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6권, 현종 3년 1662년 12월

싸라리리 2025. 12. 9.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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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일 경자

조복양(趙復陽)을 대사헌으로, 유계를 대사성으로, 권우를 예조 참판으로, 이지무(李枝茂)를 장령으로, 송창(宋昌)을 지평으로 삼았다.

 

12월 3일 임인

성균관 생원 유연(柳㝚) 등이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할 것을 청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12월 4일 계묘

대가(大駕)가 모화관(慕華館)에 나아가 칙사(勅使)를 영접하고, 먼저 인정전(仁政殿)으로 돌아와 영상 정태화(鄭太和)를 막차(幕次)로 불러 하문하기를,
"접견할 때 그가 비각(碑閣)174)  을 가 보겠다고 청해 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니, 태화가 이르기를,
"그런 말을 내놓더라도 어려워하는 기색을 보이지 마십시요."
하였다. 얼마 뒤에 청사(淸使)가 이르자 상이 전상(殿上)에서 접견하고 다례(茶禮)를 행한 뒤 자리를 파하였다. 칙서를 반포한 것은 대체로 숭덕 황후(崇德皇后) 및 그 생모에게 추후로 존호(尊號)를 올렸기 때문이었다.

 

12월 7일 병오

청사(淸使) 두 사람이 가정(家丁)을 이끌고 삼전도 비각에 가서 살핀 뒤 저녁에 관소(館所)로 돌아왔다.

 

황해 감사 강백년(姜栢年)이 윤겸(尹㻩)의 공초(供招)에 나오는 음촌방(陰村坊)의 일에 관하여 사계(査啓)하였는데 그 대략에,
"당초 개펄을 팔 때 민전(民田)을 침범한 한 조목에 대해 일찍이 논보(論報)하지 않은 것이야말로 윤겸이 소홀히 다뤄 빠뜨린 실수라 하겠습니다마는, 그가 내사(內司)의 관원과 부화뇌동했다고 하는 것은 실정(實情)이 아닙니다. 절수(折受)한 지역은 그 둘레가 30리(里)가 아니고 70리이며, 개펄을 판 곳은 20리가 아니고 15리입니다. 그리고 민전을 침범한 곳 역시 본디 작지 않으니 민원(民怨)의 대상이 되는 것을 이에 의거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사부(士夫)들이 묘를 쓴 산은 7, 8곳에만 그치지 않고 현재 24곳이나 있다고 합니다. 조원(曺瑗)의 경작지 면적은 6일경(六日耕)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80여 일경(日耕)을 몰래 경작해 먹고 살았다고 하는 것도 실상과 어긋납니다."
하니, 금부에 계하(啓下)하였다. 금부가 회계(回啓)하기를,
"조원이 훈국(訓局)에 정장(呈狀)한 의도가 당초 힘을 빌려 사사로이 경영해 보려는 계책에서 나온 것인데, 지금 와서 윤겸에게 허물을 돌리고 있으니, 정상이 무척 가증스럽습니다. 문기(文記)를 아직 환추(還推)하지 못하는 것도 그들이 본부(本府)에 바치지 않은 까닭에 빚어진 일인만큼 역시 윤겸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윤겸도 저간에 혼미하여 잘못한 실수가 있으니, 참작하여 조율토록 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고, 또 이르기를,
"조원이 말한 것마다 패악스럽지 않은 것이 없는데, 만약 별도로 중히 다스리지 않는다면 간악하고 외람된 풍조를 징계할 길이 없을 것이다. 경옥(京獄)에 잡아들여 엄히 형신(刑訊)하고 중히 다스리도록 하라."
하였다. 도승지 남용익(南龍翼) 등이 아뢰기를,
"조원에게 패악스러운 말을 한 간사한 정상이 있다 하더라도 지금 이 때문에 잡아들여 엄히 형신한다면, 외방에서 듣고는 필시 ‘백성이 전지(田地) 문제로 궁가와 다투다가 끝내는 옥에 갇혀 형을 받게 되었다.’고 할 것이니, 성덕에 크게 누를 끼치게 될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이것은 문서에 입각해서 행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 하는 일인데, 지금 거꾸로 다른 말을 끄집어내어 그대들이 명예를 구하는 자료로 삼으려 하다니, 내가 정말 이해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정원이 재계(再啓)하였으나 성상의 비답은 더욱 준엄하기만 하였다.

 

황해 감사 강백년(姜栢年)이 치계(馳啓)하기를,
"본도 안에 궁가에서 전장(田庄)을 설치한 곳이 모두 92곳이나 됩니다. 해서(海西)는 면적이 무척 좁은데 전토의 반절이 사가(私家)에 돌아가고 있으니, 계속 이런 식이 될 경우 한 도 안에 남아 있는 토지가 얼마 없게 될 것입니다. 지금 이후로는 절수(折受)하여 둔전(屯田)을 설치하는 등의 일을 일체 금단케 하소서."
하니, 상이 호조에 계하(啓下)하였다. 호조가 회계(回啓)하여, 지금부터 본도 내에는 궁가에 절수하는 일을 일체 금단토록 할 것을 청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12월 10일 기유

이유태(李惟泰)를 이조 참의로, 김수항(金壽恒)을 지춘추(知春秋)로, 유계(兪棨)를 동지춘추로, 이후(李垕)를 집의로, 곽제화(郭齊華)를 장령으로, 남천한(南天漢)을 지평으로, 이익(李翊)을 부교리로, 김만기(金萬基)를 이조 정랑으로 삼았다.

 

헌부가 조원(曹瑗)을 잡아들여 엄히 형신토록 한 명을 환수할 것을 청하니, 따르지 않았다.

 

정언 이하(李夏)가 인피하였는데 그 대략에,
"삼가 진주사(陳奏使) 이하에 대해 논상한 비망기(備忘記)를 보건대, 역관들에게 가해진 상전(賞典)이 사신보다 중하여 경중이 도치(倒置)되어 있었으므로 과람한 자급을 개정하도록 청하는 논을 그만둘 수만은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래서 신이 이런 내용으로 간통(簡通)을 띄웠는데, 동료들이 난색을 보이면서 처음에는 ‘피로하게 될 일인 듯싶다.’고 하고, 나중에는 ‘우선 내일까지 기다리자.’고 하였습니다. 이 모두가 신의 말이 신임을 받지 못한 결과이니, 직명(職名)을 체차해 주소서."
하고, 사간 정석(鄭晳), 헌납 송시철(宋時喆), 정언 윤심(尹深)은 인피하기를,
"상전이 도치된 것이 미안한 일이긴 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자급이야 실로 경중을 따질 가치도 없는 것인데 이 때문에 개정하라고 쟁집하는 것은 대각의 사체를 손상시키는 일이 될 듯 하기에 ‘피로’라는 등의 말로 간통에 답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재차 간통이 왔기에 ‘우선 내일 제좌(齊坐)할 때를 기다려 처리하자.’고 답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상의하고자 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동료가 갑자기 인피하다니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헌부가 처치하여 정석 등을 체차시키고 이하는 출사시키기를 청하니, 따랐다.

 

12월 13일 임자

간원이 진주사(陳奏使) 일행 중 역관들에게 새로 가자(加資)해 준 일을 개정토록 계청하니, 따르지 않았다.

 

금부가 윤겸(尹㻩)의 죄는 탈고신(奪告身)에 해당된다고 아뢰니, 따랐다.

 

12월 14일 계축

김우형(金宇亨)을 사간으로, 민유중(閔維重)을 헌납으로, 이단하(李端夏)를 정언으로 삼았다.

 

호남 순천부(順天府) 백성의 처가 지아비를 죽였으므로 경사(京師)에 잡아들여 죽이고 읍을 강등하여 현으로 삼았다.

 

12월 16일 을묘

대사헌 조복양(趙復陽) 등이 새로 임명된 제주 목사(濟州牧使) 박이명(朴而㫥)과 부산 첨사(釜山僉使) 이저(李竚)를 체차시키도록 계청하였는데, 상이 윤허하지 않고 이르기를,
"변장(邊將)과 변수(邊帥)에 대해 체차시키는 일로 논핵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하니, 복양 등이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간원이 처치하여 출사시키기를 청하니, 따랐다.

 

장령 곽제화(郭齊華)가 상소하여 앞머리에 곧은 말을 듣기 싫어하는 폐단을 말하고, 또 아뢰기를,
"명예를 구하고 곧음을 판다는 것으로 제목을 달아 말하는 자를 죄준다면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말하는 것을 꺼릴텐데, 이렇듯 나라를 망칠 말을 어째서 내 놓았단 말입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유생들의 상소에 대해 며칠씩이나 비답을 내리시지 않고 굳게 거절하는 뜻을 보이심으로써 중외(中外)에 실망을 안겨 주었는데, 이는 유현을 숭상하고 사도(斯道)를 중히 여기는 아름다운 뜻이 못되는 듯 싶습니다."
하고, 끝 부분에 진달하기를,
"병든 어미 곁을 멀리 떠나 있어 정세가 안타깝고 절박하기만 하니, 직명을 체차해 주시어 빨리 돌아가 구하게 해 주소서."
하였는데, 비답은 내리지 않고 계자(啓字)만 찍도록 하였다.

 

우의정 정유성(鄭維城)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장령 곽제화(郭齊華)의 상소 내용 가운데 신을 탄핵한 논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상소는 직접 보지 못하고 그 설을 대충 들어 보건대 ‘위란(危亂)의 기틀이 반드시 여기에 말미암을 것인데, 나라를 망칠 이런 말을 어째서 내놓았단 말인가.’ 하며 신의 죄목을 삼았다고 합니다. 신이 이런 죄명을 지니고 어떻게 하루라도 정승 자리에 버티고 있겠습니까. 교외에 물러가 엎드려 삼가 형벌이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으니, 법사(法司)에 내려 속히 신의 죄를 바로잡게 함으로써 사류(士類)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오늘날 세도(世道)를 경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따위 망언은 마음에 개의할 필요가 없다. 경은 섣불리 행동하여 사체를 중하게 손상시키지 말고 속히 도성으로 들어와 나의 기대에 부응하라."
하였다.

 

12월 19일 무오

경기 유생 조근(趙根) 등이 상소하여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할 것을 청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전 공조 좌랑 조임도(趙任道)가 상소하였다. 성지(聖志)를 확립할 것과 성학(聖學)을 닦을 것과 궁금(宮禁)을 엄히 할 것과 유신(儒臣)을 가까이할 것과 경연을 열 것과 학교를 진흥시킬 것과 무비(武備)를 닦을 것과 곤직(閫職)을 가려 뽑을 것과 군졸을 어루만질 것과 수령을 가려 임명할 것과 출척(黜陟)을 명확히 할 것과 농사 일을 급선무로 삼을 것과 풍속을 바로잡을 것과 절행(節行)을 권장할 것과 염치를 배양시킬 것과 예의를 숭상할 것 등을 청하니, 상이 아름답게 여겨 받아들였다.
임도는 영남 사람으로 일찍이 선조(先祖) 때 직책을 제수해도 나아오지 않았었다. 그 뒤 어사(御史) 남구만(南九萬)이 그의 아름다운 행실을 추천하며 이미 연로했다고 아뢰자, 상이 도신(道臣)에게 명하여 비단을 하사했던 옛날 예를 본따서 그에게 미숙(米菽)을 넉넉히 지급토록 하였는데, 임도가 상소하여 거절하면서 사은하고 이어 진계(陳啓)하는 말을 올린 것이었다.

 

12월 20일 기미

이상진(李尙眞)을 경상 감사로, 민정중(閔鼎重)을 대사간으로, 박승건(朴承健)·홍우원(洪宇遠)을 장령으로, 이민적(李敏迪)을 응교로 삼고, 특별히 전 장령 곽제화(郭齊華)를 경성 판관(鏡城判官)에 제수하였다.
사간 김우형(金宇亨) 등이 아뢰기를,
"곽제화가 언관의 신분으로 소장을 진달드린 것인만큼, 문자로 표현할 때 설혹 중도에 지나친 점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곧 ‘마음 속의 생각은 반드시 진달드려야 한다.’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만약 갑자기 그를 꺾어버려 영해(嶺海)의 밖에 내던지신다면, 이로부터 언로가 막히지 않을까 두려습니다. 외직에 보임(補任)하라는 명을 환수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우의정 정유성(鄭維城)이 재차 상소하여 해직을 청하니, 상이 온유하게 비답하며 허락하지 않았다.

 

12월 21일 경신

사간 김우형(金宇亨) 등이 아뢰기를,
"대간이 일을 논할 때에는 그 일이 비록 묘당에서 대신이 의논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 결말이 나기를 기다린 뒤에야 거행하는 법이니, 이는 대각의 체면을 중히 여겨서입니다. 본원이 바야흐로 곽제화(郭齊華)를 경성 판관으로 임명한 것을 환수토록 논집하고 있는 중인데, 정원이 그 숙배 단자(肅拜單子)를 봉입(捧入)하였으니, 일이 매우 타당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당해 승지를 중하게 추고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무리 성이 나더라도 승지를 추고하도록 청하기까지 하다니 내 정말 이해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우형이 비답을 듣고나서 곧바로 인피하였는데 그 대략에,
"삼가 성상의 비답을 받들건대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대계(臺啓)가 바야흐로 외직에 보임한 명을 환수토록 청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원이 숙배 단자를 봉입한 일이야말로 전에 있지 않았던 일인 만큼 추고를 청하며 논한 것은 체례(體例)상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어찌 그 사이에 감히 성내는 뜻이 개재되었겠습니까. 엄한 비답이 내려진 이상 결단코 태연히 있기가 어렵습니다."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우형이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우의정 정유성(鄭維城)이 세 번째 상소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삼가 살피건대, 곽제화(郭齊華)가 상소한 내용 중에는 채택할 만한 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신을 공격한 한 조목 때문에 그 말들까지 폐기하여 쓰지 않은 채 거꾸로 견책하며 벌을 준다면, 언로에 방해가 될 뿐만 아니라 신의 죄가 더 늘어나는 결과가 될 듯합니다. 신의 직책을 깎아주시어 공의(公議)에 사과토록 하소서."
하니, 상이 승지를 보내어 돈유(敦諭)하였다.

 

교리 이익(李翊), 수찬 여성제(呂聖齊) 등이 상차하여 관학(館學) 유생들의 종사(從祀)에 관한 청을 따를 것을 청하고, 곽제화를 경성 판관에 특별히 제수한 명을 환수토록 청하니, 상이 일렀다.
"종사에 관한 일은 이미 양사(兩司)에 내린 비답에서 유시하였다. 그리고 곽제화가 의견이 있을 경우 꼭 진달하려고 하는 것이야말로 그의 직책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나라를 망칠 말이라고까지 하면서 대신을 배척하다니, 이는 너무도 업신여기며 모욕을 가한 것이다. 따라서 이번에 외직에 보임한 것도 그가 언관이라는 점을 감안해서 말감(末減)해 준 것이라 하겠다."

 

경기 연천(漣川)의 간민(奸民)이 전패(殿牌)를 훔쳐 간 변고가 발생했다. 이에 그 현(縣)을 혁파하고 마전군(麻田郡)에 통합시켰다.

 

정언 이하(李夏)가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는데, 김우형(金宇亨)과 연명(聯名)하여 아뢰었기 때문이었다. 대사헌 조복양(趙復陽) 등이 처치하기를,
"일을 말한 신하가 먼 곳으로 배척을 당하였으므로 그 명을 환수하라는 논이 바야흐로 발동되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사단(謝單)을 봉입(捧入)한 것은 사체로 볼 때 어긋난 점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추고를 청한 계사야말로 그저 관례에 따른 것이라고 하겠는데, 성이 나서 그렇게 했다고 분부하셨으니 이는 속 마음을 몰라주신 것이라 하겠습니다. 모두 출사시키소서."
하니, 따랐다.

 

12월 25일 갑자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곽제화 자신이 사조(辭朝)를 하지 않는 것인가. 아니면 정원이 단자(單子)를 봉입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인가?"
하니, 승지 유창(兪瑒) 등이 아뢰기를,
"예전부터 외직에 보임된 사람은 대간이 그 명을 환수하도록 계청할 경우 감히 배사(拜辭)하지 못하는 것이 예(例)입니다. 곽제화가 아직까지 사조하지 않은 것은 대체로 이 때문입니다."
하니, 또 하교하기를,
"그가 어찌 감히 그런단 말인가. 대계(臺啓)를 믿고서 그러는 것인가? 승지는 대간이 추고를 청할까봐 겁을 먹은 나머지 이렇게 계달하는 것인가?"
하니, 유창 등이 또 아뢰기를,
"신들이 아무리 그지없이 형편없다 하더라도, 어찌 추고를 청하는 논을 꺼리어 응당 행해야 할 일을 봉행하지 않겠습니까. 환수하라는 논이 일단 발동되고 보면 감히 먼저 앞질러 사조하지 못하는 것이 본디 예로부터 내려온 규례이기 때문에 그 예를 원용하여 감히 진달드린 것이었습니다."
하자, 알았다고 답하였다.

 

우의정 정유성(鄭維城)이 네 번째 상소하여 사직하니, 상이 온유하게 비답하며 허락하지 않았다.

 

사간 김우형(金宇亨)이 이어 숙배 단자(肅拜單子)를 봉입한 승지를 논하며 중하게 추고할 것을 청하니, 답하였다.
"승지의 추고를 청하여 배사(拜辭)하지 못하도록 견제하다니, 패거리를 어쩌면 이토록까지 교묘하게 감싸준단 말인가. 그대들의 뜻을 내 놀랍게 생각한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경성 판관(鏡城判官) 곽제화(郭齊華)가 제수된 지 여러 날이 흘렀고 또 이미 사은 숙배를 했는데도 패거리의 세력을 믿고서 꼼짝않고 틀어박혀 있으니, 분의(分義)가 온통 사라진 일로서 지극히 통분스럽고 놀랍기만 하다. 따라서 더 죄를 주어야 마땅하겠으나 우선은 앞으로의 행동을 살펴볼까 한다. 그를 오늘 안으로 떠나보내도록 하라."

 

사간 김우형(金宇亨), 정언 이하(李夏)가 ‘견제하며 패거리를 옹호했다.’는 등의 말을 이유로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좌승지 이홍연(李弘淵) 등이 진달하였는데 그 대략에,
"대계(臺啓)가 정지되기 전에는 봉행할 수 없는 것이 예로부터 내려온 예입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그 예를 폐기시켜 버린다면, 대각을 설치하여 임금의 잘못을 구제하는 책임을 맡긴 뜻이 결코 못될 것입니다. 그래서 곽제화가 방금 배사 단자(拜辭單子)를 가져와 바쳤습니다만, 감히 옛 사람들이 복역(覆逆)175)  했던 뜻을 본받아 성상의 하교를 봉환(封還)하면서 긍정적인 방향으로 결재해 주시기 바라는 바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그대들이 추고를 청하는 논을 당할까 매우 두려워하는데, 하든 말든 마음대로들 해보라."
하였다. 대사헌 조복양(趙復陽) 등이 인피하면서 ‘강제로 배사(拜辭)하게 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극구 진달하고, 이어 ‘지나친 거조를 눈으로 보고서도 바로잡아 구제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파직시켜 주기를 청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교리 이익(李翊) 등이 청대하니, 상이 병 때문에 인견하지 못하겠다고 거절하면서 소회(所懷)를 서계(書啓)하도록 명하였다. 이익 등이 서계하기를,
"곽제화(郭齊華)가 즉시 사조(辭朝)하지 않은 일과 관련하여 최근 들어 누차 엄한 분부를 내리시고 말씀하시는 사이에 크게 화평함을 잃으셨으므로 신들은 삼가 개연(慨然)한 심정을 가누지 못하겠습니다.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대계(臺啓)가 일단 발동된 뒤에는 정원이 봉행하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국조(國朝) 수백 년 동안 내려온 구규(舊規)입니다.
지금 곽제화를 오늘 안으로 떠나보내라고 분부를 내리셨습니다만, 한편에서는 논계하는 중인데 한편에서 떠나보낸다면, 오늘부터 전장(典章)이 허물어지기 시작할 뿐만이 아니라 성덕에 누를 끼치는 것 또한 어떠하겠습니까. 그리고 후설(喉舌)을 맡은 신하가 처음에는 임금을 사랑하는 충성심에서 일과 관련해 복역(覆逆)하는 행동을 취했다가, 엄한 비답을 받은 나머지 결국 단자(單子)를 봉입(捧入)하고마는 결과를 면치 못하게 된다면, 흔들림없이 법을 집행해야 하는 도리가 결코 못 될 것입니다. 이런 길이 한번 열리면 뒷날의 폐단과 직결된 것이니, 삼가 원하건대 마음을 가라앉히고 객관적으로 살피시어 속히 곽제화를 떠나보내라는 명을 취소하심으로써 대각의 체면을 중하게 해 주소서."
하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12월 26일 을축

도목 대정(都目大政)이 있었다. 민희(閔熙)를 승지로, 정지화(鄭知和)를 평안 감사로, 이홍연(李弘淵)을 충청 감사로, 이단상(李端相)을 사인(舍人)으로, 이민서(李敏叙)를 교리로, 안후열(安後說)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지평 송창(宋昌)이 양사(兩司)를 처치하여 김우형(金宇亨)·이하(李夏)·조복양(趙復陽)·이후(李垕)를 모두 출사하게 하자고 청하고, 곽제화(郭齊華)를 외직에 보임하여 떠나보내도록 한 명을 환수하도록 청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고, 처치한 일만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정언 이단하(李端夏)가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오늘날 대신이 사류(士類)를 너무나도 미워한 나머지 조화시키려고 노력하지는 않고 그저 혐의를 두어 성낼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성상마저도 마음속으로 점차 사류에 대해 의심을 갖게 만들었으니, 이러고서도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먼저 성심(聖心)을 바르게 하여 반드시 진작시킬 뜻을 품으시고, 다음에 대신을 타일러 반드시 사류와 마음을 함께 하도록 하시면, 세도(世道) 역시 흥복(興復)될 형세가 있게 될 것입니다. 신은 현재 대관(臺官)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 병 때문에 직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있으니, 속히 체차시켜 주시어 공사(公私)간에 다행스럽게 되게 하소서."
하였다. 소(疏)를 들였으나 비답은 없이 계자(啓字)만 찍도록 하였다.

 

12월 27일 병인

이어 도목 대정을 열었다. 오정일(吳挺一)을 병조 참판으로, 이시매(李時楳)를 형조 참판으로, 유계(兪棨)를 동지의금으로, 안헌징(安獻徵)을 승지로, 정석(鄭晳)을 교리로, 이혜(李嵆)를 정언으로 삼았다.

 

사간 김우형(金宇亨)이 인피하였는데 그 대략에,
"곽제화의 사조(辭朝)와 관련하여 한편으로 쟁집하고 한편으로는 거행하는 일이야말로 일찍이 있지 않았던 일입니다. 정원이 단자를 봉입한 것이 본디 잘못이긴 합니다만, 신이 대각에 있으면서 즉시 진언하지 못했던 것 또한 직무를 수행하지 못한 죄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헌부의 신하가 논한 것이나 옥당이 배척한 것 모두를 어떻게 정원에게만 돌리고 자신을 꾸짖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소명(召命)을 받고 입궐한 것도 염치없는 짓이라 할 것이니, 체차시켜 주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우형이 비답을 듣고나서 이어 아뢰기를,
"곽제화를 외직에 보임한 뒤 임소로 떠나보내라는 명이 대계(臺啓)가 한창 전개되던 날에 나왔고 보면, 후설을 맡은 관원으로서는 시종 논집하며 전하의 마음을 기필코 돌리도록 노력했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렇게 하지 않은 채 한번 진계(陳啓)하고 나서는 곧바로 배사 단자(拜辭單子)를 봉입하고 말았으니, 임금을 허물없는 곳으로 이끈다는 도리가 과연 어디에 있다 하겠습니까. 이 길이 한번 열리면 뒤 폐단을 막기 어려우니, 단자를 봉입한 당해 승지를 파직시키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고 이르기를,
"대간을 외직에 보임한 것이 어제 오늘에 있었던 일이 아닌데 이처럼 분분하게 소란스러웠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하였다. 어쩌면 내가 연소하여 옛 규례를 익히 알지 못한다고 해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정령(政令)이 일체 아래로 귀속되게 하고 임금은 간여하지 못하게 하려고 그러는 것인가? 지금 대각을 보건대, 몸을 나라에 바친다거나 풍채가 볼 만한 논의는 들리지 않고 그저 당론으로 날마다 일을 삼고 있으니, 정말 놀랍기만 하다. 그대들도 속이 있을 것인데,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
하였다. 좌승지 안헌징(安獻徵) 등이 진계하며 봉환(封還)하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재차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우형이 비답을 들은 뒤에 인피하였는데 그 대략에,
"지금 신이 쟁집하는 이유는 실로 언로가 막히게 될까 염려해서인데, 말이 졸렬하고 성의가 얕아 전하의 마음을 돌리지 못한 채 거꾸로 엄한 비답을 받들고 말았습니다. 인신(人臣)으로서 이러한 죄를 지니고 어떻게 스스로 하늘과 땅 사이에 설 수 있겠습니까. 신을 삭직(削職)시켜 주시고 이어 신의 죄를 바로잡도록 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우형이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황해도 유생 오복연(吳復延) 등이 상소하여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할 것을 청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대사간 민정중(閔鼎重)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이 전일 망령되게 말씀드린 것 가운데 아직 한두 가지 일이 여전히 대계(臺啓) 속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만약 신의 말을 옳다고 여기신다면 꼭 서로 버티면서 이렇게까지 오래도록 요구를 안 들어주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신의 말을 그르다고 여기신다면, 신이 또한 어떻게 감히 위엄을 두려워하고 은혜에 감사한 나머지 갑자기 처음에 가졌던 견해를 바꾸어 전하의 분부를 따를 수 있겠습니까. 신명(新命)을 취소하시어 전지(田地)에 관한 일을 완결짓게 해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라."
하였다.

 

정언 이하(李夏), 지평 송창(宋昌), 대사헌 조복양(趙復陽), 집의 이후(李垕) 등이 간원에 엄한 비답을 내렸다는 이유로 서로 잇따라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우의정 정유성(鄭維城)이 여섯 번째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일을 말한 대관(臺官)이 졸지에 축출당한 것을 살펴 보건대 신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재앙이 아닌 것이 없으므로 신은 그저 땅이라도 뚫고 들어가고 싶은 심정뿐입니다. 그런데 지금 듣건대 간신(諫臣)의 상소 내용 중에 또 ‘대신이 사류(士類)를 너무도 심하게 미워하여 오직 혐의를 갖고 노여움을 품으려고만 한다.’는 말이 있었다 하는데, 이 역시 신을 가리킨 것입니다. 보잘것없는 이 몸 하나가 결과적으로 뭇 사람들의 노여움이 집중되는 표적이 되었으니, 불행 중에서도 너무 심한 불행이라 하겠습니다.
삼가 신이 이런 죄명을 얻게 된 이유를 생각해 보건대, 처음에 이숙(李䎘)의 자그마한 실수를 망령되게 진달함으로부터 혼란을 일으키기 시작하고, 뒤이어 청로(淸路)176)  를 외람스럽게 했다는 서필원(徐必遠)의 논에 대응하다가 크게 시기(時忌)에 접촉된 뒤, 사태가 발전하여 서로들 격화되면서 뭇 노여움이 일제히 신을 향해 발동된 것이라 하겠으니, 신은 참으로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직명(職名)을 깎아 주시어 조정을 편안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경이 오래도록 성 밖에 체류하고 있는 것은 사체로 볼 때 부당하다. 뜻을 편안히 갖고, 사직하지 말고서 속히 들어와 상하의 기대에 부응하라."
하였다.

 

12월 30일 기사

장령 박승건(朴承健)이 논계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인혐하였다. 정원이 봉입하지 않자, 승건이 다시 ‘일찍이 전결(田結)에 관한 논에 참여했던만큼 감히 인피한 대간을 처치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교리 이민서(李敏叙) 등이 처치하기를,
"정원의 신하가 전하의 위엄에 겁을 먹은 나머지 예로부터 내려오는 법규를 굳게 지키지 못한 채 전에 있지 않던 성조(聖朝)의 지나친 거조를 봉행하고 말았던만큼, 그를 파직하도록 청한 논의야말로 공의(公議)였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엄한 비답을 내려 꺾어버리셨으므로 상하가 의아해 하고 뭇 사람들이 황혹(惶惑)해 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뭇 신하들이 바야흐로 지금까지의 태도를 완전히 바꿔 깨달으시어 흐르는 물처럼 간언을 따르시기를 성명(聖明)께 바라고 있는만큼, 자기 자신이 불안하다고 하여 경솔하게 간관을 체차시킬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외직에 보임토록 한 명을 환수하라고 청하는 것이야말로 단연코 그만 둘 수 없는 일이었고 보면, 그렇게 논계한 신하에게 피혐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또 소회를 다 진달드림은 다행히 양찰(諒察)해 주시기를 기대하는 것이니, 바르지 못하다는 분부는 언관을 대우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진실로 위로하여 마음을 풀어주고 관직을 되돌려 줌으로써 끝까지 말하도록 책임지워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소패(召牌)에 응하지 않을 경우에는 마땅히 체차시키는 것이 요즘의 규례입니다. 피혐할 일도 아닌 것을 억지로 끌어다 붙이면서 대각에 나왔다가 곧바로 나간 행동은 근거가 없는 것이니, 그대로 재직시킬 수 없습니다.
사간 김우형(金宇亨), 정언 이하(李夏), 지평 송창(宋昌)은 출사시키고, 대사헌 조복양(趙復陽), 집의 이후(李垕), 장령 박승건(朴承健)은 체차시키소서."
하니 따랐다.

 

유계(兪棨)를 대사헌으로, 원만리(元萬里)·이연년(李延年)을 승지로, 오두인(吳斗寅)을 집의로, 나이준(羅以俊)을 장령으로 삼았다.

 

행 호군 이유태(李惟泰)가 상소하여 소명에 응하지 않으니, 답하였다.
"그대가 만약 올라와 직접 대면하고 의논한다면, 어찌 말을 채용하지 않고 사정에 어두워 맞지 않는다고 말할 리가 있겠는가. 사직하지 말고 속히 올라오라."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상차하였는데 그 대략에,
"대론(臺論)이 정지되기 이전에는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거행할 수 없는 것이 본래 예로부터 내려오는 규례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곽제화(郭齊華)의 일에 대해 대론이 정계(停啓)되는 것도 기다리지 않고 갑자기 엄한 분부를 내리시어 떠나보내도록 독촉하셨습니다. 중외(中外)에서 이를 듣고 놀라워할 뿐만 아니라 장차 끝없는 폐단을 야기할 가능성이 있으니, 성명(成命)을 중지하시고 대론의 결말을 기다리신 뒤에 조처토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경이 이토록까지 말을 하니, 곽제화는 우선 중로(中路)에 머물러 있게 하고 결말이 나기를 기다렸다가 떠나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대사간 민정중(閔鼎重)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이 지난번 본직에 있으면서 한두 가지 일을 망령스럽게 논한 적이 있었는데, 그 중에는 윤기(倫紀)와 관계되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끝내 요구 사항을 관철시키지 못하였으니, 신이 너무나도 직책을 수행하지 못했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삼가 살피건대, 양사의 관원들이 일을 말한 신하를 관대히 처리하여 간언이 나올 수 있는 길을 넓히도록 청하였는데도, 전하께서는 갑자기 진노하시며 너무 사납기까지 한 사기(辭氣)로 잘못되게 임금을 모욕하였다고 배척하시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런데 신처럼 소원하고 미천한 자가 만약 또 다시 망령된 발언을 한다면, 의심을 받는 것이 어찌 또 이 정도로 그치겠습니까. 은명(恩命)을 환수하시어 신이 분수에 따라 편안히 살면서 전지(田地)의 일에 진력하게 해 주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라고 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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