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5권, 현종 3년 1662년 7월

싸라리리 2025. 12. 9.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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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일 임신

태백(太白)이 낮에 나타났다.

 

헌납 김익렴(金益廉)이 소장을 진달하여 사직하고, 또 아뢰기를,
"죄인 윤선도(尹善道)를 심리(審理) 대상에 포함시켰는데, 전하께서는 선도에게 심리해 주어야 할 무슨 원한이나 신구(伸救)해 주어야 할 무슨 억울함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대각의 신하들이 이 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그저 위리(圍籬)를 철거토록 한 것에 대해서만 논하고 있으니, 일의 선후(先後)를 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장령 송시철(宋時喆)과 지평 이단석(李端錫)이 김익렴이 상소한 내용을 이유로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리고, 장령 이지무(李枝茂)도 익렴의 상소 내용을 이유로 인피하였다. 지무는 심리할 때를 당하여 이미 죄의 등급을 감해 주어도 무방하다는 설을 가지고 탑전(榻前)에서 진달했었는데, 그 뒤 헌관(憲官)이 되고 나서는 또 위리(圍籬)를 철거토록 한 명을 환수하라고 청하였다. 그러다가 이번에 또 배척을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자 사람들이 모두 그의 마음에 주견이 없는 것을 비웃었다. 사간 정계주(鄭繼胄)는 인피하기를,
"빈청(賓廳)에서 회의할 때 신은 이미 남의 뒤를 따라 윤선도의 위리를 철거하자는 논에 참여했으면서 흐리멍덩하여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제대로 배척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니 지금 이 논에 대해서 어떻게 감히 태연스럽게 처치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헌납 김익렴은 인피하기를,
"선도를 북쪽 맨 끝에 안치(安置)시키는 것만으로도 국론(國論)은 이미 신장되었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 위리까지 시킨 것이 당초 특명에서 나온 것이고 보면, 몇 년쯤 지난 뒤에 성상의 뜻을 분명히 보여주시면서 그의 위리를 철거케 한다 해도 안 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심리(審理)할 때만은 이 사람을 원통하고 억울한 부류들 속에 같이 섞여 들어가게 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더구나 그를 완전히 석방하여 집에 돌아가 죽을 수 있게 해 주자고 요청한 일이 위리를 철거토록 명을 내린 후에 나왔고 보면, 틈을 엿보고서 요행을 바란 그 정상이 너무도 가증스럽기만 합니다. 대각의 신하된 몸으로 어떻게 그가 노쇠했다는 이유로 용서해 주자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신의 본래 의도는 이러한 데 불과할 뿐이니, 제신(諸臣)을 비난하고 배척할 무슨 깊은 의도가 있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그런데도 제신이 이해하지 못하고 서로 잇따라 인피하였습니다. 신이 어떻게 감히 태연스럽게 그들을 처치하겠습니까."
하고, 모두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정언 이숙은 인피하기를,
"신이 호남에 사명(使命)을 받들고 가게 되었을 때, 진구할 곡식을 마련하기가 어려우리라고 미리부터 걱정이 된 나머지, 사노비(寺奴婢)로부터 미곡을 받고 면천(免賤)시켜 줄 일을 탑전(榻前)에서 품달드렸더니, 성상께서 그때 가서 계품(啓稟)하라고 유시하셨었습니다. 그뒤 신이 도내(道內)에 두루 물어본 결과 가까스로 약간의 해당자를 구했는데, 내수사와 수진궁(壽進宮)에 소속된 자를 제외한 사노비 몇 사람이 미곡 50곡을 납부하였기에 면천을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노(奴)와 비(婢)를 구별해야 한다는 주장이 황정(荒政)을 마친 뒤에 나왔는데, 이는 신이 직무를 형편없이 수행한 탓으로서 결과적으로 성조(聖朝)로 하여금 먼 지방의 백성들에게 믿음을 잃게 하고 말았으니, 이것이야말로 작은 일이 아닌 것입니다. 신은 이 일이 있은 뒤로부터 밥을 먹을 때나 쉴 때나 편안한 때가 없습니다. 게다가 월과(月課)를 제진(製進)하지 못한 탓으로 현재 추고 대상에 들어 있으니, 이쪽으로 보나 저쪽으로 보나 결단코 구차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가 어렵습니다."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대사간 김휘(金徽)는 인피하기를,
"김익렴(金益廉)이 말한 것 가운데 ‘틈을 엿보고서 요행을 바란 그 정상이 너무도 가증스럽기만 하다.’는 내용이 있었는데 이것은 전 참찬 민응형(閔應亨)을 가리켜 배척한 것이고, 끝 부분에 또 말하기를 ‘역시 시비를 분명히 말한 것이 없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대관(臺官)을 비난하며 배척한 말입니다.
당초 응형이 윤선도의 석방을 청했던 뜻을 살피건대, 80세된 나이로 먼 변방에서 죽게 된 것을 애처롭게 여겨서 그랬던 것에 불과할 뿐이니, 틈을 엿보고서 요행을 바랬다고 하는 것이야말로 실정에 벗어난 말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익렴이 어찌하여 기구(耆舊)의 신하에게 이토록까지 모욕을 가한단 말입니까. 설령 신이 그날 입시했었다 하더라도 필시 응형을 비난하고 배척할 마음이 없었을 것인데, 어떻게 익렴의 여론(餘論)을 주워모아 이제 와서 추후로 응형을 허물하겠습니까. 신이 이미 말하지 않았다는 배척을 받은 이상 여러 관원을 처치하기가 형세상 어렵습니다."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옥당이 사직하는 상소를 올리고 난 다음 처치하여 이지무·이숙·김휘는 체차시키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출사시키기를 청하니, 따랐다.

 

황해 감사 홍처윤(洪處尹)이 치계하였다.
"도내의 평산부(平山府) 음촌(陰村) 사방(四坊)에서 수천여 호(戶)가 개간한 전지(田地)는 모두 계묘년의 양안(量案)124)  에 들어가 있으므로 어떤 조그마한 전지도 탁지(度支)125)  에서 세금을 거두어들이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역가(逆家)의 노자(奴子)가 궁가(宮家)에 속여 알린 탓으로 거의 1 천여 호가 날마다 경작하는 전지가 모조리 궁가에 의해 점유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도 부사 윤겸(尹㻩)이 영문(營門)에 보고하지도 않고서 곧바로 성책(成冊)하여 해조에 보냈으니, 놀랍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부(府)의 해리(該吏)는 이미 잡아들여 엄히 형신(刑訊)하였습니다. 감히 눈으로 본 폐단을 진달드리니, 해조로 하여금 복계(覆啓)하여 처치하게 하소서."

 

영부사 이경석(李景奭)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죽을 날이 가까워지자 날로 쇠약해져 영위(營衛)126)  가 고갈되었으니, 본직과 겸대직을 속히 면하게 해 주소서."
하니, 상이 너그럽게 비답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이조 참판 이상진(李尙眞)이 소장을 진달하여 사직하니, 허락하였다.

 

7월 4일 을해

민정중(閔鼎重)을 대사성으로, 여이재(呂爾載)·홍처대(洪處大)를 동지 정사와 부사로, 이단석(李端錫)을 서장관으로, 김수항(金壽恒)을 이조 참판으로, 남용익(南龍翼)을 도승지로 삼았다.

 

헌납 김익렴(金益廉)이 직에 나온 뒤에 인피하였는데 그 대략에,
"스스로 외로이 충성을 바치고 있다고 믿고서 사람들이 흘겨보는 것도 모른 체하였는데, 삼가 옥당에 내리신 비답을 보건대, 사지(辭旨)가 준엄하여 신을 경망스럽고 괴이하다고 배척하셨습니다. 남이 말하지 않는 것을 신이 말했으니 경망스러운 건 사실입니다마는, 신이 논한 것이 시비를 밝히고 사설(邪說)을 막기 위한 것이었고 보면, 아마도 성상께서 어리석은 신을 박하게 여기고 염증을 내신 나머지 잘못 하어(下語)하신 결과를 면치 못하게 될까 염려됩니다. 신이 이미 엄한 분부를 받들었으니, 어떻게 감히 그대로 있겠습니까."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집의 오두인(吳斗寅)과 장령 송시철(宋時喆)은 인피하기를,
"전에 이미 익렴으로부터 배척을 받았으니, 감히 처치할 수 없습니다."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정언 심유(沈攸)는 인피하기를,
"담사(禫祀)를 끝내는 달이라서 월과(月課) 문자에 염두가 미칠 겨를이 없었던 탓으로 미처 제정(製呈)하지 못해 이미 추고받을 대상에 들어 있으니, 결코 그대로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부제학 조복양(趙復陽) 등이 처치하여 심유는 체차시키고 나머지는 모두 출사시키기를 청하니, 따랐다.

 

병조 판서 허적(許積)이 청대(請對)하자 상이 희정당(熙政堂)에서 인견하였는데, 좌승지 한진기(韓震琦)가 입시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신이 정사(政事)에 임하여 잘못한 일이 있습니다. 순천(順天)의 영장(營將) 이필(李泌)은 80세된 노친(老親)이 있는 데다가 일찍이 두 곳의 영장을 거쳤으므로 혼자만 수고한다는 탄식이 없지 않을 텐데 대신도 그를 체차시켜야 한다고 했고, 또 전 현감 이창주(李昌胄)를 영장으로 삼았는데 대신이 부적격자라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모두 개정하여 체차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박시한(朴始漢)이야말로 쓸 만한 무부(武夫)인데 저쪽 청(淸)나라와의 관계상 구애되는 점이 있기 때문에 현재 혁직(革職) 상태로 머물러 있으면서 속절없이 늙어만 가고 있으니 애석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문신 가운데 김휘(金徽) 같은 사람들도 모두 이미 수용(收用)하였으니, 박시한도 똑같이 수용하도록 하라."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무신은 더욱 인재가 부족해서 선전관(宣傳官)에 궐원이 생겨도 채울 길이 없으니 별도의 조치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대신이 앞으로 품달드리겠습니다만, 널리 무사를 뽑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의 뜻 역시 정시(庭試)를 설행했으면 한다."
하였다.

 

우의정 정유성(鄭維城)이 상차하여 사직하고, 또 이경석(李景奭)을 변호하며 ‘마구 준엄하게 배척을 받고 억지로 죄명(罪名)을 뒤집어 쓴 관계로 장차 향리로 돌아가려 하니 나라가 텅 비게 되었다는 탄식을 면할 수가 없게 되었다.’ 하였다. 그리고는 심지어 경인년에 사문(査問)하는 칙사가 왔을 당시의 일까지 인용하면서 그가 홀로 떠맡고 나섰을 때의 사기(辭氣)가 늠연(凛然)했던 것을 찬양하고, 이어 그를 예우하여 만류하도록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영부사가 허탄한 광언(狂言) 때문에 끝내 교외로 나가기까지 하였으므로 걱정스러운 마음 그지없다. 듣건대 마음을 결정하고 시골로 내려가려 한다 하니, 나는 너무도 놀랍기만 하다. 내가 다시 성의껏 만류할 것이니, 경은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삼가 살피건대, 최유지(崔攸之)가 비루한 인물이라서 옥당의 청선(淸選)에 결코 적격자가 못 된다는 것은 온 세상이 다 알고 있는데 이를 모르고 있는 자는 오직 이경석 한 사람뿐이라고 하겠다. 입으로 내놓은 말은 담벼락에도 귀가 있어 듣는 법인데, 더구나 경석은 사람을 대할 때마다 늘 유지를 신구(伸救)하였으니, 누가 또한 듣지 못했겠는가. 그런데 정유성이 그만을 친애(親愛)한 나머지 근거도 없는 말을 장황하게 늘어놓으면서 군부(君父)를 기만하였으니, 그 정상이 참으로 가증스럽다. 가령 그 당시 조정에 한 가닥 공론(公論)이라도 조금 있었던들 어찌 감히 이토록까지 거리낌없이 굴었겠는가. 아, 이런 짓이야말로 중급 정도가 못 되는 사람이라도 하지 않을 것이니, 위태로운 상황을 부지(扶持)할 책임을 어떻게 유성에게 맡길 수 있겠는가.

 

7월 6일 정축

이상진(李尙眞)을 대사간으로, 박승건(朴承健)을 장령으로, 이단상(李端相)·남구만(南九萬)을 응교로, 김만균(金萬均)을 수찬으로, 윤심(尹深)을 정언으로, 민유중(閔維重)을 이조 정랑으로 삼았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면유(面諭)할 일이 있으니 내일 아침에 들어오라는 뜻으로 사관(史官)을 보내 이 영부사에게 전하라."
하였다. 이튿날 이경석(李景奭)이 입궐하니, 상이 희정당(熙政堂)에서 인견(引見)하고 꽤나 근후하게 위로하며 도성 안으로 들어오라고 권하였다. 이에 경석이 아뢰기를,
"어찌 감히 명하신 대로 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이어 나아가 아뢰기를,
"도당록(都堂錄)을 작성할 때 상피(相避)해야 한다는 규정은 옛날부터 있지 않았는데, 오늘날의 세도(世道)가 이처럼 야박해졌으니, 참으로 탄식할 일입니다. 서필원(徐必遠)의 말이 직절(直截)한 면은 있습니다만 폐단을 낳게 되는 결과를 면치는 못할 것입니다. 원만리(元萬里) 등의 무리가 아깝기는 합니다만, 삼공(三公)과 다시 의논하여 품정(稟定)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만리 등을 모두 버려야 한단 말인가?"
하였다. 경석이 아뢰기를,
"지금 옥당에 의망(擬望)하여 차임(差任)한다 하더라도 어찌 공무를 집행하려 하겠습니까.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에게 물어보면 필시 공(公)에 입각한 말을 해 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옳다."
하였다. 경석이 또 아뢰기를,
"국가는 인재를 중히 여겨야 합니다. 호남의 경우 충신과 의사(義士)가 예로부터 배출되었는데 그 기풍이 지금도 남아 있어 온통 의열(義烈)의 기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리고 서도(西道)와 북도(北道)는 무사의 부고(府庫)라 할 만하니, 재주에 따라 조용(調用)한다면 실로 격려하고 권장하는 방법이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두드러지게 뛰어나 쓸 만한 사람들을 찾아 계문(啓聞)하라는 뜻으로 서·북 양도의 감사에게 하유하라."
하였다.
삼가 살피건대, 이경석이 대신의 신분으로 일단 서필원으로부터 준엄하게 배척을 받았고 보면 오로지 문을 닫고 들어앉아 스스로 반성하면서 공의(公議)에 사과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여섯 차례에 걸쳐 진달드린 차자의 말이 대부분 두서가 없었음은 물론, 정유성이 말해 준 덕택에 임금 앞에 가까이 나오게 되었을 때에도 허물을 자책할 생각은 하지도 않고 거꾸로 송시열 등에게 물어보라고 청함으로써 은근히 최유지가 옥당에 임명될 수 있도록 기대하는 마음을 품었으니, 너무도 구차스럽다 하겠다.

 

7월 7일 무인

황해 감사 홍처윤(洪處尹)이 목격한 참상에 대해 치계하기를,
"도내의 재령(載寧)·신천(信川)·서흥(瑞興)·신계(新溪) 등 고을에 너무도 참혹하게 수재(水災)가 발생하였는데, 평지가 혹 한 길남짓이나 잠기고 벼곡식이 온통 결딴났으며 민가가 많이 떠내려 갔습니다."
하니, 물에 빠져 죽은 사람 등에게 휼전(恤典)을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박세당(朴世堂)을 정언으로 삼았다.

 

7월 13일 갑신

박정(朴烶)을 지평으로, 남용익(南龍翼)을 승문원 제조로 삼았다.

 

상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원두표(元斗杓)가 상의 건강을 물으니, 상이 이르기를,
"눈꺼풀이 빨갛게 무르고 습창(濕瘡)도 심하다."
하자, 두표가 아뢰기를,
"습창은 온천 물에 목욕하시면 필시 효험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어 양남(兩南) 진휼 어사의 장계(狀啓)를 내주고 홍명하(洪命夏)에게 읽게 하였는데, 명하가 읽기를 마치자, 상이 이르기를,
"오정언(吳廷彦) 같은 자는 미관 말직의 신분인데 그에 대한 포계(褒啓)가 누차 올라 왔으니 가상하다."
하니,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성상께서 그의 성명을 기억하셨다가 발탁해 임용하시면 이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족히 용동(聳動)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밀양(密陽)과 상주(尙州)의 두 수령이 가장 공로가 뚜렷한 듯한데 어떤 상을 주어야 좋겠는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가자(加資)하는 것은 너무 지나칠 듯싶습니다."
하자, 상이 승지에게 명하여 이지온(李之馧)과 이성기(李聖基)에게 각각 숙마(熟馬) 1필(匹)씩 하사하는 것으로 써서 판부(判付)하게 하였다. 두표가 아뢰기를,
"쓸 만한 무사가 아주 적습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무예를 조금 느슨하게 하는 대신 강(講)하는 규정을 강화하면 쓸 만한 사람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고 합니다만, 신의 생각은 다릅니다. 무사는 응당 힘과 기운을 첫째로 삼아야 하는데, 어떻게 무예를 쉴 수 있겠습니까. 일찍이 인조조(仁祖朝) 때 신경진(申景禛)과 이서(李曙) 등에게 명하여 무예를 권장하게 한 결과 상당히 많은 인재를 얻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공판도 그때의 일을 눈으로 보았던가?" 【이때 이완이 공조 판서였다.】 하였다. 대답하기를, "그때 권무청(勸武廳)이라 이름하고 무사를 가려 무예를 단련시켰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도 그때처럼 하도록 하라." 하였다.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근래 인재가 부족한 까닭에 선전관(宣傳官)에 결원이 생겨도 의망(擬望)할 만한 사람이 없으니 안타깝습니다." 하니, 두표가 눈을 부릅뜨고 큰 소리로 아뢰기를, "이것은 그동안 병판을 역임한 자들이 잘못했기 때문입니다. 나라에 기강이 있다면 어떻게 그들이 죄를 면할 수 있겠습니까. 병판으로 있는 자가 미리부터 배양해 놓고 쓸 때에 가서 조발(調發)해야 할 것인데, 어떻게 인재가 부족하다고 진달드릴 수 있단 말입니까. 오늘날 무사들을 대우하는 것이 너무도 야박합니다. 그리하여 비록 무변(武弁)의 자제들이라 하더라도 문과(文科)에 올라서고 나면 다른 사람들보다도 더 심하게 무사들을 짓밟는데, 무사가 의욕을 잃는 이유가 미상불 여기에 말미암은 것입니다. 재변이 중첩해서 일어나는 이때에 무비(武備)가 이토록 허술하기만 하니 염려스럽습니다. 그리고 훈련 도감의 중군(中軍) 이수창(李壽昌)을 외임(外任)127)  에 임명해 놓고도 오래도록 교대할 인물을 내지 못했는데, 이는 적합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정부현(鄭傅賢)을 후임자로 삼고 싶은데 현재 고신(告身)을 빼앗긴 상태라서 계하(啓下)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정부현의 직첩(職牒)을 도로 내주도록 하라." 하였다. 두표가 아뢰기를, "이수창을 그대로 머물러 있게 계청했어야 마땅한데, 안마(鞍馬)128)  가 다 떨어질 정도로 오래 서울에만 있었으니, 줄곧 여기에만 머물려 둘 수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저번에 옥당이 면세전(免稅田)을 혁파하고 직전제(職田制)를 부활시킬 일을 계달(啓達)했었는데, 오늘 여러 재신(宰臣)이 입시했으니, 품정(稟定)토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직전제를 부활시키는 것과 면세전을 혁파하는 것은 본래 성격이 다른 일인데 왜 뒤섞어 말하는가?" 하였다. 홍명하가 아뢰기를, "궁가(宮家)의 면세전을 보건대, 1천 4백 결(結)이나 되는 곳도 있는데, 요즘 올리는 장소(章疏)마다 모두 이 일을 언급하고 있으니, 듣고만 있기에도 매우 괴롭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지 않고 짜증내는 기색이 역연하였는데, 이내 호조의 회계(回啓) 1통을 내주며 이르기를, "이 계사는 너무도 근거가 없다. 절수(折受)한 선후(先後)나 사리의 곡직(曲直)은 따지지도 않고 그저 내 준 것만을 주안점으로 삼고 있는데, 어떻게 감히 이럴 수 있단 말인가. 회계한 당상을 먼저 파직시킨 뒤에 추고하라." 하였다. 호조 참판 서원리(徐元履)가 전석(前席)에 입시했다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물러나갔다. 태화가 아뢰기를, "설령 회계에 착오가 있었다 하더라도 궁가(宮家)의 일에 관계되어 중벌(重罰)을 당하기까지 한다면, 먼 외방에서 보고 듣는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의아해 할 것이니, 성덕(聖德)에 누가 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파직하라는 명을 환수하소서." 하고, 두표와 유성도 서로 잇따라 진달드렸으나, 상이 답하지 않았다. 삼공이 일시에 일어나 절하고 청하기를, "신들이 간절하게 진달드리는데도 끝내 윤허하지 않으실 경우, 사람들이 필시 말하기를 ‘궁가에 관계된 일로 서원리를 파직시켰는데 삼공이 극력 간쟁했어도 되지 않았다.’고 할 것이니, 그렇게 되면 처음부터 진달드리지 않았던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 그 명을 환수한다면 어떻게 뒷날을 징계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태화가 또 아뢰기를, "이 일마저 신들의 요청을 들어주시지 않는다면 신들은 정말 면목이 없게 됩니다." 하고, 조복양(趙復陽)이 아뢰기를, "삼공의 말을 쾌히 따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한참 깊이 생각한 뒤에 이르기를, "대신의 말이 이러하니, 파직시키지는 말고 추고만 하라." 하였다. 이에 앞서 숙정(淑靜)·숙안(淑安) 두 공주가 계하(啓下)된 공사(公事)라는 핑계를 대고 신천(信川)·재령(載寧)·평산(平山) 등지의 민전(民田)을 불법으로 탈취했는데, 평산 부사 윤겸(尹㻩)이 공갈 협박하는 말에 겁먹은 나머지 아첨할 목적으로 꾀를 내어 허다한 민전을 모조리 궁가의 소속으로 만들었으므로 백성들이 생업을 잃고 원망하는 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이에 본도 감사 홍처윤(洪處尹)이 분개함을 금하지 못해 사유를 갖추어 치계(馳啓)하자 호조에 계하(啓下)하였다. 호조 참판 서원리(徐元履)와 참의 홍처후(洪處厚)가 매우 원통한 민사(民事)라고 회계(回啓)하면서 이정두(李廷枓)와 임전(林荃)이 서로 짜고 악행을 저지르며 문기(文記)를 위조한 정상을 낱낱이 진달드리고, 또 허다한 화전(火田)을 일구어 경작하여 먹고 산 지 30년에 이른 것도 있으니 주인없는 진전(陳田)으로 논할 수는 없다는 것과 감영(監營) 소속의 화전에서 거두어들이는 세금 역시 중대한 관계가 있는 만큼 둘 다 내주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진달드렸기 때문에, 상이 진노하여 이렇게 미안한 분부를 내리게 되었던 것이었다.  정치화(鄭致和)가 아뢰기를, "신이 호조에 있으면서 잘못 회계한 죄를 지은 적이 있었는데 지금까지도 황송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신이 이번 일을 회계할 때에 혐의가 있어 동참하지는 못하였습니다만, 같이 끼어 듣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으니, 서원리와 같이 추고를 받게 해주소서." 하니, 상이 답하지 않았다. 이어 대신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서원리가 규례(規例)를 몰라서 그런 것인가?" 하니, 두표가 아뢰기를, "원리가 규례를 모르지는 않을 것인데, 요즘들어 연소한 무리가 모두 ‘궁가에 관계된 일은 곡직(曲直)을 따질 것 없이 백성들에게 내 주어야 마땅하다.’고 하기 때문에, 원리의 말이 자연 이런 결과를 면치 못하게 된 것입니다." 하였다. 원두표가 또 아뢰기를, "이시술(李時術)의 집에서 뇌물로 준 물건이 무수한데 집을 팔기까지 했는데도 다 갚지 못하였다 합니다. 이전에 조신(朝臣)이 이런 환란을 당했을 경우에는 으레 약간의 물품을 지급해 주곤 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예전대로 지급토록 하라." 하였다. 정치화가 5백 금(金)을 지급할 것을 청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두표는 전석(前席)에서 말할 때마다 두서가 없었고 거만하기 짝이 없었으며 제신(諸臣)을 곤욕스럽게 하면서 참견하지 않는 곳이 없었다. 무사를 배양하지 못한 책임을 전후의 병판(兵判)들에게 떠넘기려 하였는데 이는 그의 의도가 음험한 것을 보여주는 곳이요, 서원리가 회계한 것을 연소배의 의향이라고 하면서 시기를 틈타 모함하려고 꾀했으니 이는 유감을 푸는 동시에 총애를 굳히려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었다. 심지어 무장(武將)의 안마(鞍馬)가 너절해졌다는 설까지 내놓은 것은 비루하고 패려하기 그지없는데, 그는 장차 이수창(李壽昌)으로 하여금 제멋대로 탐람한 행동을 하여 제몸을 살찌우게 하려고 한 것인가. 삼사(三司)의 신하들이 귀로 듣고 눈으로 보면서도 그의 기세를 두려워한 나머지 입을 꾹 다문 채 물러났으므로 식자들이 한탄하였다.


【태백산사고본】 5책 5권 43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339면
【분류】왕실-국왕(國王) / 왕실-사급(賜給) / 인사-관리(管理) / 인사-선발(選拔)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재정-전세(田稅) / 사법-탄핵(彈劾) / 농업-전제(田制)


[註 127] 외임(外任) : 경상 우병사임.[註 128] 안마(鞍馬) : 말 안장.
하였다. 대답하기를,
"그때 권무청(勸武廳)이라 이름하고 무사를 가려 무예를 단련시켰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도 그때처럼 하도록 하라."
하였다.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근래 인재가 부족한 까닭에 선전관(宣傳官)에 결원이 생겨도 의망(擬望)할 만한 사람이 없으니 안타깝습니다."
하니, 두표가 눈을 부릅뜨고 큰 소리로 아뢰기를,
"이것은 그동안 병판을 역임한 자들이 잘못했기 때문입니다. 나라에 기강이 있다면 어떻게 그들이 죄를 면할 수 있겠습니까. 병판으로 있는 자가 미리부터 배양해 놓고 쓸 때에 가서 조발(調發)해야 할 것인데, 어떻게 인재가 부족하다고 진달드릴 수 있단 말입니까. 오늘날 무사들을 대우하는 것이 너무도 야박합니다. 그리하여 비록 무변(武弁)의 자제들이라 하더라도 문과(文科)에 올라서고 나면 다른 사람들보다도 더 심하게 무사들을 짓밟는데, 무사가 의욕을 잃는 이유가 미상불 여기에 말미암은 것입니다. 재변이 중첩해서 일어나는 이때에 무비(武備)가 이토록 허술하기만 하니 염려스럽습니다.
그리고 훈련 도감의 중군(中軍) 이수창(李壽昌)을 외임(外任)127)  에 임명해 놓고도 오래도록 교대할 인물을 내지 못했는데, 이는 적합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정부현(鄭傅賢)을 후임자로 삼고 싶은데 현재 고신(告身)을 빼앗긴 상태라서 계하(啓下)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정부현의 직첩(職牒)을 도로 내주도록 하라."
하였다. 두표가 아뢰기를,
"이수창을 그대로 머물러 있게 계청했어야 마땅한데, 안마(鞍馬)128)  가 다 떨어질 정도로 오래 서울에만 있었으니, 줄곧 여기에만 머물려 둘 수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저번에 옥당이 면세전(免稅田)을 혁파하고 직전제(職田制)를 부활시킬 일을 계달(啓達)했었는데, 오늘 여러 재신(宰臣)이 입시했으니, 품정(稟定)토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직전제를 부활시키는 것과 면세전을 혁파하는 것은 본래 성격이 다른 일인데 왜 뒤섞어 말하는가?"
하였다. 홍명하가 아뢰기를,
"궁가(宮家)의 면세전을 보건대, 1천 4백 결(結)이나 되는 곳도 있는데, 요즘 올리는 장소(章疏)마다 모두 이 일을 언급하고 있으니, 듣고만 있기에도 매우 괴롭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지 않고 짜증내는 기색이 역연하였는데, 이내 호조의 회계(回啓) 1통을 내주며 이르기를,
"이 계사는 너무도 근거가 없다. 절수(折受)한 선후(先後)나 사리의 곡직(曲直)은 따지지도 않고 그저 내 준 것만을 주안점으로 삼고 있는데, 어떻게 감히 이럴 수 있단 말인가. 회계한 당상을 먼저 파직시킨 뒤에 추고하라."
하였다. 호조 참판 서원리(徐元履)가 전석(前席)에 입시했다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물러나갔다. 태화가 아뢰기를,
"설령 회계에 착오가 있었다 하더라도 궁가(宮家)의 일에 관계되어 중벌(重罰)을 당하기까지 한다면, 먼 외방에서 보고 듣는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의아해 할 것이니, 성덕(聖德)에 누가 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파직하라는 명을 환수하소서."
하고, 두표와 유성도 서로 잇따라 진달드렸으나, 상이 답하지 않았다. 삼공이 일시에 일어나 절하고 청하기를,
"신들이 간절하게 진달드리는데도 끝내 윤허하지 않으실 경우, 사람들이 필시 말하기를 ‘궁가에 관계된 일로 서원리를 파직시켰는데 삼공이 극력 간쟁했어도 되지 않았다.’고 할 것이니, 그렇게 되면 처음부터 진달드리지 않았던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 그 명을 환수한다면 어떻게 뒷날을 징계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태화가 또 아뢰기를,
"이 일마저 신들의 요청을 들어주시지 않는다면 신들은 정말 면목이 없게 됩니다."
하고, 조복양(趙復陽)이 아뢰기를,
"삼공의 말을 쾌히 따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한참 깊이 생각한 뒤에 이르기를,
"대신의 말이 이러하니, 파직시키지는 말고 추고만 하라."
하였다.
이에 앞서 숙정(淑靜)·숙안(淑安) 두 공주가 계하(啓下)된 공사(公事)라는 핑계를 대고 신천(信川)·재령(載寧)·평산(平山) 등지의 민전(民田)을 불법으로 탈취했는데, 평산 부사 윤겸(尹㻩)이 공갈 협박하는 말에 겁먹은 나머지 아첨할 목적으로 꾀를 내어 허다한 민전을 모조리 궁가의 소속으로 만들었으므로 백성들이 생업을 잃고 원망하는 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이에 본도 감사 홍처윤(洪處尹)이 분개함을 금하지 못해 사유를 갖추어 치계(馳啓)하자 호조에 계하(啓下)하였다. 호조 참판 서원리(徐元履)와 참의 홍처후(洪處厚)가 매우 원통한 민사(民事)라고 회계(回啓)하면서 이정두(李廷枓)와 임전(林荃)이 서로 짜고 악행을 저지르며 문기(文記)를 위조한 정상을 낱낱이 진달드리고, 또 허다한 화전(火田)을 일구어 경작하여 먹고 산 지 30년에 이른 것도 있으니 주인없는 진전(陳田)으로 논할 수는 없다는 것과 감영(監營) 소속의 화전에서 거두어들이는 세금 역시 중대한 관계가 있는 만큼 둘 다 내주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진달드렸기 때문에, 상이 진노하여 이렇게 미안한 분부를 내리게 되었던 것이었다.
정치화(鄭致和)가 아뢰기를,
"신이 호조에 있으면서 잘못 회계한 죄를 지은 적이 있었는데 지금까지도 황송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신이 이번 일을 회계할 때에 혐의가 있어 동참하지는 못하였습니다만, 같이 끼어 듣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으니, 서원리와 같이 추고를 받게 해주소서."
하니, 상이 답하지 않았다. 이어 대신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서원리가 규례(規例)를 몰라서 그런 것인가?"
하니, 두표가 아뢰기를,
"원리가 규례를 모르지는 않을 것인데, 요즘들어 연소한 무리가 모두 ‘궁가에 관계된 일은 곡직(曲直)을 따질 것 없이 백성들에게 내 주어야 마땅하다.’고 하기 때문에, 원리의 말이 자연 이런 결과를 면치 못하게 된 것입니다."
하였다. 원두표가 또 아뢰기를,
"이시술(李時術)의 집에서 뇌물로 준 물건이 무수한데 집을 팔기까지 했는데도 다 갚지 못하였다 합니다. 이전에 조신(朝臣)이 이런 환란을 당했을 경우에는 으레 약간의 물품을 지급해 주곤 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예전대로 지급토록 하라."
하였다. 정치화가 5백 금(金)을 지급할 것을 청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두표는 전석(前席)에서 말할 때마다 두서가 없었고 거만하기 짝이 없었으며 제신(諸臣)을 곤욕스럽게 하면서 참견하지 않는 곳이 없었다. 무사를 배양하지 못한 책임을 전후의 병판(兵判)들에게 떠넘기려 하였는데 이는 그의 의도가 음험한 것을 보여주는 곳이요, 서원리가 회계한 것을 연소배의 의향이라고 하면서 시기를 틈타 모함하려고 꾀했으니 이는 유감을 푸는 동시에 총애를 굳히려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었다. 심지어 무장(武將)의 안마(鞍馬)가 너절해졌다는 설까지 내놓은 것은 비루하고 패려하기 그지없는데, 그는 장차 이수창(李壽昌)으로 하여금 제멋대로 탐람한 행동을 하여 제몸을 살찌우게 하려고 한 것인가. 삼사(三司)의 신하들이 귀로 듣고 눈으로 보면서도 그의 기세를 두려워한 나머지 입을 꾹 다문 채 물러났으므로 식자들이 한탄하였다.


【태백산사고본】 5책 5권 43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339면
【분류】왕실-국왕(國王) / 왕실-사급(賜給) / 인사-관리(管理) / 인사-선발(選拔)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재정-전세(田稅) / 사법-탄핵(彈劾) / 농업-전제(田制)


[註 127] 외임(外任) : 경상 우병사임.[註 128] 안마(鞍馬) : 말 안장.
사신은 논한다. 두표는 전석(前席)에서 말할 때마다 두서가 없었고 거만하기 짝이 없었으며 제신(諸臣)을 곤욕스럽게 하면서 참견하지 않는 곳이 없었다. 무사를 배양하지 못한 책임을 전후의 병판(兵判)들에게 떠넘기려 하였는데 이는 그의 의도가 음험한 것을 보여주는 곳이요, 서원리가 회계한 것을 연소배의 의향이라고 하면서 시기를 틈타 모함하려고 꾀했으니 이는 유감을 푸는 동시에 총애를 굳히려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었다. 심지어 무장(武將)의 안마(鞍馬)가 너절해졌다는 설까지 내놓은 것은 비루하고 패려하기 그지없는데, 그는 장차 이수창(李壽昌)으로 하여금 제멋대로 탐람한 행동을 하여 제몸을 살찌우게 하려고 한 것인가. 삼사(三司)의 신하들이 귀로 듣고 눈으로 보면서도 그의 기세를 두려워한 나머지 입을 꾹 다문 채 물러났으므로 식자들이 한탄하였다.

 

임피 현령(臨陂縣令) 허질(許秩) 등 4인을 승진시켜 서용(叙用)하도록 하고, 오정언(吳廷彦)은 준직(准職)으로 제수토록 하고, 안헌징(安獻徵)에게는 숙마(熟馬)를 하사토록 하고, 도거원(都擧元)·한희설(韓希卨)에게는 표리(表裏)를 하사토록 하고, 상주 목사(尙州牧使) 이성기(李聖基) 등 3인에게는 숙마를 하사토록 하고, 양일한(楊逸漢) 등 5인은 승진시켜 서용하도록 하고, 성후설(成後卨) 등 4인에게는 표리를 하사토록 하고, 남천택(南天澤)·김운장(金雲長) 등 7인은 파직을 시키도록 명하였는데, 이는 양남 어사(兩南御史)인 이숙과 남구만(南九萬) 등의 서계(書啓)에 따라 상벌을 시행한 것이었다.

 

평안 감사 임의백(任義伯)과 함경 감사 권우(權堣)가 수재(水災)로 곡식이 상해 백성의 일이 염려스럽다고 치계하여 보고하였다.

 

사간 정계주(鄭繼胄) 등이 아뢰기를,
"곤수(閫帥)에는 합당한 인물을 얻기만 하면 되지 그 밖의 것은 논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제 대신이 ‘새로 임명된 경상 병사 이수창(李壽昌)은 중군(中軍)의 직책을 갖고 있는 만큼 외방에 내보내는 것이 부당하긴 하나 오래도록 경사(京師)에 있어 안마(鞍馬)가 너덜해졌으니, 또한 보내지 않을 수 없다.’는 내용으로 탑전(榻前)에서 진달드렸는데, 이것이 어찌 조정에서 차견(差遣)하는 뜻이겠습니까. 곤수가 된 자들이 이것을 구실로 삼을 경우 어떻게 다시 꺼리는 바가 있겠습니까. 이수창을 체차시키소서."
하니, 답하기를,
"정계주는 입시(入侍)하는 반열에 이미 끼였었는데, 그렇게 말한 본래의 뜻을 이처럼 크게 왜곡할 수 있는가.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응교 남구만(南九萬)과 교리 이민서(李敏叙)가 청대(請對)하여 입시하였다. 구만이 아뢰기를,
"듣건대 서원리(徐元履)가 회계(回啓)한 일 때문에 파추(罷推)되는 벌까지 받았다가 대신이 진달드리자 곧바로 따라주셨다 하니, 기쁘고 다행스러운 마음 금할 수 없습니다. 다만 궁가(宮家)의 일에 대해 매번 미안한 분부를 내리시는데, 이 점이 안타깝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는 호조의 회계를 옳다고 여기는가?"
하자, 대답하기를,
"외방에 있어서 상세한 내용은 듣지 못했습니다만, 회계를 가져다가 보니 별로 잘못한 것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민전(民田)은 내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궁가에서 먼저 받은 곳은 감영(監營)에서 뺏을 수 없는데, 그런 식으로 회계를 했으니 어찌 잘못이 없겠는가."
하니, 민서가 아뢰기를,
"남구만이 감히 호조를 변호하려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성덕(聖德)에 손상되는 점이 있을까 염려하여 말씀드린 것입니다."
하였다. 구만이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1개 궁가의 면세전(免稅田)이 혹 1천 4백 결(結)에 이르고 있다 하는데, 이것은 중읍(中邑)의 결수(結數)에 해당합니다. 이런데도 어떻게 백성의 원망이 없겠습니까. 속히 제도를 정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그리고 신이 일찍이 진휼 어사로 나가면서 이숙과 동시에 탑전에서 하직 인사를 드릴 때에, 신들이, 곡식을 납부하게 하고 면천(免賤)시켜 주는 일에 대해 범연히 아뢰면서 애초 노(奴)와 비(婢)를 분간하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영남의 경우에는 곡식을 납부하기를 원하는 비자(婢子)가 없었던 반면 호남에서는 마침 그런 경우가 있었는데, 이에 이숙이 범연히 허락했던 것이었습니다. 처음에 잘못한 실수는 물론 있습니다마는, 일단 면천시켜 주겠다고 허락해 놓고는 면역(免役)만 시킨다면, 국가가 믿음을 잃는 결과가 되고 말 것입니다. 지극히 하찮은 비자(婢子) 하나 때문에 앞으로 조정의 명이 백성에게 믿음을 받지 못하게 된다면 관계되는 바가 적지 않겠기에 신이 감히 누누이 진달드리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비자도 함께 면천시키도록 하고, 이숙의 일은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稟處)케 하라."
하였다. 민서가 아뢰기를,
"옛 사람 중에는 황제의 명이라고 속여 창고의 곡식을 꺼내 준 자도 있었는데, 이숙에게는 죄를 의논할 일이 없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숙은 추고하도록 하라."
하였다. 구만이 아뢰기를,
"홍문록(弘文錄) 문제로 서필원(徐必遠)이 상소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안하게 여기고 있으니 속히 처치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영중추가 재야(在野)의 유신(儒臣)에게 물어보라고 청하였는데, 그 말이 어떠한가?"
하였다. 구만이 아뢰기를,
"예(禮)를 의논하는 일이라면 물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만, 이런 일을 꼭 물을 것이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 생각도 그러하다. 대신이 출사(出仕)하기를 기다려 물어서 처치토록 하라."
하였다. 민서가 아뢰기를,
"태백(太白)의 변고가 일어났으니 매우 두렵습니다. 성상의 옥후가 좋지 않으시니 경연을 열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편전(便殿)에서 때때로 고문(顧問)하신다면 어찌 환시(宦侍)와 같이 계시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습니까."
하고, 구만이 아뢰기를,
"신이 영남에 갔을 때 백성들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는 것을 목격하였는데, 마침 궁가(宮家)의 조곡(租穀) 수백 석을 비축한 것이 있기에 기민(飢民)에게 나누어 주었었습니다. 그런데 상평청의 관문(關文)을 보건대, 궁노(宮奴)도 굶어죽을 판이니 그 곡물을 나누어주지 못하게 하라고 하였으니, 일이 매우 미안스럽습니다. 그리고 숙명 공주(淑明公主)의 농장(農庄)이 김해(金海)에 있는데, 특히 심하게 재해를 입어 세금을 거둘 길이 없게 되자, 차인(差人) 장두길(張斗吉)이 둔민(屯民)의 우마(牛馬)와 솥단지 등을 약탈하는 등 못할 짓 없이 작란하며 침학을 가하므로, 원망하며 부르짖는 소리가 하늘에 사무치고 있으니, 이런 사람은 중하게 다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유사(攸司)로 하여금 그를 가두고 다스리게 하라."
하였다. 민서가 아뢰기를,
"올해 기근 때문에 위아래가 황급해 하며 걱정하였는데, 지금 곡식이 조금 익을 희망이 있긴 합니다만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늦추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태봉(胎封)129)  에 석물(石物)을 설치하는 일은 급한 일이 아닐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해조로 하여금 다시 품달하도록 하라."
하였다.

 

7월 15일 병술

사간 정계주(鄭繼胄)가 인피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이 그저께 입시(入侍)했을 때, 대신이 ‘이수창(李壽昌)이 오래도록 서울에 있어 안마(鞍馬)가 너덜해졌다.’는 말로 탑전에서 진달드리는 말을 듣고, 신은 삼가 타당하지 않다고 여겼으나 대신이 한 말이기 때문에 감히 경솔하게 논열(論列)하지 못했었습니다. 그러다가 어제 상회례(相會禮) 때에 이 말을 꺼내었더니, 동료들 모두가 말하기를 ‘대신을 감히 논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수창은 그대로 부임케 해서는 안 된다.’ 하기에 서로 의논하여 논계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삼가 ‘본래의 의도를 크게 왜곡했다.’는 분부를 받들게 되었으니, 어떻게 감히 그대로 자리에 있겠습니까."
하고, 정언 박세당(朴世堂)·윤심(尹深)이 인피하였는데, 그 대략에,
"어제 상회례 때에 사간 정계주가 탑전에서 대신이 진달드린 말을 언급했는데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라며 탄식하였습니다. 곤수의 직에 제수하는 목적은 선명한 안마(鞍馬)를 얻게 하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청렴하고 근실하게 하라고 요구해도 탐람한 짓이 많이 있게 되는 법인데, 이렇게 이야기했다면 탐욕스러운 짓을 하라고 가르쳐주는 결과와 가깝게 되지 않겠습니까. 이에 대한 동료들의 의논이 차이가 없기에 마침내 수창을 논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계주가 피혐한 사연을 보건대 ‘동료들이 모두 말하기를 「대신이야 감히 논할 수 없다 하더라도……」 하였다.’고 하였는데, 이 말이야말로 너무나도 사람을 부끄럽게 만드는 것입니다. 석상(席上)에서는 본래 그처럼 말한 적이 없었는데 계주가 그런 식으로 말을 하다니 이 또한 괴이하지 않습니까. 신들이 대각에 수치를 끼치게 한 이상 그대로 자리에 있기가 어려운 형편입니다."
하고, 모두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장령 송시철(宋時喆) 등이 처치하여 계주는 체차시키고 세당과 윤심은 출사키기를 청하니, 따랐다.

 

이조가 아뢰기를,
"상주(尙州)의 유학(幼學) 김건(金鍵)이 재주와 행실로 향천(鄕薦)에 들어 재랑(齋郞)으로 임명토록 의망(擬望)했는데, 대각이 윤기(倫紀)에 죄를 얻은 자라고 하여 사판(仕版)에서 삭제시키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런 사람을 함부로 추천하여 계문(啓聞)하였으니 놀랍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추천한 자는 본도로 하여금 죄를 매기게 하고, 본주(本州) 목사와 본도 감사 역시 살피지 못한 잘못을 면키 어려우니 추고함으로써 뒷날을 경계시키소서."
하니, 따랐다. 또 아뢰기를,
"향천 보거(保擧)130)  하는 법이 예로부터 한 가지가 아니었습니다만, 인심이 점점 교활해져 잡되고 외람스러워졌으니 염려스럽습니다. 삼남(三南)은 각각 3인까지 그리고 5도(道)는 각각 2인까지를 한계로 하여 매 식년(式年)마다 도신(道臣)이 정밀하게 뽑아 계문토록 하되, 혹 명실(名實)이 서로 걸맞지 않거나 혹 나이를 속여 기록하다가 적발될 경우에는 보거자의 죄를 중하게 매기고 수령과 감사는 파직시키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간원이 이수창(李壽昌)을 논하며 파직을 청했는데도 오래도록 윤허하지 않자 이에 정계(停啓)하였다.

 

상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정원에 계류된 공사(公事)를 결재하였는데, 도승지 남용익(南龍翼), 좌승지 한진기(韓震琦), 우승지 이은상(李殷相), 좌부승지 권대운(權大運), 우부승지 유창(兪瑒)이 입시하였다. 진기가 아뢰기를,
"궁장(宮庄)에 관한 일로 서원리(徐元履)가 추고를 당한 공사에 대해 현재 판부(判付)하신 일이 없기 때문에 봉행치 못하고 있습니다."
하고, 용익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직접 결급(決給)131)  해 주신다면, 과오는 아랫사람에 있고 성덕(盛德)은 위에 있게 되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무엇 때문에 간여하겠는가."
하였다.

 

7월 20일 신묘

태백(太白)이 낮에 나타났다.

 

우참찬 민응형(閔應亨)이 죽었다. 응형의 자(字)는 가백(嘉伯)인데, 3조(朝)에 걸쳐 두루 섬기는 동안 큰 하자가 없었으며, 평소 강개(慷慨)한 것으로 자임하였다. 인조조(仁祖朝) 때 강역(姜逆)132)  을 사사(賜死)할 당시, 임금의 노여움이 진동하여 유배보내고 축출하는 등의 일이 잇따라 일어났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벌벌 떨며 감히 소리를 내지 못했는데, 응형이 부제학으로서 순천(順天)의 임소(任所)로부터 소명(召命)을 받들고 들어와 자진해 나서서 청대(請對)하며 구원해 만류할 계책을 담당하려 하였다. 이때 상이 병을 이유로 거절하며 만나지 않아 일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으나 사론(士論)이 감동하여 그를 중하게 여겼다. 마음 속에 생각이 있으면 안에 들어가 고했는데, 때로는 울며 임금 자신의 잘못과 시정(時政)의 득실을 극구 말해 숨기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충박(忠樸)하고 당직(讜直)한 인물로 세상에서 칭찬을 받았다. 말년에는 윤선도(尹善道)의 석방을 청했다가 송시열(宋時烈)의 패거리로부터 크게 배척을 당하고 모황(耄荒)으로 지목을 받기도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죽으니, 향년 85세였다.

 

좌의정 원두표(元斗杓)가 상차하였는데, 그 대략에,
"지난번 입시했던 날, 훈국의 중군(中軍)을 대신할 자가 없다는 말씀을 드리다가 이수창(李壽昌)을 언급하면서 무변(武弁)이 서울에서 고달프게 지내는 정상을 이어 진달드렸는데, 안마(鞍馬)가 너덜해졌다고 한 것은 즉 이야기를 하다가 별 뜻 없이 드린 말씀이었습니다. 정계주(鄭繼胄)가 이를 잘못으로 여겼다면 연중(筵中)에서 곧장 배척했어야만 간관(諫官)의 풍채에 걸맞는다고 할 것인데, 아무 소리도 않고 입을 다물고 있다가 물러나와서 뒷얘기를 하는 이유는 무엇이란 말입니까. 더구나 박세당(朴世堂)은 당초 전해 들었던 사람인데도 그토록 말이 준엄했었는데, 급기야 ‘본래의 의도를 크게 왜곡했다.’는 비답을 받은 뒤에 억지로 계주가 하지도 않았던 말을 하면서 못할 짓 없이 신에게 모욕을 가하고는 거꾸로 느슨하게 논했다고 계주를 배척하였으니, 아, 또한 괴이하다 하겠습니다.
신은 세당의 아비 박정(朴炡)과 약관(弱冠) 때부터 교분을 맺고 서로 의맹(義盟)으로 약속했었으니, 세당이야말로 신의 옛 친구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그가 신을 보는 것 역시 어찌 평범하기야 하겠습니까. 그런데 요즘 과장해서 논하는 풍조가 일어나 직질(職秩)이 높은 사람들을 잔뜩 잡아매기를 좋아하면서 이것을 고상한 취미로 여기는가 하면, 근거도 없는 말을 늘어놓으며 풍채를 드날리면서 이것으로 명예를 구하고 있기 때문에 세당이 이를 부러워한 나머지 큰소리 치는 것을 좋아한 것입니다. 세도(世道)가 여기에까지 이르렀으니 정말 개탄스럽기만 합니다. 그러나 탄핵을 받고도 행공(行公)하는 것은 소신(小臣)도 감히 하지 않는 법인데, 더구나 신은 이미 대신의 반열에 있는 몸이니, 결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행공하기가 어렵습니다. 속히 파직시켜 주시어 사람들의 말에 사과하소서."
하니, 답하였다.
"계주의 거칠고 사나운 논과 세당의 경망스럽고 괴이한 말이 어쩌면 한결같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단 말인가. 오늘날의 세도가 정말 한심스럽기만 하다. 경은 인혐하지 말고서 안심하고 행공하라."

 

정언 박세당이 인피하였는데 그 대략에,
"물건을 허술히 보관하는 것 자체가 도적을 방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물건을 가져가라고 도적에게 가르쳐주는 것이라고 말했고 보면,133)   대신이 이른바 ‘안마(鞍馬)가 너덜해졌으니, 내직(內職)과 외직을 교대로 제수해야 한다.’는 것이 탐묵(貪墨)을 가르치는 결과가 되지 않겠습니까. 아, 오늘날 조정에서 벼슬하는 사람치고 직위를 가진 선부형(先父兄)이나 친구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가령 모상(某相)이나 모경(某卿)에게 논해야 할 잘못이 있을 경우, 대각에 몸을 담고 있는 자가 사사로운 정분을 돌아보면서 감히 탄핵하지 못한다면, 이 어찌 국가에 이로운 일이 되겠습니까. 신은 ‘사사로운 교분은 어디까지나 사사로운 교분이고 공적인 의리는 어디까지나 공적인 의리이다.’고 생각하였는데, 차자를 올리면서 이렇게까지 이야기하다니, 신은 삼가 의아하게 여겨집니다.
옛날의 대신은 자신의 잘못을 부지런히 공박해 주라고 말했었는데, 오늘날의 대신은 한 마디만 서로 바로잡아주는 말을 하면 문득 성난 얼굴을 짓곤 합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도 마구 대각의 기를 꺾어 대신을 위로해주려고만 하시니, 이른바 ‘한 마디 말이 나오기만 하면 감히 그 잘못을 바로잡지 못한다.’는 것에 불행하게도 앞으로 가깝게 되고 말 것입니다. 신이 이미 준엄하게 배척을 받은 데다가 엄한 비답까지 받들었으니, 결코 그대로 자리에 있기가 어렵습니다. 체직시켜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는데, 옥당이 처치하기를,
"성조(聖朝)에서 대각을 너그럽게 용납하면서 고굉과 이목에 비하였습니다. 따라서 ‘경솔하고 괴이하다.’고 분부하신 것은 말씀하실 일이 못 되는 것이었습니다. 출사케 하소서."
하니, 따랐다. 그러나 세당이 패소(牌召)에도 나오지 않았으므로 이에 체직시켰다.

 

대사헌 송준길(宋浚吉)이 소장을 올려 수천 마디의 말을 진달드렸는데, 맨 처음에 본직을 면직시켜 줄 것을 청하고, 다음에 경연(經筵)을 여는 날이 드물어 학문이 중단되는 걱정을 진달하고, 다음에 이시술(李時術)의 일을 진달하기를,
"조가(朝家)에서 주선을 잘하지 못한 탓으로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지금 이후로 변방의 임무를 맡은 자로서 그 누가 기꺼이 지성으로 나라에 몸을 바치려 하겠습니까."
하고, 또 제궁가(諸宮家)만을 지나치게 비호하는 잘못과 북학(北學)을 지연시키고 경영하지 않는 잘못을 진달드리니, 상이 너그럽게 비답을 내리면서 병을 조리하여 올라오도록 하라고 유시하였다.

 

7월 22일 계사

박세당(朴世堂)을 헌납으로 삼았다.

 

예조가 품(稟)하기를,
"봄과 가을에 능침(陵寢)을 전알(展謁)하는 일이 일찍부터 이미 정식화(定式化)되었습니다. 이번 가을에는 어느 능을 전알하며 택일(擇日)은 언제쯤으로 해야 합니까?"
하니, 답하기를,
"8월 20일쯤 헌릉(獻陵)을 전알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7월 24일 을미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희정당(熙政堂)에서 인견하였다. 영상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역관 이분신(李芬新)이 북경에서 돌아와, 영력 황제(永曆皇帝)134)  가 청(淸)나라 군대에 포위당해 핍박을 받다가 스스로 목매 죽기까지 하였다고 했는데, 그 쪽의 과장된 소문을 또한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일 청나라 사람들이 우리 국경을 넘어왔을 때 상토 첨사(上土僉使)가 양찬(粮饌)을 지급하기까지 했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저쪽 사람들이 우리 나라 사람들을 쫓아냈기 때문에 약간의 양찬을 내주어 달래려고 했던 것이니, 대체로 부득이해서 나온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두가 통사(通事)가 청나라 말에 능통하지 못해 개유(開諭)하지 못한 탓으로 빚어진 일이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말에 능통하지 못한 통사는 도태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김좌명(金佐明)이 아뢰기를,
"호남의 산간 고을은 올 가을부터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할 예정인데, 영상이 장차 나라 밖으로 나가게 되어 있으니 속히 의논해 정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입시한 신하들에게 두루 하문하였는데, 어떤 이는 수령에게 전담시키는 것이 편하다고 하고, 어떤 이는 호조가 주관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정치화(鄭致和)가 아뢰기를,
"기읍(畿邑)의 전결(田結)이 옛날에는 13만 결이었는데 지금은 3만 결밖에 되지 않으니, 이것은 바로잡아 정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조복양(趙復陽)이 아뢰기를,
"양서(兩西) 지방 역시 양전(量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여러 신하들도 똑같은 내용으로 행하기를 권하였으나, 이완만은 홀로 아뢰기를,
"양전이야말로 반드시 행해야 할 일이기는 합니다만, 올해는 민역(民役)이 엄청나게 많으니 단연코 행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옥당의 신록(新錄)에 관한 일은 어떻게 처리해야 좋겠는가? 영부사는 재야(在野)의 유신(儒臣)에게 물어보았으면 하는데, 남구만(南九萬)과 이민서(李敏叙)는 모두 ‘이것은 《예경(禮經)》에 관한 일이 아니니 물어보는 것은 부당하다.’고 한다. 내 뜻도 그러한데, 장차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하니, 태화는 아뢰기를,
"신은 수석(首席)에 몸담고 있으면서 누이의 아들로 하여금 참여될 수 있게 하였으니 정말 두렵기만 합니다. 어떻게 감히 의논드릴 수 있겠습니까."
하고, 홍명하(洪命夏)는 아뢰기를,
"지금 만약 그대로 둔다면 그들의 마음이 어찌 편안하겠으며 전조(銓曹) 역시 어떻게 의망(擬望)할 수 있겠습니까. 신의 의견으로는 4인을 삭제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고, 정유성(鄭維城)은 아뢰기를,
"도당록(都堂錄)을 작성할 때는 본래 상피(相避)하는 규정에 구애받지 않는데, 어떻게 한 사람의 말 때문에 갑자기 삭제해버릴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이민적(李敏迪)은 아뢰기를,
"도당록이 공정하게 되지 못했다면 재신(宰臣)들을 죄주어야 마땅합니다. 어떻게 4인을 모두 버릴 수 있겠습니까."
하고, 조복양은 아뢰기를,
"지금 삭제한다면 뒷날의 폐단이 염려됩니다. 그리고 최유지(崔攸之)는 경학(經學) 면에서 가장 우수한데 어째서 옥당의 선발에 부적합하단 말입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어찌 참록(參錄)된 것을 삭제할 수야 있겠는가. 전조(銓曹)에서 공의(公議)에 따라 수용(收用)하는 것이 온당하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일 궁가(宮家)에 전결(田結)을 지급하는 문제를 의논했었는데, 6백 결(結)로 정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복양이 아뢰기를,
"6백 결은 중읍(中邑)의 결수(結數)에 해당하니 실로 과다할 듯싶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에는 1천 4백 결이나 되었던 것을 지금 6백 결로 정한다면 이 역시 너무 줄인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데, 어째서 지나치다고 하는가?"
하니, 민적이 아뢰기를,
"6백 결은 너무 많으니, 《대전(大典)》에 의거하여 제도를 정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소리를 높여 이르기를,
"만약 그렇다면 전대로 하고 제도를 정하지 말도록 하라."
하니, 복양이 아뢰기를,
"상의 분부는 온당치 못합니다. 이치상 결수를 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 뜻은 6백 결로 정하는 것인데, 안 된다면 고치지 않고 예전대로 할 뿐이다. 그대들은 이 두 가지 중에서 택일하라."
하니, 복양이 아뢰기를,
"6백 결이 많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고치지 않고 예전대로 하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하고, 민적은 아뢰기를,
"6백 결은 너무 많으니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고, 유성은 아뢰기를,
"민적의 말이 옳습니다."
하고, 정치화(鄭致和)는 아뢰기를,
"서서히 의논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였는데, 정태화와 원두표(元斗杓)는 한 마디 말도 없이 입을 다물고 있었다. 민적이 또 아뢰기를,
"요즘 들어 주현(州縣)이 피폐해진 것은 바로 노비가 적은 데에 연유한 것입니다. 《대전(大典)》을 보면 주(州)·부(府)·군(郡)·현(縣)의 노비에 각각 정액(定額)을 두고 있으니, 이제는 《대전》에 의거하여 그 정액의 수에 미달된 주현의 노비에 대해서는 다른 곳으로 옮겨주는 것을 허락하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전》의 원액(元額)과 현재 주현에 있는 노비의 실수(實數)를 해원(該院)으로 하여금 서계(書啓)하여 품처(稟處)토록 하라."
하였다. 민적이 아뢰기를,
"상평창(常平倉)의 제도가 법전에 실려 있습니다. 즉 곡물 값이 오르면 값을 내려 내다 팔고 곡물 값이 내리면 값을 올려서 사들이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경수창(耿壽昌)135)  의 유법(遺法)입니다. 《대전》에 의거하여 진휼하고 남은 미곡을 가지고 상평창을 설치해서 도민(都民)을 구제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호조가 고갈된 상태라서 상평창을 다시 설치하기에는 힘이 부족하다. 진휼하고 남은 곡식은 호조에 붙여 별도로 놔두도록 하라."
하였다.

 

밤 4경에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유성(流星)이 필성(畢星) 아래에서 나와 손방(巽方)으로 들어갔다.

 

7월 26일 정유

진하 정사(進賀正使) 정태화(鄭太和), 부사 허적(許積), 서장관 이동명(李東溟)이 사조(辭朝)하니, 상이 희정당(熙政堂)에서 인견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신이 지금 멀리 떠나려니 나랏일이 매우 걱정됩니다. 기읍(畿邑)에 양전(量田)하는 일과 호남에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는 일을 이미 품정(稟定)했으니 속히 완결지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시방(李時昉)이 이 일을 주관했는데 불행히도 빨리 죽고 말았다. 이제 어떤 사람이 그 일을 끝낼 수 있겠는가?"
하자, 태화가 아뢰기를,
"신의 아우 정치화(鄭致和)는 평소부터 어렵게 여기는 뜻을 가지고 있었으니, 이 일을 담당할 만한 자는 김좌명(金佐明)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고 상(故相) 김육(金堉)이 뭇 의논들을 거슬려가면서 호서(湖西)에 대동법을 시행하기로 결정했었는데, 좌명도 일찍이 전라 감사를 자청하며 호남에 대동법을 시행하려고 하였으니, 지금 그에게 맡기면 반드시 자기 아비의 뜻을 잘 이을 것입니다."
하였다. 태화가 정승의 직임을 체차받은 상태로 갔다 오게 해 주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1백일도 안 되는 기간인 만큼 그냥 갔다가 돌아오면 될 것이다. 어떻게 체직을 허락할 수 있겠는가."
하고, 약물(藥物)을 하사하며 위로해 타일러 보내었다.

 

유지(諭旨)로 진주(晋州)에 거주하는 전 현감 하홍도(河弘度)와 함안(咸安)에 거주하는 전 좌랑 조임도(趙任道)에게 쌀과 콩을 하사하였다. 이는 어사(御史) 남구만(南九萬)이 그들의 행실이 칭찬받고 있다고 별단(別單)으로 서계(書啓)했기 때문인데, 예조가 청하기를,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옛날에 비단을 내리던 규정을 본받아 미숙을 넉넉하게 지급하게 하되, 유지로 내려주는 거조가 없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따른 것이었다.

 

7월 27일 무술

윤석(尹晳)을 정언으로, 홍중보(洪重普)를 병조 판서로 삼았다.
사신은 논한다. 중보는 다른 재능도 없이 그저 왕실과 인척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대사마(大司馬)에 임명된 것인데, 이미 분수에 맞는 직책도 아니었을 뿐더러 그의 숙부 홍명하(洪命夏)와 동시에 양전(兩銓)을 장악하게 되었으므로 식자들이 한심하게 여겼다.


【태백산사고본】 5책 5권 48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342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역사-편사(編史) / 인물(人物)
사신은 논한다. 중보는 다른 재능도 없이 그저 왕실과 인척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대사마(大司馬)에 임명된 것인데, 이미 분수에 맞는 직책도 아니었을 뿐더러 그의 숙부 홍명하(洪命夏)와 동시에 양전(兩銓)을 장악하게 되었으므로 식자들이 한심하게 여겼다.

 

7월 28일 기해

호남 무안현(務安縣)의 남녀 18인이 섬에 들어가 고기잡이를 하다가 갑자기 광풍(狂風)을 만나 유구국(琉球國)까지 표류하였다. 그 나라 사람들은 삭발하거나 장발 차림이었는데 언어가 통하지 않아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그들이 북 하나를 가지고 앞에 와서 손으로 가리키며 고무(鼓舞)하는 모양을 지었는데, 우리 나라 사람들이 그 뜻을 알아채고 노래를 부르며 북춤을 추자, 그때에서야 그 사람들이 고려인(高麗人)이라고 부르면서 집을 지어 거처하게 하는가 하면 쌀을 주어 밥을 지어먹게 하는 등 자주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는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왜국(倭國) 살마주(薩摩州)로 이송되었다가 다시 대마도(對馬島)로 보내져 어려움 끝에 간신히 귀환하였다.

 

7월 29일 경자

사간 이민적(李敏迪), 헌납 박세견(朴世堅)이 아뢰기를,
"정사(政事)의 권한이 한 집안에 집중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경계하는 일입니다. 한 집안의 숙부와 조카가 마주앉아 양전(兩銓)136)  의 권한을 장악하게 되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물정(物情)이 온당치 못하게 여길 뿐만 아니라 뒷날 걱정거리를 발생하게 할 수도 있으니, 병조 판서 홍중보(洪重普)는 체차하소서."
하니, 따랐다.

 

호조 참판 서원리(徐元履)가 엄한 분부를 받은 뒤에 말을 바꿔 회계(回啓)하면서 영안(營案)137)  에 소속된 화전(火田)을 궁가(宮家)로 옮겨 소속시킬 것을 청하니, 따랐다.
사신은 논한다. 서원리가 한번 엄한 분부를 받은 뒤로 문득 벼슬을 잃게 되지나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이 생겨 잘못을 뉘우치고 애걸하면서 온갖 추태를 벌였으니, 어쩌면 사람이 이렇게까지 부끄러움이 없을 수 있단 말인가. 원리는 본래부터 비루한 작자였다. 일찍이 선조(先朝) 때 강원 감사로 있을 당시, 김홍욱(金弘郁)이 장사(杖死)된 뒤로 그의 친속(親屬)을 금고(禁錮)시키라는 명이 내려졌었는데, 원리가 치계(馳啓)하기를, ‘모 수령은 홍욱의 외사촌이니 관직에 있게 해서는 안 되겠기에 파출(罷黜)시켰습니다.’ 하였으니, 그 마음 씀씀이나 처신을 볼 때 그야말로 못할 짓이 없는 자로서 사람들 모두가 침을 뱉고 더럽게 여겼었다. 이번에 회계에서 임금의 비위를 미리 맞추려 한 것도 원래 그의 본모습이 드러난 것이니, 꾸짖고 말 것이 또 뭐가 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5책 5권 49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342면
【분류】농업-전제(田制) / 역사-편사(編史) / 인물(人物)


[註 137] 영안(營案) : 감영의 양안(量案).
사신은 논한다. 서원리가 한번 엄한 분부를 받은 뒤로 문득 벼슬을 잃게 되지나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이 생겨 잘못을 뉘우치고 애걸하면서 온갖 추태를 벌였으니, 어쩌면 사람이 이렇게까지 부끄러움이 없을 수 있단 말인가. 원리는 본래부터 비루한 작자였다. 일찍이 선조(先朝) 때 강원 감사로 있을 당시, 김홍욱(金弘郁)이 장사(杖死)된 뒤로 그의 친속(親屬)을 금고(禁錮)시키라는 명이 내려졌었는데, 원리가 치계(馳啓)하기를, ‘모 수령은 홍욱의 외사촌이니 관직에 있게 해서는 안 되겠기에 파출(罷黜)시켰습니다.’ 하였으니, 그 마음 씀씀이나 처신을 볼 때 그야말로 못할 짓이 없는 자로서 사람들 모두가 침을 뱉고 더럽게 여겼었다. 이번에 회계에서 임금의 비위를 미리 맞추려 한 것도 원래 그의 본모습이 드러난 것이니, 꾸짖고 말 것이 또 뭐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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