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5권, 현종 3년 1662년 4월

싸라리리 2025. 12. 9. 09:15
반응형

4월 1일 갑진

이진(李𥘼)을 대사간으로, 성태구(成台耉)를 사간으로, 윤절(尹晢)을 정언으로, 경최(慶㝡)를 장령으로, 이동명(李東溟)을 지평으로, 원만석(元萬石)을 병조 참지로 삼았다.

 

전남도 어사 이숙(李䎘)이, 면천(免賤)하려는 자가 납부한 미곡이 부족할 경우 대노(代奴)046)  를 허락해 줄 것을 청하니, 따르지 않았는데, 비국이 막았기 때문이었다.

 

4월 2일 을사

승지 김시진(金始振)이 상소하여 청하기를,
"궁녀(宮女)와 제궁가(諸宮家)의 나인(內人)들을 밖으로 내보내 그들도 시집가도록 허락함으로써 《주례(周禮)》에 나오는 다혼(多昏)의 의리를 따르시고 답답한 기운을 풀어 화기를 불러오는 소지로 삼으소서."
하였는데, 답하지 않았다.

 

4월 3일 병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는데 옥당도 청대(請對)하여 입시하였다. 영상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원옥(冤獄)을 심리(審理)하는 것이야말로 화기를 불러오는 방법입니다마는, 외방 문관(文官) 가운데 침체된 채 서용(叙用)되지 않는 자가 또한 몇백 명이나 되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간혹 늙어 죽을 때까지 일명(一命)047)  의 관직마저 얻지 못하는 자도 있다 하니, 해조로 하여금 거두어 쓰게 하소서."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이조 판서 윤강(尹絳)이 아뢰기를,
"문참하(文參下)048)  가 근래 너무 적체되고 있는데, 도목 정사(都目政事) 때 옮겨주어야 할 자들까지도 괴원(槐院)049)  의 전최(殿最)050)  를 아직 받지 못한 관계로 출륙(出六)051)  시키지 못하고 있으니, 변통하는 조치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이때 대신이 잇따라 유고(有故) 중이어서 지난해 가을에 행해야 할 전최를 한 해가 넘어갔는데도 행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태화가 우선 출륙시키는 것을 허락하도록 청하니, 따랐다. 우참찬 민응형(閔應亨)이 청대하니, 상이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불러 들이도록 하였다. 응형은 나이 85세로 평소 나라를 걱정하는 뜻이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상에게 아뢰기를,
"오늘날의 대기근은 만고에 없었던 일입니다.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그 사람 이름은 잊었습니다만, 당 덕종(唐德宗) 때 대리경(大理卿)으로 있던 사람이 상소하여 나라가 망할 조짐으로 다섯 가지 일을 진달하였는데, 첫째 직언(直言)을 채용하지 않는 것, 둘째 현인이 물러가 나오지 않는 것, 셋째 염치가 상실된 것, 넷째 위와 아래가 인순고식적으로 행동하는 것, 다섯째 사민(士民)이 생업을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의 일을 보건대 하나도 여기에서 벗어나는 것이 없는데, 전하께서는 시험삼아 좌우에 물어보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오늘날의 일에 비추어 볼 때 조금도 틀림이 없다."
하였다. 응형의 귀가 어두워 잘 듣지 못하자 태화가 전유(傳諭)하였다. 응형이 또 아뢰기를,
"《서경(書經)》에 ‘무익한 일을 행함으로써 유익한 일을 해치지 말라.’고 하였는데, 현재 갖가지 폐단 가운데 군대를 양성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무익한 일입니다."
하고, 이어 청하기를,
"무술년의 승호 포수(陞戶砲手)052)   7백 명을 해산시키어 포수의 보인(保人)에게서 거두어들이는 면포를 감하고, 양남(兩南)의 마병(馬兵)을 없애어 호남좌도의 전세(田稅)를 수용하지 말게 하소서."
하고, 또 노비 문제로 송사하다가 격쟁(擊錚)한 이용철(李龍哲)이란 자의 일을 말하였는데, 매우 중복되게 말을 하면서 누누이 그칠 줄을 몰랐으므로, 신하들이 번거롭게 아뢰는 것에 싫증을 내었으며 그만두도록 제지하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상이 그의 연로함을 생각하여 비록 들어줄 수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매우 너그럽게 용납하면서 이르기를,
"소회가 더 있으면 모두 말하도록 하라."
하니, 응형이 대답하기를,
"한이 없습니다."
하고, 물러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가 이윽고 나아와 아뢰기를,
"이번에 심리(審理)하면서 널리 죄를 씻어주는 은전을 특별히 베풀었는데, 윤선도(尹善道)만 용서를 받지 못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신이 선도를 아껴서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선왕께서는 선도가 일찍이 사부(師傅)였던 옛 정을 생각하여 보통 이상으로 그를 대우하시어 망언(妄言)을 하는 잘못이 있어도 중죄(重罪)를 가한 적이 없으셨습니다. 그런데 상의 시대에 와서 먼 변방에 귀양가 죽는 결과를 면치 못하게 된다면, 성덕(聖德)에 누(累)를 끼칠 듯싶으니, 사면해 주소서."
하였다. 상이 이를 태화에게 하문하니, 대답하기를,
"신은 그 말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삼사(三司)가 모두 입시하였으니, 물어 보소서."
하였다. 상이 다시 옥당에 하문하니, 홍주삼(洪柱三)·임한백(任翰伯)이 대답하기를,
"성덕에 누를 끼칠 것 같다는 응형의 말이 옳습니다."
하고, 김우형(金宇亨)은 불가하다고 하고, 김만기(金萬基)는 아뢰기를,
"이른바 심리(審理)라는 것은 억울한 죄를 풀어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선도의 죄가 억울한 것이라고 하여 풀어줄 수 있겠습니까. 위리(圍籬)한 것을 철거했는데도 대간이 쟁집(爭執)하지 않은 것에 대해 신은 실로 한심하게 여깁니다."
하였다. 이에 위리한 것을 철거하라는 명을 환수해야 한다는 의논이 일어났는데, 장령 여증제(呂曾齊)와 교리 이민적(李敏迪)도 위리한 것을 철거해야 한다는 의논에 가담했었기 때문에, 증제가 인피하여 체직되었고, 민적은 상소하여 사죄하면서 선도를 남곤(南袞)과 심정(沈貞)에 비유하기까지 하였다. 이에 정태화와 이경석(李景奭)도 스스로 불안하여 소장을 올려 면직을 청했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 선도에 관한 일은 말하기를 꺼려했는데 응형이 갑자기 발언하였으므로 신하들이 놀라 당황하였다. 그래서 상이 하문하였을 때 혹은 대답하고 혹은 대답하지 않았는데, 태화가 일단 응형의 말을 옳다고 하고는 다시 각자의 소회를 진달하도록 청하자 주삼 등이 어쩔 수 없이 말했던 것이다.
삼가 살피건대, 윤선도가 나이 80에 위리 안치(圍籬安置)까지 되었고 보면, 아무리 그와 원수 관계에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마음에 측은하게 여길만도 하므로 대신이 위리한 것을 철거토록 청한 것이 선도에게 사정(私情)을 둔 것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만기가 너무 심하게 논한 것이야 그다지 책망할 것도 없지만 애석한 것은 민적의 행태였다. 그는 이름난 아비의 아들로서 동료들 간에 꽤나 중하게 여김을 받았는데, 만기의 말을 한번 듣고서는 혹시라도 송시열(宋時烈)의 패거리에게 죄를 얻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처음에 이미 위리한 것을 철거하자는 의논에 가담했다가 곧바로 다시 말을 바꿔 변명하였으니, 앞뒤의 말이 마치 두 사람이 한 것처럼 되었다. 소인은 지위를 잃을까 두려워하여 못할 짓이 없다는 성인의 훈계가 어찌 정말 그렇지 않은가.

 

가흥창(可興倉)과 감동창(甘同倉)에 소속된 각 고을의 신축년 전세(田稅)를 추수 때까지 기한을 물려 징수하도록 허락하였다. 이때 기강이 더욱 무너져 버린 나머지 감사와 수령들이 조정의 명령을 준수하지 않은 채 오직 고식적으로 하여 백성에게 좋은 소리를 들으려고만 하였는데, 이것이 당시의 막을 수 없는 일반적인 추세였다. 이에 앞서 조정이 ‘영남의 기근 상태가 다른 지방보다 더욱 심하다.’는 이유로 2개 창(倉)에 납부할 신축년 전세를 본읍에 놔두어 진휼할 자료에 보태도록 허락했었다. 그런데 수령들이 독촉해서 징수하는 것을 꺼린 나머지 모두 견감이나 면제를 받으려는 욕심에서 진구했다고 핑계대고는 해조에서 회감(會減)053)  케 하였다가 각 조정에서 어사를 파견하여 고을에 진휼을 실시할 때에 와서야 비로소 ‘백성이 곤궁하여 수납하기가 어렵다.’는 사정을 말하면서 심지어는 내준 조곡을 도로 환수하자고 청하기까지 하였다. 이에 남구만(南九萬)도 어떻게 할 수가 없어 오는 가을로 기한을 물려 징수하기를 청하였으나, 조정이 허락하지 않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백성의 궁핍함이 날로 심해져 수납할 길이 없게 되자 부득이 기한을 물려서 징수할 것을 허락한 것이다.

 

4월 4일 정미

헌납 민여로(閔汝老)가 병을 이유로 사직하면서 소명(召命)에 응하지 않고 상소하여 붕당을 제거할 것을 청하였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백년된 고질병을 치료할 약을 구하기가 실로 어렵습니다만, 신에게 최상으로 여겨지는 한 가지 계책이 있습니다. 그것은 상께서 이렇듯 화창한 계절에 정전(正殿)을 활짝 열어 백료(百僚)를 나아오게 한 다음 향기로운 술자리를 베풀고 직접 분부를 내리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국가가 장차 망하게 된 처지를 안타깝게 여기면서 간절히 눈물을 흘리고 말씀하시어 함께 나라를 다스려 나가야 할 뜻으로 타일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선묘(宣廟)께서 직접 지으신 ‘신하들이여 오늘 이후로 동이니 서이니 다시 또 할 건가[朝臣今日後 尙可更東西]’라는 시를 각자 풍송(諷誦)케 하여 한 방 안에 화기(和氣)가 넘쳐 흐르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당인(黨人)도 신하인데 직접 명을 받든 마당에 누구라서 마음을 풀지 않겠으며 그 동안의 행동을 고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만 된다면 편당(偏黨)하는 폐단도 조금 수그러들 것이고 나랏일도 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4월 5일 무신

윤문거(尹文擧)를 대사간으로, 이유태(李惟泰)를 승지로, 이지무(李枝茂)를 장령으로, 최치옹(崔致翁)을 대교로 삼았다.

 

4월 8일 신해

이연년(李延年)을 사간으로, 송시철(宋時喆)을 장령으로 삼았다.

 

지평 이동명(李東溟)이 아뢰기를,
"예로부터 원악대대(元惡大憝)054)  로서 나이 칠팔 십이 되었어도 상형(常刑)을 받은 자가 어찌 한이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유독 윤선도(尹善道)에 대해서만은 용서를 해 주다니, 신은 어떤 의도에서 그런 것인지 실로 모르겠습니다. 죄악을 성토하고 징계하는 형전(刑典)을 관대하게 하여 뒷날 화란이 일어날 싹을 자라게 해서는 결코 안 되니, 윤선도의 배소(配所)에 위리(圍籬)한 것을 철거토록 한 명을 환수하소서."
하고, 또 논하기를,
"외방에 나간 봉명 사신(奉命使臣)이 하리(下吏) 1명에게 형장(刑杖)을 가했다고 해서 수령된 자가 버럭 성을 내어 헐뜯고 모욕을 가했으므로 식자들이 한심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호남 어사 이숙(李䎘)이 공산(公山)에 들렀을 때 본현의 하리에게 약간 형장을 가했는데, 현감 최문식(崔文湜)이 방자하게 화를 내며 대신을 속여 위로 전하의 귀에까지 들리게 함으로써 사핵(査覈)하는 일이 있게까지 하였으니, 국가의 체면으로 볼 때 손상된 것이 어떠하다 하겠습니까. 문식이 의도적으로 사람을 모함한 정상이 이미 본도의 사계(査啓) 가운데 드러났으니, 징계해 다스려 뒷날의 폐단을 막지 않을 수 없습니다. 최문식을 파직하고 서용(叙用)하지 못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는다고 답하였다. 문식의 일은 재차 아뢰자 윤허하였다.

 

행 판중추부사 정유성(鄭維城)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호남 어사 이숙이 호서(湖西)를 지날 때에 주전(廚傳)055)  이 너무 박하다는 이유로 가두고 형추(刑推)한 것이 3, 4인에 이른다고 하기에 신이 나름대로 놀라워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마침 등대(登對)할 기회를 얻게 되었는데, 성상께서 양남(兩南)을 진구하는 일을 걱정하시는 뜻의 분부를 내리셨으므로, 신이 이미 들은 내용을 감히 곧바로 진달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삼가 호서의 사계(査啓)와 해조에서 복계(覆啓)한 내용을 보건대, 최문식(崔文湜)이 거꾸로 허위 사실을 말한 죄에 걸려 중하게 추감(推勘)을 당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말을 전한 자가 죄를 받게 된 이상 그 말을 믿고 함부로 진달한 자가 어찌 감히 혼자서 태연하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대개 사계를 보건대, 그중에 ‘석반(夕飯)이 설익었기 때문에 삼공형(三公兄)056)  을 가두고 형추(刑推)하였는데, 다담상(茶啖床)에까지 죽 한 그릇과 꿩 다리 하나로 대신하였으니, 어쩌면 이렇게도 간단하단 말이냐.’고 했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이런 말이 일단 배리(陪吏)의 입에서 나왔고 보면, 반찬 가짓수가 너무 많다는 것을 이유로 삼아 공초(供招)를 받고 그 죄목을 이름붙였다고 어사측에서 주장하고 있는데, 정말 그 행동이 간소하게 대접받으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겠습니까. 그런데도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이 논한 것을 보면, 별성(別星)057)  으로서는 당연한 행동이라고 하면서 사실과 어긋난 죄를 전적으로 말을 전한 사람에게만 돌리고 있으니, 신도 허위 사실을 함부로 진달드린 죄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신을 파직하시어 망언하는 자들이 경계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들은 대로 모두 진달한 것뿐인데, 무슨 망언한 잘못이 있겠는가. 경이 이렇게까지 사직하려 하는 것이야말로 온당치 못한 일이다. 최문식과 이숙 등의 일은 묘당으로 하여금 처리토록 하겠다."
하였다.

 

충청도 진잠(鎭岑)에서 몸 하나에 꼬리가 둘인 송아지를 낳았는데, 낳자마자 죽었다. 본도 감사가 치계하여 보고하였다.

 

4월 9일 임자

영돈녕부사 이경석(李景奭)이 상차하여 기우제와 관련해서 말[馬]을 하사토록 한 명을 사양하고, 끝 부분에 윤선도(尹善道)의 위리(圍籬)를 철거한 일에 대해 진달하기를,
"신이 사실 처음 그 말을 전하 앞에서 꺼내었는데, 전하께서 좌우의 신하들에게 자문을 구하신 뒤 채택하여 시행하셨습니다. 이에 오직 널리 씻어주는 은혜를 확대하여 위급한 상황에 처해 있는 자를 구해 주려고 생각하셨으니, 이는 또한 좋고 나쁜 초목을 가리지 않고 내려주는 봄철 하늘의 우로(雨露)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었는데, 망령되이 《예경(禮經)》을 인용했던 것은 그의 나이가 80에 박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옥당과 상대(霜臺)의 논박이 매우 준열한데, 신처럼 우매한 자로서는 실로 이런 지경에까지 이를 줄은 생각지도 못하였습니다. 신을 파직하여 준엄하기 짝이 없는 논박에 사과토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오랜 가뭄 끝에 비가 왔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내가 어찌 구마(廐馬) 1필을 아끼겠는가. 경은 마음을 편히 가져라. 그리고 위리를 철거토록 한 명을 환수하라고 한 의논에 대해서는 내 실로 그 뜻을 모르겠다. 경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하였다.

 

4월 10일 계축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숙령 옹주(淑寧翁主)의 부마(駙馬)는 유학(幼學) 박태장(朴泰長)의 아들로 정하라고 해조에 이르라."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상차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은 심리(審理)하던 날에 윤선도(尹善道)의 위리(圍籬)를 철거토록 청했었고, 우참찬 민응형(閔應亨)이 등대(登對)하여 진언했을 때에도 신이 맨 먼저 하문을 받고는 소견에 입각하여 그가 진달드린 것을 옳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날 바로 경연 석상에서부터 물의가 벌써 준엄해지더니, 그 뒤를 이어 대간이 장소를 올려 탄핵한 내용이 준엄하기만 하였습니다. 신이 어리석게도 함부로 말한 그 죄를 피할 길이 없었으나 며칠 동안 망설이다가 미처 스스로 탄핵하지 못했는데, 삼가 듣건대 영부사 이경석(李景奭)이 상차하여 소란을 야기시켰다는 이유로 인책하였다 합니다. 신이 범한 죄는 이에 비해 더욱 중하니, 신을 삭직(削職)하시어 현재 전개되고 있는 의논에 사과토록 하소서."
하니, 상이 온유하게 비답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병조 판서 허적(許積)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은 사정에 어둡고 동작이 둔한데다 처세하는 방법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무슨 말이나 행동을 할 때마다 번번이 병통을 드러내는 바람에 뭇 비방이 한 몸에 집중되어 온 지가 오래 되었으니, 지금 뭇 사람의 비판의 표적이 된 것은 신이 실로 자초한 것입니다. 감히 누구를 탓하고 원망하겠습니까. 오직 시골에 물러가 숨어 살면서 문을 걸어잠그고 허물을 반성하여 만년의 절조나마 스스로 보전해야 마땅할 텐데, 어떻게 염치도 없이 뻔뻔스러운 얼굴로 다시 나아가 청명한 조정을 거듭 욕되게 할 수 있겠습니까. 파직시켜 주소서."
하니, 상이 너그럽게 비답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허적은 충성심이 대단하고 재능도 있어 임금의 인정을 받았는데, 그 뒤로 해마다 자리를 옮기면서 승진하여 팔좌(八座)058)  의 지위에까지 이르렀다. 그런데 이민서(李敏叙)와 김만기(金萬基) 등이 그를 매우 미워하여 기필코 배척해서 물러나게 하려 하였으므로 이와 같이 상소했던 것인데, 상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끝내 윤허하지 않은 것이다.

 

4월 11일 갑인

홍명하(洪命夏)를 좌참찬으로, 이연년(李延年)을 동부승지로, 이후(李垕)를 사간으로, 김우형(金宇亨)을 집의로 삼았다.

 

호남 어사 이숙이 상소하여 공산현(公山縣)의 하리(下吏)를 형신(刑訊)한 일에 대해 자송(自訟)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의 뜻은 오로지 비용을 줄이는 데 있었으므로 공산에 도착했을 때 두 그릇 이상 찬품(饌品)을 내놓지 말고 다담상(茶啖床)도 들이지 말라고 타일렀습니다. 그런데 대접한 찬품을 보니 그릇 수가 배나 되기에 주리(廚吏)를 잡아들이도록 하였는데, 하리나 사령(使令) 중에서 한 사람도 와서 대기한 자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완악한 습성이 놀라워 주리를 잡아가두고 그 이유를 힐문한 뒤, 이튿날 아침에 약간 형신을 가함으로써 다른 고을을 경계시키려 하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삼가 듣건대, 대신이 최문식(崔文湜)의 말을 가지고 탑전(榻前)에서 진달하여 사핵(査覈)하는 일이 있게 하였다 합니다. 신이 아무리 우매하다 하더라도, 이미 대접을 풍성하게 할까 염려하여 미리 열읍(列邑)에 신칙해 놓고는 또 대접이 박하다고 성을 내면서 하리를 형추(刑推)하여 다스리다니, 정말 이것은 이치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명을 받은 일을 제대로 수행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벌써 사패(司敗)059)  에게 나아가게 되었는데, 묘당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을 선택해서 속히 내려보내 신과 교대하도록 하는 동시에 신의 죄를 다스려 사람들의 말에 사과토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조가(朝家)에서 이미 처리하였으니, 그대는 사양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라."
하였다.

 

청병(淸兵)이 소운남(小雲南)에 들어가 영력 황제(永曆皇帝)060)  를 잡아 가지고 돌아갔다. 이로써 명(明)나라는 대통(大統)이 끊겨 멸망하였다. 삼가 살피건대, 홍광 황제(弘光皇帝)061)  가 포로로 잡혀간 뒤로 융무(隆武)062)  와 영력의 두 연호(年號)가 있었다. 표류해 온 한인(漢人)들이 혹 전하기를 ‘융무 황제는 곧 만력 황제(萬曆皇帝)063)  의 24번째 아들이다.’고 하고, ‘영력 황제는 곧 노왕(魯王)이다.’고 했는데, 만력 황제와 어떠한 친척 관계인지에 대해서는 역시 자세히 알지 못하였다. 그 뒤 융무는 어떻게 되었는지 소식이 없고 영력이 또 사로잡혔는데, 군현(郡縣)을 보유한 주씨(朱氏)가 있다는 말을 다시는 듣지 못하였으니, 아, 명나라의 영력은 마치 주(周)나라의 서주군(西周君)과 같은 셈이다. 어찌 통탄을 금할 수 있겠는가.

 

4월 12일 을묘

정원이 아뢰기를,
"각사(各司)의 관원이 궐직(厥直)했을 경우, 《대전(大典)》에 따라 파직하는 것으로 조율(照律)하는 것이야말로 바꿀 수 없는 규정입니다. 그런데 지금 헌부가 조감(照勘)한 것을 보건대, 감역(監役) 유방(兪枋)의 궐직 사건을 추고한 것과 관련하여 ‘과오를 저지른 것에 붙여 환직(還職)시키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법부(法府)의 공사(公事)인 만큼 본원이 감히 되돌려주지 못하겠기에 감히 이렇게 봉입(捧入)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봉입하는 것은 부당하다. 도로 내주도록 하라."
하였다. 장령 송시철(宋時喆)과 지평 이동명(李東溟)이 이 때문에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는데, 집의 김우형(金宇亨)이 처치하여 출사시킬 것을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정원에서 급히 불렀는데도 유방이 오지 못했던 것은 실로 궐직했기 때문인데 법부가 어찌 이토록 제멋대로 억측할 수 있단 말인가. 처치한 것이 부당하니,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4월 13일 병진

상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상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옥당이 차자로 진달드린 내용 가운데 ‘형관(刑官)을 택해 임명한 뒤에는 그 직책을 오래도록 수행하게 해야 하며, 낭관도 신중히 가려야 하는데, 모두 2년을 기한으로 해야 한다.’고 한 그 말이 매우 옳으니, 차자의 내용대로 거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태화가 또 아뢰기를,
"차자에서 진달드린 시장(柴場)을 혁파하는 일도 의논해 정해야 하겠습니다."
하고, 교리 이민적(李敏迪)이 아뢰기를,
"내사(內司) 및 제궁가(諸宮家)에서 입안(立案)하여 불법으로 점유하는 폐단이 한이 없는데다가 세력이 있는 사부(士夫)들마저 나누어 점유하고 있으므로 민간에서 나무를 채취할 길이 거의 없어졌습니다. 신이 일찍이 전조(銓曹)의 낭관으로 있었기 때문에 내사의 문서가 얼마나 많은지 잘 알고 있는데, 지금 만약 일일이 거두어들여 모조리 혁파한다면 어찌 성조(聖朝)의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시장과 관련하여 입계한 문서를 내사로 하여금 모두 거두어들여 품(稟)하도록 하라."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차자에서 말한 ‘백 명의 상홍양(桑弘羊)’이란 이야기도 필시 가리킨 것이 있을 것이니, 의논해 처리해야 하겠습니다."
하고, 민적이 아뢰기를,
"근래 각 아문에서 무역하여 이익을 증식하느라 분분하기 그지없고 불법으로 징수하여 침해하면서 못할 짓이 없으니, 이게 상홍양이 했던 일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부터는 신칙하여 금단하도록 하라."
하였다. 태화가 또 차자에서 논한 ‘문희연(聞喜宴)을 베풀고 음악을 연주하며 술을 마시는 일’에 대해 거론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간이 말하지 않았다면 그만이지만 일단 말을 했는데도 그 뒤에 이처럼 무턱대고 행한다면 크게 기강이 손상될 것이다. 연주하는 음악 소리가 궐내에까지 들려올 때도 있다."
하자, 원두표(元斗杓)가 아뢰기를,
"그런 일이 있었다면 대간이 말하지 않은 것이 잘못입니다."
하였다. 민적이 아뢰기를,
"어제 송시철(宋時喆) 등을 처치한 계사에 대해 윤허하지 않는다고 비답하시면서 출사시킬 것인지 체차시킬 것인지 명확하게 분부를 내려주지 않으셨으니 처분이 있으셔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송시철과 이동명(李東溟) 모두 체차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4월 14일 정사

집의 김우형(金宇亨)이 처치에 타당성을 잃었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는데, 옥당이 체직시킬 것을 청하니, 따랐다.

 

4월 16일 기미

내수사의 면포(綿布) 7동(同)을 호조에 내려 기참(畿站)의 수요에 보태쓰게 하라고 명하였다.

 

정석(鄭晳)을 집의로, 이정(李程)을 장령으로, 여성제(呂聖齊)를 지평으로, 이단석(李端錫)을 정언으로, 홍주삼(洪柱三)을 교리로, 민유중(閔維重)을 수찬으로 삼았다.

 

부교리 이민적(李敏迪), 수찬 김만기(金萬基) 등이 상차하였는데, 맨 처음에 인족(隣族)을 침해하여 징수하는 폐단을 진달하고, 다음에 대간을 자주 바꾸는 폐단을 진달하고, 끝으로 아뢰기를,
"오랜 가뭄 끝에 조금 비가 왔으나 그것만으로는 농민의 기대를 채워주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 늘 경외하는 마음을 간직하시고 조금이라도 게을리하지 마시어 가정(嘉靖)064)   때 중흥했던 공을 도모하소서."
하니, 상이 너그럽게 비답하였다.

 

4월 17일 경신

영상·우상·영중추 및 정부의 동벽(東壁)·서벽·육경·판윤을 명초(命招)하여 대제학을 의천(擬薦)케 하였다. 영부사 이경석(李景奭)이 파산인(罷散人)까지도 의천토록 계청하였는데, 이는 김수항(金壽恒)이 당시 파산 중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수항을 의천했다가 마침내 제수하였는데 이때 그의 나이 34세였다.

 

4월 19일 임술

장령 이정(李程) 등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문희연(聞喜宴)을 열어 창악(娼樂)을 행하는 일을 일체 금단하였는데, 영안위(永安威) 홍주원(洪柱元), 이조 판서 윤강(尹絳), 봉산군(鳳山君) 이형신(李炯信), 장악원 첨정 이성연(李聖淵), 호조 좌랑 강욱(姜頊)이 모두 술자리를 베풀고 연희(演戲)를 관람한 일이 있었습니다. 성대하게 베풀고 간소하게 행한 차이가 있기는 합니다만, 금령(禁令)을 위반한 것은 마찬가지이니, 홍주원 등을 모두 파직시키소서."
하니, 따랐다.

 

함경도 영흥(永興)·함흥(咸興)·단천(端川) 등 6개 고을에 우박이 쏟아져 벼곡식이 상하고, 경상도 성주(星州) 등 몇개 고을에 지진이 크게 일어났으므로 관례대로 해괴제(解怪祭)를 행하였다.

 

4월 20일 계해

홍명하(洪命夏)를 이조 판서로, 허적(許積)을 판의금으로, 김좌명(金佐明)을 대사간으로, 윤문거(尹文擧)를 이조 참판으로, 이익(李翊)을 헌납으로 삼았다.

 

전남 감사 이태연(李泰淵)이 치계하여, 열읍(列邑)의 전염병 환자가 1만 6천 5백명인데 사망자가 4백 67명, 길에서 쓰러져 죽은 자가 45인이라고 하였다.

 

충청 감사 오정위(吳挺緯)가 치계하였는데, 청풍(淸風)·제천(堤川) 등지에 이 달 2일 밤 서리가 내려 목화와 기장 및 콩이 반이나 넘게 상했다고 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장리(贓吏) 황헌(黃瀗)을 당초 정배(定配)한 것만도 실형(失刑)했다고 할 것인데, 심리(審理)하여 석방되는 은전을 받다니 이는 더욱 뜻밖의 일입니다. 그런데 그 명을 환수토록 청한 논계를 갑자기 정지한 것에 대해 물정(物情)이 모두 놀라워하고 있으니, 황헌은 도로 배소(配所)로 보내고, 정론(停論)한 대관(臺官) 이연년(李延年)은 추고하소서."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4월 24일 정묘

원두표(元斗杓)를 좌의정으로, 정유성(鄭維城)을 우의정으로, 최유지(崔攸之)를 집의로, 이무(李堥)를 종부시 정으로 삼았다.

 

좌의정 원두표가 상차하였는데 그 대략에,
"전하께서 즉위하신 지 4년이 되는데, 그동안 현능(賢能)을 한 사람도 발탁한 적이 없이 그저 관례에 따라 해당되는 자급(資級)에서만 채용해 왔으니, 어떻게 좋은 정치를 도모하겠습니까. 전일 김좌명(金佐明)이 천거에 의해 승진해서 임명된 것이야말로 아무런 혐의가 없는 것이었는데도 갑자기 대계(臺啓)로 말미암아 곧바로 성명(成命)을 거두셨으니, 신은 삼가 애석하게 여깁니다. 좌명은 선조(先朝) 때부터 재주와 명망이 본래 드러났던 사람인 만큼 특별히 아경(亞卿)에 제수하여 주사(籌司)065)  에 배치해도 될 것인데, 전하께서 혐의를 그에게 두시어 갑자기 버리신단 말입니까. 대간이 그렇게 아뢴 것은 대체로 뒤폐단을 염려해서 그런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만약 도로 전의 명을 내리시어 인재를 아끼는 뜻을 보여주시는 한편, 언자(言者)를 관대하게 용납하시어 간언(諫言)을 받아들이는 성의를 보여주신다면, 어찌 치우침 없는 대공(大公)의 도리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예를 들어 본다면 김수항(金壽恒)은 문아(文雅)하고 이행진(李行進)은 준결(俊潔)하고 박장원(朴長遠)은 순근(醇謹)하고 이만(李曼)은 일을 주관할 국량이 있으니, 또한 뛰어 올려 임명해도 됩니다. 현재 종2품에도 인재가 매우 모자란 형편인데, 조복양(趙復陽)과 유계(兪棨)는 모두 진정(賑政)을 담당하여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문학(文學)으로 보더라도 발탁해서 임용하기에 적당합니다. 그리고 이유태(李惟泰)는 산림(山林)의 중망(重望)을 지니고 있고, 서필원(徐必遠)은 지조를 굳게 지켜 동요하지 않는 사람이니, 그들도 모두 등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욱 깊이 생각해 보시고 정관(政官)에게 분부하시어 궐원이 생기는 대로 비의(備擬)하게 하소서. 이와 함께 전하께서도 의당 마음 속으로 결단하시거나 대신에게 자문을 구하시어 오직 인재를 얻는 것을 급선무로 삼으시고 자급(資級)에 얽매여 현인이 나올 길을 막지 않으셔야 할 것입니다. 이게 바로 혼란스럽고 쇠퇴한 현상황을 극복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데 급히 서둘러야 할 하나의 일이라고 할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경의 차자를 보고는 나라를 위하는 경의 충성심에 감탄하였다. 해조로 하여금 차자의 내용대로 거행하게 하겠으며, 나도 유념하겠다."
하고, 이어 그 차자를 이조에 내렸다.

 

4월 25일 무진

장령 이정(李程) 등이 탄핵하기를,
"전 정언 정창도(丁昌燾)가 지난번 등석(燈夕)066)  에 사자(士子) 몇 사람과 함께 술이 취해 창가(娼家)에 들렀다가 심야에 걸어 오면서 무인들이 여악(女樂)을 즐기며 모여 마시는 곳에 돌입하여 서로들 싸움을 했다는 이야기가 자자하게 퍼졌으니, 사부(士夫)로서 이보다 더 심한 치욕이 없습니다. 정창도를 파직시키고, 무인도 해부(該部)로 하여금 적발해 내어 죄를 매기게 하고, 사자는 사관(四館)으로 하여금 벌을 행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병조 판서 허적(許積)이 연소배들로부터 엉뚱한 배척을 받은 나머지 끝내 시골에 내려가서는 몇 차례나 불러도 오지 않고 있다. 허적은 이미 선조(先朝) 때부터 세상에서 보기 드문 은혜를 받은 몸이니, 어찌 자기 마음만 생각하여 시골에 물러가 있으려고 하였겠는가. 필시 자신의 염치와 관계되는 일이라서 어쩔 수 없이 그랬을 것이다. 더구나 객사(客使)가 올 날이 임박하였으니, 병조의 장관이 없어서는 안 된다. 승지는 말을 잘 만들어 하유해서 속히 올라오도록 하라."
하였다. 이때 청(淸)나라 사신이 이일선(李一善)을 데리고 나오면서 갖가지로 공갈 협박을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동요하였다. 그런데 허적이 응변(應變)하는 데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어 상이 크게 기대하고 있었으므로 이렇게 특별히 하교한 것이었다.

 

이조가 아뢰기를,
"인재가 부족하다는 탄식이 요즘 들어 더욱 심해지고 있는데, 장부를 뒤적이며 주의(注擬)할 때마다 늘 구차하게 한다는 걱정이 들곤 합니다. 대신이 올린 차자의 내용을 보건대, 그야말로 인재를 가지고 임금을 섬기는 도리에 맞는 것이었는데, 더구나 추천한 사람 모두가 당대에 뚜렷이 드러난 인물들인데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다만 생각건대, 등급을 뛰어올려 발탁하는 일은 상례(常例)와 다르니, 정관(政官)이 어떻게 감히 곧장 의망(擬望)할 수 있겠습니까. 다시 대신에게 하문하시어 재주에 따라 직책을 제수하도록 하시고, 또 별단(別單)에 성명을 기입하여 전례(前例)에 따라 어느 때든 혹 특별히 제수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토록 하소서."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4월 27일 경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희정당(熙政堂)에서 인견하였다. 영상 정태화(鄭太和), 좌상 원두표(元斗杓), 이판 홍명하(洪命夏), 호판 정치화(鄭致和), 공판 이완(李浣), 병조 참판 유혁연(柳赫然), 이조 참의 유계(兪棨), 대사간 김좌명(金佐明), 승지 심세정(沈世鼎), 장령 경최(慶㝡), 교리 이민적(李敏迪)이 입시하였다. 상이 두 장의 자문(咨文) 등본(謄本)을 꺼내어 영상에게 주며 이르기를,
"이 자문을 보건대, 의주 부윤(義州府尹)이 뜻밖에 일을 냈는데, 나도 사핵(査覈)할 때 동참하지 않을 수 없을 듯하다."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정말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영력(永曆)067)  이 포로로 잡혔다는 이야기를 과연 믿을 수 있겠는가. 그 진위는 모르겠는데, 주씨(朱氏) 가운데 임금 노릇 하던 자가 잡힌 듯하다."
하였다. 상이 두 상신(相臣)과 인족(隣族)에게 포목을 징수하는 폐단을 논란하였는데, 두표가 아뢰기를,
"이에 대해서는 옥당에서만 차자로 진달드린 것이 아니라 말한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균역(均役)하는 정책을 제대로 행하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먼저 인족의 폐단을 제거하려 한다면 어려울 것입니다. 이른바 도고(逃故)라고 하는 것도 허실이 뒤섞이어 집을 바꿔 살면서 도포(逃逋)라고 거짓 칭하는 경우도 간혹 있는데, 이런 자들까지 모두 포목을 감면해 준다면 장차 군사를 기를 수 없게 될 것입니다. 풍년이 들 때까지 조금 기다렸다가 먼저 호패법을 시행하여 나라에 놀고 먹는 백성이 없도록 한 뒤에야 변통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또 대각(臺閣)을 구임(久任)시키는 일을 논하였는데, 두표가 아뢰기를,
"신의 생각에는, 대간을 구임시킬 경우 꼭 폐단이 없으리라는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보통 사람이 오래도록 한 직책을 맡게 되면 태만해지기 마련인데, 더구나 일을 모르는 연소한 사람들이 오래도록 대각에 있으면서 오활한 말만 즐겨 하다가 일을 망친다면 어찌 염려스럽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사소한 일에는 구애받지 말고 추고(推考) 중일 때에는 체직시키지 말라.’고 한 일 등은 차자 내용대로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그것도 불편한 점이 없지 않습니다."
하였다. 장령 경최가 탑전(榻前)에서 인피하기를,
"신이 오래도록 복제(服制) 중에 있었던 관계로 본부(本府)의 근일 논계에 모두 참여하지 못했습니다만, 지금 일단 입시했으니 전계(前啓)를 전해야 할 입장입니다. 그러나 윤선도(尹善道)의 위리(圍籬)를 철거한 일에 대해, 신은 ‘지난번 심리(審理)할 때 노성(老成)한 대신들 모두가 동의하였는데, 이는 필시 참작해주려는 뜻에서 나온 것일 것이다. 따라서 성명(成命)이 이미 내려진 뒤에 다시 명을 환수할 것을 청한 일이 온당한 것인지 모르겠는데, 이미 오래도록 쟁집(爭執)하였으니 이제는 정론(停論)하는 것이 옳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이 미처 동료와 이 일을 상의하지 못해 체례(體例)에 구애되는 관계로 혼자서 정론할 수는 없습니다만, 신의 생각이 또 그러한 이상 연계(連啓)할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일을 알지 못하는 연소한 무리들’이라는 이야기가 신의 몸을 가리켜 배척한 말은 아니라 할지라도 태연히 있을 수만은 없으니, 신을 체직시켜 주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경최가 이에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김좌명(金佐明)을 예조 판서로, 민정중(閔鼎重)을 대사간으로, 이인(李𡐔)을 의주 부윤(義州府尹)으로 삼았다.

 

장령 이정(李程), 지평 여성제(呂聖齊)가 인피하기를,
"삼가 경최가 피혐한 내용을 보건대, 윤선도(尹善道)의 위리(圍籬)를 철거토록 한 명을 환수하라고 청한 논계에 대해 정지하는 게 옳다고까지 하였으니, 어쩌면 이렇게까지 공의(公議)를 무시한단 말입니까. 선도가 화를 일으킬 마음을 품고 흉악한 말을 지어낸 죄야말로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입이 닳도록 극력 간쟁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그리고 듣건대, 상신(相臣)이 ‘일을 알지 못하는 연소배’라는 이야기를 탑전에서 진달드렸다 하는데, 누구를 가리켜서 배척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대로 대석(臺席)을 차지하고 있을 수 없으니, 체직시켜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순천(順天)·진도(珍島)·고부(古阜)·함열(咸悅) 등 고을의 패선(敗船)과 관련된 사격(沙格)068)  과 사형수를 석방하고 징수할 예정인 미두(米豆)를 면제해 주도록 명하였는데, 재해를 돌보아주려는 목적에서였다.

 

4월 29일 임신

송시열(宋時烈)을 우찬성으로, 홍중보(洪重普)를 우참찬으로, 조복양(趙復陽)을 부제학으로, 이광직(李光稷)을 지평으로, 김우형(金宇亨)을 교리로, 남구만(南九萬)을 수찬으로 삼았다.

 

지평 이광직(李光稷)이 경최 등을 처치하여 아뢰기를,
"흉인(凶人)의 죄가 점점 가벼워지고 있으므로 대각이 한창 논핵(論劾)을 하고 있는데, 꼭 입장을 달리하려 하여 억지로 인혐하였습니다. 상신(相臣)이 말한 것은 일반적으로 한 이야기이니, 대관(臺官)이 피혐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경최는 체차시키고, 이정(李程)·여성제(呂聖齊)는 출사시키소서."
하니,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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