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14권, 현종 8년 1667년 6월

싸라리리 2025. 12. 11.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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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일 갑술

유성(流星)이 나왔는데, 색깔이 붉었다.

 

6월 2일 을해

평안도에 비가 많이 내려 벼가 손상을 입었다.

 

6월 3일 병자

헌납 이동로(李東老) 등이 아뢰기를,
"음흉하고 간사한 무리들이 사주하여 상소를 올리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지금 이 이석복(李碩馥)의 상소는 내용이 아주 간특하고 어조가 아주 참혹하니, 참으로 한때에 갑자기 발한 것이 아닙니다. 정원에서 그로 하여금 그 상소를 읽게 하자 겨우겨우 구두를 떼었으니, 스스로 작성한 것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상소를 올리도록 꾀인 자를 캐물어 다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유사로 하여금 엄하고 분명하게 조사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6월 5일 무인

남구만(南九萬)을 승지로 삼았다.

 

대사간 민유중이 충주(忠州)에 있으면서 질병을 이유로 사양하고 오지 않자, 체직하였다.

 

6월 8일 신사

송준길(宋浚吉)을 대사헌으로, 권대운(權大運)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이보다 앞서 도승지 장선징, 병조 참판 이정영 등이 상소하여, 이덕인(李德仁)이 역적 누명을 썼으니 원통함을 풀어주기 바란다고 진달하고, 천안(天安)에 사는 진사 이중명(李重明)이 상소하여, 명나라 신종 황제(神宗皇帝)의 사당을 세우고 인하여 명신(名臣)인 양호(楊鎬)와 장신(將臣)인 이여송(李如松)을 배향하여 우리 나라를 다시 세워준 고마움에 보답하기를 청하였는데, 오랫동안 회보하지 않았었다. 이때에 이르러 상이 두 상소에 대하여 가부를 물으니, 우의정 정치화가 아뢰기를,
"덕인이 역모에 참여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모두 원통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추대(推戴)했다는 말이 역적의 괴수인 심기원(沈器遠)의 공초에서 나왔습니다. 신하로서 이러한 죄명을 지고 있으니 어찌 형벌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신원해 주는 것에 대해 지금 와서 가볍게 의논해서는 안 됩니다. 황제의 사당을 외국에서 창건하는 것은 전고에 없던 일이며, 지금은 시기도 적당치 못합니다."
하자,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6월 10일 계미

영의정 홍명하가 또 상소하여 사면시켜 주기를 빌었는데, 상이 너그러운 비답을 내려 답하였다.

 

6월 13일 병술

고양(高陽)에 사는 강상 죄인(綱常罪人)인 수남(守男)을 처형하였다. 당초에 수남이 어미를 때린 강상죄를 저질러 금부에 수감되었었는데, 삼성(三省)이 추국하여 승복을 받아 형을 집행한 것이다.

 

6월 14일 정해

이은상(李殷相)을 도승지로, 민유중(閔維重)을 우승지로, 유철(兪㯙)을 개성 유수로, 남이성(南二星)을 부교리로 삼았다.

 

영유현(永柔縣)에 있는 제갈 무후(諸葛武侯)의 사당에 ‘포충(褒忠)’이라 사액(賜額)하고, 경성부(鏡城府)에 있는 정문부(鄭文孚)의 사당에 ‘창렬(彰烈)’이라 사액하였다.

 

상이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우상 정치화가 아뢰기를,
"영녕전(永寧殿)의 추향 대제(秋享大祭) 날짜가 다가오니 반드시 그전에 도로 봉안하여야만 급박한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하자, 예조 판서 홍중보가 아뢰기를,
"일관(日官)에게 물어 보니 7월 6일이 길하다고 합니다. 이날 도로 봉안한 뒤 8일에 추향 대제를 거행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승지 민유중이 아뢰기를,
"영동 지방의 굶주린 백성들이 유리걸식하면서 경기와 호서·영남 지방으로 흘러 들어오고 있는데, 현재 보릿가을은 비록 지났지만 가을 추수는 아직도 멀었습니다. 만약 이때 구휼해주지 않는다면 굶어 죽을 걱정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세 도에 분부를 내려 그들이 머물러 있는 곳에서 구휼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자, 상이 옳다고 하였다. 정치화가 아뢰기를,
"지난번에 강상 죄인을 삼성 추국한 것은 사체가 몹시 엄한 것인데, 헌관(憲官) 조원기(趙遠期)는 패초(牌招)하였으나 나오지 않다가 다시 패초한 뒤에야 나와 참여했습니다. 그 때문에 국문에 참여한 여러 신하들이 모두 모여 개좌(開坐)해 밤새도록 기다리기까지 하였습니다. 조정에 조금이라도 기강이 있다면 어찌 감히 이렇게 하겠습니까. 신이 고사를 듣건대, 비록 재상의 반열에 있는 나이 많은 사람에 대해서도 처음 패초하였을 때 나오지 않은 뒤에 다시 패초한 경우가 있다고는 듣지 못하였습니다. 요즈음은 모든 관원들이 태만하여 패초에 나오지 않는 것을 예사롭게 여겨 다시 패초하게 합니다. 대관도 오히려 다시 패초해서는 안 되는데, 더구나 하번 사관이겠습니까. 사관 홍만종(洪萬鍾)은 직소(直所)에서 병을 이유로 마음대로 나가 세 번 패초하였는데도 나오지 않았으며, 봉교 윤경교(尹敬敎)는 고풍(古風)을 떨어뜨렸다고 하면서 소를 올리고 나가더니 역시 세 번 패초하였는데도 나오지 않아 네 번째 패초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기강이 해이되고 국사가 느슨해진 것이 이처럼 극도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한심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홍만종은 잡아다 추문하여 죄를 주라."
하였다. 상이 윤경교를 돌아보고 이르기를,
"저 한림(翰林)도 역시 몹시 온당치 못한 짓을 하였다."
하니, 경교가 황송하여 굽신거리면서 어쩔줄을 몰랐다. 치화가 아뢰기를,
"절개를 꼿꼿하게 닦는 것이 비록 아름다운 일이긴 하나, 요즈음 조정의 신하들이 매사에 절개 지키기만을 일삼아 때때로 동료들간의 말로 인해 정사(呈辭)하거나 진소하고는 들어가버린 채 나오지 않는데, 자리를 비우고 직무를 폐기함이 실로 여기에서 말미암습니다. 그러니 서로 화합하기를 바랄 수가 없으며 부지런히 직무에 종사하는 것조차 안 되고 있습니다. 대간이 만약 신의 말을 듣는다면 반드시 한바탕 피혐할 것입니다. 그러나 품은 생각이 있으니 어찌 진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이 각사의 문서를 볼 때마다 고신(告身)을 빼앗기거나 파직당하는 자들이 끊이지 않고 있는데, 벌을 받은 자가 많은데도 사람들은 더욱 두려워하지 않고 있으며, 파산(罷散)된 자가 많은데도 주의(注擬)함에는 군색합니다. 이에 수령 하나를 의망함에 있어서도 장부를 들춰가면서 하나하나 꼽아보아도 적당한 사람이 없어서 끝내는 구차하게 채워 보냄을 면치 못합니다. 한 고을을 다스리는 임무가 가벼운 것 같으나 참으로 적당한 사람이 아니면 온 경내의 백성들이 적지 않게 피해를 받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유중이 아뢰기를,
"전 참의 이유태(李惟泰)가 어미의 상을 당하였는데, 집이 몹시 가난하니 은전을 내려 보살펴 주어야 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본도에 명하여 장례 물품을 주게 하였다.

 

6월 16일 기축

지평 조원기(趙遠期)가 대신에게 지척당하였다는 이유로 인피하자, 체직하였다.

 

6월 20일 계사

사간 박세견(朴世堅), 헌납 이동로(李東老), 정언 권격(權格)이 아뢰기를,
"김우석(金禹錫)·이익(李翊)·김익렴(金益廉) 등의 일은 실로 세도(世道)의 큰 변고이고 사대부들의 큰 수치입니다. 그런데 조정의 처분이 끝내 명쾌하게 되지 못하여 지금까지도 조정 안에 시비가 엇갈려 옳으니 그르니 서로 다투고 있습니다. 국가의 체모로 헤아려 볼 때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 다시 끝까지 따져서 임금을 속인 죄를 다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해조로 하여금 피차의 공사(供辭)와 편지를 가져다 상고해서 이쪽과 저쪽을 참고하여 엄명하게 조사해 다스리게 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별로 물을 만한 일이 없다. 계사가 옳은지 내 모르겠다."
하였다.

 

북병사 이만영(李晩榮)이 하직 인사를 하니, 상이 인견하여 관방(關防)에 대한 일을 논하였다. 또 개시(開市)와 채삼(採蔘)에 대한 폐단 및 육진의 풍속, 군졸의 훈련 정도에 대해 논하였는데, 아주 심도있게 논의하였다. 이어 힘쓰라고 유시하고서 보내었다.

 

6월 21일 갑오

민주면(閔周冕)을 승지로, 정화제(鄭華齊)를 지평으로, 김세행(金世行)을 정언으로, 이상진(李尙眞)을 함경 감사로, 남용익(南龍翼)을 경상 감사로, 민점(閔點)을 전라 감사로, 박장원(朴長遠)을 대사헌으로, 이경억(李慶億)을 형조 판서로, 홍처량(洪處亮)을 부제학으로, 정치화(鄭致和)를 사은 겸 동지 정사로, 이익한(李翊漢)을 부사로, 이세익(李世翊)을 서장관으로 삼았다.

 

전라 감사 홍처후(洪處厚)가 제주 목사 홍우량(洪宇亮)의 첩보로 인하여 치계하였는데, 대략 다음과 같다.
"제주 목사가 ‘당선(唐船) 1척이 본주로 표류해 왔는데, 배는 조각조각 부서졌으며, 배 안에 싣고 있던 물건은 모두 물에 잠겨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었다. 배에 타고 있던 사람 95명이 상륙하였는데, 입은 옷을 보고 말을 들어 보니, 중국 사람임이 분명하였다. 한 사람을 불러서 종이와 붓을 주고 그로 하여금 사는 곳과 표류해 온 사연을 쓰게 하니, 「명나라 복건성(福建省)의 관상인(官商人)으로서 장사하는 일로 일본에 가다가 바다에서 바람을 만나 난파당하여 이곳에 표류해 왔다.」고 하였다. 그들 가운데 임인관(林寅觀)·증승(曾勝)·진득(陳得) 등 세 사람이 조금 나은 자이다. 그리고 90여 명이 모두 머리를 깎지 않고 상투를 틀고 비녀를 꽂았으니, 청나라에 귀속하지 않고 왜국과 교통(交通)하는 자이다.’고 하였습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여쭈어 처리하게 하소서."

 

6월 23일 병신

상이 비국의 여러 신하를 인견하고, 묻기를,
"지금 이 표류해 온 사람들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는가?"
하니, 우상 정치화가 아뢰기를,
"끝까지 비밀로 하기 어려운 일이니, 북경으로 압송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들은 모두 머리를 깎지 않았다고 하는데, 청나라에 귀속하지 않은 자들인가?"
하니, 치화가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명나라 때에는 표류해 온 사람을 혹 사신이 가는 편에 부쳐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청나라는 아무리 미세한 일도 반드시 질책하니, 지금 마땅히 재자관(齎咨官)을 별도로 정해 압송하되, 예부에 정문(呈文)한 뒤에야 후환이 없을 것입니다."
하자, 형조 판서 이경억(李慶億)이 아뢰기를,
"임진년에도 표류해 온 사람이 있어서 정의(旌義)에서 개성부(開城府)로 보내 칙사가 돌아가는 편에 부쳐 보냈으며, 갑신년과 정해년에도 보낸 일이 있습니다."
하였다. 승지 민유중이 아뢰기를,
"후환이 없을 것 같으면 북경으로 들여보내는 것은 참으로 차마 못할 일입니다. 듣건대 이들은 일본으로 가고자 한다고 하니, 그 정상이 애처롭습니다. 예수 교도[耶蘇敎徒]라고 하면서 일본으로 들여보내는 것이 혹 가할 듯도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예수 교도에 대한 일을 저들이 만약 듣는다면 반드시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하자, 유중이 아뢰기를,
"청나라 사람들은 반드시 문서를 가지고서 우리에게 질책을 가하니, 만약 변읍(邊邑)에서 주관하여 일본으로 보내고 조정에서 관여하지 않는다면 뒷날 사문(査問)하는 일이 있더라도 이미 문서가 없으니 무슨 일이 생길 걱정이 있겠습니까. 이들이 머리를 깎지 않았으니, 명나라 사람이 분명한데, 바로 북경으로 보낸다면 어찌 불쌍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치화가 일어나 절하면서 아뢰기를,
"남한 산성의 일은 참으로 차마 말할 수 없거니와, 군사를 조발해 보낸 일도 만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현재 우리의 정세가 저들을 상대할 수 있다면 그만이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어찌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만약 차마 못 보내었다가 일이 생긴 후에는 장차 어찌하겠습니까. 신의 소견은 이와 같습니다. 입시한 여러 신하들에게 물어보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나 역시 그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았다. 참으로 차마 못할 점이 있으나, 후환이 있으니 어쩌겠는가."
하니, 이조 참판 조복양이 아뢰기를,
"가령 변신(邊臣)이 애당초 조정에 보고하지 않고 곧장 편의에 따라 보냈더라면 좋았을 것입니다. 일이 지금 이 지경이 되었으니, 몹시 불행합니다."
하고, 지사 유혁연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가 힘이 약하여 이미 저들을 섬기고 있으니, 일에 따라 곡진히 다하여 저들로 하여금 질책할 수 없도록 해야 합니다. 만약 들여보내지 않았다가 혹시라도 나라에 대해 원망을 품고 있는 자가 있어서 저들에게 몰래 일러바쳐서 사문(査問)하는 일이 있을 경우에는 끝까지 숨길 수가 없을 것이니, 장차 다시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고, 경억이 아뢰기를,
"지금 들여보내지 않았다가 뒤에 사문하는 일이 있을 경우, 저들은 반드시 도망한 백성을 돌려보내지 않았다는 것으로 질책하지, 한인(漢人)으로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호조 판서 김수흥이 아뢰기를,
"이들이 이미 명나라 사람이라고 하였으니, 차마 들여보낼 수 없는 것은 참으로 민유중의 말과 같습니다. 다만 작은 일을 차마 못하였다가는 큰 걱정이 생길 것이니, 그럴 경우 걱정이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고, 판윤 오정일(吳挺一)이 아뢰기를,
"지금 만약 압송한다면 저들이 반드시 죽일 것이니, 참으로 불쌍합니다."
하였다. 이에 끝내 북경에 압송하는 것으로 의논이 정해졌다. 대사헌 박장원(朴長遠)이 이석복(李碩馥)의 일에 대해 아뢰니, 상이 윤허하지 않고 하교하기를,
"이석복의 일에 대해서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점이 있다. 당초에 상소문을 읽게 하였을 때 문리가 유창하지 못하였다면 즉시 계달하는 것이 마땅한데, 그 당시 정원의 계사에는 이런 말이 없다가 요즈음의 대간 계사에서 비로소 나오고 있으니, 이것이 괴이쩍다."
하니, 유중이 아뢰기를,
"그 당시에는 승지가 생소하여서 미처 계달하지 못하였고, 또 날이 저물어 바빠서 계달할 겨를이 없었다고 합니다."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정원이 이석복을 공격하여 배척하기를 그야말로 여지없이 하였으니, 문리가 유창하지 못하고 구두가 불분명함이 과연 대간의 계사와 같았다면 이것은 중요한 관건이 되는 것인데, 그 당시 정원의 마음에 어찌 이 한 조목을 계사 중에 빠뜨리려 하였겠는가. 성상의 전교는 실정을 통촉하였다고 하겠다. 그런데 민유중은 생소하였다느니 겨를이 없었다느니 하는 등의 말로 입을 놀려 성상을 속이려고 하였으니, 사사로움을 따르고 당파를 비호함이 심하다.
사간 박세당(朴世堂)이 김우석·이익·김익렴의 일에 대해 아뢰니, 상이 이르기를,
"대간의 계사가 타당치 않음은 당초에 이미 말하였거니와, 사체가 몹시 이상한 듯하다. 당초에 잡아다 추문할 때에는 여러 사람의 의논이 추문하는 것이 마땅치 않다고 하였는데, 몇 달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끝까지 캐물어 실정을 알아내라는 청이 있으니, 내가 실로 이해하지 못하겠다. 만약 끝까지 밝히고자 한다면 잡아다 가두고서 추문하라고 청하는 것이 사체에 있어서 당연하다. 그런데 공사(供辭)와 서찰을 가져다 대조하여 밝히고자 하며, 또 정원의 하리와 방지기[房直]를 추문하고자 하니, 일을 논하는 체모가 몹시 구차하며, 조정에서의 처치 역시 어찌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윤허하지 않는 것이다."
하자, 박세견이 인피하면서 아뢰기를,
"신은 오직 한때의 공의(公議)를 아뢴다는 마음에서 감히 진달한 바가 있었습니다. 당초에 잡아다 추문할 때에는 곡직을 분명히 밝히지 못하였는데, 성상의 전교에, 이익과 김우석 등은 별로 물을 만한 일이 없다고 하시면서 풀어주고 김익렴에 대해서는 특명으로 삭직하여, 한 사람은 잘하고 한 사람은 잘못한 것처럼 하였습니다. 그러나 서로간에 헐뜯어 이미 증거가 없고 조정에서의 처치 역시 명백하지 못하여서 지금까지 시비가 정해지지 않아 뭇 의논이 시끄럽습니다. 그러므로 신이 동료와 서로 의논하고 논계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상의 전교에서는 사체에 있어서 타당치 않다고 거듭 유시하시니, 신이 어찌 감히 그대로 있을 수 있겠습니까. 체직하여 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당시의 초사로 본다면 이 일의 시비는 복잡하여 알기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다시 실정을 조사해 내고자 하면서 다른 사람을 위하여 허물을 없애주고자 하는 듯이 하니, 대간의 체모에 있어서 타당치 않다. 사직하지 말라."
하자,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헌납 이동로(李東老), 정언 권격(權格)도 이를 이유로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6월 24일 정유

지평 홍주국(洪柱國)이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어제 인대(引對)할 때, 이석복이 상소를 잘못 읽은 일을 정원이 당초에 계달하지 않았는데 대간의 논계에서 비로소 나온 것으로, 성상의 전교가 내렸다고 하니, 신은 두려움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그 때 석복이 겨우겨우 구두를 떼어 문리가 유창하지 못했던 상황을 정원이 비록 사실을 들어 계달하지는 않았었으나, 그 후 이정(李程)의 소에서 황급한 사이에 미처 첨가해 넣지 못하였다는 내용으로 말을 하였으니, 그것이 사실임은 다시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양사(兩司)에서 논계한 것은 대개 여기에 근거해서 말한 것입니다. 지금 하교하신 것을 듣건대, 실로 마음에 불안한 바가 있으니 체직하여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대사헌 박장원이 아뢰기를,
"어제 등대(登對)하였을 때 이석복을 논계한 일로 인해 성상의 전교가 있었는데, 입시한 승지가 당초의 곡절을 모두 진달하였습니다. 신은 성상께서 굽어살피실 것이니 미안한 혐의가 없다고 여겨져서 인피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홍주국이 그것을 이유로 인피하기까지 하였으니, 어찌 감히 태연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체직하여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행 대사간 권대운(權大運)이 아뢰기를,
"당초의 처치가 이미 명백하지 못하였다면 다시 시비를 따지는 것은 불가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인을 추문하여 실상을 알아내려고 하였으니 대간의 체모로 헤아려 볼 때 몹시 구차합니다. 그리고 이미 전지에 응하여 상소하였으니 오늘날 대간의 아룀은 정도에 지나친 것임을 면치 못하는바, 그 나머지 곡절은 말할 것이 없습니다. 이미 연계(連啓)에 참여했으니 서로 다름이 없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박세견(朴世堅)·이동로(李東老)·권격(權格)·홍주국(洪柱國)·박장원(朴長遠)을 모두 체차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김우석·이익·김익렴을 끝까지 조사하라는 아룀을 정지하였다.

 

6월 25일 무술

정지화(鄭知和)를 대사헌으로, 오두인(吳斗寅)을 사간으로, 홍만형(洪萬衡)을 지평으로, 여민제(呂閔齊)를 헌납으로, 이선(李選)을 정언으로, 이민서(李敏叙)를 나주 목사(羅州牧使)로 삼았다.

 

대미(大米) 3백 석, 전미(田米) 4백 석을 경기에 나누어 주어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라고 명하였다.

 

영녕전 수개 도감(永寧殿修改都監)이 아뢰기를,
"지관(地官) 반호의(潘好義)와 함께 종묘의 뒤편 산맥이 파손된 곳을 간심(看審)해 보니, 흙을 채워넣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병조로 하여금 다음달에 번드는 도방군(到防軍)을 부역시켜 마무리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지평 정화제(鄭華齊)가 아뢰기를,
"신은 벼슬하기 시작한 때부터 이미 무거운 허물을 짊어지고 있는데, 갑자기 신명(新命)이 내려 소패(召牌)가 잇달아 내렸습니다. 그러나 감히 스스로 다른 사람의 처지와는 다르다고 여겨져 명에 나아가지 못하였습니다. 듣건대 대신이 신이 명을 어긴 죄를 들어 탑전에서 준엄하게 지척하면서 심지어는 화복(禍福)의 설로 신의 정적을 논단하였다고까지 합니다. 체차하여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사간 오두인(吳斗寅)이 아뢰기를,
"신은 지난번에 졸지에 상(喪)을 당하여서 상차(喪次)로 돌아가 있다가 엄한 비답을 받고는 황공하여 어찌할 줄 몰라서 끝내 예율(禮律)을 범한 채 억지로 공무를 봄을 면치 못하고 말았습니다. 이에 사방에서 비방이 몰려들고 마침내는 대간의 배척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새로 제수하는 명이 또 뜻밖에 나왔으니, 어찌 뻔뻔스런 얼굴로 대간 자리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체차하여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지평 홍만형이 처치하여 정화제(鄭華齊)를 출사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헌납 여민제가 아뢰기를,
"본원에서 현재 김익렴에 대해 논계하고 있는데, 익렴은 바로 신의 매부입니다. 혐의가 있어서 가부를 말할 수 없으니, 체차하여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6월 26일 기해

지평 홍만형이 아뢰기를,
"사간 오두인이 피혐한 계사 중에 ‘대간의 배척을 받기까지 하였다.’는 등의 말이 있는데, 이른바 대간은 바로 신의 숙부인 홍주국입니다. 감히 처치하지 못하겠으니, 체차하여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지평 정화제가 처치하여 여민제와 홍만형은 출사시키고 오두인은 체차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6월 28일 신축

부교리 남이성(南二星), 수찬 박세당(朴世堂) 등이 상차하기를,
"권대운(權大運)이 헌부를 처치하면서 피혐한 계사의 본뜻에 의거하지 않고 관계없는 말을 새로 창출하여 첫 번째는 ‘전지에 응하였다.’고 하였고 두 번째에는 ‘정도에 지나치다.’고 하였으며, 끝내는 ‘그 나머지 곡절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억지로 처치하는 말을 만들어 내었으니, 이것이 무슨 의도입니까. 설령 권대운의 뜻이 이석복을 깊이 죄주고 싶지 않았다면 전례에 의거하여 출사시키기를 청한 뒤에 마땅히 동료들과 더불어 상의하고, 논의가 서로 어긋날 경우에는 별도로 의견을 진달하여도 늦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처치하는 틈을 타서 단숨에 제거하기를 급급히 들이치는 것처럼 한단 말입니까.
아, 구언한 뒤에는 상소한 자를 죄주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은, 곧 초야에 살면서 조금도 꺼림없이 말하는 꼿꼿한 자들의 경우를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석복의 상소는 초야에 있는 꼿꼿한 자의 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의 죄를 바루고자 하면 죽여도 오히려 가볍습니다. 그런데 지금 석복에 대해서는 전지에 응하였다고 비호하고 대간의 계사에 대해서는 정도에 지나치다고 배척하니, 공을 저버리고 사를 따르면서 방자하여 거리낌없음이 역시 심합니다.
그리고 ‘광망(狂妄)’ 두 자는 신하된 자들의 좋은 제목(題目)으로 이를테면 한(漢)나라에 있어서 주운(朱雲)이 참마검(斬馬劒)을 청한 것과 당(唐)나라에 있어서 한유(韓愈)가 불골(佛骨)을 논한 표(表)가 그것으로, 그 본심을 따져보면 나라에 충성을 다하고자 하여서 말이 과격함을 면치 못한 것을 ‘광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흉악한 화를 일으키려는 마음을 품고 있는 자에게 억지로 꿰맞추고자 하니,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마음이 어쩌면 이 지경에 이를 수 있단 말입니까.
이석복의 정상을 전하께서 통촉하시어 전하께서는 사특하다고 배척하시는데 권대운은 광망하다고 칭찬하고 있으며, 전하께서는 부정하다고 하시는데 권대운은 전지에 응한 것이라고 하고 있으니, 대간의 논계가 정도에 지나쳤다고 권대운에게 공격당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대사간 권대운을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승지를 보내어 영의정 홍명하에게 내일 조회에 나와 국사에 대해 면대하여 의논하라고 유시하였다. 승지가 회계하였다.
"홍명하가 ‘병이 바야흐로 심해져서 소명에 나아갈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6월 29일 임인

윤문거(尹文擧)를 대사간으로, 여성제(呂聖齊)를 집의로, 홍주국(洪柱國)을 사서(司書)로, 심재(沈梓)를 승지로, 박세견(朴世堅)을 사간으로, 이동로(李東老)를 헌납으로 삼았다.

 

주인을 시해한 죄인 명생(命生)을 복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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