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일 무술
김휘(金徽)를 호조 참판으로, 남용익(南龍翼)을 예조 참판으로, 이진(李𥘼)을 대사간으로, 이행진(李行進)을 병조 참판으로, 정석(鄭晳)을 부수찬으로, 이민적(李敏迪)을 응교로, 이세익(李世翊)을 지평으로, 정계주(鄭繼胄)를 집의로, 홍우원(洪宇遠)을 수찬으로 삼았다.
부응교 남구만(南九萬) 등이 상차하기를,
"신들이 지난번 인대할 때, 감히 계후한 뒤 자기 소생으로 제사를 주관케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진달드리면서 속히 간신(諫臣)의 청을 윤허해 주시도록 청하자, 상께서 해조에 특별히 명하여 인조조(仁祖朝)의 수교(受敎)를 베껴 올리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해조의 문적(文籍)이 병란으로 분실되는 바람에 끝내 상고해내어 계달드릴 수 없게 됨으로써 성조(聖朝)의 영갑(令甲)을 징험할 수 없게 되었으니, 신은 삼가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신이 고(故)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이 지은 《의례문해(疑禮問解)》를 보건대, ‘입후(立後)한 뒤 친자(親子)를 낳았을 경우엔 어떻게 하는가?’ 하는 사람의 질문에 답하면서, 제갈량(諸葛亮)과 호안국(胡安國) 등 여러 사람의 일을 끌어다 증거하고, 또 국조(國朝) 가정(嘉靖)026) 계축년027) 의 수교(受敎)를 인용하였는데, 호안국이 옳다고 단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장생의 아들 김집(金集)이 그 아래에 주(註)를 달면서 인조조 최명길(崔鳴吉)이 요청한 일을 인용하고 그 끝부분에 ‘선군(先君)028) 이 돌아가신 뒤에 있었던 일인데, 수교가 이와 같기 때문에 첨부하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이 한 책이야말로 삼협(三篋)029) 이 없어진 것을 충분히 보충하겠기에 이에 감히 부표(付標)하여 올립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번에 올린 책자를 보았다마는, 오늘날 이것을 인용하여 증거하려 하는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4월 2일 기해
상이 희정당에 나아갔다. 정원에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시토록 명하였는데, 상이 해조에 내리기도 하고 직접 결재하기도 하였다. 우승지 서필원(徐必遠)이 나아가 아뢰기를,
"정석(鄭晳)의 다섯 형제가 등과하였으므로 호조가 법전에 의거하여 쌀 5곡(斛)을 매년 그 아비에게 지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원식(元植)은 여섯 형제가 등과했는데도 홀로 남은 그 어미에게 본주(本州)에서 매년 쌀 3곡만 내려주고 있습니다. 법전에 의거해서 하는 것이라면 차등을 두어선 안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똑같이 미곡을 주도록 하였다.
원식은 원주(原州) 사람으로 참봉 원해굉(元海宏)의 아들이다. 원즙(元楫)·원식(元植)·원격(元格)·원적(元樀)·원철(元㯙)·원절(元梲) 등 6인이 모두 문과에 등제했는데, 옛날 기록에서 찾아보아도 일찍이 있지 않았던 일이었다.
대사헌 송준길(宋浚吉)이 상소하기를,
"연평(延平) 이통(李侗)은 위로는 정자(程子)의 학문을 계승하고 아래로는 주자(朱子)가 집대성할 단서를 열어 주었으니 그가 수수(受授)한 연원(淵源)이야말로 매우 분명하다고 할 것인데, 아직도 종사(從祀)의 반열에 참여되지 못했으니, 이는 참으로 국가의 흠전(欠典)인 동시에 유림이 실망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신이 마침 《명사(明史)》를 상고해 보건대, 성화(成化)030) 연간에 좌사부(左史副) 주목(周木)이 상주(上奏)하여 이통에게 봉작(封爵)을 가하고 공자묘(孔子廟)에 올려 제사할 것을 청했습니다. 황조(皇朝) 중엽에 와서야 이런 주장이 있게 된 것도 늦었다 할 것이니, 오늘날에 이를 주장하는 것은 늦은 가운데에서도 또 늦은 것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일의 가부만을 살펴야 할 것이니, 시간이 늦고 빠른 것이야 말할 가치가 또 뭐 있겠습니까. 여러 공경과 예관(禮官)에게 자문을 구하시어 속히 올려 제사지내는 예를 의정하소서."
하니, 상이 그 소를 해조에 내렸다. 해조가 대신과 유신(儒臣)에게 의논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영중추부사 이경석은 의논드리기를,
"오늘날 유신이 드린 말씀이야말로 오도(吾道)와 관계가 있으니, 그 누가 안 된다고 하겠습니까. 다만 주목이 청하고 난 뒤의 결말이 어떤 식으로 났는지를 모르겠는데, 오직 예관이 자료를 열람하고 상고해서 계품(啓稟)하기에 달려 있다 하겠습니다."
하고, 영의정 정태화는 의논드리기를,
"만약 황조에서 이미 정한 일이 없을 경우, 우리 나라에서 올려 제사지내는 일을 시작하는 것은 실로 중난한 일인 듯합니다. 주목의 말대로 시행되었는지의 여부를 예관으로 하여금 상고해내어 품처케 하소서."
하고, 좌의정 원두표는 의논드리기를,
"연평 이통과 같은 도학자가 아직도 사전(祀典)에 빠져 있으니, 유신이 그를 올려 제사지내는 일을 속히 의논토록 한 것이야말로 유현을 높이고 오도(吾道)를 중히 하려는 지극한 뜻이라 하겠습니다. 신이 어떻게 감히 다른 의견을 낼 수 있겠습니까."
하고, 우찬성 송시열은 의논드리기를,
"월국공(越國公)031) 의 사전이야말로 사문(斯文)의 중대한 일로서, 이미 주 부자(朱夫子)가 정해놓은 것이 《대전(大全)》및 《어류(語類)》 등의 책 속에 실려 있으니, 다른 주장은 있을 수 없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영중추와 영의정의 의논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예조가 복계하기를,
"가정(嘉靖)032) 연간에 서자(庶子) 동승서(童承叙)가 연평이 아직 종사(從祀)되지 않고 있다는 일을 가지고 또 의논드렸고 보면, 주목의 말이 준허(准許)를 받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동승서가 의논드린 후에도 시행되었다는 글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은 우선 정지토록 하라."
하였다.
4월 3일 경자
영녕전 수개 도감(永寧殿修改都監)이 아뢰었다.
"신들이 일일이 봉심(奉審)하며 함께 상의하였으나 의견이 어긋나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당초 사조(四祖)를 옮겨 모실 때에 다른 조위(祧位)033) 가 없었던 점으로 볼 때, 좌우의 익실(翼室)을 지은 것이 오로지 신주(神主)를 모시기 위한 제도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이번에 수개할 때에도 정전(正殿)의 서쪽에 6칸을 연결해 짓고, 그 6칸의 서쪽에 그대로 익실을 두는 것이 편할 듯하다.’ 하고, 어떤 이는 말하기를 ‘선왕 때의 제도를 지금 바꿀 수 없는데, 만약 한결같이 종묘의 제도대로만 한다면 두 개의 종묘가 있게 되는 혐의가 있으니 예(禮)로 볼 때 미안하다. 따라서 좌우의 익실 3칸에 각각 1칸씩 더 보태어 짓는 것이 온당할 듯하다.’ 하고, 어떤 이는 말하기를 ‘익실의 뒤에 툇기둥[退柱]이 없어서 감실(龕室)을 북벽(北壁)에 설치했는데 대체로 이런 이유 때문에 전면이 협착할 수 밖에 없었다. 지금 만약 따로 전후의 툇기둥을 설치하되 정전에 비해 조금 척수(尺數)를 줄이면 온당하게 될 것이다.’ 하는데, 신은 실로 절충하기가 어렵습니다. 전후로 툇기둥을 세우자는 설이 개수하는 뜻에 합당한 것 같이 여겨집니다만, 그렇다고 감히 단정지을 수도 없으니, 예관으로 하여금 품정(稟定)케 하소서."
상이 대신과 비국의 재신(宰臣)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오늘 인견한 목적은 대체로 영녕전(永寧殿)을 개수하는 일을 의정하기 위해서이다."
하고, 이어 신하들에게 하문하기를,
"세 가지 의견 가운데 앞으로 어느 것을 택해야 하겠는가?"
하니, 영중추부사 이경석이 아뢰기를,
"종묘의 제도야말로 중대한 것으로서 이에 대한 선유의 주장이 역시 많습니다만, 한(漢)나라 이래로 옛 제도를 제대로 복구한 경우가 드뭅니다. 오늘날의 영녕전은 곧 송(宋)나라의 영경전(永慶殿)과 같은데, 좌우에 협실(夾室)을 두고 거기에 익실(翼室)을 첨가해 지어 조주(祧主)를 모시는 것이 고제(古制)에 가까운 듯합니다. 인조조(仁祖朝) 때부터 익실이 부족했으니 정실(正室)을 더 짓는 거조가 있었어야 할 듯한데, 구제(舊制)를 그대로 놔누어 지금까지 이르게 한 선왕의 뜻을 살펴볼 때 분명히 의도하신 바가 있을 것이니, 전하 당대에 와서 바꾸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고, 좌의정 원두표는 아뢰기를,
"나라의 복록이 오래 이어져 만세토록 전하게 되면 조위(祧位)가 자연 많아지게 되니 정실을 더 짓는 것도 가능합니다. 종묘도 늘릴 수 있는 법인데, 하물며 영녕전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오직 시대에 따라 온당한 제도를 만들기만 하면 될 것입니다."
하고, 영의정 정태화는 아뢰기를,
"신이 삼가 영녕전의 제도를 살펴보건대, 익실을 설치한 목적이 조위를 봉안하기 위해서였던 것은 아닌 듯한데 조위가 점점 많아지면서 정실이 부족하게 되자 익실에 모셨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다만 옛날부터 시조의 협실에 조주를 모시는 예도 있었고 보면, 어떻게 해야 과연 예제(禮制)에 맞게 될지 알 수가 없습니다. 오직 성상께서 널리 뭇 의논을 들어보시고 절충해서 쓰실 수 밖에는 없겠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정전을 10칸으로 연달아 짓자고 하는 것이 남구만(南九萬)의 주장인데, 이 주장이 옳을 듯하다."
하였다. 예판 김수항이 아뢰기를,
"이런 일은 대신과 의정해야 할 텐데, 현재 입시하고 있는 대신들의 주장이 각각 상이하고, 뒤에 수의(收議)하더라도 필시 특별한 견해는 없을 것이니, 외방에 있는 유신(儒臣)에게 물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유신에게 물어 보았자 고제(古制)를 복구해야 한다고 말할 것이 분명하니, 오늘날에 그들의 의견을 쓰기는 어려울 듯하다. 물어 보았자 쓰지 못한다면 물어서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내 생각으로는 10칸의 의견을 따랐으면 한다."
하였다. 병판 김좌명(金佐明)이 아뢰기를,
"그렇다면 정전의 4칸은 구제(舊制) 그대로 두고 좌우의 익실을 각각 3칸씩 덧붙여 짓는다는 것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좌우의 익실을 철거한 뒤에 본전(本殿)의 제도대로 동서에 각각 3칸씩 덧붙여 모두 10칸을 만들고서, 서쪽을 상(上)으로 하여 사조(四祖) 이하를 차례로 봉안하면 될 것이다."
하였다.
헌부가 누차 아뢰며 제궁가(諸宮家)와 각아문(各衙門)에서 신설한 장토(庄土)를 혁파할 것을 청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서야 따랐다.
상이 이르기를,
"근래 친자(親子)가 제사를 주관하는 일과 관련하여 대간이 수교(受敎)를 받은 일이 있다고 말하는데, 어느 정도라야 수교라고 할 수 있는가?"
하니, 원두표(元斗杓)가 아뢰기를,
"수교라고 하는 것은 양사(兩司)의 서경(署經)을 거쳐 간행된 것을 말합니다."
하고,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과거 인조조(仁祖朝) 때에 사적으로 훈신(勳臣)을 만나면서 자녀가 있는지 있으면 얼마나 되는지 물으셨는데, 그때 고(故) 상신(相臣) 최명길(崔鳴吉)이 대답하기를 ‘신이 양자(養子)를 두었는데 지금 다행히 친자를 얻긴 하였습니다만 양자로 하여금 제사를 주관케 하고 싶습니다.’ 하니, 인조께서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수교가 해조의 문서 중에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였다.
4월 4일 신축
민응협(閔應恊)을 대사헌으로, 이관징(李觀徵)을 지평으로 삼았다.
정언 원만리(元萬里)가 인피하기를,
"그저께 경연에서 성상께서 ‘간관이 끝내 자처(自處)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다.’고 하셨으므로 신은 삼가 개연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계후자(繼後子)가 승중(承重)하는 것이야말로 대 윤기(倫紀)며 대 법도로서 《예경(禮經)》에 드러나 있으니, 그 의리가 매우 밝아 처음부터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인조조에 이미 상신 최명길의 요청에 따라 계후자로 하여금 제사를 주관케 하도록 허락하였는데, 유신(儒臣) 김장생(金長生)이 《의례문해(疑禮問解)》 중에서 또한 그것을 주(註)로 인용하며 증거를 삼으면서 수교(受敎)가 계셨다는 말을 했으니, 어찌 증거할 수 없겠습니까.
그런데 수교를 상고해 낼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또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대전(大典)》의 속록(續錄)이 간행된 것이 가정(嘉靖) 연간에 있었고 보면 지금으로부터 1백여 년 전의 일인데, 그 뒤로는 열성(列聖)의 수교를 상고할 만한 서책을 작성한 일이 한번도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인조께서 하교하신 것은 누차 병란을 겪는 동안에 남김없이 분실되고 말았으니, 상고해 낼 수 없다고 해서 또 괴이하게 여길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사람들이 귀로 듣고 눈으로 보아 분명히 증거할 수가 있는데, 문서를 찾아낼 수 없다는 이유로 끝내 흐지부지해 버린 채 시행하지 않는다면, 어찌 선왕의 성헌(成憲)을 살펴야 하는 의리에 혐의가 있지 않겠습니까. 이 모두가 신이 군부(君父)에게 믿음을 받지 못한 것이니, 체직시켜 주소서."
하였다.
당시 예조가 ‘문서 중에서는 수교를 상고해 낼 수가 없다.’는 내용으로 복계(覆啓)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수교가 있었다는 것을 가지고 다투는 것은 잘못이니, 간원이 인피해야 마땅할 듯하다."
하였는데, 상의 분부가 이와 같았기 때문에, 만리가 마침내 인피하였던 것이었다. 집의 정계주(鄭繼胄) 등이 처치하여 출사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4월 5일 임인
응교 이민적(李敏迪)도 ‘간원은 인피해야 한다.’는 상의 분부를 인하여 소장을 진달하며 인구(引咎)하였다. 민적도 일찍이 간관으로 있을 때 ‘계후자(繼後子)가 제사를 주관케 해야 한다.’는 논계에 동참했기 때문이었다.
평안도와 경상도 유생들이 상소하여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할 것을 청하였는데, 따르지 않았다.
장령 김익렴(金益廉) 등이 상차하여 이유태(李惟泰)가 소장을 올려 진달한 일들을 신하들과 함께 의논해 강구할 것을 청하니, 상이 의처(議處)하라고 답했으나 끝내 강론하는 일은 없었다.
전 사인 이단상(李端相)이 상소하기를,
"삼가 듣건대, 조정이 장차 영녕전(永寧殿)을 수개(修改)하려 하면서, 정전(正殿)을 10실(室)로 하는 제도를 창시해, 협실(夾室)에 있는 뭇 조위(祧位)들을 일체 정전에 봉안하고, 협실에 신주를 모시는 제도는 결국 폐지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은 이렇게 할 경우, 고제(古制)를 조금 남겨준 조종조의 유의(遺意)에 크게 어긋날 뿐 아니라, 조위(祧位)에 있는 열성(列聖)의 위령(威靈)들께서도 필시 정전의 합사(合祀)하는 반열에 끼이게 되는 것을 스스로 불안하게 여기시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자손의 조주(祧主)는 시조(始祖)의 협실에 보존하는 것이 바로 옛날의 제도이니, 이것이 주자(朱子)가 말한바 ‘옛날에는 자손의 조주를 위로 조고(祖考)의 협실에 보관해 두는 법만 있었으니, 조종의 조주를 아래로 자손의 협실에 두는 글은 찾아볼 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조(我朝)에서 영녕전을 건립한 것은 원래 고례(古禮)가 못됩니다. 그러나 태묘(太廟)의 제도가 일단 태조(太祖)를 제1실(第一室)로 삼게 되어 있고 보면, 사조(四祖)의 조주를 아래로 태조의 협실에 두어서는 안 되겠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렇게 영녕전을 건립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영녕전의 협실은 곧 목조(穆祖)의 협실이니, 공정(恭靖) 이하의 조주를 위로 영녕전의 협실에 둘 경우, 고례(古禮)에 완전히 합치되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자손의 조주를 위로 시조의 협실에 둔다는 뜻은 그런대로 남아 있는 셈이 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공정을 조천(祧遷)하던 날, 어찌 정전을 덧붙여 지어 한꺼번에 향사(享祀)할 것은 생각지 않고, 그저 봉안할 곳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이렇듯 구차하고 간소하게 일을 처리하여 의물(儀物)이나 보관해두는 협실에 임시로 안치할 리가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만약 이를 미안하게 여겼다면, 그뒤 1백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추모하고 숭봉하는 열성의 지극한 뜻으로 보나 경에 근거하여 예를 준수하는 허다한 유신(儒臣)들의 입장에서 볼 때, 이미 의논을 모으고 널리 상고하여 함께 향사할 수 있도록 개건(改建)하기에 여념이 없었어야 할 텐데, 어찌 협실이 협착해질 때를 기다려서야 비로소 정전을 개건하여 일체 합사토록 하고, 끝내 변통하는 도리는 생각하지 않은 채 오늘날에 이르도록 했을 리가 있겠습니까. 신의 망령된 의견으로는 결코 그렇지 않으리라고 여겨집니다.
태묘(太廟)의 제도가 만약 목조를 제1묘(第一廟) 시조(始祖)의 정동향(正東向)의 위(位)로 삼고, 익조(翼祖) 이하 뭇 조주들을 모두 목조의 협실에 두는 것으로 되어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고제(古制)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태조를 태묘의 제1실로 삼았고 보면, 별도로 사조의 묘를 건립한 것 또한 부득이한 일이었습니다. 오늘날 의논하는 자들이 필시 이 때문에 10실에 병향(並享)하자는 의논을 낸 것일 텐데, 당초 영녕전을 건립한 목적이 사조의 조주를 봉안하려는 것이었기 때문에 단지 정전을 4칸으로 하는 제도를 채택한 것이었고 보면, 이것은 이른바 《예경(禮經)》에 없는 예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다가 공정(恭靖)의 조주(祧主)를 훼천(毁遷)하는 날을 당했는데, 당시 조종조의 깊은 의도를 헤아려 보건대, 필시 ‘사조(四祖)를 위한 영녕전의 묘제(廟制)를 지금 바꾸기 어려운데, 공정 이하의 조주는 「자손의 조주는 위로 시조의 협실에 둔다.」는 고제(古制)를 따라 영녕전 목조의 협실에 봉안해야 마땅하다.’고 하여, 마침내 이렇게 정하고 누조(累朝)를 거쳐 계승해 오면서 지금껏 바꾸지 않게 된 것일 것입니다. 어찌 그렇게 하는 것이 미안하다는 것을 알면서 우선 임시로 협실에 두었을 리가 있겠습니까. 신은 이 점에 대해서 결코 그렇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당초 영녕전을 건립한 것이 고례(古禮)가 아니긴 합니다만, 부득이 이렇게 사조의 별묘(別廟)를 짓게 된 것이고 보면, 이것은 사조의 묘(廟)이지 뭇 조주들을 병향하는 묘는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뭇 조주들을 영녕전의 협실에 둔 것이 곧 ‘옛날부터 자손의 조주는 시조의 협실에 둔다.’는 유의(遺意)에 따른 것이고 보면, 지금 10실의 제도로 고쳐 지어 정전에서 조위(祧位)를 병향할 수 없다는 것은 명명백백한 일입니다. 어찌 2묘를 두는 혐의만 있는 정도이겠습니까.
지금 만약 공정 이하의 조주들을 태묘에 있는 태조의 협실에 옮겨 봉안한다면 그것은 그래도 근거 있는 일이라 하겠습니다만, 그만 영녕전 정전의 안에 일체 봉안하려 한다면 이는 결코 조종조의 뜻이 못 된다 할 것입니다. 지금 정전을 10실로 하는 제도를 제정하여 뭇 조주들을 정전에서 병향케 하는 것은 고금을 상고해도 모두 근거가 없는 일로서, 당초 조위(祧位)를 영녕전의 협실에 두었던 조종의 의도만 거꾸로 야박하게 낮추고 구차하게 처리한 결과로 빠져들게 함을 면치 못하게 하는 것이니, 어찌 크게 두려워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생각은 이렇습니다. 단지 영녕전의 협실 가운데 협착한 곳만 조금 넓혀 그 제도를 여유있게 한다면, 고제(古制)를 제대로 복구하는 것은 못된다 하더라도, 위로 고례(古禮)를 조금 남겨둔 조종조의 유의(遺意)를 어기지 않는 것이 될 뿐만 아니라 아래로도 후세의 비난을 받지 않게 될 듯 싶습니다. 그리고 협실의 제도에 있어서는, 주(周)나라 때 불굴(不窋)034) 이하 13인의 조주를 시조 후직(后稷)의 서쪽 협실에 함께 두었었으니, 이에 의거하면 얼마나 그 제도가 넓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그 조위의 수에 따라 덧붙여 짓고 개수하는 것이 실로 예의 뜻에 합치된다 할 것입니다. 이 모두가 신의 억견(臆見)이 아니라 정(程) 주(朱) 이하 선유(先儒)들의 제설(諸說)에 나오고 있으니, 전하께서 이를 가져다 열람해 보시면 신의 말이 근거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소를 들였으나 회보하지 않았다. 응교 남구만(南九萬)이 이단상의 소를 보고 하나의 글을 지어 조목별로 변론하면서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밝혔는데, 대체적인 논조는 10실을 덧붙여 지어 조주를 병향해야 한다는 의논을 위주로 한 것이었다. 이에 이단상이 남구만의 소를 보고 역시 하나의 글을 지어 변론해 밝혔는데, 주된 논지는 대체로 처음에 올린 소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경상 감사 이상진(李尙眞)이 조정에 계문하였는데, 웅천(熊川)의 전선(戰船)에서 불이 나 타 죽거나 물에 빠져 죽은 군사가 36인, 집에 돌아가 죽은 자가 34인이라고 하였다.
4월 10일 정미
수개 도감(修改都監) 도제조 이경석 등이 청대하니, 상이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영녕전을 처음에 세종조(世宗朝) 때 건립했는가?"
하니, 예판 김수항이 아뢰기를,
"이 전은 본래 사조(四祖)를 모시기 위해 설치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장생전(長生殿)에 봉안하자는 의논이 있었는데, 태종(太宗)께서 고전(古殿)에 봉안하는 것은 미안하다고 하시면서 별도로 이 전을 세우게 하고 영녕으로 이름하였습니다. 설립된 시기가 세종조이긴 합니다만, 바로 태종께서 상왕(上王)으로 계실 때였습니다."
하였다. 호판 정치화가 아뢰기를,
"이단상(李端相)의 상소를 신이 보지 못했습니다만, 대개 듣건대 정전을 더 건립하는 것을 잘못이라고 했다 합니다. 당초 제작할 때 과연 깊은 의도가 있었던 것이라면 지금 와서 섣불리 고치는 것이 옳은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단상은 조신(朝紳)들 사이에서 고례(古禮)에 널리 통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으니, 그 말은 분명히 근거가 있을 것입니다."
하고, 이경석이 아뢰기를,
"임진 왜란 뒤에 선묘(宣廟)께서 장차 종묘를 다시 고쳐지으려고 하셨는데, 그때 이원익(李元翼)과 이항복(李恒福) 등이 옛날 그대로 하도록 의논을 드렸었으니,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깊이 생각해 주소서. 전하께서 신을 불초하다 여기지 않으시고 대신의 반열에 있게 하시며 제조의 임무를 맡기셨는데, 뒷날 시비가 일어날 경우 어떻게 ‘나는 모르는 일이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치화가 아뢰기를,
"민간의 일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사우(祠宇)를 고쳐 지으려면 반드시 길년(吉年)을 가려서 하는 법인데, 일관이 금년은 순길(純吉)하지 못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수개하는 일은 중대하니 가장 좋은 해에 해야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본전이 몇 년이라도 지탱할 수만 있다면 어찌 꼭 급급하게 고쳐짓겠는가."
하였다. 수항이 아뢰기를,
"영녕전은 대체로 사조(四祖)를 봉안하기 위해서 지은 것입니다. 공정 대왕(恭靖大王)을 조천(祧遷)할 때에 정전(正殿)을 더 짓지 않고 익실(翼室)에 봉안하였으며, 정미년에 종묘 및 영녕전을 개조할 때에도 옛날 그대로 두고 바꾸지 않았는데, 그때 의정(議定)한 일이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사관을 보내 《연산일기(燕山日記)》 및 중묘(中廟)와 선묘(宣廟)의 《실록(實錄)》을 상고해 근거를 찾아 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당시 수개에 관한 의논이 분분하여 결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역사(役事)가 정지되었는데, 이와 함께 《실록》을 상고해 근거를 찾아내는 일도 취소되었다. 재신(宰臣)들이 자리를 파하고 나가려 할 즈음에 상이 이르기를,
"일찍이 만수전(萬壽殿)을 지을 때 선왕께서 허적(許積)을 유사 당상으로 삼으셨다. 만약 유사가 없게 되면 일이 필시 성글게 될 것이다."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허적은 사람됨이 총명하고 민첩하였으므로 효묘(孝廟)께서 특별히 인정하고 총애하여 발탁해서 일을 맡겼으며 대사가 있을 때마다 꼭 그에게 자문을 구하곤 하였다. 그러다가 효묘께서 승하하시자 허적이 너무 지나치게 슬퍼하다 병이 들었는데, 가인(家人)이 누차 권도를 쓰기를 요청하였으나, 그것을 받아먹지 않고 말하기를 "병신년부터 지금까지는 모두 우리 선왕의 은사(恩賜)라고 할 것이니, 죽은 목숨을 살려준 은혜를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지금 죽더라도 나는 편히 받아들이고 싶은 심정이다." 하였다. 병신년에 허적이 무고를 받는 대상에 포함되었는데, 효묘께서 그 간상(奸狀)을 통촉하시고 무고한 사람을 주벌하였다. 허적이 이 때문에 더욱 감격하여 늘 말이 효묘에 미치게 되면 번번이 눈물을 줄줄 흘리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6책 6권 36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362면
【분류】왕실-국왕(國王) / 왕실-종사(宗社) / 역사-편사(編史) / 인물(人物)
사신은 논한다. 허적은 사람됨이 총명하고 민첩하였으므로 효묘(孝廟)께서 특별히 인정하고 총애하여 발탁해서 일을 맡겼으며 대사가 있을 때마다 꼭 그에게 자문을 구하곤 하였다. 그러다가 효묘께서 승하하시자 허적이 너무 지나치게 슬퍼하다 병이 들었는데, 가인(家人)이 누차 권도를 쓰기를 요청하였으나, 그것을 받아먹지 않고 말하기를 "병신년부터 지금까지는 모두 우리 선왕의 은사(恩賜)라고 할 것이니, 죽은 목숨을 살려준 은혜를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지금 죽더라도 나는 편히 받아들이고 싶은 심정이다." 하였다. 병신년에 허적이 무고를 받는 대상에 포함되었는데, 효묘께서 그 간상(奸狀)을 통촉하시고 무고한 사람을 주벌하였다. 허적이 이 때문에 더욱 감격하여 늘 말이 효묘에 미치게 되면 번번이 눈물을 줄줄 흘리곤 하였다.
4월 11일 무신
김수흥(金壽興)을 대사간으로, 이관징(李觀徵)을 장령으로, 박장원(朴長遠)을 대사헌으로, 이민서(李敏叙)를 수찬으로, 신후재(申厚載)를 지평으로 삼았다.
간원이 안경(安鏡)의 죄를 논하였는데, 오래도록 윤허하여 따라주지 않았으므로, 이때에 이르러 정계(停啓)하였다.
사간원이 상차하여 양신(兩臣)035) 을 종사(從祀)하라고 다사(多士)들이 청한 것을 따르도록 청하였는데, 상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4월 13일 경술
양전(量田)이 불균등하게 되자 기전(畿甸) 백성들이 원망하며 비탄에 잠겼다. 영녕전(永寧殿)을 수개(修改)하는 역(役)을 정지시켰는데, 정태화(鄭太和)·이경석(李景奭) 등이 진달드린 말을 따른 것이었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재신(宰臣)들을 인견하였다. 응교 이민적(李敏迪)이 아뢰기를,
"오늘 경연에서 신하들이 진달드린 것 가운데 긴요치 않은 말들이 많았습니다마는, 신은 그래도 다행으로 여겨지는데, 그것은 대체로 임금과 신하 사이에 조금도 의심하거나 막힌 것이 없이 조용한 기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은 궁가(宮家)의 면세전(免稅田)을 참작해 정해야 한다는 논에 또한 일찍이 참여했었는데, 해가 넘도록 쟁집하면서 그칠 줄을 모르고 있으니, 공의(公議)가 어디에 있고 여정(輿情)이 얼마나 격렬한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오늘 대신에게 자문을 구하시어 통쾌하게 단안을 내려주셔야 하겠습니다."
하고, 홍명하가 아뢰기를,
"제궁가가 5백 결(結)을 모두 소유할 수 없고, 또 만약 민전(民田)이 그 속에 섞여 들어가면 그 폐단이 적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대간이 강력하게 쟁집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고, 원두표가 아뢰기를,
"처음에 6백 결로 한정했다가 지금 5백 결로 낮추어 정했는데, 그래도 외부의 의논이 많다고 하기 때문에, 다시 정하자는 논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참작해서 한도를 정하는 것은 오직 전하에게 달려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군과 공주는 4백 결로 정하고, 왕자와 옹주는 2백 50결로 정하라."
하였다.
4월 16일 계축
헌부가 산전(山田)과 해택(海澤)에 설장(設庄)한 곳을 혁파토록 청하는 논계를 정지하였다. 전후로 헌관이 면세전(免稅田)의 결수(結數)를 참작하여 정할 것과 산전과 해택에 설장한 곳을 혁파시킬 것 등 두 가지 일을 가지고 몇 개월 동안 쟁집하였는데, 참작하여 정하도록 청하는 논계에 가까스로 응답을 받았으므로, 혁파라는 논도 아울러 정지한 것이었다.
4월 18일 을묘
대사헌 박장원(朴長遠) 등이 상차하여, 양신(兩臣)을 종사(從祀)하라는 다사(多士)의 청을 따르기를 청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황해도 금천(金川)·곡산(谷山) 등의 읍과 경상도 대구(大丘)·울산(蔚山) 등의 읍에 우박이 쏟아졌다.
4월 19일 병진
수찬 홍우원(洪宇遠)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지금 우리 전하께서는 춘추가 한창이시고 체력이 강건하시며 이미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형세를 갖고 계시고 큰 일을 할 뜻도 없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금년 이래로 건강이 좋지 않으시어 신린(臣隣)을 접하시는 때가 드물고 경연에 나가시는 때가 거의 없는 탓으로 깊은 궁궐 안에서 같이 지내며 접하는 사람들이라곤 단지 환관(宦官)이나 궁첩(宮妾) 밖에는 없는 형편입니다. 이 어찌 외신(外臣)과 응대하노라면 조섭하는 데 방해가 될까 염려해서 그러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 하더라도 저 아첨을 잘하여 임금의 총애를 받는 사람들은 좌우에 가까이 모시고 있으면서 듣기 좋은 말만 하는 것을 자기의 능력으로 삼고 비위 맞추는 일만을 능사로 아는데, 틈만 생기면 교언(巧言) 영색(令色)으로 계책을 이루려 하는 이것이 본디 환관이나 궁첩의 본모습이라고 할 것이니, 전하께서 막는데 소홀히 하여 한 번이라도 그들의 계책에 들어맞게 될 경우, 조섭에 방해되는 것이 어찌 외조(外朝)에서 인접하는데 따른 번거로움 정도로 그치고 말겠습니까.
대저 공경과 대신은 인주(人主)의 고굉(股肱)이고 대간과 시종은 인주의 이목(耳目)입니다. 사람의 한 몸이 의지하여 편안해 질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고굉과 이목을 쓰는 데에 달려 있는 것이니, 그들을 소홀히 하여 도외시하면 안된다는 것이 또한 분명하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지금 전하께서 환관이나 궁첩과는 날마다 함께 계시면서 공경이나 시종과는 1개월 동안에 인접(引接)하시는 날이 얼마 없으니, 신은 삼가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아, 구중 궁궐 깊은 곳에만 계시고 나아와 신료를 접하는 때가 드문 탓으로 기상은 나른해진 채 시들한 기운을 내어 스스로 강해지려는 뜻도 없어지셨습니다. 전하의 뜻과 기상이 이와 같을진대 장차 어떻게 고굉이 나태해지지 못하도록 책망할 수 있겠습니까. 조정의 기강이 점차 문란해지고 나랏일이 날로 잘못되는 이유가 꼭 여기에서 말미암지 않는다고 할 수도 없으니, 어찌 크게 한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대저 군신(君臣) 관계는 부자(父子) 관계와 같은 것으로서 정의(情義)가 서로 도타와지는 것이 귀중하니 형적(形跡) 간에 틈이 벌어지게 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혹 이른 시간이거나 늦은 시간이거나 혹 며칠 계속하거나 하루씩 사이를 두거나간에 편복(便服) 차림으로 편좌(便座)에 나가시어 경악(經幄)의 유신(儒臣)을 인입(引入)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경사(經史)를 강론케 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성현이 말씀하신 의취(意趣)와 고금 치란의 이유를 모두 진달하여 논설케 하고 전하께서는 궤안(几案)에 기대어 들으시면서 의심이 들면 물어보고 어려운 곳이 있으면 자문을 구하소서. 그러면 명철하신 전하께서 성심(聖心)을 개발하여 자득하시는 것이 어찌 적겠습니까.
그리고 공경과 대각에 대해서도 자주 등대(登對)토록 하시고 조용히 접견하시어 국가의 대계(大計)를 진달토록 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가부를 상론(商論)케 하고 각각 소회(所懷)를 모두 말하게 한 뒤 단점은 버리고 장점만 취하여 정무(政務)로 시행케 하면서 당(堂) 하나 가득 화기(和氣)가 물씬 피어 오르게 하소서. 그러면 또한 답답하게 막힌 것이 풀어지고 성체(聖體) 역시 훨씬 여유롭게 되어 조섭하는 도에 있어서도 필시 도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저 모든 관직에 있는 사람들 또한 감히 누가 일심으로 감동되어 서로들 절차 탁마함으로써 전하의 아름다운 덕을 이어받으려 하지 않겠습니까.
신이 가의(賈誼)의 말을 들어 보건대, ‘천하의 명(命)은 태자(太子)에 달려 있고, 태자가 훌륭하게 되는 것은 일찍 교육시키는 것과 좌우에서 모시는 사람을 엄선하는 데 달려 있다.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좌우의 사람들이 바르면 태자가 바르게 되어 천하가 안정되는 것이다.’ 하였는데, 참으로 음미할 만한 말입니다. 지금 원자(元子)가 태어난 지 이미 몇 년이 지났으니 보양(輔養)하는 일을 조금도 느슨하게 할 수 없는데, 전하께서 과연 어떻게 교도(敎導)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대저 궁금(宮禁) 안에서 태어나 부시(婦寺)의 손에 맡겨지게 되면 눈은 사치한 물건을 보는 데 익숙해지고 손은 진기한 장난감과 친해지게 마련인데, 그가 하는 대로 내맡겨둔 채 놀게 하고 억제함이 없이 감정을 발산하게 하면서 ‘지금은 어려서 그렇지만 조금 자라면 저절로 그렇지 않게 될 것이다.’고 한다면, 이것이 어찌 옛적에 ‘말을 하게 될 때부터 교훈을 베풀고 무슨 행동을 할 수 있을 무렵부터 예를 지키도록 한다.’는 뜻에 부합된다 하겠습니까.
신의 의견은 이렇습니다. 원자가 유충(幼冲)하다 하더라도 일찍 국본(國本)036) 의 자리를 정하고 속히 책례(冊禮)를 거행하여 정식으로 춘궁(春宮)의 호(號)를 내려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여어(女御)와 환시(宦寺)에는 반드시 근신하고 충후한 자들을 뽑아 채움으로써 사벽(邪僻)한 일을 하지 못하게 해야 할 것이며, 또 반드시 유아(儒雅)하고 덕이 있는 인물과 단정하고 올바른 선비를 가려 사부(師傅)로 삼고 우익(羽翼)으로 삼음으로써 효제(孝悌)의 길로 이끌고 의로운 방향으로 타일러 나가야 할 것은 물론, 복식(服飾)과 기용(器用) 등에 늘 검약하는 정신을 보여주고, 동정(動靜) 간의 일체의 행동에 선(善)을 따르도록 힘껏 이끌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습관과 더불어 지혜가 자라나고 마치 성품처럼 도(道)에 맞게 되면 이에 성인이 되도록 보양하는 공이 이루어질 것이니, 그야말로 동방에 억만년토록 끝없는 복이 될 것입니다.
신은 듣건대, 임금의 덕으로는 말을 들어주는 것보다 큰 것이 없고 말을 들어 주는 도리는 사(私)에 치우친 것을 제대로 제거하는 데에 있는데, 사에 치우친 것을 제거하지 못한 채 자의식에 사로잡히게 되면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그 속에 들어갈 길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삼가 근일 양사(兩司)가 쟁집하고 있는 것을 보건대, 모두가 궁가(宮家)와 관계된 일로서 해를 넘기며 몇 개월이 되도록 끊임없이 논집(論執)하고 있는데, 전하께서 줄곧 굳게 거절하고 계신 탓으로 마치 누가 더 나은지 시합하고 있는 것처럼 상하가 버티고만 있습니다. 이것이 어찌 성세(聖世)의 아름다운 일이겠습니까. 대신(臺臣)이 전후에 걸쳐 빠짐없이 논열(論列)했고 보면 그 말이 옳다는 것을 전하께서 모르지 않으실 텐데 시종 들어주실 기약은 까마득하기만 하니, 이는 어쩌면 ‘차라리 소민(小民)에게 등을 돌릴지언정 차마 궁가에 대한 정을 베어 버리지는 못하겠다.’는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말 못할 백성의 고통을 보살펴주지 않으시고 대계(臺啓)를 돌아보지 않으신 채 그저 궁가에 대한 사정(私情)에만 이끌리시어 성덕에 누를 끼치고 계시니, 신은 삼가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신이 삼가 보건대, 전 참의 윤선도(尹善道)가 일찍이 전 찬성 송시열(宋時烈)이 예(禮)를 잘못 의논했다고 소장을 올려 시열을 공척(攻斥)하였는데, 그 결과 조론(朝論)이 크게 일어나 선도가 이 때문에 극변(極邊)에 위리 안치(圍籬安置)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그 뒤에 심리(審理)를 통하여 북청(北靑)에 양이(量移)되었었는데, 대장(臺章)이 또 발동되어 다시 그전 상태대로 유배되고 말았습니다.
신이 일찍이 선도의 상소문을 얻어 보건대, 그의 생각이나 표현 중에 많은 부분이 격분한 가운데 나와 평정을 잃긴 하였습니다만, 그의 종통(宗統)과 적통(嫡統)에 대한 설만은 그야말로 명백하고 정확한 것으로서 뒤바꿀 수 없는 논이었습니다. 시열이 아무리 산림(山林)의 유아(儒雅)로서 당대의 중망을 짊어지고 있다 하더라도 예를 잘못 의논한 것만은 또한 숨길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지금 시열을 옹호하는 자들은 완전히 그의 잘못은 덮어둔 채 사람들이 감히 이를 의논하지 못하게까지 하고, 선도를 배척하는 자들은 그를 가리켜 사림(士林)에 화를 일으키려 한다고 하면서 곧바로 흉적(凶賊)으로 지목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선도가 어찌 사림에 화를 일으키려는 뜻을 갖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대저 사람마다 각기 소견이 있으니 구차하게 동조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오직 그 동조하지 않음으로부터 시비와 득실이 나름대로 드러나는 것이니, 공론이 있는 바에야 어떻게 속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지금은 의견이 같지 않은 것을 미워하여 억지로 같게 만들려 하고 있는데, 사부들 중에 조금 이의를 제기하는 자가 나오면 반드시 떼거리로 일어나 공격을 하곤 합니다. 허목(許穆)이 예를 논하는 소를 재차 올리자 먼 지방으로 배척해 쫓아 보내더니 파귀(罷歸)한 뒤에는 다시 거두어 쓰지 않고, 권시(權諰)가 막 적치(赤幟)를 세우자마자 즉각 중한 탄핵을 받게 하였으며, 조경(趙絅)이 선도를 변호하는 한 마디 말을 하자 그를 간사(奸邪)한 자라고 지목하는가 하면 그의 아들까지도 유사에게 넘겨지는 율(律)을 적용받게 하였습니다. 대저 조경은 누조(累朝)를 섬긴 기구(耆舊)의 신하로서 그가 평생토록 지켜 온 충직한 절조야말로 신명(神明)에게도 질정할 수 있는데, 지금 홀연히 변하여 간사한 인물이 되고 말았으니, 이는 실로 신이 이해하지 못할 점입니다.
신은 평소 선도와 잘 알고 지낸 사이는 아닙니다만, 생각건대 선도는 본래 기절(氣節)이 있고 감언(敢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일찍이 혼조(昏朝) 때에 직언(直言)하여 절개를 세웠고 선조(先祖) 때에는 또 사부(師傅)로서 구은(舊恩)을 지니고 있는 사람인데, 지금은 갖은 풍상을 겪어야 하는 지역에 오래도록 유배 되어 있습니다. 흰머리 날리는 노인으로 죽을 날이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하루 아침에 세상을 떠나기라도 하면 선비를 죽였다는 이름을 성스러운 조정에 끼치게 될까 참으로 두려우니,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속히 석방하는 은전을 내리시어 그가 시골에 돌아가 죽을 수 있게 해 주소서, 그러면 이 또한 차마 사람을 어떻게 하지 못하는 인성(仁聖)한 인주(人主)의 정치라 할 것입니다."
하였는데, 소를 들였어도 회보하지 않았다.
삼가 살피건대, 기해년 초에 대례(大禮)가 어긋나고 잘못된 이래 윤선도의 소에 이르러서 비로소 장자(長者)와 서자(庶子)를 구분하고 종통(宗統)과 적통(嫡統)을 구별하는 내용이 완비되었는데, 송시열의 패거리가 이 때문에 죄를 얻을까 두려워하여 선도를 특히 심하게 다스렸다. 이에 조경이 상소하여 선도를 구해보려고 했었는데, 이번에 홍우원이 또 조경을 이어 말을 한 것이다. 그가 예를 논한 곳을 보건대 명백하고 꼭 알맞아 단안(斷案)이라고 할 만했으며 또한 그 곧은 기상이 늠름하여 범하지 못할 바가 있었으니, 참으로 명언(名言)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조경과 홍우원이 대죄(大罪)를 면할 수 있었던 것은 또한 천운이라고 하겠다.
승지 서필원(徐必遠) 등이 아뢰기를,
"윤선도가 전소(前疏)에서 예를 논하기만 한 정도라면, 사람마다 각기 소견이 다른만큼 구차하게 동조할 수 없어서 빚어진 일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만 종통·적통의 설을 만들어 내었는데, 이는 요컨대 위로는 전하께서 듣고 의혹하게 만들고 아래로는 뭇 사람들을 동요시키면서 단연코 송시열의 죄안(罪案)을 삼으려 했던 것이니, 그의 음험한 의도가 과연 어떠했다 하겠습니까. 선도가 이런 설을 내놓게 된 본래의 목적은 성상으로 하여금 이런 이야기를 듣는 즉시로 노여움을 발동하여 일망타진케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물정(物情)이 분개하며 놀라워했던 것도 바로 이 점 때문이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홍우원은 그만 이에 대해 ‘명백하고 적확하여 뒤바꿀 수 없는 논이다.’고 하고, 또 ‘어찌 그에게 사림의 화를 일으킬 뜻이 있었겠는가.’라고 하였으니, 어쩌면 이토록까지 사람이 혼폐(昏蔽)하단 말입니까.
기년(期年)으로 복제(服制)를 정하는 것은 국전(國典)상에 근거할 대목이 있는 반면, 삼년복으로 단정지을 경우에는 《예경(禮經)》 상으로 증거댈 만한 것이 없는데, 시열이 시종 삼년복에 대해 어려워하는 입장을 보인 것은 대체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복제 문제와 종통·적통 문제는 본래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인데, 선도는 그만 복제를 가벼운 쪽으로 의논한 것을 가지고 종통과 적통을 어지럽히는 것으로 귀결시켰습니다. 이는 인심이 미혹되기 쉽고 관계되는 것이 작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에 전후에 걸쳐 대신(臺臣)이 입이 닳도록 극력 쟁집하였던 것인데, 그 이유는 대체로 공의(公議)를 따르고 국시(國是)를 정하려고 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우원이 말하기를 ‘시열을 위해 그 잘못을 덮어두었다.’고 하였으니, 아, 사람의 착하지 못함이 또 이런 지경에까지 이를 수 있단 말입니까.
선도의 이 말이 본래는 시열을 무함하기 위해서 나온 것이었지만 그 귀결점을 찾아 보면 그야말로 종사에 관계되는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사형을 용서해 주어 유배만 보낸 것도 살리기 좋아하는 임금의 덕 아닌 것이 없는데, 우원은 그만 감언(敢言)하다가 죄를 얻었다고 하였으니, 아, 또한 괴이하다 하겠습니다. 도신(道臣)이 현도(縣道)를 통해 올려보낸 소장이라서 감히 퇴각시킬 수 없기에 한편으로 봉입(捧入)하면서 소회를 아울러 진달드립니다."
하였다.
삼가 살피건대, 예(禮)에 장자를 위해서는 삼년복을 입어준다고 하였는데, 이는 종통과 적통을 중요시해서이다. 그런데 지금 말하기를 ‘복제의 경중과 종통·적통 문제는 본래 상관이 없는 일이다.’고 하였으니, 이렇게 해서 누구를 속이자는 것인가. 하늘도 속일 수 있을 것인가. 서필원은 무엇에도 자기 뜻을 굽히지 않는 항직(抗直)함으로 자임하는 사람인데, 그런 자마저 이런 말을 하다니, 어찌 통탄을 금할 수 있겠는가.
4월 20일 정사
병판 김좌명이 상소하기를,
"신이 삼가 추감(推勘)하는 일이 결말이 나 장차 현벌(顯罰)을 받게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윽고 듣건대 헌부의 핵의(覈議)가 오로지 흐리멍덩하게만 처리하여 마치 신의 허물을 변호하며 신을 죄에서 꺼내주려는 것처럼 하였다 하고, 성명께서도 분간(分揀)037) 해 주라는 명을 내리셨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죄책을 면하게 된 것이 물론 다행스럽긴 합니다만, 신을 논했던 자는 더욱 더 억울해 할 테니, 이것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신이 노둔하고 용렬하기 짝이 없지만 그래도 육경의 반열에 몸을 담고 있는 이상 조신(朝臣)이 모두 모인 장소에서 무례한 짓을 저질렀다면 어떻게 작위를 탐내며 연연한 나머지 부끄러운 얼굴을 들고 반열에 나아감으로써 청명한 조정에 거듭 부끄러움을 끼칠 수 있겠습니까. 원하옵건대 성명께서는 신의 직명을 속히 전개(鐫改)해 주시는 동시에 술주정을 부리며 능멸한 죄를 다스리게 함으로써 조정의 반열을 엄숙하게 하고 사람의 말에 사과토록 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연소배가 마구 내뱉은 말을 혐의할 것이 뭐가 있는가."
하였다.
이에 앞서 좌명이 추고를 당했는데, 그가 함답(緘答)038) 하기를,
"경사스러운 자리에서 수작하는 동안 예판 김수항(金壽恒)에게 한 마디 농담을 걸었는데, 함께 웃고 파한 뒤로 서로들 잊어버렸습니다. 그런데 돌연히 대계(臺啓)가 발동되면서 추악하기 짝이 없게 헐뜯었는데, 과연 그런 패려(悖戾)한 행동이 있었다면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을 것이고, 만약 그런 일이 없었다면 사람을 함정에 빠뜨리려 해도 안 될 것입니다."
하면서, 세 차례에 걸쳐 항거하였다. 이에 상이 알기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하면서 헌부로 하여금 조사하게 하였는데, 헌부가 아뢰기를,
"좌명의 함사(緘辭) 중에 ‘김수항에게 한 마디 농담을 걸었다.’는 말이 있는데, 능멸했다는 대계(臺啓)의 설은 필시 이를 가리켜 말한 것일 것입니다."
하니, 상이 분간토록 명한 것이다. 그러나 좌명 자신은 매우 분하게 여겼던 까닭에 그의 소장 내용이 이와 같이 되었던 것이었다.
평안도 순안현(順安縣) 북령(北嶺)에 포은 선생(圃隱先生) 정몽주(鄭夢周)의 유적이 있었는데, 본현의 유생들이 서원을 세운 뒤 상소하여 사액(賜額)을 청하니, 상이 소를 예조에 내렸다. 예조가 복계하기를,
"정몽주는 이미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어 있고 그의 서원에 사액한 곳도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만, 서관(西關)의 유생들이 유적을 보고 감흥을 일으켜 사원을 세운 뒤 사액을 청하였으니, 그들이 얼마나 존모하는지 그 정성을 알 수 있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타읍의 서원에 이미 사액했을 경우 중첩해서 설치한 곳에는 그 청을 허락하지 말도록 판하(判下)하신 분부가 있으므로 신조(臣曹)에서 감히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으니, 삼가 상께서 재결해 주셨으면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정식(定式)이 있다면 어째서 나보고 재결하라고 하는 것인가."
하였다. 예조가 이어 그대로 놔두도록 청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4월 21일 무오
대사헌 박장원(朴長遠)이 ‘김좌명(金佐明)의 소 가운데 「헌부의 핵계(覈啓)를 보건대 오로지 흐리멍덩하게 처리하려고만 하였다.」고 배척한 말이 있었다.’는 이유로 인피하며 아뢰기를,
"술 좌석에서 농담한 작은 실수를 가지고 대간이 탄핵하는 논을 내놓기까지 한 것부터가 이미 너무 지나친 일이긴 했습니다만, 좌명이 이름있는 재상의 신분으로 함답(緘答)하며 세 차례까지 항거하였기에, 신이 나름대로 양편 모두를 애석하게 여기면서 요석(僚席)에서 서로 이야기하며 한 번 개탄하였습니다. 체차시켜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物論)을 기다렸다.
4월 22일 기미
지평 이세익(李世翊)이 처치하기를,
"사실대로 핵계를 올린 것인만큼 실수를 비호하려는 뜻이 조금도 없었으니, 흐리멍덩하다고 배척한 것을 개의할 필요가 없습니다. 박장원(朴長遠)을 출사시키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문장 작성이 자못 흐리멍덩하게 된 듯하다."
하자, 세익이 인피하기를,
"처치하는 문장이 명확하지 못한 탓으로 성상의 분부가 있게끔 하였으니, 체차시켜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집의 정계주(鄭繼胄), 장령 김익렴(金益廉) 등도 핵계에 동참했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김휘(金徽)를 도승지로, 유창(兪瑒)을 좌부승지로, 안후열(安後說)을 동부승지로, 조복양(趙復陽)을 병조 참판으로, 오정일(吳挺一)을 호조 참판으로, 윤우정(尹遇丁)을 정언으로, 이익(李翊)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평안도 숙천(肅川)·선천(宣川) 등지에 우박이 내렸다.
4월 23일 경신
사간 김만균(金萬均), 헌납 송시철(宋時喆), 정언 원만리(元萬里)가 아뢰기를,
"홍우원의 소를 보건대, 그 의도가 음험하며 주장이 사특했습니다. 온 힘을 기울여 찬성 송시열을 공척(攻斥)하면서 거꾸로 윤선도의 흉소(凶疏)를 명백하고 적확한 것이라고 했는가 하면, 그의 평생의 행적을 찬양하면서 기절(氣節)이 있고 감언(敢言)하였다고 하기도 하고, 직소(直疏)를 올려 절조를 세웠다고 하기도 하고, 공론이 인정하는 바라고 하기도 하였는데, 끝에 가서는 선비를 죽인다는 말을 가지고 조정을 공동(恐動)시켰으니, 아, 어쩌면 이렇게까지 사람이 불숙(不淑)하고 말이 불량할 수 있단 말입니까. 천일(天日) 아래에서 이매망량(魑魅魍魎)이 결국은 그 정상을 숨길 수 없다는 것이야 물론 알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세도(世道)를 위해 가슴이 아파오는 것을 어찌할 수 없습니다.
당초 선도가 상소할 때 겉으로는 예를 논한다고 핑계를 대고 속으로는 화심(禍心)을 이루려고 하면서 은밀히 송시열과 송준길을 불측(不測)한 곳에 빠뜨리려 하였으니, 그 흉악한 계책이 남곤(南袞)이나 심정(沈貞)보다도 더 심했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일월처럼 밝게 살펴주시어 통쾌하게 변석해 주신 덕분에 흉인(凶人)을 법대로 처치하여 국시(國是)가 이에 안정되었는데, 그뒤 몇 년 동안은 간인(奸人)의 간담이 깨어져 나가고 흉도(凶徒)가 자취를 거두어 들여 조정이 조금 안정 국면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번에 홍우원이 몰래 엿보는 마음을 품고는 못다 이룬 화심(禍心)을 다시 이루려고 편파적이고 부정한 말을 공공연히 마구 지껄이면서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아, 우원도 사람인데, 인정상 어떻게 선류(善類)를 해치면서 스스로 흉인에게 빌붙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의 이런 작태를 돌아 보건대 분명히 의도가 있습니다. 진정 이런 식으로 말을 하지 않으면 단단히 결합된 관계에 어떻게 틈을 낼 것이며, 명주(明主)가 듣고서 어떻게 의혹하게 할 것이며, 자기가 좋아하는데도 공의(公議)에 인정받지 못하는 자를 또 어떻게 구원해 낼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감히 사특한 마음을 내어 임금의 총명을 가릴 계책을 이루려 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보면 그의 말이 비록 선도를 변호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실제로 그 의도는 선도에게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선도는 앞에서 화를 전가시킬 마음을 가지고 예설(禮說)을 차용했고, 우원은 뒤에서 선도의 마음을 자기 마음으로 하여 선도를 비호했습니다. 이는 행적이 똑같고 결론도 똑같은 것으로서 마음으로 서로 응하여 같은 죄를 지은 것이니, 왕법으로 헤아려 보건대 단연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삭탈 관작하고 문외 출송(門外黜送)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국가에서 언자(言者)를 그런 식으로 대우할 수는 없으니, 말이 중도를 벗어났다 하더라도 심각하게 죄를 주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대체를 가지고 말하더라도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요란하게 떼거리로 일어나 일대 소란을 일으켜서는 안 될 것이다. 이모저모로 헤아려 보아도 내 생각과는 같지 않다."
하였다.
응교 이민적, 부수찬 이익·정석이 상차하기를,
"신들이 삼가 홍우원의 소를 보건대, 윤선도가 주장한 종통(宗統)·적통(嫡統)의 설을 명백하고 적확한 것이라고 하였으며, 또 어찌 그에게 사림(士林)에 화를 일으킬 마음이 있었겠느냐고 하였으며, 또 송시열을 위해 그의 잘못을 덮어 주고 있다고 하였으며, 선도가 감언(敢言)했기 때문에 죄를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선도가 교묘하고 위험스러운 말을 하면서 없는 일을 날조하였고 보면 어떻게 명백하고 적확한 설이라고 할 수 있겠으며, 함정을 파놓고 선량한 사람을 무함하였고 보면 어떻게 함정에 빠뜨리려 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으며, 화를 일으킬 말로 날마다 선동하여 국가에 걱정을 끼쳤고 보면 공론(公論)이 쟁집한 것이 어찌 시열을 위해 주려 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으며, 망극하게 참언을 하여 군신간을 교란시켰고 보면 어떻게 감언했다는 이름을 이 자에게 붙여 줄 수 있겠습니까.
가령 조금이라도 사람의 마음을 가진 자가 선도의 소를 본다면, 밝게 변론하는 것을 기다릴 것도 없이 반드시 사(邪)인지 정(正)인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원이 유악(帷幄)의 근신(近臣)으로서 그만 감히 시비를 어지럽히고 흉인을 비호하면서 이토록까지 거리낌없이 방자하게 굴었습니다. 성상께서 만약 통렬하게 변론하고 심각하게 배척하시어 호오(好惡)를 분명히 보여주시지 않는다면, 어떻게 잘못된 것들을 막고 국시를 정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 생각은 이미 간원에 내린 비답에서 유시하였다."
하였다.
이조 참판 유계가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문묘에 종사하도록 청하였으나, 상이 듣지 않았다.
4월 25일 임술
집의 정계주, 장령 김익렴 등이 간원이 아뢴 것처럼 홍우원을 삭출(削黜)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전 대사헌 박장원과 지평 이세익은 이렇듯 중론(重論)이 발동된 때를 당하여 체차되려는 의도를 가지고 소패(召牌)에도 응하지 않았으니, 일을 피하려는 자취가 현저하게 드러났습니다. 장원은 추고하고 세익은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고 이르기를,
"소패에 응하지 않아 체차되려고 도모한 뜻이 현저하게 드러난 자로 말하면 이 두 사람뿐만이 아니다. 나라를 위해 기강을 진작시키려고 하는 일이 어찌 이다지도 더디단 말인가."
하였다.
함경 감사 서원리(徐元履)가 죽었다.
사신은 논한다. 서원리는 과제(科第)를 통해 발신(拔身)하지 않고 특별히 사부(師傅)의 구은(舊恩)이 있다는 이유로 효묘(孝廟)의 지우(知遇)를 받아 안으로는 대각을 역임하고 밖으로는 방백의 임무를 제수받았으니, 근세에 드문 일이었다. 그런데 관직 생활 중에 일처리한 것 대부분이 사람들의 마음을 만족시키지 못하였다.
【태백산사고본】 6책 6권 41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365면
【분류】인물(人物) / 역사-편사(編史)
사신은 논한다. 서원리는 과제(科第)를 통해 발신(拔身)하지 않고 특별히 사부(師傅)의 구은(舊恩)이 있다는 이유로 효묘(孝廟)의 지우(知遇)를 받아 안으로는 대각을 역임하고 밖으로는 방백의 임무를 제수받았으니, 근세에 드문 일이었다. 그런데 관직 생활 중에 일처리한 것 대부분이 사람들의 마음을 만족시키지 못하였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서원리는 선조(先朝)의 잠저(潛邸) 때 사부였기 때문에 내가 특별히 대우하였는데, 이번에 영외(嶺外)에서 객사하였으므로 내 마음이 매우 슬프다. 각도(各道)로 하여금 호상케 하라."
4월 27일 갑자
지평 신후재(申厚載)가 인피하기를,
"신은 본부의 논에 대해 다른 의견을 갖고 있습니다. 윤선도(尹善道)가 예(禮)를 논하는 외에 다른 설을 삽입하여 음험한 어의(語意)를 현저히 드러내었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신도 미워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홍우원(洪宇遠)의 경우는 사정이 다릅니다. 그가 올린 소의 조어(措語)에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소견이 밝지 못한 탓일 뿐, 그의 본 마음을 헤아려 보면 단연코 현인을 해치고 나라를 병들게 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만 그를 남곤(南袞)이나 심정(沈貞)으로 지목을 하고, 심지어는 조경(趙絅)을 거론하며 그의 정태(情態)가 간사하다고까지 말하고 있으니, 어쩌면 이다지도 심하단 말입니까. 신은 천성적으로 융통성이 없어 구차하게 동조할 수 없으니, 체차시켜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집의 정계주(鄭繼胄), 장령 김익렴(金益廉), 사간 김만균(金萬均), 헌납 송시철(宋時喆), 정언 원만리(元萬里)·윤우정(尹遇丁) 등이 ‘신후재가 이견을 제시했다.’는 이유로 모두 인피하면서 신후재를 공척(攻斥)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김수항(金壽恒)을 대사헌으로, 김휘(金徽)를 함경 감사로, 조복양(趙復陽)을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남용익(南龍翼)을 도승지로 삼았다.
모화관(慕華館) 건물을 개축하였다. 앞에 있는 도랑의 석축(石築)을 개수하여 옛날보다 제도를 상당히 사치스럽게 하였다.
강원도 진사 한용명(韓用明) 등이 상소하기를,
"고려(高麗) 진사(進士) 원천석(元天錫)은 학문이 정심(精深)하고 도덕이 순수했는데, 좋지 못한 때를 만난 탓으로 치악산(雉嶽山)에 은거해 있으면서도 전혀 답답해하는 마음을 갖지 아니하고 다시는 섬기지 않을 뜻을 굳혔습니다. 그러다가 고려조의 운세가 마지막을 고하고 진정한 인주(人主)가 혁명을 함에 이르러서는 더욱 율리(栗里)039) 의 고절(高節)을 힘쓰고 서산(西山)040) 의 청풍(淸風)을 멀리 끌어당겨 유정(幽貞)함을 끝내 보전하면서 이를 잊지 않겠다고 길이 맹세하였으니, 천석과 같은 자야말로 이른바 만고의 강상(綱常)이 되고 백세의 사표(師表)가 되는 자라 하겠습니다. 따라서 그는 실로 정몽주(鄭夢周)나 길재(吉再)와 함께 아름다움을 짝하고 향기를 같이하는 존재로서 마치 은(殷)나라에 세 사람의 인자(仁者)가 있었던 것과 같은 격이라 할 것입니다.
생각건대 우리 태종 대왕(太宗大王)께서 감반(甘盤)041) 의 구은(舊恩)이 있다고 하여 거듭 은총을 가하시고, 산 입구에까지 가시어 그의 아들 원형(元泂)을 기천(基川)의 수령으로 임명하심으로써 그를 봉양할 여지를 마련해주시기까지 하면서도 끝내 작록은 가하지 않아 그의 뜻을 이루어 주셨으니, 천석의 고상한 풍도가 이에서 더욱 드러났다 하겠습니다.
지난 갑자년에 본주(本州)의 선비들이 본주 북쪽 칠봉(七峯) 아래에 서원을 세워 그를 경모하는 정성을 부쳤는데, 아직까지 사액(賜額)을 늦추시어 은광(恩光)이 빛나지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성조(聖朝)의 흠전(欠典)이요 선비들이 실망하는 바라 하겠습니다. 원하건대 아름다운 편액을 내려주시어 향사(享祀)를 영광되게 해 주소서."
하니, 소를 내렸는데, 예조가 방계(防啓)한 결과 결국 그 일이 시행되지 않았다.
원천석은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은거하였는데, 이색(李穡) 등 여러 사람과 평소 친하였다. 우리 태종께서 일찍이 그를 따라 학업을 닦으셨는데, 즉위하고 나서 여러 차례 불렀지만 나아오지 않았다. 이에 태종께서 직접 그의 초막에까지 왕림하셨는데도 천석이 도피하고 만나려 하지 않자, 태종께서 옛적의 식모를 불러 상품을 하사하고 천석의 아들을 관직에 임명하였다. 천석은 수고(手稿) 6권을 남겼는데 고려 말과 세상이 바뀔 때의 일을 매우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그리고는 그 책들을 풀로 붙이고 그 표지에 쓰기를 ‘어진 자손이 아니면 열어보지 말라.’고 하였는데, 지금도 그 책이 남아 있으나 두 권은 분실되었다 한다.
4월 28일 을축
응교 이민적(李敏迪)과 수찬 이익(李翊)이 상차하기를,
"홍우원(洪宇遠)의 정태(情態)에 대해서는 성명께서도 모두 잘 알고 계실 터인데 ‘시끄럽게 떼거리로 일어나 일대 소란을 일으키려 하고 있다.’는 분부를 한번 내리시자 어떻게든 구해보려는 논이 벌써 대각에서 가지를 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음양(陰陽)의 승부(勝負)와 사정(邪正)의 소장(消長)이 나눠지는 갈림길이라 할 수 있는데, 시비(是非)와 호오(好惡)를 엄하게 해야 한다는 점에서 볼 때 성명께서도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구차하게 양 다리를 걸쳤고 보면 앞뒤의 행동이 서로 어긋난 것이고, 곧장 배척하며 통렬히 변론한 것은 원래부터 심한 것이 아니었으니, 신후재는 체차시키고 정계주 등은 출사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르면서 이르기를,
"지난번 조경이 상소했을 때 ‘시끄럽게 떼거리로 일어난다.’는 답을 하지 않았다마는 그때도 논의가 들쭉날쭉했던 것은 오늘과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신후재가 피혐한 것이 어찌 내가 그렇게 답한 결과로 나온 것이겠는가. 지금 그대들이 불평하는 기색이 현저하게 드러나고 있는데 은연중 나를 조롱하는 계책까지 세우면서 이에 감히 ‘역시 책임을 지시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였다. 이는 나 역시 그대들이 처치하는 범위 안에 들어 있다는 말인데, 나를 어떻게 처치하려는가? 대체로 처치하는 규정을 보건대, 시비를 분간하여 그 입락(立落)을 결정하기만 하면 그뿐이다. 그런데 지금 와서는 나의 말을 가지고 결구(結句)를 삼았으니, 이는 무슨 이유에서인가? 꼭 진달하고 싶다면 또한 자연스럽게 차자로 소회를 아뢰어도 될 것 아닌가."
하였다.
승지 정만화(鄭萬和) 등이 ‘옥당의 차자에 대한 비답이 미안스러우니 삭제했으면 좋겠다.’는 뜻으로 두 번이나 복역(覆逆)했으나, 상이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4월 29일 병인
응교 이민적(李敏迪)과 부수찬 이익(李翊)이 소장을 진달하여 스스로 탄핵하기를,
"몇 줄의 엄한 비답을 받들건대 신자(臣子)의 극죄(極罪) 아닌 것이 없으니, 형벌을 받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뿐 감히 망령되게 스스로 변명할 수는 없습니다만, 그래도 구구한 신들의 마음을 천지 부모의 앞에 모두 드러내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성상께서 간흉(奸兇)의 정상에 대해 이미 통촉하시고 지극히 명확하게 결단을 내리셨습니다만, 그래도 혹 시끄럽게 될까 염려하시어 진정시키려고 하셨으므로, 신들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나름대로 ‘소인(小人)의 화(禍)는 독약이나 맹수와 같다. 따라서 깊이 증오하여 통렬하게 끊어버리지 않고서 조정하려 했다가는 결국 나라를 망치게 마련이다.’고 여겨졌기에, 또한 성상께서 시비를 밝히고 호오(好惡)를 통쾌하게 보여주셨으면 하고 바랬던 것일 뿐이었습니다.
조경(趙絅)이 상소하였을 때 성명께서 이미 엄절(嚴截)하게 처분을 내리셨는데도 사론(邪論)이 여전히 제멋대로 나오고 있으니, 지금 만약 시끄럽게 될까 염려하신 나머지 약간이라고 진정시키려는 의사를 보이시기만 하면, 이를 빙자하여 어떻게든 구원해 보려는 논이 필시 꼬리를 물고 일어날 것입니다. 신들이 지나칠 정도로 염려하게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논사(論思)하는 신하가 처치하는 차자를 올리면서 아울러 권계(勸戒)하는 규정이 예로부터 있어 왔습니다. 그래서 신들이 망령되나마 이 예를 적용했던 것인데, 어찌 조금이라도 그 사이에 다른 뜻을 두었던 것이겠습니까. 신들이 만약 불만스러운 뜻을 품고 군부(君父)를 농락하려 했다면 그 죄는 만번 죽어 마땅할 것입니다. 직명(職名)을 체차시켜 주시어 국법을 엄숙히 하소서."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라고 답하였다.
장령 이관징(李觀徵)이 아뢰기를,
"본부에서도 수찬 홍우원에 대한 일을 논하였는데, 우원은 바로 신의 동성(同姓) 5촌 숙모부(叔母夫)입니다. 상피해야 하는 법규에는 저촉이 되지 않지만 일단 일가라는 혐의는 있습니다. 따라서 가령 신의 의견이 동료와 같다고 하더라도 그의 죄를 청하는 논에 따라 참여해서는 안 될 것인데, 더구나 의견이 같지 않은데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심지어는 조경을 간사한 인물로 지목하고 흉도(凶徒)라고 배척하는데, 아, 조경 같은 인물에게 어찌 이런 점이 있겠습니까. 신은 그가 그런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이렇듯 논의가 한창 전개되고 있는 날을 당하여 신이 대석(臺席)에 끼어 있을 수는 없으니, 체차시켜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정언 원만리(元萬里)가 아뢰기를,
"옥당이 처치한 차자의 의도와 표현한 문장을 보건대 단지 사정(邪正)을 통렬히 구별하시어 통쾌히 호오(好惡)를 결단하시도록 한 것으로서, 특히 성상께서 소장(消長)의 분기점을 당하여 전이(轉移)할 책임을 감당하시도록 간절히 바란 것이었을 뿐, 결단코 다른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 나라의 치란(治亂)과 시비(是非)가 모두 인주(人主)에게 달려 있는데, 보도하는 책임을 맡은 신하로서 어떻게 이를 말씀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신후재(申厚載)가 한결같이 인입(引入)하면서 사태를 관망만 하다가 ‘시끄럽게 소요를 일으킨다.’는 분부를 보고는 비로소 뛰어나와 기치를 세웠으니, 그 정태(情態)에 스스로 숨길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번에 처치한 것은 단지 그 실상에 의거한 것일 뿐이니, 어찌 다시 격분하며 불평스러운 마음을 품고 한 것이겠습니까.
아, 전하께서 이미 처음에 분명하게 변별해주지 않으시어 신후재가 다른 가지를 치는 논을 들고 나오게끔 하였는데, 지금 또 바른 말을 한 선비를 꺾어 버리심으로써 이들의 엿보는 마음을 더욱 고무시키고 있으니, 신은 거듭 성명을 위하여 개연한 마음이 듭니다. 이번에 엄한 비답이 실로 신들을 처치한 것 때문에 나온 것인만큼 신이 어떻게 감히 태연히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관징(李觀徵)이 인피한 내용 역시 신후재와 같았는데, 어쩌면 이토록까지 한결같이 구원해 주는 말을 하고 있단 말입니까. 이모저모로 살펴 보아도 모두 그대로 있기가 어려우니, 체차시켜 주소서."
하니, 상이 회보하지 않고, 정원에 하교하기를,
"만리가 장황하게 피혐하는 사연을 늘어놓으면서 잔뜩 노여워하는 기색을 보였는데, 조종하고 능멸하려는 뜻이 현저히 드러나고 있으니, 놀랍고 통분스럽기 그지없다. 만리를 우선 먼저 체차하여 뒤 폐단을 막도록 하라."
하였다. 승지 정만화(鄭萬和) 등이 봉환(封還)하며 아뢰기를,
"만리가 피혐한 사연을 보건대 말은 과격하다 하더라도 그의 본 마음을 헤아려 보면 단지 시비를 밝히려고 한 것일 뿐입니다. 이번에 특별히 체차시키라고 명하신 것은 실로 대각을 너그럽게 포용하는 뜻이 못 됩니다. 왕의 말씀이 한번 전파되면 듣는 이들이 놀랄 것이니, 만리를 체차시키라고 하신 명을 환수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그렇게 말을 한 본뜻이 어찌 오로지 시비를 밝히려는 데 있는 것이겠는가. 나에 대해 잔뜩 성을 내면서 모욕을 가했는데, 그대들은 어찌하여 그토록 심하게 만리를 비호하는가."
하였다. 승지 조윤석(趙胤錫)이 또 복역하며 명을 환수할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듣지 않았다. 우부승지 안후열(安後說)은 복역한 두 번의 계사에 참여하지 않았는데, 어떤 사람이 그를 비난하자, 후열이 말하기를,
"만리의 피사에 과연 능멸하는 뜻이 있기에 내가 참여하지 않은 것이다."
하였다.
사간 김만균(金萬均), 헌납 송시철(宋時喆), 정언 윤우정(尹遇丁), 집의 정계주(鄭繼胄), 장령 김익렴(金益廉) 등도 ‘옥당의 차자에 내린 비답이 준엄하고, 이관징(李觀徵)이 이의를 제기했다.’는 이유로 모두 인피하였는데, 모두 한결같이 원만리(元萬里)가 한 것처럼 윤선도(尹善道)·홍우원(洪宇遠)·신후재(申厚載)·이관징을 공척(攻斥)하면서 체직시켜주기를 청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4월 30일 정묘
부수찬 정석(鄭晳)이 상차하기를,
"의견이 서로 달라서 구차하게 동조할 수 없거든 곧바로 진달하여 그 이야기를 마무리지워야 마땅한데 법규를 벗어나 피혐하였으니 구차하게 된 것을 면하지 못했습니다. 차자의 표현이 과격한 듯하기는 합니다만 그것은 군상(君上)에게 기대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일 뿐 실로 다른 뜻은 없는 것이었습니다. 갑자기 엄한 비답이 내려진 이상 형세상으로 태연히 있기는 어렵습니다만, 처치한 신하가 일단 온유한 비답을 받았고 보면 논계한 신하가 불안해 할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소견이 같지 않아 소란을 일으킨 책임은 저 쪽에 있고, 문장으로 표현할 때 잘 살피지 못한 것은 실로 무의식적으로 나온 것이니, 이관징은 체차시키고, 김만균·송시철·윤우정·정계주·김익렴은 출사시키소서."
하고, 이어 소회(所懷)를 진달하기를,
"홍우원의 상소 내용이 참으로 잘못되었기에 그 설을 깨뜨려 명백히 변론하지 않을 수가 없었으므로 당초 본관(本館)이 이미 대략 차자로 진달드렸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본 마음을 헤아려 보건대, 그저 견식이 어둡고 시비를 명확히 살피지 못해서 그런 것이었을 뿐, 윤선도의 상소 내용과 비유될 만큼 음험하게 모함하려는 뜻이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근일 대론(臺論)이 너무 격화된 나머지 과중하게 조어(措語)하여 마치 홍우원이 대간(大奸)이나 거특(巨慝)이라도 되는 것처럼 극악의 죄명을 그에게 가하였으니, 삼가 대각을 위해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원만리의 피사가 장황하기 짝이 없다 하더라도 어찌 그 속에 다른 뜻이 있기야 하겠습니까. 표현상 내용을 제대로 전달치 못해 빚어진 일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엄한 분부를 내려 특별히 체직시키도록까지 하셨으므로 보고 듣고서 놀랍고 두렵게 생각하지 않는 자가 없는데, 이는 대각을 대우하는 도리상 흠이 되는 일인 듯싶습니다. 그저께 본관이 처치한 데 대해 내리신 비답 역시 준엄하기 그지없었는데, 사기(辭氣) 사이에 자못 화평함을 결여하시어 신자(臣子)가 차마 듣지 못할 말씀까지 하셨으니, 위대한 왕의 말씀을 그렇게 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 처치하는 차자를 올릴 때에 아울러 진계(陳戒)드리는 규정이 이미 있기에, 감히 이렇게 우러러 진달드립니다."
하였는데, 상이 처치에 관한 일만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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