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6권, 현종 4년 1663년 5월

싸라리리 2025. 12. 9.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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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일 무진

사간 김만균(金萬均), 헌납 송시철(宋時喆), 정언 윤우정(尹遇丁)이 인피하기를,
"신들이 삼가 비망기(備忘記) 및 정원에 내린 비답을 보건대, 동료의 피사(避辭) 가운데의 이야기를 끄집어 내었는데, 성지(聖旨)가 지극히 엄하시어 특별히 체직시키라는 명까지 내리셨으므로 신들은 놀랍고 두려운 마음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동료의 피사에 과격한 점이 실로 있기는 합니다만, 1편(篇) 속에서 반복하여 진달드리다가 누차 엄한 분부가 내려지는 결과를 초래하였으므로, 대청(臺廳)에서 비답을 듣던 신하가 결국엔 엎어지고 자빠져서 물러나왔습니다. 이에 듣는 이마다 놀라고 의아해하며 분위기가 비탄에 쌓이고 참담하기만 한데, 이것이 어찌 평소 성명에게 기대하던 바이겠습니까. 신들의 견해도 동료와 다름이 없는데, 어찌 신들만 특별히 체차되는 것을 면했다고 하여 그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태연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옥당이 처치하는 차자를 올리면서 소회도 겸하여 진달드렸는데, 어떻게든 홍우원을 구원하려 하면서 양사를 공척하였으니, 아, 또한 괴이하다 하겠습니다. 당초 옥당이 우원을 논했을 때 그 사의(辭意)의 준엄한 정도가 대론(臺論)에 처지는 것이 아니었는데 정석(鄭晳)도 그때 동참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만 각각 두 사람의 손에서 나온 것처럼 홀연히 말을 바꾸었으니, 앞뒤로 말을 번복한 그 형적을 숨기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대론이 너무 격렬하고 조어(措語)가 과중하다.’고 했는가 하면, 또 ‘대각을 위해 애석하게 생각한다.’는 말로 결어(結語)를 삼기까지 하였는데, 그렇다면 어찌해서 유독 처치할 즈음에 한편으로는 논척(論斥)하고 한편으로는 출사시키기를 청함으로써 변화무쌍하게 혼란시키려는 계책을 삼는단 말입니까. 신들에게 이미 요행히 면한 혐의가 있고, 또 뜻밖의 배척을 받았으니, 체차시켜 주소서."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만균 등이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집의 정계주, 장령 김익렴이 인피하기를,
"옥당이 처치하는 차자를 올리면서 소회도 아울러 진달했는데, 감히 홍우원을 구하려 하고 신들을 공척하였습니다. 아, 정석은 이미 옥당의 차자에 참여했었는데, 그때 양사의 논보다 강도를 더하여 우원의 죄를 극론(極論)하며 말을 엄절(嚴截)히 하였습니다. 처음에 ‘우원이 그만 감히 시비를 어지럽히고 흉인을 비호하며 거리낌없이 방자하게 굴었다.’고 말하였고, 또 ‘조경(趙絅)이 앞에서 창도하고 우원이 뒤에서 이어받았는데, 성상께서 만약 한번 동요하시면 아첨하는 간사한 무리들이 필시 팔뚝을 치켜들고 사방에서 일어날 것이다.’고 하였고, 또 음양(陰陽)의 소장(消長)과 사정(邪正)의 진퇴(進退)에 관련된다는 설을 가지고 빠짐없이 이야기하며 탄핵하는 논을 전개했었는데, 신들이 그 뒤에 이를 이어 발론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정석이 홀연히 앞서의 견해를 바꾸어 ‘식견이 어둡고 시비에 밝지 못한 탓이다.’고 하며 우원을 구원해주려 하였습니다. 이는 신후재(申厚載)의 말을 주워모아 쓴 것인데, 당초 차자에서 이야기한 ‘시비를 어지럽히며 거리낌없이 방자하게 굴었다.’는 등의 말과 어쩌면 그렇게도 상반된단 말입니까. 또 감히 ‘음흉하게 모함하려는 마음은 결코 없었다.’고 하면서 우원을 구원해주려 하였는데, 그가 차자에서 말했던 ‘사정의 진퇴와 음양의 소장에 관련된다.’는 설과 또 어쩌면 한결같이 상반된단 말입니까. 음양이 열리고 닫히듯 뒤바꿔 두 가지로 말하는 그 작태야말로 차마 바로 보지 못할 점이 있습니다.
또 ‘대론(臺論)이 너무 격렬하고 조어(措語)가 과중했다.’고 말한 것은 바로 신들 및 원만리(元萬里)를 지목해서 내놓은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또 어째서 꼭 만리를 구원하는 설을 억지로 내놓아 그 정태(情態)를 숨기려 한단 말입니까. 또 일단 ‘대간을 위해 애석하게 생각한다.’고 말을 한 이상, 이 논조를 끝까지 밀고나가 양사의 체차를 청했어야 옳을 것인데, 또 어째서 꼭 한편으로는 출사시키기를 청하고 한편으로는 공격하면서 마치 두 사람의 손에서 나온 것처럼 앞뒤로 변환(變幻)하였단 말입니까. 신이 이미 그의 배척을 받았으니, 또 어떻게 감히 태연히 있겠습니까. 체차시켜 주소서."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계주 등이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대사헌 김수항(金壽恒)이 아뢰기를,
"논의할 즈음에는 반복해선 안 되고 시비를 나눌 때에는 양립(兩立)시켜선 안 됩니다. 그런데 처음에 이미 준열하게 배척했다가 뒤따라 분소(分疏)042)  해주고 한편으로는 공격하면서 한편으로는 출사시키기를 청했으니, 앞뒤로 말을 바꾼 정적(情迹)을 숨기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그 책임이 돌아갈 곳이 있으니, 서로 따질 가치가 뭐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인피한 사연이 아무리 과격했다 하더라도 말을 받아주는 도리로 볼 때는 본 마음을 살폈어야 마땅한데, 특별히 체직시키라는 명이 뜻밖에도 갑자기 나왔으니, 동사(同事)한 신하들이 요행히 면했다는 혐의를 가질 필요가 뭐가 있겠습니까. 양사를 모두 출사시키소서."
하니, 따랐다.

 

비망기(備忘記)로 이르기를,
"비가 오려다가 안 오고 구름이 끼었다가 개이곤 한다. 서늘한 바람이 연일 불어 날씨가 쌀쌀해 지니 가뭄들 조짐이 이미 이루어져 앞으로 물 한 방울 구하기 어렵게 되었다. 애달픈 우리 백성들 목숨이 경각에 달렸으니, 조용히 생각함에 한 때도 편안치가 못하다. 앞으로 어찌해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난 뒤에는 아무리 경건하게 정성껏 기도를 드린다 해도 이미 소용이 없게 될 것이다. 기우제를 거행해야 할지의 여부를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품처케 하라."
하였는데, 예조가 기우제를 거행토록 복계하였다.

 

5월 4일 신미

약방이 아뢰기를,
"성상의 체후(體候)가 어떠하십니까. 교산(喬山)043)  에 제사드릴 때면 번번이 단비의 축복이 내렸는데, 삼가 생각건대 성상께서 사모하시는 것이 지금 더욱 절실하시라고 여겨집니다."
하였다. 이 날이 효묘(孝廟)의 기신(忌辰)이었는데, 매년 이 날만 되면 꼭 비가 내렸기 때문에 약방이 이와 같이 아뢰었던 것이다.

 

평안도 희천(熙川)·영변(寧邊) 등 고을에 우박이 내렸다.

 

대사헌 김수항(金壽恒) 등이 홍우원을 논척하면서 삭출할 것을 청하고, 원만리를 특별히 체직시키도록 한 명을 환수할 것을 청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국가의 기강이 해이해져 사치 풍조가 이루어진 탓으로 백성들이 법을 두려워 하지 않고 날로 참람스러운 짓을 더해가고 있습니다. 근래 의역(醫譯)·이서(吏胥)·공사천(公私賤)들의 분총(墳塚)에 모두 5, 6척(尺)이나 되는 큰 비석을 세우고 있으며, 전면과 후면에 재신(宰臣)의 묘표와 똑같이 직함을 음기(陰記)하고 있는데, 심지어는 호조·형조·공조·한성부·의금부·도총부까지도 모두 겸직한 것으로 써넣고 있으니, 그 간특하고 참람하게 행동한 죄를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성부로 하여금 일일이 엄하게 조사하도록 하여 모두 그 죄를 다스리게 하고, 묘표를 모조리 철거토록 하소서. 그리고 이조를 신칙하여, 사대부가 아닌 경우에는 추증(追贈)을 절대 허락해주지 못하게 하고, 육조(六曹)·경조(京兆) 및 금오(金吾)·총부(摠府)의 겸직을 이미 추증한 것들은 모두 환수하여 참람한 폐단을 막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면서 이르기를,
"이미 직첩을 준 경우 지금 꼭 환수할 것까지는 없다."
하였다.

 

이경석(李景奭)을 내의원 도제조로, 이일상(李一相)을 예조 판서로, 이행진(李行進)을 예조 참판으로, 곽성귀(郭聖龜)를 장령으로, 홍만용(洪萬容)을 지평으로 삼았다.

 

태백(太白)이 낮에 나타났다.

 

평안도 강계(江界)·벽동(碧潼)과황해도 신계(新溪)와강원도 평강(平康)과 경상도 안동(安東)·영해(寧海) 등 고을에 우박이 쏟아져 곡식이 상했다.

 

5월 8일 을해

도승지 남용익(南龍翼)이 아뢰기를,
"가뭄이 이미 극심해 파종할 시기도 놓쳤는데 두 번이나 기우제를 지냈어도 하늘은 까마득히 들어주려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현재 기우제를 행하는 일을 결코 상전(常典)대로만 따라 차제(次第)로 거행할 수는 없습니다. 차제를 뛰어넘어 거행한 일 역시 전규(前規)가 있으니, 이번에 세 번째 거행하는 기우제는 으레 차임(差任)하는 관원으로 제관(祭官)을 임명치 말고 중신(重臣)을 특별히 차견(差遣)하는 것이 혹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질병을 앓은 끝에 애타는 마음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계사(啓辭)가 참으로 옳으니, 속히 거행토록 하라."
하였다.

 

5월 9일 병자

오정위(吳挺緯)를 승지로, 소두산(蘇斗山)을 지평으로 삼았다.

 

헌부가 민진익(閔震益)이 경기를 통어(統御)하는 임무에 합당치 못하다고 논하여 체차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듣지 않았다.

 

부교리 이유상(李有相), 수찬 이민서(李敏叙) 등이 차자를 진달하여 홍우원을 공척(攻斥)하면서 양사의 청을 쾌히 따르기를 청하고, 윤선도와 조경을 아울러 거론하면서 양사의 계사처럼 지극히 추악하게 헐뜯었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진위 겸 진향 정사(陳慰兼進香正使) 낭선군(朗善君) 이우(李俣)와 부사 이후산(李後山), 서장관 심재(沈梓)가 표문(表文)을 바치기 위해 청(淸)나라에 갔는데, 청나라가 상(喪)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5월 13일 경진

상이 창덕궁(昌德宮)으로 환어(還御)하였다.

 

수찬 정석(鄭晳)이 상소하여 사직하면서 변환(變幻)하고 반복(反覆)한 죄를 다스려주기를 청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라고 답하였다.

 

5월 14일 신사

전 군수 윤징지(尹澄之)가 죽었다. 징지는 감사 윤훤(尹暄)의 아들이다. 정묘 호란 때 윤훤이 평안 감사로 있었는데, 오랑캐 군사가 장차 이를 즈음에 징지가 그 아버지에게 피신한 것을 권유하였다. 평양이 먼저 무너지자 조정에서는 윤훤을 균율로 참하니, 징지가 아버지의 죽음이 자신때문이라고 생각하여 종신토록 벼슬하지 않았다.

 

유철(兪㯙)을 병조 참판으로, 민정중(閔鼎重)을 대사성으로, 김만균(金萬均)을 교리로, 홍만용(洪萬容)을 지평으로, 남구만(南九萬)을 사간으로 삼았다.

 

5월 15일 임오

성균관 생원 이적(李積) 등이 상소하여 이이와 성혼을 공자의 묘정에 종사하기를 청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5월 18일 을유

지평 홍만용(洪萬容)이 아뢰기를,
"전적 권진한(權震翰)은 정인(正人)을 헐뜯는 논에 빌붙어 낭자하기 짝이 없게 선현을 모욕하였습니다. 이런 괴귀(怪鬼)한 무리는 의관(衣冠)의 반열에 끼워둘 수 없으니, 사판(仕版)에서 삭제해버리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고, 단지 먼저 파직한 뒤에 추고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대관이 이어 사판에서 삭제할 것을 청하였는데, 한참 시일이 지난 뒤에야 정지하였다.
삼가 살피건대, 권진한이 아직 급제하지 못했을 때 시론(時論)에 붙좇는 고향 사람 하나가 양신(兩臣)044)  을 종사하라는 내용으로 소장을 진달하려고 유림(儒林)에 통문(通文)하였는데, 그때 진한이 글을 써서 말하기를 ‘세상에 어찌 사소(邪疏)에 참여하는 권진한이 있겠는가.’ 하여, 이 때문에 좌폐(坐廢)되었었다. 권진한 같은 이야말로 이른바 ‘씩씩하다, 그 기상이여.[强哉矯]’라고 칭찬할 만한 인물이라 하겠다.
만용이 또 사예 홍남립(洪南立)과 직강 도신여(都愼與)는 사람 됨됨이로 볼 때 사유(師儒)의 직임에 합당치 못하다고 탄핵하면서 체차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5월 19일 병술

지평 홍만용이 아뢰기를,
"성균관과 사학(四學)이 다르다고 해도 체면은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마다 모두 직숙(直宿)하는 사람이 있고 또 재임(齋任) 및 수재(守齋)하는 유생이 있는데, 재회(齋會)하는 때 이외에는 다른 외부 사람들이 공공연히 무턱대고 들어올 수 없는 것이 바로 학궁(學宮)의 규칙입니다. 그런데 근래 듣건대, 약간의 사자(士子)가 중학(中學)에 돌입하여 재유(齋儒)를 쫓아내고 직숙하는 방을 뺏어 차지하는가 하면 학관(學官)을 축출하여 학교가 텅텅 비게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야말로 전에 있지 않던 변고라 할 것입니다. 당해 학관이 무기력하여 직무를 수행하지 못함으로써 이런 변고가 있게 하였으니 중한 쪽으로 추고토록 하시고, 수창(首倡)한 유생도 사관(四館)으로 하여금 적발하여 벌을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윤문거(尹文擧)를 대사헌으로, 오정일(吳挺一)을 경기 감사로, 민점(閔點)을 동부승지로, 김만기(金萬基)를 집의로, 송시철(宋時喆)을 장령으로, 이유상(李有相)을 헌납으로 삼았다.

 

대사성 민정중(閔鼎重)이 상소하여 사직하였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5월 20일 정해

호군 박장원(朴長遠)이 상소하여 사직하고, 또 아뢰기를,
"소위 안에서 적간(摘奸)하는 일은 제소(祭所)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고, 역시 각각 보내야 할 곳이 생기면 일의 경중과 대소에 따라 경계하고 단속시키며 죄를 매겨서 일사불란하게 되지 않는 것을 재정비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누조(累朝)에 걸쳐 이미 행해 온 규례로서 폐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데에도 요령이 있는 것이니, 오로지 번잡스럽게 하여 소요를 일으키는 정도에 이르지 않게 해야만 중도(中道)에 맞는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일이 일어나기만 하면 번번이 보내는 일이 10에 8, 9를 차지하는데, 그에 따른 크고 작은 폐단을 일일이 셀 수 없을 정도입니다. 위에서 그런 식으로 강제하고 아래에서 그런 식으로 응하면서 마치 으레 거행하는 것처럼 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면역이 되어 두려워하는 정도가 감소되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적간하는 본래의 목적이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지금부터 성상께서 짐작하시어 한두 곳에 파견하여 엄히 경계하고 살핌으로써 나머지의 곳도 힘쓰게 하는 것이 온당하다고 여겨집니다. ‘인주(人主)가 호령을 발하고 시행할 때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번거롭게 되어 소요를 끼치는 일이다. 지극히 간요(簡要)하게 해야만 번거로움을 피할 수 있다.’고 한 옛 사람의 말이 어찌 우리를 속인 것이겠습니까."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라고 일렀다.

 

진사 남중유(南重維) 등 26인이 상소하기를,
"관학(館學) 유생 및 외방에서 아첨하여 빌붙는 무리들이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종사(從祀)해야 한다는 청을 처음 을해년에 내놓고 다시 기축년에 내놓았었는데, 그때마다 열성(列聖)께서 반드시 엄히 배척을 가하시고 공의(公議)가 끝내 허락해 주지 않았으니, 이는 참으로 두 신하의 학문이 조잡하고 천박하며 여러 흠집을 숨기기가 어려워 결단코 제사받는 반열에 외람되이 뛰어 오르게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부하며 좋아하는 일종의 논의가 있은 뒤부터 신들이 과감하게 한번 말씀드려 바로잡으려고 했었는데, 성명께서 성훈(成訓)을 준수하시면서 매우 미워하고 통렬하게 그들의 청을 끊어버리셨으므로, 신들이 그동안 급급하게 논변하려 하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지난번 황상중(黃尙中)과 유계(兪棨) 등이 기회를 틈타 사욕을 채울 목적으로 하늘을 속일 수 있다고 여겨, ‘귀일(歸一)되었다.’느니, ‘잘못을 후회했었다.’느니 하면서 당초 성명(成命)이 없었는데도 곧바로 회의하기를 청하여 군상(君上)을 꼼짝 못하게 하고 한때의 의견을 재갈물리려는 뜻을 현저하게 드러냈으므로, 신들이 원통하고 분한 생각을 금할 수가 없어 다수의 유생과 함께 중학(中學)에서 제회(齊會)한 뒤 오늘 봉장(封章)045)  하여 대궐 문을 두드리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어제 홍만용(洪萬容)이 이를 막아보려는 음흉한 계책을 몰래 품고는 감히 저격(狙擊)하는 수단을 쓰면서 제멋대로 독계(獨啓)하여 다사(多士)에게 죄를 주기를 청하였습니다. 그의 심술을 추적해 보건대, 신들을 윽박지르고 협박하여 학궁(學宮)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려는 데 불과합니다만, 만용도 사람인데 어떻게 한결같이 이토록까지 임금을 속이고 사람을 함정에 빠뜨릴 수 있단 말입니까.
대저 사림(士林)에 일이 발생했을 경우 반드시 학궁에 모여 의논하는 것이 본래 있어 온 구례(舊例)입니다. 따라서 신들이 의관을 갖추고 제회(齊會)했고 보면 이것이야말로 재회(齋會) 중에서도 큰 행사였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만용이 ‘공공연히 돌입하였다.’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그는 진정 학궁은 유생이 들어와서는 안 되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신들이 재회하던 날 하재(下齋)에 두 사람이 있기에 신들이 동참하자고 권유하였고 보면, 쫓아내었다는 등으로 만용이 말한 것에 대해 많이 변론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신들이 재당(齋堂)에 모여 있은 기간이 이미 5일이 넘었고 보면, 학교가 텅텅 비었다고 한 말이 또 얼마나 무망(誣罔)한 것이라고 하겠습니까. 또 학관(學官)을 축출했다고 말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더욱 할 말이 없을 정도입니다.
이어 삼가 생각건대, 만용은 바로 고(故) 참판 홍영(洪霙)의 손자인데, 홍영은 지론(持論)이 평이하여 본래 시의(時議)에 빌붙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만용의 아비 홍주원(洪柱元)이 권요(權要)에 아첨하고 인연을 맺은 뒤로 갑자기 그의 아비를 배신하면서 스스로 계책을 얻었다고 여기고는 맛있고 살찐 고기로 당대의 명관(名官)을 먹여 조정(朝政)에 참여하려고 꾀하며 방자하게 탐욕을 부렸습니다. 이것만도 가증스럽기 짝이 없는 일인데, 그의 아들 만용과 홍만형(洪萬衡)이 악명높은 부귀한 집의 아들로서 엉터리로 과제(科第)를 점유하고는 그 아비의 세력을 업고 빠른 속도로 요로(要路)에 진입한 뒤 그저 당파를 비호할 줄만 알았지 공의(公議)는 돌아보지도 않은 채 감히 천고(千古)에 있지 않던 일을 자행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위를 현혹시키고 아래를 협박하고 강제하여 전혀 꺼리는 것이 없이 없는 사실을 날조하여 죄주기를 청하였으니, 이런 뜻을 미루어 간다면 무슨 짓인들 하지 못하겠습니까.
신들이 삼가 성상의 비답을 보건대, 수창(首倡)한 유생을 적발하여 치죄(治罪)하라고 하셨는데, 공의(公議)가 격발되어 같은 목소리로 서로 응한 자 20여 인이 일시에 제회하였고 보면, 죄가 있든 죄가 없든 간에 차이가 있을 수 없습니다. 사관(四館)으로 하여금 똑같이 시행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승지 이은상(李殷相) 등이 진계(陳啓)하여 만용이 했던 것처럼 중유 등을 공척(攻斥)하며 아뢰기를,
"정인(正人)을 헐뜯는 소는 이치상 퇴각(退却)해야 마땅하나 일단 유소(儒疏)라고 일컬은 이상 봉입(捧入)하지 않을 수 없는데, 감히 전례를 원용하여 이것까지도 아울러 앙달합니다."
하였다.

 

5월 21일 무자

홍만용이 남중유 등의 소에서 배척을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는데, 응교 이민적(李敏迪)과 수찬 이익(李翊)이 처치하여 출사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뜸을 떴는데 핵환(核患)046)   때문이었다. 도승지 남용익이 아뢰기를,
"태학생 이적(李積)과 진사 남중유(南重維) 등의 소를 모두 이미 입계(入啓)하였는데, 그 시비와 사정(邪正)이 필시 성감(聖鑑)의 아래에서 도망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고, 약방 제조 김좌명이 아뢰기를,
"종사가 중한 것이 상의 분부와 같은 점이 있긴 합니다만, 모욕까지 하는 것은 매우 가증스러운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계(臺啓)에 분개해서 나온 것인 듯싶다."
하였다. 도제조 이경석이 아뢰기를,
"이들이 장차 소장을 진달하려고 중학(中學)에 모여 있은 지 오래였는데, 신이 항간에서 서로 전하는 말을 통해 그들의 행위를 상세히 듣건대, 재유(齋儒)를 몰아세우고 모욕한 모습이 마치 상놈들이 서로 싸우는 것과 같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그들이 감히 두 현신(賢臣)의 학문을 의논하고 대간의 부형(父兄)까지 거론하며 모욕할 수 있단 말입니까. 분명히 호오(好惡)를 보이시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하니, 상이 단지 잘 알았다고만 하였다.
삼가 살피건대, 양신(兩臣)을 종사하자는 청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있어 왔다. 그러나 처음에는 그저 그들의 도덕과 학문의 천심을 논하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을 공척하는 데 불과하였는데,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홍만용(洪萬容)이 상소한 유생들을 무함하며 학궁(學宮)에서 난동을 부렸다고 억지로 말을 지어내기까지 하였으니, 천총(天聰)을 너무도 속이고 가렸다 하겠다. 정원의 계사나 옥당의 차자도 모두 만용의 편을 들어 함께 속이고 가리는 결과에 떨어지고 말았으니, 너무도 미혹되었다 하겠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말할 가치도 없다 하겠으나, 이경석은 대신의 신분으로 그만 무망(誣罔)하는 말을 가지고 상달하였으니, 당의(黨議)가 사람을 해치는 것이 어쩌면 한결같이 이 지경까지 이르렀단 말인가.

 

수찬 이민서(李敏叙)가 상소하여 남중유 등을 자못 심하게 공척하면서 사직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5월 22일 기축

지평 홍만용이 패소에 응하지 않아 체차되었다.

 

상이 뜸을 떴다. 이경석이 아뢰기를,
"의관이 말하기를 ‘옥체의 습창(濕瘡)도 중한데 이 증세를 다스리려면 온천 물이 제일이다.’고 하니, 그 물을 가져 와서 씻으시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가져온 물은 오래 쓸 수가 없는데, 자주 가져오게 되면 민폐를 끼칠까 염려된다."
하자, 김좌명이 아뢰기를,
"성명께서 민폐를 염려하십니다만, 우역(郵驛)을 두고 번갈아 전해오게 하면 어찌 백성을 수고롭게 하겠습니까. 신들이 물러가서 상의하겠습니다."
하였다. 경석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이미 민폐를 염려하는 분부를 내리셨는데, 신이 가지고 있던 소회를 이 기회에 감히 진달드릴까 합니다. 일찍이 대계(臺啓)를 인하여 민간인 가옥을 뺏어 들어가 사는 것을 일체 금단토록 하였는데, 근래 듣건대 이름있는 사대부가 예전처럼 멋대로 뺏어서 들어갔다 합니다. 어리석은 백성이 만약 ‘조가(朝家)에서 알고도 금하지 않는다.’고 말하게 될 경우 그 입으로 저주하는 것이 너무도 두렵다고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제조 는 듣지 못했는가?"
하였다. 김좌명이 아뢰기를,
"어떤 조사(朝士) 하나가 교자(轎子)를 타고 부인 차림으로 꾸민 뒤 어떤 상한(常漢)의 집에 돌입해서는 그대로 뺏어 들어가 살고 있다 하는데, 이런 등속의 일은 정말 놀랍기만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집 주인이 빌려주지도 않았는데 뺏어서 들어간 자를 한성부로 하여금 적발하게 하고 엄금토록 하라."
하였다. 경석이 아뢰기를,
"이 일을 경조(京兆)에 책임지워야 마땅하겠습니다만 풍력(風力)이 미치지 못할 것이니, 역시 헌부 성상소(城上所)를 패초(牌招)하여 분부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5월 23일 경인

집의 김만기(金萬基)가 상소하기를,
"신이 지난번 본직에 있으면서 함부로 중신(重臣)을 논했다가 혹독하게도 추악한 비난을 당하여 대각에 모욕을 끼쳤는데 이 점에 대해서 신이 시끄럽게 쟁변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대각에서 서로 바로잡아 주는 일이야말로 본래 의례적인 일이고 추고는 헐한 벌로 매우 미세한 일인데, 김좌명(金佐明)은 그만 신을 가리켜 의도적으로 무함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대저 논박을 받은 사람들이 번번이 ‘대관(臺官)이 공심(公心)에서 발로되어 한 일이 아니다.’고 하는데, 이것이야말로 근래의 폐습(弊習)이라 할 것입니다. 신은 이 뒤로 재집(宰執)에게 대단한 잘못이 있을 경우에도 대관이 된 자들이 신을 경계삼아 감히 입을 열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하고 이어 체직시켜 주기를 청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병조 판서 김좌명이 상차하기를,
"오늘날 사람들을 보건대,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자는 드물고 잘못을 부끄러워 하면서 그 잘못을 합리화하려는 자가 대부분인데, 신 역시 오늘날 세상에 속한 사람으로서 이 병통이 없을 수 없어 허물을 은폐하려고 하지만 잘 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지금 와서는 또 사람들에게 씹히는 대상이 되었으니 신은 정말 황공할 따름입니다. 신이 자신하는 것은 다만 군부(君父)를 속이지 않으려는 마음이 붕우를 공경하는 마음보다는 많다는 것인데 이것이 또한 신의 죄입니다. 신을 체직시켜 주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고 이르기를,
"그런 이야기를 어찌 개의할 필요가 있는가."
하였다.

 

5월 25일 임진

김수항(金壽恒)을 예조 판서로, 서필원(徐必遠)을 좌승지로, 정익(鄭榏)을 동부승지로, 이광직(李光稷)을 지평으로, 홍만용(洪萬容)을 정언으로 삼았다.

 

간원이 대구 부사(大丘府使) 윤종지(尹宗之)의 연한(年限)이 이미 넘었는데도 태연히 부임했다는 이유로 파직시키기를 청하였는데, 세 번째 아뢰었을 때 따랐다.

 

5월 27일 갑오

민진익(閔震益)의 일에 대한 헌부의 계사를 이때에 이르러 윤종(允從)하였다.

 

5월 28일 을미

집의 김만기(金萬基) 등이 아뢰기를,
"저번에 정언 원만리(元萬里)를 특별히 체직시키도록 명하신 것이야말로 대각을 너그럽게 포용해야 하는 도리에 어긋난 것이었던만큼, 진계(陳啓)하며 복역(覆逆)한 것이야말로 은대(銀臺)047)  의 직분이었다고 할 것인데, 전 승지 안후열(安後說)이 혼자서 계사에 참여하지 않고는 또 뒤따라 그에 관련된 말을 지껄였으니, 마음 자세가 정말 가증스럽습니다. 파직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중학(中學)에서 난동을 부린 유생에게 벌을 시행하도록 전교하셨는데, 사관(四館)의 관원 중에 불참한 자가 많으니, 그 정태(情態)가 가증스럽습니다. 외방에서 타사(他司)에 분차(分差)되어 아직 숙배(肅拜)하지 못한 자를 제외하고, 불참한 사관의 관원은 모두 파직시키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남중유(南重維)를 정거(停擧)시키도록 이미 전교하셨고 보면, 사관이 제회(齊會)하여 벌을 시행했어야 마땅한데, 그저 정거시킨다는 방(榜)만을 써서 집에 있는 그에게 보냈으니, 사관이 너무나도 태만합니다.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군사를 거느리는 자에게 곤(棍)을 쓰도록 허용한 것은 군무(軍務)를 중히 하기 위해서인데, 병사(兵使) 등이 너무 함부로 곤을 사용한 나머지 가끔 사람 목숨이 덧없이 쓰러지곤 합니다. 병조로 하여금 먼저 곤의 길이와 두께를 정하게 한 뒤, 군무 이외에 병사가 곤을 쓰는 것을 감사로 하여금 엄히 규찰케 하고 이를 범하는 자는 저죄(抵罪)케 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경상도 상주(尙州)에 지진이 일어 났는데 마치 천둥소리 같았다.

 

정원이 아뢰기를,
"예조 판서 김수항(金壽恒), 호군 박장원(朴長遠), 장령 송시철(宋時喆), 헌납 이유상(李有相), 교리 김만균(金萬均), 정언 홍만용(洪萬容), 주서 최상익(崔商翼) 등이 소나 단자(單子)를 연일 와서 바치고 있습니다. 신들이 고사(故事)를 들어 보건대, 상의 건강이 좋지 않을 때에는 대소 신료들이 감히 사병(私病)이나 사정(私情)을 말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이 신하들에게 실제로 어떤 병이 있고 어떤 사정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뜸을 뜨고 침을 맞으시는 이런 때를 당하여 날마다 소나 단자를 바치고 있는 것은 분의(分義)로 헤아려 볼때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대간 외에는 모두 추고하여 고례(古例)가 남아 있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5월 29일 병신

헌부가 사관(四館)을 추고할 일을 아뢰어 윤허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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