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7권, 현종 4년 1663년 9월

싸라리리 2025. 12. 10.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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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일 을축

우의정 정유성(鄭維城)이 잇따라 소장을 올려 체차시켜 주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너그럽게 비답하며 허락하지 않았다.

 

9월 2일 병인

사간 이정(李程)이 인피하기를,
"환시(宦侍)의 교만한 습성은 법으로 응당 엄히 다스려야 합니다. 그런데 지난번 양달원(梁達源)의 죄를 논하다가 요청한 대로 되지 않은 상태에서 정계(停啓)하였으므로 그것만을 가지고도 물의로부터 이미 비난을 받았습니다. 달원이 사부(士夫)에게 모욕을 가한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제 듣건대 달원을 조율(照律)한 공사에 대해 조사해 처리하라는 명을 내리셨다 하니, 이는 그가 무함하여 꾸미는 말만 신임을 받고 대간이 논한 것은 믿음을 받지 못한 것이 되는 셈으로서 신은 정말 개연한 마음이 듭니다. 체차시켜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이조가 아뢰기를,
"내수사가 ‘수진궁(壽進宮)에 소속된 각읍의 노비 및 그 토전(土田)에서 경작해 먹고 사는 자와 어의궁(於義宮)에 소속된 신천(信川)의 어로리(於蘆里) 농장 내 모민(募民) 등에 대해서는 속오(束伍)나 잡역(雜役)으로 침해받지 못하게 할 일’로 수본(手本)을 올린 것이 계하(啓下)되었습니다.
근래 민역(民役)을 보건대 전에 비해 유난히 더욱 고통을 받고 있는데, 백성을 똑같이 보아야 한다는 의리에 비추어 볼 때 공사(公私)간에 차이를 두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내사의 종들이라 하더라도 모두 군오(軍伍)에 충정(充定)시키도록 허락하고 있는만큼 양궁(兩宮)에 소속된 종들만 유독 허락치 않는 것은 안 될 일입니다. 더구나 궁장(宮庄)에 투입(投入)한 자들 대부분이 역(役)을 피한 간민(奸民)들인데, 이런데도 계속 길을 열어 준다면 이는 백성들을 몰아 그곳에 들어가 소굴을 이루게 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아무리 전규(前規)가 있다고는 하지만 국체(國體)와 민폐(民弊)의 측면에서 볼 때 중대한 관련이 있기에 감히 받들어 행하지 못하겠습니다. 모두 시행하지 말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전규가 있다고 말해놓고는 또 길을 열어주면 안 된다고 말하다니, 근거가 없는 일인 듯하다. 예전대로 거행토록 하라."
하였다. 승지 김익경(金益炅)이 아뢰기를,
"해조가 방계(防啓)한 것이야말로 체례(體例)에 맞는 것이라고 하겠는데, 성명께서는 윤허하지 않으실 뿐더러 근거없는 일이라고 꾸짖기까지 하셨으니, 신은 삼가 개연한 마음이 듭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들은 내사의 노비와 성격이 다르다. 일단 전토(田土)가 있으면 잡역으로 침해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예전부터 늘 행해오던 일이다. 계사의 뜻을 나는 정말 이해하지 못하겠다. 즉시 분부토록 하라."
하였다.

 

9월 3일 정묘

대사간 이경억(李慶億)도 양달원(梁達源)의 조율 공사(照律公事)를 조사해 처리케 하였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진향사(進香使)의 장계 가운데 소위 ‘작정(酌定)했다’고 한 것은 바로 뇌물로 은(銀) 4천 냥을 주기로 이일선(李一先)과 약속했다는 것입니다. 조사하는 칙사가 나오느냐 안 나오느냐의 여부가 어찌 일선의 손에 달렸겠습니까. 일선이 잘 주선해 주겠다고 자신의 힘을 과시하며 뇌물로 은을 중간에서 얻으려고 한 것일 뿐입니다. 이런 길이 한번 열리면 뒷날의 폐단이 끝이 없게 될 것입니다."
하고, 대사헌 김수항이 아뢰기를,
"이 일을 듣고 나서 즉시 사신의 죄를 청하고 싶었습니다만, 문자로 드러낼 경우 번거롭게 될 듯싶기에 논계하지 못한 것인데, 사신은 중하게 따져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가령 경인년 때의 일처럼 장차 조정에 화가 미칠 일이었다면 그래도 그렇게 한 것이 용인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이런 정도의 일에 대해 개인적으로 뇌물을 주기로 약속하다니, 도대체 그 뜻이 무엇인가."
하였다. 형조 판서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이 일은 대계(臺啓)를 기다릴 필요도 없이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토록 해야 하겠습니다."
하고, 정태화와 원두표(元斗杓)가 모두 나문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예조 판서 홍명하(洪命夏)가 아뢰기를,
"양전(量田)하는 일이 이미 끝났으니, 선혜청에서 대동미(大同米)를 거두어들일 일을 의정(議定)해야 하겠습니다."
하였는데, 태화와 두표가 신결(新結)을 기준으로 하여 미곡을 거둘 것을 청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좌도(左道)는 양전한 뒤의 결수(結數)가 얼마나 되는가?"
하니, 민정중(閔鼎重)이 아뢰기를,
"세(稅)가 없는 제반 결전(結田)을 제외하고 역(役)에 응해야 할 결수를 합치면 모두 3만 3천여 결이 됩니다."
하였다. 상이 또 하문하기를,
"좌도와 우도를 합하면 얼마나 되는가?"
하니, 명하가 아뢰기를,
"7만여 결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신결(新結)의 수가 구결(舊結)의 배는 되는가?"
하니, 명하가 아뢰기를,
"호조는 급복(給復)해주지 않기 때문에 세(稅)를 거두어들이는 것이 구결의 배가 되지만, 선혜청의 경우는 급복해주기 때문에 구결의 배가 못 됩니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지금 두 가지 의논이 있는데, 하나는 12두(斗)의 미곡을 거두어들이되 호서(湖西)에서 시행하는 대동법처럼 백성에게 잡역(雜役)을 책임지우지 못하게 하는 것이 편하겠다는 것이고, 하나는 10두의 미곡을 거두어들이고 예전처럼 잡역을 백성에게 배정하는 것이 편할 듯하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먼저 이 두 가지의 편부(便否)를 검토한 뒤에야 규정을 정해 미곡을 거두어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예전에 받아들이던 16두 중에서 6두를 감하면 바로 10두가 되는데, 잡역은 16두를 받아들이던 때에 의거하여 모두 백성에게 배정해야 한다는 말인가?"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당초 균전(均田)할 때 백성들과 약속하기를 ‘양전한 뒤의 결수가 예전의 결수에 배가 되면 16두 중에서 반절을 감해 주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양전한 뒤의 결수가 예전의 결수에 배가 되지 못하니, 10두의 미곡을 거두어들이는 것이 좋겠다."
하니, 명하가 아뢰기를,
"10두는 불편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16두야말로 백성들의 구역(舊役)이다. 따라서 지금 감하여 10두로 감해 줄 경우, 잡역을 백성에게 책임지운다 하더라도 이는 새로 만들어내는 역이 아닌데, 백성이 어찌 원망하겠는가. 영상의 의견은 어떠한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신의 생각도 상의 분부와 같습니다."
하였다. 정치화(鄭致和)가 아뢰기를,
"신도 10두가 편하다고 생각합니다."
하고, 허적은 아뢰기를,
"신도 10두의 미곡을 거두어들이되 잡역도 그 속에 모두 포함시키면 편하리라고 생각합니다."
하고, 이조 참판 조복양(趙復陽)은 아뢰기를,
"12두로 법식을 삼되 10두는 선혜청으로 수송하고 2두는 본 고을에 남겨두어 인부와 말을 고용하는 값으로 삼게 하면 편할 듯합니다."
하고, 민유중(閔維重)은 아뢰기를,
"법도 오래되면 폐단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지금 12두로 정하더라도 뒤에 가면 반드시 더 내게 하는 역이 있을 것이니, 신은 10두가 편하리라고 생각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칙사가 올 때 열읍(列邑)이 부담하는 인부와 말의 수가 얼마나 되는가?"
하니, 명하가 아뢰기를,
"현재 열읍으로 하여금 그 수를 보고하게 하고 있는 중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만약 12두를 받아들이기로 했다가 뒤에 혹 부득이 더 배정해야 할 일이 있게되면, 그야말로 백성에게 믿음을 잃게 될 것이니, 처음 입법(立法)할 때 자세히 살펴 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경들은 물러가 자세히 헤아려 보고 열읍의 인부와 말의 숫자도 알아 본 뒤에 후일 등대(登對)할 때 다시 품정(稟定)토록 하라."
하였다. 명하가 아뢰기를,
"듣건대 사도시의 어공(御供)하는 갱미(粳米)도 재생(裁省)하라고 명을 내리셨다 하는데, 금년에 흉년이 들었다 해도 신축년 때처럼 심한 지경에는 이르지 않았으니, 우선 감하지 말게 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백관에게 주는 녹봉도 이미 줄였는데, 어공만 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는데, 이를 듣는 자들이 모두 임금다운 말이라고 하였다.

 

9월 4일 무진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행 대사헌 김수항(金壽恒) 등이 처치하여 이정(李程)과 이경억(李慶億)을 출사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9월 5일 기사

김시진(金始振)을 승지로, 이익(李翊)을 응교로, 오시수(吳始壽)를 교리로, 여성제(呂聖齊)를 수찬으로, 이숙달(李叔達)을 지평으로, 이광직(李光稷)을 정언으로 삼았다.

 

상이 의관(醫官)들에게 명하여 들어와 진찰토록 하였다. 도제조 이경석(李景奭)이 아뢰기를,
"가을 기운이 점점 싸늘해지니 약물과 음식을 드시도록 노력하시어 꾸준히 조섭하는 데 따른 효험을 보시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올해 흉년든 상황이 전국적으로 대략 같습니다만, 양남(兩南)이 특히 심하고 양남 중에서도 영남이 더욱 심하며 북로(北路)132)  가 또 가장 혹독합니다. 그리하여 만백성이 장차 굶어죽을 지경인데, 앞으로 구제할 대책에 대해서는 묘당에서 생각해 둔 바가 필시 있겠습니다만, 신도 소회가 있기에 감히 진달드립니다.
호남의 대동미(大同米) 13두(斗)는 감해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영남은 현재 많은 사람이 흩어져 떠돌고 있으니, 내년 봄을 기다려서 비로소 요역을 경감하고 진휼할 대책을 의논한다면, 때가 늦었다는 탄식이 반드시 있게 될 것입니다. 또 북로는 올해 농사를 망친 중에도 생마(生麻)133)  가 특히 심하니, 으레 보내주던 면포(綿布)나 목화(木花) 또한 모쪼록 수를 늘려 보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묘당에 말하라."
하였다.

 

내관(內官) 양달원(梁達源)이 함답(緘答)하면서 교묘한 말로 변명을 하자 상이 조사해 처리하도록 하였다. 이에 헌부가 아뢰기를,
"달원이 사부(士夫)에게 모욕을 가한 일이야말로 자자하게 전파되었고 대계(臺啓) 또한 명백할 뿐만이 아닌데, 그의 함사(緘辭)를 보면 교묘하게 꾸며 자기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전혀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하고 있으니, 이는 신임할 수 없는 것으로서 다시 조사할 일이 없다 하겠습니다. 더구나 대계(臺啓)에 따라 이미 파직시키는 벌을 시행한 터에 또 그가 함답한 데 따라 조사해 처리하도록 명하신 것은 사체로 볼 때 미안하니, 전에 조율(照律)한 대로 시행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회계는 매우 근거가 없으니, 전에 판부(判付)했던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승지 홍처대(洪處大)·오정위(吳挺緯) 등이 아뢰기를,
"헌부가 주달한 말이 매우 체례(體例)에 맞는데, 상께서는 근거가 없다고 배척하기까지 하셨습니다. 성명께서 이런 지나친 행동을 하실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신들이 감히 예에 따라 봉행할 수는 없기에 감히 이렇게 봉환(封還)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봉환하는 것이야 본원의 직분이라 하더라도, 이 회계의 경우만은 너무도 전도(顚倒)되어 근거가 없다."
하였다. 처대 등이 재차 아뢰며 복역(覆逆)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찌 이렇게까지 내 생각을 몰라주는가.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9월 7일 신미

행 대사헌 김수항(金壽恒), 장령 송시철(宋時喆)·이유(李秞) 등이 상으로부터 근거없다고 배척을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대사간 이경억(李慶億), 사간 이정(李程) 등이 인피하기를,
"일개 환관(宦官)의 일 때문에 근밀(近密)한 위치에 있는 대각(臺閣)의 신하들이 잇따라 배척을 받고 있으므로 모두들 불안한 생각을 품고 있습니다. 사방에서 이를 들으면 필시 ‘전하가 내신(內臣)만 치우치게 옹호한 나머지 이런 거조가 있게 되었다.’고 할테니, 어찌 애석하게 여길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들이 일개 환시(宦寺)를 논한 탓으로 전하로 하여금 중도에 지나친 행동을 하시게 하였으니 이는 신들의 죄입니다. 체차시켜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9월 9일 계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응교 이익(李翊), 수찬 이유상(李有相), 부수찬 오두인(吳斗寅) 등이 처치하여 양사(兩司)의 인피한 자들을 출사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정언 이광직(李光稷)이 아뢰기를,
"본원이 양달원(梁達源)의 일에 대해 일찍이 이미 사실에 입각하여 논계하였고 보면, 그가 스스로 변명하는 말을 믿어서는 안 될텐데, 조사해서 처리하라는 명이 나온 것은 의외였습니다. 그리고 헌부가 주달한 것도 실로 집법(執法)하는 논이었는데, 또 일층 더하여 미안스러운 분부를 내리셨으므로 신은 삼가 성명을 위하여 애석하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헌부가 조율(照律)한 대로 시행하소서."
하니, 상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이조가 수진궁(壽進宮)과 어의궁(於義宮) 양궁(兩宮)에 대해 초기(草記)한 일이야말로 혁파시키자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는데 너무 심하게 꺾어버리셨습니다. 신은 전하께서 일개 ‘사자(私字)’를 제대로 타파하지 못하신 것이 아닌가 염려됩니다. 해조의 초기대로 시행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양사(兩司)가 정세상 편안히 있기가 어렵다는 이유로 패소(牌召)에 응하지 않아 면직되었다.

 

서필원(徐必遠)을 승지로, 남구만(南九萬)을 집의로, 여성제(呂聖齊)를 교리로 삼았다.

 

9월 10일 갑술

호남에서 받아들이는 대동미(大同米)에서 1두(斗)를 감해 주고 북도(北道)에 군포(軍布) 30동(同)과 씨 뺀 면화(綿花) 2천 근(斤)을 더 보내라고 명하였는데, 원임 대신 이경석(李景奭)이 주달한 데 따른 것이었다.

 

9월 11일 을해

집의 남구만(南九萬), 정언 이광직(李光稷)이 성상소(城上所)로서 대청(臺廳)에 나아가 청대(請對)하니, 상이 인견하였다. 광직이 인피하기를,
"신이 어의궁(於義宮)과 수진궁(壽進宮) 양궁(兩宮)의 일에 대해 바로 얼마 전에 논계를 했었는데, 지금 듣건대 제궁가(諸宮家)도 모두 이런 일이 있다 합니다. 그런데 신이 미처 이 사실을 알지 못해 아울러 시행하지 말라고 청하지 못했으니, 체차시켜 주소서."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하였다. 구만이 내시부(內侍府)의 일을 아뢰었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또 안발(安鈸)을 도태시켜버릴 일을 아뢰니, 상이 이르기를,
"안발은 일찍이 이 직책을 거쳤었는데 지금 와서 도태시키는 것이 옳은 일인지 모르겠다."
하였다. 구만이 아뢰기를,
"이미 그가 부적당하다는 것을 안 이상, 어떻게 그가 이미 그 직책을 거쳤다고 해서 그냥 놔둘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지 않았다. 구만이 아뢰기를,
"비답을 받아야만이 다른 일을 아뢸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간이 하루에 재계(再啓)하는 규정이 없기에 내 생각에는 소회를 말하는 것이라고 여겨져서 답하지 않은 것이다. 안발을 어찌 꼭 도태시켜야 하겠는가."
하였다. 구만이 또 아뢰기를,
"조원(曺瑗)의 일은 일개 간민(奸民)이 쟁송(爭訟)한 데 따른 것인데, 왕명(王命)을 수고롭게 하며 경옥(京獄)에 잡아들이도록까지 하였으니, 국체(國體)를 손상시킨 것이 막심합니다. 성명(成命)을 환수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일의 곡절을 분명히 알 수 있는데, 경옥에 잡아들인다 해서 안 될 것이 뭐가 있는가."
하였다. 구만이 아뢰기를,
"이미 감사가 있고 또 수령이 있는데 하필 경옥에서 다스릴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더구나 이 일이 궁가(宮家)와 관련이 있는만큼 먼 외방에서 들으면 필시 ‘성명께서 궁가의 일이기 때문에 이렇게 나명(拿命)을 내리신 것이다.’고 할테니, 성덕(聖德)에 누가 되는 것이 어떠하다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무리 경옥을 잡아들였다 하더라도 어찌 바로 죽이기야 하겠는가. 그런데 대계(臺啓)가 처음에는 ‘곡직을 모르는 상황에서 먼저 앞질러 잡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말을 하더니, 이제 와서는 또 ‘일개 간민이 쟁송한 일로써 왕명을 번거롭게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있으니, 어찌된 일인가?"
하였다. 구만이 아뢰기를,
"전후의 대계에 표현상 차이가 난 것이야 본래 따지실 일이 못 됩니다. 조원이 가령 일반 백성과 쟁송하였다면 과연 이런 명을 내리셨겠습니까. 단지 궁가에 관련된 일이었기 때문에 전하께서 기필코 잡아들여 중하게 다스리려 하신 것이니, 이것이 어찌 아랫사람들에게 보여주는 도리이겠습니까. 사리가 이처럼 명확한데도 전하께서는 줄곧 고집만 하고 계시는데, 이 점에 대해 신은 성상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큰 소리로 이르기를,
"그대가 내 뜻을 알고 싶어하는데 알아서 장차 뭘 하려고 하는가?"
하자, 구만이 아뢰기를,
"조원의 죄상(罪狀)이 죽여야 하는 것이라면 본도(本道)에서 죽여도 충분합니다. 그런데도 꼭 본도에서는 그 죄를 다스리기에 부족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일의 체계로 볼 때 안 될 일이라고 신은 확신합니다."
하며, 절하고 한편으로 아뢰면서 매우 강력하게 쟁집하니, 상이 더욱 노하여 이르기를,
"초계(初啓)한 뒤에 만약 소회가 있다면 소회라고 칭하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만 그렇게 하지 않고서 계사와 소회를 구별하지 않은 채 뒤섞어 말하면서 이토록 시끄럽게 떠들고만 있으니, 들어주기도 매우 괴롭다. 아무리 1백 번을 아뢴다 해도 어찌 따르겠는가."
하였다. 이에 좌우가 모두 두려워 벌벌 떨었는데, 남구만이 홀로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아뢰기를,
"신이 금일 청대(請對)했던 것은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대체로 한 장의 문자(文字)로 전계(傳啓)했다가 윤허를 받지 못한 다음에는 〈그날 중으로는〉 재차 진달드릴 수 없는 애로가 있고, 또 전하께서도 성의(聖意)를 분명히 보여주지 않고 계시기 때문에, 신이 전하를 가까운 거리에서 뵙고 반복해 진달드림으로써 사리의 당부(當否)를 모두 말씀드리고 싶은 마음에서였습니다. 그런데 성상께서 준엄하게 분부를 내리시며 이야기를 끝마치지 못하게 하시는데, 이 모두가 군부(君父)에게 신임을 받지 못한 결과이니, 체차시켜 주소서."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하였다. 구만이 또 아뢰기를,
"양달원(梁達源)의 추함(推緘)에 따라 다시 조사하여 처리하라고 하신 일에 대해 본부가 그 불가함을 진달드렸는데도 성명께서 따르지 않으시면서 또 미안한 분부를 내리셨으므로 신은 삼가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내관(內官)이 자기 변명한 말을 가지고 거꾸로 정신(廷臣)의 말을 의심하시다니, 이 어찌 일의 체모를 크게 손상시키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조사하여 처리하라는 명을 환수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는 이 일을 이해하지 못하겠다. 조사(朝士)와 내관이 서로 범할 일이 없는 상황에서 모욕을 받기까지 하였다면, 이상익(李商翼)에게도 잘못한 점이 있을 듯싶기에, 대간이 초계(初啓)를 올렸을 때 내가 서로 싸운 것이라는 내용으로 답했던 것인데, 그래도 달원에게 죄가 있다고 여겨 또 그를 파직시키고 추고하라고 명했던 것이었다."
하였다. 구만이 아뢰기를,
"설령 이상익에게 잘못한 점이 있다 하더라도 환관이야 본래 인주(人主)의 가노(家奴)일 뿐인데 어떻게 조사(朝士)와 동등하게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의 입장에서 처치한다면 오직 달원을 깊이 죄주는 길밖에는 없다 하겠습니다. 만약 이런 무리에 대해 사정을 봐주는 기색을 보여줄 경우 뒷날 이루 말할 수 없는 폐단이 있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가령 내가 일방적으로 달원만 옹호해주려 했다면, 그의 함답(緘答)에 대해 판부(判付)할 때 곧장 분간(分揀)134)  해 주어야 마땅하지 하필 조사해 처리하라고 했겠는가."
하였다. 구만이 아뢰기를,
"무릇 환시(宦寺) 가운데 어찌 믿을 만한 사람이 없겠으며 일을 처리할 즈음에 어찌 사리 바르게 하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만약 단지 그런 사람이라고 하여 그 일까지 믿어 곧장 사정을 봐주는 일이 있게 된다면 뒤 폐단을 막기 어렵습니다. 한(漢)나라의 정중(鄭衆)은 충렬(忠烈)한 인물이었고 당(唐)나라의 고역사(高力士)는 장상(將相)을 잘 취사(取舍)했으므로 이런 사람들을 내시(內寺)로 대우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나라와 당나라의 임금이 신임하였던 것이데, 그 결과 환시가 멋대로 농간을 부리는 걱정이 생기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명확한 증거라 하겠습니다. 환시와 조사(朝士)가 서로 다투었다 하더라도 전하의 입장에서는 달원을 중하게 다스리는 것이야말로 올바로 처치하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리로 미루어 보건대, 달원이 어찌 아무 일 없이 가만히 있는 사람에게 모욕을 가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내 생각에 이상익도 잘못이 없지 않다고 여겨졌는데 그래도 끝내 상익을 죄주는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것이 그를 일방적으로 옹호한 것이겠는가."
하였다. 구만이 또 아뢰기를,
"수진궁(壽進宮)과 어의궁(於義宮) 양궁의 일에 대해 이조가 방계(防啓)하고 정원이 진달하며 변론하였는데도 성명께서 끝내 들어주지 않으셨으므로 신은 삼가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제궁가(諸宮家)의 노비와 그 전토(田土)에서 경작하는 자들에게 다른 일을 시키지 말도록 한 일은 일체 혁파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조가 이미 예(例)가 있다고 말해 놓고는 또 길을 열어주면 안 된다고 말하였기 때문에 따르지 않은 것이다."
하였다. 구만이 아뢰기를,
"대체로 남의 말을 들을 때에는 전체적인 뜻을 취해야 하는데, 어떻게 잘못 쓴 문자를 뽑아내어 배척하면서 허락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전하께서 ‘어떻게 하면 궁장(宮庄)을 이롭게 해 줄까.’ 하시면 사대부도 ‘어떻게 하면 우리 집에 이롭게 할까.’ 할 텐데, 조정이 장차 무슨 수로 금하겠습니까. 전하께서 서책을 두루 보시건대 영명하고 바른 임금들도 이런 일을 한 적이 있었습니까. 전하께서는 마땅히 요(堯) 순(舜)을 본받으셔야 하는데, 어찌하여 그만 용주(庸主)로 자처하시는 것입니까. 전하께서 개인적으로 궁장을 이롭게 해 주시는 것이 전조(田租) 몇 섬을 더 받게 해 주려는 것에 불과할 뿐인데, 궁가가 이런 것을 받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찌 앞으로 보전되지 못하겠습니까. 조종(祖宗)께서 전하에게 부탁한 것이 얼마나 중한데, 어찌하여 이런 점은 염두에 두지 않으십니까. 신은 생각이 여기에 미칠 때마다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고 싶을 뿐만이 아닙니다."
하니, 상이 답하지 않았다. 구만이 아뢰기를,
"제궁가(諸宮家)와 내사(內司)의 일을 대신(臺臣)이 논집하고 정원이 복역(覆逆)했는데도 모두 윤허를 받지 못했으니, 신의 탐탁치 못한 이야기 같은 것으로는 필시 전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으리라는 것을 물론 알고는 있습니다. 그러나 한 장의 계사를 올렸다가 ‘불윤(不允)’이라는 두 글자만을 매번 받든 채 물러나오곤 하는 것만으로는 불성실하게 느껴질 뿐만 아니라 또한 매우 답답하게 여겨졌기 때문에 당돌하게 청대하여 감히 진달드리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섯 가지 일 가운데 네 가지는 바로 궁가와 내사에 관한 일인데 전하께서는 모두 윤허해주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신의 말이 졸렬하고 성의가 얕아서 그런 것인데, 지금 물러나와 내일 논계한다 하더라도 이 일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런데 혈성(血誠)을 쏟아 직접 뵙고 진달드려도 요청을 받아들여 주시지 않는데, 더구나 문자로 써서 어떻게 윤허해 주시기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결과적으로 직명(職名)만 헛되이 띠고 있는 것이 될 뿐이니, 신의 직을 파척해 주소서."
하니, 상이 노기를 띠면서 이르기를,
"일에는 시비가 있는 법인데, 어떻게 그대가 핍박한다고 해서 따를 수 있겠는가.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구만이 물러나 물론을 기다리려고 그 자리를 나왔다.
사신은 기록한다. 남구만이 나가는 것을 상이 눈여겨 보고서는 주서(注書)를 돌아보며 이르기를 "초계(初啓)만 기록하고 재계(再啓) 이후의 내용은 기입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상이 구만에 대해 매우 노여운 감정을 갖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곧은 말을 미워하여 외부에 그 말이 새어나가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구만이 상의 마음을 돌릴 생각으로 오시(午時)부터 신시(申時)에 이르기까지 매우 적절한 표현을 구사하며 누누이 수백 마디의 말을 진달드렸으니 참으로 극간지사(極諫之士)라고 이를 만하다. 그런데도 상이 끝내 제대로 살펴 받아들이지 않았으니, 어찌 탄식을 금할 수 있겠는가.  광직이 시장(柴場) 및 어장(漁場)을 혁파할 일과 양달원(梁達源)에 관한 일과 수진궁·어의궁에 관한 일을 아뢰었으나, 상이 들어주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전 흥덕 현감(興德縣監) 이우는 춘분(春分)이 지난 다음에 부임했던 관계로 영신(迎新)135)  하는 부마(夫馬)136)   중에 미처 서울에 올라오지 못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뒤 그가 상(喪)을 당해 서울로 돌아올 때 영신할 적에 올라오지 않았던 쇄마(刷馬)137)  를 끌고 돌아오면서 송구(送舊)138)  하는 쇄마의 값을 징수해 싣고 왔는데 그 수량이 자그마치 면포(綿布) 16동(同)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명확히 조사하여 처치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광직이 인피하기를, "남구만이 인피하였으니 신이 처치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구만이 진달드린 일은 모두가 본원이 이미 내놓은 논이고, 계달(啓達)한 것이 시간적으로 차이가 나기는 하지만 쟁집한 것이 구만과 다를 것이 없는데, 어떻게 감히 태연히 처치하겠습니까. 체차시켜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승지 김익경(金益炅)이 나아가 아뢰기를, "지금 듣건대, 원자(元子)의 이름을 곧장 차비(差備)를 통해 종친부에 써서 내렸다 하는데, 사체가 중대한만큼 정원을 통해야 마땅합니다. 이미 지난 일이긴 하지만 참으로 미안한 듯싶기에 감히 이렇게 앙달(仰達)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례가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일 뿐이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7책 7권 20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381면
【분류】재정-국용(國用) / 왕실-종친(宗親) / 왕실-국왕(國王) / 왕실-궁관(宮官) / 농업-전제(田制) / 인사-임면(任免)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사법-탄핵(彈劾) / 사법-치안(治安) / 역사-고사(故事) / 역사-편사(編史)


[註 134] 분간(分揀) : 용서.[註 135] 영신(迎新) : 신임 방백이나 수령의 취임을 축하하여 맞이하는 것.[註 136] 부마(夫馬) : 인부와 말.[註 137] 쇄마(刷馬) : 지방에 비치한 관용 고마(雇馬).[註 138] 송구(送舊) : 이임하는 수령과 방백을 전송하는 것.
사신은 기록한다. 남구만이 나가는 것을 상이 눈여겨 보고서는 주서(注書)를 돌아보며 이르기를 "초계(初啓)만 기록하고 재계(再啓) 이후의 내용은 기입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상이 구만에 대해 매우 노여운 감정을 갖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곧은 말을 미워하여 외부에 그 말이 새어나가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구만이 상의 마음을 돌릴 생각으로 오시(午時)부터 신시(申時)에 이르기까지 매우 적절한 표현을 구사하며 누누이 수백 마디의 말을 진달드렸으니 참으로 극간지사(極諫之士)라고 이를 만하다. 그런데도 상이 끝내 제대로 살펴 받아들이지 않았으니, 어찌 탄식을 금할 수 있겠는가.
광직이 시장(柴場) 및 어장(漁場)을 혁파할 일과 양달원(梁達源)에 관한 일과 수진궁·어의궁에 관한 일을 아뢰었으나, 상이 들어주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전 흥덕 현감(興德縣監) 이우는 춘분(春分)이 지난 다음에 부임했던 관계로 영신(迎新)135)  하는 부마(夫馬)136)   중에 미처 서울에 올라오지 못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뒤 그가 상(喪)을 당해 서울로 돌아올 때 영신할 적에 올라오지 않았던 쇄마(刷馬)137)  를 끌고 돌아오면서 송구(送舊)138)  하는 쇄마의 값을 징수해 싣고 왔는데 그 수량이 자그마치 면포(綿布) 16동(同)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명확히 조사하여 처치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광직이 인피하기를,
"남구만이 인피하였으니 신이 처치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구만이 진달드린 일은 모두가 본원이 이미 내놓은 논이고, 계달(啓達)한 것이 시간적으로 차이가 나기는 하지만 쟁집한 것이 구만과 다를 것이 없는데, 어떻게 감히 태연히 처치하겠습니까. 체차시켜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승지 김익경(金益炅)이 나아가 아뢰기를,
"지금 듣건대, 원자(元子)의 이름을 곧장 차비(差備)를 통해 종친부에 써서 내렸다 하는데, 사체가 중대한만큼 정원을 통해야 마땅합니다. 이미 지난 일이긴 하지만 참으로 미안한 듯싶기에 감히 이렇게 앙달(仰達)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례가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일 뿐이다."
하였다.

 

경상 감사 이상진(李尙眞)도 내시부의 일 때문에 소장을 진달하여 사직하였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우찬성 송시열(宋時烈)이 상소하기를,
"신이 지은 죄가 너무도 중하여 나라에서 말들이 더욱 심각해져 가고 있습니다. 저 소위 종통(宗統)·적통(嫡統)의 설을 끝까지 밀고 나가 신의 죄를 이루려 할 경우에는 무장(無將)139)   부도(不道)의 율(律)도 오히려 가벼운 것이 될 것입니다. 지난번에 한 사람이 말했을 때에도 몹시 놀라 어떻게 해야 될지 몰랐었는데, 더구나 이를 말하지 않는 사람이 없는 지금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게다가 또 이른바 청명(淸名)과 직절(直節)이 있다고 하는 훌륭한 사대부까지도 더욱 절실하게 말하고 있으니, 신이 입이 있어도 어떻게 그렇지 않다고 스스로 해명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속히 신의 죄를 다스리시어 사람들의 말에 사과하고 대법(大法)을 밝히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서울을 떠난 지 지금 어언 3년이 되었다. 내가 경을 그리워하지 않은 때가 거의 없었는데 언제 올라오겠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으므로 마음이 매우 서운하다. 아, 사람들이 말하는 것이야 본래 개의할 것이 못 되니 속히 마음을 바꿔 올라오기를 내 매일 기대하는 바이다."
하였다.

 

어공(御供) 및 백관의 녹봉(祿俸)에서 각 1석(石)씩 감하라고 명하였는데, 흉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9월 13일 정축

상이 대신 및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칙사가 올 때 필요한 인부와 말[馬]의 수를 상세히 알아보았는가?"
하니, 예판 홍명하(洪命夏)가 아뢰기를,
"인부와 말의 값이 거의 2천 7백여 석에 이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12두(斗)씩 받아들이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신하들이 모두 아뢰기를,
"12두로 하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이 수로 정식(定式)을 삼도록 하라."
하였다. 지평 윤우정(尹遇丁)이 처치하여 이광직(李光稷)을 출사(出仕)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응교 민유중(閔維重)이 아뢰기를,
"남구만(南九萬)이 어제 직접 뵙고 진달드린 것이야말로 충섬심에서 발로된 것이었는데 성명께서는 따르지 않으시면서 사색(辭色)까지 가차없이 하셨습니다. 어쩌면 이렇듯 박하게 대간을 대우하신단 말입니까. 삼가 성덕(聖德)에 손상이 있게 될까 두렵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계사와 소회를 구분치 않고 뒤섞어 진달하기에 내가 뭐라고 한 것이다."
하였다. 민유중이 이에 대하여 아뢰기를,
"성명께서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이는 아량에 있어서 안색을 부드럽게 하고 들어주셔야 합니다. 어떻게 뒤섞어 진달드린다고 갑자기 꺾어버리셔서야 되겠습니까."
하고, 승지 오정위(吳挺緯)가 아뢰기를,
"말을 들어주는 도리로 볼 때 아무리 말을 황잡(荒雜)하게 하더라도 반드시 수용해야 하는데, 그렇게 한 뒤에야 언로(言路)를 넓힐 수 있습니다. 외부 사람들이 만약 ‘양사(兩司)가 청대(請對)했다가 끝내는 엄한 분부를 받고 물러나왔다.’고 한다면, 어찌 성덕에 누가 되지 않겠습니까."
하고, 유중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구언(求言)하는 분부를 내리셨어도 삼사 외에는 하나도 유지(有旨)에 응한 자가 없었으니, 언로가 막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찌 한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대각이 중한 임무를 띠고서 일에 따라 진달드렸는데도 전하께서 너무 심하게 꺾어버리셨으니, 범인들로서 그 누가 기꺼이 전하를 위해 싫은 소리를 해드리려 하겠습니까.
옛날 조종조 때 선정신(先正臣) 조광조(趙光祖)가 소격서(昭格署)를 혁파하도록 청하면서 하루에 몇 차례나 아뢰었는데 새벽 닭이 울 때까지 계속하다가 끝내 요청대로 허락을 받고서야 물러 나왔으니, 나라를 위하는 옛 사람들의 정성이 이와 같았습니다. 그리고 신이 듣건대 세종조(世宗朝) 때 옥당의 관원들이 엄한 분부를 받고 불안해 한 나머지 서로들 이끌고 물러 나가자 세종께서 상신(相臣) 황희(黃喜)를 불러 처리할 대책을 물었는데, 황희가 정원에 하교하여 돈독히 유시해서 도로 들어오게 하시라고 청하니, 세종께서 그 말을 따르셨다 합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세종을 본받으소서."
하니, 상이 답하지 않았다. 유중이 아뢰기를,
"듣건대 서천 부원군(西川府院君) 정곤수(鄭崑壽)에 대한 시호(諡號)를 장차 연회를 베풀고서 맞이하려 하는데 자손들이 빈천하여 어떻게 모양을 이룰 길이 없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해조로 하여금 미포(米布)를 지급하게 하는 한편 일등(一等)의 악(樂)을 내리도록 명하였다.

 

송준길(宋浚吉)을 대사헌으로, 조수익(趙壽益)을 병조 참판으로, 민유중(閔維重)을 사간으로, 윤원거(尹元擧)·김익렴(金益廉)을 장령으로 삼았다.

 

9월 14일 무인

지평 윤우정(尹遇丁)이 남구만(南九萬)을 처치하기를,
"문자로 책임을 메꿀 계책을 세우지 않고 직접 뵙고서 전하의 생각을 돌리려는 정성을 바쳤는데, 가까운 곳에서 전하의 위엄을 접하고서도 숨기지 않고 할 말을 다 진달드렸으니, 그 기상이 늠름하여 높이 평가할 만합니다. 그런데 끝내 윤허 한번 내려주시는 것을 아끼시고 거꾸로 엄한 분부를 내리셨는데, 이번에 인피한 것이야말로 감히 태연히 있을 수 없다는 뜻에서 나온 것으로서 조금도 피해야 할 혐의가 없으니, 출사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9월 15일 기묘

지평 윤우정(尹遇丁)이 아뢰기를,
"올해 우역(牛疫)이 매우 참혹하게 번져 앞으로 종자가 끊길 염려마저 있습니다. 일찍이 정축년에 우역이 있었을 때 소를 죽인 자는 사람을 죽인 것과 똑같은 죄를 적용하기로 영갑(令甲)에 기재하였으니, 지금도 이 법에 의거하여 통렬히 금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사신은 논한다. 윤우정은 사람은 귀하고 가축은 천한 의리를 모르는 자라고 할 수 있겠다.


【태백산사고본】 7책 7권 23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382면
【분류】농업-축산(畜産) / 의약-의학(醫學)
사신은 논한다. 윤우정은 사람은 귀하고 가축은 천한 의리를 모르는 자라고 할 수 있겠다.

 

유성(流星)이 나왔는데 색깔이 붉기도 하고 희기도 하였다.

 

9월 16일 경진

집의 남구만(南九萬)이 소명(召命)에 응하지 않고 인피하여 면직되었다.

 

이유태(李惟泰)를 이조 참의로, 이경휘(李慶徽)를 대사간으로, 곽성귀(郭聖龜)를 헌납으로, 맹주서(孟胄瑞)를 정언으로 삼았다.

 

9월 18일 임오

수원 부사(水原府使) 홍처후(洪處厚)가 파면되었다. 이에 앞서 수원에서 사노(私奴)가 사족(士族) 배귀현(裵貴玄)의 집에 있는 누이를 겁탈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귀현이 본부(本府)에 정장(呈狀)하였는데, 부사 홍처후가 제때에 처리하지 않은 탓으로 정범(正犯)이 도망치게 하고 말았다. 이를 간원이 논계하여 파직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따른 것이었다.

 

궁가(宮家) 면세전(免稅田)의 결수(結數)를 정하였다. 대군과 공주는 4백 결, 왕자와 옹주는 2백 50결로 하였는데, 인평 대군(麟坪大君)의 집 만은 상이 특별히 명하여 수를 정하지 말고 옛날 그대로 두도록 하였다.

 

유계(兪棨)를 부제학으로, 김수흥(金壽興)을 승지로, 김만균(金萬均)을 집의로, 남구만(南九萬)을 부응교로 삼았다.

 

9월 20일 갑신

진위 겸 진향사(陳慰兼進香使) 낭선군(朗善君) 이우(李俣)와 부사 이후산(李後山)과 서장관 심재(沈梓)가 돌아왔다.

 

이후산 등을 왕옥(王獄)에 내려 이일선(李一先)에게 뇌물을 주기로 약속한 죄를 다스렸다.

 

강원·충청 양도(兩道)에 우역(牛疫)이 크게 번져 죽은 소가 매우 많았다.

 

정언 이광직(李光稷)이 상소하여 사직하고, 또 남구만(南九萬)의 기를 꺾어버린 것은 성덕(聖德)에 흠이 되는 일이라고 진달하면서 충간(忠諫)을 받아들여 언로(言路)를 확충할 것을 청하니 상이 일렀다.
"그대가 진계(陳戒)한 말을 내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그대는 잘못한 것이 없으니,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라."

 

함경도 덕원(德源)·경흥(慶興) 등 읍에 큰물이 져 사람들이 많이 빠져 죽었는데, 휼전(恤典)을 거행토록 명하였다.

 

9월 25일 기축

전라 감사 조귀석(趙龜錫)이 계문(啓聞)하여 올 가을에 받아들이는 미곡은 신결(新結)로 기준을 정해서 내도록 하기를 청하니, 해청(該廳)이 ‘본도의 흉년든 상황이 경자년140)  과 신축년 두 해만큼 심하지는 않고, 복심(覆審)을 끝내기 전에는 재해의 실상을 알기 어려우니, 구결(舊結)에 적용했던 그대로 해야한다.’고 방계(防啓)하였는데, 상이 다시 품의하여 처리하라고 명하였다.

 

9월 26일 경인

이조가 아뢰기를,
"대간이 바야흐로 산해(山海)를 절수(折受)하게 해 준 곳 모두를 혁파하라고 쟁집하고 있는 중인데, 지금 내수사가 세금 거둘 차인(差人)을 정주(定州)와 울매도(鬱每島)에 내려보내겠다고 행이(行移)해 왔습니다. 이는 봉행할 수 없기에 감히 아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혹 혁파한다 하더라도 이곳은 거론할 성질의 곳이 아니니 예전대로 거행토록 하라."
하였다.

 

9월 27일 신묘

적선(賊船) 2척이 해서(海西) 연변에 출몰하면서 우리 나라 상선 및 어선을 노략질하였다. 해적들 모두가 머리를 깎고 호건(胡巾)을 썼으며 언어 역시 호인(胡人)과 비슷하였는데, 바로 해랑적(海浪賊)이라고 하는 자들이었다.

 

9월 29일 계사

이경휘(李慶徽)를 이조 참의로, 홍처량(洪處亮)을 대사간으로, 오두인(吳斗寅)을 수찬으로 삼았다.

 

이경직(李景稷)에게 효민(孝敏), 남이흥(南以興)에게 충장(忠壯), 귀천군(龜川君) 이수(李晬)에게 충숙(忠肅), 유강(兪絳)에게 숙민(肅敏)이라는 시호를 각각 내렸다. 경직은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겼고, 이흥은 왕사(王事)에 죽어 조정이 그 충절을 포상하였고, 수는 광해가 대비를 유폐하던 날을 당하여 종반(宗班) 수십 인을 이끌고 소장을 올려 간신(奸臣) 이이첨(李爾瞻)의 목을 베라고 청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시호를 얻은 것이었다.

 

9월 30일 갑오

행 부호군 송준길(宋浚吉)이 상소하기를,
"기해년 예(禮)를 논하는 날을 당하여 신이 송시열(宋時烈)과 함께 묘의(廟議)에 참여하여 국제(國制)를 가지고 정했었습니다. 그뒤에 허목(許穆)이 상소하여 고례(古禮)를 인용하면서 매우 힘껏 논했는데, 신 역시 명을 받들고 어리석은 의견으로 헌의(獻議)했습니다. 그러다가 전석(前席)에 모시게 되었을 때 성명께서 승지로 하여금 허목의 소를 읽게 하시고는 신으로 하여금 조목별로 논변케 하셨으므로 신의 지식과 생각이 닿는 한 모든 힘을 기울여 논하여 아뢰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옥음(玉音)으로 주고받으며 문변(問辨)하시는 것을 보건대, 《예경(禮經)》의 큰 근원을 통찰하시는 것이 멀리 상정(常情) 밖에 뛰어나셨으므로, 이에 신이 감탄을 금치 못하면서 생각하기를 ‘대성인께서 이처럼 높은 식견을 갖고 계시니 어지럽히는 말과 주장들이 아무리 많이 나온다 하더라도 필시 뜻대로 될 리가 없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생각 밖으로 세도(世道)가 괴이한 것을 좋아하고 인정이 많이 험악해진 나머지 일시적으로 예를 논한 말을 가지고 사람을 모함하는 기화(奇貨)로 바꿔 만들고 말았는데, 놀랍고 위태로운 상황이 설상가상격으로 가해져 한창 일어나는 형세가 갈수록 기이해지고만 있으니, 아 또한 심하다 하겠습니다.
지난번 홍우원(洪宇遠)의 소를 보건대, 시열에 대해서는 더욱 급하게 몰아세운 반면 신의 이름은 유독 거론하지 않았는데, 시열은 수의(收議)하는 가운데 말을 많이 해서 사람들 모두가 보았고 신은 탑전(榻前)에서 진달드린 경우가 많아 기주(記注)141)   외에는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닙니까. 신은 시열과 훼예(毁譽)·영욕(榮辱)을 같이 해야지 의리상 신만 모면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시열이 이미 소장을 올려 스스로 탄핵하였는데, 신이 어떻게 감히 태연히 있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신의 죄를 먼저 다스려 형장(刑章)을 엄숙히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세도와 인심이 좋지 못한 것이 이미 극에 달했으니, 개의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경이 서울을 떠난 지 어언 3년이 되는데 그리워지는 생각을 못내 잊을 수가 없다. 경은 나의 갈구하는 뜻을 체득하고 속히 마음을 바꿔 올라옴으로써 지극한 소망에 부응토록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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