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14권, 현종 8년 1667년 10월

싸라리리 2025. 12. 11.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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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일 계유

계유012) 표류해 온 중국인을 제주에서 홍제원(弘濟院)으로 압송해 왔다.


【태백산사고본】 14책 14권 22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566면
【분류】외교-야(野)


[註 012] 계유 : 계유가 초하루로 되어 있으나 《현종개수실록》에 근거하여 바로잡아 2일로 하였음.
표류해 온 중국인을 제주에서 홍제원(弘濟院)으로 압송해 왔다.

 

우의정 정치화가 면대를 청하자, 상이 인견하고 묻기를,
"표류해 온 중국인이 이미 도착하였는가?"
하니, 치화가 아뢰기를,
"이미 홍제원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런데 북경으로 들여보낼 것이라고 듣고는 모두 죽어도 가지 않으려고 하며 심지어는 목매어 죽으려고 하는 자도 있습니다. 그 가운데 유독 증승(曾勝)이라고 하는 자만은 조금도 마음의 동요없이 태연자약하게 담소하였습니다. 역관으로 하여금 반복해서 개유하게 하되, 끝까지 가려고 하지 않을 경우에는 이미 전례가 있으니, 그에 의거해서 처리하여야 할 형세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전의 일은 어떠하였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경진년에 중국인을 쇄송할 때에는 죄인과 마찬가지로 차꼬를 채워서 들여보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형세가 장차 그렇게 되겠구나."
하였다. 치화가 아뢰기를,
"표류해 온 사람들이 말하는 사이에 반드시 정성공(鄭成功)의 형세가 성대함을 말하는데, 대개 정성공은 명나라 때부터 귀순하지 않고 섬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이들은 필시 그의 관하(管下)이지 영력 군왕(永曆君王)의 관하가 아닌 듯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사람들이 ‘영력 군왕이 뇌주(雷州)에 있으며 3성(省)을 점거하고 있다.’고 하는데, 3성은 천하의 4분의 1이다. 과연 그것을 소유하였다면 천하가 진동할 것이지, 어찌 이처럼 잠잠할 리가 있겠는가."
하였다. 치화가 아뢰기를,
"지난번의 김수항(金壽恒)에 대한 일은 전교하신 내용이 몹시 온당치 않았습니다. 신의 뜻도 영상의 생각과 같았으나 한꺼번에 진달하는 것은 번거로울 듯하기에 입시하기를 기다렸다가 진달하는 것입니다. 김수항은 정세가 불안하여 전례에 따라서 사면해주기를 요청한 것이지, 어찌 다른 뜻이 있었겠습니까. 임금은 말 한 마디도 살피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사책에 쓰여져서 후세에 전해지니 스스로 가볍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경최(慶㝡)의 아룀은 사체에 있어서 당연한 것이고 말에도 잘못이 없습니다. 그런데 성상께서는 어째서 아무 것도 모른다고 하셨습니까? 아마도 성덕에 흠이 있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어찌 몹시 미워하는 뜻이 있었겠는가. 내가 참으로 몹시 미워하였다면 어찌 사람이 부족하여서 체직하지 않았겠는가. 더 의망하라고 명한 뒤에 외방에 있는 세 사람으로 책임을 때우듯이 의망하였으니, 그 일만 해도 옳지 않은데, 다시 더 의망하라고 명하자 단지 두 사람만 의망하였다. 의망할 사람이 없다고 아뢰면 오히려 가하거니와, 어찌 감히 이와 같이 무엄하단 말인가. 이 때문에 추고한 것은 원래 대단한 일이 아닌데 정원에서는 죄목이 분명치 않다고 하니, 내가 괴이하게 여긴다."
하자, 치화가 아뢰기를,
"신 역시 김수항이 전혀 잘못한 바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성상께서 감히 지위가 높음을 믿고 앙앙불락하여 시끄럽게 군다고 힐책하시니, 다른 사람이 듣더라도 몹시 위축되는데, 더구나 수항의 마음이겠습니까. 《역(易)》에 ‘오래지 않아 회복된다.’고 하였고, 《논어》에 ‘허물을 고치면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본다.’고 하였습니다. 성상께서는 유념하소서."
하니, 상이 그렇게 여겼다.

 

10월 3일 갑술

민유중(閔維重)·이태연(李泰淵)을 승지로, 박장원(朴長遠)·조형(趙珩)을 좌·우 참찬으로, 이명익(李溟翼)을 지평으로, 이세장(李世長)을 교리로, 홍만형(洪萬衡)을 부교리로, 이규령(李奎齡)을 정언으로 삼았다.

 

표류해 온 중국인 95명을 북경으로 압송하였다. 표류해 온 사람들이 상계(上啓)하였는데, 그 대략에,
"표류해 온 이래로 천은(天恩)을 내려 주시어 극진히 주선해 주시었습니다. 예전의 우의를 생각하심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중국을 사랑하시는 마음이 저희들에게까지 미치었으니, 신들의 분수로 헤아려 볼 때 어찌 감히 감당하겠습니까. 이에 삼가 하찮은 물품을 관가에 바치어 만분의 일이나마 보답합니다. 저희들은 지금 반 년이 지나도록 되돌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눈이 침침한 부모님은 거의 숨이 끊어져가고 재잘거리는 처자식은 반드시 죽게 되었을 것입니다. 부모를 그리워하는 마음과 고향 생각에 아침저녁으로 울부짖음을 그칠 수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천지의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을 열으시어 은택을 온갖 초목에 내리시고, 대대로 친하게 지내었던 명나라를 생각하여 사랑을 저희들에게 내리소서. 그러면 임인관(林寅觀) 등의 목숨이야 어찌 따질 것이 있겠습니까만, 전하의 높은 의리는 영원토록 남아 있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일본으로 칙사를 보내어 배를 타고 돌아갈 수 있게 해주시거나, 혹 저희들을 불쌍하게 여기시어 특별히 배 한 척을 보내어 저희들이 직접 몰고 본토로 돌아갈 수 있게 해 주소서. 그러면 그 은혜가 가이없을 것으로, 온 나라 모든 백성들이 영원토록 떠받들 것이니, 저희들의 국군(國君)과 번왕(藩王) 또한 어찌 감히 뒷날 잘 대우해 준 데 대한 보답을 잊겠습니까."
하였는데, 조정에서 ‘이미 청나라에 통보하여 다시는 변통할 뜻이 없다.’고 하자, 인관 등이 모두 울부짖으며 죽어도 가지 않으려고 하였다. 이에 그들을 내몰아 압송해 가니, 연도에서 보는 자들이 모두 비분강개하였으며, 시를 지어 자신의 뜻을 말하는 자도 있었는데, 그 시에,
남쪽 나라 귀한 손 바다 건너 왔는데
붉은 구름 한 떨기 해 곁에 떠있네
천추의 큰 의리 아는 이 없어
석실산 앞에서 통곡하고 돌아왔네
라고 하였다. 대개 김수흥(金壽興)이 김상헌(金尙憲)의 손자이면서도 압송하라는 논의를 주장하였기 때문에 시인이 이를 기롱한 것으로, 석실(石室)은 김상헌이 조정에서 물러나 살던 곳이다. 이 시를 혹자는 부제학 이단상(李端相)이 지은 것이라고 한다.

 

표류해 온 사람들이 스스로 말하기를
"천주(泉州) 사람으로 청나라의 침입을 받아 동녕(東寧)으로 피해 들어갔다."
고 하였는데, 동녕은 바로 남해에 있는 섬으로 복건성(福建省)에 속한 곳이다. 역관이 말하기를,
"너희들이 가지고 온 관화(官貨)는 어느 관원의 물건인지 모르겠다."
하니, 대답하기를,
"번왕(藩王)이 정경(鄭徑)에게 준 물건이다."
하였는데, 이른바 번왕은 바로 영력 황제(永曆皇帝)의 동생으로 서북 방면의 군무(君務)를 관할하는 임무를 받고 복건성 등의 바닷가에 진을 치고 있는 자이며, 정경이란 자는 정성공(鄭成功)의 아들로, 정성공이 죽자 영력 황제가 습봉(襲封)하여 왕으로 삼았는데, 전공(戰功)이 없다는 이유로 사양하고 스스로 ‘사봉 세자(嗣封世子)’라고 칭하고 동남쪽의 섬으로 들어가 있으면서 영력 황제를 섬기는 자였다. 또 묻기를,
"영력 황제는 지금 어느 곳에 도읍해 있으며, 차지하고 있는 군현은 얼마나 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뇌주(雷州)에 도읍해 있으며, 복건·광동(廣東)·광서(廣西)·사천(泗川) 등 네 성을 차지하고 있다."
하였다. 이에 묻기를,
"복건·광동·광서 세 성은 지역이 서로 잇닿아 있으나 사천성은 동서간에 만리도 더 떨어져 있는데 어찌 명나라가 차지하였겠는가?"
하니, 임인관 등이 분명하게 말하지 못하였다. 역관이 또 묻기를,
"뇌주에 황제가 도읍하였다고 하였는데, 너희들은 항상 그곳에 왕래하는가?"
하니, 답하기를,
"동녕에서 뇌주까지는 수로(水路)로 만 리 가까이 되므로 왕래하지 못하였다."
하였다. 또 묻기를,
"너희들은 정경의 관하(管下)가 아닌가?"
하니, 인관 등이 답하지 않고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응교 남이성(南二星), 이조 정랑 이단하(李端夏)가 상소하기를,
"듣건대 표류해 온 사람들이 홍제원(弘濟院)에 도착하여 울부짖으면서 갖은 모습으로 애걸하였다고 합니다. 백 명이나 되는 목숨이 아무런 죄도 없이 죽을 곳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죽이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우리로 인해서 죽게 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몹시도 참혹하고 비통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들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힘써볼 만한 한 가지 일이 있습니다. 만약 자문에다 그들의 사정에 대해 언급하기를 ‘그 사람들은 바로 섬에 살다가 도망한 백성들로, 스스로 상국(上國)에서 용서하지 않을 줄 알고 모두 중도에서 자살하고자 하였다. 이에 소방에서 갖가지 말로 달래면서 「너희들이 비록 죄를 지었으나 상국의 어짐이 천하를 뒤덮으니, 반드시 다른 걱정은 없을 것이다.」고 하여 우선 그들이 마음놓게 하고 인하여 들여보낸다. 상국에서 특별히 용서한다면 이 뒤로 소방에서 다시 표류해 온 사람들을 압송하는 일이 있을 때에 폐단이 없을 것이다.’고 한다면, 저들이 허락하여서 그들을 살려줄지 누가 압니까. 설령 따라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저들의 비위를 거슬리는 일은 없을 것인데, 조정에서는 무엇을 꺼려서 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하였는데, 상이 답하지 않았다. 그 후 경연 석상에서 상이 이르기를,
"남이성 등이 상소에서 말한 ‘지금 이 사람들을 죽이지 않고 살려준다면 뒷날 압송할 때 폐단이 없을 것이다.’고 한 것은 타당한 의논이 아니다."
하였다.

 

장령 권격(權格)이 아뢰기를,
"충의위(忠義衛) 이운식(李雲植)이 정장(呈狀)하기를 ‘서종조부(庶從祖父) 덕녕감(德寧監) 이지(李墀)와 덕창감(德寧監) 이게(李垍)가 지난해 호적(戶籍)을 올릴 때 적형(嫡兄)의 외조(外祖)를 거짓으로 썼는데, 지는 적족(嫡族) 측에서 정장하여 따지려고 한다는 것을 듣고서 경조리(京兆吏)와 짜고서 정안(正案)을 지우고 그의 외조로 고쳐 써넣었으나 게는 포천(抱川)에 살고 있어서 본 고을에 입적(入籍)되었으므로 고치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지와 게를 잡아다가 조사하여 처리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0월 5일 병자

이시술(李時術)을 대사간으로, 이규령(李奎齡)을 수찬으로, 변황(卞榥)을 정언으로 삼았다.

 

10월 9일 경진

지평 이명익(李溟翼)이 아뢰기를,
"병조 낭관으로 있었을 때 잡인을 수금하여 이 때문에 공상(供上)을 바치는 사람이 저지당하였다는 이유로 추고당하였으니, 체차하여 주소서."
하니, 면직하였다.

 

강상 죄인 김선립(金先立)을 복주하였다. 당초에 선립이 명화적(明火賊)으로 체포되었는데, 그의 아비인 김막금(金莫金)을 같은 도적이라고 끌어대었다. 이에 형조가 아뢰기를,
"선립은 그의 아비를 죽을 곳으로 기필코 빠뜨리려 하니, 몹시도 흉악합니다. 강상죄에 관계되니 단지 자식으로서 아비를 고발한 율로 조율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전례가 없으니, 대신에게 의논하소서."
하였다. 대신들이 의논드리기를,
"이는 실로 천지간에 없었던 커다란 변고로 강상 대죄를 저질렀음이 이미 분명하게 드러났으니 다시 의논할 것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참수하라고 명한 것이다.

 

광주 부윤(廣州府尹) 이원정(李元禎)이 연좌되어 파직당했는데, 김선립이 광주에서 태어나 자랐기 때문이다.

 

10월 10일 신사

이은상(李殷相)을 대사간으로, 임상원(任相元)을 지평으로 삼았다.
사신은 논한다. 이은상은 명문가의 자식이며 또 글재주도 있었다. 그러나 기생집에서 노래를 불렀으므로 사람들이 천하게 여겼으니, 사헌부 장관의 직을 맡는 것은 외람되다고 하겠다.


【태백산사고본】 14책 14권 24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567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역사-편사(編史)
사신은 논한다. 이은상은 명문가의 자식이며 또 글재주도 있었다. 그러나 기생집에서 노래를 불렀으므로 사람들이 천하게 여겼으니, 사헌부 장관의 직을 맡는 것은 외람되다고 하겠다.

 

10월 11일 임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홍명하가 아뢰기를,
"고 부제학 정홍익(鄭弘翼)은 혼조(昏朝) 때에 절개를 지켰는데, 그가 죽자 그의 아내는 의지할 곳이 없었습니다. 지금 듣건대 그의 아내가 또 죽었는데, 가난하여서 장례를 치룰 수 없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장례 물품을 지급해 주라고 명하고, 또 제주(濟州) 출신으로 과거에 급제한 자의 부모에게 쌀을 내려주라고 특별히 명하였다. 이보다 앞서 전 전적 송상주(宋尙周)가 상소하여, 제주 출신으로 과거에 급제한 자들에게 쌀을 내려 주어 권장하기를 청하였는데, 상이 영상 홍명하에게 물으니, 홍명하가 대답하기를,
"이것은 법외의 일로 다섯 아들이 과거에 급제한 경우와 견줄 수는 없으나, 먼 외방의 자제가 과거에 급제한 것은 다른 곳과는 다르니, 오로지 상께서 특별히 은전을 베푸느냐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하니, 상이 쌀을 내려 준 것이다.

 

10월 13일 갑신

상이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상 홍명하가 아뢰기를,
"백성들을 직접 다스리는 관원은 임무가 가장 무거운데, 요즈음은 전관(銓官)이 잘 가려서 보내지 않고 또 대간들도 탄핵하지 않고 있으니, 이는 몹시 그른 일입니다. 하직 인사를 하는 수령들을 인견하시면 어진 사람인지의 여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도승지 오정위(吳挺緯)가 아뢰기를,
"차사원(差使員)으로 올라온 수령들도 인견하여 백성들의 질고에 대해 물어보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장령 윤형성(尹衡聖)과 정언 경최(慶㝡)가 대신의 지적을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했는데, 경최는 또 외임(外任)으로 있을 때 전세(田稅)를 거두어들이지 못하였으니 응당 추감(推勘)받아야 할 대상에 속한다고 피혐하는 말 중에 언급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이때 호남에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한 후에 각 고을 중에는 획급(劃給)해 준 수량을 다 써버리고 대동미(大同米)를 빌려 쓴 고을이 많았다. 이에 본도에 명하여 조사해서 아뢰라고 하였는데, 보고가 올라오자, 상이 이르기를,
"10석 이상은 잡아다 조사하고 그 이하는 추고하라. 관청용으로 획급해 준 쌀은 수령이 당연히 쓸 물품인데, 요즈음은 획급해 준 것을 다 쓴 수령을 뒤섞어서 남용한 것으로 논하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조정에서 규례를 정한 뜻이겠는가. 획급해 준 외에 다른 달 치를 끌어다 쓴 자만 사목에 의거해서 남용한 죄로 논하라."
하니, 홍명하가 아뢰기를,
"성상의 분부가 마땅합니다. 이 전교 내용으로 선혜청과 의금부에 분부하여 그들로 하여금 벽에다 붙여놓고 거행하게 하소서."
하였다.

 

10월 14일 을유

헌납 심유(沈攸)도 경연 석상에서 대신이 수령을 탄핵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장령 윤형성(尹衡聖)이 혐의가 있어 처치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옥당이 처치하여 심유·윤형성은 출사시키고 경최는 체차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10월 16일 정해

이시술(李時術)을 이조 참의로, 정재희(鄭載禧)를 지평으로, 오시복(吳始復)을 정언으로 삼았다.

 

동지(同知) 남노성(南老星)이 졸하였다. 남노성은 어려서부터 재명(才名)이 있었으며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하였는데, 만년에 송시열의 무리에게 거슬림을 받아 다시는 청요직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10월 20일 신묘

이태연(李泰淵)·이익(李翊)을 승지로, 여성제(呂聖齊)를 사간으로 삼았다.

 

10월 21일 임진

대사간 이은상(李殷相)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형조 참판으로 있을 때 살인한 중대한 옥사를 신중하게 처리하지 못하고 지레 감사(減死)를 청하여 다시 심리하라는 전교가 있게 하였습니다. 체차하여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10월 22일 계사

대사헌 박장원(朴長遠), 장령 이숙달(李叔達) 등이 아뢰기를,
"황해 병사(黃海兵使) 성익(成釴)은 비석을 끌어내느라 벼를 손상시켜 백성들의 원망을 불러 일으켰으니,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또 이은상에 대해 처치하여 체차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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