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일 갑오
응교 남구만(南九萬) 등이 상차하여 장선징·민유중·이민서는 출사(出仕)시키고 이광직·이합은 체차(遞差)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일렀다.
"국가에서 믿는 자는 대장(大將)인데 이완(李浣)이 오래도록 행공(行公)하지 않고 있으니 일의 체모로 볼 때 온당치 못하다. 내일 아침에 패초(牌招)하여 직무를 살피게 하라."
승지 김시진(金始振)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지난번 간직(諫職)에 있을 때 느닷없이 중론(重論)을 【산해(山海)를 절수(折受)받게 해준 일을 가리킨다.】 정지시켰으므로 물의(物議)에 비난을 받았다가 그대로 탄핵을 받고 체차되었으니, 지금 다시 감히 근밀(近密)한 지위에 있을 수 없습니다. 체차시켜 주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12월 2일 을미
지평 장선징이 아뢰기를,
"강도 유수(江都留守) 권우(權堣)는 강퍅하고 잗달아 백성의 마음을 크게 잃었으니, 보장(保障)이 되는 중지(重地)를 그대로 맡길 수 없습니다. 파직시키소서. 황해 감사 강유(姜瑜)는 나이 들어 쇠약하고 병이 고질인데다 풍력(風力)이 없어 정사를 대부분 무기력하게 처리하는 탓으로 수령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있으니, 체차시키소서. 연안 부사(延安府使) 안후열(安後說)은 감사가 부의 경내를 지나갈 때 어떤 일로 아전을 때리다 화를 내고서 나와 맞이하지도 않았으니, 체통과 관련하여 손상되는 점이 적지 않습니다. 파직시키소서."
하였는데, 상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훈련 대장 이완(李浣)이 패소(牌召)에도 나아오지 않고 소장을 진달하여 체차시켜 주기를 청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고 다시 패초(牌招)하여 직무를 살피게 하였다.
우의정 홍명하(洪命夏)가 상차하기를,
"기전(圻甸)을 균전(均田)한 뒤로 1결(結)당 미곡 12두(斗)씩 거두자는 것이 바로 신의 건의 내용이었습니다. 반드시 12두를 거두어들여야만 안으로 각사(各司)의 공물가(貢物價)와 밖으로 영관(營官)·사객(使客)의 수요를 충당할 수 있고 이와 함께 인부와 말[馬] 등 잡역(雜役)도 모두 12두 내에서 해결할 수 있으니 한번 거두어 들인 뒤에는 다시 더 부과해야 할 걱정이 없어질 것입니다. 신의 주된 의견은 이와 같을 뿐인데, 대신 및 해청(該廳)의 당상에게 자문을 구하시어 좋은 방향으로 변통했으면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해 처리토록 하겠다."
하였다.
12월 3일 병신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引見)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이민서(李敏叙)가 아뢴 데 따라 대동미(大同米)를 12두씩 거두는 것의 편부(便否)를 모여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이에 삼공과 재신(宰臣) 및 해청의 당상이 서로 논란을 벌였는데 소견들이 같지 않아 어떤 이는 10두가 편하다고 하고 어떤 이는 8두가 편하다고 하고 어떤 이는 12두가 편하다고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감하려 한다면 10두로 해야지 8두는 결코 안 될 일이다. 따라서 지금 10두와 12두 중에서 그 이해와 편부를 살펴 확정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관수(官需)를 복구하려 했던 것이 바로 당초 양전(量田)할 때의 본의였으니, 오늘날에 와서 어떻게 바꿔 고칠 수 있겠는가. 그리고 12두는 일을 직접 담당하고 있는 자의 의논이고 8두는 국외자(局外者)의 의논이니, 12두로 이미 정한 규식에 따라 시험삼아 행해 보도록 하라."
하였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입암 산성(笠巖山城)의 곡물을 적간(摘奸)하라고 이미 상의 명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후일 염문(廉問)할 때 적간하는 일을 아울러 행해야 합니까, 아니면 별도로 경관(京官)을 파견하면서 어사라고 칭하고 행해야 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별도로 어사를 파견하라."
하였다. 민정중(閔鼎重)이 아뢰기를,
"각 고을의 창곡(倉穀)도 본도 감사로 하여금 적간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좌상 원두표(元斗杓)가 아뢰기를,
"다른 고을이야 감사에게 적간하게 해도 충분하겠습니다만, 장성(長城)의 창곡 만큼은 어사로 하여금 똑같이 적간케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역시 허락하였다. 정중이 아뢰기를,
"지난번 길에 버려진 아이를 거두어 기르는 자에게는 그 아이를 노비로 삼도록 허락했었는데, 다만 그 당사자에만 한하여 부리도록 하고 그의 자손은 도로 초역(初役)으로 귀속시키게 하는 것이 온당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지평 장선징이 권우(權堣)와 안후열(安後說)을 파직시키고 강유(姜瑜)를 체차시킬 일 및 당해 주서와 사관을 파직시키고 추고할 일을 아뢰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경기에서 미곡을 받아들이는 것이 호서보다 많으니 일찍 변통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들어주지 않고 이르기를,
"의논을 주관하는 자가 어쩌면 이렇게도 많단 말인가."
하였다. 이민서(李敏叙)가 소회를 가지고 진달드리기를,
"경기 백성은 사리상 너그럽게 돌봐 주어야 마땅합니다. 따라서 미곡을 호서보다 많이 거두어들이는 것은 온당치 못하니 전계(前啓)한 대로 8두를 거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인부와 말[馬]에 대한 역(役)은 예전대로 내서 정해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민서가 아뢰기를,
"제궁가의 시장(柴場)과 어장(漁場)에 대한 일을 해가 바뀌도록 쟁집하고 있는데도 아직 윤허 한번 받지 못했으므로 뭇사람들이 마음속으로 모두 안타까워하며 답답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지금 대신 및 제신(諸臣)이 모두 입시하였으니 하문하시어 처리하면 좋겠는데, 신은 이 일의 결말을 알고서 물러가고 싶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바로잡아 고치는 것은 좋지만 혁파는 안 될 일이다."
하였다. 남구만(南九萬)이 아뢰기를,
"어장의 폐단이 시장보다 심하니, 일괄적으로 조사해서 바로잡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바로잡아 고치려고 하는 이유가 대체로 이 때문이다. 조사해 낸 뒤에 남겨 둘 것은 남겨 두고 없앨 것은 없애되 미진한 일이 있거든 다시 논하도록 하라. 이 뒤로는 오직 품처(稟處)하기에 달려 있다."
하였다. 정중이 아뢰기를,
"호남과 호서의 흉년든 상황이 그다지 크게 다르지 않은데, 호남에는 미곡 3두씩을 감해 준 반면 호서에는 아무 조치도 없으니, 혜택을 베푸는 것이 너무도 불균등하다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특별히 명하여 호서에 1두씩을 감해 주도록 하였다. 구만이 아뢰기를,
"대간이 진달드린 것을 섣불리 의논드리기는 어려울 듯합니다만, 이원정(李元禎)이 일찍이 동래(東萊)에 있을 때 신이 진휼 어사(賑恤御史)로 내려 가서 그가 진휼하여 구제한 일을 보건대 부지런하고 착실할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일을 하다 보면 잘 할 때도 있고 못할 때도 있는 법인데, 어떤 일이든 완전히 잘하도록 어떻게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민서가 아뢰기를,
"이원정이 동래에 있을 때 진휼을 잘 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신이 모르겠습니다만, 설혹 착한 일 한 가지를 했다 하더라도 전일 일을 낸 사람을 어떻게 다시 변경에 둘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우의정 홍명하(洪命夏)가 아뢰기를,
"곽제화(郭齊華)는 월과(月課)를 지어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충군(充軍)까지 되었었는데, 이세화(李世華)는 3인을 장살(杖殺)했는데도 그 죄가 영원히 서용(敍用)하지 않는 정도로 그쳤으니 경중이 전도되었습니다."
하고, 두표가 아뢰기를,
"감사가 계문(啓聞)한 뒤에 또 3인이 죽었다고 하니, 놀랍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본도의 변지(邊地)에 정배토록 하라."
하였다.
12월 4일 정유
호군 윤강(尹絳)이 상소하여 군직(軍職)과 겸대(兼帶)를 체차시켜 주기를 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12월 6일 기해
대사간 홍처량(洪處亮)이 사직하고 오지 않았다.
12월 7일 경자
조복양(趙復陽)을 강화 유수로, 오정원(吳挺垣)을 황해 감사로, 이경휘(李慶徽)를 대사간으로, 권대운(權大運)을 승지로, 민정중(閔鼎重)을 이조 참의로, 김익렴(金益廉)을 장령으로, 윤우정(尹遇丁)을 지평으로, 이혜(李嵆)를 정언으로 삼았다.
12월 10일 계묘
지평 윤우정(尹遇丁)이 일찍이 본직에 있을 때 우역(牛疫)을 염려한 나머지 소를 도살한 자는 살인한 자의 죄와 마찬가지로 처리할 것을 아뢰었는데, 그뒤 인견할 때 여러 신하가 모두 ‘가축을 사람에 비하다니 매우 안 될 일이다.’고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우정이 다시 이 직책에 들어와 인피하였는데 처치하여 출사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우정의 그와 같은 주장이야말로 유(類)를 알지 못한다고 할 만한 것으로서 사람들이 비웃은 것은 원래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인피한 사연을 보건대 책임을 회피하려고 둘러대는 말이 수두룩하였으니 정말 가소로울 뿐이다.
사간 민유중(閔維重)과 헌납 이민서(李敏叙)가 서경(署經)하는 예를 위배했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는데, 처치하여 출사시키기를 청했다. 각도의 도사(都事)를 서경할 때에는 반드시 세 사람이 구비되어야만 할 수가 있는데, 두 사람이 서경을 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인피했던 것이었다.
영동에 크게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상수리 열매와 푸성귀를 먹으며 연명하였다. 이에 상번(上番)할 기병(騎兵)들도 싸가지고 갈 양식이 없었으므로 감사 이진(李𥘼)이 장문(狀聞)하여 번을 물리고 그 대신 포목을 거두어들일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개성부(開城府) 및 해주(海州)에 지진이 일어났다.
12월 11일 갑진
대사간 이경휘(李慶徽)가 지난번 전석(銓席)에 있을 때 중하게 탄핵을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는데, 처치하여 출사시키기를 청하였다.
집의 송시철(宋時喆) 등이 아뢰기를,
"근년 이래로 대소 옥송(獄訟)이 해를 넘기도록 지체되고 있는데 이 폐단은 서울이나 지방이나 마찬가지로서 백성이 원망하게 되는 단서가 또한 여기에 말미암는다 할 것입니다. 신들이 삼가 인조조(仁祖朝) 계해년의 수교(受敎)를 보건대, 그 속에 ‘검칙하는 책임은 모두 법부(法府)에 있다. 무릇 결송(決訟)171) 은 3개월 동안에 걸쳐, 한성부·장례원은 소사(小事)는 30건(件) 대사(大事)는 20건을 처리해야 하고 형조는 소사 20건 대사 30건을 처리해야 한다. 그리고 어떤 옥송(獄訟)을 판결하든 간에 대사는 30일 기한 내에 처리해야 하니 이는 사죄(死罪)이고, 중사(中事)는 20일 기한 내에 처리해야 하니 이는 도배(徒配)이고, 등사(等事)172) 는 10일 내에 확정 판결해야 하는데, 그런 뒤에는 헌부에 이보(移報)해야 한다.’는 내용이 그야말로 명백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근래 한성부와 장례원은 때때로 보고하는 일이 있기 합니다만 그것도 착실하지 못하고, 형조의 경우는 아예 이런 일을 행하지 않고 있으니, 선왕의 수교를 무시한 채 법령을 폐기시키고 있다는 그 사실이 정말 놀랍기만 합니다. 지금 이후로는 일체 인조조의 수교에 따라 다시 밝혀 봉행토록 하고, 외방의 대소 옥송 또한 이 기한 내에 결절하고 나서 즉각 계문하게 함으로써 법부가 미리 알고 규찰하며 검칙할 수 있도록 해주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홍명하(洪命夏)를 내의원 도제조로, 맹주서(孟胄瑞)를 정언으로 삼았다.
12월 13일 병오
지평 윤우정(尹遇丁)과 대사간 이경휘(李慶徽)가 패소(牌召)에 응하지 않고 인피하여 면직되었다.
강원도에 우역(牛疫)이 크게 돌아 1천 7백 70여 마리가 죽었다.
12월 14일 정미
이경휘(李慶徽)를 승지로, 이경억(李慶億)을 대사간으로, 이합(李柙)을 지평으로, 이완(李浣)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대사헌 송준길(宋浚吉)이 병으로 상소하여 사직하기를,
"신은 평소 친구도 없는 몸으로 한 세상을 뒤돌아 보아도 마음을 알아 준다고 허여한 경우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성명께서 그만 마음을 아는 것으로 기약을 하고 계시는데 신이 어떻게 이런 것을 성명에게 바랄 수 있겠습니까. 근일 대각에서 논하는 것은 실로 공의(公議)에서 나온 것인데 해를 넘기면서 논집해도 윤허를 내리지 않고 계십니다. 이에 나라 사람들 모두가 ‘사(私)’라고 하는 한 글자를 전하의 고질로 삼고 있으니, 신은 실로 가슴이 아프고 개탄스러워 침이 몸을 찌르는 것과 같을 뿐만이 아닙니다. 신은 날로 쇠약해지고 병이 위독해져 남은 목숨이 간들간들하기만 한데 이 생명이 다 되어 충성을 바쳐 보답할 길이 영영 없어지겠기에 종이를 앞에 두고 눈물만 흘릴 뿐 말씀드릴 바를 모르겠습니다. 간절히 원하건대 성자(聖慈)께서는 신의 정세를 애달프게 여기시어 조적(朝籍)에서 신을 삭제해 주심으로써 편안한 마음으로 죽을 수 있게 해 주소서. 그러면 시종 생성(生成)해 주는 은혜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너그럽게 비답하고 체직을 허락하였다.
12월 15일 무신
비가 왔다. 예조가 아뢰어 사한제(司寒祭)173) 및 빙고(氷庫)에 얼음을 채우는 일을 물리도록 청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이때 날씨가 너무 따뜻하고 비까지 와 강이 얼어 붙지 않았기 때문에 예조가 이렇게 청한 것이다.
12월 16일 기유
홍중보(洪重普)를 대사헌으로, 조수익(趙壽益)을 우윤으로 삼았다.
12월 17일 경술
대사헌 홍중보가 추감(推勘)을 당하는 일이 있어 인피하여 면직되었다.
헌납 이민서(李敏叙) 등이 아뢰기를,
"근래 화전(火田)의 폐단이 끝이 없습니다. 높은 산의 울창한 수풀을 멋대로 불질러 태우는 바람에 백 년 동안 기른 것들이 불 한 번에 소진되고 벌거숭이 산에 물이 말라버려 온갖 산물(産物)이 모두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식자들이 ‘해마다 가뭄 드는 것이 꼭 여기에서 말미암지 않는다고 할 수 없다.’ 하는데, 이는 참으로 일리가 있는 말이라 하겠습니다.
화전을 금한 것이 전후 한두 차례가 아니었습니다만, 조정에서 일률적으로 엄금하지 못했던 것은 혹 간민(奸民)을 포용하지 못할까 두려워한 탓도 있었고 혹 주현(州縣)에서 그에 따른 수입을 이롭게 여긴 탓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령 높고 크기로 유명한 산림 및 국가의 사전(祀典)에 기재된 곳, 주현의 진망처(鎭望處)로 《여지승람(輿地勝覽)》에 기록된 곳 등에 대해서는 더욱 먼저 봉식(封植)을 가해야 할 것입니다. 호조와 공조로 하여금 별도로 사목(事目)을 만들어 엄히 각읍(各邑)에 신칙하게 하고 경계선을 정해 방금(防禁)을 엄준하게 하는 한편, 본도 도사(都事)로 하여금 매년 직접 검사해서 개록(開錄)하여 계문하게 하되, 방금을 느슨히 하고 간악한 행동을 하도록 열어주는 자는 중률(重律)로 논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토록 하였다. 또 아뢰기를,
"순천 군수(順川郡守) 전영발(全英發)은 상으로 가자(加資)되어 수령에 임명된 데다가 목민관에는 부적합하니 체차시키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형조 판서 이완(李浣)이 상소하여 면직되었다.
김시진(金始振)을 승지로, 오정일(吳挺一)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12월 18일 신해
공주와 옹주의 집에 꿩을 공급하는 것에 대한 논을 정계(停啓)하였다.
홍중보(洪重普)를 예조 판서로, 유철(兪㯙)을 대사헌으로, 이행진(李行進)을 경기 감사로, 홍주삼(洪柱三)을 장령으로, 윤원거(尹元擧)를 사업으로, 윤우정(尹遇丁)을 정언으로 삼았다.
개성 유수 박장원(朴長遠)이 치계하기를,
"이번 칙사의 행차 때 통관배(通官輩)의 요구 사항이 전에 비해 몇 배나 되었고 이일선(李一先)의 종호(從胡)174) 가 마구 날뛰며 거두어들이도록 한 것이 한이 없었습니다. 이루 거론하기도 어려운 각종 물품을 어려운 처지에서도 갖은 방법을 동원해 마련해서 간신히 그들의 욕구를 채워 주었는데, 구도(舊都)의 간신히 살아남은 백성들이 전혀 보존될 가망이 없게 되었으니, 본부(本府)에 있는 해서(海西)의 피곡(皮穀) 수천 석(碩)을 얻어 민간에 나누어 줌으로써 거꾸로 매달린 것같은 위급한 상황을 풀어줄 수 있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조정이 단지 1천 석만 허락하였다.
12월 19일 임자
정언 맹주서(孟胄瑞)가 병조 좌랑 김시욱(金時郁)을 탄핵하면서 지망(地望)이 본래 가벼워 기성(騎省)175) 의 낭관에 부적합하니 체차시키라고 청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12월 21일 갑인
대사간 이경억(李慶億)이 아뢰기를,
"강도(江都)와 남한 산성(南漢山城) 모두 보장(保障)이 되는 중요한 지역이기 때문에 10년 동안 온갖 공력을 들여 군량을 비축하였는데, 지금 와서 보건대 군량의 과반수가 장부에만 허위로 기재되어 있다니,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지난번 연신(筵臣)의 요청에 따라 경관(京官)을 보내 적간(摘奸)토록 하였는데, 아직도 거행치 않고 있으니 유사 당상(有司堂上)을 중하게 추고하소서. 그리고 속히 어사를 보내 각종 군기(軍器)를 적간하게 하는 동시에 일일이 점검해서 사실대로 계문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2월 22일 을묘
윤순지(尹順之)를 공조 판서로, 윤문거(尹文擧)를 이조 참판으로, 홍만용(洪萬容)을 지평으로, 오시수(吳始壽)를 헌납으로 삼았다.
사한제(司寒祭)를 거행하고, 비로소 얼음을 빙고(氷庫)에 들였다.
비국이 원계(院啓)대로 화전(火田)을 금할 것을 청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진사 조원(曺瑗)을 의주(義州)에 장류(杖流)176) 하였다.
조원은 평산(平山) 사람으로 훈국에 정장(呈狀)하여 평산 장수원(長水院) 들판을 주인없는 진황지(陳荒地)라고 칭하면서 둔(屯)을 설치할 것을 청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공(公)을 빙자하여 사사로운 계책을 이루려고 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뒤에 숙정 공주(淑靜公主)의 집에서 그 땅을 절수(折受)받아 장(庄)을 설치하였는데 민전(民田)이 많이 뒤섞여 들어가 백성이 매우 원망하였으므로 대간이 누차 아뢰어 본도로 하여금 조사하게 하였다. 이에 조원이 전에 했던 말을 바꾸어 주인이 있는 진황지라고 말하자, 상이 조원이 농간을 부렸다고 여겨 경옥(京獄)에 잡아들인 뒤 엄히 형신(刑訊)하여 중하게 처리하라고 명하였는데, 대간이 이를 강력히 쟁집하였으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다가 이때에 이르러 변방에 유배된 것이었다.
12월 23일 병진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인평 대군(麟坪大君)의 딸아이가 죽다니 뜻밖이다. 선조(先朝) 때 돌보아 주신 뜻을 거슬러 생각하니 내 마음이 매우 참담하고 슬프다. 해조로 하여금 담지군(擔持軍)과 조묘군(造墓軍) 등을 내주도록 하라."
하였다.
효종(孝宗)이 얼마 못 살고 죽은 인평 대군을 애달프게 여겨 그의 어린 딸을 궁중에서 키우면서 공주와 똑같이 어루만져 사랑하였다. 그러다가 상이 즉위하자 비로소 그 집에 돌려 보냈는데, 이때에 이르러 병으로 일어나지 못하게 되자 이렇게 명한 것이다.
12월 24일 정사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12월 25일 무오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얇은 옷을 입은 군사에게 솜옷을 하사하였다.
12월 26일 기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대신 및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제궁가(諸宮家)의 시장(柴場)에 대해서는 일찍이 초계(抄啓)해서 품정(稟定)하라는 분부를 내리셨으니, 이제 그 이수(里數)를 정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어장(漁場)과 망장(網場)에 대해서는 모든 의논들이 혁파해야 한다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좌의정 원두표(元斗杓)가 아뢰기를,
"임진 왜란 전에는 선반(宣飯)177) 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에 여러 어장에서 예빈시가 세금을 거두어들였는데, 난리를 치른 뒤로 물력(物力)이 못 미치어 선반하는 일이 폐지되면서 어장 역시 세금을 거두지 않고 하나의 한지(閑地)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에 선조 대왕(宣祖大王)께서 궁가에 사급(賜給)하도록 명하셨으므로 이때부터 절수(折受)받게 해주는 일이 시작되었는데 오늘날에 와서는 그 폐단이 끝이 없게 되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혁파한다고 해도 안 될 것은 없다. 다만 선조조(宣祖朝)의 왕자와 공주·옹주로서 현재 생존해 있는 자가 거의 없는데, 선조(先朝) 때 사급한 것을 하루아침에 혁파한다는 것은 인정상으로 차마 못할 일일 뿐만이 아니라, 돌아보건대 여러 궁가들의 여생이 앞으로 많이 남아 있지 않으니, 우선 한 곳씩 남겨두어 그 몸을 마치도록 하는 것이 또한 옳지 않겠는가."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신이 제궁가에서 시장(柴場)을 절수받은 현황을 작성한 장부를 가져다 보건대, 절수받은 숫자에 다소의 차별이 있고 이수(里數)에도 원근의 차이가 있었는데, 똑같이 균등하게 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두표가 아뢰기를,
"사방의 둘레를 10리(里)로 한정한다면 과대한 폐단이 없어지겠습니다."
하고, 태화가 아뢰기를,
"이 설이 중도에 맞으니, 제궁가로 하여금 스스로 한 곳을 선택하게 하되 공가(公家)에서 이수를 타량(打量)178) 하여 지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태화가 또 아뢰기를,
"지난번 호남 유생 배기(裵紀) 등이 상소한 데 따라 대동법(大同法)의 편부(便否)를 본도 감사에게 문의하여 민정(民情)이 어떠한지를 살펴보려 했었는데, 지금 조귀석(趙龜錫)의 계본(啓本)을 보건대 정읍(井邑)·구례(求禮)·용담(龍潭) 3개 읍 외에는 모두 불편하게 여기고 있다 하였습니다."
하고, 우의정 홍명하(洪命夏)가 아뢰기를,
"귀석의 장계 중에 ‘산군(山郡)의 백성들은 오히려 혁파되지 않는 것을 걱정하고 해읍(海邑)의 백성들은 오히려 혹시라도 혁파될까 걱정한다.’고 하였으니, 산과 바다의 민정이 이처럼 같지 않습니다. 산군의 요구를 따른다면 당연히 혁파해야 하고 해읍의 요구를 따른다면 당연히 시행해야 하는데, 두 가지 중에서 어느 것에 맞춰 따라야 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해읍에서 원한다면 해야 할 것이다. 산군이 원하지 않는 것을 돌아 볼 것이 뭐가 있겠는가."
하였다. 두표가 아뢰기를,
"대동법을 실시하는 목적이 장차 백성을 편하게 해 주기 위함이니, 백성이 불편하게 여긴다면 혁파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금방 시행했다가 금방 폐지하는 것은 아이들 장난과 같은 점이 있다고 한다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옛날 한 고조(漢高祖)는 인(印)을 새겨놓았다가 경각간에 녹여 없애버렸는데도 끝내 선책(善策)이 되는 결과를 잃지 않았었으니, 오직 일의 당부(當否)만 살피면 되는 것입니다."
하고, 명하가 아뢰기를,
"신은 처음에 대동법을 불편한 것으로 여겼고 고(故) 상신(相臣) 김육(金堉)은 강력히 이 의논을 주장하였습니다. 신은 김육에 대해 자제와 같은 입장에 있었는데 소견이 서로 틀렸기 때문에 김육이 늘 이것을 가지고 신에게 노여워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신이 직접 선혜청 당상을 맡게 된 뒤에야 비로소 균역(均役)에는 대동법보다 좋은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산군에서는 원하지 않고 있어도 해읍에서는 모두 원하고 있고 보면, 여기에서 또한 산읍과 해읍의 부역(賦役)이 불균등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만약 균역하려 한다면 대동법을 놔두고 어떻게 하겠습니까. 만약 산군에서는 행하지 않고 해읍에서만 행한다면 이것은 이른바 반쪽 짜리 대동법이라 할 것인데, 한 도 안에서 어떻게 반쪽 짜리 대동법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태화가 아뢰기를,
"지금 의논하는 자들이 더러 ‘일단 시행하는 이상에는 산군과 해읍 모두 아울러 시행해야 한다.’고 하는데, 이 주장이 옳을 듯합니다. 대체로 볼 때 산군이 원하지 않는 것을 통해 평일 부역이 그곳에서는 무겁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해읍이 스스로 원하는 것 속에서 평일 부역이 그곳에서는 치우치게 고달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산군에서 대동법을 불편하게 여기는 것에는 또한 이유가 있습니다. 대체로 산군의 미곡은 해청(該廳)에서 가져다 쓸 수가 없기 때문에 포목으로 바꿔서 바치게 하는데, 포목으로 바꿀 즈음에 손해보는 것이 적지 않습니다. 대체로 6두(斗) 5승(升)의 미곡을 가지고 포목 1필과 바꾸는데, 포목 값은 비싸고 미곡 값은 싸기 때문에 부득이 더 주고 사는 형편이니, 그 폐해를 실로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하고, 판윤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그 포목의 품질을 보면 승수(升數)가 그다지 조밀하지 않고 척수(尺數)도 그다지 길지 않은데 15, 16두씩 주고 1필과 바꾼다는 이야기는 이치상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만, 대체로 민정(民情)을 들어보면 원망하는 자가 많다 하니, 그 사이에 더 주고 사는 폐해는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태화가 아뢰기를,
"산군에서 대동법을 원하지 않는 이유가 오로지 포목으로 바꾸게 하는 한 조목에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포목으로 바꾸는 가미(價米)를 약간 변통해 주어 부족하게 되는 걱정이 없도록 해 주어야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포목으로 바꿔 바치는 산군에는 미두(米斗)를 더 지급토록 하라."
하였다.
경기의 균전(均田)이 끝났다. 기전(畿甸)의 전결(田結)이 난리 뒤로 많이 감축되어 통상 그 숫자가 겨우 7만 2천 9백 80여 결에 불과했는데, 이때에 이르러 더 얻은 숫자가 좌·우도를 합하여 모두 2만 5천 4백 10결이었다.
고성군(高城郡)에서 어선 21척이 바다에 들어갔다가 갑자기 광풍을 만나 15척이 침몰하고 47인이 익사하였는데, 감사가 보고하니 휼전(恤典)을 거행토록 명하였다.
12월 27일 경신
해서(海西)에서 계문한 바에 따르면, 강령현(康翎縣)에 지진이 일어났는데 그 소리가 우레와 같았고 가옥이 모두 흔들렸으며, 배천(白川)과 연안(延安)에도 지진이 일어났다고 하였다.
부산 첨사(釜山僉使) 이정옥(李廷沃)의 고신(告身)을 뺏었다.
대마도주(對馬島主) 평의진(平義眞)이 보낸 사신이 동래(東萊)에 도착하자 부사 이성징(李星徵)이 정옥과 함께 연향례(宴享禮)를 행하였다. 그런데 소위 봉진(封進)하러 왔다는 왜놈의 성격이 고약스러워 술잔을 들 무렵에 구례(舊例)를 바꾸려고 하였는데 부사가 사리를 들어 다투며 허락하지 않자 왜놈이 버럭 성을 내며 칼을 뽑아들고는 큰 소리를 치면서 뛰어나와 곧바로 부사 앞으로 대들었다. 이때 부사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는데 정옥이 겁을 먹고 달아나 피하였다. 대간이 나라를 욕되게 하였다는 것으로 정옥을 탄핵하여 금부에 넘겼는데, 금부가 그 죄는 장 일백(杖一百) 탈고신(奪告身)에 해당한다고 아뢰었다.
12월 29일 임술
대사간 이경억(李慶億)이 체차되었는데, 정조(正朝) 때 진하(陳賀)하는 습의(習儀)179) 에 참석하지 않은 것에 대해 헌부가 조사해 추고하라고 논계하였기 때문이다.
경상도에 가뭄의 재해가 극심하였다. 간혹 비가 내리더라도 만족스럽게 오지를 않아 상류의 물줄기가 거의 끊기면서 낙동강(洛東江)의 뱃길이 끊기는가 하면, 곳곳의 제언(堤堰)에도 저수(貯水)된 곳이 하나도 없었으며, 삼동(三冬)이 이미 다한 때에 얼음도 얼지 않고 눈도 오지 않았는데, 감사 이상진(李尙眞)이 순력(巡歷)하다가 이같은 사실을 목격하고 보고하였다.
12월 30일 계해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이경휘(李慶徽)를 대사간으로, 오두인(吳斗寅)을 집의로, 장선징(張善瀓)을 장령으로, 민정중(閔鼎重)을 겸 대사성으로, 오시수(吳始壽)를 이조 좌랑으로, 유혁연(柳赫然)을 좌윤으로, 유계(兪棨)를 우윤으로, 박세당(朴世堂)을 지평으로, 홍주삼(洪柱三)을 수찬으로, 이합(李柙)을 장령으로, 홍중보(洪重普)를 지의금으로, 이지무(李枝茂)를 헌납으로, 목내선(睦來善)을 제용감 정으로 삼았다.
사신은 논한다. 목내선이 청도(淸道)에 좌천된 뒤로 청로(淸路)에 길이 막혔는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목내선이 사필(史筆)을 잡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을 잘못 폄하(貶下)하였는데, 그뒤 《실록(實錄)》을 찬수(撰修)하던 날 그 글이 드러나 보는 자들 대부분이 그를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이것 때문에 시인(時人)에게 죄를 얻은 것이다.’ 하였다. 이에 대해 의논하는 자들이 말하기를 ‘예전부터 사필을 잡은 자 중에 평가하는 말을 잘못 쓴 사람이 없지 않은데, 그럼에도 사람들이 감히 그를 죄주지 못한 것은 사사(史事)야말로 극비(極祕)라서 부자간에도 서로 전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때문에 목내선에게 벌을 준 것은 또한 뒷날의 폐단에 관계되는 일로서 세상이 변했음을 볼 수 있겠다.’고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7책 7권 44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393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역사-편사(編史)
사신은 논한다. 목내선이 청도(淸道)에 좌천된 뒤로 청로(淸路)에 길이 막혔는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목내선이 사필(史筆)을 잡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을 잘못 폄하(貶下)하였는데, 그뒤 《실록(實錄)》을 찬수(撰修)하던 날 그 글이 드러나 보는 자들 대부분이 그를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이것 때문에 시인(時人)에게 죄를 얻은 것이다.’ 하였다. 이에 대해 의논하는 자들이 말하기를 ‘예전부터 사필을 잡은 자 중에 평가하는 말을 잘못 쓴 사람이 없지 않은데, 그럼에도 사람들이 감히 그를 죄주지 못한 것은 사사(史事)야말로 극비(極祕)라서 부자간에도 서로 전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때문에 목내선에게 벌을 준 것은 또한 뒷날의 폐단에 관계되는 일로서 세상이 변했음을 볼 수 있겠다.’고 하였다.
경상도 사인(士人) 서행구(徐行矩) 등이 상소하여, 증(贈) 이조 참판 조호익(曺好益)은 고세(高世)의 학문과 절인(絶人)의 행동과 위태로운 때 임금에게 보답하는 충성심과 도를 밝혀 후세를 인도하는 공이 있다고 극구 말하면서, 증질(增秩)하고 역명(易名)180) 을 내리는 전범(典範)을 베풀어 충의의 기운을 격려케 할 것을 청하였다. 이 일을 예조에 내렸는데, 중대한 관계가 있는 일이라서 섣불리 허락하기는 어려운 점이 있다는 이유로 마침내 시행되지 않았다.
병조 참의 이태연(李泰淵)이 어미의 나이가 81세라는 이유로 상소하여 귀양(歸養)할 것을 청하였는데, 해조가 회계(回啓)하기를,
"법전에서 이야기하는 귀양이라는 것은 대체로 먼 지방 사람이 어버이를 떠나 서울에서 벼슬하는 경우를 가리켜 말하는 것인데, 태연은 집이 서울에 있습니다. 따라서 벼슬하면서 봉양하면 공(公)과 사(私)를 겸행할 수 있으니 체직을 허락해선 안 됩니다."
하니, 상이 따르고, 정원에 하교하기를,
"태연의 소를 보건대 말 뜻이 매우 간절하여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경향(京鄕)의 차이가 있어 준허(准許)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진휼(軫恤)하는 도가 없을 수 없으니, 해조로 하여금 옷감과 먹을 것을 넉넉히 지급해 주도록 하라."
하였다. 호조가 이에 미곡 10석(石), 대두(大豆) 5석, 주(紬) 10필, 목면(木綿) 50필을 지급하였는데, 사람들이 모두 영광으로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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