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6권, 현종 4년 1663년 1월

싸라리리 2025. 12. 9. 11:04
반응형

1월 1일 경오

대사간 민정중(閔鼎重)이 스스로 염치에 관한 의리를 잃었다는 이유로 인피하면서 체차해 주기를 청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이때 대신의 상소 내용 가운데 ‘사류(士類)가 미워하며 많은 말을 늘어놓고 있다.’는 말이 있었다. 그리고 장령 곽제화(郭齊華)가 일을 말하다가 상의 뜻을 거슬려 외직에 보임(補任)되는 명을 받자, 양사가 불가하다고 쟁집(爭執)하며 누차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이에 따라 정론(停論)하기를 기다릴 필요 없이 임소(任所)로 부임케 하라고 독촉하였는데, 간관이 다시 이를 쟁집하였으나, 상이 엄히 비답을 내리며 꺾어 버렸다. 그래서 정중이 이렇게 피혐했던 것이다.

 

1월 2일 신미

사간 김우형(金宇亨) 역시 곽제화의 부임을 독촉한 일과 관련하여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지평 송창(宋昌)이 아뢰기를,
"사간 김우형이 인피하였는데, 신의 의견도 우형과 같은 만큼 감히 그를 처치할 수 없으니, 체차시켜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1월 3일 임신

허적(許積)을 형조 판서로, 이연년(李延年)·강유(姜瑜)를 승지로, 안후열(安後說)을 집의로, 이후(李垕)를 사간으로, 이유상(李有相)을 정언으로 삼았다.

 

교리 정석(鄭晳) 등이 처치하여 대사간 민정중(閔鼎重)과 지평 송창(宋昌)의 출사를 청하고, 사간 김우형(金宇亨)의 체차를 청하였는데 우형이 패소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월 4일 계유

대사간 민정중(閔鼎重)이 또 인피하기를,
"신이 사적으로는 말을 관철시키지 못한 부끄러움이 있고 공적으로는 망령되게 제멋대로 말한 죄가 있는만큼, 다시 대각의 자리에 있게 될 가망은 이미 없다고 할 것입니다. 더구나 지금은 전하께서 날이 갈수록 거세어지기만 하시어 위와 아래가 통하지 않고 막혀 있는 상태입니다. 그리하여 언관이 무엇을 논하든 일체 거부하여 막아버리시며 조금만 성상의 뜻에 어긋나면 번번이 꺾어버리곤 하는데, 전부터 가까이 믿고 예우하던 신하들에 대해서도 모두 이런 거조를 취하고 계십니다. 이런 상황에서 신처럼 위태롭게 처신하는 사람이 어떻게 감히 외람되게 그 사이에 끼어, 대간을 경시하는 성명(聖明)의 마음을 더욱 열어드리고 청명한 조정에 거듭 부끄러운 존재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부득이 소명에도 응하지 못했으니, 책임을 회피하고 태만함이 크다 하겠습니다. 삭직시켜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간원이 처치하기를,
"정중은 진퇴를 구차하게 하지 않고 숨김없이 말을 모두 하니 그 뜻이 가상합니다. 그러나 이미 소명에 응하지 않았으니 체차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황해도 유생 오복연(吳復延) 등이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문묘에 종사하기를 청하며 세차례 상소하였으나, 상이 들어주지 않았다.

 

서필원(徐必遠)을 대사성으로, 이숙(李䎘)을 수찬으로 삼았다.

 

상이 대신과 주사(籌司)001)  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는데, 원임 대신 이경석(李景奭)도 청대하여 입시하였다. 경석이 나아가 아뢰기를,
"선조(先祖) 때에 호남의 대동미(大同米)를 13두(斗)씩 거두어 들이기로 정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듣건대 쓰고도 남는다 하니 13두를 적당히 줄여서 백성의 힘이 펴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지난번에 도신(道臣)이 역시 수량을 감해 주도록 청했었는데, 묘당이 채용하지 않은 것은 매우 불가합니다."
하였는데, 좌의정 원두표(元斗杓)가 아뢰기를,
"호남의 사인(士人)도 상소하여 감해 줄 것을 청하였고 도신도 감해 줄 것을 계청하였습니다만, 모두 윤허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듣건대 열읍(列邑)에서 조정의 명만 기다리면서 아직까지 거두어들이지 않고 있다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결코 감해 줄 수 없다. 쓰고 남은 것이 있을 경우 감해 주기를 청하는 것이야 도신의 직무라고 하겠지만, 감해 주는 명만 기다린 채 지금까지 오래도록 거두어들이지 않다니 안 될 일이다."
하였다.
삼가 살피건대, 경석의 이 논의야말로 위를 덜어 아래를 보태주는 의리에 맞는 것이었다. 그런데 두표가 정승의 신분으로 같이 들어와 전하를 대하면서 도와주는 말은 한 마디로 하지 않아 백성을 돌보아주려는 의논이 중지되어 시행되지 않았으니, 애석함을 금할 수 없다.
상이 이르기를,
"곽제화(郭齊華)의 일에 대해 양사가 어찌하여 합계(合啓)까지 하는 것인가?"
하니, 두표가 아뢰기를,
"양사가 쟁집하는 것은 언로 때문이지 제화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런데 성상께서 비답을 내리시면서 상당히 화평함이 결여되었는데, 이는 매우 미안한 일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조복양(趙復陽)이 처음에는 연주(連州)의 고사002)  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더니 나중에는 언로(言路)를 말꼬리로 잡았으니 대관(臺官)이 된 자가 곧바로 환수를 청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용의주도하게 인피를 하다니, 너무도 바르지 못한 짓이다."
하니, 경석이 아뢰기를,
"근일 간신(諫臣)이 그야말로 임금을 허물없는 곳으로 이끌어들이려 하고 있는데, 전하께서 들어주실 가능성은 까마득하기만 하니, 정말 안타깝습니다."
하였다.

 

헌납 이익(李翊)이 상소하기를,
"전하께서 현인을 좋아하는 정성과 간언을 따르는 아름다움이 점점 처음만 못해지고 있으므로 장중한 선비가 날로 멀어져가 아름다운 말을 들을 수 없게 되고 대신이 화해하지 못해 논의가 어그러지고만 있습니다.
전하께서 아무리 사심없는 성덕(聖德)을 갖추고 계신다 하더라도 마음 속으로 의아심을 버리지 못하시어 충성스러운 간언을 듣기 싫어하시는가 하면 심지어 간원에 내린 엄한 비답에 신자(臣子)가 감히 듣지 못할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이 비록 신하가 신임을 받지 못한 죄이긴 합니다만, 자기를 버리고 남을 따르는 성인의 큰 도량은 실로 못된다고 할 것입니다. 이러하고서도 서로 닦고 함께 구제해 나가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일이 궁척(宮戚)에 관계되기만 하면 번번이 듣기 싫어하는 기색을 보이시고, 말이 낭묘의 대신에게 관련되기만 하면 갑자기 축출하는 벌을 내리시곤 하니, 옛사람처럼 과감히 말하는 대간이 어쩌다가 나온다 하더라도 그 누가 기꺼이 전하를 위해 말씀드리려 하겠습니까."
하였다. 당시 곽제화(郭齊華)가 일을 말하다 외직에 보임된 것에 대해 양사가 쟁집하였는데도 상이 오래도록 윤허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익이 상소하여 이를 언급한 것이었다.

 

1월 6일 을해

정언 이유상(李有相)이 아뢰기를,
"일단 소후자(所後子)를 두었으면 뒤에 친자를 낳더라도 그에게 제사를 주관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예이니, 만약 이 예에 어긋난 경우가 있거든 예관으로 하여금 인조조(仁祖朝)의 수교(受敎)에 의거하여 모두 개정하게 하소서. 그리고 곽제화의 숙배 단자를 봉입한 승지를 파직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1월 7일 병자

이은상(李殷相)을 대사간으로, 오두인(吳斗寅)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교리 이민서(李敏叙) 등이 상차하기를,
"해가 바뀌어 봄이 되면서 만물이 새롭게 변하고 있는데, 성명(聖明)께서 즉위하시어 다스리기 시작하신 것도 지금 마침 대국(大國) 5년003)  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진 목공(秦穆公)은 허물을 뉘우치면서 스스로 맹세하여 말하기를 ‘내가 마음 속으로 걱정하는 것은 세월이 자꾸만 흘러가 다시는 기회가 오지 않을 것 같다는 점이다.’ 하였고, 한(漢)나라 소열 황제(昭烈皇帝)004)  는 일찍이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세월은 유수처럼 흐르는데 공업(功業)을 세우지 못했으므로 슬퍼할 뿐이다.’ 하였습니다. 예로부터 호걸스러운 임금들은 시간이 부족한 것을 안타까워하며 각고면려하여 분발하였는데, 마음속으로 늘 이처럼 급하게 여겼기 때문에 일을 행함에 있어 용맹스럽게 하고 과단성있게 결행하였던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어떤 임금들보다 훨씬 총명하고 인자로우시어 즉위 이래로 큰 잘못이 없으셨습니다. 그런데도 뭇 사람들이 마음 속으로 답답하게 여기고 온갖 일이 무너진 채 거행되지 않는 것은 실로 성상의 기질에 나태하고 방종에 흐르기 쉬운 병통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로부터 멋대로 즐기고 안일을 탐한 임금들을 보면, 그 원인이 모두 주색이나 토목 공사가 아니면 사냥에 기인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전하께서는 이런 행동을 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신이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자강(自强)하지 못하시는지를 모르겠습니다.
명(明)나라 신종 황제(神宗皇帝)는 40년 동안 시조(視朝)하지 않다가 끝내는 천하에 난리가 일어나게 하였고 급기야는 멸망의 길에 이르게 하였는데, 이는 또한 근래의 일 가운데 경계로 삼아야 할 일이라고 할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신료를 접하시는 때가 드물어 아랫사람들의 마음이 통하지 않고, 오래도록 경연을 폐지하시어 성학(聖學)이 날로 퇴보하고 있으며, 호령하고 거행해야 할 일들을 걸핏하면 시일만 지체시키는 까닭에 나라의 형세가 시들고 느슨해져 수습할 길이 없게 되었습니다. 전하께서 어떻게 차마 이런 상황에서 편안할 수 있겠습니까. 신들이 이렇듯 옛것을 버리고 새로움을 펼쳐야 할 날을 당하여 어리석은 말씀이나마 진달드리는 바이니, 원하옵건대 성명께서는 유념해 주소서."
하니, 상이 아름답게 여겨 받아들였다.

 

1월 8일 정축

헌납 이익(李翊)이 탄핵하기를,
"부사과(副司果) 유준창(柳俊昌)이 장릉(長陵)의 헌관(獻官)이 되어 멋대로 술을 마시고 예에 어긋난 행동을 하였으니, 불경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감찰(監察)이 그의 죄를 매겨 올린 것이 타당했는데, 헌부의 관원이 술취해 실수한 것으로 그냥 넘겨버렸으니 너무도 법을 집행하는 뜻이 못된다고 하겠습니다. 모두 파직시키소서."
하니, 따랐다.

 

1월 10일 기묘

정석(鄭晳)을 사간으로, 송시철(宋時喆)을 장령으로, 이유상(李有相)을 교리로, 홍만용(洪萬容)을 정언으로 삼았다.

 

헌납 이익(李翊)이 아뢰기를,
"신이 조정의 논의가 날로 무너지고 나라 일이 갈수록 잘못되어 가는 것을 목도하고 감히 소장 하나를 올려 어리석은 견해를 대략 진달드렸는데, 상신(相臣)이 이를 이유로 소장을 올려 물러가기를 청하면서 신이 그를 공격했다고 지목하였으므로 신은 두려운 마음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오늘날 걱정해야할 것은 실로 조정의 의논이 괴리되고 대각이 꺾인 점에 있습니다. 그런데 성상께서 자꾸 의심만 하시어 언로가 장차 막힐 위기에 처해 있으니, 조제(調劑)하는 책임을 우리 임금과 정승에게 크게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공격하는 것으로 신이 의심을 받고 있으니, 계속 이런 식이 될 경우 유언 비어가 종식되지 않고 서로들 참언(讒言)으로 얽어매 어지럽게 분열된 가운데 나라에 화를 끼치고 말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대신이 원하는 바이겠습니까마는, 신의 능력으로는 조화시키기 어려운 탓으로 먼저 의심과 배척을 받고 말았으니, 신을 삭직하시어 조정을 안정시키소서."
하고, 이어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사간 정석(鄭晳)이 처치하기를,
"이익이 소장을 진달드린 원래의 목적이 조화시키려는 데에 있었던만큼 공격했다는 말은 실로 뜻밖이니, 출사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월 11일 경진

대사헌 유계 등이 아뢰기를,
"순천 부사(順天府使) 조여수(趙汝秀)는 남쪽 변방의 웅부(雄府)에 적합하지 않으니, 체차시키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았는데, 뒤에 가서 따랐다.

 

1월 15일 갑신

이진(李𥘼)을 대사간으로, 강유(姜瑜)를 황해 감사로, 이은상(李殷相)을 승지로 삼았다.

 

사간 정석(鄭晳) 등이 아뢰기를,
"숙명 공주가(淑明公主家)의 농장(農庄)이 김해 지역에 있는데, 본 궁가의 차인(差人) 장두길(張斗吉)이 둔민(屯民)을 침학하므로 괴로워하며 원망하는 소리가 길에 깔렸습니다. 그런데도 부사 안경(安鏡)은 궁가의 위세에 겁을 먹은 나머지 사실대로 조사하지 않고 차인을 편파적으로 옹호하면서 조정을 속였으니, 나문(拿問)하여 정죄(定罪)토록 하소서. 그리고 두길의 죄상이 도신(道臣)의 사계(査啓)에 즐비하게 기재되어 있으니, 유사로 하여금 율대로 처치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양서(兩西) 관군(舘軍)의 군역은 군역 중에서도 가장 고달픈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이 그 역(役)의 대상이 되었다가 죽기라도 하면 부모가 죽은 것을 차라리 다행으로 여기고 곡(哭)을 하지 않을 정도이니, 그 괴로워하고 원망하는 정상이 참으로 가슴아프고 슬픕니다.
신이 평양(平壤) 관군 강시익(姜時益)을 살해한 옥사(獄事)의 문안(文案)을 보건대, 그의 족인(族人) 6, 7명이 같이 모의하여 시익 및 그의 처와 자식 7구(口)를 모조리 죽임으로써 일족(一族)이 침해당하는 폐단을 면해보려고 하였습니다. 그 죄상을 살피면 흉악하고 참혹하기 그지없습니다만, 그 변이 일어난 원인을 헤아려 보면 대체로 관군의 역이 중한데다 일족에게까지 폐단이 미치기 때문에 초래된 것이었으니 본도(本道)로 하여금 발전적인 방향으로 변통하게 해서 그들만 너무 고통을 받는다는 원망이 없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삼가 살피건대, 우리 나라에서 군보(軍保)를 일족에게까지 적용시키는 폐습은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되었는데, 근년 이래로 그 폐단이 더욱 심해져 친족을 살해하는 변까지 일어나게 되었다. 그런데도 그 뒤 변통해 주는 일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고 관군의 역은 옛날 그대로였으므로 원망하는 소리만 더욱 늘어났으니, 간원의 논계와 성명의 윤허가 모두 겉치레로 끝난 셈이다. 아, 폐단이 있는데도 개혁은 하지 않고 만지작거리기나 하며 세월을 보내는 상황하에서 백성이 혜택을 받고 나라의 정치가 제대로 이루어진 일은 지금까지 한번도 없었다.

 

개성부(開城府) 유생 김상경(金尙絅) 등이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할 것을 청하며 재차 상소하였으나 상이 들어주지 않았다.

 

대사헌 유계, 집의 안후열, 지평 송창·남천한이 상차하기를,
"최근 옥당이 논한바 ‘성상의 뜻이 나태하고 방종스러우며, 경연을 오래도록 중지하였으며, 신료를 인접하는 것이 매우 드물며, 호령하고 조치해야할 것들을 걸핏하면 모두 지체시키고 있다.’는 등의 말이야말로 오늘날의 상황을 지극히 절실하게 지적한 말이라 하겠습니다. 따라서 성명께서 통렬히 생각하시어 제거해 나가야 할 것들로서 이것보다 더 큰 것은 없다고 할 것입니다.
제궁가의 토전(土田)을 감축해야 한다는 계사에 대해 오래도록 윤허해 따르려 하지 않으시는데, 대계에 내리신 비답에서는 바르지 못하다고 배척까지 하시는 등 조금도 사정을 보아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곽제화(郭齊華)가 먼 외방 출신으로 광망(狂妄)한 논을 끄집어 내었는데, 가령 상신(相臣)이 웃으며 사과를 하고 전하께서도 포용하면서 그냥 놔두셨다면, 당초 소란스럽게 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단지 성명께서 곽제화에게 너무 혹독한 벌을 내리신 탓으로 대간이 어쩔 수 없이 쟁집하였던 것인데, 아직도 한번 윤허를 내리는 것을 아끼고 계십니다.
또 간원이 논한 계후(繼後)에 관한 일은 《예경(禮經)》을 상고하거나 천리(天理)를 참작해 보아도 단연코 의심할 성질의 것이 못 되는데 전하께서 들어주지 않고 계시므로 신들은 나름대로 의아해하고 있습니다.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사사로운 관계에 집착하는 태도를 버리시고 속히 대계(臺啓)를 따르소서."
하니, 상이 너그럽게 답하였다.

 

경기 지역에서 춘등(春等)에 거두어들이는 미곡 8두(斗) 가운데 2두를 감해 주었는데, 헌부의 차자를 따른 것이었다.

 

1월 16일 을유

상이 승지에게 각각 해방(該房)의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시하도록 명하고, 옥당과 양사도 입시토록 명하였다. 양사가 앞 일을 아뢰니, 모두 윤허하지 않고, 궁가의 차인(差人) 장두길(張斗吉)의 일만 윤허하였다. 도승지 남용익(南龍翼)이 아뢰기를,
"양사가 논한 궁가의 일에 대해서 오래도록 윤허해 따르려 하지 않으시는데, 날이면 날마다 그 사실이 조보(朝報)에 기재되어 팔방에 전파되고 있으니, 성덕에 누만 끼치는 일이 되고 있습니다. 즉시 대신과 삼사(三司)005)  를 소집해 상의하여 처리케 하소서.
그리고 신이 《정원일기(政院日記)》를 가져다 상고해 보건대, 인조조(仁祖朝)에 이기조(李基祚)가 부제학으로 있다가 삼척 부사(三陟府使)에 제수되었을 때, 배사 단자(拜辭單子)를 올려야 하느냐고 정원이 품계하자 인조 대왕께서 ‘대계가 정지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봉입하라.’고 명하셨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곽제화와 이기조의 행동은 차이가 있다."
하였다. 이유상(李有相)이 아뢰기를,
"옥체가 오래도록 불편하신 상태인만큼 경연을 정지하는 것은 형세상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때때로 소대(召對)를 내리셔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곽제화의 일과 관련하여 계속 엄한 비답을 내리시는데, 기왕 지나간 일은 바로잡을 수 없다 하더라도 과거의 허물을 앞으로 반복하지 않도록 하셔야 마땅합니다. 곽제화는 시골에서 자라난 까닭에 옛 규례를 잘 알지 못하는데 실제로 위세를 믿고 교만을 부리는 자가 아닙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말을 곧이 듣는다면 곽제화에게는 아무 죄가 없는 것이 될 듯도 하겠다. 그러나 일단 사은 숙배를 해놓고는 즉시 사조(辭朝)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위세를 믿은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하였다.

 

1월 17일 병술

김휘(金徽)를 좌윤으로, 임의백(任義伯)을 우윤으로, 민희(閔熙)를 승지로, 박안제(朴安悌)를 병조 참의로, 정익(鄭榏)을 참지로 삼았다.

 

우찬성 송시열(宋時烈)과 좌참찬 송준길(宋浚吉)이 연명(聯名)하여 상소하기를,
"지천태(地天泰)로 바뀌는 삼양(三陽)의 계절006)  이 되자 만물이 새롭게 빛나고 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성학(聖學)이 날로 진보하고 성덕(聖德)이 갈수록 새롭게 된 결과 만백성이 모두 그 큰 아름다움을 흠앙(欽仰)하여 춤을 추면서 씩씩하고 장엄하게 일어서고 있으니, 이때야말로 천년에 한번쯤이나 만날 수 있는 기회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근년 이래로 들리는 것들은 기대하던 것과 다르단 말입니까. 경연에 임어(臨御)하시는 날이 없고, 아랫사람을 인견하시는 것이 더욱 드물고, 대신의 말이 혹 척완(戚畹)에 관련되기만 하면 한결같이 배척해버리시어 아무리 원망을 초래하고 윤기(倫紀)를 어지럽히는 일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뒤돌아 볼 여유마저 갖지 못하고 계신다 하니, 이것만으로도 이미 크게 안타깝게 여겨진다 할 것입니다.
신들이 또 삼가 생각건대, 천품으로 타고난 성덕에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지만, 그 중에서도 효성이 가장 독실하다고 하겠습니다. 이 점이야말로 사람의 마음을 단단히 결속시키는 대본(大本)이 되기에 충분하기 때문에, 아무리 눈에 보이는 것마다 걱정거리 투성이라 하더라도 식자들이 이를 믿고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삼가 듣건대 지난번 영릉(寧陵)에 향(香)을 올릴 때 향축 단자(香祝單子)를 제때에 내리지 않은 관계로 시간이 급박해 당황하는 가운데 예의가 구차하게 되었다고 하니, 이것이 이른바 제사를 지냈어도 제사하지 않은 것과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전하의 끝없는 슬픔을 어디에서 다시 펼치시겠습니까.
그리고 삼가 듣건대 제소(諸所)의 숙위(宿衞)에게 즉각 분하(分下)해 주지 않는 관계로 늘 일몰(日沒) 때까지 시각이 지체된다고 하는데, 제위(諸衞)의 장수 가운데 이 일 때문에 파면된 자도 더러 있었다고 합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일과 비교하면 이 일이야말로 미미할 뿐만이 아닙니다마는, 그래도 원망을 초래하기에 충분한 일이니, 작은 일이라고 해서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신들이 길에서 들은 일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만, 지극히 큰 것과 지극히 작은 일 두 가지를 거론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를 미루어 본다면 나머지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정성어린 마음이 물씬 우러나고 가르쳐주는 것이 근실하고 간절하니, 실로 보통 올리는 장주(章奏)에 비길 바가 아니다. 내가 불민(不敏)하기는 하지만 가슴에 새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경들은 속히 올라와 목말라하는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말라."
하였다.

 

1월 20일 기축

정언 이혜(李嵆)가 처치하여 지평 남천한(南天漢)의 체차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이에 앞서 남천한이 경연에 들어갔을 때 상이 차자 중의 한 조목을 거론하여 하문하였는데 천한이 모른다고 사죄하였고, 또 계초(啓草)에 오자(誤字)가 있었는데도 깨닫지 못하였는데, 이를 이유로 인피하여 면직된 것이다.

 

1월 21일 경인

권우(權堣)를 도승지로, 오두인(吳斗寅)을 집의로, 남구만(南九萬)을 응교로, 박승건(朴承健)을 장령으로, 심재(沈梓)를 지평으로, 이유상(李有相)을 정언으로 삼고, 안후열(安後說)을 발탁해 승지로 임명했다. 후열이 연소하면서도 문재(文才)가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제수하는 명이 있게 된 것이다.

 

이조 참의 이유태(李惟泰)가 소명(召命)을 받고 올라와 국문(國門) 밖에 이르러서 소장을 진달하며 면직을 청하니, 상이 허락하고, 즉시 군직(軍職)에 부치도록 명하였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사직소를 올렸다. 이유태(李惟泰)가 일찍이 하나의 상소문을 올렸는데, 설치하고 시행할 일들이 많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러 장차 논란하고 변통하려 할 즈음에 태화가 담당하기를 꺼려하여 즉시 병을 이유로 인혐하고 나오지 않은 것이다.

 

1월 22일 신묘

상이 양심합(養心閤)에 나아가 침을 맞았는데, 약방 도제조 이하는 모두 문밖에 엎드려 있게 하고 의관(醫官)만 입시하게 하였다.

 

충청도 유생 유항(柳伉) 등이 상소하여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기를 청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관동(關東) 지방에 전염병이 크게 돌아 사망자가 많이 나왔다.

 

해서(海西) 지방에 나이 1백 세가 넘은 자가 8인 있었는데, 도신(道臣)이 조정에 보고하니, 상이 옷감과 음식물을 넉넉하게 내리도록 명하였다.

 

1월 26일 을미

이조가 아뢰기를,
"대사성의 임무야말로 가장 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일찍이 인조조(仁祖朝) 때에는 유림에서 중망(重望)이 있는 자를 엄선하여 이 직책을 겸대(兼帶)케 함으로써 선비들의 모범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규례가 근래에 폐지되어 시행되지 않고 있는데, 이는 대체로 그런 인물을 구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실직(實職)에 있는 자 가운데 적합한 인물을 차출하여 겸대케 하되 오래 그 자리에 있게 하여 효과를 거두도록 하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1월 27일 병신

유계(兪棨)를 겸 대사성으로, 이정(李程)을 사간으로, 민유중(閔維重)을 부교리로, 정석(鄭晳)을 수찬으로, 이행진(李行進)을 예조 참판으로 삼았다.
사신은 논한다. 이행진은 성격이 본래 괴이하고 망측하며 모든 일을 흉험하고 사특한 방법으로 처리해 나가는 인물인데, 행실마저 비루하고 추잡스럽기만 하다. 그런데 원두표(元斗杓)에게 아첨을 떨며 그의 문객(門客)이 되었는데, 두표가 상에게 행진을 추천하면서 ‘사람됨이 준걸스럽고 깨끗하다.’고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사욕(私慾)을 채우려고 하늘을 속이는 행위라고 비평들을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6책 6권 24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356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역사-편사(編史) / 인물(人物)
사신은 논한다. 이행진은 성격이 본래 괴이하고 망측하며 모든 일을 흉험하고 사특한 방법으로 처리해 나가는 인물인데, 행실마저 비루하고 추잡스럽기만 하다. 그런데 원두표(元斗杓)에게 아첨을 떨며 그의 문객(門客)이 되었는데, 두표가 상에게 행진을 추천하면서 ‘사람됨이 준걸스럽고 깨끗하다.’고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사욕(私慾)을 채우려고 하늘을 속이는 행위라고 비평들을 하였다.

 

1월 29일 무술

이정기(李廷夔)를 이조 참의로, 이정(李程)을 장령으로, 오상(吳尙)을 정언으로, 김우형(金宇亨)을 수찬으로 삼았다. 영의정 오윤겸(吳允謙)에게 충간(忠簡)을, 판서 정경세(鄭經世)에게 문충(文忠)을, 참판 송인수(宋麟壽)에게 문숙(文肅)을 시호(諡號)로 각각 내렸다.

 

첨지 홍처윤(洪處尹)을 작궐(作闕)007)  하여 군직(軍職)에 붙였다.
이에 앞서 홍처윤이 해서 지방의 감사로 있을 때 궁장(宮庄)을 사핵(査覈)하는 일을 법대로 처리하여 위에 보고하자, 상이 좋아하지 않으면서 연석(筵席)에서도 혹 미안한 분부를 내리곤 하였는데, 전조(銓曹)가 그를 주의(注擬)해도 여러 차례에 걸쳐 낙점(落點)해주려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때에 이르러 첨지를 작궐하여 의관(醫官)008)  에게 그 직위를 주라고 명하였는데, 병조가 작궐 단자(作闕單子)를 써서 들이니, 상이 홍처윤에게 낙점한 것이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