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일 신축
황해 감사 홍처윤(洪處尹)이 ‘평산(平山) 소민(小民)이 전지(田地)를 궁가(宮家)에게 탈취당한 일’을 가지고 다시금 치계(馳啓)하면서 백성의 원통함을 누누이 진달하고, 또 아뢰기를,
"제멋대로 타량(打量)138) 한 뒤 성책(成冊)하여 올려보냈는데, 이는 모두 평산 부사(平山府使) 윤겸이 내사(內司)의 관원과 부화뇌동하여 이루어진 결과입니다."
하며, 심지어 윤겸도 함께 사패(司敗)에 내려 장차의 일을 경계시키도록 청하기까지 하였다.
삼가 살피건대, 홍처윤이 본도 감사로 있으면서 처음에 윤겸이 사사로이 타량한 것을 몰랐으니 이것은 밝지 못한 것이요, 급기야 일이 드러나고 나서도 또 법에 의거하여 파출(罷黜)시키지 못했으니 이것은 무기력한 것이라고나 할 것이다. 그런데 함께 사패에 내리기를 청하기까지 하였으니, 어쩌면 그렇게도 무르기 짝이 없이 사체(事體)를 크게 잃고 있단 말인가. 탄식만 나올 뿐이다.
8월 3일 계묘
대왕 대비가 더위를 먹어 건강이 좋지 못했으므로 내의원 제조 김좌명(金佐明) 등이 약방에서 직숙(直宿)하였다.
8월 4일 갑진
이정(李程)을 집의로, 김좌명(金佐明)을 병조 판서로, 유경창(柳慶昌)을 대사성으로, 박필성(朴弼成)을 금평위(錦平尉)로, 김만균(金萬均)을 정언으로 삼았다. 김수항(金壽恒)을 예조 판서에 특별히 제수하였는데, 이때 나이 34세였다.
사간 이민적(李敏迪) 등이 아뢰기를,
"국초(國初)에는 각 해사(該司)마다 토전(土田)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난리를 겪은 뒤에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탓으로 세가(勢家)에게 모조리 탈취당한 채 세월이 점차 오래되면서 폐기된 나머지 그것이 공전(公田)이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경조(京兆)와 당해 각사의 관원으로 하여금 문적(文籍)을 조사해 내어 고수(庫數)를 개록(開錄)케 하고 아울러 1책(冊)으로 만들게 한 뒤 조종조(祖宗朝)의 옛 제도를 부활시키도록 하는 동시에, 불법 점유한 채 세금을 내지 않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중하게 죄를 매기도록 하소서. 그리고 각역(各驛)의 위전(位田)139) 역시 불법으로 점유당한 폐단을 면치 못하고 있으니, 이번에 기전(畿甸)의 양전(量田)을 다시 할 때를 당하여 이것도 아울러 수괄(搜括)해서 모자라는 수만큼 보충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기읍(畿邑)의 양전을 60년만에야 거행하게 되는 만큼 근거로 삼아 조사할 만한 전적(田籍)이 없으니, 만약 수령을 신중히 가리고 그중 특히 무기력한 자들을 도태시키지 않는다면, 경계를 확정짓는 대정사가 균등하게 되지 않을 것입니다. 고양 군수(高陽郡守) 윤후익(尹後益)은 경망스러워 수령답지 못하고, 양성 현감(陽城縣監) 김해(金垓)는 우둔하고 어리석어 일에 어둡고, 영평 현령(永平縣令) 심추(沈樞)는 바보같이 무식하기만 하니, 모두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관전(官田)과 위전(位田)에 관한 일만 허락하고, 3인의 수령에 대한 일은 모두 따르지 않았다.
장령 송시철(宋時喆) 등이 아뢰기를,
"올해 조금 풍년이 들었다고는 하나, 굶주리고 병들어 죽은 나머지 당초부터 경작하지 못한 것이 상당히 많으니, 만약 급진(給陳)140) 을 허락해 주지 않으면 필시 백성의 원망을 초래할 것입니다. 해조로 하여금 즉시 변통해서 급진하는 한 조목을 사목(事目) 가운데 첨가해 들이도록 하소서.
그리고 평산(平山)과 재령(載寧)의 전지(田地)를 몰래 팔아먹은 사람을 이미 본도에 보냈으니 알아서 변핵(辨覈)하겠습니다마는, 신천(信川)의 경우는 본래 소읍(小邑)인데도 제궁가(諸宮家)에서 무려 열두 군데나 둔전(屯田)을 설치하고 있으니 다시 궁장(宮庄)을 설치하게 해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또 평산의 전지는 본래 주인이 없는 곳이 아닌데도 부사 윤겸이 강제로 성책(成冊)하게 하였으므로 백성의 원망이 하늘을 찌르고 있습니다. 평산·신천·재령 3개 고을의 수령을 파직하고 서용(叙用)하지 못하게 하소서. 감사 홍처윤(洪處尹)은 군관을 보내 적간(摘奸)하도록까지 했으면서도 제대로 수령의 죄를 바로잡지 못했으니 중하게 추고하소서.
호조에서 재차 회계(回啓)한 당상(堂上)이 일단 엄한 분부를 받들게 되자 겁을 먹고 두려워한 나머지 어쩔줄 몰라 하면서 ‘졸지에 일을 당해서 그랬다.’느니 ‘보통으로 보아넘겨서 그랬다.’느니 하였는데, 회계하는 공사마저 자세히 살피지 못한다면, 어떤 일을 해낼 수 있단 말입니까. 앞뒤의 계사(啓辭)가 마치 두 사람의 손에서 나온 것같이 되어 물정(物情)이 매우 놀라워하고 있으니, 체차시키소서."
하니, 상이 모두 윤허하지 않고 단지 급진(給陳)하는 한 조목의 일에 대해서만 해조로 하여금 다시 품(稟)하게 하였다.
8월 5일 을사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이 청대(請對)하니, 상이 희정당(熙政堂)에서 인견(引見)하였다. 원두표(元斗杓)가 아뢰기를,
"기읍(畿邑)에서 양전(量田)하는 일을 지금 거행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인조조(仁祖朝) 갑술년에 양전할 당시 신이 호남을 맡고 있었는데, 박황(朴潢)과 정기광(鄭基廣)이 좌도와 우도의 양전사(量田使)로 내려 왔었습니다. 지금은 단지 수령이 담당케 하면서 감사가 검찰(檢察)하도록만 하고 있으므로 혹 허술하게 될까 염려됩니다. 지금도 좌도와 우도를 나누어 각각 한 사람씩 내려 보내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누가 좋겠는가?"
하자, 두표가 아뢰기를,
"민정중(閔鼎重)과 김시진(金始振)이 좋겠는데, 시진은 현재 파산(罷散)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일이 중대하니, 특별히 서용(叙用)하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하였다. 홍명하(洪命夏)가 아뢰기를,
"호남의 산군(山郡)에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할 예정이니, 포목을 미곡으로 환산하는 제도를 정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미곡 13두(斗)를 면포(綿布) 2필(匹)로 환산토록 하라."
하였다. 정유성(鄭維城)이 아뢰기를,
"황두(黃豆)141) 와 멥쌀[粳米]을 공물 주인(貢物主人)이 방납(防納)하는 폐단이 끝이 없는데, 만약 대동미로 그 값을 주고 갖추어 납부하게 한다면 이런 걱정거리가 없어질 듯합니다."
하니, 두표가 아뢰기를,
"제향(祭享)과 관련된 일을 어찌 이렇게 구차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며 목소리와 안색이 매우 엄하였는데, 유성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물러갔다. 헌납 박세견(朴世堅)이 아뢰기를,
"봄가을에 능(陵)에 참배하는 일이야말로 매우 성대한 일인 만큼 귀로(歸路)에 열무(閱武)하셔서는 안 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의 말이 옳다."
하였다. 세견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분부를 이와 같이 하십니마는, 만약 쾌히 따라 주시지 않을 경우, 신은 본래 굼뜨고 미련하기 때문에 그때 가서 필시 제대로 진달드리지 못할 것이기에, 감히 이렇게 미리 진달드리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빙긋이 웃으며 답하기를,
"어찌 미리 기약할 수 있겠는가. 그때 가서 선처토록 하겠다."
하였다.
8월 6일 병오
상이 안질로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그런데 공간이 협소한 관계로 도제조 이하가 입시하지 못하고 합호(閤戶) 밖에 엎드려 있었는데, 이때부터 그렇게 하는 것이 상례(常例)가 되었다.
정원에 하교하여 전 승지 김시진(金始振)을 특별히 서용(叙用)해서 경기 좌균전사(京畿左均田使)로 차임하고 민정중(閔鼎重)을 우균전사로 차임토록 하였다.
8월 7일 정미
이조가 아뢰기를,
"겸 지평 이합과 집의 이정(李程)이 친형제인데, 상례(常例)로 논한다면 아랫사람을 체직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시험보일 기일이 임박하여 낭패될까 염려되고 대각의 체통도 중하기 때문에 감히 마음대로 할 수가 없으니, 상께서 재결하소서."
하니, 우선 이정을 체직시키라고 명하였다.
8월 8일 무신
대왕 대비의 건강이 좋지 않자, 내의원 도제조 원두표(元斗杓)와 부제조 남용익(南龍翼)이 함께 직숙(直宿)하면서 청하기를,
"전 참의 이원진(李元鎭), 창성 도정(昌城都正) 필(佖), 전 참봉 정유악(鄭維岳), 전 감역(監役) 이기선(李耆善), 유학(幼學) 조형(趙泂)은 모두 의술(醫術)로 이름이 났으니, 약방으로 모두들 불러 오게 하여 약을 의논하는 데 동참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8월 13일 계축
내의원 도제조 원두표(元斗杓)가 상이 침을 맞은 뒤 상의 안색을 살펴보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문을 열고 들어와 앞으로 가까이 오라."
하였다. 두표가 이어 아뢰기를,
"날씨가 아직도 무더우니 능을 참배하시는 일은 조금 뒤로 물리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제조 김좌명(金佐明)이 아뢰기를,
"삼가 듣건대 옥체에 습창(濕瘡)이 또 발생했다 하는데, 옥체를 수고스럽게 하시면 더 상하게 될까 염려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습창은 온정(溫井)에서 목욕하면 효과가 있다고 하는데, 서울 가까운 지역에 온정이 있는가?"
하자, 두표가 아뢰기를,
"예로부터 열성(列聖)께서 온정에 목욕하시던 때가 있었는데, 이천(伊川)과 온양(溫陽)에는 아직도 행궁(行宮)의 유지(遺址)가 있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 몸의 습창이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해지고 있으니 온정에 가서 목욕하는 일을 그만둘 수 없을 듯하다. 경들의 의견은 어떠한가?"
하니, 두표가 아뢰기를,
"옛날과 지금의 시대가 달라서 중난(重難)할 듯합니다만, 습창이 이러한데 또한 어떻게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공조 판서 이완이 지난해 온양에서 목욕하였으니, 시험삼아 물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옳다."
하였다. 상이 이완을 불러 입시하게 하고, 이어 온정에 목욕하여 효험을 보았는지의 여부를 하문하였는데, 이완이 대답하기를,
"신의 두드러기에는 효험을 보지 못했습니다마는, 습창 같은 증세는 목욕을 하면 효과를 본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남용익(南龍翼)이 아뢰기를,
"온양은 서울에서 3일 거리로서 갔다가 돌아오려면 필시 반 달은 소요될 것이니, 어찌 중난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세조조(世祖朝) 이후로는 이런 일이 없었으니 갑자기 정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후일 다시 대신에게 물어보아 정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말은 우선 전파시키지 말고 다시 후일을 기다려 의논해 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접위관(接慰官) 윤석(尹晳)이 병이 중해지자 조정에 품(稟)하지도 않고 제멋대로 양산군(梁山郡)에 갔는데, 도신(道臣)이 치계(馳啓)하니, 비국이 회계하여 그와 교대할 자를 낼 것과 그를 추고하여 뒷날의 폐단을 징계시킬 것을 청하자, 상이 윤허하였다.
8월 14일 갑인
안후열(安後說)을 장령으로 삼고, 조복양(趙復陽)을 예조 참판에 특별히 제수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김수항(金壽恒)과 조복양은 모두 명가(名家)의 자제들로서 당시 명예가 상당하였으니 다른 사람의 입김 없이도 스스로 평탄하게 진출할 수 있었다. 그런데 원두표(元斗杓)가 발탁해서 임용하라고 청한 데 따라 서로 이어 승진해 임명되었으니, 두 신하의 입장에서 부끄러움이 없을 수 있겠는가. 사람들이 모두 비웃었다.
【태백산사고본】 5책 5권 50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343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역사-편사(編史) / 인물(人物)
사신은 논한다. 김수항(金壽恒)과 조복양은 모두 명가(名家)의 자제들로서 당시 명예가 상당하였으니 다른 사람의 입김 없이도 스스로 평탄하게 진출할 수 있었다. 그런데 원두표(元斗杓)가 발탁해서 임용하라고 청한 데 따라 서로 이어 승진해 임명되었으니, 두 신하의 입장에서 부끄러움이 없을 수 있겠는가. 사람들이 모두 비웃었다.
간원이 진계(陳啓)하여, 남별전(南別殿)의 수리를 관장한 감역(監役) 김우경(金宇慶)을 6 품으로 천전(遷轉)시키도록 한 명을 정지할 것을 청하고, 또 제궁가(諸宮家)가 시장(柴場)을 광범위하게 점유한 폐단과 연해(沿海)에서 고기잡이로 얻은 이익을 제멋대로 거두어들이는 폐단을 혁파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전남 감사 이태연(李泰淵)이 치계하였다.
"7 월 보름 이후로 큰비가 계속 내리면서 한 달이 다 되도록 그치지 않아 벼곡식이 크게 손상을 입고 목화가 모조리 썩었으니 백성의 일이 염려스럽습니다."
경상 감사 민희(閔熙)가 치계하였다.
"우병사를 영접하러 나온 하인들이 함양(咸陽)에 이르러 길이 물에 막혀 내를 건너지 못하게 되자 하류를 따라 농가의 배를 빌려 타고 건너던 도중 17인이 익사하였으니 놀랍고 참혹하기 그지없습니다."
8월 18일 무오
정익(鄭榏)을 우부승지로, 조윤석(趙胤錫)을 동부승지로, 안후열(安後說)·오두인(吳斗寅)을 수찬으로, 박승건(朴承健)을 장령으로, 이광직(李光稷)을 정언으로, 서필원(徐必遠)을 예조 참의로 삼았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여 금림군(錦林君) 딸의 상(喪)에 해조로 하여금 상수(喪需)를 넉넉히 지급하게 하였다. 효종조(孝宗朝)에 청국(淸國)의 구왕(九王)이 우리 나라와 혼인 관계를 맺고 싶어서 사신을 보내 공주를 요구하였는데, 효종이 그의 뜻을 어기기를 어려워한 나머지 종실(宗室)인 금림군 이개윤의 딸을 선택하여 의순 공주(義順公主)라고 일컬은 다음 구왕에게 보냈었다. 그뒤 구왕이 죽자 청국에서 그 딸을 구왕의 수하 장수에게 주었었는데, 개윤이 마침 사명(使命)을 받들고 연경(燕京)에 들어가서 정문(呈文)하여 귀환시켜주기를 청하자 청나라 사람들이 내보내는 것을 허락했었다. 그러다가 이때에 이르러 병들어 죽자 상이 애달프게 여겨 관(官)으로 하여금 그 상을 돌보아주게 한 것이다.
신시(申時)에 흰 구름 한 가닥이 곤방(坤方)에서 일어나 손방(巽方)을 가리켰는데 길이가 10여 길[丈]쯤 되었다.
8월 19일 기미
예조 판서 김수항(金壽恒)이 소장을 진달하였는데 그 대략에,
"벼슬을 받고나면 사직소를 올리는 것이 사부(士夫)의 상례(常禮)이기 때문에, 성명(聖明)께서 신이 당한 낭패스러운 형편을 잘 살피지 못하시리라 여겨집니다. 대각은 격탁양청(激濁揚淸)하는 곳인 만큼 법문에 구애되는 일을 바로잡으려 하는 것이야말로 사리상 당연한 일인데 물의(物議)가 일단 크게 일어났으니 여정(輿情)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성명(成命)을 거두어 주소서."
하니, 상이 너그럽게 비답하며 허락하지 않았다.
사간 이민적(李敏迪)이 ‘수항의 직질(職秩)이 오른 것이 특지(特旨)로 말미암은 것인 만큼 뒷날의 폐단에 관련이 있다.’는 이유로 탄핵하여 바로잡으려고 완석(完席)에서 발론(發論)하였는데 정언 김만균(金萬均)이 극력 저지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수항이 이와 같이 상소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수항이 일찍이 많이 모인 자리에서 술에 취해 민적을 매도한 일이 있었는데, 어떤 이는 말하기를 ‘민적이 논박하려 했던 것 역시 보복하려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고 하였다.
8월 20일 경신
여성제(呂聖齊)를 정언으로, 민정중(閔鼎重)을 대사간으로, 이민서(李敏叙)를 교리로 삼았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이 달 27일에 노량(鷺梁)에서 열무(閱武)하고 싶으니, 병조에 분부하라."
하니, 정원이 진계(陳啓)하기를,
"침 맞으시는 일을 얼마 전에야 정지시켰고 능(陵)에 참배할 기일이 또 박두했는데 강가에 나가 찬 기운을 쐬시면 더치기가 쉬울 것이니 열무하시는 일을 중지하소서."
하였는데, 답하기를,
"나의 질병을 내가 어찌 소홀히 하겠는가. 경들은 염려하지 말라."
하였다. 병조가 계품(啓稟)하기를,
"훈국(訓局)의 군병들에게는 이제 막 분부했습니다마는, 어영군(御營軍)의 경우는 부번(赴番)하지 않은 지가 이미 오래됩니다. 신번(新番)이 25일에야 상경할 예정인데, 이틀 사이에 점열(點閱)하여 단속하고 27일에 합동 조련하도록 주선하기란 형세상 역부족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니, 상이 답하기를,
"군대란 불시(不時)에 대비하는 것인데, 어떻게 날짜를 정해서 하겠는가."
하였다. 교리 김우형(金宇亨) 등이 상차하여 열무하는 일을 중지하도록 청하니, 답하기를,
"도성 안의 군병이 날이 갈수록 점점 모손(耗損)되어가 노약자가 절반을 차지할 정도가 되었다. 만약 친히 열무하는 일도 없이 그냥 포기해 버린다면, 어떻게 뜻밖의 사태에 대비한다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8월 21일 신유
좌의정 원두표(元斗杓), 우의정 정유성(鄭維城), 병조 판서 김좌명(金佐明)이 청대(請對)하니, 상이 희정당(熙政堂)에서 인견(引見)하였다. 두표가 아뢰기를,
"노량(鷺梁)의 백사장이 무척이나 광활한데 얼마 안 되는 군병을 포열(布列)하여 진으로 배치시킬 경우 모양이 형편없이 될 뿐만이 아닙니다. 게다가 즉위하신 뒤에 처음으로 행하는 열무(閱武)의 거조인데 친림(親臨)하여 조련케 하는 일이야말로 사체(事體)가 중대하니 쓸쓸하게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형세로 볼 때 상번(上番)하는 어영군(御營軍)은 필시 열무하기에 역불급일 것이니, 능(陵)에 참배하신 뒤로 날짜를 물려 행하시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다음 달은 날씨가 필시 추워질 것이니, 이것이 염려스럽다."
하였다. 두표가 아뢰기를,
"9월의 가을볕이 그다지 싸늘하지는 않을 것인데, 뭘 그렇게까지 걱정하십니까.
"하고, 남용익(南龍翼)이 아뢰기를,
"대신의 말을 따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능에 참배한 뒤인 9월 4, 5일쯤으로 날짜를 물려 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용익이 또 아뢰기를,
"안질이 오래도록 낫지 않으신 탓으로 경연(經筵)을 오랫동안 정지하였으니, 능에 참배하시고 나서는 곧바로 경연을 여셔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지 않았다. 두표가 아뢰기를,
"능에 참배하신 뒤에는 으레 춘당대(春塘臺)에서 열무(閱武)하는 규례(規例)가 있어 왔습니다. 이렇게 외방의 거자(擧子)142) 가 모두 모이는 날을 당하여 정시(庭試)를 거행해서 인재를 뽑는 거조가 마땅히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고, 유성이 아뢰기를,
"무변(武弁)에도 인재가 부족하니, 무과를 실시해서 같이 뽑는 일을 그만둘 수 없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9월에 관무재(觀武才)143) 하는 것으로 정하라."
하였다. 유성이 아뢰기를,
"능에 참배하시는 일이 앞으로 다가왔는데 예조 판서 김수항(金壽恒)이 오래도록 출사(出仕)하지 않고 있으니 변통하는 일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패초(牌招)하여 출사토록 하라."
하였다. 유성이 조복양(趙復陽)으로 하여금 그대로 진휼청의 일을 관장케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행 대사간 이상진(李尙眞)이 전주(全州)에서 수백 언을 진달하며 상소하였다. 맨 처음에 궁가(宮家)에서 전장(田庄)을 지나치게 설치한 것과 대계(臺啓)를 끝까지 거부하는 것의 부당함을 진달하고, 다음에 과장(科場)에서 사정(私情)을 쓰는 폐단을 진달하는 등 누누이 그치지 않았는데, 상이 너그럽게 비답하면서 본직(本職)의 체차를 허락하고 몸을 조리(調理)한 뒤 올라오도록 유시하였다.
8월 23일 계해
윤문거(尹文擧)를 대사헌으로 삼았다.
예조가 열무(閱武)할 날짜를 9월 9일로 택해 아뢰니, 4일로 고치도록 명하였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접위관(接慰官) 윤석(尹晳)이 사명(使命)을 받들던 중에 객사(客死)하였으므로 내 마음이 무척이나 애달프다. 지나는 각읍으로 하여금 호상(護喪)하여 보내도록 하라."
예조가 아뢰기를,
"대왕 대비전의 환후가 평상으로 회복되었으니, 고묘(告廟)하고 진하(陳賀)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병조가 아뢰기를,
"북로(北路)의 봉화(烽火)가 중도에 끊어지는 것에 대해 이미 3도(道)의 감사에게 사문(査問)을 실시했는데, 다시 더 신칙한 뒤 전과 같은 일이 있을 경우 도신(道臣)과 병사(兵使)를 모두 죄주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허가하였다.
8월 26일 병인
이익(李翊)을 지평으로, 안후열(安後說)·박세견(朴世堅)을 장령으로, 오두인(吳斗寅)을 집의로, 송시철(宋時喆)을 헌납으로, 김휘(金徽)를 형조 참판으로 삼았다.
예조가 계품(啓稟)하기를,
"고려조(高麗朝)의 구릉(舊陵)에서 경작하고 목축하는 일을 금단토록 전에 성교(聖敎)를 받들었기에 낭청(郞廳)을 파견해 적간(摘奸)해서 대략 바로잡았습니다. 그리고 고려 태조(太祖)는 통일한 공이 크기 때문에 2백 보(步)를 한도로 금표(禁標)를 세우고, 현종(顯宗)·문종(文宗)·충경왕(忠敬王) 같은 이들도 일컬을 만한 공이 있기 때문에 1백 50보로 한계를 정한 뒤 일일이 개록(開錄)하여 뒷날 상고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그중에서 변통해야 할 일들은 신들의 부서에서 감히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으니, 대신에게 의논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뒷날 등대(登對)할 때 품처(稟處)하도록 하라."
하였다.
8월 29일 기사
대사간 민정중(閔鼎重), 사간 이민적(李敏迪), 헌납 송시철(宋時喆), 정언 김만균(金萬均) 등이 대청(臺廳)에 나아가 청대(請對)하니, 상이 답하기를,
"내가 몸이 좀 좋지 않아 아직도 땀이 그치지 않는데, 혹시라도 더칠까 염려되니, 의견이 있으면 서계(書啓)하도록 하라."
하자, 정중 등이 연명(聯名)하여 인피하였는데 그 대략에,
"강연(講筵)을 오래도록 정지하여 언로(言路)가 점점 막히고 있으므로 나름대로 걱정하고 사랑하는 정성에서 앙달(仰達)하고 싶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자로 간략하게 진달드리는 것만으로는 애타는 마음을 다 펼치기에 부족할 듯하기에 한번 직접 뵙고 깊이 경계시켜드리고 싶어서 감히 입대(入對)를 청했던 것인데, 성상께서는 몸이 좀 좋지 않아 인견할 수 없노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성상께서 얼마나 불편하신지 신들은 모르겠습니다만, 군신(君臣)은 부자(父子)와 같으니, 와내(臥內)로 불러들여 물어보신다고 하더라도 안 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신들이야 아무리 보잘것이 없다 하더라도 관직이 대간의 이름을 띠고 있고 진달드리고자 하는 것은 국사(國事)인데, 성상과 지척의 거리를 두고도 끝내 나아가 뵐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성상께서 신들이야 경시하신다 하더라도 대각을 중히 여겨 언로를 열어야 한다는 것만은 생각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신들이 그대로 자리에 있을 면목이 없게 되었으니, 체척(遞斥)을 명하소서."
하였다.
약방이 아뢰기를,
"삼가 듣건대 성상의 옥후가 조금 좋지 못한 징후가 있다고 하였는데, 지금은 성체(聖體)가 어떠하십니까? 이에 감히 문안드립니다."
하니, 답하기를,
"이 병이야 대간의 말을 막을 목적에서 그리 된 것이니 혹 병세가 더친다 한들 신료들이 꼭 걱정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경들만큼은 염려하지 말라."
하였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이번에 피혐한 대관(臺官)들 모두가 예전부터 패초(牌招)를 해도 병을 핑계대고 나아오지 않은 사람들은 아닌가? 본원에서 조사해 볼 수 없겠는가?"
하니, 정원이 회계(回啓)하기를,
"이 대관들이 혹 패초에 응하지 않았을 때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갑자기 분부를 받들게 되어서 제대로 조사해 낼 수가 없으니, 황공하기 그지 없습니다."
하자, 상이 알았다고 답하였다. 우승지 이은상(李殷相), 동부승지 조윤석(趙胤錫) 등이 아뢰기를,
"대관이 인피한 것은 걱정하고 사랑하는 정신에서 발로된 것이고, 또한 대각(臺閣)의 체통을 보존하기 위해 행해 온 구례(舊例)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교(下敎)에 화평함이 결여되었기에 감히 이렇게 계달(啓達)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화평함이 결여된 책임이 나에게 있는가. 계사(啓辭)의 뜻을 내가 실로 이해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그리고 민정중 등의 피사(避辭)에 답하기를,
"내가 처음에 말한 것은 성의(誠意)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런데 그대들이 병을 핑계대는 것으로 의심할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했겠는가. 그대들은 기세만 내세우지 말고 사직하지 말도록 하라."
하니, 은상 등이 재계(再啓)하며 봉환(封還)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이에 비답을 대청(臺廳)에 전하여 보여주니, 정중 등이 다시 인피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 정중이 일찍이 옥당에 있었을 때, 선왕(先王)께서 그때 마침 옥후가 좀 불편하셨던 탓으로 오랫동안 인접(引接)하는 일을 정지하셨었습니다. 그런데 본관(本館)이 상차하여 경계하는 말씀을 진달드리자 그날 즉시 사대(賜對)하셨는데, 천안(天顔)을 우러러 뵈니 그때도 땀이 채 마르지 않았고 음성 역시 화기를 잃은 상태였었습니다. 그런데도 질병을 무릅쓰고 전상(殿上)에 나오시어 한참 동안이나 자문하셨었으니, 선왕의 성덕(聖德)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옛 사람들이 임금이 병들었을 때 뵙기를 청했던 경우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런데도 군부(君父)의 병을 걱정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죄를 주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가령 신들에게 죄가 있다면 곧바로 견벌(譴罰)을 가하시는 것이 옳지, 문안한 것에 대한 비답을 내리시면서 또 그쪽으로 노여움을 옮기시는 것은 부당합니다. 그리고 약을 의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신 데 있어서는 또한 ‘대상에 따라 그에 적절한 감정의 반응을 보인다. [喜怒在物]’는 성인(聖人)의 도(道)가 못 될 듯싶습니다. 신들이 형편없이 임금을 섬긴 탓으로 엄한 분부를 갑자기 받게 되었으니, 신들을 삭직(削職)시켜 주소서."
하였다. 상이 한 가지 일로 재차 피혐한 것을 봉입(捧入)한 것은 부당하다는 이유로 승지를 꾸짖으니, 은상 등이 ‘엄한 분부를 받고 재차 피혐하는 것이야말로 전례(前例)로서, 한 가지 일로 재차 피혐한 것과는 같지 않다.’고 진달하였는데, 상이 승지를 추고하도록 명하고 피초(避草)를 도로 내주었다.
사신은 논한다. 근년에 강연(講筵)을 오래 폐지한 탓으로 곧은 말을 듣기가 드물게 되었으니, 간관(諫官)이 직접 뵙고 잘못을 진달드리려 생각한 그 의도는 정말 좋은 것이었다. 다만 상이 일단 병을 이유로 거절하면서 소회(所懷)를 글로 진달하게 하였고 보면, 정중 등의 입장에서는 자세하게 살펴 서계(書啓)를 하거나 아니면 우선 물러갔다가 뒷날을 기다렸어야 옳았다. 둘 중 어느 한 가지를 택해도 안 될 것이 없었는데, 무턱대고 인피하면서 그 말도 완곡하게 하지 못한 나머지 상의 노여움이 거듭 진동하고 엄한 분부가 잇따라 내려지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그러나 상의 입장에서도 약방의 의계(議啓)에 대한 비답이나 정원이 누차 아뢴 데 대한 비답, 그리고 간관의 피사(避辭)에 대해 준엄하게 배척한 하교, 승지가 봉환(封還)하자 추고하라고 내린 명(命) 등이 모두 ‘허심 탄회하게 듣고 받아들이는 도리’에 어긋났으니, 어찌 탄식을 금할 수 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5책 5권 52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344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왕실-국왕(國王) / 역사-편사(編史) / 사법-탄핵(彈劾)
사신은 논한다. 근년에 강연(講筵)을 오래 폐지한 탓으로 곧은 말을 듣기가 드물게 되었으니, 간관(諫官)이 직접 뵙고 잘못을 진달드리려 생각한 그 의도는 정말 좋은 것이었다. 다만 상이 일단 병을 이유로 거절하면서 소회(所懷)를 글로 진달하게 하였고 보면, 정중 등의 입장에서는 자세하게 살펴 서계(書啓)를 하거나 아니면 우선 물러갔다가 뒷날을 기다렸어야 옳았다. 둘 중 어느 한 가지를 택해도 안 될 것이 없었는데, 무턱대고 인피하면서 그 말도 완곡하게 하지 못한 나머지 상의 노여움이 거듭 진동하고 엄한 분부가 잇따라 내려지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그러나 상의 입장에서도 약방의 의계(議啓)에 대한 비답이나 정원이 누차 아뢴 데 대한 비답, 그리고 간관의 피사(避辭)에 대해 준엄하게 배척한 하교, 승지가 봉환(封還)하자 추고하라고 내린 명(命) 등이 모두 ‘허심 탄회하게 듣고 받아들이는 도리’에 어긋났으니, 어찌 탄식을 금할 수 있겠는가.
8월 30일 경오
대사간 민정중(閔鼎重) 등이 다시 인피(引避)하였는데, 도승지 남용익(南龍翼) 등이 누누이 진계(陳啓)하며, ‘간관을 접견하여 그들의 소회를 진달케 하고 승지 등을 추고하라는 명을 환수할 것’을 청하니, 대신에게 내린 비답에서 이미 유시하였다고 답하였다.
좌의정 원두표(元斗杓)와 우의정 정유성(鄭維城)이 상차하여 뇌정(雷霆)과 같은 위엄을 거두고 화평한 뜻을 통쾌하게 보여 중외(中外)로 하여금 모두 본 모습으로 돌아온 해와 달의 모습을 보는 것처럼 하게 하기를 청하니, 답하였다.
"어제 내가 병 때문에 소견(召見)할 수가 없었는데, 시급한 일이라면 서계(書啓)해도 될 것이고, 글로 뜻을 다 밝히지 못하겠으면 조금 사이를 두고 기다렸다가 다시 청하는 것이 옳을 것이기에, 내가 서계하도록 하라고 답하였다. 그런데 화만 잔뜩 내고 사정은 간과해 버린 채 이렇게까지 사람을 의심할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했겠는가. 세도(世道)와 인심이 정말 개탄스럽다. 그러나 경들이 이토록 차자를 올려 말을 하니, 내가 유념토록 하겠다."
집의 오두인(吳斗寅), 교리 김우형(金宇亨) 등이 상차하여 전후로 내린 미안한 비답을 거두어 언로(言路)를 열 것을 청하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대사간 민정중 등이 연명(聯名)하여 피혐(避嫌)한 데 대해 답하였다.
"지금 피혐한 내용을 보고 나 혼자 웃었다. 소회(所懷)를 진달하려 하다가 갑자기 망령되게 화를 내다니, 충성심이 격발되면 과연 이런 것인가. 시급한 일이 아니라면 내 병이 나을 때까지 조금 기다려라. 그러면 어찌 면대(面對)할 날이 없겠는가."
자의 대비전(慈懿大妃殿)의 체후가 좋지 못했다가 평상으로 회복되었기 때문에 종묘(宗廟)에 고하고, 중외(中外)에 교서(敎書)를 반포하고, 잡범과 사죄(死罪) 이하를 사면하고, 백관을 가자(加資)하였다. 백관이 전문(箋文)을 대전(大殿)과 대비전에 올려 진하(陳賀)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거둥하실 때 양사(兩司)의 관원이 모두 참석해야만 비로소 예(禮)를 거행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간원의 관원들이 현재 인피(引避) 중이라서 진하(陳賀)할 때 나와 참석할 인원이 없으니,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니, 답하기를,
"진하하는 예를 생략할 수는 없다. 간원의 관원들에게 이미 사직하지 말라고 일렀으니, 나와 참석토록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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