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일 신미
헌부가 진계(陳啓)하여 승지를 추고(推考)하라는 명을 환수하기를 청하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대사간 민정중(閔鼎重) 등이 인피(引避)하였는데 그 대략에,
"전후로 성상의 비답을 받들건대, 신자(臣子)의 극죄(極罪) 아닌 것이 없었으니, 분의(分義)로 볼 때는 본디 물러가 엎드려 견벌(遣罰)을 기다렸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마침 진하(陳賀)하는 대례(大禮)를 만났는데 시각은 자꾸만 지체 되어 가고 또 전교를 받들게 되었기에 뻔뻔스럽게도 반열에 나아오긴 했습니다만 명기(名器)를 욕되게 하였으니 신들의 죄가 더욱 크기만 합니다.
간원의 관원 모두가 청대(請對)했다면 사체가 이미 중해진 것입니다. 그런데 성상께서는 비답하시면서 또 몸이 좀 불편하다고 분부하셨는데, 잠시 맞아주신다고 해서 뭐 그리 크게 방해될 것까지야 있겠습니까. 변변치 못한 신들의 소망은 실로 이런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을 뿐, 어찌 추호라도 군부를 의심하는 마음에서 그런 것이었겠습니까. 그런데 삼가 대신의 차자에 내린 비답을 보건대 말씀하신 뜻이 지극히 엄하였는데, 심지어는 인심과 세도(世道)를 개탄하기까지 하셨습니다. 이로써 보건대 성상의 의심은 아직 풀리지도 않았는데 단지 대례가 임박한 까닭에 우선 나와 참석하게 하신 것일 뿐 신들을 용서해 줄 만하다고 여겨서 그러신 것은 아닙니다. 이와 같은 죄를 지고서 그대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수는 없으니, 신들을 삭직(削職)시켜 주소서."
하고, 이어 물러가 물론(物論)을 기다렸다. 집의 오두인(吳斗寅) 등이 처치(處置)하여 출사(出仕)시키기를 청하니, 따랐다.
9월 2일 임신
대사간 민정중(閔鼎重) 등이 패(牌)를 받고도 나오지 않은 뒤에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는데, 집의 오두인(吳斗寅) 등이 처치하여 체직시키를 청하니, 답하기를,
"고의적으로 패에 응하지 않은 잘못을 저질러 기필코 체직되려 하다니 성경(誠敬)하는 마음이 결여되었다. 따라서 금일 처치할 때에는 한갓 구례(舊例)만 따라서는 안되니, 모두 출사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집의 오두인 등이 인피하였는데 그 대략에,
"전하께서 일단 출사하도록 하셨으니, 이제부터 온화하신 안색으로 장려하고 문의하시어 충성스러운 말을 다 할 수 있게 하시면, 그야말로 성인께서 말씀하신대로 시비 곡직을 계교하여 이기려는 마음이 없고[犯而不校] 노여움을 다른 데로 옮기지 않으며 두번 다시 같은 허물을 짓지 않는다[不遷不貳]는 것으로서 덕성(德性)을 함양하는 일대 기회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신들은 그저 구례만을 따라 경솔하게 체직시키기를 청한 실수를 면치 못하였으니, 신들을 체직시켜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리고, 민정중 등이 또 다시 인피하여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옥당이 처치하여 모두 출사시키기를 청하니, 따랐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9일에 능(陵)을 참배하고 12일에는 열무(閱武)할 일로 해조에 분부하라."
9월 4일 갑술
대사간 민정중(閔鼎重) 등이 고양 군수(高陽郡守) 윤후익(尹後益), 영평 현령(永平縣令) 심추(沈樞), 양성 현감(陽城縣監) 김해(金垓)의 체직을 청하면서 며칠 동안 논집(論執)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윤허하였다.
예조 판서 김수항(金壽恒)이 상차하였는데 그 대략에,
"자전(慈殿)의 건강이 회복된데 따른 과거(科擧) 실시 문제와 관련하여, 대신이 정시(庭試)에 합설(合設)하는 것은 미안하다고 하면서 별시(別試)로 실시하기를 청했습니다. 이는 대체로 양조(兩朝)144) 의 성헌(成憲)을 준수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정시로 하든 별시로 하든 함께 경축하는 뜻은 마찬가지입니다만, 그에 따른 폐단은 다른 점이 있습니다. 별시를 거행할 경우에는 초시(初試)에서 강경(講經)케 한 뒤 전시(殿試)를 보여야 하니 잇따라 차례로 과장(科場)을 설치해야 합니다. 형세로 볼 때 군색하고 촉박한 점이 있을 뿐만 아니라, 과거에 응시하느라 수령들이 고을을 비우게 되는 폐단 역시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 반면 정시로 보일 경우에는 외방의 거자(擧子)들이 혹 와서 응시한다 하더라도 한 번만 출입하면 곧바로 해산해 돌아갈 수 있으니, 비용을 절약하는 면에서 크게 차이가 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이미 확정된 춘당대(春塘臺)의 정시에서는 관무재(觀武才)만 행하고, 별도로 정시를 설치해서 보통 때보다 숫자를 늘려 시취(試取)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더구나 과거를 자주 거행하는 것이야말로 아름다운 일이 못됩니다. 올 봄에 증광시(增廣試)를 거행한 지 얼마 되지 않는 때에 또 정시와 별시의 양시(兩試)를 설행(設行)한다면, 한 해 안에 몇 번이나 중첩해서 과거를 보이는 것이 되니, 온당치 않을 듯싶습니다."
하였다. 소(疏)를 들이자 비국에 내렸는데, 비국이 회계(回啓)하여 그 의논대로 따를 것을 청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9월 5일 을해
박승건(朴承健)을 장령으로, 안후열(安後說)을 교리로, 이숙(李䎘)을 수찬으로 삼았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전일 청대(請對)했던 간관(諫官)들을 모두 패초(牌招)하여 대신과 함께 동시에 입시(入侍)토록 하라."
하고, 이어 희정당(熙政堂)에서 인견하였다. 호조 판서 정치화(鄭致和)가 각년(各年)의 포흠(逋欠)된 곡식에 대해 3분의 2를 징수토록 청하자, 이조 판서 홍명하(洪命夏)가 반절을 감해 받아들이도록 청하였는데, 제신(諸臣) 대부분이 명하의 의견에 동조하여 상이 따랐다. 사간 이민적(李敏迪)이 아뢰기를,
"신이 지난번에 궁가(宮家)의 면세전(免稅田)을 6백 결(結)로 하는 것은 너무 많다고 진달드렸는데 성상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으므로 삼가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때 내가 결수(結數)를 정하려고 하다가 못했는데, 5백 결로 한도를 정하면 어떻겠는가?"
하자, 명하와 민적이 모두 너무 많다고 하였는데, 김좌명(金佐明)은 아뢰기를,
"전일 인견한 뒤에 신들이 물러가 상의했었는데, 모두들 5백 결이라면 너무 많은 것은 아닌 듯하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좌우에 하문하자 삼사(三司)의 제신(諸臣) 역시 대부분 수긍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대군(大君)과 공주는 5백 결로써 한도를 정하고, 왕자와 옹주는 3백 50결로 한도를 정하되, 절수(折受)한 것 가운데 진결(陳結)이 있으면 모두 실결(實結)로 보충해 주도록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일 청대(請對)했던 대관(臺官)들은 앞으로 가까이 오라."
하니, 민정중(閔鼎重)이 아뢰기를,
"신이 괴이하고 망령스럽게 일을 처리하여 누차 엄한 비답을 받았는데, 이제 인접(引接)해 주시니 황공스럽기 그지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대들이 말하고 싶어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니, 정중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건강이 좋지 못하시다가 이제 다행히 조금 나으셔서 능에 참배하는 일과 열무(閱武)하는 일을 차례로 거행하게 되었는데, 유독 경연(經筵)만은 오래도록 폐지하신 채 인접하시는 일이 매우 드물기 때문에 신이 삼가 안타깝고 답답하게 여겼습니다. 인주(人主)가 마음을 태만히 갖고 소홀히 하는 것이야말로 난망(亂亡)으로 이끌어지는 조짐입니다. 그 동안의 일을 보건대 ‘현사(賢士)를 접견하는 때는 드물고 환관이나 궁첩(宮妾)을 가까이 하는 날이 많다.’고 경계한 말에 가깝지 않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안질에는 글을 보는 것이 가장 해롭기 때문에 책상(冊上) 공부가 중단됨을 면치 못하였는데, 이 점을 나도 무척이나 안타깝게 생각한다. 이제는 조금 나아진 듯하니 앞으로 경연을 열려고 한다. 그런데 지난번 그대들이 청대했을 때는 한창 이불을 덮고 땀을 내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에 인견을 할 수 없어 소회(所懷)을 서계(書啓)토록 했던 것이다."
하니, 정중이 아뢰기를,
"경연을 열 수 없다 하더라도 유신(儒臣)으로 하여금 읽게 하고 들으신다면 어찌 조금이나마 보탬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삼가 듣자니 때때로 후원(後苑)에서 말[馬]을 조련하시고 작은 표적에 활을 쏘곤 하셨다 합니다. 거리에 나도는 이야기를 믿기는 어렵습니다만, 혹시 그런 일이 있지는 않았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설령 내가 그런 뜻을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기력이 감당치 못했을 것이다."
하였다. 민적이 이어서 경연을 열고 강학(講學)해야 할 일을 누누이 진달하니, 상이 승지에게 앞으로는 관례대로 품(稟)하고 일을 보도록 하였다. 정중과 민적이 함께 해서(海西) 궁장(宮庄)의 폐단 및 윤겸(尹㻩)을 죄주어야 하는 정상에 대해 진달드리니, 상이 이르기를
"홍처윤(洪處尹)이 마음을 공평하게 가지지 못하고 윤겸을 함께 법사(法司)에 내릴 것을 청하기까지 하였으니, 너무 심하지 않은가."
하였다. 신하들 대부분이 민정(民情)과 직결되어 있는 만큼 궁가의 둔전을 혁파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대사간 민정중이 진구(賑救)할 때 조가(朝家)의 명령을 즉시 봉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상 감사 민희(閔熙)와 전라 감사 이태연(李泰淵)의 파직을 청하니, 따랐다. 또 객사(客使)가 공갈을 치자 개인적으로 너무 많이 뇌물을 주었다는 이유로 평안 감사 임의백(任義伯)과 병사(兵使) 김체건(金體乾)을 탄핵하며 파직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객사가 장차 도착할 것인데 이 소문을 들으면 번거롭게 될 것이니, 올라 온 뒤에 추고하도록 하라."
하였다. 홍명하가 아뢰기를,
"전일 성상의 위엄이 거듭 진동하던 끝에 이렇듯 사대(賜對)하시는 조용한 거조가 계시게 되었으니, 입시한 신하들로서 그 누가 감동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간원이 아뢴 것을 보건대 대부분 긴요치 않은 내용만 있고 마땅히 말해야 할 일은 언급하지 않고 있으니, 신이 진달드릴까 합니다. 호조 참판 서원리(徐元履)와 참의 홍처후(洪處厚)는 당초 회계(回啓)를 잘못한 것 때문에 특명으로 파직시켰었는데, 다시 고쳐 복계(覆啓)를 올리자 격외(格外)로 휴가를 더 주는 명까지 받았으므로 외부의 의논이 이 점에 대해서 불쾌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원리가 처음에 착오한 실수를 저지르기는 하였다. 그러나 호조의 당상은 적임자를 택해야 마땅한데, 원리야말로 대신의 추천을 받은 자이기 때문에 휴가를 더 주게 된 것이다. 어찌 그가 내 뜻을 받들어 순종했다고 해서 그런 것이겠는가."
하였다. 정중이 아뢰기를,
"원리가 앞뒤로 회계한 것을 보면 두 사람의 손에서 나온 것 같은데, 성상께서 전에는 특별히 파직시켰다가 뒤에 가서 휴가를 더 주셨으므로, 뭇 사람들이 모두 ‘성상께서 뜻을 어긴 것은 미워하셨다가 순종한 것을 기뻐하신 것이다.’고 합니다. 신도 원래 이 일을 말씀드리려 하다가 잊어버리고 미처 진달드리지 못했으니, 중신(重臣)이 배척을 한 것은 당연합니다. 신을 체척(遞斥)시켜 주소서."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이르고, 이어 승지를 돌아보며 이르기를,
"물의(物議)가 이와 같으니, 참판 서원리와 참의 흥처후는 모두 체차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이민적이 아뢰기를,
"전일 이창현(李昌炫)의 일에 대해 신이 해조(該曹)의 사체(事體)를 들어 논계한 적이 있었습니다. 출가한 딸에게는 일단 연좌율(連坐律)이 적용되지 않고 보면, 역가(逆家)의 사위를 종신토록 폐기시키는 일은 없어야 할 듯하니, 한번 품정(稟定)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고, 홍명하가 아뢰기를,
"신도 일찍이 그 사람이 애석하니 종신토록 폐기시켜서는 안 된다는 뜻을 진달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서경(署經)을 하는 관직에는 임명할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청화직(淸華職)과 서경을 하는 관직을 제외한 나머지 직책에 임명토록 하라."
하였다.
9월 7일 정축
이조 판서 홍명하(洪命夏)와 예조 참판 조복양(趙復陽) 등이 상차하기를,
"간원이 서로(西路)의 감사와 병사를 파직시키도록 요청한 일은 체례(體例)에 합당하다고 할 만합니다. 그러나 이 말이 혹시라도 전파되면 필시 뒷날 말썽을 일으킬 소지가 될 것이니, 이 점이 가장 염려됩니다. 그리고 듣건대 객사(客使)가 요구하는 숫자가 전해진 소문처럼 많지는 않다고 하는데, 감사 임의백(任義伯)은 요리하고 관장한 일이 많이 있으니, 경솔하게 체직시켜 생소한 사람에게 맡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였는데, 차자를 들이자 안에 놓아 두었다.
9월 9일 기묘
인시(寅時)에 상이 거둥하여 진시(辰時)에 영릉(寧陵)에 가서 전알(展謁)하고 능역(陵域)을 두루 살핀 뒤, 홍문(紅門)으로 걸어나와 소교(小轎)를 타고 현릉(顯陵)에 가 전알한 다음, 목릉(穆陵)에 가서 현릉에게 하던 의식대로 행하였다. 마지막으로 건원릉(健元陵)에 가서 먼저 망릉례(望陵禮)를 행하고 작헌례(爵獻禮)를 마친 뒤, 이어 비석 아래로 가 비문을 보았다. 상이 이르기를,
"다른 능에는 비를 세우지 않았는데, 이곳만 비를 세운 이유는 무엇인가?"
하니, 승지 이은상(李殷相)이 아뢰기를,
"건원릉과 헌릉(獻陵)에만 비가 있고 다른 능에는 비가 없는 이유는 대체로 뒤에 일종의 논의가 일어나 ‘비를 세워 찬양하는 것은 미안스럽다’고 했기 때문에 비 세우는 일을 중지하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하는데, 이것 역시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비석의 글을 지은 자와 쓴 자 그리고 전자를 쓴 자는 누구인가"
하니, 은상이 아뢰기를,
"권근(權近)이 글을 지었고 성석린(成石璘)이 글씨를 썼으며 정부(鄭傅)가 전자를 썼습니다."
하였다. 유창(兪瑒)이 아뢰기를,
"비 후면에는 태조(太祖)의 공신(功臣)들을 기재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기재된 자들은 누구누구인가?"
하자, 남용익(南龍翼)이 아뢰기를,
"개국(開國)·정사(定社)·좌명(佐命)의 세 부류 공신들이 기재되어 있는데, 각각 줄을 달리하여 열서(列書)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그들의 명단을 읽게 하여 들은 뒤, 이어 산의 향배(向背)를 하문하니, 용익이 비의 후면을 살펴보고 아뢰기를.
"계좌(癸坐)에 정향(丁向)입니다."
하였다.
응교 남구만(南九萬) 등이 상차하여, 올 때처럼 말을 치달리지 말고 천천히 환궁(還宮)하도록 청하니, 답하였다.
"차자를 올려 이렇게까지 말하니, 유의하겠다."
미시(未時)에 상이 어가(御駕)를 돌려 돌아오다가, 주정소(晝停所)에 머물렀을 때, 좌상 원두표(元斗杓), 우상 정유성(鄭維城), 이판 홍명하(洪命夏), 병판 김좌명(金佐明)이 청대(請對)하여 입시하였다. 양상(兩相)이 같은 말로 아뢰기를,
"전일 인견(引見)할 때, 간원이 평안 감사와 병사를 탄핵하여 파직시키도록 청하였는데, 그 말이 정말 옳기는 합니다. 다만 감사를 체차시켜 바꿔서는 안 될 일이 있기에 신이 처음에 진달드리려 하다가 머뭇거리고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영의정의 장계를 보건대, 칙사(勅使)의 행차가 또 나온다는 소문이 있다고 하니, 이런 때일수록 바꿔서는 더욱 안 됩니다. 잉임(仍任)시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 생각에도 당초부터 파직시키는 것은 불가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거행 조건(擧行條件)을 아직 도로 내려보내지 않고 있는데, 이는 대체로 나름대로 헤아리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러 의견이 이와 같으니, 거행 조건을 고쳐서 분부해야 하겠다."
하였다. 두표가 아뢰기를,
"그때 쓴 비용 역시 너무 지나치지는 않았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행차가 송계(松溪)를 지날 때, 금군장(禁軍將)에게 하교하여 먼저 사하리(沙河里) 들판으로 가서 진(陣)을 치고 대기하게 하였는데, 상이 진 앞에 이르러 진을 해산토록 하고 동서로 말을 치달리며 살펴 보았다. 신시(申時)에 대내(大內)로 돌아왔다.
9월 10일 경진
비국이 아뢰기를,
"열무(閱武)할 때의 절목(節目) 가운데 훈국(訓局)의 군병과 어영군(御營軍)을 합쳐 1 개 진(陣)으로 하는 사항이 있는데, 두 대장의 의견이 다르니, 기일 전에 품정(稟定)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두 대장을 명초(命招)하여 인견하고 하문하였다. 이완(李浣)은 아뢰기를,
"양국(兩局)을 합쳐 1 개 진으로 하는 것이 곧 선조(先朝) 때 행했던 규례(規例)인데, 유혁연(柳赫然)은 말하기를 ‘이렇게 하면 대장이 호령을 할 수가 없으니 이것이 결점이다.’고 합니다."
하고, 혁연은 아뢰기를,
"양국의 군사를 하나로 하여 같은 영내(營內)에 둔다 하더라도, 응변(應變)할 때에는 각자 알아서 진을 펼치고 호령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같은 영내에 있을 적에 각자 호령하는 것이 부당할 듯하다. 그러나 군사를 출동시켜 합전(合戰)할 때에는 역시 각자 진을 나누고 응변해야 할 것이다."
9월 11일 신사
헌부가 윤선도(尹善道)의 위리(圍籬)를 철거토록 한 명을 환수하려고 전부터 아뢰어 온 일을 이때에 이르러 정지하였다.
삼가 살피건대, 안치(安置)하는 것과 위리 안치하는 것이 얼마나 차이가 나며 고달픈 생활 역시 얼마나 다르겠는가. 그런데도 몇 개월 동안이나 번거롭게 아뢰다가 이때에 와서야 정계(停啓)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송시열에게 아첨하여 자기가 영달할 발판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지 꼭 모두가 선도에 대해 지극히 화를 내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세도(世道)가 이와 같으니, 무슨 것인들 못하겠는가. 서글퍼질 따름이다.
대사간 민정중(閔鼎重) 등이 상차하기를,
"능침(陵寢)을 전알(展謁)하실 적에 조고(祖考)께서 한숨을 쉬시며 위에서 내려다 보시는 것 같았으니, 창업(創業)과 수성(守成)의 어려웠던 점과 계승하는 일의 쉽지 않음을 생각하시어 조금도 중단됨이 없이 이를 마음 속에 간직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경연(經筵)을 열고 근실하게 신료를 인접하시는 등의 일에 대해서는 성명(聖明)께서 이미 신들에게 허락하셨습니다마는, 해서(海西) 궁장(宮庄)의 일에 대해서만은 헌부의 신하가 이미 오래 전부터 논집했고 신들 역시 일찍이 면대(面對)하여 진달드렸는데도 지금까지 어렵게 여기고 계십니다. 혹시 신들의 말은 믿을 수 없는 반면 내정(內庭) 차인배(差人輩)들의 말은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셔서입니까? 마음 속 깊이 바라건대, 사사로운 정에 이끌리지 마시고 공의(公義)로 단안을 내리시어 다툼의 대상이 되는 전지를 빈민에게 나눠 주도록 하는 동시에 새로 내린 영(令)을 엄격히 집행하여 멋대로 침해하는 일이 근절되게 하소서. 그리고 제궁가(諸宮家)에 검약하는 미덕을 가르치고 여러 신료에게 염치로써 훈계하는 한편 시골 호족(豪族)들이 멋대로 점유하고 있는 시장(柴場)과 어장(漁場)도 모두 똑같이 혁파하도록 하소서. 그러면 수십 년 동안 구부러지고 뒤틀린 폐단으로부터 하루 아침에 벗어나게 됨은 물론 언로(言路) 역시 기운을 더욱 얻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너그럽게 비답하였다.
9월 12일 임오
상이 노량(鷺梁) 백사장에 나아가 열무(閱武)하였다. 좌측 훈국(訓局) 병사들이 진을 변화시키는 속도가 너무 느리자 중군(中軍) 정부현(鄭傅賢)을 잡아들이도록 명하여 곤장 20대를 치고, 마병(馬兵)이 진퇴하면서 차서를 잃었다는 이유로 별장(別將) 정한기(鄭漢驥)에게 곤장 7대를 쳤다. 그리고 훈련 대장 이완(李浣)과 어영 대장 유혁연(柳赫然) 및 어영 중군 윤천뢰(尹天賚)에게 각각 숙마(熟馬) 1필(匹)을 하사토록 명하고, 유시(酉時)에 환궁하였다.
9월 13일 계미
대사간 민정중(閔鼎重) 등이 아뢰기를,
"인후(人後)145) 가 된 자를 아들로 삼는 것이야말로 상경(常經)이요 통의(通義)입니다. 일단 그가 낳아 준 부모를 백(伯)·숙(叔) 부모로 삼은 이상 친자(親子)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데도 세상에서는 보통 인정상 친자를 중히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혹 계후(繼後)146) 한 뒤에 친자를 낳게 되면 결국 친자로 봉사(奉祀)하게 하고 소후자(所後子)는 중서(衆庶)로 만들어버리고 맙니다. 이는 곧 부자(父子) 관계가 임시로 맺어진 셈이 되니, 윤기(倫紀)가 이로 말미암아 문란해진다 하겠습니다.
일찍이 인조조(仁祖朝)에 예관(禮官)이 호안국(胡安國)의 고사를 인용하면서 소후자로 봉사케 할 것을 청하여 윤허를 받고 확정지었으므로 고(故) 상신(相臣) 최명길(崔鳴吉) 등의 집에서도 모두 이 법을 준수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뒤로 사부(士夫)들이 가끔 예율(禮律)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다시 친자를 적자(嫡子)로 삼고 있으니, 윤리를 손상시키는 것이 크다 하겠습니다. 예관이 다시 이를 밝히도록 하여 인조조 때 분부를 받은 이후로 이를 어긴 자가 있으면 일일이 개정하게 하소서.
사원(史苑)의 고풍(古風)을 보건대, 하번(下番)인 자는 복제(服制)를 당하게 되어도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못하게 되어 있는데, 이는 대체로 사관(史官)의 일을 중시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복에는 경중이 있는 만큼 공법(公法)으로나 사정(私情)으로 볼 때 참여하지 않으면 안 될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가령 조부모 이하의 기년복(朞年服)을 당하게 되었을 경우, 나가 곡을 하지도 못한 채 초상에 아직 염(殮)을 하거나 빈소도 차리기 전에 조복(朝服)이나 공복(公服)을 입고 임금이 계시는 곳에서 일을 한다고 한다면, 아무리 사관의 일이 중하다 하더라도 예교(禮敎)를 또한 손상시키게 될 것입니다. 정원에 명하여 대신에게 의논해서 모두 성복(成服)한 뒤에 출사(出仕)하도록 허락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대신에게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라."
하였다. 이때 고상(故相) 심지원(沈之源)의 집에서 소후자를 놔두고 친자로 적자를 삼으려고 하자, 물의가 떠들썩하게 일어났기 때문에 정중이 예(禮)에 근거하여 이와 같이 논한 것이었다.
전남도 고창현(高敞縣)에 사는 백성의 아내가 한꺼번에 세쌍둥이 남자 아이를 낳았는데, 본도가 계문하였다.
9월 14일 갑신
대사간 민정중(閔鼎重) 등이 평안 감사와 병사를 일단 파직시켰다가 도로 잉임(仍任)시키는 것은 국가의 체통을 손상시키는 일이라는 이유로 파직을 청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9월 15일 을유
유경창(柳慶昌)을 대사헌으로, 곽제화(郭齊華)를 장령으로, 김만균(金萬均)을 수찬으로, 이단석(李端錫)을 정언으로, 홍중보(洪重普)을 우참찬으로 삼았다.
상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원두표(元斗杓)가 아뢰기를,
"강변에 사는 청나라 사람들이 예전부터 간혹 국경을 넘어 온 때가 있긴 하였습니다만, 지금처럼 많은 경우는 있지 않았습니다. 이는 우리가 이자(移咨)하여 질책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이토록 기탄없이 행동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의논들 대부분이 봉황성(鳳凰城)에 보고해야 한다고들 하는데, 평안 감사 임의백(任義伯)의 의견은 조금 다릅니다. 즉 그의 의견은 ‘먼저 일을 처리할 만한 사람을 봉황성의 장수에게 보내어 말하게 하기를 「청나라 사람들이 국경을 넘어 온 것이 전후로 한두 번이 아니었다. 만약 조정이 이 사실을 안다면 필시 주문(奏文)하여 죄를 청하는 일이 있을 것인데, 우리들이 우선 숨겨두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이 뒤로 또 다시 넘어 올 경우에는 사세상 조정에 보고하고 상국(上國)에 전주(轉奏)하는 일이 될 것이다.」 하면, 그 역시 두려워하는 바가 있을 것이니, 그런대로 국경을 넘어오는 걱정거리를 없앨 수 있을 것이다.’라는 것인데, 이 말에 소견이 없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봉황성에 말한다 하더라도 강변의 호인(胡人)들이 어떻게 알겠는가?"
하자, 두표가 아뢰기를,
"봉황성의 장수가 강변의 제부(諸部)를 관장한다고 하니, 알아서 금지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그렇겠다고 하였다. 김좌명(金佐明)이 적(賊)을 잡은 데 대한 상가(賞加)가 너무 외람스러운 폐단에 대해 극구 진달하였는데 상이 어느 정도 그럴 듯하게 여기면서도 변경시키는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 정치화(鄭致和)가 아뢰기를,
"호조 수세선(收稅船)의 태반이 장부에 허위로 기재되어 있는 상태인데, 지금은 배가 있는지의 여부도 따지지 않은 채 강제로 선세(船稅)를 받고 있으니 이게 연해 지역의 커다란 폐단입니다. 해도(該道) 감사로 하여금 각처(各處)에 소속된 것들을 일일이 조사해내어 참작해서 수량을 정하게 하고, 그밖의 나머지 선척(船隻)은 모두 본조에 소속시켜 세금을 거둘 수 있는 여지를 마련케 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대사헌 유경창(柳慶昌)이 평산(平山)과 신천(信川) 두 고을의 궁둔(宮屯)을 혁파할 것과 평산 부사 윤겸(尹㻩)을 나문(拿問)하여 정죄(定罪)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윤겸에 대해 아뢴 것만 윤허하였다. 유경창이 또 아뢰기를,
"전일 승지가 입시했을 때 이미 대청(臺廳)에 나가 있었던 대관(臺官)을 입시시키자고 청하지 않았으니, 당해 승지를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아르기를,
"대관이 알아서 입시를 청해야 마땅하다. 그가 이미 청하지 않았는데, 승지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9월 16일 병술
하번(下番) 사관(史官)의 복제(服制)를 변통하는 일에 대해 대신들이 헌의(獻議)하였다. 영부사 이경석(李景奭)이 의논드렸는데 그 대략에,
"신이 어려서부터 석학 노유(老儒)의 말을 익히 들었는데, 이 법을 설치한 것이 단지 사국(史局)의 일이 중하기 때문에서만이 아니라 상번과 하번의 분한(分限)을 조금이라도 경홀히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기강을 유지한 것이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조정의 체면을 높게 하려는 데에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국조(國朝) 이래로 노성(老成)하고 예를 아는 경사(卿士)가 적지 않았는데도 일찍이 이를 고치려 한 사람이 없었으니, 이는 어쩌면 ‘예란 분한을 정하는 것이 가장 크다.’는 유의(遺意)를 취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조정에서 새로 법을 정하는 것은 고례(古禮)에 위배될 듯하니, 감히 다른 의논을 드리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좌상 원두표(元斗杓)와 우상 정유성(鄭維城)은 의논드리기를,
"조종조(祖宗朝)에서 이 규례를 준수해 온 것은 대개 사국을 중히 여기는 뜻에서 나온 것으로서 이미 오래 전부터 관례화되었으니, 감히 섣불리 의논드리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의논대로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9월 17일 정해
정언 이단석(李端錫)이 의계(議啓)하였는데 그 대략에,
"사국(史局)에 대한 잘못된 규례를 대신에게 의논해 변통시킬 일을 진달드려 윤허를 받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대신이 의논드린 것들을 보건대, 참작한 뜻은 전혀 없이 억지로 잘못된 규례를 끌어다가 정리상 차마 하지 못할 일로 사람을 억누르고 있으니, 과연 이것이 예로써 아랫사람을 이끄는 도리란 말입니까. 정원에 명하여 다시 대신에게 의논해서 헤아려 변통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미 수의(收議)하였는데 다시 의논케 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하였다.
계후자(繼後子)가 있는데도 친자(親子)로 봉사(奉祀)케 하는 것을 개정하는 일에 대해 대신들이 헌의(獻議)하였다. 영부사 이경석(李景奭)이 아뢰기를,
"신이 삼가 국조(國朝) 가정(嘉靖)147) 계축년148) 의 수교(受敎) 내용을 듣건대, 후사(後嗣)를 세운 뒤에 친자를 낳았을 경우에는 친자로 봉사케하고 계후자는 중자(衆子)로 대우하여 양자로 된 것을 파기시키지 못하게 하였었습니다. 그런데 또 인조조(仁祖朝)에는 고(故) 상신(相臣) 최명길(崔鳴吉)이 계후한 뒤에 아들을 낳았는데. 호 문정공(胡文定公)149) 의 고사를 따라 계후자로 장자(長子)를 삼게 해 줄 것을 청하여 윤허를 받았었습니다. 전후의 영갑(令甲)150) 이 이와 같기는 합니다만, 천륜(天倫)이 한번 정해지면 그 차서는 바꿀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옛사람들의 예를 찾아 보건대, 제갈 무후(諸葛武侯)151) 는 아들이 없어 형인 제갈근(諸葛瑾)의 아들 제갈교(諸葛喬)를 아들로 들였는데 그 뒤에 아들 제갈첨(諸葛瞻)을 낳았어도 교를 적자(嫡子)로 삼았고, 호 문정공 안국도 형의 아들 호인(胡寅)을 양자로 들였는데 뒤에 두 아들 호영(胡寧)과 호굉(胡宏)을 낳았어도 인을 후사로 삼았으니, 이것이야말로 본받을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지금 만약 대계(臺啓)대로 인조조의 수교 아래로 위배한 자들을 일체 바로잡으려 할 경우, 세월이 이미 많이 흘러 구근(久近)이 일정치 않을 테니, 들쭉날쭉 차이가 나 잘못되는 결과를 면치 못할까 염려됩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오늘부터 다시 밝히고 중외(中外)에 포고하여 반정(反正)한 뒤의 수교(受敎)를 영구히 항식(恒式)으로 삼게 했으면 합니다. 그러면 위로는 가정 연간의 수교를 폐기하는 것이 되지도 않고 아래로는 인조조의 성헌(成憲)도 어기지 않는 것이 되어, 편리할 듯싶습니다."
하고, 좌의정 원두표(元斗杓)는 아뢰기를,
"인후(人後)가 된 자를 아들로 삼는 것이야말로 《예경(禮經)》의 분명한 가르침입니다. 간혹 자기 소생으로 승중(承重)케 하는 일이 있는데, 이는 윤서(倫序)를 밝히고 적사(嫡嗣)를 중히 여기는 뜻이 결코 못됩니다. 이번에 간관이 예경에 의거하여 증거를 제시했는데 또 인조조의 수교까지 있으니, 신이 어떻게 감히 의견을 달리 하겠습니까."
하고, 우의정 정유성(鄭維城)은 아뢰기를,
"일단 입후(立後)한 뒤에는 부자의 윤기(倫紀)와 적서(嫡庶)의 차서가 이미 정해진 것입니다. 예경의 뜻이 지극히 엄한데, 어떻게 자신의 소생(所生)이라 하여 윤리를 문란시킬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인조조의 수교가 분명히 있어 조신(朝臣)들 또한 대부분 준행하고 있는데, 신이 어떻게 감히 다시 의논을 달리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가정 계축년의 수교에 의거하여 시행하라."
하였다. 그 뒤에 사간 이민적(李敏迪)이 수교대로 시행하라고한 명을 취소하도록 계청(啓請)하였는데, 상이 끝내 따르지 않았다.
9월 18일 무자
상이 선정전(宣政殿)의 상참(常參)에 나아갔다. 정언 이단석(李端錫)이 아뢰기를,
"계후자로 승중(承重)케 해야 한다는 좌상과 우상의 의견은 본원의 계사(啓辭)와 서로 부합되는 것이었는데, 이제 ‘일체 계축년의 수교(受敎)대로 하라.’고 분부하셨으므로 신은 삼가 의아하게 생각됩니다. 명종조(明宗朝)의 수교 내용이 그러하긴 하나 인조조(仁祖朝)의 수교 역시 따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아르기를,
"명종조의 수교는 그 일 때문에 직접 분부하신 것이고 인조조의 수교는 다른 일로 말미암아 분부하신 것이므로 윤허하지 않은 것이다."
하였다. 교리 김만기(金萬基)가 아뢰기를,
"세대가 워낙 멀고 옛일을 자세히 알기 어려워 그때 그렇게 분부를 내리신 본래 의도를 알지는 못하겠습니다만, 친자를 낳은 뒤에 계후자를 파기시킨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렇게 분분하게 계후자를 파기시키지 말도록 분부를 내리셨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부자 관계는 인륜 가운데서도 가장 중한 것인데, 일단 정해진 뒤에 어떻게 자기 소생이니 계후자니 하여 차별을 둘 수 있겠습니까.
영부사 이경석(李景奭)이 의논드린 내용 가운데 이른바 제갈 무후(諸葛武侯)와 호안국(胡安國) 등의 일이야말로 상법(常法)으로 정할 만한 것이니, 일체 인조조의 수교에 의거하시어 대계(臺啓)를 따르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만기가 또 아뢰기를,
"선비를 대우하는 도리에 알찬 내용이 있어야만 선비를 오게 할 수가 있고, 말을 들어주는 도리에 그 실상이 있어야만 말을 하도록 할 수가 있는 법입니다. 지난번에 이유태(李惟泰)가 상소하면서 시설(施設)할 일을 많이 아뢰었는데 아직까지 채택해 쓰는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송준길(宋浚吉)이 상소를 올리면서 또한 이 점을 언급하기도 하였는데 역시 자문을 구하여 채택해 쓰신 일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보면 유태가 올라 오려 하지 않는 것도 형세상 당연한 것이니, 대신을 인접(引接)하시는 날 조목별로 자문하시어 채택해 쓰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비국에 내렸다."
하였다.
9월 20일 경인
장령 박세견(朴世堅)이 청대(請對)하여 입시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무슨 일로 청대하였는가?"
하니, 세견이 나아가 아뢰기를,
"지난번 능을 참배하고 돌아오실 때 군병에게 기사(騎射)를 시키지 않으셨고 열무(閱武)하실 때의 기상 역시 상당히 조용하셨으므로 정말 좋게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대장과 중군(中軍)이 질서 정연하게 진(陣)을 변화시키지 못하자 직접 지휘하시겠다고 분부를 내리기까지 하셨는데 그 즈음에 서두르는 기색이 완연하셨습니다. 전하의 마음 속에 늘 이런 생각이 자리잡고 있는 것은 결코 치심(治心)의 요결이 못된다 할 것입니다."
하고, 정명도(程明道)가 저녁 때 돌아오다가 사냥하는 광경을 보고는 벌써 떨쳐버렸다고 생각해왔던 사냥 생각이 문득 일어났다는 고사까지 인용하면서 확인을 시키니, 상이 이르기를,
"열무하는 목적은 익숙하게 조련시키기 위함이요, 친림(親臨)하는 목적은 근만(勤慢)을 살펴보기 위함이다. 나라를 다스리는 자로서 융정(戎政)을 전혀 망각할 수는 없는 일이니, 나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세견이 아뢰기를,
"경연을 오래도록 폐지하자 아랫사람들이 안타깝고 답답하게 여겨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교외에 거둥까지 하셨으면서 경연만은 열려고 하지 않으시는데, 어리석은 아랫사람들로서야 그 누가 성상의 건강이 계속 좋지 않다는 것을 알겠습니까. 유신(儒臣)을 이처럼 드물게 인접(引接)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일은 안질이 너무 심해 문자를 보는 것도 방해가 되더니, 요즘은 급성 천식의 증세가 있어 말로 수작(酬酌)하는 것도 방해가 되기에 인접을 못한 것이다."
하였다. 세견이 이어 전계(前啓)를 진달하며 평산(平山)과 신천(信川) 두 고을의 둔전(屯田)을 혁파하고 궁노(宮奴)와 부화뇌동한 자들을 모두 조사해내어 치죄하도록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장령의 이른바 수본(手本) 가운데 ‘땅은 넓은데 전결은 작다는 일’에 관해서는 철저히 조사토록 하고, 궁노 역시 본도로 하여금 조사해내게 하라."
하였다. 세견이 아뢰기를,
"외방에 거주하는 종실(宗室)들에게 녹봉을 지급하지 않는 것은 친친(親親)해야 하는 도리에 비추어 볼 때 너무나 야박한 일이니, 녹봉을 지급토록 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세견이 또 아뢰기를,
"궁가(宮家)의 면세전(免稅田)에 관한 일을 전일 가까스로 품정(稟定)했습니다마는, 5백 결(結)은 너무 많은듯 싶습니다. 일찍이 선묘(宣廟)와 인묘(仁廟) 양조(兩朝) 때 궁가 면세전의 숫자에 많고 적은 차이는 있었지만 모두 간략하게 하려고 하여 어떤 경우에는 직전(職田)의 숫자에도 미달되는 적이 있었는데, 이것이야말로 전하께서 본받으셔야 할 점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다시 더 참작해 정해서 중도에 합당한 결과가 나오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해서는 논계하여 쟁집해야 마땅하지만 등대(登對)할 때 조용히 아뢰는 것이 더 나을 듯 하기에 신이 감히 진달드리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노여워하는 기색으로 이르기를,
"논계하려면 곧장 논계할 것이지 어찌 이런 식으로 말한단 말인가. 꼭 다시 정하고 싶다면 예전대로 놔두도록 하라."
하자, 세견이 아뢰기를,
"신이 어리석고 망령된 견해를 전하의 앞에서 감히 아뢰다 보니 뜻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탓으로 성상께서 이렇게 분부하시게까지 하였으니 정말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이미 일을 논하는 체례(體例)를 잃었으니, 어떻게 감히 자리에 태연히 있겠습니까. 체직시켜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9월 21일 신묘
사간 이민적(李敏迪)이 인피하였는데 그 대략에,
"전일 궁가(宮家) 면세전(免稅田)의 결수(結數)를 품정(稟定)할 때, 신이 처음부터 끝까지 강력히 쟁집(爭執)하지 못한 탓으로 마침내 성조(聖朝)에 지나친 거조가 있게끔 하였으니, 신의 죄를 모면할 길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삼가 호조의 회계(回啓)를 보건대, ‘시장(柴場)은 관동(關東) 지역만 혁파하고 해서(海西) 지방은 논하지 않았으며, 화전(火田)은 산 중턱 이상만 금하고 금령(禁令)을 다시 밝힌 일은 없었으며, 경기 지역은 산림과 천택(川澤)을 절수(折受)한 곳 모두 혁파한 일이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해서 지역을 혼동해서 논했던 것은 사실을 잘못 알았던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화전의 경우는, 계사년152) 에 현우석(玄禹錫)의 상소에 따라 마침내 금령을 내렸었고, 무술년153) 에 비국의 재신(宰臣)들을 인견했을 때 선왕께서 분부하시기를 ‘서로(西路) 산전(山田)의 폐단이 끝이 없다. 심지어는 나라의 명산(名山)이라 할 총수산(葱秀山)마저 이런 걱정을 안고 있는데, 이 모두가 역을 피한 유민(流民)들의 행위 때문이니, 통분스럽고 놀랍기 그지없다. 금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었는데, 그 뒤에 강원 감사가 치계(馳啓)하기를 ‘본도는 평지가 거의 없는데, 전지(田地)가 없는 백성들로서는 유산(流散)할 수 밖에 없는 형편이니, 산 중턱 이하에 대해서는 화전을 허락해 주소서.’ 하여 윤허를 받았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선왕께서 처음부터 혁파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었는데, 단지 산 중턱 이하를 허락하신 것은 생업이 없는 백성들에게 잠정적으로 빌려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말한다면 호조의 회계야말로 제대로 살피지 못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경기(京畿)의 천택(川澤)이 혁파 대상에 들어 있지 않았다고 한 것도 호조에서 살피지 못한 부분입니다. 기민(畿民)의 역은 외방에 비해 훨씬 고달픈데, 시장과 어장을 일체 제멋대로 탈취하도록 내맡겨 둔다면, 심산(深山) 궁해(窮海)의 백성들이 모두 살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신은 듣건대 태조(太祖) 왕자의 경우 본과(本科)가 겨우 1백여 결에 지나지 않았고 《대전(大典)》이 반포될 때에 이르러서는 직전(職田)이 2백여 결에 달했다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무려 1천 4백 결이나 되는 면세전도 등장하였는데, 성상께서 조금 줄이시어 5백 결로 한도를 정한다 하더라도 국초(國初)에 비하면 몇 배나 되고 중세에 비하더라도 두 배의 규모가 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더구나 시장과 강해(江海)를 절수(折受)케 한 일은 조종조에 없었던 일이고, 화전마저 절수케 한 일은 지난해에도 있지 않았던 일입니다. 이익은 모조리 사문(私門)에 들어가고 국가는 원망만 받고 있으니, 이 어찌 깊이 미워하고 크게 걱정해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은 직무를 잘 수행하지 못하여 장차 배척받아 떠나야 할 몸입니다만, 그래도 변변치 않으나마 소회만큼은 다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신이 이미 임금의 비위를 미리 맞춰 따른 죄를 지었으니, 체직시켜 주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비답하였는데,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헌부가 처치하여 그의 출사를 청하고, 박세견(朴世堅)의 출사도 청하니, 따랐다.
9월 23일 계사
대사간 민정중(閔鼎重)이 소장을 진달하여 사직하였는데, 대체로 경연을 여는 일과 궁장(宮庄)을 혁파하는 일과 사신(史臣)이 상을 당했을 때 성복(成服)을 허락해주는 일과 입후자(入後子)를 적자(嫡子)로 삼는 일 모두에 대해서 윤허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상이 체면(遞免)을 허락하지 않자, 정중이 또 이를 이유로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는데, 장령 이단석(李端錫)이 처치하여 출사시키기를 청하니, 따랐다.
정언 여성제(呂聖齊)가 상소하여, 각아문(各衙門)의 둔전(屯田)을 모두 호조에 귀속시키고 제궁가(諸宮家) 면세전(免稅田)의 곡물을 모두 경창(京倉)에 수송해 들인 뒤 직전제(職田制) 처럼 그 집에 나누어 줄 것을 청하고, 포목을 징수토록 한 영(令)을 완화하여 곤궁한 백성들을 위로할 것을 청하고 윤절(尹晢)의 장례 때에 특별히 은혜를 베풀어 은의(恩義)를 극진히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너그럽게 비답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김만기(金萬基)가 진달드린 데 따라 이유태(李惟泰)의 상소 내용을 품처(稟處)하라고 명을 내리셨습니다. 그런데 그 상소문이 무려 수천 백 언이나 되니, 허다한 절목 중에 먼저 하고 나중에 할 것과 완만하게 하고 시급히 해야 할 것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유태가 수 년에 걸쳐 미루어 헤아린 결과 터득한 내용 깊은 것이라고 할 것인데, 그저 문자대로만 해석해서 범연히 조처한다면, 본래의 의도와 어긋나는 일들이 많이 생길 것입니다. 신들의 의견으로는, 더욱 성실히 예로써 불러 기필코 당사자를 오게 한 뒤에 함께 상의하여 차례차례 거행했으면 하는데,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충청도 회덕현(懷德縣)의 간민(奸民)이 몰래 전패(殿牌)를 훔쳐 갔는데, 그 현을 혁파하였다.
황해도 풍천부(豊川府)에 크게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려 벼곡식이 상했는데, 감사가 치계하여 보고하였다.
장령 박세견(朴世堅)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근래 양사(兩司)가 제궁가(諸宮家)의 폐단을 논하자 성상께서 슬기롭게 살펴 주시어 이미 재품(裁稟)토록 허락을 받았는데, 조사 과정에서 분분하게 잡음이 일어나 결국 흐지부지 되고 말았으니, 나라의 기강이 해이되는 것이 전적으로 이에 말미암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다시 낭묘(廊廟)154) 와 시종과 중외(中外)의 유사로 하여금 조용히 헤아려 바로잡게 해서 아름다운 뜻이 결국에는 착실하게 귀착되게 함은 물론, 고질적인 폐단이 일체 개혁되어 근절되도록 하소서. 그러면 실로 기강을 다시 정비하고 쇠퇴한 기운을 떨쳐 일으키게 하는 일대 계기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면세전을 5백 결로 한정지은 것이야말로 손익 관계를 짐작해서 은혜와 의리 양쪽 모두를 온전케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마는, 선조(宣祖)와 인조(仁祖) 양조(兩朝) 때 내려준 예와 비교한다면, 지금 절수(折受)된 것이 예전에 비해 월등합니다. 그래서 대의(大意)는 좋지만 여정(輿情)이 흡족하게 여기지 않기에, 신이 감히 어리석고 망령된 견해를 대략 진달드리면서 선조(先朝)의 훌륭하신 궤범(軌範)을 참작케 해드리려고 하였습니다만, 그 뜻을 제대로 표현해 전달하지 못했으니, 신에게 본디 죄가 있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전하께서 진정 사정(私情)에 가려진 것을 통렬히 제거하고 단연코 이를 실행으로 옮겨 전대(前代)를 빛내고 후세를 넉넉하게 할 수 있는지의 여부가 바로 지금 한번의 거조에 달려 있다 할 것인데, 어떻게 구차하게 하고 그만 둘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재야(在野)의 유현(儒賢)에게 일마다 자문을 구하면서 이런 의논에는 오히려 참여할 수 없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중대한 일일수록 더욱 충분히 그 대책을 강구해야 하는 법인데, 이번의 이 일은 또 국맥을 계속 이어가는 일대 계기가 되는 일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신의 망령된 생각에, 면대(面對)해서 진달드리는 것이 그래도 문자로 아뢰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라고 여겨졌기에 등대(登對)했을 때 대략 진달드린 바가 있었는데, 성상께서 노여워하시며 분부를 내리시는 바람에 황공한 마음으로 갑자기 인혐하게 된 나머지 마음 속의 간절한 정성을 미처 다 진달드리지 못했으니, 또한 신의 죄라 할 것입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속히 배척하여 물러가게 해 주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소를 보고 잘 알았다.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라."
하였다.
밤에 유성(流星)이 구진성(句陳星)·천원성(天苑星)·삼기성(參旗星)·문창성(文昌星) 아래에서 각각 나왔는데, 모두 적색에 길이가 한 길[丈] 남짓 되었다.
9월 26일 병신
대사간 민정중(閔鼎重)이 인피하기를,
"외람되게 언책(言責)을 담당한 몸으로 일을 당해 혹만 더 붙였으므로 황공하고 부끄러워 몸둘 바를 모른 나머지 패소(牌召)에도 응하지 못했으니, 신을 삭직해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는데, 정언 이단석(李端錫)이 처치하여 체직시키기를 청하니, 따랐다.
윤강(尹絳)을 형조 판서로, 서원리(徐元履)를 함경 감사로, 이상진(李尙眞)을 행 대사성으로, 이홍연(李弘淵)을 대사간으로, 안후열(安後說)을 헌납으로, 이광직(李光稷)을 지평으로 삼았다.
병비(兵批)가 아뢰기를,
"시약청(侍藥廳)에서 약을 의논한 의관들에게 가자(加資)하는 일을 병조로 하여금 거행하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그런데 유후성(柳後聖)은 현재 숭록 대부(崇祿大夫)155) 의 자계(資階)에 있는 만큼 지금 만약 가자한다면 보국(輔國)156) 으로 올려야 할 것인데, 의관의 경우 보국에 오른 전례(前例)가 없으니,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법전에 그 품계를 허락하지 말라는 조례가 있지 않다면, 그보다 뛰어난 공을 세운 의관은 없으니, 법전대로 시행토록 하라."
하였다. 병비가 또 아뢰기를,
"《대전(大典)》을 가져다 상고해 보건대, 정1품의 자급을 받는 대상에 한계를 둔다고 내건 조문은 없었습니다. 다만 보국 숭록 대부는 곧 정1품으로서 삼공(三公)과 같은 등급인 만큼 체례상 매우 중대한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조정의 반열에 있어서도 불편한 점이 많이 있게 될 뿐 아니라 약방에서 약을 의논할 때의 좌차(坐次)에 있어서도 어려운 점이 있게 됩니다. 과거 선조조(宣祖朝)에 양평군(陽平君) 허준(許浚)을 책훈(策勳)하고 군(君)으로 봉해 주면서도 자급은 숭록 대부에 그치게 하였는데, 조종조에서 그렇게 행했던 뜻이 우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금 유후성의 출처(出處)나 문지(門地)가 허준과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의관이라는 점은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지금 보국으로 임명하는 일을 창설한다는 것이 실로 타당치 못할 듯하기에 이렇게 감히 신품(申稟)합니다."
하였는데, 비답을 오래도록 내리지 않았다.
영부사 이경석(李景奭)이 소장을 진달하였는데 그 대략에,
"삼가 민정중(閔鼎重)의 상소문을 보건대, 은미하게 한 말이나 드러내 한 말 모두가 신을 죄주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신이 참으로 놀랐습니다. 예를 논하노라면 송사(訟事)에 비유될 만큼 논란이 많은 법인데, 이는 예로부터 그러했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주장이 꼭 옳다고 하면서 이렇듯 각박하게 다른 사람 보고 구차하게 동조하라고 책해서는 안될 듯합니다.
대저 하번(下番)의 사관(史官)이 기년복(朞年服)의 상을 당했을 때 참담한 심정으로 나가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신처럼 혼암(昏闇)한 사람이 들어도 역시 슬픈 마음이 들어 탄식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번이 생각대로 행동하지 못하고 상번(上番)이 감히 섣불리 허락하지 못하게 된 것은 처음에 반드시 의도가 있어 그런 법을 강정(講定)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그런 일을 직접 당한 명현이나 예법을 아는 선비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리고 대각에 있는 신하들 역시 어찌 모두가 예제(禮制)에 어두웠다고 하겠습니까. 그런데도 이 법을 금석(金石)처럼 고수하기만 하고 한번도 반박하는 의논을 낸 적이 없었던 것은 사각(史閣)의 임무가 워낙 중하고 공조(公朝)의 의리가 너무 엄한 나머지 거기에 눌려 그렇게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모상(母喪)을 당해 강복(降服)하는 일은 차마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아비를 높이기 위해서는 강복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지극히 엄한 자리에 있으면서 태사(太史)의 붓을 잡고 있는 자가 사정(私情)을 다 펴지 못하는 것 또한 공조(公朝)의 예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이웃 나라에 사신으로 나간 자가 미처 명을 전하지 못했어도 임금의 부음을 듣는 즉시 돌아오는 것이야말로 주공(周公)이 제정한 예법입니다. 그런데 지난번 국상을 막 당했을 때 어사(御史)가 급히 돌아오자 대론(臺論)이 이를 비난하였는데, 그렇다면 기년상을 당한 사관이 나가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인정상 차마 못할 일이라고 하면서 방상(方喪)157) 을 당했을 때 급히 달려오지 않는 일만은 차마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민정중처럼 예를 아는 자라면 당연히 그 경중을 강명(講明)했을 듯한데, 이런 점은 생각지 않고 기년복을 당했을 때 나가지 못하는 것만을 치우치게 쟁집하고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삼년상은 거들떠보지도 않으면서 시마(緦麻)나 소공복(小功服)만 세밀히 살핀다는 경우에 가까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계후자(繼後子)의 일과 관련하여 신이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근래에 상을 당한 자라면 차서(次序)를 따르기도 쉽고 개제(改題)하기도 쉽겠지만, 세월이 오래 된 경우에는 혹 양가(兩家)의 어버이가 모두 작고한 경우도 있을 것이고 혹 계후자나 자기의 친자 가운데 하나는 죽고 하나는 살아 있는 경우도 있어 사세(事勢)상 불편한 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이를 일체 바로잡는다면 들쭉날쭉 가지런해지지 못할 것은 필연적인 형세라 할 것입니다. 신은 어리석게도 이 점이 염려되기에 ‘지난 일을 그냥 놔둔다 해도 명묘(明廟)께서 내리신 분부를 준수하는 것이 되니 관계가 없을 것이고, 지금부터 신명(申明)한다면 인조조(仁祖朝)의 성헌(成憲)을 영원한 법식으로 삼는 것이 되니, 이렇게 하는 것이 편리할 듯싶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간신(諫臣)이 이를 비난했으니, 신이 어찌 많은 변론을 하겠습니까. 신이 백발로 죽음에 가까운 나이가 되어 이토록까지 남의 미움을 받게 되었으니, 신을 파면하시어 사람의 말에 사과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오늘날 망령된 사람의 말하는 투가 너무도 방자한 데 대해 문제삼을 것이 뭐가 있겠는가. 경은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그리하여 기강을 보존시키고 체면을 손상시키지 않음으로써 나의 뜻에 부응토록 하라."
하였다.
9월 28일 무술
유성(流星)이 오거성(五車星)과 옥정성(玉井星) 아래에서 각각 나왔는데, 모두 꼬리의 길이가 2, 3척(尺)쯤 되었으며 백색이었다.
9월 29일 기해
상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니, 도승지 남용익(南龍翼) 등이 정원에 계류된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시하였다. 장령 박세견(朴世堅)과 정언 이단석(李端錫)이 모두 전계(傳啓)를 가지고 입궐하였는데, 승지가 품청(稟請)하여 추가로 들어왔다. 세견이 아뢰기를,
"근래 궁가에서 너무 외람되게 절수(折受)한 폐단에 대해 모두 개괄적으로 논하였는데, 성명께서 역시 전결의 수를 재정(裁定)하셨으니, 그런 다행이 없습니다. 그런데 소위 주인없는 진황처(陳荒處)라고 하는 곳 모두가 생업이 없는 빈민들이 생활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곳인데, 제궁가에서 한번 절수하고 나면 조금씩 계속 잠식해 들어갈 것이니, 이 폐단이 심해지리라는 것을 그 누가 모르겠습니까. 그런데도 명확하게 변론하고 통렬하게 진달드리는 자가 없는 것을 신은 정말 가슴 아프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절수하는 것을 5백 결(結)로 한정지운 의도가 아름답기는 합니다만, 역시 만세토록 준행할 상전(常典)은 못되니, 다시 재집(宰執)과 시종신과 재야의 유현(儒賢)과 함께 널리 의논하고 참작해서 정하시기를 신은 요청드립니다. 그리고 해언(海堰)이나 산전(山田)을 막론하고 주인없는 진황처라고 일컬으면서 절수한 곳 모두를 각도에 문의한 뒤 재혁(裁革)하시는 가운데 포함시키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노하여 이르기를,
"주인이 있는 전지를 장차 잠식해 들어갈 것이라고 그대가 말했는데, 법령이 존재하는 한 어떻게 그런 일이 있겠는가. 그대가 결수(結數)를 정해 항식(恒式)으로 삼는 것에 대해 폐단이 있다고 말을 하니, 그렇다면 예전대로 한도를 정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용익이 아뢰기를,
"결수를 처음에 이미 널리 의논해서 정했는데, 어떻게 지금 와서 또 고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세견이 아뢰기를,
"상께서 참작하여 정하시는 지금이야말로 일대 기회인데, 이런 때에 합당하게 하지 못한다면 어찌 애석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5백 결은 너무 많기에 지극히 합당한 결과를 이끌어 내려고 신이 생각해서 상달(上達)한 것인데, 뒤죽박죽 어긋나게 말씀을 드린 나머지 이미 정한 제도마저 도로 취소하도록까지 만들었으니, 신은 정말 황공할 따름입니다."
히고, 단석이 아뢰기를,
"세견의 본래 의도는 그런 것이 아니었는데 뜻을 제대로 표현해 전달하지 못한 것일 뿐이니, 다시 결정하시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논계하고 싶으면 몇개월을 쟁집(爭執)해도 좋다. 그러나 어쩌자고 이렇게까지 핍박하단 말인가."
하였다. 용익이 아뢰기를,
"군신(君臣)은 부자(父子)와 같으니, 소회(所懷)가 있다면 어찌 감히 진달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상의 분부는 화평함이 결여된 듯 싶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는 계사(啓辭)의 말에 따라 답했을 뿐이다. 어찌 화평함을 결여한 것이겠는가."
하였다. 세견이 아뢰기를,
"신이 표현을 잘못하여 뜻을 전달드리지 못한 결과 미안한 분부를 내리게끔 수고를 끼쳐드렸으니, 장차 무슨 얼굴로 자리에 있겠습니까. 파직시켜 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별로 미안한 분부를 내린 것도 없는데 어째서 마냥 피혐만 하려 하는가."
하였다. 용익이 미안한 비답을 환수할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일 청대(請對)했을 때 세견의 말을 내가 들었는데, 나는 세견도 이미 알고 있다고 여겼었다. 무슨 불평스러운 분부가 있었단 말인가."
하였다. 이은상(李殷相)과 정익(鄭榏) 역시 비답을 개정할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9월 30일 경자
대사간 이홍연(李弘淵)이 인피하기를,
"본원이 지금 한창 계후자(繼後子)에 관한 일을 개정토록 논계하고 있는데, 신의 혼가(婚家)에도 이런 일이 있으니, 감히 가부를 따질 수가 없습니다."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는데, 정언 이단석(李端錫)이 처치하기를,
"처음부터 누구를 지목하여 배척하지 않고 일반적으로 논한 것이니, 사체로 헤아려 볼 때 피혐할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출사시키소서."
하니, 따랐다.
장령 박세견(朴世堅)이 인피하였는데 그 대략에,
"삼가 듣건대, 어제 거행 조건(擧行條件) 가운데 신이 아뢴 내용을 써서 들인 초본(草本)에 대해 ‘원래 계달하지도 않았으면서 써서 들인 것이 거의 3분의 2나 된다.’고 하교를 내리시기까지 하였으므로 정원이 이 때문에 주서(注書)를 추고하도록 청했다 합니다. 인견을 끝내고 물러나온 뒤에 입시했던 대관(臺官)이 계초(啓草)를 써서 주서에게 보내는 것은 본래 예사인데, 말로 아뢴 내용과 문자로 써서 들인 것에 약간씩 차이가 나는 것은 형세상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일단 엄하게 분부를 내리시어 원초(元草)가 산삭(刪削)되게 되었고 보면,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신같은 자는 폐척(廢斥)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고, 인피하며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는데, 지평 이광직(李光稷)이 처치하여 출사 시키기를 청하니,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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