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일 병인
헌부가 홍우원(洪宇遠)을 삭출(削黜)066) 할 것을 청하니, 상이 파직만 시키도록 하였다. 또 아뢰기를,
"지난번 괴원(槐院)067) 에서 분관(分館)시킬 때에 본관(本館)의 관원들이 제좌(齊坐)하여 가부를 논한 결과 논의가 귀일되었는데, 그중 한 사람이 자기 의견만 치우치게 고집하여 두 번이나 파좌(罷坐)하고 말았으니, 이는 실로 전에 없던 일입니다. 장무관(掌務官) 이하 14원(員)이 이미 이 때문에 죄를 받았고 보면, 당초 소란을 야기시킨 장본인만 죄를 면하기는 이치상 어려운 일이니, 적발하여 죄를 매기게 하소서. 이와 함께 본원으로 하여금 즉시 권점(圈點)하게 하되, 여전히 사정(私情)을 따라 소란을 일으켜 끝내 파좌케 하는 자가 있으면 그에게 죄를 매기도록 승전(承傳)을 받들어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적발해서 죄를 매긴다면 실로 명백한 처사와는 거리가 있는 듯하다. 승전을 받드는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정언 이단석(李端錫)이 인피하기를,
"동료가 전적 조세휘(趙世彙)를 탄핵할 목적으로 석상(席上)에서 발론한 뒤 집에 있는 동료에게 간통(簡通)하였는데, 신은 성상소(城上所)의 일로 대청에 나가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동료의 의견이 차이가 나 일치되지 않았습니다만, 신은 전계(前啓)에는 물론 이번에도 빠지고 말았으니, 체차시켜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승지 서필원(徐必遠) 등이 대간의 탄핵을 받았다는 이유로 소장을 진달하여 면직되었다.
함경도 단천(端川)에 큰물이 져 민간의 가옥이 침몰되고 떠내려갔으며 익사자도 12인이나 발생했다. 길주(吉州)에서 경흥(慶興)까지의 9개 고을에 황충(蝗蟲)의 해가 발생했다.
7월 2일 정묘
정언 송창(宋昌)이 인피하기를,
"전적 조세휘(趙世彙)는 평소 행동을 단속치 않아 향당(鄕黨)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는데, 무려 반년 동안이나 선세(先世)의 신주(神主)를 텅 빈 집에 내버려두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조신(朝臣)의 수치라 할 만하기에 신이 사판(仕版)에서 삭제하자는 뜻으로 석상(席上)에서 발언했더니, 동료들의 의논도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집에 있는 동료에게 간통(簡通)했더니, 그의 의견이 모순되어 끝내 이의를 제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아, 이 일이 등한히 볼 것도 아니고 충분히 듣지 못한 것도 아닐 텐데, 동료는 매번 신중하게 처리해야 한다고 핑계되면서 시간을 끌려고만 하고 있습니다. 신이 너무도 경시를 당했으니, 체차시켜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대사간 김수흥(金壽興)이 아뢰기를,
"신은 조세휘에 대해서 평소 잘 모르지만 동료가 그토록 명백하게 말하기에 서로 의논해 소초(疏草)를 작성했습니다. 그런데 사간 남구만(南九萬)에게 간통(簡通)했더니, 그가 누누이 대답한 내용 모두가 억울하게 된 것이라며 해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신이 이에 의심스런 마음이 들었으나 ‘뒷날 면의(面議)하면 사실을 알게 되겠지.’라고 여기고서 재차 왕복하였던 것인데, 송창이 끝내 의견을 바꾸지 않고 인피까지 하면서 무시당했다고 말을 했으니, 체차시켜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사간 남구만(南九萬)이 인피하기를,
"어제 동료가 ‘조세휘가 신주를 방치해 두었다.’는 한 조목을 가지고 사판에서 삭제하는 율(律)을 적용하려 하면서 신에게 간통해 왔었습니다. 그런데 신이 세휘의 이웃집에 사는 사부(士夫)의 말을 듣건대 ‘세휘가 올봄에 신은(新恩)068) 으로 소분(掃墳)하기 위해 고향에 내려가면서 계집종 하나를 남겨두어 집을 지키게 하였는데 그가 고향에 내려간 뒤에 그 집에서 전염병에 걸린 관계로 오래도록 올라오지 못하고 서울 집을 지키던 계집종마저 도망쳤으므로 그 친족이 신주를 그의 집에다 옮겨 두었던 것이다.’ 하였습니다. 정말 이 말대로라면 동료의 말과는 크게 틀리기에 다시 자세히 알아보고 신중하게 처리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동료가 기필코 자기 식대로 하려고 하면서 갑자기 인피까지 하고는 심지어 ‘시간을 끌려 하고 있다.’고 신을 배척하기까지 하였으니, 체차시켜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7월 3일 무진
장령 이지무(李枝茂), 지평 윤우정(尹遇丁)이 아뢰기를,
"승문원 부정자 이옥(李沃)은 뭇 의론이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 홀로 자기 의견을 고집한 나머지 두 차례나 파좌(罷坐)케 하였으니, 사정(私情)을 따르고 공도(公道)를 무시한 그 정상만도 이미 놀랍기 그지없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본원의 많은 관원들이 이미 이 때문에 죄를 받은 상황에서 맨 처음 소란을 일으킨 장본인인 이옥만은 유독 죄를 면하고 있으니,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나문하여 정죄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간통(簡通)을 기다리다가 끝내 논계에 빠지게 된 것은 형세가 그러했던 것이고, 등한시할 일이 아닌만큼 들은 즉시 논핵하려 한 것은 직분에 따른 일이고, 서서히 면의(面議)할 때까지 기다리려 한 것은 신중히 처리하려는 뜻이었고, 들은 내용이 서로 틀린 이상 자세히 알아보려 한 것은 체모에 손상될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니, 이단석(李端錫)·송창(宋昌)·김수흥(金壽興)·남구만(南九萬) 모두 출사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서장관(書狀官)이 병으로 뒤처지게 되었고 보면 일행을 단속하는 책임은 부사(副使)가 지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일행 중에 금물(禁物)을 가지고 있다가 청(淸)나라 사람들에게 붙잡힌 일이 있게 되었으니,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부사 이만(李曼)을 파직한 뒤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는데, 몇 차례 아뢰고 곧 정지하였다.
예관(禮官)을 보내 충렬공(忠烈公) 고경명(高敬命)과 문열공(文烈公) 조헌(趙憲)과 박사(博士) 유팽로(柳彭老)에게 제사지내게 하고, 순의단(殉義壇)에 사액(賜額)하였는데, 단은 금산군(錦山郡)에 있었다. 세 사람은 바로 임진 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운 자들이었다.
상이 의관(醫官)에게 명하여 들어와 진찰하도록 하고, 수상 정태화(鄭太和) 및 주사(籌司)069) 의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태화가 상의 안색을 살펴볼 수 있게 해주기를 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얼마 뒤에 소환(小宦)이 나아와 분판(粉板)에 써서 아뢰었는데, 부제학 이경휘(李慶徽)가 청대(請對)한다는 내용이었다. 상이 인입(引入)토록 명하고, 급히 하문하기를,
"무슨 말을 하고 싶은가?"
하니, 경휘가 말을 더듬으며 곧장 대답을 하지 못하다가 한참 뒤에야 아뢰기를,
"김강(金鋼) 등이 상소하여 양현(兩賢)070) 을 무함하여 헐뜯은 것이야말로 패망스럽기 그지없는 일이었으니 통렬히 시비를 구별해 주고 호오(好惡)를 분명히 보여주셨어야 마땅한데 ‘알았다.’고만 답하셨고, 옥당과 유생의 변무소(辨誣疏)에 대해서도 명확히 변별하여 통렬히 배척하는 분부를 내려주시지 않았으며, 심지어 민정중(閔鼎重)의 소에 대해서는 오래도록 비답을 내려주시지도 않고 계십니다. 이에 뭇사람들이 성상의 의도를 알지 못한 채 모두들 답답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하자, 상이 소리를 높여 이르기를,
"내가 언제 김강 등의 말을 옳다고 한 것이 있었는가. 김강을 옳다고 하지 않았고 보면 관학(館學)에서 소란스럽게 변무(辨誣)하는 것이 또한 수고로운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다사(多士)의 소에 대해서는 선조(先朝)에서도 통렬히 배척하지 않았었다. 선조에서 종사(從祀)를 허락치 않았던 것은 양신(兩臣)의 도덕이 부족하다고 여겨서가 아니라 신중하게 처리하려는 뜻에서였다. 인조조(仁祖朝)나 효묘조(孝廟朝) 때의 구례(舊例)로 말하더라도 관학에서 소를 올린 것이 다섯 차례를 넘지 않고 그쳤었는데, 지금은 열 번 이상이나 소를 올리고 있다. 여러 번 소를 올리면 요청대로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러는 것인가? 너무도 외람스러운 일이다. 청대했기에 무슨 특별한 말이나 나올까 하고 들어 보았는데, 이것은 가소롭기만 하다."
하였다. 경휘가 아뢰기를,
"사정(邪正)을 변별하는 일이야말로 치란(治亂)과 직결되기 때문에 감히 진달드린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지 않고 혼자서 낮은 목소리로 말하기를,
"괴롭고 고달픈 일이다."
하자, 경휘가 풀죽은 기색으로 물러 나갔다.
금군(禁軍)을 대상으로 삭시사(朔試射)071) 를 행하여 기추(騎蒭)에서 1차에 5발 맞춘 자와 편전(片箭)에서 3시(矢) 모두 적중시킨 한 사람을 직부 전시(直赴殿試)토록 하였는데, 병판 김좌명(金佐明)의 청을 따른 것이었다. 약방 도제조 이경석(李景奭)이 나아가 아뢰기를,
"《시경(詩經)》에 ‘대부가 일찍 물러 나와 임금을 피로하지 않게 한다.’ 하였는데, 신하들이 진달드리는 것을 보건대 유사가 할 일에 불과합니다. 현재 조용히 조섭하시는 중이고 또 이런 혹서기를 당했으니, 신의 생각에는 물러나가 수상과 상의해서 품처하는 것이 옳을 듯 싶습니다."
하니, 상이 빙그레 웃고 답하지 않았다.
정만화(鄭萬和)·조한영(曺漢英)을 승지로, 남노성(南老星)을 도승지로, 이제형(李齊衡)을 헌납으로 삼았다.
동·서 활인서(活人署)의 전염병 환자들에게 양곡을 지급하였다.
7월 4일 기사
정언 송창(宋昌)이 조세휘(趙世彙)의 일을 가지고 또 인피하였는데, 조세휘를 더욱 강력하게 논하면서 의심할 여지없이 확실한 일이라고까지 말하고, 또 ‘구해주려는 이야기만을 치우치게 믿고 오히려 확실한 말을 의심한다.’고 남구만(南九萬)을 배척하였으며, 또 김수흥(金壽興)을 공격하기를 ‘처음에는 따르더니 나중에는 또 딴소리를 했다.’고 하고, 또 처치를 모호하게 했다는 이유로 헌부를 배척하면서 체차시켜 주기를 청한 뒤,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이에 사간 남구만, 대사간 김수흥 역시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대사헌 송준길(宋浚吉)이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나아오지 않았다.
영중추부사 이경석(李景奭)이 한재(旱災)가 너무 참혹하다는 것으로 상차(上箚)하면서 심리(審理)할 것과 구언(求言)할 것을 청하고, 또 민원(民怨)과 민역(民役) 중에서 관대히 하고 풀어줄 것들을 도신(道臣)들에게 하유하여 간략하게 뽑아 계문(啓聞)하게 한 뒤 즉시 시행하도록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답하였다.
"경이 올린 차자의 내용을 살펴보니, 병든 가운데에서도 애태우며 걱정하는 마음이 마치 갈수록 더 뜨거워지는 불길같이 느껴졌다. 심리하는 일은 유사로 하여금 즉각 거행토록 하겠다."
7월 5일 경오
장령 이지무(李枝茂)와 지평 윤우정(尹遇丁)이 송창(宋昌)으로부터 처치를 모호하게 했다는 배척을 받았다는 이유로 모두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집의 정계주(鄭繼胄)가 처치하여 송창(宋昌)·남구만(南九萬)·김수흥(金壽興)은 체차시키고 이지무(李枝茂)·윤우정(尹遇丁)은 출사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따르면서도 ‘도무지 입락(立落)하는 뜻이 없다.’고 하였다.
집의 정계주가 상으로부터 도무지 입락하는 뜻이 없다는 분부를 받았다는 이유로 역시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응교 이민적(李敏迪), 부응교 민유중(閔維重) 등이 수재(水災)와 한재(旱災) 때문에 상차하여 진계(陳戒)하였는데, 그 대략에,
"지금 성상의 청명한 지기(志氣)가 오랜 병마에 시달리게 되고 보니, 아랫사람들이 시무(時務)를 처리하는 것보다 한시바삐 성상을 보호할 걱정에 쌓여 있습니다. 이 때문에 상하가 날마다 하는 일도 없이 위망(危亡)에 이를 재난이 닥쳐도 태평하여 조금도 괴이하게 여기지 않으며, 고약하게도 안일에 젖어 습관처럼 지내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올라온 소장(疏章)에 대해 보통으로 응수해 줄 것도 날로 지체되기만 하고 관례적으로 인접(引接)하시는 일을 삼사(三司)에게조차 폐하게끔 되었으니, 계속 이런 식이 될 경우 수성(修省)하여 보존되기를 도모할 수 있는 희망은 전혀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 위망에 이를 형세를 깊이 살피시고,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극진히 하시어, 홀로 계실 때에도 늘 상제(上帝)와 귀신이 위에서 지켜보는 것처럼 행동하시고, 재해(災害)가 이를 때면 다급한 재앙이 닥쳐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것처럼 여기소서. 그리하여 더욱 떨쳐 일어나 뜻을 확립하시고 저상(沮喪)되거나 게을리하지 말아 그 기운을 기르실 것이며, 신하들을 자주 부르고 와내(臥內)로 끌어들이시어 아침에 한 가지 일을 채용하고 저녁에 한 가지 말을 받아들이면서 뒤로 천심(天心)에 합하고 아래로 백성을 위로해 줄 수 있는 것들을 모두 빠짐없이 거행하실 것이며, 그럼으로써 시들하게 위축된 뜻을 전환시키고 새로운 일을 하도록 진작시키는 기운을 떨쳐 일으키도록 하소서, 그러면 그야말로 보존될 수 있도록 도모하는 지극한 계책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인주(人主)는 이목(耳目)의 역할을 대간에 맡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공론(公論)의 시비와 민생의 휴척(休戚)을 일단 다 말하게 해놓고는 또 따르지 않고 계시는데 심지어는 해를 넘기면서까지 요청을 들어주지 않고 계시니, 이러고서도 언로가 통달되어 사람들의 마음이 숨김없이 드러나게 되기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경악(經幄)의 장관이 청대하여 말씀을 드리자 듣기 싫어하는 기색을 현저히 보이셨는데, 이것이 어찌 대성인께서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이는 아름다움이 되는 것이겠으며 아랫사람을 예로 대하는 도리라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기를,
"병 중에 애타게 걱정하던 나머지 이 차자의 사연을 보건대, 처음에는 진계(陳戒)하다가 나중에는 기상이 늠연(凛然)하였다. 위망에 관계된 기틀을 어찌 소홀히 하겠으며 수성하는 도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끝부분에서 ‘듣기 싫어한다.’고 한 말은 내가 정말 이해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이조 판서 홍명하(洪命夏)가 소장을 올려 체차시켜 주기를 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상이 의금부와 형조에 명하여 탑전에서 원옥(冤獄)을 심리하게 하였다.
일본(日本)이 표류된 우리 나라 사람 김여휘(金麗輝) 등 28인을 돌려 보냈다.
여휘 등은 해남(海南) 사람으로 흉년이 들자 탐라(耽羅)에 들어가 걸식하다가 돌아오는 길에 바람을 만나 표류한 나머지 유구(琉球)를 거쳐 일본에 정박하게 되었는데, 배 안에서 4인이나 굶어 죽었다. 그런데 일본에서 여휘 등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매우 후대하여 별선(別船)으로 실어 보낸 것이었다.
부제학 이경휘(李慶徽)가 상소하여, 인견했을 때 상이 듣기 싫어하고 박대하는 뜻을 보였다는 이유로 사직하였는데, 허락하지 않았다.
7월 6일 신미
상이 비망기(備忘記)를 내렸다.
"아, 천재(天災)와 시변(時變)이 어느 시대인들 없었겠는가마는, 덕이 없는 내가 자리를 차지한 뒤로 일어난 것과 같은 때는 있지 않았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수재(水災)도 극심하고 참혹한 가뭄 현상까지 계속 일어나고 있다. 찌는 듯한 삼복 더위에 벼 포기가 말라죽고 거북등처럼 논이 갈라져 호미도 땅에 들어가지 않는다. 백성이 장차 모조리 죽게 되었으니 국가가 누구를 의지할 것인가. 조용히 심각하게 생각하노라면 차라리 금방 죽어버리기라도 했으면 싶은데 그럴 수도 없는 상황이다.
승지는 내 대신 교서를 초안하여 직언(直言)을 널리 구함으로써 부족한 점을 보완토록 하라. 내가 생각건대, 재이(災異)를 초래한 것이 실로 내 탓이긴 하다마는, 온 신료들도 생각해보면, 또 어찌 잘못한 점이 없겠는가. 중외(中外)의 대소 신료들로 하여금 다같이 경건한 마음으로 협력하고 더욱 성실히 직무를 수행함으로써 조금이나마 하늘의 꾸지람에 응답하게 하라."
김시진(金始振)·김익경(金益炅)을 승지로, 김수항(金壽恒)을 이조 판서로, 홍명하(洪命夏)를 예조 판서로, 민응협(閔應恊)을 대사헌으로, 서필원(徐必遠)을 대사간으로, 이정(李程)을 사간으로, 김익렴(金益廉)을 장령으로, 이혜(李嵆)·소두산(蘇斗山)을 정언으로 삼았다.
정원이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비망기를 보건대, 백성을 걱정하고 가뭄을 안타깝게 여기시는 뜻이 그 말씀에 흘러 넘치니, 하늘의 마음을 움직이고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기에 충분합니다. 신들이 아무리 명을 받들어 대신 작성하려고 해도, 정말 한 마디도 더 덧붙일 수가 없으니, 성교(聖敎)를 그대로 중외(中外)에 전파하여 알리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의(辭意)가 짧고 졸렬해서, 걱정하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나의 뜻을 다 제대로 표현할 수가 없으니, 정원이 내 대신 교서를 작성하라."
하였다. 정원이 재차 아뢰며 강력히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상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원옥(冤獄)을 심리하였다. 판의금 홍명하(洪命夏)가 나아가 추안(推案)을 읽었는데, 윤선도(尹善道)의 죄안에 이르자, 상이 이르기를,
"이 경우는 어떠한가?"
하였다. 이경석(李景奭)이 아뢰기를,
"일찍이 진달드린 바가 있습니다만 뭇 의론이 비난하였으니 지금 감히 다시 뭐라고 말씀드리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사람들이 모두 놓아주면 안 된다고들 합니다."
하고, 민유중(閔維重)이 아뢰기를,
"그의 죄로 볼 때 섣불리 놓아주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그냥 두도록 하였다. 형조 판서 허적(許積)이 추안을 읽었는데 이문현(李文炫)의 죄에 이르자, 태화가 아뢰기를,
"이 사람의 정상을 보건대 정말 가증스럽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정상이 어떠한가?"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이문현이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내가 홍처민(洪處敏)의 딸과 서로 관계하였다.’ 하였는데, 그 딸의 혼인을 의논할 때에 문현이 본조에 전장(呈狀)하기를 ‘이미 내가 그녀와 서로 관계하였는데 지금 다른 곳으로 시집가려 한다.’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딸이 이런 추악한 이야기를 듣고는 그만 자살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그대로 두도록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이문현은 종실(宗室)의 후예로서 정신 질환을 앓고 있었는데, 언젠가 홍처민의 집에 돌입해서는 공공연히 말하기를 ‘내가 처민의 딸과 서로 정을 통하였다.’고 하였다. 그때 딸이 14세였는데, 이 말을 듣고는 사흘 동안 눈물을 흘리며 울다가 끝내 자살하여 자신의 결백을 밝혔으므로, 듣는 이들이 비통하게 여겼다. 아,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이야말로 큰 문제인데, 처민의 딸이 추악하게 무함하는 정신병자의 말을 한번 듣고는 문득 자살하였으니, 옛날의 열장부(烈丈夫)라도 어떻게 이보다 더 할 수 있겠는가. 참으로 여사(女士)라고 할 만하다. 삼가 살피건대, 윤선도가 종통(宗統)·적통(嫡統)의 설 때문에 송시열(宋時烈)의 패거리로부터 크게 거슬림을 받아 북쪽 변경에 유수(幽囚)된 지 몇 년이 흘렀다. 나이도 80에 가까워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태인데, 이렇게 심리(審理)하는 날을 당하여 여러 신하들이 번갈아 속이고 은폐하는 바람에 끝내 은혜를 받지 못하고 말았다. 이렇게 하고서도 하늘의 재이를 종식시키고 인심을 복종시킬 수 있겠는가. 아, 가슴아픈 일이다. 대사간 서필원(徐必遠)이 탑전에서 처치하여 집의 정계주(鄭繼胄)·지평 윤우정(尹遇丁)·장령 이지무(李枝茂)를 모두 체차시키기를 청하니, 따랐다. 또 아뢰기를, "이목(耳目)을 맡은 관원은 사정(私情)을 따라 행하면 안 되는 법입니다. 사성 김만기(金萬基)가 헌납으로 있을 때 예조 판서 허적(許積)을 논핵하려 하였는데, 허적의 사람됨에 대해서는 성명께서도 잘 알고 계시니만큼 근래 종백(宗伯)072) 이 된 자들을 보아도 꼭 허적보다 낫다고 할 수 없으니, 그렇다면 만기가 논핵하려고 했던 것은 전적으로 자기 편이 아닌 자를 치기 위해 나온 행동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뒤에 허적이 사직소를 올리자 성상께서 과연 미안하다는 뜻의 분부를 내리셨는데도 만기가 끝내 자수(自首)하지 않았고 보면 염우(廉隅)면에서 보더라도 또한 부당하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지난번 임의백(任義伯)을 논했을 때 만기가 그 조어(措語)를 모조리 삭제하고 공공연히 변호하며 구해 주었는데, 의백이 거칠고 비루하다는 것은 온 조정이 다 알고 있는 것으로서 이 역시 같은 패거리를 감싸주려는 뜻에서 나온 행동이었습니다. 또 지난번 김좌명(金佐明)에 대한 일만 해도 그렇습니다. 처음에 뭔가 듣고서 논한 것은 실로 그 직분이라 하겠습니다. 뒤에 그런 사실이 없었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본래 인피했어야 마땅한데,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던 것처럼 시종 고집하였으니, 이는 끝까지 잘못을 우기며 합리화시킨 것이라 하겠습니다. 한 사람의 몸으로 세 가지 잘못을 저질렀으니, 파직시키고 서용(叙用)하지 마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사신은 논한다. 만기가 허적을 논하려고 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긴 하였으나. 논하려 한 그 자체에 대해 공의(公議)가 모두 비난하였다. 필원이 또 아뢰기를, "이조 판서 김수항(金壽恒)이 재주나 명망이나 이력으로 볼 때 적합하다 하더라도 올해 나이가 35세밖에 안 됩니다. 기묘 명현(己卯名賢) 중의 한 사람인 김정(金淨)이 36세에 형판이 되었었는데, 그때의 물의(物議)는 오히려 너무 이른 나이에 임용한 것이 아닐까 하고 걱정했었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김정보다 못한 수항이겠습니까. 그리고 천관(天官)073) 의 장관을 재주와 명망만 가지고 취해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노성(老成)한 인물을 얻어야만 한 시대를 복종시킬 수 있을 것이니, 체차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에 민유중이 아뢰기를, "대사간 서필원이 아뢴 것은 모두 불가합니다. 수항이 나이는 적다 하더라도 이미 열경(列卿)의 반열에 있고 재주와 명망으로도 적합한 인물이고 보면, 새로 총재(冢宰)로 임명한 것이야말로 본래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대신(臺臣)이 논하여 체차시키다니 정말 부당하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하고, 또 김만기와 김익렴을 변호하였다. 이에 서필원이 또 개인적인 교우 관계를 공적인 일보다 더 아낀다는 이유로 민유중을 배척하면서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태백산사고본】 7책 7권 3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372면
【분류】사법-탄핵(彈劾) / 사법-재판(裁判) / 사법-치안(治安) / 과학-천기(天氣) / 왕실-의식(儀式) / 역사-편사(編史) / 인사-임면(任免)
[註 072] 종백(宗伯) : 예조 판서.[註 073] 천관(天官) : 이조.
사신은 논한다. 이문현은 종실(宗室)의 후예로서 정신 질환을 앓고 있었는데, 언젠가 홍처민의 집에 돌입해서는 공공연히 말하기를 ‘내가 처민의 딸과 서로 정을 통하였다.’고 하였다. 그때 딸이 14세였는데, 이 말을 듣고는 사흘 동안 눈물을 흘리며 울다가 끝내 자살하여 자신의 결백을 밝혔으므로, 듣는 이들이 비통하게 여겼다. 아,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이야말로 큰 문제인데, 처민의 딸이 추악하게 무함하는 정신병자의 말을 한번 듣고는 문득 자살하였으니, 옛날의 열장부(烈丈夫)라도 어떻게 이보다 더 할 수 있겠는가. 참으로 여사(女士)라고 할 만하다.
삼가 살피건대, 윤선도가 종통(宗統)·적통(嫡統)의 설 때문에 송시열(宋時烈)의 패거리로부터 크게 거슬림을 받아 북쪽 변경에 유수(幽囚)된 지 몇 년이 흘렀다. 나이도 80에 가까워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태인데, 이렇게 심리(審理)하는 날을 당하여 여러 신하들이 번갈아 속이고 은폐하는 바람에 끝내 은혜를 받지 못하고 말았다. 이렇게 하고서도 하늘의 재이를 종식시키고 인심을 복종시킬 수 있겠는가. 아, 가슴아픈 일이다. 대사간 서필원(徐必遠)이 탑전에서 처치하여 집의 정계주(鄭繼胄)·지평 윤우정(尹遇丁)·장령 이지무(李枝茂)를 모두 체차시키기를 청하니, 따랐다. 또 아뢰기를, "이목(耳目)을 맡은 관원은 사정(私情)을 따라 행하면 안 되는 법입니다. 사성 김만기(金萬基)가 헌납으로 있을 때 예조 판서 허적(許積)을 논핵하려 하였는데, 허적의 사람됨에 대해서는 성명께서도 잘 알고 계시니만큼 근래 종백(宗伯)072) 이 된 자들을 보아도 꼭 허적보다 낫다고 할 수 없으니, 그렇다면 만기가 논핵하려고 했던 것은 전적으로 자기 편이 아닌 자를 치기 위해 나온 행동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뒤에 허적이 사직소를 올리자 성상께서 과연 미안하다는 뜻의 분부를 내리셨는데도 만기가 끝내 자수(自首)하지 않았고 보면 염우(廉隅)면에서 보더라도 또한 부당하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지난번 임의백(任義伯)을 논했을 때 만기가 그 조어(措語)를 모조리 삭제하고 공공연히 변호하며 구해 주었는데, 의백이 거칠고 비루하다는 것은 온 조정이 다 알고 있는 것으로서 이 역시 같은 패거리를 감싸주려는 뜻에서 나온 행동이었습니다. 또 지난번 김좌명(金佐明)에 대한 일만 해도 그렇습니다. 처음에 뭔가 듣고서 논한 것은 실로 그 직분이라 하겠습니다. 뒤에 그런 사실이 없었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본래 인피했어야 마땅한데,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던 것처럼 시종 고집하였으니, 이는 끝까지 잘못을 우기며 합리화시킨 것이라 하겠습니다. 한 사람의 몸으로 세 가지 잘못을 저질렀으니, 파직시키고 서용(叙用)하지 마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사신은 논한다. 만기가 허적을 논하려고 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긴 하였으나. 논하려 한 그 자체에 대해 공의(公議)가 모두 비난하였다. 필원이 또 아뢰기를, "이조 판서 김수항(金壽恒)이 재주나 명망이나 이력으로 볼 때 적합하다 하더라도 올해 나이가 35세밖에 안 됩니다. 기묘 명현(己卯名賢) 중의 한 사람인 김정(金淨)이 36세에 형판이 되었었는데, 그때의 물의(物議)는 오히려 너무 이른 나이에 임용한 것이 아닐까 하고 걱정했었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김정보다 못한 수항이겠습니까. 그리고 천관(天官)073) 의 장관을 재주와 명망만 가지고 취해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노성(老成)한 인물을 얻어야만 한 시대를 복종시킬 수 있을 것이니, 체차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에 민유중이 아뢰기를, "대사간 서필원이 아뢴 것은 모두 불가합니다. 수항이 나이는 적다 하더라도 이미 열경(列卿)의 반열에 있고 재주와 명망으로도 적합한 인물이고 보면, 새로 총재(冢宰)로 임명한 것이야말로 본래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대신(臺臣)이 논하여 체차시키다니 정말 부당하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하고, 또 김만기와 김익렴을 변호하였다. 이에 서필원이 또 개인적인 교우 관계를 공적인 일보다 더 아낀다는 이유로 민유중을 배척하면서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태백산사고본】 7책 7권 3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372면
【분류】사법-탄핵(彈劾) / 사법-재판(裁判) / 사법-치안(治安) / 과학-천기(天氣) / 왕실-의식(儀式) / 역사-편사(編史) / 인사-임면(任免)
[註 072] 종백(宗伯) : 예조 판서.[註 073] 천관(天官) : 이조.
삼가 살피건대, 윤선도가 종통(宗統)·적통(嫡統)의 설 때문에 송시열(宋時烈)의 패거리로부터 크게 거슬림을 받아 북쪽 변경에 유수(幽囚)된 지 몇 년이 흘렀다. 나이도 80에 가까워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태인데, 이렇게 심리(審理)하는 날을 당하여 여러 신하들이 번갈아 속이고 은폐하는 바람에 끝내 은혜를 받지 못하고 말았다. 이렇게 하고서도 하늘의 재이를 종식시키고 인심을 복종시킬 수 있겠는가. 아, 가슴아픈 일이다.
대사간 서필원(徐必遠)이 탑전에서 처치하여 집의 정계주(鄭繼胄)·지평 윤우정(尹遇丁)·장령 이지무(李枝茂)를 모두 체차시키기를 청하니, 따랐다. 또 아뢰기를,
"이목(耳目)을 맡은 관원은 사정(私情)을 따라 행하면 안 되는 법입니다. 사성 김만기(金萬基)가 헌납으로 있을 때 예조 판서 허적(許積)을 논핵하려 하였는데, 허적의 사람됨에 대해서는 성명께서도 잘 알고 계시니만큼 근래 종백(宗伯)072) 이 된 자들을 보아도 꼭 허적보다 낫다고 할 수 없으니, 그렇다면 만기가 논핵하려고 했던 것은 전적으로 자기 편이 아닌 자를 치기 위해 나온 행동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뒤에 허적이 사직소를 올리자 성상께서 과연 미안하다는 뜻의 분부를 내리셨는데도 만기가 끝내 자수(自首)하지 않았고 보면 염우(廉隅)면에서 보더라도 또한 부당하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지난번 임의백(任義伯)을 논했을 때 만기가 그 조어(措語)를 모조리 삭제하고 공공연히 변호하며 구해 주었는데, 의백이 거칠고 비루하다는 것은 온 조정이 다 알고 있는 것으로서 이 역시 같은 패거리를 감싸주려는 뜻에서 나온 행동이었습니다. 또 지난번 김좌명(金佐明)에 대한 일만 해도 그렇습니다. 처음에 뭔가 듣고서 논한 것은 실로 그 직분이라 하겠습니다. 뒤에 그런 사실이 없었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본래 인피했어야 마땅한데,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던 것처럼 시종 고집하였으니, 이는 끝까지 잘못을 우기며 합리화시킨 것이라 하겠습니다. 한 사람의 몸으로 세 가지 잘못을 저질렀으니, 파직시키고 서용(叙用)하지 마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사신은 논한다. 만기가 허적을 논하려고 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긴 하였으나. 논하려 한 그 자체에 대해 공의(公議)가 모두 비난하였다. 필원이 또 아뢰기를, "이조 판서 김수항(金壽恒)이 재주나 명망이나 이력으로 볼 때 적합하다 하더라도 올해 나이가 35세밖에 안 됩니다. 기묘 명현(己卯名賢) 중의 한 사람인 김정(金淨)이 36세에 형판이 되었었는데, 그때의 물의(物議)는 오히려 너무 이른 나이에 임용한 것이 아닐까 하고 걱정했었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김정보다 못한 수항이겠습니까. 그리고 천관(天官)073) 의 장관을 재주와 명망만 가지고 취해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노성(老成)한 인물을 얻어야만 한 시대를 복종시킬 수 있을 것이니, 체차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에 민유중이 아뢰기를, "대사간 서필원이 아뢴 것은 모두 불가합니다. 수항이 나이는 적다 하더라도 이미 열경(列卿)의 반열에 있고 재주와 명망으로도 적합한 인물이고 보면, 새로 총재(冢宰)로 임명한 것이야말로 본래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대신(臺臣)이 논하여 체차시키다니 정말 부당하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하고, 또 김만기와 김익렴을 변호하였다. 이에 서필원이 또 개인적인 교우 관계를 공적인 일보다 더 아낀다는 이유로 민유중을 배척하면서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태백산사고본】 7책 7권 3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372면
【분류】사법-탄핵(彈劾) / 사법-재판(裁判) / 사법-치안(治安) / 과학-천기(天氣) / 왕실-의식(儀式) / 역사-편사(編史) / 인사-임면(任免)
[註 072] 종백(宗伯) : 예조 판서.[註 073] 천관(天官) : 이조.
사신은 논한다. 만기가 허적을 논하려고 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긴 하였으나. 논하려 한 그 자체에 대해 공의(公議)가 모두 비난하였다.
필원이 또 아뢰기를,
"이조 판서 김수항(金壽恒)이 재주나 명망이나 이력으로 볼 때 적합하다 하더라도 올해 나이가 35세밖에 안 됩니다. 기묘 명현(己卯名賢) 중의 한 사람인 김정(金淨)이 36세에 형판이 되었었는데, 그때의 물의(物議)는 오히려 너무 이른 나이에 임용한 것이 아닐까 하고 걱정했었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김정보다 못한 수항이겠습니까. 그리고 천관(天官)073) 의 장관을 재주와 명망만 가지고 취해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노성(老成)한 인물을 얻어야만 한 시대를 복종시킬 수 있을 것이니, 체차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에 민유중이 아뢰기를,
"대사간 서필원이 아뢴 것은 모두 불가합니다. 수항이 나이는 적다 하더라도 이미 열경(列卿)의 반열에 있고 재주와 명망으로도 적합한 인물이고 보면, 새로 총재(冢宰)로 임명한 것이야말로 본래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대신(臺臣)이 논하여 체차시키다니 정말 부당하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하고, 또 김만기와 김익렴을 변호하였다. 이에 서필원이 또 개인적인 교우 관계를 공적인 일보다 더 아낀다는 이유로 민유중을 배척하면서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양주(楊州)의 유학(幼學) 이추(李樞) 등이 상소하여 문충공(文忠公) 김상용(金尙容)과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의 서원에 사액(賜額)해 주기를 청하니, 상이 그 소를 예조에 내렸다. 예조가 ‘사액을 허락해 주어 포상(褒尙)하는 뜻을 보이는 것이 온당하다.’고 복계(覆啓)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유성(流星)이 나왔는데 붉은 빛이 땅을 비추었다.
7월 7일 임신
상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심리를 행하였는데, 제도(諸道)의 정배 이하의 죄인 및 금부와 형조의 죄인 가운데 등급이 감해지거나 용서받은 자들이 모두 1백여 인이었다. 이경석(李景奭)이 다시 조형(趙珩)의 죄를 풀어주기를 청하니, 상이 일렀다.
"조형은 편배(編配)된 지 이미 오래되었으므로 내가 방면해주고 싶었는데 간신(諫臣)이 안 된다고 하기 때문에 방면치 못했었다. 그런데 영부사의 뜻이 이러하니 방면토록 하라."
패선(敗船)의 증미(拯米)를 개색(改色)074) 하는 규정을 개정하였다.
호남·영남의 세선(稅船) 및 대동선(大同船)이 침몰되는 일이 전후로 서로 잇따랐는데, 구례(舊例)에는 그 미두(米豆)를 건져내어 전량(全量)을 지방관에게 지급하거나 연변(沿邊)의 백성에게 나눠준 뒤 다시 납부하게 하였다. 그런데 침수되었다가 건져내 다시 말린 쌀이 완전히 보존될 리가 없는 법인데도 억지로 나눠준 뒤 추수 때에 이에 준해 징수하였으므로 백성들이 매우 괴로워하였다. 이에 충청 감사 이홍연(李弘淵)이 치계(馳啓)하기를,
"《대전속록(大典續錄)》을 가져다 상고해 보건대, 침수된 미곡을 평석(平石)075) 으로 기준할 때 수습잉(水濕剩)076) 이 6두(斗) 7승(升) 5합(合)이고 증건열(蒸乾劣)077) 이 5두 8승 8합인데, 패선(敗船) 한 곳의 지방 수령이 즉시 건져내어 두량(斗量)을 나눠주고 쪄서 말린 뒤 이 규정대로 환급한다고 하였습니다. 일체 법전에 의거하여 1석(石)당 9두 1승 2합은 본도 연변의 백성에게 개색하여 납부하게 하고 증건열 5두 8승 8합은 각각 본관으로 하여금 비납(備納)케 함으로써 연변 백성의 폐단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게 하소서."
하였는데, 조정이 그 말을 따르면서 다른 도도 마찬가지로 시행하게 하였다.
7월 8일 계유
태백(太白)이 낮에 나타났다.
정언 소두산(蘇斗山)이 처치하여 ‘서필원(徐必遠)이 논한 것은 중도에 맞지도 않고 정확하지도 않은 것으로서 결국 전도되고 잘못된 결과로 귀착되었다.’고 배척하며 체차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윤강(尹絳)을 이조 판서로, 홍중보(洪重普)를 대사헌으로, 남용익(南龍翼)을 병조 참판으로, 남구만(南九萬)을 집의로, 송시철(宋時喆)·여민제(呂閔齊)를 장령으로, 이단석(李端錫)을 지평으로, 이세화(李世華)를 정언으로 삼았다.
강원도 강릉부(江陵府)에서 암탉이 수탉으로 변했다.
전남·함경 등 도에 크게 가뭄이 들었다.
비국이 아뢰어 호적(戶籍)에 빠진 자는 《후속록(後續錄)》의 고역(苦役)에 충정시키는 법에 의거하여 수군(水軍)으로 만들고, 수군이 되기에 적당치 않을 경우에는 전가 사변(全家徙邊)시키도록 청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한재(旱災) 때문에 구언(求言)하는 분부를 내렸다. 또 제도(諸道) 감사에게 유지를 내려 제거해야 할 백성의 병폐와 신원(伸冤)시켜야 할 감옥의 죄수들에 대해 즉각 소결(疏決)토록 하고, 그 가운데 중대한 관련이 있어 스스로 처리하기 어려운 일이 있으면 모두 기록하여 계문(啓聞)토록 하였다.
7월 10일 을해
대사헌 홍중보(洪重普)가 추감(推勘)당하는 처지에 있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면직되었다.
7월 11일 병자
사간 이정(李程), 정언 소두산(蘇斗山)이 아뢰기를,
"내시 교관 이상익(李商翼)이 생도를 가르칠 때 고사를 인용해 오늘날의 일을 증거하면서 경계하고 단속시키는 말을 하였는데, 환관(宦官) 양달원(梁達源)이란 자가 그 말을 분하게 여기고는 상익이 들어올 때를 기다렸다가 의관을 벗고 거만하게 앉아서 능멸하는 기색을 현저하게 보였습니다. 이에 상익이 학청(學廳)에 나아가 생도들에게 그 일을 말하자 달원이 이를 듣고는 더욱 분하게 여겼는데, 뒤에 상익이 들어왔을 때 앞으로 달려나가 눈을 부릅뜨고 팔뚝을 치켜 올리면서 비할 데 없이 패만하고 외설스러운 이야기까지 하며 방자하게 모욕을 가했으니, 이는 일찍이 없었던 변고입니다. 만약 중률(重律)로 다스리지 않으면 단속시킬 길이 없을 뿐더러 뒷날의 폐단도 끝이 없을 것이니, 나문하여 정죄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양달원이 오만하게 군 죄야말로 놀랍기 그지없으니 먼저 파직한 뒤에 추고토록 하라. 그런데 이미 생도에게 훈계를 내린 것이 아니었고 보면 이것은 곧 서로 싸운 일인 셈인데, 나문까지 하라고 한 의도를 내가 정말 모르겠다."
하였다.
처음에 상익이 학청에 나아가 생도를 가르치다가 홍공(弘恭)과 석현(石顯)의 일078) 에 이르러 훈계하기를,
"이것이야말로 너희들이 교훈으로 삼아 경계해야 할 대목이다. 근래 일어난 최대립(崔大立)의 일은 듣기에 너무도 놀랍다. 내시가 어떻게 감히 외조(外朝)와 서로 겨룬단 말인가."
하였다. 그런데 달원이 대립의 양자(養子)로서 이를 듣고 분노하여 상익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가 무례하게 대하며 심지어 패려(悖戾)한 말까지 가하면서 말하기를,
"홍공과 석현이 어느 때 사람인가. 그리고 그대가 무엇 때문에 우리 아버지 이름을 부르면서 홍공과 석현에게 비유한단 말인가."
하였는데, 이루 말할 수 없이 꾸짖고 모욕하였으므로 통분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따라서 대계(臺啓)가 나문하기를 청한 것이야말로 공론(公論)에서 나온 것이었는데, 상이 끝내 따르지 않으면서 서로 싸운 것이라고까지 분부하였으니, 애석한 일이다.
유학(幼學) 권대시(權大時)가 상소하여 양신(兩臣)079) 의 훌륭한 점을 극구 칭찬하고 이어 종사(從祀)하기를 청하면서 아뢰기를,
"동인(東人)·서인(西人)의 논이 나오면서 공의(公議)가 없어졌는데, 김강(金鋼)이 헐뜯고 배척한 상소는 모두가 당론(黨論)에서 나온 것입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동인쪽 이야기만 익숙하게 듣고 서인쪽 이야기에는 평소 어두웠으나 양현(兩賢)을 비방하는 것에 대해서는 의심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양현의 유문(遺文)을 상고하고 훼예(毁譽)를 참작해 본 뒤에야, 비록 초(楚)나라 사람들이 떠드는 속에 있다 하더라도 제(齊)나라의 말이 바르다는 것080) 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였는데, 상소를 들인 지 반 달이 되도록 회보하지 않다가 정원에 비망기(備忘記)를 내리기를,
"나라의 기강이 아무리 해이해졌다 하더라도 어찌 오늘날처럼 심한 경우가 있었겠는가. 대시가 감히 이쪽 편이니 저쪽 편이니 하는 설을 가지고 방자하게 마구 써내려 가면서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있으니, 국법을 무시하고 군상(君上)을 모욕한 죄로서 이보다 심한 것이 없다. 나국하여 엄히 다스리도록 하라."
하였다. 승지 김익경(金益炅)이 복역(覆逆)하여 아뢰기를,
"유생이 소장을 진달드린 명분이 존현(尊賢)하기 위해서인만큼 나국하여 듣는 이들이 의혹하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쪽 편이니 저쪽 편이니 하는 설에 대해서 그대 역시 놀랍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하였다. 익경이 대죄(待罪)하는 계사(啓辭)를 올리면서 역시 국문해서는 안 된다는 뜻을 언급하였는데, 상이 대죄하지 말라고 하였다.
7월 12일 정축
권대시(權大時)를 하옥(下獄)하였다.
사간 이정(李程), 정언 소두산(蘇斗山)이 아뢰기를,
"사자(士子)라는 이름을 갖고 존현(尊賢)하기 위해 소장을 진달드린 것인만큼 나국해서는 안 됩니다. 나명(拿命)을 거두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명을 환수하라고 청하는 이 계사(啓辭)를 보고 내가 매우 탄식하며 애석하게 생각한다. 양신(兩臣)에게는 이쪽 편이니 저쪽 편이니 하는 붕당(朋黨)에 관계된 일이 없었는데, 지금 대시가 이런 식으로 상소 속에서 언급하였으니, 이것이 높이는 것인가, 천하게 만드는 것인가. 그대들이 알지도 못하고 거꾸로 존현하는 것이라고 하다니, 매우 근거가 없다."
하였다.
지평 이단석(李端錫)도 권대시에 대한 나명(拿命)을 환수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우의정 정유성(鄭維城)이 사명(使命)을 받아들었을 때 일행 중에서 금법(禁法)을 범한 자가 있어서 부사(副使) 이만(李曼)이 대간으로부터 탄핵을 받았다는 이유로 상소하여 견책받기를 청하였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7월 13일 무인
이정(李程)·소두산(蘇斗山)·이단석(李端錫)이 엄한 비답을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지평 장선징이 역시 권대시에 대한 나명을 중지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장선징이 처치하여 이정·소두산·이단석 모두 출사시키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대사간 이경억(李慶億)도 상소하여 권대시를 구원했으나, 상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응교 이민적(李敏迪)·민유중(閔維重) 등이 권대시를 하옥시키면 안 된다는 내용으로 소장을 진달하여 석방시키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대사성 민정중(閔鼎重)이 일만 언에 달하는 대소를 올려 이이와 성혼을 위해 변무(辨誣)하고, 호오(好惡)를 분명히 보여 사설(邪說)이 행해지지 못하게 하고 선비의 나아갈 길에 옳은 방향을 제시해 줌으로써, 사문(斯文)이 다행하게 되고 국맥(國脈)이 장구해지도록 하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7월 15일 경진
지평 장선징도 엄한 비답을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장령 송시철(宋時喆)과 지평 이단석(李端錫)도 모두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는데, 정언 소두산(蘇斗山)이 처치하여 모두 출사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이조 판서 윤강(尹絳)이 세 번째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대사헌 김수항(金壽恒)이 사직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서필원(徐必遠)에게 탄핵을 받았는데도 곧바로 헌장(憲長)에 제수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조 참판 유계(兪棨)가 상소하여 면직되었다.
7월 17일 임오
삼남(三南) 지방에서 실시하는 추등(秋等)의 수군 조련을 정지토록 명하였는데, 흉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7월 19일 갑신
장령 이유가 아뢰기를,
"전일 심리(審理)할 때에 조형(趙珩)도 사유(赦宥)를 의논하는 대상에 포함되긴 하였습니다만, 입시한 대관이 안 된다고 쟁집하였기 때문에 도로 그만두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그 대관이 들어가 있지 않은 상태에서 또 여러 신하들이 신구(伸救)하며 아룀에 따라 풀려났으니, 일의 체계로 헤아려 볼 때 부당하기 짝이 없을 뿐더러 뒷날의 폐단 역시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용서하는 명을 정지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며칠 동안 연계(連啓)한 뒤에 정계(停啓)하였다.
7월 22일 정해
평안도 용천(龍川)에서 촌 백성이 쌓아놓은 보릿단이 번갯불에 불타고 인(人)·물(物)이 벼락에 맞아 죽었다.
7월 23일 무자
지평 이후(李煦)가 아뢰기를,
"신은 본부의 전계(前啓)에 대해서 구차하게 동조할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홍우원(洪宇遠)이 시종 반열의 직책에 있으면서 속에 있는 생각을 반드시 말씀드려야 한다는 자세로 임했고 보면, 이를 당사(黨邪)로 지목하여 기필코 중한 죄를 주려고 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신은 모르겠습니다. 체차시켜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7월 24일 기축
지평 윤우정(尹遇丁)이 이후(李煦)를 처치하여 아뢰기를,
"당사(黨邪)의 죄야말로 숨길 수 없는 것으로서 공론이 이미 정해졌는데도 감히 어떻게든 비호하려고 하였으니, 그 의도가 정말 가증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체차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삼가 살피건대, 윤우정이 처치하면서 ‘당사의 죄야말로 숨길 수 없다.’ 하였는데, 이것은 참으로 자신을 두고 말한 것이라 할 것이니 가소롭기만 하다.
7월 25일 경인
태백(太白)이 낮게 나타났다.
대사간 이경억(李慶億)이 인피하기를,
"신이 지난번 본직에 있을 때 듣건대, ‘홍석범(洪錫範)의 숙부가 염병으로 죽었는데, 석범이 겨우 초빈(草殯)을 해놓은 상태에서 허둥지둥 감시(監試)에 응시했기 때문에 사학(四學)의 유생들이 유벌(儒罰)을 가하였다. 그런데 벌이 풀리기도 전에 복시(覆試)에 응시하여 참방(叅榜)081) 되었다.’고 하였는데, 이는 실로 전에 있지 않던 일이기에 논계하여 합격자 명단에서 빼도록 했었습니다. 그런데 상신(相臣)의 차본(箚本)을 보건대, 그가 응시한 것은 권장(權葬)082) 한 이후에 있었던 일이라고 하면서 그의 억울함을 말하고, 대계(臺啓)는 사실을 잘못 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체차시켜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일본(日本) 오도(五島)에 사는 왜인(倭人) 3인이 우리 나라 울진현(蔚珍縣)에 표류해 왔는데 조정이 토관(土官)으로 하여금 양식과 옷을 지급하게 하고, 또 설관(舌官)으로 하여금 그들을 데리고 육로(陸路)로 부산의 관왜(館倭)에 맡기게 한 뒤 그들 나라에 들여보내 주도록 하였다.
7월 26일 신묘
대사헌 김수항(金壽恒), 지평 윤우정(尹遇丁)이 아뢰기를,
"내수사의 대소 공사(公事)를 꼭 이조에 관유(關由)토록 법을 정한 의도가 우연한 것이 아닌데, 신들이 삼가 듣건대, 내사(內司)에서 간정 대출(間定代出)하는 일로 행문(行文)한 데 대해 ‘해조에 보고하지 말라.’고 분부를 내리셨다 합니다. 옛 규정을 허물어뜨리고 뒷날의 폐단을 여는 일로서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으니, 전례(前例)대로 해조에 보고한 뒤 시행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이일상(李一相)을 우참찬으로, 이무(李堥)·송시철(宋時喆)을 장령으로, 최유지(崔攸之)를 집의로, 남이성(南二星)을 지평으로 삼았다.
응교 이민적(李敏迪), 부응교 민유중(閔維重), 부교리 이익(李翊), 부수찬 여성제(呂聖齊)·이유상(李有相) 등이 대소(大疏)를 올렸다. 그 대강은 3가지로 성상의 궐실(闕失)·국가의 이병(利病)·백성들의 휴척(休戚)이었고, 그 세목은 16가지로 근학(勤學)·입지(立志)·청심(淸心)·양기(養氣)·경천(敬天)·외민(畏民)·사치를 금하도록 힘쓸 것·금병(禁兵)의 수를 제한할 것·지성으로 현인을 초빙할 것·신료를 자주 접견할 것·염분(鹽盆)을 혁파할 것·제둔전(諸屯田)을 혁파할 것·포흠(逋欠)을 탕척해 줄 것·민역(民役)을 고르게 정할 것·인족(隣族)을 침해하지 말 것·대간을 구임(久任)시킬 것 등이었는데, 상이 답하였다.
"계회(誡誨)하는 내용을 조목별로 진달한 차자를 살펴 보건대 실로 으레 올리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근실한 정성과 못잊어하는 충성심이 말에 흘러 넘치니, 어찌 늘 간직하며 마음에 새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조목별로 진달한 일은 절목(節目)이 있게 마련으로서 일시에 헤아려 정할 수 없으니, 묘당으로 하여금 의처(議處)토록 하겠다."
사신은 논한다. 상이 답은 이렇듯 너그럽게 내렸으면서도 실제로 채택해서 쓴 일은 없었으니 어찌 탄식을 금할 수 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7책 7권 6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374면
【분류】정론-간쟁(諫諍) / 역사-편사(編史)
사신은 논한다. 상이 답은 이렇듯 너그럽게 내렸으면서도 실제로 채택해서 쓴 일은 없었으니 어찌 탄식을 금할 수 있겠는가.
7월 27일 임진
함경도에 여역(癘疫)이 크게 돌아 죽은 자가 2백 70여 인이나 되었다.
사은사(謝恩使) 우의정 정유성(鄭維城), 부사 완원군(完原君) 이만(李曼)이 북경(北京)에서 돌아와 아뢰기를,
"청(淸)나라 사람들이 남방에 포로로 잡혀 갔다가 본토로 도망쳐 돌아 온 자들을 쇄환(刷還)하여 건주(建州)와 심양(瀋陽)에 나눠 살게 하였습니다. 관내와 관외 할 것 없이 수레에 실린 채 울부짖는 자들을 하루에 5, 6수레 혹은 7, 8수레는 만났습니다. 몇 년 계속 풍년이 든 덕분에 백성들의 먹을 것이 조금 풍족해졌습니다. 천하가 일단 정해진 뒤로는 다시 무비(武備)에 뜻을 두지 않아, 성지(城池)를 수축하지 않고 관우(館宇)를 수선하지 않으며, 또 사냥을 나가 노고(勞苦)하는 일을 익히지도 않고, 전진(戰陣)에서 쓸 만한 말[馬]들은 모두 임대해 물건을 싣는 데 쓰도록 하였으며, 갑졸(甲卒) 등이 타고 다니는 말들은 태반이 지치고 여윈 것들이었습니다. 게다가 정령이 문란하기만 한데 청(淸)나라 사람들이 한인(漢人)을 능멸하는 상황에서 한인 또한 포학하게 굴기 때문에 평민들은 하소연할 곳이 없는 실정입니다. 그런가 하면 뇌물을 바치고 벼슬을 얻는 자들도 많은데, 심지어는 자기 아내를 팔아 벼슬을 산 자까지 있다 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백이(伯夷)·숙제(叔齊)의 사당에 ‘고절의 그 자취 행하기 어려워도 인을 구한 마음이야 같아야겠지[苦節跡難踐 求仁心可同]’라는 오언시가 있었는데, 이는 소주(蘇州) 사람 이공소(李孔昭)의 작품이었습니다. 공소는 명나라 때 진사(進士)로서 청나라에 벼슬하지 않고 이 시를 지어 뜻을 나타내었다고 합니다."
하였다.
7월 29일 갑오
헌부가 구언(求言)하는 유지에 응하여 역시 상차했는데, 성지(聖旨) 중에 인구(引咎)하며 조목별로 하문한 것을 세목(細目)으로 삼아 그 설을 부연하였다. 이에 상이 답하였다.
"절실한 언사로 나의 병통을 지적하며 깊이 경계시켜 주고 있으니, 두렵게 생각하는 마음을 어찌 조금이라도 태만히 할 수 있겠는가. 양전(量田)에 관한 일은 묘당으로 하여금 의처(議處)토록 하겠다."
양사(兩司)가 홍우원(洪宇遠)을 삭출(削黜)하라는 논을 정지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효묘(孝廟)가 예척(禮陟)083) 하였을 때, 예관(禮官)이 장차 자의 왕대비(慈懿王大妃)084) 의 복제를 의논하려 하였는데, 전 지평 윤휴만이 홀로 참최(斬衰) 삼년복을 입어야 한다는 설을 주창하였다. 이에 예조가 아뢰기를,"자의 왕대비께서 대행 대왕의 상에 입어야 할 복제를 마련해야 하는데, 어떤 이는 삼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하고 어떤 이는 기년복(期年服)을 입어야 한다고 합니다만, 근거할 예문(禮文)이 없으니, 대신에게 의논하소서." 하니, 상이 이를 따르면서 특히 두 찬선(贊善)에게 일체의 것을 문의하도록 하였는데, 두 찬선은 곧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이다. 영돈녕부사 이경석(李景奭), 영의정 정태화(鄭太和), 연양 부원군(延陽府院君) 이시백(李時白), 좌의정 심지원(沈之源), 우의정 원두표(元斗杓), 완남 부원군(完南府院君) 이후원(李厚源) 등이 헌의하기를,"시왕(時王)의 제도로 상고해 보건대 기년의 복제가 마땅할 듯합니다." 하고, 송시열과 송준길도 헌의하기를,"고금의 예율(禮律)이 이미 다른데다가 제왕과 관련된 복제는 섣불리 의논 드리기가 더욱 어렵습니다. 그런데 대신들이 일단 시왕의 제도를 가지고 의논드렸는데, 신들로서도 감히 다시 다른 설은 용납하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의논한 대로 시행하도록 명하여 마침내 기년의 복제로 확정되었다. 이에 예를 안다는 사람들 역시 다른 주장을 하지 않게끔 되었는데, 윤휴가 계속 전에 했던 주장을 고집하였으므로 사림이 걱정하며 홍수나 맹수의 해에 견주기까지 하였다. 그 뒤 경자년085) 3월에 장령 허목(許穆)이 재차 상소하여 기년복으로 정한 것은 잘못이라고 논하였는데, 원두표 혼자서 전에 의논드렸던 태도를 바꿔 허목의 설을 따랐다. 윤휴가 이에 허목에게 글을 보내기를,"이번에 어른께서 논한 것을 보건대 조리가 있고 근거할 곳이 있으니 그야말로 오늘날의 의논들을 쳐부수기에 충분하다 하겠습니다. 《의례(儀禮)》 주소(註疏) 중에 ‘적자(嫡子)를 세워 장자(長子)로 삼는다.’고 한 설의 뜻이 매우 분명하니, 부부(夫婦)의 소생으로서 조종(祖宗)으로부터 수중(受重)한 자를 ‘비정(非正)’이라고 하는 것은 의리가 없다 할 것이고 첩(妾)의 아들과 동일시하는 것은 매우 어긋나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저의 생각으로는, 가소(賈疏)086) 에서 논한 것은 단지 사대부가의 예제일 뿐으로서, 왕후가(王侯家)에서 수중하지 못한 경우를 언급하기도 했지만 이것은 사자(士者)에 비유하기 위해 거론한 것일 따름이니 위로 천자나 제후에 적용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은 못 된다고 여겨집니다. 옛날부터 말해 오기를 ‘제후는 탈종(奪宗)087) 하고 성서(聖庶)088) 는 탈적(奪嫡)089) 한다.’고 하였습니다. 일단 차서(次序)를 이어 종묘 사직의 주인이 되는 위치가 되었고 보면, 종통(宗統)도 여기에 있게 되고 자연히 장자의 권한도 갖게 되는 것인만큼, 그를 위해서는 계체(繼體)한 자에게 입어주는 복을 입고 지존에게 입어주는 복을 입어야 하는 것이니, 또 어떻게 장소(長少)와 적서(嫡庶)를 따질 수 있겠습니까. 무왕(武王)이 일단 천자가 된 이상 백읍고(伯邑考)에게 사속(嗣續)이 있다 하더라도 태왕(太王)과 왕계(王季)의 적통이 될 수 없고, 한 고조(漢高祖)가 일단 왕이 되고 황제가 된 이상 아무리 유중(劉仲)이 장자라 하더라도 풍패(豐沛)090) 에서 종방(宗祊)의 제사를 주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무왕이 죽었을 때 태사(太姒)091) 가 아직 살아 있었다면 마땅히 그를 위해 계체(繼體)의 복을 입고 백읍고에게 중한 지위를 돌리지 않았을 것이며, 한 고조가 죽었을 때 태종(太宗)092) 이 별 탈이 없었고 광무(光武)가 죽었을 때 번후(樊后)093) 가 잘 살고 있었다면 마땅히 천하 사람들과 함께 지존(至尊)의 복을 입었지 유중과 백승(伯升)을 적통으로 삼은 나머지 한 고조와 광무의 복을 낮추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 경우는 그래도 적자(嫡子) 출신들의 예를 들어 말한 것입니다. 가령 한 문제(漢文帝)나 무제(武帝)는 모두 측실(側室)의 아들로서 황제의 자리에 올랐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아비가 되고 어미가 된 자들이 그들을 서자(庶子)로 논하여 계체한 지존의 복을 입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계체한 지존에게는 참최복을 입어주어야 한다는 것이야말로 상경(常經)이요 대의(大義)입니다. 일반 서민의 집에서도 장자를 위해서는 참최복을 입어주는데, 그 이유는 그가 조부(祖父)의 통서(統序)를 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종묘 사직을 지킬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고 천하 만백성의 주인이 된 자에 대해서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의 장자됨이 크고 그가 종통을 잇는 것이 존귀하다 하겠습니다. 그를 장자로 삼지 않으면 누구를 장자라고 할 것이며, 그를 두고 종통을 이은 자라고 하지 않는다면 어디에 가서 종통을 잇게 하겠습니까. 그리고 《의례(儀禮)》에서 논한 것을 보건대 ‘장차 전중(傳重)할 사람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미 천지와 종방의 주인이 되는 중차대한 책임을 진 사람에게 대하여 여전히 강복(降服)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이는 종통을 둘로 하고 그 주인되는 사람을 낮추는 것이 되니, 옳은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오늘날의 논을 보면 심지어 ‘둘째 아들은 강등하여 서자(庶子)로 대우하는 예(例)를 따른다.’고 하니, 어찌된 일입니까. 예를 잃으면 혼란하게 되고 명목(名目)이 제대로 세워지지 않으면 어그러지게 되니 작은 일이 아닐 듯싶습니다. 또 《의례》를 살펴보건대, 제후와 오속(五屬)094) 의 친족 관계가 있는 자들은 모두 참최복을 입도록 되어 있는데, 천자나 제후의 상(喪)에는 모두 참최복을 입었지 기년복을 입은 경우는 없었습니다. 진(晉)나라 말엽에 이르러서도 모후(母后)가 사군(嗣君)을 위하여 여전히 참최의 복제를 지켰는데, 이는 대체로 일단 천하의 인주(人主)가 되고 나면 천하의 아비가 되는 것인만큼 태후(太后)가 아무리 천하의 어미가 된다 하더라도 마땅히 지존의 복을 입어 선군(先君)과 등급을 같도록 해야지 그냥 자최복을 입음으로써 사서(士庶)와 같이 강등시켜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禮)에서 이야기하는 바 ‘감히 친복(親服)으로 지존의 복을 삼지 못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인께서 예를 제정하시면서 자최·참최와 다섯 등급의 복제를 두신 이유는 인륜을 밝히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날의 의논이야말로 국가의 윤강(倫綱)과 직결되는데, 다행히 우리 어른께서 훌륭한 말씀으로 끝까지 논하심으로써 후세에 상고할 바가 있게끔 하셨습니다." 하고, 또 이유태(李惟泰)에게 글을 보내기를,"한인(漢人)의 말에 ‘제후는 탈종(奪宗)하고 성서(聖庶)는 탈적(奪嫡)한다.’는 것이 있는데 이는 대체로 천자와 제후는 나라를 세우고 종통을 바꿨으니만큼 사대부의 예(禮)와 동일하게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정자(程子)가 이를 일컬어 말하기를 ‘종법(宗法)은 천리(天理)로서 마치 나무의 줄기와 같다. 그러나 역시 곁가지가 뻗어나와 줄기로 피는 경우도 있다. 천자가 나라를 세우고 제후가 탈종하는 것이 그것이다.’ 하였는데, 이를 해설하는 자가 말하기를 ‘제후는 한 나라의 주인이 되는만큼 종자(宗子)가 아니라 하더라도 자신에게 종통을 옮겨 올 수 있는 것이다.’ 하였으며, 주 부자(朱夫子)가 또 이를 거듭 밝히기를 ‘제후에게는 2종(宗)이 없고 대부에게는 2묘(廟)가 없는 법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종묘(宗廟)의 예(禮)와 제사의 의(義)와 상복(喪服)의 제도를 일체 여기에 기준해서 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부터 예를 만들고 여기에서부터 의리를 확립해야 할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고금을 막론하고 국가의 대경(大經)과 대륜(大倫)이 되는 것이라 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의논을 들어 보면 ‘효종 대왕(孝宗大王)은 두 번째 적자(嫡子)이니 서자(庶子)에 견주어야 마땅하다. 따라서 대왕 대비로서는 기년복(期年服)으로 강복(降服)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는데, 이것이 과연 앞에서 말한 의리와 합치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허정(許正)095) 이 ‘적자를 세워 장자로 삼는다는 말은 두 번째 적자를 세워도 장자가 된다는 말이다.’고 한 소가(疏家)의 설을 거론하였는데, 그 뜻이 밝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이는 대체로 적처(嫡妻)의 소생이 종서(宗緖)를 계승했을 때에는 ‘비정(非正)’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인데도 서얼(庶孽)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을 지적한 것으로서 그 말이 진정 조리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저의 생각에도 이것은 역시 사서가(士庶家)의 예에나 논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가령 천자나 제후의 경우를 보면, 이미 종묘와 사직의 중한 책무를 받고서 부조(父祖)를 계승하여 지존의 자리에 올라 나라를 다스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위에 더 존엄한 위치가 있을 수 없는 것으로서 몸이 벌써 민서(民庶)와는 현격히 달라 적통(嫡統)이 여기에 있고 종통(宗統)이 이쪽으로 바뀌어지는만큼 적(嫡)이니 서(庶)니 하는 것은 따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장(長)이니 소(少)니 하는 것을 따질 수 있겠습니까. 종통이 있는 사람에게는 복을 높여서 입는 것이 당연하니, 복을 낮추게 되면 즉 종통이 바뀌어지는 것을 의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장서(長庶)의 설만 고집하고 대통(大統)이 중하다는 것은 까마득히 모른 채 항간의 예(禮)를 가지고 왕조(王朝)의 전례(典禮)를 논하고 있으니, 그렇게 해도 되는 것인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천자는 천하의 주(主)가 되고 제후는 한 나라의 종(宗)이 되어 그 이상 높고 존귀한 자리가 있지 않으니, 족인들도 친족 관계를 가지고 그를 대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서자로 강복해야 한다.’고 한다면, 이 또한 그 종(宗)을 둘로 하고 존엄한 위치를 허물어뜨리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러한데도 바로잡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경(經)과 어긋나고 고례와 반대되고 천하의 대의를 위배하는 것이 될테니, 앞으로 미칠 걱정을 생각건대, 비단 오늘날의 명의(名義)가 바르지 못하게 되고 인심이 복종하지 않는 정도로 그치지는 않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성인께서 예를 제정하시면서 오복(五服)의 등급을 나눠 마련해 두신 것은 장차 천질(天秩)을 바르게 하고 천서(天叙)를 밝히려는 목적에서였습니다. 그런데 명의가 어긋나 예를 잃게 되면 윤기(倫紀)를 펼 길이 없게 될 것이니, 도대체 후세에 무슨 말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이유태가 답하기를,"우리들 입장에서 예를 한번 잘못 논했다가는 횡액을 면키 어려울 듯한데 어느 겨를에 기운을 내어 당신과 설왕설래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이어 복제도설(服制圖說)을 지어 해명하였는데, 그 설에,"《의례(儀禮)》 상복(喪服) 참최장(斬衰章) ‘아비가 장자를 위하여[父爲長子]’조(條)의 소(疏)에 ‘적자(嫡子)를 세워 장자로 삼는다.’고 하였는데, 이는 적처(嫡妻)의 소생을 모두 적자라고 이름하는데 첫째 아들이 죽었을 경우 적처 소생의 둘째 아들을 취해 세우면서 그도 역시 장자라고 이름한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적처의 소생을 모두 적자라고 이름한다.’고 한 것은 적처의 아들이라는 것을 말한 것이지 전중(傳重)한 정적(正嫡)이라는 것을 말한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첫째 아들이 죽었을 경우라고 한 것은 아래의 소에서 이야기한 바 ‘적자에게 폐질(廢疾) 혹은 다른 사고가 있거나 죽었는데 아들이 없어 수중(受重)하지 못함으로써 삼년복을 입어주지 못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또 ‘적처 소생의 둘째 아들을 취해 세우면서 그도 역시 장자라고 이름한다.’고 한 것은 첫째 아들이 수중하지 못한 상태에서 죽었을 경우 둘째 아들을 취하여 후계자로 세워야 마땅한데 오직 그가 적처의 소생이어야만 삼년복을 입어주지 그가 첩의 소생일 경우에는 후계자로 세워졌어도 그를 위해서는 삼년복을 입어줄 수 없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적자에게 폐질 또는 다른 사고가 있거나 아들이 없이 죽어 수중(受重)하지 못한 경우는, 정체(正體)이긴 하나 전중(傳重)하지 못한 것에 해당되는데 전중하지 못했기 때문에 삼년복을 입어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서자(庶子)를 세워 후계자로 삼았을 경우를 살펴 보건대, 서자에게도 장자처럼 삼년복을 입어줄 수 없다는 조목의 소(疏)에 ‘서자라고 하는 것은 첩의 아들에 대한 칭호인데 적처 소생의 둘째 아들도 모두 서자라고 표현한 것은 정적(正嫡)과 구별하여 혐의를 멀리 피하려고 한 것이다.’고 하였으니, 마땅히 똑같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대저 정적(正嫡)은 한 사람 밖에는 없습니다. 적자에게 폐질 또는 다른 사고가 있거나 아들이 없이 죽어 수중하지 못함으로써 삼년복을 입어줄 수 없을 때 그 적자는 정적이 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적자가 죽었어도 정적이 되지 못해 삼년복을 입어주지 않게 된 연후에야 그 뒤를 이어 올라가 후계자가 된 사람이 정적이 되는 것이니 그를 위해서는 응당 삼년복을 입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령 적자가 죽었어도 그를 위해 이미 정적(正嫡)에 해당되는 삼년복을 입어주었을 경우에는 그 뒤를 이어 올라가 적자로 된 사람이 아무리 적처의 소생이라 하더라도 이는 서자를 세워 후계자로 삼은 것이니, 그를 위해 다시 삼년복을 입어주는 것은 부당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정적에는 두 사람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허헌(許憲)096) 의 설대로 한다면, 가령 대부(大夫) 사(士)의 적처 소생에 수십 명이 있다고 할 경우, 첫째 아들이 죽었을 때에도 삼년복을 입어주고 둘째 아들이 죽었을 때에도 삼년복을 입어주며 불행히 셋째 넷째가 죽고 다섯때 여섯째가 죽었을 때에도 모두 삼년복을 입어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치상 그렇게 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소(疏)에 이르기를 ‘서자(庶子)는 첩의 아들의 호칭이다. 그런데 적처 소생의 둘째 아들은 중자(衆子)인데도 지금 똑같이 서자라고 이름한 것은 장자와 멀리 구별하기 위해서이다. 이런 까닭에 첩의 아들과 똑같은 호를 쓰고 있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에 의거하건대, 적자가 죽었을 때 이미 그를 위해 삼년복을 입어주었을 경우에는, 그 뒤에 둘째 아들로서 뒤를 이어 적자로 된 자가 비록 적처의 소생이라 하더라도 어찌 서자로서 후계자가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소에서 ‘적처 소생은 모두 적자라고 이름한다. 첫째 아들이 죽은 경우 적처 소생의 둘째 아들을 취하여 세우는데, 그도 역시 장자라고 이름한다.’고 한 이 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대체로 보건대, 첫째 아들이 죽은 경우라고 하는 것은 아래의 소에서 이야기한 바 적자에게 폐질 또는 다른 사고가 있거나 아들이 없이 죽어 수중(受重)하지 못함으로써 삼년복의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 경우를 말합니다. 그리고 적처 소생의 둘째 아들을 취하여 세웠을 때에도 역시 장자라고 이름한다고 한 것은 첫째 아들이 수중(受重)하지 못한 상태에서 죽었을 경우 둘째 아들을 취하여 후계자로 세워야 마땅한데 이때에도 오직 적처의 소생이라야만 삼년복을 입어 준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이는 대체로 첩의 소생일 경우에는 아무리 후계자로 세워졌다 하더라도 삼년복을 입어주어야 할 대상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밝힌 것입니다. 천한 소견을 가지고 함부로 손을 놀려 복제도를 꾸며 보았습니다만, 어떤 이는 말하기를 ‘이것은 장자가 장차 자신을 대신하여 승중(承重)할 때에 입어주는 복을 논한 것이다. 그러나 가령 제왕가(帝王家)와 같은 경우는 대통(大統)을 중시하는 법이니, 비록 지자(支子)로 들어와 계승했다 하더라도 태상황(太上皇)이 살아 계시면 사군(嗣君)의 상(喪)으로 대우하여 응당 삼년복을 입어줄 것이다.’ 합니다. 그러나 이 설이 과연 옳다고 한다면, 아우가 형을 계승하고 숙부가 조카의 뒤를 잇는 경우라 하더라도, 정체(正體)니 비정체(非正體)니 하는 것을 따질 필요도 없이 모두 삼년복을 입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내용이 경문(經文)에 나타나지 않고 제후에 관한 예는 아직 배워보지 못하였으니, 예서에 없는 예를 감히 망령되게 늘어놓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명종 대왕(明宗大王)을 위한 인성 왕후(仁聖王后)의 복제 문제에 대해 기고봉(奇高峰)097) 이 응당 삼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하였을 때 퇴계(退溪)는 말하기를 ‘어찌 기년(期年)으로 그치면 안 될 이치가 있겠는가.’ 하였었습니다." 하였다. 그 뒤 4월에 윤선도(尹善道)가 대소(大疏)를 올려 양송098) 이 예(禮)를 잘못 의논하였다고 논척하였는데, 삼사가 함께 일어나 논죄하여 선도를 변방에 유배시켰다. 이에 선도가 안치(安置)된 상태에서 또 예설(禮說)을 지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어떤 이가 나에게 묻기를 ‘《의례》 상복 참최장에 「아비가 장자를 위해 입어주는 복이다.」 하였고, 그 전(傳)에 「어째서 3년인가? 위로 정체(正體)가 되고 또 전중(傳重)하기 때문이다.」 하였는데, 소위 정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기에 내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정(正)은 직(直)과 같고 체(體)는 간(幹)과 같으며 소위 위라고 하는 것은 곧 조선(祖先)을 말한다. 이를 나무에 비유해 보건대, 조선은 나무의 뿌리와 같고 후세의 자손은 나무의 줄기와 같다. 그리고 여러 아들들은 모두 나무의 가지와 같은데 유족 장자만은 곧바로 나무의 뿌리와 나무의 줄기에 연결되기 때문에 전에서 ‘위로 정체가 된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사대부가(士大夫家)의 예는 오직 연장자를 장(長)으로 삼지만, 천자와 제후의 경우는 나이의 다소나 출신 성분의 귀천을 따지지 않고 단지 후계자로 된 사람을 장으로 삼는데, 장이 될 경우 위로 정체가 되는 것은 매 일반이다. 대체로 볼 때 천하는 천하의 천하요 국가는 국가의 국가이다. 따라서 인군(人君)은 마땅히 종사(宗社)와 생령(生靈)을 위주로 해야지, 일 개인의 정이나 한 집안의 사사로움을 가지고 천하나 국가를 바라보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비록 가천하(家天下)하기 시작한 이후의 시대라 하더라도 간혹 훌륭한 인물을 가려 후계자로 세운 때가 있었으니, 고공단보(古公亶父)가 문왕(文王)을 성스럽게 여겨 계력(季歷)을 세운 일이라든가 문왕이 백읍고(伯邑考)를 버리고 무왕(武王)을 세운 일이라든가 미자(微子)가 그 적손(嫡孫) 둔(腯)을 놔두고 그 중자(衆子) 연(衍)을 세운 일이라든가 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일단 태자나 세자로 서게 되면, 아무리 그가 중자 중에 가장 막내이거나 가장 천한 얼자라 하더라도, 이치상으로 보면 마땅히 적(嫡)이 되고 장(長)이 되어 위로 정체(正體)가 되는 것이니, 나이의 다소나 적서(嫡庶)의 구별 같은 것은 따질 수가 없는 것이다. 한인(漢人)이 이른바 ‘곁가지가 뻗어나와 줄기가 되는 것과 같다.’고 한 것이 이것이고, 《의례》의 소설(疏說)에서 이른바 ‘둘째 아들을 세웠을 때에도 역시 삼년복을 입어준다.’고 한 것이 이것이고, 소석(疏釋)에서 이른바 ‘적처 소생의 둘째 아들을 세웠을 때에도 역시 그를 장자라고 이름한다.’고 한 것이 이것이고, 주 부자(朱夫子)가 이른바 ‘제후에게는 2종(宗)이 없다.’고 한 것이 이것이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이른바 「체이긴 하나 정이 되지는 못한다[體而不正]」고 하는 설은 무엇인가?’ 하기에, 내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태자라고 이름하고 세자라고 이름할 때 이른바 태자니 세자니 하는 것이야말로 모범적인 행동이 현저하게 드러날 뿐더러 적(嫡)이 되고 장(長)이 되어 그와 필적할 만한 다른 아들들이 없을 경우에 붙이는 칭호이다. 그렇다면 태자가 되고 세자가 되면 그가 장자가 되는 것이 분명하니, 또 어찌 이치상 ‘체이부정(體而不正)’이 될 수 있겠는가. 석(釋)에서 말한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니 다시 변론할 필요가 없다 하겠다. 내 생각에는 소설(疏說)의 이른바 ‘서자가 승중했을 때에는 삼년복을 입어주지 않는다[庶子承重不爲三年]’고 한 문자 중에 ‘불(不)’자는 ‘역(亦)’자의 잘못이 아닐까 여겨진다. 《대학(大學)》의 책을 펼치자마자 첫번째로 말하는 ‘신민(新民)’의 ‘신(新)’자가 ‘친(親)’자로 잘못되어 있고 보면, 《의례》의 허다한 소설 가운데 ‘역위삼년(亦爲三年)’의 ‘역(亦)’자가 ‘불(不)’자로 잘못되어 있다고 해서 괴상하게 여길 것이 뭐가 있겠는가. ‘신’자가 ‘친’자로 잘못 전해진 것이 음(音)이 서로 비슷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고 보면, ‘역’자가 ‘불’자로 잘못 베껴진 것도 글자가 서로 유사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분명한 듯하다. 만약 그렇지 않고 분명히 ‘불’자가 잘못이 아니며 소(疏)의 뜻이 본래 그러한 것이라면, 석(釋)에서 말한 ‘체이부정’의 설과 똑같이 잘못된 해석을 내렸다고 하는 것이 역시 확실하다 하겠다. 소설(疏說)에서 ‘심의는 옷섶을 잇고 가장자리를 구부러지게 한다.[深衣續袵鉤邊]’고 해석하고, 상례(喪禮)중 ‘담제는 1개월의 간격을 둔다.[禫祭間一月]’고 한 말이 수천 년 동안 잘못된 채로 답습되어 오다가 주 부자의 말년에 이르러서야 바로잡히게 되었었으니, 소설은 어찌 다 믿을 수 있겠는가. 맹자(孟子)가 ‘글을 다 믿는 것은 차라리 글을 보지 않는 것만 못하다.’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소설의 이른바 ‘둘째 아들을 세웠을 때에도 그를 위해 삼년복을 입어준다.’고 한 것이야말로 천리(天理)에 들어맞는 것으로서 경(經)을 세우고 전(傳)을 지은 주공(周公)과 자하(子夏)의 뜻을 깊이 밝힌 것이라 할 것이니, 이 예를 믿고 쓰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에 반해 이른바 ‘승중(承重)했어도 삼년복을 입어주지 않는다.’고 한 것은 천리에 맞지 않는 것으로서 경과 전을 지은 주공과 자하의 뜻에 크게 위배되니, 어떻게 모두 믿고 쓸 수 있겠는가. 어떤 이가 말하기를 ‘예(禮)로 보면 그러하다. 그러나 조정의 의논을 보면 「예가 행해지든 행해지지 않든 국가의 안위(安危)와는 조금도 상관이 없다.」고 하는데, 어찌하여 그대만 유독 이것이야말로 대통(大統)을 밝히고 백성의 뜻을 안정시키고 종사(宗社)를 굳건히 하는 예라고 하면서 심각하게 걱정하고 상세히 말하는 것인가?’ 하기에, 내가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아, 이것이 무슨 말인가.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예(禮)가 일어난 연후에야 만물이 안정된다.’ 하였다. 예가 아니면 미소한 사물도 모두 안정을 얻을 수가 없는 법인데 더구나 크고 중하기만 한 천하나 국가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사소한 절문(節文)도 변론하지 않을 수 없는 법인데, 더구나 부자(父子)의 윤서(倫序)와 군신(君臣)의 등위(等威)를 그대로 내맡겨 문란하게 해놓고서도 안정을 얻을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예기》에 이르기를 ‘예의 목적은 친소(親疎)를 정하고 혐의를 판단하고 동이(同異)를 구별하고 시비를 밝히는 것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군신·상하·부자·형제 관계가 예가 아니면 바르게 되지 못한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부조(父詔)를 받들어 세자가 되었고 천명을 받아 종사(宗社)를 지켰고 지존의 자리에 올라 10년 동안이나 나라를 다스리며 신민을 통치했던 효종 대왕에 대해 적(嫡)도 아니고 장(長)도 아니라고 하며 끝끝내 서자의 예로 대우하려고 하니, 어찌 된 일인가. 단상(短喪)을 한다면 그것은 그래도 가능하다. 그러나 예를 어떻게 이런 식으로 논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식으로 한다면 친소가 정해지고, 혐의가 판별되고, 동이가 구별되고, 시비가 정해지고, 군신·상하·부자·형제의 올바른 관계가 정립되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하고서도 대통(大統)이 밝혀지고, 신민의 뜻이 정해지겠는가. 대통이 밝혀지지 않고 백성의 뜻이 정해지지 않는다면 종사가 굳건해질 수 있겠는가. 공자(孔子)께서 이르시기를, ‘이름이 바르지 못하면 말이 이치에 순하지 못하고, 말이 순하지 못하면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예악(禮樂)이 일어나지 못하고, 예악이 일어나지 못하면 형벌이 알맞게 되지 못하고, 형벌이 알맞게 되지 못하면 백성들이 꼼짝할 수 없게 된다. 이 때문에 군자가 이름을 붙이면 반드시 말할 수 있으며 말하면 반드시 행할 수 있는 것이다.’고 하였다. 그런데 지금 예를 논하는 자들을 보건대, 둘째 아들 역시 모두 장자라고 이름하면서도 그를 위해 참최복을 입어주면 적통(嫡統)이 엄해지지 못한다고 한다. 아, 대통을 이어 종묘를 받들고 한 나라에 군림(君臨)했는데도 적(嫡)이라고 말하지 못하고 장(長)으로 삼지 못한단 말인가. 이런 이가 장이 되지 못한다면 어디에서 장을 구한단 말이며, 이런 이가 적이 되지 못한다면 적이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다른 곳에 장이 있고 다른 곳에 적이 있다고 한다면, 종(宗) 역시 다른 곳에 있다는 말인가. 아니면 종도 둘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존엄성을 무너뜨리고 인주를 비하하려고 하는 것이 분명하니, 군부(君父)를 폄출(貶黜)하는 것과 비슷한 일이 되지 않겠는가. 이것이야말로 이른바 ‘임금이 임금답게 되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게 되지 못하며 나라가 나라답게 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니, 이보다 더 크게 이름이 바르게 되지 못하는 경우가 어디에 있겠는가. 이렇게 하고서도 반드시 말할 수 있으며 반드시 행할 수 있겠는가. 명분이 바르게 되지 못한 결과는 꼭 백성이 꼼짝할 수 없는 데까지 이르는 것이고 보면 백성의 뜻이 정해지지 못하리라는 것은 확실한 일이다. 백성의 뜻이 정해지지 못하는 것이 확실하다면 종묘 사직이 굳건해지지 못하리라는 것도 확실한 일이다. 따라서 내가 대통을 밝히고 백성의 뜻을 안정시키고 종묘 사직을 굳건히 하는 길이 여기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지나친 일이 아니다. 그러니 내가 심각하게 우려하고 상세하게 말하는 일을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어떤 이가 말하기를 ‘그대가 항장(抗章)한 데 대해서 혹 질시하여 헐뜯으며 참소한다고 하기도 하고, 혹은 화(禍)를 일으킬 기틀을 꾸며내고 있다고 하기도 하고, 혹은 겉으로는 예를 논한다고 핑계대면서 속으로는 실제로 사람을 모함하고 있다고 하기도 하는데, 과연 대송(大宋)099) 에게 악감정을 가지고 그를 함정에 빠뜨리려 한 것인가? 당초 어찌하여 사람들의 말이 있을 것을 생각지도 않고 기화(奇禍)를 피하려고도 하지 않은 채 이처럼 위태로운 말을 했단 말인가?’ 하기에, 내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내가 대송에게 무슨 악감정이 있어서 그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했겠는가. 나의 본 마음은 그저 성명께서 깨달으시어 대례가 올바르게 되기를 기대했던 것일 뿐이다. 송공(宋公)을 모함하려고 하는 뜻이 어디에 있었겠는가. 가령 내가 송공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뜻이 있었다면, 내가 상소하면서 왜 단궁 문(檀弓免)과 자유 최(子游衰)100) 의 설을 거론하지 않았겠는가. 당초 대송이 수의(收議)한 내용 가운데 ‘가소(賈疏)101) 에서 단지 첫째 아들이 죽었다고만 말하고, 첫째 아들이 죽었는데 그의 후계자가 없다고는 말하지 않았는데, 그렇다면 이는 성인(成人)이 되지 못한 상태에서 죽은 경우를 가리키는 것인 듯싶다. 이 점이야말로 긴요한 대목이다. 그런데 지금 허목(許穆)의 설을 보건대, 《의례》의 문장의 본 뜻을 자세히 상고해보지도 않은 채 무턱대고 자기 주장을 내세운 듯한데, 그렇다면 단궁이 문을 한 것이나 자유가 최 차림을 한 것 모두 돌아볼 가치가 없다는 말인가.’ 하는 말이 있었다. 단궁의 문과 자유의 최에 대한 설은 《예기(禮記)》 단궁편(檀弓篇)에 나오는데, 그 말을 상고해 보면 모두가 적손(嫡孫)을 세워야 한다는 취지의 설들이다. 소현(昭顯)이 죽고난 뒤 인조 대왕께서 세자를 세울 당시라면 그가 혹 천리의 대의(大義)와 성인의 대권(大權)을 모른 나머지 상경(常經)을 내세워 이런 말씀을 드렸다 해도 괜찮다 할 것이다. 그러나 효종 대왕께서 임금으로 임하신 지 10년이 지난 뒤에 와서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가 있단 말인가. 혹시라도 송(宋)을 좋아하지 않는 자가 있어 이 말을 꼬집어 낸 뒤 단궁편 양장(兩章)의 내용을 모조리 말해버리면서 송의 죄를 논한다면, 송은 필시 스스로 해명할 말이 없게 될 것이다. 내가 송을 위해 이 점을 염려하였기 때문에 간단간단하게 이 설을 제기하였는데, 내가 소를 올리면서 ‘시열이 망령되지 않았다면 어리석은 사람이다.’ 하고 또 ‘불인(不仁)한 자가 아니면 부지(不智)한 자이다.’고 하였으니, 나는 그래도 그가 망발(妄發)한 말을 견해가 잘못되었던 것으로 돌리려고 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꼭 내가 송을 무함하려 했다고 하지만 실제로 내 말은 송을 변호하려는 입장에서 나온 것이었다. 아, 볕들고 비내리는 것이 절도를 잃어 거듭 기근이 닥치고 있는데 곡식이 익지 않아 민생(民生)이 불안하고 대명(大命)이 박두한 듯 만물이 길러지지 않는 것이 이때보다 심한 적이 없었다. 어쩌면 하늘에 계신 효종 대왕의 영령께서도 오르내리시며 편안치 못하실텐데, 하늘과 조종(祖宗)께서 위엄을 내려 경계시키면서 우리에게 인책토록 하는 것은 아니겠는가. 어떤 이가 말하기를 ‘대송(大宋)이 의논드리기를 「둘째 적자 이하는 아무리 인군(人君)의 모제(母弟)라 하더라도 역시 서자(庶子)라고 한다.」 하고, 또 「효종 대왕이 인조 대왕의 서자라 해도 아무 상관이 없다. 서자는 천한 자를 가리키는 개념이 아니고 중자(衆子)라는 뜻이다. 《예경(禮經)》을 상고해 보면 이런 종류가 매우 많다.」 하였는데, 이 설이 어떠한가?’ 하기에, 내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예경에 중자를 서자라고 했다는 이 설은 참으로 옳다. 다만 원래 중자였다 하더라도 일단 그를 세워 태자로 삼고 세자로 삼은 뒤에는 그의 명칭을 적자요 장자라고 해야 마땅하지 그대로 서자라고 해서는 안 된다. 장차 전중(傳重)할 자도 그러한데, 더구나 이미 전중해서 대통을 받들고 군림(君臨)한 뒤에 와서 그를 예전 그대로 서자라고 부르며 서자의 예로써 대우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소설(疏說)을 보건대 ‘둘째 아들을 세웠을 때에도 그를 위해 삼년복을 입어준다.’ 하였는데, 그 아래에서는 또 ‘서자(庶子)가 승중(承重)하면 삼년복을 입어주지 않는다.’ 하였다. 고문(古文)에 중자를 서자로 한 곳이 원래 많지만 첩의 아들을 서자로 기록한 곳도 많이 나온다. 소설에서 말한 서자가 과연 중자라고 한다면 이것은 즉 둘째 아들이라는 말이 되는데, 그렇다면 어찌 이처럼 말을 다르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글을 볼 때에는 한 단어에 집착하여 한 문장의 뜻을 오해하면 안 되고,102) 한 문장에 집착한 나머지 전체적인 뜻을 왜곡시켜서도 안 되고, 그 참뜻이 무엇인지를 깊이 따져모아야 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건대, 소에서 말한 서자가 첩의 아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면 그래도 뜻이 통하지만, 송공(宋公)처럼 서자를 둘째 아들의 개념으로 본다면 위와 아래 문장의 설이 모순되니 잘못이 아닐까 의심되는 것이다. 따라서 나의 어리석은 견해로는, 여기에서 ‘삼년복을 입어주지 않는다[不爲三年]’고 했을 때의 ‘불(不)’자는 ‘역(亦)’자의 잘못이 아닌가 여겨지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소의 이 설은 이치에도 어긋나고 경(經)에도 어긋나니 신용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대송이 상소한 말을 보건대 「한 문제(漢文帝)가 남월(南越)에 준 글을 보건대 『짐은 고황제(高皇帝)의 측실(側室)의 아들이다.』고 하였다. 그런데도 당시에 한 문제를 모자라게 보지 않았으며, 그뒤 국가에 많은 변고가 있긴 하였지만 통서(統緖)를 이어 즉위한 자는 모두 한 문제의 자손이었다. 따라서 비록 측실의 아들이라고 일컫더라도 원래 정통(正統)을 전수하는 데 아무 상관이 없는 법이다. 그런데 더구나 적자로서 둘째 아들인 우리 선대왕(先大王)의 경우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하였는데, 이 설이 어떠한가?’ 하기에, 내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스스로 고황제의 측실이라고 말한 것은 한 문제의 겸사(謙辭)이다. 당시 신하 중에서 또한 고황제의 측실의 아들이라고 말한 자가 있었던가. 그리고 출신 성분을 이야기하면 아무리 고황제의 측실의 아들이라고 하더라도, 일단 즉위한 때로부터 보면 고황제의 적(嫡)이요 장(長)으로서 당시 신하들의 인식도 이러하였고 추대한 것도 이러하였기 때문에, 문제가 그 자리를 편안히 여길 수 있게 되어 종묘(宗廟)에 제사를 지내고 자손을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반대로 당시 신하들이 문제에 대해 적(嫡)이 못 되고 장(長)이 못된다고 하면서 혹 ‘적통(嫡統)이 엄숙하게 되지 못한다.’는 설을 내놓기도 하고 ‘단궁(檀弓)이 문(免)하고 자유(子游)가 최(衰)한 것 모두가 과연 돌아볼 가치도 없다는 말인가.’라고 의논을 내놓기도 했다고 하자. 이런 상황이었는데도 조정이 태연하게 괴상히 여기지도 않은 채 일찍 변론하지 않았다면, 천하의 인심이 안정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고서도 문제가 끝내 그 자리를 편안히 여겨 종묘에 제사를 지내고 자손을 보전할 수 있었겠는가? 따라서 당초 항장(抗章)했던 것도 구신(舊臣)으로서 차마 선왕을 저버리지 못하겠기에 나온 행동으로서 이에 감히 우리 자손과 백성을 보호해야 한다는 설을 올리게 된 것이었다. 이렇게 한 것이 무슨 죄가 된단 말인가. 그런데도 저 삼사(三司)가 양송(兩宋)의 뜻을 떠받들어 무함한 것이 끝이 없었으니, 이것을 과연 국가를 위한 말이었다고 하겠는가. 옛날에 쾌산(快山)의 야수(野叟)가 밭을 갈다가 피곤해 밭갈이를 쉬고는 둔덕 위에서 잠깐 잠이 들었다. 이때 호랑이가 와서 그 늙은이를 물려 하자 그 늙은이의 소가 힘껏 싸워 호랑이를 쫓아버렸는데, 호랑이가 떠나고 나자 밭이 엉망이 되었다. 늙은이가 잠에서 깨어나서는 소가 호랑이를 물리치느라 밭이 엉망이 된 사실은 알지 못하고 마침내 소에게 화를 내어 소를 죽여버렸다. 세상에서는 이를 쾌산의 원우(冤牛)라고 일컫고 있다. 구신이 북쪽 변방에 유배된 것이 어찌 원우(冤牛)와 같은 경우가 아니겠는가. 시비(是非)와 사정(邪正)이 멋대로 전도(顚倒)되게 한 결과, 장래 국가의 일이 좋게 되어갈지 감히 알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하였으니, 어찌 한심함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야말로 옛날에 이른바 ‘큰 집 한 모퉁이에서 화염이 이미 치솟고 있는데 마루에 있는 제비는 즐겁게 놀기만 하면서 불길이 장차 뻗쳐 오리라는 것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니, 또한 애달플 뿐이라 하겠다."
【태백산사고본】 7책 7권 7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374면
【분류】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 인사-임면(任免) / 왕실-의식(儀式) / 역사-편사(編史)
[註 083] 예척(禮陟) : 임금의 승하.[註 084] 자의 왕대비(慈懿王大妃) : 인조(仁祖)의 계비(繼妃).[註 085] 경자년 : 1660 현종 원년.[註 086] 가소(賈疏) : 《의례》 정현(鄭玄)의 주(注)에 불인 당나라 가공언(賈公彦)의 소.[註 087] 탈종(奪宗) : 종통(宗統)을 자신에게 옮겨 오는 것.[註 088] 성서(聖庶) : 서자로서 왕위에 오른 자를 말함.[註 089] 탈적(奪嫡) : 적통(嫡統)을 자신에게 옮겨 오는 것.[註 090] 풍패(豐沛) : 한 고조가 기병(起兵)한 곳으로서 제왕의 고향이라는 뜻으로 쓰임.[註 091] 태사(太姒) : 문왕(文王)의 비(妃)이며 무왕의 생모임.[註 092] 태종(太宗) : 한 고조의 아버지.[註 093] 번후(樊后) : 광무의 어머니.[註 094] 오속(五屬) : 오복(五服) 즉 참최·자최·대공·소공·시마복을 입어야 하는 친족.[註 095] 허정(許正) : 허목(許穆)을 말함.[註 096] 허헌(許憲) : 허목(許穆)을 말함.[註 097] 기고봉(奇高峰) : 기대승(奇大升).[註 098] 양송 : 송시열과 송준길.[註 099] 대송(大宋) : 송시열(宋時烈).[註 100] 단궁 문(檀弓免)과 자유 최(子游衰) : 단궁과 자유가 후계자를 잘못 세운 사람들을 은근히 비난하면서 깨우쳐 주기 위해 각각 적당한 상복이 아닌 문과 최를 일부러 하고 문상했던 고사. 《예기(禮記)》 단궁(檀弓) 상(上). 송시열이 허목(許穆)의 설을 반박하기 위해 의논드리면서 바로 이 설을 인용하였는데, 이 설의 주안점이 적손(嫡孫)을 세워야 한다는 데 있는 것이었고 보면, 결과적으로 효종이 즉위한 것을 비난한 것이 되어, 치명적인 타격을 받는 요인이 되는 것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음.[註 101] 가소(賈疏) : 당(唐)나라 가공언(賈公彦)이 《의례》 정현(鄭玄)의 주(注)를 해설한 소.[註 102] 한 단어에 집착하여 한 문장의 뜻을 오해하면 안 되고, : 《맹자(孟子)》 만장(萬章) 상(上)에 나오는 말로서 원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불이문해사(不以文害辭) 불이사해지(不以辭害志) 이의역지(以意逆志)"
사신은 논한다. 효묘(孝廟)가 예척(禮陟)083) 하였을 때, 예관(禮官)이 장차 자의 왕대비(慈懿王大妃)084) 의 복제를 의논하려 하였는데, 전 지평 윤휴만이 홀로 참최(斬衰) 삼년복을 입어야 한다는 설을 주창하였다. 이에 예조가 아뢰기를,"자의 왕대비께서 대행 대왕의 상에 입어야 할 복제를 마련해야 하는데, 어떤 이는 삼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하고 어떤 이는 기년복(期年服)을 입어야 한다고 합니다만, 근거할 예문(禮文)이 없으니, 대신에게 의논하소서." 하니, 상이 이를 따르면서 특히 두 찬선(贊善)에게 일체의 것을 문의하도록 하였는데, 두 찬선은 곧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이다. 영돈녕부사 이경석(李景奭), 영의정 정태화(鄭太和), 연양 부원군(延陽府院君) 이시백(李時白), 좌의정 심지원(沈之源), 우의정 원두표(元斗杓), 완남 부원군(完南府院君) 이후원(李厚源) 등이 헌의하기를,"시왕(時王)의 제도로 상고해 보건대 기년의 복제가 마땅할 듯합니다." 하고, 송시열과 송준길도 헌의하기를,"고금의 예율(禮律)이 이미 다른데다가 제왕과 관련된 복제는 섣불리 의논 드리기가 더욱 어렵습니다. 그런데 대신들이 일단 시왕의 제도를 가지고 의논드렸는데, 신들로서도 감히 다시 다른 설은 용납하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의논한 대로 시행하도록 명하여 마침내 기년의 복제로 확정되었다. 이에 예를 안다는 사람들 역시 다른 주장을 하지 않게끔 되었는데, 윤휴가 계속 전에 했던 주장을 고집하였으므로 사림이 걱정하며 홍수나 맹수의 해에 견주기까지 하였다. 그 뒤 경자년085) 3월에 장령 허목(許穆)이 재차 상소하여 기년복으로 정한 것은 잘못이라고 논하였는데, 원두표 혼자서 전에 의논드렸던 태도를 바꿔 허목의 설을 따랐다. 윤휴가 이에 허목에게 글을 보내기를,"이번에 어른께서 논한 것을 보건대 조리가 있고 근거할 곳이 있으니 그야말로 오늘날의 의논들을 쳐부수기에 충분하다 하겠습니다. 《의례(儀禮)》 주소(註疏) 중에 ‘적자(嫡子)를 세워 장자(長子)로 삼는다.’고 한 설의 뜻이 매우 분명하니, 부부(夫婦)의 소생으로서 조종(祖宗)으로부터 수중(受重)한 자를 ‘비정(非正)’이라고 하는 것은 의리가 없다 할 것이고 첩(妾)의 아들과 동일시하는 것은 매우 어긋나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저의 생각으로는, 가소(賈疏)086) 에서 논한 것은 단지 사대부가의 예제일 뿐으로서, 왕후가(王侯家)에서 수중하지 못한 경우를 언급하기도 했지만 이것은 사자(士者)에 비유하기 위해 거론한 것일 따름이니 위로 천자나 제후에 적용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은 못 된다고 여겨집니다. 옛날부터 말해 오기를 ‘제후는 탈종(奪宗)087) 하고 성서(聖庶)088) 는 탈적(奪嫡)089) 한다.’고 하였습니다. 일단 차서(次序)를 이어 종묘 사직의 주인이 되는 위치가 되었고 보면, 종통(宗統)도 여기에 있게 되고 자연히 장자의 권한도 갖게 되는 것인만큼, 그를 위해서는 계체(繼體)한 자에게 입어주는 복을 입고 지존에게 입어주는 복을 입어야 하는 것이니, 또 어떻게 장소(長少)와 적서(嫡庶)를 따질 수 있겠습니까. 무왕(武王)이 일단 천자가 된 이상 백읍고(伯邑考)에게 사속(嗣續)이 있다 하더라도 태왕(太王)과 왕계(王季)의 적통이 될 수 없고, 한 고조(漢高祖)가 일단 왕이 되고 황제가 된 이상 아무리 유중(劉仲)이 장자라 하더라도 풍패(豐沛)090) 에서 종방(宗祊)의 제사를 주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무왕이 죽었을 때 태사(太姒)091) 가 아직 살아 있었다면 마땅히 그를 위해 계체(繼體)의 복을 입고 백읍고에게 중한 지위를 돌리지 않았을 것이며, 한 고조가 죽었을 때 태종(太宗)092) 이 별 탈이 없었고 광무(光武)가 죽었을 때 번후(樊后)093) 가 잘 살고 있었다면 마땅히 천하 사람들과 함께 지존(至尊)의 복을 입었지 유중과 백승(伯升)을 적통으로 삼은 나머지 한 고조와 광무의 복을 낮추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 경우는 그래도 적자(嫡子) 출신들의 예를 들어 말한 것입니다. 가령 한 문제(漢文帝)나 무제(武帝)는 모두 측실(側室)의 아들로서 황제의 자리에 올랐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아비가 되고 어미가 된 자들이 그들을 서자(庶子)로 논하여 계체한 지존의 복을 입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계체한 지존에게는 참최복을 입어주어야 한다는 것이야말로 상경(常經)이요 대의(大義)입니다. 일반 서민의 집에서도 장자를 위해서는 참최복을 입어주는데, 그 이유는 그가 조부(祖父)의 통서(統序)를 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종묘 사직을 지킬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고 천하 만백성의 주인이 된 자에 대해서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의 장자됨이 크고 그가 종통을 잇는 것이 존귀하다 하겠습니다. 그를 장자로 삼지 않으면 누구를 장자라고 할 것이며, 그를 두고 종통을 이은 자라고 하지 않는다면 어디에 가서 종통을 잇게 하겠습니까. 그리고 《의례(儀禮)》에서 논한 것을 보건대 ‘장차 전중(傳重)할 사람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미 천지와 종방의 주인이 되는 중차대한 책임을 진 사람에게 대하여 여전히 강복(降服)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이는 종통을 둘로 하고 그 주인되는 사람을 낮추는 것이 되니, 옳은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오늘날의 논을 보면 심지어 ‘둘째 아들은 강등하여 서자(庶子)로 대우하는 예(例)를 따른다.’고 하니, 어찌된 일입니까. 예를 잃으면 혼란하게 되고 명목(名目)이 제대로 세워지지 않으면 어그러지게 되니 작은 일이 아닐 듯싶습니다. 또 《의례》를 살펴보건대, 제후와 오속(五屬)094) 의 친족 관계가 있는 자들은 모두 참최복을 입도록 되어 있는데, 천자나 제후의 상(喪)에는 모두 참최복을 입었지 기년복을 입은 경우는 없었습니다. 진(晉)나라 말엽에 이르러서도 모후(母后)가 사군(嗣君)을 위하여 여전히 참최의 복제를 지켰는데, 이는 대체로 일단 천하의 인주(人主)가 되고 나면 천하의 아비가 되는 것인만큼 태후(太后)가 아무리 천하의 어미가 된다 하더라도 마땅히 지존의 복을 입어 선군(先君)과 등급을 같도록 해야지 그냥 자최복을 입음으로써 사서(士庶)와 같이 강등시켜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禮)에서 이야기하는 바 ‘감히 친복(親服)으로 지존의 복을 삼지 못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인께서 예를 제정하시면서 자최·참최와 다섯 등급의 복제를 두신 이유는 인륜을 밝히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날의 의논이야말로 국가의 윤강(倫綱)과 직결되는데, 다행히 우리 어른께서 훌륭한 말씀으로 끝까지 논하심으로써 후세에 상고할 바가 있게끔 하셨습니다." 하고, 또 이유태(李惟泰)에게 글을 보내기를,"한인(漢人)의 말에 ‘제후는 탈종(奪宗)하고 성서(聖庶)는 탈적(奪嫡)한다.’는 것이 있는데 이는 대체로 천자와 제후는 나라를 세우고 종통을 바꿨으니만큼 사대부의 예(禮)와 동일하게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정자(程子)가 이를 일컬어 말하기를 ‘종법(宗法)은 천리(天理)로서 마치 나무의 줄기와 같다. 그러나 역시 곁가지가 뻗어나와 줄기로 피는 경우도 있다. 천자가 나라를 세우고 제후가 탈종하는 것이 그것이다.’ 하였는데, 이를 해설하는 자가 말하기를 ‘제후는 한 나라의 주인이 되는만큼 종자(宗子)가 아니라 하더라도 자신에게 종통을 옮겨 올 수 있는 것이다.’ 하였으며, 주 부자(朱夫子)가 또 이를 거듭 밝히기를 ‘제후에게는 2종(宗)이 없고 대부에게는 2묘(廟)가 없는 법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종묘(宗廟)의 예(禮)와 제사의 의(義)와 상복(喪服)의 제도를 일체 여기에 기준해서 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부터 예를 만들고 여기에서부터 의리를 확립해야 할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고금을 막론하고 국가의 대경(大經)과 대륜(大倫)이 되는 것이라 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의논을 들어 보면 ‘효종 대왕(孝宗大王)은 두 번째 적자(嫡子)이니 서자(庶子)에 견주어야 마땅하다. 따라서 대왕 대비로서는 기년복(期年服)으로 강복(降服)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는데, 이것이 과연 앞에서 말한 의리와 합치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허정(許正)095) 이 ‘적자를 세워 장자로 삼는다는 말은 두 번째 적자를 세워도 장자가 된다는 말이다.’고 한 소가(疏家)의 설을 거론하였는데, 그 뜻이 밝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이는 대체로 적처(嫡妻)의 소생이 종서(宗緖)를 계승했을 때에는 ‘비정(非正)’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인데도 서얼(庶孽)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을 지적한 것으로서 그 말이 진정 조리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저의 생각에도 이것은 역시 사서가(士庶家)의 예에나 논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가령 천자나 제후의 경우를 보면, 이미 종묘와 사직의 중한 책무를 받고서 부조(父祖)를 계승하여 지존의 자리에 올라 나라를 다스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위에 더 존엄한 위치가 있을 수 없는 것으로서 몸이 벌써 민서(民庶)와는 현격히 달라 적통(嫡統)이 여기에 있고 종통(宗統)이 이쪽으로 바뀌어지는만큼 적(嫡)이니 서(庶)니 하는 것은 따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장(長)이니 소(少)니 하는 것을 따질 수 있겠습니까. 종통이 있는 사람에게는 복을 높여서 입는 것이 당연하니, 복을 낮추게 되면 즉 종통이 바뀌어지는 것을 의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장서(長庶)의 설만 고집하고 대통(大統)이 중하다는 것은 까마득히 모른 채 항간의 예(禮)를 가지고 왕조(王朝)의 전례(典禮)를 논하고 있으니, 그렇게 해도 되는 것인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천자는 천하의 주(主)가 되고 제후는 한 나라의 종(宗)이 되어 그 이상 높고 존귀한 자리가 있지 않으니, 족인들도 친족 관계를 가지고 그를 대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서자로 강복해야 한다.’고 한다면, 이 또한 그 종(宗)을 둘로 하고 존엄한 위치를 허물어뜨리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러한데도 바로잡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경(經)과 어긋나고 고례와 반대되고 천하의 대의를 위배하는 것이 될테니, 앞으로 미칠 걱정을 생각건대, 비단 오늘날의 명의(名義)가 바르지 못하게 되고 인심이 복종하지 않는 정도로 그치지는 않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성인께서 예를 제정하시면서 오복(五服)의 등급을 나눠 마련해 두신 것은 장차 천질(天秩)을 바르게 하고 천서(天叙)를 밝히려는 목적에서였습니다. 그런데 명의가 어긋나 예를 잃게 되면 윤기(倫紀)를 펼 길이 없게 될 것이니, 도대체 후세에 무슨 말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이유태가 답하기를,"우리들 입장에서 예를 한번 잘못 논했다가는 횡액을 면키 어려울 듯한데 어느 겨를에 기운을 내어 당신과 설왕설래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이어 복제도설(服制圖說)을 지어 해명하였는데, 그 설에,"《의례(儀禮)》 상복(喪服) 참최장(斬衰章) ‘아비가 장자를 위하여[父爲長子]’조(條)의 소(疏)에 ‘적자(嫡子)를 세워 장자로 삼는다.’고 하였는데, 이는 적처(嫡妻)의 소생을 모두 적자라고 이름하는데 첫째 아들이 죽었을 경우 적처 소생의 둘째 아들을 취해 세우면서 그도 역시 장자라고 이름한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적처의 소생을 모두 적자라고 이름한다.’고 한 것은 적처의 아들이라는 것을 말한 것이지 전중(傳重)한 정적(正嫡)이라는 것을 말한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첫째 아들이 죽었을 경우라고 한 것은 아래의 소에서 이야기한 바 ‘적자에게 폐질(廢疾) 혹은 다른 사고가 있거나 죽었는데 아들이 없어 수중(受重)하지 못함으로써 삼년복을 입어주지 못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또 ‘적처 소생의 둘째 아들을 취해 세우면서 그도 역시 장자라고 이름한다.’고 한 것은 첫째 아들이 수중하지 못한 상태에서 죽었을 경우 둘째 아들을 취하여 후계자로 세워야 마땅한데 오직 그가 적처의 소생이어야만 삼년복을 입어주지 그가 첩의 소생일 경우에는 후계자로 세워졌어도 그를 위해서는 삼년복을 입어줄 수 없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적자에게 폐질 또는 다른 사고가 있거나 아들이 없이 죽어 수중(受重)하지 못한 경우는, 정체(正體)이긴 하나 전중(傳重)하지 못한 것에 해당되는데 전중하지 못했기 때문에 삼년복을 입어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서자(庶子)를 세워 후계자로 삼았을 경우를 살펴 보건대, 서자에게도 장자처럼 삼년복을 입어줄 수 없다는 조목의 소(疏)에 ‘서자라고 하는 것은 첩의 아들에 대한 칭호인데 적처 소생의 둘째 아들도 모두 서자라고 표현한 것은 정적(正嫡)과 구별하여 혐의를 멀리 피하려고 한 것이다.’고 하였으니, 마땅히 똑같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대저 정적(正嫡)은 한 사람 밖에는 없습니다. 적자에게 폐질 또는 다른 사고가 있거나 아들이 없이 죽어 수중하지 못함으로써 삼년복을 입어줄 수 없을 때 그 적자는 정적이 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적자가 죽었어도 정적이 되지 못해 삼년복을 입어주지 않게 된 연후에야 그 뒤를 이어 올라가 후계자가 된 사람이 정적이 되는 것이니 그를 위해서는 응당 삼년복을 입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령 적자가 죽었어도 그를 위해 이미 정적(正嫡)에 해당되는 삼년복을 입어주었을 경우에는 그 뒤를 이어 올라가 적자로 된 사람이 아무리 적처의 소생이라 하더라도 이는 서자를 세워 후계자로 삼은 것이니, 그를 위해 다시 삼년복을 입어주는 것은 부당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정적에는 두 사람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허헌(許憲)096) 의 설대로 한다면, 가령 대부(大夫) 사(士)의 적처 소생에 수십 명이 있다고 할 경우, 첫째 아들이 죽었을 때에도 삼년복을 입어주고 둘째 아들이 죽었을 때에도 삼년복을 입어주며 불행히 셋째 넷째가 죽고 다섯때 여섯째가 죽었을 때에도 모두 삼년복을 입어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치상 그렇게 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소(疏)에 이르기를 ‘서자(庶子)는 첩의 아들의 호칭이다. 그런데 적처 소생의 둘째 아들은 중자(衆子)인데도 지금 똑같이 서자라고 이름한 것은 장자와 멀리 구별하기 위해서이다. 이런 까닭에 첩의 아들과 똑같은 호를 쓰고 있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에 의거하건대, 적자가 죽었을 때 이미 그를 위해 삼년복을 입어주었을 경우에는, 그 뒤에 둘째 아들로서 뒤를 이어 적자로 된 자가 비록 적처의 소생이라 하더라도 어찌 서자로서 후계자가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소에서 ‘적처 소생은 모두 적자라고 이름한다. 첫째 아들이 죽은 경우 적처 소생의 둘째 아들을 취하여 세우는데, 그도 역시 장자라고 이름한다.’고 한 이 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대체로 보건대, 첫째 아들이 죽은 경우라고 하는 것은 아래의 소에서 이야기한 바 적자에게 폐질 또는 다른 사고가 있거나 아들이 없이 죽어 수중(受重)하지 못함으로써 삼년복의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 경우를 말합니다. 그리고 적처 소생의 둘째 아들을 취하여 세웠을 때에도 역시 장자라고 이름한다고 한 것은 첫째 아들이 수중(受重)하지 못한 상태에서 죽었을 경우 둘째 아들을 취하여 후계자로 세워야 마땅한데 이때에도 오직 적처의 소생이라야만 삼년복을 입어 준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이는 대체로 첩의 소생일 경우에는 아무리 후계자로 세워졌다 하더라도 삼년복을 입어주어야 할 대상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밝힌 것입니다. 천한 소견을 가지고 함부로 손을 놀려 복제도를 꾸며 보았습니다만, 어떤 이는 말하기를 ‘이것은 장자가 장차 자신을 대신하여 승중(承重)할 때에 입어주는 복을 논한 것이다. 그러나 가령 제왕가(帝王家)와 같은 경우는 대통(大統)을 중시하는 법이니, 비록 지자(支子)로 들어와 계승했다 하더라도 태상황(太上皇)이 살아 계시면 사군(嗣君)의 상(喪)으로 대우하여 응당 삼년복을 입어줄 것이다.’ 합니다. 그러나 이 설이 과연 옳다고 한다면, 아우가 형을 계승하고 숙부가 조카의 뒤를 잇는 경우라 하더라도, 정체(正體)니 비정체(非正體)니 하는 것을 따질 필요도 없이 모두 삼년복을 입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내용이 경문(經文)에 나타나지 않고 제후에 관한 예는 아직 배워보지 못하였으니, 예서에 없는 예를 감히 망령되게 늘어놓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명종 대왕(明宗大王)을 위한 인성 왕후(仁聖王后)의 복제 문제에 대해 기고봉(奇高峰)097) 이 응당 삼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하였을 때 퇴계(退溪)는 말하기를 ‘어찌 기년(期年)으로 그치면 안 될 이치가 있겠는가.’ 하였었습니다." 하였다. 그 뒤 4월에 윤선도(尹善道)가 대소(大疏)를 올려 양송098) 이 예(禮)를 잘못 의논하였다고 논척하였는데, 삼사가 함께 일어나 논죄하여 선도를 변방에 유배시켰다. 이에 선도가 안치(安置)된 상태에서 또 예설(禮說)을 지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어떤 이가 나에게 묻기를 ‘《의례》 상복 참최장에 「아비가 장자를 위해 입어주는 복이다.」 하였고, 그 전(傳)에 「어째서 3년인가? 위로 정체(正體)가 되고 또 전중(傳重)하기 때문이다.」 하였는데, 소위 정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기에 내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정(正)은 직(直)과 같고 체(體)는 간(幹)과 같으며 소위 위라고 하는 것은 곧 조선(祖先)을 말한다. 이를 나무에 비유해 보건대, 조선은 나무의 뿌리와 같고 후세의 자손은 나무의 줄기와 같다. 그리고 여러 아들들은 모두 나무의 가지와 같은데 유족 장자만은 곧바로 나무의 뿌리와 나무의 줄기에 연결되기 때문에 전에서 ‘위로 정체가 된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사대부가(士大夫家)의 예는 오직 연장자를 장(長)으로 삼지만, 천자와 제후의 경우는 나이의 다소나 출신 성분의 귀천을 따지지 않고 단지 후계자로 된 사람을 장으로 삼는데, 장이 될 경우 위로 정체가 되는 것은 매 일반이다. 대체로 볼 때 천하는 천하의 천하요 국가는 국가의 국가이다. 따라서 인군(人君)은 마땅히 종사(宗社)와 생령(生靈)을 위주로 해야지, 일 개인의 정이나 한 집안의 사사로움을 가지고 천하나 국가를 바라보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비록 가천하(家天下)하기 시작한 이후의 시대라 하더라도 간혹 훌륭한 인물을 가려 후계자로 세운 때가 있었으니, 고공단보(古公亶父)가 문왕(文王)을 성스럽게 여겨 계력(季歷)을 세운 일이라든가 문왕이 백읍고(伯邑考)를 버리고 무왕(武王)을 세운 일이라든가 미자(微子)가 그 적손(嫡孫) 둔(腯)을 놔두고 그 중자(衆子) 연(衍)을 세운 일이라든가 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일단 태자나 세자로 서게 되면, 아무리 그가 중자 중에 가장 막내이거나 가장 천한 얼자라 하더라도, 이치상으로 보면 마땅히 적(嫡)이 되고 장(長)이 되어 위로 정체(正體)가 되는 것이니, 나이의 다소나 적서(嫡庶)의 구별 같은 것은 따질 수가 없는 것이다. 한인(漢人)이 이른바 ‘곁가지가 뻗어나와 줄기가 되는 것과 같다.’고 한 것이 이것이고, 《의례》의 소설(疏說)에서 이른바 ‘둘째 아들을 세웠을 때에도 역시 삼년복을 입어준다.’고 한 것이 이것이고, 소석(疏釋)에서 이른바 ‘적처 소생의 둘째 아들을 세웠을 때에도 역시 그를 장자라고 이름한다.’고 한 것이 이것이고, 주 부자(朱夫子)가 이른바 ‘제후에게는 2종(宗)이 없다.’고 한 것이 이것이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이른바 「체이긴 하나 정이 되지는 못한다[體而不正]」고 하는 설은 무엇인가?’ 하기에, 내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태자라고 이름하고 세자라고 이름할 때 이른바 태자니 세자니 하는 것이야말로 모범적인 행동이 현저하게 드러날 뿐더러 적(嫡)이 되고 장(長)이 되어 그와 필적할 만한 다른 아들들이 없을 경우에 붙이는 칭호이다. 그렇다면 태자가 되고 세자가 되면 그가 장자가 되는 것이 분명하니, 또 어찌 이치상 ‘체이부정(體而不正)’이 될 수 있겠는가. 석(釋)에서 말한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니 다시 변론할 필요가 없다 하겠다. 내 생각에는 소설(疏說)의 이른바 ‘서자가 승중했을 때에는 삼년복을 입어주지 않는다[庶子承重不爲三年]’고 한 문자 중에 ‘불(不)’자는 ‘역(亦)’자의 잘못이 아닐까 여겨진다. 《대학(大學)》의 책을 펼치자마자 첫번째로 말하는 ‘신민(新民)’의 ‘신(新)’자가 ‘친(親)’자로 잘못되어 있고 보면, 《의례》의 허다한 소설 가운데 ‘역위삼년(亦爲三年)’의 ‘역(亦)’자가 ‘불(不)’자로 잘못되어 있다고 해서 괴상하게 여길 것이 뭐가 있겠는가. ‘신’자가 ‘친’자로 잘못 전해진 것이 음(音)이 서로 비슷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고 보면, ‘역’자가 ‘불’자로 잘못 베껴진 것도 글자가 서로 유사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분명한 듯하다. 만약 그렇지 않고 분명히 ‘불’자가 잘못이 아니며 소(疏)의 뜻이 본래 그러한 것이라면, 석(釋)에서 말한 ‘체이부정’의 설과 똑같이 잘못된 해석을 내렸다고 하는 것이 역시 확실하다 하겠다. 소설(疏說)에서 ‘심의는 옷섶을 잇고 가장자리를 구부러지게 한다.[深衣續袵鉤邊]’고 해석하고, 상례(喪禮)중 ‘담제는 1개월의 간격을 둔다.[禫祭間一月]’고 한 말이 수천 년 동안 잘못된 채로 답습되어 오다가 주 부자의 말년에 이르러서야 바로잡히게 되었었으니, 소설은 어찌 다 믿을 수 있겠는가. 맹자(孟子)가 ‘글을 다 믿는 것은 차라리 글을 보지 않는 것만 못하다.’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소설의 이른바 ‘둘째 아들을 세웠을 때에도 그를 위해 삼년복을 입어준다.’고 한 것이야말로 천리(天理)에 들어맞는 것으로서 경(經)을 세우고 전(傳)을 지은 주공(周公)과 자하(子夏)의 뜻을 깊이 밝힌 것이라 할 것이니, 이 예를 믿고 쓰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에 반해 이른바 ‘승중(承重)했어도 삼년복을 입어주지 않는다.’고 한 것은 천리에 맞지 않는 것으로서 경과 전을 지은 주공과 자하의 뜻에 크게 위배되니, 어떻게 모두 믿고 쓸 수 있겠는가. 어떤 이가 말하기를 ‘예(禮)로 보면 그러하다. 그러나 조정의 의논을 보면 「예가 행해지든 행해지지 않든 국가의 안위(安危)와는 조금도 상관이 없다.」고 하는데, 어찌하여 그대만 유독 이것이야말로 대통(大統)을 밝히고 백성의 뜻을 안정시키고 종사(宗社)를 굳건히 하는 예라고 하면서 심각하게 걱정하고 상세히 말하는 것인가?’ 하기에, 내가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아, 이것이 무슨 말인가.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예(禮)가 일어난 연후에야 만물이 안정된다.’ 하였다. 예가 아니면 미소한 사물도 모두 안정을 얻을 수가 없는 법인데 더구나 크고 중하기만 한 천하나 국가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사소한 절문(節文)도 변론하지 않을 수 없는 법인데, 더구나 부자(父子)의 윤서(倫序)와 군신(君臣)의 등위(等威)를 그대로 내맡겨 문란하게 해놓고서도 안정을 얻을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예기》에 이르기를 ‘예의 목적은 친소(親疎)를 정하고 혐의를 판단하고 동이(同異)를 구별하고 시비를 밝히는 것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군신·상하·부자·형제 관계가 예가 아니면 바르게 되지 못한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부조(父詔)를 받들어 세자가 되었고 천명을 받아 종사(宗社)를 지켰고 지존의 자리에 올라 10년 동안이나 나라를 다스리며 신민을 통치했던 효종 대왕에 대해 적(嫡)도 아니고 장(長)도 아니라고 하며 끝끝내 서자의 예로 대우하려고 하니, 어찌 된 일인가. 단상(短喪)을 한다면 그것은 그래도 가능하다. 그러나 예를 어떻게 이런 식으로 논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식으로 한다면 친소가 정해지고, 혐의가 판별되고, 동이가 구별되고, 시비가 정해지고, 군신·상하·부자·형제의 올바른 관계가 정립되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하고서도 대통(大統)이 밝혀지고, 신민의 뜻이 정해지겠는가. 대통이 밝혀지지 않고 백성의 뜻이 정해지지 않는다면 종사가 굳건해질 수 있겠는가. 공자(孔子)께서 이르시기를, ‘이름이 바르지 못하면 말이 이치에 순하지 못하고, 말이 순하지 못하면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예악(禮樂)이 일어나지 못하고, 예악이 일어나지 못하면 형벌이 알맞게 되지 못하고, 형벌이 알맞게 되지 못하면 백성들이 꼼짝할 수 없게 된다. 이 때문에 군자가 이름을 붙이면 반드시 말할 수 있으며 말하면 반드시 행할 수 있는 것이다.’고 하였다. 그런데 지금 예를 논하는 자들을 보건대, 둘째 아들 역시 모두 장자라고 이름하면서도 그를 위해 참최복을 입어주면 적통(嫡統)이 엄해지지 못한다고 한다. 아, 대통을 이어 종묘를 받들고 한 나라에 군림(君臨)했는데도 적(嫡)이라고 말하지 못하고 장(長)으로 삼지 못한단 말인가. 이런 이가 장이 되지 못한다면 어디에서 장을 구한단 말이며, 이런 이가 적이 되지 못한다면 적이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다른 곳에 장이 있고 다른 곳에 적이 있다고 한다면, 종(宗) 역시 다른 곳에 있다는 말인가. 아니면 종도 둘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존엄성을 무너뜨리고 인주를 비하하려고 하는 것이 분명하니, 군부(君父)를 폄출(貶黜)하는 것과 비슷한 일이 되지 않겠는가. 이것이야말로 이른바 ‘임금이 임금답게 되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게 되지 못하며 나라가 나라답게 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니, 이보다 더 크게 이름이 바르게 되지 못하는 경우가 어디에 있겠는가. 이렇게 하고서도 반드시 말할 수 있으며 반드시 행할 수 있겠는가. 명분이 바르게 되지 못한 결과는 꼭 백성이 꼼짝할 수 없는 데까지 이르는 것이고 보면 백성의 뜻이 정해지지 못하리라는 것은 확실한 일이다. 백성의 뜻이 정해지지 못하는 것이 확실하다면 종묘 사직이 굳건해지지 못하리라는 것도 확실한 일이다. 따라서 내가 대통을 밝히고 백성의 뜻을 안정시키고 종묘 사직을 굳건히 하는 길이 여기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지나친 일이 아니다. 그러니 내가 심각하게 우려하고 상세하게 말하는 일을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어떤 이가 말하기를 ‘그대가 항장(抗章)한 데 대해서 혹 질시하여 헐뜯으며 참소한다고 하기도 하고, 혹은 화(禍)를 일으킬 기틀을 꾸며내고 있다고 하기도 하고, 혹은 겉으로는 예를 논한다고 핑계대면서 속으로는 실제로 사람을 모함하고 있다고 하기도 하는데, 과연 대송(大宋)099) 에게 악감정을 가지고 그를 함정에 빠뜨리려 한 것인가? 당초 어찌하여 사람들의 말이 있을 것을 생각지도 않고 기화(奇禍)를 피하려고도 하지 않은 채 이처럼 위태로운 말을 했단 말인가?’ 하기에, 내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내가 대송에게 무슨 악감정이 있어서 그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했겠는가. 나의 본 마음은 그저 성명께서 깨달으시어 대례가 올바르게 되기를 기대했던 것일 뿐이다. 송공(宋公)을 모함하려고 하는 뜻이 어디에 있었겠는가. 가령 내가 송공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뜻이 있었다면, 내가 상소하면서 왜 단궁 문(檀弓免)과 자유 최(子游衰)100) 의 설을 거론하지 않았겠는가. 당초 대송이 수의(收議)한 내용 가운데 ‘가소(賈疏)101) 에서 단지 첫째 아들이 죽었다고만 말하고, 첫째 아들이 죽었는데 그의 후계자가 없다고는 말하지 않았는데, 그렇다면 이는 성인(成人)이 되지 못한 상태에서 죽은 경우를 가리키는 것인 듯싶다. 이 점이야말로 긴요한 대목이다. 그런데 지금 허목(許穆)의 설을 보건대, 《의례》의 문장의 본 뜻을 자세히 상고해보지도 않은 채 무턱대고 자기 주장을 내세운 듯한데, 그렇다면 단궁이 문을 한 것이나 자유가 최 차림을 한 것 모두 돌아볼 가치가 없다는 말인가.’ 하는 말이 있었다. 단궁의 문과 자유의 최에 대한 설은 《예기(禮記)》 단궁편(檀弓篇)에 나오는데, 그 말을 상고해 보면 모두가 적손(嫡孫)을 세워야 한다는 취지의 설들이다. 소현(昭顯)이 죽고난 뒤 인조 대왕께서 세자를 세울 당시라면 그가 혹 천리의 대의(大義)와 성인의 대권(大權)을 모른 나머지 상경(常經)을 내세워 이런 말씀을 드렸다 해도 괜찮다 할 것이다. 그러나 효종 대왕께서 임금으로 임하신 지 10년이 지난 뒤에 와서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가 있단 말인가. 혹시라도 송(宋)을 좋아하지 않는 자가 있어 이 말을 꼬집어 낸 뒤 단궁편 양장(兩章)의 내용을 모조리 말해버리면서 송의 죄를 논한다면, 송은 필시 스스로 해명할 말이 없게 될 것이다. 내가 송을 위해 이 점을 염려하였기 때문에 간단간단하게 이 설을 제기하였는데, 내가 소를 올리면서 ‘시열이 망령되지 않았다면 어리석은 사람이다.’ 하고 또 ‘불인(不仁)한 자가 아니면 부지(不智)한 자이다.’고 하였으니, 나는 그래도 그가 망발(妄發)한 말을 견해가 잘못되었던 것으로 돌리려고 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꼭 내가 송을 무함하려 했다고 하지만 실제로 내 말은 송을 변호하려는 입장에서 나온 것이었다. 아, 볕들고 비내리는 것이 절도를 잃어 거듭 기근이 닥치고 있는데 곡식이 익지 않아 민생(民生)이 불안하고 대명(大命)이 박두한 듯 만물이 길러지지 않는 것이 이때보다 심한 적이 없었다. 어쩌면 하늘에 계신 효종 대왕의 영령께서도 오르내리시며 편안치 못하실텐데, 하늘과 조종(祖宗)께서 위엄을 내려 경계시키면서 우리에게 인책토록 하는 것은 아니겠는가. 어떤 이가 말하기를 ‘대송(大宋)이 의논드리기를 「둘째 적자 이하는 아무리 인군(人君)의 모제(母弟)라 하더라도 역시 서자(庶子)라고 한다.」 하고, 또 「효종 대왕이 인조 대왕의 서자라 해도 아무 상관이 없다. 서자는 천한 자를 가리키는 개념이 아니고 중자(衆子)라는 뜻이다. 《예경(禮經)》을 상고해 보면 이런 종류가 매우 많다.」 하였는데, 이 설이 어떠한가?’ 하기에, 내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예경에 중자를 서자라고 했다는 이 설은 참으로 옳다. 다만 원래 중자였다 하더라도 일단 그를 세워 태자로 삼고 세자로 삼은 뒤에는 그의 명칭을 적자요 장자라고 해야 마땅하지 그대로 서자라고 해서는 안 된다. 장차 전중(傳重)할 자도 그러한데, 더구나 이미 전중해서 대통을 받들고 군림(君臨)한 뒤에 와서 그를 예전 그대로 서자라고 부르며 서자의 예로써 대우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소설(疏說)을 보건대 ‘둘째 아들을 세웠을 때에도 그를 위해 삼년복을 입어준다.’ 하였는데, 그 아래에서는 또 ‘서자(庶子)가 승중(承重)하면 삼년복을 입어주지 않는다.’ 하였다. 고문(古文)에 중자를 서자로 한 곳이 원래 많지만 첩의 아들을 서자로 기록한 곳도 많이 나온다. 소설에서 말한 서자가 과연 중자라고 한다면 이것은 즉 둘째 아들이라는 말이 되는데, 그렇다면 어찌 이처럼 말을 다르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글을 볼 때에는 한 단어에 집착하여 한 문장의 뜻을 오해하면 안 되고,102) 한 문장에 집착한 나머지 전체적인 뜻을 왜곡시켜서도 안 되고, 그 참뜻이 무엇인지를 깊이 따져모아야 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건대, 소에서 말한 서자가 첩의 아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면 그래도 뜻이 통하지만, 송공(宋公)처럼 서자를 둘째 아들의 개념으로 본다면 위와 아래 문장의 설이 모순되니 잘못이 아닐까 의심되는 것이다. 따라서 나의 어리석은 견해로는, 여기에서 ‘삼년복을 입어주지 않는다[不爲三年]’고 했을 때의 ‘불(不)’자는 ‘역(亦)’자의 잘못이 아닌가 여겨지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소의 이 설은 이치에도 어긋나고 경(經)에도 어긋나니 신용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대송이 상소한 말을 보건대 「한 문제(漢文帝)가 남월(南越)에 준 글을 보건대 『짐은 고황제(高皇帝)의 측실(側室)의 아들이다.』고 하였다. 그런데도 당시에 한 문제를 모자라게 보지 않았으며, 그뒤 국가에 많은 변고가 있긴 하였지만 통서(統緖)를 이어 즉위한 자는 모두 한 문제의 자손이었다. 따라서 비록 측실의 아들이라고 일컫더라도 원래 정통(正統)을 전수하는 데 아무 상관이 없는 법이다. 그런데 더구나 적자로서 둘째 아들인 우리 선대왕(先大王)의 경우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하였는데, 이 설이 어떠한가?’ 하기에, 내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스스로 고황제의 측실이라고 말한 것은 한 문제의 겸사(謙辭)이다. 당시 신하 중에서 또한 고황제의 측실의 아들이라고 말한 자가 있었던가. 그리고 출신 성분을 이야기하면 아무리 고황제의 측실의 아들이라고 하더라도, 일단 즉위한 때로부터 보면 고황제의 적(嫡)이요 장(長)으로서 당시 신하들의 인식도 이러하였고 추대한 것도 이러하였기 때문에, 문제가 그 자리를 편안히 여길 수 있게 되어 종묘(宗廟)에 제사를 지내고 자손을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반대로 당시 신하들이 문제에 대해 적(嫡)이 못 되고 장(長)이 못된다고 하면서 혹 ‘적통(嫡統)이 엄숙하게 되지 못한다.’는 설을 내놓기도 하고 ‘단궁(檀弓)이 문(免)하고 자유(子游)가 최(衰)한 것 모두가 과연 돌아볼 가치도 없다는 말인가.’라고 의논을 내놓기도 했다고 하자. 이런 상황이었는데도 조정이 태연하게 괴상히 여기지도 않은 채 일찍 변론하지 않았다면, 천하의 인심이 안정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고서도 문제가 끝내 그 자리를 편안히 여겨 종묘에 제사를 지내고 자손을 보전할 수 있었겠는가? 따라서 당초 항장(抗章)했던 것도 구신(舊臣)으로서 차마 선왕을 저버리지 못하겠기에 나온 행동으로서 이에 감히 우리 자손과 백성을 보호해야 한다는 설을 올리게 된 것이었다. 이렇게 한 것이 무슨 죄가 된단 말인가. 그런데도 저 삼사(三司)가 양송(兩宋)의 뜻을 떠받들어 무함한 것이 끝이 없었으니, 이것을 과연 국가를 위한 말이었다고 하겠는가. 옛날에 쾌산(快山)의 야수(野叟)가 밭을 갈다가 피곤해 밭갈이를 쉬고는 둔덕 위에서 잠깐 잠이 들었다. 이때 호랑이가 와서 그 늙은이를 물려 하자 그 늙은이의 소가 힘껏 싸워 호랑이를 쫓아버렸는데, 호랑이가 떠나고 나자 밭이 엉망이 되었다. 늙은이가 잠에서 깨어나서는 소가 호랑이를 물리치느라 밭이 엉망이 된 사실은 알지 못하고 마침내 소에게 화를 내어 소를 죽여버렸다. 세상에서는 이를 쾌산의 원우(冤牛)라고 일컫고 있다. 구신이 북쪽 변방에 유배된 것이 어찌 원우(冤牛)와 같은 경우가 아니겠는가. 시비(是非)와 사정(邪正)이 멋대로 전도(顚倒)되게 한 결과, 장래 국가의 일이 좋게 되어갈지 감히 알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하였으니, 어찌 한심함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야말로 옛날에 이른바 ‘큰 집 한 모퉁이에서 화염이 이미 치솟고 있는데 마루에 있는 제비는 즐겁게 놀기만 하면서 불길이 장차 뻗쳐 오리라는 것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니, 또한 애달플 뿐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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