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일 을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이경억(李慶億)을 도승지로, 이상일(李尙逸)을 우승지로, 오정위(吳挺緯)를 형조 참판으로, 박장원(朴長遠)을 대사헌으로, 박정(朴烶)을 집의로, 윤순거(尹舜擧)·민여로(閔汝老)를 장령으로, 이유(李秞)를 헌납으로, 홍주국(洪柱國)·신명규(申命圭)를 지평으로 삼았다.
예조가 아뢰기를,
"강학청이 응당 행해야 할 절목(節目)에 대해서 본조가 조사해 볼 만한 문적(文籍)이 난리를 겪는 사이에 전부 없어져버렸습니다. 이렇게 강학청을 신설하는 날에 경황없이 독자적으로 정할 수는 없으니, 인종 대왕께서 원자로 계시던 때와 인조조 계해년 초의 원자 보양 절목을 춘추관으로 하여금 실록에서 찾아내도록 한 다음에 여쭈어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호조가 좌참찬 송준길에게 이달 월봉 및 쌀과 반찬을 보냈다. 송준길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는데, 상이 다시 보내게 하였다.
7월 2일 병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가 밤에는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7월 3일 정해
햇무리가 졌다.
도목 대정(都目大政)이 있었다. 이유를 집의로, 송규렴을 부수찬으로, 윤변을 헌납으로, 박정을 사간으로, 이상진을 대사간으로, 이행진을 예조 참판으로, 김만기를 부응교로, 남용익을 우윤으로, 조복양을 예문 제학으로, 이민서를 응교로 삼았다.
좌참찬 송준길이 상소하여 자신의 쇠약하고 병든 정상을 진달하고 온천에 가서 목욕할 것과 또 죽은 아들의 소상에 맞추어 돌아가서 지극한 정을 다하고자 한다고 청하니, 상이 답하였다.
"경의 소를 살펴보니 내 마음이 매우 슬프다. 비록 예경에 가르침이 있긴 하지만 임시 방편도 있는 법이니, 후일 등대할 때에 면대하여 하유하겠다."
강원 감사 이만영(李晩榮)이 치계하기를,
"영동의 9개 고을은 가뭄이 특히 더 심하므로 구휼하는 대책을 미리 세우지 않아서는 안 되겠는데, 본도(本道)는 최근 몇 년간 계속 흉년이 들어 공사(公私)간에 비축된 것이 하나도 없어 손을 쓸 길이 없습니다. 곡식을 옮겨 구제하는 방도를 묘당으로 하여금 미리 강구하게 하소서."
하니, 비국이 회계하기를,
"9개 고을의 가뭄은 너무도 놀랍고 처참합니다. 경자년017) 의 예에 따라 타도(他道) 고을 중에 가까운 거리에 있는 지역의 곡식을 옮겨 구제하되, 신임 감사로 하여금 내려가는 대로 가뭄으로 입은 피해의 정도와 수송할 곡식의 양을 헤아려 보고하고 여쭈어 처리하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7월 4일 무자
자전이 편찮으셨으므로 상이 의관(醫官)에게 명하여 궐내에 머물러 숙직하도록 하였는데, 제조(提調)들도 교대로 숙직하겠다고 청하였다.
7월 5일 기축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정언 이익상 등이 아뢰기를,
"지방에 재변이나 상서가 있으면 도신(道臣)은 즉시 보고하여야 합니다. 충청도 공산(公山) 땅에 나무의 결이 글자의 형태를 이룬 일이 있어서 봄부터 서울에 전파되고 있으니, 상서가 아니면 필시 재변일 것입니다. 그런데 충청 감사 김시진(金始振)은 끝내 보고하지 않고 있다가 지난번 온천에 거둥하셨을 때에 모시고 간 벼슬아치에게 사람을 시켜 그 나뭇조각을 보여주었습니다. 처음에 곧바로 보고하지 않고 있다가 사사로이 말을 퍼뜨리고 보여준 것은 너무도 해괴한 일입니다. 김시진을 엄중히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강화부에 전염병이 극심하여 사망한 자가 40여 명이었다.
7월 7일 신묘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7월 8일 임진
신후재(申厚載)를 지평으로 삼았다.
헌납 윤변 등이 아뢰기를,
"삭주 부사 이수방(李綏邦)은 일찍이 운산 군수로 있을 때에 백성을 속여 원망을 받아가면서 끝없이 영리를 추구하였습니다. 어떻게 전에 이미 탐욕스럽고 교활한 짓을 하였던 관리에게 다시 수령의 임무를 맡겨 거듭 변방 백성에게 해를 끼쳐서야 되겠습니까.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간원이 조경의 월봉을 환수하는 일로 간쟁한 지 한달이 넘었는데, 상이 끝내 윤허하지 않자, 이때에 이르러 정계하였다.
상이 좌참찬 송준길을 인견하고 하유하기를,
"경의 지극한 마음은 내가 이미 잘 알고 있는데 심지어 예경의 가르침을 인용하여 간청하기에, 내가 ‘일에는 임시 방편이 있다.’고 말하였었다. 최근에 날씨가 매우 더워 안질이 재발할 염려가 없지 않고 또 다리의 통증으로 움직이기에 불편한 점이 있어서 강학을 중지하였고, 또 자전께서 편찮으셨기 때문에 오랫동안 폐하게 된 것이다. 지금은 자전의 병환도 점차 회복되고 있고 날씨도 서늘해지고 있으므로 곧 다시 경연을 열려고 하는데, 경이 아니면 누구와 함께 강론할 것이며 또 누구로 하여금 원자를 보양하게 하겠는가. 나랏일만 그런 것이 아니고 젊은이와는 다른 노인네 근력으로 이렇게 더운 날씨에 길을 나섰다가 병을 얻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일찍이 선조(先朝) 때에 경이 부모의 무덤을 돌보기 위하여 내려가려 하였으나 선왕께서 끝내 윤허하지 않으셔서 경이 떠나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실로 임시 방편에 해당하는 것이라 하겠다."
하니, 준길이 아뢰기를,
"신은 나날이 늙고 병들어 가고 글뜻도 잊어버린 것이 많아서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서울에 머물러 있는다 하더라도 병이 만약 심해지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경연에 출입할 수 있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서울에 있으면서 휴식을 취한다면 어찌 길을 달려가는 것과 같겠는가."
하니, 준길이 아뢰기를,
"선조 때에 신이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던 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당시에 선왕께서 송시열에게 일을 위임하고 신으로 하여금 그와 함께 일하게 하고자 하셨으니, 신이 머물러 있었던 것은 진실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지금은 시열이 오지 않았는데 신만 머물러 있게 하시니, 나라에 도움이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신의 사정(私情)도 실로 매우 낭패스럽습니다. 상께서 자주 경연을 열고 또 보양관으로 하여금 날마다 원자를 모시게 한다면 나라 안 사람 중에 기뻐하지 않을 자가 있겠습니까. 요사이처럼 단지 내간(內間)의 병환을 이유로 일을 폐하고 세월만 보내신다면, 신이 비록 머물러 있는다 하더라도 달리 하는 일 없이 그저 공밥만 먹게 될 것이니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날씨가 점차 서늘해지니 어찌 그런 정도에까지 이르겠는가."
하였다.
7월 9일 계사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어떤 왜인이 몰래 배 1척에다 유황을 싣고 와서 용초도(龍草島)에 정박하고 피 봉사(皮奉事)와 임 주부(林主簿)를 찾는다고 경상 감사 임의백(任義伯)이 보고하였다. 이른바 피 봉사와 임 주부는 곧 상인 임지죽(林之竹)과 피기문(皮起門)으로 전부터 왜인과 유황을 몰래 매매해온 자들이다. 비국이, 동래 부사 및 통제사로 하여금 두 사람에게 분부하여 비밀히 교역하도록 하고, 또 이후로는 밀무역하는 상인을 일체 엄금하도록 동래 부사에게 신칙하기를 청하니, 따랐다.
7월 11일 을미
이때 본국으로 들어가던 왜선이 폭풍을 만나 되돌아와 다대포(多大浦) 앞바다에 정박하였다. 사왜(四倭)가 육로를 따라 관(館)으로 돌아가려 하자 다대포 첨사 하종한(河宗漢)이 군인 1백여 명을 풀어 길을 막았는데, 왜인이 작대기로 군인들을 난타하니 군인들이 모두 흩어져 달아났다. 왜인이 늙은 군인 윤난상(尹難祥)을 구타하자 난상이 맞서 싸우다가 작대기를 빼앗아 때려 왜인이 다쳤는데, 왜인들이 노하여 곧장 첨사의 처소로 가서 온갖 방법으로 협박하였다. 종한이 그 때문에 난상에게 매질을 가하니 난상이 손이 닳도록 빌었는데, 왜인이 그제서야 배를 타고 관으로 돌아갔다. 관에 있던 왜인들이 일제히 성을 내어 공갈하는 말을 매우 심하게 하니, 동래 부사 안진이 역관과 군관(軍官)을 연달아 보내어 여러모로 달랬지만 여전히 소란을 피웠다. 그러자 안진이 졸지에 변란을 일으킬까 염려하여 치계하기를,
"속히 신을 파직하지 않는다면 국가를 욕되게 하는 일이 없으리라고 보장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종한의 죄도 빨리 다스려 저들의 노여움을 풀어주도록 하지 않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여쭈어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비국이 회계하기를,
"종한은 잡아다가 심문하여 처벌하고 난상도 본부(本府)로 하여금 죄를 다스리게 하소서. 왜인이 배로부터 관(館)의 양식을 가져 가는 것은 배의 격군(格軍)018) 이 수로(水路)를 왕래하기가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이후로는 육지로 다니도록 허락해 주고, 군인의 수를 정하여 방비하게 함으로써 여염에 출입하는 폐단이 없게 하소서."
하자, 따랐다.
강화부에 심한 바람이 불어 모래와 돌이 날리고 벼와 곡식이 큰 피해를 입었는데, 3일 만에 그쳤다.
7월 12일 병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전라도 회령포(會寧浦)의 방군(防軍) 28명과 동남 동녀(童男童女) 10여 명이 바다에 나갔다가 배가 전복되어 10명이 빠져 죽었고, 가리포(加里浦) 방군 28명이 입방(立防)을 마치고 돌아오다가 배가 전복되어 14명이 빠져 죽었다. 이를 감사가 보고하니 본도(本道)로 하여금 구휼하는 은전(恩典)을 베풀게 하였다.
7월 14일 무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7월 16일 경자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7월 17일 신축
정원이 아뢰기를,
"금부의 죄인 이온(李溫)은 사람을 죽인 죄로 심문을 받고 있는 중인데, 얼마 전에 본부가 그의 병세를 진달하고 여쭈어 보방(保放)019) 하였습니다. 지금 듣건대, 살인과 같은 큰 죄를 지은 죄수는 염병 이외에는 일찍이 보방한 전례가 없다고 하는데, 본부가 어리석게도 여쭈어 보방까지 해 놓고 10일이 지나도록 다시 가두지 않고 있으니 해당 당상을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평안 감사 이정영(李正英)이 치계하기를,
"강서(江西) 고을에 우레가 요란하게 치고 폭우가 쏟아져 사람이 떠내려 가고 가옥이 물에 잠겼으며, 고을 북쪽의 무학산(舞鶴山)이 무너져 4명이 깔려 죽었습니다."
하니, 본도로 하여금 구휼하는 은전을 거행하도록 명하였다.
광주(廣州)에 해일과 태풍이 있었다.
7월 18일 임인
이만영(李晩榮)을 동부승지로 삼았다.
전라 감사 민유중(閔維重)이 치계하기를,
"본영(本營)에 소속된 아병(牙兵)은 총 6천여 명인데, 전부터 이들에게 한 사람당 포 1필 씩을 거두어 영내에 소요되는 경비를 충당해 왔습니다. 그러나 항오(行伍)에 관한 법이나 기예를 익히는 일은 제쳐두고 거행하지 않고 있으니, 만약 변란이 생긴다면 어떻게 힘을 발휘할 수 있겠습니까. 금년 11월부터는 그들에게 거두던 포를 면제해 주는 대신 돌아가며 번을 서게 하되, 1년에 한 번 군영에서 번을 서게 함으로써 훈련시켜 재목으로 키우고, 매년 봄과 가을에 합동 군사 훈련을 시키고자 하는데, 새로 만드는 일이라서 감히 이렇게 아룁니다."
하니, 이 일을 병조에 내렸다. 병조가 회계하기를,
"이대로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황해 감사 강유후(姜裕後)가 치계하기를,
"수안군(遂安郡)에 비바람이 심하게 몰아쳐서 모래와 흙이 논밭을 뒤덮고 산언덕이 붕괴되어 8명이 깔려 죽고 2명이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하니, 구휼하는 은전을 베풀라고 명하였다.
공산(公山) 땅의 산록에 있는 어떤 모과 나무를 나무꾼이 도끼로 찍었더니 속의 나뭇결이 ‘상화 하목(上和下木)’이라는 네 글자를 이루고 있었는데, 빛깔은 검은 빛이 감도는 자주색이었다. 감사 김시진이 즉시 보고하지 않고 있다가 대간의 논의가 나오자 비로소 나뭇조각을 올려보내어 보고하였다.
충청도 아산(牙山)·신창(新昌) 등지에 해일이 있었다.
7월 19일 계묘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집의 이유가 아뢰기를,
"삼가 정원이 아뢴 말을 보니 김충윤(金忠胤)이 무고를 한 정상이 마디마디 드러나 있습니다. 안응창(安應昌)은 추관(推官)의 직책을 맡고 있으면서 충윤이 하는 말만 믿고 무고한 백성을 가두어 심문하였고 발각된 후에도 끝내 관찰사에게 보고하지 않았으니, 옥사를 처결하는 데에 법을 따르지 않은 정상이 극히 놀랍습니다. 또 박승건(朴承健)은 토포사(討捕使)의 신분으로 충윤에게 기만을 당해 사실인지 거짓인지를 따져보지도 않은 채 추관이 하는 대로 맡겨 두었으니, 제대로 살피지 않은 잘못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안응창은 파직하여 서용하지 말고 박승건은 엄중히 추고하소서.
의금부의 살인죄에 관계된 옥사는 일의 체모가 엄중하므로 설혹 병에 걸렸다 하더라도 일찍이 보방(保放)한 전례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해당 부서가 죄인 이온의 큰 죄명을 생각지도 않고, 또 판의금이 출사하기를 기다리지도 않은 채 여쭈어 보방하게 하였으니, 법을 무시하고 사정(私情)을 따른 잘못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해당 당상은 이미 추고를 받았습니다만, 자세히 살펴보지도 않은 채 당상에게 두루 고하여 상에게 여쭙는 일을 초래하게 한 도사의 행동 또한 매우 놀라우니 해당 도사를 파직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고 도사를 추고하라고만 하였다.
김충윤(金忠胤)에게 곤장을 치고 삼천리 밖에 귀양보냈다.
이에 앞서 개령(開寧) 사람 김충윤이, 처음에 크게 파당을 지어 도적질을 하다가 기축년에 그 파당을 개령에 고발하면서 평소에 미워하던 사람들까지 모두 도적으로 무고하여 1백여 명을 죽게 만들었는데, 그 가운데 태반은 양민이었다. 충윤은 그 공으로 첨지에 제수되기에 이르렀고, 아울러 도적에게서 몰수한 장물과 전민(田民)을 지급 받았으며, 심지어는 당시에 연좌되어 체포된 53명을 자모군(自募軍)이라고 일컬어 충윤에게 내주어 그의 봉족(奉足)으로 삼게 하고는 그로 하여금 적당을 탐문하도록 하였다. 충윤이 그 후로 사람을 무고하여 잡아넣는 것을 일삼았으므로 분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에 이르러 또 선산(善山) 사람 이연억(李連億)·김입선(金立善) 등을 무고하여 상주 목사 박승건(朴承健)에게 밀고하니, 승건이 그대로 믿고 선산 부사 안응창(安應昌)으로 하여금 은밀히 체포하여 추문(推問)하게 하였다. 입선 등이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충윤에게 뇌물을 주자, 충윤이 그것을 받고 비로소 그들이 억울하다는 것을 응창에게 말하였는데, 응창이 충분히 조사해 보지도 않고 석방해 주자고 청하였다. 감사 임의백이 의심하여 선산 향소(鄕所)의 색리(色吏)와 김충윤을 추고하여 전후의 범죄를 밝혀내어 보고하면서 자모군을 혁파하고 충윤의 죄를 다스릴 것을 청하였다. 형조가, 다시 본도로 하여금 엄중히 심문하게 하기를 청하였는데, 충윤이 세차례 심문을 받고 비로소 자백하니, 장 일백 유 삼천리(杖一百流三千里)할 것을 명하였다.
7월 21일 을사
오두인(吳斗寅)을 교리로 삼았다.
대사헌 박장원(朴長遠)이 아뢰기를,
"이번에 이온을 보방한 사건은, 다른 당상이 판부사가 출사하기를 기다리지도 않고 서둘러 먼저 여쭈었으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추고를 받았다 하여 버려두고 논하지 않아서는 안 되겠으니 당상을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먼저 체차한 다음에 추고하도록 명하였다.
수원(水原)·인천(仁川)·남양(南陽)·안산(安山) 등지에 해일이 있었다.
7월 22일 병오
이에 앞서 제주 군관(軍官) 김원상(金元祥)이 상을 치르기 위하여 제주로부터 돌아오다가 거센 바람과 파도에 휩쓸려 표류한 나머지 일본에 닿았다. 원상이 진수관(鎭守官)이라고 거짓말을 하니 왜국이 지극히 후하게 대우하고 대마도로 옮겨 보냈는데, 도주(島主)도 음식과 의복을 후하게 보내주고 차왜(差倭) 평성진(平成辰)을 차출해 호위하여 동래로 돌려보냈다. 부사가 그러한 사실을 보고하자 조정에서 박순(朴純)을 접위관(接慰官)으로 삼아 성진을 접대해 우대하는 뜻을 보였다.
7월 23일 정미
우찬성 송시열이 상소하기를,
"신은 실로 한 죄인에 불과한데, 우리 인조 대왕께서 연이어 소명을 내려 간절한 뜻으로 타이르시고 우리 성고(聖考)의 세대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하였으니, 신이 입은 은혜가 임금과 신하가 있은 이래로 일찍이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전하께서 또 잘못을 너그러이 용서하는 큰 도량으로 신의 목숨을 보전하게 해 주셨으니, 신은 마땅히 전하께 몸바쳐 죽을 때까지 충성을 다할 것을 기약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신은 본래 미약한 몸으로 근거없는 소문에 휩쓸리고 심한 비방에 놀라 오직 벼슬을 버리고 물러갈 것만을 생각하여 감히 베풀어 주신 은혜를 저버렸으니, 이는 성상의 조정에 죄를 지었을 뿐만이 아니라 실로 선조(先朝)의 죄인입니다.
아, 신의 잘못이 산처럼 쌓여 있으니, 비록 신에게 쓸 만한 재주가 있다 하더라도 세상에 스스로 설 수 없을 것인데, 더구나 신은 애당초 조그마한 장점도 갖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성상께서는 끝내 버리려 하지 않으시니, 이는 보잘것 없는 신이 처음부터 전혀 알 수 없는 점일 뿐만이 아니라 지식이 있는 자들은 누구나 다 의아해 하는 점입니다. 혹시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의심과 노여움이 모두 가라앉고 시비가 모두 사라져서 여러 대부들과 국민들이 다 신을 용서해도 된다고 한다면 신 또한 스스로 연마하여 장구(章句)에 대한 진부한 지식을 가지고 다시 전하를 가까이에서 모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은 어찌 넓고 깊은 도량으로 나의 간절한 마음을 헤아리지 않는가. 이는 실로 내 성의가 미덥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아, 경의 나아감과 물러감은 실로 음양이 사라지고 자라나는 기미에 관계되는 것임을 경은 생각하라. 경의 마음은 내가 알고 있고 나의 마음은 경이 알고 있는데, 세월이 지나도 서로 신뢰하는 실상을 보지 못하고 있으니, 나는 진실로 한밤중에 일어나 탄식하며 옛날의 임금과 신하의 일에 대해 매우 부끄러움을 느낀다. 경은 나의 지극한 뜻을 잘 살펴 떠나려는 마음을 속히 돌려 나의 기대에 부응하라. 또 원자를 보양하게 하겠다는 뜻을 전에 이미 하유하였으니, 내가 기대하는 바가 더욱 간절하다는 것을 경은 깊이 생각하라."
하였다.
함경도에 양전(量田)이 있었다. 이보다 먼저 함경 감사 민정중이 사사로이 함흥(咸興)의 전부(田賦)를 측량하였는데, 일을 마친 뒤에 경기를 양전할 때의 사목(事目)에 따라 도(道) 전체의 전정(田政)을 균평하게 할 것을 청하자, 호조가 민정중으로 하여금 그 일을 주관하여 거행하게 하도록 청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정중이 도사(都事)로 하여금 남도(南道)의 7개 고을을 주관하게 하고, 평사(評事)로 하여금 북도의 부령(富寧)·경성(鏡城)·명천(明川)·길주(吉州) 4개 고을을 나누어 주관하게 하고, 회령(會寧) 이북 및 삼수(三水)·갑산(甲山) 등 고을과 문서를 주관하는 일은 함흥 사람인 전 군수 주목(朱楘)·한우기(韓友琦), 전 참봉 정시원(鄭時元)으로 하여금 나누어 살피게 하면서, 갑술년020) 의 예에 따라 그들을 종사(從事)로 가칭(假稱)하여 그 일에 신중을 기할 것을 청하였는데, 호조가 그대로 시행하게 하기를 청하였다. 북도는 토질이 척박한데 양전을 한 뒤에 요역과 부세가 전보다 가중되었으므로 백성들이 불편하게 여겼다. 정중은 자기의 재주를 자부하였으나 그가 시행하는 모든 일이 잗달고 대체를 잃어 훗날의 폐단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7월 24일 무신
이때 장마가 그치지 않아 벼와 곡식이 손상되었으므로 예조가 사문(四門)에 기청제(祈晴祭)를 지낼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헌납 윤변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삼가 듣건대, 혜성의 변고가 있은 뒤에는 가장 혹심한 재변이 따른다고 합니다. 말하는 자들은 전쟁이 일어날 조짐이라고 하는데, 천도(天道)는 현묘하고 심원한 것이라 헤아리기 어렵지만, 지금이 어찌 군신 상하가 태연스럽고 한가하게 있을 때이겠습니까. 신하들 중에 전후로 말씀을 올려 조정의 득실을 논한 자가 한둘이 아니지만, 신은 유독 민생이 곤궁하여 초췌한 것이 오늘날의 근본적인 근심거리라고 생각합니다. 여러 고을의 군병에게 징납하는 포역(布役)은 실로 나라를 망치게 하는 일입니다."
하고, 인하여 청하기를,
"전국 군병의 1년치 번포(番布)를 특별히 면제해 주어 군민(軍民)으로 하여금 국가의 비상한 은택을 흠뻑 입게 하소서. 또 각 아문(衙門)에 축적되어 있는 은과 포를 풀어 곤궁에 시달려온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소서. 경기의 대동미는 2말을 견감하여 호서와 똑같게 하고, 상평창에 쌓여 있는 곡식을 대량으로 풀어서 잡역에 관계되는 모든 것을 모두 상평창으로부터 지급함으로써 위급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경기의 백성을 구제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그대가 정성을 다해 진언(進言)한 것을 가상히 여긴다. 아뢴 일은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비국이 탑전(榻前)에서 여쭈어 의논하기를 청하였으나 대신이 모두 어렵게 여겼으므로 일이 끝내 시행되지 않았다.
평안도 산간 지대에 있는 고을과 해안에 있는 고을에 홍수와 해일이 있었다. 거센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히고 지붕이 날려가고 모래가 날고 돌이 굴렀다고 감사가 보고하였다.
7월 25일 기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7월 28일 임자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영광(靈光) 등 16개 고을에 해일이 있었다.
7월 29일 계축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대신 및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좌상 홍명하가 아뢰기를,
"최근에 있은 지방의 풍재(風災)는 벼와 곡식을 손상시켰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나무가 뽑히고 돌이 날아갔으니 극히 놀랍고 두렵습니다."
하니,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천재(天災) 가운데에서도 바람의 변고가 가장 두렵습니다. 과거의 일을 가지고 말을 해보면, 을해년과 신묘년에 바람이 심하게 불더니 끝내 큰 화가 있었는데, 그 때문에 중외(中外)의 인심이 모두 놀라고 의혹하는 것입니다. 풍재만 그런 것이 아니라 해일의 변고까지 도처에 일어나고 있으니, 이 또한 두려운 일입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형조 판서 김좌명이 아뢰기를,
"김근행(金謹行)이 유황을 밀거래하기로 약속했던 건은 지금 여쭈어 처리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수량이 얼마나 되는가?"
하자, 좌명이 아뢰기를,
"전에는 1만 5천여 근이었는데 이번에는 2만 7천 근입니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정부(政府)의 노복이 면천(免賤)하기 위하여 밀무역하여 온 것입니다. 대개 이 일은 고 상신(相臣) 원두표(元斗杓)가 재직하던 당시에, 비국이 역관에게 분부하여 은밀히 장사꾼으로 하여금 저들에게 가서 약속하고 오게 한 데에서 유래되었습니다."
하니, 호조 판서 정치화가 아뢰기를,
"밀무역은 저들 나라가 엄중히 금하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가 하는 처사를 관왜(館倭)가 뻔히 알고 있을 것이고, 또 장사꾼들이 반드시 이 일을 빌미삼아 멋대로 밀무역을 하려들 것이니, 어찌 나라의 체통을 손상시키지 않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이후로 엄중히 금지시켜야 한다고 봅니다."
하였다. 명하가 아뢰기를,
"영동 지방의 가뭄은 매우 참담한데 강릉은 특히 더 심하다고 합니다. 이미 감사로 하여금 직접 살펴본 다음 보고하여 구휼할 근거를 삼도록 하였습니다만,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는 백성이 없지 않을 듯하니, 아직 처결되지 않은 본도의 옥사를 일일이 아뢰게 한 다음 형조로 하여금 소결(疎決)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치화가 아뢰기를,
"고 교리 윤집(尹集)은 남한 산성에 있었을 때에 화의를 배척하였다가 청나라로 잡혀가 굴복하지 않고 죽었는데, 그가 청나라로 떠나던 때에 인조 대왕께서 윤집을 인견한 자리에서 ‘노모와 처자를 돌보아 주겠다.’라고 하교하셨고, 그후 매달 쌀을 그의 집에 지급하게 하셨습니다. 지금 듣건대 그의 처는 죽고 집안이 매우 궁핍하다고 하니, 3년 동안은 쌀을 계속 지급해 주어 제사에 필요한 물건을 마련하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하니, 태화가, 아직 장례를 치르지 않았으니 상을 치르는데 필요한 물건을 지급해 주기를 청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이조 판서 김수항이 아뢰기를,
"신은 원자 보양관의 직임을 맡고 있으면서도 아직 배알하지 못하였으니, 아랫사람된 자로서 심정이 매우 답답합니다. 또 실록을 지금 이미 베껴 왔으니 여쭈어 결정해야 할 일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실록에서 베껴온 것은 매우 소략하다. 태종조에는 원자부(元子府)라 칭하고 관속(官屬)은 시학관(侍學官)으로 칭하였는데, 중종조에는 곧장 세자로 칭하고 인종 대왕이 6세 되던 때에 관을 쓰고 서연에 출입하였다. 이는 중종조에 창설한 것이니 지금은 따를 필요가 없다."
하자, 명하가 아뢰기를,
"쌍동계(雙童髻)는 《대명회전(大明會典)》에 나옵니다."
하였다. 수항이 아뢰기를,
"조종조의 고사(故事)에는 시강하는 관원을 여러 명 차출하였는데 중종조에는 심지어 대신으로 정하기도 하였습니다. 인조조에는 원자 관속을 차출하여 당상관은 강학관, 당하관은 시학관이라고 불렀으니, 지금 다 차출하지 않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송준길의 뜻은 이렇게 하였으면 하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서로 만나보게 하고자 한 지가 오래인데, 원자가 근래에 병을 앓고 있으니 병이 나으면 경들과 서로 만나보게 하겠다."
하였다. 태화가, 예판 및 보양관으로 하여금 상의하여 절목(節目)을 정하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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