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7권, 현종 4년 1663년 11월

싸라리리 2025. 12. 10.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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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일 을축

장령 김익렴(金益廉) 등이 인피하기를,
"듣건대 영풍군(靈豊君) 이식(李湜)이 창녀(娼女)에게 고혹(蠱惑)되어 누차 불러도 오지 않자 동생을 보내 데려오도록 하려다가 패려(悖戾)한 행동이 있게 되었다 합니다. 식은 수죄(首罪)에 해당되니만큼 나문(拿問)하라고 아뢰었어도 안 될 것이 없습니다마는, 직접 찾아가서 난동을 부린 자는 식의 동생인 영은군(靈恩君) 이함(李涵)과 영신군(靈愼君) 이형(李濙)이었습니다. 신들이 일을 논하면서 실수를 면치 못했으니, 어떻게 감히 태연히 있겠습니까. 체차시켜 주소서."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또 아뢰기를,
"영풍군 식이 창물(娼物)에 고혹된 나머지 두 동생까지 보냈다가 패려스러운 짓을 저지르게 하였으니 식이 수죄(首罪)가 되는 것이 마땅합니다마는, 그 동생 함과 형도 직접 주가작란죄(主家作亂罪)를 범한 이상 그들만 면하기는 이치상 어려우니, 모두 나문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온갖 역(役) 중에서도 응사(鷹師)160)  의 역이 가장 고달프기 때문에 봄철 3개월 및 겨울철 3개월 동안 이 역에 응하는 자들은 마치 죽을 곳에 나가는 것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옹원에서 날마다 공급하는 꿩을 궁을 나간 공주나 옹주에게까지 올리고 있는데, 이것은 조종조(祖宗朝)이 구례(舊例)에 크게 어긋나는 일이고, 선조(先朝) 때 어쩌다 미처 없애지 못한 채 인순고식적으로 오늘에 이르렀고 보면 또한 선조의 뜻이라고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국법이 지극히 중하고 방한(防限)이 또 엄하니, 제공주와 옹주의 집에 응사가 꿩을 대주는 예를 속히 폐지하고, 1년에 두 번 역에 응하는 폐단도 해조로 하여금 발전적인 방향으로 변통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해조로 하여금 예를 상고하여 처치토록 했는데, 결국 뒤에 가서는 아무 실효가 없었다.

 

대장(大將)·중군(中軍) 및 이익한(李翊漢)의 일을 정계(停啓)하였다.

 

승지 김수흥(金壽興)이 아뢰기를,
"제궁가와 각아문이 해수(海水)와 암석(巖石)을 입안(立案)하여 절수(折受)받은 곳에 대해 사핵(査覈)하라고 하신 것이야말로 폐단을 바로잡으려는 성상의 훌륭하신 뜻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전남 감사 조귀석(趙龜錫)이 도내의 연해(沿海) 고을에는 모두 절수받은 곳이 없다고 치계(馳啓)하였으니, 실로 그 이유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잘 살피지 않고 범연히 처리한 잘못을 면하기 어려우니 그를 추고하고, 해조로 하여금 다시 더 조사해내 품처케 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호조가 사실에 입각하여 계문(啓聞)하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서인(庶人)의 묘갈(墓碣)을 참람되게 허위로 기재한 자를 죄주었는데, 이에 앞서 한성부가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이조에서 추증(追贈)한 사람을 기록한 책자 가운데 명단이 있는 자에 대해서는 해조가 알아서 품처(稟處)해야 하겠습니다마는, 이름이 없는데도 외람되게 증직(贈職)된 것으로 한 자, 교지(敎旨) 중에는 가자(加資)된 것만 기재되어 있는데 실직(實職)을 함부로 써넣은 자, 돈령이 아닌데도 곧바로 돈령이라고 써넣은 자, 원종(原從)에 참여되었을 뿐인데도 곧장 공신이라고 써넣은 자 등에 대해서는 차례로 논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리고 표석(表石)의 경우, 서인은 2척(尺)을 넘지 못하게 하도록 선조(先朝) 때 분명히 승전(承傳)을 받들었으니, 자손이 없어 이름을 물어볼 수 없는 경우 외에는 모두 일체 철거토록 해부(該部)에 분부하는 한편, 10리(里) 밖 기내(圻內)와 접경이 되는 지역에 대해서도 똑같이 시행할 일로 경기 감사에게 이문(移文)하였습니다. 그러나 율(律)을 상고하여 죄를 다스리는 일은 신부(臣府)의 소관이 아니니, 해부(該府)로 하여금 품처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

 

11월 2일 병인

좌의정 원두표(元斗杓)가 상차(上箚)하기를,
"신이 방금 이태연(李泰淵)과 서필원(徐必遠) 등의 소를 보건대, 힘을 들여 마구 말을 해대면서 자기 변명을 펼친 반면, 사람에 대해 허물을 공격하는 것은 너무도 중하게 하는 것을 면치 못했으므로 처음에는 놀랍고 의아심이 들다가 곧이어 웃음이 나왔습니다.
대장(大將)과 중군(中軍) 등이 정원으로부터 벌을 논해야 한다는 계청까지 받았는데, 그 사이의 곡절에 사실과 어긋나는 점이 많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신이 전일 탑전(榻前)에서 약간 변백(卞白)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 정원의 계사(啓辭)가 체례(體例)를 잃은 점을 진달드렸는데, 신의 생각은 실로 처치하는 것이 온당하게 되게끔 하려고 한 것일 뿐이었습니다. 군졸이 난동부리는 것을 정원이 눈으로 본 것도 아닌데, 그저 형조의 계사를 보고는 삼척법(三尺法)처럼 믿은 나머지, 도감이 편계(偏係)하고 있다고 의심하면서 동시에 이것을 가지고 신까지 의심했으니, 공평한 자세로 평가해야 한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과연 혐의가 없다 하겠습니까.
그리고 이태연을 배척해 물리쳤다는 이야기는 사실과 크게 다른 것으로서 더욱 놀랍기만 합니다. 신이 합문(閤門)에 이르렀을 때, 태연이 해방(該房)의 신분으로 신에게 와서 인사하기에, 신이 부드러운 말로 언급하기를 ‘오늘 등대(登對)해서 도감에 관한 일을 진달드리려 하는데 혹시라도 전도(顚倒)되는 일이 있을까 염려되니 영공(令公)은 추이(推移)를 보아가며 입시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더니, 태연이 즉시 일어나 나갔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만 근시(近侍)를 질책했다고 배척하면서 다방면으로 비유를 인용하기까지 하고 있으니 신이야 얼굴을 들고 계속 자리에 버텨 있고 싶다 하더라도 청명한 조정에 누를 끼치게 되는 것은 어찌할 것입니까. 돌아보건대, 조정은 체통이 중한 것인데 혹시라도 신 때문에 무너지기라도 한다면, 신은 논할 것조차도 없지만 그 자리가 애석합니다. 본직 및 훈련 도감 도제조의 직임을 한꺼번에 깎아 파직시킴으로써 사람들의 말에 사과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직소를 올리지 말고 속히 나와 도(道)를 논하라."
하였다.

 

우의정 홍명하(洪命夏)가 상소하여 상직(相職)을 사양하니, 상이 답하였다.
"경은 재주나 덕으로 볼 때 태정(台鼎)에 실로 합당한데, 어째서 사직하려 하는가."

 

응교 남구만(南九萬)과 부교리 여성제(呂聖齊) 등이 재이(災異) 때문에 상차하면서, 산전(山田)과 해택(海澤)을 입안(立案)하여 절수(折受)받은 곳을 혁파시킬 일 및 둔장(屯庄)에서 모집한 백성들을 군액(軍額)에 충정(充定)시키도록 허락해 줄 일을 반복하여 진달하며 청하였으나, 상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11월 3일 정묘

상이 대신 및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引見)하였는데, 사간 민유중(閔維重)도 청대(請對)하여 입시하였다. 유중이 아뢰기를,
"전후 북행(北行)할 때 범금(犯禁)한 일들이 모두 역배(譯輩)로 말미암은 것이었는데 자세히는 알지 못했었습니다. 그런데 판부사의 말을 들어 보건대 이번 북행했을 때 일을 낸 것도 역배의 행동이었다고 합니다. 이형장(李馨長)이 복주(伏誅)된 뒤로 역배가 상당히 조심할 줄 알았었는데, 요즘 와서는 점차 풀어져 끝내 이와 같은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으니, 칙사의 행차가 지나간 뒤에 수역배(首譯輩)를 법에 따라 중하게 추궁하고, 이후 범금하는 자가 있을 경우에도 엄하게 다스려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대사성 민정중(閔鼎重)이 아뢰기를,
"지난번 대신(臺臣)이 제언(堤堰)을 쌓을 때 고척(古尺)으로 헤아려 기준을 삼는 폐단을 가지고 변통할 것을 계청(啓請)했었는데, 이 일은 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물을 채워놓으려면 민전(民田)이 그 속에 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는데, 고척을 쓰지 않으면 백성이 모점(冒占)한 것까지 모조리 내주어야만 할테니, 또한 어떻게 물을 채워넣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좌의정 원두표(元斗杓)가 아뢰기를,
"옛날 제언을 쌓을 때, 어찌 금척(今尺)처럼 짧은 것이 있었겠습니까. 대계(臺啓)는 따를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도록 하였다. 정중이 아뢰기를,
"신축년 진휼할 때에 어사가 민간에 효유(曉喩)하여 부유한 백성들로 하여금 곡식을 바치게 했었는데, 그뒤로 조정에서 시상(施賞)한 일이 없어 장차 백성에게 믿음을 잃게 되었습니다. 곡식을 적게 바쳤던 자는 본 고을에서 연호 잡역(烟戶雜役)161)  을 감해 주고 많이 바쳤던 자는 해조에서 체문(帖文)162)  을 발급해 주도록 하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하고, 승지 서필원(徐必遠)이 아뢰기를,
"연호 잡역을 감해주는 것도 한계를 정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따르면서 이르기를,
"그 숫자를 서계(書啓)토록 하라."
하였다. 정중이 아뢰기를,
"충청 감사 이홍연(李弘淵)과 경상 감사 이상진(李尙眞) 모두 임기가 만료되는 시기가 되었는데 진휼하는 일이 끝날 때까지는 잉임(仍任)시켜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대사간 남용익(南龍翼)이 아뢰기를,
"근일 정석(政席)이 엄숙하지 못해 청탁하는 행위가 상당히 행해지고 있습니다. 정석에 임하여 주의(注擬)할 즈음에 어떤 사람이 어떤 관직을 요구했다는 설이 정관(政官)의 입에서 나오는가 하면, 사찰(私札)이 정청(政廳)에 왕래하는 일까지 있으며, 음사(蔭仕)로 처음 들어오는 사람들도 대부분 정선(精選)된 자들이 아닙니다. 만약 이 고질적인 습성을 한번 씻어내어 격려시키는 일이 있지 않으면 퇴폐한 기강을 엄숙하게 진작시킬 수 없을 것이니, 이조의 삼당상(三堂上)을 모두 체차시키도록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이조의 삼당상이 모두 체차되었으니 앞으로의 정사(政事)가 걱정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조 당상이 없게 되었으니 장차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삼공(三公)이 한꺼번에 모두 없게 되는 경우에는 이조로 하여금 전에 복상(卜相)했던 것을 써서 들이도록 하는 것이 고규(古規)이다. 전에 듣건대 이판을 의망(擬望)할 때 낭관이 대신의 집에 가서 그의 천망(薦望)을 받았다고 하던데, 지금도 이에 따라 하는 것이 좋겠는가?"
하자, 태화가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신들이 빈청(賓廳)에 물러가서 천망해 들이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패초(牌招)하여 개정(開政)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유중이 또 생각하고 있는 바를 진달했는데 그가 간절하게 누누이 개진한 것은, 산과 바다를 절수(折受)받게 한 곳을 혁파하고 둔장(屯庄)에서 모집한 백성들을 군정(軍丁)으로 뽑게 함으로써 백성의 병폐를 제거하고 재이(災異)에 응하는 실상을 삼으라는 것이었으나, 끝내 천청(天聽)을 돌리지는 못하였다. 또 이정옥(李廷沃)을 나문(拿問)할 일을 아뢰니, 상이 따랐다.
유중이 아뢰기를,
"을미년에 추쇄(推刷)하던 당초부터 완전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혹 허록(虛錄)된 자도 있고 혹 의탁할 곳 없이 보수(保授)된 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뒤 허록된 자는 공포(貢布)를 징수하려 해도 징수할 곳이 없고 의탁할 곳이 없는 자는 흩어져 떠돌아다녀 찾을 길이 없었던 관계로 족린(族隣)에게까지 침해가 미쳤는데, 그 폐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우선 받아들이지 못한 것들을 탕척시켜주고 내년 가을을 기다려 허실을 바로잡는 것이 좋겠다고 여겨집니다."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탕척해주면 허위로 인한 폐단도 필시 많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유중이 아뢰기를,
"허위로 인한 폐단이 참으로 염려스럽기는 합니다. 그러나 공포를 징수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탕척해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실효가 없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차라리 특명으로 탕척해주는 것이 훨씬 나을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우선 조사해 내도록 하라."
하였다. 유중이 아뢰기를,
"전패(殿牌)를 분실한 고을에 대해서는 10년 기한으로 혁파시키고 있기 때문에 현재 혁파당한 군읍(郡邑)이 매우 많게 되어 백성들이 고통을 감내하지 못하고 있으며 황정(荒政)도 전일하게 되지 않고 있습니다. 간민(奸民)이 변을 일으키는 의도는 단지 수령을 쫓아내려는 데에 있는데, 뒤따라 혁파시킨다면 그의 의도를 바로 맞춰주는 셈이 되니, 대신에게 자문하여 변통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태화 및 정중·필원과 응교 남구만(南九萬)이 모두 혁파시키지 말도록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지금 이후로는 전패를 분실했다 하더라도 묻지 말라. 그리고 전에 혁파된 읍도 그 연수(年數)를 기록해서 써들이되 강상(綱常)과 관계되어 혁파된 읍은 써들이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유중이 아뢰기를,
"북로(北路)가 멀리 떨어져 있어 왕화(王化)를 듬뿍 받지 못한 관계로 온 도내에 고작 2∼3명의 무출신(武出身)이 있을 뿐이니 정말 애달픕니다. 신의 생각에는 특별히 근신(近臣)을 파견하여 과거를 실시해 사람을 뽑음으로써 인재를 거두어 모으고 민심을 위로해주는 것이 옳겠다고 여겨집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해조로 하여금 품처(稟處)케 하라."
하였다. 유중이 산과 바다를 양궁(兩宮)에 절수(折受)해 준 일에 대해 누누이 진달드렸는데도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인피(引避)하기를,
"신은 듣건대 언책(言責)이 있는 자가 말씀을 드려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에는 물러난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점이 많으니, 체차시켜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物論)을 기다렸다. 남용익과 유철도 이를 이유로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지평 윤우정(尹遇丁)이 상소하기를,
"신이 삼가 생각건대 현재 진행되는 국가의 일 모두가 헛된 형식들일 뿐입니다. 산해(山海)의 이익을 독점케 하고 궁장(宮庄)에 대해 물침(勿侵)163)  케 하는 것치고 생민의 해가 되고 성덕(聖德)에 누가 되지 않는 것이 없으며 내시부가 육조(六曹)와 통관(通關)164)  하는 것 역시 크게 나라의 체모를 손상시키는 일입니다. 그런데 대간이 이에 대해 몇 개월에 걸쳐 아뢰고 있는데도 늘 ‘불윤(不允)’ ‘물번(勿煩)’으로 응수하는 문자를 삼고 계시니, 이것이 형식적인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참으로 원하건대 성상께서는 지금부터 크게 경책하시고 크게 분발하시어 성실하게 행하는 도리를 극진히 하심으로써 수성(修省)하는 근본을 삼도록 하소서. 그리고 상규(常規)에 구애되지 말고 신료들을 자주 접견하시면서 마치 가인(家人)이나 부자(父子)가 서로 만나보는 예(例)처럼 안색을 부드럽게 하고 모두 말하도록 이끌어 말 한 마디 일 한 가지라도 속속들이 행해질 수 있게 하소서. 그러면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보살피는 도리로 볼 때에도 모두 실효가 있게 되어 헛된 형식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니, 이는 그야말로 재이(災異)를 전환시켜 상서로움으로 만드는 일대 계기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제도(諸道) 감사로 하여금 각읍의 적곡 및 내사(內司)와 제각사(諸各司)의 노비·포보(砲保)의 가포(價布), 장인(匠人)에게서 거두어들이는 포목들 가운데 오래도록 수납되지 않은 것들을 명확히 조사하게 한 뒤, 특별히 탕척해 줌으로써 기아선상에 놓인 백성에게 혜택을 베푸소서. 그러면 이 또한 재해를 막고 화기를 불러들이는 하나의 방법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전조(銓曹)에 신칙하여 수령을 선발할 때 더욱 어렵게 여겨 신중을 기하도록 하소서. 그리하여 아무리 시종(侍從)의 반열에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모두 돌아가며 외직(外職)에 보임되도록 하소서. 그러면 열읍(列邑)을 제압하는 측면에서 도움이 적지 않을 것이며, 또 백성의 일을 익숙히 알게 함으로써 문학(文學)과 전곡(錢穀)의 일이 아무 상관없는 두 가지 일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치적이 있다고 이름난 자는 임기가 만료될 때까지 기다릴 것이 없이 특별히 승진시켜 발탁함으로써 한(漢)나라 조정 때의 고사(故事)처럼 포장(褒奬)하는 뜻을 보여 주소서. 그러면 함께 다스리는 효과를 거둘 수 있는 동시에 민생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풀어줄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항상 군정(軍政)에 유념하소서. 때때로 어사를 파견하여 제도(諸道)를 순안(巡按)하고 사졸을 점열(點閱)케 하면서 그들의 재예를 시험하여 능부(能否)에 따라 상과 벌을 내림으로써 군정(軍情)을 위로케 하소서. 그리고 곤수와 수령에 대해서도 군오(軍伍)가 정예롭게 훈련되었는지 기계가 예리하게 대비되어 있는지에 따라 출척(黜陟)하고 권징(勸懲)하소서. 그렇게 하면 무사한 평시에 효과를 거두어 위급할 때에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청대(請對)하고서도 또 물러가 소회(所懷)를 진달하다니 걱정하며 아끼는 그 정성을 알 수 있다.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진달한 일은 유사로 하여금 의논해 처리토록 하겠다."
하였다.

 

김수항(金壽恒)을 이조 판서로 삼았다.

 

승지 오정위(吳挺緯)가 아뢰기를,
"경성 판관(鏡城判官) 곽제화(郭齊華)가 세 차례나 월과(月課)를 걸렀는데, 그 의도가 반드시 파직되고야 말겠다는 데 있으니, 파직 전지(傳旨)를 관례에 따라 받들게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변방 수령을 꺼리어 피하려 한 율(律)을 적용하여 본읍에 충군(充軍)토록 하라."
하였다.

 

강원도 원주(原州) 봉명산(鳳鳴山)의 쓰러졌던 잣나무가 다시 일어났다. 높이가 14∼15척(尺)에 두께는 지름이 2척쯤 되었는데, 4월에 큰 바람이 불어 쓰러진 나머지 가지며 뿌리 모두가 주민들에 의해 절단되었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러 갑자기 저절로 일어나 5일 간이나 넘어지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괴이하게 여겼다.

 

11월 4일 무진

우의정 홍명하(洪命夏)가 세 번째 소장을 올려 사직하였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조 판서 김수항(金壽恒)이 상소하여 사직하였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동지사(冬至使) 조형(趙珩), 부사 권령(權坽), 서장관 정창도(丁昌燾)가 표문(表文)을 받들고 청(淸)나라에 갔다.

 

응교 남구만(南九萬) 등이 상차하기를,
"아들이 어버이를 모시면서 바른 말을 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에는 공경심을 일으키고 효심을 일으켜서 어버이가 기뻐하시게 되면 다시 간(諫)하고, 세번을 간해도 들어주지 않으면 눈물을 흘리고 소리내어 울며 뒤따라 가 기필코 어버이의 마음을 감동시키게 한 뒤에야 그만두는 법입니다. 임금에 대한 신하의 태도 역시 이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지금 양사(兩司)의 신하들로서는 오직 다시 성의(誠意)를 쌓아 기필코 윤허를 받도록 해야 마땅할 뿐, 지레 스스로 사퇴하여 다시 나라의 체모를 손상케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간 민유중(閔維重), 대사간 남용익(南龍翼), 대사헌 유철(兪㯙), 정언 이광직(李光稷), 장령 김익렴(金益廉), 지평 윤우정(尹遇丁)·이숙달(李叔達)을 모두 출사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여이재(呂爾載)를 형조 판서로, 남용익(南龍翼)을 도승지로, 유계(兪棨)를 이조 참판으로, 홍처량(洪處亮)을 참의로, 김시진(金始振)을 대사간으로, 이민적(李敏迪)을 집의로, 김만균(金萬均)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전 이조 판서 윤강(尹絳)이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였는데, 민유중(閔維重)에게 탄핵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조정의 의논이 모두 그가 떠난 것을 애석하게 여기면서도 또한 그의 만절(晩節)을 대단하게 여겼다.

 

11월 6일 경오

상이 모화관(慕華館)에 나아가 청사(淸使)를 맞았다. 원접사(遠接使) 허적(許積)이 와서 숙배(肅拜)하니, 상이 인견(引見)하였다. 상이 하문하기를,
"이일선(李一先)이 과연 성을 내었는가?"
하니, 허적이 대답하기를,
"처음에는 칙사로 대접해주지 않는다고 화를 내더니, 중간에는 군위군(軍威軍)165)  의 수를 늘렸다고 조금 좋아하였고, 나중에 가서는 또 홍제원(弘濟院)에 자기 의자를 마련하지 않았다고 매우 성을 내면서 심지어는 ‘경성(京城)이 점점 가까워 온다고 해서 이렇게 나를 떠보는 것인가?’ 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대체로 그 뜻을 살피건대 듣고 싶어하는 말이 있는데 끝내 그 말을 듣지 못하기 때문에 일마다 트집을 잡고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가 듣고 싶어하는 것이 무슨 말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어찌 다른 것이 있겠습니까. 뇌물을 주기로 약속하는 말을 듣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어젯밤에 이일선이 칙사의 방에 가서 한참 있다가 오기에 신이 사람을 시켜 물어보게 하였더니, 그가 대답하기를 ‘내일 조사를 행해야 하기 때문에 상의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이 또 어떻게 의논이 되었는지 물어보게 하였더니, 대답하기를 ‘어찌 본국에 좋게 의논이 되었겠는가.’ 하였습니다. 그리고 늘 말하기를 ‘우상(右相)은 벼슬도 높고 나이도 많으니 혁직(革職)되더라도 필시 안타깝게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고 한다 하는데, 이런 말의 뜻을 살피건대 뇌물을 주겠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하는 것인 듯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정유년에 조사할 때는 네 명의 칙사가 나왔는데, 지금은 칙사가 두 명 왔으니, 조사하는 일이 가벼울 듯하다."
하였다.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관반(館伴)이 저 사람들을 접대하는 방식에 익숙하지 못하니 걱정입니다."
하고, 좌의정 원두표(元斗杓)가 아뢰기를,
"허적으로 대체시키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북사(北使)가 연은문(延恩門)에 도착하자 상이 막차(幕次)에서 나와 국궁(鞠躬)하고 칙서를 맞은 뒤에 먼저 돈의문(敦義門)을 경유하여 인정전(仁政殿) 서쪽 뜰의 소막차(小幕次)에 환어(還御)하였다. 조금 시간이 지난 뒤에 칙서가 이르자 상이 백관과 함께 네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렸다. 칙사는 인정전 동쪽으로 물러가고 상은 인정전 서쪽 막차로 들어왔다. 승지 오정위(吳挺緯)가 나아가 아뢰기를,
"일선이 소지한 자문(咨文) 중에 ‘의자에 앉도록 허락하라.’는 말이 있는데, 접견할 때 의자를 놓아야 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승지가 영상에게 가서 의논하라."
하였다. 정위가 들어와 고하기를,
"영상이 말하기를 ‘의자를 놓는 것이 참람스럽기는 하나 일선이 황제의 명이라고 칭탁하는 이상 의자를 놓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신의 생각에는 상께서 특별히 의자를 놓게 하시면 일선에게 생색을 낼 수 있다고 여겨지는데, 그가 만약 사양할 경우에는 억지로 놓을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그의 의자를 놓되 북사의 좌측에서 약간 뒤로 놓도록 명하였다.
상이 전상(殿上)으로 올라가 북사를 접견하고 서로 읍(揖)하였는데, 일선도 북사와 나란히 서서 상을 대해 읍하였다. 상이 북사와 함께 나아와 의자에 앉았는데, 일선이 또 상의 명을 기다리지도 않고 곧바로 의자 위에 앉았다. 그가 모든 행동거지를 북사와 똑같이 하면서 감당치 못해 하는 뜻을 조금도 드러내지 않았으므로 이를 본 신하들 모두가 비분한 나머지 죽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다례(茶禮)를 마치고 북사가 물러 나가니, 상이 뜰에 내려와 읍하고 전송하였다.

 

사간 민유중(閔維重)이 출사(出仕)의 처치를 받은 위에 패소(牌召)에 응하지 않은 채 즉각 인피(引避)하여 체차시켜 주기를 청하면서, 산해(山海)를 절수(折受)해 준 폐단과 궁장(宮庄)을 사적으로 비호해주는 비리를 극언(極言)하고, 하늘을 감동시켜 재이를 없애고 병폐를 제거하여 백성을 위로하려면 오직 대계(臺啓)의 청을 속히 윤허하는 길밖에 없다고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는데, 유중이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북사(北使)가 관소(舘所)에 들어갔다. 이일선(李一先)이 내일 조사를 벌이겠다고 하면서 무척 공갈을 하였는데, 연접 도감(延接都監)이 하루쯤 물려서 조사를 행하자고 청하니, 일선이 처음에는 매우 심드렁하게 대하다가 강권한 뒤에야 허락하였다. 그리고는 일선이 또 말하기를,
"모든 일에 대해 한 가지도 나에게 문의하지 않기에 매우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지금 무엇 때문에 처음으로 이런 요청을 하는 것인가?"
하였는데, 뭔가 기대하는 뜻이 상당히 있었으므로, 도감이 전언(傳言)하기를,
"진정 조사하는 일에 대해 잘 지휘해주기만 한다면 어찌 도리상 치사(致謝)하는 일이 없겠는가."
하였다. 도감이 그와 문답한 이야기를 서계(書啓)하였다.

 

승지 서필원(徐必遠)이 아뢰기를,
"듣건대 어제 수찬 김만균(金萬均)이 그의 조모가 강도(江都)에서 죽었다는 이유로 청사(淸使)가 왔을 때는 차마 행공(行公)하지 못하겠다고 소장을 진달하였는데 입직(入直)한 동료가 봉입(捧入)했다고 합니다. 정축년 난리를 겪은 뒤로 부모와 관련된 일이 아닌 한 사면(辭免)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대체로 부모가 참화를 당한 경우는 자식으로서의 지극한 정리상 차마 강박할 수 없는 일이지만 기타의 경우는 부모에 비해 약간 차이가 나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만약 이 소를 봉입할 경우, 예전부터 이런 처지에 있으면서도 감히 소장을 진달하지 못하던 자들이 모두 앞으로 잇따라 사면할테니, 온 조정의 신하들 가운데 행공하는 자들이 거의 없게 될 것입니다. 어제 들인 소는 도로 내주어 행공하게 하고, 지금 이후로는 부모와 관련되지 않은 소를 절대 봉입하지 못하게 하여 후례(後例)를 삼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필원이 청좌(廳坐) 중에서 사소(辭疏)를 낸 만균의 잘못을 크게 말하고 이어 승지가 봉입한 것을 책망하니, 승지 이경억(李慶億)·김수흥(金壽興)이 동료의 의논이 매우 준엄하다는 이유로 진계(陳啓)하고 대죄(待罪)하였는데, 사간 민유중(閔維重)이 응교 남구만(南九萬)에게 글을 보내 ‘정원의 계사를 보건대 의리가 꽉 막혔는데 어째서 탄핵하여 체차시키지 않는가.’ 하였다 한다.

 

11월 7일 신미

대사간 김시진(金始振) 등이 제궁장(諸宮庄)의 모민(募民)에 관한 일로 아뢰기를,
"신 시진이 일찍이 호남의 관찰사로 재직하고 있을 때, 헌신(憲臣)의 소에 따라 제궁가 및 각아문의 둔장(屯庄)에서 모집해 들인 부류를 조사해내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이에 시진이 치계(馳啓)하기를 ‘본관(本官)으로 하여금 다른 편호(編戶)의 예대로 한정(閑丁)은 정군(正軍)에 충정(充定)시키고 속오(束伍)에 편입되지 않은 자는 속오에 충정시키고 능로(能櫓)166)  에 합당한 자는 능로에 충정 시키도록 하되, 제궁가와 각아문이 사적으로 비호하지 못하게 하소서.’ 하자, 비국이 또 ‘유역(有役)과 무역(無役), 공천(公賤)과 사천(私賤)을 따질 것 없이 한결같이 범민(凡民)의 예에 의거하여 응당 행해야 할 역(役)에 차정(差定)하되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늘 신칙하여 착실히 거행토록 하소서.’라는 내용으로 복계(覆啓)하여 윤허를 받았으니, 이것이 곧 전일에 이미 확정된 영갑(令甲)인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만 양궁(兩宮)의 둔장에는 잡역(雜役)으로 침해하지 못하게 할 일이 또 계하(啓下)되고 이조에 이문(移文)되었으므로 오늘날 이렇듯 쟁집하는 논이 있게 되었는데, 유사(有司)된 입장에서 어떻게 감히 이미 이루어진 명을 폐기시킨 채 이미 개혁된 폐단을 다시 답습한단 말입니까. 전일 비국이 복계한 대로 수진궁(壽進宮)의 노비 및 그 전토(田土)를 경작하는 자와 어의궁(於義宮)의 둔장에서 모집한 백성들에게 잡역을 부과하지 못하게 한 따위는 모두 시행하지 말게 하소서. 그리고 다시 비국이 복계한 내용을 명백하게 제도 감사에게 알려, 각읍에 엄히 당부하여 착실히 거행토록 하소서."
하였는데, 따르지 않았다.

 

11월 8일 임신

대사헌 유철 등이 아뢰기를,
"신들이 간원의 계사(啓辭)를 보건대, 제궁(諸宮)의 둔장(屯庄)에서 모집한 백성들에 관한 일로 이미 품정(稟定)한 거조가 있었는데, 신들은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전혀 모른 채 몇 개월 동안 쟁집하면서도 일찍이 거론하지 못했으니, 일을 부실하게 논한 잘못을 면키 어렵습니다. 체차시켜 주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간원이 전계(前啓)를 다시 아뢰니, 상이 따르지 않고 이르기를,
"명례(明禮)·어의(於義)·수진(壽進) 등의 궁은 제궁가와는 다르다. 이 3개의 궁 외에는 모두 전에 복계한 대로 거행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조손(祖孫) 관계가 되면 부자(父子)에 비해 정의(情義)상으로 본디 감쇄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난리 통에 죽은 자가 발생한 집에 있어서도 그 아들에게만 빈례(賓禮)에 참석하지 않아도 된다는 허가를 내렸을 뿐 손자의 경우는 사명(使命)으로 차견(差遣)하기까지 한 적도 있었으니, 조정의 처치야말로 참작해서 적당하게 한 것으로서 공사(公私)간의 입장을 살려 주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 김만균(金萬均)이 이 점은 생각하지 못하고 외람스럽게도 감히 진달드려서는 안 될 소를 진달드렸고, 정원이 또 태연히 봉입(捧入)하였으니, 사체가 형편없이 되었습니다. 김만균과 당해 승지를 모두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김시진이 이 논을 강력히 주장하였는데, 언젠가 우상 홍명하(洪命夏)에게 말하기를
"조정에서 반드시 만균을 북경(北京)에 차견(差遣)한 뒤에야 나라의 기강이 확립될 수 있다."
고 하니, 명하가 말하기를
"그대가 어쩌자고 이런 말을 하는가."
하자, 시진이 입을 다문 채 말이 없었다.

 

대사헌 유철 등이 아뢰기를,
"제궁가와 각아문의 둔장(屯庄)에서 모집한 백성 등에 관한 일이 이미 품정(稟定)된 사실이 있는데도, 지금 그만 양궁(兩宮)의 노비와 모집한 백성들에게는 잡역을 부과하지 못하게 할 일로 감히 먼저 아뢰었는가 하면 심지어 이조에 이문(移文)까지 하는 등 성명(成命)을 폐기시킨 채 여전히 전에 하던 짓을 답습하고 있으니 정말 통분스럽고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내수사의 당해 관원을 중하게 추치(推治)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고 추고만 하도록 명하였다. 양궁의 노비 등에 관한 일을 정계(停啓)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봉상시에서 각종 물품을 새로 받아들일 때 일일이 정밀하게 가리지 않으면, 신조(臣曹)의 당상과 본시(本寺)의 제조가 임시(臨時)하여 품질을 살핀다 하더라도 군박하게 되는 걱정을 면하기 어려우니, 아예 본시의 관원을 가려 차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후로는 해조(該曹)로 하여금 본시의 관원을 십분 가려 차임해서 직무를 극진히 수행하게 하되 제물(祭物)을 진배할 때 정밀하게 가리지 못한 것이 발견될 경우에는 법사(法司)로 하여금 일일이 적발하여 죄를 매기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조가 대신, 2품 이상의 삼사(三司) 관원, 2품 문·무·남(文武南)으로서 육조의 참판과 좌윤·우윤과 곤수 이상의 경력이 있는 자, 삼사의 경력이 있고 직책을 갖고 있는 인원들로 하여금 각각 인재를 천거하게 하되 3인을 넘지 못하게 청하였는데, 도승지 남용익(南龍翼)이 아뢰기를,
"삼사의 시임(時任) 관원 외에 삼사의 경력을 가진 사람은 인재를 천거하는 규정이 없으니, 경력을 가진 사람은 모두 제외시켜야 할 것입니다. 천거할 자격이 있는 인원을 별단(別單)으로 써 들여 계하(啓下)를 받은 뒤에 천거하도록 해야할 것이며, 이와 함께 양사(兩司)로 하여금 단자를 가져다 조사하게 하고 함부로 천거된 자는 일일이 바로잡게 하여 예전처럼 뒤섞이는 폐단이 없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승지 서필원(徐必遠)이 아뢰기를,
"얼마 전 곽제화(郭齊華)의 과제(課製)를 옥당에서 보내와 올렸는데, 신이 올려 보낸 문서를 가져다 조사해 보니, 지난달 5일에 제화가 자기 손으로 성첩(成貼)한 사실이 매우 명백하였습니다. 이를 보면 그가 계획적으로 피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는데, 충군(充軍)하라는 단자(單子)가 내려지긴 했지만 억울한 일이 될 듯싶기에 감히 진달드립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두 차례나 짓지 않은 것을 보면 의도한 바가 있으니 억울하지는 않을 듯하다."
하였다.

 

승지 이경억(李慶億)이 아뢰기를,
"수찬 김만균(金萬均)이 숙사(肅謝)한 뒤에 소장을 진달하고 나가서 그대로 궐직(闕直)을 하였습니다. 어제 패초(牌招)한 뒤에 궐문 밖에 와서 누차 사직소를 올리기에 본원이 봉입(捧入)하지 않고 빨리 직소(直所)에 들어가라고 재촉하였으나 끝내 오려 하지 않았습니다. 사직소를 도로 내려준 뒤에는 배종(陪從)하는 대열에도 따라 참여해야 하는 법인데, 더구나 궐내에서 입직(入直)하는 것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중하게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고, 금부에 내리라는 전지(傳旨)를 내렸다.

 

전 대사헌 민응협(閔應恊)이 죽었다.
사신은 논한다. 민응협의 자(字)는 인보(寅甫)로서 소시부터 성망(聲望)이 있었다. 청현직(淸顯職)을 역임하고 지위가 아경(亞卿)에 이르렀으나 끝내 서너 칸 되는 집도 장만해 두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많이 칭찬하였다.


【태백산사고본】 7책 7권 35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388면
【분류】인물(人物) / 역사-편사(編史)
사신은 논한다. 민응협의 자(字)는 인보(寅甫)로서 소시부터 성망(聲望)이 있었다. 청현직(淸顯職)을 역임하고 지위가 아경(亞卿)에 이르렀으나 끝내 서너 칸 되는 집도 장만해 두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많이 칭찬하였다.

 

11월 9일 계유

정언 이광직(李光稷) 또한 일을 부실하게 논했다는 이유로 인피(引避)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상이 남별궁(南別宮)으로 행차하여 서연청(西宴廳) 문 밖의 장전(帳殿)에 나아가 관반(館伴) 허적(許積)과 호조 판서 정치화(鄭致和)를 소견(召見)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사문(査問)할 때 혁직(革職) 혹은 강자(降資)167)  로 쟁집하는 여부에 대해 대신을 불러 의정(議定)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삼공(三公)을 불러 의논케 하였는데,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이미 행한 규례가 있으니 강자로 쟁집해야 할 것입니다."
하고, 허적이 아뢰기를,
"강자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엔 혁직으로 정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범금(犯禁)한 두 사람은 처참(處斬)으로 의논해야 하는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저들이 처참으로 논죄하지 않더라도 상의 입장에서는 처참으로 쟁집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오정위(吳挺緯)가 아뢰기를,
"사문을 행할 때 시위(侍衛)하는 신하들을 모두 입시(入侍)하게 해야 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총부(摠府)의 당상은 마루 위에서 시위하고 낭청(郞廳)은 섬돌 아래에 있도록 하라."
하였다.
어첩(御帖)을 올린 뒤에 상이 서연청으로 들어가 사신과 서로 읍(揖)하였다. 상은 동쪽을 향해 앉고 사신은 서쪽을 향해 앉았으며, 이일선(李一先)은 사신 아래 약간 뒤쪽으로 앉고 삼공 및 금부·형조의 당상은 북쪽을 행해 시립(侍立)하였다.
다례(茶禮)를 마친 뒤에 상이 사문을 행할 것을 청하니, 사신이 말하기를,
"삼가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하고, 일선과 사적으로 한참 동안 이야기를 하자, 상이 이르기를,
"청나라 말을 해독하는 자가 한 사람도 입시하지 않았는가?"
하였다. 일선이 사신의 말을 상에게 아뢰어 유황(硫黃)을 몰래 산 허룡(許龍)·언남(彦男)을 잡아들여서 공초(供招)를 받게 하고, 또 양효원(梁孝元)·이익신(李翊臣)과 정사(正使) 정유성(鄭維城), 부사 이만(李曼)을 불러들여 섬돌 위에 앉게 한 뒤 치대(置對)케 하였다. 일선이 또 사신의 말을 가지고 좌우를 물리친 뒤 감죄(勘罪)할 것을 청하니, 상이 승지와 사관 각 한 사람씩만 남고 나머지는 모두 물러가도록 명하였다. 일선이 또 사신의 말로 상에게 아뢰기를,
"허룡 등은 금하는 물건을 몰래 사들였으니 참형(斬刑)에 해당하고, 익신은 그가 데리고 간 사람이 일을 냈으니 혁직(革職)시킨 뒤 변원(邊遠)에 충군(充軍)시켜야 할 것이고, 정사와 부사는 제대로 단속하지 못하였으니 혁직시켜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사문이 끝나고 환궁하였다.

 

김만균(金萬均)을 금부에 내렸다.

 

내시를 보내 완산 부부인(完山府夫人)에게 치제(致祭)하였다.

 

대사간 김시진(金始振)이 아뢰기를,
"신이 제궁가와 각아문의 둔민(屯民)을 일체로 역(役)에 충정(充定)시켜야 한다는 것을 본래 알면서도 마침 거동하는 때를 만난데다가 일세(日勢)마저 늦었으므로 미처 문서를 조사해내지 못한 채 전계(前啓)를 따라 참여하는 일을 면하지 못했으니, 일을 살피지 않고 논한 잘못을 신 역시 면하기 어렵습니다. 체차시켜 주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간원의 계사(啓辭)에 잘못 쓴 글자가 있었으므로 상이 비답을 전하는 중관(中官)을 시켜 정원에 분부하기를,
"대신(臺臣)이 잘못 쓴 글자를 어찌하여 살피지 않았는가?"
하였는데, 승지 김수흥(金壽興)이 아뢰기를,
"신들이 미처 깨달아 살피지 못해 성상께서 분부하시게끔 수고를 끼쳐 드렸으니 황공하기 그지없습니다."
하니, 상이 알았다고 하였다.
대체로 상의 뜻은 대계(臺啓) 가운데 ‘자궁(慈宮)’이라고 한 ‘궁(宮)’자를 미안하게 여긴 것이었다. 승지가 계사를 전할 때에 내관(內官) 고예남(高禮男)이 말하기를 ‘이 궁자가 어떠한가?’ 하니, 승지가 대답하기를 ‘대계는 고칠 수 없다.’고 하자, 예남이 감히 더 이상 말하지 못했는데, 듣는 이들이 그 습성을 미워하였다.

 

정언 김석주(金錫胄)가 ‘상이 오자(誤字) 때문에 분부를 내렸다.’는 이유로 인피(引避)하고 체차시켜 주기를 청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응교 남구만(南九萬) 등이 상차하기를,
"김만균(金萬均)에게 나명(拿命)을 내리신 것에 대해 신들은 삼가 지나치다고 생각합니다. 대체로 부자간과 조손간은 정리상 차별이 있는데, 만균이 사정(私情)을 이룰 목적으로 규례를 벗어나 소장을 올렸는가 하면 두 번이나 패소(牌召)를 받고도 끝내 취직(就職)하지 않았으니, 정말 죄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 정리를 살펴보면 혹 용서해 줄 만한 점도 있습니다. 망부(亡父)의 말을 감히 폐기하지 못할 사정이 있었고 보면 소장을 진달하여 조정의 명을 기다리지 않을 수가 없었고, 두 번이나 궐하(闕下)에 나아와 소장을 올리며 면직을 청했고 보면 끝내 명에 응하지 않은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근시(近侍)를 금부에 내려 다스리게 하는 것이야말로 특별한 조치라 하겠는데, 진정 용서하기 어려운 죄만 아니라면 예(禮)로써 진퇴(進退)시켜야 본래 마땅한 것입니다.
그리고 정원의 계사(啓辭)에 ‘달리 청할 만한 벌이 없습니다.’ 하였는데, 그 의도는 반드시 다른 벌로 시행했으면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이를 인해 나명을 내리셨으니, 이는 아래에서 요청한 것이 이미 타당성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상께서 베푸신 것도 타당성을 얻지 못했다 할 것입니다. 나명을 취소하시고 마땅한 벌을 헤아려 시행하심으로써 근시를 대우하는 예(禮)를 보전케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차사(箚辭)가 이러하니, 파직하고 놓아보내라."
하였다.

 

윤강(尹絳)을 판윤으로, 심세정(沈世鼎)을 승지로, 이정(李程)을 사간으로, 민유중(閔維重)을 집의로, 오시수(吳始壽)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11월 11일 을해

대사간 김시진(金始振)과 정언 이광직(李光稷)도 계사(啓辭) 가운데 오자(誤字)를 쓴 잘못이 있다는 이유로 인피(引避)하였는데,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사옹원 도제조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왕자와 공주·옹주가 출합(出閤)한 뒤에는 날마다 공급하는 꿩을 감하는 것이 법인데, 인조조(仁祖朝)에 특별히 하교하여 15년을 기한으로 공급토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대간이 논계하자 성상께서 이렇게 비답하셨으니, 지금부터는 정파(停罷)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도 기한을 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출합한 뒤부터 연수(年數)를 계산합니까? 아니면 출합한 선후를 따지지 말고 모두 지금부터 계산해야 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부터 10년을 기한으로 그대로 지급토록 하라."
하였다.

 

11월 12일 병자

장령 김익렴(金益廉) 등이 출합(出閤)한 공주와 옹주에게 10년 기한으로 꿩을 공급케 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쟁집하며 폐지할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들어주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지난번 대왕 대비전을 위로해드리던 날에 숭선군(崇善君) 이징(李瀓)과 낙선군(樂善君) 이숙(李潚)이 감히 편복(便服) 차림으로 금중(禁中)을 출입했으니, 외람되게 행동한 죄를 그냥 놔둘 수 없습니다. 모두 파직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함경 감사 김휘(金徽)가 길주 목사(吉州牧使) 임한백(任翰伯)과 도사(都事) 안후창(安後昌)을 파출(罷黜)하였는데, 연분(年分)168)  을 정할 때 재실(災實)을 살피지 못한 죄가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에 헌부가 ‘김휘가 그 지역에 근무하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을 위해 공도를 무시한 채 사정(私情)을 따랐다.’는 이유로 파직시키기를 청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고 추고만 하게 하였다.

 

대사간 김시진(金始振) 등이 아뢰기를,
"무릇 변신(邊臣)된 입장에서 참으로 뜻밖의 비상 사태가 발생했을 경우엔 사실대로 치계(馳啓)함으로써 조정으로 하여금 그 곡절을 완전히 알게끔 해야 합니다. 그런데 동래 부사(東萊府使) 이성징(李星徵)은 왜인이 칼을 빼든 사건을 치계하면서 이정옥(李廷沃)이 도망친 일은 전혀 거론하지 않았으니, 엄폐한 죄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파직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고 추고만 하게 하였다.

 

11월 15일 기묘

상이 추고에 따른 조감 공사(照勘公事) 중에 제향(祭享)에 관련된 일까지도 공죄(公罪)로 감율(勘律)한 것을 정원이 봉입(捧入)했다고 꾸짖었다. 대사헌 유철, 장령 김익렴, 지평 윤우정·이숙달이 이를 이유로 모두 인피하여 면직되었다.

 

송최(宋最)가 주서(注書)의 천(薦)에 참여되자, 정언 김석주(金錫胄)가 아뢰기를,
"송최는 일찍이 가관(假官)이었을 때 가장 재주가 없다고 일컬었으니, 천거 대상에서 삭제하소서."
하고, 천거한 사람이 사정(私情)을 따랐다고 탄핵하면서 그를 파직시킬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윤허하지 않다가 이튿날 다시 아뢰자 이에 따랐다.

 

11월 18일 임오

송준길(宋浚吉)을 대사헌으로, 오두인(吳斗寅)을 사간으로, 이합(李柙)·장선징(張善瀓)을 지평으로, 이유상(李有相)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11월 19일 계미

집의 민유중(閔維重)이 장관과 상피(相避) 관계에 있다는 이유로 인혐하여 면직되었는데, 대사헌 송준길이 유중의 장인이기 때문이었다.

 

11월 20일 갑신

지평 이합 등이 아뢰기를,
"연경(燕京)에 가는 역서배(譯胥輩)와 수행원들이 이끗을 탐내 금법(禁法)을 범함으로써 국가에 걱정을 끼친 일이 전후로 잇따랐습니다. 이번 사문(査問)에서 모욕을 받은 것은 더욱 말할 수조차 없는데, 죄벌이 사신에게만 미치고 그들은 유독 멀쩡하니, 어찌 마음 아픈 일이 아니겠습니까. 국법으로 논한다면 단연코 이럴 수가 없으니, 정범(正犯)을 데리고 간 양효원(梁孝元)과 이익신(李翊臣) 및 수역(首譯)을 모두 나문(拿問)하여 정죄(定罪)케 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경상도 진사 이파(李坡)가 상소하여 전일 진소(陳疏)한 유생 김강(金鋼)과 유직(柳㮨) 등을 배척하면서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위해 변론하였는데, 상이 답하였다.
"꼭 소란을 일으킨 다음에 이기려고 하지 말고 그대들은 물러가 학업이나 닦아라."

 

11월 22일 병술

숭선군(崇善君) 이징(李瀓)과 낙선군(樂善君) 이숙(李潚)을 파직시키라는 논을 정계(停啓)하였다.

 

11월 23일 정해

헌부가 양효원(梁孝元)·이익신(李翊臣) 및 수역(首譯)을 나국(拿鞫)할 일을 아뢰니, 상이 따르지 않고 일렀다.
"수역 등은 먼저 파직시킨 뒤에 추고하라."

 

11월 24일 무자

지평 장선징이 아뢰기를,
"형조 판서 여이재(呂爾載)는 쇠약하고 실무에 어두운데다 평소 청렴한 면이 부족한데 전후로 이 직책에 임명되었으므로 사람들의 말을 많이 초래하고 있으니, 파직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승지를 보내 전옥(典獄)의 경범 죄수들을 풀어주었다.

 

허적(許積)을 판윤으로, 임유후(任有後)를 승지로, 서필원(徐必遠)을 병조 참의로, 이태연(李泰淵)을 참지로, 이원정(李元禎)을 의주 부윤(義州府尹)으로, 이정(李程)을 집의로, 홍주삼(洪柱三)을 수찬으로 삼았다.

 

응교 남구만(南九萬) 등이 상차하기를,
"위로 성상의 덕에 누를 끼치고 아래로 국가의 근본을 무너뜨리고 나라를 나라답지 못하게 하고 백성을 백성답지 못하게 하고 주현(州縣)을 주현답지 못하게 하고 관리를 관리답지 못하게 하여, 국가를 무기력 상태에 빠지게 함으로써 끝내 꼭 멸망에 이르게 하고야 말 것은 바로 제궁가(諸宮家)가 산해(山海)를 절수(折受)받는 폐단이라 할 것이니, 이는 한 가지 일이 잘못되어 한때의 폐단으로 그치는 정도에 비할 바가 아닌 것입니다. 이에 대해 대간이 2년 동안이나 아뢰었어도 지금까지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는데, 천지처럼 크게 포용해야 할 전하에 대해서도 유감이 없을 수 없지만, 한편으로는 성심(誠心)과 실의(實意)를 다하여 전하의 마음을 감동시키지 못했던 대신(臺臣)에게도 그 책임이 있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제 간원이 느닷없이 이를 정계(停啓)함으로써 1년이 넘도록 쟁집한 논을 끝내 한바탕의 부질없는 일로 만들어 버렸으니, 결코 일을 논하는 도리도 못 되고 바로잡아 구제하는 의리도 못 된다 할 것입니다. 정계한 간원의 관원을 체차시키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꽉 막힌 견해를 끝내 바꾸지 않는 한 아무리 해를 넘기며 쟁론한다 하더라도 결코 효과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차사(箚辭)가 이러하니,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11월 25일 기축

정언 김석주(金錫胄)가 병으로 정고(呈告) 중에 있다가 옥당의 차자를 보고는 나와서 인피하기를,
"사서(私書)를 보내 물어보기에 다른 말없이 동의해 답을 보냈으니, 체차시켜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物論)을 기다렸다.

 

정언 이광직(李光稷)이 인피하기를,
"신이 병 때문에 바야흐로 급히 휴가를 청하느라 요석(僚席)의 간통(簡通)을 뜯어보지 못했습니다만, 동참(同參)했던 논계를 정지하려 할 경우에는 사서(私書)를 보내 물어보는 것이 대규(臺規)입니다. 그저께 본원이 두 건(件)의 일을 정계하면서 한번도 물어보는 일이 없기에 신이 혼자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방금 정언 김석주(金錫胄)가 피혐한 사연을 보건대 ‘사서를 보내 물어 왔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신과 석주 모두 정고(呈告) 중인 것은 마찬가지인데, 한 사람에게는 물어보고 한 사람에게는 물어보지 않았으니, 이는 모두가 신이 경시당한 탓입니다. 체차시켜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11월 26일 경인

헌부가 처치하여 이광직(李光稷)은 출사시키고 김석주(金錫胄)는 체차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우의정 홍명하(洪命夏)가 상소하여 사직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11월 27일 신묘

상이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근래 대소 관원을 차임하고 제수할 때 늘 인재가 부족한 걱정이 있습니다. 조종조에서 사람을 임용하는 규정을 보건대 상으로 가자(加資)하는 예는 없고 단지 그 사람을 살펴서 발탁하였을 뿐입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이런 규정이 없으니 인재가 부족하다는 탄식이 당연히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하고, 좌의정 원두표(元斗杓)가 아뢰기를,
"신이 형편없기 때문에 그저 사람을 추천하는 것으로 임금을 섬기려고 한 나머지 매번 인재를 천거하자는 논을 내놓곤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일찍이 서필원(徐必遠)의 배척을 받기도 하였습니다만, 지금 또 망령되이 이 논을 내놓은 것은 진실로 사람을 발탁하지 않으면 인재를 임용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명(聖明)께서 보시기에 신하들 중에 쓸 만한 자가 있거든 발탁해서 쓰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헌납 이민서(李敏叙)가 아뢰기를,
"빈청(賓廳)에서 인견하는 것은 의례적인 일인데도 외부 사람들은 모두 뭔가 기대를 하면서 무슨 이야기가 나오고 어떻게 강구했는지 꼭 알고들 싶어하니, 뭇 사람들의 마음에 무기력해진 조정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뜻을 분발하여 큰 일을 하려고 한다면 지금이 바로 그때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조정에서 백성의 고통을 돌아보지 않기 때문에 산해(山海)를 절수(折受)받게 한 것을 혁파하지 않는 것이다.’ 하고 있습니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죄없는 이를 한 사람이라도 죽이고 의롭지 못한 일을 한 가지라도 행해야 할 상황이라면 천하를 얻는다 할지라도 그런 짓은 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임금이 만약 이런 마음을 갖고 있다면 어찌 혜택을 받지 못하는 백성이 있겠습니까.
지금은 양(陽)이 회복되는 달로서 일양(一陽)이 처음 발동하여 만물이 은밀히 자라나는 때인데, 옛사람이 말한 ‘머지않아 회복된다.’는 그 뜻이 크다고 할 것입니다. 오늘부터 전하께서 마음속으로 분발하시고 대신이 경책(警責)하여 뭔가 강구하면서 혜택을 베푼다면 어찌 사직의 복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우의정 홍명하(洪命夏)가 아뢰기를,
"백성의 원망이 자심해지는 것은 역시 수령이 적임자가 아니기 때문이니, 어사(御史)를 파견하여 염문(廉問)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태화가 아뢰기를,
"신의 생각도 그렇습니다."
하고, 민서가 아뢰기를,
"명이 내려 어사가 행장을 꾸리면 수령의 친지가 모두 급히 각읍에 통지하는 동시에 사람을 보내 어사의 뒤를 밟아가게 하니, 정말 통탄할 일입니다. 신이 듣건대 성종조(成宗朝) 때 혹 입직(入直)한 관원이나 혹 관유(館儒)를 불의에 떠나보냈다 하는데, 이것은 아름다운 규례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상의 생각에는 팔로(八路)를 염문하게 하고 싶은가?"
하였다. 명하가 아뢰기를,
"먼저 기전(圻甸)과 양서(兩西)를 염문케 하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잘 알았다고 하였다. 병조 판서 김좌명(金佐明)이 아뢰기를,
"영동(嶺東)의 재해 지역 중에도 강릉(江陵)과 양양(襄陽)이 심한데, 두 고을의 기병(騎兵)이 지금 당번의 차례를 당하여 의장(衣裝)이 허술하니, 얼어 죽을까 매우 염려됩니다. 그러니 번(番) 서는 것을 1개월 감해주고 그 대신 쓰고 남은 군포(軍布)를 가지고 고군(雇軍)을 대립(代立)시키는 것이 편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대사성 민정중(閔鼎重)이 아뢰기를,
"지난번 몹시 춥던 날 기아(飢兒) 하나가 거적에 싸여 길거리에 내버려져 있기에 바로 옷을 입히고 밥을 먹여 살렸는데, 들으니 이런 경우가 매우 많다 합니다. 만약 양자로 거두어들이는 자가 있을 경우 노비로 삼는 것을 허락해 준다면 버려진 아이들 가운데 살아나는 애들이 많을 것입니다. 경조(京兆)로 하여금 공문을 발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정중이 아뢰기를,
"듣건대전라도 산성(山城)의 회부미(會府米)169)   가운데 명색은 쌀이면서도 실제로는 피곡(皮穀)인 경우가 있다 하니, 경관(京官)을 파견하여 적간(摘奸)해서 중하게 다스려야 하겠습니다."
하고, 두표가 아뢰기를,
"이 말이 옳습니다."
하였는데, 태화가 아뢰기를,
"정중이 이미 들은 바가 있을 테니 어떤 고을인지 지적해 알리게 하소서."
하니, 정중이 아뢰기를,
"입암(笠巖)이 그렇다 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경관을 파견하여 적간토록 하라."
하였다. 정중이 아뢰기를,
"유생이 통독(通讀)한 성적의 평점을 신은 20분(分)170)  을 한계로 삼자고 청하였는데, 예조가 15분으로 정했다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면 초계(抄啓)하는 숫자가 너무 많게 될 것이니, 20분으로 한계를 정하는 것만 못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지평 이합이 양효원(梁孝元)·이익신(李翊臣) 및 수역(首譯)을 나문(拿問)할 일을 논계하니 상이 들어주지 않다가 곧바로 태화의 말로 인해 따랐다. 또 아뢰기를,
"길주 목사(吉州牧使) 임한백(任翰伯)을 지금 만약 파직만 시키고 그냥 놔둔다면 그의 소원대로 해 주는 결과밖에 되지 않으니, 나문(拿問)하여 정죄(定罪)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의주 부윤(義州府尹) 이원정(李元禎)은 일찍이 장성 부사(長城府使)로 있을 때 관곡(官穀)을 남용한 죄를 지었는데 그뒤 동래(東萊)에 있으면서 또 일을 제대로 선처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미 시험해 본 결과 일을 망친 것으로 판명된 사람을 지금 다시 기용하여 변경의 중책을 제수할 수는 없으니, 파직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정중이 아뢰기를,
"선척(船隻)·염분(鹽盆)·어전(漁箭)을 이미 조사해 낸 뒤, 선척에 대해서는 일단 판부(判付)하여 숫자를 정하도록 하였습니다만, 명례궁(明禮宮) 등 궁가의 염분과 어전은 아직 숫자를 정하지 못하였기에 감히 품(稟)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선척의 예에 따라 숫자를 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민서가 아뢰기를,
"대간이 논계하고 있는 일은 아무리 의정(議定)된 것이라고 하더라도 거행하지 못하는 것이 규례입니다. 그런데 본원이 제궁가의 어장(漁場)에 관한 일을 한창 논계하고 있는 중인데 제조 민정중이 느닷없이 숫자를 정하자고 청하였으니 일의 체계로 볼 때 부당합니다.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부교리 여성제(呂聖齊)가 아뢰기를,
"지난번 헌부가 논계한 데 따라서 소를 도살한 자는 살인한 자와 똑같은 죄로 처리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필시 행해질 수 없는 일로서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가축을 천하게 여기는 의리에 비추어 보더라도 이래서는 안 되니, 변통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명령을 반포하였는데 지금 또 거두어들인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병자년에도 이런 명령을 내렸습니다만 소를 도살했다고 해서 죽임을 당한 자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하고, 민서가 아뢰기를,
"‘「사람이 다쳤느냐?」 하시고 말[馬]에 대해서는 물어보지 않으셨다.’고 한 것이 곧 옛날 성인의 일입니다. 어떻게 소를 도살했다고 해서 사람을 죽일 수 있겠습니까."
하고, 태화가 아뢰기를,
"제신(諸臣)의 말이 이러하니 변통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성제가 아뢰기를,
"듣건대 입번(入番)하는 금군(禁軍)들이 내관(內官)에게 점열(點閱)을 받는다고 하는데, 매우 안 될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 창시한 것이 아니고 선조(先朝) 때부터 해 온 일이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선조 때에는 새로 입번하는 금군들을 차비문(差備門) 밖에 모이게 한 뒤 내관으로 하여금 그들의 군장(軍裝)을 살피게 하고 이어 술을 공궤(供饋)하게 하였으니, 이는 우대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지 당초 점열하려는 목적에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대로 점열하는 규정으로 굳혀지고 말았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지 않았다.

 

김좌명(金佐明)을 수어사(守禦使)로 삼았다.

 

11월 28일 임진

지평 장선징이 인피하기를,
"무릇 인견(引見)할 때 입시한 대관(臺官)이 일에 따라 논핵한 일이 있을 경우에는 그 자리가 파한 뒤 대청(臺廳)에 나와 동료에게 간통(簡通)하는 것이 예(例)입니다. 그런데 지평 이합이 어제 등대(登對)했을 때 한림(翰林)과 주서(注書) 양 신하에 대한 일을 새로 논계했는데도 끝내 통보해 알려주지 않았으니 대각의 고사(故事)가 신으로부터 추락된 셈입니다. 체차시켜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物論)을 기다렸다.

 

정언 이광직(李光稷)이 아뢰기를,
"신은 위로는 성실한 마음과 뜻으로 전하의 마음을 감동시키지 못했고 아래로는 요석(僚席)에서 중히 여김을 받지 못했으니, 이와 같은 신이 배척을 받지 않고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런데 신을 처치하여 출사(出仕)를 청한 것이야말로 생각지도 못한 일이기에 소패(召牌)가 내렸어도 감히 무릅쓰고 나아가지 못한 채 번잡스럽게만 해드렸으니 신의 죄가 크다 하겠습니다.
아, 하늘이 임금을 세워 만백성에 군림케 한 목적이 어찌 백성의 생활 터전을 빼앗아 사친(私親)에게만 후하게 해주려 한 것이겠습니까. 장차 백성을 위해 해를 제거하여 자식처럼 보는 도리를 극진히 하게 하려는 뜻에서일 것입니다. 지금 이 산해(山海)를 절수(折受)받게 해주는 폐단이야말로 만백성에게 막대한 피해가 돌아가는 일로서 근심하고 원망하는 소리가 온 나라에 가득 퍼지고 있습니다. 이에 대신(臺臣)이 이를 거론하여 들려 드렸으니 필시 전하께서도 이미 남김없이 통촉하고 계시리라 생각하는데, 2년에 걸쳐 쟁집하고 있어도 아직 윤허 한번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전하의 생각은 필시 앞으로도 ‘백성에게 폐해를 끼치는 것이야 염려할 것이 없고 백성이 원망하는 것도 걱정할 것이 없다. 오직 사친(私親)에게만 후하게 해주면 된다.’라는 식이 될 것인데, 이러한 일단의 사의(私意)에 휘감겨 점점 고질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백성을 자식처럼 보아야 하는 도리는 까마득히 생각지도 못하게 되고 말 것입니다. 이러한데 이미 구구하게 진달드린 사의(辭意)를 가지고 사고 방식이 동떨어져 변화시키기 어려운 전하의 마음을 감동시켜 되돌릴 수 있겠습니까. 신은 차라리 입을 다물고 물러갈지언정 다시는 감히 논열(論列)하여 하루나마 서로 버티며 그 하루만큼 전하의 누(累)를 늘리게 하는 일은 하지 못하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이 끝내 대열에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이니, 체차시켜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지평 이합이 역시 장선징이 인피한 이유를 가지고 인구(引咎)하며 인피한 뒤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11월 29일 계사

사간 민유중(閔維重) 역시 그동안 대직(臺職)에 있으면서 산해(山海)를 절수(折受)받게 해주는 데 대해 논계했어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피하면서 아뢰기를,
"신이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데도 구차하게 이 직책에 있는 것이나, 상께서 그 말을 채용하지 않으면서 구차하게 그 몸을 영광되게 해주시는 것이나 모두 수수(授受)하고 진퇴(進退)하는 의리에 비추어 부끄러운 점이 있으니, 체차시켜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헌납 이민서(李敏叙)가 ‘혐의가 있어 처치하기 곤란하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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