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일 신축
지평 이광직(李光稷)이 아뢰기를,
"거자(擧子)158) 장천우(張天羽)가 조총(鳥銃) 속에 탄환 두 발을 집어넣은 간악한 정상은 숨길 수가 없는 일인데, 형조가 회계(回啓)하여 장 일백(杖一百)으로 조율(照律)하다니 너무도 헐하게 처리한 듯싶습니다. 일이 매우 놀라우니, 형조의 당상과 낭청을 먼저 파직한 뒤에 추고하고, 장천우는 다시 중하게 과단(科斷)케 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았는데, 과단하는 일만은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사간 이민적(李敏迪)은 ‘대신의 차자에 비답을 내리면서 간신(諫臣)을 꺾어버렸다.’는 이유로, 정언 이단석(李端錫)은 ‘월과(月課)를 미처 제진(製進)하지 못한 탓으로 현재 추고 대상에 들어 있다.’는 이유로, 정언 여성제(呂聖齊)는 ‘일찍이 이 일로 인피했던 만큼 감히 처치할 수 없다.’는 이유로, 대사간 이홍연(李弘淵)은 ‘본원의 관원들이 인피했는데, 그 중 한 조목에 대해서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본인도 피혐해야 한다.’는 이유로, 지평 이광직(李光稷)은 ‘간원의 관원들이 인피했는데, 아비가 현재 간장(諫長)으로 있는만큼 태연히 처치할 수 없다.’는 이유로 모두 인혐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행 호군 이유태(李惟泰)가 공주(公州)에서 수백 언(言)의 상소를 올렸는데, 먼저 신병(身病) 때문에 조정에 나아갈 수 없는 사정을 개진한 다음에 진달하기를,
"선왕께서 영단을 내리고 분발하시어 기필코 삼대(三代)159) 의 정치를 회복시키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으셨는데, 현인을 임용하고 능력있는 자를 선발하고 백성의 고통을 보살펴주고 군정(軍政)을 닦는 등 애쓰시다가 불행히도 먼저 돌아가시는 바람에 웅도(雄圖)가 침몰되고 말았습니다. 그 뒤 전하께서 즉위하시어 유업을 잇게 되셨는데, 뜻을 세운 것이 선왕만 못하고 정치를 행하는 것이 선왕만 못하신 상황에서, 4년 동안 재이가 중첩해서 나타나는가 하면 근래에는 흉년까지 겹쳐 팔도 백성이 유랑하며 굶어 죽고 있으니, 이렇게 된 이유가 어찌 없겠습니까.
전하께서는 덕성면에서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으나 강직하고 씩씩한 면은 부족하고, 무슨 일을 해도 모두가 공도(公道)에 입각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사람을 임용해도 꼭 적임자를 얻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궁가의 사치스럽고 방자하게 구는 습관과 외방의 점유하고 탈취하는 폐단은 날이 갈수록 만연되어 가기만 하고, 농사에는 힘쓰지 않은 채 놀고 먹는 백성들이 아직도 많은 반면, 집에 한톨의 양식도 남아 있는 것이 없어 유리 걸식하는 자들이 줄을 잇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안으로는 신책(神策)의 군사에 결원이 생겨도 보충하지 않아 날로 쇠약해지기만 하고, 밖으로는 변방의 군기(軍器)가 유명무실하여 엉망진창이 되고 있습니다. 이런 종류를 모두 들자면 한이 없을 것인데, 이 모두가 성상의 뜻이 정해지지 않고 국가의 체통이 서지 않아 일어난 결과인 것입니다. 더구나 지금은 선왕께서 가까이하며 믿고 중하게 의지하던 신하들이 이미 전하의 옆에 있지도 않은 상황인데, 아, 이런 상황에서도 징계하지 않는다면 이런 정도로만 그치지는 않을 듯싶습니다.
오늘날 마땅히 해야 할 일들로서 가령 향약(鄕約)·보오(保伍)·사창(社倉)·오위(五衞)·직전(職田)·균역(均役)·양전(量田)·흥학(興學)같은 것들은 모두 시급하게 일시에 거행해야 할 일들입니다. 그래서 신이 지난해 탑전에서 이미 이 설을 진달드렸었는데, 어리석은 생각에는 그래도 채택되는 일이 혹 있으리라 여겼었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한 가지도 시행된 것이 없으니, 물론 신의 말이 시의(時宜)에 부적합하다는 것을 알고는 있습니다만, 삼가 전하께서도 분발하시는 뜻이 없었던 소치라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너그럽게 비답하고, 올라와서 상의하여 거행하라고 유시하였다. 유태의 상소가 7월에 올라왔는데도 오래도록 회보하지 않다가 이때야 비로소 비답을 내렸는데, 이는 대체로 전일 김만기(金萬基)가 이 일을 진달했기 때문이다.
행 사직(行司直) 이상(李翔)이 상소하여, 경연을 오래도록 폐지한 일과 궁가에서 이익을 독점하고 있는 일을 말하고 또 여섯 가지 일을 조목별로 진달하였는데, 말이 매우 용잡(冗雜)스러웠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이 조가(朝家)에서 이미 변통시킨 사안들이었다. 그런데 비국에 계하하자, 비국이 더러 채택해 시행할 것을 청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이상이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에게 빌붙어 유명(儒名)을 절취(竊取)하였기 때문이었다.
금부가 아뢰기를,
"윤겸(尹㻩)의 공초(供招)가 대부분 대계(臺啓)와 상반되고, 내사(內司)의 관원과 부화뇌동했다는 것도 본정이 아닌 듯하니, 참작해서 조율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원정(原情) 가운데 조사할 일을 모두 일일이 분명하게 조사하여 처리하라."
하였다.
10월 2일 임인
상이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열무재(閱武才)하고 문신 정시(文臣庭試)를 설행(設行)하였는데, 좌의정 원두표(元斗杓)와 우의정 정유성(鄭維城) 및 승지와 사관이 입시하였다. 무사에게는 먼저 유엽전(柳葉箭)을 시험토록 하고, 문신에게는 대제학 김수항(金壽恒)에게 명하여 7언 20운 배율(排律)을 출제케 하였는데, 행 부호군 안헌징(安獻徵)이 삼상(三上)으로 수석을, 종부시 정 민점(閔點)이 삼중(三中)으로 차석을, 승지 유창(兪瑒), 장악원 첨정 정석(鄭晳), 교리 김만기(金萬基), 대교 이익상(李翊相) 등 4인이 삼하(三下)로 그 다음을 차지하였다. 상이 좌우에 하문하기를,
"송립(宋岦)은 연로한데도 아직 활을 잘 당기는데, 나이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다."
하니, 두표가 이뢰기를,
"현재 나이가 81세입니다. 그런데 송립은 일찍이 역적 이괄(李适)이 병란을 일으켰을 때 서로(西路)의 수령으로 있었는데, 그에게 협박을 받고 서울로 오다가 중도에서 휘하 군사를 이끌고 돌진하여 귀순해 왔었으니, 그 공이 작지 않습니다."
하였다. 무사들의 활쏘기가 끝나자, 시사(試射)에 뽑힌 문신 및 활을 쏠 줄 아는 당상 이상에게 모두 과녁을 향해 쏘도록 하였다. 병조 판서 김좌명(金佐明)이 아뢰기를,
"정시(庭試)의 초시를 보일 날이 3, 4일밖에 남지 않았는데, 외방의 거자(擧子)들이 운집한 결과 양소(兩所)에 이름을 등록한 사람이 거의 만 명에 이른다 합니다. 미리 규구(規矩)를 내리면 그 가운데 재주가 부족한 자들은 또한 스스로 알아서 물러나 돌아갈텐데, 외부의 의논을 들어보면 모두 강서(講書)를 해야 할 것이라고 합니다."
하니, 두표가 아뢰기를,
"초시에 강서를 하는 규정이 예전부터 있지 않았는데, 어떻게 지금 새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
하자, 좌명이 아뢰기를,
"신이 유혁연(柳赫然)에게 듣건대, 혁연이 등제(登第)할 당시 초시에서 강서를 했다 합니다."
하였다. 기추(騎蒭)의 활쏘기를 아직 끝내지 못한 상태에서 날이 저물자 잠정적으로 파하고, 신시(申時)에 상이 대내(大內)로 돌아왔다.
10월 3일 계묘
상이 또 춘당대에 나아가 관무재(觀武才)하였다. 원두표(元斗杓)가 아뢰기를,
"이번의 정시에 외방의 거자들이 많이 모였는데, 초시에서 뽑는 액수(額數)가 너무 적자 그들 모두가 낙심하고 있다 합니다. 초시의 액수를 참작해서 더 늘려 정하는 것이 본디 온당한 일이겠습니다만, 외부의 의논을 보면 액수를 정하지 말고 규정만 준엄하게 하는 것이 옳다고 하기도 하고, 수백 명으로 액수를 늘려 널리 시취(試取)하는 뜻을 보이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기도 하니, 이 둘 중에서 참작하여 정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김좌명(金佐明)에게 이르기를,
"경의 의견은 어떠한가?"
하자, 좌명이 대답하기를,
"액수를 정하지 말고 규정을 엄격히 하는 것이 더 나을 듯합니다."
하였는데, 이완(李浣)이 아뢰기를,
"신의 생각에는 양소(兩所)에 각각 1백 명씩 더 늘이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하였다. 유혁연(柳赫然)이 아뢰기를,
"신의 의견은 병판과 같습니다. 액수를 정하지 않으면 무사들이 필시 기뻐할 것이고, 규정을 엄격하게 하면 요행을 바라고 참여하는 사람이 없어질 것입니다."
하니, 이완이 아뢰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액수를 정하지 않으면 무사들이 요행을 바라는 마음을 갖게 될 것이고, 규정을 엄격하게 하면 무사들이 기만을 당했다는 원망을 하게 될 것이니, 신은 그렇게 하는 것이 타당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과거를 실시하여 인재를 뽑는 것이야말로 국가의 대사인데, 어떻게 법례를 무너뜨리면서 구차하게 거자의 마음을 따라 주어야 하겠습니까. 양소에서 각각 1백 명씩 더 뽑아 6백 명으로 한도를 정하고 규정을 평이하게 하는 것이 사체로 볼 때 당연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양소에서 각각 2백 명씩 더 뽑아 8백 명으로 한도를 정하라."
하였다. 시사(試射)한 문신 30여 명 가운데 과녁을 명중시킨 자가 겨우 9명이었는데, 사과(司果) 박신규(朴信圭)가 수석을 차지하였다. 날이 저물었기 때문에 일단 파하고 상이 대내(大內)로 돌아왔다.
응교 남구만(南九萬) 등이 양사를 처치하여 모두 출사시키기를 청하면서 장령 박세견(朴世堅)에 대해 아뢰기를,
"그가 논한 것이 이미 옳은 터에 누차 엄한 분부를 받았고 보면 감히 명을 받고 나아오지 못한 것은 정세상 당연한 일입니다. 소패(召牌)에 응해 나오지 않았을 경우 체면(遞免)시킨 예가 있긴 합니다만, 다만 생각건대 일을 말하는 신하가 일단 엄한 분부를 받아서 소명(召命)에 응하지 못할 때마다 이것을 이유로 번번이 체직시키곤 한다면, 시비를 강력히 쟁집하여 성상의 마음을 돌리는 도리가 실로 아닙니다. 지난번 간원의 신하들이 불안한 정세에 처하여 소명에 응하지 못했을 때, 특별히 체직시키지 말라는 분부를 내리시어 앞으로 나아오게 하여 소회(所懷)를 다 진달토록 하셨는데, 이것이야말로 앞으로 본받아 준행해야 할 일이라고 여겨집니다. 요즘의 사소한 규정을 융통성없이 지키고만 있을 수 없으니, 함께 출사시키소서."
하고, 정언 여성제(呂聖齊)는 체차시키기를 청하였는데, 이날 비답을 내리지 않았다.
10월 4일 갑진
상이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갔다. 상이 승지 이은상(李殷相)에게 명하기를,
"옥당의 차자에 대한 비답을 받아 쓰도록 하라."
하니, 은상이 붓에 먹을 적시고 받아 쓸 자세를 취하자, 상이 입으로 불러주기를,
"아뢴 대로 하라. 그러나 박세견(朴世堅)을 처치한 것은 상규에 어긋난 듯하다. 특별히 출사시키는 것은 아래에서 마음대로 할 일이 못된다. 체차시키라."
하였다. 부수찬 이숙(李䎘)이 아뢰기를,
"박세견을 그렇게 처치한 것은 공의(公議)가 그러해서였을 뿐만이 아닙니다. 지난번에 상께서 특별히 간관을 출사시키도록 하신 일이 있었는데, 이 일 역시 같은 규례에 속하겠기에 감히 출사를 청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비답을 들으려고 들어 왔다가 삼가 비답을 보건대 사지(辭旨)가 준엄하기만 하니 황공하기 그지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무슨 의미인가?"
하였다. 은상이 아뢰기를,
"비답을 듣기 위해 탑전에까지 왔다가 이미 엄한 분부를 받들게 되었는데, 대간의 직책이 아닌 신분이라서 피혐도 할 수 없기에 황공하여 대죄(待罪)한다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죄(待罪)한다면 혹 모르겠거니와, 황공하다는 계사를 올리는 규례는 일찍이 없었다."
하였다.
사간 이민적(李敏迪)이 청대하여 입시해서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어사의 직책을 수행하면서 내포(內浦)를 모두 살펴보았는데, 당진(唐津)에서 면천(沔川)까지의 해양(海洋) 1백 리가 임해군(臨海君)과 금양위(錦陽尉) 양가(兩家)에 절수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궁가에서 지금까지도 혹독하게 침해를 가하고 있는데, 요구를 해서 뜻대로 되지 않으면 사정없이 매질을 하곤 하였습니다. 이런 폐단을 상께서 어떻게 아시겠습니까.
그리고 시장(柴場)의 경우, 나라의 명산이라고 할 평산(平山)의 총수산(葱秀山)마저 시장으로 절수하였는데, 이 산이 그러한 형편이라면 다른 산은 알 만합니다. 더구나 경기 지방은 근본이 되는 지역인만큼 이치상 너그럽게 보살펴 주어야 마땅한데, 만약 무턱대고 점유하도록 일체 내맡겨버린다면 도성의 백만 가구가 어디 가서 꼴을 베고 땔나무를 해오겠습니까.
화전(火田)에 대해서는 조종조(祖宗朝)에서 지극히 엄하게 금령을 내렸는데, 지금 와서는 거꾸로 궁가의 자본이 되고 있는가 하면 부역을 피해 도망친 간악한 백성들이 날로 그 곳으로 투속(投屬)해 들어가는 등 그 폐해를 이루 말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산이 온통 벌거숭이가 된 채 어떤 물줄기도 마르지 않은 곳이 없는데, 가뭄의 재해 역시 이 점으로부터 말미암는다고 하겠습니다. 바로 이 점을 심각하게 염려해서 선왕께서 단단히 마음을 먹고 금단하셨는데, 그러면서도 궁민(窮民)들이 하루아침에 의지할 곳을 잃게 될까 염려하신 나머지 산 중턱 이하는 밭을 일궈 먹고 살도록 잠정적으로 허락하셨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소민(小民)들이 금령을 범하고 관리들이 멋대로 법을 적용하여 혹 무턱대고 경작하는 폐단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통렬히 금하기에 여념이 없어야 마땅할 것인데, 어떻게 궁가의 잘못을 용납하여 그것을 본받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원두표(元斗杓)가 아뢰기를,
"화전의 폐단이 날로 불어나는데 장래에는 필시 난민이 되고 말 것이니, 통렬히 금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하고, 정유성(鄭維城)이 이뢰기를,
"당초 산 중턱 이하만 허락했을 때에도 산꼭대기까지 무턱대고 경작하는 백성이 있었는데, 만약 궁가에서 절수(折受)하는 것을 허락한다면, 이는 전일의 금령을 흐지부지해 버린 채 백성들에게 화전을 권하는 결과가 되고 말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화전에 관한 일은 서서히 의논해 선처토록 하라."
하였다. 민적이 또 아뢰기를,
"5백 결은 너무 많다고 진달드린 박세견(朴世堅)의 말이야말로 그 뜻이 매우 좋은 것이었는데, 성명(聖明)께서는 성급하게도 면세전의 한도를 정하도록 한 일을 도로 취소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러나 성인의 입장에서 볼 때 이런 식으로 감정을 내시면 안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세견은 영구히 법식을 정하는 것을 그르게 여겼으나, 이것은 정론(正論)이기 때문에 나의 행동이 이럴 수 밖에 없었다."
하였다. 민적이 아뢰기를,
"세견의 뜻은 5백 결이 과다하다는 것이었지 한계를 정하는 것을 그르다고 여긴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민정중이 아뢸 때에 신도 그 논에 참여했었는데, 망령된 사람이라고까지 분부를 내리셨으니, 이는 더욱 미안스럽기 그지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정중이 소를 올리면서 대신에게 모욕을 가하는 말을 하였기에 내가 ‘오늘날 망령된 사람이 너무도 말을 방자하게 한다.’고 비답을 내렸던 것인데, 그 계사가 틀렸다는 말은 아니다. 대신은 인군(人君)도 존경하는 위치에 있는데 어떻게 이렇듯 능멸할 수 있단 말인가."
하였다. 민적이 아뢰기를,
"당 태종(唐太宗)은 간언(諫言)을 잘 받아들였던 명군(明君)이었는데도 ‘저 촌 늙은이[田舍翁]를 죽여버려야 하겠다.’는 말까지 하였으니,160) 이 점이야말로 성상께서 경계하여 두렵게 여기셔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위징(魏徵)에 대해 촌 늙은이라고 한 말까지 인용하다니, 나는 그 의도를 모르겠다. 난 죽이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하였다. 민적이 또 아뢰기를,
"종묘 대제(宗廟大祭)가 임박한 이때에 시예(試藝)161) 하는 것은 온당치 못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섭행(攝行)할 때에는 치재(致齋)하는 기간이 하루이다. 그리고 시예와 형살(刑殺)은 차이가 있으니,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하였다. 민적이 또 아뢰기를,
"온천에 거둥하시는 시기에 대해 명백히 품정(稟定)한 일도 없는데, 충청 감사 오정위(吳挺緯)가 헛소문을 함부로 믿고는 공어(供御)하는 물품을 분정(分定)하는가 하면 행궁(行宮)의 재목과 기와 등을 징수함으로써 도내에 소요를 일으키고 있으니,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실상을 정확히 알기 어려우나, 추고하라."
하였다. 민적이 또 아뢰기를,
"시예(試藝)가 거의 끝나가는데, 마상재(馬上才)의 경우는 희극(戲劇)과 같은 점이 있으니 정지시키도록 명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지 않고 승지를 돌아보며 이르기를,
"시예가 끝난 후에는 으레 입시한 신하들에게 선온(宣醞)하는 일이 있게 마련인데, 간관이 이렇게 말하니 오늘 선온하는 일은 정지토록 하라."
하였다. 제술(製述)에서 수석을 차지한 안헌징(安獻徵)과 활쏘기 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한 박신규(朴信圭)에게 각각 숙마(熟馬) 1필(匹)을 내리고, 그 다음에게도 차등있게 상을 내리도록 명하였다. 무신의 시예에서 우등한 사람 가운데 2품(品)의 실직(實職)을 제수받은 사람이 1인, 가선 대부로 오른 자가 1인, 절충 장군에 오른 자가 3인, 변장(邊將)에 제수된 자가 6인이었으며, 군병과 한량(閑良)의 시예에서 우등한 사람 가운데 직부 전시(直赴殿試)된 자가 6인이었는데, 나머지에게도 모두 시상하였다. 상이 승지에게 이르기를,
"해가 벌써 기울고 있다. 미처 시상하지 못한 군병들은 내일 궐내로 불러 모은 뒤에 승지가 잘 살펴서 나누어 주도록 하라."
하였다.
서필원(徐必遠)을 이조 참의로, 이제형(李齊衡)을 장령으로, 이하(李夏)를 정언으로 삼았다.
우의정 정유성(鄭維城)이 탑전에서 아뢰기를,
"지난번 최유지(崔攸之)가 도당록(都堂錄)에 참여되었을 때 이경석(李景奭)은 조금도 간여한 일이 없었는데, 서필원(徐必遠)이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그에게 모욕을 가하고 모함을 하였습니다. 대신에게 죄가 있다면 논해서 안 될 것이 없지만, 이 경우는 터무니없이 날조해 모함하면서 기염을 토해 추악하게 헐뜯었으므로 공의(公議)가 모두 그르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해조가 갑자기 엄선해야 할 직책에 그를 의망(擬望)하면서 마치 무함한 그의 행동을 직절(直節)한 것인양 여기는 점이 있는듯 하였으니, 이조의 당상과 낭청을 모두 추고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고 서필원도 체차시키도록 하였다.
유시(酉時)에 상이 대내(大內)로 돌아왔다.
10월 5일 을사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동지(同知) 송립(宋岦)이 80이 넘은 나이로 활을 당기고 말을 달려 활을 쏘았는데 노인같지가 않았다. 비록 명중을 시키지는 못하였지만 확삭(矍鑠)한 기운은 옛 사람에 비해도 부끄러울 것이 없었으니,162) 특별히 가자(加資)하도록 하라."
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관무재(觀武才)할 당시 그가 말을 타고 활을 쏘았기 때문이었다.
10월 6일 병오
대사간 이홍연(李弘淵), 사간 이민적(李敏迪)이 아뢰기를,
"삼가 듣건대, 대신의 아룀에 따라 이조의 당상과 낭청을 추고하고 참의 서필원(徐必遠)을 체차하라는 명을 내리셨다 하기에, 신들이 의아해 하고 있습니다. 필원이 대신을 비난하며 배척한 것에 착오가 있는듯 하긴 합니다만, 어찌 일찍이 대신이 아뢴 것처럼 용의주도하게 모함하고 고의로 모욕을 가한 적이야 있겠습니까. 필원은 스스로도 감언지사(敢言之士)로 인정하는 터인데 그의 광직(狂直)은 평소 잘 알려져 있습니다. 예로부터 감언지사를 보건대 침착하고 자상한 경우는 드물고 경솔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따라서 조정에서 그들을 대할 때에도 그들의 장점만 취해야지 소절(小節)을 지키지 못한다고 꾸짖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만약 한번 과오가 있게 될 때마다 번번이 무함한다는 이름을 가한다면 조정을 다스리는 아름다운 일이 결코 되지 못할 뿐더러 언로(言路)가 기구(崎嶇)하게 되는 것이 필시 이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해조의 비의(備擬)는 별로 잘못된 것이 없으니, 이조의 당상과 낭청을 추고하고 참의 서필원을 체차하라는 명을 환수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10월 7일 정미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의관(醫官)을 보국 숭록 대부에 올리지 못한다는 법조문도 이미 없다. 유후성(柳後聖)을 특별히 보국 숭록 대부로 가자(加資)하라."
하였다. 대사간 이홍연(李弘淵) 등이 환수할 것을 계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예조 낭관을 송도(松都)에 보내 여조(麗朝)의 제능(諸陵)을 살펴보게 하고 1백 보(步)로 한계를 정해 그 안에서는 경작과 장례를 금하게 하였다. 그 가운데 태조(太祖)의 능은 선조(先祖) 때 정한 제도를 써서 1백 보를 더 늘려 한계로 잡고, 현종(顯宗)·문종(文宗)·충경왕(忠敬王)의 3개 능은 50보를 더 늘려 잡았는데, 이 세 임금의 공덕이 가장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송도 경내에 사는 왕씨(王氏) 자손으로 하여금 금호(禁護)하는 일을 전적으로 관장케 하였는데, 금법을 범하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관에 고발하여 죄를 매길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10월 8일 무신
우의정 정유성(鄭維城)이 상차(上箚)하였는데 그 대략에,
"전일 이조 참의를 차출할 때에, 멀리 가 있어 데려오기 어려운 사람과 양전(量田)과 관련하여 다른 곳으로 옮길 수 없는 수령을 첫번째와 마지막에 비의(備擬)하고는 서필원(徐必遠)만을 부망(副望)하여 마치 단망(單望)한 것처럼 했었는데, 이는 대체로 서필원이 노성(老成)한 대신에게 모욕을 가한 것을 직절(直節)한 행동이었다고 평가한 나머지 이렇듯 엄선해야 할 자리에 올려 포양(褒揚)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신은 나름대로 시비가 뒤바뀐 것을 개탄하다가 마침 등대(登對)할 때를 당하여 전관(銓官)을 추고할 것을 청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삼가 간원이 아뢴 것을 보건대, 신의 말을 그집어내어 장황하게 논열(論列)하였으니, 신이 이에 죄를 면할 길이 없게 되었습니다. 소위 감언(敢言)이라는 것은, 어떤 사람의 범죄 사실이 뚜렷이 드러났는데도 사람들이 말하기 어려워할 때 감히 배척하여 말하며 용서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번 최유지(崔攸之)의 일에 이경석(李景奭)이 조금도 간여한 사실이 없다는 것은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는데, 서필원이 억측하고 터무니없는 말을 날조하여 죄명(罪名)을 뒤집어 씌웠으니, 이것이 무함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필원이 처음 정소(呈疏)할 때에 경석의 직책과 성(姓)을 빼버리고 이름만 기재하면서 못할 짓 없이 추악하게 헐뜯고 매도하였으므로 정원이 환송(還送)하여 다시 정소하도록 하였으니, 이것이 모욕을 가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대각(臺閣)의 체례(體例)를 가지고 말하더라도, 사실을 잘못 알아 체차된 사람은 감히 곧바로 대직에 의망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곧 시비의 결과를 그대로 보존하기 위한 의도에서 나온 것이니, 이 때문에 언로가 기구하게 된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 더구나 이번에 곧다고 하는 이름을 얻으려고 의도적으로 취한 필원의 행동을, 어떻게 잘못 알고 논사(論事)한 경우에 비유하여 논할 수 있단 말입니까.
신은 일찍부터 체통이 점점 무너져가는 것을 개탄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그만 직절(直節)이 있다고 중망을 받고 있는 신하를 신이 지척(指斥)하였으니, 시휘(時諱)를 중하게 범한 것이 된다는 것을 물론 알고 있습니다만, 그렇게 한 본래의 의도는 실로 시비를 밝히고 조정을 높이려는 것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간관이 신의 말을 배척하면서 언로에 방해가 된다고 하였는데, 그 사의(辭意)가 맺고 끊는듯 엄격하기만 하니, 신이 어떻게 감히 정승의 반열에 태연히 있겠습니까. 신의 직책을 깎아주시어 공의(公議)에 사과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경이 어찌 언로를 방해하고 뒤 폐단을 열 의도에서 말했겠는가. 꼭 서로 따질 필요가 없다.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10월 9일 기유
대사간 이홍연(李弘淵)과 사간 이민적(李敏迪)이 인피하였는데 그 대략에,
"서필원(徐必遠)이 노성한 대신을 비난하며 배척한 말에 대해서는 대신이 그르다고 했을 뿐만이 아니고 신들 역시 그르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신은 이를 무함한 것이라고 하고 신들은 망작(妄作)한 것이라고 하는데, 무함과 망작의 차이는 단지 의도적이었느냐 무의식적이었느냐에 달려 있다고 하겠습니다.
근래 세상의 풍조가 날로 투박해지고 선비의 기상이 갈수록 시들어가고 있는데, 감언지사(敢言之士)로 자임하는 서필원같은 사람이야말로 모양을 꾸며 아첨하는 신하들보다야 훨씬 낫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일을 논하는 것을 한번 부당하게 했다고 해서 곧바로 죄를 주며 배척한다면, 신들이 언로에 방해가 된다고 말한 것도 지나치게 걱정한 것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언사(言事)를 담당한 사람들은 으레 잘못을 들추어내 꾸짖기를 좋아하는 인상에 가까운데, 만약 곧다는 이름을 얻으려 했다고 몰아부치며 배척한다면, 실제로 직언(直言)하고 극간(極諫)하는 경우마저도 이런 지목을 받는 것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이는 말세에 늘 나타나는 걱정거리로서 성세(盛世)의 일이 못되는 것인데, 이 점에서 대신이 실언했으므로 신들이 삼가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재상이 옳게 여기는 것에 대해서도 간관이 그르다고 할 수 있는 이것이야말로 본디 통의(通義)인만큼 신들이 꼭 인피할 것까지는 없습니다만, 이로 인해 사태가 발전한 결과 대신이 소장을 올려 면직을 청하면서 이토록 준엄하게 배척하였으니, 신들이 어떻게 감히 태연히 있겠습니까. 체직시켜 주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물러가 물론(物論)을 기다렸는데, 헌납 안후열(安後說)이 처치하여 출사시킬 것을 청하니, 따랐다.
상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갔다. 약방 제조 김좌명(金佐明)과 부제조 남용익(南龍翼)이 의관(醫官) 정후계(鄭後啓)·조징규(趙徵奎)·윤후익(尹後益) 등을 이끌고 입시하였다. 상이 방 안으로 들어가자, 제조와 사관(史官)이 문 밖에 엎드려 있었는데, 의관만 들어와 진찰토록 하였다.
10월 10일 경술
호서(湖西) 면천군(沔川郡)에 해일(海溢)이 일어났다.
10월 11일 신해
사간 이민적(李敏迪)이 인피하기를,
"헌납 안후열(安後說)이 동료가 인피하고 들어간 틈을 타고 혼자서 오정위(吳挺緯)의 파직을 청하는 논계를 정지시켰는데, 이 모두가 신이 가볍게 취급을 당한 결과입니다."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헌납 안후열도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옥당이 처치하여 민적 등은 출사시키고 후열은 체직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홍중보(洪重普)를 대사헌으로, 권령(權坽)을 승지로, 이익(李翊)을 교리로, 정석(鄭晳)을 수찬으로, 윤개(尹塏)를 정언으로 삼았다.
행 이조 판서 홍명하(洪命夏)가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은 감식안(鑑識眼)이 지극히 어두워 하는 일마다 흠집을 내고 있으니, 상신(相臣)이 추고를 청한 것도 가벼운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삼가 생각건대 이조 참의야말로 당상 가운데에서도 엄선해서 의망해야 할 자리인데, 이번에 비망(備望)한 사람들은 또한 모두 선조(先朝) 때에 이미 의망되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신이 그 선후 차례를 따라 의망했는데, 이것 역시 본조의 구례입니다. 성상께서 어떤 사람에게 낙점하실지에 대해서야 어떻게 신이 감히 억측할 수 있는 문제이겠습니까.
산림지사(山林之士)에 대해 멀리 가 있어 데려오기 어렵다는 이유로 의망하지 않는다면 현사를 불러올 날이 없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양전(量田)하는 수령을 옮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생각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만 너무도 인재가 부족하기 때문에 전일 부사(府使)에 결원이 생겼을 때에도 그 수령을 옮겨서 승진시켜 의망했었는데, 정관(政官)의 임무가 수령보다 중하지 않겠습니까.
서필원(徐必遠)이 일을 당할 때마다 감언(敢言)한 것이 어제 오늘에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떻게 신이 청선(淸選)에 의망하여 포양(褒揚)한 뒤에야 그의 직절(直節)이 드러난단 말입니까. 지난번에 그가 소를 올리면서 재상의 과실을 차례로 말하였는데, 신도 배척을 받은 사람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의 본 마음을 헤아려 본다면 어찌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 그가 원로인 신하를 비난하며 배척한 것은 일시적으로 망언한 실수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가지고 무함했다고 단죄하여 조정의 반열에 용납되지 못하게 하다니, 이는 실로 어리석은 신으로는 생각지도 못한 것입니다. 신의 소견이 어둡고 질못되어 사람을 임용할 때에 타당성을 잃었으니, 직명을 깎아주시어 관방(官方)을 바르게 하소서."
하니, 상이 너그럽게 비답하며 허락하지 않았다.
부응교 남구만(南九萬), 교리 이민서(李敏叙), 부교리 김만기(金萬基) 등이 상차(上箚)하여, 경연을 오래도록 폐지하고 있는 일과 궁가에 절수(折受)한 일과 면세전을 혁파하고 그 수를 줄여 한도를 정할 일과 가정(嘉靖) 때의 수교(受敎)를 준용하도록 한 것을 환수할 일 등에 대하여 누누이 진달드리고, 끝에 가서 서필원(徐必遠)의 일을 논하기를,
"현재 구차하게 결탁하고 아첨을 떨어 높은 관직을 차지한 사람이 어찌 없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런 사람을 대신이 배척해서 물러나게 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는데, 필원에 대해서만은 유독 이렇게 짓밟고 있으니, 어쩌면 이렇게도 입을 다물고 있는 자는 다행스럽게 되고 일을 말한 자는 불행하게 된단 말입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제대로 쓰시는데, 대신이 오히려 저지하면서 ‘명예를 구하여 곧음을 판다.’는 것으로 그의 죄안(罪案)을 삼았습니다. 아, 언제 일찍이 고금 천하에 ‘명예를 구하여 곧음을 판다.’는 이유로 사람을 죄주면서 제대로 나라를 다스린 경우를 본 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대신이 일단 무함하고 모욕을 가했다고 필원을 단정지워 놓고는 또 명예를 구하여 곧음을 팔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명예를 구한다거나 곧음을 판다는 것을 살펴 보건대, 그 마음은 잘못된 것이지만 그 일 자체는 옳은 것입니다. 그런데 일단 무함했다고 말했고 보면 구하는 것이 무슨 명예이겠으며 일단 모욕을 가했다고 말했고 보면 무슨 곧음을 팔았다고 하겠습니까.
그리고 대신이 차자를 올리면서 조정의 기강이 날로 무너지고 체통이 점점 허물어지는 것을 개탄한다고 하였는데, 어쩌면 필원이 소신(小臣)으로서 대신(大臣)을 범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반드시 위(衞)나라의 경대부(卿大夫)처럼 된 뒤에야 조정의 기강이 무너지지 않게 될 것인데, 당개(唐介)가 조정에서 문언박(文彦博)을 질타한 것163) 역시 체통을 무너뜨린 것이라고 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관점에서 대신의 말을 살펴본다면 서필원 한 사람에 대해서만 공정성을 잃은 것이 아니니, 그 말이 일을 해치고 이치를 해친 점이 본디 작지 않다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차자의 내용을 살펴보고 깊이 탄식하였다. 늘 정성스럽게 생각하는 그 뜻을 내 매우 아름답게 여긴다. 경연을 여는 일에 대해서는 뒷날 면유(面諭)하겠다."
하였다.
10월 15일 을묘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일이 없을 때는 시사(視事)를 품(稟)하고 유고(有故) 중일 때에는 탈품(頉稟)164) 하는 것이 관례이다. 근래 약방이 잇따라 문안하고 있는 중인데, 어째서 취품(取稟)165) 하는가?"
하니, 정원이 회계(回啓)하여 ‘이미 취품한 뒤에야 비로소 재감(再感)166) 의 징후가 계시다는 말을 들었다.’고 갖추어 진달하고, 이어 평상으로 회복될 때까지 탈품할 것을 청하였는데, 답하기를,
"물어보고 나서야 탈품을 청하다니, 너무도 일이 형편없다."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시사(視事)하기를 품하는 것은 정원의 임무이다. 따라서 상께서 무고하면 행하고 유고 중일 경우 정지하면 그 뿐이니, 미워할 일이 못되는 것이다. 그런데 상이 문답할 즈음의 사기(辭氣)를 보면 상당히 화평함을 결여하여 성내는 뜻이 있는 것처럼 보이니, 탄식을 금할 수 없다.
【태백산사고본】 6책 6권 13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351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역사-편사(編史)
[註 164] 탈품(頉稟) : 어떤 사정으로 말미암아 임시로 정무를 일시 정지하도록 상사에게 아뢰는 것.[註 165] 취품(取稟) : 임금에게 아뢰어 하명을 기다리는 것.[註 166] 재감(再感) : 재차 병세가 발작하는 것.
사신은 논한다. 시사(視事)하기를 품하는 것은 정원의 임무이다. 따라서 상께서 무고하면 행하고 유고 중일 경우 정지하면 그 뿐이니, 미워할 일이 못되는 것이다. 그런데 상이 문답할 즈음의 사기(辭氣)를 보면 상당히 화평함을 결여하여 성내는 뜻이 있는 것처럼 보이니, 탄식을 금할 수 없다.
이익(李翊)을 헌납으로, 오시수(吳始壽)를 수찬으로, 안후열(安後說)을 부수찬으로, 유계(兪棨)를 동부승지로 삼았다.
호서(湖西)에 지진이 일어나 해괴제(解怪祭)를 거행하였다.
10월 17일 정사
진시(辰時)에 햇무리가 지고, 무지개가 서쪽에 나타났다.
해서(海西) 산골 곳곳에 봄철과 다름없이 꽃이 피었는데, 본도가 계문(啓聞)하였다.
10월 18일 무오
원만리(元萬里)를 병조 참의로, 이연년(李延年)을 참지로, 이은상(李殷相)을 예조 참의로, 여성제(呂聖齊)를 교리로, 윤심(尹深)을 정언으로 삼았다.
우의정 정유성(鄭維城)이 상차하여 사직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이 망언한 탓으로 대각이 바야흐로 성명(成命)을 도로 정지하라고 논하고 있고, 옥당이 온 힘을 기울여서 차자를 올려 신을 배척하면서 신의 말이 일을 해치고 이치를 해친다고까지 하며 신의 죄안(罪案)을 삼고 있습니다. 이는 곧 신의 죄가 조정에 용납되기 어렵게 되었음을 의미하는데, 신이 그들을 상대로 변명하자니 송사를 벌여 곡직(曲直)을 다투는 것과 같은 꼴이 되겠기에 서로 따지기조차 부끄러운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신이 만약 오래도록 자리에 그대로 버티고 있으면 일을 해치고 이치를 해치는 일이 갈수록 더욱 심해질 테니, 직명을 깎아주시고 어질고 덕있는 이로 다시 정승을 삼게 해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경이 서로 따지려 하지 않는 뜻이 또한 사체에 합당하다. 이치로 볼 때 인혐할 것이 뭐가 있는가.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10월 23일 계해
상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당상들을 인견하였다. 원두표(元斗杓)가 아뢰기를,
"사신의 장계를 보건대, 이시술(李時術)의 죄가 혁직(革職) 정도로 그치고 만인(湾人)167) 들도 모두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 하니, 정말 다행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저쪽 사람들이 어떤 일을 조사할 때마다 처음에는 준엄하게 했다가 나중에 완화해 주는데, 이는 은혜를 베풀었다는 명분을 내세워 뇌물을 요구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하자, 두표가 아뢰기를,
"정말 성상께서 분부하신 그대로입니다."
하였다. 대사간 이홍연(李弘淵)이 또 오정위(吳挺緯)를 탄핵하여 파직을 청하니, 윤허하지 않는다고 답하였다. 홍연이 또 이조의 당상과 낭청을 추고하도록 한 명과 서필원(徐必遠)을 체차시키도록 한 명을 환수할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추고하도록 한 명을 환수하는 일은 아뢴 대로 하라. 체차시키는 일에 대해서는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교리 이민서(李敏叙)가 승지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시할 때 옥당의 입직(入直)한 관원도 함께 입시토록 하고, 이를 영구히 항식(恒式)으로 삼게 할 것으로 청하니, 따랐다.
10월 24일 갑자
정시(庭試)를 거행하여 인재를 뽑았는데, 자의 대비전(慈懿大妃殿)의 건강이 평상으로 회복되었기 때문이었다. 문과에서는 홍만용(洪萬容) 등 13인을, 무과에서는 남홍벽(南弘璧) 등 43인을 뽑았다.
10월 25일 을축
민여로(閔汝老)를 헌납으로, 윤개(尹塏)를 장령으로, 여성제(呂聖齊)를 지평으로 삼았다.
10월 29일 기사
지평 여성제가 인피하기를,
"궁가의 면세전의 외람된 폐단에 대해 말하는 자가 많은데,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이렇게 변통하는 때를 당해서는 반드시 《대전(大典)》에 의거하여 직전(職田)과 사전(賜田)의 세(稅)를 모두 경창(京倉)에 납부하게 한 뒤 군자감(軍資監)의 미두(米豆)로 바꿔서 주게 한 뒤에야 영구히 폐단이 없게 될 것을 보장할 수 있을 것이다.’고 여겨지기에, 전일 상소하면서 이 뜻을 진달드렸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때의 생각이 변함이 없는데도 그저 수를 감하도록 청하기만 한 본부의 논계에 뒤따라 참여하기만 하였고, 연일 논계한 일에 대해서도 또 감히 자신의 견해를 첨가해 들이지 못했으니, 체직시켜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대사간 이홍연(李弘淵)이 처치하여 출사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소대(召對)하였는데, 도승지 남용익(南龍翼), 교리 김만기(金萬基), 수찬 오시수(吳始壽), 장령 곽제화(郭齊華)가 입시하였다. 만기가 《대학연의(大學衍義)》의 홍범(洪範) 끝편을 읽었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해수기침 때문에 강독할 수가 없으니, 그대들이 문의(文義)를 진달하도록 하라."
하자, 만기가 논란하니, 상이 자못 경청하였다. 만기가 이어 아뢰기를,
"신이 대강 글뜻을 강하긴 했습니다만 상수(象數)에 대해서는 까마득히 모르는 상태입니다.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이 모두 정밀하게 알고 있는데, 현재 조정에 있는 신하 중에는 오직 유계(兪棨)가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전 대사헌 유경창(柳慶昌)이 죽었다. 경창은 관직 생활을 청렴하게 하여 세론(世論)이 훌륭하게 여겼다. 그러나 성품이 오활한 데다가 재능마저 없어 내직(內職)과 외직을 두루 거치는 동안 이렇다 할 업적을 별로 남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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