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5권, 현종 3년 1662년 5월

싸라리리 2025. 12. 9.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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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일 갑술

태백(太白)이 낮에 나타났다.

 

이동명(李東溟)을 장령으로, 곽제화(郭齊華)를 지평으로, 이단하(李端夏)를 정언으로, 임한백(任翰伯)을 수찬으로 삼았다. 곽제화는 본래 강진(康津)의 한미한 집안 출신인데 그의 아비 곽성귀(郭聖龜) 때부터 등제(登第)하여 벼슬길에 나섰다. 그런데 성귀는 상당히 근신할 줄을 알았던 반면 제화는 경망스럽고 매우 교만하였으므로 대각의 자리에는 걸맞지 않았는데, 뒤에 과연 우망(愚妄)한 일로 견책의 벌을 받았다.

 

5월 5일 정축

장령 이동명(李東溟)이 인피하기를,
"신이 지난번 최문식(崔文湜)이 사명(使命)을 무함한 죄를 탄핵했었는데, 그뒤 대신의 차자를 보건대 ‘아첨을 떨고 공을 바치며 제멋대로 사정(私情)을 둔다.’는 얘기로 배척하였습니다. 이러한 제목(題目)을 무턱대고 사람에게 뒤집어씌워서야 되겠습니까. 만약 문식을 탄핵하지 않아야 아첨을 떨고 공을 바쳤다는 비난을 면할 수 있고, 이숙을 죄주자고 청해야 사정을 두어 패거리를 옹호한 결과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는 대신으로서 뭇 관원을 격려시키는 도리가 못된다고 할 것입니다. 가령 신이 염치없이 이익만 좋아하며 사람들에게 아첨을 떨 의도가 있었다면 어찌 대신에게 아첨을 떨지 않고 소관(小官)에게 환심을 사려고 하겠습니까. 파직시켜 주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이동명이 물러가 물론(物論)을 기다렸는데, 장령 이정(李程)이 처치하여 출사시키기를 청하니, 따랐다.

 

김수항(金壽恒)을 대사헌으로, 남구만(南九萬)을 헌납으로 삼았다.

 

5월 7일 기묘

장령 이동명(李東溟)이 소패(召牌)에 응하지 않고 이어 다시 인피하니, 그 계사를 도로 내주라고 명하고, 정원에 하교하기를,
"지난번에 이동명이 피혐한 글을 보건대 괴이하고 망령스럽기 짝이 없었는데 노기가 등등하여 대신에게 모욕을 가하면서 조금도 공경스럽게 대하는 뜻이 없었다. 이보다 더 사리를 모를 수가 없으니, 체차시키라."
하였다. 이정이 처치를 잘못했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는데, 대사헌 김수항이 처치하여 출사시키기를 청하니, 따랐다

 

5월 11일 계미

청사(淸使)가 서울로 들어왔다. 상이 모화관(慕華館)에서 칙서(勅書)를 맞고 인정전(仁政殿)에 돌아와 칙서를 받는 예를 거행하였으며 이어 두 사신과 함께 전내(殿內)에 마주 앉았다. 탑전(榻前)에 칙서와 자문(咨文)을 펼쳐놓았는데, 칙서는 운남(雲南)의 승첩을 알리는 것이었고, 자문은 의주(義州)의 일을 조사하는 내용이었다. 상이 열람하고 나서 의주의 일을 칙사에게 사과하였는데, 칙사가 말하기를,
"부윤(府尹) 외에 상관(上官)이 또 있습니까?"
하니, 상이 말하기를,
"감사가 도내(道內)에서는 가장 높은 관원인데, 주군(州郡)의 사소한 일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관여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일을 부윤이 먼저 감사에게 보고해 알렸다면 감사도 마땅히 연루시켜 죄를 주어야겠지만 보고하지 않았다면 죄를 줄 것이 없습니다."
하자, 칙사가 말하기를,
"먼저 부윤을 조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마침내 금부 도사를 보내 의주 부윤 이시술(李時術)을 잡아오도록 하였다. 이어 다례(茶禮)를 행하고, 파한 뒤에 상이 대내(大內)로 돌아왔다.

 

오두인(吳斗寅)을 사간으로, 안진(安縝)을 장령으로, 원만리(元萬里)를 지평으로, 안후열(安後說)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정언 이단하(李端夏) 등이 아뢰기를,
"올해 전염병이 팔도 전체에 만연된 관계로 한창 농사에 매달려야 할 이때에 농사일을 완전히 폐기하고 있으니, 조가(朝家)의 입장에서는 별도로 구제하는 대책을 세워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데 군병 등에게 포목을 징수하도록 하는 것이 평일과 마찬가지이므로 몹시 고달파하며 원망하고 있으니, 각도(各道)로 하여금 전염병에 걸린 군병 등을 뽑아내어 당번(當番)의 가포(價布)를 편의에 따라 견감토록 함으로써 덕의(德意)를 선포케 하소서.
그리고 호남 지방 태인(泰仁)·고부(古阜) 두 고을의 경우, 갑술년의 양안(量案)에 주인이 없는 것으로 등록된 땅들을 그 뒤에 백성들이 들어가 거의 모두 전지(田地)를 일구어 경작하면서 부자간에 전수하거나 돌려가며 서로 매매하는 등 개인의 소유지로 바뀐 지가 오래 된 땅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새로 태어난 공주의 궁노(宮奴)가 호조의 관문(關文)069)  을 지니고 내려가 세력을 빙자하여 탈취하였으므로 그지없이 원망하고 있습니다. 갑술년 양안에 주인없는 땅으로 기록되었다 하더라도 수십 년 동안 경작해 온 지금에 와서 하루아침에 어떻게 무턱대고 빼앗을 수 있단 말입니까.
금구(金溝) 지역에도 제방을 막은 저수지가 있는데, 감사 이태연(李泰淵)이 새로 더 수축(修築)하여 혜택을 입는 백성의 전지(田地)가 매우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이것마저 궁가(宮家)에서 탈취하였는데, 제방을 수축하는 사목(事目)을 다시 밝혀 행회(行會)하는 이때에 불법으로 점유하여 원망을 사고 있으니, 더욱 놀랍기만 합니다. 해도 감사로 하여금 궁노를 수금하고 법대로 죄를 매기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전염병에 걸린 군인의 포목을 해조로 하여금 감하게 하는 일은 아뢴 대로 하라. 그리고 제방 안에 전지(田地)를 일구어 경작하는 일에 대해서는 해조가 일찍이 내사(內司)에 이문(移文)하여 금단케 했었는데, 명령을 내린 후에까지 그런 일을 또 하였단 말인가. 조사해서 품달하도록 하라. 고부의 전지에 대한 일은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5월 12일 갑신

서필원(徐必遠)을 승지로 삼았다.

 

간원이 아뢰기를,
"경연을 열지 않은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만약 와내(臥內)에서 유신(儒臣)을 인접(引接)하고 성현의 글을 가져다 윤독(輪讀)케 하면서 마치 육가(陸賈)가 황제에게 진언할 때 늘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을 일컬었던 것070)  처럼 한다면, 의리(義理)와 모훈(謨訓)이 항상 전하의 마음을 열어 비옥케 하는 바탕이 될 것이니, 어찌 보탬이 적다 하겠습니까. 유신에게 속히 품의하여 정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병의 차도를 살펴 형세를 보아가며 내가 알아서 할 것인데, 어찌 꼭 많은 구실을 붙여야만 경연을 열겠는가."
하였다.

 

대사헌 김수항(金壽恒) 등이 아뢰기를,
"제궁가(諸宮家)의 전결(田結)은 법전에 그 숫자가 기재되어 있는데 요즘 들어서는 뒤범벅이 되어 한계가 없습니다. 백성이 원망하는 것과 세입(稅入)이 줄어드는 이유가 전적으로 이 때문이니, 해조로 하여금 조사해 낸 다음 품처(稟處)해서 외람스럽게 된 폐단을 없애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후일 등대(登對)할 때 품처토록 하라고 이미 하교했었다."
하였다.

 

병조 판서 허적(許積)이 소명(召命)을 받고 올라오다가 여주(驪州)에 이르러 병이 악화되자 소장을 진달하여 사직하니, 상이 답하기를,
"좋지 못한 인심이 갈 데까지 간 이 상황에 경이 이렇게 올라오는 것이 또한 온당하지 않겠는가. 지금 이후로 또 다시 운운(云云)하는 이야기가 나온다면, 이것이야말로 임금을 업신여기면서 경을 배척하여 조정에 서지 못하게 하는 일이라고 하겠다. 그럴 경우에는 조가(朝家)에서 자연히 처치하게 될 것이니, 경은 혐의로 여기지 말라. 그리고 사문(査問)하는 일이 며칠밖에 남지 않았는데, 국가에서는 오로지 경만을 믿고 있다. 또 경이 제수받은 직책도 대단히 중요한 관계가 있으니,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고서 병이 조금 차도가 나는 대로 속히 들어와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말도록 하라."
하고, 이어 어의(御醫) 정후계(鄭後啓)에게 명하여 말을 달려 가서 간병(看病)하게 하였다.

 

5월 14일 병술

비국이 계청하기를,
"상납(上納)해야 할 관향(管餉) 전미(田米) 4천 2백 석과 대두(大豆) 1천 8석을 본도에 놔두었다가 민간에 조곡으로 나누어 줌으로써 조정에서 돌보아주는 뜻을 보여주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5월 15일 정해

상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고 하문하기를,
"사문(査問)하는 일이 마음에 걸려 경들과 상의하고 싶었다."
하니,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이시술(李時術)이 들어왔다는 것을 이일선(李一善)이 이미 알고 있으니, 사문하는 일을 지연시켜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고, 원두표(元斗杓)가 아뢰기를,
"따로 준 1천 금(金)이 적지 않은데 일선은 2천 금을 생각하고 있다 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전일엔 사문하는 일이 있었어도 칙사가 주관했기 때문에 그다지 많이 주지 않았었는데, 지금은 일선이 주관하기 때문에 이렇게 조종하고 있는 것이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이시술 및 월경(越境)한 사람들에게 무슨 죄를 적용해야 하겠습니까?"
하고, 두표가 아뢰기를,
"예전부터 이런 일들은 우리 쪽에서 단정을 짓지 못하고 으레 저들 나라에 물었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시술이 물금첩(勿禁帖)071)  을 작성해 준 죄는 본디 중하다. 그러나 우리 지역 안으로 한계를 설정했다면 사형을 면하게 해 주는 것이 옳다."
하자, 태화가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일 인삼(人蔘)과 염초(焰硝)에 관한 일을 사문할 때, 자문(咨文)을 누가 지었는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채유후(蔡𥙿後)와 허적(許積)이 상의해서 지었는데 허적의 글이 대부분이라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허적은 올라온다고 하던가?"
하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사직소를 올려 보냈다 합니다."
하였다. 상이 상소한 내용을 하문하니, 김시진(金始振)이 아뢰기를,
"상소한 내용을 보건대, 병세가 아직 차도를 보이지 않고 있는데 본직과 겸대한 직을 모두 체직시켜 주면 그런대로 여러 재신(宰臣)의 반열에서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홍명하(洪命夏)가 아뢰기를,
"사문할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니, 영상과 좌상이 아뢰기를,
"경인년에 사문할 때는 이만(李曼)과 노협(盧協)도 모두 의관(衣冠) 차림으로 들어왔었습니다."
하고, 정치화(鄭致和)가 아뢰기를,
"정유년에 이미 정해둔 규정이 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일체 정유년의 예에 따라 하도록 하라."
하고, 이어 명하기를,
"정유년의 초기(草記)를 자세히 조사해 아뢰도록 하라."
한 뒤, 파하고 나갔다.

 

대사헌 김수항(金壽恒) 등이 아뢰기를,
"근일 전조(銓曹)072)  에서 대정(大政)073)  을 행할 때마다 그저 상례(常例)에만 따르면서 혹은 잡기(雜技)074)  라는 이유로 혹은 오래 근무했다는 이유로 차례차례 승진시켜 준 결과, 동반(東班) 6품직 태반이 외람스럽고 잡스럽게 채워지고 말았는데, 자리만 지키는 쓸모없는 관원을 아무리 배치해도 무익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선전관(宣傳官)이야말로 무변(武弁)의 참하직(參下職)075)   중에서도 엄선해야 할 직책인데, 쓸모없는 잡인으로 구차하게 충원하는 일이 간혹 있으니, 양전(兩銓)으로 하여금 그런 사람들을 구별해내어 도태시키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5월 16일 무자

상이 남별궁(南別宮) 서연청(西宴廳)에 친히 거둥하여 칙사와 함께 사문(査問)하는 일을 행하였다. 영상 정태화(鄭太和), 좌상 원두표(元斗杓), 판의금 허적(許積), 지의금 정치화(鄭致和), 형판 조계원(趙啓遠) 및 6승지가 입시하였다. 상이 칙사와 다례(茶禮)를 행하였다. 태화가 나아가 아뢰기를,
"사문하는 일을 칙사에게 물은 다음에 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자, 역관(譯官)으로 하여금 칙사에게 묻게 하였다. 칙사가 말하기를,
"이시술(李時術)부터 먼저 사문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이에 시술을 계단 아래로 잡아들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죄안(罪案)을 문자로 통할 수 없으니, 언어로 전달해야 하겠습니다."
하자, 상이 말하기를,
"자문(咨文) 내용대로 문목(問目)을 만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칙사가 말하기를,
"귀국에서 묻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판의금 허적, 형조 판서 조계원이 시술에게 묻기를,
"너의 부(府)의 백성들이 몰래 상국(上國)의 지방으로 넘어들어가 자기들끼리 벌목(伐木)을 했는데, 네가 첩문(帖文)을 발급해 주었다고 한다. 그렇게 한 이유는 무엇인가?"
하니, 시술이 말하기를,
"보통 때 방금(防禁)을 무척 엄히하여, 압강(鴨江) 변에 여덟 곳이나 금소(禁所)를 두었습니다. 그런데 강중(江中)의 3개 도서(島嶼)는 곧 우리 나라의 지계(地界)로서 예로부터 백성들이 개간하여 경작한 곳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보통 때 늘 단속하면서 일을 내지 말도록 하였는데, 이번에 어리석은 백성들이 함부로 대금(大禁)을 범하였습니다. 그런 일을 알고서 금하지 않는 것도 감히 못할 일인데, 어떻게 그렇게 하라고 첩문을 발급해 줄 리가 있겠습니까. 만약 당초 백성이 정장(呈狀)한 것과 그에 따른 제사(題辭)076)  를 자세히 조사해 보면 얼마나 억울하게 되었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일선(李一善)이 칙사의 말로 묻기를,
"소위 여덟 곳 외에는 상국의 지방에 범금(犯禁)한 곳이 없는가?"
하니, 시술이 대답하기를,
"중강(中江)의 동쪽은 우리 나라의 지경(地境)이고 그 서쪽이 곧 상국의 경계인데, 도서는 상국의 경계를 범한 곳이 없습니다."
하였다. 일선이 말하기를,
"시술이 ‘중강 건너편에는 파수하는 곳이 없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우리들이 모를 일입니다. 지금 삼공과 육경이 모두 모여 있는데, 다들 압강(鴨江)이 한계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하니, 상이 허적으로 하여금 일선에게 말하게 하기를,
"상국의 지방에도 도서가 많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냥 범범하게 ‘도중(島中)’이라는 두 글자를 써서 경솔하게 벌목을 허락했단 말입니까. 이런 내용으로 시술에게 물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자, 일선이 칙사의 말로 대답하기를,
"국왕께서 물어보고 싶으시다면 물어보셔도 좋습니다. 그런데 시술이 공초(供招)한 것을 보면, 상국의 지방에 섬이 있는 줄은 몰랐다고 했고, 중강에는 파수가 없는데 아랫것들이 자기들끼리 국경을 넘어갔다고 했습니다. 이 모두가 간특하게 속이는 말이니, 사실대로 공초하라는 뜻으로 먼저 물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허적과 치화가 일선과 함께 그에게 가서 물었는데, 시술이 여전히 세 차례에 걸쳐 ‘그런 줄 몰라 살피지 못했다.’고 대답하였다. 일선이 또 말하기를,
"첩문을 발급해 줄 때 상관(上官)에게 보고하지 않았는가?"
하니, 시술이 말하기를,
"매우 사소한 일이었기 때문에 상관에게는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하자, 일선이 이에 칙사의 뜻으로 단안을 내리기를,
"그런 줄 알고 벌목을 허락했는지 물어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원통하다고 하면서도, 제대로 살피지 못한 한 조목에 대해서는 이미 자백하였습니다. 시술은 내보내고 월경인(越境人)들을 불러들여 물어보십시요."
하였다. 이에 국경을 넘어간 2인을 불러들여 물어보았는데, 2인의 대답도 시술이 말한 것과 같았다. 일선이 말하기를,
"일단 금처(禁處)에서 제외되는 곳이라면, 자기들끼리 사사로이 농사를 짓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니, 상이 말하기를,
"이것은 일조일석에 이루어진 일이 아니오만, 하여튼 그릇된 관습을 그대로 답습하여 경작해온 일은 역시 매우 잘못된 일이었소."
하였다. 일선이 또 말하기를,
"정장(呈狀)한 내용에 나오는 이말생(李末生)이라는 자가 유독 이번 사문에 빠졌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하니, 2인이 말하기를,
"말생은 정장하고나서 제사(題辭)를 받은 뒤에 갑자기 병세가 중해져 처음부터 같이 가지 못했습니다."
하였는데, 말생에게 받은 공초 내용 역시 이와 같았다. 일선이 말하기를,
"공초를 받는 일은 이제 끝났습니다."
하였다. 상이 나가 소차(小次)에 머물렀다가 조금 뒤에 다시 칙사를 만나 다례(茶禮)를 행하고 일선 이하 통관(通官)들에게도 모두 차를 주도록 명하였다. 일선이 말하기를,
"이제는 시술의 죄안(罪案)을 속히 의논해 정해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좌우를 물리치고 삼공 및 병판 허적과 형판 조계원만 남아 있도록 한 뒤 의논해 정하였는데, 사신(史臣)도 이에 관한 내용을 들을 수 없었다.

 

5월 17일 기축

상이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희정당(熙政堂)에서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시술(時術)의 죄가 점점 지극히 중해지니,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하니,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단지 이일선(李一善)이 조종해서 그러는 것만이 아니라 이는 곧 칙사의 뜻이기도 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내가 중사(中使)를 보내 칙사에게 문안하게 하면서 어제 주선하며 힘을 써준 데 대해 감사를 드리게 했더니, 일선이 말하기를 ‘이것이야말로 국왕이 우리를 조롱하는 것이다. 조금도 주선한 일이 없는데 감사할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하였다 한다."
하였다. 정치화(鄭致和)가 아뢰기를,
"따로 주는 은(銀)에 대해서는 예전에도 정해진 숫자가 없었는데, 지금은 얼마를 주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먼저 2천을 주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이 뒤로 파수(把守)하는 일은 어떻게 의논해 정해야 하겠는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압록강을 한계로 해야 마땅하겠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반드시 저 나라와 의논을 해서 정하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강을 한계로 삼을 경우 우리 땅이 저네들에게 들어가니 어찌 아깝지 않겠는가."
하였다. 정유성(鄭維城)이 아뢰기를,
"허적(許積)이 자진해서 사신으로 차임되어 사문하는 일을 주선해 보고 싶어하는데, 외부의 의논도 타당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사신(史臣)에게 이르기를,
"이런 일들은 기록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대사간 민정중(閔鼎重)이 태인(泰仁)과 고부(古阜)의 민전(民田)을 탈취한 궁노(宮奴)를 가두고 다스릴 일에 대해 아뢰니, 상이 이르기를,
"일개 궁노를 가두고 다스리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다. 다만 전계(前啓)의 내용이 꽤나 명확하지 못했는데 그 뜻을 모르겠다."
하였다. 정중이 아뢰기를,
"사리를 따져 말한다면 불법 점유한 궁둔(宮屯)은 모조리 혁파해야 옳습니다. 그런데 전계의 내용을 살펴 보건대, 궁둔으로 절수(折受)받은 곳에 또한 민전(民田)이 있는데도 궁노가 구별하려 하지 않고 싸잡아 탈취하였기 때문에 단지 가두고 다스리라고만 청했던 것인 듯싶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긴 하겠다마는, 궁노를 가두어 다스리라고 범범하게 칭하다니 어쩌면 그토록 명확치 못하단 말인가."
하였다. 정중이 아뢰기를
"예전부터 궁둔으로 절수받은 가운데 민전이 포함되어 있어도 궁노들이 번번이 세력을 믿고 탈취하고 있는데, 외방에 이보다 더 심한 민원(民怨)이 없습니다. 더구나 이 두 고을에 있는 진황지(陳荒地)의 경우, 아무리 주인 없는 땅이라고는 하지만 전토(田土)가 없는 곤궁한 백성들이 갖은 고생 끝에 개간하여 여러 해 동안 경작해 먹고 살면서 영구적인 자신의 땅으로 여겨 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농가(農家)의 일정한 재산을 보건대, 장정 한 사람의 경작지가 10여 두(斗)의 땅을 넘지 못하고 있는데, 하루아침에 궁가에게 빼앗긴다면 그 원통한 심정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계사(啓辭)가 이와 같으니, 해도 감사로 하여금 앞으로 호조의 관문(關文)이 있는 것을 제외하고 외람스럽게 폐단을 짓는 일이 있을 경우 자세히 조사해 처리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이민적(李敏迪)이 아뢰기를,
"어제 남별궁(南別宮)에 거둥하셨을 때 비록 좌우를 물리치라는 명이 계시긴 하였지만 시위(侍衛)하는 제장(諸將) 및 근시(近侍)들이 모두 문밖에 나가 있었던 것은 사체로 볼 때 부당한 일이었습니다. 6승지를 모두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승지의 죄가 아니었다. 그러나 추고하라."
하였다. 민적이 또 아뢰기를,
"신이 여제(厲祭)의 제문(祭文)을 지어 올렸었습니다마는, 그 글은 산천(山川)에 기도할 때의 글과 똑같이 지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듣건대 무사귀신(無祀鬼神)077)  의 위판(位版)에 제사를 지냈다고 하니, 일이 매우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듣건대 외방에서 단(壇)을 쌓고 제사지내면서 여제신(厲祭神)이라고 위판에 썼다 하니, 그것도 근거가 없는 일입니다. 해조로 하여금 대신에게 의논한 뒤 구례(舊例)를 참고해서 정식(定式)을 삼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헌부가 아뢰기를,
"사직서 참봉 신여식(申汝栻)은 아비의 상중에 있는 몸으로 서얼 동생과 서로 싸운 뒤 자신이 증인으로 나섰는데 동생이 형(刑)을 받고 죽기까지 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그 동생의 패악스러움이야 이미 말할 것조차도 없습니다만, 형이 된 입장에서 어떻게 동생을 죽인 죄를 면할 수 있겠습니까. 진신들이 이 이야기를 서로 전하며 같은 반열에 서기를 수치스럽게 여기고 있으니, 신여식을 사판(仕版)에서 삭제해 버리소서."
하니, 따랐다.

 

5월 18일 경인

옥당의 신록(新錄)078)  을 도당(都堂)079)  에서 뽑았는데, 이숙(李䎘)·여성제(呂聖齊)·이유상(李有相)·송규렴(宋奎濂)·최유지(崔攸之)·오두인(吳斗寅)·정석(鄭晳)·윤석(尹晳)·윤지미(尹趾美)·원만리(元萬里) 등 10인이었다.
윤지미는 윤강(尹絳)의 아들로서 용렬하고 학식이 없었다. 원만리는 원두표(元斗杓)의 아들이고 흥평위(興平尉) 원몽린(元夢鱗)의 아비인데 거친 성격에 기세만 부렸다. 두 사람 모두 사망(士望)이 아니었고 또 본관(本館)에서 대상 인물로 취하지도 않았는데, 단지 형세를 등에 업고 참여하게 되었으므로 물론(物論)이 소란하게 일어났다. 그러나 본관에서 택했다고 하는 최유지 같은 자를 보아도 만리나 지미보다 나은 점이 뭐가 있다고 하겠는가. 그런데도 이경석(李景奭)이 그와 인척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극력 입김을 불어넣어 끝내 남건(濫巾)080)  에 이르게 하였으니, 사로(仕路)의 혼탁함이 이에 이르러 극에 달했다 하겠다.

 

5월 19일 신묘

홍우원(洪宇遠)을 사인(舍人)으로, 이민서(李敏叙)를 교리로 삼았다.
우원은 효종조(孝宗朝) 때에 유지(有旨)에 응하여 진언했다가 말이 매우 강직했던 관계로 이에 걸려 폐고(廢固)되었었다. 그 뒤 상의 세상에 와서도 수용(收用)되지 않다가 오늘날에 와서야 비로소 중서(中書)에 임명되었으므로 너무나 시기가 늦은 점을 사론(士論)이 애석하게 여겼다.

 

연접 도감(延接都監)이 아뢰기를,
"병조 판서 허적(許積)과 대제학 김수항(金壽恒)이 함께 남별궁(南別宮)에 도착해서 역관(譯官)으로 하여금 이일선(李一善)에게 통지하게 하기를 ‘사문(査問)과 관련해 주달(奏達)할 문서를 정리해서 기다리고 있다.’ 하니, 일선이 대답하기를 ‘우리들이 먼저 대체적인 요지를 알아야만 칙사에게 보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청사(淸使)가 온 목적은 전적으로 의주(義州)의 일을 조사하기 위해서였는데, 일선이 이 틈을 타고서 더욱 끝없는 욕심을 부렸으므로 조정이 걱정하였다.

 

조정이 병조 판서 허적을 진하 부사(進賀副使)로 차견할 것을 의논드렸는데, 부사에 1품을 임명하는 것은 이전에 없었던 일이었기 때문에 상이 허적을 정사(正使)로 차임하려 하였다. 이에 비국이 아뢰기를,
"진하사는 예전부터 왕자나 부마(駙馬)가 아니면 모두 대신으로 차견하였으니, 저들이 의아해 할 것 같습니다."
하자, 마침내 허적을 부사로 임명하였다.

 

상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삼공 및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허적에게 이르기를,
"칙사가 뭐라고 공갈하는 말을 하던가?"
하니, 허적이 대답하기를,
"그가 바로 경작하는 것과 관련된 한 조목을 제기하면서 말하기를 ‘이 문장을 보건대, 강 건너편에서 경작하는 일이 예로부터 있어 왔다고 하였다. 그런데 어떻게 파수(把守)를 한다고 하면서 거꾸로 경작을 하도록 할 리가 있겠는가. 이 점은 본국에 죄가 있다. 이시술(李時術)을 조사할 필요가 뭐가 있는가. 이런 조사는 할 필요도 없으니, 그만두고 돌아가 본국의 죄를 황제에게 고하겠다. 그러면 사사(査使)가 다시 나오거나 본국 대신이 들어가 변명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시술 한 사람을 위해 주려 하다가 국가에 일이 발생하게 하면 되겠는가. 내일 다시 조사해야 하겠다.’ 하고, 또 말하기를, ‘시술이 공초(供招)한 말이 어찌 이렇게도 번다한가. 그리고 사문할 때 듣지 못했던 말도 많이 있다. 시술에게는 죄가 셋이 있다. 인문(印文)을 발급해 준 것이 첫째 죄이고, 파수하는 장수에게 금하지 말도록 분부한 것이 둘째 죄이고, 처음에 섬 이름을 구별해 주지도 않고 보낸 것이 셋째 죄이다. 시술은 반드시 이 세 가지 죄를 스스로 담당해야 할 것인데, 이를 자복(自服)한 것으로 결어(結語)를 작성해야 할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에 앞서 의주(義州)에 사는 박용업(朴龍業) 등이 압강(鴨江) 건너편에서 벌목(伐木)하겠다고 부윤 이시술에게 정소(呈訴)하자, 시술이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벌목을 허락하였는데, 용업이 청(淸)나라 사람에게 붙잡혔다. 이 때문에 사사(査使)가 나와 협박을 많이 하였는데, 일선 역시 자복(自服)했다는 것으로 결어를 작성케 하여 칙사의 뜻을 맞춰주려 하였다. 그래서 허적과 김수항(金壽恒)이 날마다 관소(館所)를 왕래했으나 그의 마음을 돌리지 못한 채 돌아와서 사정을 아뢴 것이었다. 상이 이르기를,
"아, 이것은 내 잘못이다. 당초 사문할 때 내가 온 힘을 기울여 구제해 주었는데 필시 그가 이 때문에 간계를 부리는 것일 것이다."
하고, 또 태화에게 이르기를,
"저들이 경계(境界)를 구실로 삼아 말하는 것은 필시 ‘경작’에 관한 한 조목을 빼버리려고 하는 것인데, 장차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그것이 중요한 대목의 말이긴 합니다만, 저들이 국가에 화를 떠넘기려 할 경우 시술에게도 해가 돌아갈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럴 것이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경작한다는 사실이야말로 시술에게 힘이 되는 말인데, 지금 빼버릴 경우 필시 헤아릴 수 없는 지경으로 빠질 것이니, 정말 애처롭습니다."
하자, 수항이 아뢰기를,
"허적의 말이 맞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이 말을 잘하여 변명토록 하라. 그런데 저들의 노여움만 돋구는 결과가 된다면 도리어 해가 될 것이다."
하자, 원두표(元斗杓)가 아뢰기를,
"외부 사람들은 저들의 마음을 모르고 입으로 다투려고만 하는데, 이는 시술에게도 보탬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국가에도 화를 끼치는 일입니다."
하였다. 수항이 입시한 신하들에게 두루 물어보기를 청하였는데, 여러 재신(宰臣) 모두가 그 대목을 삭제하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삭제하라."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부사(副使)를 정하는 의논이 아직 완결되지 않았는데, 신의 생각에는, 허적이 먼저 자문(咨文)을 가지고 들어가서 전적으로 시술을 구하는 뜻을 보여주고, 신은 옛 규례대로 부사의 직함을 띠고 들어가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하고, 허적이 아뢰기를,
"신은 시술이 아무 죄도 없이 죽게 된 것이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감히 부사에 끼어 가려고 하는 것인데, 일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조정에는 후회되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만약 신만 따로 먼저 떠난다면 사체가 타당치 못할 뿐만 아니라 뒷날의 폐단도 있게 될 것입니다."
하고, 두표가 아뢰기를,
"문자로 이미 드러내 밝힌 말이 없는 상태에서 허적마저 가지 않는다면 그를 살릴 길이 필시 없을 것입니다. 허적의 관질(官秩)이 높긴 하지만 부사로 충원하여 들여보내더라도 저들은 필시 혐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허적을 부사로 정해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허적이 김좌명(金佐明)과 함께 주문(奏文)을 짓게 해 주기를 청하니, 따랐다.

 

호남 진휼 어사 이숙이 치계하였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예전부터 황폐하게 버려져 있던 도내 저수지의 제방을 감사 이태연(李泰淵)이 신칙하여 수축하고 있습니다. 전주(全州)의 옥야(沃野)081)  와 익산(益山)의 춘포(春浦)082)  는 모두가 높은 지대로서 건조한 땅인데 지금 삼례(參禮)의 대천(大川) 아래 물줄기를 끌어다가 제방을 견고하게 쌓고 있으니, 관개(灌漑)를 시작하기만 하면 옛날 쓸모없이 버려졌던 땅이 기름진 땅으로 탈바꿈하면서 무려 1천 3백여 결(結)이나 되는 새로운 전지(田地)가 마련될 것입니다. 그리고 점차적으로 공력을 기울여 물길을 뚫으면 임피(臨陂)·옥구(沃溝)의 50, 60리(里)되는 지역도 관개할 수 있을 것인데, 앞으로 1만 석 이상을 파종하는 이익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두 고을의 주민들이 모두 기뻐하고 있는데, 세입(稅入)도 앞으로 더욱 늘어나게 될 것입니다."

 

5월 20일 임진

상이 대신과 비국의 재신들을 희정당(熙政堂)에서 인견하였다. 부제학 조복양(趙復陽)이 문서 중에서 경작에 관한 한 조목의 말을 빼지 말도록 청하면서 누누이 아뢰니, 상이 이르기를,
"그가 만약 화를 내면서 조가(朝家)에서 알고 있었다고 고한다면 필시 화가 미치는 폐단이 있을 것인데 어찌한단 말인가?"
하였다. 김좌명(金佐明)이 아뢰기를,
"신의 생각에는 경작에 관한 한 대목을 빼버리더라도 그다지 해되는 바가 없으리라고 여겨집니다. 그런데 외부의 의논을 보면 모두들 힘을 쓰지 않고 있다고 말을 하는데, 도감으로 하여금 이일선(李一善)에게 물어보도록 하더라도 무슨 지장이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일선의 말이 아니라 칙사가 물어본 내용인데, 일선에게 다시 물어본들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하자, 정태화(鄭太和)와 원두표(元斗杓)가 아뢰기를,
"그렇게 해서 혹 이시술에게 보탬이 된다 하더라도 국가에 화를 끼치는 일이 없지 않을 것이니, 결코 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처음에 교죄(絞罪)로 논단(論斷)했던 것도 정말 만부득이해서 한 일이니, 지금 와서 그 문자를 고치지 않기란 정말 어렵다."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저들이 말하기를 ‘지금 만약 고치지 않는다면 다시 대가(大駕)를 관소(館所)에 오도록 청해서 조사해야 하겠다.’고 하는데, 그렇게 되면 모양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였다. 두표가 아뢰기를,
"문서가 너무 늦으면 의아하게 생각할 여지가 없지 않으니 속히 완결지은 뒤 정서(正書)해서 가지고 가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하였다. 복양이 다시 나아가 아뢰기를,
"그렇긴 하나 다시 가서 물어보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였는데, 두표가 아뢰기를,
"그런 식으로 하면 의논이 정해질 때가 없을 것입니다. 정유성(鄭維城)의 의견도 처음에는 신들과 달랐는데, 곡절을 듣고 나서는 전혀 차이가 없이 일치되었습니다. 국가의 대사를 용이하게 처리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복양이 탄식하고 물러갔다.

 

이때 연접 도감(延接都監)의 계사가 날마다 분분하게 올라 왔는데, 그 내용은 모두 칙사가 이시술의 일을 계속 고집부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일선(李一善)이 안에서 조종하고 있었으므로 조가(朝家)에서 그에게 은밀히 은(銀)을 2천 냥이나 주었는데, 이것은 보통 5백 냥을 주는 관례를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일선이 꽤나 불만스럽게 생각하면서 그 뒤로는 무슨 말을 해도 칙사에게 전달조차 하지 않았다. 이에 허적(許積)과 김수항(金壽恒)이 어떻게 해볼 수가 없어 상의 앞에서 아뢰기를,
"그가 자기 공을 내세우는 기색이 완연하니 더 뇌물을 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호판 정치화(鄭致和)에게 하문하기를,
"이 말이 어떠한가?"
하자, 치화가 아뢰기를,
"신의 생각에는 1천 냥만 더 주었으면 합니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1천 냥으로는 그의 욕구를 채워주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하니, 치화가 아뢰기를,
"일선이 스스로 공을 과시하고는 있지만 아직 뚜렷하게 해놓은 일도 없는데 지금 많이 준다면 뒷날 폐단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신이 허적과 상의해서 적당히 주도록 했으면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의 환심을 사려면 뇌물을 아끼지 말아야 할 형편이다. 일선이 마음과 힘을 다 쏟으면 무사하게 넘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이번에 갑자기 이 일을 당했는데, 외정(外廷)의 의논들을 보면 모두가 ‘뇌물을 넉넉하게 주면 혹시 가망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치화가 아뢰기를,
"신이 대통관(大通官) 김대헌(金大獻)의 말을 들었는데, 그가 말하기를 ‘칙사가 화를 내고 있는데, 지금 고치지 않으면 필시 후환이 있게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 사내는 상당히 믿을 수 있는 인물이니, 속여서 말했을 리는 없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태가 이렇게까지 되었으니 문자를 고치도록 하라."
하였다.

 

유신(儒臣)이 진달드린 여제 제문(祭文)의 규식(規式) 문제를 가지고 수의(收議)하였는데, 영부사 이경석(李景奭), 영상 정태화(鄭泰和), 우상 정유성(鄭維城)이 아뢰기를,
"지난번 북쪽 교외에서 여제를 지낼 때 위판(位版)은 성황신(城隍神)의 것을 쓰고 제문 첫머리에는 여제지신(厲祭之神)이라고 썼다 하기에, 신들도 듣고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오례의(五禮儀)》 가운데 성황신에게 고하는 글을 보건대 ‘장차 모월 모일에 북쪽 교외에 단(壇)을 쌓고 경내에 있는 무사귀신(無祀鬼神)을 제사지내려 하는데, 신(神)이 힘을 발휘하여 귀신들을 소집해서 단으로 나아오게 해 주기를 바란다.’고 하였고, 여제와 관련한 교서(敎書)를 보아도 ‘왕약왈(王若曰)’이라고 칭하면서 끝 부분에 ‘이에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성 북쪽에 단을 쌓고 경내의 무사귀신을 두루 제사지내게 하면서 이곳 성황신으로 하여금 뭇 영(靈)들을 불러모아 이 제사를 주관케 하였으니, 너희 뭇 귀신들은 친구가 있는 대로 모두 이끌고 와 음식을 실컷 먹고 여재(厲災)를 끼쳐 화기(和氣)를 상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본다면, 여제를 거행하기 전에 먼저 성황신에게 고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지금 만약 다시 거행한다면 이 규식에 의거해서 행하는 것이 마땅한데, 성황제와 여제의 제문에 ‘다시 거행한다.’는 내용을 첨가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그 의논을 옳게 여겼다.

 

5월 21일 계사

우의정 정유성(鄭維城) 등이 동도(東道)083)  의 제릉(諸陵)을 봉심하고 돌아와 아뢰기를,
"현릉(顯陵)084)  과 목릉(穆陵)085)  의 사토(莎土) 및 곡장(曲墻)086)  이 무너진 곳이 상당히 광활하였으므로 우선 유둔(油芚)087)  과 초둔(草芚)088)  으로 덮어두고는 앞으로 개수(改修)하기로 했습니다. 해조로 하여금 추수 뒤에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놀랍기 그지없는 일이다. 추수 때까지 기다릴 수 없으니, 즉시 개수토록 하라."
하였다.

 

5월 22일 갑오

병조 판서 허적(許積)과 대제학 김수항(金壽恒)이 청대(請對)하니 상이 인견하였다. 상이 하문하기를,
"주문(奏文)의 결어(結語)는 어떻게 마무리지었는가?"
하니, 허적이 대답하기를,
"‘범죄의 실정을 알아냈다.[得情]’는 두 글자는 생략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칙사의 안색이 어제에 비하면 풀어진 듯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이시술(李時術)의 아들 이세장(李世長)이 어떻게든 칠성검(七星劍)을 구해가지고 은밀히 주었기 때문입니다."
하고, 마침내 소매 속에서 주문의 초고를 꺼내어 읽었는데, 상도 1본(本)을 가지고 문자를 상의하며 확정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상국 사람들도 아는 사실이다. [上國之人亦所共知]’는 여덟 글자를 그가 부당하게 여겼는데, 이는 청(淸)나라 문자로 번역하면서 내용 그대로 전달을 하지 못해 그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었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그가 기필코 시술의 이름을 죄인 중에 첫번째로 기재하려 하기에 신들이 다퉜습니다만 뜻을 돌리지 못했으니 정말 안타깝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은 어째서 ‘시술은 교죄(絞罪)에 해당되고 상놈은 참죄(斬罪)에 해당된다. 참죄가 교죄보다 중하니 중한 죄의 순서대로 이름을 기재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하자, 허적이 아뢰기를,
"신이 그 점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내일은 그런 내용으로 말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가 기필코 ‘범죄의 실정을 알았다.[知情]’는 것으로 결어(結語)를 삼으려 하는 의도가 무엇인가?"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교죄(絞罪)로 논할 근거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신이 ‘시술의 공사(供辭)에는 그런 말이 없었다.’고 따지니, 그가 도리어 성을 내며 말하기를, ‘힐문하지도 않아서 그가 승복할 리는 결코 없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신들은 따로 소요를 일으키게 될까 두려워 다시 따지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교리 이민적(李敏迪), 수찬 임한백(任翰伯)이 옥당에 입직(入直)했다가 청대(請對)해 입시하여 아뢰기를,
"저쪽 사람이 사용하고 있는 것은 《대명률(大明律)》인데 《대명률》로 보면 ‘지정(知情)’은 참최(斬罪)에 해당됩니다. 지금 만약 지정의 내용으로 결어를 삼는다면, 시술이 살 수 있는 길은 전혀 없게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는 병판의 말을 듣지 못했는가. 형추(刑推)하는 지경까지 이른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하자, 민적이 아뢰기를,
"공갈하는 말을 어찌 다 믿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허적이 아뢰기를,
"신이 극력 따져도 안 되기에 영상을 찾아갔더니 영상이 즉시 비국에 나아가 여러 당상과 회동하였는데, 삼공의 의견은 ‘그들 모두가 굳게 고집하고 있는 이상 따져도 이익이 없을 것이다.’ 하였고, 예판 김좌명(金佐明)은 ‘그가 살릴 마음만 가지고 있다면 아무리 중한 쪽으로 문장을 작성해도 염려할 것이 별로 없겠지만, 기필코 죽이려 든다면 아무리 가벼운 쪽으로 작성한다 해도 살릴 방도가 없을 듯하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주서(注書)에게 명하여 삼공을 불러들이도록 하고, 분부하기를,
"옥당의 뜻은 반드시 대신을 보내 지정(知情)이라는 두 글자에 대해 강력히 따지려고 하는 것이다만, 나의 생각은 다르다. 대신이 갈 경우, 이것은 바로 조정의 의견이 되는 셈이다. 그들이 일단 조정의 의견이 이러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일이 중대하게 될 뿐만이 아니고 그들이 또한 들어줄 리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우선 글을 작성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가서 설득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민적이 아뢰기를,
"대신이 가서 따지는 것이 불편하다면 다른 사람을 다시 보내 설득하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아무튼 병판이 다시 가 보도록 하라."
하고, 또 이르기를,
"‘그대가 주선해서 「알고서도 국경 너머에 보냈다.[知而越送]」는 말을 없애게 해 준다면 내가 답례하겠다.’고 그에게 말하라."
하니, 민적이 아뢰기를,
"상의 분부가 간절하고 애달프시니 누구인들 감읍(感泣)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마음을 굳게 먹고 다툰다면 효과를 볼 희망이 없지 않습니다. 시술이 끝내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된다면, 세상에 이토록 참혹하고 통분스러운 일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리고 ‘금하는 지역인데 알고도 건너 보냈다.[禁地知而越送]’는 내용은 시술의 공사(供辭) 중에 없는데, 그가 죽일 셈으로 지(知)라는 글자를 억지로 덧붙였습니다. 이렇게 되면 시술이 죽는 것만 애처로울 뿐이 아니라 뒷날의 폐단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으니, 그야말로 계속 강력히 따져야 할 대목인 것입니다. 따라서 허적이 갔다가 혹 실패하고 온다 하더라도 다시 대신을 보내 누누이 온 힘을 다해 따지지 않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신의 생각입니다. ‘허적이 실패할 경우 다시 거론하기는 정말 어렵다.’고 말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신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것은 그렇지 않은 점이 있다. 이일선(李一善)이 만약 어렵게 여기면 어찌 칙사에게 통할 리가 있겠는가."
하니, 원두표(元斗杓)가 호조에 분부하여 좋은 검(劍) 한 자루를 주도록 할 것을 청하였다. 허적이 먼저 하직하고 나가 관소(館所)에 갔는데, 칙사가 말하기를,
"이시술의 공사(供辭) 가운데 ‘중강(中江)에는 파수를 두지 않았는데, 예로부터 그러하였다.’라는 말이 있었다. 이미 예로부터 그러했다고 그가 말했는데, 그렇다면 조정에서 알고 있었던 일인가, 아니면 시술이 속여서 말한 것인가?"
하였다. 이에 허적이 대답하기를,
"그것은 바로 사문(査問)할 때 그가 대답한 말입니다."
하면서 다방면으로 논란을 벌였으나, 칙사는 말하기를,
"이것은 병판이 독자적으로 대답할 성격의 것이 못된다. 국왕에게 알려 조정에서 의논해 정한 다음에 회보(回報)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5월 23일 을미

대신 및 비국의 신하들을 희정당(熙政堂)에서 인견하였다. 상이 허적에게 이르기를,
"어제 관소(館所)에 가서 어떻게 의논해 정하였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이일선은 수면 중이기에 만나보지 못하고, 단지 김대헌(金大獻)만 불러 그에게 말하기를 ‘「금지 구역인데, 알고서도 건너 보냈다.[禁地知而越送]」는 여섯 글자를 문장에 포함시키는 것은 매우 중대한 문제이다. 이시술(李時術)의 아들 이세장(李世長)이 그 글자를 고치려고 애걸해 마지 않는데, 그대가 주선해 준다면 반드시 후히 보답하겠다.’ 하니, 대헌이 말하기를 ‘한번 시도해 보겠는데, 초피(貂皮) 2백 령(令)을 준비해 오도록 하라.’ 하였습니다. 이렇게 그와 수작하다 보니 날이 이미 저물어가고 있었는데, 일선이 신들에게 말을 전해 오기를 ‘반드시 입이 닳도록 쟁집(爭執)해 보라.’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들어가 칙사를 만났더니, 칙사가 말하기를 ‘중강(中江) 파수에 관한 일은 예로부터 그러했다는 등의 말을 속히 삭제해버리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하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그것이야말로 시술이 공초(供招)한 말인데, 어떻게 삭제할 수 있는가.’ 하자, 부사(副使)가 힐책하면서 말하기를, ‘이런 것은 병판의 독자적인 견해로 될 일이 아니니, 급히 조정에 품하여 회보하도록 하라.’ 하였으므로 신이 돌아왔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몇 군데나 고쳤는가?"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어제 김대헌에게 1백 금(金)을 주겠다고 했더니, 비로소 주선해 준 말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하고,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금지 구역인데, 알고서도 건너 보냈다.[禁地知而越送]’는 말을 ‘금지 구역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국경을 범한 결과가 되고 말았다.[知其禁地而致此越犯]’고 고쳤는데, 이렇게 되면 글 뜻이 조금 달라집니다. 이것은 대헌의 공이라 할 것입니다."
하고, 허적이 아뢰기를,
"칙사가 신에게 묻기를 ‘문서는 완료되었는가?’ 하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말한 대로 모두 고쳤다. 다만 시술을 논한 죄는 곧 교죄(絞罪)이고 국경을 범한 자들의 죄는 곧 참죄(斬罪)인데, 시술의 이름을 맨 처음에 올려 놓으려 하는 것은 무슨 의도에서인가? 우리들의 생각으로는 죄명(罪名)의 경중에 따라 순서를 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여겨진다.’ 하였더니, 칙사가 말하기를 ‘참죄와 교죄에 무슨 차이가 있는가. 고칠 필요가 없다.’ 하였는데, 신이 돌아오는 것이 급해서 미처 굳이 쟁론하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신임 의주 부윤(義州府尹)으로 하여금 역시 중강(中江)에 파수를 본래 설치했다고 말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자, 허적이 아뢰기를,
"안 됩니다. 만약 의주에 물어볼 경우 필시 겁을 먹어 뇌물을 많이 쓸 것이니 보탬이 되는 일은 없이 재물만 허비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옳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그가 일단 ‘조정에 가서 품(稟)하고 회보하라.’고 하였는데 어찌 모르겠다고 답할 수가 있겠습니까. 조정의 체면으로 보아서도 시술에게 죄를 떠넘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고, 원두표(元斗杓)가 아뢰기를,
"조정의 뜻이 이와 같다면 속히 회보해야 할 것입니다."
하고, 태화가 아뢰기를,
"금지(禁地)에 관한 한 대목에 대해 이미 문장을 바꿔서 작성할 수 있게 되었으니, 파수(把守)를 설치한 대목에 대해서 또한 ‘예로부터 그러하였다.’는 문자로 완결짓게 된다면, 시술의 죄가 전에 비해 헐해질 듯합니다."
하고, 허적이 아뢰기를,
"당초 사문(査問)할 때 조정에서도 ‘예로부터 그러하였다.’는 뜻을 말하였으니, 지금 어떻게 중간에 말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혹 들어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예전에 했던 대로 그 말을 반드시 고수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하였다. 허적과 김수항(金壽恒)이 먼저 하직하고 물러나가 관소(館所)로 향하려 할 때, 상이 허적에게 이르기를,
"경은 속히 관소에 가서 이일선(李一善)에게 말하기를 ‘그런 정상을 알았다.[知情]’는 지자(知字)를 꼭 고치고 싶은데 칙사가 어렵게 여기고 있다. 네가 주선해 준다면 그런 다행이 어디 있겠는가.’ 하라."
하고, 또 이르기를,
"지금 다시 쟁집(爭執)해도 끝내 들어주지 않으면 어찌한단 말인가?"
하니, 허적이 대답하기를,
"신이 어찌 감히 힘을 다해 도모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정유성(鄭維城)이 나아가 아뢰기를,
"신이 동도(東道)의 제릉(諸陵)을 봉심(奉審)했는데 무너진 곳이 상당히 넓어 놀랍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러나 장마가 아직 그치지 않았으므로 지금은 개축하기가 어렵습니다."
하고, 태화가 아뢰기를,
"그렇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찌 장마가 그칠 때까지 기다릴 수 있겠는가."
하였다. 두표가 아뢰기를,
"신들의 생각에는 8월도 너무 가까울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8월까지 기다려 봤다가 공사를 시작하도록 하라."
하였다.

 

5월 25일 정유

김수항(金壽恒)을 도승지로, 박장원(朴長遠)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장원은 성품이 순수하고 근실했으나 풍절(風節)은 모자란 편이었다. 그러나 그래도 윤선도(尹善道)의 위리(圍籬)를 철거토록 한 명을 환수하라고 청한 논에 대해 너무 심하다고 여겨 평소 사람을 대할 때면 꽤나 불가한 점을 말하곤 하였다. 그러다가 헌장(憲長)에 임명되어서는 감히 이론(異論)을 제기하지도 않았으나 논에 참여하려고도 하지 않은 채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끝내 나오지 않았으므로 동료들이 자못 좋아하지 않았는데 어떤 이들은 이 점을 칭찬하기도 하였다.

 

수찬 민유중(閔維重)이 밀소(密疏)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이시술(李時術)이 죄도 없이 죽게 된 것이야말로 상하 모두가 가슴 아파하고 애달프게 여기는 일입니다. 성상께서 지성을 다하며 애처롭게 여기신 마음은 타인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고 신하들이 왕복하며 쟁론하였고 보면 저들이 들어줄 만도 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잗달한 일이 의외에 생겨 갖가지로 공갈을 치고 있는데, 우리로서는 형세에 눌려 마음대로 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그러나 교외(郊外)에 직접 임하시어 전송할 때에 이 일을 언급하며 은근하고 간절하게 부탁을 하신다면, 자기 나라에 돌아가 보고할 때 우리에게 보탬이 되는 점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파수(把守) 지역 외에는 우리 경내(境內)라 할 것인데, 의주부(義州府)의 백성들이 오직 도중(島中)에서만 꼴과 나무를 해 오는 실정이고 보면, 아무리 금령(禁令)을 다시 밝혀도 그 일을 막아 근절시키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따라서 반드시 이 기회를 이용하여 중강(中江)에 파수를 옮겨 설치하고 피차 한계선을 분명히 하여 간악한 백성들이 넘나들지 못하게 한다면, 훗날 또한 저들에게 할 말이 있을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따로 글 하나를 작성해 사신의 행차 편에 부쳐서 곡절을 낱낱이 개진하게 하는 동시에 개설(改設)할 것을 청하도록 했으면 합니다. 그리고 경작하는 것과 관련된 한 조목을 역사적으로 고찰해 볼 때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되었으니, 굳이 숨길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숨긴들 저들이 모를 리가 없을 것이니, 이번에 실상 그대로 개진해도 무방할 듯합니다."
하였다. 소를 들인 뒤 오래도록 내리지 않다가 어느날 대신을 인견하면서 꺼내 보여주었는데, 대신이 읽고 나서 비밀로 할 것을 청했기 때문에 안에 놔두고 내리지 않았다.
삼가 살피건대, 변방을 지키는 임무야말로 어려운 것이라 하겠다. 조금이라도 살피지 못할 경우 환란을 불러올 수도 있으니, 신중하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만부(灣府)의 신장(訊杖)이 어찌 꼭 변경의 버드나무가지 역할을 한다고야 하겠는가마는,089) 이시술(李時術)이 경솔하게 제사(題辭)090)  를 발급해 주었다가 끝내 죄망(罪網)에 걸려들어 이 때문에 죽게까지 되었으니, 참으로 원통하기 짝이 없는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죄의 경중(輕重)이 어떻든 간에 일단 잘못을 저질렀고 보면 설령 불행하게 된다 하더라도 권대덕(權大德)의 사건 때와 무슨 큰 차이가 있다 하겠는가.
그런데 백성이 초목을 꺾은 죄 정도를 가지고 변방 수령을 죽이기까지 하는 일은 저네들도 필시 하지 않을 것인데, 공경(公卿) 이하가 너무도 지나치게 애석해 하고 너무도 심하게 놀란 나머지 황급하게 굴기만 하였다. 그리하여 군상(君上)이 친림(親臨)하여 능욕을 당하게 되는 점은 생각할 겨를도 갖지 못한 채 오직 시술을 구제하는 것만을 일대 능사(能事)로 여기고는 1품직의 중신(重臣)을 강등시켜 부사(副使)로 충원하기까지 하였으니, 어쩌면 이렇게도 사리가 뒤바뀌었단 말인가.
정치화(鄭致和)가 ‘정말 다행이다.’고 한 말이 매우 촌스러운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의 그런 행동은 시의(時議)를 염려한 나머지 비용을 아낄 엄두는 아예 내지 못했던 데에서 발로된 것이었다. 그런데도 당시 붓을 잡은 신하는 ‘어째서 구준(寇準)이 조이용(曹利用)을 책망했던 것091)  처럼 하지 못했단 말인가.’라고까지 하며 치화를 심각하게 꾸짖었다. 과연 우리와 저들의 관계가 송(宋)과 요(遼)의 관계에 서로 비유될 수 있는 것이겠는가. 이것은 아동의 견해와 다름이 없으니, 더욱 가소롭기만 하다.

 

5월 26일 무술

호남 어사(湖南御史) 이숙이 상소하면서 별단(別單)으로 백성의 병폐 아홉 가지를 조목조목 나열했는데, 상이 그 계사를 비국에 내렸다. 비국이 회계(回啓)하여 해조로 하여금 본도와 상의하여 품달한 뒤 시행하게 할 것을 청하였는데, 시행된 것이 많지 않은 가운데 오직 ‘궁가(宮家)에서 거두어들이는 전조(田租)가 너무 외람되다.’고 아뢴 일에 대해서만은 상이 전년에 비해 반으로 줄이라고 특별히 명하였다.

 

5월 27일 기해

우상 정유성(鄭維城)이 첫 번째 정사(呈辭)하였는데, 윤허하지 않는다고 비답하였다.
이에 앞서 유성이 일단 ‘호남 어사 이숙이 공산현(公山縣)에 도착해 하리(下吏)를 형신(刑訊)한 일’을 진달드리자, 상이 매우 노하였다. 이에 정신(廷臣)이 본도에서 사핵(査覈)할 것을 청하였는데, 본도가 차원(差員)을 정해 공산현의 하리에게 공초(供招)를 받은 결과, 그의 대답이 대신이 진달한 것과는 상당히 다르게 나타났다. 이렇게 되자 장령 이동명(李東溟)이, 공산 현감 최문식(崔文湜)이 사명(使命)을 무함하였다고 하면서 논계하여 파직시킬 것을 청하였는데, 유성이 상차하여 변론하면서 ‘서로 앞을 다투어 칭찬하고 아첨해서 공을 바치려 하니, 이숙의 위세가 이처럼 대단하다.’는 등의 말까지 하자, 동명이 인피하면서 유성을 비난하며 배척하는 말을 많이 하였기 때문에 유성이 정사(呈辭)한 것이다. 동명은 용렬하고 비루하며 무식한 자로서 이숙에게 아첨하여 빌붙은 나머지 꼭 사실이라고 보장할 수도 없는 소위 사계(査啓)라는 것을 구실로 유성을 탄핵했던 것인데, 상이 이를 깨닫지 못하였으니 탄식을 금할 수가 없다.

 

5월 28일 경자

지평 원만리(元萬里)가 아뢰기를,
"입암(笠巖)092)  의 비축곡은 본래의 목적이 군향(軍餉)인데, 지금 어사 이숙이 올린 치계를 보건대, 전 부사 이원정(李元禎) 때 축낸 곡식의 숫자가 무려 7백여 석이나 된다 하니, 그를 나문(拿問)해 사실을 조사한 뒤 처리케 하소서. 그리고 전 감사 김시진(金始振) 역시 고을 일에 관심을 두지 않아 각읍(各邑)에 이전(移轉)할 때 제 수량대로 받아가지 못했다는 보고가 상당히 많이 들어왔는데도 덮어둔 채 조사하지 않았으니 너무도 직책을 수행하지 못했습니다. 파직시키소서."
하니, 따랐다. 이원정을 금부에서 다스리며 대질 신문을 벌였으나 모두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으므로 이에 풀어주었다.

 

5월 29일 신축

김좌명(金佐明)을 내의원 제조로, 김휘(金徽)를 동지의금으로, 이상진(李尙眞)을 이조 참판으로, 이은상(李殷相)을 승지로, 조한영(曹漢英)을 예조 참의로, 남구만(南九萬)·이익(李翊)을 이조 좌랑으로, 이숙(李䎘)을 수찬으로, 이성징(李星徵)을 동래 부사로 삼았다.

 

이조 참판 윤문거(尹文擧)가 상소하여 본직을 극력 사양하니, 따랐다. 문거는 일찍이 이산(尼山)의 역옥(逆獄)을 상변(上變)한 공으로 당상의 자계(資階)에 올랐는데, 이 때문에 상당히 비방을 받았으므로 문거가 이를 괴롭게 여겨 벼슬길에 나서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송시열(宋時烈)이 누차 밀어주어 도헌(都憲)과 아전(亞銓)에 임명되기까지 했는데도 끝내 출사(出仕)하려 하지 않았다.

 

호조 판서 정치화(鄭致和)가 점계(粘啓)093)  하여 아뢰기를,
"태인(泰仁)·고부(古阜) 등지에서 제궁가(諸宮家)가 마구 점유한 전지(田地)가 비록 갑술년 양안(量案)에 주인 없는 것으로 등록된 땅이라 하더라도, 그 뒤에 백성들이 거의 모두 개간해 경작하면서 부자간에 전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에게 팔기도 하고 있는데, 하루아침에 궁노(宮奴)가 관문(關文)을 가지고 와서는 빼앗아 소유해버렸습니다.
금구(金溝) 지역은 제언(堤堰)을 크게 만들어 물을 저장해두고 있는 곳으로서 제언 아래의 민전(民田)에서 매우 많은 혜택을 받고 있는데, 궁노가 도서(圖書)를 갖고 내려가 장차 제언 안쪽을 개간하려 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제언을 수축하는 사목(事目)을 다시 밝히는 날을 당하여 법을 무시한 채 원한을 쌓고 있으니, 다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언의 저수(貯水)에 관한 일을 다시 밝히도록 한 사목이 1월 28일에 계하(啓下)된 반면, 궁가에서 절수(折受)하는 문서가 1월 15일에 작성되긴 하였습니다만, 예로부터 제언에 대해서는 아무리 버려진 곳이라 하더라도 궁가에서 절수하지 못하는 것이 관례화되었으니, 그 일이 명령을 내리기 전에 있었다는 이유로 그냥 놔두어서는 안 될 듯합니다. 따로 강명(剛明)한 차원(差員)을 정해 자세히 적간(摘奸)해서 계문하게 한 뒤 처치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이미 명령을 내리기 전에 있었던 일인 만큼 ‘다시 밝히는 때’라고 한 것은 실제와 어긋나는 일인 듯하고, 수본(手本)으로 이미 관유(關由)케 한 상황인데 다시 ‘제궁가에서 절수받을 수 없다.’고 하다니, 앞뒤로 말이 뒤바뀌면서 도대체 근거로 삼을 말이 없다. 또 태인과 고부의 경우는 당초 사계(査啓)하라는 명도 없었는데 운운(云云)하고 있으니, 모두가 방자해서 그런 것으로서 너무도 터무니없는 일이라 하겠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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