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7권, 현종 4년 1663년 10월

싸라리리 2025. 12. 10.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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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일 을미

우의정 정유성(鄭維城)이 소장을 올려 체차시켜주기를 청하였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고 내의(內醫)를 보내 간병케 하였다.

 

병조 참판 조수익(趙壽益)이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삼가 살피건대, 조수익은 진신(搢紳)들 사이에 유아(儒雅)한 인물로 일컬어졌으며 청현직(淸顯職)을 두루 역임하는 동안 여망(輿望)을 만족시켰다. 그런데 하나의 소를 올려 조경(趙絅)을 구한 일이 있으면서부터 송시열의 패거리가 크게 미워하고 무척 힘을 들여 배척하면서 다시 청로(淸路)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하였으니, 너무도 공의(公議)를 무시한 처사라 하겠다.

 

이일상(李一相)을 대사헌으로, 이무(李堥)를 장령으로, 이민적(李敏迪)을 응교로, 오두인(吳斗寅)을 부교리로, 오시수(吳始壽)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함경 감사 김휘(金徽)가 계문하기를,
"도내에 권관(權管)142)  만 병부(兵符)가 없는데, 해조로 하여금 법문(法文)을 상고하고 제도(諸道)에 문의하여 똑같이 품처토록 하소서."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10월 5일 기해

상이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듣건대 호광(湖廣)의 토적(土賊) 때문에 동병(動兵)하는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심양(瀋陽)에 침범해 온다는 급보(急報)가 있었다고 합니다만, 만약 합(哈)143)  이 침범해 왔다면 필시 그전처럼 병력을 징발했을텐데 아직 그런 소식이 없으니 염려할 것이 못 된다고 하겠습니다."
하였다. 좌의정 원두표(元斗杓)가 아뢰기를,
"진휼청 당상이 관서(關西)의 미곡을 옮겨다 쓰고 싶어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여럿의 의논은 어떠한가?"
하자, 태화가 아뢰기를,
"신은 서쪽 백성들이 고달픔을 받게 되는 것이 곤란하게 여겨집니다."
하고, 병조 판서 김좌명(金佐明)이 아뢰기를,
"관서의 미곡을 가져다 쓰는 일은 조용히 강정(講定)해야 할 텐데 왜 꼭 오늘 급하게 해야 합니까?"
하고, 태화가 아뢰기를,
"반드시 속히 강정해야만 미리 요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땅히 곡수(斛數)를 정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몇 곡을 써야 하는가?"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신은 1만 곡을 넘을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고, 두표가 아뢰기를,
"단지 청남(淸南)144)   및 해서(海西) 연해의 미곡을 가져다 써야지 청북(淸北)의 미곡을 가져다 쓰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모두 허락하였다. 조복양(趙復陽)이 아뢰기를,
"관향곡(管餉轂)과 각 아문의 은포(銀布)와 평안 감영의 요목(遼木)145)  도 가져다 쓰게 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좌명이 아뢰기를,
"금군(禁軍) 중에 의장(衣裝)이 누추한 자에게 본조에서 옷감을 지급해 주도록 함으로써 선조(先朝) 때의 고사를 따르게 하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사간 민유중(閔維重) 등이 아뢰기를,
"석실 서원(石室書院)146)  에 사액(賜額)하여 제사드릴 때, 감사가 본 고을에 분부하여 경내에 거주하는 전직 관원을 집사(執事)로 차정(差定)하게 한 것만도 불가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본 고을에서도 경내에 거주하는 전직 관원을 차견(差遣)하지 않은 탓으로 시기에 임박하여 급해진 나머지 그만 제생(諸生)을 집사로 충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그야말로 왕언(王言)인 제문(祭文)까지도 유생을 시켜 읽게 하였으니, 전례(典禮)로 살펴보건대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입니까. 이밖에도 제물(祭物)이 갖추어지지 않았을 뿐더러 향배 교생(香陪校生)147)  이 내려올 때 길을 가르쳐주는 사람조차 대기하지 않고 있었으니, 그 태만함을 더욱 알 수 있습니다. 경기 감사 오정일(吳挺一)은 중하게 추고하고 양주 목사(楊州牧使) 민희(閔熙)는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부제학 유계가 아뢰기를,
"선조(先朝)에서 균전(均田)을 의논할 때 하교하기를 ‘양전(量田)한 뒤에 신결(新結)이 구결(舊結)의 배가 되더라도 민역(民役)은 구결을 기준으로 쓰도록 하겠다.’ 하셨는데, 신이 이 성교(聖敎)를 가지고 역시 언젠가 사람을 대해 말했더니, 경기의 백성들이 이를 듣고 무척이나 기뻐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듣건대 12두(斗)로 정했다 하니, 이는 백성에게 크게 믿음을 잃게 될 일입니다. 신결이 구결의 배는 안 된다 할지라도 민간이 내는 미곡이 5만 곡(斛)에 가까울테니, 백성들이 필시 ‘국가에서 양전한 것은 곡식을 많이 얻기 위해서였다.’고 할텐데, 앞으로 무슨 수로 이 비방에 대해 해명할 것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말이 어떠한가?"
하자, 태화와 두표가 아뢰기를,
"신들의 의견도 그와 같습니다만 일을 맡은 신하들이 모두 12두를 편하게 여기기 때문에 신들도 따른 것입니다."
하고, 좌명이 아뢰기를,
"12두의 미곡을 거둘 경우 민역(民役)을 그런대로 편하게 해 줄 수 있겠기에 신들이 12두로 정하자고 청했던 것입니다. 지금 유계가 믿음을 잃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만, 선조 때 양전하자고 청한 것도 신의 아비이고 10두가 편하겠다고 한 것도 신의 아비였습니다. 따라서 지금 신이 12두를 말씀드리면 안 되겠습니다만, 단지 백성을 편하게 해 줄 수 있겠기에 이런 주장을 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무튼 유계의 말을 가지고 다시 상의토록 하라."
하였다. 유중이 아뢰기를,
"남해(南海)의 노량(露梁)은 곧 이순신(李舜臣)이 순절한 지역으로서 그곳의 사우(祠宇)에는 이미 ‘충렬(忠烈)’이라고 사액(賜額)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듣건대 통영(統營) 또한 순신이 처음 개설한 곳이므로 장사(將士)들이 일찍이 사우를 세워 존모(尊慕)하는 정성을 바치고 있다 하니, 거듭 사액하는 데에 구애받지 마시고 노량의 예에 따라 ‘충렬’의 호를 내려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10월 7일 신축

남구만(南九萬)을 집의로 삼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성안에 병사(病死)한 노약자가 매우 많은데, 혹 동쪽이나 서쪽 도로 곁에 끌어다 버리기도 하고 혹 소나무 사이에 걸어둔 채 바로 매장하지 않기도 하여 보기에 참혹했으므로 경조(京兆) 낭청에 분부하여 사부(四部)를 시켜 매장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본사의 낭청을 파견하여 살펴보게 한 결과, 동쪽과 서쪽 도로에 그대로 둔 채 매장하지 않은 곳이 60여 곳이나 되었으니, 해랑(該郞)을 파직시킴으로써 타인을 징계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침을 맞았다.

 

10월 8일 임인

전남도 진사 배기(裵紀) 등이 경대동(京大同)을 호남에 옮겨 설행(設行)할 경우 세 가지 행해서는 안 될 점이 있고 다섯 가지 감당할 수 없는 폐단이 생긴다고 하면서 조목별로 나열하여 소장을 진달하였는데, 묘당이 아뢰기를,
"유생들이 올린 하나의 소 때문에 섣불리 의논할 수는 없습니다. 본도 감사로 하여금 민정(民情)을 수집하여 그 편부(便否)를 상문(上聞)하게 한 뒤에 품처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구 공신의 적장자의 녹봉을 감하고 단지 30 체아(遞兒)만 남겨 두었는데, 각릉(各陵) 및 남별전(南別殿)에 제사드릴 때 가관(假官)으로 차견(差遣)하기 위해서였다.

 

경상 감사 이상진(李尙眞)이 본도의 폐해를 10개 조로 계문(啓聞)하였는데, 그 내용에,
"첫째, 각사(各司) 노비들 가운데 허록(虛錄)된 자와 사고로 처리시켜야 할 자와 도망자를 살펴 바로잡아야 할 것이며, 그들의 재해입은 정도에 따라서 당년(當年)의 신공(身貢)148)  을 전감(全減)하거나 반감하거나 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 내노비(內奴婢)의 신공이 시노비(寺奴婢)보다 배가 되니, 혹 승수(升數)와 척수(尺數)를 감해주기도 하고 혹 필수(匹數)를 감해주기도 하고 혹 다른 종류로 대납케 하기도 해서 일방적으로 고통받는 폐단이 없게 해야 할 것입니다.
셋째, 염부(鹽夫)가 안부(案付)149)  된 뒤로 도망자와 사망자가 발생하고 배가 썩었는데도 고치지 않은 것도 있으니, 해조로 하여금 모두 사고로 처리토록 하여 인족(隣族)을 침해하는 폐단이 없게 해야 할 것입니다.
넷째, 제궁가(諸宮家)와 각 아문(各衙門)이 둔전(屯田)을 설치하면서 민전(民田)까지 뒤섞어 점유한 곳이 매우 많으며 그 곳에 투입(投入)하여 역(役)을 피하는 자 역시 많으니, 혁파하기는 어렵다 하더라도 재손(裁損)하는 것이 있어야 하겠고, 그 중에 장정들을 가려 군액(軍額)에 충정(充定)토록 허락해야 할 것입니다.
다섯째, 남양(南陽)과 금성(錦城)에 목장(牧場)을 신설한 뒤로 관둔(官屯)과 민전(民田)이 그 속에 뒤섞여 들어갔으니, 변통하여 백성의 폐해를 없애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여섯째, 절도(絶島)에 정배(定配)된 죄인의 숫자가 매우 많아 주객(主客) 모두 고통을 받고 있으니, 먼저 경죄(輕罪)를 이배(移配)시키고 지금 이후로는 그곳에 정배하지 말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일곱째, 풍기(豊基)와 영천(榮川) 두 고을의 전세(田稅)를 단양(丹陽) 물가로 운반해 두고 수로(水路)를 통해 곧장 납부하고 있는데, 예천(醴泉)의 전세 역시 똑같이 수로로 곧장 납부하게 하는 것이 편리하겠습니다.
여덟째, 거제현(巨濟縣) 칠원도(漆原島)에 제향(祭享)에 쓸 소와 사복시의 소가 5백 20여 두(頭)나 되는데 땅이 매우 척박하여 풀이 무성하게 자라지 않기 때문에 해마다 봄 여름이 되면 짚풀을 계속 대느라 남부여대(男負女戴)하여 섬안으로 운반해 들이는 등 그 폐단이 적지 않으니, 사복시의 소는 혹 다른 곳으로 옮겨 방목하거나 혹 내어 팔아서 민폐를 줄이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아홉째, 속오군(束伍軍)에게 급보(給保)150)  하는 예를 타도에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혹 아비가 원군(元軍)인데 아들이 보인(保人)이 되기도 하고 혹 아들이 원군인데 아비가 보인이 되기도 하는 등 관과 민에 해가 되는 것이 가장 크니, 이를 변통하여 일체 타도와 같게 해야 할 것입니다.
열째, 각읍(各邑) 및 향교(鄕校) 가운데 노비가 극히 적어 모양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곳에 각사(各司)의 노비 약간 명을 획급(劃給)해 준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 장계를 주사(籌司)에 내렸다. 주사가 회계하기를,
"모두 시행토록 하소서. 다만 시노비(寺奴婢)에 대한 일만은 허실을 분변하기 어려우니 바로잡도록 허락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리고 속오군에게 급보하는 일은 병사(兵使)에게 통의(通議)하여 다시 아뢰도록 하소서. 각읍 및 향교에 시노비(寺奴婢)를 획급하는 일에 대해서는 우선 형세를 보아가며 처리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유철(兪㯙)을 대사간으로, 김만균(金萬均)을 수찬으로 삼고, 좌찬성 이안눌(李安訥)에게 문혜(文惠)라는 시호를 내렸다.

 

해주(海州)의 절부(節婦) 구씨(具氏)를 정표(旌表)하였다. 구씨는 유학(幼學) 김유(金瑜)의 처이다. 밤에 들어온 화적(火賊)의 칼을 맞고 김유가 거의 다 죽어가고 있었는데 구씨가 목숨이 끊어져가는 남편의 소리를 듣고서 활활타는 불 속으로 뛰어들어가 남편을 부여안은 채 같이 타죽었으므로 마을 사람들이 모두 아름답게 여기며 진정한 열부(烈婦)라고 찬탄하였다. 해주 인사(人士)들이 ‘절의(節義)가 이러한데도 전해지지 않고 없어지게 한다면 우리 고을의 수치이다.’ 하고 방백에게 정장(呈狀)하자, 방백 강유(姜瑜)가 그 사실을 갖추어 계문(啓聞)하였는데, 예조가 ‘그 절의는 정표해야 마땅하다.’고 복계(覆啓)하니, 상이 따른 것이다.

 

10월 10일 갑진

의주 부윤(義州府尹) 김우형(金宇亨)이 북사(北使)가 온다는 패문(牌文)을 받았다고 치계하였는데, 허적(許積)을 원접사(遠接使)로, 송창(宋昌)을 문례관(問禮官)으로 삼았다.

 

10월 12일 병오

김수항(金壽恒)을 대사헌으로, 이일상(李一相)을 좌참찬으로, 이민서(李敏叙)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황해도 해주(海州)·곡산(谷山)에 우역(牛疫)이 크게 번져 1천여 두(頭)가 죽었으며 관저(官猪)도 많이 죽었다.

 

밤에 천둥이 치고 우박이 왔다.

 

영남과 호남에서의 조련을 정지시켰는데, 흉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10월 14일 무신

김시진(金始振)을 승지로, 남구만(南九萬)을 응교로, 윤선거(尹宣擧)를 집의로 삼았다.

 

10월 15일 기유

사간 민유중 등이 아뢰기를,
"도성 안의 교량을 개수(改修)하는 일은 유사(有司)가 알아서 할 일인데, 무지한 희사(喜捨)하는 무리들이 개인적으로 개조하였습니다. 그런데 처음 공사를 시작할 때 그들이 비국에 알리니, 비국이 비용이 절약될 것을 이롭게 여긴 나머지 이를 허락해 주고 또 그들에게 비용을 보조해 줌으로써 복을 지으려는 사도(邪道)의 무리들이 구실을 삼을 수 있게 하였으니, 나라의 체모가 크게 손상되었다 하겠습니다. 그 당시의 비국 당상들을 모두 중하게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이번에 교량을 보수한 무리들이 권연문(勸緣文)151)  을 가지고 비국에 와 도장 찍어주기를 청하자 비국에서 이를 허락하였습니다. 사도(邪道)로 백성을 유인하는 일은 주현(州縣)의 관리들도 부끄러워하거늘, 더구나 비국이 어떤 아문인데 그만 이런 일을 했단 말입니까. 지난해 이미 이런 일이 있어서 이번에 또 이를 원용(援用)하여 예로 삼았다고 하니, 듣기에 놀라워 너나없이 한심해 하고 있습니다. 전후 비국의 당상들을 모두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정유성(鄭維城)을 판중추부사로, 남노성(南老星)을 예조 참판으로, 유계를 도승지로, 이경억(李慶億)을 승지로 삼았다.

 

10월 17일 신해

장령 김익렴(金益廉) 등이 아뢰기를,
"의주 부윤(義州府尹) 이인은 일찍이 정주(定州)의 수령으로 있을 때 고을의 기녀(妓女)와 은밀히 관계를 맺었는데, 의주 부윤에 제수되자 아문 안으로 데려다 두었고 체차되어 돌아가면서도 그대로 데리고 왔으니 너무도 거리낌없이 법을 무시했다 할 것입니다. 파직시키소서. 그리고 이밖에 사부(士夫)들 사이에 기녀를 데리고 사는 일이 있을 경우 모두 해도로 하여금 엄히 조사하여 쇄환(刷還)케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병조 판서 김좌명(金佐明)이 상소하기를,
"신이 종묘서 제조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앞길의 돌다리가 옆으로 기울어진 것을 보고 맨 먼저 개조하자는 의논을 꺼내어 탑전에서 아뢰었었습니다. 그리고 물러나와 장포(匠布)를 참작해 정하고 방군(坊軍)을 조용(調用)한 뒤 경조(京兆)의 장작(將作)152)   담당 관원으로 하여금 그 일을 감독케 하였는데, 이와 함께 화주(化主)153)   몇 사람으로 하여금 그 일을 돕게 하였으니, 이것은 신이 지은 죄입니다. 본직과 겸대직을 체차시킴으로써 신의 죄를 바로잡으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형조가 아뢰기를,
"어제 회음(會飮)하다 금법(禁法)을 범한 자가 본조의 금리(禁吏)에게 체포되었는데 도감의 포수(砲手) 한 사람도 그 중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러자 동렬(同列)의 군사가 금리를 묶고는 마구 구타하면서 체포된 자를 탈취하였으므로 중군(中軍)에게 알렸더니 중군이 그가 금리인 줄을 알고 군사를 꾸짖으며 놓아 보내게 하는데도 여전히 듣지 않고 제멋대로 마구 때렸습니다. 그 때 본조 정랑 서필성(徐必成)이 마침 그 광경을 목도하고 타이르며 금지시켰더니 더욱 기승을 부리며 잡아가지고 돌아갔습니다. 이에 대장(大將)에게 호소하니 대장도 그가 금리인 줄을 알고 놓아주도록 하였으나 또 듣지 않은 채 길 가에 둘러서서 줄곧 구타하였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는 놀란 마음으로 즉시 형리(刑吏)와 사령(使令)으로 하여금 수창(首倡)한 자를 뒤쫓아 체포하게 하였더니 이번에는 또 사령 2인을 구타하여 머리가 깨지고 눈이 찢어지는 등 온 몸에 유혈이 낭자하여 목숨이 곧 끊어질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예로부터 아무리 교병(驕兵)과 한졸(悍卒)이라 하더라도 어찌 오늘날과 같이 심한 경우가 있었겠습니까. 도감으로 하여금 수창한 자를 잡아보내게 하여 법대로 죄를 매기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놀랍기 그지없는 일이다. 수창한 사람을 도감으로 하여금 즉시 조사해 내도록 하라."
하였다.

 

강원 감사 이진(李𥘼)이 한정(閑丁)154)  에 대한 세초(歲抄)155)  와 북민(北民)의 쇄환(刷還)을 정지하여 기민(飢民)을 침해하는 폐단을 없앨 것을 계청(啓請)하니, 조정이 모두 허락하였다.

 

10월 19일 계축

승지 이태연(李泰淵)이 상소하기를,
"지금 우리 전하께서는 춘추도 젊으시고 지기(志氣)도 한창 강성하시니, 이 때야말로 신하들이 너무 용감하게 나가시는 것을 염려하고 엄하게 독촉하시는 것을 경계하며 분주히 일하느라 겨를이 없어야 할 때인데, 지금은 그만 태평스럽게 축 늘어져 마치 오래도록 임어(臨御)하신 나머지 권태로움을 느끼고 계시는 때와 같게 된 점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5년 동안 다스린 효과도 점차 쇠퇴해져 가기만 하는데, 그저 고식적으로만 처리하려 할 뿐 분발하려는 의지가 조금도 없으십니다.
아래에서 계달(啓達)하는 것이 어찌 모두 옳다고만 하겠습니까마는, 그저 ‘의계(依啓)’ ‘의윤(依允)’ 등 몇 글자를 가지고 응수하는 도구를 삼으시면서 마치 생각해 보시려고도 하지 않고 그냥 물으면 곧장 대답하는 식의 태도를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런가 하면 장주(章奏)에 대해서도 안에 놔둔 채 내리지 않으시는 관계로 모든 문부(文簿)의 처리가 지체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는 필시 전하의 건강이 좋지 못해 살펴보시는 데 지장이 있어서 그렇게 되신 것이겠습니다마는, 먼 외방에서 들을 때에야 어찌 이런 곡절을 모두 알고서 답답해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시험삼아 오늘날의 일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대간이 논한 것은 실로 궁부(宮府)가 일체가 되어야 한다는 뜻에서 나온 것인데 한 달이 넘도록 논집하고 있어도 천청(天聽)은 더욱 아득하기만 하니, 이러고서도 진작되기를 구한다는 것은 이치상 도저히 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제신(諸臣)이 다툰 것은 그저 하나의 공식 석상에서 가부를 논한 것에 불과한데 서로들 소장을 올려 헐뜯고 배척하는 것을 일삼고 있으니, 이러고서도 힘을 합쳐 이룰 것을 기대한다는 것은 또한 이치 밖의 일이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그대의 근심하고 사랑하는 정성과 충성을 바치고자 하는 뜻에 대하여 내 매우 감탄하는 바이다. 어찌 좌우에 기록해 두고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때 양남(兩南)을 재생(裁省)하는 일과 관련하여 재신(宰臣)들의 의견이 같지 않았는데, 홍명하(洪命夏)가 상소하여 민정중(閔鼎重)을 논척(論斥)하자 유계 또한 소장을 올려 공격하면서 서로들 인입(引入)하였으므로 상소 가운데 언급했던 것이었다.

 

사간 민유중(閔維重) 등이 탄핵하기를,
"상주 목사(尙州牧使) 이시만(李時萬)이 처신을 잘못하여 좌폐(坐廢)된 나머지 조정의 반열에 끼이지 못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큰 고을에 제수되었으므로 물정(物情)이 크게 놀라워하고 있으니, 파직시키소서."
하니, 따랐다.

 

상이 침을 맞았다. 도제조 이경석(李景奭)이 아뢰기를,
"신이 지난번 호남 백성들의 망극한 생활상을 보고 감히 진달드린 것이 있었는데, 이는 대체로 상께서 은혜를 베푸시도록 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비국의 복계(覆啓)를 보건대 유사(有司)가 할 일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먼저 경비(經費)를 돌아보는 것이야말로 유사의 직분이라 할 것인데, 만약 성상께서 덕음(德音)을 흔연히 발하시어 특별히 숫자를 감하도록 하고, 또 하교하시기를 ‘경비가 만약 부족하다면 척촌(尺寸)의 물건이라도 내부(內府)에 저장된 것을 모두 털어내 기부해서 보충하도록 하겠다.’고 하신다면, 오늘날 나라 일이 아무리 어렵고 위태롭다 하더라도 어찌 돌릴 수 있는 길이 없을 것이며, 빈사 지경에 놓인 천 리 밖의 백성들 역시 조정의 덕의(德意)에 어찌 감격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김좌명(金佐明)이 아뢰기를,
"이경석의 뜻은 상께서 특별히 덕음을 발하시어 두(斗)의 수를 줄여주셨으면 하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재해를 입은 호남 군읍(郡邑)에 대해 중하게 입은 곳은 2두를 감하고 가벼운 곳은 1두를 감해 주도록 하라."
하였다. 경석이 아뢰기를,
"영남은 나라의 근본이 되는 지역이니만큼 또한 넉넉하게 보살펴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도신(道臣)이 조목별로 진달해 아뢴 것도 참으로 가상합니다만, 성명께서 거의 다 윤허를 내려주셨으니 또한 매우 다행한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밖에 도신이 감히 청하지 못했던 것이나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서는 대신과 강구하여 진구해 살릴 길을 모색해야 할 것입니다. 국가의 형세는 위태롭기만 하고 사람들의 마음은 흩어지고만 있으니, 성상께서 항상 백성을 품어 보전시킬 도리를 생각하시어 백성의 사생(死生)으로 나라의 존망(存亡)을 삼으신다면, 인애로운 하늘이 감격하여 마음을 돌릴 이치가 어찌 없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지 않았다.

 

양달원(梁達源)의 고신(告身) 3등(等)을 박탈하였다. 헌부가 이상익(李商翼)에게 함사(緘辭)를 발해 달원을 조율(照律)했기 때문에 상이 따른 것이었다.

 

승지 이경억(李慶億)이 아뢰기를,
"도감의 군사들이 방자하게 굴며 난동을 부려온 지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마는, 조사(朝士)에게 대들고 장령(將令)을 거역했다는 말은 일찍이 들어보지 못했는데, 어제 형조의 초기(草記)를 보고는 경악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가령 대장(大將)이 늘 단속하면서 군사들이 범할 때마다 중하게 다스렸던들 어찌 이런 변이 있었겠습니까. 평상시에도 이런 식으로 국법을 아랑곳하지 않고 장령을 무시한다면, 위급한 사태가 발생했을 때 어떻게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계속 이런 식이 된다면 뒷날 이보다 더한 환란이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법도 없이 군사를 다스리고 마음대로 굴도록 놔두어 난동을 일으키게 한 죄를 징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훈국 대장 이완(李浣)은 중하게 추고하고, 중군(中軍)과 당해 초관(哨官)은 대장으로 하여금 중하게 죄를 매기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함경도의 전세(田稅) 미두(米豆) 및 시노비(寺奴婢)·내노비(內奴婢)·사천(私賤)의 신공(身貢)을 감하고, 상평청의 모곡(耗穀)을 기민(飢民)에게 무상 지급하였으며, 또 조적 외에 창고에 남아 있는 곡식을 꺼내 각읍의 기민을 진휼하였는데, 감사 김휘(金徽)의 계청을 따른 것이었다.

 

10월 20일 갑인

양사(兩司)가 모두 할말을 하지 않은 허물이 있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당시 재이(災異)가 매우 심하게 발생했는데, 승지 이태연(李泰淵)이 상소하여 삼사(三司)가 침묵만 지키고 있다고 배척하였으므로 이렇게 인피한 것이었다.

 

응교 남구만(南九萬) 등이 이태연으로부터 소(疏)로 배척을 받았다는 이유로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호남에 기근이 크게 들었으므로 감사 조귀석(趙龜錫)이 장계를 올려 신결(新結)을 기준으로 추수미(秋收米)를 받아들이자고 청하였는데, 묘당이 복계(覆啓)하여 막았다. 이에 귀석이 또 치계(馳啓)하기를,
"올해 농사를 완전히 망친 곳에서 여전히 구결(舊結)을 적용하여 미곡을 거둬 들인다면, 그야말로 백성을 다친 사람 보듯 보호하는 성명(聖明)의 뜻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하니, 상이 선혜청으로 하여금 다시 의논토록 하였다. 선혜청이 회계(回啓)하기를,
"재해를 입었는지의 여부를 따지지 말고 신결을 기준으로 미곡을 거두는 것을 허락함으로써 먼 지방의 백성들이 조정의 덕의(德意)를 알게 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르고, 또 하교하기를,
"본도의 일은 정말 애달프기만 하다. 12두 중에서 이미 1두를 감하기는 했다만, 더욱 심한 고을은 앞서 감해 준 외에 2두를 더 감하도록 하고, 그 다음 고을은 1두를 감해 주도록 함으로써 조정의 진휼(軫恤)하는 뜻을 알게 하라."
하였다.

 

10월 21일 을묘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병으로 체차되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훈련 도감이 아뢰기를,
"군사 수십 명이 형조에 있는 사람을 잡아와서 고하기를 ‘오늘 중순시(中旬試)156)  를 본 뒤에 군인들이 줄지어 앉아 요기하고 있었는데 한 사람이 뛰어 들어와 주기(酒器)를 탈취하기에 누구냐고 물었더니 형조의 금리(禁吏)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나 근래 민간에 금리라고 거짓 칭하면서 횡행하며 뇌물을 받는 자들이 매우 많은데 이 자도 필시 거짓 칭하는 자라고 여겨졌기에 잡아와 알리는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이에 신이 허실을 알고 싶어서 형조의 직숙(直宿)하는 관리를 불러오게 하였는데 서리배(書吏輩)와 사령(使令)들이 마구 때리며 쫓아내는 바람에 불러오지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신이 바야흐로 놀라고 있는 중에 이익한(李翊漢)이 사람을 보내 말하기를 ‘금리인 것이 틀림없다.’고 하기에 신이 즉시 놓아 보내도록 하였습니다. 지금 형조의 계사를 보고는 즉시 군병들을 집합시킨 뒤 직접 나서서 추문(推問)해 보았더니 ‘대장께서 이미 놓아보내라고 명령하셨는데 군병들이 어떻게 중도에서 구타할 리가 있겠습니까.’ 하였습니다.
신이 본초(本哨)의 기대총(旗隊摠)으로 하여금 엄히 조사토록 한 결과 금리를 묶은 자는 최경필(崔景弼)이고 서로 싸운 자는 고영길(高永吉)·염기남(廉起男)으로 밝혀졌으므로 즉시 이 세 사람은 형조로 잡아 보내고, 기대총은 제대로 단속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중하게 결곤(決棍)하였습니다.
그런데 다만 형조 사령의 형용을 보건대 한 사람도 본래 다친 것이 없었는데 한 사람의 얼굴 부위에 약간 부기(浮氣)가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만약 머리가 깨지고 눈이 찢어져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는 상황이라면 불러도 올 수 없을 것이고 물어도 대답하지 못할 것인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 본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오가며 문답하고 있으니, 형조의 계사야말로 사실을 과장한 것을 면하지 못한 것으로서 정말 애석하다 할 것입니다. 그리고 본조 하리(下吏)의 경우는 불러도 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상사(上司)의 사람을 이유없이 구타하였으니 정말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지금 수금(囚禁) 중에 있으니 아울러 해조로 하여금 법대로 치죄(治罪)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두 곳의 계사가 이처럼 상반되고 있으니, 소위 다쳤다는 사람과 허위로 보고했다는 색리(色吏)를 또한 검사하고 사문(査問)하여 처치토록 하라."
하였다.

 

10월 22일 병진

응교 남구만(南九萬) 등이 양사(兩司)를 처치하여 장령 김익렴(金益廉), 정언 이광직(李光稷), 지평 윤우정(尹遇丁)·이숙달(李叔達), 사간 민유중(閔維重), 대사간 유철(兪㯙)은 출사시키고, 대사헌 김수항(金壽恒)에 대해서는 패소(牌召)에도 나아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차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훈련 도감 도제조 원두표(元斗杓)가 아뢰기를,
"이쪽과 저쪽의 계사가 이처럼 다르다니 실로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지금 부상당한 사람과 허위 보고한 관리를 조사하여 처치하라고 분부를 내리셨습니다마는, 도감 혼자 조사해서 아뢰면 형조에서 역시 말이 있을 것이 분명하니, 대장(大將)과 해조 색낭청으로 하여금 검사하여 품처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승지 이태연(李泰淵)이 아뢰기를,
"이 일은 양조(兩造)157)  를 대질 신문해야 하는 사건과 비슷한 점이 있는데, 도감이나 형조가 모두 편계(偏係)하는 혐의가 있으니, 법부(法府)로 이송하여 공정하게 조사를 진행시키게 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제독(提督) 이일선(李一先)이 먼저 봉황성(鳳凰城)에 도착하여 칙사(勅使)로 자처하면서 접대 등의 일을 한거원(韓巨源)이 칙사로 왔을 때의 예(例)대로 하도록 하면서 거원 때의 예대로 대접하라는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을 보여 주었다. 원접사(遠接使) 허적(許積)이 일선에게 말을 전하기를,
"자문에는 승진하여 칙사가 되었다는 말이 없는데 제독이 칙사로 자처하고 있으니 사리가 부당하다. 지난번 거원이 칙사라고 칭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결코 황제의 명이 아니었던 것으로서 당시 접대에 있어 기만을 당하는 것을 면치 못했었으니, 지금 잘못된 예를 준행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하였다. 일선이 또 칙사의 말이라고 하면서 압력을 가해 왔는데 허적이 매우 강력하게 다투니 칙사도 강제로 시킬 수가 없었다. 허적이 그 일을 장문(狀聞)하고 그 자문을 올렸는데, 승지 김수흥(金壽興)이 아뢰기를,
"자문 중에 승진시켜 칙사로 차견한다는 말이 특별히 없으니 빈접하는 신하가 쟁집한 것은 실로 체통에 맞는 일이었다고 하겠습니다. 앞서 보낸 어첩(御帖)은 바치지 말고 서울로 올려보내도록 하고, 접대하는 법식은 도감으로 하여금 다시 품하여 처리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10월 23일 정사

장령 이무도 ‘재해를 당했는데 말씀을 올리지 않았다는 배척을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양사가 처치하기 어려운 혐의가 있다는 이유로 모두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한거원(韓巨源) 때에도 자문(咨文)이 있었는가?"
하니, 예판 홍명하(洪命夏)가 아뢰기를,
"자문 없이 곧장 패문(牌文)에 열서(列書)했기 때문에 우리 나라에서 그가 칙사가 아니라는 것을 모르고 그만 칙사로 대접했었습니다."
하고, 좌의정 원두표(元斗杓)가 아뢰기를,
"칙서 속에 사신(使臣)의 일을 제기했으니 앞으로 필시 치대(置對)하는 일이 있게 될 것입니다. 심양(瀋陽)에 있었을 때부터 혹 대신이 모욕을 받는 일이 있었어도 치대를 당하는 수모를 받아본 적이 없었는데, 지금 만약 뜰 안에서 사문(査問)받는 일을 면하지 못하게 된다면 너무도 불행한 일이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뜰 안에서 사문했던 전례가 있는가?"
하니, 명하가 아뢰기를,
"전일 사문했을 때 대군(大君)은 의막(依幕)에 있고 김남중(金南重)·정인경(鄭麟卿)은 서연청(西宴廳)에 앉은 상태에서 치대했었습니다."
하였다. 이조 참판 조복양(趙復陽)이 아뢰기를,
"영남 및 영동의 군병을 세초(歲抄)하는 일을 기황(饑荒) 때문에 정지시켰는데, 양호(兩湖)의 재해입은 고을도 이 예에 따라 정지시켜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재해입은 고을에서 상번(上番)해야 할 군사들에게도 자원에 따라 포목을 바치게 함으로써 기민(飢民)이 올라오는 폐단을 제거해야 하겠습니다."
하고, 대사성 민정중(閔鼎重)도 신축년의 예에 따라 양호(兩湖)의 관수미(官需米)를 감하고 월과(月課)를 정지시킬 것을 청하니, 상이 모두 허락하며 이르기를,
"재해입은 고을의 군사가 자원하여 포목을 바치려 할 경우 그 숫자를 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홍명하가 아뢰기를,
"권진한(權震翰)의 형추 공사(刑推公事)를 의금부에 내렸는데, 진한의 정상이 자못 가증스럽기는 합니다만, 그렇다고 이 때문에 형추까지 할 경우 뒤 폐단이 있을 듯싶습니다."
하니, 상이 조율(照律)하라고 하였다. 두표가 아뢰기를,
"훈국(訓局)의 군사가 금리(禁吏)를 구타한 일로 올린 재신(宰臣)의 계사가 그토록 상반되었는데, 이완(李浣) 혼자 조사하게 하면 이익한(李翊漢)의 뒷말이 없지 않겠기에 그렇게 아뢰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정원이 형조를 일방적으로 두둔하면서 신의 계사를 편계(偏係)한 것이라고까지 말하며 믿지 않았으니, 일의 체모로 볼 때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하고, 승지 김수흥(金壽興)이 아뢰기를,
"그 일은 곡절이 있습니다. 대장(大將)이 도감 단독으로 조사를 벌이는 것은 난처하다는 뜻으로 재삼 말을 전해 오기에, 신들이 법부(法府)로 이송하여 조사토록 하자고 아뢰었던 것입니다."
하고, 두표가 아뢰기를,
"정원이 당초 중군(中軍) 이하의 죄를 청한 것은 더욱 부당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도감은 체면상 존중되어야 하고 중군도 다른 장관(將官)에 비할 바가 아닌데, 지금 이런 일 때문에 결곤(決棍)한다면 군정(軍情)도 필시 낙심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장을 추고하고, 중군 이하의 죄를 결정하라고 내린 명을 시행하지 말라."
하였다.

 

10월 24일 무오

응교 남구만(南九萬) 등이 처치하여 양사(兩司)를 출사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승지 이태연(李泰淵)이 상소하여 사직하기를,
"신이 입시하기 위해 합문(閤門) 밖으로 나아가던 길이었는데 대신이 신을 좌전(坐前)에 불러 놓고는 체통을 잃었다고 꾸짖은 뒤에 물러가도록 하였습니다. 이에 신이 머뭇거리며 물러나왔는데 그때의 전도(顚倒)된 정상은 신하들이 눈으로 본 바입니다. 더구나 듣건대 탑전(榻前)에서 진달드린 사의(辭意)가 역시 준엄했다 하니, 망발한 죄를 신이 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속히 신을 체직시키시고 동시에 신의 죄를 다스리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10월 25일 기미

완산 부부인(完山府夫人) 최씨(崔氏)가 죽었다. 자의 대비(慈懿大妃)가 춘휘전(春暉殿)에서 예(禮)에 따라 거애(擧哀)하였다. 상이 특별히 장생전(長生殿)의 관재(棺材)를 내리고 중사(中使)를 보내 호상(護喪)케 하였다.

 

이날 밤 대왕 대비가 갑자기 기절하였는데, 종일 곡읍(哭泣)했기 때문이었다. 상이 뜰 안 한데에 앉아 의관(醫官)을 불러 약을 문의하고 직접 약물(藥物)을 올리는 한편, 양지당(養志堂)에서 묵으면서 시질(侍疾)하였으므로 이를 듣는 자들이 모두 감읍하였다. 상의 지극한 효성은 천부적인 것이었다. 동궁(東宮)으로 있을 때부터 대왕 대비전을 자전(慈殿)처럼 모시면서 따르고 공경하는 것이 모두 지극하였으며, 즉위하고 나서도 완산 부부인을 대우하는 것이 영가 부부인(永嘉府夫人)을 대우하는 것과 차이가 없었으므로 궁중에 화기가 애애하였다.

 

10월 26일 경신

성균관이 아뢰기를,
"조종조에서 영암(靈巖)의 추자도(楸子島)를 본관에 사급(賜給)했는데, 지금 듣건대 영둔(營屯)을 설치한다 하니, 일의 체계로 볼 때 온당치 못한 일입니다. 해조로 하여금 본도에 분부하여 특별히 금단케 하고 예전대로 세금을 거두어들여 선비를 기르는 비용으로 쓰게 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한다고 하였다.

 

10월 27일 신유

장령 김익렴(金益廉) 등이 아뢰기를,
"영풍군(靈豊君) 이식(李湜)이 인평위(寅平尉)의 집에까지 창기(娼妓)를 쫓아가 그녀가 그 집안에 도망쳐 숨은 것에 화를 낸 나머지 문을 두드리고 외쳐 부르면서 그 창기를 내놓도록 요구하다가 궁노(宮奴)와 서로 싸우는 과정에서 안에까지 소리가 들렸으므로 듣는 자들이 모두 한심하게 여겼습니다. 나문(拿問)하여 정죄(定罪)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고 단지 파직한 뒤에 추고하게 하였다.

 

좌승지 서필원(徐必遠)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근일 첨의(僉議)를 보건대 모두 대장(大將)의 추고를 청한 것을 잘못이라고 하고 있는데, 해방(該房)으로 하여금 합문(閤門) 밖 공좌(公坐) 중에서 예전에 볼 수 없었던 배척을 당하게까지 한 것이야말로 신의 망언(妄言)으로 말미암은 것이었으니, 신이 머리카락을 뽑아 죄를 센다 하더라도 어떻게 속죄(贖罪)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합문 밖에서 해방을 배척해 물리친 것에 대해서는 신이 또 대신을 위해 애석하게 여기는 바입니다. 설령 해방에게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함께 탑전(榻前)에 이르러 일일이 거론하며 논죄한다 해서 안 될 것이 없는데, 어찌하여 그만 공좌 중에서 마치 노예나 대하는 것처럼 질타하며 물리쳤단 말입니까. 신이 한번 발언하자 허물과 비난이 뒤따라 이르렀으니, 신을 삭직(削職)시켜 주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10월 28일 임술

양사(兩司)가 청대(請對)하니, 상이 인견(引見)하였다. 대사간 유철이 아뢰기를,
"하늘의 위엄에 신중히 대처하고 기강을 진작시키고 마음을 바르게 하고 덕을 닦아야 한다고 하는 것이 진부한 말로 들릴지 모르겠습니다만, 전하께서 만약 수고롭게 근심만 하지 마시고 이 네 가지 일에 대해 점진적으로 착실히 해 나가실 수만 있다면 오늘날 하늘의 노여움을 돌리기가 어찌 어렵겠습니까."
하였다. 장령 김익렴(金益廉)이 아뢰기를,
"수원(水原)이야말로 경기의 중진(重鎭)입니다. 그래서 선조(先朝) 때에도 중요시하였는데, 근래 그곳의 책임을 맡은 자들이 혹 군정(軍政)을 포기하기까지 하고 있으니, 어찌 한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어사를 파견하여 점열(點閱)토록 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정언 이광직(李光稷)이 아뢰기를,
"성상의 건강이 오래도록 회복되지 않고 있으니, 이보다 더 큰 신민(臣民)의 걱정이 없습니다. 민간인들도 질병에 걸리면 꼭 옛 성인의 경계를 가지고 몸을 단속하는데, 즉 혈기가 한창 강성할 때에는 여색(女色)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웃으면서 이르기를,
"그대의 말이 좋다."
하였는데, 유철이 아뢰기를,
"광직이 진달드린 것이 지극한 정성에서 나온 것이니, 참으로 원하건대 성상께서는 유념하소서."
하였다. 광직이 또 아뢰기를,
"외부 사람들이 혹 궁금(宮禁)이 엄숙하지 못하다고 하는데, 궁금에 출입하는 자들이야 바로 전하의 지친(至親)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절도가 없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듣건대 전일 부마(駙馬) 및 왕자·왕손을 금중(禁中)에 모이게 할 때 제궁가(諸宮家)의 기악(妓樂)까지도 들어왔다 하는데, 과연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이는 재이(災異)를 당해 수성(修省)하는 뜻이 못 될 듯하니, 있으면 고치고 없으면 더욱 노력하소서. 이는 오직 전하에게 달린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공주가 왕래할 때 구사(丘史)158)  가 출입한 일은 더러 있었지만 연회 때에 음악을 연주한 일은 있지 않았다."
하였다. 광직이 아뢰기를,
"소신이 들은 것이 있어서 망령되게 진달드렸는데, 그 죄 만 번 죽어 마땅합니다. 그러나 옛 사람이 말하기를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하기보다는 그런 일을 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하였으니, 전하께서는 늘 경계하고 주의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말해야 할 것을 말하지 않았다면 참으로 허물이 있다고 하겠지만, 그런 일이 있다고 듣고서 말한 것인데 무슨 죄가 있겠는가."
하였다. 광직이 기휘(忌諱)에 저촉되는 것도 피하지 않고 매우 근실하고 간절하게 말하였는데, 상이 이에 감동되는 기색이었다. 유철이 아뢰기를,
"경상 감사의 장계를 보건대, 부산 첨사(釜山僉使) 이정옥(李廷沃)이 겁을 먹은 나머지 조치를 잘못하여 너무도 나라에 모욕을 끼쳤다 하니, 파출(罷黜)하는 정도로 끝낼 수 없습니다. 나문(拿問)하여 정죄(定罪)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장계를 보건대 나문할 죄가 별로 없었다."
하였다. 또 영풍군(靈豊君) 이식(李湜)의 일을 거듭 아뢰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근래 각아문이 국체(國體)는 염두에 두지 않고 각각 관하(管下)만 사적으로 보살피면서 다른 아문과 서로 다투는 일이 있을 때면 번번이 우선 이겨놓고 보려고 힘쓰다가 끝내는 위로 천청(天聽)을 번거롭게 하는 등 서로 송사(訟事)를 벌이는 자들처럼 행동하고 있는데, 이 역시 조정이 존엄하게 되지 못하고 기강이 확립되지 않은 소치입니다. 이완(李浣)은 대장(大將)의 신분으로서 제대로 군졸을 단속치 못해 이런 해괴한 일이 일어나게 했으면서도 스스로 반성할 줄은 알지 못하고 그만 분소(分疏)159)  하였으니, 그 교만하고 마음대로 하는 습성을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파직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익렴이 아뢰기를,
"중군(中軍)이 부하를 제대로 단속하지 못한 죄는 대장과 다름이 없으니, 파직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형조 참판 이익한(李翊漢)이 마치 송사를 벌이는 것처럼 서로 쟁변한 것은 일의 체모로 볼 때 부당하니,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사핵(査覈)케 하였으니 우선 추고하지 말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장령(將令)을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방자하게 난동을 부렸고 보면 이는 바로 난졸(亂卒)에 해당됩니다. 군법(軍法)으로 헤아려 보건대 본래 적용할 율(律)이 있으니 범연하게 추치(推治)만 하고 그만둘 수는 없습니다. 수창(首倡)한 군사 최경필(崔景弼)은 율에 의거하여 처단하고, 기타 패거리를 지어 난동부린 사람들 및 이른바 불러도 오지 않고 도감의 하인을 마구 때린 서리(書吏)와 사령(使令)들은 모두 유사(有司)에게 부쳐 법에 따라 죄를 매기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필은 이미 수금(囚禁)케 하였다. 그밖에 난동부린 군졸 및 형조의 하인들은 아뢴 대로 죄를 매기게 하라."
하였다. 익렴이 또 대신이 승지를 질타하며 물리친 것은 일의 체모로 볼 때 부당하다고 아뢰니, 상이 답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종묘(宗廟)의 돌다리를 개수한 뒤에 화주배(化主輩)가 하마비(下馬碑)를 새겨 세웠다고 하는데 한성부로 하여금 철거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도승지 유계 등도 대신이 해방(該房) 승지를 배척해 물리친 일 때문에 상소하여 사직하였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영상과 좌상을 명초(命招)하여 복상(卜相)케 하였는데,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신이 명을 받들고 빈청(賓廳)에 나아왔다가 좌의정이 병으로 나오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는 필시 훈국과 관련된 일을 불안하게 여기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신이 감히 단독으로 복상(卜相)할 수는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뭐라고들 하는 설에 대해서는 혐의할 필요가 없다."
하고, 사관(史官)을 보내 전유(傳諭)케 한 뒤에 다시 명초하여 복상케 하였다.

 

좌의정 원두표(元斗杓)가 상차(上箚)하여 인구(引咎)하고 이어 훈국의 일을 진달하면서 직명(職名)을 깎아줄 것을 청하니 상이 일렀다.
"내 뜻을 방금 사관이 가는 편에 유시하였다.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김석주(金錫胄)를 정언으로, 정만화(鄭萬和)를 승지로 남용익(南龍翼)을 대사간으로, 유철(兪㯙)을 대사헌으로, 홍중보(洪重普)를 예조 판서로, 김수항(金壽恒)을 형조 판서로, 허적(許積)을 판의금으로, 홍명하(洪命夏)를 우의정으로 삼았다. 명하는 당론(黨論)을 주장하는 병통이 있어 편계(偏係)된 일이 많았으나 관직 생활을 염근(廉謹)하게 한다는 칭찬을 받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정승에 임명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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