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14권, 현종 9년 1668년 4월

싸라리리 2025. 12. 11.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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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일 경오

이경휘(李慶徽)를 부제학으로, 권격(權格)을 장령으로, 조헌경(曺憲卿)을 지평으로 삼았다.

 

4월 3일 신미

상이 침을 맞은 후에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호조 판서 김좌명이 나아가 아뢰기를,
"전조(銓曹)에서 사람을 쓰는 것이 공정하지 않습니다. 당상은 낭관에게 떠맡겨 버리니 몹시 형편없습니다."
하고, 또 붕당의 폐단에 대해 아뢰기를,
"자기편 의견만 주장하고 반대편 의견은 배척하니 어떻게 공도(公道)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이조 판서 박장원이 아뢰기를,
"낭관에 대한 일은 어찌 김좌명의 말과 같겠습니까."
하였다. 예조 판서 조복양이 아뢰기를,
"붕당의 폐단은 이미 백 년이나 되었는데, 처음에 발하였을 때에는 지금보다 더 심하였습니다. 요즈음에는 쓸 만한데도 쓰지 않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요즈음 당론이 성하다고 나 역시 들었다."
하자, 김좌명이 아뢰기를,
"박장원과 조복양은 모두 면전에서 속이고 있습니다."
하니,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붕당에 대한 말을 어찌 감히 탑전에서 한단 말입니까."
하고, 대사헌 이경억이 아뢰기를,
"김좌명이 면전에서 속이고 한 말은 몹시 그릅니다. 조복양의 말 역시 불평스러운 기색이 많으니 아울러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부총관 조한영(曺漢英)은 이미 함부로 직소(直所)를 떠난 잘못이 있는데 지난 번에 기우제의 제관에 차출되어서도 병을 핑계대고 나아가지 않았으니, 몹시 태만합니다.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우선 추고만 하라고 하였다.

 

우의정 송시열이 세 번이나 상소를 올려 사면시켜 줄 것을 청하니, 상이 승지를 보내어 도타운 말로 유시하였다.

 

4월 4일 임신

정석(鄭晳)을 사간으로 삼았다.

 

좌의정 허적이 상소하여 사면시켜 주기를 청하니, 상이 답하였다.
"경에게 국가의 안위가 달렸고 의리상 국가와 휴척을 함께 하여야 하니 한결같이 사양만 해서는 안 된다. 모름지기 나의 지극한 뜻을 체득하여 속히 나와서 치도를 논하라."

 

4월 5일 계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4월 9일 정축

이상진(李尙眞)을 대사간으로, 권격(權格)을 사간으로, 이관징(李觀徵)을 헌납으로, 정시성(鄭始成)을 정언으로, 정양(鄭瀁)을 장령으로 삼았다.

 

홍문관이 구언에 따라 전지에 응하여 상차해서 여덟 조목에 대해 논하였는데, 첫째는 뜻을 세울 것, 둘째는 정무를 힘쓸 것, 셋째는 용사(用舍)를 신중히 할 것, 넷째는 기강을 진작시킬 것, 다섯째는 궁금(宮禁)을 엄히 할 것, 여섯째는 사치를 없앨 것, 일곱째는 둔전을 혁파할 것, 여덟째는 양민을 돌볼 것이었다. 내용 중에 채용할 만한 것이 많았으나 뒤에 끝내 실제로 채용한 것이 없었다.

 

4월 10일 무인

좌의정 허적이 상소하여 사면시켜 주기를 청하니, 상이 따스한 말로 비답하였다.

 

4월 12일 경진

대사헌 이경억, 지평 조헌경이 탄핵하기를,
"좌참찬 조형(趙珩)이 근수(跟隨)가 정원을 초과하여 병조에서 아뢰어 하리(下吏)를 잡아 가두었는데, 특별히 추고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조형은 결속 색리(結束色吏)004)  가 고소한 것에 대해 분노하여 색리의 정처(正妻)를 잡아 가두어서 분을 풀려고 하였습니다. 재상의 반열에 있으면서 분의(分義)가 엄함을 생각하지 않고 이와 같이 놀라운 짓을 하였으니,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4월 13일 신사

쌀과 콩 각 1만 곡(斛)으로 경기 고을의 기민을 구제하고 남쪽에서 운반해 온 쌀 4천 곡으로 충청도와 황해도 두 도의 기민을 구제하라고 명하였다.

 

여러 궁가(宮家)에서 민전을 침범하여 절수(折受)받는 폐단과 조신(朝臣)들이 장복(章服) 외에 입는 옷에 당물(唐物)을 사용하는 것을 금하는 법을 신명하였는데, 옥당의 상차를 따른 것이다.

 

김인후(金麟厚)를 정경(正卿)에, 강항(姜沆)·김덕령(金德齡) 등을 당상에 추증하라고 명하였다.
김인후는 호가 하서(河西)이며 경학(經學)에 밝고 행실이 뛰어나 옥당에 들어와 교리가 되었다. 인종에게 인정을 받아 인종이 장차 크게 쓰려 하였다. 인종이 승하한 후에는 병을 칭하고 벼슬하지 않았으며, 매년 인종의 기일(忌日)을 만나면 홀로 산속에 들어가 통곡하고 돌아왔으므로 ‘해마다 칠월이면 온 산중에 통곡소리[年年七月日 慟哭萬山中]’라는 시구가 있게 되었다.
강항은 임진 왜란 때 호조의 낭관으로서 호남 지방에 갔다가 왜적에게 포로가 되어 일본에서 10여 년을 살았다. 본국으로 돌아와서는 세상에 용납되지 못하였으나 선정(先正)의 여러 신하들이 그의 절의에 대해 많이들 칭송하였으며, 그가 지은 《간양록(看羊錄)》이 세상에 전한다.
김덕령은 임진 왜란 때 의병장으로 세상에서 ‘익호 장군(翼虎將軍)’이라고 하며, 역옥(逆獄)에 연루되어 죽었는데, 대개 당시 사람들이 그의 용력을 꺼려서 모함하여 죽인 것이다.
교리 이단하(李端夏)가 이 세 사람의 행적을 상소를 올려 말하자, 이에 이 명이 있게 된 것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강항은 임진 왜란을 당하여 왜적에게 포로가 되어 고용살이를 하다가 쫓겨났다. 이에 왜적의 자제들을 모아 글을 가르쳐 주고 쌀을 받아 살아가다가 십여 년이 지난 뒤에 배를 훔쳐 타고 도망쳐 왔는데, 선조께서 버려둔 채 등용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를 일러 왜적에게 항복하였다고 하는 것은 지나치나, 그에게 무슨 칭할 만한 절의가 있겠는가. 그런데도 이단하는 당론에 병들어서 감히 추증하기를 청하였으니, 참으로 《논어》에서 말한 ‘내가 누구를 속이겠는가. 하늘을 속이겠는가.’ 하는 것이다.

 

4월 17일 을유

윤형성(尹衡聖)을 장령으로, 이규령(李奎齡)·홍수하(洪受河)를 지평으로, 송준길(宋浚吉)을 대사헌으로, 민정중(閔鼎重)을 대사성으로, 이정영(李正英)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사간 권격이 아뢰기를,
"한재가 몹시 참혹하여 상하가 모두 걱정하고 있으니 기우제를 공경스럽게 지내는 정성을 누가 감히 태만히 하겠습니까. 그런데도 예조 참판 조한영(曺漢英)과 복평군(福平君) 이연(李㮒)은 제관(祭官)으로 차출된 뒤에 끝내 나아가서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니, 사체로 헤아려 볼 때 참으로 몹시 한심스럽습니다. 파직하라고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고 이르기를,
"아울러 우선 중한 쪽으로 추고하라."
하였다.

 

4월 18일 병술

이정(李程)을 승지로, 성진병(成震丙)을 장령으로 삼았다.

 

집의 이합(李柙)이 아뢰기를,
"봉산(鳳山)에 사는 전삼해(全三海)가 그의 아비인 전의명(全義明)을 위하여 본부에 억울함을 하소연하기를 ‘군수 정동설(鄭東卨)이 아버지가 데리고 잔 관비(官婢)와 몰래 간통하고는 질투심으로 인해 혐원을 품고 죄목을 날조하여 감사에게 거짓으로 보고해 엄한 형신을 받다가 죽게 하였다. 내가 감사에게 원통함을 하소연하였는데, 전 감사가 처리한 일이라고 핑계대면서 끝내 조사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과연 이것이 사실이라면 일이 몹시 놀랍습니다. 정동설을 잡아다 추문하고, 감사 김우형(金宇亨)도 중한 쪽으로 추고하라고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4월 19일 정해

집의 이합이 아뢰기를,
"부호군 정두제(鄭斗齊)는 대궐 앞을 지나면서 말에서 내리지 않아 추고를 받은 뒤에 함문(緘問)에 사실대로 답하지 않았으며, 또 대관(臺官)을 침해하였으니 일이 몹시 놀랍습니다. 파직하소서."
하였는데, 여러 차례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사간 권격, 헌납 이관징(李觀徵)이 이조 참판 이정영(李正英)을 체직하라고 논계하면서 아뢰기를,
"이조의 참판은 한때의 극선(極選)으로 참으로 명망과 실상이 모두 뛰어나고 공평하고 밝음이 평소에 드러나지 않은 자는 이 자리를 차지할 수 없습니다. 이정영은 인망이 본디 가벼운데 갑자기 본직에 제수되었으므로 물정이 모두 흡족하지 않게 여기고 있습니다. 또 지난번에 간원의 장관으로 있을 때 폐단을 진달한 상소를 올렸는데, 수령이 탐장(貪贓)한 일을 언급하였으니 즉시 이름을 들어 탄핵하여 바로 잡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행공한 지 여러 날이 지났어도 끝내 논핵하지 않았습니다. 대간의 체모가 어찌 이럴 수 있겠습니까. 체차하소서. 이른바 탐장한 수령도 이정영에게 물어서 처치하소서."
하니, 상이 단지 물어보라는 청만 따르고 체직하라는 아룀은 따르지 않았다.

 

이유(李𣞗)와 이삼재(李三才)의 패륜한 죄를 치죄하였다. 이류는 글을 읽은 사람이고 재주와 행실이 있어 여러 차례 특별히 천거되었는데, 사실은 재물을 탐하고 이끗을 좋아하여 불의(不義)를 많이 행하였는 바, 그의 조카인 이삼재와 몇 이랑의 밭을 다투어 불미스러운 말이 사대부들 사이에 전파되었다. 이에 대간이 이들 숙질을 잡아가두고 치죄하기를 청하여 마침내 유배되는 형을 받은 것이다.

 

4월 20일 무자

집의 이합이 아뢰기를,
"황주(黃州)는 바로 큰길가의 커다란 고을인데 수토(水土)가 나쁘고 관리들이 자주 바뀌어 날로 쇠락해 지고 있습니다. 또 병사(兵使)가 목사를 겸임하여 가솔을 거느리고 가 해를 끼침이 끝이 없어 낱낱이 거론할 수가 없습니다. 일이 백성들을 다스리는 정사에 관계되면 병사는 ‘나와는 상관이 없다.’고 하고, 독촉하여 받아들이는 데 관계되면 ‘나는 목사를 겸임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에 호령하는 즈음에 흔단이 쉽게 생겨나며 공억(供億)하는 사이에 관곡이 탕갈되어 백성들에게 마구 긁어들이므로 위태롭기가 물이나 불속에 있는 것과 같은 바, 만약 제때에 변통하지 않는다면 버려진 고을이 될 것입니다. 병사가 가솔을 거느리고 가는 규정을 없애고 예전 규례에 의거해 목사를 차출하며, 병영과 주(州)를 분리하여 고질적인 폐단을 혁파하소서."
하니, 상이 묘당에서 품의하여 처리하라고 하였다.

 

4월 22일 경인

원양도(原襄道) 평강현(平康縣)에 우박이 내리고 벼락이 사람을 쳤다.

 

우의정 송시열이 상소를 올려 사면시켜 주기를 청하니, 상이 온화한 말로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으며, 사관을 보내어 유시하였다.

 

4월 23일 신묘

집의 이합이 인피하여 아뢰기를,
"봉산 군수 정동설(鄭東卨)이 질투심으로 인하여 사람을 죽였다는 설이 도성 안에 전파되었으므로 신이 정동설을 잡아다가 추문하고 감사를 추고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지금 듣건대, 물의가 토민(土民)의 정장(呈狀)을 인하여 곧장 잡아다가 추문하기를 청한 것은 뒤 폐단에 관계가 된다고 합니다. 신은 논사하는 데 마땅함을 잃었으니, 체차하소서."
하고, 물러나 물론을 기다렸다. 헌부가 처치하여 잘못한 바가 없다고 하면서 출사시키기를 청하였다.

 

사간 권격이 인피하여 아뢰기를,
"이조 참판 이정영이 폐단을 진달한 상소 중에 ‘경기의 수령이 진휼할 곡식을 사사로이 썼다.’는 말이 있었으니, 행공한 뒤에는 즉시 이름을 거론하여 논핵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록 아무 말없이 있더니 끝내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대간의 체모를 손상시킴이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이정영에게 물어보지 않으면 불법을 저지른 수령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이정영이 이미 언관에서 체직되었으니 또한 물어보는 데 무슨 방해로움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듣건대, 물의가, 물어보는 것은 뒤 폐단에 관계가 된다고 하면서 몹시 그르게 여긴다고 합니다. 체차하소서."
하고, 물러나 물론을 기다렸다. 헌납 이관징(李觀徵) 역시 이를 이유로 인피하였다. 간원이 처치하여 모두 체차하였다.

 

정언 정시성(鄭始成)이 아뢰기를,
"이정영이 비록 언관의 직에서 체직되었다 하더라도 재직하였을 때의 일로 물어보기까지 하는 것은 사체를 손상시키는 점이 있습니다. 명을 중지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남구만(南九萬)을 승지로, 이태연(李泰淵)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전 판서 조경(趙絅)에게 보국 숭록 대부를 가자하였는데, 노인을 우대하는 전례(典禮)였다.

 

함경도 경성부(鏡城府)에 재[灰]가 내렸다. 부령(富寧)에도 같은 날에 재가 내렸다.

 

4월 24일 임진

집의 이합 등이 아뢰기를,
"대관의 사체는 다른 관원들과는 현격하게 달라 진정(賑政)을 겸하여 살필 수 없습니다. 대간의 직책이 체차되기 전에는 다른 낭관이 대신 살피게 하여 대간의 체모를 보존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문신 당상 이상과 당하 시종신 및 무신으로 일찍이 곤수(閫帥) 이상을 지낸 자의 부모로 나이가 70세 이상인 자에게 옷감과 음식물을 차등있게 하사하였다.

 

4월 25일 계사

민정중(閔鼎重)을 우빈객으로, 이은상(李殷相)을 형조 참판으로, 권령(權坽)을 우윤으로, 여성제(呂聖齊)를 사간으로, 이세장(李世長)을 이조 좌랑으로, 이휴징(李休徵)을 장령으로, 윤형성(尹衡聖)을 헌납으로 삼았다.
사신은 논한다. 민정중은 중한 인망을 지니고 있었으나 지나치게 각박한 병통이 있었다. 이은상은 문재(文才)가 있었으나 청근(淸謹)한 조행이 없었다. 여성제는 평온하고 조용한 마음이 부족하였으며, 이세장은 명민하다는 칭찬이 있었다. 권령과 윤형성은 용렬한데도 구차하게 충원된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14책 14권 46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578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역사-편사(編史)
사신은 논한다. 민정중은 중한 인망을 지니고 있었으나 지나치게 각박한 병통이 있었다. 이은상은 문재(文才)가 있었으나 청근(淸謹)한 조행이 없었다. 여성제는 평온하고 조용한 마음이 부족하였으며, 이세장은 명민하다는 칭찬이 있었다. 권령과 윤형성은 용렬한데도 구차하게 충원된 것이다.

 

4월 26일 갑오

상이 양심합(養心閤)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대신에게 이르기를,
"함경도에 재가 내린 이변은 몹시 놀랍다. 박승후(朴承後)의 상소 가운데 말하기를 ‘하늘 주위가 20여 곳이 터졌다.’고 하였는데, 좌상이 시골에 있을 때 그것을 들었는가?"
하니, 허적이 대답하기를,
"그런 말이 있었습니다. 동쪽 하늘이 갈라졌는데 빛이 화경(火鏡)과 같았습니다. 또 붉은 말이 서로 싸우는 듯한 모양이 있었는데 말을 전하는 자가 몹시 많았습니다. 다음날 북쪽에 붉은 기운이 있었으며, 또 다음날 이상한 흰기운이 있었습니다. 하늘이 열리는 것은 태평의 기상이고 하늘이 갈라지는 것은 쇠란의 조짐이라고 합니다."
하였다. 영상 정태화가 황해도 병영이 가솔을 거느리고 가는 것을 혁파하고 목사를 차출할 일을 품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만약 잘 변통하지 않으면 도리어 예전 그대로 두는 것만 못하다."
하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인재를 얻는 것이 중요합니다. 판관과 목사가 어찌 다르겠습니까."
하자, 허적이 아뢰기를,
"신의 생각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해하지 못할 점이 있습니다. 다른 도에도 목사를 겸임하는 경우가 없지 않은데 유독 황주만 폐단이 심하니, 설립한 처음에 잘못 구획해서 그런 것은 아닙니까. 본도로 하여금 먼저 폐단을 조사하게 한 다음에 변통하는 것을 의논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 뒤에 본도에서 조사해 아뢴 것을 인해서 끝내 정지되었다. 정태화가 이정영은 형세상 편히 있기 어려움을 말하고 상께 그를 체직시키기를 권유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정영이 과연 이조 참판에 합당하지 못한가?"
하니, 대답하기를,
"어찌 그렇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내가 체직을 허락하지 않는 것도 역시 그 때문이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이정영은 평온하고 고요함을 스스로 지킵니다. 만약 분주하게 교유하였다면 반드시 이런 탄핵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탄핵을 받았으니 억지로 행공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자, 상이 이에 체직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이정영은 대단한 하자는 없었으나 청아한 명망은 물정에 흡족하지 않았으니, 그를 탄핵한 것은 괴이한 일이 아니다. 그러니 대신이 이정영을 위해 두둔할 경우에는 형세상 억지로 출사하기 어려움을 진달하여 조정에서 재신을 예로 대우하는 체모를 보존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지금 말이 이와 같으니, 종전에 이 직임에 있었으되 대간이 논핵하지 않은 자가 어찌 모두 분주하게 교유한 자이겠는가.  허적이 아뢰기를, "정동설은 상사(上司)에 보고하고 형추하였으니 함부로 살해한 데 비할 것이 아닙니다. 고을 백성의 하소로 인하여 곧바로 잡아다 추문하기를 청하는 것은 일이 몹시 타당치 않습니다." 하니, 좌우 사람들도 대부분 그르다고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본도로 하여금 조사해 아뢰게 한 다음에 처치하라." 하였다. 그 후에 본도에서 전삼해 등이 무고한 상황을 조사해 아뢰자 법에 의거해 죄를 정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법사에서 먼저 영을 정한 후 금지해야 백성들이 피할 바를 알게 되어 소요스런 폐단이 없게 됩니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금령이 간혹 백성들이 미처 생각지 못한 데서 나오므로 여염에서 소요스러움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하고, 이어 몇 가지 일에 대해 진달하였으며, 여러 신하들도 이에 대해 말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금조(禁條)는 예전과 지금이 사의가 다르니 헌부와 한성부·형조로 하여금 묘당에 와서 의논해 옛 조문 중에서 삭제할 만한 것은 삭제하고 새 조목에 첨가할 만한 것을 첨가해 다시 정식을 만들어 거행하게 하라." 하였는데, 그 후에 형조와 한성부의 금조는 몇 달만에 완성되었으나 헌부의 금조는 3년이 지나도 완성되지 않았다. 허적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당론이 있느니 하는 말이 경연에서 나왔는데, 김좌명은 있다고 하고 조복양은 없다고 하여 두 신하의 말이 이와 같이 서로 달랐는데도 성상께서는 두 사람을 화해시켰을 뿐 전혀 분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없는데도 있다고 하였으면 김좌명이 죄가 있는 것이고 있는데도 없다고 하였으면 조복양이 죄가 있는 것으로, 시비를 가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조복양이 일어나 절을 하며 아뢰기를, "신은 그날 없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대개 계해년 이후의 같고 다름에 대해 진달하였으며, 또한 오늘날에는 인재가 적체되지 않았음을 말했을 뿐입니다." 하자, 허적이 아뢰기를, "계해년 이후로는 두루 등용한다는 말은 참으로 옳으나 당론은 요즈음보다 더 심한 때가 없었습니다." 하니, 김좌명이 아뢰기를, "신은 이미 거짓말을 하였으니 아무 말없이 있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그날 조복양이 이쪽과 저쪽을 두루 등용한다고 하면서 편당이 없다고 하므로 신이 조복양이 면전에서 속인다고 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신이 어찌 그런 말을 하였겠습니까. 지금 조복양의 말을 듣건대 신의 말과 다름이 없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날의 대화를 영상도 들었다." 하니, 정태화가 대답하기를, "조복양은 전혀 없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대개 계해년 이후에 두루 등용하는 것에 대해 말하였는데 그 말이 끝나기 전에 지레 면전에서 속인다고 지척을 받은 것입니다. 지금 조복양의 말을 들으니 김좌명의 생각과 같습니다." 하자, 허적이 아뢰기를, "신은 소란을 일으키려는 것이 아니라 계해년 초에는 서로 화평하게 지냈는데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니 상께서 신들을 계칙하여야 마땅하고 신들도 서로 계칙해야 마땅합니다."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허적이 정승에 제수되어 등대하면서 먼저 이 일을 발론하여 조복양에게 무고죄를 가하려고 하였는데, 대개 조복양이 당론에 몹시 준열하여 한쪽 편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삼가 살펴보건대, 김좌명과 조복양이 동서(東西) 편당의 유무로 탑전에서 서로 다투었으니, 이 한 가지 일만 보더라도 조정이 존엄하지 못하고 기강이 해이된 것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조복양은 감히 동인과 서인을 두루 등용하여 적체됨이 없다는 말을 진달하였는데, 이 당시에 말로 죄를 받은 자가 몇 사람이며, 재주가 있으면서도 배척을 받은 자가 몇 사람이었던가. 그런데도 감히 임금 앞에서 이렇게까지 속였으니, 몹시도 거리낌이 없는 자라고 하겠다. 그런데 위에서는 죄를 주지 못하고 아래에서는 감히 다 말하지 못하니, 아, 나라가 위태롭다고 하겠다.


【태백산사고본】 14책 14권 47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578면
【분류】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 사법-치안(治安) / 과학-천기(天氣) / 군사-군정(軍政) / 인사-임면(任免) / 역사-편사(編史)
사신은 논한다. 이정영은 대단한 하자는 없었으나 청아한 명망은 물정에 흡족하지 않았으니, 그를 탄핵한 것은 괴이한 일이 아니다. 그러니 대신이 이정영을 위해 두둔할 경우에는 형세상 억지로 출사하기 어려움을 진달하여 조정에서 재신을 예로 대우하는 체모를 보존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지금 말이 이와 같으니, 종전에 이 직임에 있었으되 대간이 논핵하지 않은 자가 어찌 모두 분주하게 교유한 자이겠는가.
허적이 아뢰기를,
"정동설은 상사(上司)에 보고하고 형추하였으니 함부로 살해한 데 비할 것이 아닙니다. 고을 백성의 하소로 인하여 곧바로 잡아다 추문하기를 청하는 것은 일이 몹시 타당치 않습니다."
하니, 좌우 사람들도 대부분 그르다고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본도로 하여금 조사해 아뢰게 한 다음에 처치하라."
하였다. 그 후에 본도에서 전삼해 등이 무고한 상황을 조사해 아뢰자 법에 의거해 죄를 정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법사에서 먼저 영을 정한 후 금지해야 백성들이 피할 바를 알게 되어 소요스런 폐단이 없게 됩니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금령이 간혹 백성들이 미처 생각지 못한 데서 나오므로 여염에서 소요스러움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하고, 이어 몇 가지 일에 대해 진달하였으며, 여러 신하들도 이에 대해 말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금조(禁條)는 예전과 지금이 사의가 다르니 헌부와 한성부·형조로 하여금 묘당에 와서 의논해 옛 조문 중에서 삭제할 만한 것은 삭제하고 새 조목에 첨가할 만한 것을 첨가해 다시 정식을 만들어 거행하게 하라."
하였는데, 그 후에 형조와 한성부의 금조는 몇 달만에 완성되었으나 헌부의 금조는 3년이 지나도 완성되지 않았다. 허적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당론이 있느니 하는 말이 경연에서 나왔는데, 김좌명은 있다고 하고 조복양은 없다고 하여 두 신하의 말이 이와 같이 서로 달랐는데도 성상께서는 두 사람을 화해시켰을 뿐 전혀 분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없는데도 있다고 하였으면 김좌명이 죄가 있는 것이고 있는데도 없다고 하였으면 조복양이 죄가 있는 것으로, 시비를 가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조복양이 일어나 절을 하며 아뢰기를,
"신은 그날 없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대개 계해년 이후의 같고 다름에 대해 진달하였으며, 또한 오늘날에는 인재가 적체되지 않았음을 말했을 뿐입니다."
하자, 허적이 아뢰기를,
"계해년 이후로는 두루 등용한다는 말은 참으로 옳으나 당론은 요즈음보다 더 심한 때가 없었습니다."
하니, 김좌명이 아뢰기를,
"신은 이미 거짓말을 하였으니 아무 말없이 있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그날 조복양이 이쪽과 저쪽을 두루 등용한다고 하면서 편당이 없다고 하므로 신이 조복양이 면전에서 속인다고 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신이 어찌 그런 말을 하였겠습니까. 지금 조복양의 말을 듣건대 신의 말과 다름이 없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날의 대화를 영상도 들었다."
하니, 정태화가 대답하기를,
"조복양은 전혀 없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대개 계해년 이후에 두루 등용하는 것에 대해 말하였는데 그 말이 끝나기 전에 지레 면전에서 속인다고 지척을 받은 것입니다. 지금 조복양의 말을 들으니 김좌명의 생각과 같습니다."
하자, 허적이 아뢰기를,
"신은 소란을 일으키려는 것이 아니라 계해년 초에는 서로 화평하게 지냈는데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니 상께서 신들을 계칙하여야 마땅하고 신들도 서로 계칙해야 마땅합니다."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허적이 정승에 제수되어 등대하면서 먼저 이 일을 발론하여 조복양에게 무고죄를 가하려고 하였는데, 대개 조복양이 당론에 몹시 준열하여 한쪽 편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삼가 살펴보건대, 김좌명과 조복양이 동서(東西) 편당의 유무로 탑전에서 서로 다투었으니, 이 한 가지 일만 보더라도 조정이 존엄하지 못하고 기강이 해이된 것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조복양은 감히 동인과 서인을 두루 등용하여 적체됨이 없다는 말을 진달하였는데, 이 당시에 말로 죄를 받은 자가 몇 사람이며, 재주가 있으면서도 배척을 받은 자가 몇 사람이었던가. 그런데도 감히 임금 앞에서 이렇게까지 속였으니, 몹시도 거리낌이 없는 자라고 하겠다. 그런데 위에서는 죄를 주지 못하고 아래에서는 감히 다 말하지 못하니, 아, 나라가 위태롭다고 하겠다.


【태백산사고본】 14책 14권 47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578면
【분류】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 사법-치안(治安) / 과학-천기(天氣) / 군사-군정(軍政) / 인사-임면(任免) / 역사-편사(編史)
사신은 논한다. 허적이 정승에 제수되어 등대하면서 먼저 이 일을 발론하여 조복양에게 무고죄를 가하려고 하였는데, 대개 조복양이 당론에 몹시 준열하여 한쪽 편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삼가 살펴보건대, 김좌명과 조복양이 동서(東西) 편당의 유무로 탑전에서 서로 다투었으니, 이 한 가지 일만 보더라도 조정이 존엄하지 못하고 기강이 해이된 것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조복양은 감히 동인과 서인을 두루 등용하여 적체됨이 없다는 말을 진달하였는데, 이 당시에 말로 죄를 받은 자가 몇 사람이며, 재주가 있으면서도 배척을 받은 자가 몇 사람이었던가. 그런데도 감히 임금 앞에서 이렇게까지 속였으니, 몹시도 거리낌이 없는 자라고 하겠다. 그런데 위에서는 죄를 주지 못하고 아래에서는 감히 다 말하지 못하니, 아, 나라가 위태롭다고 하겠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4월 27일 을미

집의 이합, 지평 홍수하가 정동설을 잡아다 추문하라고 청하였다가 대신에게 지적당하였다는 이유로 인피하니, 면직하였다.

 

홍처량(洪處亮)을 대사간으로, 이경휘(李慶徽)를 이조 참판으로, 남이성(南二星)을 부응교로, 이규령(李奎齡)을 교리로, 박세당(朴世堂)을 수찬으로, 신후재(申厚載)를 지평으로, 이성징(李星徵)을 황해 감사로 삼았다.
사신은 논한다. 남이성은 발탁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청현직을 두루 역임하였으나 재주와 식견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점이 없었다. 박세당은 구차하게 벼슬길에 나아갈 뜻이 없었으며, 이성징은 대신이 재능이 있다고 천거하여 파직된 가운데서 차임해 보낸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14책 14권 48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579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역사-편사(編史)
사신은 논한다. 남이성은 발탁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청현직을 두루 역임하였으나 재주와 식견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점이 없었다. 박세당은 구차하게 벼슬길에 나아갈 뜻이 없었으며, 이성징은 대신이 재능이 있다고 천거하여 파직된 가운데서 차임해 보낸 것이다.

 

4월 28일 병신

이때 팔도에 전염병이 크게 퍼져 잇따라 죽었는데, 천연두와 홍역으로 죽은 자가 더욱 많았다. 경성의 5부에서 죽었다고 보고한 자가 9백여 인이었는데, 실제로는 이루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의관으로 하여금 약을 가지고 가 구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4월 29일 정유

예조 판서 조복양이 상소하여 면직시켜 주기를 청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는데, 대신에게 지적을 당하였기 때문이었다. 호조 판서 김좌명도 스스로 편안치 못하여 상소하여 면직시켜 주기를 청하였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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