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14권, 현종 9년 1668년 1월

싸라리리 2025. 12. 11.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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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 경자

헌납 윤형성이 아뢰기를,
"해마다 온천에 행행하면서 은상(恩賞)이 외람되어 전에 대간의 아룀으로 인하여 제수한 관직과 자급을 모두 이미 환수하였습니다. 이번에 여러 신하들에게 준 상격도 모두 아울러 환수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상이 하교하였다.
"초겨울에 판부사 허적이 병에 걸렸는데 얼마 뒤에 조금 차도가 있어서 내가 기뻤었다. 이제 추위가 이미 다 가고 봄기운이 점차 돌아오는데 평온한가의 여부를 듣지 못하여 내가 염려스럽다. 오래동안 시골에 있어서 약을 쓰기가 참으로 어려울 것이니 어의 권유(權愉)를 다시 보내어 병을 살펴보게 하라."

 

1월 2일 신축

두 대비전(大妃殿)에 올리는 정조(正朝)의 진하(陳賀)를 대신의 상 때문에 물려서 거행하였다.

 

복상(卜相)하도록 명하여 정태화를 영의정으로 삼았다. 박장원(朴長遠)을 대사헌으로, 이태연(李泰淵)을 대사간으로, 민정중(閔鼎重)을 부제학으로, 정재숭(鄭載嵩)을 교리로, 변황(卞榥)을 지평으로 삼았다.

 

1월 3일 임인

영의정 정태화가 상소하기를,
"신은 죄명이 아주 무겁고 공의가 지엄하여 마음이 항상 떨렸었는데, 뜻하지 않게 다시 영의정에 제수하는 명을 받았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반드시 놀라워할 것이니, 속히 체직하여 주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아, 해마다 흉년이 들어 국사가 몹시 어려운데 대신의 상을 당한 데다가 객사까지 들어오게 되었으니, 걱정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경의 재주와 덕은 오래 전부터 시망(時望)에 맞았으니, 어찌 지난날의 일로 다시 인혐해서야 되겠는가.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고 속히 나와서 공무를 집행하여 조야(朝野)의 바람에 부응하라."
하였다.

 

1월 5일 갑진

심재(沈梓)·이익(李翊)을 승지로 삼았다.

 

영의정 정태화가 세 번 상소하여 사면시켜 주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온화한 말로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1월 6일 을사

정언 조위봉(趙威鳳)이 ‘수령으로 있으면서 멋대로 임소(任所)를 떠났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헌납 윤형성(尹衡聖)이 ‘동료들이 상의하지도 않고 갑자기 홍우익(洪宇翼)에 대해 아뢰는 것을 정계하였다.’는 이유로 인피하였으며, 사간 심유(沈攸)가 ‘이미 경솔히 한 잘못이 있으며 또 동료의 배척을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는데, 모두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1월 7일 병오

정언 이휴징(李休徵)이 처치하여, 조위봉에 대해서는 ‘비록 정리(情理)로 인해서이나 이미 스스로 마음대로 임소를 떠났다.’고 하고, 윤형성에 대해서는 ‘옛 규례를 무너뜨렸으니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하고, 심유에 대해서는 ‘지레 정계하였으니 경솔함을 면치 못한 것이다.’고 하면서, 윤형성은 출사시키고 조위봉과 심유는 체차시키기를 청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1월 8일 정미

정석(鄭晳)을 사간으로, 임상원(任相元)을 정언으로 삼았다.

 

이조 판서 김수항(金壽恒)이 상소하여 사면시켜 주기를 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김수항이 오랫동안 이조 판서를 맡고 있으면서 상소하여 간절하게 사직한 것이 여러 차례였는데, 이때 와서 따른 것이다.

 

1월 9일 무신

행 대사헌 박장원(朴長遠)이 ‘본인이 행행하였을 때의 상격(賞格) 중에 들어 있어서 본부의 논계에 참여하기가 곤란하다.’는 이유로 인피하니, 체차하였다.

 

1월 10일 기유

이정영(李正英)을 도승지로, 김수항(金壽恒)을 대사헌으로, 박장원(朴長遠)을 이조 판서로, 윤비경(尹飛卿)을 승지로 삼았다.

 

영의정 정태화가 세 번 상소를 올리고 출사한 다음에 빈청에 나아와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어제 오시(午時)에 무지개가 태양을 꿰었으며, 또 신이 그릇 영의정에 제수된 후에 있었다고 합니다. 이에 신은 더욱 두렵고 놀라워 대궐에 나아와 스스로를 탄핵하는 것이니, 속히 신의 직을 체차하소서. 또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다시금 더욱 더 마음을 가다듬고 항상 하늘을 공경하는 마음을 지니시어 재변을 해소시키는 근본으로 삼으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아, 국사가 날로 잘못되어 가고 재변이 한꺼번에 나타나니, 걱정을 잠시도 늦출 수가 없으며 답답함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 다만 재변이 일어나는 것은 실로 내가 덕이 부족한 소치이니 경은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고 또한 대죄하지도 말면서 더욱 더 덕을 힘써서 나의 부족한 점을 보충하라. 나 역시 더욱 더 하늘을 공경하는 마음을 가져 하늘의 노여움에 답하겠다."
하였다.

 

1월 11일 경술

찬성 송시열이 상소하여 치사(致仕)시켜 주기를 청하였는데, 그 대략에,
"송나라의 태상 소경(太常少卿) 공승공(孔承恭)은 61세에 치사하기를 청하였는데 태종이 허락하면서 ‘이는 세도(世道)를 격려시키기에 충분하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신은 공승공보다 나이가 한 살 더 많습니다. 그리고 또 공승공은 조정에 있으면서 애를 쓰고 있었으니 그가 떠나는 것이 애석하였는데도 태종은 오히려 그의 청을 따라주었습니다. 신의 경우에는 재야에 있으면서 하는 일도 없이 직명만 헛되이 띠고 있으니 마땅히 삭제하여야 됨은 또한 어찌 공승공에 비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온화한 말로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으며, 인하여
"봄기운이 따뜻할 때 올라오라."
고 유시하였다.

 

승지 이준구(李俊耉)·윤비경(尹飛卿)·심재(沈梓)·정륜(鄭錀)·오두인(吳斗寅)이 무지개의 변을 인하여 아뢰기를,
"성상께서 임어하신 이래로 신료들을 드물게 인견한 것이 대개 옥후가 편치 않은 까닭이기는 하나, 아랫사람들이 답답하게 여기는 것도 이미 깊습니다. 시험삼아 오늘날의 일로 말해보겠습니다. 지난 겨울에 계복(啓覆)한 뒤로 지금 이미 한 달이 지났는데 한 번도 비국의 신하와 옥당의 관원을 불러보지 않아 쓸데없는 관원이 되었습니다. 더구나 여러 업무가 적체된 뒤에 상신(相臣)이 마침 출사하였는데도 오히려 물어보고 토의하는 거조가 없으니, 이것이 어찌 신민들이 성상께 바라는 바이겠습니까."
하니, 상이 가납하였다.

 

1월 12일 신해

오정위(吳挺緯)를 도승지로, 이숙달(李叔達)을 장령으로, 김좌명(金佐明)을 판의금으로 삼고, 특별히 이여발(李汝發)을 병조 참판으로 삼았다.

 

헌납 윤형성(尹衡聖), 사간 정석(鄭晳)이 인피하기를,
"지금 이 상가(賞加)를 도로 거두기를 청하는 것은 실로 공적인 논의에서 나온 것이지, 애당초 한두 사람을 지적해서 바란 것이 아니었으므로, 한 집안 사람이 논상(論賞)하는 가운데 들어 있더라도 혐의롭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지금 헌부의 관원이 이미 한 집안 사람이 그 가운데 들어있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당하였으니, 신이 어찌 감히 스스로 옳다고 여겨 태연히 논핵할 수 있겠습니까. 체차하여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장령 최문식, 지평 변황이 무지개의 변을 인하여 상차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들이 전하를 보건대, 재변을 만난 처음에는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주 지극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루 이틀 지나면서 이 뜻을 계속 가지지 못하여 며칠이 지나지 않아 태만한 마음이 생겨났으니, 어찌 실제적인 것으로 하늘에 응답하는 뜻에 부족함이 없겠습니까. 전(傳)에 이르기를 ‘지성껏 하여 쉬임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진실로 자신을 낮추고 덕을 닦아 오래도록 쉬임이 없게 하고, 성심을 다해 하늘을 공경하여 조금도 간단이 없게 한다면, 하늘의 노여움을 돌이킬 수 있고 재변을 늦출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또,
"요즈음 오랫동안 경연을 폐한 것이 비록 날씨가 몹시 춥고 옥체가 편치 않아서이긴 하나, 생각건대 번잡한 중에 조금 성취했던 학문마저 잃어버리게 될 걱정이 없지 않고, 한가로운 즈음에 하루 세 번 신하들을 만나보는 뜻이 태만해질까 염려됩니다. 지난번에 간관이 아뢰어 청하자 자못 들어주시는 뜻을 보이셨는데, 봄이 이미 다되었는데 아직도 경연을 열지 않고 계시니, 신들은 전하께서 한갓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인다는 이름만 취하고 채용하는 실제는 없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하였는데, 상이 가납하였다.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충청 감사에게 명하여 송시열·송준길·윤문거(尹文擧)·윤선거(尹宣擧)·이유태(李惟泰) 등에게 음식물을 보내주게 하였다. 지사 김좌명이 아뢰기를,
"듣건대 오부(五部)의 기민들이 날마다 죽을 끓여주기를 바라고 있으며, 경기 지방의 백성들도 역시 그렇다고 합니다. 그러니 2월 1일부터 죽을 끓여주어 진구하는 것이 마땅하며, 경기 감사에게도 분부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형조 판서 이경억(李慶億)이 아뢰기를,
"두 차례 신원된 것은 청리(聽理)하지 말라는 내용으로 뒷날 등대(登對)할 때에 품의하여 처리하라는 전교가 있었습니다."
하고, 이어 장례원의 문서를 읽었다. 읽기를 마치고서 아뢰기를,
"장례원이 격쟁(擊錚)한 자로 인하여 회계하면서 ‘양쪽이 부당하면 속공한다.’고 하자, 그 때의 당상과 낭청을 파직한 다음 추고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하고, 또 형조의 문서를 펴서 읽었다. 읽기를 마치고 아뢰기를,
"형조가 또 격쟁한 자로 인하여 회계하면서 속공하기를 청하였는데, 아뢴 대로 하라고 판하하셨습니다. 이 일에 대해서는 하나를 지목하여 품의해 정하는 일이 있어야겠습니다."
하니, 김좌명이 아뢰기를,
"신의 생각으로는, 이후로 이와 같은 일에 대해서는 송관(訟官)이 복계(覆啓)하는 문서에 자신의 의견으로 곡직을 상세히 진술하되 ‘정식을 감히 바꾸지 못한다.’는 것으로 맺음말을 쓰고서 상의 결정을 기다리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자, 이경억이 아뢰기를,
"혹 상의 하교로 인하여 청리(聽理)하는 바가 있으면 새 법을 변동시킴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속공에 이르러서는 비록 법전에 실려 있기는 하나, 별판부(別判付)로써 속공하는 것은 사체에 있어서 온당치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의 생각으로는 속공 역시 청리에 관계되니, 지금 이후로는 속공하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정식을 삼아 시행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1월 13일 임자

정언 이휴징(李休徵)이 아뢰기를,
"대체를 보존하려고 힘썼으니 풍채가 가상하고, 공적인 논의를 함에 있어서 어찌 작은 혐의를 돌아볼 수 있겠습니까. 윤형성과 정석을 출사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월 14일 계축

헌납 윤형성과 사간 정석이 ‘본원에서 처치한 것이 헌부에서 결정한 것과 같지 않으며, 또 풍채가 가상하다느니 하는 등의 말은 기롱하는 뜻이 현저하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정언 이휴징이 처치가 타당함을 잃었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대사헌 김수항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지금 무지개의 이변이 정월에 나타났으니 어떤 화의 기미가 하늘에 숨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지난날의 징험이 조금도 틀리지 않고 말하기 어려운 걱정이 어리석은 자나 지혜로운 자나 모두 똑같으니, 어찌 크게 두려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신이 크게 두려워하는 것은 하늘의 재변이 혹심한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전하께서 실제적인 것으로 하늘에 응답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가령 전하께서 홀로 계시는 은미한 곳에서도 마음을 달리하지 않고 정령을 내리는 사이에도 실제적인 것을 다하도록 힘써서, 재변이 지나간 다음에도 한결같이 그런 마음을 해이하지 않게 한다면, 어찌 재변이 다시 나타나겠습니까."
하고, 또,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자주 재상과 시종하는 신하들을 인견하여 치도를 강구하고, 초야의 큰 덕을 지닌 신하들을 불러보아 학문을 닦으소서. 그러면 장차 끊어지려는 국가의 맥을 이을 수가 있고, 몹시 노한 하늘의 마음을 기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가납하였다.

 

이조 판서 박장원이 전에 전형을 맡았을 때 논박을 받았다는 이유로 상소하여 면직시켜 주기를 청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1월 15일 갑인

지평 변황, 장령 최문식이 인피하기를,
"지난번에 장령 경최(慶㝡)를 처치할 때 신의 뜻으로는 ‘경최의 조카가 상격(賞格)에 들어 있으니 환수하기를 청하는 논계에 동참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을 듯하다.’고 여겼으므로 상의하여 체차하기를 청하였습니다. 지금 간원의 많은 관원이 인피한 내용을 보니, 신의 처치가 마땅함을 잃은 잘못이 드러났습니다. 체차하여 주소서."
하고, 물러나 물론을 기다렸다.

 

집의 여성제(呂聖齊)가 처치하여 아뢰기를,
"조그마한 혐의를 돌아보지 않은 것은 참으로 체모를 얻은 것이고, 범연한 조어(措語)에 무슨 불안해 할 것이 있겠습니까. 처치하여 출사시키기를 청한 것은 참으로 소견이 있는 것이고 애당초 기롱하는 게 아니었으니 본인에게 있어서는 손실이 없는 것입니다. 당초에 체차하기를 청한 것은 경솔함을 면치 못한 것입니다, 윤형성·정석·이휴징은 출사시키고, 변황·최문식은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월 16일 을묘

사간 정석이 아뢰기를,
"이여발(李汝發)은 재주와 명망이 부족하고 또 경력도 없는데, 병조 참판에 특별히 제수하는 명이 사람들의 기대 밖에 나왔습니다. 무신(武臣)으로서 이 직에 제수된 자가 거의 없었으니, 전혀 명기(名器)를 아끼는 것이 아닙니다. 개정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옥당이 무지개의 이변으로 인하여 상차하면서 ‘먼저 대체(大體)를 세우고 강건한 덕으로 보충하라.’는 등의 말로 반복하여 진달하여 경계시켰는데, 상이 가납하였다.

 

1월 17일 병진

경최(慶㝡)를 정언으로, 이명익(李溟翼)을 지평으로, 심유(沈攸)를 장령으로 삼았다.

 

태학에 감을 하사하였다. 대제학 김수항을 불러 시제를 내어 시사(試士)하였다. 수석을 차지한 진사 서문상(徐文尙)을 전시(殿試)에 직부하게 하였다.

 

1월 18일 정사

대사헌 김수항이 아뢰기를,
"본부가 현재 온천에 거둥한 일에 관계되어 내린 상전(賞典)을 환수하기를 청하고 있는데, 신의 형 김수흥 역시 상을 받는 속에 있어서 신은 이 논계에 도리상 참여하기가 곤란합니다. 그런데 요즈음 대각에서 이상한 의논을 새로 내어, 명분은 대체를 보전한다고 하나 실제로는 법을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어찌 한때의 처치를 바꿀 수 없는 법조문처럼 여기며 이름을 지목하지 않았다고 핑계대고서 태연히 논핵할 수 있겠습니까. 체차하여 주소서."
하고, 물러나 물론을 기다렸다.

 

사간 정석, 집의 여성제, 정언 이휴징, 헌납 윤형성이 모두 이상한 의논을 새로 만들어 내었다고 배척을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물러나 물론을 기다렸다.

 

1월 19일 무오

부교리 윤심(尹深), 수찬 오시복(吳始復)이 차자를 올려 ‘혐의가 있어서 아뢰는 데 참여하기가 곤란하니 그대로 직에 있을 수 없다.’는 것으로 김수항을 논하여 체차시키기를 청하고, ‘처치하면서 출사시키기를 청한 것은 규례에 어긋남을 면치 못한다.’는 것으로 정석·여성제·이휴징·윤형성을 논하여 체차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거제(巨濟) 지역에서 동(銅)이 산출되었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동이 나지 않다가 지금 비로소 산출된 것이다.

 

1월 20일 기미

이상진(李尙眞)을 대사헌으로, 심유(沈攸)를 집의로, 권격(權格)을 헌납으로, 변황(卞榥)을 정언으로, 여성제(呂聖齊)를 사간으로, 유거(柳椐)를 장령으로, 정석(鄭晳)을 수찬으로 삼았다.

 

경상도 청송(靑松)에 큰바람이 불고 불이 나 관청과 민가 5백여 호가 불탔으며, 원양도(原襄道) 강릉(江陵)에 지진이 있었는데, 두 도의 감사가 아뢰었다.

 

1월 21일 경신

정언 경최, 장령 이숙달이 모두 상가(賞加)를 환수하라는 논계에 혐의가 있어서 참여하기가 곤란하다는 이유로 인피하니, 체차하였다.

 

1월 22일 신유

김수항(金壽恒)을 예조 판서로, 최문식(崔文湜)을 장령으로, 오시복(吳始復)을 정언으로 삼았다.

 

1월 23일 임술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요즈음 상격을 환수하라는 논계로 인해 대간들이 인피하여 몹시 소란스러우니, 정해진 규식이 있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부자와 형제, 삼촌 숙질 외에는 피혐하지 말라."
하였다. 예조 판서 김수항이 아뢰기를,
"왕세자가 종묘에 알현하는 예를 지난 봄에 여리(閭里)가 깨끗하지 못하여 거행하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듣건대, 외간에 전염병이 아직도 돌고 있다고 하니, 장차 어떻게 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직까지 알현하지 못한 것은 예에 있어서 온당치 않으니, 2월 그믐 사이에 다시 품의하여 거행하라."
하였다. 김수항이 아뢰기를,
"세자가 8세에 입학하는 것은 옛 예이며 조종조에서도 이미 행한 예입니다. 지금 왕세자가 입학하기에 적당한 나이이며, 아랫사람들의 마음도 모두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반드시 미리 결정한 다음에야 입학 절목을 바야흐로 의논해 정할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옛 예는 그러하다만 나의 생각으로는 내년 봄에 행하였으면 한다."
하자, 조복양(趙復陽)이 아뢰기를,
"8세에 입학하는 것은 삼대(三代) 시대의 성대한 예인데, 어찌 폐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년 봄에 행하더라도 무슨 방해로울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조복양이 아뢰기를,
"함경도 내의 노인들에게 이미 노인을 우대하는 예를 시행하였으니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누군들 감동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재신(宰臣)과 시종하는 여러 신하들 중에도 연로한 부모가 있는 자가 많으니, 효(孝)로 다스리고 계시면서는 이들 역시 뽑아내어 음식물을 하사하여 특별히 우대하는 뜻을 보이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몇 살로 한계를 정하는가?"
하자, 정태화가 아뢰기를,
"평소에는 80세로 한계를 정하지만 지금 이 거조는 특별한 은혜에서 나온 것인데, 아래에서 어떻게 감히 한계를 정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당상관 이상과 당하관으로 시종하는 사람의 부모 중 나이가 70세 이상인 자를 서계하라."
하였다.

 

1월 25일 갑자

대사간 이태연, 헌납 권격, 정언 오시복·변황이 아뢰기를,
"평릉 찰방(平陵察訪) 유수창(柳壽昌)은 하직 인사를 한 후 별도로 기거 단자(起居單子)를 차비문(差備門)에 바쳤으니, 그의 무식하고 외람된 것은 진실로 말할 것도 못 되나 사사로이 기거 단자를 바치는 것은 뒤 폐단에 관계가 됩니다. 파직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북사(北使) 두 사람이 서울에 들어왔다. 상이 모화관에 나아가 맞이하였으며, 인정전(仁政殿)에서 칙서를 반포하였다. 대개 청나라 황제가 순치 황제(順治皇帝)001)  를 천단(天壇)에 배향하고 그의 어머니와 할머니에게 존호(尊號)를 올린 후에 사면(赦免)을 반포한 것이다. 상이 인정전에 올라가 동쪽을 향하여 앉고 북사가 서쪽을 향하여 앉은 다음 상이 차(茶)를 올려 삼작례(三爵禮)를 행하였다. 예를 마치고 이어 북사가 남별궁(南別宮)에 묵었다.

 

1월 26일 을축

성진병(成震丙)을 지평으로 삼았다.

 

1월 27일 병인

혜성이 나타났는데, 꼬리가 점차 길어지고 백기(白氣)가 점점 성해졌으며, 밤이 깊어서야 사라졌다.

 

영의정 정태화가 비밀히 아뢰기를,
"듣건대 북사가 밤에 백기의 이변을 보았으니 오늘 일관(日官)을 불러 무슨 징조인가를 물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 이변이 무슨 조짐인지는 분명히 알지 못하겠으나, 병란의 상인 듯합니다. 북사에게 그대로 고할 수는 없으니, 흉년이 들 조짐이라고 말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저들 가운데도 역시 일관이 있어서 숨길 수 없을 듯하나, 이에 의거해서 말해주는 것이 무방하다."
하였다.

 

대사간 이태연, 헌납 권격, 정언 변황·오시복이 재변을 인하여 차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조참(朝叅)과 상참(常叅)의 구례를 닦아 나라의 기강을 엄숙하게 하고, 상과 벌을 신중히 내려 권장하고 징계하는 뜻을 보이며, 궁금(宮禁)을 엄하게 하여 사사로운 길을 막고, 수령을 잘 가려 혜택을 베풀며, 별군직(別軍職)을 파하여 헛된 낭비를 줄이소서."
하였는데, 상이 가납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재변이 일어난 이래로 삼사가 번갈아 상소를 올렸는데, 비록 곧고 올바른 말은 없었으나 그 가운데는 역시 현재의 폐단에 꼭 들어맞는 것도 있었다. 그런데도 단지 우악한 비답만 내리고 실제로 채택해 시행하였다고는 듣지 못하였으니, 그러고도 어떻게 하늘의 뜻을 감동시키고 사람들의 마음을 감복시키기를 바라겠는가.


【태백산사고본】 14책 14권 34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572면
【분류】정론-간쟁(諫諍) / 과학-천기(天氣) / 역사-편사(編史)
사신은 논한다. 재변이 일어난 이래로 삼사가 번갈아 상소를 올렸는데, 비록 곧고 올바른 말은 없었으나 그 가운데는 역시 현재의 폐단에 꼭 들어맞는 것도 있었다. 그런데도 단지 우악한 비답만 내리고 실제로 채택해 시행하였다고는 듣지 못하였으니, 그러고도 어떻게 하늘의 뜻을 감동시키고 사람들의 마음을 감복시키기를 바라겠는가.

 

1월 29일 무진

밤에 혜성이 나타났다.

 

상이 눈병으로 편찮아 침을 맞은 후에 약방 제조 등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상의 눈병이 혹 찬바람을 쐬여서 도진 것은 아닙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난밤에 높은 곳에 올라가 백기를 바라보려고 하다가 도진 것이다."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백기의 형체가 혜성과 비슷한데 일관도 무슨 별인지 알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대개 그 뿌리를 보지 못해서입니다. 강화(江華)에 해가 지는 곳을 볼 수 있는 곳이 있다고 하니, 일관을 보내어 살펴보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보내라고 명하였다.

 

1월 30일 기사

밤에 혜성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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