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14권, 현종 8년 1667년 11월

싸라리리 2025. 12. 11.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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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일 신축

대사헌 박장원 등이 아뢰기를,
"순릉(順陵)의 제기(祭器)를 도둑맞은 변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깜깜한 밤중에 도적들이 칼을 뽑아들고 크게 소리치자 수가 적어 번을 서던 군졸들이 감히 대항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그 사이의 사세는 헤아려 알지 못하겠으나, 시끄럽게 떠들어댈 즈음에 제대로 방비하지 못하고, 또 온 힘을 다해 맞서 싸우지도 못하여 제기 등의 물품을 모두 도둑들의 손에 넘겨 주었으니, 일이 뜻밖에 터졌다는 핑계로 내버려 둘 수 없습니다. 참봉은 잡아다 추문하고 입직하였던 서원(書員)과 수호군(守護軍)은 모두 잡아 가둔 다음 분명하게 조사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노인과 여자를 전가 정배(全家定配)하는 법을 정하라고 명하였다. 형조 판서 이경억이 아뢰기를,
"호적에 누락된 자들은 모두 법률에 의거해 전가 정배하나, 나이가 70인 자와 여자는 정배하는 법이 없으니, 단지 수속(收贖)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수속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나이가 비록 70이 되었더라도 자식이 있을 경우에는 그 자식도 아울러 정배하고, 자식이 있는 여자는 그 자식으로 하여금 어미를 데리고 배소(配所)로 가게 하라. 자식은 입적(入籍)되었으나 부모가 누락된 경우에는 그 자신에 대해서만 수속하고 아들은 정배하지 말라."
하였다.

 

내노비(內奴婢)가 신공(身貢)으로 바치는 쌀을 헤아려 감하도록 명하였다.

 

11월 2일 임인

상사(上使) 정치화(鄭致和)와 부사 이익한(李翊漢), 서장관 이세익(李世翊)이 북경으로 갔는데, 동지(冬至)와 정조(正朝)를 하례하기 위해서였다.

 

11월 3일 계묘

홍처량(洪處亮)을 대사간으로, 정륜(鄭錀)을 승지로 삼았다.

 

대사헌 박장원, 집의 오두인 등이 탄핵하기를,
"영천 군수(永川郡守) 유정(柳頲)은 비록 능한 관리라고는 하지만, 호족들을 억누르고 쇠잔한 백성들을 소생시키는 책임은 결단코 감당할 바가 아닙니다.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병조 판서 홍중보가 상소하여 판의금부사의 직을 사직하니, 답하기를,
"죄인이 날조해 낸 말을 가지고 어찌 이렇게까지 인혐하여 도리어 사체를 손상 시키는가.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이때 최세경(崔世慶)과 이정(李禎)의 처 윤씨(尹氏)의 옥사가 있었는데, 홍중보가 최세경을 편드는 뜻이 있었다. 이에 윤씨의 아비가 격쟁(擊錚)하여 원통함을 하소연하면서 송사를 결단함이 공평치 않다고 크게 배척하였기 때문에 홍중보가 사직한 것이다.

 

11월 7일 정미

지평 이상(李翔)이 상소하여 사직하면서 재변을 해소시킬 방도에 대해 진달하였는데, 그 대략에,
"하늘과 사람은 서로 더불어서 간격이 없이 한 이치여서 감통(感通)하면 반드시 그에 대한 반응이 있는 것이니, 어찌 까닭이 없이 재변이 일어나겠습니까. 전하께서 만약 자신의 마음 속에서 그 까닭을 찾아보고 자신에게 책임을 돌리면서 ‘마음이 밝지 못하여 물욕이 솟구치는가, 편안함에 중독되어 뭇 공적이 떨어졌는가, 사사로움을 이기지 못하여 공도가 폐해졌는가, 사치 풍조가 없어지지 않아 재력이 고갈되었는가, 궁궐 안이 엄하지 않아 아첨꾼이 극성한가, 중한 죄를 지은 자를 처벌하지 않아 법이 문란한가, 의욕(疑獄)을 용서해 주지 않아 원통함을 품은 자가 많은가?’ 하는 등의 몇 가지 조항으로 자신에게 돌이켜 보고 일에 징험해 보아, 깊이 스스로를 반성하여 거조를 마땅하게 한다면, 백성들이 기뻐하여 하늘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깨우쳐 줌이 몹시 간절하고 말뜻이 실로 절실하여 내가 거듭거듭 읽으면서 가상하게 여기었다. 사직하지 말고 속히 올라와서 나의 부족한 점을 보충하라."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이상(李翔)은 어려서부터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김집(金集)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그러나 향리에서의 처신이 좋지 못해 비방이 몹시 많았다.


【태백산사고본】 14책 14권 25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567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정론-간쟁(諫諍) / 과학-천기(天氣) / 역사-편사(編史)
사신은 논한다. 이상(李翔)은 어려서부터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김집(金集)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그러나 향리에서의 처신이 좋지 못해 비방이 몹시 많았다.

 

11월 8일 무신

권두추(權斗樞)를 정언으로 삼았다.

 

사간 여성제(呂聖齊) 등이 탄핵하기를,
"파주 목사(坡州牧使) 박유동(朴由東)은 청렴치 못하다는 비난이 많습니다. 그의 장모의 상을 치루면서 부의(賻儀) 물품이라고 하면서 마을에서 수십 석을 어거지로 거두어들였습니다. 파직하소서."
하니,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정원이 새로 제수된 간관을 서경(署經)하는 일로 양사 성상소(城上所)를 패초(牌招)하기를 청하였습니다. 간원이 성원(成員)을 갖추지 못하였다면 이런 아룀이 있는 것이 마땅하나, 본부(本府)는 현재 성원을 갖추지 못한 일이 없는데 뒤섞어서 패초하기를 청하였으니, 일이 몹시 타당치 않습니다. 해당 승지를 추고하소서."
하니, 따랐다.

 

11월 9일 기유

도승지 오정위 등이 아뢰기를,
"그저께 간관이 말을 전해 오기를 ‘전례를 보니, 비록 성원이 갖추어지지 않았더라도 새 대간을 서경할 일로 와서 아뢸 경우, 정원은 초기(草記)처럼 여겨 봉입하지 않고서 자체적으로 패초하기를 계청한 다음 말을 보내면, 이를 인하여 서경하였다. 본원에 서경하지 않은 관원이 있으니, 정원은 이 예에 의거하여 하라.’ 하였습니다. 이에 신이 해방 승지와 상의한 다음 양사를 패초하기를 청하고 ‘즉시 개좌(開坐)하여 속히 서경하라.’는 뜻으로 말을 보내었습니다. 해방 승지가 이 때문에 추감(推勘)을 당하기까지 하였으니, 신 역시 불안합니다. 인하여 《일기(日記)》를 고찰해 보니, 대관 중에 서경하지 않은 자가 있을 경우, 동료 대관이 ‘비록 성원이 되지 않았으나 서경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으로 와서 아뢰면 봉입하여 비답을 받는 것이 전례였습니다. 간원이 말한바 전례라는 것은 중간의 잘못된 규례인 듯한데, 신들이 단지 대간의 말만 믿고서 경솔하게 계달하였으니, 황공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서경하지 않은 대관이 숙배(肅拜)한 뒤에는 비록 성원이 되었더라도 즉시 양사가 개좌하여 서경하기를 계청하고, 이어 새 대간도 함께 모여 논사(論事)하기를 청하는 것이 바로 대각의 예전 전례입니다. 지금 이 대간은 숙배한 지 한 달이 지났는데 비로소 서경하기를 청하였으며, 이미 서경이 나갔는데도 또 같이 모이지 않았습니다. 이는 모두가 본원과 대각이 모두 옛 규례를 잘 모른 데서 말미암은 것이니, 옛 규례를 다시 밝혀서 대각의 체모를 보존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헌납 권격, 사간 여성제가 정원으로부터 지적을 당하였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11월 10일 경술

정언 오시복(吳始復)이 인피하기를,
"정원의 계사에 ‘이미 서경이 나갔는데도 또 같이 모이지 않았다.’고 하였으니, 신은 두려움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체차하여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11월 11일 신해

집의 오두인, 장령 이숙달(李叔達)·윤형성(尹衡聖), 지평 정재희(鄭載禧)가 아뢰기를,
"지난번에 장관이 ‘간원에서 서경하는 일을 정원이 지레 계청하였으니 옛 규례에 어긋남이 있는바, 간원을 아울러 논계하고자 한다.’고 하였는데, 신들이 ‘이 일은 반드시 곡절이 있을 것이니 아울러 논계할 필요가 없다.’고 하자, 장관 역시 그렇다고 하고는 그 의논을 정지하였습니다. 지금 장관이 ‘발언하고서 곧바로 정지하여 혐의가 있으므로 간원을 처치하기가 곤란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날 장관이 발언했다가 곧바로 정지한 것은 실로 신들의 말 때문이었으니, 신들 역시 감히 태연스럽게 처치할 수 없습니다. 체차하여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대사헌 박장원이 이미 발언했다가 곧바로 정지하여 끝까지 자신의 견해를 지키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집상전(集祥殿)을 짓도록 명하였다. 이때 왕대비전(王大妃殿)에 재변이 있어서 다른 곳으로 옮겨가 있었는데,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자전께서 정전(正殿)에 임어하시지 못한 지 지금 이미 반 년이나 되었으니, 사체에 있어서 온당치 않을 뿐만 아니라 내 마음이 또한 어떻겠는가. 별도로 전각 하나를 세워 편안하게 계실 곳으로 삼았으면 한다. 그러나 이러한 때 백성들에게 부역을 시키는 것도 몹시 온당치 않으니, 우선 옛 궁궐에서 한 칸을 헐어다가 전(殿) 동쪽의 옛 터에다 건립하고자 한다. 호조와 병조의 판서로 하여금 관장하게 하여 새해가 오기 전에 완성시키게 하라."

 

11월 12일 임자

응교 남이성, 교리 이익상, 부교리 윤심(尹深)·박세당(朴世堂) 등이 차자를 올려 처치하기를,
"서경은 곧바로 청하는 것이 옛 규례이니, 전갈을 보내어 대신 여쭌 것은 잘못된 규례를 답습한 것임을 면치 못합니다. 【권격과 여성제를 가리킨 것이다.】 질병이 드는 것은 비록 피하기 어려운 바이나 모두 모이는 데 나아가지 않은 것은 실로 고풍(古風)을 떨어뜨린 것입니다. 【오시복을 가리킨 것이다.】 말을 보낼 즈음에 나눈 얘기가 있으니 같이 체모를 잃은 것으로, 형세상 태연히 있기 어렵습니다. 【오두인·이숙달·정재희·윤형성을 가리킨 것이다.】 단지 정원만을 논하여 이미 한 쪽을 빠뜨렸으며, 폐단이 일어날까 염려하여 곧바로 정지한 것도 타당치 않습니다. 【박장원을 가리킨 것이다.】 모두 체차하소서."
하고, 또 상차하기를,
"정원이 아뢰면서 쓸데없는 말을 끼워넣어 대각을 지휘하는 것처럼 하였습니다. 조정에서 대각을 대우함에 있어서는 사체가 자별한 것으로, 실로 뒤 폐단에 관계가 됩니다. 그날 계사를 올린 승지를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1월 13일 계축

상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이날 최세경(崔世慶)과 윤단일(尹但一)의 옥사를 심리하였는데, 영의정 홍명하와 이조 참판 조복양 등은 최세경을 신구(伸救)하여 옥사를 느슨하게 하고, 지사 김좌명은 최세경에게 매우 각박하게 법을 적용하여 의견이 일치되지 않아 탑전에서 서로 다투었다. 이때 전 교관(敎官) 이상익(李商翼)이 최세경의 친구로서 사간인(事干人)으로 갇혔는데, 사사로이 옥문 열쇠를 만들어 외간인을 출입시키다가 일이 발각되었다. 옥졸의 공사(供辭)로 인하여 상익을 엄하게 형신하라는 명을 내렸는데, 홍명하가 아뢰기를,
"이상익의 일은 별로 실정을 숨긴 것이 없는데, 옥졸의 공초로 인하여 엄히 형신하기까지 하는 것은 지나친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열쇠를 만든 것은 상익이 한 짓이니, 그 죄가 가볍지 않다."
하자, 김좌명이 아뢰기를,
"성상께서는 관대함과 어짐은 남음이 있으나 강건한 덕이 부족하십니다. 여러 신하들은 성상의 부족한 점을 보충하여야지 남는 면을 도와서는 안 됩니다."
하니, 홍명하가 아뢰기를,
"강건한 덕이 비록 아름다운 일이나, 형벌을 쓰는 일 등에 권장해서는 안 됩니다."
하고, 조복양이 아뢰기를,
"관대함과 어짐이 참으로 임금의 아름다운 덕입니다. 어찌 강건함과 과단성을 권장해서야 되겠습니까. 김좌명의 말은 몹시 그릅니다."
하자, 김좌명이 아뢰기를,
"영상은 이상익이 형신을 받다가 죽게 될까 염려하고 있으나, 이상익이 비록 죽더라도 나라에는 기강이 있게 될 것입니다. 임금은 하늘의 도를 본받아 행하여야 합니다. 시절에는 춥고 더운 때가 있는 법인데 현재 시기가 절조를 잃은 것은 여기에서 말미암은 것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삼대(三代) 이후로 어질기로는 송 인종(宋仁宗)만한 임금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나라에 기강이 서지 않아 끝내 떨치지 못함을 면치 못하고 말았습니다. 한 광무제(漢光武帝)는 현명한 임금이었으며 오한(吳漢)은 명신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신중히 하여 사면하지 말라고 말하였습니다. 대개 사면은 소인들의 다행인 것입니다."
하니, 홍명하가 아뢰기를,
"임금의 덕은 인(仁)·명(明)·무(武) 세 자로 어느 하나도 폐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형정(刑政)에 무(武)를 쓰는 것은 도리어 그른 일이 됩니다. 옛날 세종조 때 어떤 선비가 죄를 지어 형벌을 받게 되었는데, 그의 종이 옥졸에게 뇌물을 주면서 여주인으로 하여금 밤중에 들어가 서로 영결(永訣)하게 해 주기를 청하자 옥졸이 허락하였습니다. 이에 한밤중에 종이 여자 옷을 입고 얼굴을 가리고 들어가 그 주인으로 하여금 몰래 옷을 바꿔 입고 옥에서 나가게 하고 자신이 옥에 갇혔습니다. 그에게 장차 형벌을 가하려고 끌어내 보니, 그는 종이었습니다. 옥관이 이 사실을 아뢰자 세종께서 의롭게 여겨 이르기를 ‘만약 이 종을 죽이면 나라를 다스릴 수 없을 것이다.’ 하고, 즉시 모두 석방하도록 명하였습니다. 그 후에 선비가 과거에 급제하여 청현직에 벼슬하여 지금까지 미담이 되고 있습니다. 어짐과 관대함이 어찌 아름다운 덕이 아니겠습니까."
하자, 부교리 윤심(尹深)이 아뢰기를,
"강건하게 해야 될 때 강건하게 하고 부드럽게 해야 할 때 부드럽게 하여야지, 편중되게 해서는 안됩니다."
하니, 김좌명이 아뢰기를,
"이상익의 일에 대해서, 처음에는 형추(刑推)하라고 하고, 그 다음에는 추고하지 말라고 하고, 끝내는 엄하게 형신하라고 하였는데, 지금은 또 형신하지 말라고 청하고 있습니다. 조정의 거조가 어찌 이와 같이 일정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잠자코 아무 말이 없었다.

 

11월 14일 갑인

음란한 행동을 한 죄인 최세경과 여자 윤단일(尹但一)을 원도(遠道)에 정배하라고 명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고 현감 이유청(李惟淸)이 자식이 없어서 그의 조카 정(楨)을 후사로 삼았는데, 이정은 성품이 흐릿하였다. 이정의 아내는 이름이 윤단일(尹但一)로 바로 진사 윤국경(尹國卿)의 딸이었다. 유청의 외손인 최세경이란 자가 외삼촌인 이정과 유청의 집에서 같이 살았는데, 몰래 이정의 아내와 간통하였다는 설이 경외에 전파되었다. 이에 유청이 이정과 며느리만을 쫓아내고 묻어둔 지 20여 년이나 되었는데, 대간의 논계로 인하여 두 사람을 잡아다 국문하자 단일은 말하기를 ‘모년 모월 모일에 최세경이 밤을 틈타 내 방에 들어와 겁간하려고 하였는데, 항거하여 면하였다.’고 하고, 최세경은 말하기를, ‘단일이 외간 남자와 통하였는데 일이 발각되자 나를 얽어넣은 것이다.’ 하여 옥정(獄情)이 몹시 의심스러워 오랫동안 결단하지 못하였다. 이에 대신들에게 의논하니, 대신들도 분명하게 밝히지 못하였으며, 영부사 이경석은 ‘죄가 의심스러우니 가벼운 율을 적용하소서.’라고 헌의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상이 판결을 내리기를 ‘두 사람이 공초한 말이 모두 의심스러운 정적이 없지 않은데, 형신하지 않으면 실정을 알아낼 수가 없고, 형신하다가 지레 죽으면 반드시 원통하게 죽는 사람이 있게 될 것이다. 아, 세교(世敎)가 한심스러우며, 이 옥사는 밝히기가 어렵다. 영부사가 말한 ‘죄가 의심스러우니 가벼운 율을 적용시키라.’는 말이 어찌 좋은 말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풍교(風敎)에 관계되어 완전히 석방할 수도 없고, 몸가짐이 바르지 못한 것도 죄를 면키 어렵다.’하고, 모두 정배하도록 명한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14책 14권 27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568면
【분류】사법-행형(行刑) / 윤리-강상(綱常) / 역사-편사(編史)
사신은 논한다. 고 현감 이유청(李惟淸)이 자식이 없어서 그의 조카 정(楨)을 후사로 삼았는데, 이정은 성품이 흐릿하였다. 이정의 아내는 이름이 윤단일(尹但一)로 바로 진사 윤국경(尹國卿)의 딸이었다. 유청의 외손인 최세경이란 자가 외삼촌인 이정과 유청의 집에서 같이 살았는데, 몰래 이정의 아내와 간통하였다는 설이 경외에 전파되었다. 이에 유청이 이정과 며느리만을 쫓아내고 묻어둔 지 20여 년이나 되었는데, 대간의 논계로 인하여 두 사람을 잡아다 국문하자 단일은 말하기를 ‘모년 모월 모일에 최세경이 밤을 틈타 내 방에 들어와 겁간하려고 하였는데, 항거하여 면하였다.’고 하고, 최세경은 말하기를, ‘단일이 외간 남자와 통하였는데 일이 발각되자 나를 얽어넣은 것이다.’ 하여 옥정(獄情)이 몹시 의심스러워 오랫동안 결단하지 못하였다. 이에 대신들에게 의논하니, 대신들도 분명하게 밝히지 못하였으며, 영부사 이경석은 ‘죄가 의심스러우니 가벼운 율을 적용하소서.’라고 헌의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상이 판결을 내리기를 ‘두 사람이 공초한 말이 모두 의심스러운 정적이 없지 않은데, 형신하지 않으면 실정을 알아낼 수가 없고, 형신하다가 지레 죽으면 반드시 원통하게 죽는 사람이 있게 될 것이다. 아, 세교(世敎)가 한심스러우며, 이 옥사는 밝히기가 어렵다. 영부사가 말한 ‘죄가 의심스러우니 가벼운 율을 적용시키라.’는 말이 어찌 좋은 말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풍교(風敎)에 관계되어 완전히 석방할 수도 없고, 몸가짐이 바르지 못한 것도 죄를 면키 어렵다.’하고, 모두 정배하도록 명한 것이다.

 

11월 16일 병진

정익(鄭榏)·심재(沈梓)를 승지로, 송준길(宋浚吉)을 대사헌으로, 윤집(尹鏶)을 대사간으로, 이유상(李有相)을 집의로, 최관(崔寬)을 사간으로, 이세장(李世長)을 헌납으로, 심유(沈攸)·최문식(崔文湜)을 장령으로, 윤진(尹搢)을 지평으로, 강여호(姜汝㦿)를 정언으로 삼았다.

 

도승지 오정위(吳挺緯)가 간관과 유신(儒臣)의 탄핵을 받았다는 이유로 상소하여 면직시켜 주기를 빌었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11월 19일 기미

집의 이유상, 장령 심유 등이 아뢰기를,
"현재 천재가 거듭 나타나고 기근이 한꺼번에 들이닥쳐 백성들이 잇따라 유리함이 팔도가 모두 그러하니 군신 상하가 참으로 여기에 온 마음을 쏟아야만 합니다. 견감해 주고 진구해 주는 모든 정사에 대해 급급히 강구하여 모든 방도를 다하더라도 오히려 하늘의 노여움을 돌이키고 민심을 위무하기에 부족할까 염려됩니다. 그런데 어느 겨를에 또 때 아닌 역사를 일으킬 수 있겠습니까. 한편으로는 진구하고 한편으로는 영조(營造)하는 것은 더욱 더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보살피는 도리에 어긋납니다. 별전(別殿)을 옮겨 짓는 역사를 정지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오늘날 이 역사는 자성(慈聖)을 위한 것으로 참으로 만부득이해서 하는 것이다. 내가 어찌 좋아서 하겠는가. 지금 나의 이 말은 참으로 조금도 숨김이 없는 것이다. 다시는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옥당이 상차하여
"흉년에 토목 역사를 일으켜서는 안 되니 별전을 지으라는 명을 정지하소서."
라고 하니, 상이 헌부에 답한 것과 같은 내용으로 비답하였다.

 

11월 23일 계해

헌부가 별전을 짓는 역사를 정지하기를 청하는 아룀을 정지하였다.

 

집의 이유상, 장령 심유가 아뢰기를,
"살인한 죄인과 아비를 시해한 죄인을 청주(淸州)로 옮겨 수감하여 형신을 한 뒤 죄인이 거짓으로 옥중에서 죽자 곧바로 시친(屍親)에게 내어주었는데, 여러 달 동안이나 도망하여 살다가 비로소 발각되었습니다. 살인한 죄인과 강상죄(綱常罪)를 지은 죄인이 물고된 뒤에 검시(檢屍)하는 것이 얼마만큼 중대한 일인데, 당초에 자세하게 살펴보지 않아 거짓으로 죽는 변고를 일으키게 한단 말입니까. 지금 비록 잡기는 하였으나 내버려 둔 채 논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목사 이섬(李暹)을 파직하고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잡아다가 국문하여 정죄하라."
하였다.

 

진선(進善) 정양(鄭瀁)이 상소하여 체직시켜 주기를 비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사신은 논한다. 정양은 고 재상 정철(鄭澈)의 손자이다. 음직(蔭職)으로 벼슬길에 나와 별다른 학술(學術)은 없었으나 꼿꼿하고 깨끗하다는 명성이 있었으므로 탁용되었다. 그러나 사람됨이 괴팍하여 기롱하는 사람도 있었다.


【태백산사고본】 14책 14권 27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568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역사-편사(編史) / 인물(人物)
사신은 논한다. 정양은 고 재상 정철(鄭澈)의 손자이다. 음직(蔭職)으로 벼슬길에 나와 별다른 학술(學術)은 없었으나 꼿꼿하고 깨끗하다는 명성이 있었으므로 탁용되었다. 그러나 사람됨이 괴팍하여 기롱하는 사람도 있었다.

 

11월 24일 갑자

집의 이유상, 장령 심유 등이 ‘성상의 비답에 이섬(李暹)을 잡아다 추문하라고 명하였으니, 우리들이 율을 적용한 것이 마땅함을 잃었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는데, 처치하여 출사시켰다.

 

이익(李翊)·홍처후(洪處厚)를 승지로, 윤경교(尹敬敎)를 봉교로, 이단하(李端夏)를 헌납으로, 오시복(吳始復)을 수찬으로 삼았다.

 

11월 28일 무진

윤비경(尹飛卿)·남구만(南九萬)을 승지로, 민유중(閔維重)을 이조 참의로, 오두인(吳斗寅)을 사간으로, 이규령(李奎齡)을 지평으로, 정재숭(鄭載嵩)을 교리로, 이세장(李世長)을 이조 정랑으로, 박장원(朴長遠)을 좌참찬으로, 여성제(呂聖齊)를 부응교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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