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일 임인
이연년(李延年)을 승지로, 이정(李程)을 사간으로, 서필원(徐必遠)을 대사성으로, 여성제(呂聖齊)·박순(朴純)을 정언으로, 윤변(尹抃)을 장령으로 삼았다.
헌부가 아뢰기를,
"변장(邊將)은 본도에서 부거(赴擧)094) 하지 못하도록 하는 금령(禁令)이 분명히 있으니, 병사(兵使)와 시관(試官)이 감히 제멋대로 부거를 허락한 것은 그 죄가 작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난번 북병사(北兵使) 정부현(鄭傅賢), 북우후(北虞候) 이경한(李經漢), 단천 군수(端川郡守) 이지형(李之馨)에 대해서는 현임(見任)에서 해직시키는 것으로 조율(照律)하여 윤허를 받았으니, 너무 가볍게 처리한 결과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더구나 유시정(柳時楨)의 고신(告身)을 뺏는 것으로 추후(追後)에 조율한 것과 비교해 볼 때, 죄는 같은데 벌은 다르게 시행하였으니, 부현 등 3인에게 고신을 뺏는 것으로 고쳐 조율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함경 감사 권우(權堣)가 치계(馳啓)하였는데, 안변(安邊) 등 아홉 고을에 황충(蝗蟲)의 재해가 크게 발생해 각종 곡식이 손상을 입었고, 어느 곳 하나 정결한 곳 없이 전염병이 오래도록 만연되고 있다고 하였다.
이때 잇따라 해마다 크게 흉년이 들어 경외(京外)를 막론하고 기근이 심해 백성들이 나무껍질과 풀뿌리로 연명하였다. 성상의 관심과 묘당의 시책 또한 지극했다고 할 만했으나 그래도 그 만분의 일도 구하지 못해 눈에 보이는 것마다 재해를 입은 황폐한 광경이었고 굶주려 죽은 시체들이 길에 가득하였다.
6월 2일 계묘
우찬성 송시열(宋時烈)이 상소하여 사직하니, 상이 너그럽게 답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시열이 포의(布衣)에서 일어나 돌연히 전형(銓衡)의 권한을 행사하였는데, 그가 입김을 불어넣어 준 자를 보면 모두가 이론만 좋아하며 그에게 아첨한 무리들이었고 그가 끌어들여 임용한 자를 보면 향곡(鄕曲)의 악착스런 무리들뿐이었다. 그가 통서(統緖)를 어지럽히고 예(禮)를 그르친 죄 말고도 성상을 속이고 저버린 죄가 또한 많은데, 그 무리들이 끊임없이 칭찬하자 상이 믿고 발탁해 이공(貳公)에 임명하니, 중외(中外)가 놀라워하였다.
병조 좌랑 정재숭(鄭載嵩)이 소장을 진달하여 그의 아비인 정태화(鄭太和)의 군관 자격으로 북경(北京)에 따라가게 해 줄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6월 3일 갑진
장령 안진(安縝), 지평 원만리(元萬里)가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는데, 옥당이 처치하여 체직시킬 것을 청하니, 따랐다.
이에 앞서 간원이 삼등 현령(三登縣令) 구인전(具仁廛)을 논하면서 조사해 처리할 것을 청했었다. 그런데 헌관이 ‘간원이 논계를 일부러 정지시켜서 일단 조사를 마친 뒤에도 마무리짓지 않았다.’고 오인하고 간원의 체직을 아뢰었는데, 그뒤 바로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는 인피하여 체직된 것이다.
상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각 아문과 제궁가(諸宮家)의 선척(船隻)의 숫자를 정하도록 일찍이 하교하셨었습니다. 그런데 사옹원 소속의 배는 원래 2백 척으로 정했습니다만 지금 현존하는 숫자가 1백 59척인데, 의논하는 이들은 ‘2백 척은 너무 많으니 50척을 감해야 마땅하다.’고 합니다. 이 의논대로 숫자를 정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법전(法典)에 기재된 것이니 감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제궁가의 선척은 이미 그 숫자를 정했습니다만, 내수사·명례궁(明禮宮)의 선척도 현재 있는 것 외에는 절대로 숫자를 늘리지 말라고 분부하셔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잘 알았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호남 어사 이숙의 장계를 보건대, 사노비(寺奴婢) 3명이 미곡을 바치고 속량(贖良)되었다 하는데, 노(奴)는 속량이 가능하지만 비(婢)와 후생(後生)이야 어떻게 허락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일단 가미(價米)를 받은 이상 되돌려주기도 어려운 형편이니, 당사자에게만 국한시켜 역(役)을 면제해 주는 것으로 시행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지금 이후로 비(婢)에 대해서는 허락해주지 말라."
하였다. 상이 태화에게 이르기를,
"동래(東萊)에서 왜관(倭館)을 옮기는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웅천(熊川)은 내지(內地)이니 그곳에 옮겨 설치할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원두표(元斗杓)가 아뢰기를,
"신이 지난번에 상차하여 인재를 천거하였는데, 그 중에서 김좌명(金佐明) 한 사람만 발탁했을 뿐 나머지에 대해서는 소식이 없으므로 신이 감히 다시 진달드립니다."
하니, 홍명하(洪命夏)가 아뢰기를,
"사체가 중대한 만큼 특명이 계시지 않는 한 감히 쉽사리 의망(擬望)할 수가 없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해조에서 착실히 거행하기에 달려 있다."
하였다. 이완이 아뢰기를,
"각사(各司)의 노비 모두가 제궁가(諸宮家)의 사패(賜牌)095) 안에 들어 있는데, 심지어는 일단 받은 뒤에 거지가 되었다는 이유로 다른 자로 바꾸기도 하고 도망했다는 이유로 다른 자를 데려가기도 하니, 이는 전에 없던 규정이라 하겠습니다."
하고, 조복양(趙復陽)이 아뢰기를,
"거지가 되었다고 대신할 자를 내게 하는 것이야말로 더욱 근거없는 일이니 조사해 다스리도록 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규정은 폐지하고 처음 그런 식으로 만든 자에게 죄를 주도록 하라."
하였다. 복양이 또 아뢰기를,
"고부(古阜)·태인(泰仁)의 민전(民田)의 일에 대해 미안한 분부를 내리셨는데, 궁가(宮家)와 관련된 일이기에 밖의 의논들이 상당히 석연치 않게 여기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는 곡절을 모르는가? 대간이 말한다면 좋다. 그런데 해조가 그만 물어보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장황하게 늘어놓았으니, 사체로 볼 때 어떻게 감히 이렇게 할 수 있단 말인가."
하였다. 홍명하가 아뢰기를,
"복양이 생각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습니다. 정치화(鄭致和)에게 실수가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방자하다.’는 분부가 미안하기 때문에 감히 누누이 진달드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지 않았다. 복양이 아뢰기를,
"대간이 궁장(宮庄)의 일을 가지고 논계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는데도 아직껏 윤허하지 않으시므로 아랫사람들이 모두 안타깝고 답답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간의 말이 틀렸는데 내가 어찌 윤허하겠는가. 관문(關文)은 따지지도 않고 내외에서 그저 고집하려고만 드는데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하자, 두표가 아뢰기를,
"오늘날의 대간이 어찌 일을 알겠습니까. 뭐라고 한 마디라도 하면 그저 화를 낼 줄만 알 뿐입니다."
하였다. 복양이 아뢰기를,
"대간의 계사가 사리에 마땅치 못할 경우에는 당초부터 명백하게 하교하시어 시비를 분별하셔야 옳습니다. 그렇지 않고 줄곧 꺾어버리기만 하신다면 정말 미안스럽게 되는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의 말은 틀렸다. 하교를 해도 모욕만 당하는데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피혐한 말들을 보면 거의 대부분이 불손하니, 내가 하필 모욕을 자초하겠는가."
하였다. 복양이 아뢰기를,
"이렇게 분부하시다니 온당치 못합니다. 대계(臺啓)에 혹 제대로 뜻을 표현하지 못한 부분이 없지 않겠습니다마는, 모욕[辱]이라는 한 글자야말로 어찌 대간의 본 의도와 관계가 있는 것이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늘날의 대간이 일자무식장이가 아닌데 어찌 매번 표현을 잘못할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상이 궁가(宮家)의 일에 대해 편파적으로 처리하는 병통을 아직 없애지 못한 관계로 그 일에 조금만 언급이라도 되면 번번이 미안한 분부를 내리곤 하였다. 그래서 조복양이 매우 간절하게 말씀드렸는데도 막연하게만 듣고 살피지 않았다. 그런데 원두표는 나라의 인친(姻親)으로서 정축(鼎軸)에 몸을 담고 있는 신분인 만큼 그 한 마디가 성상의 뜻을 유도하기에 충분할 텐데, 그런 말을 개진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성상을 따라 대관(臺官)을 비난하고 배척함으로써 인군(人君)이 대각을 경시하는 폐단을 열어놓았으니, 그야말로 같이 임금을 섬길 수 없는 자라 하겠다.
【태백산사고본】 5책 5권 32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334면
【분류】왕실-국왕(國王) / 교통-수운(水運) / 신분-천인(賤人)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농업-전제(田制) / 정론-간쟁(諫諍) / 역사-편사(編史)
[註 095] 사패(賜牌) : 하사 증명서.
사신은 논한다. 상이 궁가(宮家)의 일에 대해 편파적으로 처리하는 병통을 아직 없애지 못한 관계로 그 일에 조금만 언급이라도 되면 번번이 미안한 분부를 내리곤 하였다. 그래서 조복양이 매우 간절하게 말씀드렸는데도 막연하게만 듣고 살피지 않았다. 그런데 원두표는 나라의 인친(姻親)으로서 정축(鼎軸)에 몸을 담고 있는 신분인 만큼 그 한 마디가 성상의 뜻을 유도하기에 충분할 텐데, 그런 말을 개진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성상을 따라 대관(臺官)을 비난하고 배척함으로써 인군(人君)이 대각을 경시하는 폐단을 열어놓았으니, 그야말로 같이 임금을 섬길 수 없는 자라 하겠다.
6월 4일 을사
여성제(呂聖齊)를 수찬으로, 김휘(金徽)를 대사간으로, 이민징(李敏徵)을 장령으로, 이유상(李有相)을 정언으로, 이합(李柙)을 지평으로, 강백년(姜栢年)을 좌승지로, 김좌명(金佐明)을 동지의금으로, 안후창(安後昌)을 병조 좌랑으로 삼았다.
6월 5일 병오
대사헌 박장원(朴長遠), 헌납 박세견(朴世堅)이 모두 소패(召牌)에 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는데, 정언 박순(朴純)이 처치하여 체직시키기를 청하니, 따랐다.
강원 감사 이홍연(李洪淵)이 치계하였다.
"삼척부(三陟府)에 이달 6, 7일에 잇따라 밤에 서리가 내려 콩과 삼 등이 모두 손상을 당했으며, 강릉(江陵)도 마찬가지입니다. 원주(原州)에 큰물이 져 봄보리가 부패되었습니다."
6월 6일 정미
상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승지들에게 정원에 계류된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해방(該房)이 탑전(榻前)에서 윤독(輪讀)하였는데 상이 조금도 지체시키지 않고 재결(裁決)하였으므로 신하들이 뒤쫓아가지 못할 정도였다. 다 읽고나자 도승지 김수항(金壽恒)이 나아가 아뢰기를,
"지난번에 홍명하(洪命夏)가 시종(侍從)의 사직문제를 가지고 분분하게 진달하였는데, 수찬 이숙이 정세상 편안치 못한 점이 있어 패초(牌招)를 했는데도 나아오지 않고 있으니, 이는 도리상 변통해 주어야 마땅할 듯 합니다."
하고, 이은상(李殷相)이 아뢰기를,
"이숙이 정세상 과연 매우 편안치 못할 텐데, 이런 소를 퇴각시키는 것은 어려울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정세상 불편한 점이 있는 소는 정원이 말을 잘 바꿔 계품(啓稟)하도록 하라."
하였다. 수항이 아뢰기를,
"호조 판서 정치화(鄭致和)가 바로 얼마 전에 미안스러운 분부를 받았으므로 감히 공무를 집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당초 회계(回啓)할 때에 착오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어찌 감히 방자한 마음이야 품었겠습니까. 참판과 참의도 모두 서로 잇따라 인혐하고 들어갔으므로 호조의 업무가 행해지지 않고 있으니 염려스럽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판서를 패초(牌招)하여 임무를 살피도록 하라."
하였다. 수항이 아뢰기를,
"참판과 참의도 모두 패초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판서를 패초하면 참판과 참의는 저절로 출사(出仕)할 것이다."
하였다.
6월 7일 무신
유경창(柳慶昌)을 대사헌으로, 김익렴(金益廉)을 헌납으로, 정만화(鄭萬和)를 좌부승지로, 유창(兪瑒)을 우부승지로 삼았다.
사신은 논한다. 유경창은 단지 하나의 오활한 인물로서 관직 생활 중에 청백(淸白)하다는 이름이 있긴 하였으나 조정에 있으면서 직간(直諫)하는 풍도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니 풍헌(風憲)의 장관 자리는 그에게 매우 걸맞지 않는다 하겠다. 정만화는 사람됨이 잗달아 그저 각박하게 세세히 살피는 것을 능사로 삼았다. 일찍이 승지로 있으면서 각사(各司)를 몹시도 다그쳤는데, 예조의 아전이 낭관에게 소보(小報)로 통지하면서 ‘본조엔 별 일이 없는데, 정 승지가 정원에 입직(入直)해 있다.’고 하였으므로 듣는 자들이 모두 배를 잡고 웃었다. 대사성 서필원(徐必遠)이 만화와 젊어서부터 서로 친했었는데 만화의 옳지 못한 점을 보고는 늘 섬인(憸人)이라고 칭하더니 이어 그와 절교하고는 같은 당에서 말한 적이 없었다.
【태백산사고본】 5책 5권 33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334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역사-편사(編史) / 인물(人物)
사신은 논한다. 유경창은 단지 하나의 오활한 인물로서 관직 생활 중에 청백(淸白)하다는 이름이 있긴 하였으나 조정에 있으면서 직간(直諫)하는 풍도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니 풍헌(風憲)의 장관 자리는 그에게 매우 걸맞지 않는다 하겠다. 정만화는 사람됨이 잗달아 그저 각박하게 세세히 살피는 것을 능사로 삼았다. 일찍이 승지로 있으면서 각사(各司)를 몹시도 다그쳤는데, 예조의 아전이 낭관에게 소보(小報)로 통지하면서 ‘본조엔 별 일이 없는데, 정 승지가 정원에 입직(入直)해 있다.’고 하였으므로 듣는 자들이 모두 배를 잡고 웃었다. 대사성 서필원(徐必遠)이 만화와 젊어서부터 서로 친했었는데 만화의 옳지 못한 점을 보고는 늘 섬인(憸人)이라고 칭하더니 이어 그와 절교하고는 같은 당에서 말한 적이 없었다.
교리 홍주삼(洪柱三)이 노모를 봉양할 목적으로 상소하여 수령직을 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충청 감사 오정위(吳挺緯)가 치계하였다.
"이 달 24일 밤에 퍼붓듯 큰비가 내려 육지가 내로 변하고 모래가 뒤덮힌 곳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는데, 전의(全義)·문의(文義)·청안(淸安) 등의 지역에서는 산이 무너져 깔려 죽은 사람과 가축이 매우 많았습니다."
반송사(伴送使) 여이재(呂爾載)가 치계하였다.
"제독(提督) 이일선(李一善)이, 보내온 소가 살찌지 않았다고 화를 내면서 순안 현령(順安縣令) 서정리(徐正履)를 잡아들여 갖은 모욕을 가했는가 하면 본현의 향소배(鄕所輩)096) 들을 곤장치기까지 하였습니다. 수령을 능욕하는 일이 근래에는 없었는데 갑자기 이런 환란이 있게 되자 모두들 통분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6월 10일 신해
홍명하(洪命夏)를 판의금으로, 안진(安縝)·오시수(吳始壽)를 정언으로, 박장원(朴長遠)을 예조 참판으로, 이시매(李時楳)를 형조 참판으로, 박세모(朴世模)를 동의금으로, 조원기(趙遠期)를 주서로 삼았다.
사신은 논한다. 홍명하는 조정에 선 이래로 오로지 패거리를 비호하는 것만을 일삼았다. 그리고 그 사람됨이 권모 술수가 많은데다가 남을 이기기 좋아하는 병통이 있었다. 그리하여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스스로 주도하기를 좋아하며 기필코 자기의 뜻을 관철시켰는데, 조금이라도 마음에 거슬리는 점이 있으면 대뜸 매도하고 모욕을 가하였으므로 식자들이 병통으로 여겼다.
【태백산사고본】 5책 5권 33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334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역사-편사(編史) / 인물(人物)
사신은 논한다. 홍명하는 조정에 선 이래로 오로지 패거리를 비호하는 것만을 일삼았다. 그리고 그 사람됨이 권모 술수가 많은데다가 남을 이기기 좋아하는 병통이 있었다. 그리하여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스스로 주도하기를 좋아하며 기필코 자기의 뜻을 관철시켰는데, 조금이라도 마음에 거슬리는 점이 있으면 대뜸 매도하고 모욕을 가하였으므로 식자들이 병통으로 여겼다.
정언 박순(朴純)·이유상(李有相)이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는데, 사간 이정(李程)이 처치하여 체직시키기를 청하니, 따랐다. 이때 대계(臺啓)가 ‘고부(古阜)·태인(泰仁)의 전토(田土) 및 김제(金堤) 제언(堤堰) 내의 땅을 무턱대고 점유한 궁노(宮奴)를 치죄(治罪)할 일’을 오랫동안 쟁집(爭執)하고 있었는데, 박순 등이 ‘궁노가 이미 내사(內司)의 공문을 지니고 있었으니 꼭 치죄할 것이 없다.’고 하며 몇 줄의 말을 빼버리고 연계(連啓)하자 물의가 이를 비난했기 때문이었다.
대사성 서필원(徐必遠)이 소장을 진달하여 사직하고, 또 아뢰기를,
"사(私)라는 한 글자야말로 나라를 망치는 근본이 된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근년 이래로 점차 이런 풍조가 횡행하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도 버젓이 공정하지 않은 일을 행하고 있기 때문에 길거리마다 이를 비판하는 이야기가 자자한데도 대각에서는 한 마디 말씀도 드리지 않고 조용하기만 하니 성상께서 어떻게 들으실 수 있겠습니까.
옥당의 관원은 으레 경연(經筵)을 겸하여 논사(論思)하고 보도(輔導)하는 책임을 전담하고 있으니, 그 임무가 얼마나 중합니까. 이렇듯 중하기 때문에 선발하는 것 역시 중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내려오는 홍문록(弘文錄)의 규정을 보건대, 처음에는 재주나 명망이 당대에 뚜렷이 드러난 자를 가린 다음 본관(本館)의 관원들이 모두 모여 권점(圈點)097) 해서 점수가 많은 자를 뽑는데, 그것을 본관록(本館錄)이라 합니다. 그 뒤 삼공(三公) 및 정부의 동서벽(東西壁)098) 과 관각(館閣)의 당상이 도당(都堂)에 일제히 모여 본관록 중에서 부적합한 자는 삭제하고 적합한데도 누락된 자는 취하는데, 이것을 도당록(都堂錄)이라고 이름하니, 이렇게 한 뒤에야 비의(備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대저 한 관사(官司)의 후보자 명단에 대해 처음에 본관의 심사를 거쳤다가 재차 도당을 거치게 하는 등 매우 상세히 심사하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라, 중하게 하고 가볍게 하려 하지 않는 것이고, 공(公)에 입각해서 하고 사(私)를 개입시키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에서인 것입니다.
그런데 전일 도당에서 권점을 행하여 뽑을 때에, 윤지미(尹趾美)와 원만리(元萬里)는 모두 본관록에 참여되지도 않은 사람인데 홀연히 도당록에 끼이고 다른 사람은 참여하지 못하였습니다. 이게 어찌 도당록에 참여될 만한 사람이 오직 이 두 사람밖에 없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윤지미는 상신(相臣)의 누이의 아들이고 원만리는 상신의 친아들입니다. 도당이란 바로 정부의 별명으로서 실제로는 삼공이 이 일을 주도하고 있는데 본관록에 누락된 그 아들과 조카만 참여되었으니 아무리 사(私)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신은 감히 믿지 못하겠습니다.
고(故) 상신 이준경(李浚慶)은 도당에서 권점을 행하던 날, 그의 아들이 도당록의 대상자 명단에 끼어 있자 직접 붓을 잡고 지우면서 ‘내 아들이 이 선발에 부적합하다는 것은 나 스스로 잘 알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공정한 그 마음 자세에 대해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칭찬하는데, 이 어찌 뒷 사람들이 본받아야 할 점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최유지(崔攸之)나 송규렴(宋奎濂) 같은 자는 모두 부적합한 사람인데도 인아의 세력 덕택으로 함부로 대상자 명단에 등록되었으니, 어떻게 뭇사람들의 입을 막고 그들의 마음을 만족시킬 수 있겠습니까. 어리석은 신의 생각으로는 이를 바로잡아 풍절(風節)을 힘쓰게 하고 앞으로 징계하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여겨집니다. 그런데 박장원(朴長遠)처럼 퇴보(退步)하는 자야 원래 꾸짖을 가치도 없는 것이지만, 민정중(閔鼎重)처럼 과감하고 강직한 자마저 입을 꾹 다문 채 체직되려고만 안간힘을 쓰고 있으니, 오늘날의 나랏일이 한심스럽기만 합니다. 만약 일체 그들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둔다면 앞으로 환란을 구하기가 어렵게 될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나라를 위하는 그대의 충성심을 가상하게 생각한다.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라."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서필원이 소장을 진달한 뒤에 어떤 이가 그에게 묻기를 ‘윤지미 등 4인 모두가 꼭 홍문록에 부적합한 인물이라고 할 수 없는데, 그대가 어찌하여 갑자기 상소하여 배척을 하였는가?’ 하니, 필원이 대답하기를 ‘윤지미는 본래 범상할 뿐 취할 만한 장점이 없고, 원만리는 사람됨이 거칠고 포악하여 전혀 아망(雅望)이 결여되었다. 그런데 상신의 조카이거나 상신의 친아들이라는 이유 때문에 본관록에 누락되었는데도 그 뒤에 도당록에 참여되었다. 경악의 청선(淸選)에 어찌 그런 자들을 끼워둘 수 있겠는가. 최유지는 너무나도 용렬하여 그 벼슬과 걸맞지 않은 정도뿐만이 아닌데다가 더구나 남한 산성(南漢山城)이 포위되었을 당시 용서받기 어려운 죄까지 지었는데 말할 것이 있겠는가. 송규렴은 일찍이 호남의 방백으로 있으면서 고을 일을 결딴내었고 또 연소한 부마(駙馬)들과 친밀하게 지내며 왕래하다가 뒤섞여 도당록에 참여되었으니, 외람스럽기 짝이 없다. 내가 그래서 소장을 올려 배척한 것이다.’ 하였다. 필원이 편협하고 너그럽지 못한 병통을 가지고 있긴 하였으나 일단 일을 당하면 마음을 바꾸지 않고 곧게 행동하는 것으로 자임(自任)하였으므로 사론(士論)이 중히 여겼다.
【태백산사고본】 5책 5권 34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335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정론-정론(政論) / 역사-편사(編史) / 인물(人物)
[註 097] 권점(圈點) : 후보자 이름 위에 둥근 점을 치는 것.[註 098] 동서벽(東西壁) : 동벽(東壁)은 좌찬성과 우찬성을, 서벽(西壁)은 좌참찬과 우참찬을 말함.
사신은 논한다. 서필원이 소장을 진달한 뒤에 어떤 이가 그에게 묻기를 ‘윤지미 등 4인 모두가 꼭 홍문록에 부적합한 인물이라고 할 수 없는데, 그대가 어찌하여 갑자기 상소하여 배척을 하였는가?’ 하니, 필원이 대답하기를 ‘윤지미는 본래 범상할 뿐 취할 만한 장점이 없고, 원만리는 사람됨이 거칠고 포악하여 전혀 아망(雅望)이 결여되었다. 그런데 상신의 조카이거나 상신의 친아들이라는 이유 때문에 본관록에 누락되었는데도 그 뒤에 도당록에 참여되었다. 경악의 청선(淸選)에 어찌 그런 자들을 끼워둘 수 있겠는가. 최유지는 너무나도 용렬하여 그 벼슬과 걸맞지 않은 정도뿐만이 아닌데다가 더구나 남한 산성(南漢山城)이 포위되었을 당시 용서받기 어려운 죄까지 지었는데 말할 것이 있겠는가. 송규렴은 일찍이 호남의 방백으로 있으면서 고을 일을 결딴내었고 또 연소한 부마(駙馬)들과 친밀하게 지내며 왕래하다가 뒤섞여 도당록에 참여되었으니, 외람스럽기 짝이 없다. 내가 그래서 소장을 올려 배척한 것이다.’ 하였다. 필원이 편협하고 너그럽지 못한 병통을 가지고 있긴 하였으나 일단 일을 당하면 마음을 바꾸지 않고 곧게 행동하는 것으로 자임(自任)하였으므로 사론(士論)이 중히 여겼다.
좌의정 원두표(元斗杓)가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도당(都堂) 홍문록(弘文錄)은 본래 완의(完議)099) 해야 된다는 규정이 없습니다. 전일 권점(圈點)할 때에 삼공(三公) 및 정부의 서벽(西壁), 이조의 당상, 대제학 등 7원(員)이 회의에 참석하였는데, 신의 아들 원만리(元萬里)는 6점(點)을 얻어 도당록에 참여되었습니다. 신이 아무리 형편없더라도 아들을 위해 이익을 꾀할 목적으로 어찌 다시 사정(私情)을 두는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옛날 대신이 자신의 아들 이름을 지워버린 것처럼 하지 못했다고 신을 책망한다면 정말 신이 부끄럽습니다마는, 신이 사(私)를 따랐다고 한다면 너무도 이해하지 못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을 파직하여 사람들의 말에 보답하소서."
6월 11일 임자
함경 감사 권우(權堣)가 치계(馳啓)하여 가뭄 끝에 비가 내리더니 황충(蝗虫)의 재해가 치성해지고 있다고 하고, 충청 감사 오정위(吳挺緯)가 치계하여 장맛비가 절도없이 내려 하천이 범람한 나머지 진천(鎭川)·보은(報恩) 등 고을의 가옥이 많이 침수되고 떠내려갔다고 하였다.
6월 12일 계축
상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소대(召對)하였는데 승지 유창(兪瑒)과 옥당 김우형(金宇亨)·안후열(安後說)이 입시하였다.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태공망(太公望)은 어떤 사람에게 비유할 수 있는가?"
하니, 우형이 아뢰기를,
"풍후(風后)100) 와 역목(力牧)101) 과 같은 인물이라 할 것입니다."
하고, 후열은 아뢰기를,
"이윤(伊尹)이나 부열(傅說)보다 못한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조심하는 마음이 게으른 마음을 이기면 길하다.[敬勝怠則吉]’는 단서(丹書)의 말을 보건대, 그도 학문을 모르는 사람은 아니었다."
하였다. 강을 마치고 한(漢)나라와 초(楚)나라의 흥망에 관한 일이 언급되자 상이 이르기를,
"항우(項羽)가 아무리 강했어도 자영(子嬰)을 죽이고 의제(義帝)를 시해하였으니 이런 식으로 행동하고서 어떻게 천하를 얻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고제(高帝)가 정공(丁公)을 죽이고 항백(項伯)을 봉해 준 것도 균등하게 벌을 내리지 못한 것이라고 하겠다102) "
하였다. 이때 오래도록 경연을 폐지하였다가 갑자기 소대(召對)하였는데, 상이 고금의 역사를 관통하며 명확하게 변론해 설명하였으므로 입시한 신하 모두가 기뻐해 마지않았다. 물러갈 즈음에 우형이 나아가 아뢰기를,
"미곡을 납부한 사노(寺奴)를 면천(免賤)시키도록 한 명을 도로 취소하는 것은 신임을 잃는 결과를 면치 못할 것이니, 국가의 체면상 이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후일 등대(登對)할 때 품처(稟處)토록 하라."
하였다.
장령 이민징(李敏徵)·윤변(尹抃), 지평 이합(李柙), 사간 이정(李程)이 ‘서필원(徐必遠)의 상소 내용 가운데 「홍문록(弘文錄)이 작성된 후로 대각에서 한 마디도 없이 조용하기만 하였다.」는 말이 있었다.’는 이유로 서로 잇따라 인피하고, 대사간 김휘(金徽)가 ‘서필원과는 혼인관계를 맺어 상피(相避)해야 할 입장이니 감히 처치할 수 없다.’는 이유로 역시 인피하였는데, 옥당이 처치하여 모두 출사(出仕)시키기를 청하였다. 그런데 사간 이정은 패초(牌招)에도 나오지 않았다.
도승지 김수항(金壽恒)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서필원(徐必遠)이 상소하여 홍문록(弘文錄)이 불공정하게 작성되었다고 극언(極言)하면서 ‘최유지(崔攸之)와 송규렴은 모두 부적격자인데도 인아의 세력 덕분으로 외람되게 참록(參錄)되었다.’고 하였으므로, 신은 두려움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송규렴은 바로 신의 매부(妹夫)인데 그가 부적격자인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따로 공의(公議)가 있겠습니다마는, 당초 본관(本館)에서 뽑을 때 규렴이 일단 준점(准點)103) 으로 참여되었고 보면 이 어찌 신 덕택으로 된 것이라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다만 도당(都堂)104) 에서 초록(抄錄)하던 날 신도 역시 말석(末席)에 수행해 참여하기는 했습니다만, 일단 다른 이의 손에서 권점(圈點)이 행해졌고 보면, 이 역시 신이 권해서 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말을 하는 것은 필시 신의 힘을 빌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의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이 아무리 형편없다 하더라도 어떻게 감히 그 사이에서 힘을 행사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윤지미(尹趾美)와 원만리(元萬里)가 등록된 것도 권점에 참여한 신하들의 잘못이라고 하였는데, 신 역시 권점에 참여한 한 사람입니다. 그저 대중의 의견에 따라 취사(取舍)했을 뿐이지 어찌 다른 마음을 품고 한 것이겠습니까. 그러나 제대로 신중하게 심사하지 못해 물정(物情)에 거슬리는 결과를 빚게 되었고 보면, 비난하며 배척하는 말이 나오게 된 것에 대해 정말 할말이 없게 되었습니다. 본직과 겸대한 문형(文衡)을 체직시켜 주시고, 공도(公道)를 무시한 채 사정(私情)을 따른 죄를 다스려 주소서."
예조 참판 박장원(朴長遠)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서필원(徐必遠)이 상소하여 신을 퇴보(退步)한다고 배척하면서 꾸짖을 가치도 없는 자라고 하였으므로 신은 정말 부끄러울 따름인데 사실 명기(名器)를 욕되게 하는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신이 조정에 선 이래로 관직에 임명될 때마다 사양했던 것이 어찌 사사로이 일신만 편하게 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그런 재주도 못되는데 직책을 맡아 일을 망치지나 않을까 크게 걱정해서였으니 이것이 첫 번째 당연히 물러가야 할 이유였고, 늘 어미의 병을 걱정하느라 다른 일은 생각을 하지 못할 형편이었으니 이것이 두 번째 물러가야 할 이유였고, 육신마저 일찍 쇠약해지고 정신도 따라가지 못했으니 이것이 세 번째 물러가야 할 이유였고, 병에 물이 차면 쏟아지듯 과분한 복은 재앙을 일으키는 법이니 이것이 네 번째 물러가야 할 이유였습니다. 따라서 신이 물러가려고 했던 것이야말로 진심에서 나온 것이니, 퇴보한다는 배척을 어찌 면할 수 있겠습니까. 직명(職名)을 깎아주시고 이어 한가하게 물러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면 무척 다행이겠습니다."
사신은 논한다. 서필원이 장원을 퇴보(退步)라는 용어를 써서 배척한 것이야말로 장원의 병통을 제대로 맞춘 것이니, 그 기롱한 것이 지극히 절실했다 하겠다. 그런데 장원은 사람됨이 지혜스럽지 못하여 퇴보라는 말을 겸퇴(謙退)의 뜻으로 잘못 인식한 나머지 평소에 겸퇴했던 일들을 차례로 세어 나가기만 했을 뿐 한 마디도 필원의 뜻을 발명(發明)하지 못한 채 ‘이어 한가하게 물러갈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는 말로 끝맺으면서 진정 겸퇴하는 절조(節操)가 있는 자처럼 하였으므로, 이를 듣고 배를 잡고 웃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태백산사고본】 5책 5권 35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335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역사-편사(編史) / 인물(人物)
사신은 논한다. 서필원이 장원을 퇴보(退步)라는 용어를 써서 배척한 것이야말로 장원의 병통을 제대로 맞춘 것이니, 그 기롱한 것이 지극히 절실했다 하겠다. 그런데 장원은 사람됨이 지혜스럽지 못하여 퇴보라는 말을 겸퇴(謙退)의 뜻으로 잘못 인식한 나머지 평소에 겸퇴했던 일들을 차례로 세어 나가기만 했을 뿐 한 마디도 필원의 뜻을 발명(發明)하지 못한 채 ‘이어 한가하게 물러갈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는 말로 끝맺으면서 진정 겸퇴하는 절조(節操)가 있는 자처럼 하였으므로, 이를 듣고 배를 잡고 웃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 우참찬 홍중보(洪重普), 이조 참의 유계(兪棨)가 서로 잇따라 소장을 진달하여 사직하였는데, 모두 도당록(都堂錄)을 작성할 때 권점(圈點)에 참여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상이 모두에게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는데, 오직 영상에게는 답하기를,
"서필원(徐必遠)이 상소한 말이 직절(直截)하기는 하나, 실은 모두가 꼭 옳은 말만은 아니라는 것을 내가 훤히 알고 있다. 경은 적은 혐의로 인피하지 말고 대체(大體)를 보존토록 힘쓰면서 속히 나와 공무를 집행함으로써 나의 뜻에 부응하라."
하였다. 이조 판서 홍명하(洪命夏)가 소장을 진달하여 사직하였는데 그 대략에,
"도당록(都堂錄)을 작성할 때는 원래 완의(完議)105) 해야 하는 규정이 없습니다. 말석(末席)에서부터 차례로 권점(圈點)한 다음 점수가 많고 적음에 따라 취사(取舍)할 뿐입니다. 신이 아무리 형편없다 하더라도 어찌 감히 그 사이에서 한결같이 사의(私意)만 따르겠습니까. 그런데 이번에 서필원(徐必遠)의 상소에 대해서는 그 내용이 중도에 지나친 듯하기는 합니다만, 뜻이 매우 엄절(嚴截)하니 신이 감히 많은 말로 변론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리고 신이 이미 중하게 배척을 받고 있는 상태에서 마침 개정(開政)106) 해야 할 때를 당했는데, 요원(僚員)이 병으로 나오지 못했기 때문에 신이 어쩔 수 없이 염치를 무릅쓰고 정사(政事)에 참여했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판의금을 가망(加望)하라는 분부가 계셨으나 1품직 중에 달리 의망(擬望)할 사람이 없었고 그렇다고 신이 감히 자신을 의망할 수도 없었는데, 끝내는 성상의 분부를 받들어 천점(天點)까지 받게 되었으므로 황감(惶感)하여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신은 지난해 외람되게 금오(金吾)에 몸을 담고 있을 때 형편없이 직무를 수행한 탓으로 수인(囚人)으로부터 멸시와 비난을 당하고 또 아래 관원으로부터 모함과 모욕을 당했는데, 다행히 성상께서 밝게 살펴주신 덕택으로 깊은 물 속에서 구원을 받아 지척에서 모시게 되었으므로, 오직 죽어서라도 은혜를 갚아 만에 하나라도 보답해드리려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조가(朝家)에 모욕을 끼쳐 놓고 거꾸로 차지해서는 안 될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으니, 결코 얼굴을 들고 출사(出仕)하여 거듭 명기(名器)를 더럽힐 수는 없는 일입니다. 신의 본직과 겸대직을 모두 체차시켜 주시어 사람들의 말에 사죄하게 하소서."
하였다. 이때 도당(都堂)에서 권점에 참여한 제신(諸臣)이 모두 소장을 올려 사직하였다. 그리고 송규렴과 최유지(崔攸之)의 경우는 본관록(本館錄)에 참여되었었는데, 서필원이 상소하여 부적격자라고 배척하였기 때문에, 교리 이민적(李敏迪) 등이 역시 스스로 불안해 하여 각자 소장을 진달하는 등 하루도 시끄럽지 않은 날이 없었다.
강원 감사 이홍연(李弘淵)이 치계하였다.
"10일 동안 큰비가 내린 나머지 포구의 촌락에 모래가 뒤덮히는 재해가 발생했는데 온 도가 모두 그러합니다. 그리고 영동(嶺東) 몇몇 고을에서는 황충이 많이 발생하여 봄에 경작한 각 곡식이 모조리 손상당했습니다."
고려조의 능침(陵寢)을 봉식(封植)토록 명하였는데, 태조(太祖)의 능은 2백 보(步)를 한계로 하고 7개 능은 1백 50보를 한계로 정하였다. 그리고 이 보수(步數) 안의 지역에 몰래 장사지낸 것들은 모두 파내가게 하고, 집을 짓고서 경작하는 자들 역시 추치(推治)하게 하였는데, 예조의 계사에 따른 것이었다.
6월 13일 갑인
정언 오시수(吳始壽)와 안진(安縝) 모두 도당(都堂)의 신록(新錄)에 관한 일로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사간 이정(李程)은 소패(召牌)에 불응하고 나오지 않았다. 대사간 김휘(金徽)는 연계(連啓)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장령 이민징(李敏徵)과 윤변(尹抃)은 안진이 피혐한 사연을 보건대 자기들과 똑같은 일 때문인데 어떻게 감히 처치하겠느냐고 하면서 인피하고, 지평 이합(李柙)은 사간 이정이 형인 만큼 법으로 볼 때 상피(相避)해야 할 입장이니 감히 처치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인피하면서 모두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옥당이 처치하여 사간 이정은 체차시키고 나머지 모두는 출사시키기를 청하니, 따랐다.
우의정 정유성(鄭維城)이 도당(都堂)의 권점(圈點)에 참여하였다는 이유로 소장을 진달하여 사직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6월 14일 을묘
영부사 이경석(李景奭)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은 마을 가운데 파묻혀 귀머거리나 소경처럼 살아오다가, 서필원(徐必遠)이 상소하여 집의 최유지(崔攸之)를 배척하면서 ‘인아의 세력 덕분에 외람되게도 도당록(都堂錄)에 참여되었다.’고 했다는 말을 늦게서야 들었습니다. 그런데 유지의 형인 최휘지(崔徽之)의 처가 바로 신의 누이이기에 혹시 신을 가리켜 인아라고 한 것은 아닐까 하고 신은 의아해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어제 처음으로 연줄을 대어 탐문해 보고서야 그가 소위 인아라고 한 것이 신 자신을 가리킨 것이라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신에게 이런 말이 있게 된 것이야말로 운수가 불길한 탓이긴 합니다만, 혹시라도 사태가 악화하여 위험한 지경에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성상께서 아무리 곡진히 보호해 주시려 하더라도 어렵게 되고 말 것이니, 신을 파직시켜 주시어 숨어 살 수 있게 해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 일이 경 자신과 무슨 관계가 있기에 이렇게까지 인혐(引嫌)하는가. 끝 부분의 말은 더욱 염려가 지나치다고 할 수 있겠다. 경은 마음을 편히 가지도록 하라."
하였다.
6월 15일 병진
전 사간 박증휘(朴增輝)와 전 부사 최일(崔逸)을 기역(畿驛)에 장배(杖配)107) 하였는데, 일찍이 장성 부사(長城府使)로 있었을 때에 입암 산성(笠巖山城)의 미곡을 조적(糶糴)하면서 아직 받지도 않은 것을 받았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6월 16일 정사
오두인(吳斗寅)을 집의로, 정계주(鄭繼胄)를 사간으로, 여이재(呂爾載)를 지의금으로, 송시철(宋時喆)·이지무(李枝茂)를 장령으로, 이단석(李端錫)을 지평으로 삼았다.
사신은 논한다. 정계주는 홍명하(洪命夏)와 이행일(李行逸)이 대질 신문을 당할 때 명하의 변호를 떠맡고 나서면서 온 힘을 기울여 행일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였다. 이에 행일의 아우 이행적(李行迪)이 그의 형을 위해 격쟁(擊錚)하고 진정하여 계주를 사정없이 욕하면서 ‘남의 종기를 빨아주고 치질을 핥아주는 행동’이라고까지 하였는데, 사람들 중에도 계주의 심적(心跡)을 의심하는 자가 있었다. 여이재는 사람됨이 비루하고 잗달아 가는 곳마다 깨끗하지 못하다는 비난을 받았으며, 성망(聲望)도 없는데다 재능도 부족하였는데, 졸지에 팔좌(八座)의 지위에까지 뛰어 올랐으므로, 식자들이 당시의 정사(政事)를 개탄하였다.
【태백산사고본】 5책 5권 36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336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역사-편사(編史) / 인물(人物)
사신은 논한다. 정계주는 홍명하(洪命夏)와 이행일(李行逸)이 대질 신문을 당할 때 명하의 변호를 떠맡고 나서면서 온 힘을 기울여 행일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였다. 이에 행일의 아우 이행적(李行迪)이 그의 형을 위해 격쟁(擊錚)하고 진정하여 계주를 사정없이 욕하면서 ‘남의 종기를 빨아주고 치질을 핥아주는 행동’이라고까지 하였는데, 사람들 중에도 계주의 심적(心跡)을 의심하는 자가 있었다. 여이재는 사람됨이 비루하고 잗달아 가는 곳마다 깨끗하지 못하다는 비난을 받았으며, 성망(聲望)도 없는데다 재능도 부족하였는데, 졸지에 팔좌(八座)의 지위에까지 뛰어 올랐으므로, 식자들이 당시의 정사(政事)를 개탄하였다.
영부사 이경석(李景奭)이 재차 상소하여 파직을 청하니, 상이 너그럽게 비답하며 허락하지 않았다.
충청 감사 오정위(吳挺緯)가 치계하기를,
"온양 군수(溫陽郡守) 박유동(朴由東)의 첩보(牒報)에 의하건대 전패(殿牌)를 잃어버렸다 하니, 속히 처치해 주소서. 본도에서 2년 동안에 이런 변고가 네 차례나 일어났으니 놀라움과 함께 통분함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는데, 예조가 회계하기를,
"예로부터 이런 변고가 일어나는 것은 모두 수령을 쫓아내려고 하는 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령을 파직시키지 말도록 근래에 관례로 굳혔으니, 그저 전패를 다시 만들어 봉안(奉安)토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6월 17일 무오
천안(天安)에 거주하는 신일생(申一生)이 미쳐 실성(失性)한 나머지 제손으로 조모를 죽였다고 도신(道臣)이 계문(啓聞)하였다. 이에 경차관(敬差官) 정석(鄭晳)을 보내 철저히 조사토록 명하였는데, 의심할 여지없이 명백했으므로 경중(京中)에 잡아와 관례대로 삼성 추국한 뒤 참(斬)하였다.
황해 감사 홍처윤(洪處尹)이 치계하기를,
"이정두(李廷枓)라는 자가 선세(先世)의 사패전(賜牌田)이라고 일컬으면서 임전(林荃)과 동모한 뒤 갑자기 평산(平山)의 민전(民田)을 궁가(宮家)에 몰래 팔아 넘겼습니다. 그런데 정두가 성종조(成宗朝)인 정덕(正德)108) 8년109) 에 사패(賜牌)를 받았다고 했는데, 정덕 8년 계유년은 바로 성종께서 승하(昇遐)하신 지 21년이 되는 해인 만큼 위조한 정상이 뚜렷이 드러나 숨길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재령(載寧)·신천(信川)의 전지(田地) 역시 본토에 거주하는 백성들이 오래 전부터 경작해 오던 토지인데, 아무리 문기(文記)110) 가 없다 하더라도 어떻게 하루아침에 탈취할 수 있단 말입니까. 신의 감영에 소속된 화전(火田)도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데, 여기에서 또한 해마다 세금을 징수하여 각참(各站)의 수요(需要)와 진휼하는 자본을 보충하고 있으니, 만약 모두 탈취당할 경우에는 감영의 입장으로 볼 때에도 절박하게 될 근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이곳 몇 이랑의 전지에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소민(小民)의 경우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런데 세 고을의 수령들이 백성들의 원한에 찬 부르짖음을 듣고 있으면서도 궁차(宮差)의 말을 거역하는 것을 어렵게 여긴 나머지 영문(營門)에 품(稟)하지도 않고 성책(成冊)하여 지레 먼저 올려 보내는 등 정말 형편없기 짝이 없는 짓을 했으므로 세 고을의 색리(色吏)를 영문에 잡아들여 중하게 형추(刑推)하였습니다. 신천과 재령의 민전(民田)에 대해 해조로 하여금 속히 복계(覆啓)하여 처치토록 하고, 평산의 민전을 몰래 팔아넘긴 이정두라는 자도 해조로 하여금 잡아 보내게 함으로써 전지의 주인과 한 곳에서 조사할 수 있도록 하소서."
하였다. 그 뒤에 이정두와 임전을 모두 해조에서 구금하여 조사해 간악한 정상을 밝혀냈는데, 임전은 장(杖)을 맞다가 죽고 이정두도 옥중에서 죽었다.
6월 18일 기미
정언 안진이 아뢰기를,
"황주(黃州)와 진주(晋州)는 본래 근무하기 어려운 고장으로 이름이 났으므로 사람들 모두가 싫어하며 피하고 있습니다. 진주 목사 이규로(李奎老)는 부임한 지 이제 막 1년이 지났고 황주 판관 김현문(金炫文)은 부임한 기간이 규로보다도 훨씬 짧은데, 모두 잘못 다스렸다는 소문도 없는데 갑자기 하고(下考)111) 의 대상에 포함되었으니, 체직되려고 도모한 자취를 분명히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런데도 그냥 놔둘 경우 사람들 모두가 피하려고만 꾀를 낸 나머지 자주 영접하고 송별하는 폐단이 점점 심화되면서 관사(官事)가 흐지부지되어 결국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 것이니, 이규로와 김현문의 이번 하고를 모두 삭제하고 그대로 그곳에 임명하여 임기를 다 채우도록 하소서. 그리고 양도(兩道)의 감사 또한 성적 평가를 불공정하게 한 책임을 면하기 어려우니, 중하게 추고하소서."
하니, 따랐다.
영부사 이경석(李景奭)이 세 차례 상소하여 파직을 청하였는데 그 대략에,
"다른 사람들이 공격받은 경우에 대해서는 그것이 모두 공론(公論)에서 나온 것인지 신은 모르겠습니다마는, 신이 배척을 받은 것에 대해서만큼은 공론이라고 신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이 참여하지도 않았었는데 그저 관직이 높다는 이유만으로 억측해서 배척하였으니, 이 또한 공론이 너무했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서린책언(西隣責言)112) 이야 원래 괴이하게 여길 것도 없지만 우리쪽 사람들은 당연히 모두 잘 알리라고 여겼는데, 또한 이 지경에까지 이르러 평지 풍파가 거듭 일어나고 전하의 앞에서 중하게 의심을 사게 되는 등 온갖 험난하고 어려운 과정을 거쳐 오는 중에 또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었으니, 종적이 위태로워 목숨이 얼마 남지 않은 처지에서 숨지 않고 어떻게 하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굽어 살피시어 은례(恩禮)를 베푸시는 가운데 포함시켜 주소서."
하니, 상이 너그럽게 비답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대사헌 유경창(柳慶昌)이 ‘진상(進上)을 궐봉(闕封)한 일 때문에 예조 당상을 특별히 추고하라는 명이 있게 되었는데, 신은 당시 당상이었던 만큼 그대로 대석(臺席)에 있기가 어렵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장령 이지무(李枝茂)가 ‘윤선도(尹善道)의 위리(圍籬)를 철거시키도록 한 명의 환수를 청하는 일과 황헌(黃瀗)을 도로 배소(配所)로 보내게 하도록 청하는 일을 전계(傳啓)했어야 하는데, 삼성 추국을 끝내고 보니 날이 이미 저물어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인피하면서 모두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는데, 장령 송시철(宋時喆)이 처치하여 경창은 체차시키고 지무는 출사시키기를 청하니, 따랐다.
6월 20일 신유
상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공사(公事)를 결재하였다. 도승지 김수항(金壽恒), 좌승지 한진기(韓震琦), 우승지 이은상(李殷相), 좌부승지 정만화(鄭萬和)가 각방(各房)의 공사를 가지고 입시하고, 부제학 조복양(趙復陽), 교리 이민서(李敏叙)·홍주삼(洪柱三), 부교리 김우형(金宇亨)·이민적(李敏迪), 부수찬 안후열(安後說)도 청대(請對)하여 입시하였다. 수항 등이 공사를 윤독(輪讀)하자 상이 일일이 친히 결재하였는데, 이를 마치자 은상이 나아가 아뢰기를,
"전염병이 극도로 만연된 상태에서 또 이처럼 장맛비가 내리는데, 동·서 활인서에 수용된 전염병 환자의 숫자가 거의 2천 인에 이르니, 진휼해 주어야 합당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빈 가마니를 더 주고 양찬(粮饌)도 적당히 지급토록 하라."
하였다. 복양이 아뢰기를,
"이밖에 사적으로 출막(出幕)113) 한 부류의 숫자도 4천여 인에 이른다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들에게도 해청(該廳)으로 하여금 양찬을 지급토록 하라."
하였다. 수항이 아뢰기를,
"지난번 간원이 아뢴바 ‘진주 목사(晋州牧使) 이규로(李奎老)와 황주 판관(黃州判官) 김현문(金炫文)의 하등(下等)을 삭제하게 하고 본직에 그대로 제수시킬 일’에 대해 윤허를 내리셨습니다. 성적을 매겨 출척(黜陟)시키는 것이야말로 국가의 막중한 제도인데, 하등을 삭제케 하는 것은 실로 전에 없던 규정인 동시에 뒷날의 폐단과도 관계되니, 매우 온당치 못한 일입니다. 예로부터 수령에게 직책을 피하려 한 자취가 있을 경우에는 다른 벌을 시행하여 왔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하등으로 매긴 것을 삭제하게 한 일은 환수하고 시행치 말라. 직책을 피하려 꾀한 일에 해당하는 율(律)을 해조로 하여금 전례(前例)를 상고하여 품하도록 하라."
하였다. 연신(筵臣)이 서로 잇따라 자주 접견할 일과 언로(言路)를 열 일에 대해 누누이 진달드렸는데, 상이 답하기도 하고 답하지 않기도 하였다. 복양이 아뢰기를,
"꼭 널리 구언(求言)할 필요도 없습니다. 송시열(宋時烈)이나 송준길(宋浚吉), 윤문거(尹文擧) 형제, 이유태(李惟泰) 같은 사람들에게 해소시킬 방책을 물어야 할 것인데, 이 사람들의 소견은 필시 보통 사람들보다 나을 것입니다. 성상께서 정말 뭔가 해 보려는 뜻을 제대로 분발하고 계신다면, 이 사람들이 올라오기를 기다리셔야 할 텐데, 그런 뒤에야 바야흐로 정치를 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국가에 대해 필시 지극한 정성을 갖고 있을 것이니, 만약 지극한 정성으로 그들을 부른다면 어찌 모두 세상을 잊어 버리려고들 하겠습니까. 이때야말로 정신을 집중하여 급급히 만회해야 할 때인데, 혹시라도 소홀히 하게 되면 하늘의 마음에 응하고 백성의 기대를 채워 줄 길이 없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찬성의 상소에 대한 비답에 간절하게 바라는 뜻을 갖추어 언급했다마는 그가 마음을 돌릴지 모르겠다. 우찬성과 전 대사헌에게 사관(史官)을 보내 의견을 자문케 하고 속히 올라오라는 뜻을 유지(有旨) 중에 언급토록 하라. 그리고 윤문거와 이유태에게도 하유하여 올라와서 의견을 진달토록 하라."
하였다. 복양이 또 아뢰기를,
"지난해 노산(魯山)과 연산(燕山)의 묘에 특별히 근신(近臣)을 보내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는데, 현재 재이(災異)가 극심하니, 이 일을 행하게 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예조로 하여금 전례(前例)를 상고하여 품처(稟處)케 하라."
하였다.
교리 이민적(李敏迪)과 수찬 안후열(安後說)이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상소하여 지방 수령 직을 청하니, 상이 그 소를 해조에 내렸다. 해조가 회계하기를,
"현재 경악의 신하들을 보건대, 문학과 재망(才望) 모든 면에서 민적과 같은 자를 얻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그리고 후열은 바로 선조(先朝) 때 사가 독서(賜暇讀書)한 신하로서 문한(文翰)이 가장 우수합니다. 따라서 한꺼번에 외방에 보임하는 것은 정사(政事)의 체례(體例)상 온당치 못합니다."
하니, 상이 해조에 명하여 각각 미곡 10곡 씩 특별히 하사토록 하였다. 이에 민적과 후열이 전문(箋文)을 올려 사은(謝恩)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이 이를 영광으로 여겼다.
6월 21일 임술
도목 대정(都目大政)이 있었다. 송준길(宋浚吉)을 대사헌으로, 오준(吳竣)을 판중추로, 임한백(任翰伯)을 길주 목사(吉州牧使)로, 홍주삼(洪柱三)을 예천 군수(醴泉郡守)로, 박세모(朴世模)를 경기 감사로, 정지화(鄭知和)를 우윤으로, 조윤석(趙胤錫)을 예조 참의로, 오시수(吳始壽)를 교리로, 이유상(李有相)을 수찬으로, 이단하(李端夏)를 정언으로, 남용익(南龍翼)을 동지의금으로, 정만화(鄭萬和)를 경상 감사로, 홍처량(洪處亮)을 강원 감사로, 권대운(權大運)을 좌부승지로 삼았다.
승지에게 교서를 초안하도록 하여 우찬성 송시열(宋時烈)과 행 부호군 송준길(宋浚吉)에게 유시하였는데 그 대략에,
"경이 조정을 떠난 뒤로 그리워하는 마음이 끝이 없다. 전후 유시한 뜻이 간절하고 절박할 뿐만이 아니었는데, 경이 멀리하려는 마음을 돌리지 않고 있으니, 나의 정성이 천박한 것만을 탄식할 뿐이다. 국가가 불행하여 이처럼 재해가 빠짐없이 일어나고 있는데, 백성의 일을 생각하노라면 가슴이 타는듯 아프기만 하다. 모르겠다만 어떤 화란이 보이지 않는 속에 숨어 있단 말인가.
경은 산림(山林)의 숙덕(宿德)으로서 선왕으로부터 세상에 드문 대우를 받았으니, 의리상 휴척(休戚)을 함께 해야 마땅하다. 이렇듯 걱정하느라 겨를이 없는 때를 당하여 어떻게 차마 옆에서 구경만 할 수 있단 말인가. 경은 마음을 한시바삐 바꾸어 속히 올라와 현재의 어려움을 구제하여 재기불능의 상태에 이르지 않도록 함으로써 나의 목말라하는 기대에 부응토록 하라."
하였다. 또 교서를 초안토록 명하여 팔도 감사와 개성 유수(開城留守), 강화 유수(江華留守)에게 유시하였는데, 그 대략에,
"재해를 당한 이때 형(刑)을 신중히 하는 일을 조금이라도 완만하게 해서는 안 된다. 여러 차례 심리(審理)하는 일을 거치긴 하였지만 혹 원한을 품고서도 신원되지 않은 자가 있을지 모른다. 경옥(京獄)의 죄수에 대해서는 이미 유사(有司)로 하여금 소결(疏決)하도록 하였는데, 경은 형을 신중히 하는 나의 뜻을 명심하여 도내(道內) 옥에 갇힌 죄수에 대해 즉시 경중에 따라 처결한 뒤 계문(啓聞)함으로써 감옥에 오래도록 갇혀 원망하며 부르짖는 폐단이 없게끔 하라."
하였다.
대사성 서필원(徐必遠)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근일 조정이 소란스럽게 된 것이 실로 신이 말한 것 때문이기에 신은 삼가 송구스럽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삼가 영부사 이경석(李景奭)이 세 차례에 걸쳐 올린 소장을 보고 신은 너무도 놀란 나머지 몸둘 바를 몰랐습니다. 신이 군부(君父)의 앞에서 일단 언단(言端)을 꺼냈고 보면, 오직 그 이야기를 마무리지은 뒤 재처(裁處)하시기를 기다려야 할 것이니, 어찌 또한 감히 내놓았다 물렸다 하거나 내비쳤다 숨겼다 할 수 있겠습니까.
지난해 겨울 홍문록(弘文錄)을 작성했을 때 ‘모(某) 상공(相公)이 모인을 위해 힘을 썼다.’는 이야기야말로 시내에 전파된 말이었는데, 신이 경솔하게 믿고 상달(上達)했던 데에는 본래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신이 일찍이 듣건대, 최유지(崔攸之)가 병자년 겨울에 포위된 남한 산성(南漢山城)에 들어가 세마(洗馬)의 직책에 임명되었다가 소현 세자(昭顯世子)가 북쪽으로 떠날 즈음에 수행 인원으로 뽑히자 유지가 노모가 있다는 핑계를 대고 비국에 호소하여 마침내 면제되었는데, 그가 크게 소리지르고 성을 내는 모습을 당시에 목격한 자들은 너나없이 통분스럽게 여겼다고 하였습니다. 유지가 그 뒤에 등제(登第)하여 그의 사천(史薦)114) 을 의논하게 되었을 즈음에 결국 이런 이유 때문에 논박을 받았었는데, 그 논박이 마침 유지와 당색(黨色)을 달리하는 사람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유지를 변호하여 구해주려는 자들이 모두 그 논박을 당론(黨論)으로 돌려버렸습니다. 그러다가 유지와 당색을 똑같이 하면서 당시의 일을 목격한 자가 입증하며 통렬히 배척한 뒤에야 그 논란이 종식되었습니다.
신은 일찍이 생각하기를 ‘당시 남한 산성의 변고가 있었을 때야말로 신자(臣子)가 목숨을 바칠 때였다. 직명(職名)을 가진 자로서 자원해서 앞으로 나서지는 못할망정 어떻게 차마 궁관(宮官)의 신분으로 선발된 뒤에 가서 면제되기를 도모할 수 있겠는가. 이는 단연코 인간된 도리상 해서는 될 일이 아니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이미 오래 지난 뒤라서 사람들의 말도 점차 수그러들고 그를 지원하는 세력도 강해져 양사(兩司)의 자리를 차지할 수는 있었다 하더라도 엄선해야 할 옥당의 자리에까지 오른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신은 또 듣건대, 이경석이 유지가 사천(史薦) 문제로 논박을 당하던 날 연중(筵中)에서 극력 변호하여 구해 주었는가 하면, 또 당색을 같이 하면서 입증한 자를 책망하며 말하기를 ‘영공(令公)이 말한 것 때문에 유지가 장차 버림받게 되었으니, 이게 무슨 일인가.’ 하였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지금까지도 전해오는 이야기입니다. 이에 신은 일찍이 생각하기를 ‘그 사람이 아무리 사랑스럽다 하더라도 이미 그 정도가 너무 지나쳤다. 친한 사이인만큼 자신이 담당하고 나서서 극력 배척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변호해 주려고 급급하다니, 단연코 공심(公心)의 발로가 못 된다.’ 하였습니다. 신이 두 신하의 일과 관련하여 귀로 듣고 마음으로 평가한 것이 전부터 이와 같았기에 전일 상소하면서 그런 말을 꺼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인아라는 용어와 연가(連家)라는 용어는 실로 혼동해서 써서는 안 될 문자인데, 신이 잘못 표현하였으니, 이는 신의 죄입니다. 끝 부분의 스스로 상심하는 곳에서 언급한 몇 귀절의 이야기에 대한 시비(是非)와 당부(當否)는 제대로 분별할 자가 자연히 있게 될 것이니, 신은 우선 놔두겠습니다. 그러나 신이 그토록 죄를 지고 이토록 모욕을 당했으니, 앞으로 무슨 면목으로 다시 군부를 섬기겠습니까. 직명을 삭제해주시고 이어 물리쳐 축출해 주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정언 안진이 ‘이규로(李奎老) 등의 성적이 하등(下等)으로 매겨진 것을 삭제케 하라고 청한 논계가 여론의 비난을 받고 있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는데, 장령 송시철(宋時喆)이 처치하여 체직시키기를 청하니, 따랐다.
예조가 노산(魯山)과 연산(燕山)의 무덤에 제사지낼 일을 복계(覆啓)하니, 대신의 의논을 수합하도록 명하였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의논드리기를,
"조종조(祖宗朝)에서 계속 노산의 묘에 제사를 올린 적이 있었습니다만, 재해를 당했기 때문에 제사를 드렸다는 말은 신이 듣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연산의 묘의 경우는 중묘조(中廟朝) 이후로 단지 두 차례만 제사를 지냈었으니, 노산의 묘와는 비할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특명을 내려 똑같이 제사를 지내게 한다면 물론 안 될 것도 없습니다만, 재해를 만났다고 해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옳은 일인지는 신이 모르겠습니다."
하고, 우의정 정유성(鄭維城)이 의논드리기를,
"이렇게 재해를 당한 때에 두 묘에 똑같이 제사를 지낸다 해도 안 될 것은 없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재해를 당했다고 해서 제사를 지내는 것은 매우 부당하니, 영상의 의논에 따라 거행하라."
하였다.
6월 23일 갑자
상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가뭄 끝에 비가 왔는데 그것이 도리어 물난리를 빚어 냈으니 너무도 불행한 일이다."
하니, 영상과 우상이 아뢰기를,
"양남(兩南)과 북관(北關)은 더욱 혹심하게 재해를 입었다고 합니다."
하였다. 대사간 김휘(金徽)가 아뢰기를,
"해마다 계속 흉년이 든 뒤끝에 수재(水災)가 또 혹심하니 하늘의 뜻이 두렵기만 합니다. 상께서 반성하며 조용히 살피신다면 어찌 이렇게 되도록 한 이유가 없겠습니까. 대간이 제궁가(諸宮家)에 관계된 일을 논하기만 하면 번번이 윤허를 해주려 하지 않으시는데, 이것은 성세(聖世)의 일이 못 됩니다. 옛날 당 대종(唐代宗)이 승평 공주(昇平公主)의 수애(水磑)를 혁파했었는데 승평은 곧 대종의 딸이었습니다. 공주가 혁파시키지 말 것을 눈물로 호소했지만 대종은 꼭 혁파시켜야 된다는 뜻으로 타이르면서 결국 혁파시켰었습니다. 대종 같은 보통 자질의 임금도 이런 일을 제대로 해 내었는데, 어찌 성명(聖明)한 전하께서 도리어 이보다 못하실 수 있단 말입니까. 성명하신 전하께서는 두려운 마음으로 살피셔야 합니다."
하니, 상이 답하지 않고 좌우를 돌아보며 다른 이야기를 하였다. 정유성(鄭維城)이 아뢰기를,
"아름다운 말을 살펴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재해를 당했을 때 수성(修省)하는 방법입니다. 김휘가 진달드린 말이 매우 옳은데도 끝내 응수조차 해 주려 하지 않으시니, 언로(言路)에 방해될까 염려스럽습니다."
하니, 상이 또 답하지 않았다.
사신은 논한다. 언로를 넓히고 임금의 덕을 보완하는 것은 대신의 책임이다. 상이 제궁가의 일에 대해서는 더욱 간언(諫言)을 따르지 않았던 만큼, 김휘가 말한 것이야말로 직분을 다했다고 할 만한데 묵묵히 답하지 않았다. 대신이 된 자가 일단 말머리를 꺼내놓고는 임금의 잘못을 인하여 바로잡아주지 못하였으니, 애석한 마음 금할 수 있겠는가.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호남에서 미곡을 바치고 면천(免賤)된 사비(寺婢)의 일에 관하여, 일찍이 등대(登對)했을 때 품정(稟定)하라는 분부가 계셨기 때문에 감히 품달드립니다." 하고, 조복양(趙復陽)은 아뢰기를, "근래 밖의 의논을 들어 보건대, 모두 믿음을 잃을까 걱정하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본도(本道)로 하여금 그가 바친 미곡을 도로 내주도록 하라. 그리고 혹시라도 다 써버렸다면 다른 미곡으로 대신 지급한다 해도 무슨 지장이 있겠는가." 하였다. 복양이 아뢰기를, "면역(免役)해 주는 것은 전에 품정(稟定)했던 대로 시행하고, 바친 미곡 중에서 약간 곡을 덜어내어 도로 내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태화와 정치화(鄭致和)가 일제히 아뢰기를, "그렇게 하는 것은 매우 부당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전에 품정했던 대로 처리하라." 하였다. 복양이 아뢰기를, "당초에 이미 면천해 주겠다고 약속했는데 이제 와서 허락하지 않는다면 믿음을 잃는 결과가 될까 염려됩니다. 미곡을 잃을지언정 믿음을 잃을 수는 없습니다."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그의 소원을 물어보게 한 뒤 면역을 시키거나 미곡을 내주거나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잘 알았다." 하였다. 태화가 또 아뢰기를, "상께서 즉위하신 후에 태봉(胎封)115) 의 석물(石物)을 즉시 더 설치해야 했는데, 신들이 고사(古事)를 잘 알지 못해 아직까지 거행하지 못했으니, 정말 흠전(欠典)이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태봉에 석물을 더 설치하는 것이 옛날의 규례(規例)인가?"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명종조(明宗朝)에 관원을 보내 수리한 일이 있었는데, 지금도 해조로 하여금 전례를 상고하여 거행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추수 때까지 기다렸다가 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완이 아뢰기를, "북로(北路)의 봉수(烽燧)가 단절되는 것이 늘 걱정인데, 이는 대체로 마천령(磨天嶺) 등 네 곳의 큰 영(嶺)이 높아서 구름에 덮여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고, 김좌명(金佐明)이 아뢰기를, "신이 들은 바에 의하면 회양(淮陽)과 금성(金城) 양 고을 사이에 하늘을 찌르는 산봉우리가 첩첩이 들어서 있어 운무(雲霧)가 늘 개이지 않고 있다 하는데, 봉화(烽火)가 끊어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봉수가 이런 상태라면 작은 걱정거리가 아니다. 자세히 살펴 변통하라고 양도 감사에게 분부하라."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5책 5권 39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337면
【분류】왕실-국왕(國王) / 왕실-종사(宗社) / 농업-전제(田制) / 역사-편사(編史) / 신분-천인(賤人) / 군사-통신(通信)
[註 115] 태봉(胎封) : 왕실의 태반(胎盤)을 묻어둔 곳임.
사신은 논한다. 언로를 넓히고 임금의 덕을 보완하는 것은 대신의 책임이다. 상이 제궁가의 일에 대해서는 더욱 간언(諫言)을 따르지 않았던 만큼, 김휘가 말한 것이야말로 직분을 다했다고 할 만한데 묵묵히 답하지 않았다. 대신이 된 자가 일단 말머리를 꺼내놓고는 임금의 잘못을 인하여 바로잡아주지 못하였으니, 애석한 마음 금할 수 있겠는가.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호남에서 미곡을 바치고 면천(免賤)된 사비(寺婢)의 일에 관하여, 일찍이 등대(登對)했을 때 품정(稟定)하라는 분부가 계셨기 때문에 감히 품달드립니다."
하고, 조복양(趙復陽)은 아뢰기를,
"근래 밖의 의논을 들어 보건대, 모두 믿음을 잃을까 걱정하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본도(本道)로 하여금 그가 바친 미곡을 도로 내주도록 하라. 그리고 혹시라도 다 써버렸다면 다른 미곡으로 대신 지급한다 해도 무슨 지장이 있겠는가."
하였다. 복양이 아뢰기를,
"면역(免役)해 주는 것은 전에 품정(稟定)했던 대로 시행하고, 바친 미곡 중에서 약간 곡을 덜어내어 도로 내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태화와 정치화(鄭致和)가 일제히 아뢰기를,
"그렇게 하는 것은 매우 부당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전에 품정했던 대로 처리하라."
하였다. 복양이 아뢰기를,
"당초에 이미 면천해 주겠다고 약속했는데 이제 와서 허락하지 않는다면 믿음을 잃는 결과가 될까 염려됩니다. 미곡을 잃을지언정 믿음을 잃을 수는 없습니다."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그의 소원을 물어보게 한 뒤 면역을 시키거나 미곡을 내주거나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잘 알았다."
하였다. 태화가 또 아뢰기를,
"상께서 즉위하신 후에 태봉(胎封)115) 의 석물(石物)을 즉시 더 설치해야 했는데, 신들이 고사(古事)를 잘 알지 못해 아직까지 거행하지 못했으니, 정말 흠전(欠典)이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태봉에 석물을 더 설치하는 것이 옛날의 규례(規例)인가?"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명종조(明宗朝)에 관원을 보내 수리한 일이 있었는데, 지금도 해조로 하여금 전례를 상고하여 거행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추수 때까지 기다렸다가 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완이 아뢰기를,
"북로(北路)의 봉수(烽燧)가 단절되는 것이 늘 걱정인데, 이는 대체로 마천령(磨天嶺) 등 네 곳의 큰 영(嶺)이 높아서 구름에 덮여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고, 김좌명(金佐明)이 아뢰기를,
"신이 들은 바에 의하면 회양(淮陽)과 금성(金城) 양 고을 사이에 하늘을 찌르는 산봉우리가 첩첩이 들어서 있어 운무(雲霧)가 늘 개이지 않고 있다 하는데, 봉화(烽火)가 끊어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봉수가 이런 상태라면 작은 걱정거리가 아니다. 자세히 살펴 변통하라고 양도 감사에게 분부하라."
하였다.
영부사 이경석(李景奭)이 상소해 체직을 청하면서 누누이 수천 언(言)을 아뢰었는데, 대체적으로 최유지(崔攸之)를 변호해 주는 내용이었다. 상이 답하기를,
"본말(本末)도 모르는 서필원(徐必遠)의 말에 대해 경이 어찌하여 과민하게 반응을 하며 인혐(引嫌)까지 함으로써 내 마음을 불안하게 만드는가. 더 이상 사직하지 말고 들어오라."
하고, 이어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전유(傳諭)토록 하였다.
호남에 큰물이 졌는데, 전주(全州) 등 7, 8개 고을이 더욱 혹심하게 재해를 입었다.
6월 24일 을축
집의 오두인(吳斗寅) 등이 논핵(論劾)하기를,
"서원 현감(西原縣監) 정기풍(鄭基豊)은 노쇠하여 극지(劇地)116) 에 적합하지 않고, 통진 현감(通津縣監) 이익(李翊)은 경악에 출입하던 신하로서 무단히 외방에 보임(補任)되었으니 정사(政事)의 체례(體例)에 어긋나는 점이 있습니다. 모두 체차시키소서."
하고, 이어 정관(政官)을 추고할 것을 청하니, 따랐다.
예조가 아뢰기를,
"오늘이 바로 입추절(立秋節)이니, 정전(正殿)에 나아가시는 일과 상선(常膳)을 회복하는 일, 금루(禁漏)117) 를 작동하는 일, 격고(擊鼓)118) 를 시행하는 일 등을 내일부터 거행하소서."
하니, 따랐다.
장령 이지무(李枝茂) 등이 장리(贓吏) 황헌(黃瀗)을 배소(配所)로 돌려보내도록 청하는 논계(論啓)를 정지시켰다. 이때 헌부가 이 일과 병행하여 윤선도(尹善道)의 위리(圍籬)를 철거토록 한 명을 환수할 것을 논하면서 몇 개월 동안 쟁집(爭執)하였으나 상이 끝내 윤허하지 않자 먼저 이 논계를 정지시킨 것이다.
6월 25일 병인
행 대사간 김휘(金徽) 등이 아뢰기를,
"호남을 진구할 때에 미곡을 바친 사비(寺婢)에 대해 어사(御史)가 이미 면천(免賤)해 주기로 약속했었습니다. 그런데 대신이 진달한 데 따라 단지 면역(免役)을 허락해 주거나 아니면 미곡을 도로 내주도록 결정하였는데, 신들은 삼가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당초 면천 사목(免賤事目) 중에 비자(婢子)가 거론되지는 않았습니다만, 명백하게 그런 일을 막는다는 조목도 없었고 보면, 어사가 미곡을 바치도록 허락한 것이야말로 형세상 당연한 일이었다고 할 것입니다. 위급할 때 이미 가져다 써 놓고는 조금 형세가 나아지자 그만 이런 행동을 보여 준다면 원근에서 듣고 뭐라고들 하겠습니까. 허다한 노비를 잃는 한이 있어도 백성에게 믿음을 잃어서는 안 되는 것인데, 더구나 1구(口)의 비(婢) 때문에 이처럼 이해를 따지는 일이 있었으니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왕자(王者)의 정치는 이래서는 안 됩니다. 미곡을 바친 비자를 어사가 장계한 대로 면천시켜 주도록 허락하소서."
하니, 따르지 않았다.
영남 진휼 어사 남구만(南九萬)이 들어와 청대(請對)하니, 상이 희정당(熙政堂)에서 인견(引見)하고 진휼한 일의 전말을 물어보고, 또 물고(物故)119) 된 자가 얼마나 되는지 하문하였는데, 구만이 2천여 인이나 된다고 하자, 상이 측은하게 여겼다. 구만이 아뢰기를,
"기민(飢民)의 식량으로 추가로 들여 온 곡물을 도로 바치게 하기가 어려운 형편이라서 아예 탕척(蕩滌)시켜 주는 것만 못하겠기에 신이 이미 절반을 감해 주도록 하였는데, 아직 감해지지 않은 것이 그래도 미곡 3천 석에 조곡(租穀) 5천 석이나 됩니다. 그런데 감사 민희(閔熙)가 신에게 말하기를 ‘반절을 탕감해 줄 바엔 차라리 통쾌하게 완전히 감해 주는 것이 낫겠다. 상평청에서 진휼하고 남은 곡식이 아직도 6천 석이나 있는데, 만약 3천∼4천 석을 내주기만 한다면, 그 나머지는 본영(本營)의 별회곡(別會穀)으로 보충해 보겠다.’ 하였습니다. 기민이 받은 곡식을 모두 탕척해 주소서."
하니, 상이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稟處)케 하였다. 대신이 그의 말대로 탕감해 줄 것을 청하니, 따랐다.
큰비가 그치지 않아 도성 안의 가옥이 무너지고 깔려 죽은 자도 많았는데, 호조에 명하여 각각 면포(綿布) 2필(匹)과 미곡 5두(斗)씩 주도록 하였다.
영부사 이경석(李景奭)이 또 상소하여 사직하니,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고 유시하였다.
좌의정 원두표(元斗杓)가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도당(都堂)에서 작성하는 홍문록(弘文錄)에는 원래 완의(完議)120) 해야 하는 규정이 없습니다. 근래의 일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윤두수(尹斗壽)가 정승으로 있을 때 그의 아들 윤훤(尹暄)이 기해년 도당록(都堂錄)에 참여되었고, 윤방(尹昉)이 정승으로 있을 때 그의 손자 윤지(尹墀)와 조카 윤순지(尹順之)가 갑자년 도당록에 참여되었고, 오윤겸(吳允謙)이 정승으로 있을 때 그의 사위 구봉서(具鳳瑞)가 정묘년 도당록에 참여되었고, 정태화(鄭太和)가 정승으로 있을 때 그의 아우 정만화(鄭萬和)가 정유년 도당록에 참여되었고, 신이 정승으로 있으면서도 사위 이민서(李敏叙)가 역시 도당록에 참여되었으니, 이것은 고금에 통행되는 규례라 할 것입니다. 이번 신의 아들 원만리(元萬里)가 도당록에 참여된 것에 대해서는 신 스스로 송구스러울 따름인데, 뜻밖에도 사정(私情)을 따랐다는 배척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어찌 신의 본정(本情)을 알고서 한 말이겠습니까. 그렇긴 하나 신의 직명(職名)을 깎으시어 사람의 말에 답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무 근거도 없는 서필원(徐必遠)의 말에 대해 경은 어찌하여 과민하게 반응하여 인혐까지 함으로써 내 마음을 불안하게 만드는가. 현재 가뭄과 홍수가 서로 잇따라 일어나고 온갖 변괴(變怪)가 발생하고 있는데, 숙덕(宿德) 원로인 경이 어떻게 작은 혐의 때문에 사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속히 상소하는 일을 중단하여 조야(朝野)의 기대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원두표가 전례(前例)까지 인용하면서 스스로 변명하려고 한 그 의도가 교묘하기도 하다마는 그 말은 공격하지 않아도 저절로 무너지게 되어 있다. 서필원이 상소한 내용을 보건대, 대체로 만리를 상신(相臣)의 아들이라고 배척하면서 본관록(本館錄)에도 끼이지 못했는데 도당록(都堂錄)에는 참여되었다는 것이었다. 모르겠다만, 윤훤(尹暄) 등 제인(諸人)도 모두 본관록에 끼이지도 못했는데 집안의 형세를 발판삼아 만리처럼 무턱대고 도당록에 참여되었던 사람이란 말인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는 두표가 사정(私情)을 따랐다는 이름을 면해 보려고 걸맞지도 않는 전례를 억지로 인용하면서 구차하고 아리송한 설로 상이 듣고 속게끔 하려 한 것이니, 그 교활한 정상이야말로 사정을 따른 죄보다도 훨씬 크다 할 것이다. 그런데도 상이 제대로 살피지 못한 채 그만 숙덕이니 원로니 하는 등의 말로 도리어 높여주는 비답을 내렸으니, 정말 애석한 일이다. 사정을 따른 죄는 두표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날 권점(圈點)에 참여했던 사람이라면 어떻게 그 책임을 면할 수 있겠는가. 만리가 궁액(宮掖)과 인척(姻戚)으로 연결되고 두표의 위세가 융성해지자 서로들 다투어 아첨하는 모습을 보이려고만 했을 뿐 수치스럽기 그지없다는 사실은 알지 못하였으니, 애석한 일이다. 두표가 일찍이 선조(先祖) 때에 병조 판서로 있으면서 선왕의 뜻이 융무(戎務)에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문득 뜻을 맞춰 호감을 사며 능력을 과시할 계책을 내어 총애를 굳히고 진출할 발판을 삼으려 하였었다. 그리하여 삼남(三南)에 영장(營將)을 설치할 것을 건의했던 것인데, 명분이야 군대를 훈련시킨다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아무 효과도 거두지 못한 채 백성만 병들게 함으로써 국가에 원망이 돌아가게 했었다. 그런데도 선왕께서는 수고했다고 여겨 가복(加卜)121) 토록 명하여 정승으로 삼았던 것인데, 급기야 정승이 되고 나서는 오로지 상의 의도를 점쳐 미리 비위를 맞추고 현능(賢能)한 인재들을 투기하고 질시하는 것만을 일삼았다. 그런데 여기에 또 그의 손자가 의빈(儀賓)122) 까지 되자 그 위세가 하늘을 찌를 듯해지면서 끝없이 탐욕스러운 행동을 자행하여 뇌물이 공공연히 행해지곤 하였다. 그런가 하면 요망한 첩(妾)에게 듬뿍 빠져 그녀를 부유하게 만들어 줄 심산으로 남의 노비와 토지를 약탈하여 욕심을 채워주었으며, 저택이 너무 사치스럽고 전원(田園)도 매우 광활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김자점(金自點)이 죽고 나자 또 다른 김자점이 나왔다.’고 하였다. 윤선도(尹善道)가 일찍이 선조(先朝) 때에 상소를 올려 두표를 논하기를 ‘그의 사람됨을 보건대, 재주는 많으나 덕은 적고, 이익을 좋아하여 의로움을 해치고, 험특하고 음흉하며, 성질이 사납고 꿍꿍이 셈을 품고 있다.’ 하였는데, 조금도 어김없이 그의 모습을 완전히 모사(模寫)해 내었다고 하겠다.
【태백산사고본】 5책 5권 40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338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역사-편사(編史) / 인물(人物)
[註 120] 완의(完議) : 의견의 완전 일치.[註 121] 가복(加卜) : 정승 후보자 외에 추가로 추천하는 것.[註 122] 의빈(儀賓) : 왕녀와 결혼한 부마 도위(駙馬都尉).
사신은 논한다. 원두표가 전례(前例)까지 인용하면서 스스로 변명하려고 한 그 의도가 교묘하기도 하다마는 그 말은 공격하지 않아도 저절로 무너지게 되어 있다. 서필원이 상소한 내용을 보건대, 대체로 만리를 상신(相臣)의 아들이라고 배척하면서 본관록(本館錄)에도 끼이지 못했는데 도당록(都堂錄)에는 참여되었다는 것이었다. 모르겠다만, 윤훤(尹暄) 등 제인(諸人)도 모두 본관록에 끼이지도 못했는데 집안의 형세를 발판삼아 만리처럼 무턱대고 도당록에 참여되었던 사람이란 말인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는 두표가 사정(私情)을 따랐다는 이름을 면해 보려고 걸맞지도 않는 전례를 억지로 인용하면서 구차하고 아리송한 설로 상이 듣고 속게끔 하려 한 것이니, 그 교활한 정상이야말로 사정을 따른 죄보다도 훨씬 크다 할 것이다. 그런데도 상이 제대로 살피지 못한 채 그만 숙덕이니 원로니 하는 등의 말로 도리어 높여주는 비답을 내렸으니, 정말 애석한 일이다. 사정을 따른 죄는 두표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날 권점(圈點)에 참여했던 사람이라면 어떻게 그 책임을 면할 수 있겠는가. 만리가 궁액(宮掖)과 인척(姻戚)으로 연결되고 두표의 위세가 융성해지자 서로들 다투어 아첨하는 모습을 보이려고만 했을 뿐 수치스럽기 그지없다는 사실은 알지 못하였으니, 애석한 일이다. 두표가 일찍이 선조(先祖) 때에 병조 판서로 있으면서 선왕의 뜻이 융무(戎務)에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문득 뜻을 맞춰 호감을 사며 능력을 과시할 계책을 내어 총애를 굳히고 진출할 발판을 삼으려 하였었다. 그리하여 삼남(三南)에 영장(營將)을 설치할 것을 건의했던 것인데, 명분이야 군대를 훈련시킨다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아무 효과도 거두지 못한 채 백성만 병들게 함으로써 국가에 원망이 돌아가게 했었다. 그런데도 선왕께서는 수고했다고 여겨 가복(加卜)121) 토록 명하여 정승으로 삼았던 것인데, 급기야 정승이 되고 나서는 오로지 상의 의도를 점쳐 미리 비위를 맞추고 현능(賢能)한 인재들을 투기하고 질시하는 것만을 일삼았다. 그런데 여기에 또 그의 손자가 의빈(儀賓)122) 까지 되자 그 위세가 하늘을 찌를 듯해지면서 끝없이 탐욕스러운 행동을 자행하여 뇌물이 공공연히 행해지곤 하였다. 그런가 하면 요망한 첩(妾)에게 듬뿍 빠져 그녀를 부유하게 만들어 줄 심산으로 남의 노비와 토지를 약탈하여 욕심을 채워주었으며, 저택이 너무 사치스럽고 전원(田園)도 매우 광활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김자점(金自點)이 죽고 나자 또 다른 김자점이 나왔다.’고 하였다. 윤선도(尹善道)가 일찍이 선조(先朝) 때에 상소를 올려 두표를 논하기를 ‘그의 사람됨을 보건대, 재주는 많으나 덕은 적고, 이익을 좋아하여 의로움을 해치고, 험특하고 음흉하며, 성질이 사납고 꿍꿍이 셈을 품고 있다.’ 하였는데, 조금도 어김없이 그의 모습을 완전히 모사(模寫)해 내었다고 하겠다.
6월 26일 정묘
기내(畿內)에 큰물이 져 물가의 인가가 무척 많이 떠내려가거나 침몰되었으며 벼곡식이 침수되어 손상된 것이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기청제(祈晴祭)를 사대문(四大門)에서 설행(設行)하였다.
정언 이단하(李端夏)가 소장을 진달하여 체직을 청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단하는 고(故) 대제학 이식(李植)의 아들인데, 중년에 마음병을 얻어 수년 동안 앓다가 만년에야 등제(登第)하였다. 사람됨이 전아(典雅)하고 소탈했으나 사무에는 전혀 어두웠는데 기성(騎省)123) 의 낭관(郞官)을 거쳐 이 직책에 임명되었다가 이때에 이르러 소장을 진달하여 면직을 청한 것이다. 그런데 종이 가득 누누이 말한 것 모두가 그의 병에 관한 기록뿐이었는데 끝 부분에 가서 ‘성학(聖學)을 근실히 하는 것이 정치의 근본이다.’는 몇 줄의 말만 남겼으므로 이를 본 자들이 모두 말을 전하며 웃었다.
【태백산사고본】 5책 5권 41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338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역사-편사(編史) / 인물(人物)
[註 123] 기성(騎省) : 병조.
사신은 논한다. 단하는 고(故) 대제학 이식(李植)의 아들인데, 중년에 마음병을 얻어 수년 동안 앓다가 만년에야 등제(登第)하였다. 사람됨이 전아(典雅)하고 소탈했으나 사무에는 전혀 어두웠는데 기성(騎省)123) 의 낭관(郞官)을 거쳐 이 직책에 임명되었다가 이때에 이르러 소장을 진달하여 면직을 청한 것이다. 그런데 종이 가득 누누이 말한 것 모두가 그의 병에 관한 기록뿐이었는데 끝 부분에 가서 ‘성학(聖學)을 근실히 하는 것이 정치의 근본이다.’는 몇 줄의 말만 남겼으므로 이를 본 자들이 모두 말을 전하며 웃었다.
6월 28일 기사
태백(太白)이 밤에 동정성(東井星) 안으로 들어갔다.
6월 29일 경오
심유(沈攸)·이숙(李䎘)을 정언으로, 최치옹(崔致翁)을 봉교로, 권상구(權尙矩)를 가선 대부로 삼았다.
사신은 논한다. 치옹은 경조(輕躁)하고 부박(浮薄)하여 모양만 보아도 한림(翰林)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는데, 이광직(李光稷)이 그와 친했던 까닭에 극력 추천한 덕분으로 끼이게 되었으므로 물의(物議)에 비웃음을 당했다. 그러다가 이번에 또 한원(翰苑)의 옛 규정을 무시한 채 차례를 뛰어넘어 봉교로 승진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놀랍게 여겼다. 상구는 일찍이 전주 판관(全州判官)으로 있을 때 적(賊)을 체포하여 자계(資階)가 오르면서 담양(潭陽)으로 옮겨 임명되었는데, 여기에서 또 적을 체포하여 그 공로로 가선 대부에 오르자, 물의가 모두 조정에서 작상(爵賞)을 너무 함부로 시행한다고 비난하였다. 그 뒤 얼마 있다가 헌부가 논박하여 바로잡아 가선 대부의 자계를 환수하고 그 대신 상으로 숙마(熟馬) 1필(匹)을 지급하였다.
【태백산사고본】 5책 5권 41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338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왕실-사급(賜給) / 사법-치안(治安) / 역사-편사(編史) / 인물(人物)
사신은 논한다. 치옹은 경조(輕躁)하고 부박(浮薄)하여 모양만 보아도 한림(翰林)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는데, 이광직(李光稷)이 그와 친했던 까닭에 극력 추천한 덕분으로 끼이게 되었으므로 물의(物議)에 비웃음을 당했다. 그러다가 이번에 또 한원(翰苑)의 옛 규정을 무시한 채 차례를 뛰어넘어 봉교로 승진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놀랍게 여겼다. 상구는 일찍이 전주 판관(全州判官)으로 있을 때 적(賊)을 체포하여 자계(資階)가 오르면서 담양(潭陽)으로 옮겨 임명되었는데, 여기에서 또 적을 체포하여 그 공로로 가선 대부에 오르자, 물의가 모두 조정에서 작상(爵賞)을 너무 함부로 시행한다고 비난하였다. 그 뒤 얼마 있다가 헌부가 논박하여 바로잡아 가선 대부의 자계를 환수하고 그 대신 상으로 숙마(熟馬) 1필(匹)을 지급하였다.
영부사 이경석(李景奭)이 상소하여 사직하니, 상이 너그럽게 비답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영남의 기민(飢民)에게 나누어주어 진휼한 곡물을 모두 견감케 하였는데, 어사(御史) 남구만(南九萬)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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