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14권, 현종 8년 1667년 8월

싸라리리 2025. 12. 11.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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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일 계유

상이 눈병으로 인하여 침을 맞았다.

 

8월 2일 갑술

송시철(宋時喆)·이정(李程)을 승지로, 이규령(李奎齡)을 정언으로 삼았다.

 

8월 3일 을해

홍중보(洪重普)를 병조 판서로, 오두인(吳斗寅)을 사간으로, 이동직(李東稷)을 헌납으로 삼았다.

 

좌의정 허적(許積)이 충주(忠州)에 있으면서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상이 사관을 보내어 올라오라는 뜻으로 유시하였는데, 유시한 내용이 은근하기 짝이 없어 사람을 감동시킬 만하였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기근이 들었다는 이유로 비용을 의논해서 줄이게 하였다. 내주방(內酒房)과 각전(各殿)의 주미(酒米)와 사포서(司圃署)의 진서과가(眞西瓜價)를 반을 감하도록 명하였으며, 사복시(司僕寺)의 마초가(馬草價)를 반감하였고, 의정부와 종친부의 납약가(臘藥價)를 3분의 1을 감하였다. 그리고 상의원에서 진어하는 초피(貂皮)와 중국에서 무역해 오는 물품 및 판별방(辦別房)의 당초피(唐貂皮)도 감하였다. 내년 가을까지를 기한으로하여 내궁방(內宮房)의 별조(別造)를 파하였고, 4품 이상 관원의 녹봉을 1석을 감하였다. 그리고 경기 지방의 전세미(田稅米)를 16두를 감하고서 단지 1두 6승만 받도록 하였다. 서북 지방의 추쇄(推刷) 및 양남 지방의 세초(歲抄)를 정지하였다.

 

8월 6일 무인

배천(白川)에서 개가 강아지를 낳았는데 머리 하나에 몸체가 둘이었다.

 

유학 이태양(李泰陽)이 구언하는 전지에 응하여 상소하기를,
"신이 보건대 오늘날 조정에는 일종의 괴격한 무리가 세력을 믿고 당파를 심어 뿌리를 단단히 맺고는 큰일 작은일 가릴 것 없이 걸핏하면 실없는 의논을 내고, 임금을 협박하고 온 세상 사람들을 뒤흔드는 것이 그들의 능사입니다. 그러니 전하께서 먼저 스스로 분발하시어 그들 중에 심한 자를 제거해 여러 신하들을 경계시켜 가다듬게 하여 전날의 습관을 고치게 한다면 재변을 늦출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단지 서로 협심하라는 몇 마디 말로 병의 뿌리가 깊어 이미 고질이 된 습관을 개혁시키고자 하니, 역시 지나치게 구구하지 않습니까.
아, 적(赤)과 백(白)이 서로 공격하고 있는데, 신은 어느 쪽이 옳고 어느 쪽이 그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요로(要路)를 차지하고 있고 청반(淸班)을 출입하는 자들이 거의 모두 적당을 공격하는 무리들이고, 조정의 기강을 마구 뒤흔들고 전하의 총명을 가리우는 자들도 역시 모두가 백당입니다. 그러니 백당이 적당을 공격한다고 하는 것은 오늘날 실정에 맞는 말이지만, 그것을 일러 적당과 백당이 서로 공격한다고 하는 것은, 신은 옳은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조정에다 함정을 파 놓고 시의(時議)에 붙좇지 않는 자를 몰아넣으며, 대각에다 쇠뇌를 설치해 놓고 조금이라도 뜻을 거스르는 자를 따라가 쏘고 있습니다. 옥당에서 들이치는 것은 호랑이이면서 날개가 있는 것이고, 정원에서 전하를 속이는 것은 사슴이면서 갈기가 달린 것입니다. 이구동성으로 전하를 현혹시키고 있으니, 당파만을 일삼는 자를 전하께서 비록 여러 사람과 함께 치고자 하시더라도 누구를 치겠으며, 서로 협심하기를 생각지 않는 자를 전하께서 형벌에 처하고자 하시더라도 누구에게 형벌을 내릴 수 있겠습니까. 어느 쪽이 사이고 어느 쪽이 정인지 이에 근거하여 알 수 있으며, 재이가 일어나는 것이 어찌 공연히 일어나는 것이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이 상소는 답할 만한 상소가 아니기에 도로 내린다."
하였다.

 

전 판서 윤강(尹絳)이 졸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윤강은 사람됨이 순수하고 근실하였으며, 오랫동안 청요직(淸要職)에 있었다. 비록 칭할 만한 점은 없었으나 늘그막에 시골로 물러가 있으면서 여러 차례 불렀으나 올라오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물러나 조용히 지내는 것을 훌륭하게 여겼다.


【태백산사고본】 14책 14권 16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563면
【분류】인물(人物) / 역사-편사(編史)
사신은 논한다. 윤강은 사람됨이 순수하고 근실하였으며, 오랫동안 청요직(淸要職)에 있었다. 비록 칭할 만한 점은 없었으나 늘그막에 시골로 물러가 있으면서 여러 차례 불렀으나 올라오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물러나 조용히 지내는 것을 훌륭하게 여겼다.

 

8월 7일 기묘

원만리(元萬里)를 정언으로, 정지화(鄭知和)를 예조 판서로, 이상일(李尙逸)을 원양 감사(原襄監司)로 삼았다.

 

왕세자의 탄신일을 9월 15일로 고쳐 정하였다. 이에 앞서서 관상감이 아뢰기를,
"왕세자의 탄생이 신축년 8월 15일에 있었는데, 대통력(大統曆)의 역법으로 보면 이 해에는 윤달이 10월에 있으니, 시헌력(時憲曆)의 신축년 윤7월은 8월이 되며 8월은 9월이 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달의 크고 작음을 따져보면 시헌력의 윤7월과 대통력의 8월은 모두 작으며 15일은 간지(干支)가 모두 계유(癸酉)입니다. 나라에서 지금 대통력을 기준으로 삼고 있으니, 왕세자의 탄생한 날짜는 9월 15일로 정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일이 중대한 데 관계되니 예관으로 하여금 대신에게 가서 의논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대신에게 의논하도록 명하였다. 대신들이 모두 대통력으로 시행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자, 이에 정했다.

 

집의 여민제(呂閔齊)가 상소하여 아뢰기를,
"내탕고에 쌓아두는 것은 전혀 사재(私財)를 축적하지 않는 왕자의 도가 아니나, 그 유래가 이미 오래 되어 갑자기 혁파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어찌 혼자만 부를 누릴 수 있겠습니까. 흉년에 창고를 풀지 않는 것에 대해 옛사람이 조롱하였습니다. 내사(內司) 및 수진궁(壽進宮)·명례궁(明禮宮)에 쌓아둔 재물과 곡식을 덜어내어 가난한 백성들을 진휼하소서."
하니, 상이 너그러운 비답을 내렸다. 그러나 시행하지는 않았다.

 

8월 10일 임오

헌납 이동명(李東溟)이 아뢰기를,
"이태양(李泰陽)의 상소가 또 이석복(李碩馥)의 상소에 뒤이어 들어와 성상께 들인 지 며칠이 지났는데도 참소하는 말을 미워하는 거조가 없으니, 이는 나라 사람들이 모두 의혹하는 바이며 여러 사람들이 깊이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신이 듣건대, 머뭇거리는 마음을 가진 자는 참소하는 말이 오게 하며,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자는 굽은 길을 열어놓는다고 합니다. 속히 그의 죄를 결단하여 인심을 안정시키고 조정이 존엄해지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8월 11일 계미

상이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고 경기 백성의 신역을 반으로 감하도록 명하였다. 상이 영상 홍명하를 돌아보고 이르기를,
"이태양의 상소는 뜻은 불미스러우나 말은 범범히 칭하였다. 대간이 현재 죄주기를 청하고 있는데, 죄주어도 되겠는가?"
하니, 명하가 아뢰기를,
"이 상소는 바로 황연(黃壖)의 상소와 비슷한 것입니다. 그러나 상소를 올렸다는 이유로 유배보낸다면 뒷날 소인이 군자를 공격할 때에도 이런 폐단이 있을 것이니, 정배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하였다.

 

8월 13일 을유

정언 원만리(元萬里)가 아뢰기를,
"이태양의 위험하고도 건방진 정상을 성상께서 이미 통촉하셨으니, 멀리 유배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사람의 상소가 어찌 바르다고 하겠는가마는 그를 죄주지 않고자 하는 것은 언로에 방해가 될까 염려해서이다."
하였다.

 

지평 신경윤이 아뢰기를,
"김익훈의 행실이 거칠고 패려한 것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모두 손가락질하며 욕하고 있는데도, 단지 명문 거족이라서 기세가 두려우므로 모두들 감히 무어라고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에 신이 일찍이 이를 통분스럽게 여겨 그의 잘못된 행동 가운데 분명하게 드러난 것 하나를 가지고 논박하였습니다. 그런데 위태로운 기미가 밀어닥치고 욕설과 비방이 쏟아져 들어오니, 어찌 한심스럽지 않겠습니까. 신의 아비가 혼조(昏朝) 때에 처음 벼슬길에 나섰는데, 본래 흉론(凶論)에 물들어 벼슬을 얻은 것이 아님은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는 바이며, 인조조에 의망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니 그 당시의 조정 의논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 교묘하고도 터무니없는 말을 떠벌리면서 신을 중상모략하고, 지하에 있는 신의 아비까지 무함하려고 하니, 그 정상이 몹시 참혹스럽습니다. 그지없이 욕을 당하고 있으니, 아무말 않고 자리에 있을 수 없습니다. 체직해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8월 15일 정해

권격(權格)을 헌납으로, 이유상(李有相)을 부교리로, 이익상(李翊相)·오시복(吳始復)을 부수찬으로, 김만중(金萬重)을 수찬으로, 최유지(崔攸之)를 교리로, 경최(慶㝡)를 정언으로 삼았다.

 

8월 17일 기축

대사헌 박장원(朴長遠) 등이 아뢰기를,
"집의 여민제(呂閔齊)는 본직에 제수된 지 이미 오래인데, 상소에 대한 비답이 내린 뒤에도 한결같이 물러나 움츠리고 있으면서 나와 숙배할 뜻이 없습니다. 물론이 모두 그르게 여기고 있으니, 체차하소서. 처음으로 삼사(三司)의 직에 제수된 나이 어린 신진의 무리가 소를 올려 사면되는 것은 몹시 번거로울 뿐만 아니라 또한 고사(古事)도 아닙니다. 더구나 패초를 받고 대궐에 나와서도 감히 사직하는 소를 올리고는 끝내 들어와 숙배하지 않고 물러가니, 법이 해이됨이 심합니다. 아울러 추고하소서.
어린아이를 군역에 충정하는 것이 오늘날의 커다란 폐단입니다. 대개 양민 가운데 조금이라도 재산이 있는 자는 모두 헐한 역에 투속되어 다시 여정(餘丁)이 없으므로, 수령들이 찾아낼 길이 없어서 부득이하여 어린아이로 충정하고는 포(布)를 거둡니다. 이 때문에 유리하여 흩어지고 인족(隣族)들이 보전하지 못하니, 이것은 참으로 불쌍히 여겨야 할 것입니다. 각 아문의 군관이나 각 영문에서 변란에 대비하고 있는 군관이나 군뢰(軍牢)·아병(牙兵) 등의 역은 폐할 수 없으나, 정해진 인원수가 있으니 마음대로 충정하여 가난한 백성들만 치우치게 고통받게 해서는 안 됩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품의하여 정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8월 18일 경인

최관(崔寬)을 집의로, 이단하(李端夏)를 이조 정랑으로, 이익상(李翊相)을 교리로, 이동명(李東溟)을 장령으로, 이세장(李世長)을 부수찬으로, 박세당(朴世堂)을 부교리로, 조한영(曹漢英)을 부제학으로 삼았다.

 

장령 송창(宋昌), 대사헌 박장원이 아뢰기를,
"물의가 여민제를 논핵한 계사는 말이 범범하여 단지 그가 늦게 사은한 것만 나무라는 것 같고 옥당을 추고하기를 청한 계사는 말이 지나치게 중하다고 하면서 그르게 여기니, 그대로 태연히 있을 수 없습니다. 체직하여 주소서."
하였는데, 처치하여 모두 면직시켰다.

 

8월 19일 신묘

상이 침을 맞았다. 상이 진휼청 당상 조복양에게 일렀다.
"지금 흉년으로 인하여 모든 것을 감하거나 면제하였는데, 올 9월부터 내년 9월까지를 기한으로 하는 것이 옳다."

 

8월 20일 임진

이경억(李慶億)을 대사헌으로, 이단석(李端錫)을 장령으로, 홍만형(洪萬衡)을 수찬으로 삼았다.

 

정언 원만리(元萬里)가 아뢰기를,
"원양 도사(原襄都事) 정중휘(鄭重徽)는 일찍이 언관의 자리에 있으면서 마음씀이 불미스러워 대간의 탄핵이 무겁게 발하였었는데, 이 일로 인하여 폐기된 채 오랫동안 청현직에 들어오지 못하였으니, 공의가 엄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홍문록(弘文錄)에 참여되었으므로 물정이 모두 해괴하게 여깁니다. 이에 신이 홍문록에서 삭제하자는 뜻으로 석상에서 발론하였습니다. 그러자 다른 동료들은 끝내 이견을 제시하지 않았는데, 유독 아장(亞長)만이 중휘에게 사정(私情)을 두어서 논란하며 따지는 즈음에 아무런 근거도 제시하지 않으면서 단지 ‘홍문록에서 삭제하기는 곤란하다.’고만 하였습니다. 이에 반나절이나 서로 버티다가 끝내는 소란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이는 모두가 신이 경시당한 탓에 일어난 일입니다. 체직하여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사간 오두인이 아뢰기를,
"원만리가 정중휘를 홍문록에서 삭제하자는 뜻으로 발론하였는데, 신의 생각에는 ‘대각에 있으면서 한때 잘못한 바가 있다 하더라도 세월이 오래 지난 뒤에 이를 이유로 홍문록에서 삭제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여겼습니다. 이에 신이 이런 내용으로 반복해서 상의하였습니다. 그런데 원만리가 끝끝내 고집을 부리다가 지레 먼저 인피하였으며, 사정을 두었다느니 하는 등의 말로 드러내놓고 헐뜯으니, 신은 실로 그 뜻을 모르겠습니다. 신이 어렵게 여긴 것은 자세하고 신중하게 처리하자는 것이었는데, 중하게 동료의 배척을 받았습니다. 그대로 무릅쓰고 있을 수 없으니, 체직하여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가다렸다. 헌납 권격(權格)도 이를 이유로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지난 갑진년에 집의 민유중(閔維重)이 서필원(徐必遠)을 중하게 탄핵하면서 ‘파직하고 서용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상이 엄한 비답을 내려 민유중을 특별히 체직하였다. 그러자 다음날 정중휘가 지평으로 있으면서 인피하기를 ‘신은 서필원의 일에 대해서 견해가 서로 어긋나므로 연계(連啓)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규례가 있는 일이어서 혼자 정계(停啓)할 수도 없습니다.’고 하였다. 이에 옥당이 처치하기를 ‘동료가 특별히 체직당한 뒤에 드러나게 회피한 자취가 있으니 체차하소서.’ 하였다. 원만리가 정중휘의 마음씀이 불미스럽다고 한 것은 이 일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8월 21일 계사

대사간 이시술(李時術)이 아뢰기를,
"직무상의 잘못으로 인하여 폐기되었다면 그 홍문록을 쓰지 않으면 충분히 공의(公議)를 시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드시 삭제하고자 하였으니, 역시 지나치게 과격한 것입니다. 논한 바가 중한 일이어서 자세하고 신중하게 하자는 뜻이었으나, 실정이 아닌 배척은 혐의롭게 여길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일이 지나친 듯하다.’고 하고서, 또 ‘상의하여 하였다.’고 하였으니, 끝내 구차하게 휩쓸림을 면치 못한 것입니다. 원만리·권격은 체차하고 오두인은 출사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8월 23일 을미

박장원(朴長遠)을 형조 판서로, 강여호(姜汝㦿)를 정언으로, 심유(沈攸)를 헌납으로 삼았다.

 

사간 오두인이 아뢰기를,
"정언 원만리가 지난번에 ‘여민제(呂閔齊)는 지난번에 부상(父喪)을 당하여 오랫동안 상차(喪次)를 떠나 있어서 물의가 있게 하였으니, 논핵하지 않을 수 없다.’는 내용으로 석상에서 발론하였습니다. 이에 신이 ‘여민제가 오랫동안 고질병을 앓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바이니, 참으로 상도(常道)로 책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미 사람들의 말이 있었으니 논하지 않을 수는 없다. 사정을 참작해서 말을 만들어 논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내용으로 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원만리 역시 그렇다고 하였으므로 신은 신의 견해를 고집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다시 동료와 더불어 상의해 보니, 동료가 ‘이미 병든 실상을 알았으면, 어찌 갑자기 중하게 논핵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끝끝내 곤란하게 여겼습니다. 신이 지난번에 경솔하게 논의한 잘못을 면하기 어려우니 체직하여 주소서."
하고, 물론을 기다렸다. 정언 경최(慶㝡)가 아뢰기를,
"동료가 여민제의 일에 대해 발론하기에, 신은 ‘여민제가 부상(父喪)을 당하였을 때 고질병이 몹시 위독해져 조석으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던 상황은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예를 무너뜨렸다고 하면서 갑자기 중하게 논핵할 수 있겠는가.’라고 여겨져 재삼 곤란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동료가 전에 이미 논의에 참여하였다는 이유로 인피하기까지 하니, 신이 어떻게 감히 그대로 있을 수 있겠습니까. 체직하여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영상 홍명하에게 이르기를,
"원만리가 정중휘를 논핵한 일에 대해 경은 어떻게 여기는가?"
하니, 홍명하가 아뢰기를,
"홍문록에서 삭제하는 일은 몹시 중대한 일로 일찍이 듣지 못했던 바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몇 년 전에 한 가지 일을 실수한 것을 가지고 어찌 홍문록에서 삭제하기까지 한단 말인가. 원만리의 이번 일은 반드시 속뜻이 있어서 발론한 것이다. 이런 습관은 징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먼저 파직한 다음 추고하라."
하니, 명하가 아뢰기를,
"만리는 들은 바가 필시 지나쳤을 것입니다. 어찌 다른 뜻이 있었겠습니까. 죄를 주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장령 이동명이 처치하기를,
"이미 ‘끝까지 고집하지 못하였다’고 하고서 또 ‘경솔하게 논의하였다.’고 하였으니, 전후로 논의한 것이 구차함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병이 중한 실상을 자세히 알았다고는 하지만 많은 말을 늘어놓으면서 인피하였으니, 신구(伸救)하는 듯한 점이 있습니다. 오두인과 경최를 모두 체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동명이 또 아뢰기를,
"원만리를 파직하라는 명을 거두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8월 25일 정유

좌의정 허적(許積)이 상소하여 면직시켜 달라고 청하니, 상이 사관을 보내어 유시하였다.
"국사와 백성들의 걱정이 어떠한 때라고 하겠는가. 경과 같은 재주와 덕을 지니고도 정사에 참여하지 않은 채 시골 사람이 되어 지낸 지가 지금 몇 달 째인가. 부디 고사하지 말고 속히 마음을 돌려 나의 바람에 부응하라."

 

8월 29일 신축

오정위(吳挺緯)를 도승지로, 이유상(李有相)을 헌납으로, 여성제(呂聖齊)를 사인으로 삼았다.

 

이산(理山)·창성(昌成) 등지에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새알만하여 새들이 많이 맞아 죽었다. 비바람이 몰아치고 벼락이 쳐 나무가 뽑히고 돌멩이가 날아갔다.

 

대사간 이시술이 아뢰기를,
"신이 원만리를 처치하면서 신의 뜻으로는 ‘홍문록에서 삭제하려고까지 한 것은 실로 지나친 듯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체직하기를 청하였습니다. 지금 듣건대, 물의가 그르게 여기며, 헌부가 환수하라고 아뢰면서 신의 계사 가운데 있는 말을 끄집어 내어 드러내놓고 배척하는 뜻이 있기까지 하였습니다. 체직하여 주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공도(公道)가 이미 쇠해져 사의(私意)가 크게 행해지고 있다. 이미 4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청현직에 들어올 수 없다고 하니, 이 역시 공정치 못한 일이다. 어찌 이것으로 혐의를 삼아서야 되겠는가. 사직하지 말라."
하자,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지평 신경윤(愼景尹)이 아뢰기를,
"신이 원만리를 파직 추고하라는 명을 환수하라고 한 논계에서 말을 첨가해 넣은 것은, 대개 신이 정중휘의 지난날의 잘못을 영원히 폐기할 만한 일로 여긴 것이 아니라, 아직 청현직에도 통망(通望)되지 못하였는데 갑자기 홍문록에 참여시키는 것은 홍문록의 선발을 중하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간장(諫長)이 피혐한 계사에 ‘말을 끄집어 내어 드러내놓고 배척하였다.’는 등의 말이 있으니, 신이 어찌 감히 태연하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체직하여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사간 이동명이 처치하기를,
"그 홍문록을 쓰지 않으면 된다는 말은 말이 구차하니, 이시술을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별로 체차할 만한 잘못이 없는데, 반드시 신구(伸救)하고자 하여 이와 같은 말을 하니, 몹시 형편없다. 출사시키라."
하였다.

 

사간 이동명이 엄한 비답이 내렸다는 이유로 인피하면서 체직시켜 달라고 청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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