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14권, 현종 9년 1668년 2월

싸라리리 2025. 12. 11.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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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일 경오

밤에 혜성이 나타나 천원성(天園星)을 지나 삼수(參宿) 내의 병성(屛星) 위로 향하였다.

 

명하여 보낸 일관이 강화에 가서 고려산(高麗山)에 올라가 백기를 바라다 보니 해가 진 후에 서쪽 하늘가에서 비로소 나타났는데, 뿌리가 바다 속에 있어서 자세히 살펴볼 수 없었다. 대개 백기는 혜성이었으나, 다만 그 뿌리를 보지 못하여 분명하게 알 수 없었으므로 일관을 보내어 살펴보게 한 것이다.

 

경성 내의 굶주린 백성 남녀 노소 1천 5백 20여 명을 죽을 끓여주어 진휼하였다. 그 후에 더욱 늘어나 2천 8백여 명이나 되었다.

 

2월 2일 신미

혜성이 희미해졌다.

 

대사간 이태연 등이 아뢰기를,
"이번에 충의위(忠義衛)에 모속(冒屬)된 자를 조사할 때 혹 문서가 착오나서 뒤섞여 도태된 자도 있으며, 분명히 충의위인데도 장부에 기입되지 않아 도태된 자도 있습니다. 을사년 이전에는 장부를 바치는 법이 몹시 해이하여 엄하게 단속하는 명령이 또 병오년에 내려졌으니, 을사년 이전에 장부에 기입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갑자기 도태시키도록 하는 것은, 비단 명령은 태만히 하면서 기한만 각박히 적용하는 것과 같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이미 공신의 자손임을 알면서도 그대로 여정(餘丁)으로 정한다면, 공신을 우대하는 뜻에 부족한 점이 없겠습니까. 더구나 종실(宗室) 충의위는 사리로 따져볼 때 더욱 도태시켜서는 안 됩니다. 해당 부(府)로 하여금 다시 분명하게 조사하여 모속으로 잘못 분류된 자 및 계파가 분명한데도 을사년 이전에 장부에 기입되지 않은 자를 가려내도록 하여 많은 사람들의 고할 데 없는 원통함을 풀어주게 하소서."
하니, 상이 해당 부로 하여금 다시 조사한 다음 품의하여 처리하게 하였다.

 

찬선 송준길, 대사헌 윤문거, 집의 윤선거가 모두 상소하여 하사한 음식물을 사양하니, 상이 온화한 말로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시강원 보덕 이유(李秞) 등이 상소하기를,
"사람이 태어나 8세가 되면 왕공(王公) 이하에서부터 서민의 자제에 이르기까지 모두 입학하는 예가 있습니다. 옛날의 제왕들이 모두 이 예를 따랐으며 우리 나라에서도 일찍이 행하였습니다. 신들이 왕세자를 보건대, 바로 입학할 나이가 되었으며, 자품이 뛰어나고 덕성이 숙성합니다. 종묘에 알현하는 예는 이미 품의하여 시행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어찌하여 유독 입학하는 예에 대해서만은 늦추십니까. 여러 사람들이 답답하게 여기고 있으니, 예조로 하여금 즉시 거행하게 해서 신민들이 목을 늘이고 고대하는 바람에 부응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너희들의 생각도 좋은 듯하나, 지난번에 의논해 정한 것은 실로 깊이 생각한데서 나온 것이다. 너희들은 속히 하는 것만을 귀하게 여기지 말라."
하였다.

 

2월 3일 임신

혜성이 점차 희미해졌다.

 

집의 심유, 장령 유거·최문식이 아뢰기를,
"며칠 전에 어떤 초동(樵童)이 소를 끌고 와 땔감을 파는 자가 있었는데, 도적이 유인하여 그 소를 빼앗고는 살해한 다음 항아리 속에 시체를 넣어서 몰래 장통교(長通橋) 아래에다 버렸습니다. 도성 내에 이러한 살인의 변고가 일어났으니, 이는 실로 전에 없었던 일입니다. 그런데도 포도청에서는 평상시에 엄하게 신칙하지 못하였으며, 또 즉시 수색하여 체포하지 못하였습니다. 당해 포도 대장을 중한 쪽으로 추고하소서. 그리고 포도청으로 하여금 제때에 정범(正犯)을 체포하여 그 죄를 바루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으면서 이르기를,
"이는 결당하여 횡행하는 것이 아니니 포도청에서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별로 추고할 만한 일이 없으니, 단지 제때에 체포하게만 하라."
하였다.

 

상이 침을 맞은 후에 약방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는데, 옥당 역시 면대를 청하였다. 수찬 김만중(金萬重)이 아뢰기를,
"지난해 귀양갔던 여러 신하들을 이미 석방하였으나 아직도 폐기되어 있는 채 해를 넘겼으므로, 이 때문에 조정에 아무말 않고 있는 것이 풍조가 되어 올바른 말이 들리지 않고 있습니다. 집상전(集祥殿)을 짓는 것은 대개 부득이한 데서 나온 일이나, 호조 판서 김수흥(金壽興)이 차자에서 말한바 ‘전각 하나를 짓는 것은 수성(修省)하는 도리에 해로울 것이 없다.’고 한 것은 크게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도리를 잃은 것입니다. 또 듣건대, 전각의 안 기둥의 단청을 당주(唐朱)로 칠하라고 수흥이 청하였다고 합니다. 옛날에 송나라의 신하 채양(蔡襄)이 민중(閩中)을 맡고 있으면서 건다(建茶)를 올리자, 구양수(歐陽脩)가 ‘군모(君謨)002)  는 사인(士人)인데 어찌하여 이런 짓을 하는가?’ 하였으며, 전유연(錢惟演)이 서경(西京)을 맡고 있으면서 모란꽃을 올리자, 소식(蘇軾)이 ‘낙양의 상공은 충효의 집안인데 가련하게 그 역시 요황화를 올렸네.[洛陽相公忠孝家可憐亦進姚黃花]’라는 시를 지었으니, 지금 김수흥의 일 역시 애석해 할 만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차자의 내용은 기억하지 못하겠으나, 단청에 대한 일은, 당초에는 번주(燔朱)를 쓰려고 하였는데, 호조에서 당주(唐朱)가 남아 있다고 하였으므로 안에서 분부한 것이지, 호조 판서가 청한 것이 아니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왕세자의 입학례를 행하기를 청하면서 아뢰기를,
"8세에 입학하는 것은 삼대(三代)의 예이니, 폐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으나, 상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경기와 해서·호서 지방에 크게 기근이 들고 또 여역(癘疫)이 치성하였다. 창고의 곡식을 내어 진휼하도록 명하였다.

 

2월 4일 계유

일관(日官)이 강화에서 와서 말하기를 ‘혜성의 백기(白氣)의 뿌리를 바라다보니 크기가 광주리만하였다. 이는 바로 치우기(蚩尤旗)이다.’고 하였다.

 

호조 판서 김수흥이 김만중에게 배척을 받았다는 이유로 상소하여 스스로를 밝히면서 직명(職名)을 파해 주기를 청하니, 상이 답하였다.
"세도(世道)가 한심하여 와언이 날마다 떠돈다. 김만중이 들은 것이 어디에서 나온 말인지 모르겠으나 그가 공격하여 배척한 것은 모두가 사람들에게 아부하는 뜻이며, 결말 부분에 송나라 조정에서 꽃을 올린 일 등을 말한 것은 너무 심하였다. 가령 김만중이 조금이라도 군자다운 마음이 있다면 어찌 뜬소문을 믿고서 사대부에게 간사하게 아첨한다고 지목하기를 이처럼 극도로 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서 그의 마음을 엿볼 수 있으니, 어찌 깊이 혐의하여 사체를 손상시키겠는가. 객사(客使)가 관소에 있으니 하루도 직무를 폐할 수 없다. 안심하여 사직하지 말고 속히 공무를 보라."

 

2월 5일 갑술

오시복(吳始復)을 부수찬으로, 이숙달(李叔達)을 정언으로 삼았다.

 

가뭄이 심하여 우물물이 모두 고갈되었다.

 

경성과 외방에 곳곳에서 불이 나 집들이 탔는데, 없는 날이 거의 없었다.

 

관반(館伴) 이경억(李慶億)을 인견하였다. 대개 북사(北使)가 돌아가게 되었는데, 그가 탐욕스럽기 그지없었으므로 그에게 줄 물건을 탑전에서 의논해 정하고자 한 것이다.

 

정원이 백기(白氣)의 이변으로 인해 진계하면서 ‘대간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느니, ‘신하들을 만나보지 않는다.’느니, ‘응하기를 실제적인 것으로 하라.’느니 하는 등의 말로 누누이 말하였는데, 상이 가납하였다.

 

2월 6일 을해

눈이 왔다. 북사가 돌아갔는데, 상이 모화관에 친히 나아가 전송하였다.

 

대사간 이태연 등이 아뢰기를,
"근래에 삼상(蔘商)을 밀봉(密封)하는 폐단은 몹시 형편없는 짓입니다. 이른바 삼상에 대해서는 해조에서 액수(額數)를 정해 세금을 거둡니다. 그런데 도망하였거나 죽은 자의 대신을 해당 부(部)로 하여금 밀봉하게 하고는 각계(各契)에서 독촉해 받아들이게 하면서 마구 매질을 가하므로, 각계의 사람들이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억지로 아무나 가리켜 삼상이라고 합니다. 심지어 송도(松都)의 경우에는 해조가 체문(帖文)을 유수(留守)에게 직접 보내 다른 장사를 하는 자에게 삼세(蔘稅)를 독촉해 거두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잘못된 규례가 오랫동안 시행되어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더욱 심하게 되었습니다. 해조로 하여금 전의 규례를 혁파하게 하여 서울과 송도의 백성들이 원통함을 하소연하는 폐단이 없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해조로 하여금 품의하여 처리하게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훈국(訓局)의 포수(砲手)가 시장에 앉아서 장사를 하고 있는데, 이는 역(役)을 내는 시장 백성들과는 경중이 현격하게 다르므로, 지난해 겨울 초에 인대하였을 때 변통하라는 뜻으로 진달하자, 상께서 평시서와 훈련 대장이 상의하여 세를 매기라고 허락하였습니다. 지금 듣건대, 평시서의 관원이 대장의 집에 다시 가서 의논해 정하려고 하였으나 대장이 즉시 거행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몹시 타당치 않으니, 대장 이완(李浣)을 중한 쪽으로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재이로 인하여 정전(正殿)을 피하였다. 정원에 하교하였다.
"아, 오늘날의 국사가 위태롭고도 위태롭다고 하겠다. 위로는 하늘의 노여움이 몹시 심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일이 그지없이 애닯아 걱정스럽고 두려운 생각을 마음속에서 조금도 늦춘 적이 없었다. 금년 봄 새해 초에 이미 무지개가 해를 꿰는 재변이 있었는데 한 달도 채 못 되어 또 이런 괴이하고 놀라운 변이 있다. 자나 깨나 이에 대해 생각하며 꿈속에서도 놀라니, 깊은 연못과 깊은 산골짜기에 빠진 듯한 마음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 그 원인을 따져보면 실로 나의 덕이 부족한 데서 말미암은 것이다. 오늘부터 정전(正殿)을 피하여 지난날의 허물을 반성하고 하늘을 경외하는 마음을 더욱 더 가져 조금이나마 하늘의 꾸지람에 답하겠다. 승지는 나를 대신해서 교서를 지어 널리 직언을 구하여 나의 부족한 점을 보충하라. 너희 대소 신하들은 서로 협동하고 각자의 직분을 부지런히 수행하라. 인재를 선발하고 옥사(獄事)를 심리하는 것은 참으로 재변을 늦추는 데 있어서 급선무이니, 각 해당 관원들로 하여금 착실히 시행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반찬의 가짓수를 줄이고 음주를 금하는 등의 일도 해조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라."

 

2월 7일 병자

정지화(鄭知和)를 형조 판서로, 홍만용(洪萬容)을 동부승지로 삼았다.

 

2월 9일 무인

사헌부가 아뢰기를,
"황주 판관(黃州判官) 유진창(柳晋昌)은 부임한 뒤 오로지 자신을 살찌우기만을 일삼아 비루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외방에서 곤장을 쓰는 것은 단지 군정(軍政)을 위해서 쓰는 것이지, 본래 일상적인 형벌에 쓰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혹 가벼운 벌에도 이 형벌을 쓰므로 군인과 백성들이 원통함을 하소연하는 것이 이보다 심한 것이 없습니다. 각도의 감사들로 하여금 솔선해서 이 법을 지키게 하고 각 진이나 각 고을에서 이 영을 범하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남형죄(濫刑罪)로 논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병조 판서 홍중보(洪重普)가 면대를 청하여 아뢰기를,
"대간의 아룀으로 인하여 충의위 가운데 문서에 기입되지 않은 자를 다시 조사하라는 명이 있었으므로, 지금 품의해 정하고자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식년(式年)인 병오년에 문서에 기입하지 않은 자는 태거(汰去)시켜 군역에 정하지 말고 1년간 포를 징수하여 그 벌을 시행하라. 그리고 구전(口傳)한 체자(帖子)는 그대로 나누어 주라. 거느리고 있는 아이들에 대해서도 포를 징수하지 말라."
하였다.

 

대사간 이태연이 상소하기를,
"신이 보건대 전하께서 즉위한 이래로 재변이 일어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어서 구언하는 교서를 여러 차례 내렸으나 전례에 따라 임시방편만을 하여 진작시킬 기약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전하께서 하늘에 응답하는 것을 실제적인 것으로 하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올곧고 올바른 말을 한 사람이 있었으나 교만한 기색을 보이어서 천리 밖에서 사람을 막았으니 전하께서 구언하신 것을 성의껏 하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예로써 어진 이를 초빙하여 오더라도 임용하는 정성이 처음만 못하니 무슨 뽑아 쓸 만한 특별한 인재가 있겠습니까. 비록 옥사를 자주 심리하더라도 죄를 결정하는 즈음에 경중을 잃으니, 어찌 번거롭게 소결(疏決)하여 요행의 길을 열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고, 또,
"정전을 피하고 반찬의 가짓수를 줄이는 것이 참으로 재변을 두려워하는 데 있어서 한 가지 일이기는 하나, 이미 실제적인 것이 없이 한갓 형식적으로만 하였으니, 전하께서 비록 한 달을 넘도록 한데 앉아 있고 날마다 한 가지 반찬만 올린다 하더라도 저 땅을 비추이는 하늘이 반드시 감동하여 마음을 바꿀 리가 없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가납하였다.

 

사관을 보내어 우찬성 송시열과 찬선 송준길에게 유시하였다.
"아, 지금처럼 재변이 겹쳐 나타나 국사가 어려운 때 조정에 큰 덕을 지닌 어진 선비가 있어서 좌우에서 보필한다면 국가의 형세가 얼마나 중해지겠는가. 더구나 경은 선조(先朝)에서 알아주신 은혜를 받았고 선조께서 부탁하신 중대한 임무가 있으니 그 책임이 크고도 무겁다고 하겠다. 그런데 한 번 비방하는 말을 들은 뒤로는 시골로 물러나 있을 마음을 굳게 지키어 앞뒤로 올린 상소에 대한 비답에서 내 뜻을 모두 다 말했는데도 마음을 바꿀 기약이 없으니, 내 마음의 답답함이야 참으로 말할 겨를이 없다고 치더라도, 국가의 불행이 마땅히 어떠하겠는가. 전에 없던 이런 재변을 만나서 어찌 한결같이 시골로 물러나 있으면서 나와는 상관없다고 하면서 돌아보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현재 봄날씨가 점차 화창해지고 있으니, 모름지기 앞서 올린 소에 대한 비답의 뜻을 잘 인식해서 속히 올라와, 쓰러져가는 국세를 부지시키고 내가 밤낮으로 생각하고 있는 마음을 조금이나마 위로하라."

 

행 판중추부사 허적에게 유시하였다.
"아, 재변이 겹쳐 나타나 국사가 어렵기가 지금보다 더 심한 때가 없었다. 그런데 조정에는 서로 협동한다는 소리가 들리지 않고 물러나 있는 자가 많으니, 국사가 한심스러움이 어떠하겠는가. 경이 시골로 물러나 살고 있는 지가 지금 이미 한 해가 다 되었으며, 내가 그대를 생각함도 몹시 간절하다. 더구나 경은 선조(先朝)에게 세상에 드문 은총을 받았고 국가의 안위에 대한 중대한 책임을 맡았으며, 비록 원임(原任)이라고는 하지만 대신의 지위에 있으니, 이러한 때 무관심하게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분명하다. 신명께서 보살피시어 지난날의 병이 지금 모두 나았고, 봄날씨가 따뜻해져 뱃길이 이미 통하였다. 경은 모름지기 나의 지극한 뜻을 잘 인식해서 수로와 육로 가운데 편한 쪽을 택하여 속히 올라오라. 그리하여 위태로운 국세를 부지시키고 간절히 바라고 있는 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위로하라."

 

대사간 이태연이 아뢰기를,
"부호군 권우(權堣)는 자기 자신의 일로 노장(露章)003)  을 올려 해명하면서 명을 받들어 염문(廉問)하는 사람을 헐뜯고 욕하였습니다. 상달하는 글에서까지 헐뜯고 욕한 것이 상놈과 똑같았으니, 어찌 이와 같은 재신(宰臣)이 있단 말입니까. 사판에서 삭제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선 중한 쪽으로 추고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유학(幼學) 이유(李𣞗)는 밖으로는 학행(學行)이 있다는 이름을 낚으면서 안으로는 교활하고 음험한 마음을 품어, 전부터 재물을 탐하고 올바른 사람을 미워하여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은 지 오래입니다. 그의 숙부인 이입신(李立身)이 후사가 없이 죽었으므로 입신의 처 구씨(具氏)가 이류의 형의 아들인 이삼재(李三才)를 수양 아들로 삼아 후사를 맡기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이류는 재산을 나누어 받지 못하는 것에 분을 품어 구씨를 매우 헐뜯고 욕하였으며, 같은 성 안에 살면서 한 해가 넘도록 찾아보지 않고는 언문으로 긴 글을 써서 구씨의 죄를 나열하였으니, 조금도 사람의 도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삼재는 이류의 조카로서 집안의 변고에 잘 대처하지 못하여 도리에 어긋난 일이 많았으니, 이류와 이삼재를 해조로 하여금 캐물어 율에 의거해 죄를 다스리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집의 심유(沈攸) 등이 차자를 올려 수성(修省)하는 방도에 대해 진달하였는데, 그 조목이 다섯 가지였다. 첫째는 오랫동안 경연을 정지하였다는 것이었고, 둘째는 자기 생각대로만 하고 간언을 거부한다는 것이었으며, 셋째는 적조(糴糶)를 독촉하는 것을 늦추는 것이고, 넷째는 각 고을에서 별도로 마련해 올리는 군기(軍器)에 대한 규정을 혁파하는 것이었으며, 다섯째는 궁가에서 전장(田庄)을 설치하는 폐단에 대한 것이었는데, 상이 가납하였다. 그 뒤에 군기를 별도로 마련해 올리는 규정을 혁파하라고 명하였는데, 대개 이 말을 따른 것이다.

 

2월 11일 경진

이경억(李慶億)을 대사헌으로, 정재숭(鄭載嵩)을 부교리로 삼았다.

 

집의 심유와 장령 유거가 ‘행행하였을 때 대가를 호위한 관원과 서울에 남아 있던 여러 신하에 대한 상격(賞格)을 헤아려 처리하라는 전교가 있었는바, 이는 품의하여 처리하라는 것과는 차이가 있는데도 경솔하게 정계(停啓)하여 물의가 크게 그르게 여긴다.’는 이유로 인피하니, 체직하였다.

 

재신(宰臣) 이하와 당하관인 시종 신하의 나이 많은 부모에게 가자(加資)하거나 아니면 음식물과 옷감을 내려주라고 특별히 명하였다. 예조 판서 김수항 등이 전문(箋文)을 올려 사례하였다.

 

90세가 넘은 강화 백성에게 가자하고 음식물을 내려주라고 명하였는데, 유수인 서필원(徐必遠)의 청을 따른 것이다.

 

2월 12일 신사

북경(北京)에 간 부사(副使) 이익한(李翊漢)이 북경에서 병으로 죽었다.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김좌명이 아뢰기를,
"남한 산성의 쌀을 전에는 각 고을에 옮겨 나누어주었다가 가을에 도로 받아들였는데, 근년 이래로 옮겨 나누어주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므로 경기 백성들이 많이들 호소하고 있습니다. 군향(軍餉)으로 쓸 것을 가볍게 내어주기는 참으로 어려우나, 이와 같은 흉년에는 한 가지 법만을 굳게 지켜서는 안 되고, 변통하는 방도가 있어야만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강도(江都)에 있는 쌀 1만 석은 이미 옮기도록 허락하였고, 남한 산성에 있는 쌀 5천 석도 옮기도록 하되, 강도에서 가까운 고을은 강도에 있는 쌀을 옮기고 남한 산성에서 가까운 고을에는 남한 산성에 있는 쌀을 옮기라. 피곡(皮穀)은 경기 지방의 백성들이 종자를 구하지 못하였을 때 나누어 주는 것이 마땅하다."
하자, 김좌명이 아뢰기를,
"서필원은 강도에 있는 피곡을 각 고을에 옮겨다 주어 백성들에게 종자곡으로 나누어 주고자 하는데, 조복양(趙復陽)의 말을 들으니 강도에 있는 벼는 상한데다가 잘 여물지 않아서 종자곡으로 쓰기에는 적당치 않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서필원을 이미 올라오라고 하였으니, 그가 오면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이완이 아뢰기를,
"도감의 초관(哨官) 선귀영(宣貴榮)은 지난 기해년에 형조에서 송사(訟事)가 일어나자 죄받을까 두려워하여 양주(楊州) 송산(松山)으로 도피하였습니다. 이에 신이 거느리고 있는 부하들을 보내어 체포하여 오는 도중에 또 몸을 빼어 도주하였습니다. 지금 듣건대 사리에 어긋난 일로 송사를 일으키기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장단부(長湍府)에 갇혀 있는 것을 공문을 보내어 잡아다가 경옥(京獄)에 가두었다고 합니다. 선귀영은 장관(將官)으로 있으면서 두 차례나 도망하였으니, 이와 같은 사람은 군법을 엄하게 밝혀 징계시키는 바탕으로 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군전(軍前)에서 효시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그러라고 하였다. 이완이 또 아뢰기를,
"훈국(訓局)을 설치한 것은 군문(軍門)을 중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병조 낭관이 금란(禁亂)한다고 하면서 서리(書吏)를 잡아다가 마음대로 곤장을 때렸으며, 또 포수(砲手)를 잡아다가 기대총(旗隊摠)을 윽박질러서 곤장을 때리게 했다고 하니, 일이 몹시 놀랍습니다. 추고하소서."
하고, 대사간 이태연이 아뢰기를,
"낭관이 금란으로 인하여 죄를 다스렸다면 이미 사사로이 한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훈국은 병조에 대해선 사체가 자연 구별되는데, 대장이 어떻게 곧장 추고하기를 청할 수 있겠습니까. 이완을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일은 나온 지 이미 오래 되었는데 병조에서 거론하는 일이 없었으니, 대장이 추고하기를 청하는 것을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하자, 이태연이 아뢰기를,
"훈국의 도제조는 병조의 낭관을 추고하라고 청할 수 있으나 대장은 청할 수 없습니다. 이완의 일은 일찍이 없었던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장은 추고하고 병조 낭관은 파직한 다음에 추고하라."
하였다.

 

2월 14일 계미

송창(宋昌)을 장령으로, 심유(沈攸)를 사간으로, 이유(李秞)를 집의로, 여성제(呂聖齊)를 부응교로, 조복양(趙復陽)을 대사성으로, 이선(李選)을 수찬으로 삼았다.

 

대사간 이태연이 아뢰기를,
"어제 등대(登對)하였을 때 이완을 추고하라고 청하였다가 병조의 낭관을 파직한 다음 추고하라는 명을 내리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신이 다투어 논집하지 않아 물의가 그르게 여깁니다. 체차하여 주소서."
하고, 물러나 물론을 기다렸다.

 

상이 침을 맞았다.

 

정언 변황이 아뢰기를,
"신들이 일찍이 충의위를 태거시켜 군보(軍保)로 정해서는 안 된다고 논하자, 다시 품의하여 처리하라는 분부가 있었으므로 우선 논계를 중지하였습니다. 지금 듣건대, 성상께서 1년을 기한으로 하여 포(布)를 징수하라고 명하였다고 합니다.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았으면 속히 그만두어야지, 하필 1년을 기한으로 하여 포를 징수해서 1천여 명이나 원통함을 하소연하는 폐단이 있게 한단 말입니까. 포를 징수하지 말아서 백성들이 원망하지 않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왕자·대군·공주·옹주·부마를 천장(遷葬)할 때에는 본래 다시 예장(禮葬)을 내려주는 규정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정신 옹주(貞愼翁主)와 달성위(達城尉)의 천장에는 예장하라는 명이 있어서 거듭 민폐를 끼치고 있습니다. 성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훈련 도감은 병조 소속이니, 병조 낭관이 공사로 인하여 포수를 치죄하지 못하는 것은, 단연코 그럴 리가 없습니다. 훈련 대장이 병조 낭관을 추고하라고 청하는 것은 몹시 체모를 잃은 것이고, 대간이 대장을 추고하라고 청한 것은 참으로 체모를 얻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로 인하여 특별히 낭관을 파직한 다음 추고하라고 명이 내렸으니, 일은 비록 미세하지만 크게 체통을 손상시킨 것입니다.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전하를 바로 앞에서 모시고 있으면서 눈으로 잘못된 거조를 보고서도 다투어 논집하지 못하여 대간의 체모를 크게 손상시켰습니다. 대사간 이태연을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부교리 윤심(尹深), 부수찬 정석(鄭晳)이 차자를 올려 학문에 힘쓰지 않고 정사를 함에 부지런하지 않으며, 말을 들어줌에 있어서 실제적인 것으로 하지 않음에 대해 진달하고, 또 사치의 해로움에 대해서 말하였는데, 상이 가납하였다.

 

2월 15일 갑신

이은상(李殷相)을 대사간으로, 김좌명(金佐明)을 호조 판서로, 민종도(閔宗道)를 지평으로, 민정중(閔鼎重)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호조 판서 김수흥을 면직하였다. 김수흥이 옥당의 배척을 무겁게 받았다는 이유로 여러 차례 사직하는 소를 올렸으나, 상이 뜬소문으로 체차시키는 것은 불가하다고 하여 오랫동안 허락하지 않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대신이 정세상 출사하기 어렵다고 하자, 상이 이에 허락한 것이다.

 

상이 침을 맞은 후 약방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이때 상이 핵환(核患)을 앓아 누군가 현삼주(玄參酒)가 핵환을 치료하는 데 가장 좋다고 권하자, 상이 일렀다.
"비록 좋은 처방이라고 하더라도 술을 입에도 못 대니 어쩌겠는가."

 

2월 16일 을유

대사간 이은상이 이름이 상격(賞格) 중에 들어 있어서 논계에 참여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인피하니, 면직하였다.

 

2월 18일 정해

이태연(李泰淵)을 대사간으로, 조복양(趙復陽)을 부제학으로, 윤형성(尹衡聖)을 장령으로 삼았다.

 

2월 20일 기축

치우기(蚩尤旗)가 사라졌다.

 

대사간 이태연 등이 아뢰기를,
"춘천 부사(春川府使) 민승(閔昇)은 전에 고을살이를 할 때 한번도 선정을 폈다는 보고가 없었으며, 지난해 가을에는 사사로이 양전(量田)하면서 새로 찾아낸 전지를 상사(上司)에 보고하지 않고는 화전(火田)의 결복(結卜)에다 포함시킨 다음 세를 거두어 사사로이 썼습니다. 잡아다가 추문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다가 여러 차례 아뢴 뒤에야, 이에 윤허하였다.

 

2월 22일 신묘

대사간 이태연 등이 아뢰기를,
"신들이 듣건대, 요즈음 복창군(福昌君) 이정(李楨), 복선군(福善君) 이남(李柟), 복평군(福平君) 이연(李㮒)이 항상 경기 지방의 산골짜기에 사냥을 나가 마을에 폐를 끼치며, 심지어는 사냥개의 먹이까지도 궁한 백성들에게 마련하도록 책임지워 도처에서 시끄러우며 백성들이 고통을 감당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종실이 마음대로 먼 경기 지방까지 출입하는 것은 이미 법을 어긴 것이며, 이렇게 기근이 든 때 다 죽어가는 백성들이 또 궁노들의 침해에 시달리니, 일이 몹시 한심합니다. 모두 추고하소서. 그리고 이 다음부터는 왕자나 종실이 사사로이 마을에 출입하는 자는 엄하게 금지시켜 나라의 제도를 중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2월 23일 임진

최유지(崔攸之)를 사간으로 삼았다.

 

예조 좌랑 이옥(李沃)이 재변으로 인하여 상소를 올려 수성(修省)하는 도에 대하여 논하고, 이어 두 편의 책을 올리면서 제목을 《역대수성편람(歷代修省便覽)》이라고 하였는데, 상이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가납하였다. 이어 전교하기를,
"올린 책을 보건대, 걱정하고 사랑하는 정성이 독실하지 않으면 어찌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재삼 읽어보고는 가상함을 금치 못하겠다. 이제 마장(馬粧) 1부(部)를 내리니 이옥에게 주어 나의 뜻을 표하라."
하였는데, 그 상소에 대략 말하기를,
"예로부터 국가가 흥하고 망하는 것이 모두 서책에 실려 있으니, 삼가 생각건대, 성상께서 경사(經史)를 두루 보시어 감계(監戒)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다만 생각건대, 많고 많은 분량의 책을 다 보기가 어렵고 옥체가 편치 않아 오랫동안 경연을 폐하였으며, 총명에는 한계가 있어서 두루 섭렵하지 못하였을 것이니, 성의가 간간이 단절되는 것은 아마도 여기에서 말미암은 것인 듯합니다. 그러므로 신이 감히 참람한 죄를 잊고서 재변의 징험을 주워 모았으되, 위로는 춘추(春秋) 시대부터 아래로는 송나라에 이르기까지의 군신이 재변을 당하여 서로 닦아 후세에 법이 될 만한 것과 재변을 즐기고 법도를 무너뜨려 후세에 징계가 될 만한 것, 총 48조목을 모았습니다. 그런 다음 각각 그 아래에다 저의 견해를 덧붙여 치란을 드러내고 흥망을 징험하여 두 편으로 정리하고는 이를 다시 한 책으로 만들어 제목을 《역대수성편람》이라 한 다음 손으로 써서 감히 전하께 올리어 한가하신 여가에 펼쳐보시도록 하였습니다."
하였다.

 

2월 24일 계사

재상을 뽑도록 명하여 정치화(鄭致和)를 좌의정으로, 송시열(宋時烈)을 우의정으로 삼았다.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도승지 오정위(吳挺緯)가 아뢰기를,
"지난번 노인들을 우대하는 일에 은혜를 베푸셨을 때 신은 특별한 은혜를 받았으므로 저희 모자와 형제들이 머리를 맞대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런데 신은 감격스러운 마음에 다시 구구한 생각이 있기에 감히 황공하게도 진달합니다. 영부사 이경석(李景奭)은 나이가 74세나 된 원로 대신이나 현달한 자식이 없는 연고로 은전(恩典)을 받지 못하여 바깥의 의논이 모두들 흠으로 여깁니다. 그리고 전 경력(經歷) 김경(金坰)은 바로 인조께서 잠저에 계실 때의 친구인데 나이는 늙고 자식이 없어 의지할 곳이 없으니, 역시 성상께서 마음쓰셔야 할 사람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김경은 나이가 얼마나 되었는가?"
하자, 정태화가 아뢰기를,
"을미생으로 바로 인조와 동갑입니다."
하였다. 오정위가 아뢰기를,
"동지(同知) 홍헌(洪憲)은 인조조의 시종신으로 금년 나이가 84세인데도 참여하지 못하였기에, 아울러 아룁니다."
하자, 정태화가 아뢰기를,
"무신 가운데도 부모가 연로한 자가 있는데 균등하게 은전을 받지 못하였으므로 실망하는 마음이 없지 않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당초에 무신을 일체로 뽑아 아뢰지 않은 것은 해조가 제대로 살피지 못한 소치이다. 일찍이 영장(營將) 이상을 지낸 사람을 해조로 하여금 다시 뽑아서 아뢰게 하라. 내가 영부사에 대해서도 일찍이 생각이 있어서 참으로 그에 대해 언급하고 싶었으나 말하지 못하였다. 명주와 비단 및 음식물을 넉넉하게 지급하라. 김경은 특별히 가자하고 넉넉하게 음식물을 주라. 홍헌에게도 음식물을 지급하라."
하였다. 김좌명이 아뢰기를,
"정사 공신(靖社功臣)은 단지 두세 사람만 있는데, 구인기(具仁墍)는 얼마 전에 가자하였습니다. 함릉군(咸陵君) 이해(李澥)는 나이 들어 직을 사양하였으니 조용히 물러남이 가상한데, 여러 차례 치사(致仕)를 청하였으나 조정에서 허락하지 않았으며, 현달한 아들이 없어서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하자, 정태화가 아뢰기를,
"신은 그와 같은 마을에 살아서 그의 사람됨을 잘 알고 있습니다. 청렴할 뿐만 아니라 집안에서의 행실도 깨끗해 많은 장점이 있으며, 나이가 지금 78세인데 녹봉을 사양하고 집의 쌀을 먹은 지 오래 되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해의 자급이 어느 품계인가?"
하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숭록 대부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 한 자급을 가자하면 부원군(府院君)이 되는가?"
하자, 정태화가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 예전에는 나이 들어 치사하면 봉조하(奉朝賀)하게 하였으며, 또한 정상적으로 녹봉을 주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른바 봉조하란 무엇을 말하는가?"
하자, 정태화가 대답하기를,
"예전에 나이 든 대신은 비록 직무를 보면서 공무를 집행하지 못하더라도 으레 3품의 녹봉을 주어 우대하였는데, 이것을 봉조하라고 합니다."
하니, 오정위가 아뢰기를,
"근래에는 치사하는 법이 폐해진 지 오래되었으니, 특별히 그의 청을 들어주어 염치의 도리를 격려시키는 것도 어찌 조정의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해의 기력은 어떠한가? 직무를 보지 못할 지경인가?"
하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기력은 아직도 건강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가자하고 음식물을 지급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경기 백성이 크게 굶주려 죽을 끓여서 진구하였다.

 

2월 26일 을미

상이 하교하였다.
"지금 이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에 종친들만 빠졌으니, 친친(親親)하는 도리에 부족한 점이 있지 않겠는가? 종반(宗班) 4품 이상으로 나이 많은 자와 부모가 있는 자를 모두 서계하라. 무신으로서 일찍이 영장(營將) 이상을 지낸 자도 일체로 시행하라."

 

집의 이유(李秞), 장령 윤형성(尹衡聖)이 아뢰기를,
"크고 작은 군정(軍政)을 반드시 계문하여 품정(稟定)하게 한 것은 군정을 중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충청 병영(忠淸兵營)을 청주(淸州)로 옮긴 뒤 그 당시의 병사가 기수(旗手) 1초(哨)를 애당초 계품하지도 않고 마음대로 더 설치하고는 우후로 하여금 전적으로 맡아 수괄(搜括)하게 하였는데, 이를 지금까지 그대로 따라 왔습니다. 그러다가 전 병사 이원로(李元老)가 비로소 잘못된 것을 깨닫고 상의하여 혁파하였습니다. 그런데 현재 병사로 있는 유비연(柳斐然)은 감히 그대 두자는 뜻으로 장황하게 치계하였으니, 사체를 잘 모름이 심합니다. 기수를 더 설치하였을 때의 병사와 우후는 조사하여 죄를 주고, 유비연은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2월 28일 정유

대사간 이태연 등이 아뢰기를,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은 몹시 성대한 거조이니, 그것을 듣는 사람치고 누구인들 감탄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일찍이 영장(營將) 이상을 지낸 사람을 모두 뽑아 아뢴다면 난잡하게 됨을 면치 못할 듯합니다. 무신들 가운데 당하관으로 있을 때 동·서반(東西班)의 정직(正職)을 거치고 당상관이 된 후에는 실직(實職) 첨지(僉知) 이상인 자를 뽑아 아뢰게 하여 혼잡한 폐단이 없게 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미 영장을 지냈으면 이는 응당 정직을 받았던 사람이다. 그런데 무슨 구별할 일이 있겠는가."
하고, 따르지 않았다.

 

형조에 명하여, 배를 파선시킨 죄인 권시담(權時談)을 당초의 사목대로 곧장 효시(梟示)하게 하였다. 형조 참의 남구만(南九萬)이 상소하여 쟁집하기를,
"시역(弑逆)하는 것은 크나큰 악이며 살인하고 재물을 빼앗는 것은 크나큰 죄입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승복받지 아니한 채 법을 집행하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찌 크나큰 악을 저지르고 크나큰 죄를 저지른 자에게도 시행하지 않는 율(律)을 배를 난파시킨 죄에 시행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권시담의 죄가 본디 물어보지도 않고 효시하는 것이 합당한 죄라면 그를 체포하였을 때 즉시 처형하는 것이 옳았습니다. 지금 이미 그렇게 하지 않고 법조(法曹)에 보내어 한 해가 다 지나도록 캐어 물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형을 집행한다면 어찌 몹시도 명분이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상이 따랐다.

 

2월 29일 무술

좌의정 정치화가 북경에서 돌아와 광주(廣州)에 도착하여 상소를 올려 사직하였는데, 그의 형인 정태화가 막 영의정에 제수되었기 때문이다. 상이 ‘사직하지 말고 올라오라.’고 답하고, 사관을 보내어 유시하였다.

 

상이 중사(中使)를 보내어 어찰(御札)을 가지고 가서 판부사 허적(許積)에게 유시하게 하고, 또 정원에 하교하였다.
"판부사 허적이 서울로 올라올 때 수로(水路)와 육로(陸路) 두 길에서 편의에 따라 호송하라고 두 도의 감사에게 유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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