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일 기사
동지 정사(冬至正使) 여이재(呂爾載), 부사 홍처대(洪處大), 서장관 이단석(李端錫) 등이 북경(北京)에서 돌아왔다. 서장관이 문견록(聞見錄)을 올렸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저들의 내부 사정을 탐문하였는데, 모두들 말하기를 ‘운남(雲南)·귀주(貴州)·남경(南京)·서촉(西蜀) 등지가 이미 모두 평정되었는데, 오삼계(吳三桂)는 현재 운남과 귀주의 접경 지역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정지룡(鄭芝龍)과 손완(孫莞)이 해도(海島)에 들어가 웅거하면서 항복을 청하였는데, 청국(淸國)에서 대답하기를 ‘올테면 오고 오고 싶지 않으면 올 필요가 없다.’고 하였답니다. 귀주의 백문선(白文先)과 이수창(李守昌)은 모두 수적(水賊) 노릇을 하다가 영력(永曆)017) 에게 귀순하였는데, 수창은 안남왕(安南王)이 되었다가 먼저 죽고, 문선은 귀주왕(貴州王)이 되었다가 영력이 패한 뒤 청나라가 공작(公爵)으로 봉해 주었다 합니다. 신이 돌아오다 풍윤(豊潤)에 이르렀을 때 조금 문자를 아는 한인(漢人) 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가 말하기를 ‘영력은 죽지 않고 아직도 남방을 보유하고 있다. 청나라 사람들의 과대 선전을 믿어서는 안된다.’고 하였습니다."
3월 2일 경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출사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정태화는 정승 자리에 있은 지 10여 년간 일컬을 만한 일은 하나도 한 것이 없이 오직 임금의 뜻에 영합하고 아첨하여 총애를 굳건히 다지고 자리를 보전할 마음만 품었으며 뇌물을 많이 받아 집이 매우 호사스러웠는데 정작 나랏일에 대해서는 나몰라라 하고 놔두기만 하였다. 이유태(李惟泰)가 장문의 상소를 올려 여러 일들을 변통하도록 청하자, 상이 유지를 내려 불러들이면서 장차 공경(公卿)들과 의논해 처리하도록 하려 하였는데, 태화는 그만 병을 이유로 인피하고 나아오지 않은 채 유태가 시골로 물러가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다가 칙사 일행이 나오자 태화가 비로소 출사한 것인데, 틈을 엿보고 일을 피하는 그의 정상에 대해 놀라워하며 분개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태백산사고본】 6책 6권 29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359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역사-편사(編史) / 인물(人物)
사신은 논한다. 정태화는 정승 자리에 있은 지 10여 년간 일컬을 만한 일은 하나도 한 것이 없이 오직 임금의 뜻에 영합하고 아첨하여 총애를 굳건히 다지고 자리를 보전할 마음만 품었으며 뇌물을 많이 받아 집이 매우 호사스러웠는데 정작 나랏일에 대해서는 나몰라라 하고 놔두기만 하였다. 이유태(李惟泰)가 장문의 상소를 올려 여러 일들을 변통하도록 청하자, 상이 유지를 내려 불러들이면서 장차 공경(公卿)들과 의논해 처리하도록 하려 하였는데, 태화는 그만 병을 이유로 인피하고 나아오지 않은 채 유태가 시골로 물러가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다가 칙사 일행이 나오자 태화가 비로소 출사한 것인데, 틈을 엿보고 일을 피하는 그의 정상에 대해 놀라워하며 분개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3월 3일 신미
유계(兪棨)를 이조 참판으로, 안후열(安後說)·민점(閔點)을 승지로, 박세당(朴世堂)을 지평으로 삼았다.
상이 대신 및 형조 판서 허적(許積)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번에 칙사를 맞을 때 복색(服色)은 어떻게 하고 포진(鋪陳)018) 은 무슨 색깔을 써야 하는가?"
하니,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의주(儀註)대로 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정유성(鄭維城)이 아뢰기를,
"양전(量田)에 관한 일을 지금 결정해야 하겠습니다."
하고, 태화가 아뢰기를,
"대간이 논계한 이유는 대체로 농사철 때문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지금 우선 초본(草本)에 따라 수정해 놓고 추수 때를 기다려 하면 편할 듯 싶은데, 하든 안 하든 간에 속히 정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지 않았다.
대신들이 주사(籌司)019) 에 모여 양전의 정지에 따른 편부(便否)에 대해 헌의하였는데, 이경석(李景奭)·정태화(鄭太和)·정유성(鄭維城) 모두가 아뢰기를,
"일이 거의 완료된 상태에서 중도에 그만두고 추수 때까지 기다린다는 것은 매우 불편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다수의 의논에 따라 시행토록 하라."
하였다.
3월 4일 임신
상이 제신(諸臣)과 함께 천담복(淺淡服) 차림으로 칙사를 맞은 뒤에 거애(擧哀)하였는데, 상은 편전에 있으면서 합(閤) 안에서 행례(行禮)하였다.
대사간 이진(李𥘼), 사간 이민적(李敏迪) 등이 아뢰기를,
"양전(量田)이 거의 끝날 즈음에 또 결수(結數)를 늘리는 것과 관련한 의논이 나와 관대하고 느슨하게 처리한 수령들이 죄를 받았으니, 앞으로는 필시 등수(等數)를 올려 결수를 많게 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크게 백성에게 믿음을 잃고 나라를 원망하게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니, 해청(該廳)이 안핵(按覈)할 때에 관대하고 균등하게 하도록 힘써 등수를 올리지 말게 함으로써 균역하여 백성을 돕는 성조(聖朝)의 뜻을 보여주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특별히 바로잡아 백성의 원망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3월 9일 정축
김만기(金萬基)를 응교로, 정석(鄭晳)을 집의로, 나이준(羅以俊)·오상(吳尙)을 장령으로, 윤심(尹深)을 지평으로, 임의백(任義伯)을 도승지로 삼았다.
3월 13일 신사
대신과 비국의 재신(宰臣)들을 인견하였다. 병판 김좌명(金佐明)이 아뢰기를,
"신이 종묘서 제조를 관여하고 있는데, 영녕전(永寧殿)을 봉심(奉審)해 보건대, 서쪽 익실(翼室)020) 의 기둥 하나가 기울어져 있으니, 개수(改修)해야 하겠습니다."
하고, 영상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만약 크게 개조한다면 감역(監役) 등 관원에게만 맡겨 감독하게 해서는 안 되고 당상 3인을 차출해야 할 것입니다."
하고, 우상 정유성(鄭維城)이 아뢰기를,
"도감을 설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태화가 아뢰기를,
"그렇다면 ‘영녕전 수리 도감(永寧殿修理都監)’으로 이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장령 오상(吳尙)이 아뢰기를,
"한산 군수(韓山郡守) 서홍리(徐弘履)가 지난해 봄 진구(賑救)한다는 핑계를 대고 면강(免講)하는 체문(帖文)을 교생(校生)들에게 발급해 주면서 면포(綿布) 5백여 필(匹)을 받았는데, 그 돈으로 이웃 고을의 퇴역(退役)한 전선(戰船)을 사들여 사용(私用)으로 돌렸으므로 사람들의 말이 자자합니다. 나문(拿問)하여 정죄토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김시진(金始振)을 대사간으로, 이진(李𥘼)을 병조 참의로, 오두인(吳斗寅)을 집의로, 김만균(金萬均)을 사간으로, 이익(李翊)을 부교리로, 정석(鄭晳)을 부수찬으로, 민종도(閔宗道)를 검열로 삼았다.
3월 15일 계미
여성제(呂聖齊)를 교리로, 영부사 이경석(李景奭)을 영녕전 수개 도감 도제조로, 호판 정치화(鄭致和)·예판 김수항(金壽恒)·공판 이완(李浣)을 도감 당상으로 삼았다.
이판 홍명하(洪命夏)가 상차하기를,
"승지 이유태(李惟泰)가 패소(牌召)에 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추고를 받았는데, 이는 현인을 대우하는 뜻이 못되는 듯싶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임금을 사랑하는 경의 정성에 내가 감탄했다."
하였다.
지평 박세당(朴世堂)이 임의백(任義伯)을 탄핵하며 후설(喉舌)021) 의 장관이 되기에는 인망이 차지 않는다면서 체차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따르지 않고 일렀다.
"사람이 꼭 들뜨고 가벼워야만 직책에 맞는다고 한다면, 노질(魯質)한 사람은 쓰지 말고 버려야 한단 말인가?"
3월 17일 을유
이진(李𥘼)을 승지로, 김만기(金萬基)를 집의로, 윤개(尹塏)를 장령으로, 이단하(李端夏)를 지평으로 삼았다.
사신은 논한다. 이진은 규모가 매우 좁았으나 검소한 생활을 잘해 나갔으며 가정을 화목하게 하고 조정에서 근신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공경하였다. 그의 아우 이회(李檜)는 재국(才局)이 있었으며 누차 주군(州郡)을 맡아 다스렸는데, 역시 치적의 이름이 높았다.
【태백산사고본】 6책 6권 30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359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역사-편사(編史) / 인물(人物)
사신은 논한다. 이진은 규모가 매우 좁았으나 검소한 생활을 잘해 나갔으며 가정을 화목하게 하고 조정에서 근신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공경하였다. 그의 아우 이회(李檜)는 재국(才局)이 있었으며 누차 주군(州郡)을 맡아 다스렸는데, 역시 치적의 이름이 높았다.
지평 박세당(朴世堂)이 아뢰기를,
"그저께 도승지 임의백(任義伯)을 체차시키라고 논했는데, 성상께서는 ‘질로(質魯)한 사람은 쓰지 못한단 말인가.’ 하고 비답을 내리셨습니다. 신은 삼가 모르겠습니다마는, 성명께서는 과연 임의백을 박로(朴魯)하고 후질(厚質)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대체로 그는 출세에만 급급한 나머지 부끄러움도 잊은 채 날마다 요로(要路)에 달려가 끝내 현달하게 되었으니 그 흠을 숨기기가 어렵고, 그가 역임한 것을 보아도 실제 능력은 없으면서 오로지 휼궤(譎詭) 일변도로 흐르고 괴이하고 허망한 짓을 행했으므로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중후하고 순박한 사람의 행동이라고 하겠습니까. 후설(喉舌)의 장관은 본래 준망(峻望)의 대상인데, 임의백처럼 남에게 천시를 당하고 비부로 지목받은 자에게 어떻게 함부로 제수할 수 있겠습니까.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또 들어주지 않았다. 이에 앞서 임의백이 황해도 관찰사로 있을 때 술잔을 잃어버렸는데 분향하고 앉아서 술잔 훔쳐간 사람을 스스로 저주하였으므로 진신(搢紳)들이 그 이야기를 전하며 웃었다. 대계(臺啓)에서 괴탄한 짓을 행했다고 한 것은 대개 이것을 가리킨 것이었다.
3월 18일 병술
집의 김만기(金萬基)가 아뢰기를,
"신은(新恩)022) 을 위한 문희연(聞喜宴)023) 이야말로 조신(朝紳)이 다들 와서 모이는 자리인데, 병판 김좌명(金佐明)이 술주정하며 좌석을 매도하면서 경재(卿宰)를 능멸하였으니, 크게 예경(禮敬)을 잃었습니다.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때 이판 홍명하(洪命夏)의 아들이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으므로 그 집에서 자축연을 베풀었다. 좌명이 그 연회에 참석하여 농담으로 예판 김수항(金壽恒)에게 말하기를
"영공의 입에 어째서 젖 냄새가 나는 것인가."
하자, 손님들이 모두 웃었는데, 만기가 이 말을 듣고는 이렇게 논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후 좌명이 김수항과 대질심문한 결과 끝내는 그런 사실이 없는 것으로 나타나자 사람들이 만기의 행동을 각박하게 여겼다.
대사간 김시진(金始振)이 체차되었다. 이때 시진이 균전사(均田使)로서 열읍에 나가 순심(巡審)하게 되었으므로 간직(諫職)을 오래도록 비워둘 수 없다고 상장(上狀)하여 면직된 것이다. 시진은 사무에 통달하고 산법(算法)에 밝았으므로 그에게 균전하는 임무를 부여한 것이었다.
서필원(徐必遠)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필원은 사람됨이 확고하고 행동거지가 구차하지 않았으며 조정에서 과감하게 발언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많이 공경하면서 두려워하였다. 일찍이 항소(抗疏)를 올려 대신에게 미움을 받은 탓으로 오래도록 산반(散班)에 있다가 이때에 이르러 다시 간원의 장관이 된 것이었다.
3월 20일 무자
진하(進賀) 겸 사은(謝恩) 정사(正使) 우상 정유성(鄭維城), 부사 호조 참판 이만(李曼), 서장관 박승건(朴承健)이 연경으로 떠났다.
지평 박세당(朴世堂)이 인피하기를,
"신이 시소(試所)에 있으면서 임의백(任義伯)을 논핵한 본부(本府)의 소장을 얻어 보건대, 초계(初啓)의 문자를 모두 삭제하고 별도로 몇 귀절의 말을 만들었는데, 그나마 절반은 그를 찬탄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었으므로 신이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대체로 신이 논한 것은 모두가 의백의 실상입니다. 만약 그것이 과연 사실이 아니라면 대각의 직책을 수행하는 자의 입장에서는 마땅히 그 시비를 변론해야 할 것이니 그런 뒤에 신을 탄핵해도 될 것입니다. 그리고 혹 의견이 합치되지 않아 구차하게 동조할 수 없는 경우라면 역시 인피하며 물론(物論)을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가 않아, 그만두려 해도 그만둘 수가 없게 되자 칭찬 반 비난 반으로 구차하게 말을 만들어내어 억지로 따르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 의백을 위해 주는 측면에서 이를 본다면 위곡(委曲)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사실은 스스로 옳지 않은 처지로 떨어지고 있는 것도 모르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의백이 명환(名宦)을 굽신거리며 섬겨 이렇게까지 될 수 있었고 보면, 동료가 이런 행동을 보인 것도 본래 괴이할 것이 없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신이 너무도 경시를 당했으니, 체차시켜 주소서."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3월 21일 기축
집의 김만기(金萬基)가 아뢰기를,
"동료가 모두 시소(試所)에 들어갔기 때문에 신이 성상소(城上所)의 일을 대행하고 있었는데, 임의백의 체차를 청한 전계(前啓)를 가져다 보건대, 그의 잘못된 악습을 차례로 지적하면서 비부(鄙夫)로 지목을 하고 있었습니다. 과연 이 설대로라면 그의 죄명으로 볼 때 체직만 시키고 그만두어서는 안 되고 아예 조정의 반열에 끼이지 못하도록 해야 옳을 것입니다. 이렇듯 사실을 넘어서서 참혹하고 각박하게 논하는 것은 신이 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신이 하고 싶지도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신이 어떻게 그 뜻을 굽신거리며 따라 계속 전계의 문자를 쓸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박세당(朴世堂)이 장황하게 말을 늘어 놓으며 모욕을 가한 것이야말로 뜻밖의 일로서 신은 나름대로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일단 모욕을 받은 이상 뻔뻔스럽게 얼굴을 들 수가 없으니, 체차시켜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지평 이단하(李端夏)가 처치하였는데, 박세당(朴世堂)에 대해서는,
"문자의 표현이 지나쳤으므로 물정(物情)이 인정하지 않았는데, 인피하면서 또 헐뜯고 매도하는 등 화평함을 잃었으니, 체차시키소서."
하고, 김만기(金萬基)에 대해서는,
"전계(前啓)의 문자를 산개(刪改)하여 너무 간략하게 된 듯하기는 합니다만, 사람마다 각자의 견해가 있게 마련인 것으로서 별로 다른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니, 출사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3월 22일 경인
이은상(李殷相)을 대사간으로, 이민서(李敏叙)를 지평으로 삼았다.
정언 원만리(元萬里)가 아뢰었다.
"어제 헌부가 처치한 것을 보건대, 정말 개탄스럽게 여겨지는 점이 있었습니다. 어떤 논을 그대로 취해 쓰면서 그 논을 끄집어낸 사람을 거꾸로 체차시키다니 이는 실로 근거가 없는 일로서 체례(體例)를 무너뜨리도록 그냥 놔둘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신이 오늘 처치한 관원을 논하려고 했습니다만, 동료의 의논이 들쭉날쭉하여 끝내 귀일되지 못하였습니다. 아, 근래 직기(直氣)는 소멸되고 유약한 풍조만 만연된 나머지 사람의 허물을 덮어주는 행위를 충후(忠厚)한 것으로 인정하게끔 되었으니, 계속 이런 식이 될 경우 나라 꼴이 엉망이 되고 말 것입니다. 신은 동료에게 경시를 당해 그대로 자리에 있을 수 없으니, 체차시켜 주소서."
정언 송창(宋昌)이 아뢰기를,
"박세당(朴世堂)이 임의백(任義伯)을 논한 것은 정말 옳습니다. 다만 그가 피혐한 사연을 보면 크게 화평함을 잃었는데 심지어는 ‘의백이 명환(名宦)을 굽신거리며 섬겼고 보면 동료가 이런 행동을 한 것도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김만기(金萬基)가 기다려 상의하지도 않고 문자를 산개(刪改)한 것은 체례(體例)상으로 잘못한 실수에 불과한 것인데, 어떻게 이토록까지 심하게 헐뜯고 매도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런데 동료가 세당의 체차를 청한 것은 잘못이라고 하면서 논하려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이번에 처치한 것은 그의 논이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단지 동료를 너무 심하게 공격하였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체차되었어도 그의 논을 취할만하다면, 그대로 연계(連啓)를 하더라도 절충하는 논의 정신에서 볼 때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인데, 어찌 이를 이유로 탄핵할 수 있단 말인가.’ 하였는데, 동료가 끝내 인피까지 하였습니다. 신이 어찌 감히 태연히 있겠습니까. 체차시켜 주소서."
하고, 모두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3월 23일 신묘
헌납 송시철(宋時喆)이 처치하여 송창(宋昌)은 체차시키고 원만리(元萬里)는 출사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장령 윤개(尹塏)가 김만기(金萬基)가 인피한 일을 처치하기를,
"일의 시비를 따질 것 없이 동사(同事)한 관원이 일단 체직되었고 보면 이치상 혼자 나와 행공(行公)할 수는 없을 듯하니, 체차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사신은 논한다. 박세당(朴世堂)의 피사(避辭)가 과격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단하(李端夏)가 그렇다고 해서 그의 체차를 청한 것은 실로 근거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원만리(元萬里)가 논하려 했던 것인데, 송창(宋昌)이 김만기에게 죄를 지을까 두려워하여 굳게 고집하면서 따르지 않았으니, 만리가 어떻게 인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윤개(尹塏)는 사람됨이 어둡고 용렬하여 어떤 일을 당하면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하니, 그가 몽롱하게 처치한 것을 괴이하게 여길 것도 없다.
【태백산사고본】 6책 6권 31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360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역사-편사(編史)
사신은 논한다. 박세당(朴世堂)의 피사(避辭)가 과격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단하(李端夏)가 그렇다고 해서 그의 체차를 청한 것은 실로 근거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원만리(元萬里)가 논하려 했던 것인데, 송창(宋昌)이 김만기에게 죄를 지을까 두려워하여 굳게 고집하면서 따르지 않았으니, 만리가 어떻게 인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윤개(尹塏)는 사람됨이 어둡고 용렬하여 어떤 일을 당하면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하니, 그가 몽롱하게 처치한 것을 괴이하게 여길 것도 없다.
남용익(南龍翼)을 예조 참판으로, 서필원(徐必遠)을 예조 참의로, 이민적(李敏迪)을 집의로, 박정(朴烶)을 장령으로, 윤심(尹深)을 정언으로 삼았다.
3월 25일 계사
정언 원만리(元萬里)가 아뢰기를,
"박세당(朴世堂)이 논한 것이야말로 공의(公議)를 따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평 이단하(李端夏)가 몇 조목의 문자를 발췌해내어 저지시키려는 계책을 세웠는데, 결국에는 그의 논을 가져다 쓰면서 그 사람을 배척하기까지 하였으니, 이보다 더 심하게 시비가 전도될 수가 없습니다. 체차시키소서. 장령 윤개(尹塏)가 처치한 내용을 보건대, 너무나도 무기력하고 구차하기가 그지없습니다. 이런 말이 행해진다면 공의를 펴기가 어려울 뿐더러 뒷날의 폐단이 염려되니, 체차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부호군 이유태(李惟泰)를 인견하였다. 유태가 아뢰기를,
"신의 말이 시의(時宜)에 합당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모두가 옛사람들의 여론(餘論)으로서 신이 처음 내놓은 말은 아닙니다. 그리고 자기의 뜻을 꼭 행하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묘당(廟堂)에서 진퇴(進退)해 주기를 기다릴 뿐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도 행하고 싶기는 하다만, 일은 같은 일이지만 시대가 다르다는 탄식이 없지 않다."
하였다. 유태가 아뢰기를,
"대계(臺啓) 가운데 궁가(宮家)에 관한 일을 오래도록 윤허해 따르려 하지 않으시니, 신은 삼가 안타깝게 여깁니다. 전하께서는 대간이 궁가를 업신여긴다고 생각하셔서 따르지 않는 것입니까? 이것이야말로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이롭게 하려는 정신에서 발로된 것인데, 어찌 다른 마음이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 말할 만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궁가에 관한 일만 논하고, 또 무심히 한 일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행한 것이라고 여기니, 이는 실로 타당하다고 할 수 없다."
하였다. 유태가 아뢰기를,
"임금의 한 마음이 곧 만사의 근본이 되는데, 마음을 바르게 하는 요체로는 경연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임어(臨御)하신 이래로 경연을 열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는데, 외부 사람들은 성상의 건강이 불편하다는 것을 모르고 더러 ‘다른 일은 그래도 잘 응접하시면서 경연만은 열지 않고 계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성상께서 건강이 불편하신 중이라 하더라도 문을 닫고 강론(講論)하시면 그것도 괜찮으리라 여겨집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눈병 때문에 책자를 보기가 어려워 조금 낫기를 기다리려 하는 것이다."
하였다. 유태가 어미의 병을 이유로 돌아가기를 청하면서 사직하고 나왔다.
3월 26일 갑오
오정일(吳挺一)을 도승지로, 서필원(徐必遠)을 우승지로, 이은상(李殷相)을 좌부승지로, 조윤석(趙胤錫)을 우부승지로, 정석(鄭晳)을 집의로, 김익렴(金益廉)을 장령으로, 홍만용(洪萬容)을 지평으로 삼았다.
부응교 남구만(南九萬) 등이 청대하니, 상이 인견하였다. 구만이 아뢰기를,
"신은 이유태(李惟泰)가 어떤 인물인지도 모르고 그가 한 말이 타당한지 어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일단 불러들인 상태에서 끝내 예우해주지도 않고 또 그 말을 채용하지도 않는다면, 은둔해 있는 선비들의 마음이 모두 떠나버리지 않을까 신은 두렵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병 때문에 오래도록 불러서 보지 못하다가 어제 인대(引對)했었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어미의 병을 이유로 돌아가겠다고 하니, 형세상 만류할 수가 없었다."
하였다. 구만이 아뢰기를,
"대신과 균전사(均田使)를 불러서 보실 때에도 인접(引接)하지 않으셨으므로, 아랫사람들 모두가 ‘전하가 유태를 싫어하여 박하게 대하신다.’고 하고 있으니, 신은 삼가 개연(慨然)해집니다."
하니, 상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구만이 또 아뢰기를,
"양사가 제궁가의 일을 쟁집하고 있는데 하답(下答)을 아직도 아끼고 계시니, 전하께서 어떤 의도를 가지고 계시기에 줄곧 굳게 거절하시는지 신은 모르겠습니다. 외부의 의논을 들어 보면, 혹 자전(慈殿)의 뜻을 어기기가 어려워 전하께서 자유롭게 하지 못한다고도 하는데, 정말 이 말이 맞습니까? 아니면 전하의 뜻이 그러한데 신하들의 말을 듣고 태도를 바꾸려 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까? 신은 번거롭게 해드리는 것을 피하지 않고 감히 들은 내용을 진달해드립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어려워하다가 서서히 이르기를,
"어찌 자전의 분부 때문에 따르지 않는 것이겠는가. 그리고 대간이 정계(停啓)할 때까지 버티고 있는 것도 아니다."
하였다. 구만이 아뢰기를,
"성상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대신과 속히 강정(講定)하셔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의논해서 처리토록 하겠다."
하였다. 구만이 다시 명백하게 하교할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변통하겠다. 어찌 그럴 시기가 없겠는가."
하였다. 구만이 아뢰기를,
"상의 분부에 아직도 저의(底意)가 함축되어 있으니, 신이 다시 번거롭게 해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이미 할 말을 다했는데, 나보고 날짜까지 정하라고 하는 말인가?"
하였다. 구만이 또 아뢰기를,
"계후(繼後)에 대한 일은 윤기(倫紀)와 직결되니 얼마나 중대합니까. 그런데 외부의 의논을 들어보면, 또한 ‘청평위(靑平尉)의 집과 관련이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전하께서 오래도록 윤허해 따르려 하지 않는 것이다.’고 합니다. 지극히 공정하신 성상께서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마는, 신이 일단 들은 것이 있는 이상 감히 사실대로 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꼭 남의 가법(家法)을 어지럽힌 뒤에야 마음이 통쾌하겠는가."
하고, 승지에게 아뢰기를,
"인조조(仁祖朝)의 수교(受敎)를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베껴 올리도록 하라."
하였다. 구만이 아뢰기를,
"신이 지금 다행히 가까운 자리에서 전하를 뵙게 되었으니, 감히 충성심에서 숨김없이 모두 진달드리고 싶습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전하께서 한가히 계실 때에 법도를 따르지 않는 일이 많이 있다.’고 하는데, 전하의 성덕(聖德)에 비추어 볼 때 어찌 이런 일이야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장장 몇 개월이나 문을 닫고 있었는데, 몸에 질병만 없다면 아무리 사람들의 말을 듣는다 해도 내 몸은 편안했을 것이다."
하였다. 상이 승지에게 이르기를,
"도승지 임의백(任義伯)은 형세상 직무를 수행하기 어려우니, 체차하라."
하였다.
대신의 수의(收議)에 따라 균전사(均田使)를 소환토록 한 명을 도로 취소하였다. 이유태(李惟泰)가 인대(引對)할 때, 균전사가 외방에 나가 순심(巡審)하게 되면 농민이 농삿일을 못하는 폐단이 있다고 극력 진달하면서 소환할 것을 청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유태의 논이 행해지지 않게 된 것이다.
내수사가 각도와 각읍에 직관(直關)024) 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경상 감사 이상진(李尙眞)이 계문(啓聞)하기를,
"내수사는 백사(百司)의 아문(衙門)에 끼이지 못하는만큼 직접 공문을 보내지 못하고 꼭 이조를 관유(關由)토록 되어 있으니, 이것이 바로 조종조의 성헌(成憲)입니다. 그런데 근래 내사(內司)에서 각읍에 직관하더니 이제는 또 감사에게 직신(直申)025) 까지 하고 있는데, 이는 사체와 관련이 있는 일인만큼 멋대로 구례를 바꿔 새로운 예를 만들어내게 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내사의 공사(公事)를 이조에 싸 보내면서 사유를 갖추어 이문(移文)하는 바이니, 이번 기회에 구례를 다시 밝혀 직관하고 직신하는 잘못을 바로잡도록 하는 것이 온당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 장계를 이조에 내렸다. 이조가 아뢰기를,
"이상진의 계문이 체례에 합당하고 내사의 이런 습관은 막아야 옳으니, 해관(該官)은 추고하고 해리(該吏)는 수금(囚禁)하는 동시에, 직관을 해 오거든 받아들여 시행하지 말라는 뜻으로 각도에 분부하소서."
하니, 상이 허가하였다.
경외(京外)에 전염병이 크게 돌아 사망자가 매우 많이 발생했다.
3월 29일 정유
서리가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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