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14권, 현종 8년 1667년 9월

싸라리리 2025. 12. 11.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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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일 임인

정언 정재숭(鄭載嵩)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심리(審理)할 때 신의 아비가 ‘이온(李溫)은 정배(定配)시키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으니, 신은 그 명을 환수하기를 청하는 데에 동참할 수 없습니다. 체직하여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대사헌 이경억이 신경윤(愼慶尹)에 대해 처치하기를,
"그가 말을 고집한 것은 근거할 만한 것이 있으니, 출사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9월 2일 계묘

대사간 이시술(李時術)이 이미 체직되었는데 특별히 출사하게 했다는 이유로 인피하니, 면직하였다. 지평 신경윤이 또 혐의가 있어서 처치하기 곤란하다는 이유로 인피하면서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대사헌 이경억이 처치하기를,
"사간 이동명과 지평 신경윤은 출사시키고 정언 정재숭은 체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9월 3일 갑진

상이 침을 맞았다. 이때 청나라 사신이 우리 국경에 들어왔다. 우상 정치화가 아뢰기를,
"이번에 청나라에서 보내온 사문(赦文)은 전날과는 다르니, 이는 필시 크게 사면을 베푸는 것입니다. 영부사(領府事) 이경석(李景奭)의 죄명을 깨끗이 씻어달라는 뜻으로 주문(奏聞)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좋지 않은 일을 제기하는 것이 아닌가? 죄를 받았을 때의 문서를 상고해 낸 후에 다시 의논하여도 늦지 않다."
하였다. 그 후에 이 의논은 끝내 시행되지 않았는데, 대개 일찍이 주문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9월 4일 을사

김익경(金益炅)을 대사간으로, 경최(慶㝡)를 정언으로, 이세장(李世長)을 이조 좌랑으로, 오두인(吳斗寅)을 부교리로, 여성제(呂聖齊)를 부응교로 삼았다.

 

헌부가 원만리(元萬里)를 파직 추고하라는 명을 환수하라는 논계를 정지하였다.

 

9월 5일 병오

밤에 우레가 쳤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상 홍명하가 나아가 아뢰기를,
"가뭄이 든 뒤에 또 어젯밤에 우레가 쳤으니, 무슨 화의 기미가 아득한 가운데 숨어 있기에 이렇게 재변이 연거푸 닥친단 말입니까?"
하고, 이어 책면시켜 주기를 청하니, 상이 하유하여 위로하였다. 상이 원양도(原襄道)의 삼명일 방물(三名日方物)을 감해주라고 명하고, 양서 지방의 금년도 전조(田租)의 반을 내려 주라고 하였는데, 우상 정치화의 말을 따른 것이다. 예조 판서 정지화가 아뢰기를,
"지금 이미 비가 내렸으니 상선(常膳)으로 회복하고 금고(金鼓)를 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10월부터 시행하라."
하자, 홍명하가 아뢰기를,
"가을철은 금기(金氣)에 속하니, 금고를 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자, 상이 허락하였다.

 

9월 6일 정미

간원이 이태양(李泰陽)을 먼 곳에 정배하라는 논계를 이때에 이르러 정지하였다.

 

9월 9일 경술

청나라 사신이 서울에 들어와 칙서를 선포하고 사면령을 반포하였다. 대개 청나라 임금이 어린 나이에 황제 자리를 이어받아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친정(親政)하였기 때문이다.

 

9월 11일 임자

민정중(閔鼎重)을 부제학으로, 남이성(南二星)을 응교로, 정재숭(鄭載嵩)을 부수찬으로, 이유상(李有相)을 이조 정랑으로, 심유(沈攸)를 헌납으로 삼았다.

 

9월 13일 갑인

상이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장령 이단석(李端錫)이 아뢰기를,
"영서 지방의 열 고을이 더욱 참혹하게 재변을 당하였으니, 경기 지방의 예에 의거하여 함께 잡역(雜役)을 견감하지 않을 수 없고, 봄보리의 종자를 나누어 주어 전지를 묵히지 않게 하여야 하며, 또 포보(砲保)와 수군(水軍) 및 기타 신역도 3필 중에서 2필을 감해 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신이 이상과 같은 내용으로 논계하고자 해서 동료에게 간통(簡通)하였는데, 동료들의 의견이 서로 어긋났습니다. 이는 모두가 신이 무시당한 소치이니, 체직하여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지평 신경윤이 아뢰기를,
"지금 이단석이 인피한 계사를 보니, 신은 실로 경악스럽습니다. 백성을 구제하는 데 관계되는 일을 어찌 범범하게 보고자 하였겠습니까. 이른바 의견이 서로 어긋났다고 하는 것은 빨리 할 것이냐 늦게 할 것이냐를 기다려 보자는 데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서로 상의하는 것조차도 용납하지 않고 지레 먼저 인피하면서 심지어는 무시당하였다고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니 신 역시 무슨 얼굴로 대간 자리에 그대로 있을 수 있겠습니까. 체직하여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우승지 이정(李程)을 파직하였는데, 금부의 문서를 출납하는 것을 지체하였기 때문이다.

 

9월 14일 을묘

대사헌 이경억 역시 이단석이 무시당하였다고 하면서 인피하여 스스로 편안치 못하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그러면서 3필 가운데 2필을 감하는 일 등에 대해 단지 1필만 받아들이는 것은 곤란한 점이 있다고 말하면서 체직을 청하고는,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대사간 김익경(金益炅), 헌납 심유(沈攸)가 처치하여, 이단석과 신경윤은 출사시키기를 청하고, 이경억에 대해서는,
"포를 징수하는 것이 편중된 것은 모든 백성을 똑같이 대하는 도리에 어긋나는데, 곤란한 점이 있다고 하였으니 구차함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체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민유중(閔維重)을 대사간으로, 박장원(朴長遠)을 대사헌으로, 김익경(金益炅)·이익(李翊)을 승지로 삼았다. 이날 정사에서 상이 승지를 더 의망하라고 명하였는데, 정관(政官)이 홍처량(洪處亮)·이시술(李時術)·민유중으로 의망하였다. 그러자 상이 또 더 의망하라고 명하니, 김우석(金禹錫)·이익으로 의망하였는데, 상이 이익을 낙점하였다. 김우석과 이익은 《정원일기》에 관한 일로 분분하게 쟁변하여, 이 때문에 오랫동안 청망(淸望)에 통하지 못하다가 이 때에 이르러 이익이 승지에 제수된 것이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오늘 승지를 더 의망하라는 명을 내린 뒤에 정관이 한 짓은 매우 놀랍다. 중한 벌을 내려 다른 사람을 경계시키는 것이 마땅하나, 우선 관대한 벌을 내린다. 당상과 낭청을 모두 중한 쪽으로 추고하여 뒷사람을 경계시키라."
하였다. 정원이 죄명이 분명하지 않다는 이유로 분명한 전지를 내려줄 것을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정청(政廳)에서 이미 곡절을 알고 있으므로 죄명을 거론하지 않은 것이다. 계사가 이와 같으니, 참으로 가소롭다."
하였다.

 

9월 15일 병진

이조 판서 김수항 등이 상소하기를,
"김우석과 이익을 당초에 함께 승지에 의망하지 않은 것은,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지난번에 치대(置對)한 일에 대해 공의(公議)와 물정이 석연치 못하게 여기는 점이 있어서 청선(淸選)인 승지의 직에 갑자기 의망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아서였습니다. 그런데 극히 엄한 내용의 성상의 분부가 내리게 하였으니, 신들의 직을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벌의 경중은 스스로 구한다고 해서 면할 수 없고 스스로 구한다고 해서 얻을 수도 없다. 경들은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9월 16일 정사

이경억을 형조 판서로, 이태연(李泰淵)을 승지로 삼았다.

 

장령 이단석(李端錫), 지평 신경윤(愼景尹)이 아뢰기를,
"영서 지방에 기근이 들었으니, 잡역(雜役)을 감해야 하고 봄보리 종자를 나누어 주어야 하며, 신역에 대해 포를 거두는 것도 1필만 받아들이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9월 17일 무오

장령 이단석, 지평 신경윤이 아뢰기를,
"나라의 기강이 해이해져 수습할 수가 없습니다. 전 병조 판서 김좌명(金佐明)은 강서(講書)에서 불통(不通)한 자 두 사람을, 한 사람은 선전관에 의망하고, 한 사람은 수문장에 의망하여 낙점을 받기까지 하였습니다. 여러 해 동안 등용되지 못하여 원통하게 여기는 자가 한둘이 아닌데도 먼저 낙강(落講)한 자를 의망하였으니, 어떻게 사사로움을 따른 자취를 면할 수 있겠으며, 무사들의 마음을 승복시킬 수 있겠습니까. 병조 판서 홍중보(洪重普)는 지난해 상께서 온천에 행행하셨을 때 선전관을 곤장 치라는 명이 있었는데, 치는 시늉만 하여 곤장을 맞은 상처가 전혀 없었습니다. 이에 승지더러 살펴보라는 명이 내림에 미쳐서는 당황하여 어쩔줄 몰라하면서 돌조각으로 둔부를 문질러서 피가 나게 하였습니다. 재상으로 있으면서 처사가 이와 같으니, 어떻게 뭇 관원과 하리들의 간사한 짓을 금지시킬 수 있겠습니까. 김좌명과 홍중보를 모두 파직한 다음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근거가 없다고 꾸짖고, 따르지 않았다.

 

9월 18일 기미

지평 신경윤, 장령 이단석이 엄한 성상의 비답이 내렸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응교 남이성(南二星)이 상소하기를,
"전하께서 임어하신 이래로 경연을 연 날이 얼마 되지 않아 광하(廣廈) 세전(細氈)의 사이에 강관(講官)의 자취가 끊긴 지가 10년이나 되었습니다. 옥후가 편치 않아 실로 경연을 여는 데 방해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성품은 참으로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조금 괴롭더라도 저절로 피로하지 않게 됩니다. 신이 열성(列聖)들의 행장(行狀)을 보건대, 문종 대왕께서는 눈병이 있었는데도 날마다 경연을 열자, 대신들이 격일로 열 것을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으며, 시종신(侍從臣)들도 글 보는 것을 중지하여 눈을 보호할 것을 청하였으나, 답하기를, ‘나는 성질이 글 보는 것을 좋아하여 중지할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본다면 전하께서는 학문을 좋아하는 정성에 있어서 부족한 점이 있는듯 싶습니다. 옛날에 주자(朱子)가 효종 황제에게 말하기를 ‘세월이 흘러가는 것은 시냇물이 흘러가는 것과 같아서 한번 흘러가고 나면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고 하였습니다. 그 말이 통절하기가 이와 같으니, 신은 전하를 위하여 재삼 반복하면서 개탄하는 바입니다."
하였다. 이때 상이 오랫동안 경연을 열지 않았으므로 남이성이 상소에서 언급한 것이다.

 

9월 19일 경신

청나라 사신이 돌아갔다. 상이 친히 서교(西郊)에서 전송하였다.

 

대사헌 박장원이 아뢰기를,
"신이 동료와 더불어 어제 상회례(相會禮)를 거행하기로 약속했었습니다. 그런데 동료가 중신(重臣)을 논핵하면서 기다리지 않았으니, 신이 무시당하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감히 동료를 처치할 수 있겠습니까. 체직하여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정언 경최(慶㝡)가 수가(隨駕)할 때 반열의 차서를 어겼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간원이 처치하여 박장원·경최는 출사시키기를 청하고, 신경윤과 이단석에 대해서는 ‘상회례를 거행하기로 약속하고서도 장관을 기다리지 않은 것은 그르다.’는 이유로 체직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9월 20일 신유

집의 최관(崔寬)이 아뢰기를,
"신은 집안이 화를 당한 뒤끝에 살아남아 온 몸에 허물이 쌓인 천지간의 한 죄인입니다. 소패(召牌)가 내렸는데도 나아가지 못하였으니, 책임을 회피한 죄를 모면할 길이 없습니다. 파직하여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사신은 논한다. 최관의 계모인 권씨(權氏)는 병자 호란을 당하여 청나라 사람에게 잡혀갔다가 구차하게 살아 돌아왔으니, 참으로 허물이 있다. 당시에 권씨의 시부모가 모두 살아 있었으며, 최관 역시 성인이었다. 만약 최관의 할아버지가 대의(大義)로 책하여 절연(絶緣)하고서 최관으로 하여금 어머니로 대하지 못하게 하고, 또 권씨가 죽은 뒤에는 가묘(家廟)에 들이지 말라는 뜻으로 명백하게 유언을 만들어 자손들에게 남겨주었다면, 누가 감히 그것을 그르다고 하였겠는가.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서 권씨가 살아 돌아오자 총부(冢婦)로 대우하여 제사를 주관하게 하고 최관으로 하여금 어머니로 섬기게 하였으며, 최관의 숙부인 최계웅(崔繼雄)이 형수로 섬긴 것이 20여 년이었다. 그리고 권씨가 죽었을 때에는 시아버지는 이미 죽었으나 시어머니가 살아있으면서 장부(長婦)의 복(服)을 입었고, 최관은 3년복을 입어 조금도 낮추는 예가 없었다. 그러다가 장례를 마치고 관을 묻는 날에야 계웅이 비로소 그의 어머니의 말이라고 하면서 "권씨의 신주를 우리 집안의 가묘(家廟)에 들일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자 최관이 드디어 그 말에 따라 자신의 이름을 방제(傍題)에서 삭제하였으며, 권씨의 신주를 권씨가 낳은 아들인 최선(崔宣)의 집으로 내쫓아 보냈다. 아, 모자간의 천륜과 삼년상의 제도가 얼마나 중대한 일인데, 전후의 처사가 이와 같이 어그러졌단 말인가. 설령 최관이 그 사이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어지러운 집안의 자식임을 면치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대각에 출입하다니, 외람되다.


【태백산사고본】 14책 14권 21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565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가족-가족(家族) / 역사-편사(編史)
사신은 논한다. 최관의 계모인 권씨(權氏)는 병자 호란을 당하여 청나라 사람에게 잡혀갔다가 구차하게 살아 돌아왔으니, 참으로 허물이 있다. 당시에 권씨의 시부모가 모두 살아 있었으며, 최관 역시 성인이었다. 만약 최관의 할아버지가 대의(大義)로 책하여 절연(絶緣)하고서 최관으로 하여금 어머니로 대하지 못하게 하고, 또 권씨가 죽은 뒤에는 가묘(家廟)에 들이지 말라는 뜻으로 명백하게 유언을 만들어 자손들에게 남겨주었다면, 누가 감히 그것을 그르다고 하였겠는가.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서 권씨가 살아 돌아오자 총부(冢婦)로 대우하여 제사를 주관하게 하고 최관으로 하여금 어머니로 섬기게 하였으며, 최관의 숙부인 최계웅(崔繼雄)이 형수로 섬긴 것이 20여 년이었다. 그리고 권씨가 죽었을 때에는 시아버지는 이미 죽었으나 시어머니가 살아있으면서 장부(長婦)의 복(服)을 입었고, 최관은 3년복을 입어 조금도 낮추는 예가 없었다. 그러다가 장례를 마치고 관을 묻는 날에야 계웅이 비로소 그의 어머니의 말이라고 하면서 "권씨의 신주를 우리 집안의 가묘(家廟)에 들일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자 최관이 드디어 그 말에 따라 자신의 이름을 방제(傍題)에서 삭제하였으며, 권씨의 신주를 권씨가 낳은 아들인 최선(崔宣)의 집으로 내쫓아 보냈다. 아, 모자간의 천륜과 삼년상의 제도가 얼마나 중대한 일인데, 전후의 처사가 이와 같이 어그러졌단 말인가. 설령 최관이 그 사이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어지러운 집안의 자식임을 면치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대각에 출입하다니, 외람되다.

 

이조 판서 김수항이 정고(呈告)하니, 상이 물리치도록 명하였다. 이어 정원에 하교하였다.
"수항이 직무에 충실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가벼운 벌을 내렸다. 그랬으면 부지런히 마음을 가다듬고 정성을 다해 봉직하는 것이 신하의 분의에 있어서 마땅한 바이거늘, 감히 지위가 높음을 믿고 불평을 늘어놓으면서 정고 단자를 급급히 바쳤으니, 그지없이 방자한 바 몹시 경악스럽다. 그러나 만약 중한 벌을 내린다면 그의 계책대로 해 주는 것이니, 우선은 중하게 추고하라. 정원도 어찌 감히 그 단자를 받아들인단 말인가. 해방 승지도 추고하라."

 

9월 21일 임술

홍처량(洪處亮)을 대사간으로, 권격(權格)을 장령으로, 임상원(任相元)을 지평으로 삼았다.

 

대사헌 박장원이 처치를 묵혔다는 이유로 인피하니, 면직하였다.

 

헌납 심유, 정언 경최가 아뢰기를,
"김수항이 정고한 것은 실로 정세가 민망한 데서 나온 것으로, 어찌 감히 조그만치라도 방자한 마음이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정원에서 받아들인 것도 그의 정세를 양찰한 것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갑자기 실정 밖의 전교를 내려셨는바, 말이 매우 엄준하니, 아마도 성대한 조정의 아름다운 일이 아닌 듯합니다. 추고하라는 명을 아울러 환수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직무에 충실치 않은 한 관원을 죄주었고 벌을 준 것도 박한데, 아무것도 모르면서 장황하게 떠벌리니, 참으로 놀랍고 이상하다."
하였다.

 

각 아문에서 세금을 받는 것을 한결같이 민전(民田)을 견감한 예에 따라 시행하도록 신칙하라고 명하였는데, 간원의 아룀을 따른 것이다.

 

정언 경최·헌납 심유가 엄한 전지가 내렸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응교 남이성(南二星), 수찬 홍만형(洪萬衡)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김수항에게 실제로 죄줄 만한 일이 있으면 참으로 죄명을 곧바로 들어 분명하게 죄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무엇을 꺼리어서 그렇게 하지 않고 ‘죄를 받은 자가 마땅히 그 일을 알 것이다.’느니, ‘만약 중한 벌을 내린다면 그의 계책대로 해 주는 것이다.’느니 하는 전교를 내려서, 노여움을 쌓고 분을 쌓아 장차 극죄(極罪)를 줄 것이되 우선은 참는 바가 있어서 죄주지 않는 것처럼 하신단 말입니까. 이것이 어찌 아랫사람을 정성으로 대하는 도리이겠습니까. 지금 이조의 관원이 죄를 받은 것은 실로 한두 명의 승지를 의망하면서 조금 착오가 있었던 데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큰 죄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중신(重臣)이 정세(情勢)를 이유로 인혐하고 들어갔으면 승지가 정고 단자를 받아들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무슨 노여워할 일이 있겠습니까. 속히 취소한다는 명을 내려 사람들의 의심을 풀어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차자의 내용을 보니 가소롭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다. 내가 비록 어리석기는 하나 어찌 너희들의 놀림감이 되겠는가."
하였다.

 

9월 22일 계해

표류한 중국인 95명을 탐라(耽羅)에서 압송해 와 상륙시켰다.

 

9월 23일 갑자

지평 임상원(任相元)이 아뢰기를,
"본부에서 바야흐로 김좌명의 일에 대해 논계하고 있는데, 신은 그 정사의 색낭관(色郞官)이었으므로 논계에 참여하기에는 혐의가 있습니다. 체직하여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장령 권격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동료가 정중휘(鄭重徽)를 홍문록에서 삭제하라고 청하였는데, 신의 의견도 대략 같아서 인피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발론한 동료가 이미 파직한 뒤에 추고하라는 벌을 받았는데, 신만은 요행히 벌을 면하였습니다. 태연히 그대로 있을 수 없으니, 체직하여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부응교 여성제(呂聖齊), 교리 이익상(李翊相), 수찬 김만중(金萬重) 등이 처치하여, 경최·심유·권격은 출사시키고 최관·박장원·임상원은 체직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옥당의 여러 신하들이 차자에 대한 비답이 엄준하다는 이유로 상소하여 죄를 청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보라고 명하였다.

 

영상 홍명하가 상차하여 김수항의 일에 대해 말하고, 또 전후에 내린 엄한 비답은 온당치 못하다고 진달하니, 상이 답하였다.
"경이 전말에 대해 자세히 몰라서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닌가?"

 

9월 24일 을축

좌상 허적이 병을 이유로 사면시켜 주기를 청한 것이 여러 차례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체직하도록 허락하였다.

 

9월 25일 병인

지평 변황(卞榥)이 소명(召命)에 나아가지 못하여 거둥하는 데 참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인피하니, 면직하였다.

 

헌부가 김좌명과 홍중보를 파직하고 추고하라는 일을 이때에 이르러 정계(停啓)하였다.

 

장령 권격이 아뢰기를,
"부호군 민희(閔熙)는 일찍이 그의 동생이 모여서 술마실 때 동참했었는데, 그의 동생 민점(閔點)이 대간의 비난을 받았는데도 끝내 한 마디 해명도 없이 태연히 반열에 나아갔으니, 행실을 지키는 도리를 상실함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를 수 있단 말입니까.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9월 27일 무진

허적(許積)을 판중추부사로, 이상진(李尙眞)을 대사헌으로, 오두인(吳斗寅)을 집의로, 강시경(姜時儆)을 정언으로, 이규령(李奎齡)·이상(李翔)을 지평으로 삼았다.

 

9월 29일 경오

헌부가 전에 아뢴 영서 지방의 10여 고을에 대한 일을 이때에 이르러 정계(停啓)하였다. 대개 묘당에서 처리한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9월 30일 신미

지평 이규령이 집의 오두인과 상피 관계가 있어서 인혐하자, 면직하였다.

 

부교리 박세당(朴世堂), 부수찬 오시복(吳始復)이 상차하여, 요즈음 비답을 내릴 때 사기(辭氣)가 미안한 것에 대해 진계(陳戒)하면서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중신(重臣)을 몰아치기를 종 부리듯이 하고 대각을 어리숙하게 보기를 어린아이 보듯 하고 계십니다. 또 듣기에 거북한 오만한 말을 경연의 신하에게 하시는데, 옛날의 무도한 임금도 말이 신중하지 못하기가 아마도 이보다 더하지는 않았을 듯합니다. 어찌 전하에게 이런 잘못된 거조가 있을 줄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신은 몹시 분하게 여깁니다."
하니, 답하기를,
"차자의 내용은 잘 알았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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