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8권, 현종 5년 1664년 2월

싸라리리 2025. 12. 10. 14:50
반응형

2월 1일 갑오

정언 정재숭(鄭載嵩), 사간 오두인(吳斗寅), 정언 맹주서(孟胄瑞)가 계사(啓辭)에 글자를 정확하게 쓰지 않아 혼동과 착오가 있게 만들었다는 잘못으로 하여 모두 인피하니, 체직하였다.

 

2월 2일 을미

금성(金星)이 낮에 나타났다.

 

원두표(元斗杓)를 내의원 도제조로, 이경억(李慶億)을 부제학으로, 김시진(金始振)을 좌부승지로, 송시철(宋時喆)을 사간으로, 윤원거(尹元擧)를 장령으로, 정재숭을 지평으로, 송창(宋昌)·윤형성(尹衡聖)을 정언으로, 오두인을 수찬으로, 홍순민(洪舜民)을 황해 병사로, 전동흘(全東屹)을 전라 우수사로, 이경휘(李慶徽)를 대사간으로 각각 삼았는데 경휘는 세수천(歲首薦)에서 빠졌다 하여 인피하니, 체직하였다.

 

2월 3일 병신

금성이 낮에 나타났다.

 

함경 감사 서필원(徐必遠)이 상소하기를,
"신이 듣건대 우찬성 송시열의 사직소에 전 수찬 김만균(金萬均) 문제가 거론 되었는데 그가 죄를 입고 의금부에 하옥된 것이 모두 사의(私義)를 내세워 소를 올렸기 때문이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전해진 말이 사실과 달라 위로 조정에 없었던 잘못을 드러내고 아래로 유현(儒賢)의 지극히 공정한 귀를 의혹되게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신으로서는 그 문제에 있어 너무나 개탄스럽습니다. 신이 지난날 정원의 지위에 있을 때, 만균이 소를 올린 것은 불가한 일이라고 강력히 배척하고 심지어 그 소를 도로 내줄 것을 아뢰었던 자가 바로 신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만약 그 일이 오늘부터서는 과연 이적(夷狄)으로 빠져들어가고 금수(禽獸)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일이 된다면 수악(首惡)에 해당하는 죄를 받을 사람이 신인데 신이 어떻게 감히 태연하게 의관(衣冠)의 반열에 끼어 있을 수 있으며 또 어떻게 감히 세상에 서서 사람 축에 들겠습니까?
시열은 유림의 영수로서 의리에 훤하여 그가 한 말이라면 아마 틀림없이 근거가 있겠으나, 그러나 생각하면 신이 취한 망녕스러운 짓 역시 할 말은 있는 것입니다. 이왕이면 조금 더 피력하여 신의 죄를 더 중하게 만들까 합니다. 신은 듣건대 맹자가 말하기를 ‘안에서는 부자, 밖에서는 군신이 사람에 있어 대륜(大倫)이다.’ 하였고, 또 삼강 항목에서는 임금과 아버지가 같은 서열이고 그외에는 거기에 끼어들지 못한다고 들었으며 또 임금과 어버이는 똑같다는 말이 고훈(古訓)에 나와 있다고도 들었습니다. 그렇게 미루어본다면 군신·부자와 조손(祖孫)·곤제(昆弟)가 어찌 경중과 선후의 차이가 없겠습니까. 그리고 복제(服制)로 말하더라도 1년과 3년의 차이가 있으니 그렇다면 그 사이에는 천리나 인정으로 보아 같지 않음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왜 유독 원수를 보복하는 경우에 있어서만은 전혀 구별이 없이 똑같이 할 것입니까?
지금 부모의 원수를 두고 임금에게 고하기를 ‘나와 저와는 어버이 원수 사이이기에 내 차마 저 자의 일에 간여할 수 없고 차마 저 자를 맞이할 수도 없습니다.’ 한다면 인정으로 보아서나 의리로 보아서나 당연한 일이 되겠지만 만약 어버이 이하로 군부와는 같은 서열에 둘 수 없는 사이라면 비록 그를 위해 보복해야 할 원수가 있더라도 그 슬픔과 아픔을 마음에 되새기며 죽도록까지 잊지 않으면 그뿐인 것이고 만약에 꼭 자기 뜻대로 하고 싶다면 그는 그대로의 방법이 따로 있어야지 어떻게 원수마다 다 갚기를 청하고 낱낱이 억울함을 다 풀 것입니까? 지금 신의 주된 뜻은 조정에 있는 신료들이 경중을 저울질하고 선후를 참작하여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대의만 더럽히지 말았으면 하는 생각뿐인데 그것이 과연 이적으로 빠져들어가고 금수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지름길이 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신이 그날 계청할 때도 동료들에게 말하기를 ‘김 아무 상소문을 어찌하여 받아들였는가? 만약 이 소문에 대하여 예를 따라 비답이 내려진다면 대신으로는 홍명하, 중신으로는 허적·이일상(李一相) 등 여러 사람과 그 밑으로도 그러한 참화를 당했던 자들이 앞으로 틀림없이 상소문을 들고 몰려올 것인데 받아들이자니 안 될 일이고 받지 말자니 공평을 잃은 일이니, 김 아무 상소문을 도로 내 주도록 아뢰지 않으면 안 되겠다.’ 하였더니 동료들 모두가 신의 말이 옳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지금 큰 죄에 빠져들었으니 신이 비록 말을 삼가고 싶지만 어쩔 수가 없습니다.
아, 저 세 신하들024)  도 다 형제가 화를 당한 원수가 되고 있지만 평상시나 난리 때나 한 마음 한 뜻으로 감히 청을 못하고 있는 것은 경중을 저울질하여 공을 우선하고 사는 뒤로 하자는 뜻이지, 그들이라고 어찌 모두 작록에만 마음이 있어 염치 불고하고 형제의 우애가 만균만 못해서 그러는 것이겠습니까? 지금 나라 일은 점점 어려워져가고 인재는 적어 비록 모두가 마음과 힘을 합해 밤낮으로 쉴새없이 뛰더라도 잘 안 될 염려가 있는데 산림(山林)의 숙덕(宿德)이라는 사람이 느닷없이 그러한 말을 하였으니 그의 말이 만약 시행이 될 경우 의리는 더욱 밝아질지라도 나라에는 더욱 인재가 없어지지 않을까 신으로서는 염려인 것입니다.
만약 오늘 조정의 신료들이 모두 난리 때 나라 위해 죽은 이들의 손자요 증손자라면 평상시 아무 일이 없을 때는 녹을 먹으며 의기 양양하다가 저들 사신이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모두 다 도망가버리고 그 수많은 일 처리를 지존 혼자서 다 하게 할 것입니까? 그래서 신은 그것이 결코 불가한 일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신이 천성이 어리석고 미치광스러워 이렇게 유현(儒賢)도 엿보지 못한 의리를 만들어냈으니, 신의 죄 이에 이르러 더욱 무겁게 되었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신의 직명을 삭제하시고 신의 죄명을 논의하셔서 시비를 바로잡으시고 의리를 밝히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혐의롭게 여길 것 없으니 마음 편히 직을 살피라."
하였다.

 

전설사 별검(典設司別檢) 송규광(宋奎光)이 본사에 입직하고 있을 때 하인들이 바쁘게 돌아다녀 그 까닭을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해마다 봄·가을이면 삼전(三殿)이 으레 경(經)을 외우고 복을 비는 일을 하는데 차장(遮帳)은 사약방(司鑰房)이 올리고 배설(排設)은 본사의 하인들이 하여왔습니다. 오늘밤 궐내에서 경 외우는 일을 할 것이기 때문에 하인배들이 배설을 끝마치고 오는 길입니다."
하였다. 이에 규광이 상소하기를,
"경을 외우고 복을 비는 일을 시골 마을 사대부 집에서는 간혹 하지만 그것도 식자라면 부끄럽게 여기는데 하물며 사방의 표준이요 본보기가 되는 궁금(宮禁) 지엄한 곳에서 어찌 그렇게 허황되고 터무니없는 일을 할 것입니까? 엎드려 생각건대 성상께서는 학문이 고명하셔서 천인(天人)의 이치에 있어 이미 다 통촉하고 계실 것이므로 그렇게 허황된 일에 대하여는 이 한 두 마디 말이 아니더라도 성상의 지감으로 이미 훤히 알고 계실 것이지만, 궁액(宮掖) 내에서 그러한 일이 있게 되면 원근에서 들을 때 어찌 놀라고 의혹하지 않겠습니까?
옛 사람이 말하기를 ‘나라가 일어나려면 백성들 말을 잘 듣고 나라가 망하려면 귀신 말을 잘 듣는다.’ 하였듯이 지금 경을 외우는 그 일은 바로 귀신의 말을 듣는 것으로 성상이 위에 계시면서 그러한 일이 있으리라고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신이 본직에 있는 몸으로 그렇게 배설하는 일이 있었는데도 그것을 미리 알아서 못하도록 간하지 못했으니, 이는 신이 하는 일 없이 자리만 지키고 앉아 나라를 저버린 죄를 지은 것입니다. 바라건대 성상께서 신이 직책 수행을 제대로 못한 죄를 다스리시고 그 허황된 습속을 고치신다면 신이 비록 죄에 죽더라도 영광으로 여기겠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충성을 다하는 그대 정성에 대하여 내 가상히 여기는 바이다."
하였다.

 

북로(北路)가 너무 멀어 왕화(王化)가 미치지 못하므로 사간 민유중(閔維重)이 근신(近臣)을 보내 민정을 탐문하고 이어 과거를 실시하여 그 쪽 사람들 마음을 위로할 것을 아뢰어 청했는데, 이에 대하여 묘당이 아뢰기를,
"현재는 기민 정책을 논의해야 할 봄철이어서 과거 실시는 제때가 아니니 가을철에 가서 승지나 혹은 어사를 별도로 보내 실시했으면 합니다. 그러나 거자(擧子)들 도목(都目)에 대하여는 기간 전에 정돈해두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니 시취(試取) 규정을 별단(別單)에다 써넣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2월 6일 기해

허적(許積)을 우참찬으로, 윤순지(尹順之)를 판윤으로, 송준길(宋浚吉)을 대사헌으로, 남용익(南龍翼)을 대사간으로, 유철(兪㯙)을 병조 참판으로, 윤문거(尹文擧)를 이조 참판으로, 이경휘(李慶徽)를 승지로, 오두인(吳斗寅)을 집의로, 정부현(鄭傅賢)을 통제사로 각각 삼았다.

 

2월 7일 경자

금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 재신들을 인견하였는데 영부사 이경석(李景奭), 판부사 정유성(鄭維城)도 명을 받고 입시하였다. 영상 정태화가 경상도 속오군에 대한 급보(給保) 건으로 아뢰기를,
"그것이 다른 도에는 없는 일인데 권우(權堣)가 감사(監司)로 있을 때 아뢰어 청했던 것으로 당초 설립 시기에는 시험삼아 해본 것이라고 하겠으나 지금은 만약 주지 않으면 군대들이 틀림없이 쓸쓸한 심정을 가질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상도는 다 급보를 하고 있는가?"
하자, 좌상 원두표가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이른바 보인(保人)이라는 것은 자기 형제 아니면 겨레붙이인데 지금 만약 그것을 일체 혁파한다면 군사들이 매우 서운한 심정일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그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태화가 또 함경 감사 서필원(徐必遠)의 장계에 의하여, 부방군(赴防軍)을 입방(入防)하지 말도록 할 것을 아뢰자, 상이 이르기를,
"장계의 본뜻은 그들을 덜어내어 성을 쌓으려는 것인데 회계에서는 그들로 하여금 영원히 입방을 하지 말게 하자는 것인가?"
하자, 태화가 아뢰기를,
"입방한 군대들이 대부분 병사(兵使)로부터 혹사당하여 나무를 하고 소금을 굽느라 괴로움을 견뎌내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회계한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혹사를 못하게 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호조가 아뢴 여러 궁가의 해양(海洋)을 떼어받은 단자(單子)에 대하여는 비국에 계하하셨습니다."
하고, 이어 그 단자를 들고 지적하면서 아뢰기를,
"공주(公主)·옹주(翁主)로 부처(夫妻)가 다 죽은 자에 대하여는 이미 규정을 정한 하교가 있었으나 명례궁(明禮宮) 등 세 궁가가 떼어받은 것 역시 똑같이 처리할 것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것은 종전대로 그냥 놓아두라."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의정부에 소속된 것도 그대로 소속시켜두는 것이 좋을 듯싶습니까?"
하자, 두표가 아뢰기를,
"정부에 소속된 것은 세조(世祖) 때 하사한 것인데 지금 만약 혁파한다면 온당치 못한 일이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로 놓아두라."
하였다. 태화가 또 시장(柴場) 건을 아뢰자, 상이 인빈궁(仁嬪宮)이 떼어받은 것은 그대로 두라고 명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여러 궁가가 떼어받은 곳이 비록 각기 따로따로이지만 크기가 일정하지 않으니 해당 아문으로 하여금 그 크기를 조종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태화가 아뢰기를,
"신축년 사기(史記)는 사관(史官) 윤절(尹晢)이 작고하였기 때문에 그때 상번(上番)했던 사관 이광직(李光稷)으로 하여금 수정하게 했는데 지금은 또 광직도 고인이 되었으니 상번한 사관으로서 현직에 있는 자에게 수정의 일을 나누어 맡기고 또 대제학이 그를 주관하게 하여 매 10일씩 일과로 수정하여 빨리 끝내게 하소서."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경석이 늙고 병이 심함을 이유로 치사를 빌었는데 두세 번 간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대사간 남용익이 정후계(鄭後啓) 건에 대하여 아뢰었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용익이 아뢰기를,
"어장(漁場)·시장(柴場) 건은 바로 여러 해를 두고 쟁집해온 일로서 성상께서 하루아침에 흔쾌히 윤종하셨을 때 모든 신민들이 누가 기뻐하지 않았겠습니까. 대체로 그 일에 있어 가까운 데부터 시작한다면 궁가가 당연히 솔선해야 할 것이고 남의 본보기가 되는 곳에서부터 시작하려면 정부가 당연히 솔선해야만 시행이 될 것인데 지금 의정부에 소속된 어장이 두 군데나 그대로 있고 수진궁(壽進宮)에 소속된 어장도 세 군데나 있어, 그렇다가는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리라고 신은 염려하고 있습니다. 이는 계사(啓辭)가 아니라 신이 소회가 있기 때문에 감히 이렇게 아뢰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의정부 어장은 그게 바로 조종조에서 하사하신 것일 뿐만 아니라 삼공(三公)은 궁가와는 또 다른데 왜 꼭 다 혁파해야 할 것인가?"
하였다. 집의 오두인이 황헌(黃瀗) 건에 대하여 아뢰었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지난번 종묘 춘향 대제(春享大祭) 때 집례(執禮) 김익렴(金益廉)이 향소(享所)에까지 나왔다가 그의 지병이 갑자기 더쳐서 부득이 미리 차출하여 두었던 좌통례 이유창(李有淐)으로 하여금 올라가 참례하게 하였던 바 그도 갑자기 범염(犯染)을 하여 감히 들어갈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급기야 헌관(獻官)이 두세 번 캐묻자 그때는 또 대단한 범염은 아니라고 대답했기 때문에 그를 그대로 입참(入參)하여 예를 행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만약 과연 범염한 사실이 있었다면 그 어찌 매우 온당치 못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유창의 앞 뒤 말이 다른 것도 너무 놀랄 일이거니와 헌관이나 감찰이 그대로 입참하도록 한 것도 그 책임을 면키 어렵겠으니 유창을 파직시키고 해당 감찰을 체차할 것이며 헌관은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부제학 이경억이 아뢰기를,
"지난번에는 성상의 체후가 편찮으셔서 오래도록 경연을 열지 못했으나 지금은 이미 여쭈어 보고 의견을 기다리라고 하시고서도 한 번도 경연을 열지 못했기에 감히 이렇게 아뢰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요즘 형편을 보아가며 하려고 한다."
하였다. 경억이 아뢰기를,
"성상 체후가 비록 평안하지 못하더라도 혹 옥당 관원을 불러 그로 하여금 글뜻을 강론하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하자, 경석이 아뢰기를,
"안질이 만약 조금 덜하시면 강관을 자주 대하여 그로 하여금 읽게 하고 들으시는 것도 무방할 것입니다."
하였다. 명하가 아뢰기를,
"지난날 인심이 어수선했던 것도 모두 성상께서 신하들을 인접하지 않으신 데에서 연유한 것이고 식자들 간에도 성상이 나랏일을 포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걱정과 의심을 하기도 하니 어찌 민망스런 일이 아니겠습니까. 지난번 조참(朝叅)을 보신 후로는 도하의 인심이 흉흉하지 않은 것만 보더라도 신하들을 더욱 자주 인접하시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또 인재가 적은 것으로 말하더라도 이조 참판 및 대사헌이 빈번이 자리가 비어 있으니 그렇고서야 나라 일이 되겠습니까?"
하고, 명하가 또 아뢰기를,
"상께서 만약 경연을 여시고 양송(兩宋)을 부르시면 그들이 어찌 오지 않겠습니까."
하니, 경억이 아뢰기를,
"양송이 비록 오지 않더라도 별도의 유지를 내리시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정성과 예도가 쇠하지 않는다면야 왜 오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신하들 생각이 모두 성상께서 오직 자질구레한 일만 하려 드시고 대체(大體)는 힘쓰지 않는다고 하고 있습니다. 신들이 지척에 입시하고 있으면서 어찌 감히 숨김이 있겠습니까. 인재 없는 한탄이 지금 매우 심각합니다. 모름지기 상께서 신하들을 자주 대하시어 그들 현우와 장단을 아셔야만 적재적소에 쓸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두표가 아뢰기를,
"바깥 말들은 모두 성상께서 즉위하신 후로 의관(醫官)은 가자(加資)된 자가 있지만 인재는 발탁하여 쓴 일이 없다고들 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경억이 아뢰기를,
"외간에서 혹 말하기를, 성상께서 지난번 후원(後苑)에 행차하시어 내구(內廐)에 들어가 말 구경을 하시다가 한질(寒疾)에 걸렸다고 하는데, 그러한 사실이 있었으면 고치시고 없었다면 더욱 노력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병이 있어 바깥 나들이를 못하는데 어떻게 말 구경을 했겠는가."
하였다. 경억이 아뢰기를,
"요즘 와서 모든 일들이 해이하지 않은 것이 없고 입계한 공사 역시 체류된 것이 많으며 정청(政廳)의 낙점(落點)이 모두 부표가 되어 내려오고 있는데 그것이 비록 안질 때문이시지만 그러다가 낙점 제도가 영원히 없어지지나 않을까 매우 두렵습니다. 대관(大官) 제수에 있어서는 더더욱 낙점을 않으시면 안 될 것입니다."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그것은 참으로 그렇습니다. 모든 제수에 있어 다 낙점을 할 수는 없을지라도 대신 및 번신(藩臣) 제수와 영장(營將)에게 가자(加資)하는 경우는 꼭 낙점을 하여 뒤 폐단을 예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하였다. 경억이 아뢰기를,
"이하악(李河岳) 가자에 대하여 대간이 이미 개정을 청하였고 또 그가 별도로 준비했다는 것이래야 보잘것 없었기 때문에 비국도 추고를 청했던 것인데, 감사(監司)는 논보(論報)하여 그로 하여금 상을 받게 하였으니 그 감사도 어찌 죄가 없다 하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경기 감사 이행진(李行進)이 이미 늙은 나이에다 정령(政令)이며 하는 짓이 전도된 게 많습니다. 지금 본도에다 대동법을 새로 실시하려고 하는데도 그것이 무슨 일인지조차 까맣게 모르고 있어 진신(縉紳)들 사이에는 모두가 지탄하고 비웃고 있습니다. 그런데 비국은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니라 하여 그냥 놔둔 채 말하지도 않고 대간도 탄핵을 하지 않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한 일입니다."
하였다. 상이 행진에 대하여 물으니, 태화가 아뢰기를,
"행진이 정령에 있어 전도된 일을 하고 있다고 신은 들은 바 없습니다. 근래에 수령들을 파직 출척한 일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혹자는 풍력(風力)이 있다고 하고 있습니다."
하고, 두표는 아뢰기를,
"행진이 나이는 늙었습니다. 그러나 양호(兩湖)의 감사에 대해서는 그들이 속여서 보고한 것이 죄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뒤 폐단을 핑계로 탄핵을 않고 있으면서 유독 행진에 대해서만 그렇게 아뢰고 있는데, 이는 행진은 나이 차이가 서로 동떨어지고 또 늙을대로 늙었기 때문에 그렇게 깔아뭉개는 것이고 양호의 감사들은 그들과 친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안면에 걸려 감히 탄핵을 못하는 것입니다. 일이 매우 부당합니다."
하니, 경억이 아뢰기를,
"신은 듣고 아는 바가 있어서 사실을 아뢴 것인데 대신들이 그렇게 호되게 배척하니 너무나 황공합니다."
하였다. 용익과 두인도 대신으로부터 배척을 당했다하여 다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2월 8일 신축

지평 정재숭(鄭載嵩)·이경과(李慶果), 사간 송시철(宋時喆)이 서로 이어 인피하였다.

 

홍중보(洪重普)를 지경연으로, 김좌명(金佐明)을 동지경연으로 삼았다.

 

각 능(陵) 수호군(守護軍)에 대한 급복(給復) 수량을 늘려 능의 위전(位田)이 많은 곳은 30부(負), 위전이 적은 곳은 40부, 위전이 없는 곳은 50부로 하였는데, 그것은 대동법 규정에 능 수호군에 대한 급복 수량이 매우 적었기 때문에 각능의 참봉들이 능군(陵軍)의 호소에 따라 예조에 보고하여 늘려주도록 규정을 바꾼 것이다.

 

강원도 원주(原州)에서 암탉이 수탉으로 변하였다.

 

경상도에 여역이 번져 현재 앓고 있는 자가 8백 71명이었다.

 

상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주강하였다. 연신(筵臣)이 《대학연의》를 진강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수신 제가에서부터 치국 평천하까지 그 모두가 ‘경(敬)’이라는 한 글자의 공부인 것이다."
하니, 참찬관 이경억이 아뢰기를,
"한(漢)나라 문제(文帝)도 자질이 출중하였으나 그는 다만 배운 것이 황로학(黃老學)025)  이었기 때문에 옛 성왕의 정치를 재현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옛말에 이르기를 ‘순임금은 어떠한 사람이며 나는 어떠한 사람인가?’ 하였고, 또 ‘문왕은 나의 스승이라.’ 하기도 하였는데 그리하려면 다른 겨를이 없다고 하지 않겠는가?"
하고, 또 이르기를,
"무왕(武王)이 그것을 명(銘)으로 만들어 써두었던 것은, 조심하고 두려워하는 정도로는 오히려 부족하여 눈이 가는 곳마다 그 마음을 간직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하니, 경억이 아뢰기를,
"염자재자(念玆在玆)의 뜻입니다. 마음이란 살아 움직이는 물건이어서 만약 조존(操存)을 않으면 바깥 물건에 유혹당하지 않은 경우가 드문 것입니다. 경(敬) 한 글자가 바로 성상께서 항상 살피셔야 할 일입니다."
하였다. 특진관 홍중보가 아뢰기를,
"오늘 주강하라는 명은 그것이 오래 정지되었던 끝에 나온 것이어서 그를 듣고 고무되지 않을 자 누구이겠습니까. 지금 이후로 이를 만약 중지하지 않는다면 이야말로 신민들의 더할 수 없는 경사이겠습니다."
하였다. 중보가 상의 핵환(核患)이 회복되었다 하여 하례를 올리고 종묘에 고할 것을 청했으며, 경억과 참찬관 김수흥도 따라 청하자, 상이 듣지 않고 이르기를,
"병이 아직도 쾌히 회복이 안되었는데 어찌 그 일을 하겠는가."
하였다. 경억이 아뢰기를,
"신이 그제 입시했던 날 망령된 말을 하여 대신들이 화를 내게 만들었는데 오늘만은 경연 참석을 위하여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들어왔으나 이미 대신으로부터 물리침을 당했으니 신을 체직시키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왜 꼭 그 일을 가지고 인피하려 하는가.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경억이 아뢰기를,
"성상의 체후가 회복되었고 지금 또 경연을 열었으니 밖에서 듣고는 틀림없이 귀가 쏠리고 있을 것입니다. 초야에 있는 신하들도 이 시기에 불러들이지 않으면 안될 것이니 양송(兩宋) 및 이유태(李惟泰)·윤선거(尹宣擧)에 대하여 정원으로 하여금 별도의 유지를 내리게 하소서."
하니, 상이 정원으로 하여금 거행하도록 명하였다.

 

부교리 여성제(呂聖齊), 수찬 오시수(吳始壽)가 상차하기를,
"친구라 하여 편파적으로 두둔했다고 한 꾸짖음은 사실과는 다른 것이지만 그러나 이미 말을 하지 않은 잘못이 있는 이상 그대로 있을 수는 없는 일이고, 소명(召命)에 응하지 않으면 당연히 체직이 되는 것이 근간의 규례이며 추감(推勘)을 받고 있는 몸으로서는 재직하기도 어려운 입장이니, 대사간 남용익, 집의 오두인, 지평 정재숭·이경과, 사간 송시철을 모두 체차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강원도에 여역이 번져 현재 앓고 있는 자가 8백 83명이고 사망자가 74명이나 되었다.

 

2월 10일 계묘

홍처량(洪處亮)을 대사간으로, 정만화(鄭萬和)를 전라 감사로, 이단상(李端相)을 집의로, 이정(李程)을 사간으로, 윤우정(尹遇丁)·맹주서(孟胄瑞)를 지평으로 각각 삼았다.

 

사간 이정이 서장관으로서 집의(執義)를 겸직하고 있는데다 또 간직(諫職)을 맡는다는 것이 체례(體例)에 구애된다 하여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우찬성 송시열의 상소에 답하였다.
"경이 선왕조에서 수명(受命)했던 일이 어떻게 오늘 김만균(金萬均)의 일과 동일하게 취급될 수 있는 일인가. 지나치게 혐의를 잡고 있으나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마음을 편히 하고 사양말고 올라와 나의 기대에 부응토록 하라."

 

2월 11일 갑진

조참(朝叅)을 보았다.

 

간원이 처치하기를,
"양사의 체례로 보아 이미 구애된 바가 있는 이상, 겸대는 어려운 실정이니 사간을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지평 맹주서가 아뢰기를,
"호남 지방의 작년 농사가 비록 영글지는 못했지만 말하는 자들의 말같이 그렇게 심한 정도는 아니었는데 전 감사 조귀석(趙龜錫)이 착실하게 듣고 보지 않고 각 읍의 거짓 보고만 그대로 따라 재실(災實)이 서로 혼동되고 세입(稅入)이 많이 줄게 만들었습니다. 지금 기민 정책을 바야흐로 실시하려고 하는데 기민이 아주 적은 걸 보면 그가 당초에 일 처리를 잘못했던 정상이 너무 놀랍습니다. 그리고 장성 부사(長城府使) 이하악(李河岳)도 입암 산성(笠巖山城)에 쌓아둔 군기(軍器)를 전혀 수리 보충하지 않았고 그가 새로 만들어 별도로 준비했다는 것도 정예롭지 않으며 성과 성가퀴의 보수 축조까지도 견고하지가 않아 내세울만한 공적이라곤 없는데도 그는 감히 비국이 추고할 것을 청한 이후에 치계하여 장황한 말로 그를 칭찬하고 당치 않은 상을 청하기까지 하였으니, 도(道)를 맡은 사람으로서 체통이 그럴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가 이미 체직이 되었다 하여 그냥두고 논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니 그를 파직시키소서."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경기 감사 이행진이 늙기도 하고 재능도 부족하여 일 많은 기보(畿輔)는 원래 그가 감당할 곳이 못되므로 보통 정령(政令)에 있어서도 전도되는 일이 없지 않은데 더구나 지금 새로 대동법을 실시하려는 이때 백성의 편의를 도모해야 하고 부역을 균등히 해야 하는 등 감사라면 상당한 역할을 해야 하므로 공론이 모두 부적합하다고 합니다. 그도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밤에 안개가 자욱하여 사방이 꽉 막히었다.

 

2월 12일 을사

이시매(李時楳)를 경기 감사로, 이단상(李端相)을 전한으로, 송시철(宋時喆)을 집의로, 홍주삼(洪柱三)을 사간으로, 박세당(朴世堂)을 부수찬으로, 이유상(李有相)을 헌납으로 각각 삼았다.

 

한강 부근에 사는 조묵석(趙墨石)이 자기 어미를 시해하였는데 삼성(三省)이 추국하여 자복을 받고 형을 집행하였다. 이 시기에는 교화가 크게 무너지고 민간 풍속이 허물어져 강상(綱常)의 변이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 양구(楊口)에서는 양녀인 옥기(玉只)가 간부(奸夫)와 짜고 자기 지아비와 자식을 죽여 부부의 윤기와 모자의 사랑이 끊겼으며, 은율(殷栗)에서는 사노(私奴)인 검충(檢忠)·유립(劉立)이 자기 상전을 찔러 죽여 노주(奴主)의 의리가 없어졌고, 파주(坡州)에서는 역시 사노인 충헌(忠獻)이 사족(士族)집 처녀를 납치하여 자기 며느리를 삼으려다가 일이 발각될까 두려워서 강물에 빠뜨려 죽였으며, 원주(原州)에서도 사노 옥선(玉先)이 역시 사족집 여인을 납치하여 욕을 보였는데, 그들 모두는 승복을 하고 형 집행을 당했지만 식자들은 걱정이 대단하였다.

 

2월 13일 병오

지평 맹주서가 인피하고 아뢰기를,
"전 감사 이행진의 상소 안에, 연신(筵臣)이 한 말은 묵은 원한에서 나온 말이라고 했다는데, 그 소문을 비록 보지는 못했으나 대각의 논계는 오직 공론만을 따라야 하는 것이므로 체직을 청한 일을 그냥 말 수는 없었습니다. 다만 그 탄핵이 연신이 이미 지척(指斥)한 후에야 있었으니 신도 논계했던 사람으로서 마음 편히 그대로 머물러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윤우정(尹遇丁)이 처치하기를,
"대각의 논계는 오직 공론에 따른 것인데 소를 올려 자신을 변호한다는 것이 사실 해괴한 일입니다. 인피해야 할 혐의가 어디 있겠습니까. 맹주서를 출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정언 윤형성(尹衡聖)이 헌납 이유상(李有相)과 상피가 된다는 이유로 인피하니 체직하였다.

 

사은 겸 진주사(謝恩兼陳奏使) 우상 홍명하(洪命夏), 부사 임의백(任義伯), 서장관 이정(李程)이 청나라에 갔다.

 

2월 14일 정미

지평 맹주서가 아뢰기를,
"나주 목사 이하악(李河岳)은 전에 장성 부사(長城府使)로 있을 때 산성에 관하여는 원래 수축한 사실이 없었고 옛날부터 있었던 군기는 아예 내버리고 말았으며 새로 만들어서 별도로 준비했다는 것 역시 매우 조잡합니다. 그런데 감히 장황하게 거짓 보고를 하여 능력을 과시하고 상을 바랐으니 너무나 터무니없는 일로서 그냥 둬서는 안 됩니다. 그를 파직시키소서."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홍처대(洪處大)를 좌승지로, 원만석(元萬石)을 우승지로, 정재숭(鄭載嵩)을 정언으로, 남이성(南二星)을 부수찬으로, 오시수(吳始壽)를 교리로, 이단하(李端夏)를 부교리로 삼았다.

 

2월 15일 무신

사헌부가 아뢰기를,
"전 경기 감사 이행진이 일 처리를 엉뚱하게 한 것은 조정 진신이 다 아는 사실이니, 연신이 지척한 것은 관리들끼리 서로 배우고 서로 바로잡는 뜻인 것이며 대각의 논계가 곧바로 터져나와 이미 체직할 것을 아뢰었으니 공론이 어떻다는 것을 더욱 알 만한 것입니다. 그런데 도리어 사체를 돌아보지 않고 소를 올려 변명하면서 심지어는 연신이 한 말이 마치 묵은 원한이나 있어 말한 것처럼 하고 있으니, 그가 분에 못 이겨 상대를 공격한 자취가 숨길 수 없이 뚜렷합니다. 사체로 보아 참으로 너무 놀라운 일로서 그러한 일을 그냥 두면 뒤 폐단이 말이 아닐 것이니 그를 파직시키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각 관아에서 각종 공문서를 오로지 말단 관리에게 맡기는 것이 큰 폐습인데 그 중에서도 승문원은 더합니다. 문서 감정(勘定)이 얼마나 중대한 일인데 말단 관리 이외에는 모두가 무관심하여 비록 대단히 잘못된 것이 있어도 아예 살펴보지 않습니다. 관직은 서열이 있으므로 비록 차등이 없을 수는 없겠으나 틀림없이 감당하지 못할 일을 오로지 한 사람에게만 맡긴다는 것은 단연코 그러한 이치는 없는 것이니, 예전 규례라 하여 변통을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본원으로 하여금 병조에서 하는 예대로 서로 돌려가며 서로 도와 나라 일을 중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정언황(丁彦璜)을 우부승지로 삼았다.

 

2월 19일 임자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여러 승지에게 공사를 가지고 입시하도록 명하였다. 좌부승지 권대운(權大運)이 남병사(南兵使) 윤천뢰(尹天賚)의 추고 공사를 읽으니, 상이 이르기를,
"그의 함사(緘辭)가 어떠한가?"
하자, 대운이 아뢰기를,
"신이 추고할 것을 청한 것이 바로 그 점입니다. 듣기에 정이룡(鄭二龍)이 기해년 국상 때 3년을 소식(素食)했다고 하는데 그의 어떤 점이 변장(邊將)으로 적합하지 않은지 그 내용은 비록 모르겠으나 제목(題目)상으로는 말이 차서가 없습니다."
하고, 우승지 원만석(元萬石)이 아뢰기를,
"평소 충효(忠孝)가 현저하였으니 변장으로 어찌 적합하지 않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글이 짧아 그런 것이니 굳이 나무랄 것 없다."
하였다. 오정위(吳挺緯)가 아뢰기를,
"함경 감사 서필원(徐必遠)이 생과(生瓜)·생어(生魚)를 진상했다 하여 추고할 것을 장계하여 왔는데 그것이 비록 어공(御供)이라 하더라도 그때문에 수령을 갈아낸다면 폐단이 있을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것은 어공이 아니라 바로 천신(薦新)이었던 것이다."
하였다. 대운이 아뢰기를,
"천신이거나 어공이거나 별로 다를 것이 없으니 상께서 참작하소서."
하니, 상이 답이 없었다. 만석이 아뢰기를,
"여역이 또 번져 동·서 활인서에 병자가 매우 많고 그 밖에도 사사로이 막사(幕舍)로 나가 있는 자도 많습니다. 지금은 비록 비가 개었으나 호조로 하여금 빈섬[空石]을 찾아주게 하여 비와 이슬에 젖지 않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승지가 나가서 즉시 분부하라."
하였다. 대운이 아뢰기를,
"사간원 관원들이 아뢸 일이 있어 대청(臺廳)에 와 있는데 들어오라고 합니까?"
하니, 상이 입시하라고 하였다. 정언 송창(宋昌)이 이행진을 파직하는 일을 아뢰었는데, 상이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여러 궁가가 떼어받은 시장·어장을 혁파하자는 청에 대하여 본원이 이미 정론(停論)을 하고 묘당이 여쭈어 처리하도록 기다리기로 하였는데, 듣기에 지난 7일 인견 때 이미 의정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주서(注書)가 그것을 거행 문서(擧行文書) 속에다 써 내놓지 않고 신이 물어본 후에야 비로소 써 내놓았는데 기사 내용이 매우 소략하고 빠진 것이 많았습니다. 그날 입시했던 승지 역시 불찰의 잘못을 면키 어려우니, 그들을 다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정위가 아뢰기를,
"지난날 주강 명령이 오랜 기간 편찮으셨던 끝에 나와 신민 모두가 기뻐 손뼉 치지 않은 이가 없었으나, 그 후로 다시는 경연을 연 일이 없어 가까이 모시고 있는 신들로서는 항상 민망히 여겨왔습니다. 지금 안질이 있다는 하교를 들었는데 만약 조금이라도 글 보기에 방해가 있다면 경연을 어떻게 열겠습니까. 혹 유신(儒臣)을 소대하시거나 혹은 신들을 인접하여 글뜻을 강론하고 백성들 실정을 여쭙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안질이 전에 비하여 조금 덜하므로 3, 4일 더 치료하고 나서 경연을 열려고 한다."
하자, 대운이 아뢰기를,
"안질이 재발하였으면 신의 생각에는 꼭 새로 음(音)과 해석을 배우실 것이 아니라 유신으로 하여금 글뜻을 강론하게 하고 듣기만 하시더라도 도움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정위가 아뢰기를,
"선왕조에서는 개정(開政)하는 날 정관(政官)이 만약 늦게 오면 혹 추고도 하였는데 지금은 그러한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선왕조에서는 입직한 사람이 혹 소를 올린 자가 있으면 그를 불러 인견도 하였습니다. 우승지 원만석이 일찍이 춘방(春坊)에 있으면서 소를 올렸던 연유로 사대(賜對)를 하였는데 그게 바로 언로를 여는 길인 것입니다."
하자, 만석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춘방에 입직하였을 때 마침 구언(求言)을 하였는데 성상의 하교가 하도 간곡하여 그걸 보고서 감히 소를 올렸더니 심지어 불러 보기까지 하시고 또 정원에 하교하기를 ‘만약 청대자가 있으면 만나보겠다.’ 하셨으니, 그 어찌 성세의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이 보건대 선왕조에서는 정사(政事)가 있는 날 망통(望筒)026)  이 들어오면 금방 내렸으니, 참으로 임금과 신하 사이의 응수가 그림자나 메아리처럼 빨랐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은 정관(政官)이 아침에 들어오면 으레 저물어서야 파하니 매우 온당치 못한 일입니다."
하였다. 장선징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오랜 기간 조용히 섭양만 하셨기 때문에 용기를 내고 가다듬는 기상이 없어 그 결과 임금과 신하, 위 아래가 시들부들 엉거주춤하기만 하고 대신들도 앞뒤를 재면서 옛것만을 답습하고 머뭇거리며 남의 의견만 따르고 있으니 신은 나라 일이 끝에 가서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지난날 유신(儒臣)이 이행진(李行進) 파척 문제를 놓고 탑전에서 의논드릴 때 상께서 제신들에게 하문하자 대신들은 못 들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들리는 바로는 대신들이 자기들 집에서는 자기 형제들과 그 일을 얘기한다고 합니다. 천위(天威)를 지척에 두고 어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하자, 정위가 아뢰기를,
"지금은 인심이 시들부들하고 풍속이 극도로 나빠 인정(仁政)만 써서는 안 되고 촉(蜀)을 다스리면서 엄한 법을 썼던 그 법을 써야만 합니다."
하니, 좌승지 홍처대(洪處大)가 아뢰기를,
"상줄 데 상주고 벌줄 데 벌주면 기강은 저절로 확립될 것입니다. 엄한 법을 써야 한다는 말은 좀 지나친 것 같습니다."
하였다. 선징이 아뢰기를,
"제갈량(諸葛亮)은 촉을 다스리면서 엄한 것을 숭상하였고, 후한(後漢) 때의 최식(崔寔)은 정사에 은대(恩貸)가 많은 것을 나무랐는데 그들이 어찌 치체(治體)를 몰라 그랬겠습니까. 인정(仁政)이 비록 임금에 있어 큰 덕화라고는 하지만 인정만을 힘쓰다 보면 끝에 가서는 고식적이고 구차하게만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왕조에서는 근시(近侍)로서 변방 수령을 제수받으면 그 사람 스스로 영광으로 여겼을 뿐만 아니라 국가에서 그를 골라 임명한 뜻 역시 보통으로 한 것이 아니었는데, 지금은 그것을 다만 승진 발탁의 디딤돌로 삼아 일단 자급만 오르고 나면 금방 온갖 방법으로 갈려갈 것을 꾀하고 있습니다. 국가 기강이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근간의 일로만 말하더라도 길주 목사(吉州牧使) 임한백(任翰伯) 건은 참으로 한심한 일입니다. 지난날 비록 그를 잡아 가두라는 명령은 있었으나 가자(加資)도 당연히 도로 삭탈하여야 할 것 같습니다. 한백이 부임 이후로 병을 핑계하여 공무는 폐해버리고 술 마시는 일로 날을 보내다가 결국 체직이 되게 하고야 말았으니, 그러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한백의 가자는 도로 삭탈하라. 이 후로는 조정으로부터 죄를 받은 자 외에 그 자리를 피하기 위하여 체직을 도모하는 자는 달 수를 정하여 가자를 도로 삭탈하도록 묘당으로 하여금 규정을 정하게 하라."
하자, 비변사가 아뢰기를,
"자급이 올라 외임에 제수된 사람 중에 조정으로부터 벌을 받은 자를 제외하고 그 자리를 피하기 위하여 체직을 도모한 자는 성상의 하교대로 그 가자를 회수하도록 두 전조(銓曹)에다 분부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집의 송시철, 지평 윤우정이 어제 조입(照入)한 정민헌(鄭民獻) 추고 공문서에 변(邊)을 쓰지 않아 도로 내주라는 명령이 있기까지 하여 너무 황송하다는 이유로 인피하니, 체직하였다.

 

우의정 홍명하가 벽제관(碧蹄館)에 이르러, 사명을 받들고 국경을 나가게 되었다는 이유로 상소하여 체직을 빌고, 또 아뢰기를,
"신이 지금 멀리 떠나면서 걱정스러워 마음이 놓이지 않기 때문에 전일에 탑전에서 못다 밝힌 소회를 거듭 말씀드리니, 성상께서는 채택하여 주소서. 천재(天災)와 시변(時變)이 거듭 나타나고 있으며 인심과 세도가 날로 어그러지고 달로 변하여 오늘날 나라 일이 수습하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성상께서 뜻을 분발하시고 떨치고 일어나 무엇인가 하셔야만 위태로움을 안정으로 바꿔놓을 수 있는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편찮으셨던 옥후가 근래 점점 회복이 되어가고 경연을 한번 열자 온 나라가 기뻐 손뼉을 쳤으니 이를 계기로 하여 치도를 강론하는 일을 중지하지 마시고 유현(儒賢)들을 초치하여 보도(輔導)의 책임을 전담하게 하소서.
한 번의 동정(動靜)도 반드시 하늘의 법칙을 따르시고 절선(節宣)을 때에 맞게 더욱 더 섭양에 힘쓸 것이며 약이(藥餌)의 효과만을 바라지 마소서. 시비를 분명히 하고 호오를 공정히 하여 뭇사람들의 폐습을 바로잡으시고 무너진 기강을 진작시키고 옛 법을 다시 실현하여 국가 체통을 확립하소서.
그리고 백성을 돌보는 정책도 진구 한 가지만 제일이 아니라 폐단 중에서 큰 것을 혁파해버리면 백성은 자연히 편안해질 것입니다. 양호(兩湖)의 지역(紙役)은 백성들이 견디기 어려워하고 있는 것인데 묘당 논의가 이미 확정된 이상 신이 감히 다시 말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백 번 생각해보아도 끝내 변통하지 않는다면 양호 백성들을 다시 보장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경기 지역에 양전을 한 후 대동법을 실시한 것은 백성들의 편의를 도모하자는 뜻에서 한 것인데, 관리들이 법을 무서워하지 않아 그것을 받들어 시행할 사람이 없습니다. 국가 법령은 애당초 시행하지 않았으면 그만이지만 이미 시행하고 나서는 중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 빨리 해당 청(廳)으로 하여금 서둘러 이정(釐正)하여 막히거나 구애되는 폐단이 없게 하여 궁한 백성들의 바람에 부응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직을 지닌 채로 갔다가 돌아온 옛 규례가 있는데 왜 사직을 하려고 하는가? 상소문에서 진계한 말에 있어서는 마음속 깊이 생각하겠다. 대동법 문제와 변통하는 일에 있어서는 다시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겠다."
하였다.

 

충청도 영동현(永同縣)의 용당천(龍塘川)이 한 나절이나 흐름이 끊겼다. 용당천은 수원이 매우 풍부하여 전부터 아무리 큰 가뭄에도 흐름이 끊긴 일이 없었다.

 

2월 20일 계축

좌의정 원두표가 연신(筵臣)이 등대했을 때 대신들이 그럭저럭 지내면서 책임있는 일을 하지 않는다고 나무란 일과 또 전 감사 이행진 건에 대하여 주상이 물었을 때 대신들이 사실대로 대답하지 않았다고 나무란 일 등을 이유로 차자를 올리고 파직을 빌었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대사간 홍처량(洪處亮)이 병을 이유로 오지 않았다가 체직되었다.

 

2월 21일 갑인

조수익(趙壽益)을 우윤으로, 김익경(金益炅)을 동부승지로, 김수흥(金壽興)을 대사간으로, 남구만(南九萬)을 집의로, 장선징(張善瀓)을 부교리로, 홍만용(洪萬容)·송규렴(宋奎濂)을 수찬으로, 정재숭(鄭載嵩)을 지평으로, 박세당(朴世堂)을 정언으로, 이익한(李翊漢)을 충청 감사로, 박이명(朴而㫥)을 충청 수사로 삼고 임한백의 가자를 삭탈하였다.

 

2월 22일 을묘

헌납 이유상(李有相)이 대사간 김수흥과 동서간이라 하여 상피하여 체직되었다.

 

부교리 장선징이 상소하기를,
"신은 천성이 우직하여 언제나 나라 일을 생각하면 개연한 마음이 속에 숨어 있기 때문에 천안(天顔)을 지척에서 모시면 그것이 더욱 격발하여 망령되이 운운한 바 있는데, 그 요지는 대개 오늘날 나라 일이 시들시들해져 날이 갈수록 손을 쓸 수 없는 쪽으로 가고 있는 것은 그 모두가 전하께서 무엇인가 크게 해보려는 뜻을 분발하지 못하시고 보필하는 신하 역시 원망도 아랑곳없이 일을 맡아 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저의 구구한 생각은, 위 아래가 서로서로 경계하고 격려한다면 설사 광솔(狂率)한 말을 할지라도 도리에 손상될 것이야 뭐 있겠느냐는 것이었지, 재상 자리가 텅 비고 보필하는 일을 폐지하는 것은 어리석은 신으로서는 미처 계산을 못했던 것입니다. 옛 사람이 ‘도움을 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해까지 끼친다.’고 했는데, 소신이 한 일이 불행히도 그 말과 같이 되었습니다. 신을 면직시키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한 말이 딴 뜻은 없는 것인데, 어찌 사직하는가? 편안한 마음으로 직무를 보라."
하였다.

 

2월 23일 병진

상이 상참(常叅)을 보았는데 예조 판서 홍중보(洪重普), 병조 판서 김좌명(金佐明), 정언 송창(宋昌)이 전상에 올라가 주사(奏事)하였다. 중보가 아뢰기를,
"담양(潭陽) 금성 산성(金城山城)의 군량미 건으로 전 부사 김응조(金應祖)를 잡아올리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응조는 세 조정에 걸쳐 시종한 신하로서 나이 이미 80세이고 집도 영남(嶺南)에 있을 뿐만 아니라 마마[痘疫]도 치르지 않아 먼 길에서 잡아올리자면 틀림없이 쓰러지고 말 것이니, 성상께서 늙은이를 우대하고 아랫사람을 돌보는 도리로 보아 변통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신이 예관(禮官)으로 있기에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잡아올리지 말고 본도에서 서면으로 추문하라고 하라."
하였다. 송창이 아뢰기를,
"요즘 장오죄에 관한 법이 엄하지 않아 장오죄로 파직당한 자가 매우 적기 때문에 탐관오리가 징계되지 않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한 일입니다. 새로 제수된 충청 수사 박이명(朴而㫥)은 성격이 원래 거칠고 교활하여 가는 곳마다 긁어모으기로 소문이 파다한데 그는 바로 탐관오리 중에서도 특히 심한 자로서 일찍이 제주 목사 시절에도 그 때문에 파직당한 일이 있습니다. 그를 파직하도록 명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좌명이 아뢰기를,
"훈련 대장 이완이 목욕 관계로 내일 길을 뜨게 될 것인데 전부터 이러한 때에는 혹은 임시 대장이나 도제조를 차출하여 겸찰(兼察)하게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도제조가 겸찰하게 하고 능행(陵幸) 때 가서 다시 아뢰라."
하였다. 상이 또 도승지 오정위에게 이르기를,
"대신과 비국의 재신들을 인견해야겠다."
하였다. 좌의정 원두표가 아뢰기를,
"성상께서 오래도록 편찮으시다가 지금 와서 능행 날짜를 잡으라는 명령이 계셨으니 신민들로서는 너무나 기쁘고 다행스런 일입니다. 다만 지금 마마와 열병이 한창 번지고 있는데 배종(陪從)하는 많은 사람들이 다 깨끗하기를 어떻게 바라겠습니까. 그뿐 아니라 작년이 흉년이었는데 봄철이 되어서는 더 심하여 굶주린 백성들이 길 닦기에 고달플 것입니다. 그리고 나룻배도 하루 이틀 길을 잡고 와 정박하게 해야 하는데, 이것은 더욱 염려스러운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러면 여러 능 중에서 거리가 가장 가깝고 나룻배도 쓰지 않을 곳을 배알하면 어떻겠는가?"
하자, 두표가 아뢰기를,
"그만둘 수 없다면 가장 가까운 능으로 행차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중보가 아뢰기를,
"나룻배야 그 폐단을 굳이 따질 것 없고 또 배 편도 봄철이 가을철에 비하여 한가할 것 같습니다. 다만 여염 사이에 전염병이 크게 번지고 있어 그것이 걱정스러운 일입니다."
하니, 이조 참의 민정중이 아뢰기를,
"능행을 아니하면 그만이지만 이미 헌릉(獻陵)으로 정했으면 어떻게 다른 능으로 행차하겠습니까? 나룻배 편이 비록 폐단이 있다 하더라도 능행을 하면서 어떻게 지나가는 데 따르는 폐단을 따지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선왕조에서는 군대들에게 평소 도수(渡水)하는 법을 익히게 하려고도 하였습니다. 지금도 만약 잘만 한다면 나룻배가 왜 꼭 많이 필요하겠습니까."
하자, 상이 드디어 헌릉으로 행행할 것을 정하였다. 정중이 아뢰기를,
"신이 들은 바로는 헌릉에 비석이 있는데 임진년 난리에 왜인이 불을 놓아 태웠으나 비가 불에 타 깨지지 않으므로 왜인들이 신이(神異)하다고 하였답니다. 그리고 그 비에 글자가 아직도 마멸되지 않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자, 두표가 아뢰기를,
"신은 그 비를 보았습니다. 옛날에는 비록 제왕이라도 비를 세워 그 공덕을 기록했기 때문에 이 빗돌이 있는 것인데, 그 글자가 지금까지 마멸되지 않았고 그 비 등에다는 그 당시 여러 신하들 이름을 죽 새겨놓았습니다. 만약 능행을 하시면 성상께서도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두표가 또 아뢰기를,
"일찍이 선왕조에서는 강화도에 나룻배를 많이 만들어 가을·겨울에는 변란에 대비하고 봄·여름이면 고기를 잡고 해초를 채취하게 하여 거기에서 세를 받아 그 세로 배를 수리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미 10년이 되었기 때문에 썩고 부서진 것이 많으나 삼남(三南) 역시 기근이 심하여 거기에서 개조하게 할 수도 없습니다. 강화도에서 개조하고 배 6척만 충청 수영(忠淸水營) 및 전라도에다 나누어 정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두표가 아뢰기를,
"유계(兪棨)의 병이 바로 내종(內腫)이어서 우황(牛黃)을 먹어야 하는데, 그의 집이 너무 가난하여 살 수가 없습니다. 선왕조에서 고 판서 김익희(金益熙)가 병들었을 때 약을 준 일이 있었으니 지금도 내국(內局)으로 하여금 우황을 찾아서 주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1부를 주라고 명하였다. 상이 병조 판서에게 묻기를,
"능행 때의 유도 군병(留都軍兵)에 관하여 왜 취품을 않고 있는가?"
하니, 좌명이 아뢰기를,
"흉년이어서 군대를 징발하자면 폐단이 있을 것 같습니다. 어영군으로 하여금 도성을 지키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정중이 아뢰기를,
"흉년을 이유로 능행을 하지 않으려면 모르거니와, 하려면 어떻게 유도군(留都軍)을 징발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능행 때의 제반 사항을 생략한다는 것 역시 온당치 못한 일입니다."
하였다. 어영 대장 유혁연(柳赫然)이 아뢰기를,
"군장을 꾸리고 갔다가 오는 것도 하나의 습진(習陣)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징발하여 갔다가 와야만 쓸모가 있는지의 여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정중이 아뢰기를,
"강화 유수 권우가 탄핵을 받고는 비국의 규정을 어기고 지레 올라와버렸으니 그를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중한 쪽으로 추고하라."
하였다. 오정위가 아뢰기를,
"소동도(蘇東道)도 늙고 고질병이 들었으니 김응조(金應祖)에게 한 대로 잡아 올리라는 명령을 중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두표가 아뢰기를,
"응조는 일찍이 옥당을 역임하였고 또 마마도 치르지 않았기 때문에 잡아올리지 말도록 청하였던 것이나, 동도는 응조와 입장이 다르고 또 잡아올리라는 명령을 일단 내린 뒤에 다시 중지하도록 하는 것 역시 중대한 문제인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정위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함경도 단천군(端川郡)에 열병이 번져 사망자가 38명이었으며, 현재 앓고 있는 자가 14명이었다. 명천부(明川府)에는 열병으로 죽어간 마소가 1백 50여 두에 달하였다.

 

2월 24일 정사

정언 박세당(朴世堂)이 누차 소명(召命)을 어긴 관계로 현재 추감(推勘)을 받고 있는 몸이라 하여 인피하니, 체직하였다.

 

지평 정재숭(鄭載嵩)이 인피중이어서 맹주서(孟胄瑞)가 처치를 해야 하는데 자기 집에 구기(拘忌)해야 할 병이 있어 예궐할 수 없다 하여 소를 올리고 체직을 청하였다. 이에 정원에서는, 대간의 처치를 주서(注書)가 써들여와도 혐의될게 없을 듯하다고 여겨 그 소를 받지 않았다. 맹주서가 또 거행(擧行)의 문서가 나오기도 전에 지레 소를 올린 것은 온당치 못한 일이라 하여 인피하였는데, 정원에서는 그것도 받아들이지 않고 상께 계품하였다. 상이 피혐이나 처치나 구기되는 것으로 말하면 일반인데 피혐을 위하여는 들어오고 처치를 위하여는 오지 않는 것은 어째서냐고 하면서 받아들이지 말라고 하였다. 이에 맹주서가 준엄한 전지가 내려지게 하였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는데, 대사간 김수흥(金壽興)이 정재숭·맹주서 둘 다 체임시킬 것을 계청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이지무(李枝茂)를 장령으로, 윤심(尹深)·윤형성(尹衡聖)을 지평으로, 윤우정(尹遇丁)을 정언으로 삼았다.

 

2월 26일 기미

가주서 조시원(趙時瑗)을 보내 좌찬성 송시열, 대사헌 송준길에게 개유하기를,
"경들이 전야에 물러가 있은 지도 어느덧 5년이 흘렀다. 내가 날마다 경들이 돌아오기 바라기를 목마른 자가 물을 찾는 것보다도 더 간절하게 바라는데도 성의가 미쁨을 받지 못해 떠나가려는 마음을 돌리지 못하고 있으니, 잊지 못하는 이 마음을 어찌 밥 먹고 숨 쉴 때인들 잊겠는가. 경들은 선왕조의 숙덕(宿德)으로서 국가와 휴척을 함께해야 할 처지이며 평소 나라 경영하는 방법을 강론했을 때 한 시대를 바로잡을 수 있는 재질이 충분했다. 지금 나라 형세는 하나도 믿을 것이 없으니 홍제(弘濟)의 정책을 경들이 오기를 기다려 세워야겠고, 조정 내부도 갈기갈기 찢기어 서로 화합하기를 바라기 어렵게 되었으니 보합(保合)의 책임도 경들이 오기를 기다려서 맡겨야겠다. 과인의 잘못을 경들이 아니면 누가 바로잡겠으며 무너지고 흐트러진 모든 일을 경들이 아니면 누가 일으키겠는가. 더구나 내가 계속 병을 앓아 오랜 기간 학문을 폐지했다가 이제 겨우 조금 나아서 처음으로 경연을 열었다. 그러나 경연 석상에서도 공부가 성취되지 않고 뭇신하들을 대하여도 계옥(啓沃)의 말이라곤 들을 수가 없다. 이 시기에 경들을 생각하는 마음이야말로 풍년 들기를 바라는 것보다 더하다. 경들도 만약 그것을 생각한다면 어찌 차마 못 잊어하는 생각이 없을 것이며, 그렇지 않더라도 선왕이 베푸신 지우(知遇)의 은총은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봄이 이미 깊어 날씨도 따뜻하니 경들은 즉시 마음을 돌려 되도록 빨리 올라와 곁 자리를 비워두고 기다리는 나의 뜻에 부응하라."
하고, 행 부호군 이유태(李惟泰)에게 개유하기를,
"생각하면 전년에 그대가 조정에 왔을 때 때마침 내 병세가 심상치 않아 하루도 조용한 기회를 갖지 못했던 것이 예우(禮遇)에 흠결을 남기게 되었다. 그러나 못 잊어 잠 못 이루는 당초의 마음이야 뭐라고 다 말하겠는가. 지금 나라 일이 위태위태하여 안정될 기약이 없으니 만약 제현(諸賢)들이 바로잡고 돕지 않으면 어떻게 이 어려운 고비를 넘겨 쓰러지지 않게 하겠는가. 지금 나도 병이 조금 나아 처음으로 경연을 열었는데, 경전의 뜻을 토론하고 심오한 의미를 개진하여 나의 학문을 도울 사람이 그대 말고 누구이겠는가. 되도록 빨리 올라와 이 갈망을 풀어달라."
하였다.

 

대사헌 송준길, 장령 윤원거(尹元擧)가 병을 이유로 오지 않았다.

 

이조가 아뢰기를,
"지금 내수사의 첩문(牒文)을 보니, 숙명 공주(淑明公主) 집 수본(手本)에 의하여 금산(金山) 지방의 전토를 산 자와 현재 경작자 등을 본도로 하여금 우선 엄중히 다스리게 하고 나서 사실을 분명히 밝혀 엄정히 처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내수사 관원을 불러서 전후 문서를 가져다 상고하였더니, 작년에 어사의 서계로 인하여 호조가 복계하고 본도에 행회한 후 차사원을 별도 선정하여 양안(量案) 및 문권(文券)을 샅샅이 조사한 다음 이미 백성들에게 결급(決給)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궁가의 수본으로 인해 이미 조사한 것을 다시 처결하라 하고, 경작인을 엄중히 다스리기까지 하라고 한다면, 이는 국가 체통이 이만저만 깎이는 일이 아닙니다. 이 공사는 감히 전례대로 봉행하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것은 떼어받은 것에 비할 바 아니고 바로 사들인 물건인데 서로 송사를 해야 할 일이라면 본도로 하여금 강명한 관원을 특별 선정하여 다시 조사하도록 한 것이 뭐가 잘못되었다는 것인가"
하자, 우승지 원만석(元萬石)이 아뢰기를,
"그 하교는 이미 해당 아문에다 분부했습니다. 다만 초기(草記)로 볼 때 이미 결급한 뒤이니 백성들이 경작하는 것은 죄가 될 일이 없을 것 같고, 설사 잘못된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미 다시 조사하라는 명령이 있었으니 그 송사가 완료되어 죄상이 현저히 나타나면 그때 가서 조용히 처리하는 것이 사체로 보아 당연한 일입니다. 해당 아문이 계청한 대로 경작자 등에 대해 우선 죄를 다스리지 마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전 이조 참판 유계(兪棨)가 죽었다. 유계는 견문이 넓고 기억력이 강해 문명(文名)이 있었다. 병자년 난리에 호종하고 남한 산성에 들어가 소를 올려 척화를 강력히 주장하다가 그 때문에 당시에 배척을 당하였다. 효종 초년에는 인조(仁祖)의 묘시(廟諡)를 놓고 다투다가 종성(鍾城)으로 귀양갔다. 송시열의 강력한 추천으로 드디어 발탁되어 왕으로부터 대단한 인정을 받았으나 별로 한 일이 없었다. 송시열 등과 당파를 이루어 경자년에는 윤선도(尹善道)를 극력 배척하였고 앞장서서 분소(焚疏)를 제창하기도 하여 공론으로부터 큰 죄를 얻었다.

 

박장원(朴長遠)을 대사헌으로, 송창(宋昌)을 장령으로, 안진(安縝)을 헌납으로, 정재숭(鄭載嵩)을 정언으로 삼았다.

 

양호(兩湖) 사이에 황산(黃山)이라는 곳이 있는데,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 문인이 그 황산이 바로 장생이 일찍이 왕래했던 곳이라 하여 원우(院宇)를 창건하고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이 장생의 사승(師承)이라 하여 모시었다. 그리고 또 이이·성혼의 연원(淵源)을 찾아 고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까지 함께 모셨었다. 이때와서전라도 여산(礪山) 유생 송유광(宋有光) 등이 상소하여 사액(賜額)을 청하였다. 조정에서는 원우가 중복으로 있다 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전라도 강진(康津)의 사인암(舍人巖) 앞 큰 시내가 하루 밤 동안 물이 끊겼다.

 

2월 28일 신유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유신을 소대하였다. 《대학연의》 제3편 경지장(敬之章)을 진강하였는데, 좌의정 원두표, 참찬관 오정위가 상의 안질을 고려하여 새 장을 배우지는 말 것을 청하였으므로, 상이 문장의 뜻만 강하도록 명하였다. 검토관 홍만용(洪萬容)이 아뢰기를,
"소신이 지난날 경기 도사로 있으면서 교생(校生)을 고강(考講)하는 일로 양주(楊州)를 순회하면서 들었는데, 양전(量田) 당시에 매긴 등수의 높낮음이 고르지 못해 백성들이 현재 뿔뿔이 흩어지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거기야말로 서울 근교의 뿌리에 해당하는 곳으로서 변통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인데 지금 대신 및 선혜청 당상들이 다 입시하였으니 의견을 물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자, 두표가 아뢰기를,
"그 말이 맞습니다. 당초에 수령들이 선처를 못하여 그렇게 되었는데 지금 와서는 양안(量案) 정리가 이미 끝나서 변통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영상이 출사하면 그때 가서 의논하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병조 판서 김좌명에게 이르기를,
"일찍이 선왕조에서는 헌릉(獻陵) 능행 때 하룻 밤을 지내는 것으로 되어 있다기에 정원으로 하여금 찾아보라고 하였더니 내가 들은 바와 같은데 병조에는 그 기록이 없다니 어찌 된 일인가? 조금 늦게 궁(宮)을 나가 이튿날 환도(還都)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제신들 모두가 좋겠다고 하였다. 원두표가 아뢰기를,
"부제학 유계를 끝내 손을 못 쓰고 말았는데, 어제 입관(入棺)해야 할 날이었으나 가난해서 치상을 못한다고 합니다. 선왕조에서는 유신 조석윤(趙錫胤) 초상 때 상수(喪需)를 제급한 일이 있었기에 감히 아룁니다."
하니, 상이 해당 아문으로 하여금 제급하라 하였다. 김수흥이 아뢰기를,
"능 행차 날은 지금 이미 정해졌는데 그 전부터 환궁하실 때 혹 열무(閱武)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능행이 비록 군행(軍行)이라고는 하지만 지금 겨우 재계가 끝난 상황에서 그 일이 있는 것은 부당하겠으니 성상께서는 조용히 돌아오시고 그러한 일들은 하지 마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의 아뢴 말이 좋다."
하였다. 수홍이 아뢰기를,
"지금 정조(政曹)가 후보를 추천하는 과정에서 구차하고 소략한 일이 매우 많습니다. 대사헌이 작년 겨울부터 자리가 비어 있기 때문에 추감(推勘)도 따라서 적체되어 대간 추천을 받지 못하고 있는 자도 많습니다."
하였고, 두표는 아뢰기를,
"패부진(牌不進)이 법규상으로 종전에는 파직이었습니다. 지난 무오년에 대신들이 수의하여 파직을 않기로 변통하였지만 지금 6, 7차까지도 부진하는 자가 있으니 참으로 한심한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만약 파직을 시키면 비록 파직당하고 싶어하는 그의 마음을 맞춰주는 꼴은 되지만 그래도 여러 차례 패부진으로 사체를 손상시키는 일은 없을 것 아닌가."
하였다. 두표가 아뢰기를,
"비국의 좌기만 하더라도 그 전에는 한 번 불참하면 하리를 다스렸고 두 번 불참이면 가동을 가두었으며 세 번 불참이면 추고를 하였는데, 지금은 불참자가 항상 많은 것입니다."
하자, 수흥이 아뢰기를,
"그것은 대신들이 책려하기에 달렸습니다."
하니, 두표가 아뢰기를,
"신같이 무위도식하는 자야 어떻게 책려라도 하겠습니까마는, 지금의 대신들은 비록 대신이라는 이름은 있어도 모든 정사에 있어 다 참여하여 듣지는 못하니, 기강이 무너진 것을 오로지 대신에게만 책임을 지우려고 하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하자, 수흥이 아뢰기를,
"대신의 말도 옳습니다. 규례에 따라 추고를 청하기만 하면 모두 원망하고 화를 내니 대신으로서도 소신있게 일하기가 역시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직을 고하는 수령을 인견하는 일은 선왕조 때부터 시작된 일인데 상께서는 현재 조용히 섭생 중에 계시기 때문에 비록 낱낱이 인견하기는 어렵겠지만 그래도 선왕조 고사대로 간간이 인견하시고 감사·병사도 수시로 인견하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지난번 대신이 국경을 나가던 날도 불러 인견하지 않으셨는데 그 당시 성상 체후가 어떠하셨는지는 비록 알 수 없으나 뭇신하들 심정은 모두 불만이었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요즘에는 연거푸 경연을 열고 계셔서 조정에 감도는 기상이 점점 좋아져가고 있습니다. 상께서 중지하지 않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리고 윤대를 폐지한 지 지금 너무 오래되어 각 관아의 관원들이 자기가 맡은 직책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자가 적습니다. 지금부터 수시로 윤대하시면 해당 관원들도 틀림없이 자기가 맡은 직책에 유의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모두 시인은 하면서도 대답은 없었다.

 

2월 29일 임술

조수익(趙壽益)을 개성 유수로 삼았다.

 

병조 판서 김좌명, 한성 우윤 유혁연이 헌릉 행차의 도로 사정을 살펴보고 돌아왔는데,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즉시 인대하였다. 좌명 등이 도로 사정에 대하여 아뢰기를,
"노량진 길을 택하여 서빙고(西冰庫)를 거쳐 가게 되면 길은 매우 평탄하나 거의 10여 리까지 백성들 전답이 피해를 입게 되고 삼전도(三田渡) 길을 택하게 되면 강폭이 좁아 물살은 세지만 군병들이 송파(松坡) 나루에서 건너게 되기 때문에 편리하고 좋을 것 같았습니다."
하니, 승지 김익경(金益炅)이 아뢰기를,
"이 농사철에 백성들 전답이 10리나 피해를 입게 되면 그는 사실 애처로운 일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삼전도 길을 택하라."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어제 도감의 초기(草記)를 보았는데 유황(硫黃)을 사온 자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하니, 좌명이 아뢰기를,
"서울 사는 부상(富商) 이응상(李應祥)의 종 무선(武善)인데, 응상의 지시를 받고 외방에서 잇속을 채우는 자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도감이 일찍이 그렇게 분부한 일이 있었던가?"
하니, 혁연이 아뢰기를,
"언젠가 김근행(金謹行)이 들어갈 때 좌상이 그를 시켜 왜인들과 서로 약속을 하게 했기 때문에 왜인들이 잠상(潛商)을 하려고 2만 근은 우선 들여오고 뒤이어 2만 근이 또 오는데 우리 나라 장사치들과 접선이 안 될까봐 미리 알려온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그들이 감히 곧바로 왜관(倭館)으로 오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니, 혁연이 아뢰기를,
"전일 잠매(潛賣) 때도 가덕도(加德島)까지 왔었으니 이번에도 틀림없이 가덕도로 왔을 것입니다."
하였다. 좌명이 아뢰기를,
"장검(長劍)은 바로 수응(酬應)에 쓰이는 물건인데 왜관에서도 그것을 구입할 수가 없기 때문에 좌상이 김근행을 시켜 구입해 오게 하여 지금 2백 자루나 나왔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대개 들어보면 유황 1백 근 값이 왜국에서는 은화 5, 6냥에 불과한데 우리 나라에서는 10냥으로 치기 때문에 왜인들이 죽기를 무릅쓰고 와서 판다는 것입니다."
하니, 혁연이 아뢰기를,
"그것이 우리 나라에는 없는 물건이어서 오는 길을 끊어버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듣기로는 왜인들이 지금 그것을 실어두고 섬 속에 잠복하고 있다는데 만약 순풍을 만나면 불과 한나절 사이에 우리 국경에 와 정박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유황 값은 은화로 줄 것인가?"
하니, 혁연이 아뢰기를,
"그것이 잠매이기 때문에 왜인들은 저들 가져가기 편리하게 꼭 은화로 받으려고 하지만 은은 우리 나라에서 생산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백사(白絲) 혹은 목면(木綿)으로 쳐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나라에도 없는 물건이 없습니다. 단천(端川)에서는 유황토(硫黃土)를 끓여 수은(水銀)을 생산하고 청주(淸州)에서도 유황을 끓여 함석(含錫)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것은 물건 다루는데 해박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고, 이어 군대 조련 때의 진법(陣法)에 대하여 물었다. 혁연이 방진(方陣)·원진(圓陣)·첩진(疊陣)의 법을 들어 대답하니, 상이 이르기를,
"작년 열무(閱武) 때 진법을 보았더니 호가(扈駕) 때 서로 싸우는 진법과는 다른 데가 있었다."
하였다.

 

강원도 강릉(江陵)에 큰 바람이 불어 기와가 모두 날아가고 큰 나무들이 뽑혔으며 압사자가 있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