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일 갑인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정지화(鄭知和)를 지의금으로, 권대운(權大運)을 개성 유수로 삼았다.
이때 사간 박정(朴烶)과 정언 권두추(權斗樞)가 상견례를 하기로 약속되어 있었는데 날이 저물도록 두추가 병을 핑계대고 오지 않았다. 박정과 헌납 윤변이 경시당한 것을 이유로 인피하자 두추도 인피하였다. 정언 이익상(李翊相)은 마땅히 처치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역시 병을 핑계대고 나오지 않다가 하룻밤이 지난 뒤에 비로소 와서 인피하였고, 대사헌 박장원(朴長遠)은 박정의 조카인 것을 이유로 들어 감히 처치하지 못하겠다고 하면서 역시 인피하였다. 집의 이유(李秞)가 처치하여 두추는 체차하고 박정·윤변·익상·장원은 출사하게 하기를 청하였다. 응교 이민서(李敏敍)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대각(臺閣)은 임금의 귀이자 눈으로서 당시의 여론을 주관하는 곳이니, 맡은 임무의 막중함은 다른 직책과 비교할 바가 아닙니다. 일찍부터 국가가 반드시 대관(臺官)을 오랫동안 재직하게 하고자 했던 것은 실로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직책을 맡은 자는 자기의 맡은바 직무를 다할 것만을 생각해야지 고의로 범하여 체직되기를 구하는 데 급급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이번에 정언 권두추는 며칠간 단자(單子)를 올렸고 이미 출사하고 나서는 또 동료와 상견례를 갖기로 약속해 놓고 무단히 병을 핑계대고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는 필시 체직되고자 하는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 매우 형편없는 짓입니다. 그리고 계사를 올릴 때 빠진 경우와 하룻밤이 지난 뒤에 처치한 경우에는 인피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최근의 예가 분명히 있는데도 정언 이익상은 즉시 처치하지 않은 것을 인피하는 핑계로 삼으려 하였으니, 또한 매우 구차스러운 행동입니다. 정원은 마땅히 전례를 들어 처리해야 했을 것인데 어리석게도 받아들였으니, 그 또한 체통을 잃은 것입니다. 정언 권두추는 파직하고 정언 이익상 및 해당 승지에 대해서는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으나 승지에 대해서 추고하라고만 명하였다.
경성(鏡城)에 홍수가 나서 사람과 가축이 물에 휩쓸려 죽었다.
8월 2일 을묘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집의 이유가, 옥당의 차자로 인해 정언 이익상이 체차되자, 처치함이 타당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물러났다.
김우명(金佑明)·이일상(李一相)·정치화(鄭致和)를 진연청(進宴廳) 당상으로 삼았다. 이때 대왕 대비가 완산 부부인(完山府夫人)의 상중에 있었는데, 상제(喪制)가 초겨울에 끝나도록 되어 있었다. 예조 판서 이일상(李一相)이 양 자전에게 풍정연(豊呈宴)을 마련해 드리기를 청하니, 상이 금년 12월 및 내년 1월로 정하여 행하도록 명하였다. 일상과 대신이 미리 진연청을 설치하고 당상과 낭청을 차출하여 그들로 하여금 미리 여러 일들을 처리하게 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8월 3일 병진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홍만형(洪萬衡)·정재희(鄭載禧)를 정언으로, 이정(李程)을 집의로, 오정원(吳挺垣)을 판 결사로 삼았다.
충청 감사 김시진이 치계하기를,
"산간 고을에 있는 수군(水軍)은 태어나면서부터 노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있으므로 바다에서 훈련할 때에 배에 태우기만 하면 수질(水疾)이 발생하곤 합니다. 그러므로 대부분 비싼 값으로 토병(土兵)을 고용하여 번(番)을 세우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수군이 더욱 곤궁해지는 원인이며 변방이 더욱 엉성해지는 원인입니다. 그러니 지금 만약 수영(水營)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포민(浦民)으로서 물에 익숙한 자를 모집하여 군대를 만든 다음 평상시에는 그들이 고기잡이하여 생업을 꾸려나갈 수 있도록 두고, 봄과 가을 훈련할 때에는 수군들로 하여금 그들이 오고갈 때와 머무를 때의 식량을 계산하여 포민에게 지급하게 함으로써 훈련의 터전을 삼으면 어떻겠습니까. 그렇게 한다면 사변이 일어났을 경우에 포민을 모집하여 만든 군대를 제때에 조발(調發)하여 쓸 수 있을 것이니, 육지의 수군과 비교했을 때 그 이해의 차이가 천배 백배 뿐만이 아닐 것입니다. 신과 수사(水使) 이상경(李尙敬)이 함께 의논하고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는데, 기꺼이 따르겠다는 백성이 꽤 있었습니다. 지금부터 규식을 정해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비변사가 회계하여 그대로 시행하게 하기를 청하였는데, 따랐다.
8월 4일 정사
이에 앞서 매년 각릉(各陵)의 참배는 봄 2, 3월과 가을 8, 9월에 하기로 규식이 정해져 있었다. 예조가 아뢰기를,
"금년 가을에 참배할 능은 어느 능으로 정할 것이며, 날은 언제쯤으로 택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장릉(長陵)으로 정하고, 이달 그믐과 다음달 초순 사이에 날을 택하도록 하라."
하였는데, 예조가 9월 3일로 날을 정하였다.
8월 5일 무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내수사가, 숙명 공주(淑明公主) 궁노(宮奴)의 수본(手本)021) 에 숙천(肅川) 땅의 떼어 받은 전지를본궁(本宮)에 환속시켜 주도록 본도 및 호조에 공문을 보내 달라고 청한 일로 이조에 공문을 내었다. 이조가 아뢰기를,
"일찍이 어사 의 서계(書啓)에 ‘떼어 받았던 이 수전(水田)은 매년 붕괴되고 있어 끝내 전지가 될 기약이 없으니, 궁가에는 도움이 되지 않고 고을 백성에게 피해만 준다.’고 한 말로 인하여 비국이 재고를 요청하여 윤허를 얻어 혁파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수본으로 인하여 그대로 다시 환속시킨다면 조정의 조처가 전도됨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식으로 나간다면 궁가(宮家)가 백성을 병들게 하는 일이 위에 보고된다 하더라도 혁파되었다가는 곧 다시 번복되어 끝내 시원히 혁파되는 날이 없게 될 것입니다. 백성들의 원망과 차후의 폐단을 모두 염려하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니 시행하지 마소서."
하니, 상이 매년 개축한 때의 수본이 있는지 조사해 보라고 명하였다. 이조가 다시 아뢰기를,
"내사(內司)에 물었더니 달리 개축한 때의 수본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매년 붕괴되고 있다는 말이 이미 어사가 염문(廉問)하던 날에 나온 것으로 보면 반드시 그 사이에 곡절이 있을 것입니다. 본궁의 청원만 믿고 곧장 환속하게 해서는 안되겠으니, 해조로 하여금 본도에 공문을 보내어 분명히 조사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답하기를,
"지금 개축한 때의 수본이 없으니 해마다 붕괴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수본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헌납 윤변이, 온천에 궁실을 지으려 한다는 말을 듣고 상소하기를,
"지난 여름에 목욕하신 것은 실로 어쩔 수 없어서 취한 일이었는데, 특별히 백성의 괴로움을 염려하여 궁실을 짓지 못하게 하시고 제도(諸道)의 봉진(封進)을 정지하게 하시고 특별히 연로(沿路) 백성의 조세를 견감해 주셨으니, 온나라의 신민이 누가 전하의 어진 마음을 우러러 존경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교량을 수리하고 임시 가사를 증축하느라 호우(湖右) 지방 백성의 힘이 고갈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또 이 역사를 일으켜 거듭 그들을 곤궁하게 한다면 이미 피폐한 백성이 장차 감당해내지 못할 것이니, 지난날 구휼하시던 일과 비교해 볼때 어쩌면 그리도 다르단 말입니까.
어떤 사람은 ‘주상의 몸에 습창(濕瘡)이 재발하려는 조짐이 있으니, 만약 다시 거둥하시게 된다면 미리 대비하는 방도를 세우지 않아서는 안 된다.’라고 합니다만 그 또한 너무나 생각해 보지 않고 한 말입니다. 최근 몇 년간 연이어 흉년이 들었고, 금년은 다행히 큰 흉작은 면하였으나 요사스런 혜성이 물러가자마자 태백이 낮에 나타나고 사나운 바람에 나무가 뽑히는 참변이 일어나는 등 일마다 놀랍고 두렵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역사를 그만두어야 하겠습니까, 그만두지 말아야 하겠습니까? 지난번에 한여름을 당하여 초라한 몇칸 집에서 이미 거처하셨으니, 흙계단과 초라한 궁이 더욱더 성인의 검소한 덕을 빛내 주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사치스럽게 행궁(行宮)을 지으려 하시니, 절대로 하늘을 경외하고 백성을 위로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아뢴 일은 내 유념하겠다."
하였다. 이때 상이 온천에서 돌아온 뒤로 습창이 재발되려는 조짐이 있었고, 자전이 여러달동안 편찮으시자 의관들이 모두 자전의 병후도 온천에서 목욕해야 된다고 아뢰었다. 그래서 상이 내년 봄에 다시 온천에 가고자 하여 궁중에서는 이미 의논을 정해 놓고 신하들에게만은 말하지 않고 있었는데, 여염 및 관료들 집안에 소문이 파다하게 났으므로 윤변이 상소하여 간쟁한 것이다.
좌참찬 송준길이 상소하기를,
"신이 삼가 과거 역사를 보건대, 군주 중에는 주색에 빠져 나랏일을 생각할 겨를이 없는 자도 있었고, 게으르고 해이하여 대내(大內) 깊은 곳에 거처하면서 정전(正殿)에 나오지 않아 공사(公事)를 출납할 수 없게 한 자도 있었습니다. 아, 성상께서는 앞에 말한 경우에는 반드시 해당되지 않으시겠습니다만, 나중에 말한 경우에는 만에 하나라도 가깝지 않으신지요? 광해군 때에 ‘천천히 처리하겠다.’고 하던 말 한마디가 필경에는 나라를 망친 하나의 전철이 되고 말았었는데, 논란하는 자들이 그 일을 끌어다 오늘에 비유하고 있으니, 신은 삼가 애통하게 생각합니다.
신이 장로들에게 듣건대, 인조 대왕께서는 여러차례 큰병을 앓아 여러해동안 병상에 계셨지만 병세가 위독한 때일지라도 공사에 관계되는 모든 일을 잠시도 지체하지 않으셨으므로 당시의 신하 중에 우러러 탄식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고 합니다. 또 효고(孝考)의 시대에는 장주(章奏)가 올라갈 때마다 즉시 처리하였고, 때로는 올라가자마자 답을 내릴 때도 있었으므로 지금까지도 미담으로 전해지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전하께서 마땅히 보고 본받아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 전하께서 온천에서 돌아오셨을 때에 전하께 바라는 중외(中外)의 인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인정이 있는 곳에서 하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예전처럼 쇠약하고 나태하여 일을 미루고, 관리들은 예전처럼 이리저리 휩쓸려 말만 일삼고 있으니, 이 때문에 백성들이 근심하고 군사들이 원망하여 도적이 날로 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또 장차 어떤 지경에까지 가게 될런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 나라가 병자 호란에 거의 망할 지경에 이르렀다가 간신히 보존되어 구차하게 명맥만 근근이 이어가고 있어 나라의 체통과 조정의 법도가 말이 아닙니다. 지금 만약 예기치 못한 변고라도 생긴다면, 어떤 인심과 어떤 국세(國勢)와 어떤 인재로 방어하여 나라를 건져낼런지 신은 알지 못하겠습니다.
신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눈앞의 작은 편안함에 안주하여 앞날을 염려하지 않거나 원대한 생각을 소홀히 하는 일이 없도록 하소서. 그리하여 자주 대신과 삼사(三司)를 불러 환란을 방비하는데 대한 대책을 강구하시고 수성(修省)의 방도를 자문함으로써 위로는 하늘의 견책에 답하고 아래로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오늘날 과인의 병통은 실로 경이 말한 대로이니, 내 두렵게 여기고 있다. 나라를 근심하고 과인을 사랑하는 경의 깊은 마음에 감격하였다. 경은 안심하고 나의 부족한 점을 보필하도록 하라."
하였다.
8월 6일 기미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8월 7일 경신
사간 박정 등이 아뢰기를,
"평안도 각 고을이 원곡(元穀) 이외에 매년 전세(田稅)로 받는 쌀과 콩은 거두어 본 고을에 두고, 갖가지 모곡(耗穀)은 전부 관향사(管餉使)의 관할하에 두었는데, 이자가 또 이자를 낳아 해마다 불어나므로 빌려주고 받는 즈음에 주민에게 대단히 큰 괴로움을 주고 있습니다. 축적하느라 병폐를 끼치기보다는 변통하여 곤궁한 백성을 구제하는 것이 낫겠습니다. 지금 본도(本道)에는 비·바람·우박 세가지 재해가 한꺼번에 일어났으니, 구휼하는 대책을 깊이 강구하지 않아서는 안됩니다. 금년 모곡을 특별히 감면해 주어 서도(西道) 백성에게 조금이라도 은혜를 베풀어 주소서."
하니, 상이 관서의 1년 모곡이 얼마나 되는가를 물었다. 호조가 아뢰기를,
"작년의 회계를 상고해 보건대 평안도에 나누어 지급한 관조(官糶)가 35만 1천 5백 80섬[石]이니, 모곡은 3만 5천 1백 78섬이 되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 수의 3분의 1을 견감해 주라고 명하였다.
응교 이민서가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상소하여 지방의 군수로 나가기를 청하였는데, 상이 특별히 그가 원하는 대로 들어주었다.
8월 8일 신유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송준길이 차자를 올려 아뢴 이후에 적체되어 있던 공사를 일시에 재결하셨으니, 전하께서 간하는 말을 잘 받아들이시는 미덕을 누가 우러러 존경하지 않겠습니까. 허다한 공사를 신속히 처리하시니 성상께서 이처럼 일할 수 있다는 점을 볼 수 있어서 기쁘고 다행스러운 마음이 더욱 간절합니다. 재변을 경계해야 한다고 아뢴 그의 말은 더욱 절실한 것이니, 만약 더욱 수성에 힘써 항상 차자가 처음 들어온 때와 같이 하신다면 그 다행스러움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여쭈어 결정할 일이 있는가?"
하자, 태화가 아뢰기를,
"헌납 윤변의 상소에서 아뢴 일을 지금 여쭈어 결정해야 하겠습니다만, 그가 상소한 뜻은 1년치 군포(軍布)를 모두 감면하고 선혜청의 대동미 두수(斗數)를 견감하자는 것인데, 신들이 서로 의논해 보니 모두들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 형편으로는 어려운 일이다."
하였다. 상이 이미 고쳐서 감면해줄 의사가 없는 데다가 대신도 모두 어렵게 여겼으므로 일이 시행되지 못하고 말았다.
경흥(慶興)·삼수(三水)·갑산(甲山) 등 7개 고을에 한 자 정도의 눈이 내리고 뒤이어 된서리가 내렸다. 부령(富寧)·경성(鏡城) 등지도 그와 같았다.
8월 9일 임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사간 박정이 인대했을 때에 이조 판서 김수항(金壽恒)을 추고하기를 청하고는 파하고 나간 뒤에 동료에게 간통(簡通)을 내지 않았는데, 정언 홍만형(洪萬衡)과 헌납 윤변(尹抃)이 경시당했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그러자 박정이 대간의 법규를 추락시켰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차되었다.
도적 박종선(朴從善) 등이 떼를 지어 성안에 숨어 있으면서 곳곳에서 도적질을 하였는데, 포도청이 4명을 체포하여 보고하자 효시하라고 명하였다.
8월 10일 계해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이에 앞서 강릉부(江陵府) 안에 사는 어떤 상놈이 몹쓸병에 걸렸는데, 그에게는 아들은 없고 딸만 있었다. 딸의 남편은 부(府)의 관노였는데, 병이 전염될 것을 염려하여 아내 및 장모와 함께 모의하고 천막을 지어 바닷가에 장인을 버려둔 채 일체 음식을 주지 않다가 끝내 산 채로 항아리에 넣어 땅에 묻어버렸다. 온 경내에 소문이 파다하게 돌자 향소(鄕所) 등에서 윤리에 관계되는 변고이므로 본부에 화가 미치게 될까 두려워하여 그의 사위를 잡아들여 가볍게 매질을 하고 부내에 감히 소문을 퍼뜨리지 못하게 경계시켰다. 이때에 이르러 대사헌 박장원 등이 아뢰기를,
"딸이 아비를 시해하고 아내가 남편을 시해한 큰 변고를 1년이 넘도록 숨기고 있었다니, 듣기만 해도 놀랍고 개탄스럽습니다. 본도 감사로 하여금 조사해 아뢰게 하여 처치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수원 부사 박경지(朴敬祉)는 부임한 이후로 행정을 부하에게 맡기고 술에 취하지 않은 날이 거의 없었으니, 관직을 맡고 있으면서 일을 전혀 돌보지 않았음을 이것으로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또 작년 전세(田稅)를 금년 가을까지 기다렸다가 봉입(捧入)하기를 청한 본도 감사의 장계로 인하여 상께서 ‘봉입을 독촉하지 말아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라’는 분부를 내리셨는데도, 경지는 통보가 내려지기를 기다리지도 않고 앞질러 농사철에 굶주린 백성을 독촉하여 받아들였으니, 조정의 구휼하는 뜻이 과연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또 배에 실어 서울의 창고로 옮기다가 배의 전복을 초래함으로써 이미 거둔 쌀을 장차 다시 거두게 되었으므로 온 경내에 원망이 자자하다 합니다. 듣기만 해도 놀라운 일이니 박경지를 파직하소서."
하니, 따랐다.
8월 11일 갑자
이유(李秞)를 사간으로, 이정(李程)을 부수찬으로, 윤선거(尹宣擧)를 집의로, 이민서(李敏敍)를 개성 경력(經歷)으로 삼았다.
8월 12일 을축
상이 옥당을 소대하여 《심경》을 강하게 하였다. 송준길이 서산 진씨(西山眞氏)022) 의 학설을 강하고 아뢰기를,
"전에 선조(先朝) 때에 신이 조복양과 함께 이 부분을 강하자 선왕께서 ‘선대 유학자의 소(疏) 가운데에서 이 설이 가장 명백하고 정밀하다.’라고 하셨습니다. 대개 초학자가 공부할 곳을 모르면 노력할 수가 없으므로 이 장에서 공부하는 방법을 지극히 정밀하고 지극히 절실하게 제시한 것입니다. 이른바 평소 거처할 때에 장경(莊敬)으로 몸을 견지한다는 말은 바로 공부를 하는 문이며 길이니, 공부가 이러한 경지에 이르고 나면 만가지 변화에 대응할 때 어느 것이나 중도에 맞지 않는 것이 없게 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해나 득실에 따라서 두 마음을 갖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준길이 아뢰기를,
"신하가 임금을 섬길 적에 말을 해야 할 일이 있는데도 상의 견책과 노여움을 겁내거나 벼슬과 녹을 아까워하여 말하려 하지 않는데 이게 다 두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하자, 좌상 홍명하가 아뢰기를,
"신하가 임금을 섬길 적에 이러한 병통이 가장 많습니다. 이해와 득실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어찌 훌륭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복양이 아뢰기를,
"이것은 임금에게 달려 있습니다. 성상께서 여러 신하들을 살펴보고 자신의 이해를 돌아보지 않는 자를 택하여 쓰신다면 어찌 이처럼 제몸을 보존하기에 급급한 자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장로의 말을 듣건대, 선조 대왕께서는 큰 난을 만나 전쟁의 어지러움을 겪으면서도 하루 세번 경연을 여는 일을 그만두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이처럼 뜻을 가다듬어 나태하지 않았으므로 회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옥당의 유신(儒臣)을 가장 사랑하고 아꼈는데, 당시의 제수가 대부분 슬기로운 간택에서 나왔으므로 뭇 신하가 각자 분발하여 자기의 능력을 다하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사기를 복돋워 주는 일이 없으십니다. 이민서(李敏敍)와 이단하(李端夏)는 문학에 가장 뛰어난 자들인데, 단하는 1년이 넘도록 변방에 근무하고 있는데도 소환하지 않으시고, 지금 또 민서를 외직에 제수하셨습니다. 민서 같은 자는 지방에 있다 하더라도 다시 불러들여야 할 텐데 어찌 그렇게 갑자기 지방에 보임한단 말입니까. 민서의 본직을 다시 제수하고 단하를 소환하소서."
하니, 따랐다. 준길이 아뢰기를,
"문학도 진실로 성취시켜야 하겠지만 명절(名節) 또한 기르지 않아서는 안됩니다. 예를 들면 윤강(尹絳) 같은 사람은 물러나 안산에 살고 있으나 조정 신하가 그의 위풍과 지조를 존경하지 않는 자가 없으니, 장려하지 않아서는 안됩니다."
하니, 상이 머리를 끄덕였다.
8월 13일 병인
장령 윤순거(尹舜擧)가, 그의 동생 윤선거(尹宣擧)가 집의에 제수된 일로 인피하여 체차되었다.
상이 옥당을 소대하였다. 조복양이 《심경》을 강하고 송준길이 글뜻을 강하였다. 강을 마친 뒤에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좌상 홍명하가 아뢰기를,
"삼가 듣건대 북도(北道)의 백성들이 몇년 안에 변고가 있을 것이라고 여겨 무척 두려워하는 마음을 품고 있다고 하니,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북도는 관서(關西)와는 형편이 달라서 저들이 알게 될 걱정은 그다지 없으니, 성지(城池)를 미리 수축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그렇게 하겠다고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신이 삼가 장로의 말을 듣건대, 임진 왜란이 있기 10년 전부터 요사한 혜성이 나타나더니 끝내 임진 왜란과 정유 재란이 일어났으며, 무오년에 치우기(蚩尤旗)가 나타나더니 북쪽 오랑캐가 그 해에 쳐들어 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또 혜성이 나타나고 심지어 태백이 몇 해째 늘 나타나고 있으니, 어찌 이런데도 시절이 무사하리라고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최근의 풍재는 더욱 참담한데다가 경주와 강릉에서 일어난 윤리에 관계되는 변고는 천재보다 배나 더 참혹하니, 어찌 오늘날처럼 근심스러웠던 때가 있었겠습니까."
하니, 장원이 아뢰기를,
"관서 일대는 저들과의 거리가 가깝기 때문에 병무(兵務)에 전혀 힘쓰지 않고 있으니, 급한 일이 생겼을 경우에 어떻게 변란에 대응하겠습니까. 수령을 뽑아 보내 은밀히 형세를 관찰하여 무비(武備)를 힘써 보충해 나가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정언 홍만형이 아뢰기를,
"불행히도 나라에 해마다 흉년이 들어왔는데 금년 농사가 또 큰 흉작이 되게 되었으니 앞으로 백성들이 살아갈 일이 진실로 염려스럽습니다. 지금 능에 거둥하시기로 결정하셨는데, 아직 추수하지 않아 필시 병사들이 농작물을 짓밟게 되는 폐단이 있을 것입니다. 장령(將領)으로 하여금 절대 그런 일이 없게 금지시키게 하고, 도로를 너무 넓게 치우다 곡식을 상하게 하는 일이 없게 하라는 뜻을 경기 감사에게 분부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8월 14일 정묘
사간 이유 등이 아뢰기를,
"강릉 부사 최문식(崔文湜)은 백성들의 괴로움을 생각지 않고 조상의 분묘에 쓰기 위하여 지나치게 많은 비석을 정선(旌善)에서 가져오느라고 굶주린 백성을 징발하여 재를 넘어 운반하게 하였습니다. 백성들이 식량을 싸가지고 가 부역하느라 노상에서 오랜 날을 보내었으니, 그간의 괴로움은 말하지 않아도 상상할 수 있겠습니다. 백성을 구휼하는 직책을 어떻게 이런 사람에게 맡길 수 있겠습니까. 그를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대사헌 박장원이 아뢰기를,
"안동 판관(安東判官) 최해성(崔海聖)은 얼마 전에 부사 한진기(韓震琦)가 죽었을 때에 초상에 필요한 관과 염에 쓰이는 도구를 대부분 돌보아주지 않았고 아침 저녁의 제전(祭奠) 거리도 제대로 지급하지 않았습니다. 그 말을 들은 원근의 사람들이 다 한심해 하고 있으니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원양 감사(原襄監司) 이준구(李俊耉)가 치계하기를,
"강릉 등 3개 고을은 흉년이 가장 심하게 들어 백성들이 벌써 굶주리고 있으니, 다른 곳의 곡식을 옮겨 구휼하소서. 또 기해년023) 의 전례를 그대로 따라 부역(賦役)을 견감하소서."
하니, 그 부근에 있는 함경도와 경상도의 고을 곡식을 옮겨 구휼하라고 명하였다.
평안도 성천(成川) 등 6개 고을에 우박이 쏟아져 곡식과 초목이 모두 남김없이 쓰러졌다. 감사 이정영(李正英)이 보고하고 관이 빌려주었던 곡식의 봉납 시기를 미루어 주기를 청하니, 허락하였다.
8월 15일 무진
이동명(李東溟)을 장령으로, 정재희(鄭載禧)를 정언으로, 이민서(李敏敍)를 응교로, 오정위(吳挺緯)를 예조 참판으로 삼았다.
경주(慶州)의 아비를 죽인 죄인 이만(李萬)을 처형하였다.
처음에 경주 사람 이경무(李慶楙)가 아내를 박대하자 그의 아내 곽영(郭英)이 원한을 품고 아들 이만 및 노비 옥매(玉梅) 등과 같은 집에 사는 임용(林龍)·사남(士男)·최덕창(崔德昌)·암외(巖外)·치만(致萬) 등과 함께 밤을 틈타 작당하여 경무를 돌로 쳐죽였다. 감사가 보고하자 상이 특별히 경차관(敬差官) 신후재(申厚載)를 보내어 조사하게 하였다. 후재가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곽영은 옥에서 죽고, 이만 및 같은 패거리들이 모두 자복하였는데 마침내 잡아들여 금부에서 국문하였다. 상이 이만과 같이 극도로 흉악 무도한 자는 잠시라도 천지 사이에 살려두어서는 안된다고 하여 그믐과 보름의 금기에 구애하지 말고 즉시 처형하라고 명하였다. 노비 옥매 및 같은 패거리 사남은 참형하고 나머지는 모두 죄의 경중에 따라 처벌하였다.
좌참찬 송준길이 차자를 올리기를,
"신이 태묘(太廟)의 악장(樂章)이 심하게 전도 착란되어 있다는 말을 듣고 《오례의》·《악학궤범》 등의 서책과 국조(國朝) 명신(名臣)들의 장지(狀誌)에 실려 있는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태묘에는 보태평(保太平) 9장 11성(聲)024) 을 각 묘실(廟室)의 초헌 때에 통용하고, 정대업(定大業) 9장 11성025) 을 아헌과 종헌 때에 통용하는데, 선왕(先王)의 덕을 찬송한 장은 세종 대왕 당시의 일에 그치고 그 아래로는 빠져 있습니다. 문소전(文昭殿)026) 을 없애기 전에는 각 묘실마다 악장을 따로 만들어 사용하였으니, 태묘에는 여러 묘실에 9장을 통용하면서 문소전에는 각 묘실에 따로 만들어 사용한 뜻이 어디에 있었는지 진실로 알지 못하겠습니다. 선조조(宣祖朝)에 예판으로 있던 황정욱(黃廷彧)은 태묘의 묘실마다 각각 한 장(章)을 만들어 사용하기를 청하였고, 인조조의 오윤겸(吳允謙)도 경연에서 이런 청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정욱과 윤겸은 모두 이름있는 신하였으니, 그들이 그렇게 말한 데에는 반드시 나름대로 소견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윤겸이 아뢴 것을 대신들이 여러 각도로 의논한 결과 다 채택하여 쓰지 않고, 선묘(宣廟)를 위한 악장만을 별도로 만들어 사용하게 되었습니다027) 효종조에는 장악 정(掌樂正)으로 있던 권우(權堣)가 상소하여 종묘의 음악을 정리하자고 청하고, 또 선묘의 예에 따라 인조의 묘실에도 별도로 악장을 만들어 사용하기를 청하였으나 대신들이 모두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선조의 묘실에는 이미 별도로 악장을 만들었는데, 그 위로 세조·성종·중종 삼대의 묘실과 아래로 인조·효종 양 묘실에만은 별도로 만들어서는 안 되는 까닭을 또한 신은 모르겠습니다.
또 태묘에 사용하는 악장은 비록 ‘한 악장을 통용한다.’고 되어 있긴 하지만 사실은 각실마다 한 악장을 연주합니다. 그러므로 일의 공(功)이 각기 달라서 합치하지 않을 뿐만이 아니라, 9장의 연주는 9실에 그치는데, 태묘는 지금 10실이기 때문에 제10실에 해당되는 효묘에는 사용할 악장이 없습니다. 그래서 부득이 인출곡(引出曲)인 역성장(繹成章)을 사용하게 되었는데, 인출(引出)할 때에도 그 악장을 중복하여 사용하며, 아헌과 종헌 때에도 인출곡인 영관장(永觀章)을 사용합니다. 영녕전(永寧殿)028) 에 연주하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아, 이곳이 어떤 곳인데 사용하는 예악이 이렇게까지 전도 착란 되었단 말입니까. 진실로 놀라운 일입니다. 그리고 만들어 사용하는 악장의 길이가 고르지 않아서 매우 짧은 것은 한 묘실의 예(禮)를 다 마치기도 전에 악장이 먼저 끝나므로 악공배들이 그 악장을 재차 연주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선조의 묘실은 지금 제7실에 해당되는데, 그 악장은 이미 전에 사용하던 것이 있는데다가 또 새로 만든 것이 있으니, 태조의 묘실에는 한 악장만을 사용하면서 선조의 묘실에는 두가지 악장을 사용하는 것이 됩니다. 앞에 말씀드린 것들은 모두 매우 미안한 일입니다. 또 초헌과 아헌 때에 사용하는 악절(樂節)은 문무(文武)가 같지 않고029) 음조가 각기 다른데, 나중에 만든 선조 묘실의 악장은 삼헌(三獻)에 다 통용하니, 이 또한 옳은 예가 아닙니다. 또 악원(樂院)에 소장되어 있는 악장에 관한 여러 주설(註說)이 전도 착란되어 차례가 뒤죽박죽이니, 이 또한 정리한 다음 깨끗이 써서 간행하여 나중에 볼 수 있도록 길이 남겨야 하겠습니다.
신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신의 이 차자를 내려 여러 공경들로 하여금 다각도로 상의하게 하여 좋은 방안을 따라 보충함으로써 한 시대의 예악을 새롭게 하여 후세에 비웃음거리를 남기지 않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대신들에게 의논할 것을 명하였다. 영중추부사 이경석(李景奭)은 아뢰기를,
"지금 송준길이 올린 차자의 내용을 보건대, 좋은 쪽으로 변통하여 한 시대의 예악을 새롭게 하고자 하는 것이니, 그 뜻이 매우 훌륭하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신이 선배들의 논의를 대략 들었는데, 태묘와 영녕전의 악장이 뒤섞여 있는 듯함에도 불구하고 선뜻 고치지 못한 것은 뜻하는 바가 있어서였습니다. 과거 인조조 때의 재상 오윤겸이 경연에서 아뢴 일로 인하여 실록을 상고하고 유신(儒臣)에게 물어보고 대신과 의논하여 재차 삼차 여쭈었으나 절충하지 못하고 선조의 묘실에만 악장을 만들어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인조 대왕께서는 이미 무너진 윤리를 다시 밝히고 종묘 사직을 받들어 나라를 중흥함으로써 성대한 덕과 빛나는 공적이 천고에서 으뜸으로 꼽히시니, 별도로 악장을 두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우선적으로 여쭈어 정하는 것은 진실로 여러 사람의 뜻에 맞는 것입니다. 태묘의 초헌에 희문(熙文)030) 보태평을 연주하고 아헌과 종헌에 소무(昭武)031) 정대업을 연주하므로써 인입(引入)과 인출(引出) 등 악장을 열성(列聖)의 묘실에 아울러 연주하고 영녕전에 통용하는 것이, 비록 미안하기는 하지만 거기에는 뜻하는 바가 있습니다. 고 상신 이정귀(李廷龜)가 예조 판서로 있던 때에 고찰해 본 후 증거를 들어 상세하게 아뢰었던 것이며, 또 신묘년032) 에 있었던 상신 김육(金堉)의 의논에서도 고찰해 볼 수 있습니다. 오직 예조가 이것을 전하께 다 진달하고 널리 묻고 의논함으로써 좋은 방향으로 연구하여 결정지을 수 있도록 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하고, 영의정 정태화는 아뢰기를,
"우리 나라 태묘에 사용하는 악장이 잘못되었다는 말은 전부터 있었는데, 며칠전 마침 좌참찬 송준길을 만나 그에게서 직접 말을 들어 보고, 오늘 또 이 차자를 보니, 바로잡는 조처가 없어서는 안될 듯합니다. 다만, 세조 이하 여러 대(代)의 악장을 지금에 와서 추술(追述)할 수는 없으며, 선조의 묘실에 이미 사용하였던 악장을 새삼 없앨 수도 없다고 생각되는데, 그대로 답습하여 오늘날에 이른 것은 반드시 이 때문일 것입니다. 막중한 종묘의 음악은 신처럼 몽매한 자가 감히 의논하여 정할 바가 아니니, 예조로 하여금 유신에게 널리 물은 다음에 충분히 의논하여 여쭈어 처리하게 하소서."
하고, 좌의정 홍명하는 아뢰기를,
"예로부터 제왕(帝王)에게 공덕(功德)이 있으면 반드시 그 묘실에 악장이 있었습니다. 이미 선묘를 위해 별도로 악장을 만들었는데 인조의 묘실에 지금까지 악장이 없고 효종의 묘실에도 사용할 악장이 없어서 인출곡인 역성장을 사용하고 있으니 어찌 대단히 미안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유신이 차자로 아뢴 뜻은 우연한 것이 아닐 것이니 마땅히 바로잡는 조처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다만 지금의 사신(詞臣)이 찬정(撰定)한 가사와 악사(樂師)가 작곡한 가락이 노래와 춤의 형식에 어긋나거나 잘못된 곳이 없이 들어맞을지 모르겠습니다. 각 묘실에 이미 사용하였던 막중한 악장을 일시에 바꾸기는 쉽지 않을 듯하니,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사신(詞臣)으로 하여금 먼저 인조와 효종 두 묘실의 악장을 찬정해 내게 하여 관현(管絃)에 실어 음률에 맞게 한 다음에 양 묘실에 사용하면 좋을 듯합니다. 또 악원에 소장된 악장의 음주(音註)가 잘못된 곳은 예관으로 하여금 해원(該院)과 함께 강구하여 바로잡게 하소서."
하고, 우의정 허적은 병으로 인해 의논을 드리지 않았다. 상이 훗날 등대할 때에 여쭈어 처리하라고 명하였다.
8월 16일 기사
함경 감사 민정중(閔鼎重)이 장계를 올려 아뢰기를,
"백성을 변방으로 이주시켜 채우는 것은 뜻하는 바가 있어서입니다. 본도 육진(六鎭)의 각보(各堡)는 특히 더 허술하니, 각도에 전 가족이 유배되는 죄인은 다른 곳에 정배하지 말고 전부 육진에 나누어 정배하게 하소서."
하니, 허락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원자를 보양하는 데에 관한 과거의 전례를 춘추관으로 하여금 《실록》에서 찾아보게 하였는데, 입학하기 전과 관을 쓰기 전의 강학 절목에 대해서는 명백히 근거할 만한 글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보양관과 상의해 참작하여 아래와 같이 정하였으니, 그대로 거행하소서."
하였다.
1. 원자와 보양관이 처음 상견례를 행할 때에는 동계(童髻)에 옥잠(玉簪)을 꽂고 아청색(雅靑色) 단령(團領)을 입고 흉배(胸褙)와 옥대(玉帶)와 흑화자(黑靴子)만을 착용한다. 원자가 강학하는 처소는 본청(本廳)이 임시로 여쭈어 시행하되, 수리하고 배설하는 일 등은 해조로 하여금 속히 거행하게 한다.
1. 원자와 보양관의 상견례는 사부(師傅) 상견례의 의식에 따르고, 의주(儀註)는 때에 임하여 써서 들인다.
1. 원자가 강학청에 출입할 때에는 조종(祖宗)의 구례를 그대로 따르고, 노련 건실하고 근신 돈후한 환관을 뽑아 좌우에서 모시고 받들며 기거하는 때에 항상 배종하게 한다.
1. 보양관에게는 이미 소속 서리와 사령(使令)이 없으니, 강학청으로 하여금 적절한 수를 정하게 한 다음 해조로 하여금 요포(料布)를 지급하게 한다. 강학청은 시강원에 설치한다.
8월 18일 신미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옥당을 소대하였다. 조복양이 《통감》 당 태종기(唐太宗記)를 강하고 송준길이 글뜻을 강하였다. 강이 끝난 뒤에 상이 이르기를,
"이 강학청에 관한 절목을 누구와 의논해 정하였는가?"
하니, 형조 판서 김좌명(金佐明)이 아뢰기를,
"어제 신들이 예판 및 송준길과 상의하여 정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신묘년033) 에 내가 사부와 상견례를 하던 때에는 당수(唐首)에 곤룡포를 입었었다. 공정책(空頂幘)은 판(板)을 없앤 평천관(平天冠)으로 정례(正禮) 때에 쓰는 관이며, 대는 옥대를 사용하였었다. 인조조에는 원자가 흑직령(黑直領)을 입고 옥대를 착용했었다."
하니, 준길이 아뢰기를,
"예조 판서 이일상(李一相)이 혼자서 먼저 흑직령과 세조대(細絛帶)와 쌍동계로 먼저 정하였었는데, 신의 생각에는 공정책과 수정대(水晶帶)가 좋을 듯하기에 이렇게 정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소현은 책봉하기 전에 원자로 있었으므로 세조대와 흑직령을 입었고, 나는 곧장 책봉되었으므로 관례를 하기 전인데도 흑단령을 입었던 것이다. 대개 단령은 관례를 치렀거나 치르지 않았거나에 구애될 것이 없으며, 이미 단령을 입었으면 세조대를 사용할 수 없다."
하니, 준길이 아뢰기를,
"신의 생각에는, 세자가 옥대를 착용하는 법이므로 책봉되기 전에는 수정대를 착용해야 할 듯합니다. 소현이 원자로 있던 갑자년034) 당시의 복색이 필시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인데, 지금 예조에 없으니 혹시 내간에 있지 않습니까?"
하자, 상이 없다고 하였다. 좌명이 아뢰기를,
"그렇다면 의주(儀註)를 고쳐야 하겠습니다만 혹시 주상께서 착용하셨던 수정대가 아직 남아 있는지요?"
하니, 상이 있다고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신들의 생각으로는, 책봉되기 전이므로 세자의 복색과는 차이를 두었으면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는 곧장 세자의 복색으로 했으면 한다."
하니, 준길이 아뢰기를,
"책봉되기 전인데도 예절을 세자나 다름없이 한다는 것입니까?"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주상께서 세자로 계시던 당시에 공정책을 쓰셨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직 관례를 하기 전이었으므로 당수(唐首)를 하였다. 그러나 만약 관례를 했었다면 익선관(翼善冠)을 썼을 것이다."
하자, 준길이 아뢰기를,
"당수란 곧 쌍동계를 말한 것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당수는 사대부 집안 아이들이 트는 상투이다."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옥대를 띠려면 용포(龍袍)를 입어야 하는데 지금 만약 옥대만 착용하고 용포를 입지 않는다면 어떻겠는가? 무룻 국가의 대례(大禮)에 세자는 검은 옷을 입고 푸른 띠를 착용하도록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옥대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옥대를 사용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니, 좌명이 아뢰기를,
"그렇다면 흉배는 사용하지 않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세자의 흑단 단령(黑段團領)에는 앞뒤 흉배에 모두 견화(肩花)가 있고 세손은 방흉배(方胸褙)를 하도록 되어 있는데, 지금 만약 견화를 제거하고 단흉배(團胸褙)만 사용하면 어떻겠는가? 견화가 있어야 곤룡이라고 하니, 견화가 없으면 곤룡이라고 하지 않는 것이다."
하니, 좌명이 아뢰기를,
"그러면 흑단령을 입고 견화를 없앤 단흉배와 옥대를 착용하는 것으로 복색을 결정해야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게 하라. 또 보양관 4명이 한자리에 모여 상견례를 하고, 만약 무슨 일이 있으면 돌아가며 상견례를 행하되 날짜는 가려 정하지 않아도 된다. 처소는 마땅히 시강원에 두어야 하겠지만 거리가 너무 먼 것 같다."
하니, 준길이 아뢰기를,
"강학하는 장소는 안에서 짐작하여 정하소서."
하자, 상이 이르기를,
"선정전(宣政殿) 모퉁이에 일찍이 서연(書筵)을 열었던 곳이 있지만 그곳 역시 먼 것 같다. 사부 상견례는 세자가 뜰에서 맞이하여 서로 마주보고 답배(答拜)할 뿐이니, 굳이 의주(儀註)를 쓰지 않아도 될 듯하다."
하자, 준길이 아뢰기를,
"이것은 주상께서 짐작하여 시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만약 사부와 상견하는 예를 쓴다면 회강(會講)과 조강(朝講)은 차이가 있으니, 회강에는 마땅히 사부와 상견하는 예를 써야 할 것이다."
하니, 준길이 아뢰기를,
"사부를 처음 만날 때에는 예와 예복을 갖추지 않아서는 안 되겠지만 평소에는 편한대로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어찌 반드시 매번 예복을 갖추어 입을 것이 있겠습니까. 이른바 의식이란 올라가고 내려가며 절하고 읍하는 절차에 지나지 않는 것이니 검토하여 정하지 않을 수 없을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떤 책을 먼저 강론해야 하는가?"
하니, 준길이 아뢰기를,
"《소학》 본문을 배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본문의 음은 읽을 줄 알지만 석의(釋義)는 읽지 못하는 듯하다."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삼가 듣건대 원자가 《효경》을 읽고 있다 하는데 사실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효경》 본문 첫머리를 우연히 남이 읽는 것을 듣고 배웠다."
하자, 준길이 아뢰기를,
"《효경》을 강하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효경》 한두 장을 이미 배웠으니 인하여 계속 강학하면 좋겠다."
하자, 준길이 아뢰기를,
"그렇다면 《효경》을 먼저 강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명하가 아뢰기를,
"상견례를 행한 뒤에 신과 영상 우상이 번갈아 나아가 뵈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종조에는 대신이 보양관이 되었었으니, 경들이 출입하여 자주 만나 보는 것이 어찌 어렵겠는가."
하였다. 준길이 청하기를,
"현재 조정에 있는 신하 중에 명망이 있는 당상관과 당하관을 강학관으로 차출하여 번갈아가며 모시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원자가 항상 궁중에 있었으므로 수염난 사람을 보기 싫어하기 때문에 내가 우선 경들 몇명으로 하여금 번갈아 출입하게 한 것이다. 친숙해진 다음에는 궁료(宮僚)들이 많이 출입해도 괜찮을 것이다."
하니, 준길이 아뢰기를,
"신은 성상의 뜻이 어디에 계신지 알겠습니다. 지금 이후로 매번 한 사람씩 번갈아 뵙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이 아뢴 악장에 관한 일은 의논하여 행하도록 해놓았다."
하니, 준길이 아뢰기를,
"종묘의 음악에 미비된 점이 있으니 바로잡을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스럽겠습니까. 대개 종묘의 악장은 9장 밖에 없는데, 각장(各章)마다 각기 제목을 달아 그 공덕을 기렸습니다. 그런데 지금 목조(穆祖)를 기린 가사를 태조의 묘실에 쓰고 익조(翼祖)를 기린 가사를 태종의 묘실에 쓰고 있으니, 어찌 어긋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한 장마다 한 묘실의 공덕을 찬술하였는데, 9장으로 한 것은 곧 구성(九成)035) 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인출과 인입은 어떤 뜻인가?"
하니, 준길이 아뢰기를,
"헌관을 인도하여 출입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어찌하여 11성(聲)이 되는가?"
하니, 준길이 아뢰기를,
"9장에다 인출과 인입을 합하여 11성이 됩니다. 현재 효묘가 10실036) 에 해당되는데 악장은 9장 밖에 없어 제10실에 이르러서는 사용할 음악이 없으므로 부득이 인입장(引入章)을 사용하고 있으니, 어찌 미안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명하가 아뢰기를,
"과거 인조조에 고 상신(相臣) 오윤겸(吳允謙)이 경연에서 진달하자 인조께서 고치려는 마음을 갖고 실록에서 찾아보게 하였더니 7장만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당시 예조 판서로 있던 고 상신 이정귀가 대신과 의논하기를 청하고, 또 차자를 올려 ‘한(漢)나라 때는 묘악을 공덕이 있는 묘실에만 사용하였고 명나라 역시 그렇다.’라고 했으며, 당시의 대신 윤방(尹昉)·신흠(申欽) 등의 의논도 모두 이와 같았으므로 선묘에만 악장을 지었던 것입니다. 목조 이하 사조(四祖)를 천묘(遷廟)한 뒤로 사조의 묘실에 사용하던 악장을 그대로 태묘에 사용하게 되었으니, 사람들이 다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영녕전에는 어떤 악장을 사용하는가?"
하자, 명하가 아뢰기를,
"영녕전도 이 악장을 사용합니다."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문소전(文昭殿)을 없애기 전에는 묘실마다 별도의 악장을 지어 사용했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문소전은 어떤 뜻이며 언제 없앴는가?"
하자, 준길이 아뢰기를,
"난리 뒤에 없앴으며 한나라의 원묘(原廟)와 뜻하는 바가 같습니다. 선왕께서 돌아가신 분을 살아계신 때와 같이 섬기려는 뜻에서 별도로 문소전을 세워 하루에 세 번 제사를 지내셨습니다."
하니, 상이 명하에게 악장을 주면서 읽으라고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장악원에 《악학(樂學)》 1책(冊)이 있는데, 각장(各章)의 주설(註說)이 어지러이 뒤섞여 있으니 가져다가 살펴보시면 아실 것입니다. 문소전에는 악장을 각 묘실마다 각각 연주하였으므로 매우 정밀하고 합당하였으니, 문소전에 사용하던 악장을 태묘에 사용하면 좋겠습니다."
하니, 명하가 아뢰기를,
"변통을 하고자 하더라도 이미 음율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어서 결코 가곡을 제작하여 관현에 맞추기 어려우니 이 점이 가장 어렵습니다. 그러나 부득이하다면 효묘의 악장만을 만들어 시험해 보면 어떻겠습니까?"
하자, 준길이 아뢰기를,
"하필 먼저 시험해 볼 것이 있겠습니까. 만약 다 고치고자 한다면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이정귀가 잘못된 것을 다 고치지 못하고 선묘의 악장만을 만들어 시험했으므로 그 이후로 구 악장을 이미 선묘에 연주하고 나서 또 새로 지은 곡을 중복하여 연주하게 되었다 하니, 이는 매우 미안한 일입니다."
하였다. 상이 승지로 하여금 악장을 써서 들이게 하였다.
경주 부윤(慶州府尹)을 강등하여 부사(府使)로 삼았다. 좌상 홍명하가 아뢰기를,
"이번에 이만(李萬)이 아비를 시해한 사건은 만고에 없었던 변고이니 경주의 호칭을 강등시켜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상례로 보면 한 등급을 강등시켜 목사로 삼아야 하겠지만, 이처럼 흉악 무도한 적(賊)이 난 곳을 상례대로 처리해서는 안 되겠으니, 특별히 부사로 강등시켜 악을 징계하는 국가의 뜻을 보이소서."
하니, 상이 그 말을 따라 강등하여 부사로 삼고 그 고을 원을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8월 19일 임신
남용익(南龍翼)을 형조 참판으로, 윤강(尹絳)을 지경연으로, 박장원(朴長遠)을 동지경연으로, 이시매(李時楳)를 우윤으로, 오정위(吳挺緯)를 동지의금으로 삼았다.
8월 21일 갑술
우의정 허적, 판윤 오정일(吳挺一), 예조 참판 오정위(吳挺緯)가 후릉(厚陵)037) 에 가서 봉심한 뒤에 서계하였는데, 상이 대신들에게 의논할 것을 명하였다. 영부사 이경석이 아뢰기를,
"삼가 후릉을 봉심하고 올린 서계를 보건대 진실로 극히 한심하니, 개수하지 않아서는 안될 듯합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은 곳까지 염려하여 대뜸 능의 큰 역사를 일으킨다면 후회할 일이 없지도 않을 것이니 이점을 또한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상께서 헤아려 처리하소서."
하고, 영의정 정태화는 아뢰기를,
"만약 완전한 돌이 없어 그 사이에 착수하기 어렵다면 전체를 다시 개봉(改封)하지 않을 수 없을 듯합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은 곳에도 혹시 의외의 걱정거리가 있을지 또한 알 수 없습니다. 만약 이러한 지경에 이른다면 정말 난처한 일입니다만 그렇다고 이를 염려하여 그대로 둔다는 것은 미안하다고 여겨집니다."
하고, 좌의정 홍명하는 아뢰기를,
"능의 숱한 석물이 하나도 완전한 것이 없으니 개봉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봉분 안에 혹시 의외의 걱정거리라도 있을 경우에는 난처함이 이 일보다 더 심할 것이니, 봉심한 대신과 충분히 상의한 다음 등대할 때에 여쭈어 처리하였으면 합니다."
하니, 따랐다.
황해도 해주 등 7개 고을에 비바람이 크게 몰아쳤고 봉산(鳳山)에는 우박이 오고 비바람이 심하게 몰아쳤으며, 수안(遂安)에는 며칠 밤을 연이어 서리가 내렸다. 황주(黃州)·금천(金川)·서흥(瑞興)에 우역(牛疫)이 극성하였다.
8월 22일 을해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밤에는 달이 동정(東井) 성좌로 들어갔다.
8월 23일 병자
곽성귀(郭聖龜)를 장령으로, 이단하(李端夏)를 부수찬으로, 구문치(具文治)를 수원 부사로 삼았다.
상이 다리에 통증이 있어서 침을 맞았다. 도제조 허적(許積) 등이 입시하여 능에 거둥하지 말 것을 청하니, 따랐다. 허적이 이어 후릉에 관한 일을 진달하자, 상이, 여러 재상들이 한 자리에 모여 의논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명하였다. 허적 등이 물러나려고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내가 의논하고자 하는 일이 있다. 자전의 병환은 본래 심화(心火)에서 비롯된 것인데, 근래 습열(濕熱)이 매우 심하여 여름이면 수시로 부기(浮氣)와 창증(脹症)이 생겼다가는 가을과 겨울이 되면 조금 나아지곤 하였다. 이것으로 보면 분명히 습열인데, 약을 복용하여도 입만 쓰디쓸 뿐이지 드러나는 효과가 없어 늘 걱정해 왔다. 내가 온천의 효험을 본 이후로 온천이 습열을 치료하는 데에 신통한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온천으로 모시고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중대한 일이기에 경들과 상의하는 것이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신들이 약방(藥房)에 있은 지 이미 오래 되었는데 자전의 병환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이미 습열의 증세로 판명이 되었고 상께서 전에 시험해 보아 효험을 거두었으니 거둥하시는 일을 그만둘 수 없겠습니다. 신들에게 어찌 감히 다른 의논이 있겠습니까. 다시 의관들에게 물어보소서."
하자, 상이 의관들에게 두루 물어보게 하였다. 의관들이 모두 아뢰기를,
"자전의 병환은 온천에서 목욕하면 신통한 효험을 거둘 것이 틀림 없습니다."
하니, 상이 마침내 뜻을 정하였다. 허적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늘 의논하여 결정하고자 한 것은, 충청 감사가 곧 내려가는데 그곳에 도착한 뒤에 계품하는 것은 직접 의논하는 것만 못하겠기에 미리 의논을 정해 감사에게 분부해 보내기 위해서이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이 일은 매우 중대하므로 신들과 의관들의 말만 듣고 경솔히 결정해서는 안 됩니다. 다시 대신들에게 물어 차분히 결정하시고, 모든 일처리는 감사가 내려간 다음 기일에 앞서 분부하여 그로 하여금 정리하게 하소서."
하자, 상이 이르기를,
"좌상이 지금 빈청에 있으니 불러서 물어보겠다."
하였다. 좌상 홍명하가 들어오자, 상이 허적으로 하여금 말해주라고 하였다. 명하가 아뢰기를,
"자전께서 거둥하신다는 것은 진실로 중대한 일입니다만 목욕으로 효험을 보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면 신이 어찌 감히 이의를 제기하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의논이 결정되었으니 충청 감사에게 분부해야 하겠다."
하니, 명하가 아뢰기를,
"상께서 만약 거둥을 결정하고자 하신다면 마땅히 명백하게 하교하여 조정이 다 알게 해야지, 여기에서만 의논하는 데에 그쳐 뭇 신하들이 사사로이 의논하는 일이 있게 해서는 안 됩니다. 일찍이 이완(李浣)과 유혁연(柳赫然)에게 듣기로는 휘장을 치는 것이 가장 큰 폐단이 되었다고 하였으니 담장을 미리 쌓지 않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거처할 집을 한채만 덧붙여 지으면 될 것이다."
하니, 김좌명이 아뢰기를,
"행궁이 있었던 터에 초석(礎石)이 갖추어 있으니 그 터에 짓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일은 거행하는 데에 대한 조건을 굳이 낼 필요가 없이 여러가지 일들을 미리 짐작하여 거행하여야 할 것이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다른 대신에게 다시 물어야 합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급히 물을 필요는 없다. 조용히 면대하여 의논하겠다."
하였다.
밤에 달이 동정 성좌로 들어갔다.
8월 24일 정축
평안도에 폭우가 쏟아져 물이 불어나 양덕(陽德) 백성 49명과 창성(昌城) 백성 21명이 깔려죽고 성천(成川) 백성 16명이 빠져죽었다. 감사가 보고하자, 상이 본도에 명하여 구휼하는 은전(恩典)을 거행하게 하였다.
8월 26일 기묘
표류하던 왜인 1명이 삼척(三陟)에 닿고 20명이 장기(長鬐)에 닿았는데, 각각 옷과 식량을 주어 왜관으로 들여보냈다.
황도창(黃道昌)을 남병사(南兵使)로, 정만화(鄭萬和)를 형조 참의로, 이세장(李世長)을 대교로, 홍만용(洪萬容)을 수찬으로, 이단상(李端相)을 부응교로 삼았다.
8월 28일 신사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정언 정재희 등이 아뢰기를,
"강도(江都)의 화는 전고에 없었던 것입니다. 당시에 일을 맡았던 신하들이 차례로 처벌을 받았으니, 이민구(李敏求)가 혼자 형벌을 면한 것은 실로 모든 사람들이 분하게 생각하는 일입니다. 그의 죄가 이와 같으므로 당초에 대신(臺臣)이 아뢰면서 심지어 ‘민구가 살아 있는 것은 경징(慶徵)의 원통함이다.’는 등의 말을 하였던 것이니, 이것이 어찌 칼로 자른 듯이 엄정한 의논이 아니겠습니까. 국가의 법이 엄하지 않아 점차 너그럽게 용서하다가 마침내 귀양을 풀어주고 직첩(職牒)을 지급하여 한가하게 살도록 놔두어 오늘에 이르렀으니, 민구에게는 그것만도 다행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일찍이 선조대(先朝代)에 서용하라는 명이 있었지만 삼사(三司)가 일제히 논하자 마침내 받아들여졌었고, 성상께서 왕위를 이으신 뒤에도 일찍이 서용하라는 명을 내리셨으나 대론(臺論)이 또 일어나 윤허를 받고나서야 그만두었습니다. 여기에서 나라의 법을 어지럽히기 어렵다는 것과 여론을 거역하기 어렵다는 것과 큰 죄를 완전히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뜻밖에 또 서용하는 은혜를 내리시어 다시 서반(西班)에 들게 하여 마치 평범한 죄인을 으레 서용하는 듯이 하셨습니다. 어찌 세월이 오래 지났고 은택이 두루 미쳐야 한다는 이유로 상례대로 서용하여 조정의 관적(官籍)에 들게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보고 듣는 이마다 놀라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이민서를 서용하라는 명을 거두소서.
근래에 뇌물에 관한 법이 엄하지 않음으로 인해 탐욕을 부리는 자들이 징계하고 두려워 하는 바가 없이 뇌물을 주고받는 사례가 잇따라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국법은 점점 더 해이해져 어느 한사람 그 죄를 바로잡는 자가 없으니, 사람들이 분하고 답답하게 여겨온 지 이미 오래입니다. 황헌(黃瀗)이 탐욕을 부려 뇌물을 숱하게 받은 죄는 실로 심상한 데에 비길 바가 아니니, 국법으로 볼 때 진실로 용서하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을 뒤로 미루고 은혜를 앞세워 목숨을 살려주었으니 종신토록 폐고(廢錮)된다 하더라도 그에게는 다행한 일입니다. 작년에도 서용하라는 명을 내렸다가 대간이 아뢰자 곧 그만 두셨으니, 대개 그의 죄가 너무도 커서 완전히 용서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경사가 있어 교서를 반포하면서 또 서용하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신들도 성상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알겠습니다만, 황헌과 같은 죄인을 처음에 이미 목숨을 살려주고 나중에 차츰차츰 너그럽게 용서하다가 직첩을 주기까지 하셨으니, 성상께서 황헌을 위하여 하신 일은 그것만도 너무 지나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만약 다시 사적(仕籍)에 끼워준다면 앞으로 탐람한 무리들이 무엇을 두려워하여 못된 행동을 자제하겠습니까. 황헌을 서용하라는 명을 거두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충청도에 우역(牛疫)이 극성하였다.
8월 29일 임오
평안도에 염병이 극성하여 사망한 자가 매우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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