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7권, 현종 4년 1663년 8월

싸라리리 2025. 12. 10.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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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일 정유

태백(太白)이 낮에 나타났다.

 

대사성 민정중(閔鼎重)이 상소하기를,
"대저 학교(學校)는 교화(敎化)의 근본이 되는 곳인데, 삼대(三代)의 성법(盛法)에 대해서는 우선 논하지 않고, 단지 선비를 기르는 문제와 관련하여 현재 급히 해야 할 일들에 대해서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사학(四學)103)  와 외교(外校)104)  에서 나눠 가르치고 그 중에서 선발하여 태학(太學)105)  에 올리는 것은 장차 국가에서 쓰기 위해서입니다. 훗날 등제(登第)하여 경상(卿相)이 되고 아래로 백집사(百執事)가 되는 자들이 모두 여기에서 배출되니, 이곳에서 가르침을 받고 길러지는 자들이 진정 어질고 재주가 있으면 국가의 발전을 점칠 수 있는 반면, 어질지 못하고 재주가 없을 경우에는 국가가 쇠퇴하리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옛날 조종조(祖宗朝)에서 혹 태학에 친림(親臨)하여 경(經)을 논하고 기예를 시험하기도 하고, 혹 제유(諸儒)를 소대(召對)하여 배운 것을 강문(講問)한 뒤 뛰어난 자를 발탁하고 재주를 장려함으로써 한 시대를 권장시키기도 하고, 혹 권학 절목(勸學節目)을 내리면서 다시 밝혀 거행케 하기도 하고, 혹 사유(師儒)에게 명하여 별도로 힘껏 타이르게 하기도 하고, 혹 중관(中官)을 보내 재유(齋儒)106)  가 얼마나 되는지 물어보게 하면서 제술(製述)하게 하기도 하였는데, 이렇듯 특이하게 대우했던 것은 참으로 근본을 다스리는 곳이 바로 여기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문사(文詞)는 작은 기예일 뿐으로서 치도(治道)와는 큰 관련이 없는 것인데도 삼순(三旬)에 제술케 하는 제도를 설치한 뒤 우등자(優等者)를 취하여 상을 주기도 하고 점수를 주기도 하고 직부 전시(直赴殿試)하게도 하였었으니, 권장하려고 한 것이 또한 지극했다 하겠습니다. 이렇게 하는 일이 어느 때 폐지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래도 상순(上旬)에 윤차(輪次)하는 것만은 남아 있는데, 하여튼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후로 학교를 권장하는 제반 일이 거의 모두 폐지되어버린 상태입니다. 옛 성인이 이르기를 ‘학교의 가르침은 인군(人君)이 궁행(躬行)하고 심득(心得)한 결과에 기초하여 나오는 것이다.’ 하였는데, 어쩌면 학문에 종사하는 전하의 정성에 미진한 점이 있는 나머지 학교에 시행하는 제반 일이 자연히 날이 갈수록 쇠퇴해지는 지경에 이른 것은 아니겠습니까. 신은 삼가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위에서 교도(敎導)하는 것이 너무 허술하기 때문에 아래에서 보고 느끼는 효과가 없어진 탓으로 요즘 들어 사습(士習)이 투박해지고 사기(士氣)가 시들게 되었으니, 참으로 식자(識者)가 한심하게 여기는 바입니다. 심지어는 재임(齋任)107)  이 수직(守直)하려 하지 않는가 하면 유생들도 거재하기를 싫어하여 묘정(廟庭)이 휑뎅그렁하고 재사(齋舍) 역시 텅텅 비어 있는데 현재 반궁(泮宮)108)  에 머물러 있는 자는 고작 10여 인밖에 되지 않습니다. 또 집에 있는 자들 역시 아무리 성묘(聖廟)에 일이 있을 때이거나 삭망(朔望)에 분향하고 춘추(春秋)로 석채(釋菜)109)  를 올리는 날이라 하더라도 와서 참여하는 자가 극히 적으며, 나아가 집사(執事)해야 할 인원마저도 일이 있을 때 부족한 형편이니, 정말 개탄스럽습니다.
아, 교양(敎養)을 잘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실로 국가의 발전과 퇴보가 결정되는데, 오늘날의 규모와 기상이 이와 같고 보면 그 결과를 따라서 알 수 있는 일입니다. 보고 느껴 교화되게 하는 것이야말로 전하께서 직접 행하시는 데에 근본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만, 절목(節目)에 관계되는 세부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신이 시험삼아 본관(本館)의 학령(學令)을 가지고 대략 변통을 가해 볼까 하는데, 예조에 명하여 참작해서 정하도록 했으면 합니다.
신이 삼가 살피건대, 학령에 이르기를 ‘매일 학관(學官)이 제좌(齊坐)하여 제생(諸生)을 맞아들이고서 정읍례(庭揖禮)에서 1인씩 추첨해 뽑아 읽은 책을 강(講)하게 하는데, 통자(通者)110)  는 세초(歲抄)111)  할 때에 획수(劃數)112)  를 계산하여 식년(式年)113)   강서(講書)시에 점수를 합산한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지금 이 규정이 어느 해에 폐지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삼가 헤아려 보건대 매일 강하는 자가 단지 두 사람뿐이고 보면 매일 학령처럼 한다 해도 착실하게 되지는 않을 듯싶고, 또 1년 동안 강서하여 얻은 획수를 식년 때의 그것과 합산할 경우 오늘의 사정에 비추어 볼 때 또한 반드시 구애되어 행하기 어려운 점이 있으리라고 여겨집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이렇게 했으면 합니다. 즉 조정에서 학관으로 하여금 매달 4차에 걸쳐 상·하재의 제생을 통틀어 강하게 하도록 허락해 주되, 강하는 서책은 삼경(三經)과 사서(四書)로 하여 돌아가며 익숙하게 암송토록 하고, 매번 암송하는 권(卷)을 바꾸도록 했으면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통략(通略)을 나누는 것은 일체 학령(學令)에 따르게 하되 문의(文義)를 관통하는 것을 위주로 하고, 재생(齋生)이 많을 경우에는 혹 며칠 계속 회강(會講)해도 될 것입니다. 그러면 1년에 강서하는 횟수가 통틀어 48차가 되는데 식년(式年)에 이를 때쯤 되면 거의 3, 4차례씩 돌려가며 암송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세초(歲抄)할 때마다 획수를 통틀어 조사한 뒤 20획 이상이 되는 자의 성명을 별도로 써서 입계(入啓)하도록 했으면 하는데, 상격(賞格)의 고하는 오직 상께서 결재하시기에 달려 있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저 제술(製述)에 관한 규정과 같은 경우 그것이 특명에서 나온 것이고 보면 원래 아래에서 감히 진달드려 청할 성격의 것이 아니긴 합니다. 그런데 가령 상순(上旬)에 윤차(輪次)하는 것은 원래 응당 행해야 될 일에 속하는 것인데, 늘 정부·육조·관각의 제 당상의 유고(有故)로 말미암아 해마다 폐지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신의 생각에 당초 이 규정을 설치한 것은 권장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리하여 본관에서 윤차할 때에도 병조의 도시(都試) 때 제관(諸官)을 참회(叅會)시키는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게 하였으니, 이는 대체로 문(文)이나 무(武)에서 인재를 뽑는 것이 똑같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도시는 해마다 거행하면서 윤차는 완전히 폐지하고 있으니, 어찌 문(文)을 파행적으로 한다는 비평이 없겠습니까. 《대전(大典)》을 상고해 보건대, 역시 ‘유고가 있을 때에는 그 다음날 행한다.’는 글이 있으니, 지금 이후로는 유고가 있다 하더라도 반드시 본관으로 하여금 계품(啓稟)하여 무고(無故)한 날에 거행토록 하되 그 달을 넘지 않도록 하게 하소서. 그러면 어찌 폐지되었다는 탄식이 나오겠습니까.
중순(中旬)과 종순(終旬) 두 번에 걸쳐 행하는 윤차를 지금 다시 설치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본관으로 하여금 매달 두 차례씩 설장(設場)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소서. 그리고 출제(出題)는 학령의 규정에 따라 설장한 곳마다 의(義)·의(疑)·부(賦)·표(表)·송(頌)·명(銘)·잠(箴)·기(記) 중 두 문제를 내고 책문(策問)은 한 통을 써내도록 하되 반드시 당일에 석차를 매기고 등제(登第)케 하소서. 그러면 1년을 통틀어 24회를 제술하게 되는데, 세초(歲抄)할 때에 이르러 획수를 합산한 뒤 10획 이상인 자의 성명을 따로 써서 입계하도록 하되 상격(賞格)의 고하에 대해서는 오직 상의 결재를 기다리게 하소서. 그러면 이 두 가지 일에 대해서 만큼은 그런대로 격려하고 권장하는 도로 볼 때 조금 보탬을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더라도 염려되는 점이 있습니다. 강경(講經)과 제술(製述)은 각자 닦는 업(業)이 다른데, 만약 때에 따라 직부 전시(直赴殿試)케 하는 은사를 내리지 않고 그저 획수(劃數)를 내려주기만 할 뿐이라면, 강경하는 유생의 입장에서야 물론 다행으로 여기겠지만 제술하는 유생의 입장에서는 일단 강업(講業)이 없는 상태에서 필시 낙담할테니 그들을 흥기시킬 가망성은 없어진다 할 것입니다. 의논하는 자들은 필시 ‘직부 전시케 하는 일을 섣불리 행할 수는 없다.’고 하겠지만, 신의 어리석은 생각은 다릅니다. 설사 해마다 직부 전시케 하는 명을 내린다 하더라도 대비(大比)114)   이전까지 그런 은사를 받는 자는 3인에 불과할 뿐입니다. 조종조에서 자주 제술을 명하여 특별히 직부 전시하게 한 자가 1년 안에 혹 2인에 이른 적도 있었고 보면, 지금 1년에 한 사람씩 허락해 준다 하더라도 어찌 외람스럽게 될 걱정이 있겠습니까. 더구나 신이 요청드리는 것이야 때에 따라 은사를 내려주시라고 하는 것인데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리고 신이 듣건대, 학교에 책을 내려주는 것이야말로 전대(前代)에 으레 있어 온 은사라고 하는데, 현재 본관에 소장하고 있는 서적이 2백, 3백 권을 넘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그리하여 사생(師生)이 열람할 것이 있을 때마다 번번이 모두 민간에서 빌려오는 형편이니, 여기에서도 조정이 학교를 숭상하지 않는 일면을 볼 수 있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상께서는 특별히 예조에 명하여 팔도에서 간행된 제본(諸本)을 인출(印出)해 본관에 주도록 함으로써 강독할 자료를 삼게 하는 한편, 교서관으로 하여금 서책을 찍어낼 때마다 1본(本)을 본관에 보내도록 하고 이를 영구한 법식으로 삼게 하소서. 이밖에 변통해야 할 자질구레한 것들은 모두 예조에 이야기하여 품처(稟處)할 수 있도록 하였으니, 감히 모두 번거롭게 아뢰지는 않겠습니다.
이와 함께 삼가 걱정되는 것이 있습니다. 신이 어린 아이나 가르칠 정도의 후진(後進)으로서 외람스럽게 스승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므로 유생들을 대할 때마다 마음속으로 부끄러움을 느끼는데, 다시 어떻게 강론하며 절차 탁마시키는 도움을 줄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성명(聖明)께서는 전후에 걸친 신의 간절한 정성을 살피시어 속히 면직을 허락해 주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그대가 진달한 말은 실로 선비를 기르려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이었다. 내가 어찌 유념하지 않겠는가. 해조로 하여금 품처(稟處)토록 하겠다. 그대는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예조 판서 홍명하(洪命夏)가 아뢰기를,
"대사성 민정중이 사유(師儒)의 장(長)인 신분으로 문교(文敎)가 폐해진 것을 목도하고 선비를 기르는 방도에 대해 조목별로 진달함으로써 옛 제도를 회복할 소지를 마련하려 하고 있습니다. 예로부터 국가 정치의 일로는 다사(多士)를 배양하는 것보다 앞설 것이 없었기 때문에, 조종조에서 유학을 숭상하고 선비를 기르는 일이라면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하지 않는 일이 없었습니다. 인재가 성대하게 일어나고 치도(治道)가 밝아지는 것은 실로 이에 말미암는 것인데, 그 근본은 직접 실천하여 교화시키는 데에 있는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조가(朝家)에서 마땅히 준행(遵行)해야 할 것입니다.
일찍이 선조(先朝) 때에 진작시키는 방법을 더욱 넓혀 윤강(輪講)하는 제도를 정파(停罷)하고 별도로 과제(課製)하는 제도를 설치한 뒤 혹 반궁(泮宮)에서 시험하기도 하고 혹 금정(禁庭)에서 시험하기도 하였으며, 또 좨주(祭酒)의 직임을 설치하여 제생(諸生)을 통독(通讀)시킴으로써 용동(聳動)시키는 일을 행하였는데, 그 결과 그런대로 성취되는 효과를 얻게 되었었습니다.
그런데 근년 이래로 마침 조가에 유고가 있게 된 관계로 으레 행해오던 과제(課製)도 거행치 못하고 있으므로 다사(多士)가 무척이나 낙담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리하여 심지어는 재임(齋任)이나 제생(諸生)이 거재(居齋)하려 하지 않는가 하면 삭망(朔望) 때의 분향(焚香)이나 춘추(春秋)로 지내는 석채(釋菜) 때에도 와서 참여하지 않고 있으니, 일이 한심하기 짝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비록 사습(士習)이 불미스러운 탓이긴 하나 역시 바르게 되도록 제대로 기르지 못한 결과이니, 이에 대해서는 사장(師長)이 알아서 재벌(齋罰)을 시행함으로써 폐습을 바로잡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선비는 선(善)으로 이끌어야지 법을 가지고 제재를 가해서는 안 되는 것이니, 오직 어떻게 가르치고 이끄느냐에 달려 있다 하겠습니다.
본관(本館)의 학령(學令)은 곧 조종조에 이미 행해 오던 절목(節目)으로서 법전 안에도 기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학관(學官)을 임시로 감축한 뒤에 매일 유생들을 고강(考講)케 하는 법도 따라서 폐지되었는데 지금 갑자기 옛 제도를 회복시키기는 어렵다 하겠습니다.
소(疏)에서 진달한 고강·제술 등 일의 절목을 보건대, 고사(古事)에 의거하여 약간씩 변통을 가한 것이 참으로 일리가 있으니 진정 이대로 시행해야 하긴 하겠습니다만, 일은 어디까지나 이루어지는 것이 귀중한 것으로서 제도가 간략해야만 행해질 수 있다 하겠습니다.
매월 4회씩 고강하고 2회씩 과제하자는 뜻이야 좋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만, 그럴 경우 한 달 안에 허다한 관원이 빈번하게 제회(齊會)해야 할 뿐더러 1년 내내 꼭 참석한다는 것도 형세상 쉽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결국에는 유명무실한 결과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니, 사세(事勢)를 참작하고 정식(定式)을 절충해서 반드시 행할 수 있는 바탕을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매월 대사성이 본관의 관원과 상·하재(上下齋)의 제생(諸生)을 이끌고 두 차례 고강케 하되 집에 있는 제생도 강하기를 원하면 허락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강하는 서책은 사서와 삼경을 돌려가며 고강케 하되 문의(文義)를 관통하는 것을 위주로 하고, 통략(通略)과 그에 따른 분수(分數)115)  는 일체 학령(學令)에 따르도록 해야 할 것이며, 《주역(周易)》과 《춘추(春秋)》도 점수를 배로 주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면 1년 동안 강하는 것이 24회에 이를텐데, 매년 말에 획수(劃數)를 합산하여 20분(分) 이상이 되는 자를 뽑아 본조에 보고케 해야 하겠습니다.
이른바 중순(中旬) 윤차(輪次)라고 하는 것은 곧 사중월(四仲月)116)  에 제술하는 규정을 말하고, 이른바 종순(終旬)이라고 하는 것은 매월 20일 후에 윤차하는 것을 말하는데, 정파(停罷)된지 이미 오래 되었으니, 또한 다시 설치하기는 어렵습니다. 지금 이후로는 대사성 이하가 매월 1회씩 시제(試製)하되 일체 장옥(場屋)117)  처럼 엄격하게 하여 외부 사람과 서로 통하지 못하게 하고, 출제(出題)는 부(賦)·표(表)·논(論)·책(策) 가운데에서 시험 때마다 하나씩 출제하게 하되 반드시 당일 석차를 매겨 등제(登第)를 정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1년 동안 제술하는 것이 12회에 이를텐데 매년 말 획수를 합산하여 10분 이상 되는 자를 뽑아 본조에 보고케 함으로써 서계할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고강과 제술에 따른 상격(賞格)의 고하는 그 분획(分劃)의 다소에 따라 상의 결재를 기다려야 하겠습니다만, 유생이 고강하고 제술할 때 특명으로 나온 경우가 아니면 우등자에게는 직부 회시(直訃會試)케 하는 상격을 내리고 다음은 점수를 내려주고 또 그 다음은 지필묵을 내려주는 것이 예로부터 내려온 고례(古例)입니다. 그러나 제술하는 유생들은 일단 강업(講業)이 없으므로 분획만 받을 수밖에 없는데 그럴 경우 그들이 낙담하는 탄식이 있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직부 전시까지 허락하는 문제는 결코 섣불리 의논할 수 없습니다.
이른바 상순(上旬)에 윤차한다고 하는 것은 곧 1월 7일과 7월 7일에 하는 것으로서 정부와 관각(館閣)과 본관(本館)의 당상이 나아와 참여하여 시취(試取)하는 것이고, 이른바 춘추(春秋)로 과시(課試)한다는 것은 곧 3월 3일과 9월 9일에 하는 것으로서 정부와 육조와 관각과 본관의 당상이 일제히 나아와 참여하는 것인데, 이는 병조의 도시(都試)의 규정과 조금도 차이가 없으니, 대체로 문(文)·무(武) 공히 인재를 선발해야 한다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날 유고가 있으면 다음날 하도록 법전에도 실려 있는데, 지금 이후로는 거행해야 할 날에 사고가 발생했을 경우엔 본관이 계품하여 사고가 없는 날에 거행토록 하되 그 달을 벗어나지 않도록 해야 마땅할 듯하니, 본관으로 하여금 착실히 거행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교서관으로 하여금 서책을 인출(印出)할 때마다 1본(本)을 본관에 보내주도록 하는 것을 항식(恒式)으로 정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개성부(開城府) 유생 이문규(李文奎) 등이 상소하여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8월 3일 무술

상이 침을 맞았다.

 

8월 5일 경자

대사간 이경억(李慶億) 등이 보성 군수(寶城郡守) 이창욱(李昌彧)과 부안 현감(扶安縣監) 최진남(崔鎭南)을 목민관에 부적합하다고 탄핵하면서 모두 체차시키기를 청하였는데, 상이 진남의 일은 따르고 창욱의 일은 따르지 않았다. 양달원(梁達源)을 나문(拿問)하는 일을 정계(停啓)하였는데, 물의가 이를 비난하였다.

 

상이 침을 맞았다. 제조 김좌명(金佐明)이 아뢰기를,
"신이 소회(所懷)가 있어 이렇게 감히 우러러 진달드립니다. 근일 양사의 논계에 대해 하나도 윤허해 따르시는 것이 없으므로 뭇사람들이 모두 안타깝고 답답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조징규(趙徵奎)가 술에 취해 출입한 것은 신도 눈으로 본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도 일찍이 그의 술 좋아하는 것을 꾸짖었었다. 대계(臺啓)를 따르는 것이야 어렵지 않지만 이런 이야기를 어떻게 외간에 전파시킨단 말인가. 이것이 내가 따르지 않은 이유이다."
하였다. 좌명이 아뢰기를,
"권대시(權大時)의 소에 나오는 이쪽 편 저쪽 편의 설이 해괴한 듯하긴 합니다만, 진신(搢紳)들 사이에도 당론(黨論)을 갖고 관직 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어떻게 대시에 대해서만 유독 심각하게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그 사람은 문관도 아니고 무관도 아니며 단지 일개 무례한 인간일 뿐입니다. 최대립(崔大立)은 선조(先朝) 때부터 가까이에서 모셔온 환관(宦官)이니 조가(朝家)의 체례(體例)를 모르지 않을텐데 이번에 그만 이와 같이 하였으므로 평소 풍력(風力)이 있는 이상진(李尙眞)이 치계(馳啓)하였던 것입니다. 양달원(梁達遠)은 원래 무식한 자인데, 교관(敎官)이 또한 꼭 경계시키지 않아도 될 일을 가지고 경계시키긴 하였지만 이는 당초 그들이 일을 잘 처리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온 행동이었습니다.
대간이 이상 네 가지 일을 가지고 논계했는데도 오래도록 윤허해 따르지 않으신 채 위와 아래가 서로 버티고만 있으니 이는 성덕(聖德)에 누를 끼치는 일입니다. 어찌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도승지 남노성(南老星)이 아뢰기를,
"좌명이 말한 것이 옳습니다."
하였으나, 상이 모두 답하지 않았다.

 

전 부사 허목(許穆)이 상소하기를,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후사가 없으시다가 황천(皇天)이 성상을 보우하시어 원자(元子)를 탄생시켰으니, 이는 하늘이 성자(聖子)를 내려 준 것이라 하겠습니다.
예(禮)를 보건대, 태자(太子)가 태어나면 성인례(成人禮)를 거행한 뒤에 3개월 만에 선비로 하여금 업게 하며 유사(有司)가 단면(端冕)118)   차림으로 남교(南郊)119)  에 가서 뵙게 한다 하였고, 제후의 세자(世子)는 천자에게 맹세를 드리고 그 이름을 오사(五祀)120)  와 산천(山川)에 두루 고한다 하였으니, 이는 통서(統緖)를 엄중히 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다른 기대를 갖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현재 성자(聖子)가 탄생한 지 벌써 3년이 되었는데도 성인례를 거행하지 않은 채 저위(儲位)를 오래도록 비워두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신이 모르겠습니다만, 전하께서 지금 춘추가 한창이시어 세자를 세우는 대계(大計)를 지금 하기에는 너무 이르다고 생각해서 그러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성자가 아직 유아기로서 자라지 않았으니 몇 년 더 미룬 뒤 하려고 하시는 것입니까? 그러나 세자를 세우는 큰 일이야말로 예에 비추어 보아도 이렇듯 엄한 것으로서 하늘이 내려주시고 인심이 결부되어 있는 것이니, 나이가 어리다는 것에 구애를 받아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보부편(保傅篇)에 이르기를 ‘성왕(成王)이 태자가 되자 강보(襁褓)에 쌓인 어린 아이였는데도 소공(召公)이 태보(太保)가 되고 주공(周公)이 태부(太傅)가 되고 태공(太公)이 태사(太師)가 되어 효(孝)·인(仁)·예(禮)·의(義)를 밝혀서 이끌며 습성이 되게 하였으니, 성왕은 적자(赤子) 때부터 이미 가르침이 행해졌었다.’고 하였습니다.
태자에 대한 예가 이와 같은만큼 고사(古事)에 비하면 이미 늦긴 하였습니다만, 그래도 모쪼록 뭔가 알아 볼 수 있는 어린 아이 때부터 사부(師傅)에 위임하여 교도(敎導)하고 보양(保養)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거처하고 출입하는 것과 언어와 동작 모두를 훈계하고 단속하여 귀와 눈에 익숙하게 하고 마음에 편안히 여겨지도록 해야 할 것인데, 이렇게 가르침이 이루어져 덕이 성취된 연후에야 일국의 신민이 기대하는 것을 이루어 줄 수 있고 국가도 장구한 기간에 걸쳐 안정된 정치를 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가의(賈誼)도 ‘한 나라의 운명은 태자에게 매어 있고 태자가 훌륭하게 되는 것은 일찍 가르치고 좌우의 사람들을 잘 고르는 데 있다.’고 하였는데, 더구나 국본(國本)인 저사(儲嗣)를 정하는 것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국본이 미처 정해지지 않은 것은 나라가 위태롭게 되는 길이니,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일찍 저사를 정하여 천심(天心)에 순응하고 사부를 세워 교양시키는 일을 책임지움으로써 사방 신민들의 바람을 따르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그 소를 예조에 내렸다. 판서 홍명하(洪命夏)가 복계(覆啓)하기를,
"원자가 탄생한 것이야말로 종사(宗社)의 무궁한 복이니, 온 나라의 신민들로서 그 누가 기뻐하며 떠받들지 않겠습니까. 탄생한 초기에 간원이 고례(古禮)에 따라 행하기를 청했었는데, 《실록(實錄)》을 상고해 보니 조종조(祖宗朝)에서 일찍이 고례를 준행한 일은 없었고, 단지 원자가 태어난 지 6년 만에 책봉(冊封)하는 일이 있었을 따름이었습니다. 현재 고례에 따라 행하지 않았어도 인심이 매어 있어 국본(國本)은 자연히 정해진 셈인데, 아직 거행치 못한 것은 단지 봉전(封典)일 따름입니다.
지금 이 허목의 소를 살펴 보건대 고례에 따라 행하고 싶어하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만, 저위(儲位)가 오래도록 비어 있어 국본(國本)이 정해지지 않았다는 설에 대해서는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개 태자가 뭔가 느낄 수 있는 두세 살쯤에 삼공(三公)121)  과 삼소(三少)122)  가 이끌어 습관이 되게 하는 것이 곧 성주(成周)의 예(禮)이니, 지금 원자의 나이가 어리다 하더라도 속히 봉전을 거행하여 시기에 맞게 보양(保養)하는 것이야말로 일찍 교화시킨다는 뜻에 합치된다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런 막중한 예를 해조에서 감히 단독으로 처리할 수 없으니, 대신에게 의논드리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의논드리기를,
"원자가 탄생한 날이 바로 국본(國本)이 저절로 정해지는 날로서, 종묘(宗廟)에 고하고 백관이 진하(陳賀)하고 팔도가 함께 경축하고 과거를 설치하며 인재를 뽑았습니다. 그리고 온 나라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모두 기뻐하며 떠받들고 있고 보면, 허목이 소에서 이야기한 ‘국본이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는 설은 실로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가 인용한 바 ‘성왕은 적자(赤子) 때부터 가르침이 이미 행해졌었다.’고 한 말이야말로 지론(至論)이니 본래 이에 따라 시행해야 온당하겠습니다마는, 그래도 책봉하는 예는 조종조에서 행해온 것을 본받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고, 영부사 이경석(李景奭), 좌의정 원두표(元斗杓), 우의정 정유성(鄭維城)도 태화와 동일하게 의논드리니, 상이 이르기를,
"책봉하는 예는 우선 서서히 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경휘(李慶徽)를 승지로, 송창(宋昌)을 정언으로 삼았다.

 

8월 6일 신축

상이 대신과 주사(籌司)123)  의 재신(宰臣)들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재생(裁省)하는 일은 신축년의 예에 따라 행해야 마땅한데, 일찍이 강구하지 않을 수 없음은 물론 주관할 사람은 더더욱 빨리 정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누가 적임자인가?"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유계와 조복양 두 사람이 적임자인데, 복양은 현재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있습니다."
하니, 상이 복양을 체차시켜 경직(京職)에 부치도록 명하였다. 좌의정 원두표(元斗杓)가 아뢰기를,
"호조 판서 정치화(鄭致和)가 장차 경사(京師)에 가게 되어 있는데, 이렇게 진휼하는 정사를 행할 때를 당하여 탁지(度支)의 임무를 생소한 사람에게 맡길 수는 없으니, 변통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정치화는 체차시키고, 종2품 중에서 대신에게 의논하여 의망(擬望)토록 하라."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전주 부윤(全州府尹)을 추수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설치하기로 이미 품정(稟定)했었는데, 지금 또 흉년이 들었으니 또 내년 가을 때까지 우선 기다리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두표가 아뢰기를,
"진휼청(賑恤廳) 낭청(郞廳)은 나라 일에 성의가 있는 자를 택해야 마땅하니, 민유중(閔維重)과 남구만(南九萬)을 차임(差任)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태화가 옥당의 차자를 가지고 나아가 아뢰기를,
"근학(勤學)·입지(立志)·청심(淸心)·양기(養氣)·경외(敬畏) 등의 일은 돌아보건대 성명께서 얼마나 힘써 행하시느냐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지 않았다. 태화가 아뢰기를,
"금병(禁兵)에 관한 일은 5백 명을 한도로 하여 궐원이 생겨도 보충하지 말도록 청하였는데, 내년 가을까지를 기한으로 이에 의거하여 시행하는 것이 매우 편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태화가 아뢰기를,
"지성으로 현인을 불러들여야 한다는 한 조목 역시 성상께서 깊이 유념하시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하고, 두표가 아뢰기를,
"불행히도 조정의 논의가 두 갈래로 갈라져 양송(兩宋)124)  이 한번 가서는 끝내 돌아오지 않고 있는데, 지성으로 초치하는 것은 역시 전하에게 달려 있다 할 것입니다."
하고, 태화가 아뢰기를,
"송시열이 마음속으로 불안해 할 텐데 정신(廷臣)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국휼(國恤)125)  을 당하던 초기에 신 역시 이 직책을 수행하고 있었는데, 신이 본래 《예경(禮經)》에 어두웠던 관계로 겨우 국전(國典)에 기재된 기년(期年)의 제도를 가지고 대왕 대비의 복제(服制)를 의논하려고 시열에게 물었더니, 시열도 신의 말을 따랐었습니다. 따라서 만약 이것을 가지고 시열의 죄로 삼는다면 신도 죄가 있는 셈입니다. 그뒤 예를 논하면서 변설(辨說)이 있긴 하였습니다만 당초 의논드린 내용으로 볼 때 신과 시열이 똑같았으니, 이제 와서 불안해 하는 것이 어찌 신과 시열에게 차이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지 않았다. 그 나머지 10여 조목에 대해서 제신(諸臣)이 논란을 벌였으나 모두 변통하는 일은 없었다. 상이 이르기를,
"헌부의 계사 가운데 ‘내사(內司)에서 간정 대출(間定代出)한 일’이 나오는데, 그것이 어떤 일인 줄 알고 쟁집하는 것인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그것은 곧 제궁가(諸宮家)가 각사(各司)의 노비를 받아내면서 그 당사자에 한하여 부리는 일이 아닙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것이 아니고 바로 내사의 노비를 궁가에 정해 주는 일인데, 이에 대해서는 원래 이조에 관유(關由)해야 하는 규정이 없다. 그런데 이런 것인 줄 알지 못하고는 그만 ‘궁가나 내사에 관련되는 일이기만 하면 번번이 어려워하며 따르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가소로운 일이다."
하였다. 대사헌 김수항(金壽恒)이 인피하기를,
"신들이 처음에 간정(間定)에 관한 곡절을 알지 못한 데다가 그런 것은 해조에 관유하지 않는다는 것도 모른 채, 내사의 공사(公事)는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반드시 이조를 거치는 것이 체례(體例)에 맞는 일이라고 생각한 나머지 이런 계사를 올렸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성상의 분부를 받들고 보니 신중하게 자세히 살피지 못한 잘못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체차시켜 주소서."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권대시(權大時)가 형편없이 말을 하기는 하였습니다마는, 국문까지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정거(停擧)시키는 벌을 시행하는 것이 오히려 괜찮겠습니다."
하고, 두표가 아뢰기를,
"대시가 상소한 것은 사문(斯文)과 관계된 일 때문이었는데, 나문까지 한다면 어찌 성덕(聖德)에 누가 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시는 정거시키고 놓아보내라."
하였다. 홍명하(洪命夏)가 아뢰기를,
"옥당이 차자에서 진달한 사치의 해독이야말로 현재 당면한 폐습(弊習)으로서 전보다 더욱 심해지고 있는데, 더구나 지금 흉년이 들었으니 더욱 통렬하게 금해야 하겠습니다. 법사(法司)로 하여금 금제(禁制)를 거듭 밝혀 착실히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명하가 아뢰기를,
"고 상신(相臣) 김상용(金尙容)과 김상헌(金尙憲)의 서원에 유소(儒疏)에 따라 사액(賜額)하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김수항이 조징규(趙徵奎)의 불경죄(不敬罪)를 아뢰면서 나문할 것을 청하니, 따랐다. 이경억(李慶億)이 이창욱(李昌彧)은 목민관으로 적합하지 못하다고 아뢰면서 체차시키기를 청하니, 따랐다.

 

8월 7일 임인

장령 송시철(宋時喆), 지평 윤우정(尹遇丁)·남이성(南二星)이 간정 공사(間定公事)에 관한 일로 역시 인피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경기 지방의 산록(山麓)과 해변 및 오래도록 황폐하게 버려둔 들로서 경작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땅에 대해 향곡(鄕曲)의 호우(豪右)들이 양안(量案)에 그 땅 이름이 기재되어 있다는 이유로 제멋대로 금하고 억누르는 바람에 땔나무를 하는 자들이 발을 못 붙이고 고기잡는 자들이 손을 놀리지 못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무덤이 첩첩이 들어서 있는 곳으로 경성(京城)과 지극히 가까운 땅까지도 자기 소유물이라고 일컬으면서 세금을 징수하는 등 온갖 방법으로 간악하고 외람된 짓을 자행하고 있으니, 좌·우 균전청(均田廳)으로 하여금 일일이 조사해 낸 뒤 무단(武斷)한 데 적용하는 율(律)로 논하여 일체 금단토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8월 8일 계묘

대사헌 김수항(金壽恒), 장령 송시철(宋時喆), 지평 윤우정(尹遇丁)과 남이성(南二星)이 아뢰기를,
"내시부(內侍府)에 인신(印信)이 있긴 합니다만 품질의 고하간에 써넣도록 하는 규정이 원래 없고 보면 다시 또 상고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내수사의 예(例)에 따라 해조(該曹)에 보고하고 행이(行移)하게 함으로써 잘못된 관습을 바로잡고 법례를 중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고 이르기를,
"상고할 것이 뭐가 있느냐고 말한 한 대목은 매우 살피지 못한 것이다."
하였다.

 

8월 9일 갑진

헌부가 상으로부터 살피지 못했다는 분부를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8월 10일 을사

대사간 이경억(李慶億)이 처치하기를,
"헌부가 논집한 것에 잘못이 없으니, 출사시키소서."
하니, 따랐다.

 

충청도 진사 이상경(李尙絅) 등과 전라도 생원 유무(柳楙) 등이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문묘에 종사할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8월 11일 병오

오두인(吳斗寅)을 부수찬으로, 이유상(李有相)을 헌납으로, 이유(李秞)를 장령으로, 조복양(趙復陽)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전 전적 권진한(權震翰)이 세 차례 항거하며 함답(緘答)을 거역하자 헌부가 본도로 하여금 형추(刑推)하게 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추함(推緘)을 거역했다고 하여 조관(朝官)을 외방에서 형추한 예가 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봉입(捧入)한 승지를 꾸짖고 근거할 만한 문서를 찾아서 들이도록 하였다.

 

8월 13일 무신

상이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가을 가뭄이 이토록 혹독하니 올해도 흉년을 면하기가 어렵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래도 상강(霜降) 날짜가 조금 뒤로 밀린 것은 다행이다."
하였다. 형조 판서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전일 지아비를 죽인 여인의 형(刑)을 집행한 뒤에 그 여인의 시체에 음행을 한 자가 있었는데 형신(刑訊)을 하여 승복(承服)을 받아내었습니다. 사람들 모두가 죽여야 한다고 합니다만 법문에 이를 적용할 율이 없는데 그렇다고 새로 율을 제정할 수도 없는 형편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돈을 받아먹고 싶어서 그런 일을 범하다니 세상에 어찌 이처럼 흉참한 일이 있겠는가."
하였다. 정태화 및 대사헌 김수항(金壽恒), 대사간 이경억(李慶億), 응교 이민적(李敏迪)이 모두 효시(梟示)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르면서 이르기를,
"그에게 돈을 주기로 약속한 자도 전가 사변(全家徙邊) 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김수항이 내시부의 일을 아뢰었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이민적이 아뢰기를,
"상께서 재해를 인하여 구언(求言)하셨습니다만 삼사(三司) 외에는 유지(有旨)에 응한 자가 없습니다. 이는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전하께서 실제로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여 채용하시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헌부가 논한 내시부의 일이나 간원이 논한 제궁가(諸宮家)의 절수(折受)에 관한 일을 아직도 윤허해 따르지 않고 계시니, 바른 말을 받아들이는 덕에 어찌 흠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이 답하지 않았다.

 

경관(京官)을 보내 남한 산성(南漢山城)과 강도(江都)의 창곡(倉穀)을 검사하였는데, 이민적(李敏迪)이 아뢴 데 따른 것이었다.

 

이저의 고신(告身)을 빼앗고 도삼년(徒三年) 정배(定配)에 처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식자들이 법을 제대로 적용하지 못한 것을 비난하였다.


【태백산사고본】 7책 7권 17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379면
【분류】인사-관리(管理) / 사법-행형(行刑) / 역사-편사(編史)
사신은 논한다. 식자들이 법을 제대로 적용하지 못한 것을 비난하였다.

 

8월 16일 신해

대사헌 김수항 등이 아뢰기를,
"출신(出身) 박대붕(朴大鵬)이 접수시킨 소송 문권(文券)이 해조에서 분실되었다고 정장(呈狀)하여 원통함을 호소했습니다. 그 송리(訟理)126)  의 곡직(曲直)을 알 수는 없습니다마는 문권이 분실된 것은 의심할 만한 일입니다. 이것이 해리(該吏)가 용간(用奸)한 일에 불과한 것이라 할지라도 해랑(該郞) 역시 직무를 태만히 한 죄를 면하기 어려우니 파직시키고, 해리는 유사로 하여금 엄히 형신하여 사실을 알아내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서필원(徐必遠)을 우승지로, 이지무(李枝茂)를 헌납으로, 이유상(李有相)·오시수(吳始壽)를 수찬으로 삼았다.

 

8월 17일 임자

평안도 태천(泰川)과 운산(雲山) 등 읍에 지진이 일어났다.

 

준익(俊益)이 복주(伏誅)되었는데, 여인의 시체에 음행을 한 자이다. 그리고 이 사건의 판결을 수교(受敎) 중에 기록하여 법률로 정하게 하였다.

 

비국이 제언사(堤堰司)의 낭청을 보내 제언을 검사하게 하기를 청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지난번 안국재(安國宰) 등이 상소한 데 따라 각도로 하여금 각읍의 향교(鄕校)에서 제사드리는 위판(位版)의 현황을 조사해 아뢰도록 했었습니다. 지금 팔도의 계사를 보건대, 계수관(界首官)127)  이 있는 곳의 향교는 태학(太學)과 차이가 없는데, 주(州)·부(府)·군(郡)·현(縣) 중에는 혹 제사를 드려야 하는데도 제사드리지 않는 경우도 있고, 혹 제사드리면 안 되는데도 제사를 드리는 경우도 있고, 혹 위차(位次)의 차서(次序)를 잃은 경우도 있고, 혹 아조(我朝) 선현(先賢)의 위판을 분실했는데도 개정하지 않은 곳도 있고, 혹 무(廡)가 없는 군(郡)도 있고, 혹 무가 있는 현(縣)도 있었으니, 각 해도(該道)로 하여금 일체 정제(定制)에 따라 제때에 바로잡게 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군(郡)이면서도 무가 없게 된 이유가 혹 물력(物力)이 달려서일 수도 있고, 현인데도 무가 있게 된 이유가 혹 묘우(廟宇)가 협착해서 일 수도 있는데, 일시에 개수(改修)하기는 형세상 어려운 점이 있을 것이니, 조금 풍년들 때를 기다렸다가 요리해서 거행토록 하는 것이 온당할 듯싶습니다.
그리고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128)  의 후명(後名)129)  이 문종 대왕(文宗大王)의 어휘(御諱)130)  에 저촉되는데도 각도의 위판을 보면 그의 후명으로 기록한 곳이 상당히 많으니 매우 미안스럽습니다. 즉시 ‘유(裕)’자로 고쳐서 써넣으라는 뜻을 팔도 감사에게 알리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8월 20일 을묘

대사간 이경억(李慶億)이 탄핵하기를,
"금성 현감(錦城縣監) 윤격(尹檄)은 서산(瑞山)의 수령으로 있을 때 잘 다스렸다는 이름이 있었으나 실제 공적은 전혀 없었는데 자급이 올라 큰 고을로 옮겨 제수되기까지 하였으므로 이미 물의가 있었습니다. 그뒤 본현에 이르러서도 정령(政令)이 이미 고을을 제압하기에 부족할 뿐만 아니라 몸이 병들고 쇠약하여 번거로운 업무를 감당해내지 못하고 있으니, 체차시키소서."
하고, 또 탄핵하기를,
"홍양 현감(洪陽縣監) 윤변은 날마다 술만 마시고 직무는 폐해버린 나머지 송사(訟事)가 많이 적체되고 있으므로 많은 백성들이 원망하고 있으니, 그를 체차시키소서."
하였으나, 상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은산(殷山)의 전 현감 박율은 회부(會付)131)  할 곡식을 받아 들이지 않았는데도 이미 받아들였다고 조정을 속였습니다. 그러니 이미 체직되었다고 하여 그냥 놔둘 수 없습니다. 나문하여 본도로 하여금 엄히 조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오정위(吳挺緯)·이태연(李泰淵)을 승지로, 이일상(李一相)을 좌참찬으로, 홍중보(洪重普)를 우참찬으로, 조복양(趙復陽)을 동지성균(同知成均)으로 삼았다.

 

8월 21일 병진

함경도 유생 한희익(韓希益)이 상소하여 양신(兩臣)을 종사(從祀)하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대마도주(對馬島主)가 강호(江戶) 집정(執政)의 요구 사항이라고 일컬으면서 사서(四書)·《오경대전(五經大全)》·《사기평림(史記評林)》·《주자어류(朱子語類)》를 구입하기를 청하였는데, 조정이 허락하지 않고 단지 《어류》와 《평림》 두 책의 구입만 허락하였다.

 

이경휘(李慶徽)를 이조 참의로, 민여로(閔汝老)를 헌납으로 삼았다.

 

8월 24일 기미

조형(趙珩)에 관한 일을 정계(停啓)하였다.

 

8월 26일 신유

평안도 함종(咸從)·영유(永柔) 등 읍에 지진이 일어났다.

 

8월 28일 계해

대사간 이경억(李慶億) 등이 아뢰기를,
"올해 큰물이 지고 가뭄이 드는 재해를 입은 곳 중에서 영남이 더욱 심하여 이렇게 추수할 때를 당했는데도 굶주리는 백성이 아직도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 요즘 듣건대 호서(湖西)로 옮겨 오는 영남 백성들이 매우 많은데 늙은이를 부축하고 어린아이를 끌고 오는 등 도로에 잇따르고 있으므로 주객(主客) 모두가 고달픈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신(道臣)이 한번도 위에 보고하지 않았으니, 그 행태에 대해 경책(警責)을 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양도 감사를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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