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6권, 현종 3년 1662년 11월

싸라리리 2025. 12. 9.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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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일 임신

조윤석(趙胤錫)을 우부승지로, 홍처후(洪處厚)를 동부승지로, 유계(兪棨)를 이조 참의로, 이익(李翊)을 수찬으로, 여성제(呂聖齊)를 이조 정랑으로, 원만리(元萬里)·남천한(南天漢)을 지평으로 삼았다.

 

영남의 안동(安東)·예안(禮安)·봉화(奉化) 등 3개 고을에 지진이 일어났으므로 중앙에서 해괴제(解怪祭)를 거행하였다

 

대사헌 홍중보(洪重普)가 인피하기를,
"무과(武科)의 시취(試取) 규정을 보견대, 분수(分數)168)  를 계산해서 등제(登第)의 고하(高下)를 매기도록 법전에 실려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예로부터 지금까지 공통적으로 행해온 일이라 하겠습니다. 따라서 이번에 무과 초시의 경우, 유엽전(柳葉箭)은 이중(二中)169)  , 편전(片箭)은 1중(一中)으로 정식(正式)을 삼았고 보면 입격한 자들을 대상으로 그 분수를 계산해서 등수를 매겨야 옳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비국의 복계(覆啓)를 보건대, 한결같이 명중시킨 화살 숫자만 따르면서 심지어는 문과(文科)의 표(表)·전(箋)·부(賦)·책(策) 등에 비유하여 논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물론 표와 전이 아무리 두 배의 점수가 되는 것이라 하더라도, 표와 전에 3하(三下)를 맞아 부와 책에서 3중(三中)의 점수를 맞은 것과 동일할 경우에는 부와 책을 위주로 하고 표와 전은 뒤로 돌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의 경우는 달라 편전은 1중(一中)만 해도 점수가 7분(分)반이나 되는 반면, 유엽전은 2중(二中)을 해도 고작 2분(分)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만약 보통 때 시사(試射)하는 예에 의거하여 한결같이 명중시킨 화살 숫자만 따진다면, 《대전(大典)》의 과거조(科擧條)에 하필 그 분수를 정해 놓았겠습니까. 신이 일단 감시관의 임무를 수행한 터에 소견이 같지 않은 상황에서 감히 구차하게 출방(出榜)170)  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신은 지난번 노량(鷺梁)에서 열무(閱武)하시던 날 역마를 빌려 탄 죄가 있으니, 결단코 자리에 그대로 있기가 어렵습니다."
하고, 사간 이민적(李敏迪)도 같은 말로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우의정 정유성(鄭維城)이 소장을 진달하여 사직하면서 심지어는 ‘마치 봉변이나 당한 것처럼 떼거리로 일어나 일제히 공격했다.’는 말까지 하였는데, 상이 답하였다.
"간원의 논계나 대신의 계사(啓辭) 모두가 병행되어도 어긋나지 않는데, 옥당이 곁가지를 치고 나가 계속 트집을 잡고 나서다니 괴이한 일이다. 경은 어찌 사직소를 올려 나라의 체통을 손상시키는가. 속히 상소하는 일을 중단하여 나의 소망에 부응하라."

 

행 호군 이유태(李惟泰)가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속히 올라와서 국사(國事)를 의논해 정하라는 성상의 비답을 삼가 받들고 신은 황공스러워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신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닐뿐더러 또 신이 의중에 두고 있었던 일도 아닙니다. 신이 전일 상소한 내용은 모두 옛사람들의 방책(方策) 가운데 나오는 말을 취한 것입니다. 성명(聖明)께서 시행할 만하다고 여기시면 거행하여 조치하시면 될 것이고, 만약 불가하다고 여기신다면 또 신을 불러와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이 처음부터 끝까지 감히 명을 받들지 못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굳이 거절하는 이유를 내가 정말 모르겠다. 소장에 진달한 내용이 방책에 널려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손익을 짐작하는 것은 그대가 아니고서는 안 되니, 전의 유지(有旨)를 따라 속히 올라오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경기 김포(金浦)에 사는 진사 이영원(李榮元)이 상소하여, 이이(李珥)와 성혼(成渾) 두 신하를 문묘(文廟)에 배향(配享)할 것과,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 두 신하가 살고 있는 곳에 각각 몇 칸의 정사(精舍)를 짓게 하여 종유(從遊)하는 선비들이 학업을 연마하는 곳으로 삼게 할 것과, 관원을 보내 김상용(金尙容)·홍명구(洪命耉)·정온(鄭蘊)·김상헌(金尙憲)·이상길(李尙吉)·이시직(李時稷)·심현(沈誢) 등에게 사제(賜祭)하고 그 후손들을 녹용(錄用)함으로써 충혼(忠魂)을 위로할 것과, 여섯 신하의 무덤에 봉식(封植)하고 더러 뇌제(誄祭)를 지낼 것과, 서필원(徐必遠)과 이지익(李之翼) 등 감언지사(敢言之士)의 기상을 북돋아 줄 것과, 날로 경연을 열고 친히 유신(儒臣)을 접하며 정심(正心)으로 근본을 삼을 것을 청하니, 상이 답하였다.
"그대의 진언(進言)을 내가 아름답게 여긴다."

 

11월 4일 갑술

정언 이하(李夏)가 인피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이 무과(武科) 1소(一所)의 감시관(監試官)으로 임무를 수행하였는데, 등제(等第)의 석차를 매기는 것과 관련하여 소견이 홍중보(洪重普) 등과 상반됩니다. 그런데 그가 일단 ‘구례(舊例)를 변동시켜 바꿨다.’고 말했고 보면, 신이 어떻게 감히 태연스럽게 처치하겠습니까. 그리고 신은 지난번 서필원(徐必遠)을 특별히 체직시킨 명을 환수하도록 청하는 논계에 참여했는데, 상신(相臣)이 상소한 내용이 준엄하였으니, 체척(遞斥)시켜 주소서."
하고, 집의 오두인(吳斗寅)은 인피하기를,
"신이 시소(試所)에서 점수를 따져 석차를 정하는 규정을 따르지 않았으니, 구례를 변동시켜 바꿨다는 배척을 신 역시 면하기 어렵습니다."
하고, 대사간 이홍연(李弘淵), 정언 윤심(尹深)은 인피하기를,
"서필원을 체직시킨 명을 환수하도록 청하는 논계에 이미 참여했으니, 대신에게 배척을 받은 것이 이하와 다름없습니다."
하고, 지평 원만리(元萬里)는 인피하기를,
"간원에서 피혐한 내용이 서필원과 관련되어 있는만큼 신이 감히 처치할 수 없습니다."
하고, 모두들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옥당이 처치하여 이하·윤심·이홍연·원만리는 출사시키고 홍중보·이민적·오두인을 체차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부교리 김만기(金萬基)가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서필원(徐必遠)의 말이 무함하기 위한 목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에 대해서는 신이 이미 전의 차자에서 진달드렸으니, 다시 꼭 번거롭게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만약 명예를 구하여 곧음을 팔았다[要名沽直]는 것으로 그의 죄안을 삼을 경우, 앞으로 이 네 개의 글자가 언사(言事)하는 사람들에게 함정 역할을 할 것이니, 아무리 바른 논과 곧은 말을 하는 인사라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신이 전에 차자를 올리면서 광참(狂僭)한 말을 위로 성상과 관련하여 많이 언급했을 때 성상께서는 이미 평온한 기색으로 받아들여 주셨는데, 대신과 관련하여 말을 하자 오히려 꺾어버리셨으니, ‘인주(人主)를 간(諫)하기는 쉬워도 대신에 관하여 말하기는 어렵다.’고 한 구양수(歐陽修)의 말이 또한 근사하게 맞아든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이 망령되이 논한 탓으로 장차 말하기를 꺼려하는 풍조를 열어놓게 되었으니, 신의 죄가 이에 이르러 더욱 커지게 되었습니다. 신의 죄를 바로잡아 대신의 위치를 편안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라고 답하였다.

 

수찬 오시수(吳始壽)·여성제(呂聖齊) 등이 상차하여, 수성(修省)하는 도를 극진히 함으로써 지진의 변고에 응하도록 청하고, 다음에 진달하기를,
"명예를 구하여 곧음을 팔았다고 비난하였는데, 이는 서필원(徐必遠)의 본정(本情)이 아닙니다. 언로(言路)가 열리느냐 닫히느냐에 관계된 일이었던만큼 경악(經幄)의 신하를 바로잡아 구하려 했던 것은 그의 직책이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대신이 이미 수용하지 못한 상황에서 전하께서 또 뒤따라 꾸짖으셨으니, 치세(治世)의 아름다운 광경이 못 되는 듯합니다.
그리고 이미 시취(試取)가 끝났는데도 출방(出榜)171)  을 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예로부터 들어보지 못했던 일입니다. 따라서 정원이 양사(兩司)의 관원을 불러 처치하게 할 것을 청한 것이야말로 사세가 급박해서 나온 행동이었는데, 장령 윤개(尹塏)와 지평 이세익(李世翊)은 패초(牌招)를 받고 궐내로 나아왔으면서도 일이 있다고 핑계대고 사은하지 않음으로써 며칠 동안이나 처치하는 일이 지체되는 결과를 빚게 하였습니다. 이는 그들의 뜻이 규피(規避)하려고 하는 것으로서 진퇴에 근거가 없으니, 윤개와 이세익 모두 체차시키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차자의 내용이 근실하고 간절하니 경계하는 마음으로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지난번 본관의 차자에 대해서는 그것을 장려해야 할지 내가 모르겠다. 윤개 등의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11월 11일 신사

송준길(宋浚吉)을 대사헌으로, 허적(許積)을 판윤으로, 이민적(李敏迪)을 집의로, 송시철(宋時喆)·박승건(朴承建)을 장령으로, 이유상(李有相)을 지평으로, 정석(鄭晳)을 사간으로, 홍중보(洪重普)를 우참찬으로, 이만(李曼)을 호조 참판으로, 정지화(鄭知和)를 병조 참판으로, 오정일(吳挺一)을 형조 참판으로, 권우(權堣)를 우윤으로, 김우형(金宇亨)을 교리로, 민유중(閔維重)을 이조 정랑으로 삼았다.

 

11월 12일 임오

강원도 생원 이모(李模) 등이 상소하여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할 것을 청하니, 상이 답하였다.
"따르기 어렵다는 뜻을 선조(先朝) 때 이미 남김없이 다 말씀하셨다. 그대들은 번거롭게 하지 말라."

 

집의 이민적(李敏迪)이 전일 무시(武試)의 등제(等第) 기준을 시수(矢數)로 하느냐 분수(分數)로 하느냐의 문제로 또 인피(引避)하고, 정언 윤심(尹深), 지평 원만리(元萬里), 장령 송시철(宋時喆), 사간 정석(鄭晳)이 서로 잇따라 인피하고 모두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는데, 대사간 이홍연(李弘淵)이 처치하여 윤심·원만리·정석은 출사시키고 이민적·송시철은 체차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이후(李垕)를 집의로, 정제화(鄭齊華)를 장령으로, 정재숭(鄭載嵩)을 지평으로, 이유상(李有相)을 교리로, 오두인(吳斗寅)을 수찬으로, 권우(權堣)를 동지의금으로, 서필원(徐必遠)을 형조 참의로, 유필(柳苾)을 횡성 현감(橫城縣監)으로 삼았다. 유필은 유후성(柳後聖)의 아들이었다. 사간 정석(鄭晳) 등이 수령 자리를 논상(論賞)하는 자료로 삼아서는 안된다는 이유로 유필의 체차를 청했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우의정 정유성(鄭維城)이 소장을 진달하여 사직하니, 온유한 비답을 내리며 허락하지 않았다.

 

정언 윤심(尹深)이 아뢰기를,
"제궁가(諸宮家)에 절수(折受)해 준 폐단에 대해 양사(兩司)가 몇개 월에 걸쳐 쟁집(爭執) 중인데, 이조는 배관(背關)172)  을 관례대로만 처리하고 있고 호조는 하나하나 모두 행이(行移)하고 있습니다. 대계(臺啓)를 아랑곳하지 않는 그 행동이 놀랍기 그지없으니, 이조와 호조의 당해 당상을 추고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그렇게 하는 것이 곧 요즘 공통적으로 행해지는 규정이니, 꼭 괴롭게 생각하며 심각하게 논할 것까지는 없다."
하였다.

 

11월 14일 갑신

사학(四學)의 유생 홍원보(洪遠普) 등이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할 것을 청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11월 20일 경인

진주 정사(陳奏正使) 정태화(鄭太和), 부사 허적(許積), 서장관 이동명(李東溟) 등이 북경(北京)에서 돌아왔다. 그런데 그들이 연로(沿路)에서 들은 바에 의하면, 영력 황제(永曆皇帝)173)  가 청(淸)나라 군대에 붙잡혀 해를 당했으며, 소운남(小雲南)에 도망쳐 살고 있던 주씨(朱氏)의 자손 역시 모두 청나라 군대에게 살해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사행(使行)에 대동했던 의관(醫官) 안례(安禮)가 청나라 사람들의 만류를 받고 연경(燕京)에 뒤떨어져 있었는데, 이는 각로(閣老) 손이(蓀伊)가 병이 들어 안례에게 침을 맞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청국(淸國) 예부(禮部)가 회자(回咨)하였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왕께서 스스로 허물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시술(李時術)은 죽음을 면하고 혁직(革職)만 되었으며, 의주(義州) 백성들도 모두 죽음을 면한 상태에서 유배되거나 장형(杖刑)에 처해지는 등 차등있게 벌이 가해졌습니다."

 

11월 23일 계사

상이 양심합(養心閤)에 나아갔다. 삼공(三公) 및 호조 판서와 승지·한림·주서 각 한 사람씩 입시하였는데, 이조 판서 홍명하(洪命夏)도 청대(請對)하여 입시하였다. 상이 영상을 위로하며 이르기를,
"아무 탈없이 갔다 왔고 진주(陳奏)하는 일도 좋게 끝났으니 다행스럽기만 하다."
하고, 이어 하문하기를,
"영력 황제(永曆皇帝)가 붙잡혔다는 말이 낭설은 아닌가?"
하니, 영상이 대답하기를,
"길에서 유생을 만났는데, 그가 글로 써서 보여 주기를 ‘영력은 해를 당했고 그 처자는 현재 광록사(光祿寺)에 구금 중이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11월 27일 정유

유계(兪棨)를 예문관 제학으로 삼고 가선 대부로 승진시켰다. 유계는 시망(時望)이 있었으므로 이조 판서 홍명하(洪命夏)가 탑전에서 진달하여 당상으로 의망한 결과 초배(超拜)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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