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일 정유
사헌부가 아뢰기를,
"부산 첨사(釜山僉使) 이저(李竚)를 지난번 통신(統臣)의 계사에 따라 수영(水營)에 잡아들여 결곤(決棍)토록 하라고 명을 내렸는데, 이저가 태연히 병을 핑계대고 감사에게 보고하면서 나아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대저 잡아들여 결곤케 한 것은 조명(朝命)이고 군율(軍律)인데 평상시에도 이런 식으로 된다면 혹 위급한 사태가 발생할 경우 어떻게 호령하겠습니까. 법대로 처리한다면 그 죄가 참형(斬刑)에 해당되는데, 나국(拿鞫)한 뒤 안율(按律)하여 정죄(定罪)케 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이에 앞서 귀국하던 왜선(倭船)이 다대포(多大浦)에 표박(漂泊)한 일이 있었는데, 관왜(館倭) 두 사람이 담을 뛰어넘어 달아나 다대포로 향하자 문을 지키던 군관들이 만류하려 하였으나 두 왜인이 칼을 뽑아들면서 근접하지 못하게 하였고, 금도왜(禁徒倭)048) 가 또 배를 타고 곧장 가덕(加德) 앞바다로 갔었다. 이에 통제사(統制使) 김시성(金是聲)이 이저가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좌수사(左水使) 이견(李汧)으로 하여금 결곤(決棍)케 하고 또 조정에 죄주기를 청하였는데, 비국이 아뢰기를,
"일단 결곤케 한 이상 벌은 이미 시행된 셈인데, 체차하여 바꾸면 폐단이 있을 것이니, 다시 뒷날의 일을 보아가며 처리하소서."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저가 병을 핑계대고 나아가지 않으면서 이견에게 보고하기를,
"본진(本鎭)의 사체(事體)가 다른 진과는 틀리니, 왜인이 듣는 곳에서 장(杖)을 맞을 수는 없습니다."
하였는데, 이견이 순영(巡營)에 전보(轉報)하니, 감사 이상진(李尙眞)이 이견을 독촉하여 결곤케 하였다. 그러자 이저가 또 ‘체면에 관계되는 일인만큼 곤장을 맞게 하는 것은 안 될 일이다.’는 내용으로 이상진에게 첩문(牒文)을 올리면서 말하기를,
"선창(船倉)을 개축하는 일을 감독하는 것이 급하긴 하나 신병(身病)이 매우 위태로우니, 먼저 파출(罷黜)시켜 준 뒤에 다른 율(律)로 논해 주었으면 합니다."
하였는데, 상진이 상문(上聞)하기를,
"결곤케 한 일의 당부(當否)는 따지지 않더라도 일단 이것이 계하(啓下)된 일인데도 병을 핑계대고 나오지 않았으니 이것만도 놀랍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선창을 수축하는 일이야말로 긴급하기 짝이 없는 것인데도 역시 감독할 뜻을 가지고 있지 않으니, 거만하게 구는 그 형태가 또한 가증스럽기 그지없습니다. 그저 파출시키기만 하면 그의 소원대로 해 주는 것이 될 것이니,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토록 하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하니, 비국에 내렸다. 비국이 복계하기를,
"본도로 하여금 결곤케 하고 이어 일을 감독케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저가 결곤 당하는 것을 피하려고 꾀한 것이 당초 통신(統臣)의 계사로 말미암은 것이었으니, 지금 본도에 맡겨 치죄케 할 수는 없다. 통신으로 하여금 중한 율을 적용하여 결곤케 하고, 이어 이저로 하여금 그 역사(役事)를 감독케 하라."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대신(臺臣)이 안율(按律)하기를 청한 것이었다.
상이 침을 맞았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인조조(仁祖朝)와 선조(先祖) 때에 양신(兩臣)을 종사(從祀)하자는 유생의 청에 따라 증작(贈爵)·증시(贈諡)·사액(賜額)·조전(吊典) 등의 일을 거행한 일이 있었는가? 조사해서 아뢰어라."
하였는데, 정원이 아뢰기를,
"《일기(日記)》를 상고해 보건대, 성혼(成渾)의 경우는 영사 이정귀(李廷龜)가 주달하자 추증(追贈)할 것을 윤허하였는데 그 날이 기사년049) 윤4월 1일이었고, 그 뒤에 참찬관 이식(李植)의 말에 따라 좌의정을 증직하였는데 그 날은 그 달 12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이(李珥)의 경우는 모두 인조 초년에 있었다고 말하는데, 계해년050) 《일기》에는 나오지 않았고 계해년 이후의 문서는 미처 조사해 내지 못했습니다.
양신에게 증시(贈諡)한 날짜도 상고해 내지 못했습니다만, 종사(從祀)하자는 요청이 을해년051) 유생의 소에서 처음 나타났는데 그때 문성(文成)과 문간(文簡)이라는 두 시호를 차례로 거론했었고 보면, 증시한 일이 아마도 을해년 이전에 있었으리라는 것과 그 일이 종사하자는 청에 따라 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액(賜額)과 사제(賜祭) 등의 일에 대해서는, 경인년052) 6월 2일자 예조의 계사(啓辭)에 ‘본조 낭청(郞廳)으로 하여금 향축(香祝)과 액호(額號)를 높이 받들어 전하게 함으로써 유현(儒賢)을 높이고 오도(吾道)를 중히 여기는 뜻을 특별히 보이소서.’ 하였고, 종사에 관한 청이 또 기축년053) 겨울철 무렵에 일어나 경인년 여름에 이르러 그쳤고 보면, 사액한 일이 다사(多士)의 청에 따라 이루어진 듯한데, 또한 명백하게 나타난 곳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해조의 계사는 신임할 만한 것이 못 된다. 당초 무슨 일 때문에 사액했는지 다시 조사해 아뢰어라."
하였다.
6월 2일 무술
헌납 이유상(李有相), 정언 홍만용(洪萬容)이 정원으로부터 배척을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면직되었다.
상이 침을 맞고 도승지 남용익에게 일렀다.
"장맛비가 지리하게 와 곡식을 심히 해치고 있으니 백성의 일이 염려스럽다. 가을 절기가 이르지 않았어도 일찍이 기청제(祈晴祭)를 지낸 일이 있었으니, 속히 해조로 하여금 거행케 하라."
약방 제조 김좌명이 아뢰기를,
"제향(祭享)에 쓸 흑우(黑牛)가 갑자기 죽었기에 신이 오늘 병들지 않은 소들을 막 여염집에 내두어 전염되지 않도록 하였는데, 지금 듣건대 계속해서 죽어가 일곱 마리밖에 남아 있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필시 소 전염병 중에서도 독한 것이라서 그럴 것이니, 해사(該司)로 하여금 구료(救療)할 약물을 찾아 보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앞으로 제향할 일이 매우 염려스럽다."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희생물에 재변이 생긴 것은 변고 중에서도 큰 변고이다. 그런데 아래에서는 재이(災異)로 상문(上聞)하지 않고 위에서는 수성(修省)할 뜻을 다잡지 않은 채 어떻게 하면 구료하고 계속 쓸 수 있는지만 강론하고 있으니, 임금이나 신하 모두 잘못되었다 하겠다.
【태백산사고본】 6책 6권 48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368면
【분류】의약-수의학(獸醫學) / 역사-편사(編史)
사신은 논한다. 희생물에 재변이 생긴 것은 변고 중에서도 큰 변고이다. 그런데 아래에서는 재이(災異)로 상문(上聞)하지 않고 위에서는 수성(修省)할 뜻을 다잡지 않은 채 어떻게 하면 구료하고 계속 쓸 수 있는지만 강론하고 있으니, 임금이나 신하 모두 잘못되었다 하겠다.
정원이 아뢰기를,
"어제 조사해서 아뢴 것 이외에 명백히 드러난 곳을 찾을 수 없기에 사람들에게 물어 보았더니, 어떤 이는 말하기를 ‘원유(院儒)054) 가 별도로 사액(賜額)을 청한 데 따라 허락이 내려졌다.’고 하였는데, 원유의 상소가 《일기(日記)》에 기재되어 있지 않은 이유를 또한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의 증직(贈職)에 대한 일을 어제 미처 상고해 아뢰지 못했었는데, 고(故) 상신(相臣) 이정귀(李廷龜)의 문집을 곧바로 살펴 보건대, 이이의 묘표(墓表) 가운데 ‘계해년 우리 성상께서 즉위하신 초년(初年)에 연신(筵臣)이 행장(行狀) 및 그가 저술한 《성학집요(聖學輯要)》를 바치니, 상이 열람하시고 찬탄하시며 영의정을 증직하였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에게 증직한 일이 인조(仁祖) 초년에 있었던 것만은 확실합니다. 그런데 이번에 사액(賜額)과 사전(賜田)에 대한 일로 여러 차례나 분부하시는 수고로움을 끼쳐드렸는데, 《일기》가 미비하여 조사해 낼 수 없기에 감히 아룁니다."
하였는데, 회보하지 않았다.
6월 3일 기해
상이 대신과 비국의 재신(宰臣)들을 인견하였다. 이조 판서 홍명하(洪命夏)가 주의(注擬)할 때 사람이 부족한 점을 진달하니, 상이 이르기를,
"가선 대부(嘉善大夫) 이상이 부족한가?"
하였다. 좌의정 원두표(元斗杓)가 아뢰기를,
"우리 나라에서 인재를 임용하는 규정을 보건대, 꼭 자급(資級)에 준해서만 하는데, 이미 노쇠해질 나이가 되고 보면 그 근력이 어떻게 일을 감당해 내겠습니까. 연소배 중에 이경휘(李慶徽)·서필원(徐必遠)·민정중(閔鼎重)같은 자들은 모두 발탁해서 쓸 만한데, 해조에서 감히 임의로 승진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지 않았다.
이조 참판 유계가 상소하여 이이와 성혼의 도덕이야말로 종사(從祀)받기에 합당하다고 찬양하고, 현인을 무함하고 정인(正人)을 헐뜯었다고 유직(柳稷)과 남중유(南重維)를 논척(論斥)하며 체직시켜 주기를 청했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병조가 헌부의 계사에 따라 병사(兵使)와 영장(營將)이 사용하는 곤장의 넓이를 3촌(寸)에서 2촌으로 줄일 것과 곤장 형태를 세모진 것에서 양면형으로 바꿀 것, 진목(眞木)055) 을 버드나무로 대체할 것을 청하니, 상이 일렀다.
"군문(軍門)의 호령은 특별한 것으로서 결곤(決棍)하는 벌이야말로 참형(斬刑) 다음으로 시행되는 것인만큼 제도를 일체 바꿀 수는 없는 일이다마는, 감영(監營)·병영(兵營)·수영(水營)에서 조가(朝家)의 분부를 따를 때나 조련할 때 결곤하는 것 이외에는 모두 이에 의거해 제도를 변경해서 쓰도록 하라."
6월 5일 신축
상이 안후열(安後說)의 파직을 청한 논계 때문에 헌부에 답하기를
"대각은 법을 집행하는 곳인데 논의가 혹 다를 경우에는 처치할 때 입락(立落)만 하면 그뿐이다. 그런데 지금 은대(銀臺)에 있는 자를 꼭 파직시킨 뒤에야 그만두려 하고 있으니 너무도 하는 일이 근거가 없다."
하였는데, 지평 이광직(李光稷)이 사설을 늘어놓으면서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좌승지 서필원(徐必遠)이 상소하기를,
"신이 듣건대, 상신(相臣)이 경연석상에서 전관(銓官)이 주의(注擬)할 때 인재가 부족했다고 아뢰자 신의 성명을 거론하면서 또 천청(天聽)을 혼란케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정당하게 대우하지 않으며 음식을 주면 거지도 달갑게 여기지 않는 법인데, 아무리 어리석기 짝이 없는 신이라 하더라도 역시 인성(人性)을 소유하고 있으니, 어떻게 감히 스스로 다행으로 여기면서 마음에 편안히 여길 수 있겠습니까.
인재를 추천하는 일이 대신의 직분이라 하더라도 그러나 그 사이에는 본래 절목(節目)이 있는 법입니다. 선조(先祖) 계사 연간에 해조의 계사에 따라 특별히 묘당으로 하여금 승진시킬 만한 사람을 초계(抄啓)하도록 했었고 또 기해년에 재차 이 일을 행했었는데, 모두 성명(成命)에 따른 것이고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인재를 뽑았기 때문에 추천한 자도 혐의가 없고 추천을 받은 자도 부끄러워할 것이 없었으니, 이것이야말로 본받아야 할 사례라 하겠습니다.
가령 상신이 인재가 부족한 것을 걱정했다면, 고사(故事)를 원용(援用)하여 성명을 얻은 다음에 동료 상신들 및 정사(政事)에 관여하는 신하들과 상의해서 가려 뽑았어야 옳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계책은 내지 못한 채 성명도 기다리지 않고 동료 상신들과 상의도 하지 않고서 개인적으로 표방하며 갑자기 진달드렸으니, 그의 본심이야 공(公)에서 나온 것이라 하더라도 끝내 한 사람의 개인적 영예로 돌아가는 결과를 면치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옳은 일이겠습니까. 게다가 이러한 때 이러한 정승마저 이런 일을 할 수가 있다고 한다면, 이러한 때가 아닌 다른 때에 가령 이러한 정승이 아닌 다른 정승이 이 예를 원용하여 늘 이런 일을 한다고 가정할 때, 이에 관계되는 뒤 폐단이 또 어떠하다고 하겠습니까.
사부(士夫)가 처신할 때에는 풍절(風節)을 중히 여기는 법입니다. 정승의 집에 출입만 해도 사람의 비난을 받게 마련인데, 더구나 신은 지난해와 올해 연달아 상신이 추천하는 대상 인물에 포함되었으니, 물의(物議)에 의해 비웃음당하는 일을 어떻게 면할 수 있겠습니까. 융통성 없는 성격을 고치기 어려워 지금 또 대신을 촉범(觸犯)하였는데, 신을 삭직(削職)하시는 동시에 신을 치죄(治罪)하여 국체(國體)를 보존케 하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양서(兩西)의 주군(州郡)에 황충(蝗蟲)의 재난이 발생했으므로 양도(兩道)로 하여금 중앙에 단(壇)을 설치하고 포제(酺祭)를 거행하게 하였다.
평안도에 큰물이 져 대동강(大同江)이 넘치면서 민간의 가옥 30여 호가 침수 되었다.
6월 6일 임인
집의 김만기(金萬基)가 안후열(安後說)의 파직을 청한 논계에 대해 내린 비답이 엄하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차를 청했는데, 처치하여 그의 출사(出仕)를 청했으나, 패(牌)에 응하지 않아 면직되었다.
황해도에 큰물이 졌다.
계후(繼後)하는 일과 관련된 간원의 논계가 이때에 이르러 정지되었다.
개성부(開城府)에 큰물이 졌는데 벽란도(碧瀾渡)의 산비탈이 무너져 주민 4인이 압사(壓死)했다.
좌의정 원두표가 상소하여 사직하고 또 아뢰기를,
"가령 신이 천거한 것이 적합하지 않다면, 아무리 성명(成命)을 기다려서 하고 동료 상신(相臣)들과 의논해서 한 것이라 하더라도, 신이 마땅히 잘못 천거한 죄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이를 트집잡아 허물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서필원(徐必遠)이 그런 말을 한 것은 현인을 쓰려는 인주(人主)의 마음을 저지하고 대신이 인재를 천거하는 길을 막는 것이니, 앞으로의 폐단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신이 어떻게 대략적으로나마 그의 말이 근거가 없다는 것을 변론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번에 건백(建白)드리면서 신은 적은 정성이나마 조금 바치는 것으로 여겼었는데, 이토록까지 사람에게 이해를 받지 못했으니, 어떻게 감히 태연하게 정승의 자리에 있겠습니까."
하면서, 이어 체직시켜 주기를 청하였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6월 8일 갑진
헌부가 이저(李竚)를 안율(按律)하여 정죄(定罪)토록 논계한 일을 이때에 이르러 따랐다.
6월 9일 을사
태백(太白)이 낮에 나타났다.
정계주(鄭繼胄)를 집의로, 박정(朴烶)을 장령으로, 홍주삼(洪柱三)을 수찬으로, 이유상(李有相)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6월 10일 병오
경상도 생원 김강(金鋼) 등이 상소하기를,
"성상께서 선왕을 이어 밝은 정사를 펼치시는 날을 당하여 사문(斯文)에 참의(僭擬)되는 일이 있게 되었고 보면, 감히 주제넘는다는 혐의만 피하려고 하면서 그에 대해 변론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사람을 논할 때에는 마땅히 그의 대절(大節)을 살펴 보아야 하는 법입니다. 이이(李珥)가 일찍 집안에서 불행을 당하여 선문(禪門)에 종사했다는 것은, 이이가 상소하여 스스로 그 사실을 말하였을 뿐만이 아니라 고(故) 상신(相臣) 이항복(李恒福)이 지은 그의 비문에도 ‘19세에 출가(出家)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논하는 이들이 이것을 만년(晩年)에 불가(佛家)와 노장(老莊)에서 빠져나온 장횡거(張橫渠)에게 비유하기도 합니다만, 횡거가 어찌 실제로 총림(叢林)에 들어간 적이야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성혼(成渾)은 재신(宰臣)의 반열에 오른 신분으로서 나라가 변란을 당했을 때 분문(奔問)하러 오지도 않았었으니, 나라가 어려울때 정성을 다 바쳐야 하는 신하의 의리에 비추어 볼 때 부끄러운 점이 있습니다. 아, 두 신하의 일이 일시적으로 불행했던 나머지 나온 일이라 하더라도, 인륜상으로나 변란에 대처하는 의리로 볼 때 결함이 없지 않은 것이고 보면, 어찌 후세에 인신(人臣)이 된 자나 인자(人子)가 된 자들에게 모범으로 삼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들의 학술을 말해 보건대, 이이는 오로지 자존(自尊)을 표방하고 선현(先賢)과 다른 입장을 표명하는 것으로 득력(得力)의 발판을 삼았으므로 선정신(先正臣) 이황(李滉)이 글을 보내 훈계하면서 이이의 병근(病根)을 모조리 이야기했었습니다. 그리고 성혼의 경우는 재주나 학술상으로 이이에게 훨씬 미치지 못하는 형편입니다.
그래서 선조 대왕(宣祖大王)께서 임인년에 지극히 엄하게 비답을 내리셨었고, 성학(聖學)이 고명하신 인조 대왕(仁祖大王)께서도 두 신하의 인품과 학술을 환히 아셨기 때문에 ‘도덕이 높지 못하고 결함이 있다는 비방이 있다.’고 을해년의 유소(儒疏)에 답하셨으며, 효종 대왕(孝宗大王)께서도 뒤따라 2조(祖)의 뜻을 받들어 홍위(洪葳)의 청을 엄하게 막으셨으니, 이는 참으로 인심이 불복(不服)하고 공의(公議)가 만족스럽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황상중(黃尙中)이란 자는 본도 사람으로서 일찍이 경인년에 두 신하를 변론해 배척하는 상소에 참여했었는데, 지금 와서는 얼굴을 바꾸고 다른 말을 하며 시의(時議)에 빌붙고 있습니다. 이랬다저랬다 하는 그의 행동이야 본래 거론할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마는, 일도(一道)의 선비들 모두가 한 마음으로 쏠려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있다고 속여 말하기까지 했으니, 그가 너무도 천청(天聽)을 기망(欺罔)했다 하겠습니다.
혹시라도 상중의 소를 인하여 팔로(八路)의 의견이 귀일되었다고 여긴 나머지 속히 종사(從祀)케 하자고 갑자기 청하기라도 할 경우, 구중 궁궐에 깊이 계신 전하께서 무슨 방법으로 그 실상을 아실 수 있겠습니까. 신들이 이 점을 두려워하여 발을 부르터가며 험한 산을 넘어 대궐에 와 호소드리니, 삼가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성묘(聖廟)에 종사(從祀)하는 일의 지중(至重)함을 염두에 두시고 2조(祖)와 성고(聖考)의 유훈(遺訓)을 체득하시어 사의(邪議)를 엄히 물리치심으로써 정학(正學)을 부지(扶持)하소서. 그러면 사문(斯文)에 다행이고 국가에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상이 상소한 내용을 잘 알았다고 답하였다.
6월 11일 정미
예조가 아뢰기를,
"지난해 10월 4일 간신(諫臣)의 진계(陳啓)에 따라, 지금 이후로는 인조조(仁祖朝)의 수교(受敎)에 의거해서 계후(繼後)한 뒤에는 친자(親子)를 낳아도 소후자(所後子)가 봉사(奉祀)케 하고 친자는 둘째 아들로 논할 것이며 이를 어긴 자는 엄히 밝혀 금단토록 했었으니, 이를 경외(京外)에 주지시켜 영원히 정식(定式)으로 삼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인조 조의 수교가 상세하지 못한 듯하니, 지금 이후로 새로운 사목(事目)을 따로 만드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6월 12일 무신
대사간 김수흥, 사간 남구만이 아뢰기를,
"이번에 신방(新榜)056) 을 분관(分館)할 때에 괴원(槐院)057) 의 관원들이 재차 회합을 가졌으나 논의가 일치하지 않아 끝내 권점(圈點)을 하지 못한 결과, 정부가 합좌(合坐)하던 날에도 신래(新來)를 간택(揀擇)하는 일을 폐지하게 하였습니다. 이 모두가 일찍이 있지 않았던 일로서 이것만도 놀랍기 그지없는데, 심지어는 합좌하여 개강(開講)하던 때 이미 강석(講席)에 들어왔으면서도 신래를 간택할 수 없다는 것을 혐의로 삼아 서로 이끌고 일어나 가버리기까지 하였으니, 제멋대로 하는 방자한 습성을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괴원에서 권점했을 때의 행수 장무관(行首掌務官)과 정부에서 합좌했을 때 앞질러 먼저 일어나 가버린 관원을 모두 나문(拿問)하여 정죄(定罪)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일상(李一相)을 대사헌으로, 정재숭(鄭載嵩)을 정언으로 삼았다.
강원도 영서(嶺西)에 큰물이 지고, 전남도에 여역(癘疫)이 크게 치성했다.
6월 14일 경술
태백(太白)이 낮에 나타났다.
경기 진사 박지상(朴之相) 등이 상소하여 양신(兩臣)을 종사(從祀)할 것을 청하고, 이의를 제기하며 소장을 진달한 사람들을 공척(攻斥)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경상도에 큰물이 졌다.
6월 15일 신해
지평 소두산(蘇斗山) 등이 아뢰기를,
"환시(宦侍)의 직분이란 그저 소제(掃除)하는 일이나 맡는 것으로서 외조(外朝)의 관원과는 사체(事體)가 현격히 다릅니다. 그런데 전일 내관(內官) 최대립(崔大立)은 함사(緘辭)에서 경상 감사 이상진(李尙眞)을 배척하면서 심지어는 ‘사의(辭意)가 장황하고 잔뜩 성을 내며 공척(攻斥)하였다.’고 하는 등 모욕하는 뜻을 현저하게 드러내기까지 하였으니, 거리낌없이 방자하게 군 것이 어떠하다 하겠습니까. 이런데도 징계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점점 교만하고 방자하게 구는 폐단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될 것이니, 먼저 파직한 뒤에 추고하소서."
하니, 따르지 않고, 이르기를,
"사의(辭意) 등 여덟 글자는 날조해 낸 것이 아닌 만큼, 나는 그가 거리낌없이 방자하게 군 것인지를 모르겠다."
하였다.
이에 앞서 내시부(內侍府)가 본부의 노비에 관한 일로 차노(差奴)를 내려 보내면서 경상도에 행관(行關)058) 한 일이 있었는데, 이상진이 치계(馳啓)하기를,
"《법전(法典)》을 보건대 내시부는 단지 음식을 감독하고 명을 전하고 문을 지키고 청소하는 임무만을 관장할 뿐 외조(外朝)의 정사에 간섭하는 일은 없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경외(京外)의 각 아문과 문서를 통하는 규정이 전혀 없는데, 이것이 조종조(祖宗朝)의 성헌(成憲)인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전에 없었던 일을 새로 만들어 사체(事體)를 손상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는데, 이는 한때 아문의 수치가 될 뿐만 아니라 실로 뒷날 무궁한 폐단을 여는 일이 될 것입니다. 또 내시부는 인신(印信)을 통용하는 관사(官司)에 속해 있지 않은데, 도대체 어느 때부터 인신을 쓰기 시작한 것입니까. 이는 법의 테두리를 벗어난 일로서 언뜻 보기만 해도 너무 놀랍기에 감히 이렇게 치계합니다. 그리고 그 공사는 회답할 성질의 것이 못되기에 법부(法府)에 싸서 보내면서 아울러 이문(移文)했으니, 법부로 하여금 법에 의거하여 품처(稟處)토록 하소서."
하니, 상이 그 장계(狀啓)를 헌부에 내렸다. 헌부가 추고를 받아야 할 데에 해당된다는 이유로 최대립을 추고할 것을 청하였는데, 대립이 함답(緘答)하기를,
"경상 감사의 사의(辭意)가 장황한데 잔뜩 성내며 공척(攻斥)하고 있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조종조에서 관직을 처음 설치할 때 소각사(小各司)와는 다르게 대우하여 내시부라고 칭했고 보면 부(府)라는 글자의 의미 배후에는 분명히 뜻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인신(印信)을 성화(成化)059) 7년060) 에 새긴 것으로 보아 유래가 오래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체의 궁부(宮府)가 똑같이 2품(品)의 인신을 쓰고 있고 이를 관장하고 있는 사람의 직질(職秩)도 2품인데, 서로 등급이 같은 아문끼리는 통관(通關)061) 하는 것이 관례입니다. 따라서 비록 호조나 병조라 하더라도 통관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렇다면 조종조에서 특별히 노비 50구(口)를 하사하셨고 을미년에 추쇄(推刷)할 당시 도감이 1백 5구를 쇄출(刷出)하여 성적(成籍)한 뒤 지급했는데, 만약 더 태어났거나 죽었거나 하는 일이 있을 경우, 어찌 이문(移文)하여 추핵(推覈)하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며, 세 차례에 이르기까지 항거(抗拒)하였다. 헌부가 최대립의 직첩(職牒)을 환수하고 나아와 추고받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고, 이르기를,
"각조(各曹)와의 통관 여부 및 노비를 추쇄한 일이 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 사실대로 조사에 내어 품처(稟處)토록 하라."
하였다. 헌부가 또 아뢰기를,
"문서를 가져다 조사해 보건대 내시부가 각조(各曹)와 통관해왔으며, 추쇄안(推刷案)도 본부의 노비 문서 속에 기재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전(大典)》의 예전(禮典)을 상고해 보건대 2품 아문은 곧장 행이(行移)하고 나머지는 모두 속사(屬司)에 보고토록 되어 있는데, 또 이전(吏典)에 기재된 것을 보면 내시부는 품계가 없는 아문에 속해 있습니다. 대체로 통관하는 규식(規式)은 실로 아문의 고하(高下)에 관계되는 것이지 시임관(時任官)의 품질(品秩)이 어느 정도냐에 관계되지는 않으니, 내시부가 각사(各司)와 통관하는 규정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실로 잘못된 규례(規例)라 할 것입니다. 전계(前啓)한 대로 하소서."
하니, 상이 대립의 죄를 용서해 주도록 명하였는데, 의논하는 이들은 이때부터 환시(宦寺)가 조사(朝士)를 능멸하기 시작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경기 수사(京圻水使) 조유(趙猷)는 곤수(閫帥)의 직임에 적합하지 않으니, 체차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황해도에 큰물이 져 29명의 익사자가 발생했는데, 상이 본도로 하여금 휼전(恤典)을 거행토록 하였다.
이시영(李時榮)은 송화(松禾) 사람이다. 시영의 아들이 물에 빠져 죽을 위기에 처하자 시영의 어미가 구하려다 또 빠졌는데, 시영이 이 말을 듣고 급히 달려와 어미를 구하다 자신도 물에 빠져 죽었다. 조(祖)·자(子)·손(孫) 3세(世)가 같은 날 죽었으므로 이를 듣고 슬퍼들 하였는데, 예조가 정문(旌門)하여 그 효심을 드러내게 하니, 따랐다.
6월 16일 임자
지평 소두산(蘇斗山) 등이 아뢰기를,
"성상의 건강이 좋지 않아 상하가 걱정하느라 겨를이 없으니, 의관(醫官)들로서는 출입하며 진찰할 때 한마음으로 경건하고 근실하게 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데 의관 조징규(趙徵奎)는 술에 취한 채 입시했으니, 너무도 패만(悖慢)하고 불경스러웠다 할 것입니다. 나문(拿問)하여 정죄(定罪)하소서."
하니, 따르지 않았다.
상이 대신 및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좌상(左相)이 일찍이 호남의 감사로 있었고 또 전주 부윤(全州府尹)을 지냈기 때문에 물정(物情)을 자세히 아는데 늘 말하기를 ‘부윤을 다시 설치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고, 조귀석(趙龜錫)이 현재 부윤을 겸하고 있는데 역시 다시 설치할 것을 계청하고 있으니, 감사가 부윤을 겸하는 데 따른 폐단이 염려되니, 추수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설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형조 판서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강상 죄인(綱常罪人)이 있을 경우 그가 출생한 고을의 호(號)를 강등시키고 관원을 파직시키는 것이 관례화되었습니다만, 율문(律文)에는 없는 일입니다. 선묘조(宣廟朝) 정미년에 대신에게 의정(議定)토록 하였는데 그때 선묘께서 삼강 죄인도 똑같이 적용해서 시행하라고 분부하셨기 때문에 그대로 영갑(令甲)으로 굳어진 것이었습니다.
이번에 양구(楊口)에서 지아비를 죽인 죄인의 경우, 스스로는 포천(抱川)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포천 사람들은 본읍 태생이 아니라고 하면서 소장을 올려 변론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본조에서 청리(聽理)를 허락하지 않았는데, 지금 또 와서 정소(呈訴)하기를 ‘그녀의 어미가 자기 자식은 금화(金化) 태생이라고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대체로 읍호(邑號)를 강등시키는 것은 밝게 교화를 못 시켰기 때문이니, 죄인이 현재 거주하는 고을을 해당시켜야 할 듯합니다."
하고, 태화도 허적의 말이 옳다고 하니, 따랐다.
함경도에 큰물이 졌다.
6월 17일 계축
사간 남구만(南九萬), 헌납 이민서(李敏叙)가 늦은 시각에 전계(傳啓)한 잘못이 있다는 이유로 인피(引避)하였다.
헌부의 조율 공사(照律公事)에 글자를 빠뜨린 곳이 있었으므로, 상이 그대로 정원이 봉입(捧入)한 것을 꾸짖었는데, 정원이 헌부의 하리(下吏)를 수금(囚禁)하고 치죄(治罪)하기를 청하였다.
6월 18일 갑인
남노성(南老星)을 병조 참판으로, 이경휘(李慶徽)를 우부승지로, 민점(閔點)을 동부승지로 삼았다.
지평 박세당(朴世堂)·소두산(蘇斗山)이 인피하기를,
"조율 공사(照律公事)에 누락된 글자가 있다고 정원에 분부를 내리셨기 때문에 동료가 이미 인피하였는데, 이 때문에 하리(下吏)가 또 현재 수금(囚禁)되어 치죄(治罪)를 받고 있으니, 태연히 있을 수 없습니다. 체직시켜 주소서."
하고, 대사간 김수흥(金壽興)이 ‘처치가 타당함을 잃었다.’는 이유로 역시 인피하며 체차시켜주기를 청하고, 모두 물러가 물론(物論)을 기다렸다. 헌납 이민서(李敏叙)가 처치하기를,
"한 글자를 글에서 빠뜨린 것은 본래 대단한 일도 못되는데 헌부의 하리를 가두고 다스리다니 이는 실로 전에 없던 일입니다. 대각(臺閣)의 사체(事體)가 일반 관료와는 다른만큼 비록 잘못이 있더라도 스스로 탄핵하게 허락해주고 남이 조절(操切)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그렇게 한 데에는 본래 뜻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정원이 체례(體例)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앞질러 하리를 가둘 것을 청하였으니 참으로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한 글자를 빠뜨린 실수 때문에 경솔하게 언관을 체차시킨다는 것은 국가의 체면으로 볼 때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인 만큼 당초 출사시키기를 청한 것에는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모두 출사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6월 19일 을묘
도승지 남용익(南龍翼), 좌승지 서필원(徐必遠), 우승지 오정위(吳挺緯)가 아뢰기를,
"삼가 간원이 처치한 계사(啓辭)를 보건대 실로 경악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법부(法府)의 조율 공사야말로 지극히 중한 일로서 한 글자가 있고 없는 데 따라 경중(輕重)이 관련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글자만 빠뜨려도 대관(臺官)이 인피하여 체직되는 것이 본래 전부터 내려 오던 규정인만큼 그렇게 한 뜻이 얼마나 엄절(嚴截)한지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근래 자주 체차시키는데 따른 폐단이 있었던 까닭에 상께서 체차시키지 말라는 분부를 내리셨는데 이것만도 고례(古例)에 비교해 보면 해이해진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번에 글자를 빠뜨린 것이 대단한 잘못은 아니라 하더라도 일단 성교(聖敎)를 수고스럽게 해드린 이상 본원의 도리로 볼 때 어떻게 감히 한 말씀도 올리지 않고 입을 다물 수 있었겠습니까. 본원에서 일찍이 품정(稟定)한 일이 있었고 보면 곧장 수금(囚禁)케 했어도 안 될 것이 없는데, 이 일이 법부와 관계되기 때문에 가두어 다스리기를 계청(啓請)했던 것이니, 서로 공경하는 뜻이 곡진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거꾸로 말을 늘어놓으며 온 힘을 기울여 배척하고 있으니, 이 점을 신들은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왕명을 출납하는 지위에 있으면서 뜻밖에도 이런 배척을 받은 이상 일이 국가의 체면과 관련되기에 감히 진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잘못 쓴 서리(書吏)를 가두어 다스리는데, 이치상 안 될 일이 뭐가 있는가."
하였다.
헌납 이민서(李敏叙)가 인피하기를,
"신이 대청(臺廳)에 나아와서 정원의 계사(啓辭)를 듣건대, 신이 처치를 잘못하였다고 배척하였기에 신이 삼가 놀라운 느낌이 들었습니다. 정원에 규검(糾檢)하는 책임이 있기는 합니다만, 대간에 대해서는 사체(事體)가 자별(自別)하기 때문에, 법사(法司)의 공사(公事)에 혹 잘못된 일이 있다 하더라도, 대간에게는 추찰(推察)하는 벌을 적용하지 않는 법이고, 가두어 다스리는 일을 하리(下吏)에게 가하지 않는 법입니다. 이는 대체로 특별히 너그럽게 대하고 예우하기 위해서이니, 이것이야말로 국조(國朝)에서 대간을 대우해 온 아름다운 뜻인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정원이 이기려는 마음이 앞선 나머지 법례(法例)를 허물어뜨린 채 그만 법부의 하리를 가두어 다스리면서 서로 공경하는 뜻이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도리란 말입니까. 그 거조가 실로 뒤 폐단과 관계가 되겠기에 신이 처치할 때 대략 곡절을 진달했던 것인데 이렇게까지 배척을 받았으니 그대로 자리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체차시켜 주소서."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이민서가 재차 인피하기를,
"신이 일단 성상소(城上所)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대청(臺廳)에 나아갔다가 졸지에 정원의 공척(攻斥)을 받았으므로 인피하며 체차시켜 주기를 청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성비(聖批)에 사직하지 말라고 분부하셨고 전계(傳啓)하는 일도 중하기에 감히 물러가 물론(物論)을 기다리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잇따라 정원에 내리신 비답을 보건대 ‘잘못 쓴 하리를 가두어 다스린다고 해서 안 될 일이 뭐가 있는가.’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신의 처치가 과연 정당함을 잃는 결과를 면치 못하게 되었으니, 체차시켜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이민서가 정원을 탄핵할 목적으로 탄핵하는 글을 소매 속에 넣고 대청에 나아왔다가, 정원에서 계사를 올려 매우 준엄하게 배척한 사실을 알고는, 이에 먼저 인피하였던 것인데, 비답이 내려진 뒤에도 물러가 물론을 기다리지 않았던 것은 대체로 정원을 장차 탄핵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승지 서필원(徐必遠)이 비답을 이민서에게 전한 뒤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헌납이 물러가 물론을 기다리지 않는 것을 보니 우리들도 장차 탄핵을 받을 모양이다."
하였는데, 마침 정원의 계사에 대한 비답이 민서가 아직 전계(傳啓)하기 전에 내려오자, 필원이 하리를 급히 보내 양사(兩司)에 이 사실을 널리 알리게 하였다. 그래서 민서가 이렇게 재차 인피하게 되었던 것이라고 한다.
6월 20일 병진
태백(太白)이 낮에 나타났다.
대사간 김수흥(金壽興), 정언 송창(宋昌)이 아뢰기를,
"헌부의 하리(下吏)를 가두도록 청한 것이야말로 전에 없던 일이었고, 글자 한자를 빠뜨린 것이 본래 체차되어야 할 잘못도 아니었고 보면 조사(措辭)하여 처치한 것은 참으로 제대로 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정원이 진계(陳啓)하여 공적(攻斥)한 것이 뜻밖의 일이었던 만큼, 미안한 분부를 내리셨다해도 별로 타당성을 잃었다는 혐의를 가질 것이 없으니, 이민서를 출사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르면서 이르기를,
"글을 잘못 쓴[誤書] 하리를 가둔다고 해서 사체에 손상될 것이 없는데, 이민서가 어제 인피하면서 정원에 비답한 분부를 인용하며 ‘오서(誤書)’라는 두 글자를 슬쩍 빼버렸으니 그 의도를 내가 실로 모르겠다."
하였다. 김수흥 등이 또 아뢰기를,
"대각의 사체는 일반 관료와는 다릅니다. 따라서 존엄한 인주(人主)로서도 그들을 예우하고 있는데, 더구나 정원이 어떻게 어떤 일을 빌미로 대각을 능멸하면서 하리를 가두어 다스리라고 청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리고 이번의 조율 공사(照律公事)에 이미 빠진 글자가 있었는데도 정원의 해방(該房)이나 해리(該吏)가 당초 잘 살피지 못한 채 봉입(捧入)하였다가 전교(傳敎)가 있으신 뒤에야 비로소 알았고 보면, 원래 대죄(待罪)하기에 겨를이 없었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그만 거꾸로 사체를 돌아보지도 않고 신규(新規)를 새로 만들어 낸 다음 마치 차지(次知) 정도를 가두는 것처럼 헌부의 하리를 가두도록 청하였으니, 놀랍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당해 승지를 중하게 추고하소서."
하니,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기전(畿甸)의 민역(民役) 가운데 가장 시급히 변통해야 할 것은 전세조(田稅條) 공물(貢物)에 따른 폐단입니다. 사도시(司䆃寺)의 경우에는 경미(粳米)·중미(中米)·황대두(黃大豆)·황두(黃豆) 등의 명색(名色)이 있고, 봉상시(奉常寺)의 경우에는 경미·장두(醬豆) 등의 명색이 있는데, 수봉(收捧)하는 정식(定式)을 보면 7, 8갑(甲)062) 씩 받기도 하고 3, 4갑씩 받기도 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각 공물 주인(貢物主人)들이 기세를 부리며 마구 징수하여 1승(升)의 전세를 내는 자가 8, 9승을 더내고 1두(斗)를 내는 자가 8, 9두(斗)를 더 내는 형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족하게 되는 걱정이 있기 때문에, 각읍(各邑)이 매우 감당키 어려운 것을 안타깝게 여긴 나머지, 각 방면별로 돌아가며 정한 액수를 내게 함으로써 그 고통을 분담토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한번 그 역(役)을 치르고 나면 그 방면의 백성들이 실업(失業)하지 않는 경우가 없는데, 제향(祭享)과 어공(御供)에 관계된 일이라서 섣불리 고치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이번에 양전(量田)한 뒤에는 전결(田結)이 증가하여 세입(稅入)도 배나 늘어날 것이고, 지금 이후로는 각읍에 분정(分定)하지 말게 하고, 해조가 전세로 받는 미두(米豆)와 전에 정했던 갑수(甲數)의 곡식을 합쳐 각사(各司)에 옮겨 보낸 뒤, 공물 주인에게 나누어 주어 관례대로 진공(進供)케 하소서. 그러면 백성들이 이보다 더 실질적으로 혜택을 입는 일이 없을 것이니, 해조로 하여금 품처(稟處)하여 변통케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경기 지방에서 물선(物膳)을 봉진(封進)하도록 규정을 만들어 시행해 온 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니 갑자기 변통시키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선혜청(宣惠廳)이 처음 설립될 당시에는 소정(所定)의 공물가(供物價)가 넉넉했다고 할 수 있는데, 근년 이래로 산과 바다의 생산물이 부족해진 탓으로 자연히 물가가 뛰어 올라 지급되는 소정의 공물가로는 마련하기에 부족한 실정입니다. 이런 까닭에 공물 주인들이 지급된 공물가가 넉넉하지 못한 나머지 심지어는 집을 팔고 파산하는 경우까지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에 어쩔 수 없이 본읍(本邑)에 가서 호소하게 되면, 본읍 역시 보충해 지급하기가 어려운 까닭에 혹 민결(民結)에서 수봉(收捧)하는 일을 면치 못하게 되는데, 이는 과외(科外)로 징수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양전(量田)한 뒤에 미곡을 거두어들이고 얼마나 남을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해청(該廳)에서 가미(價米)를 보태 지급한다 한더라도 역시 계속 대기에는 어려운 걱정이 있습니다. 그런데 각읍에 할당된 상평청(常平廳) 곡물의 모미(粍米)가 해마다 불어나고 있으니, 이 곡식을 가지고 세입을 헤아려서 첨가해 지급토록 하고 공물 주인들로 하여금 해읍(該邑)에 가서 받도록 하는 한편, 각읍에서 과외(科外)로 민결에서 징수하는 폐단을 철저히 금지시키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공물 주인도 그런대로 파산하는 걱정을 면할 수 있고 경기 백성에게도 과외로 역(役)을 부담하는 일이 없어질 것이니, 해청으로 하여금 품정(稟定)하여 변통케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응교 이민적(李敏迪)과 수찬 이유상(李有相)이 상차하여,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도덕과 학문을 칭송하면서 종사(從祀)를 원하는 다사(多士)의 청을 따르기를 청하는 동시에, 현인을 모독한 김강(金鋼)의 죄를 다스릴 것을 청하고, 또 노기(盧杞)와 여혜경(呂惠卿)에까지 비유하여 홍우원(洪宇遠)을 공척(攻斥)하면서063) 양사(兩司)의 계사(啓辭)를 따르기를 청하였는데, 상이 들어주지 않았다.
승지 서필원(徐必遠) 등이 상소하여 대간을 배척하면서 체직시켜 주기를 청하였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6월 21일 정사
대사간 김수흥(金壽興) 등도 서필원의 상소에서 배척을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시켜 주기를 청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는데, 수흥 등이 물러가 물론(物論)을 기다렸다.
대정(大政)이 있었다. 송준길(宋浚吉)을 대사헌으로, 박장원(朴長遠)을 판윤으로, 이진(李𥘼)을 강원 감사로, 이경휘(李慶徽)를 부제학으로, 이경억(李慶億)을 승지로, 민유중(閔維重)을 부응교로, 이익(李翊)을 부교리로, 여성제(呂聖齊)를 부수찬으로, 이경과(李慶果)를 장령으로, 장선징(張善瀓)·남이성(南二星)을 지평으로, 이단석(李端錫)을 정언으로, 이민서(李敏叙)를 이조 좌랑으로, 김익렴(金益廉)을 헌납으로 삼았다.
진사 이선악(李善岳) 등이 상소하여 김강(金鋼)·남중유(南重維)를 공척(攻斥)하고 그들의 상소를 군소배(群小輩)들의 사설(邪說)이라고 지목하면서 양신(兩臣)을 종사(從祀)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번거롭게 소란을 일으키지 말라고 답하였다.
사간 남구만(南九萬)이 처치하여 김수흥(金壽興)과 송창(宋昌)을 출사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6월 23일 기미
전라도에 큰물이 졌다.
6월 25일 신유
이은상(李殷相)을 승지로, 송시철(宋時喆)을 헌납으로, 이지무(李枝茂)를 장령으로, 윤우정(尹遇丁)을 지평으로 삼았다.
충청도 아산(牙山)·신창(新昌)·홍양(洪陽) 등 읍에 3일 간 해일(海溢)이 일어났다.
6월 28일 갑자
예조가 아뢰기를,
"기청제(祈晴祭)를 금방 지냈는데 또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라고 청하는 것이 실로 미안하기는 합니다만, 극비(極備)064) 와 극무(極無)065) 에 따라 수시로 변통시켜야 할 것입니다. 비가 계속 내리다가 이제는 이토록 혹독하게 가뭄이 들어 벼곡식이 누렇게 말라죽고 있으니, 기우제를 행하는 일을 늦출 수 없습니다. 응당 날을 가리지 말고 제사를 지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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