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6권, 현종 4년 1663년 2월

싸라리리 2025. 12. 9.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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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일 경자

햇무리가 지고 양이(兩珥)가 있었다.

 

2월 2일 신축

상이 침을 맞았다. 도제조 원두표(元斗杓)가 청대하여 아뢰기를,
"근일 일을 보건대, 걱정되는 것이 많습니다. 영상이 벌써 며칠째 인피하며 나오지 않고 있고, 이조는 판서만 공무를 행하고 있으며 양사 역시 출사하는 사람이 없고, 호판 정치화(鄭致和)는 또 세 번째 상소까지 올리고 있습니다. 이유태(李惟泰)가 올라온 지 며칠이 지났는데도 그가 상소하여 진달한 일을 오래도록 품처(稟處)하지 못하고 있으며 군정(軍政) 역시 정비하지 못한 것이 많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호판을 패초(牌招)하여 임무를 살피도록 하라."
하고, 이어 도승지 권우(權堣)에게 이르기를,
"이 뒤로는 침을 맞을 때라 하더라도 정원에 계류된 공사(公事)는 수합해서 미품(微稟)009)  토록 하라."
하였다.

 

2월 6일 을사

장령 이유(李秞)가 ‘승지 안후열(安後說)은 아직 준직(準職)010)  을 거치지 않았으니 당상으로 승진시킨 것은 부당하다.’고 대석(臺席)에서 발언하자, 지평 심재(沈梓)가 ‘후열은 삼사를 출입하며 재주와 명망이 평소 드러났고 또 전례(前例)도 있으니 꼭 탄핵하여 논할 것은 없다.’ 하였다. 이에 서로들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2월 7일 병오

대사헌        유계가 ‘수석(首席)의 신분으로 안후열(安後說)의 직책을 개정하자는 논과 관련하여 동료들을 진정시키지 못했다.’고 하면서 인피하고, 지평        송창(宋昌)은 ‘안후열의 직책을 개정하자는 논은 단지 법을 준수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그에 대한 명이 내려지던 날 바로 논계하지 못하고 시기를 지나쳐버리게까지 한 것은 나의 책임이다.’ 하면서 인피하고, 정언        이유상(李有相)은 ‘일단 언지(言地)에 있는 몸으로서 안후열에 대한 일을 시기를 놓쳐 논하지 못하게 한 책임이 나에게도 있으니 처치할 수 없다.’고 하면서 인피하고, 대사간        이진(李𥘼)은 ‘국조(國朝) 이래로 아장(亞長)011)                  을 발탁하여 승지로 임명한 경우는 이루 헤아리기 어려우며 내가 보고 기억하는 것만도 한둘이 아니다. 그리고 일찍이 이를 개정한 적이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는데, 후열의 경우만 유독 개정하자고 논하고 있으니, 그것이 온당한 일인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는데, 응교        남구만(南九萬) 등이 처치하여 양사(兩司)의 관원 모두를 체차시켰다.

 

2월 10일 기유

상이 침을 맞았는데, 도제조 원두표(元斗杓)가 청대하자 인견하였다. 두표가 아뢰기를,
"전하께서 오래도록 신료를 접견하지 않고 계시는데, 이유태(李惟泰)가 이미 오래 전에 올라왔는데도 아직 인접(引接)하지 않고 계시니, 정말 미안하기 그지없습니다. 수상(首相)이 정고(呈告) 중이라서 그가 상소에서 진달한 것을 의정(議定)하기는 어렵겠습니다마는, 한번 접견하시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 병이 아직 낫지 않았다."
하였다. 두표가 아뢰기를,
"안경(安鏡)과 조원(曹瑗)의 일에 대해 위아래에서 마치 큰일이나 되는 것처럼 버티고 있는데, 조원의 일은 더구나 궁가(宮家)와 관계되고 있는만큼 외방에서 들으면 필시 석연치 못하게 여길 것이니, 통쾌하게 따라주셔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원이야말로 죄가 있다고 하겠다마는, 안경의 일에 대해 대간이 쟁집하고 있는 것이 옳은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였다. 두표가 아뢰기를,
"이유태(李惟泰)에게 가 보았더니, 그 상소를 양송(兩宋)012)   및 윤선거(尹宣擧)와 상의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듣건대, 윤선거가 무슨 일 때문에 서울 근교에 와 있다 하니, 그에게 직명을 부여하여 그대로 머무르게 해야 할 것인데, 사업(司業)같은 직책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근일 양사가 인피하여 모두 체차되었는데 이에 관해 시비를 가린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하니, 두표가 아뢰기를,
"옥당이 통쾌하게 처치한 것 같습니다. 임금이 사람을 쓸 때 어떻게 자급(資級)에 구애받을 수 있겠습니까. 준직(準職)이 안 된 상태에서 승진시켜 발탁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니, 개정해야 한다고 논한 것은 정말 잘못되었습니다. 그리고 간원까지 처치하는 것을 혐의하여 인피하였는데, 이는 더욱 잘못되었다고 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 생각에는 이유를 체차시키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하니, 두표가 아뢰기를,
"성상의 분부가 옳습니다."
하였다.

 

응교 남구만(南九萬) 등이 ‘양사가 논한 제궁가(諸宮家)의 일을 한 해가 지나도록 윤허하지 않고 있다.’는 것으로 수백 언의 차자를 올리면서 ‘궁가의 시장(柴場) 입안(立案)과 화전(火田) 절수(折受)와 염분(鹽盆)·어전(魚箭) 등속을 일체 혁파하고, 다시 대신과 궁가의 조도(調度)를 참작해 정해서 상법(常法)으로 삼게 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들어주지 않았다.

 

2월 11일 경술

민응협(閔應協)을 대사헌으로, 남용익(南龍翼)을 대사간으로, 남구만(南九萬)을 집의로, 윤개(尹塏)를 장령으로, 원만리(元萬里)·윤심(尹深)을 지평으로, 이유상(李有相)을 교리로, 오두인(吳斗寅)을 수찬으로, 이관징(李觀徵)을 정언으로 삼았다.

 

충청도에 전염병이 크게 돌아 사망자가 매우 많이 발생했다.

 

동지사(冬至使) 여이재(呂爾載) 등이 북경(北京)에서 돌아오다가 산해관(山海關)에 이르러 먼저 역관을 보내 계문(啓聞)하였다.
"관소(館所)에 머물고 있을 때 종자 한 사람이 몰래 초피(貂皮)를 팔다가 청(淸)나라 사람에게 붙잡혔으므로 신들이 즉시 엄형을 가하며 치죄하였습니다. 그리고 역관들로 하여금 저쪽의 내부 사정을 탐문하게 하였더니, 혹은 ‘서촉(西蜀)·운남(雲南)·귀주(貴州) 등 지역이 모두 평정되었으며 영력 황제(永歷皇帝)가 패몰(敗沒)한 것도 헛소문이 아니다.’ 하고, 혹은 ‘영력 황제가 죽지 않고 남방을 보유하고 있다.’ 하였는데, 어떤 말이 옳은지 모르겠습니다."

 

2월 12일 신해

지평 원만리(元萬里)가 인피하기를,
"대사간 남용익(南龍翼)은 지난번 정원에 있을 때 일을 잘못 아뢴 탓으로 유생의 상소에 의해 배척을 받고 인피하여 나아오지 아니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곧바로 다시 출사하였으니, 이는 사부(士夫)의 염우(廉隅)를 잃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규핵하자는 논을 석상(席上)에서 꺼냈는데, 동료들이 따라주지 않았으니, 이는 신이 경시당한 소치입니다. 체차시켜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이때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자고 유생이 소를 올렸는데, 남용익이 지신사(知申事)013)  로서 아뢰기를 ‘종사하기를 청한 것은 참으로 옳지만 상소한 시기가 잘못되었다.’고 하였기 때문에 만리가 이렇게 논한 것이었다. 이에 집의 남구만(南九萬) 등이 이의를 제기하며 인피하기를,
"남용익이 경연 석상에서 실언한 것은 한때 말을 잘못한 것에 불과하니, 뒤미쳐 이를 허물하며 중하게 죄를 줄 수는 없습니다."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우상 정유성(鄭維城)이 아뢰기를,
"신이 멀리 떠날 날이 임박하였기에 부득이 부끄러운 얼굴을 들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서필원(徐必遠)에게 곧음을 팔아 명예를 구하는[沽直要名] 모습이 엿보였으므로 신이 망령되이 말하며 배척했었는데, 그 결과 뭇 의논이 격분하여 일어났으니, 이는 신이 스스로 헤아리지 못한 잘못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곽제화(郭齊華)가 맞지 않는 말을 한 마디 한 탓으로 먼 변방으로 축출당했으므로 양사가 몇 개월에 걸쳐 쟁집하고 있으니, 공의(公議)를 따라 통쾌하게 한번 윤허를 내려 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우상만을 위안하려 해서가 아니라 대신을 대우하는 도리는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뜻에서 그렇게 한 것이다."
하자, 교리 이민서(李敏叙)가 아뢰기를,
"사람들이 말하기 어려워하는 것을 말하다 보면 으레 남의 단점을 들추어내는 것으로 보이기 십상인데, 이를 한결같이 명예를 구하여 곧음을 파는 행동으로 지목한다면, 그 누가 이런 함정에서 빠져나올 수 있겠습니까. 일의 곡절을 따져 사실에 의거해서 배척하는 것이 곧 대신의 할 일이지, 명예를 구하여 곧음을 판다고 사람을 배척하는 것은 대신의 할 도리가 못될 듯싶습니다."
하였다. 좌상 원두표(元斗杓)가 아뢰기를,
"일이란 진보하지 않으면 퇴보하는 법입니다. 근일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무사안일주의로만 처리한 채 조금도 진작될 가망이 없으니 매우 우려스럽습니다."
하고, 유성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오래도록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에 계신 관계로 신료를 접견하시는 일이 드물고 모든 일이 흐지부지되고 있는데, 이것을 생각하면 정말 통곡하고 싶을 따름입니다. 이유태(李惟泰)가 상경(上京)한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한번도 인접(引接)하지 않으셨으니, 그가 상소하여 진달한 일들은 어느 때나 의정(議定)할 것입니까. 이 한 가지 일만 보아도 진작될 기약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영상이 현재 정고(呈告) 중에 있고 나 역시 종기를 앓고 있어 형편상 오래도록 접견하지 못한 것이다. 주관하는 신하와 함께 상소에서 진달한 일들을 상의하게 할까 한다."
하였다. 이판 홍명하(洪命夏)가 아뢰기를,
"그 소를 보면 가장 중요한 부분이 있는데 그것의 시행 여부를 헤아린 뒤에 차례로 거행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지 않았다. 상이 이르기를,
"이번 양전(量田)에서 새로 얻은 전결은 얼마나 되는가?"
하니, 명하가 아뢰기를,
"한 배(倍)에도 미달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째서 그 지경이 되었는가?"
하니, 명하가 아뢰기를,
"사등(四等)을 시작으로 하여, 등수(等數)를 너무 낮게 책정했기 때문입니다."
하자, 두표가 아뢰기를,
"이것이 어찌 사등을 시작으로 했기 때문이겠습니까. 수령이 명예를 구하는 일에만 힘을 쏟은 결과 백성들이 국법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수령 중에 한 사람도 벌받은 자가 없고 감색(監色)도 한번 형(刑)을 받은 일이 없이 기강이 점점 해이해지고 있으니, 큰 일을 해보려 해도 정말 어렵습니다."
하였다.

 

해풍군(海豊君) 정효준(鄭孝俊)은 아들 5인이 등과(登科)하였고 나이가 80여 세였는데, 예판 김수항(金壽恒)이 주달한 데 따라 자급(資級)을 뛰어넘어 판돈녕부사로 삼았다. 윤경(尹絅)은 나이가 97세였는데, 이민서(李敏叙)가 주달한 데 따라 해조에 명하여 계속 음식과 비단을 내려주도록 하였다.

 

사간 정석(鄭晳)이 탑전에서 처치하기를,
"언어의 실수를 추론(追論)할 수는 없는 만큼 바로잡을 일이 없으니 구차하게 동조할 수는 없는 일인데 끝내 소란스러운 사태를 야기시켰으니 그 책임은 져야 할 것입니다. 집의 남구만(南九萬) 등은 출사시키고 지평 원만리(元萬里)는 체차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정유성(鄭維城)이 아뢰기를,
"호남 대동미를 감할 것인지 감하지 않을 것인지 아직 정하지 못했습니다."
하고, 홍명하(洪命夏)가 아뢰기를,
"어떤 이는 감해야 한다고 하고 어떤 이는 감해서는 안된다고 하는데, 영상은 감하는 것을 불가하게 여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 생각에는 호남에서 13두(斗)를 거두는 것이 그래도 경기 지역의 16두보다는 가볍다고 여겨진다."
하였다. 유성이 아뢰기를,
"해마다 계속 흉년이 들어 백성이 목숨을 부지하기도 어려운데, 어떻게 급하지도 않는 미곡을 재촉해 징수함으로써 백성으로 하여금 목숨을 보전하지 못하게 할 수야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두표와 명하가 시종 감하는 것은 불편하다고 말을 하니, 상이 이에 따랐다.
사신은 논한다. 호남에서 대동미로 거두는 13두(斗) 중에서 3두를 감해 주더라도 수요에는 충분히 응할 수 있을 것이다. 도신(道臣)의 계사(啓辭)와 이경석(李景奭) 등의 차자야말로 백성의 사정을 헤아리고 용도를 참작해서 진달드린 것이었다. 따라서 대신의 입장에서는 마땅히 한 목소리로 감할 것을 청하여 은혜로운 정사가 백성에게 미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두표는 감해주면 안 된다고 극력 진달하였는데, 명하가 또 이에 따라 맞장구를 쳐주었다. 중하게 세금을 매겨 마구 거두어들이는 상황하에서 백성이 고달파지지 않고 나라가 위태롭게 되지 않았던 때를 과거에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었던가.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일명(一命)014)  에 속한 인사라도 참으로 물건을 아끼는 마음을 간직한다면 그만큼 반드시 사람에게 혜택을 줄 수 있을 것이다.’고 하였다. 두표가 정승 자리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 이 점은 생각지도 않은 채 오로지 상의 뜻에 영합하여 총애를 굳건히 다질 목적으로 백성을 괴롭게 하고 나라를 병들게 하는 일조차 서슴없이 해대고 있으니, 너무도 불인(不仁)한 자라 하겠다.


【태백산사고본】 6책 6권 26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357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사상-유학(儒學)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재정-공물(貢物) / 역사-편사(編史)


[註 014] 일명(一命) : 가장 낮은 관리의 품계.
사신은 논한다. 호남에서 대동미로 거두는 13두(斗) 중에서 3두를 감해 주더라도 수요에는 충분히 응할 수 있을 것이다. 도신(道臣)의 계사(啓辭)와 이경석(李景奭) 등의 차자야말로 백성의 사정을 헤아리고 용도를 참작해서 진달드린 것이었다. 따라서 대신의 입장에서는 마땅히 한 목소리로 감할 것을 청하여 은혜로운 정사가 백성에게 미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두표는 감해주면 안 된다고 극력 진달하였는데, 명하가 또 이에 따라 맞장구를 쳐주었다. 중하게 세금을 매겨 마구 거두어들이는 상황하에서 백성이 고달파지지 않고 나라가 위태롭게 되지 않았던 때를 과거에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었던가.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일명(一命)014)  에 속한 인사라도 참으로 물건을 아끼는 마음을 간직한다면 그만큼 반드시 사람에게 혜택을 줄 수 있을 것이다.’고 하였다. 두표가 정승 자리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 이 점은 생각지도 않은 채 오로지 상의 뜻에 영합하여 총애를 굳건히 다질 목적으로 백성을 괴롭게 하고 나라를 병들게 하는 일조차 서슴없이 해대고 있으니, 너무도 불인(不仁)한 자라 하겠다.

 

2월 14일 계축

집의 남구만(南九萬) 등이 아뢰기를,
"신부(新婦)가 시부모에게 바치는 기수(器數)에는 원래 정해진 제도가 있고, 근일 이 법을 다시 밝힌 것 또한 엄격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돈녕부 도정 이정한(李挺漢)은 귀근(貴近)의 가문으로서 자기가 먼저 이를 범하여 기수를 과람하게 하였으니, 먼저 파직한 뒤에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전남도 생원 안국재(安國宰) 등이 상소하기를,
"본도 함평현(咸平縣)의 성묘(聖廟)에 지난번 뜻밖의 변고가 발생해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의 위판(位版)이 분실되었습니다. 그래서 도신(道臣)이 치계했더니, 해조가 회계하기를 ‘현에는 본래 무(廡)가 없다. 따라서 본현의 향교(鄕校)에서 동국(東國)의 유현(儒賢)을 봉안하는 것은 비례이니 위판을 다시 만들어 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삼가 생각건대, 주(州)와 부(府)와 군(郡)은 성전(聖殿) 안에 10철(哲)을 종향하고 동무(東廡)와 서무(西廡)에 동국의 유현을 봉안하며, 현인 경우는 무(廡)가 없는 관계로 성전 안에 송조(宋朝)의 4현(賢)과 동국의 9현을 봉안하는 것으로 나라의 제도가 이미 정해져 있으므로, 팔도에서 모두 그렇게 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도신이 계문하면서 동벽(東壁)의 벽(壁)자를 무(廡)자로 썼기 때문에, 해조가 본현의 향교에는 무(廡)가 없는데 웬일일까 하고 의심한 나머지 이렇게 방계(防啓)한 것일 것입니다. 원하옵건대 해조로 하여금 팔방 열현(列縣)의 예에 의거하여 분실된 위판을 다시 만들어 내려 보내게 하소서."
하니, 상이 해조에 소를 내렸다. 해조가 대신과 유신(儒臣)에게 의논할 것을 청하였는데, 대신과 유신 모두가 위판을 다시 만들어주는 것이 타당하다고 의논드리니, 상이 허락하였다.

 

2월 18일 정사

송준길(宋浚吉)을 대사헌으로, 김우형(金宇亨)을 집의로, 이민적(李敏迪)을 사간으로, 남구만(南九萬)을 부응교로, 심재(沈梓)를 지평으로, 오시수(吳始壽)·이숙(李䎘)을 이조 좌랑으로 삼았다.

 

헌납 송시철(宋時喆), 정언 이관징(李觀徵) 등이 아뢰기를,
"근래 나라의 기강이 해이해진 탓으로 호한(豪悍)한 백성들이 변을 일으키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전 영덕 현령(盈德縣令) 심지엄(沈之淹)이 체차되어 돌아오던 날, 품관(品官) 몇 사람이 무뢰배와 결탁하고는 무수히 모욕을 가하면서 칼을 빼들고 돌입하기까지 하였는데, 다행히 관하(管下)의 구원을 받고 간신히 빠져나왔습니다. 그런 변이 일어난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마는 이보다 더 큰 패악한 습벽은 없으니, 앞장서서 변을 일으킨 사람을 본도 감사로 하여금 명확히 조사하게 하여 법대로 처치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2월 19일 무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 및 경기좌·우도 균전사(均田使)인 민정중(閔鼎重)과 김시진(金始振)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오늘 균전사를 인견한 목적은 대체로 수령의 근만(勤慢)을 알아보고 상벌을 내리려 해서이다. 수령 가운데 현저하게 법을 봉행하지 않은 자를 즉시 뽑아내도록 하라."
하니, 시진이 아뢰기를,
"문서를 감정해 본 뒤에야 실정을 자세히 알고 논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정중도 아뢰기를,
"일이 완료되지 않은 상황에서 근만 여부를 알기는 어렵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오늘 인견하고도 끝내 논벌(論罰)하는 일이 없게 되면, 수령들이 더욱 경계하며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이니, 좌·우도의 수령 중에 더욱 심하게 제대로 수행하지 않는 자를 먼저 뽑아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2월 20일 기미

대사간 남용익(南龍翼)이 ‘원만리(元萬里)가 논하여 배척했다.’는 이유로 패소(牌召)에도 응하지 않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인피하여 면직되었다.

 

2월 22일 신유

유창(兪瑒)을 승지로, 이진(李𥘼)을 대사간으로, 정석(鄭晳)을 수찬으로 삼았다.

 

경기좌도 균전사(京畿左道均田使) 민정중(閔鼎重)이 매우 심하게 직무를 수행하지 못한 수령으로 금천 현감(衿川縣監) 유익삼(柳益三)·광주 부윤(廣州府尹) 김수흥(金壽興)·용인 현령(龍仁縣令) 유탁연(柳卓然)·진위 현령(振威縣令) 송단(宋摶)·과천 현감(果川縣監) 심억(沈檍) 및 양근(楊根) 겸임 지평 현감(砥平縣監) 이인석(李仁碩) 등 6읍(邑)의 수령을 초계(抄啓)하고, 우도 균전사 김시진(金始振)은 양주 목사(楊州牧使) 정박(鄭樸)·장단 부사(長湍府使) 이시정(李時挺) 및 부평(富平)과 통진(通津)의 수령을 초계하였는데, 상이 일렀다.
"양근·과천·양주 3읍의 수령을 잡아들여 죄상을 신문하라. 금천·광주·용인·장단 등 4읍의 수령은 본청(本廳)에 잡아들여 경중에 따라 결장(決杖)한 뒤 정직하게 조사 업무를 행하게 하라. 수원·진위의 수령은 우선 추고하라."
사신은 논한다. 양전(量田)하는 목적은 민역(民役)을 균등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지금 원두표(元斗杓)가 등수(等數)를 너무 느슨하게 매겨 결부(結負)가 많이 줄어들고 있다고 진달하여 등수의 다과(多寡)에 따라 수령의 수행 능력 여부를 결정짓도록 하였다. 이에 수령된 자들이 명령대로 수행하여 죄벌을 면해보려는 일에만 급급한 나머지 토품(土品)이 어떠한지는 묻지도 않고 오로지 등수를 올려 결부를 많이 늘리는 것만 일삼고 있으니, 백성을 함정에 빠뜨리는 일과 비슷하게 되지 않겠는가. 두표는 입만 열면 백성에게 재앙을 끼치는 일만 골라서 말하는데, 사람이 어쩌면 이토록 한결같이 불인(不仁)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경기 백성들이 모두 원망하며 말하기를"이 정승이 언제나 망하려는고. 이 정승이 망해야 우리가 살아날 것이다." 고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6책 6권 27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358면
【분류】농업-양전(量田) / 사법-탄핵(彈劾)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역사-편사(編史)
사신은 논한다. 양전(量田)하는 목적은 민역(民役)을 균등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지금 원두표(元斗杓)가 등수(等數)를 너무 느슨하게 매겨 결부(結負)가 많이 줄어들고 있다고 진달하여 등수의 다과(多寡)에 따라 수령의 수행 능력 여부를 결정짓도록 하였다. 이에 수령된 자들이 명령대로 수행하여 죄벌을 면해보려는 일에만 급급한 나머지 토품(土品)이 어떠한지는 묻지도 않고 오로지 등수를 올려 결부를 많이 늘리는 것만 일삼고 있으니, 백성을 함정에 빠뜨리는 일과 비슷하게 되지 않겠는가. 두표는 입만 열면 백성에게 재앙을 끼치는 일만 골라서 말하는데, 사람이 어쩌면 이토록 한결같이 불인(不仁)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경기 백성들이 모두 원망하며 말하기를"이 정승이 언제나 망하려는고. 이 정승이 망해야 우리가 살아날 것이다." 고 하였다.

 

2월 23일 임술

송창(宋昌)을 정언으로, 정만화(鄭萬和)를 예조 참의로 삼았다.

 

사간 이민적(李敏迪)과 정언 오상(吳尙)이 아뢰기를,
"균전(均田)하는 일이야말로 왕정(王政) 중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균등하게 하면 백성이 그 혜택을 입게 되지만 불균등하게 될 경우에는 백성이 피해를 입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조정에서 이미 등수(等數)의 다과를 가지고 상벌을 논하겠다고 하면서 엄명을 한번 내리자 주현(州縣)이 이를 봉행하기에 급급한 나머지 자세히 조사할 겨를도 없이 꼭 결수를 많이 늘리는 것으로 일을 삼고 있으므로 민정(民情)이 더욱 놀라와하고 있으니, 성조(聖朝)의 균전하는 뜻이 과연 어디에 있다고 하겠습니까.
이런 춘궁기를 당하여 공억(供億)015)  하는 비용을 백성들이 필시 감당하지 못할 것이고, 또 봄갈이가 바야흐로 급한 때에 농삿일을 제쳐두고 날마다 전야(田野)에 나와 모이게 하면 농민이 일할 시기를 자연 뺏는 결과가 되고 말 것입니다. 신들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타량(打量)016)  하는 정사를 이제 막 손 놓은 상태이니, 지금 높이 매겨야 할 등급을 하등(下等)으로 매기고 하등을 높은 등급으로 매겼다 하더라도, 그것은 척수(尺數)를 가지고 그 등수를 산출해 낸 것에 불과할 뿐일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서둘러 농무(農務) 때문에 우선 정지시킨다는 뜻의 명지(明旨)를 내리시고 서서히 추수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수령으로 하여금 일일이 현장 답사를 하여 살펴보게 한 뒤 공론(公論)을 취하여 등수를 정하게 하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그러면 고등과 하등을 매기는 일이 필시 크게 문란한 지경에까지는 이르지 않을 것이며, 농민 역시 안심하고 경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균전청과 함께 상의해서 좋은 방향으로 변통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우승지 유창은 탄핵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곧바로 이 직책을 제수받았으므로 이 제목(除目)이 한번 내려지자 물정이 온당치 못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해조가 공의를 아랑곳하지 않고 감히 곧바로 의망한 것은 정사(政事)하는 체통을 크게 잃은 것이니, 유창을 체차시키도록 명하시고, 이조의 당해 당상과 낭청은 추고토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이에 앞서 유창이 승지로 있으면서 곽제화(郭齊華)의 배사 단자(拜辭單子)를 봉입(捧入)하였으므로, 대간이 왕명의 출납을 맡은 의리를 잃었다는 이유로 그를 탄핵하였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렇게 제수하였기 때문에 민적이 탄핵한 것이다.

 

2월 24일 계해

영중추부사 이경석(李景奭)이 상차하기를,
"균전(均田)하는 일이야말로 왕정(王政)에서 그만둘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양전(量田)하는 것을 보건대, 처음에는 관대하게 했다가 나중에는 가혹하고 각박하게 하여 명분은 균전이라고 하면서 내용을 보면 결수(結數)만 늘리고 있으니, 이보다 더 크게 믿음을 잃는 일이 어디에 있겠으며, 백성이 어떻게 원망을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지금 듣건대, 기전(圻甸)의 대소 읍재(邑宰) 가운데 죄를 받은 자가 많다고 하고 또 파직시키거나 결장(決杖)하도록 명을 내리셨다 하는데, 신의 우견(愚見)으로는 불가하게 여겨집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결장한 뒤에 도로 임소(任所)로 가게 하는 것에는 세 가지나 크게 불가한 점이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혹 백성을 사랑하는 임금의 뜻을 몸받아 차마 결수를 늘리지 못한 탓으로 이렇게 죄를 받은 자가 있다면, 백성이 더욱 심하게 조정을 원망할 것이니, 이것이 첫번째 불가한 점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엄하게 명령을 내렸고 보면 도로 부임한 뒤에 형세상 장차 전지의 품질을 따지지 않고 차례로 결수만 늘리려 할 것인데, 그러면 차라리 옛날 하던 그대로 1·2·3등(等)으로 나누던 것만 못하게 될 것이니, 이것이 두 번째 불가한 점입니다. 또 그들 가운데에는 혹 지위가 낮지 않아 병무(兵務)와 민간 행정을 도맡아 책임지고 있는 자도 있을 텐데, 군령과 관계가 없는 전지의 일로 결장을 받게 될 경우, 대부(大夫)에게는 형(刑)을 가하지 않는다는 의리에 위배되니, 이것이 세 번째 불가한 점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차자의 내용이 이와 같으니, 결장하는 일은 우선 양전하는 일의 결말을 보아가며 처리토록 하라."
하였다.

 

2월 25일 갑자

식년(式年) 감시(監試)를 보여 생원에 이적(李積) 등 1백 인과 진사에 홍석보(洪碩普) 등 1백 인을 뽑았다.

 

2월 26일 을축

호군 이유태(李惟泰)가 상소하여 균전에 관한 일을 논하면서 등수를 증가시키고 수령을 논죄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주장하고, 또 아뢰기를,
"균전하는 일이야말로 신이 상소에서 언급한 한 조목의 일이긴 합니다마는, 기전(畿甸) 지방에서 실시하는 균전의 일을 보고 있노라면, 무익할 뿐만 아니라 백성을 사랑해야 하는 왕자(王者)의 정사와도 어긋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양사가 궁가의 면세전을 혁파하도록 쟁집하고 있는 일 역시 신의 상소에 언급된 한 조목의 일인데, 상하가 자기 주장만 고집하여 결정짓지 못한 채 한 달이 가고 일 년이 지나고 있으니, 전하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대체로 상상할 수 있습니다.
아, 전하께서 신을 불러들인 것도 당초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이시려는 아름다운 뜻에서 나온 것이겠습니다마는, 신 역시 전하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무릅쓰고 나오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선 몇 조목의 일에 대해서만 살펴보더라도, 신은 또한 전에 상소를 올려 조목별로 진달한 일들이 끝내는 채택되어 시행되는 일은 없이 국가의 거조가 형식적인 것으로 귀결되면서 신의 진퇴(進退) 역시 근거없는 것이 되어 버리는 결과를 면치 못하게 될까 두려운 생각이 들기만 합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그대가 올라온 지 벌써 오래되었는데도 내가 계속 질병에 시달리느라 서로 만나보지 못했으므로 마음이 매우 편치 못하다. 그대는 뜻을 편히 갖고 머물러 있을 것이요, 길이 떠날 계책일랑 생각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2월 27일 병인

좌상 원두표(元斗杓)가 아뢰기를,
"신이 비국의 신하들 및 좌·우균전사와 함께 가을철을 기다려 균전하는 일의 편부(便否)에 대해 반복해서 상의하였는데, 허적(許積)·홍명하(洪命夏)·정치화(鄭致和)·김수항(金壽恒) 등은 ‘이미 타량(打量)을 완료하였는데 등수(等數)를 미처 바로잡지 못한 읍은 약간에 불과하다. 일이 거의 완료된 상태인 만큼 아무리 농사에 방해된다고 하더라도 추수 때까지 잠정적으로 정지케 하는 것은 매우 불편하다.’ 하고 민정중(閔鼎重)과 김시진(金始振)도 추수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불가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의 의견은 이렇습니다. 수령이 조가(朝家)의 본의를 체득하지 못한 탓으로 토질이 비옥한지 척박한지에 따라 하지 않고 혹 5, 6등(等)에 해당되는 것을 4등으로 매기는가 하면 4등에 해당되는 것을 5, 6등으로 매기는 등 매우 불균등하게 처리하고 있으니, 백성이 원망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균전사가 바야흐로 순심(巡審)하려고 합니다만, 여름 이전에 일을 마치기는 어려울 듯하니, 백성의 농사철을 빼앗게 된다는 대신(臺臣)의 우려가 참으로 옳습니다. 따라서 지금 우선 정지했다가 서서히 농한기를 기다려 하는 것이 편하고 온당할 듯한데, 대신과 충분히 강구하소서."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2월 29일 무진

청사(淸使) 2인이 황후의 상(喪)을 알리는 부고를 전하려고 나왔으므로, 이조 참판 박장원(朴長遠)의 자급(資級)을 뛰어올려 원접사로 차임해서 내려 보냈는데, 원두표(元斗杓)가 진달한 데 따른 것이었다. 상이 이르기를,
"황태후의 상에 성복(成服)하는 일이 있는가?"
하니, 두표가 아뢰기를,
"《오례의(五禮儀)》의 대명집례(大明集禮)를 보아도 본래 이를 거론한 말이 없으니, 거애(擧哀)하는 일은 없어도 될 듯합니다. 그러나 저들이 일단 칙사를 보내어 부고를 전하기까지 했는데 거애를 하지 않는다면 저들이 필시 의아해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거애하는 한 조목을 조용히 상의해야 하겠다. 그런데 내가 병 때문에 교외에 영접을 나갈 수 없으니, 이 뜻을 빈신(儐臣)으로 하여금 저들에게 말하게 하라."
하니, 김좌명(金佐明)이 아뢰기를,
"예문(禮文)에 거애하는 조항이 없으니, 이를 빈신에게 분부하여 칙사에게 말하게 하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하자,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곽제화(郭齊華)를 외직에 보임한 명을 환수토록 청하는 일을 이때에 이르러 정계(停啓)하였다.

 

원만석(元萬石)·오정위(吳挺緯)·이은상(李殷相)·조윤석(趙胤錫)을 승지로, 김만기(金萬基)를 집의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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