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13권, 현종 8년 1667년 5월

싸라리리 2025. 12. 11.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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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일 갑진

햇무리가 졌다.

 

5월 2일 을사

이원정(李元禎)을 광주 부윤(廣州府尹)으로, 송시철(宋時喆)·민점(閔點)·윤비경(尹飛卿)을 승지로 삼았다.

 

영의정 홍명하가 상소를 올려 면직을 바랐는데, 상이 유시하였다.
"가뭄이 이와 같이 참혹하니 백성들의 일이 망극하다. 경의 몸에 안위가 달려 있으니 의리상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해야 한다. 한 때의 과격한 논의로 인하여 지나치게 겸양하면서 어려운 나랏일을 돌아보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굳이 사직하지 말고 속히 나와서 도를 논해야 한다."

 

사헌부가 교지에 응해서 차자를 올려 수양하고 반성하는 방법을 지극하게 진달했는데, 상이 부드럽게 답하였다.

 

5월 6일 기유

근시 및 중신을 보내어 여러 곳에 기우제를 지냈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했다. 우상 정치화가 아뢰기를,
"각사 노비(各司奴婢)에 대해서 각각 1필의 공목(貢木) 외에 또 저화(楮貨)를 더 거두는 규정이 있습니다만, 지금 노(奴)에게는 1필을 더 거두며 비(婢)에게는 반 필을 더 거두고 있기 때문에 지탱하지 못하고 도망하는 자들이 나날이 늘고 있습니다. 참작 견감해서 실제적인 혜택을 베풀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노비 공목을 각각 반 필을 감해주고 저화가(楮貨價) 역시 특별히 감해주되, 이를 법식으로 삼아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5월 11일 갑인

대사헌 정지화(鄭知和), 장령 이숙달(李叔達)이 아뢰기를,
"봉사(奉使)하는 신하가 비록 먼길에서 분상(奔喪)하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아래에서 의관을 보내라고 계청하는 것은, 참으로 아직까지 없던 일입니다. 지난번 정원이 일의 체모를 돌아보지 않고 규례 밖의 일을 진계했으니, 해당 승지를 무겁게 추고하소서."
하니, 따랐다.

 

이조 판서 김수항(金壽恒)이 교지에 응하여 차자를 올려, 학문을 부지런히 하고 마음을 바로잡고 현자를 가까이 하고 간언을 따르고 덕을 닦음으로써 하늘의 재앙에 대응하라고 청했는데, 상이 가상히 여겨 받아들이고 인하여 현재(賢才)를 힘써 천거하여 나랏일을 도우라고 명했다.

 

수찬 박세당(朴世堂)이 교지에 응하여 상소를 올려, 제거해야 할 민폐와 개혁해야 할 폐정을 극도로 말하고 또 본직의 잘못과 여러 아랫관료들의 실수를 언급하며 남김없이 진술했는데, 상이 부드럽게 답하고 그 상소를 비국에 내렸다. 비국의 회계에 대부분은 거절되었고 한두 가지 사항만 시행되었다.

 

평양(平壤) 등지에 병충해가 있었다.

 

유학(幼學) 이석복(李碩馥)이 상소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전하의 슬기로움과 너그러움은 하늘에서 타고난 것이지만 강(剛)이 부족하고 유(柔)가 지나치므로, 위복이 위에서 제어되지 않고 정치의 권한도 아래에 빼앗기게 된 것입니다. 간혹 약석과 같은 충언이 한번 전하에게 진달되더라도, 전하를 현혹시켜 사슴을 말이라고 하며 장황하게 속이는 한편 관학의 유생들을 선동해서 돕게 하고 지방에 바람을 넣어 끌어들여 스스로 공공의 의논이라고 하면서 협박을 하므로, 그들의 세력이 미침에 쓰러지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고금 천하에 군주의 권위가 상실되고 정치의 권한이 밑에 있는데 망하지 않는 나라가 어디 있겠습니까.
간혹 한두 대신이나 서너 중신들이, 나랏일이 나날이 잘못되어가고 횡의가 나날이 커진 상황을 목격하고는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을 품고 시대를 바로잡고자 하는 뜻이 간절하지만 머리와 꼬리를 움츠린 채 말하고 싶어 하면서도 말하지 못하는 것은, 전하께서 전적으로 위임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정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몇몇 연소배들이 세력을 믿고 기세를 올리면서 공격을 일삼으며, 편벽되고 사악한 젖비린내 나는 자들이 인사권을 오랫동안 도둑질하고 있는데, 옛 사람이 이른바 나라를 해치고 임금을 좀먹는다는 것이 이보다 심한 것이 없으니, 신은 매우 가슴 아프게 여깁니다.
지난번 일월 같은 밝으심으로 음흉한 정상을 통촉하시어, 명을 한번 내리자 그들의 간담이 써늘해졌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즉시 또 전부 석방하셨으니, 이는 비록 성조(聖朝)의 아름다운 일이었지만 끝내 전하의 나약함만 보여주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전하에게 죄를 받는 자를, 떼 지어 일어나 해명하고 무리지어 화합하여 구원하게 해서 명예와 지위가 나날이 커지고 빛나게 하셨으며, 시의(時議)에 죄를 얻은 자를, 같은 목소리로 공격하고 서로 꾸짖으며 배척하여 온 세상이 흉악한 무리로 지목하게 해서 권간이 나날이 성해지고 국세가 나날이 그릇되게 하셨으니, 신은 매우 가슴 아프게 여깁니다.
아, 지난번 관학 유생들이 과거를 정지시킨 명에 대해 화를 내어 권당(捲堂)하는 짓을 하여 드디어 성묘(聖廟)를 며칠간 텅 비게 했으니, 임금을 협박하고 임금을 무시한 그들의 죄를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상소에 참여하지 않은 유생들을 타일러 모으라는 성상의 분부는 참으로 성인을 존숭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으니, 성상의 은혜를 받아 육성된 인재들이 진실로 성상의 분부를 들었다면 누가 감히 들어가지 않겠습니까. 지관사(知館事) 김수항(金壽恒)과 대사성 조복양(趙復陽) 등은 많은 유생들이 일제히 들어가면 군상을 위협하려는 자신들의 계책이 깨질 것을 두려워하여, 드디어 성상의 분부를 감추고 선포하지 않은 채 한두 친밀한 자들에게만 몰래 통보해서, 겉으로는 불러 모으는 것처럼 하면서 속으로는 사실상 들어가지 못하게 지휘하여 지존을 속이고는, 끝내 정거를 풀게 한 연후에야 비로소 저보(邸報) 가운데 성상의 분부를 내었습니다. 그들이 군부를 우롱하면서 어린아이처럼 여긴 정상은 길가는 사람들도 아는 바입니다. 신하가 되어 이런 짓을 차마 할 수 있다면 앞으로 무슨 짓인들 않겠습니까. 아, 이 무리들은 한갓 당파가 있다는 것만 알고 나라가 있다는 것은 알지 못하여 모든 사람들이 쳐다보는데도 이렇게까지 속였고 보면, 여러해 동안 인사권을 장악하여 선발을 치우치게 하면서 자신들과 뜻이 다른 사람들을 배척했을 것이니, 조정에 한 사람도 논란하는 자가 없는 것이 무엇이 이상하겠습니까.
지난번 크게 사면하는 은전을 내려 죄를 뉘우치지 않는 재범자들까지도 모두 용서받았는데, 아직도 윤선도(尹善道) 한 사람은 남겨두고 계시니, 전하께서는 선도가 나라에 죄를 얻었기 때문에 석방할 수 없다고 여기는 것입니까. 아니면 죄는 용서할 만하지만 시의(時議)를 어기기를 곤란하게 여겨 석방하지 못하시는 것입니까. 선도는 자신을 헤아리지 못하고 망령되게 전례(典禮)를 논했으니, 그가 쫓겨난 것은 진실로 스스로 초래한 것입니다만, 지금 선도는 나이가 팔십이 넘어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남북으로 옮겨다니면서 안치된 지가 10년이 되었습니다. 비록 죄가 있다 하더라도 벌이 이미 행해진 것입니다. 선왕의 사부에 대한 은혜를 미루어 생각하고 지금 대사면하는 은전을 크게 베풀어서 그로 하여금 고향에 돌아가 죽을 수 있게 해주신다면 어찌 전하의 덕을 성대하게 베푸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죄수들을 심리한 지가 지금 며칠이 지났는데, 하늘의 뜻은 막연하여 붉은 구름이 짙게 끼어 있고 한발은 혹심하여 아직도 그치지 않고 있어서, 길에서 서로들 조문하여 말하기를 ‘선도가 석방되지 않았는데 하늘이 어찌 비를 내리겠는가.’ 하며, 들에서 하늘을 쳐다보며 탄식하기를 ‘선도가 석방되어야 하늘이 비를 내릴 터인데.’ 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비를 내리는 여부가 반드시 선도의 석방 여부에 매여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인정이 이와 같으니 하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하였다.

 

좌승지 송시철(宋時喆), 좌부승지 윤비경(尹飛卿), 우부승지 심재(沈梓), 동부승지 이정(李程)이 아뢰었다.
"방금 전에 유학 이석복(李碩馥)이 와서 한 상소를 올렸는데, 그 주된 뜻을 살펴 보니 황연(黃壖)의 찌꺼기 의논을 주워모아 상소 가득 장황하게 벌려 놓으며 사설(邪說)을 부르짖어 성상의 귀를 현혹시키고 조정에 알력을 일으키는 계책을 부리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간쟁하던 신하들을 완전히 석방한 일을 상의 나약함을 보여준 것으로 말하기까지 하고, 또 윤선도(尹善道)를 석방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의 한재가 있게 된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 음험하고 흉악한 작태를 차마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으니, 성명의 세상에 다시 이런 황당무계한 무리가 있을 줄은 생각지 못했습니다. 이와 같이 위험하고 바르지 못한 상소는 출납을 진실하게 하는 도리에 있어서는 진실로 물리쳐야 했습니다만, 그가 일단 유생이라는 이름을 빌려 교지에 응한다고 핑계한 데다가 또 그의 간악한 정상은 반드시 성상의 눈에서 도망하기 어려울 것이었기 때문에 봉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5월 13일 병진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했다. 우상 정치화가 아뢰기를,
"가뭄이 너무나 심해서 농사가 크게 흉년이 들 상황이니, 구황 정책을 미리 강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라에 저축해 놓은 곡식이 다 떨어졌으니, 백관들의 녹봉을 감해서 국가의 재정을 도와야 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의 사대부는 녹봉이 매우 적어서 참으로 감하기 어렵지만, 구황 정책이 한창 급한데 국가의 재정이 부족하니, 5품 이상에 대해서는 대미(大米) 1석(碩)을 감하고 대신 전미(田米)를 지급하고 6품 이하는 감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헌납 이동로(李東老)가 아뢰기를,
"유배된 죄인 강석규(姜錫圭)와 형조 죄인 이세공(李世恭)이 사람을 죽인 죄는 이온(李溫)과 차이가 없습니다. 이온은 지난번 심리할 때 편배되는 은전을 받았지만, 세공은 귀양 중에 어미 상을 당해 이미 3년이 지났으며 현재 옥중에 있는데 또 아비 상을 당했으나 오히려 사면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죄는 같은데 벌이 다르니 참으로 억울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세공이 범한 죄는 이온과 차이가 있으니 가볍게 논의할 수 없다."
하였다. 부교리 이단하(李端夏)가 아뢰기를,
"이석복이 흉악한 상소를 올렸는데 내용이 음험했다고 들었습니다. 조정에 알력을 일으키고 사림에 화를 전가하려는 계책이 황연과 마찬가지입니다. 음양(陰陽)의 성쇠 여부는 국가 존망의 갈림길이니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 으레 내리는 비답처럼 비답을 내린다면 더욱 흉악한 무리들의 마음을 열어주게 되어 앞으로 나라의 화가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용안(龍安)을 맡았을 때 듣건대 ‘경내의 부사였던 오응정(吳應鼎)이 왜란을 만나 절개를 세우고 죽어 증직하고 정표했다. 그의 아들 오욱(吳稶)은 아비를 따라 함께 죽어 성효가 숭상할 만했고, 아들 오직(吳稷)은 무오년에 우영 천총(右營千摠)으로서 힘껏 싸우다가 죽었는데 조정에서 단지 증직만을 했다.’ 하였습니다. 자손들이 미약해서 호소할 곳이 없으므로 차차 민멸되어 정려하는 조치가 없게 되었으니, 참으로 흠전(欠典)입니다."
하니, 상이 해조로 하여금 복계하고 거행하게 하였다.

 

5월 15일 무오

민희(閔熙)를 승지로, 홍만용(洪萬容)을 부응교로 삼았다.

 

5월 16일 기미

경상도 안에 비가 두루 흡족하게 내렸다고 감사가 보고하였다.

 

5월 17일 경신

상이 창경궁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궁인이 마마를 앓았기 때문이었다.

 

정언 권격(權格)이 아뢰기를,
"사람을 죽인 자를 사형에 처하는 것은 왕법(王法) 가운데서도 지극히 엄한 법입니다. 죄인 이온(李溫)이 사람을 죽인 정상은 환하여 가릴 수 없는데, 어떻게 심리로 인하여 갑자기 최저 형량을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장관과 더불어 상의하여 논계하려고 했는데, 장관이 시종일관 고집하였습니다. 신이 매우 경시 당한 것입니다. 체직하소서."
하고, 물러나 물론 기다렸다.

 

대사간 강백년(姜栢年)이 아뢰기를,
"신의 요량에, 당초에 법을 살펴 살인자의 목숨으로 변상시켜 사형함은 법률상 당연한 것이지만 죄가 의심스러울 때에는 법률을 가벼운 쪽으로 적용시키는 것도 형벌을 신중히 하는 방법이라고 여겼습니다. 지금의 이 심리는 참으로 큰 은전을 베푸는 것이니, 이제 와서 굳이 간쟁하는 것은 지나친 듯합니다."
하고, 인피하여 물러나 물론을 기다렸다.

 

정언 윤진(尹搢)이 아뢰었다.
"이온의 일을 이유로 동료들이 인피했으니, 신이 알면서도 말하지 않은 죄가 이에 이르러 더욱 드러났습니다. 체직하소서"

 

헌납 이동로(李東老), 지평 조원기(趙遠期)도 또한 이를 이유로 인피했는데, 원기는 감히 처치할 수 없다는 내용으로 말을 만들어 체직을 청하고 물러나 물론을 기다렸다.

 

지평 신후재(申厚載)가 아뢰기를,
"양사가 인피했으니 신이 처치해야 합니다만, 신이 본부의 전계(前啓)에 대해서 감히 가부를 논하지 아니했으니, 단지 처치만 하면서 전계를 전하지 않는 것은 대각의 규례에 위반됩니다. 신의 사정이 참으로 곤란합니다. 체직하소서."
하고, 물러나 물론을 기다렸다.

 

부응교 홍만용(洪萬容) 등이 차자를 올려 처치하여, 강백년·조원기·신후재는 체직시키고 나머지는 모두 출사시키라고 청했다.

 

5월 18일 신유

헌납 이동로(李東老), 정언 권격(權格)이 아뢰기를,
"목숨으로 변상시키는 사형의 제도는 법률상 지극히 엄한 것입니다. 사람을 죽인 죄인 이온을 감형하여 정배시키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함경도 안의 굶주린 백성 1만 2천 3백여 인에게 양식을 주어 구휼했다.

 

5월 19일 임술

윤문거(尹文擧)를 대사헌으로, 민유중(閔維重)을 대사간으로, 최관(崔寬)·이세장(李世長)을 지평으로 삼았다.

 

황해·충청 양도에 비가 두루 흡족하게 내렸다고 감사가 보고했다.

 

5월 20일 계해

궁녀 귀열(貴烈)이 복주되었다. 이에 앞서 귀열이 왕대비전의 궁녀로서 자기 형부인 서리(書吏) 이흥윤(李興允)과 몰래 간통하여 임신했는데, 일이 발각되자 상이 내수사에 가두라고 명했다. 이때 이르러 옥중에서 아들을 낳고는 사실대로 실토했다. 상이 내수사에서 출옥시켜 해조에 회부하고는 법률을 적용하게 했다. 형조가 교수형에 처해야 된다고 아뢰자, 상이 등급을 높여 참수형에 처하라고 명했다. 해조가 법을 인용하여 간쟁했는데, 상이 따르지 않고 즉시 형을 집행하라고 명했다. 정원도 역시 법이 한번 잘못 시행되면 뒤 폐단에 적지 않게 관련되니 해조의 논의대로 행하라고 청했는데, 상이 또 듣지 않아 드디어 참수했다. 그녀의 아비 광찬(光燦)과 어미 숙지(淑只)도 역시 사실을 알고도 알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아울러 형신을 받고 정배되었다. 흥윤은 도망했는데 수색했으나 잡지 못했다.

 

부사직 조원기(趙遠期)가 뜻을 세울 것, 백성을 아낄 것, 간언을 받아들일 것, 근검 절약할 것, 기강을 확립할 것, 신하들을 격려할 것 등 여섯 조항의 상소를 올렸는데, 상이 가상하게 여겨 받아들였다.

 

5월 21일 갑자

영상 홍명하(洪命夏)가 정고(呈告)하였는데, 상이 승지를 보내어 유시하여 출사하게 했다.

 

장령 이숙달(李叔達) 등이 아뢰기를,
"영녕전(永寧殿)을 수리하는 역사는 상신이 검사하고 중신이 당상으로 있으니, 맡아서 감독하는 것이 더할 나위 없습니다. 듣건대 상께서 또 중사를 별도로 정해서 검사하게 했다고 하는데, 일의 체모로 헤아려 볼 때 매우 미안한 일입니다. 종묘의 수리는 다른 건축에 비길 바가 아닌데다가 또 대신과 중신이 있으니, 어떻게 내관으로 하여금 감독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중사를 정해서 보내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상이 엄한 내용으로 비답하여 거절하면서 듣지 않았다. 숙달이 엄한 비답을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면서 체직을 청했는데, 상이 답하기를,
"이와 같은 망언은 말할 가치도 없다. 또 대각이 공정성이 없는 논의를 올리는 것을 미워한다."
하고, 인하여 사직하지 말라고 명했다. 숙달이 물러나 물론을 기다렸다.

 

장령 소두산(蘇斗山)이 역시 이를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을 청하면서, 중사(中使)가 공사를 감독할 수 없다는 것과 잘못된 전례를 준수할 수 없다는 것을 갖추 진달하고, 또 상의 마음이 치우쳐 가리운 바가 있으며 말씨가 화평하지 못하다는 것을 언급했는데, 상이 답하기를,
"아, 근래 일처리가 잘못되었는데도 교묘하게 꾸미는 일이 풍조를 이루었구나. 비답을 조용히 살펴보며 일처리를 소급해서 반성해본다면 전도되고 근거가 없다는 것을 즉시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물며 너희들은 온천에서 돌아와 직책을 오랫동안 띠고 있었고 전(殿)의 수리가 또한 두 달이 넘었으니, 만약 온당치 못하다고 여겼다면 왜 언관의 지위에 있으면서 일찍이 일언반구도 없다가 이제야 운운한단 말인가. 문을 막아놓고 있어서 그런 것인가, 귀를 틀어막고 있어서 그런 것인가. 내가 알 수가 없구나. 이로써 본다면 불공정한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가릴 수 있겠는가. 이 일이 비록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대각에서 이런 바르지 못한 마음을 싹 틔우다니, 풍조가 좋지 못하다. 이것이 내가 깊게 미워하며 통렬하게 배척하는 이유이다."
하고, 인하여 사직하지 말라고 명했다.

 

헌납 이동로(李東老), 정언 권격(權格) 등이 처치하기를,
"대신과 중신이 전적으로 책임지고 있으니 환시(宦寺)가 간여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할 듯합니다. 품은 생각이 있어 바로 진달함은 대각의 체모를 깊이 터득한 것입니다. 이숙달과 소두산을 아울러 출사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르면서 이르기를,
"헌부의 계사는 말뜻이 전도되어 있었는데, 이번 처치는 도리어 더 전도되어 있다. 내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다."
하였다. 정언 권격, 헌납 이동로가 엄한 비답을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물러나 물론을 기다렸다.

 

5월 22일 을축

상이 중사(中使)를 몰래 보내어 수개 도감(修改都監)을 적간(摘奸)하게 했는데, 이때 시각이 이미 유시(酉時)였다. 당상과 낭관들이 모두 업무를 마감하고 귀가했었기 때문에 이를 꼬투리로 잡아 보고했다. 상이 도청(都廳)인 교리 오두인(吳斗寅)을 명초하여 정원에서 유문 입대(留門入待)하게 해놓고 밤새도록 묻는 말이 없었다. 무릇 적간할 때는 반드시 사관(史官)과 중사(中使)가 함께 나가는 것이 관례인데 단지 중사만을 보낸 것은, 상의 뜻이 외조(外朝)에 비밀로 한 채 부정의 유무를 탐지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5월 23일 병인

상이 하교하기를,
"어제 유시 말엽에 도감을 적간했더니 도청 두 명 중 한 사람도 남아 있는 자가 없었다. 무릇 도감의 규정은 오후에 마감하고 귀가하는 것이 관례인가?"
하니, 홍만용(洪萬容)이 대답하기를,
"어제 본관이 일제히 모여야 할 일로 간통을 보내왔기 때문에 곧장 본관에 갔다가 미처 도감에 정상 근무하지 못했습니다."
하고, 오두인(吳斗寅)이 대답하기를,
"어제 오후에 장인의 상(喪)이 났다는 말을 듣고 황급하게 나갔기 때문에 적간에 꼬투리를 잡혔습니다."
하였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이조 판서 김수항(金壽恒)이 비록 불안한 일이 있다 하나 한결같이 인혐하면서 나오지 않으니, 도감의 사체상 온당하지 못하다. 무겁게 추고하고 즉시 나아와서 직무를 살피게 하라. 어제 저녁 중사를 보내어 도감을 적간했더니, 당상과 낭관이 한 명도 역소에 머물러 감독하는 자가 없었으며 낭청에 있어서는 또 인원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대각의 계사와 어찌 그리도 서로 어긋나는가. 호조 판서 김수흥(金壽興)은 홀로 도감의 자리에 참여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는데 적간할 때에 벌써 도청에 남아 있지 아니했으며, 오두인은 비록 절박한 사고가 있었다 하나 조정에서 응당 휴가를 지급해야 할 규정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모두 그냥 내버려 둘 수 없다. 우선 무겁게 추고하라. 도청 홍만용은 어찌 감히 본관의 일을 핑계대면서 이렇게 홀만하게 군단 말인가. 낭청 김우경(金宇慶)은 이유도 없이 나아오지 않았으니 태만이 이보다 심할 수가 없다. 아울러 나문 정죄하라."
하였다.

 

안변(安邊) 등 열 고을에 황충이 심하게 발생했고, 평안도 내에 비가 매우 흡족하게 내렸다.

 

5월 24일 정묘

영상 홍명하(洪命夏)가 상소를 올려 진달하면서 면직을 바랐는데, 상이 부드럽게 비답하고 사관을 보내어 유지를 전했다.

 

옥당이 처치하여 권격(權格)·이동로(李東老)·이숙달(李叔達)·소두산(蘇斗山)을 아울러 출사시키라고 청했는데, 상이 따랐다.

 

5월 26일 기사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요즈음 인심이 옛스럽지 못하여 사사로운 뜻이 횡행하고 있다. 오늘날 이석복(李碩馥)의 상소는 매우 바르지 못하다. 죄를 주자니 구언(求言)하는 교지를 막 내린 상황이고, 주지 않자니 나의 마음이 유쾌하지 못하다. 그렇지만 죄를 주는 것도 옳지 않고, 답하는 것도 옳지 않다. 이 상소는 물리치도록 하라."

 

상이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했다. 우상 정치화가 아뢰기를,
"별도로 중사를 보내는 것을 정지하라는 논계가 비록 지나쳤다 하나, 이로 인하여 사태가 악화되어 엄한 비답을 내리기까지 한 것은, 대각을 부드럽게 용납하는 도리가 아닌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계사를 보니 처음에는 이미 상신으로 하여금 검사하게 하고 중신으로 하여금 맡게 해서 내가 전적으로 맡기지 못하는 것처럼 한다고 말하고, 또 묘우(廟宇)는 지극히 엄한 곳이므로 내관으로 하여금 맡게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묘우가 지극히 엄한 곳이라고 일단 한다면 어찌 감히 이 말을 대신과 중신보다 뒤에서 하는가. 전도되고 근거없는 일이 이보다 심한 경우가 없다. 내가 이런 뜻으로 비답을 했더니, 그들은 스스로 옳다고 여기면서 도리어 나를 그르다고 하였다. 내가 그 뜻을 이해할 수 없다. 선묘조(宣廟朝)가 묘우를 수리할 때도 역시 내관을 파견했으니, 어찌 전례가 없단 말인가."
하였다. 도승지 장선징이 아뢰기를,
"사관을 파견하지 않은 채 중사만을 보내어 적간한 것도 역시 전례가 없는 일로 매우 온당하지 못합니다."
하니, 상이 이것도 역시 전례가 있다고 일렀다. 상이 선징에게 이르기를,
"‘위태로움이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러 모든 근심이 한꺼번에 모여드니, 지금은 대신이 오랫동안 물러나 있을 때가 아니다. 온당하지 못한 한 가지 일을 이유로 끝내 나랏일을 폐기해서는 안 되니, 모름지기 지극한 뜻을 알아 속히 올라오라.’는 뜻으로 사관을 보내어 좌상 허적에게 유시하라."
하였다. 이조 판서 김수항(金壽恒)이 이석복(李碩馥)의 상소에서 무겁게 배척을 받았다는 이유로 상소를 올려 진달하면서 면직을 바랐는데, 상이 답하기를,
"이는 개의할 것이 못 된다. 어찌 이렇게까지 인혐하는가.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원양 감사(原襄監司)가 평해군(平海郡)에서 5월 13일 신시(申時) 말엽에 검은 안개 한 가닥이 바다 속에서 나와 잠깐만에 하늘을 뒤덮어 천지가 컴컴해서 지척도 구분할 수 없었는데 초저녁에야 개었으며, 또 며칠만에 강릉과 평해가 연이어 대낮이 컴컴했다고 보고하였다.

 

5월 27일 경오

김만기(金萬基)를 승지로, 박세견(朴世堅)을 사간으로, 홍주삼(洪柱三)을 지평으로 삼았다.

 

5월 28일 신미

장령 이숙달(李叔達)·소두산(蘇斗山) 등이 또 별도로 중사를 파견한 일을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헌납 이동로(李東老)가 아뢰기를,
"이석복이 황연을 이어 일어나 교지에 응한다고 칭탁하고는 앞장서서 상소를 올렸는데, 임금을 위태롭게 하고 조정의 인사들을 모욕한 정상이 참으로 황연과 안팎으로 호응하였습니다. 그런데 근거없는 말을 하고 추측을 하며 농간을 부리고 시험한 작태는 황연보다 심한 점이 있으니, 변방으로 귀양을 보내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5월 30일 계유

이단하(李端夏)를 겸보덕으로, 최관(崔寬)·송창(宋昌)을 장령으로, 조원기(趙遠期)를 지평으로, 신정(申晸)을 겸 설서로 삼았다.

 

금부가 홍만용(洪萬容)과 김우경(金宇慶)의 원정(元情)을 가지고, 장 팔십(杖八十)은 속(贖)하고 탈고신 삼등(奪告身三等)을 하는 데에 해당한다고 아뢰었는데, 상이 장을 집행한 뒤 풀어주라고 명했다. 정원이 법이 아니라는 이유로 재차 복역하면서 간쟁했는데, 상이 듣지 않았다. 간원이 또 벌을 시행하는 것이 중도를 잃었다는 이유로 굳게 간쟁하니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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