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일 무술
정언 송창(宋昌)이 인피하여 아뢰기를,
"서천 군수(舒川郡守) 안명로(安命老)는 일찍이 남쪽과 북쪽 지방의 수령이 되었을 때 도처에서 정사를 잘못하였으나. 이미 부임하였기에 우선 앞으로 하는 것을 보고서 처치해도 혹 늦지 않을 듯하였으므로 즉시 논죄하지 않고 단지 대관을 찾아보지 않았다는 한 조목만으로 추고하기를 청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듣건대 물의가 그르게 여긴다고 합니다. 체차하여 주소서."
하니, 헌부가 처치하여 출사시키기를 청하였다. 송창이 출사하고는 여러 차례 파직시켜 주기를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사신은 논한다. 안명로가 과연 수령의 직임을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이라면 사실에 의거하여 논핵하는 것이 옳다. 그런데 부임하였다는 핑계로 우선 다른 일을 거론하면서 추고하기를 청하였으니, 구차하기가 심하다. 송창이 비록 죄상을 논핵한다 하더라도 이미 손상된 대간의 체모에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정사를 잘못한 한 수령을 논하면서 여러 날 쟁집하며 상하가 서로 버티고 있으니 손상됨이 적지 않다.
【태백산사고본】 14책 14권 48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579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역사-편사(編史)
사신은 논한다. 안명로가 과연 수령의 직임을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이라면 사실에 의거하여 논핵하는 것이 옳다. 그런데 부임하였다는 핑계로 우선 다른 일을 거론하면서 추고하기를 청하였으니, 구차하기가 심하다. 송창이 비록 죄상을 논핵한다 하더라도 이미 손상된 대간의 체모에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정사를 잘못한 한 수령을 논하면서 여러 날 쟁집하며 상하가 서로 버티고 있으니 손상됨이 적지 않다.
관학 유생 홍수헌(洪受瀗) 등 1백 70여 명이 상소하여 계성묘(啓聖廟)를 세우기를 청하고 또 선유(先儒) 이통(李侗)을 문묘(文廟)의 종사(從祀)하는 반열에 올리기를 청하니, 상이 답하였다.
"이 일은 참으로 중대한 일이어서 지금 갑자기 거행하기는 곤란하다. 너희들은 물러가 학업을 닦아라."
양녀(良女) 윤덕(閏德)은 부여(扶餘) 사람인데, 어렸을 때 부모를 효성껏 섬겼으며 시집가서는 시부모를 친부모처럼 섬겼다. 남편의 상을 당해서는 곡하고 슬퍼함이 한결같이 지성에서 나왔으며, 무덤에 묻고 난 다음에는 목욕한 다음 자결하여 남편의 뒤를 따랐는데, 초빈(草殯)한 곳에서 흰기운 한 줄기가 위로 뻗쳐 하늘까지 닿았으므로 사람들이 지성에 감동한 소치하고 하였다. 감사가 이 사실을 아뢰자 상이 정표(旌表)하라고 명하였다.
평안도 창성(昌城)·박천(博川) 등 10여 고을에 우박이 내려 각종 곡식이 크게 손상되었다.
5월 5일 임인
간원이 자산 군수(慈山郡守) 배상도(裵尙度)가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 것을 탄핵하면서 파직하기를 청하였는데, 세 번째 아뢰자 이에 따랐다.
송준길(宋浚吉)을 찬선으로, 민정중(閔鼎重)을 대사헌으로, 이익(李翊)을 승지로, 이단하(李端夏)를 교리로, 송규렴(宋奎濂)을 수찬으로 삼았다.
사신은 논한다. 이익은 어려서 명망이 있었으나 김익렴(金益廉)과 틈이 벌어진 뒤 김익렴의 편을 드는 자들이 하자를 지적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태백산사고본】 14책 14권 48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579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역사-편사(編史)
사신은 논한다. 이익은 어려서 명망이 있었으나 김익렴(金益廉)과 틈이 벌어진 뒤 김익렴의 편을 드는 자들이 하자를 지적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숙정 공주(淑靜公主)가 졸하였다. 상이 애도하고 3일간 조시(朝市)를 정지하였다. 거애 절목(擧哀節目)을 즉시 취품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예관을 즉시 잡아들이라고 명하였는데, 정원이 잡아다 추문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아뢰면서 도로 거두기를 청하자. 상이 이르기를,
"당상은 중한 쪽으로 추고하라."
하였다. 이때 판서인 조복양은 인피하여 들어가고 참의 이준구(李俊耉)가 혼자서 행공하고 있었는데 위인이 흐릿하여 제대로 살피지 못하고 이서(吏胥)들에게 물어서 예를 정하니, 사람들이 모두 비웃었다.
전의(全義)·목천(木川) 등지에 서리가 내렸다. 명천(明川)에 사는 사람의 머리 오른편에 뿔이 났는데, 흡사 양의 굽은 뿔과 같았으며, 경성부(鏡城府)에서는 말 오른쪽 귀 속에 무엇이 났는데, 수탉의 벼슬과 같은 것이 살도 아니고 뿔도 아니었으며, 길이가 5푼가량 되었다.
5월 6일 계묘
예조가 아뢰기를,
"공주와 옹주의 상에는 거애하는 절목이 있으나 근래에는 모두 거행하지 않았으며, 대신의 상에도 성상의 몸이 편찮아서 거행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이 숙정 공주의 상에 거애하는 한 조목은 어떻게 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절목을 작성하여 들이라."
하였다. 예조가 절목을 들이니, 상이 이르기를,
"편전에서 거애하겠다."
하였다. 예조가 또 아뢰기를,
"왕대비께서도 거애하는 절차가 있어야 하는데, 《오례의》에는 없습니다. 어떻게 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무술년에 있었던 대군의 상례에 의거해서 하되 거애하는 한 조목은 절목 가운데 넣지 말라."
하였다. 왕세자 역시 거애하는 것이 마땅한데 현재 나이가 어리므로 예조가 계품하여 권정(權停)하였다.
미시에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숙정 공주를 위하여 거애하였는데, 백관이 옥색 단령(玉色團領)에 오사모(烏紗帽)·흑각대(黑角帶)로 협양문(恊陽門) 바깥에 늘어 섰고 승지와 사관이 희인문(熙仁門) 바깥에 늘어 앉았다. 예를 마친 후 좌상 허적이 백관을 거느리고 문안하였다.
좌상 허적이 안에서 거애할 때 백관이 소복으로 궐정에서 조애(助哀)한 것은 올바른 예가 아니라는 이유로 예관과 해당 승지를 추고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5월 8일 을사
함경도에 우역(牛疫)과 마역(馬疫)이 크게 퍼져 전후로 죽은 것이 1만 8천 1백여 마리였다.
평안도 창성(昌城) 등 10여 고을에 바람이 크게 불고 천둥과 벼락이 쳤으며, 우박이 쏟아졌는데 크기가 오리알만하였으며, 사람이 벼락에 맞아 죽고 초목이 남아난 것이 없었다.
5월 12일 기유
남쪽에서 운반해 온 쌀 1만 3천 석을 도성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명하였다.
호조 판서 김좌명이 사직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 헌납 윤형성이 상소하여 김좌명과 조복양이 탑전에서 서로 다툰 잘못을 지척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윤형성은 여러 차례 대각에 들어갔는데, 그날 입시하였던 대관으로서 끝내 한 마디도 않다가 오늘에야 비로소 말하였으며, 말한 것도 실정에 지나치니, 어쩌면 그리도 어긋났단 말인가.
【태백산사고본】 14책 14권 49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579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역사-편사(編史)
사신은 논한다. 윤형성은 여러 차례 대각에 들어갔는데, 그날 입시하였던 대관으로서 끝내 한 마디도 않다가 오늘에야 비로소 말하였으며, 말한 것도 실정에 지나치니, 어쩌면 그리도 어긋났단 말인가.
함경도 갑산(甲山)·삼수(三水)에 눈이 내렸다.
5월 13일 경술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 및 삼사를 인견하였다. 좌상 허적이 아뢰기를,
"대간은 십분 잘 가려서 임용해야 합니다. 소결(疏決)할 때 이동로가 집의로서 입시하여 살인한 죄수인 이세공(李世恭)을 풀어주기를 청하였는데, 어찌 이와같은 대간이 있단 말입니까. 이미 지나간 일이나 중한 벌을 내려 뒷사람을 징계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법을 집행하는 관원이 먼저 법을 무너뜨리다니, 실로 뒤 폐단에 관계가 된다. 파직하라."
하였다. 허적이 또 아뢰기를,
"이완(李浣)의 말을 듣건대 ‘포도청에서 몰래 엿보는 일이 있는데, 어떤 대관이 본청의 하인을 잡아다가 속히 몰래 엿보는 일을 정지하게 하고 도리어 정장한 사람을 치죄하였다.’고 합니다. 어찌 이와 같은 대관도 있단 말입니까."
하니, 상이 누구냐고 물었다. 허적이 아뢰기를,
"최문식(崔文湜)인데 지금은 대간의 직에 있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일이 몹시 놀라우니 최문식을 먼저 파직한 다음 추고하라."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신이 지난번에 사사로운 뜻을 끊어 버려야만 국사를 다스릴 수 있다고 진달하였습니다. 요즈음 듣건대 신천(信川)의 어의궁(於義宮) 둔전 백성이 선격(船格)들에게 침해를 당하자 본군 향소(鄕所)의 7인을 경기에 옮겨 가두고 5차례나 형신하였다고 합니다. 둔전 백성을 침해하는 것은 참으로 죄주어야 하나 본도로 하여금 죄주게 하면 충분합니다. 하필 옮겨 가둔단 말입니까. 죄인들의 자녀가 원통함을 하소연하는 소리가 듣기에 애처롭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형벌을 시행하였으니 풀어주라."
하였다. 정언 민종도(閔宗道)가 상가(賞加)와 상격(賞格)을 환수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대사헌 민정중이 아뢰기를,
"해마다 논상하기를 응당 행해야 할 것처럼 하고 있으니, 사리로 헤아려 볼 때 실로 몹시 타당치 않습니다. 대관이 이와 같이 쟁론하는데도 따르지 않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상격과 상가는 차이가 있는데 아울러 환수하기를 청하다니, 내가 이해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이때 와서 민정중이 상의 뜻을 알아차리고 단지 상가와 자제들에게 직을 제수하라는 명만 환수하기를 청하니, 상이 즉시 따랐다. 또 아뢰기를,
"진휼할 곡식을 경기 고을에 주어 그들로 하여금 나누어주게 한 것은 실로 기근을 진념하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듣건대 각 고을의 수령들이 민결(民結)에 따라 응당 주어야 할 숫자를 빼어내어 사사로이 서울에 사는 사람에게 주었으므로 백성들이 원망하여 비방하는 말이 퍼지고 있다고 합니다. 수령으로 있는 자가 굶주린 백성들이 먹을 것을 빼앗아 서로 아는 자에게 생색을 낼 밑천으로 삼고 있으니, 그 마음씀이 가증스럽고 일이 몹시 놀랍습니다. 이 일은 사사로움을 따르고 법을 무시한 것일 뿐만이 아닙니다. 본도 감사로 하여금 일일이 적발하여 계문한 다음 죄를 다스리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뒤에 끝내 적발하지 못하였다고 감사 장선징이 계문하고 대죄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상이 과연 이동로가 법을 굽힌 것이 가증스럽고 대관이 논계하지 않은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면, 대관을 심하게 책하여 말하지 않은 잘못을 바로잡고 인하여 이동로를 다스려 법을 무너뜨린 폐단을 징계했어야 했다. 그런데 어찌하여 처음에는 이동로의 죄수를 석방하라는 아룀을 따르고 뒤에는 대신의 말로 인하여 그에 대한 벌을 내린단 말인가. 이와 같이 하면 위복(威福)의 권한이 아래로 옮겨가지 않는 것이 얼마나 되겠는가.
【태백산사고본】 14책 14권 49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579면
【분류】구휼(救恤) / 왕실-국왕(國王) /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사법-치안(治安) / 사법-탄핵(彈劾) / 사법-행형(行刑) / 재정-역(役)
사신은 논한다. 상이 과연 이동로가 법을 굽힌 것이 가증스럽고 대관이 논계하지 않은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면, 대관을 심하게 책하여 말하지 않은 잘못을 바로잡고 인하여 이동로를 다스려 법을 무너뜨린 폐단을 징계했어야 했다. 그런데 어찌하여 처음에는 이동로의 죄수를 석방하라는 아룀을 따르고 뒤에는 대신의 말로 인하여 그에 대한 벌을 내린단 말인가. 이와 같이 하면 위복(威福)의 권한이 아래로 옮겨가지 않는 것이 얼마나 되겠는가.
지평 오시복(吳始復)과 신후재(申厚載)가 이동로의 잘못을 논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피하니, 면직하였다.
사신은 논한다.005) 위에서 과연 이동로가 법을 굽힌 것이 가증스럽고 대관이 논하지 않은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면 대관을 심하게 책하여 말하지 않은 잘못을 바로잡고 인하여 이동로를 다스려 법을 무너뜨린 폐단을 징계하였어야 했다. 그런데 어찌하여 처음에는 이동로의 죄수를 석방하라는 논의를 따르고 뒤에는 대신의 말로 인하여 벌을 시행한단 말인가. 이와 같이 하면 비록 사흉(四凶)과 같은 죄를 지은 자에게 곧장 찬축하는 법을 시행하더라도 사람들은 ‘죄를 준 자는 재상이다.’고 할 것이니, 위복(威福)의 권한이 아래로 옮겨지지 않음이 얼마나 되겠는가.
【태백산사고본】 14책 14권 49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579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사법-행형(行刑)
[註 005] 사신은 논한다. : 이 부분은 원문의 편집이 잘못된 듯하기에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사신은 논한다.005) 위에서 과연 이동로가 법을 굽힌 것이 가증스럽고 대관이 논하지 않은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면 대관을 심하게 책하여 말하지 않은 잘못을 바로잡고 인하여 이동로를 다스려 법을 무너뜨린 폐단을 징계하였어야 했다. 그런데 어찌하여 처음에는 이동로의 죄수를 석방하라는 논의를 따르고 뒤에는 대신의 말로 인하여 벌을 시행한단 말인가. 이와 같이 하면 비록 사흉(四凶)과 같은 죄를 지은 자에게 곧장 찬축하는 법을 시행하더라도 사람들은 ‘죄를 준 자는 재상이다.’고 할 것이니, 위복(威福)의 권한이 아래로 옮겨지지 않음이 얼마나 되겠는가.
충청도 15고을의 각사 노비 신공 가운데 일정하게 징수할 곳이 없는 것을 이미 견감토록 허락하였는데, 내수사가 직공 아문(直貢衙門)이라는 이유로 견감치 말도록 하였다. 이에 감사 민유중(閔維重)이 사유를 갖추어 아뢰니, 탕감하도록 명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이 기사 사론에 대한 본문은 현종실록에는 없으며, 현종개수실록 같은 날자(현종9년 5월 13일 1번째 기사)에 개수하여 수록되었다.] 상이 과연 이동로가 법을 굽힌 것이 가증스럽고 대관이 논계하지 않은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면, 대관을 심하게 책하여 말하지 않은 잘못을 바로잡고 인하여 이동로를 다스려 법을 무너뜨린 폐단을 징계했어야 했다. 그런데 어찌하여 처음에는 이동로의 죄수를 석방하라는 아룀을 따르고 뒤에는 대신의 말로 인하여 그에 대한 벌을 내린단 말인가. 이와 같이 하면 위복(威福)의 권한이 아래로 옮겨가지 않는 것이 얼마나 되겠는가.
【태백산사고본】 14책 14권 49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579면
【분류】재정-역(役) / 신분-천인(賤人) / 역사-편사(編史) / 사법-행형(行刑)
사신은 논한다. [이 기사 사론에 대한 본문은 현종실록에는 없으며, 현종개수실록 같은 날자(현종9년 5월 13일 1번째 기사)에 개수하여 수록되었다.] 상이 과연 이동로가 법을 굽힌 것이 가증스럽고 대관이 논계하지 않은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면, 대관을 심하게 책하여 말하지 않은 잘못을 바로잡고 인하여 이동로를 다스려 법을 무너뜨린 폐단을 징계했어야 했다. 그런데 어찌하여 처음에는 이동로의 죄수를 석방하라는 아룀을 따르고 뒤에는 대신의 말로 인하여 그에 대한 벌을 내린단 말인가. 이와 같이 하면 위복(威福)의 권한이 아래로 옮겨가지 않는 것이 얼마나 되겠는가.
5월 14일 신해
사간 여성제(呂聖齊)와 정언 송창(宋昌)이 특별히 천거한 것이 공정치 않다고 동료가 소를 올렸으며 이동로를 즉시 규핵하지 않아 성상의 분부가 있게 하였다는 이유로 인피하니, 헌부가 처치하여 송창은 체차시키고, 여성제는 미처 출사하지 않았으니 허물을 인책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는 이유로 출사시키기를 청하자 상이 따랐다. 이때 헌납 윤형성이 상소하여 특별히 천거한 것이 공정치 않다고 논하였으므로 천거한 대신(臺臣)들이 모두 불안하여 서로 이어서 인피하였다.
5월 16일 계축
대사헌 민정중과 집의 이유(李秞) 등이 논계하기를,
"사대부 집에서 군사를 고립(雇立)할 때 시끄럽게 청탁하고 마구 채찍질하고 있으니 병조로 하여금 적발하여 죄를 논하게 하소서. 위장(衛將)들도 이름을 지적하여 고하지 않았고 병조 판서 홍중보(洪重普)는 일찍이 적발하여 처치하지 않았으니 모두 잘못한 바가 있습니다. 모두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모두 따랐다.
의금부가 신경윤(愼景尹) 등의 일은 오랫동안 밝혀낼 수 없으며 도류안(徒流案)에도 끝내 상고할 만한 것이 없다는 이유로 상께서 결정하기를 청하였는데, 상이 판결하기를,
"이미 관청의 명백한 문서가 없으니 사체상 갑자기 단안을 내려서는 안 된다. 신경윤은 석방하라. 김익훈(金益勳)은 그간에 한 짓이 몹시 형편없다. 김익경(金益炅)은 담당하는 자리에 있지도 않으면서 인물을 통색(通塞)하고 사사로움에 따라 헐뜯고 추켜세워 이에 감히 입계하는 문서 가운데 크게 써 넣었으니, 방자하여 꺼림없음이 심하다. 단지 일에 대해 말한 자를 헐뜯은 죄로만 죄주는 것은 불가하니, 상세히 율문을 따져 중한 쪽으로 죄를 주라. 김익훈은 참작하여 율문을 적용하라."
하였다. 이때 김익경의 원정(元情) 가운데 신경윤 선대의 허물에 대해 극언하고, 또 ‘신경윤이 청현직에 들어갔을 때 신이 그의 선대의 허물을 들어 합당하지 않음을 말하였으므로 신경윤이 이 때문에 유감을 품었다.’고 하였는데, 상이 그가 임의대로 통색한 데 대해 노하고, 또 방자하게 입계하는 문서에다 써 넣은 것을 미워하여 그 죄를 다스리고자 하여 이런 명이 있었다.
사신은 논한다. 신경윤이 김익훈을 탄핵한 것이 반드시 김익경의 한 마디 말에서 말미암지만은 않았으니, 김익경이 이를 빙자하여 일을 논한 신하를 욕한 것은 반드시 유감을 품은 것인 바, 그가 조정을 무시하고 대관을 멸시한 것이 심하다. 그러니 방자하여 꺼림이 없는 죄를 어떻게 면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통색에 간여하였다는 것은, 이것이 어찌 죄인가. 가령 신경윤이 과연 청현직에 합당하지 않다면 사람마다 모두 말할 수 있는 것인데, 어찌 일찍이 간원의 장관을 지낸 자라 하여 유독 말할 수 없단 말인다. 상께 아뢴 일은 망발한 것일 뿐이다. 망발한 죄가 어찌 중한 쪽으로 죄를 주는 데에까지 이르겠는가. 경중이 전도되었다고 할 만하다.
【태백산사고본】 14책 14권 50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580면
【분류】사법-탄핵(彈劾) / 인사-임면(任免)
사신은 논한다. 신경윤이 김익훈을 탄핵한 것이 반드시 김익경의 한 마디 말에서 말미암지만은 않았으니, 김익경이 이를 빙자하여 일을 논한 신하를 욕한 것은 반드시 유감을 품은 것인 바, 그가 조정을 무시하고 대관을 멸시한 것이 심하다. 그러니 방자하여 꺼림이 없는 죄를 어떻게 면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통색에 간여하였다는 것은, 이것이 어찌 죄인가. 가령 신경윤이 과연 청현직에 합당하지 않다면 사람마다 모두 말할 수 있는 것인데, 어찌 일찍이 간원의 장관을 지낸 자라 하여 유독 말할 수 없단 말인다. 상께 아뢴 일은 망발한 것일 뿐이다. 망발한 죄가 어찌 중한 쪽으로 죄를 주는 데에까지 이르겠는가. 경중이 전도되었다고 할 만하다.
영의정 정태화가 정고(呈告)하니, 상이 불윤 비답을 내렸다.
사신은 논한다. 정태화는 재주가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났으며, 임기응변에 뛰어났다. 다만 재상이 된 지 20년 동안에 국사를 자신이 담당하려 하지 않았고 자신을 돌보는 계책에 능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이것을 단점으로 여겼다.
【태백산사고본】 14책 14권 50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580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역사-편사(編史)
사신은 논한다. 정태화는 재주가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났으며, 임기응변에 뛰어났다. 다만 재상이 된 지 20년 동안에 국사를 자신이 담당하려 하지 않았고 자신을 돌보는 계책에 능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이것을 단점으로 여겼다.
5월 18일 을묘
진하 겸 사은 정사 복창군(福昌君) 이정(李楨)과 부사 민희(閔熙), 서장관 정박(鄭樸) 등이 연경으로 갔다.
5월 19일 병진
이은상(李殷相)을 대사간으로, 장선징(張善瀓)을 병조 참판으로, 남용익(南龍翼)을 예조 참판으로, 이정영(李正英)을 호조 참판으로, 강백년(姜栢年)을 경기 감사로, 이익상(李翊相)을 부교리로, 이명익(李溟翼)을 지평으로, 정시성(鄭始成)·홍수하(洪受河)를 정언으로 삼았다.
5월 20일 정사
상이 침을 맞았다. 이때 숙정 공주(淑靜公主)의 상을 당하였고 숙녕 옹주(淑寧翁主)가 두역(痘疫)을 앓았으며, 숙안 공주(淑安公主)의 병이 중하였고 두 아들이 모두 두역을 앓았는데, 상이 두역을 겪지 않았으므로 서로 통하기가 어려웠다. 이에 여러 궁모(宮母)에게 병의 상황을 아뢰도록 명하고, 약방으로 하여금 글을 전하여 들이게 하였다. 약방 도제조 정치화가 아뢰기를,
"이와 같은 병은 듣지 않는 것만 못하니, 대단한 일 이외에는 속속 서계하지 않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뢴 뜻이 나라를 위해서인 줄은 알겠으나, 자주 듣지 않으면 마음이 몹시 답답하니, 조석으로 서계하라."
하였다. 정치화가 또 성상의 몸을 조섭하라고 계달하니, 상이 이르기를,
"막 상을 치루었는데 여러 곳에서 병이 또 이와 같구나. 위로 자전을 모시고 있어서 정을 억제하고는 있으나 걱정스런 마음에 속이 타는 듯하다."
하였다. 상께서 우애가 독실하여 죽음을 애도하고 병을 걱정하느라 옥체가 편치 않게 되었으므로 신하들이 걱정하였다.
숙녕 옹주가 죽었다. 옹주는 상의 서매(庶妹)였다. 상이 몹시 슬퍼하여 조시(朝市)를 정지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지금 이 숙녕 옹주의 상에는 거애하는 절목이 있는데, 전에 숙정 공주의 상에 거애할 때 대신이 실례(失禮)라고 하였으므로 지금 감히 곧바로 거행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리고 성상께서 바야흐로 편치 않으시니 안에서 편의에 따라 거애하는 것이 편할 듯힙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번에도 편전(便殿)에서 거애하는 전례에 따라 하라. 그리고 대신이 실례라고 한 한 조목은 대신에게 의논하여 아뢰라."
하였다.
5월 21일 무오
한성부가 방민(坊民)들의 16가지 폐단을 조목조목 거론하면서 묘당으로 하여금 품의하여 처리하게 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이때 방민들의 폐단이 아주 심하였는데 마침 참봉 박승후(朴承後)란 자가 소를 올려 진달하자 상이 한성부에 명하여, 오부(五部)의 관원을 불러다가 방민들이 응당 해야 할 역(役) 이외의 폐단에 대해 상세히 물은 다음 아뢰고서 처리하게 하였다. 이에 이완(李浣)이 판윤이 됨에 미쳐서 조목별로 아뢴 것이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5월 22일 기미
강화 유수 서필원(徐必遠)이 사직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서필원은 나이 어린 사람들에게 배척당하였으나 자못 성상의 총애를 받았으며, 이론(異論)을 좋아하고 화합하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지금 체직되어 다시 조정으로 들어오자 식자들이 혹 조정이 시끄러워질까 염려하였다.
헌납 윤형성이 이조 판서 박장원(朴長遠)이 상소를 올려 지척하였고 또 이동로(李東老)를 논계하지 않은 잘못이 있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대사헌 민정중이 소결(疏決)할 때 일을 착오나게 아뢴 잘못이 있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장령 성진병(成震丙)이 전에 영천 군수(永川郡守)로 있을 때 도배되는 형을 받았는데 본직에 제수되자 대신이 이를 말하였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는데, 모두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집의 이유(李秞)가 처치하기를,
"상소를 올려 소회를 진달하는 것은 반드시 혐의롭게 여길 필요는 없으나 즉시 규정하지 않았으니 그 잘못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윤형성을 체차하소서. 면대해서 원통한 정상을 진달한 것은 일을 아뢰는 체모를 얻은 것이니, 뜻밖에 이름이 바뀐 것은 원래 대단한 잘못이 아닙니다. 한때 견책을 당한 것은 이미 지나간 일이니 이를 이유로 언관을 가볍게 체직해서는 안 됩니다. 민정중과 성진병을 출사시키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5월 23일 경신
대사헌 민정중이 인피하기를,
"신이 어제 일을 착오나게 아뢰었다는 내용으로 스스로 논핵하고 물러갔습니다. 출사시키도록 처치한 것은 실로 생각지 않았던 것인데, 이에 뜻밖에 이름이 바뀐 것은 원래 대단한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신이 스스로 논핵한 것과 서로 어긋나는 것이니 어찌 태연히 그대로 있을 수 있겠습니까. 소결할 때 처음에 감형하라고 명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완전히 석방된 자들은 대신 활을 쏘게 한 자들입니다. 신이 진달한 내용 중에, 혼자만 빠져 원통해 하는 자가 있다고 한 것도 대신 활을 쏘게 한 자인데, 잘못 알아서 대신 쏘게 한 자가 아닌 자까지 뒤섞어서 거론하여 아울러 사면받게 하였으니, 원래 이름을 바꾸어 아뢴 것이 아니라 이는 모두가 착오나게 아뢴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것을 일러 대단한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윤형성은 경연에 같이 입시하였다가 아무 말없이 물러났으며 그 뒤에 여러 날이 지났는데도 한 마디 말도 없다가, 달이 지나 이미 헌관(憲官)을 거쳐 다시 간원의 직에 제수되어서야 비로소 말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실정에 지나치게 떠벌리면서 논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였습니다. 비답이 내림에 미쳐서는 고의적으로 전의 일을 인용하여 뜻이 체직되고자 하는 데 있으면서도 누누이 강변하여 본심이 아니었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거조입니까. 물정이 괴이하게 여기는 것은 참으로 당연한 것입니다. 반드시 혐의롭게 여길 필요는 없다는 논의는 과연 어디에 근거한 것입니까.
어사가 탐문하는 것은 사체가 중한 것이며 유배되는 형벌은 가벼운 벌이 아닙니다. 사면된 뒤에 다른 관직을 거치지 않고 먼저 대각에 들어왔으니 물의가 지나치게 뛰어오른 것에 대해 의아해 하는 것은 지나친 일이 아닙니다. 오래 전의 일이라고 핑계대는 것도 타당한지 모르겠습니다.
신은 이미 응당 체직되어야 할 잘못을 저질렀으며, 처치한 말도 또 사실과 어긋나니, 상께서 조섭 중에 계시지만 다시 아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신을 체차하소서."
하였다. 장령 성진병이 지척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집의 이유(李秞)가 처치한 것이 사실에 어긋났다는 이유로 인피하였으며, 장령 이휴징(李休徵)이 이동로를 논핵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옥당이 처치하여 모두 체차시키고 민정중만 출사시키기를 청하였다.
원양도(原襄道) 평강현(平康縣)에 4월 27일 우박이 내려 땅에 쌓였는데, 거의 1촌가량 되었다.
5월 25일 임술
이태연(李泰淵)을 평안 감사로 삼았다.
좌의정 허적이 면대를 청하여 상께 이어(移御)하기를 권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이때 외간에 ‘여러 궁가의 두역은 대궐 안에서 퍼진 것이다.’는 말이 전파되고, 또 궁중에 귀신의 변고가 많았으므로 허적이 이렇게 청한 것이다.
가주서 조창기(趙昌期)가 입시함을 인하여 다스리는 방도에 대하여 많은 말을 갖추 진달하였는데, 말이 비록 적절하지는 않았으나 상이 자못 가상하게 여겼다. 그런데 승지 홍만용(洪萬容)이 외람되다고 하면서 추고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이를 들은 자들이 홍만용을 그르다고 하였다.
김휘(金徽)를 형조 참판으로, 이단하(李端夏)를 헌납으로, 이합(李柙)을 집의로, 이흥발(李興浡)·송창(宋昌)을 장령으로 삼았다.
5월 26일 계해
영의정 정태화가 여섯 차례째 정고하니 상이 온화한 말로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대사헌 민정중이 내수사와 궁가에서 측량하는 중에 뒤섞여 들어간 평강현(平康縣)의 민전(民田)을 본도로 하여금 별도로 강명한 관원을 정해 상세히 조사하여 되돌려 주고, 함부로 차지한 궁노와 측량한 차인(差人)도 유사로 하여금 중한 쪽으로 죄를 주어 뒤 폐단을 막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르면서 일렀다.
"조사한 뒤에 죄를 주어도 늦지 않다."
5월 28일 을축
좌의정 허적이 병을 이유로 차자를 올려 사직하니, 상이 온화한 말로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으며, 내의를 보내어 병을 살펴보게 하였다. 우의정 송시열이 상소하여 사직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고 온화한 말로 비답하였다.
5월 29일 병인
관학 유생 신응징(申應澄) 등이 상소하여 계성묘(啓聖廟)를 세우기를 청하고, 또 송나라 유학자인 귀산(龜山) 양시(楊時)와 예장(豫章) 나종언(羅從彦), 연평(延平) 이통(李侗)을 문묘의 종사(從祀)하는 열에 올려 미비한 전례를 갖추기를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해조로 하여금 품의하여 처리하게 하겠다."
하였다. 이른바 계성묘라는 것은 명나라에서 사당을 세우고 숙량흘(叔梁紇)·안무요(顔無繇)·증점(曾點)·공리(孔鯉)·맹손씨(孟孫氏)를 제사지내면서 계성묘라고 한 것인데, 유생들이 명나라 제도를 고찰하고 이러한 청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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