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일 기해
기우제를 지냈다.
3월 3일 신축
대사간 이태연(李泰淵)이 아뢰기를,
"듣건대 ‘경상도 비안(比安)에 사는 선비 집에 장성한 처녀가 있었는데 명화적(明火賊)에게 잡혀가 예천(醴泉) 땅 도적의 집에 있었다. 그런데 그 처녀가 부근에 사는 양반 집에 몰래 잡혀온 사연을 말하자, 그 사람이 즉시 처녀의 부모에게 달려가 알렸다. 이에 계략을 세워 도적을 잡은 다음 비안현에다 가두어두었는데, 현감 이민도(李敏道)가 낱낱이 감사에게 보고하자, 감사가 유의해 듣지 않고 전례에 따라 추치(推治)하여 단지 그 정범(正犯)만을 죽이고 같은 무리 4인은 모두 석방하였다.’고 합니다. 선비의 딸을 도적이 잡아다가 강간한 것이 얼마만큼 큰 변고입니까. 그런데도 감사는 보통 일로 보았고 옥을 다스리는 관원도 법에 의거해 따지지 않아 정범을 법을 적용해 처형하지 못하였고 같은 무리도 법률에 의거해 처치하지 못하였으므로 원근에서 듣는 이들이 모두들 놀랍고 분통하게 여깁니다. 감사 남용익(南龍翼)은 먼저 파직한 다음 추고하고, 이민도는 잡아다가 국문하여 정죄하고, 같은 무리 4인은 다시 법률을 적용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남용익은 우선 중하게 추고하라."
하였다.
좌의정 정치화가 여러 차례 차자를 올려 사면해 주기를 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3월 4일 임인
이경억(李慶億)을 예조 판서로, 이경휘(李慶徽)를 대사헌으로, 정치화를 판중추부사로 삼았다.
판중추부사 정치화가 복명(復命)하니, 상이 인견하였다. 상이 청나라 임금의 현부에 대해 물으니, 대답하기를,
"사치스럽기가 한량이 없어 말안장까지 순금으로 꾸몄으며 술주전자와 그릇을 모두 황금으로 만들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묻기를,
"표류해 온 한인들은 어떻게 처리하였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차마 다 죽이지는 못하고 반드시 용서해 줄 것이라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묻기를,
"북경에서도 혜성(彗星)이 보였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청나라에서도 보였는데, 길이가 수십 장(丈)이었고, 백기(白氣)의 뿌리가 광주리를 걸어놓은 것 같았으며, 중국 사람들이 천하에 병란이 일어날 조짐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청나라의 사정이 어떻던가?"
하니, 대답하기를,
"《진신편람(搢紳便覽)》을 얻어 보니, 13성(省)의 포정사(布政司)를 모두 청인(淸人)으로 차견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보건대 천하를 거의 다 차지한 것이며, 오직 정경(鄭經)만이 섬 하나를 차지하고 있는데 청인이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고 정경이 일본에 혼인을 요청하였는데 일본이 허락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였다.
3월 6일 갑진
집의 이유(李秞), 장령 윤형성(尹衡聖)이 ‘어제 받든 성상의 비답에, 기수(旗手)를 새로 설치할 때의 병사(兵使)와 우후를 우선 추고하라고 전교하였는데, 신들이 잘못 헤아리고서 유비연(柳斐然)도 아울러 추고하기를 청하였다가 우선 정지하였으니, 제대로 살피지 못한 잘못을 면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인피하니, 체차하였다.
3월 7일 을사
소대하여 《중용》을 강독하였다. 정언 변황(卞榥)이 탑전에 나아가 남용익의 일을 아뢰니, 상이 체차하도록 명하였다.
상이 함릉 부원군(咸陵府院君) 이해(李澥)가 연로한 훈신(勳臣)이라는 이유로 특별히 명하여 불러보고 또 품고 있는 생각을 물으니, 이해가 아뢰기를,
"근래에 대소의 관원들이 부지런히 직무에 종사하지 않고 있으니 성상께서 진작시키소서."
하였다. 이어 이해가 봉조청(奉朝請)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경의 뜻을 들어주지 않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선조(先朝)의 훈구 신하가 경 한 사람 뿐이니 어떻게 물러가도록 허락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해가 파하고 나갈 때 어린 환관을 시켜서 부축하고 나아가도록 명하였다.
햇무리가 졌다. 밤에 유성이 나타났는데, 빛이 땅을 비추었다.
예조가 요사스러운 기운이 사라지고 측후(測候)하는 것도 정지하였다는 이유로 오늘부터 정전(正殿)에 다시 임어하고 상선(常膳)을 회복하기를 청하니, 상이 일렀다.
"아뢴 대로 시행하되, 굶어 죽은 시체가 길에 널렸고 백성들이 살아가기가 어렵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항상 슬퍼 밥을 먹어도 목에 넘어가지 않았는데, 무슨 마음으로 상선을 회복하겠는가. 가을이 되기를 기다리라."
3월 8일 병오
정륜(鄭錀)을 우승지로, 이정(李程)을 좌부승지로, 이합(李柙)을 집의로, 유거(柳椐)를 장령으로, 이경휘(李慶徽)를 이조 참판으로, 심재(沈梓)를 경상 감사로, 이상진(李尙眞)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우의정 송시열이 사면시켜 주기를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의 재주와 학식은 참으로 보필하는 임무를 맡기에 합당한데, 경은 어찌하여 굳이 사양하는가. 내가 고대한 지 이미 오래되었으니 모름지기 나의 지극한 뜻을 체득하여 마음을 바꾸어 올라와서 현재의 어려운 상황을 구제하라."
하였는데, 사관을 보내어 유시를 전하였다.
3월 11일 기유
조복양을 예조 판서로, 강백년(姜栢年)을 대사간으로, 박세당(朴世堂)을 정언으로, 이혜(李嵆)를 지평으로, 이동로(李東老)를 집의로 삼았다.
정언 이숙달(李叔達)이 ‘직에 나아온 후 해가 아직 많이 남았는데도 전계(前啓)를 정계하여 물의가 그르게 여긴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장령 유거(柳椐)가 처치하여 출사시키기를 청하였는데, 물의가 역시 그르게 여겼다. 이숙달과 유거가 모두 인피하니, 체차하였다.
판부사 허적(許積)이 충주(忠州)에서 올라와 강가에 도착하여 상소를 올려 면직시켜 주기를 청하니, 상이 사관을 보내어 유시를 전하였다.
"경이 올라왔다는 소식을 듣고 내가 몹시 기뻤다. 맹자가 말한 ‘큰 가뭄에 비구름을 바라듯 한다.’는 것이 바로 오늘날을 두고 한 말이다. 사양하지 말고 속히 들어와서 나의 마음을 위로하라."
3월 12일 경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판부사 허적이 입조(入朝)하였다. 당시에 허적이 군기시 및 훈국(訓局)의 제조를 겸대하고 있었는데 다리 병이 있어서 꿇어앉지 못하니, 상이 숙배를 하지 말도록 명하고 인견하였다. 그러자 허적이 눈물을 흘리면서 아뢰기를,
"죄와 허물이 몹시 중한데도 돌보아주심이 더욱 융숭하여 염치를 돌아보지 않고 죽음을 무릅쓰고 올라왔습니다."
하니, 상이 몹시 은근하게 위로하였다. 허적이 이어 강원도 지방을 시급히 구휼해야 한다고 아뢰자, 상이 구휼할 물자를 내려줄 것을 명하였다. 승지 홍만용(洪萬容)이 아뢰기를,
"오랫동안 경연을 폐하던 끝에 소대한다는 명이 있었으므로 듣고 보는 사람들이 모두들 좋아하였습니다. 그런데 연이어 기우제의 재계(齋戒)를 만나 도로 정지하였으므로 모두들 실망하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요즈음 몸이 편치 않아 정지하여 나 역시 섭섭하다. 며칠 지난 뒤에 다시 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자, 만용이 아뢰기를,
"옛날에 한 문제(漢文帝)는 선실(宣室)에서 음복(飮福)을 하면서도 가의(賈誼)를 불러 보았습니다. 비록 재계하는 중이더라도 유신(儒臣)을 불러들여 경서를 강론한다면 어찌 하늘을 공경하는 도리에 보탬이 없겠습니까."
하였다.
3월 13일 신해
민정중(閔鼎重)을 대사간으로, 이휴징(李休徵)을 장령으로, 윤형성(尹衡聖)을 헌납으로, 오시복(吳始復)을 지평으로, 송규렴(宋奎濂)을 정언으로 삼았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를 인견하여 진구책(賑救策)에 대하여 의논하였다. 의논을 마치고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온양(溫陽)에 행차한 데 대한 상격(賞格)이, 첫해에는 전에 없던 거조였고 다음해에는 자전(慈殿)을 모시고 행차하였으므로 여러 사람들이 혹 그럴 수도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번은 전의 두 해와는 차이가 있는데 하필 여러 사람들의 뜻을 굳이 어기십니까."
하니, 상이 아무 말이 없었다. 부수찬 김만중(金萬重)이 아뢰기를,
"대신이 시골에 있을 때 특별히 중사(中使)를 보내어 불렀다고 하는데, 옛 사람은 정(旌)으로 우인(虞人)을 부른 것도 오히려 불가하다고 하였으니, 이는 대신을 공경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이미 지나간 일이나 뒤 폐단에 관계가 되므로 감히 우러러 진달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정으로 우인을 불렀다는 말에 대해서는 내가 그 뜻을 모르겠다. 대신이 귀양갈 때 혹 중사를 시켜서 호송해 가게 하였는데, 인조 때에도 이런 규례가 있었다."
하자, 만중이 아뢰기를,
"불러오고자 할 경우에는 승지나 사관을 보내면 족합니다. 하필 별도로 중사를 보내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족(足)자의 뜻을 내가 이해하지 못하겠다. 중사를 보내는 것이 과중하다는 말인가?"
하자, 만중이 아뢰기를,
"승지나 사관을 보내면 부족하지 않다는 뜻이지 중사를 보내는 것은 과중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임금에게 고하는 말을 어찌 변동하는가. 중사를 보내는 것은 내가 처음으로 한 것이 아니다."
하였다. 지평 이혜가 아뢰기를,
"비록 승지나 사관을 보내더라도 대신이 명에 나아올 수 있는데 지금 내관을 보내었으니, 이는 외조(外朝)의 신하를 내관보다 가볍게 여긴 것입니다. 김만중의 뜻은 이것이 온당치 않다고 여긴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만중의 말은 몹시 간특하다."
하자, 승지 이정(李程)이 아뢰기를,
"자신의 생각을 말한 것일 뿐 단연코 다른 속셈은 없습니다."
하니, 상이 노한 목소리로 이르기를,
"만중의 말이 이와 같이 간특한데, 너 역시 이 자리에서 들었으면서도 이에 감히 비호한단 말인가. 몹시 외람되다. 이정과 만중을 먼저 파직한 다음 추고하라."
하였다 이혜가 아뢰기를,
"두 신하를 파직한 다음 추고하라는 명을 신이 환수하라고 청하여야 마땅한데, 이정은 바로 신의 종형(從兄)입니다. 혐의가 있어서 감히 논하지 못하겠으니, 신을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이번의 이 거조는 온당치 못할 뿐만 아니라 허적에게도 방해로운 점이 있으니, 조금 위엄을 거두시어 파직한 다음 추고하라는 명을 환수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정원이 아뢰기를,
"신들이 조금 전에 듣건대, 입시하였던 승지와 옥당의 관원이 아울러 특별히 파직하라는 명을 받았다고 합니다. 비록 상세한 곡절은 모르겠으나 이것은 반드시 성상을 가까이에서 모심을 믿고 품은 생각을 진달하고자 한 것일 뿐입니다. 크나큰 천지는 모든 물체를 포용하며, 기뻐함과 노여워함은 중도에 맞게 하는 것이 귀중한 법입니다. 성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내가 이미 친히 들었는데 너희들이 어찌 감히 그 사이에서 비호하는가."
하였다. 세 번 아뢰었으나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전라도 나주(羅州)·창평(昌平)·영암(靈巖) 등 고을에 지진이 있었다.
3월 14일 임자
황해도 해주(海州)·서흥(瑞興) 등의 읍내에 크게 불이 났다.
헌납 윤형성이 아뢰기를,
"지평 이혜가 혐의가 있어서 논열하지 않은 것은 형세상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만, 혐의스러움이 없는 부분에 대해서도 논계하지 않았으니, 대간의 체모로 볼 때 그대로 자리에 있기 어렵습니다. 체차하소서. 무릇 대신에게 유시함에 있어서는 근시(近侍)가 있는데 특별히 중사를 보낸 것은, 그것이 비록 은근하고도 간절한 성상의 뜻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체모와 존경하는 도리에 있어서는 일반적인 규례와 다른 점이 있습니다. 경연의 신하가 진달한 바는 대개 이 때문입니다. 그런데 말이 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여 자세하게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가까이에서 모시는 신하가 진달한 바에 이르러서도 어찌 조그만치라도 사사로운 뜻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성상의 위엄을 촉발시키자 갑자기 벌을 내렸으니, 이것이 어찌 대성인(大聖人)의 화평한 기상이겠습니까. 파직한 다음 추고하라는 명을 환수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홍문관이 차자를 올려 김만중과 이정을 파직한 다음 추고하라는 명을 도로 거둘 것을 청하니, 상이 답하였다.
"어제의 대화를 내가 상세히 들었다. 평순(平順)한 뜻이 있었다면 내가 어찌 이런 벌을 내렸겠는가. 그 부정한 작태는 참으로 눈뜨고는 차마 볼 수 없었다."
3월 15일 계축
조복양(趙復陽)을 겸 대사성으로, 변황(卞榥)을 지평으로 삼았다.
소대하여 《중용》을 강독하였다. 강독을 마치고서 지평 오시복(吳始復)이 행행하였을 때의 상을 주라는 명을 도로 거둘 것을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약방(藥房) 이외에는 모두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또 김만중과 이정을 파직한 다음 추고하라는 명을 도로 거둘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고, 이정은 추고만 하라고 명하였다.
옥당의 관원인 이규령(李奎齡)·정석(鄭晳) 등이 아뢰기를,
"김만중의 뜻은 결단코 대신을 우대하는 것을 그르다고 한 것이 아닙니다."
하고, 정태화가 아뢰기를,
"김만중이 스스로 결단코 다른 뜻은 없다고 말하고 있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다른 뜻은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전하께서만 필시 다른 속셈이 있다고 하십니까. 지금 구언(求言)하는 때를 당해서 죄주는 것은 옳지 않으며, 허적도 반드시 불안해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의 말도 이와 같으니 도로 명을 거두라."
하였다.
사헌부가 아뢰기를,
"행행하였을 때의 상격에 대해서 이미 도로 거두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유독 약방에 대해서만은 무슨 구별하는 뜻이 있어서 일체로 따라주지 않으십니까."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3월 17일 을묘
헌납 윤형성이 ‘병조 낭관을 파직한 다음 추고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는 아룀을 홀로 정계하여 물의가 그르게 여긴다.’는 이유로 인피하니, 면직하였다.
우의정 송시열이 다시 상소하여 면직시켜 주기를 청하니, 상이 온화한 말로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3월 18일 병진
대제학 김수항(金壽恒)이 모상(母喪)을 당하니, 상이 대신 가운데 일찍이 대제학을 지낸 자에게 천거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영부사 이경석(李景奭)이 병으로 인해 예궐하지 못하고 상소하여 사양하니, 상이 글로 써보내어 천거하게 하였다.
조복양(趙復陽)을 대제학으로, 신익상(申翼相)을 검열로, 유거(柳椐)를 장령으로, 민종도(閔宗道)·홍수하(洪受河)를 정언으로, 권격(權格)을 헌납으로 삼았다.
3월 19일 정사
산천단(山川壇)과 성황단(城隍壇)에 제사를 지내라고 명하였다. 또 중신(重臣)을 보내어 북교(北郊)에서 여제(厲祭)를 지내라고 명하였다. 또 근신을 보내어 험천(險川)·쌍령(雙嶺)·금화(金化)·토산(兎山)·강화(江華)에서 싸우다가 죽은 장사들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명하였는데, 험천 등 5곳은 병자년 난리 때 싸움터였던 곳이다. 이때 여역(癘疫)이 몹시 치성하여 중외에 죽은 자가 잇따랐는데, 교리 이규령(李奎齡)이 제사를 지내어 기도하기를 청하고, 예조가 강화에는 본부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하라고 아뢰었는데, 상이 따른 것이다. 뒤에 강화 유수 서필원(徐必遠)이 모두 근신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기를 계청하자, 상이 따랐다.
지평 변황(卞榥)이 전에 간관으로 있을 때 부호군 권우(權堣)와 경상 감사 남용익(南龍翼), 비안 현감(比安縣監) 이민도(李敏道)가 옥사를 처리하면서 체모를 잃은 죄를 논핵할 때 참여하였는데 권우의 함답(緘答)에 언관을 헐뜯었고 또 남용익 등의 일이 사실이 아니었으므로 인피하였으며, 헌납 권격(權格)도 권우를 논계하는 데 참여하였다는 이유로 따라서 인피하였다. 헌부가 처치하여 변황은 체차하고 권격은 출사시켰다.
3월 20일 무오
이때 양사가 행행하였을 때의 약방의 상격에 대한 일로 여러달 동안 논핵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헌납 권격이 기우제에 참여한 제관(祭官)에게 상을 주라는 명을 환수하기를 청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뒤에 대신의 말에 따라 비로소 환수하라고 명하였다.
3월 22일 경신
박세당(朴世堂)을 지평으로 삼았다.
집의 이동로(李東老), 장령 유거(柳椐), 지평 오시복(吳始復) 등이 탄핵하기를,
"공조 판서 구인기(具仁墍)는 논핵을 받은 뒤에도 염치를 무릅쓰고 행공하여 스스로 처신하는 도리를 생각지 않았습니다. 육부의 장관 자리에 있는 것은 마땅치 않으니 체차하소서."
하였는데, 여러 차례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인기는 취할 만한 점이 없었는데도 훈구(勳舊)라는 이유로 특별히 정경(正卿)에 제수되었으니, 명기를 욕되게 함이 심하다.
3월 23일 신유
도성에서 10리 안의 사산(四山)에 소속된 곳은 한성부에서 금화(禁火)를 관장하고, 10리 바깥의 양주(楊州) 지역에 속하는 곳은 본주에서 금화를 관장하는 것을 정식(定式)으로 삼게 하였다.
민충단(愍忠壇)에 제사를 지내라고 명하였다. 민충단은 홍제원(弘濟院) 근처에 있는데, 임진 왜란 후에 명나라에서 동정(東征)한 장사(將士)들로 싸우다가 죽은 자들을 위하여 단을 쌓고 제사를 지내었는데, 우리 나라에서 그대로 이어 제사를 지내다가 병자 호란 이전에 제사를 폐하고 지내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호조 판서 김좌명이 다시 제사를 지내기를 청한 것이다.
상이 경연의 신하들에게 일렀다.
"옥사를 심리하는 일을 비록 자주 해서는 안 되나 현재 가뭄이 몹시 심하니, 해조로 하여금 재계가 지난 뒤에 속히 판결하도록 하되, 그 가운데 가벼이 의논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뒷날 등대하였을 때 품의하여 처리하게 하라."
3월 24일 임술
경상도에 전염병으로 죽은 자가 2백 30여 명이라고 감사가 보고하였다. 각도에서 전염병으로 인해 죽었다고 잇따라 보고해 온 수가 헤아릴 수 조차 없었다.
3월 25일 계해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여러 신하들과 함께 죄수를 판결하여 풀어 주었다. 집의 이동로가 경연석상에서 살인죄를 지은 죄인 이세공(李世恭)에 대해 말하자, 상이 좌우에 물으니,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살인에 관한 옥사는 가볍게 의논할 수 없습니다."
하고, 헌납 권격이 ‘오랫동안 가두어 놓고 판결하지 않았다.’고 하고, 수찬 이혜(李嵆)가 ‘마땅히 이온(李溫)과 같은 예로 해야 한다.’고 말하자, 상이 이르기를,
"여러 사람들의 의논이 이와 같으니 감사(減死)하여 정배(定配)하라."
하였다. 우참찬 이경억이 아뢰기를,
"살인한 중죄를 삼사의 신하가 함께 용서해 주기를 청하는 것은 몹시 옳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이에 이동로 등이 소란스럽게 인피하니, 상이 이르기를,
"너는 용서해 주기를 청하지 않았으니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권격이 끝내 환수하기를 청하지 않은 잘못을 이유로 인피하고서 물러갔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이세공의 죄에 대해 아래에서 감해 주기를 청하는 것은 일이 몹시 온당치 않습니다. 이경억의 말이 옳으니 방면하는 명단에서 삭제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동로와 권격을 처치하여 모두 면직시켰다.
민정중(閔鼎重)을 대사성으로 삼았다. 민정중이 당시에 인망이 있어서 여러 차례에 이 직임에 제수되었으나 인재를 양성하는 성과가 없었다.
각사의 노비 신공(奴婢身貢)을 각각 반 필을 감하라고 명하였는데, 이조 정랑 이단하(李端夏)의 말을 따른 것이다.
3월 26일 갑자
여제(厲祭)를 지낼 관원인 여성제(呂聖齊)를 험천(險川)에, 정석(鄭晳)을 쌍령(雙嶺)에, 이선(李選)을 금화(金化)에, 정재숭(鄭載嵩)을 토산(兎山)에, 남이성(南二星)을 강화(江華)에 보내었는데, 모두 옥당의 관원이다.
전 지평 신경윤(愼景尹), 전 정 김익훈(金益勳), 전 참의 김익경(金益炅)을 모두 옥리(獄吏)에게 내렸다. 김익훈은 세족(世族)이었으나 행실이 좋지 못하였는데, 정(正)에 제수되자 신경윤이 전의 패려한 행실을 들어 탄핵하였다. 김익훈이 이에 신경윤의 아비인 신영건(愼永健)이 일찍이 혼조(昏朝) 때 상소를 올려 모후(母后)를 폐할 것을 청하여서 인조조 때 죄를 받아 북변으로 귀양갔었다고 떠들어 대면서, 신경윤은 흉인(凶人)의 자식이라서 청반(淸班)에 있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하였다. 그러자 신경윤이 상소를 올려 스스로를 밝히고 또 김익훈 등이 자신을 모함한 정상을 말하였다. 이에 일을 금부에 내리고 모두 옥에 가두었으며, 또 전후의 죄적(罪籍) 가운데서 신영건이 죄를 받은 이유에 대해 조사하게 한 것이다.
재난을 당한 경상도의 18고을에서 응당 바쳐야 할 세폐(歲幣) 중에서 상목(上木) 1천 9백 필을 감하라고 명하였다.
민정중(閔鼎重)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3월 27일 을축
교서를 내려 구언(求言)하고 정전을 피하였으며, 반찬을 줄이고 음악을 철폐하였다. 이때 가뭄이 몹시 심하자 상이 수교(手敎)를 내려 이르기를,
"아, 오늘날 국가의 형세가 어찌하여 이처럼 극도에까지 이르렀단 말인가. 말과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나도 모르게 마음이 참담해진다. 내가 임금답지 못한 자질로 임금 자리에 올라 하늘의 재앙과 백성들의 원망을 불러들임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므로 한밤중에 가슴을 어루만지면서 몹시도 두려워하고 있다.
현재 가뭄이 몹시도 혹심한데, 지난 가을부터 가뭄이 들더니 해가 바뀌어 봄이 이미 다 지나갔는데도 간간이 가랑비만 내렸을 뿐 시원스럽게 비가 쏟아지지 않았으며, 햇빛은 쨍땡 내려쬐고 스산한 바람만 불고 있다. 봄에 씨앗을 뿌리지 못하였는데 가을 추수를 어떻게 바랄 수 있겠는가. 참으로 애처로운 것은 봄보리가 다 떨어져가 백성들이 모두 굶어죽게 된 것이다. 오늘날의 상황이 불행히도 가뭄에 대해 읊은 운한시(雲漢詩)의 내용과 비슷하니,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 아, 죄는 나 한 사람에게 있는 것이다. 백성들이야 무슨 죄가 있겠는가. 그런데 어찌하여 나에게 재앙이 내리지 않고 지금 도리어 백성들에게 해가 미치는가. 아픔이 나에게 있는 것만 같아 위급함을 무어라 말할 수 없는 바, 차라리 아무 것도 들리지 않게 죽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아, 국사가 비록 이 지경에 이르렀지만 감히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하면서 스스로 나를 돌보아주는 하늘을 끊을 수 있겠는가. 정전(正殿)을 피하고 수성(修省)하는 것을 오늘부터 더욱 힘써 조금이나마 하늘의 꾸짖음에 답하도록 하겠다.
다만 생각건대, 조정의 신하들이 서로 협동한다는 말을 들을 수가 없고, 인심이 날로 투박해지고 조정의 의논이 날로 분열되어 사의(私意)가 크게 행해지고 공도(公道)는 전혀 없어졌다. 심한 자는 그 사이에서 시비를 현란시켜 반드시 사사로운 뜻을 이루고 있으니, 어찌 크게 한심한 일이 아니겠는가. 전에 여러 차례나 서로 협동하라고 신칙하였으나 성과가 전혀 없었다. 대각(臺閣)에 논박하여 바로잡아주는 거조가 전혀 없는 것이 어찌 다른 이유에서이겠는가. 이미 서로 협동하지 못하는데 어느 겨를에 다른 사람을 논핵하겠는가. 내가 참으로 놀랍게 여긴다. 너희 대소 신민들은 국사의 어려움을 생각하고 내가 책려하는 지극한 뜻을 생각하여 서로 협동하도록 더욱 힘쓰고 각자의 직분에 더욱 부지런하여서 지난날과 같이 그럭저럭 지내지 말도록 하라.
교서가 이미 내렸는데도 올바른 말을 들을 수가 없는 바, 이는 참으로 나의 실덕(失德)에서 말미암은 것이기에 몹시도 부끄럽다. 그러나 나의 임금은 어찌할 수가 없다고 하지 말라고 한 맹자의 가르침 역시 몹시도 엄절하니, 어찌 이를 생각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땅히 전에 내린 전지(傳旨)를 준수하여 나를 불초하다고 여기지 말고 좋은 말을 두루 진달해 나의 부족한 점을 보충해달라. 음악을 철폐하는 등의 일은 해조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열 줄의 윤음(綸音)이 말뜻이 간절하고도 애닯습니다. 항상 이런 마음을 간직하여 더욱 수성해서 하늘의 노여움을 돌이키는 것은 성상께서 얼마만큼 스스로 힘쓰느냐에 달렸습니다. 삼가 성상의 교시로 중외에 포고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글이 거칠고 졸렬하여 마음은 몹시 아픈데 만에 하나도 표현하지 못하였다. 승지가 나 대신 짓는 것이 마땅하다. 경계시켜 깨우쳐 준 말은 내가 몹시 가상하게 여기니, 감히 마음에 새겨 스스로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3월 28일 병인
정원이 또 아뢰면서 성상의 교시로 중외에 포고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사신은 논한다. 해를 이어서 크게 기근이 들어 나라를 보존하기 어렵게 되었는데도 별달리 경동하여 크게 진작시키는 거조가 없었다. 그러니 비록 간절한 교시가 있다 하더라도 도리어 무슨 보탬이 있겠는가. 정원은 몇 줄의 글로 찬미하기만 할 뿐이며, 또한 명을 따르고 교시를 받들지 못하였다. 위에서는 수성하는 실제가 없고 아래에서는 서로 협동할 희망이 끊어져 시행하지 못할 빈말이 되고 말았으니 식견있는 자가 탄식함이 어떠하겠는가.
【태백산사고본】 14책 14권 44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577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과학-천기(天氣) / 왕실-국왕(國王) / 역사-편사(編史)
사신은 논한다. 해를 이어서 크게 기근이 들어 나라를 보존하기 어렵게 되었는데도 별달리 경동하여 크게 진작시키는 거조가 없었다. 그러니 비록 간절한 교시가 있다 하더라도 도리어 무슨 보탬이 있겠는가. 정원은 몇 줄의 글로 찬미하기만 할 뿐이며, 또한 명을 따르고 교시를 받들지 못하였다. 위에서는 수성하는 실제가 없고 아래에서는 서로 협동할 희망이 끊어져 시행하지 못할 빈말이 되고 말았으니 식견있는 자가 탄식함이 어떠하겠는가.
정원과 옥당이 면대를 청하니 상이 인견하였다. 도승지 오정위가 분발시켜 인재를 얻을 것을 진달하고, 승지 이태연이 실제를 힘쓰라고 아뢰었으며, 교리 윤심(尹深)이 자주 신하들을 접견하라고 아뢰고, 부수찬 이혜(李嵆)가 숙배(肅拜)하는 수령들을 인견하라고 아뢰었는데, 상이 서로 공경하고 협심하며 각자 자신의 직책에 힘쓰라고 하교하였다. 수찬 정석(鄭晳)이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는 오늘날의 병통을 꼭 맞추었습니다. 신하들이 직무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서로 공경하고 협심하지 못하는 것은 참으로 신하들에게 그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근원이 맑으면 흐름이 깨끗한 법으로, 이것은 성상께서 어떻게 이끌어 가시느냐에 달렸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위에서는 분발하여 진작시키는 거조가 없고 아래에서는 마음을 다해 봉공하는 사람이 없다. 그러므로 위에서 아래에 하교하고 아래에서 위에 고하는 말이 ‘각자의 직책에 부지런하라.’느니, ‘분발하여 이끌어 가라.’느니 하는 데 불과하니, 그 요령을 얻지 못하여 끝내 실효가 없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맥이 풀린 채 그럭저럭 세월만 보내는 것이 실로 오늘날의 고질적인 폐단이다. 양사가 상의 하교 중에, 전혀 바로잡아주는 거조가 없고 서로 협동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4책 14권 44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577면
【분류】왕실-국왕(國王) / 정론-정론(政論) / 과학-천기(天氣) / 역사-편사(編史) / 인사-임면(任免)
사신은 논한다. 위에서는 분발하여 진작시키는 거조가 없고 아래에서는 마음을 다해 봉공하는 사람이 없다. 그러므로 위에서 아래에 하교하고 아래에서 위에 고하는 말이 ‘각자의 직책에 부지런하라.’느니, ‘분발하여 이끌어 가라.’느니 하는 데 불과하니, 그 요령을 얻지 못하여 끝내 실효가 없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맥이 풀린 채 그럭저럭 세월만 보내는 것이 실로 오늘날의 고질적인 폐단이다.
양사가 상의 하교 중에, 전혀 바로잡아주는 거조가 없고 서로 협동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허적(許積)을 좌의정으로, 우의정 송시열(宋時烈)을 겸 세자부로, 이경억(李慶億)을 대사헌으로, 이단상(李端相)을 응교로, 이합(李柙)을 집의로, 윤형성(尹衡聖)을 헌납으로 삼았다.
정평(定平) 향리(鄕吏) 김계조(金繼祖)의 아내인 양녀(良女) 서계향(徐桂香)을 정표(旌表)하라고 명하였다. 김계조의 집에 불이 났는데 서계향이 고모와 조부모의 신주(神主)를 구하고자 치솟는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가 신주를 안고 나오다가 미처 나오지 못해 끝내 불에 타 죽고 말았다. 감사가 이 사실을 아뢰자 상이 본도로 하여금 휼전(恤典)을 거행하고 정표하라고 한 것이다.
3월 29일 정묘
상이 눈병이 있어서 양심합(養心閤)에 납시어 침을 맞았다. 의관 등은 입시하고 약방 제조와 사관은 희정당(熙政堂)에 있으면서 입시하지 못하였다. 그 뒤에도 모두 이와 같이 하였는데, 이것은 올바른 예법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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