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일 갑신
태백(太白)이 낮에 나타났다.
9월 3일 병술
대신과 비국의 제신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홍명하(洪命夏)가 아뢰기를,
"후릉(厚陵)038) 을 개봉(改封)하는 일은 그만둘 수 없을 것 같습니다만 일이 매우 중대한 데에 관계됩니다. 사대석(莎臺石)을 제거하고 개봉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고, 우의정 허적(許積)은 아뢰기를,
"이미 1백 50여 년이나 되었는데 지금 개봉한다면 의당 쿵쿵 다지면서 축조하는 일이 있게 될 것이니, 어찌 매우 미안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대석을 쓰지 않는다면 쿵쿵 다지면서 축조하는 일은 하지 않아도 되겠는가?"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단지 사대석을 고르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뿐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난간석(欄干石)만을 쓰고 개봉할 때에는 구릉(舊陵)보다 조금 넓게 다듬도록 하라."
하였다. 명하가 아뢰기를,
"대교(待敎) 이세장(李世長)이 이미 일기(日記)를 찬수하여 춘추관(春秋館)에 보관하여 두었습니다만 거기에 누락된 일이 있어 추가로 기록하려고 하는데 사고(史庫)는 마음대로 여닫을 수가 없으니, 세장에게 상하번(上下番) 사관(史官)과 함께 사고를 열고 첨서(添書)하여 보관하게 하소서. 세장이 방금 입시(入侍)해 있으니 하문하여 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세장에게 하문하여 보고 나서 허락하였다. 부제학 조복양(趙復陽)이 아뢰기를,
"세장이 이른바 누락되었다는 것이 무슨 일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막중한 사고(史庫)를 어떻게 멋대로 열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이조 참판 이경휘(李慶徽)는 아뢰기를,
"상께서 하문하셨다고 하더라도 이세장이 어떻게 감히 이런 말을 진달할 수 있습니까."
하고, 복양은 아뢰기를,
"사람들이 만일 이번 일을 끌어대어 전례로 삼아 멋대로 사고를 열어 마음대로 내용을 삭제하거나 고친다면 그 폐단을 말로 다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명하는 말이 막혔고 세장도 감히 다시 말하지 못하였다. 우상 허적이 아뢰기를,
"지금 온천(溫泉)에 새로 짓는 어실(御室)에는 자전(慈殿)께서 입어(入御)하셔야 하고 전에 지은 어실에는 상께서 입어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어실은 서쪽에 있고 백관들의 가가(假家)는 동쪽에 있어서 자전의 어실과 너무 가까우니 이 점이 매우 불편합니다. 도형(圖形)을 내려보내어 내관(內官)으로 하여금 주관하도록 분부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호판(戶判)을 차지(次知)로 삼으라."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일로(一路)의 관사(官舍) 또한 미리 품정해야 하는데, 어떤 사람은 ‘자전이 입어했던 어실에는 뒷날 사객(使客)이 들어가 거처할 수 없으니, 따로 침실을 짓지 않을 수 없다.’고 합니다."
하고, 영상 정태화는 아뢰기를,
"갑자년039) 인목 왕후(仁穆王后)께서 입어하였던 어실에 그뒤 사객들이 들어가 거처했었으니, 지금 와서 이 때문에 따로 또 하나의 어실을 지을 것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수원(水原)에는 대문(大門) 안에 별당(別堂)이 있으니, 내가 들어가 거처할 수 있다."
하였다.
원자(元子)가 보양관(輔養官) 송준길(宋浚吉)과 희정당(熙政堂) 서쪽 별당(別堂)에서 상견례(相見禮)를 행하였다.
원자가 보양관과 상견례를 행한 의식(元子與輔養官相見儀)
그날 액정서(掖庭署)에서 원자의 배위(拜位)를 동벽(東壁) 아래 설치하여 서쪽을 향하도록 좌석을 만들었으며 보양관의 배위는 서벽(西壁) 아래 설치하여 동쪽을 향하도록 좌석을 만들었다. 보양관이 서당(書堂)에 이르러 흑단령(黑團領)을 갖추자 내시(內侍)가 꿇어앉아 내엄(內嚴)을 찬청(贊請)하였고, 보양관이 궁문 서쪽에서 동쪽을 향하여 서니 내시가 꿇어앉아 외비(外備)를 아뢰었다. 원자가 동계(童髻)·옥잠(玉簪)·아청 단령(鴉靑團領)·흉배(胷褙)·옥대(玉帶)를 갖추고 나아오니 내시가 배위(陪衛)하고 내려와 동쪽 뜰 아래 서고, 보양관은 서쪽 뜰 아래로 왔다. 보양관이 먼저 올라가고 원자는 뒤에 올라갔다. 보양관이 자리로 나아가자 원자가 자리로 나아가 머리 조아리고 두 번 절하니 보양관도 머리 조아리고 두 번 절하여 답하였다. 상견례를 마치고 보양관이 뜰을 내려오자 원자도 내려와서 동쪽 뜰 아래에 섰다. 보양관이 문을 나가니 내시가 꿇어앉아 예(禮)가 끝났다고 아뢰었다. 원자는 대내(大內)로 들어가고 배위(陪衛)를 평상시처럼 하였다. 【대내(大內)에다 미리 별석(別席)을 설치하였기 때문에 재배례를 행한 뒤에 다시 좌석으로 나아갔다가 금방 파하고 나갔다.】 이때 원자의 나이 겨우 5세였는데도 행례할 적에 마치 성인(成人)과 같아 행동 하나하나가 조금도 예에 어긋나지 않으니 보양관과 내시들이 모두 탄복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1책 11권 1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479면
【분류】왕실-종친(宗親)
이때 원자의 나이 겨우 5세였는데도 행례할 적에 마치 성인(成人)과 같아 행동 하나하나가 조금도 예에 어긋나지 않으니 보양관과 내시들이 모두 탄복하였다.
이달 18일에 춘당대(春塘臺)에서 관무재(觀武才)를 설행할 것을 결정했는데 이는 문신(文臣)의 정시(庭試)에 대한 대거(對擧)이다.
행 부호군 조경(趙絅)이 소장을 올려 월봉(月俸)을 사양하기를,
"지난번 양사에서 함께 발론하여 월봉을 지급하는 것은 근거가 없는 일이라고 하면서 모욕하고 비방하는 언사가 백간(白簡)040) 에 낭자했는데 이는 진실로 신을 시기하여 제거하려는 자들의 남은 분노가 그치지 않은 소치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른바 퇴로(退老)한 신하에게 녹봉을 지급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은 실로 공의(公議)요 국전(國典)입니다. 신이 무상하기는 하지만 죽을 날을 목전에 둔 몸으로 이런 예의에 어긋나는 월봉을 받음으로써 몰염치한 귀신이 되기를 달갑게 여길 수 있겠습니까. 속히 월봉을 지급하라는 명을 환수하시어 신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은 굳이 사양하지 말고 안심하고 받으라."
하였다.
9월 4일 정해
해에 겹햇무리가 졌다.
김만기(金萬基)를 집의로, 남이성(南二星)을 이조 좌랑으로, 윤집(尹鏶)을 이조 참의로, 이시술(李時術)을 우부승지로, 이유상(李有相)을 수찬으로 삼았다.
이조가 아뢰기를,
"이익화(李益華)·이태기(李泰祺) 2인은 모두 문지(門地)가 낮아서 성균관이 공론을 따라 허참(許參)시키지 않았다고 했기 때문에 당초 발론한 사람에게 왕복하면서 핵문(覈問)했더니, 전 박사(博士) 박이문(朴以文)·정민헌(鄭民獻)과 전 학록(學錄) 이삼석(李三錫) 등이 서로 미루면서 모호하게 회답하였을 뿐 끝내 하나를 지적하여 정직하게 진술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준례에 의거 이문(移文)해서는 그 실상을 알아낼 수 없으니, 박이문 등에게 유사(攸司)로 하여금 함문(緘問)을 보내어 추문하게 해서 허실(虛實)을 상세히 조사한 뒤에 분관(分館)에 관한 한 조항은 본조에서 다시 품처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따랐다.
원자가 좌상 홍명하, 우상 허적과 상견례를 행하였다. 상이 특명을 내려 대신들과 상견례를 행하게 했는데 영상 정태화가 병 때문에 휴가중에 있었으므로 좌우상이 먼저 행한 것이다.
9월 5일 무자
원자가 보양관 김좌명(金佐明)·김수항(金壽恒)과 상견례를 행하였다.
좌참찬 송준길이 소장을 올려 온천(溫泉)에 가서 목욕하게 해줄 것을 청하니, 상이 인견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신이 다행히 원자를 뵙게 되었습니다. 종사와 신민의 큰 경사가 실로 여기에 있으니 위에서 제가(齊家)하는 법을 잘 실행하여 원자로 하여금 취하여 본받게 한다면 어찌 국가의 복이 아니겠습니까. 보양하는 책임이 제신들에게 있기는 합니다만 나아가 뵙는 것이 때가 있으니 십한(十寒)041) 의 우려가 없지 않습니다. 항상 좌우에 두고 곳에 따라 교유하는 것은 오직 전하께 달려 있습니다. 신은 노병(老病)이 날로 깊어져 가고 있으므로 지금 서늘해져 가는 시기에 맞추어 휴가를 얻어 목욕을 하러 가고 싶어 감히 이렇게 거듭 청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 천기(天氣)가 이미 서늘하여 졌으니, 경이 내려간다고 해도 반드시 목욕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원자가 이미 상견례를 행했으니 글을 배우게 해야 하는데 경이 내려간다면 누가 그를 교도(敎導)하겠는가. 그리고 원자가 전에는 수염이 있는 사람을 만나기 싫어했는데 경을 만나고 난 뒤부터 항상 다시 만나보고 싶어했다. 오늘도 경이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 방금 나와서 만나보려 하고 있다."
하였다. 상이 원자를 나오게 하라고 명하니, 원자가 당수(唐首)·옥잠(玉簪)에 남색사 도포(藍色紗道袍)·홍사대(紅絲帶)·흑화(黑靴) 차림으로 나와서 북쪽을 향하여 재배하고 어좌(御座)의 왼쪽에 앉았다. 준길이 아뢰기를,
"신이 압존(壓尊)되어 답례(答禮)를 할 수 없기에 매우 황공스럽습니다."
하니, 상이 원자에게 이르기를,
"좌참찬을 본 적이 있느냐?"
하자, 원자가 보았다고 대답하였다. 상이 안석(案席)에 기대어 웃음을 머금은 채 원자를 눈여겨 바라보았다. 원자는 미목(眉目)이 청아하고 신기(神氣)가 빼어났는데 단정하게 손을 마주 잡고 정좌하여 제신들을 둘러보았다. 입시했던 신하들이 모두 은근히 기뻐하였다. 조금 있다가 상이 원자에게 대내(大內)로 들어가라고 명하니, 원자가 일어나서 재배하고 들어갔다. 준길이 아뢰기를,
"삼가 원자께서 행례(行禮)하는 것을 살펴보니 읍양하고 배궤(拜跪)하는 것이 법도에 맞지 않는 것이 없었습니다. 궁중(宮中)에서 예습을 했다고 하더라도 타고난 자질이 아니면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부터 힘써 학문을 강론하게 함으로써 품성을 개도하여 증익시켜야 하는데 강해야 할 글은 의당 《효경(孝經)》으로 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기는 하지만 자음(字音)을 필시 알지 못할 것이니 먼저 《훈몽자회(訓蒙字會)》를 강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자, 준길이 아뢰기를,
"《효경》을 강하면서 겸하여 자서(字書)도 강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인하여 강학(講學)함에 있어 날마다 할 것인가 하루씩 걸러 할 것인가에 대한 당부(當否)를 결정할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하루씩 걸러 하도록 하라. 보양관은 1인으로 정할 필요가 없다. 일이 없을 경우에는 2인이 들어와도 된다."
하였다. 준길이 또 목욕하러 가게 해줄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면유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준길이 아뢰기를,
"삼가 듣건대 진연(進宴)을 거행할 것을 이미 결정했다고 하는데 시세를 상고하여 보면 해서는 안 될 점이 있습니다. 지금 백성의 일이 참담하여 큰 흉년의 재앙이 팔로(八路)가 똑같은 실정이어서 백성의 주검이 구렁을 메울 상황입니다. 게다가 근래 천재(天災)가 마음을 놀라게 하고 태백(太白)이 낮에 나타나 지금껏 없어지지 않고 있는데 이런 걱정스런 때를 당하여 이렇게 성대한 행사를 거행하는 것을 외방 사람들이 듣는다면 장차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더구나 제왕(帝王)의 효도는 구체(口體)를 봉양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실은 종사를 공고하게 하여 백성들이 안락(安樂)을 누리게 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내년 봄에 자전을 모시고 온천으로 목욕하러 간다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 내년에 자전의 체후가 평복되고 농사도 풍년이 든 뒤에 성례(盛禮)를 거행하여 백성과 즐거움을 함께 한다면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국상(國喪)이 있은 뒤로 잇따라 흉년이 든 탓에 아직 한번도 두 자전께 진연을 올리지 못하였다. 임인년042) 에는 연사(年事)가 조금 풍년이 들었으므로 장차 설행(設行)하려 했으나 만수전(萬壽殿)의 상제(喪制)를 당하였던 탓에 또 설행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런데 만수전의 상제가 겨울에 끝났기 때문에 이에 대신들과 상의하여 겨울 끝이나 초봄에 설행하려 했다. 만일 1년, 2년 자꾸 미루다 보면 끝내는 설행할 때가 없게 될 것이다. 여러 사람의 의견에는 풍정(豊呈)을 행하자고 하는 이도 있었으나 단지 간략하게 진연(進宴)을 설행하여 조금이나마 나의 마음을 펴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천재(天災)와 민원(民怨)이 이렇게 매우 극심한 상황인데 나라에서 한편으로 이런 거조를 행한다면 먼 외방의 백성들이 장차 반드시 국가에서 구휼(救恤)하여 주지 않으면서 도리어 성대한 행사를 거행한다고 여길 것이니, 어떻게 백성들에게 해명할 수 있겠습니까. 대저 임금의 거조가 조금이라도 천의(天意)와 민심(民心)에 합치되지 않는 점이 있게 된다면 이는 아마도 제왕의 효도가 아닐 듯싶습니다. 일찍이 선조(先朝) 정유년043) 에 진연을 설행하려 했었는데 마침 겨울에 우레가 치는 변이 발생했으므로 신이 탑전에서 진달하였더니 선왕께서는 즉시 물려서 설행하라고 명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늘을 두려워하는 도리인 것입니다. 근래 천재와 경주(慶州)·강릉(江陵)의 변고는 모두 전고에 없었던 일입니다. 이런 때에 이런 거조가 있는 것은 매우 미안스러운 일이기 때문에 감히 이렇게 진달하니, 삼가 바라건대 다시 생각하여 보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자식이 되어 날짜가 가는 것을 아끼는 마음에 있어 흐르는 세월은 기다려 주지 않는 것이어서 후회해도 소용이 없는 지경에 이를까 우려했기 때문에 부득이하여 거행하려는 것이다."
하자, 준길이 아뢰기를,
"신들도 부모가 있는데 이런 성교(聖敎)를 듣고 어떻게 감히 다시 진달할 수 있겠습니까. 단지 신의 뜻은, 제왕의 효도는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므로 먼저 큰 것을 행한다면 이런 일은 비록 행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효도에 무슨 손상될 것이 있겠느냐고 여겨 아뢴 것입니다."
하였다.
9월 6일 기축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장령 이동명(李東溟), 지평 신명규(申命圭)가 아뢰기를,
"신들이 지난번 태상(太常)044) 의 일 때문에 번독스럽게 함을 면할 수 없었는데 이는 또한 신들의 죄인 것입니다. 처치할 즈음에 전례에 따라 출사하게 할 것을 청하였으므로 애써 재숙(齋宿)하고 소명(召命)이 내리면 달려가려고 했었는데 처치한 지 4일이 지나서야 소패(召牌)가 내려졌습니다. 스스로 의혹스럽기 그지없었습니다만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신들이 숫자에 끼이기에 부족한 탓에서라면 당초 분수에 지나친 자리에 두어 명기(名器)에 하자가 있게 한 것은 부당한 일이며, 인피한 일이 성상의 마음에 합치되지 않아서라면 진실로 분명한 유지(有旨)를 내려 지척했어야 하며, 긴요하지 않은 일이라고 핑계하고 방과(放過)하여 그렇게 된 것이라면 이는 명주(明主)가 대간(臺諫)을 설치하여 이목의 임무를 맡기는 도리가 아닌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신료들이 전하에게 기대한 것이겠습니까. 이는 모두 신들이 불초하여 천대와 모욕을 자초한 소치이니 어떻게 감히 구차스럽게 무릅쓰고 있으면서 전하께 누를 끼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신들을 체직시켜 주소서."
하니, 상이 사퇴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사헌부가 아뢰기를,
"이민구(李敏求)가 강도(江都)에서 일을 그르친 죄에 대해서는 신들이 번거롭게 누누이 아뢸 필요가 없겠습니다만, 민구에게는 이보다 더 큰 죄가 따로 있습니다. 그가 귀양가 있을 때를 당하여 이에 역적 정명수(鄭命壽)가 데리고 있던 여자의 아우를 취하여 첩으로 앉히고 드디어 명수와 교결(交結)하여 감히 협박하여 풀려나기를 도모할 계교를 세웠습니다. 그리하여 청인(淸人)이 나올 때를 당하여 은밀히 명수에게 촉탁을 넣어 마구 공갈을 가하게 하였으므로 인조 대왕께서 당초 즉시 왕법(王法)에 의거 정형(正刑)에 처하지 않았던 탓으로 이런 욕을 당하게 되었다고 크게 한스럽게 여기기에 이르렀는데 부득이 우선 이배(移配)하게 했었습니다. 만일 민구가 조금이나마 사람의 마음이 있어 대강 분의(分義)를 아는 사람이라면 의당 스스로 책형(磔刑)을 받으려 해도 되지 않을 것처럼 여겨야 할 것인데 끝내는 이에 창녀(娼女)를 첩으로 앉혀 놓고 스스로 좋은 계교로 여겼으니, 고금 천하에 남의 신하가 되어 이웃 나라에 있는 역적과 교결해서 군부에게 협박을 가하는 것을 민구처럼 한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의 전후 죄상을 따져본다면 지금까지 천지 사이에 숨쉬고 있게 한 것도 더없는 실형(失刑)인 것입니다. 더구나 직첩을 주고 거두어 서용하게 함으로써 다시 작록의 반열에 끼게 했는데야 말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이민구를 서용하라는 명을 환수하소서.
기보(畿輔)는 보장(保障)이어서 중임(重任)이라고 할 수 있지만 곤임(閫任)에 견주어 본다면 진실로 대등한 반열이 아닙니다. 지난번 수원 부사(水原府使)의 천망(薦望)이 있을 적에 삼로(三路)의 절도사(節度使)를 아울러 의망함으로써 결국 새북(塞北)의 곤수에게 귀착시켰습니다. 관방(官方)과 정체(政體)를 이렇게 어긋나게 하는 것은 부당하기 때문에 물정이 모두 의아해 하고 있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수원(水原)과 북청(北靑)의 거리는 십수일의 노정이 되는데 무변(武弁)으로서 서울에 있으면서 일이 없는 사람들 가운데 어찌 가합한 사람이 없겠습니까. 그런데 하필 변방의 곤수를 옮겨가면서까지 제수하여 전도스러움이 이 지경에 이르게 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전 남병사(南兵使) 구문치(具文治)는 그대로 전임(前任)에 제수하고 수원 부사는 다시 일이 없는 가합한 사람 가운데서 극진히 가려 차송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충청 감사 임의백(任義伯)이 폐사(陛辭)하니, 상이 인견하고 본도의 농사에 대해 하문하였다. 의백이 아뢰기를,
"처음에는 풍년을 기대할 수 있었습니다만 곧이어 풍상(風霜)과 장마 때문에 곡식이 손상되었으며 두태(豆太)까지도 매우 부실하다고 합니다. 온천에 집을 짓는 역사에 대해서는 신이 내려가서 헤아려 처리하겠습니다. 지난번에 우의정 허적과도 상의했고 또 어실(御室)의 도형(圖形)을 받아가지고 가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도형은 바로 자전께서 입어(入御)하실 집이다. 구기(舊基)의 계단이 너무 높으니 두어 계단을 제거하여 평평하게 만들도록 하라. 그리고 4칸을 짓되 반드시 간가(間架)를 넓게 하여 비좁지 않게 하라. 내가 전에 거처했던 집은 벽만 고치면 되는데 재목은 서울에서 내려보내도록 하겠다."
하고, 상이 또 이르기를,
"부득이하여 이런 거조가 있게 되었으므로 백성들을 동원하고 싶지 않다. 경은 모쪼록 유념하여 선처함으로써 반드시 백성의 원망이 없게 하라."
하였다. 의백이 아뢰기를,
"신이 전에 경상 감사로 있을 적에 도내의 절효(節孝)가 탁이한 사족 10인, 상한(常漢) 14명과 재행(才行)이 있어 녹용(錄用)하기에 가합한 자 7인을 기록하여 계문했었습니다. 그 가운데 영천(榮川) 사인(士人) 정도창(鄭道昌)은 아비가 반노(叛奴)의 적당들에게 살해당하자 원수를 갚을 것을 맹세하고 7년동안 상복(喪服)을 입고 날마다 관문(官門)에 나아가 울부짖으면서 통곡했는데 결국 적괴(賊魁)를 체포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당(餘黨)을 죄다 체포하지 못했다는 것으로 오히려 최마(衰麻)를 벗지 않자 장현광(張顯光)이 ‘선왕(先王)이 만든 예법을 무시하고 마음 내키는 대로 해서는 안 된다.’고 했기 때문에 비로소 최마를 벗고 심상(心喪)을 하였으며 적도들을 모두 제거하고 나이 오십이 되어서야 아내를 얻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그의 성효에 감동하여 서로 함께 효자리(孝子里)라는 세 글자를 마을 앞에 있는 암석(巖石)에 새겼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의당 특별히 포장(褒奬)하는 법전을 시행해야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높이 살 만하니 반드시 특별한 은전을 가한 연후에야 선행(善行)을 표창하는 도리에 합당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듣건대 이미 해조에 내렸으나 단지 전례에 따라 보파(報罷)했을 뿐이라고 하니, 장차 어떻게 보고 느끼어 용동(聳動)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해조에 이르라."
하였다.
달이 토성(土星)을 범하였다.
9월 7일 경인
전주(全州) 등 다섯 고을에 황충이 발생하였다.
여성제(呂聖齊)를 북평사(北評事)로, 이유상(李有相)을 이조 좌랑으로, 홍처후(洪處厚)를 병조 참의로 삼았다.
간원이 이민구를 서용하라는 명을 환수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집의 김만기 등이 잇따라 이문구·구문치의 일을 아뢰고 또 아뢰기를,
"각도의 조적과 신역을 징납할 수 없게 된 부류들을 초출(抄出)하여 계문하게 한 것은 성상께서 하늘의 뜻에 따라 백성을 구휼하려는 성의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도신(道臣)이 된 자는 의당 조정의 덕의를 몸받아서 실제의 혜택이 아래에 미치게 해야 하는데 전 충청 감사 김시진(金始振)은 이에 각 고을에서 초출할 즈음 그 가운데 숫자가 많은 고을은 반드시 태반을 감하게 했습니다.
대저 각 고을에 신칙하여 허실이 혼동되는 일이 없게 하는 것은 가합니다. 그러나 이제 감하게 하기만을 힘쓴 까닭에 각 고을에서 감히 어기지 못하게 됨에 따라 곤궁한 백성들이 탄식하게 함으로써 조정의 명령이 부실하다는 원망을 사기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인색하게 하는 습성에 굳어져 덕의(德意)를 잘 봉승(奉承)하지 못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큰 기대를 완전히 잃게 만들었으니, 김시진은 추고하여 무겁게 다스리소서. 그리고 신 감사에게 각 고을에 분부(分付)하여 다시 더 초출하게 함으로써 똑같이 계문하게 할 여지를 만들어 주소서."
하니, 상이 이민구와 김시진의 일은 따랐으나 구문치의 일은 따르지 않았다.
원자에게 《효경》을 강하기 시작하였다. 보양관 1인씩이 돌려가면서 진강(進講)하게 하였는데 아직 나이가 어려서 행례(行禮)에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단배(單拜)만 하게 하였다. 당상(堂上)이 강할 때마다 《효경》 한 대문(大文)을 강하고 대자(大字) 열 자(字)를 익히게 했는데 이를 일상의 과제로 삼게 하였다. 입는 복색(服色)은 편의에 따라 편복(便服)으로 접견하게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지관(地官)에게 문의하여 본바 후릉(厚陵)의 개봉(改封)은 정미년 2월이 길하다고 하니, 이때에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9월 11일 갑오
간원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방역(坊役)의 사목(事目)을 반포할 때 수십 건을 첨가하여 기록한 일에 대해 본원(本院)에서 해당 부관(部官)을 파직시킬 것을 논하자 당부(當部)에서 참봉 김만리(金萬里)를 현고(現告)했습니다. 지금 듣건대 그때 문서(文書)에 수결(手決)을 둔 사람은 바로 주부(主簿) 이득빈(李得彬)이었다고 합니다. 현고할 적에 이미 자수(自首)하지 않았고 동료에게 핑계하여 미룬 것도 너무 터무니 없는데 동료가 파직된 뒤에는 태연히 출사하였으니 몰염치하기가 이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남부 주부(南部主簿) 이득빈은 도태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헌부가 아뢰기를,
"괴원(槐院)045) 의 규례는 감히 차서를 건너뛰지 못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우위(右位)가 작산(作散)되었을 경우에는 아래에 있는 사람이 승진하여 상박사(上博士)가 되더라도 자신보다 우위에 있는 사람이 수서(收叙)되면 그 우위에게 사양하고 감히 등급을 뛰어넘어 곧바로 다른 관서로 나갈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번 이옥(李沃)이 박사에서 승진되어 나아갈 적에 우위에 있는 4인이 이미 수서되어 순차적으로 옮겨가게 되어 있었으니, 이옥의 도리에 있어서는 실제의 사일(仕日)이 찼다고 하더라도 의당 규례에 의거하여 사양했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차례에 해당된 우위에게 사양하지 아니하고서 끝내 스스로 승진되어 나아갔으니 그가 규례를 무너뜨린 것이 실로 놀랍습니다. 전적(典籍) 이옥을 개정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9월 12일 을미
간원이 아뢰기를,
"국가에서 저축하는 것은 가뭄과 장마에 대비하기 위한 것으로 유사시의 경우에 견준 것입니다. 지금 팔로(八路)에 저축되어 있는 숫자를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만, 양서(兩西)의 경우는 가호가 얼마 안 되는 작은 고을일지라도 수만 석(石)을 밑돌지 않고 있고 기타 각도 여러 고을에 저축된 것도 숫자의 다소가 고르지 않습니다. 곡식이 많은 고을은 조적(糶糴)을 실시할 즈음 백성들이 이를 감내할 수 없어 포흠되는 걱정을 면할 수가 없으며, 곡식이 적은 고을은 만일 흉년이 들게 되면 백성들이 모두 먹여주기를 바라는 것은 물론 다른 고을의 적곡(糴穀)을 받으러 가기에 이르고 있으니, 실로 널리 은택을 베푸는 데 병통이 있다는 탄식이 있습니다. 지금 각 고을의 전결(田結)의 다과(多寡)를 가져다 조사하여 조처한다면 3년의 식량을 저축하는 숫자는 채우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원수를 참작하여 결정해서 매년 적곡을 나누어 주고 모곡(耗穀)과 아울러 거두어 들일 수 있습니다. 그런 다음 원래 정한 실수 이외에 여유가 있게 된 부분은 경창(京倉)으로 운송해다가 군수(軍需)에 대비하도록 한다면, 제도의 민력을 조금이나마 펴지게 할 수 있고 대농(大農)046) 의 경비에도 보탬이 되는 점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해조로 하여금 묘당에 나아가 의논하여 각 고을의 조적을 그 고을 전결의 다과에 따라 원수를 일정(一定)하게 함으로써 민간의 폐단을 조금이나마 제거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대사간 이상진(李尙眞)이 소장(疏章)을 올렸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지금의 온갖 폐단은 각기 그에 대한 이유가 있는데 그 책임은 전적으로 군상(君相)에게 있습니다. 전하께서 진작시킬 의지가 없고 강강한 위엄이 적기 때문에 국가의 기강이 날로 퇴폐되고 온갖 일이 점점 실추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번 온천에 목욕하신 뒤로 건도(愆度)가 평상으로 회복되셨으므로 신민들이 다같이 경하하였고 더욱 정신을 가다듬어 좋은 정치를 할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지난번 유신의 소장을 인하여 즉시 고리를 굴리듯이 따르시는 아름다움이 있었고 허다한 주독(奏牘)을 일시에 모두 판하(判下)하였으므로 원근이 함께 축하하면서 구름을 헤치고 하늘을 본 듯이 통쾌하게 여겼습니다. 그랬는데 얼마 안 되어 다시 전일과 같아져 버렸으니, 이 한 가지 일로도 다시 지치(至治)를 기대할 수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아, 전하의 명성(明聖)함으로 종사(宗社)를 부탁받은 중함을 생각하지 않은 채 한결같이 구습을 답습해서야 되겠습니까. 이로 인하여 비국과 제사의 공사(公事)가 적체되어 달이 지나고 해를 넘긴 것이 얼마인지 모릅니다. 따라서 전하께서 어떻게 대신을 책하실 수 있겠으며 대신은 어떻게 전하를 바룰 수 있겠습니까. 군신 상하가 이렇게 그럭저럭 세월을 보낸다면 장차 나라를 어떤 지경에 두게 되겠습니까. 더구나 대신은 매양 시조(施措)가 있을 때마다 대체(大體)는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고식책(姑息策)만을 힘쓰기 때문에 백성의 일을 마치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는 남의 일을 보듯이 하고 있어 변괴가 계속 발생하는가 하면 기근이 잇따라 닥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백성의 원망을 야기시키게 된 원인을 생각하지 않고 있음은 물론 끝내 백성을 위로하고 재변을 해소시킬 방책을 생각지 않고 있습니다. 간혹 이에 대해 말하는 자가 있으면 방계(防啓)하기만을 일삼기 때문에 전하께서 백성을 구휼하는 덕의(德意)로 하여금 중간에서 막혀 아래에까지 미쳐가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점점 인심은 믿을 수 없고 국사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으니, 대신의 죄가 무겁지 않습니까.
이렇게 백성들의 원망이 발생된 이유를 따져보면 실은 치병(治兵)과 염재(歛財)의 문로(門路)가 몹시 번거로운 데 연유된 것입니다. 각 관서에서 스스로 법식을 정하여 독촉하는 탓으로 그 분요로움을 견디지 못한 지친 백성들이 울부짖으면서 원망하게 되었는데도 불쌍하게 여기지 않고 매질을 낭자하게 하는가 하면 잡아다 가둔 죄수가 감옥에 가득한데, 이렇게 하는 자들을 유능한 관리라고 말하면서 취하여 승진 발탁하고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어진 마음이 있는 사람이 차마 독촉하고 핍박할 수가 없어서 혹 기일을 어기게 되는 경우에는 명예를 노리는 행위라고 비방하고 죄벌이 뒤따릅니다. 그러므로 지금 풍력(風力)과 간재(幹才)가 있다고 이름난 자들은 거개가 재능을 팔고 벼슬을 잃을까 걱정하는 비열한 자들로 자신을 위하여 도모하기만을 힘쓸 뿐 백성의 고통은 돌보지 않고 있으니, 백성이 어떻게 곤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깊이 성의(聖意)에 유념하시어 민폐를 통렬히 제거하시고 염재의 외람됨과 치병의 번요로움에 대해 변통시킬 방도를 생각하소서.
그리고 금년의 농사는 흉년을 면하기 어려우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유사(有司)의 1년 비용을 헤아려 남는 것에 해당되는 숫자를 양감(量減)하며 급하지 않은 것은 독촉을 정지함으로써 일푼이나마 너그럽게 하여 죽음을 면하게 해준다면 백성들의 더없는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진계(進戒)한 내용은 절실한 것이어서 내가 마땅히 유념하도록 하겠으며 또한 유사로 하여금 의논하여 조처하게 하겠다."
하고, 소장을 비국에 내렸다. 그래서 대신들이 모두 인구하고 체면시켜줄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위유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따라서 일도 정지되어 행해지지 않았다.
9월 14일 정유
김석주(金錫胄)를 부교리로, 이두진(李斗鎭)을 남병사(南兵使)로 삼았다.
좌참찬 송준길이 소장을 올리기를,
"신이 지난번 진실한 마음을 진달하고 은가(恩暇)를 내려주기를 빌었습니다. 그런데 성념(聖念)이 그지없이 간곡하시어 갑자기 허락하려 하지 않고 사대하여 면유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성의(聖意)가 간절하고도 돈독하시어 원자(元子)를 나오게 하여 어좌(御座) 곁에 모시고 있게 하면서 돌아보고 하신 말씀이 정녕하였고 권유하는 뜻으로 면려하시었으니, 이는 실로 몇 세대에 드물게 있는 성전(盛典)인 것입니다. 스스로 나이와 근력이 모두 쇠진하여 우러러 성의에 보답할 수 없는 것이 슬플 뿐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삼가 성지(聖旨)를 받들어 감히 곧 떠나지 못하고 또한 수차에 걸쳐 시강했는데, 우러러 원자의 낭랑한 목소리를 들으니 송독(誦讀)이 분명하였고, 또 기운찬 필획(筆畫)을 살펴보니 정신을 집중하여 쓴 글씨였습니다. 실로 종사(宗社)의 큰 경사가 여기에 있었으므로 진신(搢紳)들이 서로 경하하였고 중외(中外)가 다같이 기뻐하였습니다.
신이 지극히 완고하기는 하지만 또한 인심은 지니고 있는데 옛 사람이 이른바 차마 곧바로 결별(訣別)할 수 없다고 한 것이 바로 신의 오늘날 심정을 두고 한 말인 듯합니다. 생각건대 신은 원래 자중(自重)하는 사람이 아닌데 신령한 하늘이 돌보아줌을 힘입어 오랜 병이 조금 차도를 보아서 다행히 여생을 보존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궁문(宮門)에 들어가 거듭 청광(淸光)을 우러를 수 있게 되기를 감히 청할 수는 없지만 진실로 원하는 바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몇 구의 문자로는 나의 회포를 다 표현하기 어려우니, 또 면유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김여신(金礪臣)이란 자는 안악(安岳) 사람이다. 그의 어미 홍씨(洪氏)는 처음 철원(鐵原) 사람 신광만(申光晩)의 아내였는데 광만이 죽은 뒤에 김의결(金義潔)의 첩이 되어 여신을 낳았다.
이때에 이르러 장백운(張白雲)이 광만의 6촌인 최량(崔樑)과 노비 때문에 쟁송했는데 최량이 홍씨를 겁박하여 간음했다고 무고하였다. 강원 감사가 홍씨를 추문하려 하자 백운이 또 홍씨가 나아가서 변명하게 되면 자신의 정적(情跡)이 탄로날까 두려워하여 백운이 이에 의결 부자(父子)를 꾀어 홍씨는 이미 죽었고 여신은 바로 적자라고 사칭하게 하였다. 이에 의결 부자가 그의 말대로 하였고, 여신은 심지어 홍씨가 아버지의 첩인데 잉태한 지 3, 4개월 후에 아기를 낙태하고 쫓겨나 죽었으며 자신의 어미는 의결의 아내로 안악 사람 정대기(鄭大基)의 딸이라고까지 하였다.
강원 감사는 황해도에 이문(移文)하여 정씨에 대해 사문하게 했더니 여신은 과연 정씨의 소생이 아니라 홍씨의 아들이며 홍씨는 지금 의결의 집에 살아 있다고 하였다. 감사가 드디어 이런 사실을 장문(狀聞)하였고, 형조에서 의결과 여신을 추문하자 모두 변명하지 못한 채 취복(就服)하였다. 형조가 청하기를,
"의결은 장 일백 도삼년에 처하고 여신은 전가 사변시키소서."
하니, 상이 대신에게 의논하라고 명하였다. 대신들이 해조로 하여금 율문을 조사하여 정죄하게 할 것을 청하니, 형조가 금부로 이송시켜 결장하고 정배할 것을 청하였다. 상이 전일 평안도의 죄인 무진(武進)의 전례에 의거 일죄(一罪)로 논하게 하였으나 여신이 결안(結案)하는 공초에서 자복하지 않았으므로 2차의 형신을 받았고, 그 뒤 소결(疏決)하는 거조가 있을 적에 마침내 감사(減死)되어 삼수(三水)에 정배되었다.
9월 15일 무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심재(沈梓)를 수찬으로, 민여로(閔汝老)를 장령으로 삼았다.
장령 이동명(李東溟)이 아뢰기를,
"신이 들으니, 강릉(江陵)의 옥사(獄事)에 대한 사계(査啓)가 들어왔는데 그 가운데에 그때의 수령이 그저 멍하니 자리만 지키고 있으면서 끝내 깨달아 살피지 못했다는 등등의 말이 있었고 해조에서 다시 조사한 연월(年月)로 계사(啓辭)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신이 체직되어 돌아온 것이 금년 2월이고 지난해는 신이 고을에 있을 때이니, 신이 바로 사핵에 들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감히 태연스럽게 무릅쓰고 대직(臺職)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인피하면서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헌부가 처치하여 체직시키라고 청하니, 상이 따랐다.
좌참찬 송준길을 인견하고 하유하기를,
"경이 또 소장을 진달하고 떠나게 해줄 것을 청하니, 나는 매우 한탄스럽다. 원자가 이미 강학을 시작했는데도 좌찬성은 오지 않고 경만이 머물러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경이 또 버리고 가려 하니 개도(開導)하는 공부를 장차 의뢰할 데가 없게 되었다. 경은 어찌 차마 내려갈 수 있겠는가."
하니, 준길이 아뢰기를,
"신은 병든 잔약한 몸으로 이런 추운 계절을 당하여 결코 여사(旅舍)에 머물러 있기가 곤란합니다. 온천에 가서 목욕하고 이어 전리(田里)로 돌아갔다가 겨울을 지내고 나서 다시 오려 합니다. 신이 어찌 차마 원자와 영원히 헤어질 수 있겠습니까. 삼가 조종조의 고사를 보건대 보양관이 중국에 갈 경우에는 보양관을 더 차출하여 진강하게 했었습니다. 조정 신하들 가운데 적격자가 없지 않으니 대신에게 하문하시어 더 차출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에게 병이 있기는 하나 나의 의견에는, 여기에서 치료하고 조섭하면서 서서히 내년을 기다렸다가 온천에 가서 목욕한다면 실로 양쪽이 모두 온편할 것이니 그렇게 하는 것이 나으리라고 여겨진다."
하니, 준길이 또 간청하여 마지 않았다. 상이 이르기를,
"원자를 보양할 책임을 내가 이미 경에게 부탁하였고 경도 이미 스스로 담당했는데 만일 강학을 폐하게 된다면 그 해가 어떻겠는가. 경은 모쪼록 사정을 돌아보지 말고 머물러 있도록 하라."
하니, 준길이 아뢰기를,
"성교가 이러하니 어떻게 감히 다시 진달할 수 있겠습니까. 전에 선조(先朝) 때에는 신이 서연(書筵)에 입시할 적마다 선왕께서 신이 들어온 것을 알고서 서연이 파한 뒤면 매번 머물러 기다렸다가 소대(召對)하게 했기 때문에 신들이 서연이 있는 날에는 번번이 대조(大朝)를 모실 수 있었습니다. 신이 근일 매양 이런 성거(盛擧)가 있기를 바랐었으나 지금껏 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성후(聖候)가 미령하신 것에 연유된 것이기는 하지만 걱정스런 생각과 감개스런 마음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삼가 외방(外方)의 민사(民事)에 대해 듣건대 금년 농사의 흉황이 지난해의 배나 된다고 합니다. 신은 삼가 이것을 감응의 이치라고 여기는데 무엇을 가지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하면, 위에서 온천에 갔다온 뒤로 중외 신민들의 기대가 전보다 만배나 더한데도 근일의 갖가지 거조를 살펴보건대 전보다 나아진 것이 없습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금년 농사가 처음에는 무성했다가 결국에는 흉황이 든 것이 어찌 감응의 이치에 의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근년 이래 혜성(彗星)·풍재(風災)·해일(海溢)과 경주(慶州)·강릉(江陵)에서의 변괴가 잇따라 한때에 나타났고 태백이 낮에 나타나는 것은 없는 날이 없으니, 지금이 어찌 군신 상하가 각자 두려워하고 면려하고 경계해야 할 때가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승지에게 이르기를,
"좌참찬이 말한 보양관을 차출하라는 등의 일에 대해 대신들과 의논하여 반드시 노성(老成)한 사람을 가려서 차출하게 하라."
하고, 또 준길에게 이르기를,
"원자가 무척 허약하고 또 이제 해가 점점 짧아져 가니, 이에 하루씩 걸러 강학하게 하고 싶다."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원자의 나이가 아직 어리니 보양이 중요합니다. 강학은 서두를 필요가 없으므로 하루씩 걸러 해도 불가할 것은 없습니다만 때로는 연일 강학하게 하여 중단하는 일이 있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이른바 불시에 접견하겠다는 것이 이를 말한 것이다."
하였다.
흥해(興海)·경주(慶州) 등 20고을에 황충이 발생하였다.
9월 16일 기해
사간 이유(李秞) 등이 아뢰기를,
"황헌(黃瀗)을 서용하라는 명을 속히 환수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지평 신명규(申命圭)가 아뢰기를,
"성주(星州) 고을은 본디 다스리기 어려운 곳으로 알려져 왔는데 새로 제수된 목사 이휴징(李休徵)은 인품이 괴팍하고 망령스러워 지난번 삼척(三陟)에 부임했을 적에 잘 다스리지 못한다는 소문이 도내에 파다했을 뿐만이 아니라 추하고 비루한 일을 한 것이 끝이 없었으므로 관동(關東) 사람들이 서로 더럽다고 수군대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따라서 다시 큰 고을을 제수하여 백성들에게 폐해를 끼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아침에 이에 대해 간통(簡通)을 보내어 왕복했는데 장관(長官)만이 곤란하게 여기는 뜻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면대하여 의논하기에 이르렀습니다만 시종 변치 않는 자세를 고수했습니다. 이는 모두 신이 미더움을 받지 못한 소치이니 어떻게 감히 태연스럽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인피하고서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대사헌 박장원이 아뢰기를,
"휴징의 인품과 벼슬살이에 대해서 상세히 아는 것이 없으므로 억지로 따름으로써 모순을 야기시키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신이 남에게 미더움을 받지 못한 것이 분명합니다."
하고, 집의 김만기는 동료가 장관과 소견이 합치되지 않는다고 서로 잇따라 인피했다는 것을 이유로 또한 인혐하니, 지평 신후재가 처치하여 아울러 출사시키기를 청하였다. 장원이 다시 억지로 동료의 의논을 따를 수 없어서 시끄러운 단서를 야기시켰다는 것으로 다시 인피하였고, 명규와 만기는 둘 다 출사하게 하도록 처치한 것이 구차하고 모호하여 크게 체례(體例)에 어긋난다는 것으로 또한 모두 체직시켜줄 것을 청하였으며, 후재는 처치가 공척(攻斥)받았다는 것으로 인피하였다. 간원이 처치하기를,
"장원과 후재는 체직시키고 명규와 만기는 출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9월 17일 경자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대사간 이상진(李尙眞)이 아뢰기를,
"아, 오늘날의 국사가 안전합니까, 위태롭습니까. 안전한 것도 군상(君相) 때문이고 위태로운 것도 군상 때문인 것입니다. 국사를 논하면서 군상을 거론하지 않는다면 누가 그 책임을 지겠습니까. 구구한 저의 의견으로 삼가 전하께 바라는 것은 전하께서 스스로 면려하심으로써 대신을 면려시키고 대신이 스스로 근면하여 전하를 권면하는 일입니다. 대신의 도량에 있어서는 의당 남의 말을 받아들여 더욱 면려할 일이지 기어이 인혐하면서 차자를 진달할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성상의 비답이 위유하는 데에 그치고 면려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으며 실제와 어긋나는 말을 억지로 가하였다는 내용의 하교가 있기에 이를 줄은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신이 스스로 한 말을 살펴보아도 잘못된 점이 있는 것을 깨닫지 못하겠고 또 성상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진실로 백성을 구휼하기 위해 정당한 방도를 극진히 힘썼다면 백성의 처지가 반드시 이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고 백집사(百執事)를 날마다 질책할 수는 없는 것이니, 책임이 귀결되는 것을 어떻게 면할 수 있겠습니까. 대신에게 사실이 아닌 말을 강제로 가한 죄가 어떤 죄에 해당되는 것입니까. 신은 참으로 황공스러워 말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종래 억지로 무릅쓰고 있었던 부끄러움은 말할 겨를이 없습니다. 신을 파직시키라고 명하소서."
하니, 상이 사퇴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간원이 처치하여 출사하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9월 18일 신축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온천에 행행할 적에 배종했던 제신들에게 상격(賞格)을 내렸다.
헌부가 아뢰기를,
"성주(星州) 고을은 영남(嶺南)의 웅진(雄鎭)으로 사람이 많고 지역이 커서 본디 다스리기 어렵다고 말해오고 있으므로 적격자가 아니면 외람되이 제수해서는 안 됩니다. 목사 이휴징은 지난번 삼척에 부임했을 적에 잘 다스리지 못한다는 비난은 이미 말할 수 없는 정도였고 추하고 비루한 일을 저지른 것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다시 남방의 큰 고을을 제수하여 백성들에게 해를 끼치게 해서는 안 되니, 파직시키소서.
국가에서 작상(爵賞)을 설치한 것은 공로에 보답하기 위한 것인데 반드시 상이 그 공로에 상당하게 된 뒤에야 헛되이 제수하고 외람되이 받았다는 데로 귀결되는 일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제신에게 가자하여 6품으로 천전시키라는 명은 실로 상을 신중히 한다는 의의에 어긋나는 점이 있습니다. 약방(藥房)의 제신들이 성궁(聖躬)을 보호하여 국가에 큰 경사가 있게 한 데 대해 상전(賞典)을 시행하여 온 것은 이미 전례가 있습니다. 이밖에 제신들은 배종하기도 하고 거수(居守)하기도 했는데 이는 직분상 당연히 해야 될 일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무슨 기록할 만한 공로가 있다고 아울러 은혜롭고 특이한 은전을 베풀어 품계를 건너뛰어 승진시키기에 이르게 한단 말입니까. 약방에게 내리는 상전 외에 제신들에게 가자하여 6품으로 천전시키게 한 명은 아울러 환수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파직시키는 일은 따랐다.
경안군(慶安君) 이회(李檜)가 졸(卒)하였다. 경안군은 곧 소현 세자(昭顯世子)의 아들이다. 소현의 자녀(子女)가 모두 죽었고 유독 경안군만이 살아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온천에 목욕하러 갔다가 병이 나서 실려 돌아와 죽었다. 상이 매우 애도하여 정원에 하교하기를,
"경안군의 상사(喪事)는 뜻밖에 나온 것이어서 내가 매우 비통하게 여기고 있다. 아, 선조(先朝) 때부터 돌보아 기르고 어루만져 보살펴 왔으니 진실로 후세 자손들은 의당 이를 본받아야 한다. 말과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눈물이 옷깃을 적시는 것을 깨닫지 못하겠다."
하고, 특별히 예장(禮葬)할 것을 명하였다. 그리고 의관(醫官) 박군(朴頵)은 삼가서 구호하지 못했다는 것으로 잡아다가 신문한 다음 형장을 가하고 먼 곳에 정배시켰다.
동지(同知) 이행진(李行進)이 졸(卒)하였다. 행진은 제법 문명(文名)이 있었으나 인품이 경망하고 지론(持論)이 부박하였으며 처신을 또 근신하게 하지 못하여 일찍이 원두표(元斗杓)에게 빌붙었다가 청의(淸議)에 버림받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졸하였다.
9월 21일 갑진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윤문거(尹文擧)를 대사헌으로, 이경과(李慶果)를 지평으로, 윤경교(尹敬敎)를 주서로 삼았다.
사간 이유 등이 아뢰기를,
"각 고을에서 조적(糶糴)을 수납할 즈음에 반드시 모곡(耗穀)을 받아들이고 있는데 이것이 전부터 유래되어 온 정식(定式)이라고는 하지만 근년 이래 흉년이 잇따라 발생하였으므로 원곡(元穀)도 간신히 준비하는 상황에 대해서는 진실로 논할 겨를도 없고 모곡에 이르러서도 충비(充備)할 수 없는 지경입니다. 입추(立秋) 이후로 수재·바람·우박·해일 등의 재해가 거듭 나타나니, 앞으로의 민사(民事)를 이미 알 수가 있습니다. 지난번 본원(本院)의 계사를 인하여 관서 관향곡(管餉穀)의 모곡(耗穀)은 이미 양감(量減)했습니다만 기타 제도의 피해를 입은 곳에 대해서도 똑같이 진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도 가운데 피해가 더욱 극심한 고을에 대해서는 금년의 모곡을 특별히 감제시켜 조정에서 은혜롭게 돌본다는 뜻을 보이게 하소서."
하니, 상이 해조에게 그 가운데 더욱 극심한 고을을 초출하여 품처하게 하였다.
9월 23일 병오
평안 감사 이정영(李正英)이 치계하였다.
"가산군(嘉山郡)에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새알만했으며 귀성부(龜城府)에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계란만하였고 여러 곡식을 손상시켰습니다. 태천(泰川)·박천(博川)·안주(安州) 등 고을도 그러했습니다. 의주(義州)에는 천둥 벼락이 치면서 우박이 내렸는데 벼 곡식이 크게 손상되었으므로 백성들이 곳곳에서 모여 통곡하였습니다. 그리고 각 고을에 염병(染病)이 크게 번지어 사망자가 잇따라 발생하고 있습니다."
전라 감사 민유중(閔維重)이 치계하였다.
"도내 각 고을에 우역(牛疫)이 점점 번져 죽은 숫자가 매우 많습니다."
9월 24일 정미
사간 이유 등이 아뢰기를,
"이번에 제신들에게 가자한 것과 6품으로 천전시키라는 명은 실로 상(賞)은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도리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헌부가 환수할 것을 청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인 것입니다. 약방(藥房)은 성궁을 보호하는 것이 직분이고 다행히 신명(神明)의 도움을 받아 성후(聖候)가 평상으로 회복되었으니, 전례에 의하여 상전을 베푸는 것은 그래도 전거가 있으나, 기타 제신들이 배종도 하고 유도도 하여 일을 보았던 것은 본디 직분에 있어 당연한 것인데 무슨 상을 주어야 될 일이 있기에 혼동하여 은전을 베풉니까. 속히 환수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지난번 연석(筵席)에서 진연(進宴) 때의 기생들 가운데 기생이 아닌데도 선발되어 올라온 사람은 즉시 도로 내려보내게 하라고 하교하였습니다. 이는 실로 성상께서 폐단을 진념하고 민원을 돌보는 성대한 뜻에서 나온 조처인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들리는 바에 의하면 악원(樂院)에서 막 방송하여 미쳐 내려가기도 전에 곧이어 침선비(鍼線婢)로 상방(尙方)에 예속되었다고 합니다. 상방의 침선비를 어찌 다른 데서 초출할 수 없기에 한쪽에서는 방송시키고 한쪽에서는 이속(移屬)시켜 끝내 성명(成命)을 헛된 데로 귀결시킨단 말입니까. 사체로 헤아려 보건대 매우 부당한 처사입니다. 상방의 해당 제조를 추고하여 무겁게 다스리소서."
하니, 따랐다.
우참찬 송준길이 차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강연(講筵)을 정지한 지가 이제 몇 달 며칠이 지났습니까. 우러러 생각하건대 성덕은 하늘에서 타고나신 것이어서 훈도(薰陶)의 보익에 도움받을 것이 없기는 합니다. 그러나 깊숙한 궁중에서 마음을 성실하게 하는 공부에 대해서는 참으로 외신(外臣)이 감히 엿보아 헤아릴 수 없는 노릇이고, 보통 사람의 마음은 남을 대할 적에는 근엄한 자세를 하지만 혼자 있을 적에는 방사하기 마련이며, 자신보다 나은 사람과 함께 있게 되면 공경심이 생기게 되고 자기보다 못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 교만한 마음이 생기는 법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부시(婦寺)들만 대할 뿐 신하들은 접견하지 않으신 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니 또한 태만하고 해이되고 즐기고 허물을 범하는 마음이 발생되지 않았다고 어떻게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삼가 생각건대 오늘날 강연을 정지한 것은 실로 옥체가 미령하신 데에 연유된 것이기는 합니다만 그렇더라도 미령하신 것이 대단한 지경에 이르지 않을 적에는 어찌 조금 편안한 때에 유신들을 인접할 겨를이 없겠습니까. 아, 질병을 앓는 것은 진실로 어찌할 수 없는 것입니다만 또한 전하께서 조양(調養)하는 도리에 있어 그 방도를 극진히 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깊은 걱정과 지나친 우려를 여러 가지로 해봅니다.
신이 종전에 감히 선조(先朝)의 양심합(養心閤)에 대한 이야기를 전달한 것은 본래 의도가 있는 것이었는데 삼가 생각건대 성명께서도 반드시 말 밖의 뜻을 깨달으셨을 것입니다. 신은 원컨대 전하께서는 선조께서 이미 행한 전례를 준행하시며 성인이 질병을 삼간 도리를 유념하시어 항상 소합(小閤)에 거처하시면서 맑은 마음으로 조용히 조섭하소서. 그리고 자주 승지들로 하여금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시하게 하실 것은 물론 또 강관(講官)을 불러서 경사(經史)를 진강하게 한 다음 전하께서는 궤석(几席)에 의지하여 들으소서. 밤에는 방에 병풍을 치고 밖에다는 불을 밝혀 놓고서 승지와 강관들을 불러들여 함께 고금의 사의를 논하고 치도(治道)를 상의하소서. 서늘한 계절 고요한 밤에는 그 취미가 더욱 심원(深遠)하여 진수(進修)와 조양(調養) 두 가지 모두 마땅하게 될 것이니, 이를 춘당대(春塘臺)에서 열무(閱武)하느라 혹 더쳐서 건강을 손상시키는 것과 견주어 본다면 이해(利害)와 난이(難易)가 너무도 현격한 정도일 뿐만이 아닙니다. 잘모르겠습니다만 전하께서는 무슨 까닭에 이것을 하시면서 저것은 하지 않으려 하십니까.
지금 하늘이 경계를 보이고 흉년이 또 극심하여 백성들이 장차 떠돌다 죽게되었는가 하면 걱정스러운 일이 눈에 넘치고 있습니다. 큰 근본이 확립되지 않은 것이 이러하니, 성명께서는 경척(警惕)하는 마음으로 살펴 받아들이소서."
하니, 상이 은혜로운 답을 내렸다.
9월 25일 무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박장원(朴長遠)을 우참찬으로 삼았다.
대사간 이상진이 차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아뢰기를,
"약방 제조와 의관으로서 수가(隨駕)한 자들은 침약(鍼藥)의 공이 없다고 하더라도 원래 성궁(聖躬)을 보호하는 일에 관계된 것이니, 전례를 적용하여 그래도 상을 줄 수 있습니다만, 도성에 머물러 지킨 자들도 혼동하여 상을 주는 것은 절대로 이런 이치는 없는 것이고, 호가한 대소 관원에 이르러서도 말고삐를 잡은 공로가 있다 하여 아울러 상을 내릴 수 있겠습니까. 만일 이보다 더 기간이 오래고 이보다 더 큰일이 있을 경우에는 그에 대한 상을 어떻게 주겠습니까.
그 가운데 정리사(整理使)와 병방 승지(兵房承旨)는 총관(摠管) 등의 관원이나 다른 승지에게 견줄 수 있는 것이 아닌데 그들에 대한 상도 가자(加資)에 이르는 것은 부당합니다. 더구나 이 두 신하는 모두 앞서 가자된 지가 오래되지 않았는데 또 다시 승자(陞資)시켰으니 이는 관자(官資)를 아끼고 신중히 한다는 도리에 매우 어긋나는 처사입니다. 여항(閭巷)에서 여러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전하는 말에 의하면 전하께서 척완(戚畹)에게만 후하게 한다고 합니다. 전하께서는 무엇 때문에 안타깝게도 상을 주지 않아도 될 사람에게 상을 줌으로써 스스로 성덕에 누를 끼치고 비방하는 의논이 나오도록 길을 열어주십니까.
군대를 거느린 자를 가지고 논하여 보건대 신이 지난번 남쪽 지방을 왕래할 적에 도로에서 듣고서 상을 주어야 될 사람과 상을 주지 않아야 될 사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어영군(御營軍)은 군령이 엄명하여 하나도 폐단을 끼치지 않았으므로 곳곳의 고을과 마을에서 지금까지 칭송하고 있습니다. 이는 유혁연(柳赫然)이 자신의 임무를 잘 수행한 결과인 것으로 격려하는 방도에 있어 의당 상을 주어야 할 것은 물론 한 자급을 가자하는 것이 조금도 불가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제신들이 외람되이 받는 가운데 혼입되어 상이 오히려 분명하지 못했으니, 또한 애석한 일입니다. 훈국(訓局)과 금군(禁軍)은 멋대로 꺼림없이 말썽을 일으켜 폐해를 끼친 것이 작지 않았으므로 일로(一路)의 사람들이 분노하여 원망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장관(將官)을 매도하기에 이르렀으니, 장관은 죄를 주어야 할 것이요 상을 줄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대장(大將)이 평상시 절제(節制)를 잘하지 못했다는 것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완(李浣)에게 상을 주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은 유도(留都)만 한 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대사마(大司馬)로서 금군의 횡포를 제대로 금지시키지 못했으니 홍중보(洪重普)에게 상을 주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은 공이 없는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벌을 주어야 하는데도 벌을 주지 않고 상을 주는 것이 부당한데도 도리어 상을 주었으니 어찌 성조를 위하여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소장이 들어간 지 여러 날이 되었어도 비답이 내리지 않았다.
9월 27일 경술
사헌부가 약방에서 수가한 제신들 이외에 기타 가자하여 6품으로 천전시키라고 한 명을 아울러 환수하라는 것으로 잇따라 아뢰니, 상이 답하기를,
"약방과 병조 판서·어영 대장·정리사·병방 승지·내관 육후립(陸後立)·문철(文撤)·김성휘(金聲輝), 사관(史官)을 6품으로 천전시키게 한 것 이외에는 모두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간원에 답한 것도 그러하였다.
우의정 허적이 차자를 올려 자제(子弟)들에게 관직을 제수하게 한 명을 사양하고, 또 배종한 제신들에게 상가한 것이 외람하며 양사가 환수하라고 청한 것은 실로 공공(公共)의 의논이나 오히려 다 말하지 않은 점이 있었다고 말하면서 풍재(風裁)가 부족함을 지척하였다.
달이 태미원(太微垣) 단문(端門) 안으로 들어갔다.
9월 28일 신해
상이 대신과 비국의 제신들을 인견하였는데 강화 유수 서필원도 입대(入對)하였다. 좌의정 홍명하가 아뢰기를,
"신들이 전일 원자(元子)를 배견(拜見)하니 예수(禮數)가 법도에 잘 맞았으므로 신들은 기쁘고 경하스런 마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책봉례(冊封禮)를 그만둘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례(大禮)를 어떻게 갑자기 의논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부제학 조복양이 아뢰기를,
"국본(國本)은 일찍 세우지 않을 수 없으니, 의당 속히 행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책봉례를 행할 적에는 나이가 어려서 면복(冕服)의 무거움을 견뎌내기 어려웠었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오늘의 이 청은 곧 군하(群下)의 지극한 마음이어서 그만둘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년 가을에나 혹 행해도 될지 모르겠다. 영상이 출사하기를 기다려 의논하도록 하라."
하였다. 호조 판서 정치화가 아뢰기를,
"양주(楊州)의 양전(量田)을 다시 하는 일은 이제 거행하려 하는데 양주 백성들의 소원은 오직 전의 결수를 감해 달라는 데 있습니다만 이는 사세상 어렵습니다. 그리고 민간에 반드시 비용을 허비하는 일이 있게 될 것이기 때문에 민정(民情)이 다시 양전하는 것을 바라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백성들이 바라지 않고 있어도 그대로 거행해야 합니까, 아니면 조금 물려서 풍년을 기다려서 행해야 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거행할 것으로 결정하였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만일 균일하지 않아서라면 일주(一州)를 통합하여 다시 양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미 결수가 너무 많게 되었다면 전의 결수를 굳이 고집하는 데 대해 신은 그것이 옳은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도승지 이경억(李慶億)은 아뢰기를,
"만일 결수의 감손을 허락한다면 민간에 경비가 허비되는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다시 양전해주기를 원할 것입니다."
하였다. 서필원이 강도의 군무에 대해 변통시켜야 할 것을 진달한 것이 모두 십수 조항이었는데 상이 모두 따랐으나 마장(馬場)을 파하고 사람이 경작하게 하는 한 가지 일은 윤허하지 않았다. 필원이 아뢰기를,
"진달한 일은 모두 윤허를 받았는데 유독 이 마장에 관한 한 가지 일은 끝까지 청납(聽納)하여 주지 않으시니, 군덕(君德)에 또한 손상이 있게 될까 염려스럽습니다. 따라서 신이 감히 상의 명을 받들고 물러갈 수가 없습니다."
하고, 이경억은 아뢰기를,
"목장에 대한 일을 윤허하지 않았다고 해서 어찌 성덕에 손상될 것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필원이 감히 외신(外臣)으로서 이런 외람되고 잡스러운 말을 했으니,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웃으면서 추고하지 말라고 하였다. 복양이 아뢰기를,
"지난번 경연을 연 뒤에 이어 다시 오래도록 정지하였으므로 하정(下情)이 매우 답답합니다. 심상한 공부도 중도에 중지해서는 안 되는데 더구나 성학(聖學)이야 말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상의 환후가 대단한 지경에 이르지 않았으면 자주 강연을 여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산야(山野)의 사람이 머물러 있는 것은 이 한가지 일 때문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다리의 병 때문에 강연을 열 수가 없었는데 수삼일 이래 조금 나아졌다."
하였다. 명하와 허적 등이 자제에게 관직을 제수하게 한 명을 사양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복양이 아뢰기를,
"상가(賞加)가 외람스럽게 된 것에 대해서는 삼사가 함께 발론할 일이 아닙니다만 본디 공론이기 때문에 한번 소장을 올리려 했었으나 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하였다. 명하가 이상진의 소장 내용에 대해 언급하자, 상이 이르기를,
"내가 대간의 소장을 살펴보니 그 내용이 매우 괴이하였다. 모화관(慕華館)에 거둥할 때 예방 승지에게 가자했던 전례가 있었으니 이번의 거둥에 병방 승지에게는 의당 가자하는 일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병조 판서에 이르러서는 모화관의 거둥 때 예조 판서와 동일한 예인 것이다. 그리고 약방은 내가 봄에서부터 오래도록 침을 맞고 있었으므로 온천의 거둥이 아니라도 의당 상을 논하는 거조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애당초 유도(留都)한 공 때문에 이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였다. 집의 김만기, 사간 이유는 모두 대신이 올린 차자에서 공척받았다는 것으로 탑전에서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헌납 윤변(尹抃), 정언 홍만형(洪萬衡), 지평 신명규(申命圭)도 모두 이 일로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정언 정재희(鄭載禧)는 본원의 상가(賞加)를 환수하라는 계사에 대해 당초 감히 가부하지 않아서 지금 처치하기 곤란하다는 것으로 또한 체직시켜 주기를 청하면서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대사간은 소장에 대한 비답에 미안한 하교가 있었다는 것으로 또한 인피하였다. 옥당이 처치하여 아울러 출사하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9월 29일 임자
상이 희정당에서 소대하였다. 참찬관 조복양에게 《통감(通鑑)》의 당 태종기(唐太宗記)를 읽게 하고 상은 안석(案席)에 기대어 들었다. 좌참찬 송준길이 강설이 끝나자 나아가 아뢰기를,
"지난번 강한 《심경(心經)》을 아직 끝내지도 않았는데 어찌하여 《통감》을 강하게 하셨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눈병 때문에 직접 문자를 볼 수 없는데 사기(史記)는 다른 서책과는 달라서 말하는 것과 같은 점이 있기 때문에 이를 강하게 한 것이다."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사기를 강한다고 해도 전혀 아무 것도 강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하고, 준길이 이어 병이 들었음을 진달하고 춥기 전에 돌아가게 해 줄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조리하고 올라오려 하는 것을 내가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소아(小兒)를 경에게 부탁하였고 내가 경에게 추위를 무릅쓰고 수고롭게 출입하라고 책하지 않으니, 조용히 있으면서 조섭한다면 고향에 가 있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신이 지금 원자를 모시고 있으므로 실로 차마 떠날 수 없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신세는 반드시 돌아가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는 부탁한 일이 있고 경은 떠나가야 할 의리가 없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신은 겨울철에는 결단코 출입할 수 있는 기대가 없습니다. 따라서 서울에 있다하더라도 무익한 일입니다. 그리고 신이 소장에서 진달한 것도 이미 저와 같았으니 어떻게 그대로 머물러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복양은 아뢰기를,
"준길의 말이 진실로 간절하고도 지극하기도 합니다만 근래 강연을 여는 거조가 있자 나라 사람들이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이런 때 이런 사람을 어떻게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허락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병을 조리하는 방도로 말하면 시골이 반드시 서울만 못할 것입니다."
하고, 우의정 허적은 아뢰기를,
"준길이 내려가기를 청하는 이유를 신은 알 수가 없습니다. 선비가 학문을 한 것은 그 의도가 도(道)를 행하는 데 있는 것인데 경연에 출입하게 되었고 지위가 빈사(賓師)이며 그가 진달하는 것을 상께서 많이 따라주고 있는 데다가 지금은 원자(元子)에 대한 부탁을 받았으니 그 책임의 소중함이 어떠합니까. 위에서 기필코 떠나지 않기를 바라신다면 단지 성의를 보이는 일에 달렸을 뿐입니다."
하니, 상이 준길에게 이르기를,
"이제 경이 서울을 떠난 지가 5년이었는데 우연히 올라왔다가 반년도 못 되어 또 내려가려 하니, 이렇게 되면 서로 헤어져 있는 날이 많고 서로 만나는 날은 적은 것이 된다. 경에게 떠나야 할 의리가 없다는 것은 알면서 허락한다면 성실하게 하는 데 흠이 있게 되기 때문에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신의 작위가 높고도 중하며 은례는 견줄 데가 없는 상황입니다만 귀신이 집을 엿본다는 옛말도 있습니다. 만일 오래 머물러 있게 되면 반드시 후회할 일이 생길 것입니다."
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준길이 아뢰기를,
"근래 민풍(民風)과 세교(世敎)가 날로 상패(傷敗)된 탓으로 경주(慶州)와 강릉(江陵)에서의 변이 있기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매우 놀랍고도 참담합니다. 조정에서 악을 징계하는 형전(刑典)을 이미 거행했습니다만 선을 표창하는 일도 반드시 아울러 시행한 연후에야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계하는 바가 있게 될 것입니다. 이에 앞서 임의백(任義伯)이 경상 감사로 있을 적에 절효(節孝)와 행의(行誼)가 있는 사람을 찾아가 물은 다음 열거 기록하여 계문한 적이 있고 지난번 등대했을 적에도 또 진달했었는데 효행이 더욱 탁이한 사람은 우선 정표(旌表)하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각도에서 신보(伸報)한 효자(孝子)·열부(烈婦)의 부류들을 해조에서 정부로 이보(移報)한 것이 매우 많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6, 7년 동안 적체되어 있는 채 전혀 거행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또 해조에 적체되어 있는 것도 등제(等第)를 매기지 않은 것이 또한 많다고 하니, 정부와 예조로 하여금 즉시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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