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일 갑자
헌부가 3궁(宮)의 둔장(屯庄)에 관한 일을 정계(停啓)하였다.
1월 2일 을축
금성(金星)이 낮에 나타났다.
간원이 아뢰기를,
"수진궁(壽進宮)·명례궁(明禮宮)·어의궁(於義宮) 등 3궁의 둔장(屯庄)에 있는 백성들에 대해 모두 다른 궁가의 예에 따라 시행토록 하소서.
평산 부사(平山府使) 김상중(金尙重)은 그 고을에 12세 된 양가(良家)의 딸을 겁간(劫奸)한 죄인이 있었는데도 정에 끌려 옥사(獄事)를 지연시키면서 곧바로 다스리지 않았습니다. 이에 그 딸의 아비가 원통하고 분한 마음을 가누지 못해 호소하자 성을 내며 중하게 장(杖)을 쳐 죽게까지 하였는데 일이 이미 환히 알려진 상황인데도 기필코 엄폐하고자 하여, 한편으로는 장수(葬需)를 지급해 주어 시친(尸親)001) 을 무마하고, 한편으로는 죄인을 박살(撲殺)하여 뒷날 핑계댈 자료를 만들었는가 하면, 또 그의 족속들을 위협하여 진정서를 올리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루 말할 수 없이 자자하게 소문이 전파되었으니, 나문(拿問)하여 정죄(定罪)케 하소서.
전임 황해 감사 강유(姜瑜)는 도주(道主)의 신분으로서 본읍이 이 옥사를 숨겨두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서도 즉시 안문(按問)하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원고(元告)가 원통하게 죽은 뒤에도 법대로 처치하지 않았으니, 직무를 수행하지 못한 죄가 이보다 더 심할 수가 없습니다. 먼저 파직시킨 뒤에 추고하소서."
하였으나, 따르지 않다가 뒤에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우림위장(羽林衞將) 이익달(李益達)이 전일 일을 망친 죄는 왕법(王法)에 비추어 볼 때 용서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나라에 기율(紀律)이 없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으니 종신토록 영원히 폐고(廢錮)된다 하더라도 그에게는 또한 다행이라 할 것인데, 외람스럽게도 사판(仕版)에 끼이게 되었고 심지어는 계의(啓擬)002) 에까지 포함되었습니다. 현재 적당한 장령(將領)이 극히 부족하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이런 사람에게 다시 숙위(宿衞)하는 임무를 맡겨 듣는 이를 놀라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불차 탁용(不次擢用)003) 하는 자를 선발하였는데, 이집(李鏶)·이세선(李世選)·조부(趙裒)·양일한(楊逸漢) 등이 참여되었다. 장령(將領)에 적합한 자를 선발하였는데, 유병연(柳炳然)·성진문(成震炆)·홍중형(洪重亨)·신명전(申命全)·한여윤(韓汝尹)·유동발(柳東發)·신한주(申翰周)·강열(姜說)·민섬(閔暹)·한석(韓)·김세기(金世器)·권도경(權道經) 등이 참여되었다. 불차 탁용자의 선발은 변방의 근심이 있지 않는 한 섣불리 거행하지 않는 법이기 때문에 조종조 이래 매우 드물게 선발했던 것인데, 이때 변경에 경보가 있지도 않은 상황에서 묘당이 계청하여 선발한 것이다. 또 장령을 가지고 따로 명목을 세워 뽑았는데 용잡한 자들이 더욱 많았으므로 식자들이 비난하였다.
1월 3일 병인
지평 박세당(朴世堂)이 인피하기를,
"신이 전에 간직(諫職)에 몸담고 있을 때 김만기(金萬基)가 허적(許積)을 논하려 했는데 그때 신도 실제로 동참하였습니다. 만기는 그 일 때문에 뒤미처 탄론(彈論)을 받고 아직까지 죄적(罪籍)에 있는데, 신이 그 일에 동참한 사람으로서 홀로 동당벌이(同黨伐異)한 죄를 면하고 있습니다. 어찌 감히 구차하게 면하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겨 대헌(臺憲)의 직을 거듭 더럽히겠습니까. 전파(鐫罷)를 명해 주소서."
하고, 이어 물러가 물론(物論)을 기다렸다.
상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상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신원(新元)004) 의 절기를 맞아 양기(陽氣)가 처음 발생하니 이때야말로 전하께서 감발(感發)하실 기회입니다. 인군(人君)의 도는 하늘을 몸받는 것이 귀중하니, 전하께서는 봄철 화기에 만물이 발육하는 때를 맞아 하늘의 일을 사람이 대신 한다는 가르침을 염두에 두시어 날로 덕을 새롭게 하시고 감히 태만한 행동을 행여라도 하지 마소서."
하니, 우상 홍명하(洪命夏)가 아뢰기를,
"영상의 말이 옳으니, 전하께서 명심하셔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원두표(元斗杓)가 아뢰기를,
"갑신년005) 에 심적(沈賊)006) 이 역모를 꾀해 상황이 위태롭기가 머리칼 하나 들어갈 틈이 없을 정도였는데, 황헌(黃瀗)과 이원로(李元老)가 상변(上變)한 덕택으로 죄인을 복주(伏誅)시키고 종사(宗社)를 안정케 하였으니, 황헌 등의 사람됨이 비록 보잘것이 없다 하더라도 그 공만큼은 폐할 수 없습니다. 인조 대왕(仁祖大王)께서도 당시에 특별히 병조 참의를 제수하셨으니, 얼마나 우대했는지를 또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뒤에 장오죄(贓汚罪)에 걸려 몇 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다가 지금은 석방되어 서울에 돌아와 있는데, 공신에게는 그 녹(祿)을 잃지 않게 하는 것이 예로부터 내려오는 도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수용(收用)할 것까지는 없고 만약 도로 훈봉(勳封)을 주어 녹을 먹을 수 있게만 해 준다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황헌이 통제사로 장오죄에 걸려 수금(囚禁)되어 있을 때 선조(先朝)의 특별한 분부에 따라 정배(定配)되었다가 그 뒤 양이(量移)되었었다. 지금은 이미 석방 되었는데 현재 어떤 죄적(罪籍)에 있는가?"
하자, 태화가 아뢰기를,
"현재 방면을 받은 중에 있으니 곧 고신(告身)을 빼앗긴 상태에 있다 하겠습니다. 신이 일찍이 듣건대 친공신(親功臣)007) 이 일단 직첩(職牒)을 제수받았으면 충훈부에서 군직(軍職)에 부쳐 녹을 지급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직첩을 도로 주도록 하라."
하였다. 교리 여성제(呂聖齊)가 아뢰기를,
"황헌이 지금까지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것도 그 공 때문입니다. 지금 만약 직첩을 도로 내주어 봉록을 받아먹게 한다면 국법은 어떻게 할 것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녹을 지급하는 것은 수용(收用)하는 것과는 다르다."
하였다. 호조 판서 정치화(鄭致和)가 아뢰기를,
"함릉군(咸陵君) 이해(李澥)는 나이가 이미 70이 되어 늙고 병들었다는 이유로 치사(致仕)를 청하였는데, 비록 허락을 받지는 못했지만 일단 직책을 수행하고 있지 않은 이상 녹봉을 받는 것은 의리가 없는 짓이라고 하여 누차 등급에 따른 녹봉을 모두 받지 않고 있습니다. 1품(品)의 훈신(勳臣)에게 상록(常祿)을 받아먹지 못하게 하는 것은 공신을 대우하는 도리가 결코 못되겠기에 신이 일찍이 탑전(榻前)에서 진달드려 특명에 따라 한번 수송했습니다만, 그 뒤로 또 받지 않고 있습니다. 사체가 대신과 달라 해조에서 감히 매번 입계(人啓)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별도로 내려주는 은전(恩典)이 있어야 마땅할 듯합니다."
하고, 판윤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신이 이해가 치사를 청하던 날에 그의 소원을 들어 주고 봉조하(奉朝賀)008) 하게 하자고 청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그의 소원을 들어주면 청렴한 생활 태도를 계속 견지하게 해 줄 수 있고 봉조하를 하게 하면 자연히 상록(常祿)이 있게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고, 두표가 아뢰기를,
"이해가 스스로 이와 같이 처신하고 있다 하더라도, 정사 공신(靖社功臣) 50여명 중에 지금 남아 있는 자는 단지 4인뿐이니 우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먹을 것을 제급(題給)해 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매년 봄과 가을에 먹을 것을 지급토록 명하였다. 호조가 이에 따라 쌀 10석(石)과 콩 5석을 지급하고, 매년 이를 정식(定式)으로 삼았다.
지평 홍만용(洪萬容), 정언 맹주서(孟胄瑞), 헌납 이지무(李枝茂)가 연신(筵臣)의 배척을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1월 4일 정묘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장령 장선징도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부교리 여성제(呂聖齊) 등이 양사(兩司)를 처치하여 박세당·장선징은 출사시키고 홍만용·맹주서·이지무는 체차시키기를 청하니, 따랐다.
1월 5일 무진
조참(朝叅)을 행하였다. 상이 오래도록 건강이 좋지 못한 상태에 있다가 이때에 이르러 시조(視朝)하자 중외(中外)가 모두 기뻐하고 좋아하였다.
대사간 이경휘(李慶徽)가 소명(召命)에 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는데, 옥당이 처치하여 체차시키기를 청하니, 따랐다.
영중추부사 이경석(李景奭)이 상소하여 갖추 진술하기를,
"3조(朝)에 걸쳐 분에 넘치게 이미 은혜를 받았으니 포의(布衣)로서 극치에 이르렀다 하겠는데 다시 더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게다가 큰 병을 앓고 난 뒤끝에 갑자기 혼미함이 더욱 심해져 정신이 하나도 없고 근력도 이미 다했으니, 벼슬을 그만두게 하여 여생을 마치게 해 주소서."
하니, 상이 너그럽게 비답하였다. 경석이 다시 소를 올려 물러나가기를 청했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선혜청이 탑전(榻前)에서 품정(稟定)한 데 따라 호남의 산군(山郡)에 작목(作木)할 미곡을 1두씩 더 주는 것으로 규식을 삼자고 청하니, 따랐다.
3궁(宮)의 둔장(屯庄)에 있는 백성들에게 일체 다른 궁가의 예에 따라 똑같이 시행할 일로 양사가 한 달이 지나도록 강력히 쟁집하였으나 상이 끝내 들어주지 않자 이때에 이르러 정계(停啓)하였다.
1월 7일 경오
정언 윤우정(尹遇丁)이 체차되었다. 우정이 3궁의 둔장에 관한 일을 정계하자 물의가 ‘중하게 일어난 논을 독자적으로 정계하다니, 이는 대례(臺例)에도 위배될 뿐더러 뒷날의 폐단과도 관계가 있다.’고 하였는데, 우정이 이 때문에 인피하여 체차된 것이다.
1월 8일 신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헌부가 아뢰기를,
"종실(宗室)은 외방에 거주하지 못하게 한 국법이 지엄한데, 근래 외방에 거주하는 종실이 무척 많으니, 그것만도 한심하기 짝이 없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일찍이 인조조(仁祖朝)에 유사(有司)에게 신칙하여 모두 조정에 돌아오게 했었는데도 그뒤에 그대로 답습하면서 전리(田里)에 편안히 누워 태연하게 녹봉을 받는가 하면, 거동하심에 따라 문안할 일이 생길 때면 해리(該吏)에게 뇌물을 보내 요행히 무사하게 되기를 꾀하고 있으니, 법례(法例)에 비추어 볼 때 어찌 이렇게 해야 되겠습니까. 종부시로 하여금 일일이 초출(抄出)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관학 유생(館學儒生)의 인일(人日)009) 과제(課製)를 일이 있어 이날로 물려 거행하였다. ‘바르면 제 자리로 돌아온다.[貞則復元]’는 제목으로 부(賦)를 시험하였는데, 진사 민시중(閔蓍重)과 생원 김정태(金鼎台)가 모두 삼중(三中)으로 직부 회시(直赴會試)할 자격을 얻었다.
1월 9일 임신
금성(金星)이 낮에 나타났다.
도목 대정(都目大政)이 있었다. 허적(許積)을 내의원 제조로, 이일상(李一相)을 대사헌으로, 이두진(李斗鎭)을 충청 병사로, 이단상(李端相)을 사간으로, 강호(姜鎬)를 장령으로, 이경과(李慶果)를 지평으로, 조세환(趙世煥)을 정언으로, 민유중(閔維重)을 부응교로, 이경억(李慶億)을 부제학으로, 유계(兪棨)를 이조 참판으로, 홍처량(洪處亮)을 대사간으로, 홍주삼(洪柱三)을 헌납으로, 정재숭(鄭載嵩)을 정언으로 삼았다.
금성현(錦城縣)을 나주목(羅州牧)으로 승격시키고 목천현(木川縣)을 다시 설치하였다.
부호군 조경(趙絅)이 상소하기를,
"신축년에 한 마디 말씀을 올렸다가 죄를 얻었습니다만010) 이는 대체로 변변치 못한 의견이나마 정성껏 바치려는 뜻에서였지 다른 의도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음 속에 늘 담고 있는 충성심을 끝내 제대로 펼쳐내지 못한 채 세상의 표적이 되고 말았는데, 이는 실로 늙고 망령된 나머지 나온 발언이었던 만큼 비록 삼위(三危)011) 에 귀양갔다 하더라도 신이 어떻게 감히 원망을 했겠습니까. 그런데 다행히도 전하의 호생지덕(好生之德)에 힘입어 거의 다 죽어 가는 어리석은 신하를 기보(圻輔)에서 전대로 눌러살게 해주시어 나이 90이 된 노모에게 변변찮은 음식이나마 아침 저녁으로 보살펴드리게 하였으니, 하늘과 같은 성은에 대해서는 신의 몸이 부서져 가루가 되어도 제대로 보답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서명(叙命)을 내리기까지 하셨으니, 아무리 일월(日月)의 비췸에 사사로움이 없고 봄 우레가 칩거하던 생물을 깨움에 미미한 곤충도 제외시키지 않는다 하더라도 국법이 너무 느슨하게 되고 유사가 의혹할까 삼가 두렵기만 합니다."
하니, 상이 몸을 조리하고 올라오라고 답하였다.
조경이 경인년012) 이후로 시골에 물러가 있었지만 조야(朝野)에서 그를 중하게 의지하고 있었는데, 신축년에 한번 소를 올리면서 시의(時議)에 중하게 거스름을 받아 그의 아들 조위봉(趙威鳳)과 함께 폐고(廢錮)되고 말았으므로 사류(士類)가 매우 애석하게 여겼었다. 그러다가 이때에 이르러 서명(叙命)이 있게 되었으므로 이렇게 상소한 것이다.
충청 감사 이홍연(李弘淵)이 아산(牙山)의 포구를 굴착한 일로 대간의 탄핵을 중하게 받자 상소하여 사직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이 보잘것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호오(好惡)하는 천성만큼은 여느 사람과 다를 것이 없는데, 처음에 어찌 살피지 않고 경솔하게 허락하였을 리가 있겠으며 나중에 어찌 덮어둔 채 물어보지 않았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가령 신이 앞으로 쟁단(爭端)이 있어 결국 사람들의 말을 야기시킬 줄 알고서 굳게 마음을 정하고 허락해주지 않았던들 필시 오늘날과 같은 일은 없었을텐데, 그저 이익은 많고 해는 적다는 것 때문에 백성을 편하게 해주는 일이라고 인식한 나머지 경솔하게 굴착하는 것을 허락해 주었으니, 그 죄는 실로 신에게 있습니다. 먼저 신을 삭직(削職)하고 이어 신의 죄를 다스리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라."
하였다.
1월 10일 계유
금성(金星)이 낮에 나타났다.
도목정(都目政)을 이어 행하였다. 유철(兪㯙)을 병조 참판으로, 남구만(南九萬)을 응교로, 오시수(吳始壽)를 이조 정랑으로, 이경휘(李慶徽)를 병조 참지로 삼았다.
경상 감사 이상진(李尙眞)이 아뢰기를,
"남해(南海)와 거제(巨濟)에 죄인을 정배(定配)시키고 있는데, 이런 흉년을 당하여 주객(主客)이 모두 고달프니, 해조로 하여금 현재 정배된 자들의 죄명을 조사하여 참작해서 이배(移配)토록 하소서."
하니, 상이 그 장계를 형조에 내렸다. 형조가 회계(回啓)하기를,
"본도에서 올려보낸 가을 3개월 동안의 도류안(徒流案)을 가져다 조사해 보건대, 두 고을에 정배된 죄인은 오래 전에 주회(走回)013) 해온 당인(唐人)을 제외하고 현재 모두 60인인데, 살옥(殺獄)에 관계된 자도 있고 관물(官物)을 훔친 자도 있고 간사(奸事)나 상송(相訟) 때문에 정배된 자도 있는 등 죄명이 일정치 않습니다. 그런데 당초 절도(絶島)에 정배시킨 것이 의도가 있었던 일이고 보면 이제 와서 육지에 이배한다는 것도 온당치 않을 듯하고, 다른 도에 이송할 경우 소요스럽게 될 폐단이 있을 뿐 아니라 중로(中路)에서 쓰러질 걱정 또한 없지 않습니다. 본도 감사로 하여금 도내의 조금 형편이 나은 읍에 참작해서 이배하게 하되, 그 중에서 그 지역에 정착하여 생활 터전을 삼고서 이배되고 싶어하지 않는 자가 있거든 소원대로 그곳에 그냥 두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경상 감사 이상진(李尙眞)이 양산 군수(梁山郡守) 안명로(安命老)가 지은 《연기신편(演奇新編)》을 바쳤다. 명로는 서생(書生) 출신으로 병사(兵事)에 뜻을 두고는 제가(諸家)의 설을 취집해서 일가(一家)로 통합하여 만든 다음 《연기신편》이라고 명명하였는데 모두 3권이었다. 이때에 이르러 상진이 권하여 간행하게 하고는 한 질(帙)을 바치면서 아뢰기를,
"오늘날 군진(軍陣)에서 통상 쓰는 것은 단지 척계광(戚繼光)의 진법 뿐인데 오위(五衞)의 구제(舊制)보다도 오히려 못하니 병사(兵事)를 담당한 신하에게 하문해 보소서."
하니, 상이 그 의논을 해조에 내렸는데, 해조가 경솔하게 변통할 수 없다고 하여 그 일이 결국 중지되었다.
1월 11일 갑술
금성(金星)이 낮에 나타났다.
행 판중추부사 정유성(鄭維城)이 상장(上章)하여 본직 및 겸대직의 체차를 청하고 녹봉을 반급(頒給)하라는 명을 사양하였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1월 12일 을해
금성이 낮에 나타났다.
헌납 홍주삼(洪柱三) 등이 아뢰기를,
"근래 의관(醫官)들까지 읍재(邑宰)로 뒤섞어 제수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청명한 조정의 일대 폐정(弊政)이라 하겠습니다. 이번에 정후계(鄭後啓)를 처음에 특명으로 남양 부사(南陽府使)에 제수했다가 곧바로 정청(政廳)이 아룀에 따라 파주 목사(坡州牧使)로 바꾸어 제수하였습니다. 주(州)라 하든 부(府)라 하든 그 경중은 실로 같은 것이고 그의 자급(資級)이 걸맞지 않는 것은 이쪽이나 저쪽이나 차이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부사에 합당하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 어떻게 목사로 옮겨 제수할 수 있단 말입니까. 정체(政體)로 헤아려 보건대 훼손되는 점이 큽니다. 그리고 1품(品)의 자급을 수령으로 차임하는 규정이 일찍이 있지 않았는데 격외로 창시하는 것은 실로 뒤 폐단과 관련이 있습니다. 개차(改差)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대사헌 이일상과 장령 장선징이 모두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는데, 그들이 감찰다시(監察茶時)하게 한 것이 온당치 않다고 정원이 품계(稟啓)하였기 때문이었다. 간원이 처치하여 모두 체차시키기를 청하니, 따랐다.
1월 15일 무인
영중추부사 이경석(李景奭)이 또 상소하여 고로(告老)014) 하니, 상이 답하였다.
"내 뜻을 이미 유시하였는데 경이 이렇게까지 사직하다니 정말 경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겠다. 후일 등대(登對)할 때 면유(面諭)하겠다."
1월 16일 기묘
금성(金星)이 낮에 나타났다.
정언 정재숭(鄭載嵩)이 아뢰기를,
"나주 목사(羅州牧使) 이하악(李河岳)에게 병조의 회계(回啓)에 따라 가자(加資)하라는 명이 내리기까지 하였습니다. 도신(道臣)이 계문(啓聞)한 것이 비국에서 그의 추고를 청한 다음에 나온 것이라서 물정이 의아하게 생각할 수 밖에 없는데, 설령 그에게 특별히 대비한 면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2품의 직질(職秩)에 올린 경우는 있지 않았습니다. 덕있는 이에게 명하는 품계는 통정(通政)의 품계와 비교할 때 경중에 차별이 있으니 함부로 줄 수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개정하소서."
하였는데, 누차 아뢰어서야 따랐다.
윤문거(尹文擧)를 대사헌으로, 송시철(宋時喆)을 집의로, 이합(李柙)을 장령으로, 조세환(趙世煥)을 지평으로, 오두인(吳斗寅)을 교리로, 오시수(吳始壽)를 수찬으로, 맹주서(孟胄瑞)를 정언으로 삼았다.
함릉군 이해가 식품을 특별히 하사한 데 대해 상소하기를,
"신은 늙고 병들어 거의 죽게 되었기 때문에 문안하고 조하(朝賀)하는 반열에 스스로 끼이지 못한 지 지금 벌써 5년이나 되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성자(聖慈)께서 쓸모없게 된 신에게 특별히 관심을 쏟아주시어 식품을 하사하고 은혜롭게 길러주며 총애해 주셨으니, 이는 실로 전대(前代)에나 보기 드물게 있었던 일일뿐 근세(近世)에는 전혀 없었던 일이라 하겠습니다. 이와 함께 삼가 생각건대 신이 연전에 소장을 올려 쉬게 해주기를 청했지만 미천한 정성이 전하를 감동시키지 못해 어여삐 살펴주시는 은혜를 받지 못했었는데 그때 동시에 상록(常祿)을 반급(頒給)해 주는 것도 사양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오늘날에 와서 또 성주(聖主)의 특별한 대우를 받게 되었고 보면 은혜가 잘못되었다는 비난을 면할 수 없음은 물론, 총애를 굳히려 했다는 죄를 얻기에 안성맞춤이라 할 것입니다. 이에 신은 두렵고 부끄럽기만 할 뿐 어떻게 마음을 가져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뜻이 우연한 것이 아니니, 경은 안심하고 받도록 하라."
하였다.
균전청(均田廳)을 폐지했다. 좌·우도의 한전(旱田)015) 과 수전(水田)016) 의 원결(元結) 9만 8천 4백 56결(結) 36부(負) 4속(束) 중에서 여러 탈이 있는 것을 제외한 실결(實結)은 6만 1천 4백 52결 10부 4속이었다. 지난해 가을에 양전(量田)을 끝냈는데 문서를 수정하는 관계로 이때에 이르러서야 폐지한 것이다.
1월 17일 경진
간원이 이익달(李益達)의 일을 논하면서 누차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자 이때에 이르러 정계(停啓)하였다.
장령 이합과 지평 조세환이 아뢰기를,
"황헌은 장오죄(贓汚罪)를 범한 자이니 직첩(職牒)을 도로 내주고 봉록을 다시 받게 해서는 안 됩니다. 명을 환수하소서."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1월 19일 임오
금성(金星)이 낮에 나타났다.
영중추부사 이경석(李景奭)이 또 소장을 올려 치사(致仕)를 청하고 녹봉을 지급하게 한 명을 사양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1월 20일 계미
금성이 낮에 나타났다.
이일상을 공조 판서로, 유철을 도승지로, 이단상을 집의로, 오두인을 사간으로 각각 삼았다.
우찬성 송시열(宋時烈)이 상소하여 사직하면서 아뢰었다.
"신은 근래에 들은 것으로 인하여 말할 수 없이 두려운 마음을 더욱 가지게 되었는데, 이는 사직해야 마땅할 뿐만이 아니라 그야말로 죄를 청해야 할 실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은 불행하게도 난리를 겪던 날 동기(同氣)017) 가 죽음을 당하는 비극을 맞았습니다. 지극히 원통하게 여기는 마음을 갖는 것이야말로 천성에 근거한 것이라 할 것이니 어찌 한 순간인들 이를 잊은 적이 있었겠습니까. 신이 소시에 《예경(禮經)》을 읽어 보건대, 공자(孔子)께서 형제의 원수를 갚는 의리에 대해서 논한 것이 있었는데, 무릇 사람이라면 그 누군들 이런 마음을 가지지 않겠습니까.
신이 몇해 전 조정에 나아갔던 날, 소임이 미관 말직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쪽과 저쪽018) 의 크고 작은 일들을 모두 간여하게 되다 보니 마음이 혼자 속으로 아파오면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감히 예경에 의거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애원하였더니 우리 선왕께서 스스로 사의(私義)를 펴도록 허락해 주셨으므로 신이 편안한 마음으로 일을 볼 수 있었는데, 이에 대해서 신은 늘 자신의 도리를 다하고 남에 대한 도리를 다하는 성인의 도라고 여기면서 삼가 흠앙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듣건대 근일 종신(從臣)019) 이 대략 이와 같은 의리를 내세워 전하에게 간청하자 조정이 그만 정위(廷慰)에게 내리고 결국 파직시켰다고 하는데, 신은 삼가 이를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이 내세운 것이야말로 조손(祖孫)의 큰 윤기(倫紀)로서 주자(朱子)도 이미 ‘복수는 5세(五世)020) 까지는 모두 해야 한다.’고 하였고 보면, 이 어찌 천경(天經) 지의(地義)로서 없앨 수 없는 이치가 아니겠습니까. 이런 의리를 미루어 저들 청나라 사신의 일에 간여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은 본래 인간의 심정상 당연한 일인 데다가 그 사람이 또 아비의 유지(遺志)를 받들었고 보면 죄가 없어야 마땅할 듯한데 오히려 죄를 면하지 못하였습니다. 돌아보건대 신이 망령되게도 그만 감히 전에 마음내키는 대로 앞질러 행동하여 시의(時義)를 범하였으니, 어찌 이미 지나간 일이라고 하여 편안히 조적(朝籍)의 끝에나마 끼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대체로 신의 망령된 생각에는 사람이 사람답게 되고 나라가 나라답게 되는 것은 단지 인륜(人倫)이 있기 때문이니 혹시라도 이를 버리면 인류는 금수(禽獸)의 상태가 되고 중국은 이적(夷狄)으로 전락될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래서 주 부자(朱夫子)도 일찍이 송(宋)나라 유공(劉珙)의 일을 기록하였던 것인데,021)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유공에게 일찍이 조부의 원수를 갚을 일이 있었는데, 그가 진강(鎭江)을 지키고 있을 때에 오랑캐의 사신이 우호 관계로 이르러 큰 깃발을 배 위에 세우자 유공이 노하여 다른 깃발로 바꾸어버렸습니다. 이에 접반사(接伴使)가 크게 두려워하여 매우 급히 찾았는데, 유공은 말하기를 ‘그 깃발을 나의 고을 경내에서 세우려고 한다면 나에게는 죽음이 있을 뿐이다.’고 하고는 그 경내를 벗어나서야 내주었다는 것입니다.
이때의 상황은 송나라 왕실이 결딴난 나머지 고종(高宗)이 오랑캐에게 신하라고 칭할 정도였으니, 두려워하며 굴복한 정상이야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오히려 필부가 스스로 사의(私義)를 펴는 것을 이처럼 용납하였는데, 이와 같았기 때문에 윗사람도 믿고 의지하며 핑계댈 바가 있어 왕업을 계속 유지시킬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형세는 송나라 때와는 또 더욱 다릅니다. 그렇다면 공공연히 말하고 전파하여 이 의리를 밝히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고통을 참고 원망을 품고서 절박한 심정에서 부득이하게 하는 말이라도 있어서 천하의 대방(大防)을 보존해야 마땅할 것이니, 그렇게 할 경우 인심이 완전히 어두워지고 천리(天理)가 모두 없어지는 지경에까지는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힘을 남기지 않고 쏟아 그런 발언은 모조리 족쇄를 채우고 녹여 없애면서 온통 그런 방향으로만 몰고 가니, 그야말로 주 부자가 마음 아파하며 탄식한 바와 같다 하겠습니다. 신은 식견이 어둡고 어리석어 세상과 의견이 맞지 않으니 감히 다시 이 세상에 설 수가 없습니다. 다시 바라건대 성자(聖慈)께서는 아울러 신의 정세를 양찰하시어 속히 요청을 들어주심으로써 꽉 막히고 오활한 지조나마 온전하게 지키도록 해 주소서."
우부승지 김시진(金始振)이 상소하기를,
"신은 배우지도 못하고 식견도 없어 의리에 대해서는 전혀 깜깜합니다. 그러나 익히 보아 오건대, 조가(朝家)에서 지난해에 난리 때 가족이 죽은 집에 대해서는 죽은 자의 아들만 객사(客使)에 대한 예(禮)와 경외(境外)로 내보내는 일에 참여시키지 않았을 뿐, 형제나 조손(祖孫) 관계에 있는 사람에 대해서까지 면제해 주는 예(禮)를 베풀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고, 선조(先朝) 때부터 사개(使价)로 차견(差遣)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역시 감히 사양한 자가 한번도 있지 않았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조손이나 형제는 부자 관계와는 차이가 없을 수 없다. 따라서 사정(私情)상으로도 감쇄(減殺)되는 바가 있을 것이고 공의(公義)는 폐하기 어려운 것이니, 조정이 그들을 대할 때에도 이와 같이 할 수 밖에 없고 신하가 자처(自處)하는 것도 이와 같이 할 수 밖에는 없다.’고 여겨졌고, 선조 때 사의(私義)를 펴도록 허락하면서 저쪽 청나라의 일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였다는 일에 대해서는 신이 실로 들어서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지난번 이익(李翊)이 문례관(問禮官)에서 체차되려고 꾀했을 때에도 신이 드러나게 그 불가함을 말한 적이 있었는데, 그뒤 저 김만균(金萬均)이 관소(館所)에 배종(陪從)하는 것을 면케 해주기를 청하였을 때 신이 마침 간직(諫職)에 있었으므로 그 외람스러움을 탄핵하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삼가 우찬성 송시열(宋時烈)의 소를 보건대, 김만균을 금부에 내린 잘못을 극구 말하면서 심지어는 인륜을 버리고 금수(禽獸)의 상태로 전락했다고까지 말했으니, 신은 이에 나름대로 두려움과 놀라움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만균을 정위(廷慰)에게 내려 심문하게 한 것은, 실제로 그가 궐직(闕直)한 것에 대해 정원이 재차 추고하기를 청한 것에서 말미암은 것이지 대계(臺啓)로 그의 죄를 청한 탓이 아닙니다마는, 신이 그때 논하면서 일단 만균의 소를 타당하지 못한 것이라고 하였고 보면 신이야말로 시열이 말한 ‘천하의 대방(大防)을 없애버려 인심이 어두워지게 하고 천리(天理)가 사라지게 하였다.’는 죄의 으뜸가는 자라 할 것입니다. 삼가 성명(聖明)께서는 신의 직명을 깎고 신의 죄상을 다스리시어 말세에 이륜(彛倫)을 붙잡아 세울 수 있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라."
하였다. 이 뒤에 이경억(李慶億)이 좌부승지가 되어 역시 상소하기를,
"신이 전에 본직에 몸담고 있을 때 수찬 김만균이 연일 궐직(闕直)했기 때문에 관례대로 추고를 청하였는데 이어 금부에 내려 다스리라는 명이 계셨으니, 만균이 사의(私義)를 펴려고 한 것을 죄로 삼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번에 우찬성 송시열이 상소한 사연을 보건대, 만균을 금부에 내린 것은 오로지 소장을 진달한 자에 관계되었기 때문인 것처럼 말하면서 그만 천하의 의리를 없애고 있다고 걱정하였습니다. 혼매하고 망령된 신의 죄를 스스로 풀 길이 없으니, 신을 체직시키시어 공의(公議)에 사과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광주(廣州) 저자도(楮子島)의 사노(私奴) 선(先)이 동네 사람 세현(世玄)과 힘 겨루기를 하다가 이기지 못하자 성을 내어 세현을 찔러 죽였는데, 동네 사람이 그를 결박하니 세현의 처 임생(任生)이 남편이 비명에 죽은 것을 원통하게 여겨 즉시 칼을 잡고 선을 찔러 죽여 복수하였다. 형조가 아뢰기를,
"처가 남편을 위해 복수했을 때 적용할 만한 율(律)이 없는데 정표(旌表)할 만한 열녀(烈女)이니만큼 복주(伏誅)되어야 할 죄도 덮어 주기에 충분하다 하겠습니다. 율에 ‘조부모나 부모가 남에게 살해되었을 때 흉악한 행위를 한 자를 자손이 멋대로 죽인 경우에는 장 육십(杖六十)이고 현장에서 즉시 죽인 경우에는 논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부처(夫妻)는 삼강(三綱)의 하나인 만큼 자손이 조부모나 부모를 위해 복수한 경우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고, 마침내 장 육십으로 주당(奏當)022)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일단 현장에서 죽인 이상 장 육십의 율을 적용하는 것은 타당치 못할 듯하다. 논하지 말라."
하였다.
충청도에 여역(癘疫)이 크게 번져 사망자가 많이 발생했다.
1월 25일 무자
남용익(南龍翼)을 병조 참판으로, 오정위(吳挺緯)를 도승지로, 임유후(任有後)를 동부승지로, 장선징(張善瀓)을 장령으로, 박세당(朴世堂)을 지평으로 삼았다.
강계(江界) 만포진(滿浦鎭)의 간민(奸民)이 수항정(受降亭)에 봉안된 전패(殿牌)를 몰래 훔쳐 깨뜨렸는데, 본진의 병방 군관(兵房軍官) 및 색리(色吏)만 다스리게 하고 첨사에게는 책임을 묻지 말게 하였다.
1월 27일 경인
새벽에 달이 태백성을 범했다.
1월 29일 임진
사간 오두인(吳斗寅)이 아뢰기를,
"신들이 오늘 제좌(齊坐)하여 서경(署經)할 때에 이조에서 보내 온 별천(別薦) 명단을 가져다 보건대, 동지(同知) 유여량(柳汝𣛀)이 천거한 유학(幼學) 심지영(沈之瀛)은 바로 행 사직(行司直) 심지명(沈之溟)의 아우였고, 심지명이 천거한 유학 유여재(柳汝梓)는 바로 유여량의 아우였습니다. 이번에 별천하게 된 의도가 범연한 것이 아닌데, 그만 감히 서로 손만 바꿔 상대편 아우를 써서 올렸으니, 사정(私情)을 따르고 법을 무시한 그 정상이 참으로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모두 파직시킨 뒤 서용(敍用)하지 말고 그들이 천거된 단자(單子)는 해조로 하여금 뽑아버리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태연(李泰淵)을 우부승지로, 유정(兪椗)을 전라 병사로, 이도빈(李道彬)을 전라 좌수사로 삼았다.
충청 감사 이홍연(李弘淵)이 장계를 올려 통정(通政)의 체문(帖文)023) 을 발급해서 곡식을 모집해 기민(飢民)을 진휼하게 해 줄 것을 청하니, 허락하였다.
함경 감사 서필원(徐必遠)이 치계(馳啓)하여 ‘목면(木綿)의 종자를 얻은 뒤 백성에게 씨뿌리고 심는 법을 가르치고 공들여 가꾸도록 권장하겠다.’고 청하니, 조정이 평안 감사로 하여금 수십 석을 모아 들여 양덕현 접경에 쌓아두고, 함경도로 하여 거두어 가게 하였다. 대체로 함경도는 일찍 서리가 내리고 기후가 춥지만, 남도(南道)에서는 그래도 목면을 재배할 수가 있는데 재배하는 자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필원이 이렇게 청한 것이다.
1월 30일 계사
금성(金星)이 낮에 나타났다.
지평 박세당은 소명(召命)에 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장령 장선징은 혼자 마음대로 고향에 내려갔다는 이유로 모두 인피하였는데, 체직되었다.
대사간 홍처량(洪處亮)이 재차 상장(上章)하여 병이 있다고 진달해서 체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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