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일 갑자
영중추 이경석, 판중추 정유성이 상차하기를,
"성상께서 해를 넘겨 편찮으신 뒤끝에 이렇게 능행을 명하셨는데, 지금 바람이 순조롭지 못해 날씨가 변동이 심하며 전염병이 중외에 크게 번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지존의 행차가 들판을 지나 능소에서 밤을 넘긴다는 것은 위태롭고 두렵기가 그보다 더한 일이 없습니다. 빨리 정지하라는 전지를 내리시고 가을이 되거든 행행하시기로 하여, 여망을 저버리지 마소서."
하였으나, 상이 듣지 않았다.
3월 3일 을축
상이 선정전에 나아가 상참(常叅)을 받았다. 대사간 김수흥이 아뢰기를,
"충청 수사 박이명은 탐욕스럽고 교활하니, 파직시키소서."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전라도 입암 산성(笠巖山城)·금성 산성(金城山城) 등지에 나간 번고 어사(反庫御史) 오두인(吳斗寅)은 번고도 제대로 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전 부사 이하악(李河岳)이 군기(軍器)를 별도로 만들었다는 것도 모두 형편없을 뿐만 아니라 부서진 군기도 수리하지 않고 산성을 고쳐 쌓았다는 것도 애들 장난하듯 해놓은 것이었으며, 또 감사 조귀석(趙龜錫)이 실결(實結)을 재결(災結)로 보고한 것도 다 눈으로 보고서도 서계(書啓)에다 갖추 기록하지 않았으며, 또 자신이 간직(諫職)에 있으면서도 그를 들어 탄핵도 않고 다만 사사로이 진신들 사이에다 말만 퍼뜨리는 등 봉사(奉使)를 형편없이 하였습니다. 파직시키소서."
하자, 상이 그대로 따랐다. 상참을 마치고 이어 대신 및 비국 재신들을 인견하였는데, 좌상 원두표가 상의 안질에 대하여 묻자, 상이 이르기를,
"이제 다 나았다."
하였다. 두표가 열병이 현재 번지고 있어 여염이 깨끗하지 못하다 하여 능행을 정지할 것을 청하고, 좌참찬 허적도 그를 쟁집하니, 상이 이르기를,
"해가 지나도록 전알(展謁)을 못했는데 깨끗해질 날을 기다리기로 하면 어느 때에나 하겠는가."
하였다. 예조 판서 홍중보가 아뢰기를,
"크고 작은 모든 제사를 으레 4경 초두에 모시는데 이번 능행에는 하룻밤을 지내기로 하였으니 날 샐 무렵에 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4경에 행사하고 이어 능을 하직한 후 막차(幕次)에서 휴식을 취하다가 날 샐녘에 출발하여 돌아오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였다. 상이 두표에게 묻기를,
"훈련 도감의 유황을 사 온 사람에게 장차 무슨 상을 내릴 것인가?"
하니, 두표가 아뢰기를,
"홍희남(洪喜男)은 전번에 이미 가자(加資)하였기 때문에 동지(同知)를 제수했지만 이번에는 가설 첨지(加設僉知)로 상을 내리면 맞을 것입니다. 김근행(金謹行)이 섬 안으로 들어갈 때 신과 이완(李浣)·유혁연(柳赫然)이 근행에게 말하여 그로 하여금 잠상 왜인과 서로 약속을 하도록 하였는데, 지금 과연 세 명의 왜인이 와서 은밀히 매매를 하고 또 섬 안에도 배에 실어 숨겨둔 것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전번에는 유황 1백 근 값이 은화 80냥까지 갔었는데 지금은 70냥에 불과하고, 앞으로도 또 그보다 더 내릴 것이므로 이 길을 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였다. 강화 유수 조복양(趙復陽)도 강도(江都) 일을 여쭈어 결정하기 위하여 입시하고 아뢰기를,
"강도의 군대들은 기예가 너무 말이 아닙니다. 신이 도임 후 별파진과 무학(武學) 속오군(束伍軍)을 시켜 쏴보라고 하였더니, 어떤 자는 총소리가 나자마자 땅에 엎드리는 자도 있었습니다. 신이 총을 쏠 줄 아는 중군(中軍)들을 시켜 화약을 장전하여 가르치게 하고 또 하리와 관속들을 뽑아 총 쏘는 것을 익히게 하였더니, 부내(府內) 사람들도 배우기를 원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민간에 총을 가지고 있는 자가 너무 적고 본부가 가지고 있는 것도 겨우 5백여 자루뿐입니다. 그것을 가지고서야 어떻게 두루 다 쏘는 법을 익히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선 각 진보에 있는 것들을 거두어다 주고 서울에 있는 것을 그대로 나누어 보내면 될 것이다."
하였다. 복양이 아뢰기를,
"어영청이 2백여 자루를 보낼 수 있다고 들었는데, 우선 그거라도 가지고 갔으면 합니다."
하니, 상이 그리하라고 하고, 또 이르기를,
"각 진보는 형세가 어떻던가?"
하자, 중보가 아뢰기를,
"선왕께서는 적이 왔을 경우 후망(候望)이 없어서는 안 된다고 하시면서 신이 유수(留守)로 있을 때 신으로 하여금 각보를 창설하여 후망 장소를 만들게 하시고 또 경군(京軍)을 파견하여 파수하게 하셨으므로 참으로 믿을 만했었습니다."
하였다. 복양이 아뢰기를,
"전일에 쌓았던 둑이 허다한 물력을 들였기 때문에 참으로 견고한데, 그때 쌓지 못한 곳이 세 곳이나 되니 지금 만약 쌓지 않으면 전공(前功)을 버리게 될 것이니 참으로 애석한 일입니다. 속오군을 후한 음식으로 위로하고 그들로 하여금 역사에 임하게 해야 할 것이나, 지금은 또 번고(反庫)를 하고 있어 겹으로 시킬 수도 없습니다. 유심이 유수로 있을 때 쌓아둔 콩 5천 8백 섬이 해묵어 못 쓰게 될 염려도 있고 지금 또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 콩 두 말씩을 주고 한 명씩을 모집하면 역사를 완전히 마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자, 두표가 아뢰기를,
"그게 바로 중보(重普)가 쌓은 것입니다. 선왕께서 생각하시기를, 그 둑을 쌓지 않으면 덕포(德浦) 등의 진(鎭)으로 통하는 길을 빙 돌아가게 되어 왕래하기 어려우므로 일단 유사시 믿을 것이 못 된다 하여, 특별히 중보를 시켜 둑을 쌓아 길을 내게 하고 또 그 둑 안에다가 백성들로 하여금 논을 만들게 했던 것입니다."
하니, 상이 그리하라고 하였다. 복양이 아뢰기를,
"본부가 가지고 있는 화기(火器) 중에 이른바 불랑기(佛狼器)라는 것은 바로 대포 종류인데, 소포(小砲)처럼 자주자주 쏠 수가 있어 실로 화기 가운데 제일가는 화기입니다. 경상도 병영 및 통영(統營)에서 동래(東萊)에 쌓아둔 동철을 가져다가 몇 백 자루 더 만들어 보내게 하소서. 그리고 그러한 화기는 쏘는 방법을 익혀두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다만 화약을 계속 대기 어려우니 동래부에 있는 유황을 지금 올려와야 하겠습니다. 많은 양을 보내도록 명하소서."
하였다. 복양이 또 아뢰기를,
"신이 강화도 지형과 상황을 두루 살펴보았더니, 둘레가 거의 3백 리인데 각 진이 혹 10리 밖에 있기도 하고 혹은 20리 밖에 있기도 하며, 또 산으로 막혀 있어 훤히 바라볼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 적이 조강(祖江)으로부터 배를 이용하거나 혹 떼를 타고 흐름 따라 내려오면 어느 곳이고 배를 댈 수 있어 방어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하니, 두표가 아뢰기를,
"그 전부터 혹 그러한 논의들이 있었는데, 무장(武將) 이완(李浣)·유혁연(柳赫然) 등의 말이 ‘평지에서도 전쟁을 하는데 더구나 배에서 내리고 있을 때 어찌 격퇴하지 못하겠는가. 만약 사람 힘을 쓰지 않기로 말하면 비록 금성탕지(金城湯池)가 있더라도 적을 어떻게 막겠는가.’ 하였는데, 그 말이 참으로 옳습니다."
하였다. 복양이 이어 정포진(井浦鎭)의 형세가 천험임을 극력 주장하니, 상이 이르기를,
"누가 가서 살펴볼 것인가?"
하자, 두표가 아뢰기를,
"밭 가는 일은 종에게 물으랬으니 유혁연 같은 무신으로 하여금 가서 형세를 살피게 하소서."
하였다. 복양이 아뢰기를,
"본부의 사절인(死節人) 구원일(具遠一)은 갑진(甲津) 함락 때 뭍에 내려 싸우려고 유수에게 청병(請兵)을 했는데 유수가 주지 않자 분에 못 이겨 고래고래 꾸짖다가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본부의 사절인 세 명 중에는 그가 제일이기 때문에 맨 먼저 충렬사(忠烈祠)에 들어와 제향되었는데, 다른 두 명은 그의 자손들 상소로 인하여 다 증작(贈爵)을 받았지만 원일은 자손이 미약하여 아직까지 증작이 되지 않고 있으므로 섬 전체의 선비들이 모두 흠전(欠典)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똑같이 증작을 하라."
하였다. 중보·두표가 양호(兩湖)의 유생들이 청한 황산(黃山)의 서원 청액(請額) 건에 대하여, 그것을 허락할 것을 청하자, 상이 이르기를,
"서원이 어느 때부터 시작이 된 것인가?"
하자, 허적이 아뢰기를,
"시작은 백운동 서원(白雲洞書院)부터 시작이 되었고, 때는 인종조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무엇을 하기 위하여 설립한 것인가?"
하자, 두표가 아뢰기를,
"서원은 혹 선현이 장기간 지내던 곳이나 혹은 그가 살던 고을에다 설립하여 선비들이 수양하는 곳으로 삼아왔던 것입니다."
하였다. 좌명이 아뢰기를,
"서원 사액을 겹으로 하사하지 않는 것은 폐단을 없애기 위한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도 그래서 한 말이다. 서원은 한 군데면 족하지 겹으로 설립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다. 서원을 많이 설립해야만 유풍(儒風)이 흥기하고 그렇지 않으면 유풍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선비들이 하늘같이 앙모하는 이로는 선성(先聖) 같은 이가 없으니, 향교에 모여 독서하는 것이 좋지 하필 서원에 들어가야만 그것이 유술(儒術)을 숭상하고 도를 중히 여기는 길이겠는가? 내 생각은 사액하기가 어려워 그러는 것은 아니다."
하였다. 치화가 아뢰기를,
"지난번 대계(臺啓)에 의하여 여러 궁가와 각아문에서 떼어받은 해양(海洋)을 모두 혁파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임해군(臨海君)이 떼어받은 아산(牙山)의 영공(令公) 해양 역시 혁파 대상에 들어 있었는데, 중추부가 조세를 받으려고 입계하여 윤허를 받았습니다. 금방 혁파했던 것을 다시 금방 허락한다는 것은 사체로 보아 온당치 못한 일이지만 중추부는 바로 대신의 아문이기 때문에 신들이 감히 방계(防啓)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이 아뢰었기에 허락했던 것인데 사리로 보아 부당하니 시행하지 말라."
하였다.
호조에 명하여, 고 참판 유계(兪棨)의 상수(喪需)로 쌀 20섬과 무명베 50필을 하사하도록 하였는데, 좌상 원두표의 건의에 따른 것이다.
3월 4일 병인
권대운(權大運)을 승지로, 윤형성(尹衡聖)을 장령으로, 신후재(申厚載)를 지평으로, 홍만용(洪萬容)을 정언으로 삼았다.
3월 5일 정묘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도제조 원두표가 아뢰기를,
"침을 맞고 조섭하려면 4, 5일을 지나야 하니 능행 날짜를 17일로 물려 잡으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침을 맞고 난 후 승지 오정위가 아뢰기를,
"광주 부윤(廣州府尹) 유창이 아비상을 당했는데, 시재 어사(試才御史)가 현재 군병을 모으고 있고 또 능행 날짜도 머지않으니 비국으로 하여금 오늘 중으로 추천하여 차출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김시진(金始振)을 광주 부윤으로 삼았다.
영부사 이경석, 판부사 정유성이 또 상차하기를,
"전후 이변이 겹쳐 생겨 이루 다 셀 수가 없습니다. 요즈음 나타난 것만 말하더라도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 해를 넘기도록 없어지지 않고, 봄에 궂은비가 여름철 장마같이 내리며, 쓰러졌던 잣나무가 다시 일어나는가 하면 암탉이 수탉으로 변하고, 큰 시내에 물이 끊어지고 영동(嶺東)에서는 또 집이 넘어가는 센 바람이 이 때에 불었습니다. 이 모두가 대단한 이변으로서 하늘이 전하께 경고를 내리심이 곡진하게 타이르는 것보다 더하신 것이니, 이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상께서는 의당 수성(修省)을 더하시고 조심하고 두려워하셔야 합니다. 병세가 조금 나으신 이 시기에 날로 상제를 대하듯이 새로운 길을 걸으시고, 자주 대신과 유신들을 불러 경전을 강론하고 나라 다스리는 방법에 대하여도 자문을 구하는 것이 실로 오늘의 급선무이며, 꼭 해야 하고 늦추어서는 안 될 일인 것입니다. 그리고 능침(陵寢)을 살피는 일도 지금은 결코 할 때가 아닙니다. 날씨가 따뜻해지자 전염병이 다시 번지기 시작하여 시골 어느 마을을 가거나 병이 질펀하게 퍼져 있고, 바람은 아직도 차가우며 길마저 멀고 물도 건너야 하는데 그 악조건들을 무릅쓰고 하루내내 돌아다니시고 산야(山野)의 막차(幕次)에서 밤을 지낸다는 것이 지존으로서 신중을 기하는 도리가 아니기에 신들로서는 결코 불가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였는데, 상이 허락치 않았다.
동지사(冬至使)로 갔던 상호군(上護軍) 조형(趙珩), 부호군(副護軍) 권령(權坽), 서장관 정창도(丁昌燾)가 북경에서 돌아왔다.
대사간 김수흥(金壽興) 등이 차자를 올리고, 이어 시정(時政)의 폐단에 대하여 의견을 아뢰었는데, 첫번째는,
"지금 인재가 몹시 모자라 위로 대신에서부터 아래로 서료에 이르기까지 자리가 비었다 하면 후보자를 추천하기가 어려워서 결국 구차하게 충원하고 맙니다. 그런데 어떻게 현부를 가려 취하고 버리기를 바라겠습니까? 그동안 국가가 다사했고 법망이 점점 주밀하여 일찍이 수령을 지냈던 사람도 하찮은 과실에 걸려 거론을 못하고 있는 자가 몇십 명 몇백 명이나 됩니다. 두 전조로 하여금 그러한 사람들을 뽑아내어 대신과 의논한 후 아뢰게 하여, 탕척하거나 감등, 수서(收叙)하면 열 명 중 두서너 명만 골라도 눈앞의 다급한 상황을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고, 두 번째는,
"경기 지역에 대동법을 실시하였으니 국가에서 백성을 위한 뜻이 지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실시한 지 몇 달 안 가서 막히고 구애된 게 많아 계속하기가 어렵습니다. 해당 청으로 하여금 변통 대책을 빨리 강구하게 하소서. 그리고 또 한두 종신(從臣)을 보내 민정을 탐문하면서 관리들이 불법으로 백성에게 해를 끼치는 일을 살피게 하여 권징(勸懲)하는 바가 있게 하소서."
하였으며, 세 번째로는,
"능행 거둥을 멈추시어 여러 대신들의 말을 따르소서."
하였는데, 상이 좋은 뜻으로 답을 내리고, 조항별로 아뢴 일들은 묘당에서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인재가 모자라기가 지금보다 더한 때가 없어 해당 아문이 추천하는 과정에서 사실 구차하게 수나 채우는 실정인데, 이는 폐직당한 자가 자꾸 쌓이기 때문인 것으로 간신(諫臣)이 올린 차자가 무단히 한 말이 아닙니다. 두 전조로 하여금 탈고신(奪告身) 이하의 죄인 및 해유(解由) 또는 월봉(越俸)에 걸린 부류들을 뽑아내어 신들과 서로 의논한 후 기록하여 아뢰어 재가를 받도록 하시고, 또 경기 지역에 양전한 이후 비록 한 결에 너 말의 쌀을 제감하기는 하였으나 각읍의 폐단이 역시 한두 가지가 아니니 사목 내의 막히고 구애된 점은 종전대로 재가하여 해당 청의 당상으로 하여금 경기 감사와 의논하여 되도록 빨리 변통하도록 하실 것이며, 근신이 민정을 탐문하는 일은 근년에 와서는 오래도록 실시하지 않았으니 경기 지역부터 우선 어사를 내보내 백성들의 고질적인 폐단이 되는 정치를 상세히 살피게 하는 일을 그만두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전라·충청 두 도의 유생 송유광(宋有光) 등이 상소하기를,
"신들이 듣건대 7세(世)의 사당에서 덕(德)을 볼 수 있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친(親)이 다하면 당연히 신주를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이지만 덕이 있는 이의 신주는 옮기지 않는 것을 이른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사랑과 은택이 사람을 감동시키고 후세에 전해지기가 충분하고 그리하여 1백 세를 두고 다 함께 존경하고 사랑하고 사모할 수 있는 분이면 세대의 원근이나 정례의 융쇄에 관계없이 그를 반드시 불천(不遷)의 예로 모셔 영구히 숭봉(崇奉)하는 것이 바로 세실(世室) 제도가 만들어진 이유요 목적이 아니겠습니까?
옛 우리 인종 대왕께서는 원래 생지(生知)의 성인으로 하늘이 내신 효자였으며, 춘궁(春宮)에서 덕성을 함양하기 거의 40여 년을 하시다가 급기야 왕위에 오른 지 1년만에 인후하다는 소문이 멀리까지 퍼져 팔도가 기뻐하고 만족해하였던 것입니다. 그의 선조를 받드는 정성과 백성을 사랑하던 은택은 비록 대순(大舜)이 죽을 때까지 부모를 사모했던 일, 문왕(文王)이 백성을 상처입은 사람처럼 보살폈던 일들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도성 안에서는 남녀가 길을 달리하고 늙은이가 짐을 지지 않는 풍속이 거의 이루어졌으며, 중국 사신이 와서는, 도가 크고 덕이 훌륭하여 작은 나라에서는 용납하기가 어렵겠다고 하였으니, 그 겉으로 나타난 영화(英華)와 사람에게 깊이 스며든 교화를 과연 어떻다고 해야 하겠습니까.
하늘이 만약 몇 해의 나이만 더 주셨더라도 삼대의 치화가 다시 우리 나라에 나타날 수 있었는데 불행히도 백성들이 복이 없어 성상께서 갑자기 승하하신 것입니다. 멀리 하늘로 오르시던 날 아무리 깊은 산 막다른 골짜기까지도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울부짖지 않은 이가 없었고, 몇백 년 뒤인 지금도 추모의 정이 가시지 않아 그칠줄 모르고 흐느껴 우는 자도 간혹 있으니, 그야말로 그 깊은 사랑 지극한 은택이 사람의 살갗과 뼈 속까지 스며들어 이른바 죽도록 잊을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성덕이 그러함을 민정으로 알 수 있다면 세실에 모시는 일을 그만둘 수가 있겠습니까?
지난 신축년 조의(祧儀)를 거행하려 했을 때 당시 대신(臺臣) 최유지(崔攸之)가 상소하여, 조천(祧遷)은 불가하다고 극구 말하였으나 날짜가 너무 촉박하고 일도 중대한 일이어서 그 논의가 그대로 잠잠해버렸는데 신들로서는 그것을 저으기 한스럽게 여기는 것입니다. 지금 말하는 자들은 틀림없이 인종은 나라를 누린 날짜가 적어서 공적이 나타나지 못했으므로 성대한 의식을 거행하지 않는 것이 그 때문이라고 하겠지만 신들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덕이란 내적인 것이고 공이란 외적인 것이어서, 그러한 덕이 있는데 그러한 공은 없는 이를 신들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 당시 은택이 얼마나 사람에게 느껴졌는지 그것이야 이루 말할 수도 없거니와 그것 말고도 문(文)을 돕고 도(道)를 중히 여겼던 공로는 더 큰 것이 있습니다. 당시 환후가 있어 궤를 의지하고 계실 때에 조광조(趙光祖)에게 직첩을 도로 주라는 전지를 서둘러 내리심으로써 이미 꺾였던 사기가 그것을 계기로 다시 신장되고 이미 퇴폐한 풍속도 그를 힘입어 다시 순후하게 되어, 지금까지도 나라 운세가 공고하고 종묘 사직이 안정을 누리고 있으니, 사업과 공로가 빛나고 칭송할 만하기가 그보다 더 클 수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세실에 모시는 것을 끝내 궐하고 있으니, 이게 바로 신들이 성세에 대하여 유감이 없을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지금 말하는 이들은 틀림없이 또 이미 조천을 했으니 쉽게 도로 모실 수는 없는 일이라고 하겠지만 신들은 더욱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인종의 성덕이 지극하지 못한 점이 있어 그렇다고 한다면 모르거니와, 만약 그 성덕이 세실에 모셔야 할 정도라면 비록 1백 대가 지난 후라도 당연히 변통의 일이 있어야 할 것인데, 하물며 지금은 소목(昭穆)이 이제 겨우 옮겨졌고 일도 오래된 일이 아니므로 군신 모두가 당연히 서둘러 도로 봉안하고 과거를 뉘우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일이지 어찌 이미 조천을 했다는 이유를 들어 망설이고 있을 것입니까.
옛날 송 희조(宋僖祖)도 이미 조천하였다가 그 후 뭇 유자들의 건의에 의하여 여러 대가 지난 후 도로 봉안하였지만 지금도 그것을 훌륭한 일이었다고 합니다. 이 일은 전하가 하신 일인데 전하가 그것을 고치시면 전하의 효사(孝思)가 끝이 없음을 더욱 나타내는 일로서 잘못될 게 어디 있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빨리 성대한 의식을 거행하시어 하늘에 계신 조종 영령을 위로하시고 온 나라 신민들 소망에 답하소서."
하였는데, 소를 예조에 내렸다. 예조가 아뢰기를,
"지금 이 양호 유생들이 세실로 모시자고 청한 일은 실로 나라 전체의 공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당이라면 일정한 제도가 있고 예에도 절문(節文)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지난 신축년 별묘(別廟)로 조천하던 날 대각의 신하가 숭봉(崇奉)해야 한다는 뜻으로 글월을 올려 의견을 개진한 자가 있었으나 그 당시 대신(大臣)이 전일에 유현(儒賢)이 올렸던 상소문 내의 말까지 거론하면서 결국 그 일이 실현되지 않았던 것인데, 이 막중 막대한 예에 대하여 신 무리들로서는 감히 가벼이 의논하지 못하겠습니다. 다시 대신들과 의논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는데, 영중추부사 이경석, 영의정 정태화, 판중추부사 정유성이 모두 불가하다 하여 그 논의가 실현되지 않고 말았다.
영상 정태화가 병을 이유로 단자를 올리기를 7차에 걸쳐 하였는데, 상이 승지 김익경(金益炅)을 보내 출사하도록 타일렀으나, 나오지 않았다.
3월 6일 무진
영상 정태화가 상소하기를,
"듣건대 지난날 경연에서 옥당의 신하가 대신들의 부직(不職)에 관하여 빠짐없이 논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신이 물론 달게 받겠습니다. 그러나 이행진(李行進) 건에 있어 그의 주장이 ‘대신도 자기 자제들과는 말을 했으면서 급기야 하순(下詢)하자 사실대로 대답하지 않았다.’ 했다는 그 말에 있어서는 신은 모골이 송연하여 곧 땅이라도 뚫고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그것은 틀림없이 일 꾸미기 좋아하여 헛소리를 만들어낸 말들을 귀에 익게 들어왔기 때문에 거기에서 분개하여 그리된 것인데, 신이 평소에 과연 남들에게 믿음을 받았다면 지금 곧 죽을 나이에 어찌 임금을 속인 것으로 의심받을 리가 있겠습니까. 신의 본직과 겸직 모두를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아, 나라 형세가 위태롭고 하늘도 불편한 마음을 가지셨는데 이러한 시기에 어두운 과인의 미치지 못한 점을 도와주고 민생을 어렵고 괴로운 속에서 헤어나게 하려면 경 말고 누가 있겠는가. 지난번 경연 신하가 말한 의견도 나라를 위해 한 말이고, 귀에 들어온 말도 꼭 다 믿을 것이 못되지만 스스로 반성하여 올바르다면 천만 사람이 뭐래도 나는 가리라고 했는데, 그리하면 될 게 아닌가? 모름지기 이 지극한 뜻을 깊이 생각하고 빨리 나와서 치도를 논해 목타듯이 바라는 이 마음에 실망을 주지 말라."
하고, 사관을 보내 유지를 전하였다.
경상 감사 이상진(李尙眞)이 치계하기를,
"각읍의 기민(飢民) 수가 통계 7만 4천 1백 5명인데 날마다 엄히 단속하여 각별히 구제하고는 있으나 지금 민간에는 극심한 춘궁기여서 뿌리박고 사는 백성이라 하여 기민 축에 끼지 못한 사람이라도 너무 가난하고 굶주린 자는 그를 세밀히 골라내어, 으레 급여하는 8결을 기준으로 한 환자곡 외에, 한 달에 한두 번씩 별도로 조곡을 계속 주고 있고, 전염병에 걸린 자 1천 5백 29명에 대하여는 종전 규정대로 건량(乾粮)을 주어 그들 겨레붙이나 이웃에서 보살펴 주도록 하고 있는데, 기민 병민이 날로 불어나고 있어 앞으로 진구책을 계속하자면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사안을 진휼청에 내렸다. 진휼청이 회계하기를,
"기민과 병민의 수는 점점 많아지고 죽 먹일 거리는 계속 대기가 어려운 형편이어서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종전에 재가하신 대로 곳곳에 죽 쑤는 곳을 두고 낱낱이 나누어 먹여 굶어죽는 걱정은 없도록 하게 하고 끼니가 끊긴 자에 대하여 별도로 조곡을 계속하고 환자곡을 급여하는 일, 또는 전염병자를 돌보아 살리는 일 등은 매우 잘한 일이니 그대로 거행하라는 뜻으로 회이(回移)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전 좌랑(佐郞) 조임도(趙任道)가 죽었다. 임도는 영산(靈山) 사람으로 참찬 장현광(張顯光) 문인인데 명예가 꽤 있었기 때문에 우찬성 송시열이 이조 판서로 있으면서 탑전에서 아뢰어 곧 6품으로 올랐다가 지금 와서 죽은 것이다. 상이 본도로 하여금 그의 상수(喪需)를 주게 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국가가 해마다 가뭄으로 인한 흉년을 염려하여 다시 제언사(堤堰司)를 두어 수리(水利)를 일으키게 했는데, 매우 잘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외지의 호활한 무리들이 혹 거짓 민정을 핑계로 열명(列名)한 소장을 본 관아에 올리고는 역군을 외방에서 얻어내어 저들 멋대로 공한지를 점유하고 그 이익을 독차지하려 하기 때문에 도리어 백성에게 해를 주고 있다니, 그를 엄히 금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지금 이후로는 비록 소장을 올린 자가 있더라도 본 관아로 하여금 본읍에다 그 사실 여부를 조사하여 처리하게 함으로써 뒤 폐단을 막으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도제조 원두표, 제조 허적이 상의 안질이 낫지 않았다 하여 능행을 정지하도록 청했는데, 상이 가을로 능행을 물려 잡도록 명하였다.
성균관이 아뢰기를,
"일찍이 선왕조에서 홍문관의 아룀에 따라 전 집의 최유지(崔攸之)로 하여금 혼천의(渾天儀)를 만들어 대내로 들어오게 하였다가 그 후 또 누국(漏局)에다 내다두었는데, 지금 듣기에 유지가 만든 것이 고쳐야 할 곳이 있다고 하니 누국으로 하여금 그것을 성균관으로 옮겨와 제생들과 서로 의논하여 고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황해도에 여역이 크게 번져 현재 앓고 있는 자가 2천 5백 19명이고 사망자도 3백 60명에 이르렀다.
제언사가 본 관아의 낭청을 보내 경기·황해·충청도 등지의 제언에 대하여 적간하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3월 10일 임신
정언 홍만용(洪萬容)이 지난날 본원 차자에 임금의 귀와 눈이 삼사에 붙여져 있는데 요즘은 임금이 하는 대로 입 다물고 있는 것이 풍습이 되었다는 등의 말이 있었다 하여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대사간 김수흥(金壽興)이 인피하고 아뢰기를,
"신이 못난 위인으로 간직(諫職)에 발탁된 후 위로 보답하려고 해도 길이 없고 두렵고 부끄러움만 쌓이기에 다만 작은 정성을 보이기 위하여 짧은 차자를 올렸던 것인데, 뜻하지 않게도 띄워놓고 시폐를 논한 말이 도리어 동료들의 인피 자료가 되고 말았으니, 이야말로 이른바 함께 목욕하면서 벌거벗은 것을 흉보는 격으로, 신이 어떻게 감히 편안한 마음으로 처치를 하겠습니까? 신의 직을 체차하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가주서 조시원(趙時瑗)이 돌아와, 우찬성 송시열, 대사헌 송준길, 호군 이유태가 모두 병을 이유로 사양하고 오지 않았다고 아뢰었다.
3월 11일 계유
장령 윤형성(尹衡聖)이 밖에서 들어왔다가 정언 홍만용의 피사(避辭)를 보고는 역시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승지 오정위가 아뢰기를,
"요즘 입계한 상소문에 대하여 비답을 내리지 않은 것이 많고 영릉(寧陵) 봉심 날짜가 앞에 닥쳤는데도 예조 판서 상소에 대한 비답도 내리지 않아 감히 아뢰는 바입니다."
하였으나, 상이 답이 없었다.
3월 12일 갑술
장령 송창(宋昌)도 임금이 하는 대로 입 다물고 있었다 하여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이단상(李端相)을 사간으로, 황도창(黃道昌)을 경상 우병사로, 이상경(李尙敬)을 충청 수사로 삼았다.
3월 13일 을해
정언 정재숭(鄭載嵩)도 임금이 하는 대로 입 다물고 있었다 하여 인피하고 믈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부제학 이경억(李慶億), 교리 오시수(吳始壽), 부수찬 남이성(南二星)이 상차하기를,
"간신(諫臣)의 차자는 시속 폐단에 대하여 범연하게 논하여 앞으로 더 노력하자는 것에 불과한 것이었으니, 그렇다면 각자가 더욱 더 정신을 가다듬고 서로 격려하여 일이 있을 때마다 할 말을 다 함으로써 자기 직책에 맞는 일을 하면 그뿐 아니겠습니까. 세상을 걱정하여 말을 올리는 것은 상대를 경계하고 깨우치자는 뜻인데 여러 신하들의 인피 이유가 바로 그 차자 내용 때문이라면 그를 감히 처치할 수 없는 것은 당연히 그럴 수 밖에 없는 일입니다. 정언 홍만용, 장령 윤형성·송창, 대사간 김수흥, 정언 정재숭 모두를 출사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성균관이 이달 3일에 실시할 유생들 제술에 있어 수석을 한 생원 이후징(李厚徵)을 곧바로 회시(會試)에 응하게 하였는데, 이는 지난 3일에 다른 일이 있어서 제술을 이날로 물려 한 것이다.
3월 14일 병자
유학(幼學) 조해(趙楷) 등이 상소하여 서필원(徐必遠)을 공척하면서 주장하기를,
"요즘 들어 빗나간 논의들이 날로 번성하고 공정한 언론은 길이 막혔으며, 인욕(人慾)이 판을 치고 천리(天理)는 없어졌습니다. 스스로 옳다는 편파적 주장으로 유현(儒賢)을 업신여기며 욕하고 있는데, 그의 말이 만약 행해진다면 사람도 사람 꼴이 아닐 것이고, 나라도 나라 꼴이 아닐 것이니, 그게 바로 이적(夷狄)으로 빠져들고 금수(禽獸)의 세계로 가는 지름길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는 내용의 매우 장황한 말을 하였는데, 상이 도로 내주라고 명하여, 승지 홍처대와 원만석이 상소 내용이 비록 과격하기는 하나 선비들의 상소를 내주는 것은 온당치 못한 일이라고 하였으나, 상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옥당의 장선징·남이성이 청대하여 아뢰기를,
"국가는 유학자를 당연히 남달리 우대해야 하는데 그 소를 도로 내주면 소문으로 듣고 놀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필원의 망령스런 행위에 대해서는 책할 것도 없지마는 바깥 논의들 역시 내 뜻을 모르는 것이다."
하고, 그 소를 도로 받아들이라고 명하였다가 그로부터 5일 후 비답을 내리기를,
"필원의 미치광스러운 상소에 대해서야 깊이 나무랄 것이 뭐가 있겠는가. 그리고 그대들이 한 말도 타당치 못한 것들이 많은 것이다. 그대들은 물러가 학업을 닦으라."
하였다. 선징이 입시하였을 때 또 아뢰기를,
"신이 이번 보령(保寧)에 내려갔을 때 연로(沿路) 수령들 말을 들으니, 백면지(白綿紙) 그 한 가지가 가장 폐단이 있었습니다. 비록 해조의 지양(紙樣)과 똑같은 것을 준비하여 올려보내도 서울에 도착된 뒤에는 곧 퇴짜를 맞는 일이 있고 퇴짜를 맞고 나서는 혹 서울에서 곱이나 비싼 값으로 사서 바치기 때문에 민폐가 더욱 심하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무슨 변통이 있어야겠습니다. 듣기에 대동미(大同米) 여분이 많은 수량이 남았다고 하고 또 서울은 모든 물건이 모여드는 곳이어서 제값만 주면 물건들이 다리가 없이도 다 오고 있으므로 신의 생각 같아서는 백면지 값을 정해놓은 값 외에 적당히 더 주고 서울에서 구입하면 민폐도 자연 없어질 것이고 나라 일에도 해가 없을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애당초 각읍에다 나누어 배정한 것은 뜻이 있어 한 일이다. 아직은 일단 종전대로 외방에다 나누어 배정하고, 퇴짜당한 종이에 있어서는 그것을 본읍으로 내려보내지 말고 해당 청이 소유하고 있는 쌀로 값을 치르고 사들여 해조로 실어 보내라. 정해놓은 값 외에 적당히 값을 더 주고 서울에서 사들이는 것과 그 둘을 놓고 편리 여부를 해당 청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라."
하였다.
경상도 의성(義城) 고을 민가에서 소가 암송아지를 낳았는데 머리 하나, 발 넷에 눈이 셋이고 코가 둘이었다. 낳은 지 나흘만에 저절로 죽었다.
3월 15일 정축
대사간 김수흥이 유생 조해 등이 글월을 올려 서필원이 윤리를 어지럽히고 현인을 모욕한 죄를 바로잡을 것을 청하고 또 ‘저들끼리 서로 편당이 되어 잘못한 일도 감히 바로잡지 못한다.’ 하는 등의 말로 삼사(三司)를 공척했다 하여, 자신이 간직에 있으면서 그러한 뜻밖의 공척을 당했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고, 장령 윤형성·송창, 정언 정재숭도 그 일로 하여 인피하였다. 헌납 안진(安縝)은 서원(西原) 임지로부터 부름을 받고 올라왔다가, 본원의 차본(箚本)에 대간들 직무 이탈에 관한 폐단을 말하면서 ‘정사가 있을 때면 반드시 외임(外任)도 함께 의망할 것을 청하나 급기야 낙점된 것을 보면 더러 인망(人望) 이외의 인물이 나오기도 한다.’ 한 내용이 있었는데, ‘외지로부터 부름을 받았고, 인망에는 맞지 않는다.’ 하는 등의 말 때문에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3월 16일 무인
상이 안질 때문에 침을 맞았는데, 혹자는 전하기를, 후원(後苑) 행차가 잦아 그 때문에 안질이 더 심해진 것이라고 하였다.
경상도 곤양(昆陽)·남해(南海)·하동(河東)·진해(鎭海)·웅천(熊川)·거제(巨濟) 등 읍에 지진이 있었다.
3월 17일 기묘
정언 홍만용이 유생들로부터 헐뜯음을 당했다 하여, 역시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수찬 남이성이 상차하여, 대사간 김수흥, 장령 송창, 정언 홍만용, 헌납 안진은 출사하게 하고, 장령 윤형성, 정언 정재숭은 체차할 것을 청하자, 그대로 따랐다.
이조 참판 윤문거(尹文擧)가 병을 이유로 상소하고 사직하여 체직되었다.
3월 18일 경진
윤순지(尹順之)를 우참찬으로, 남용익(南龍翼)을 도승지로, 오정위(吳挺緯)를 평안 감사로, 장선징을 장령으로, 맹주서(孟胄瑞)를 지평으로, 윤우정(尹遇丁)을 정언으로, 윤심(尹深)을 수찬으로 각각 삼았다.
3월 19일 신사
사간 이단상(李端相)이 전후 추감(推勘)을 끝마치지 못했다는 이유로, 헌납 안진은 소명에 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다 인피하였다.
강원도 원주(原州)·횡성(橫城) 땅에 서리가 내려 곡식이 손상을 입었다.
전라 감사 정만화(鄭萬和)가 사조(辭朝)하니,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본도가 인물(人物)로는 팔도에서 가장 대단한 곳이니 흩어진 백성들을 안집시키는 책임에 있어 경은 마음을 다하라."
하니, 만화가 답하기를,
"신이 재능은 비록 모자라지만 감히 마음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작년 재실(災實) 문제를 본도가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은 것이 많은데, 경은 인수인계 관계로 하여 구애받지 말고 사실대로 아뢸 것이며, 진휼 문제도 단단히 생각해야 할 것이다."
하니, 만화가 답하기를,
"전임 감사가 재실을 사실대로 보고 하지 않은 잘못은 있을지라도, 혹자가 말한, 전혀 굶주린 백성이 없었다고 한 것은 그도 사실과 다른 것같습니다. 신이 어떻게 감히 인수인계에 구애받아 아뢰기를 사실대로 하지 않겠습니까. 들리는 바로는 연해(沿海) 각읍이 꼭 다 흉년인 것은 아닌데 그 중에서도 굶주림이 심한 곳을 찾아 죽을 쑤어 기민을 먹이자면 허실이 서로 엇갈리는 폐단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진휼청에서는 그것을 염려하고 있으나 다만 죽을 쑤어 기민을 먹인 후 거기에 소요 되었던 곡식을 진휼청이 만약 회감(會減)027) 하지 않고 가을에 가서 징봉(徵捧)한다면 그는 국가 체면으로 보아 매우 온당치 못한 일입니다."
하자, 승지 권대운이 아뢰기를,
"죽 쑤어 기민을 먹이고는 그 곡식을 도로 징봉한다는 것은 국가 체면으로 보아 과연 온당치 못한 일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호남 지방이 크기가 영남에 비하여 어떤가?"
하니, 만화가 답하기를,
"영남은 넓이가 매우 큽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땅이 비옥하기는 호남이 더 나은가?"
하니, 만화가 대답하기를,
"땅도 영남에 비하면 더욱 좋고 인물도 영남보다 많습니다. 그런데 영남은 인심이 두터웁고 진실하여 옛날부터 혁호(革號)의 변이 없었고, 호남은 인심이 교활하고 속임수가 있어 허위적인 풍습과 옥송(獄訟)의 폐단이 그칠 날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군대는 영남에 비하여 어떠한가?"
하니, 만화가 아뢰기를,
"호남은 군대가 모두 정예하고 강하지만 마음이 교활하고 속임수가 있기 때문에 병자년 난리에 영남 군대는 싸움에서 패한 후에도 다시 모였으나 호남 군대들은 다시 모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근래 호남에다 신법(新法)을 시행하고 있는데 잘 봉행(奉行)하기가 참으로 어려울 것이어서 신이 그 때문에 두렵고 민망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동(大同)의 법을 착실히 거행하도록 하라."
하고, 이어 납약(臘藥)·궁전(弓箭) 등의 물품을 하사하였다.
경상 감사 이상진이 치계하기를,
"각읍의 기민이 통계 11만 3천 4백 38명인데 그들에게 죽을 먹인지 이미 50일이 지났습니다. 지금 봄갈이가 한창이어서 꼭 권농(勸農)을 해야 할 것이기 때문에 귀농(歸農)을 자원한 자에 대하여는 신축년에 하던 예대로 건량(乾糧)을 주어서 돌아가 농사에 임하게 하고, 그대로 죽 먹기를 원한 자는 종전과 똑같이 죽을 먹이고 있으며, 그 밖의 녹(祿)이 끊긴 전직자로서 궁하게 살면서 끼니가 끊긴 사람, 또는 행의(行誼)가 남다르면서도 너무 가난하게 사는 자로서 공론에 오른 사람이면 그들 명단을 뽑아 별도로 진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병에 걸린 자 4천 2백 84명에 대하여는 종전대로 건량을 주어 이웃이나 겨레붙이가 각별히 돌보고 농삿일도 도와주도록 하고는 있으나 기민·병민이 가면 갈수록 더욱 불어나 앞으로 그들을 구제하려면 두루 손이 미치지 못할 염려가 있어 그것이 매우 민망스럽고 걱정되는 것입니다."
하였는데, 그 사실을 진휼청에 내렸다.
3월 22일 갑신
윤강(尹絳)을 판윤(判尹)으로, 조계원(趙啓遠)을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조수익(趙壽益)을 형조 참판으로, 송시철(宋時喆)을 사간으로, 이유(李秞)를 장령으로, 장선징(張善瀓)을 헌납으로, 소두산(蘇斗山)을 지평으로 각각 삼았다.
관학(館學) 유생들 고강(考講) 시제(試製)의 규정을 정하였다. 처음에 대사성 민정중(閔鼎重)이 아뢰어, 그에 따라 상이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여러 대신과 의논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영중추부사 이경석(李景奭), 판중추부사 정유성(鄭維城), 영상 정태화(鄭太和)가 다 의논을 드렸는데 태화의 의논이,
"대사성 민정중의 건백(建白)에 따라 유생들의 고강 성적이 20분(分), 제술 성적이 10분 이상인 자를 뽑아 아뢰라고 하신 것은 비록 격려와 권장의 뜻에서 나온 것이지만 그것은 전에 없었던 일입니다. 만약 민정중이 탑전에서 아뢰었던 말대로 상께서 혹 별도로 전강(殿講)을 연다거나 승지 또는 대제학을 특별히 보내 강경 시험과 제술 시험을 보여 별도의 상격(賞格)을 두기로 한다면 그 규모와 체제가 과중하고 유생들로서도 초시(初試)에 급분(給分)하고 마는 정도를 바라지는 아니할 것이며 종당에는 남상(濫觴)의 폐단이 있을 염려도 있는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차라리 유학(幼學)들이 강경·제술을 거쳐 감시 초시(監試初試)에 응시할 수 있게 되는 예처럼 고강·제술에 있어 우등자 각 5명을 뽑아 성균관이 그들 획수를 정확히 기록하여 예조에 보고하고 재가를 받아 동당 초시(東堂初試)에 참여토록 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하여, 상이 이르기를,
"영의정 논의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3월 24일 병술
헌납 장선징이 추감(推勘)을 끝마치지 못한 이유로 인피하였다가 체직되었다.
강원도 정선군(旌善郡)에 우박이 내렸다.
3월 25일 정해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병조 판서 김좌명이 아뢰기를,
"우상의 상소에 대하여, 영상이 출사하기를 기다려서 여쭈어 처리하라는 하교가 일찍이 있었기에 감히 아뢰는 것입니다."
하고, 정태화가 아뢰기를,
"경기도 대동미는 12말을 징수하고 부역도 그 내에서 산출하기로 이미 여쭈어 정한 것인데, 홍명하가 질애(窒碍)의 폐단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그 소를 올린 일이 있었으나 그 법이 처음 논의될 때부터 이미 그 질애에 대한 염려는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을 맡았던 신은 혹은 사고가 있고, 도신(道臣) 역시 갈리어서 자세히 의논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백면지(白綿紙) 한 가지 일만 하더라도 신의 생각은 처음부터 각관에다 나누어 배정하는 것이 옳다고 했으므로 지금까지도 당초 견해에 변동이 없지만 현재 뭇의견들은 다 폐단이 있다고 하니 신이 어떻게 감히 종전 소견을 고집하여 마치 이기기 좋아하는 자 같이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당연히 충청도부터 먼저 변통해야 할 것인데 반드시 잘해야만 시행이 가능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선 호서부터 먼저 변통하라."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경기도 대동미를 12말을 징수하면 쌀이 부족하여 지용(支用)이 어려울 것입니다. 만약 부마(夫馬) 값을 상평청에서 주기로 하면 그렇게 시행해도 될 것입니다."
하고, 태화가 아뢰기를,
"애당초 12말로 정할 때는 큰 줄거리 만을 생각했던 것인데 지금 와서 자세히 헤아려보니 쌀이 매우 부족합니다."
하고, 정치화가 아뢰기를,
"12말로 정할 때 이미 모든 잡역(雜役)까지 모두 그 속에 포함시키기로 한 것인데 지금 와서 다시 쌀을 더 징수하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12말 외에 더 징수해서는 안 되고 부마 값을 상평청에서 주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칙사(勅使) 때의 마부와 말은 각읍이 말 가진 자를 기록하여 두었다가 내놓도록 책임을 지우되, 해당 지역의 잡역 의무를 지닌 백성들[煙戶]로 하여금 내놓게 한다면 말 가진 자가 견딜 수 없을 것이고 그 폐단 또한 적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좌명이 아뢰기를,
"만약 전결(田結) 수에 따라 말을 내놓도록 하면 결역(結役)028) 으로 내놓는 게 너무 많아 종전과 다를 게 없을 것입니다. 우상도 언제나 결역이 종전과 같을까 염려하여 12말 내에다 잡역까지 모두 포함시키자고 했던 것이니 우상이 돌아오기를 기다려 다시 의논하여 정하도록 하소서."
하고, 태화와 원두표도 우상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것을 청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민정중이 아뢰기를,
"대간은 바로 임금의 귀와 눈입니다. 무릇 인피가 있을 때면 즉시 처치하는 것이 전례입니다. 지금은 처치가 혹 여러 날 가기도 하고, 또 헌부도 회의하지 않은 지 이미 오래되어 추감이 적체되고 있으며, 이조는 참의 혼자서 정사를 해온지 한 달이 지났고, 형조와 예조는 판서 이외에 다른 관원이 없습니다. 나랏일이 어찌 이럴 수 있겠습니까. 성상께서 지나치게 너그럽고 인후하여 오로지 덮어두려고만 하기 때문에 신들이 비록 그 사실을 고하여도 효과가 없는 것입니다. 신은 항상 영상과 그에 대해 언급하면서 민망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하고, 태화가 아뢰기를,
"대사헌은 작년 7월부터 공무를 집행한 자가 없습니다."
하고, 두표가 아뢰기를,
"근래에는 대간을 차출하는 과정에서 이조가 반드시 수령들을 대상자로 아뢰어 차출하고, 차출한 후에는 또 추고하여 체임을 당하곤 하는데, 지금부터는 삼사의 후보 추천에 있어서 외임(外任)은 제수하지 말도록 하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추고 문제로 늘 시끄럽기 때문에 그를 변통하기 위하여 탕척하였던 것이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선왕조에서는 언제나 대간이 추고를 당하고 인피하면 곧 추고를 기각하라는 특별 명령이 있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정원은 그 뜻을 잘 알고서 대관이 인피할 때 반드시 무슨 일 때문에 추고를 당한 것이라고 분명하게 내용을 밝히도록 하라."
하였다. 정중이 아뢰기를,
"인재 부족하기가 요즘보다 더할 수가 어디 있겠습니까. 농사철에는 수령을 이동시키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이고, 양호(兩湖)에 있어서는 현재 진정(賑政)이 있어서 더욱 갈아서는 안 되는데 사세 부득이하여 추천 대상자로 아뢰어 청하지 아니할 수 없었으니, 그게 얼마나 앞뒤를 잃고 구차하고 소략한 정사라는 것을 신 자신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신의 말이 지금 또 저러하니 너무도 황공합니다. 그리고 신이 병이 많고 재주는 부족한데다 겸임하고 있는 일이 너무 많아 근력도 정신력도 그를 주선하고 관리할 수가 없습니다. 바라건대 대신에게 물어 신이 겸임하고 있는 모든 직무를 체차하소서."
하니, 태화·두표 등 모두가 대사성을 겸임하고 있는 것은 체차하는 것이 옳다고 하여, 상이 그를 허락하였다. 상이 예조 판서를 불러 앞 가까이 오게 하고 이르기를,
"외가(外家)의 종손 장선연(張善淵)의 아내가 병자년 난리 때 실절(失節)을 하여 그의 자식으로 제사를 받들게 할 수 없고 그의 아우 장선함(張善涵)이 대신 종사(宗祀)를 이어가게 하도록 예조는 알고 있으라."
하였다.
영상 정태화, 좌상 원두표 등이 아뢰기를,
"고 참판 유계(兪棨)의 상사에 있어 지금 자기 고향인 임천(林川)으로 반장(返葬)을 하려는데 가난해서 운구(運柩)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일이 매우 불쌍하게 되었으니 바라건대 선왕조에서 고 판서 김익희(金益熙)의 상사 때 담군(擔軍)을 관에서 주었던 전례에 따라 경기·충청 두 감사에 분부하여 그들로 하여금 운구하여 보내주게 하소서."
하여, 상이 그를 허락하였다.
김중일(金重鎰)을 동부승지로, 오시수(吳始壽)를 헌납으로, 정재숭(鄭載嵩)을 지평으로 삼았다.
3월 26일 무자
충청 감사 이익한(李翊漢)이 사조(辭朝)하였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인견하고 이르기를,
"경이 수임한 곳은 바로 기보(畿輔)의 문호(門戶)에 해당하는 곳인데 근년 들어 흉년이 잦아 적자(赤子)들이 유리분산하고 있으니 그들을 안집시키고 무마하는 일에 있어 경은 마음을 다하라."
하니, 익한이 아뢰기를,
"감히 하교하신 대로 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삼남(三南) 중에서는 본도가 비록 작지만 다른 도에 비하면 그래도 큰 편이다."
하니, 익한이 아뢰기를,
"주현(州縣)이 54개나 됩니다. 작년에 농사가 비록 잘되지는 못하였지만 큰 흉년까지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현재 심한 춘궁기여서 죽을 쑤어 진구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번신(藩臣)의 계문(啓聞)은 지나치게 사실을 과장하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사실을 과장하거나 허세를 부리는 것이 옳지 못하기는 일반이다. 경은 잘 처리하라."
하니, 익한이 아뢰기를,
"위에서 하늘이 들으실 일을 신이 어떻게 감히 속일 것입니까. 그리고 신이 일찍이 제주 목사(濟州牧使)로 있어 보았는데 그 고장도 변통해야 할 폐단이 많았습니다. 제주가 멀리 바다 밖에 있어 임금의 덕화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민심을 수습하기가 어렵습니다. 일찍이 인조조에서는 특별히 어사를 보내 문무재(文武才) 시험을 보이고, 본주 사람 오섬(吳暹)이 뽑히자 인조께서 특명으로 급제를 내렸었는데 사람들이 지금까지 그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옛날 하던 대로 관원을 파견하여 시험을 보임으로써 격려하고 권장하소서. 목사를 으레 문관(文官)·무관(武官)으로 번갈아 임명하기 때문에 목사가 만약 문관일 때는 훈도(訓導)와 함께 유생의 제술 과정을 설행하고 해마다 두 명을 선발하여 승보(陞補)를 하는데 거기 입선한 자면 마치 등과(登科)라도 한 듯이 서로 경사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목사가 무관일 때는 그것을 폐지해버리고 실시를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크게 실망하는 것입니다.
대체로 그 고을 토풍(土風)이 이름은 비록 유(儒)를 표방하고 있으나 하는 일들은 말 달리고 사냥하는 것이 전부이고, 혹 배우기를 원하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미 권과(勸課)의 길이 없으니 어떻게 성취가 되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목사가 만약 무관일 때는 판관(判官)을 반드시 문관으로 보내 권과를 폐지하지 않게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그 모두를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고, 또 그곳 풍속은 어떠냐고 물었다. 익한이 답하기를,
"백성들 풍속은 모두 공(工)을 업으로 하고 있으며, 비록 여자라도 반드시 종립(騣笠)029) 을 만들어 육지에 내다가 팔아 먹고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본주에 전선(戰船)이 있는데 그 폐단이 말도 못합니다. 제주의 바다는 타지역의 바다와 달라 밀물 썰물이 없고 파도가 항상 하늘에 닿고 있는데 어떻게 전선을 쓰겠습니까. 더구나 적의 배가 왔을 때 적선이 만약 순풍이면 전선은 역풍을 만나게 되고 우리 쪽이 순풍일 때는 적은 물론 올 수가 없어 전선은 사실 쓸모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번번이 만들고 있어 결국은 썩고 마는 것입니다. 그것도 마땅히 변통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역시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제주(濟州)의 시재 어사(試才御史)에 대하여는 일찍이 조종조에서도 별도로 보내던 때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 구례를 따라 문무를 격려하고 권장하는 뜻으로 들여보내 조만간 시재를 하게 하고 그 시재 절목에 있어서는 해조가 여쭈어 분부를 받아 거행하도록 하며, 목사·판관을 문관·무관으로 번갈아 임명하는 것도 역시 해조가 그대로 시행하도록 하소서. 전선 문제에 있어서는, 실용가치는 없고 큰 폐단만 있다고 일찍이 전임자들도 아뢴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로부터 설치한 것이 의도가 있었을 것이므로 별안간 변통하기는 어려운 점이 있어 지금까지 끌어온 것입니다. 그런데 눈으로 본 사람이 그렇게 사실을 말하고 있으니 그곳 목사를 지냈던 사람들에게 조용히 물어보고 다시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하여, 상이 그대로 윤허하였다.
평안도 이산(理山)에 서리가 내려 곡식이 피해를 입었다.
3월 27일 기축
용안 현감(龍安縣監) 이단하가 부교리로 부름을 받고 서울에 들어와 상소하기를,
"신이 작년 7월에 처음으로 그곳에 부임하였는데 그때는 가뭄이 너무 심하여 전야(田野)가 다 타버렸습니다. 7월 중순에 비록 비가 내리기는 하였지만 가뭄의 피해가 이미 극에 달한 뒤여서 추수할 가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서리가 늦게 내려서 타고 남은 곡식은 수확할 수가 있었는데, 그래도 흉년인 것은 확실하였습니다. 다행히도 성상께서 백성의 굶주림에 대하여 특별 진념하여 부역(賦役)을 견감하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였기 때문에 궁한 백성들이 조금은 살길을 얻고 저들이 수확한 곡식으로 설밑까지는 목숨을 이어갈 수 있었으며, 초봄에 와서는 또 진대(賑貸)의 정책을 시행하여 흩어지게 된 백성들이 그를 믿고 제 고장을 지키면서 구렁에 굴러떨어지는 것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바로 구제 정책을 제대로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 국운이 불행하여 4∼5년 동안 연거푸 큰 흉년을 만났고, 작년 가뭄은 또 그렇게도 참혹하여 목민관(牧民官)·임사관(任事官)으로서 깊은 걱정, 지나친 계책, 무엇인들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서리가 내린 후 감사가 재실(災實)을 조사한 결과 신축년보다는 낫다고 아뢴 것이니, 어찌 처사를 잘못한 과실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진정(賑政)을 시작할 때 기민이 아주 적었던 것은, 기민이 아니면서 버젓이 등록을 하는 폐단이 있을까 감사가 염려하여 당초 기민을 뽑을 때 곡식을 일단 대여했다가 다시 받아들인다고 말을 하였기 때문에 원입자(願入者)가 과연 적었던 것이고, 급기야 죽을 쑤어 거져 준다는 영을 듣고서는 원입자가 많아지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다만 진미(賑米)가 넉넉하지 못하기 때문에 심한 자만 골라 죽을 쑤어주고 그 나머지는 다만 곡식을 대여하여 구제하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조정에서는 먼 지방 백성들 사정은 살펴보지도 않고 단박에 재해 보고가 지나치게 사실을 과장했다 하여 도신(道臣)에게 죄를 내리기까지 하였으니 이제부터 비록 금년보다 더한 흉년을 만나더라도 재해를 숨기고 다시는 아뢰어오지 않을까 신으로서는 염려가 됩니다.
신도 이미 수령으로서 함께 거짓 보고한 축에 들어 있습니다. 누누한 이 말은 결국 자기변명을 위한 것이 되고 말 뿐이니, 어떻게 위아래의 믿음을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지금 이 소를 보니 비단 자기변명 뿐이 아니고 도주(道主)까지 감싸고 있어 그 태도가 좋지 못하다. 단하를 체차하도록 하라."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단하의 상소문은 백성들 사정을 대강 말한 것으로, 그의 말은 비록 수용할 것이 없을지라도 단박에 꺾어버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였으나, 상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처음에 전라 감사 조귀석(趙龜錫)이 각읍의 보고에 의하여 본도 흉년 상황을 아뢰어왔는데, 귀석이 거짓 보고를 하였다 하여 대신이 탑전에서 아뢰었고, 뒤이어 대간이 탄핵하여 귀석을 파직시켰기 때문에 단하가 지금 이렇게 말한 것인데, 상은 단하가 자기변명을 하고 또 귀석까지 두둔하고 있는 것으로 의심하였다. 그후 양사(兩司)가 다 특체(特遞) 명령을 도로 거둘 것을 청했으나, 끝까지 듣지 않았다.
평안도에 전염병이 성하게 번져 병자가 3백 50명, 사망자가 23명이었다.
제주에서 씨말[種子馬]로 암수 모두 50필을 가져다가 강화(江華)·진강(鎭江)의 목장에다 방목하고, 또 진강의 잡종말을 골라내어 장봉도(長峰島)로 옮겨 방목하였다.
3월 28일 경인
함경 감사 서필원이 상소하기를,
"신이 유학(幼學) 조해(趙楷) 등의 상소 및 조보(朝報) 내의 양사가 인피한 내용을 보고 너무나 놀랐습니다. 조해 등 동유(童儒)들 소견이야 말할 것이 없다 하더라도 조정의 사대부들마저 그런 말을 한단 말입니까. 신이 지난날 소를 올리고 나서 사람을 통해 들은 얘기지만, 《예기》 단궁편(檀弓篇)에 그 일에 관한 기록이 매우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만약 한가한 기회에 한번 살펴보시면서 사(仕) 불사(不仕) 등의 구절을 자세히 음미해보면 신이 죄가 있고 없고가 자연적으로 천감(天鑑) 앞에 환히 나타날 것입니다. 《주례》에서 논한 것은 본디 변치않는 떳떳한 도리이고, 《예기》에 이른 것은 바로 시대에 따라 알맞게 한 교훈인데, 주공(周公)·공자(孔子)가 똑같은 성인인 바에야 세상의 모범으로 후세에 남긴 기록을 어찌 이것이다 저것이다를 가려 취하고 버리고 하겠습니까.
대체로 사람이 벼슬하기 이전에는 사은(私恩)이 제일이어서 공의(公議)를 논할 겨를이 없는 것이고, 이미 벼슬한 후에는 공의가 더 중하여 사은은 빼앗김을 당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자연의 도리일 것입니다. 지금 벼슬하지 않았거나 이미 벼슬하였거나는 따지지 않고 한결같이 사은만을 제일로 삼기로 하면 공과 사 사이에서 한 쪽은 너무 중하고 한 쪽은 너무 경한 폐단이 있게 될 것인데, 신의 전일 상소는 바로 그것이 두려워서 한 상소였습니다. 그런데 조해 등이 이해를 못하고 마치 신이 교묘한 방법으로 남을 꾸짖고 헐뜯으며 애써 유현(儒賢)을 배척하는 자인양 취급하고 있으니, 그들의 음험한 심보가 아, 너무 심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래도 핑계댈 데나 있는 것이, 나이 젊은 사람으로서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아첨하려고 사리에 닿지 않는 말을 한 것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양사의 피혐 내용에서는 신을 의리에 전혀 깜깜하고 말을 뒤틀리게 꾸몄다고 공척하였습니다. 그들의 운운한 말이 신의 무슨 말을 두고 한 말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지난날 신이 올린 상소 내용이 비록 거칠기는 하였으나 거슬러 찾아보면 바로 《예기》에 실마리가 있는데, 의리가 어찌 전혀 깜깜하고 만들어진 말들이 어찌 뒤틀린 것뿐이겠습니까. 그런데 여럿이 떠들어대니까 그를 살피지도 않고 게다가 또 일이 유현(儒賢)과 관계가 되고 있기 때문에 도리어 파란을 일으킨다는 말로 역이용한 것이니, 전일의 신의 두려움이 이제 와서 한 단계 더한 것입니다. 신이 오늘 취할 도리로는 물론 입을 막고 혀를 잡아매어 조정의 처분이나 기다리는 것이 옳겠으나, 살피건대 신이 패륜(悖倫) 모현(侮賢)을 한 것 외에 또 전혀 의리에 깜깜한 죄까지 겹쳤으니, 신도 염치가 있지 어떻게 감히 일각인들 그대로 눌러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신의 직을 특별히 삭탈하시고 이어 신의 죄를 다스리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은 마음을 가라앉혀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라."
하였다.
장령 송창(宋昌), 정언 홍만용(洪萬容)이 다 서필원(徐必遠)으로부터 심한 배척을 당했다 하여 인피하였는데, 상이 모두 사직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3월 29일 신묘
지평 맹주서(孟胄瑞)가 소명에 응하지 않았다 하여 인피하였다가 체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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