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일 무진
병조 참의 이후산(李後山), 좌랑 이우정(李宇鼎)·임상원(任相元)이 파직되었다. 군사(軍士)를 고용하여 입번시킬 때에 위리(衛吏)를 침학하였는데, 대간(臺諫)의 아룀으로 인하여 적발되어 죄를 받은 것이다.
6월 2일 기사
헌납 이단하(李端夏)가 아뢰기를,
"전라 병영(全羅兵營)에 임시로 소속시킨 인정(人丁)에 대해서, 혁파하여 본관(本官)의 해당 군역(軍役)으로 옮기라고 조정에서 이미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지금 들으니, 전라 수영(全羅水營)에도 임시로 소속시킨 인정이 있는데 그 숫자가 매우 많다고 합니다. 병영과 마찬가지로 일체 혁파하소서. 다른 도의 병영과 수영 또한 반드시 이러한 폐단이 있을 것이니, 각도의 감사로 하여금 아울러 모두 조사해 내서 일시에 혁파하게 하여, 정군(正軍)의 액수(額數)를 보충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6월 3일 경오
승문원 박사 강필주(姜弼周)와 전 좌랑 이유룡(李猶龍)이 죄가 있어서 논핵을 당하였다. 처음에 강필주가 양아버지의 상(喪)을 당했을 때에, 출계(出繼)의 입안(立案)이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6개월이나 지난 뒤에 소급하여 성복(成服)하였고, 연상(練祥)에 두 아버지의 기일(忌日)을 그대로 쓰고, 21개월 안에 담제(禫祭)를 지내고 상복을 벗었다. 이유룡이 혐의로 인하여 이 일을 발설하여 떠들었다. 그리하여 대간이 아뢰어 두 사람 모두 잡혀와서 추문을 당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헌부가 소급해 논핵하여 강필주는 사판에서 삭제하고 이유룡은 낭천에서 삭제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른 것이다.
금부가 아뢰기를,
"김익경(金益炅)의 일을 의논해 아뢸 때에, 인물을 진퇴시키는 자리에 있지도 않으면서 사람의 통색(通塞)에 대해서 논하였다는 등의 말로 입계하니, 율문을 상고하여 중하게 죄를 정하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그런데 신들이 율문을 두루 상고해 보았으나, 합당한 율문을 끝내 찾지 못하였습니다. 제서유위율(制書有違律)을 적용하여 장 1백(杖一百)으로 조율하여 입계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록 합당한 율문은 없더라도, 이미 무겁게 죄를 정하라고 했는데 어찌 김익훈(金益勳)과 똑같이 조율을 할 수가 있는가. 중하게 법을 적용하라고 한 뜻이 어디에 있는가. 일이 매우 놀랍다. 해당 당상과 낭청을 무겁게 추고하고 이 공사를 도로 내보내어 고쳐서 들이도록 하라."
하였다.
정주(定州)·가산(嘉山)·선천(宣川)·삼화(三和)·용천(龍川)·박천(博川)·용강(龍岡)·숙천(肅川)·곽산(郭山)에 해일(海溢)이 있었다.
6월 4일 신미
충청 감사 민유중(閔維重)이 본도 죄인들의 용서할 만한 정상을 조사하여 아뢴 뒤 오래도록 지휘(指揮)가 없자 치계하기를,
"신이 옥에 갇혀 있는 죄수들을 소결(疏決)하라는 명을 받들고, 도내의 각읍에 현재 갇혀 있는 죄인들을 직접 조사 심문하고 추안(推案)을 열람해서, 그 가운데 죄명은 비록 무거우나 증거가 분명하지 못하여 용서해 줄 만한 자를 별도로 뽑아낸 다음 의견을 붙여서 차례로 아뢰었습니다. 먼저 아뢴 것은 날짜가 이미 오래되었으므로 처분이 있어야 마땅한데, 지금까지 회답이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경외(京外)의 죄수들을 소결하는 일은 실로 성상께서 재변을 만나 형옥을 돌보아 주시는 지극한 덕인데, 정상을 조사하여 아뢴 뒤로 오래도록 지휘가 없어서, 정상을 용서할 만하거나 억울함을 풀어줄 만한 많은 죄인들이 옥에 갇힌 채 여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혹 죽기라도 하여 끝내 그 억울함을 풀지 못하게 되면 아마도 재변을 만나 마음을 가다듬는 당초의 뜻에 어긋날 듯합니다. 진장(賑場)을 설치했을 때에는 각읍의 죄수에게도 모두 죽을 끓여 먹여서 목숨을 연장할 수 있게 하였는데, 지금은 진장의 진휼하는 일이 이미 끝나서 옥에 갇혀 있는 죄수들을 먹여 살리기가 더욱 어려워졌으니, 이들이 살아갈 길이 더욱 염려됩니다. 해조로 하여금 상께 여쭈어 처리하게 하소서."
하였다. 상이 해조에 내렸는데, 10일이 지난 뒤에 회계하기를,
"신들이 요즈음 정세(情勢)가 불안해서 잇따라 사면하고 있는 중이었으므로 즉시 복계(覆啓)하지 못하여, 본도에서 치계하는 일까지 있게 하였으니, 황공함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그 가운데 살인과 저주에 관련된 사건은 추안이 매우 많고 복잡하여, 옥사의 실상을 조사하는 즈음에 날짜가 많이 흘러 즉시 의논해 아뢰지 못했습니다. 이런 뜻으로 회유(回諭)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삼가 살피건대, 죄수를 소결하는 것은 실로 재변을 만나 형옥을 보살피는 뜻이니, 형관(刑官)은 마땅히 여기에 마음을 다해야 한다. 그런데도 나태하고 게으른 것이 습관을 이루고 꺼리는 바가 없어서, 자기 개인의 일만 돌아보고 나라의 급한 일은 잊어버려 조정에서 자세를 가다듬어 하는 일을 그저 상투적으로 하는 일이 되게 하였다. 번신(藩臣)이 치계한 뒤에야 이에 구차한 말로써 단지 황공하다는 뜻만을 진달하였는데, 그것도 열흘이나 지난 뒤에 아뢰면서 문서의 말이 번잡했기 때문이라고 핑계대었으니, 너무나도 직무를 내팽개친 것이다. 그런데도 상께서 견책하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위아래가 함께 정도를 잃은 것이라 하겠다.
6월 5일 임신
대사헌 민정중, 집의 이합(李柙) 등이 아뢰기를,
"무릇 신통(新通)할 사람이 있을 경우에는 삼사(三司)에 출입하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먼저 의논하여 공론을 들어보는 것이 전례입니다. 김익경(金益炅)은 전후 이력으로 보아 이러한 논의를 들은 것일 텐데, 어찌 이로써 조정을 혼란시켰다는 죄로 결단할 수가 있습니까. 만약 탄핵을 받은 사람이 대간을 비난하여 일의 체모를 손상시켰다는 것으로 죄준다면 적절하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조정의 논의에 간섭했다는 것으로 특별히 무거운 죄를 주는 것은 아마도 타당하지 않을 듯합니다. 익경을 무겁게 죄를 정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다. 여러 차례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당시에 익경이 법을 맡은 관리에게 내려진 지가 여러 달이 되었는데, 상이 가볍게 조율했다는 이유로 특별히 금부의 당상과 낭청을 추고하게 했었다. 이에 대간이 논계한 것인데, 상이 사사로이 자기 당파를 비호하는 것을 미워하여 들어주지 않았다.
전옥서 주부 윤만(尹幔), 참봉 유명길(柳命吉)이 죄가 있어서 법을 맡은 관리에게 내려졌다. 당시에 도망한 포수(砲手) 이지해(李祉海)를 잡아두었는데, 뒤에 본서(本署)의 청지기[廳直]가 관원의 말이라고 거짓으로 전하여 죄가 가벼운 죄수들이 있는 곳으로 내어놓았다가 이어 도망하게 하였다. 훈국(訓局)이 그 죄를 청하니, 상이 잡아다 다스리라고 명하였다. 청지기는 일개의 하인인데 중죄의 죄수를 놓아주었으니, 나라의 기강이 해이하다는 것을 이것으로 알 수가 있다.
6월 6일 계유
충청도 예산(禮山) 등 스물 두 고을의 나이 90 이상인 노인들에게 가자하고 먹을 거리를 내렸다.
형조가 아뢰기를,
"수어청(守禦廳)의 은자(銀子)를 훔친 도적 금이(金伊)는, 보통의 도적으로 논단해서는 안 됩니다만, 일단 강도가 아니니 조율을 상복(詳覆)하는 것이 바로 통상적인 규례입니다. 이 규례에 의거하여 시행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절도와는 다르니, 시기를 기다릴 것 없이 목을 베고 붙잡아 고한 사람은 논상하라."
하였다.
민정중(閔鼎重)을 이조 참판으로, 이상진(李尙眞)을 대사간으로, 이경억(李慶億)을 대사헌으로, 이은상(李殷相)을 형조 참판으로, 이시술(李時術)을 이조 참의로, 이익상(李翊相)을 이조 정랑으로, 정석(鄭晳)을 교리로, 오시복(吳始復)을 부교리로 삼았다.
사신은 논한다. 이은상은 청렴하지도 못하고 바쁜 직무를 처리할 재주도 없으니, 형조 관원은 그에게 맞는 직임이 아니다. 이시술은 이름난 조상의 자손이기 때문에 현요직을 두루 거친 것일 따름이다.
【태백산사고본】 15책 15권 2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582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역사-편사(編史)
사신은 논한다. 이은상은 청렴하지도 못하고 바쁜 직무를 처리할 재주도 없으니, 형조 관원은 그에게 맞는 직임이 아니다. 이시술은 이름난 조상의 자손이기 때문에 현요직을 두루 거친 것일 따름이다.
6월 8일 을해
사문(四門)에 영제(禜祭)를 행하였다. 날이 개이기를 기도한 것이다.
집의 이합 등이 아뢰기를,
"경상 좌수사 박이명(朴而㫥)은 임지에 도착한 뒤로 횡렴이 많습니다. 송금(松禁)을 적간한다고 핑계하고 군관을 보내어 촌락을 돌아다니면서 횡포를 부리게 놓아두어서, 동래(東萊) 땅 온 지역이 모두 그 피해를 당하였으므로 도망한 사람들이 매우 많고, 혹은 뇌물을 거두어들여 주기도 하였습니다. 또 기장(機張) 땅에 배를 만들 목재를 수백 년 동안 오래도록 길러온 곳이 있는데, 박이명이 같은 고향 친척의 부탁을 받고, 베어내는 것을 사사로이 허락해 주어 극도로 엉망이 되었으니 그가 너무나 법을 무시하고 사사로움을 따랐습니다. 잡아다 추문하여 죄를 정하소서. 뇌물을 받은 군관과 나무를 베어낸 족속도 아울러 본도로 하여금 조사해 다스리게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세 번째 아뢰니, 따랐다.
윤심(尹深)을 부수찬으로, 이관징(李觀徵)을 헌납으로, 조세환(趙世煥)을 정언으로, 민종도(閔宗道)를 지평으로 삼았다.
6월 9일 병자
형조가 이삼재(李三才)가 끌어댄 조사기(趙嗣基)를 잡아둘 것을 청하니, 상이 판결하기를,
"종이로 싸맸는지의 여부는 원래 이 옥사와는 관계가 없는데, 갑자기 스스로 해명한 말을 가지고 도리어 조사기를 끝까지 추문하려고 한다면 온당할지 모르겠다. 이유(李𣞗)는 긴 글로 숙모(叔母)를 욕되게 한 것이 이미 드러나 숨길 수 없게 되었고, 삼재(三才)의 일은 손가락을 잘랐는지 끌어내렸는지의 여부를 막론하고 그가 증거로 댄 조사기의 함사(緘辭)가 이미 이와 같으니, 삼재의 도리에 어긋난 정상도 또한 숨길 수 없다. 마땅히 일체로 조율하여 속히 결말을 지어야 한다. 삼재는 아직 취복하지 않았으니, 전에 판하했던 대로 형추하여 정상을 알아내도록 하고, 이류는 그대로 가두어 둘 수 없으니, 일찌감치 조율하라."
하였다.
당시에 삼재는 여전히 이류의 손가락을 다치게 한 일을 숨기고 조사기를 끌어다 증거를 댔는데, 조사기의 함사 가운데 이류가 손가락을 다쳐서 종이로 싸맨 정상을 자세히 진술하였다. 그런데 형조가 다시 조사기를 끝까지 추문하고자 했기 때문에 상의 분부가 이와 같았다.
6월 10일 정축
이경휘(李慶徽)를 대사헌으로 삼았다.
6월 11일 무인
권격(權格)을 집의로, 이휴징(李休徵)을 장령으로, 박세당(朴世堂)을 정언으로 삼았다.
6월 13일 경진
태백(太白)이 낮에 나타났다.
6월 14일 신사
집의 권격이 고군(雇軍)의 일을 간여하여 사람들의 말이 많고, 또 이조 참판 이정영(李正英)을 논핵했다가 근거가 없는 일이라고 배척을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는데, 헌부가 처치하여, 고군에 간여한 일을 그르다고 하였으므로 체직되었다.
6월 16일 계미
한량(閑良) 이후창(李后昌)이 시재할 때에 조총(鳥銃)을 세 번 명중시켰는데, 전시(殿試)에 바로 응시할 수 있게 하라고 명하였다.
6월 17일 갑신
형조가 내관 서후행(徐後行)을 처벌할 것을 청했는데, 상이 들어주지 않았다. 당시에 서후행의 종이 궁궐의 담장을 넘어들어가 몰래 소나무를 베었으며, 또 관사(官司)를 능욕하고 간사한 꾀를 부려 도망하였다. 그래서 무겁게 결단을 하여 햇수를 정하지 않고 정배하였다. 형조가 또 아뢰어 서후행을 먼저 파직하고 나서 추고하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서후행이 이미 이 일 때문에 파직되었으니, 죄를 거듭 시행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서후행은 환관 중에서 교만하고 방자한 자였다.
이완(李浣)을 판의금으로, 이은상(李殷相)을 도승지로, 서필원(徐必遠)을 형조 참판으로, 최관(崔寬)을 집의로 삼았다. 이은상은 인망이 없는데도 이 자리에 여러 차례 앉았으니, 관직에 알맞은 사람을 제대로 뽑지 못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홍우량(洪宇亮)을 경상 좌수사로 삼았다.
6월 18일 을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이때에 주회인(走回人)이 있었는데, 평안 감사가 장계를 올려 아뢰었다. 비국이 병조로 하여금 별도로 금군을 정하여 청나라로 압송하게 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주인을 죽인 죄인 금이(金伊)가 복주되었다. 금이는 최승립(崔承立)의 노비이다. 최승립이 채무를 징수할 일로 삼화(三和) 땅에 갈 때에 금이가 뒤따라 갔다가 채무를 진 사람인 박유상(朴有相)·이응백(李應白) 등과 함께 모의하여 죽이고는 징수한 재화를 나누어 가졌는데, 일이 발각되어 복주되었다.
6월 19일 병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장령 이휴징(李休徵) 등이 논핵하기를,
"춘천 부사(春川府使) 유병연(柳炳然)은 자기 휘하의 진휼 감색(賑恤監色)이 형벌을 받은 것에 화가 나서 도사(都事)를 업신여기고 일처리를 어그러지게 하였습니다. 사직하는 장계를 먼저 올려 능멸하고 날조하였는데, 그 말을 꾸며 비방하고 모함한 정상이 참으로 매우 놀랄 만합니다. 사판에서 삭제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여러 차례 아뢰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삼가 최문식(崔文湜)이 세 번째 항거한 추함(推緘)을 보건대, 포도청의 규찰을 정파한 데에 관한 말은 모두 맹랑하게 되었습니다. 문식이 대간과 시종의 반열에 출입하는 사람으로서 참으로 범한 바가 있는데도 왜곡되게 죄를 면할 계책을 하면서 꾸며대는 말이 이러하였다면 분석하여 논핵하는 것은 아니할 수 없는 일입니다. 때문에 신들이 본부에 모였을 때에 여러 아전들에게 물어보았는데, 모두들 한결같이 그렇지 않은 것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또 당일 차를 마실 때에, 지사 유혁연(柳赫然)의 상소 가운데 끌어댄, 목면을 도둑맞은 물주 함계성(咸繼聲)을 불러 물어보고, 그가 한 말을 가지고 문식의 함사를 참고해 보니, 대개 문식이 이때에 민진익(閔震益)을 논계하는 일이 있었는데, 그 허실을 자세히 알고자 하여 계성에게 물은 일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이어 생각건대, 문식이 연좌된 바가 대관 때의 일이었으니 이미 체직되었다는 이유로 일반 관리와 같이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지금 만약 진래 추고(進來推考)했다가 또 항거를 한다면 금부에 이송하는 것이 전례입니다.
처음에는 대관 때에 논사를 신중히 하자는 뜻에서 나왔는데 끝내 잘못 전해진 말을 가지고 다스리기까지 한다면 나라의 체모를 손상시키는 것이 이보다 심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헌부와 포도청 하배 및 물건을 도둑맞은 물주를 한 곳에서 대질시켜 분변하게 한다면 그간의 진위가 즉시 밝혀질 것입니다. 유사로 하여금 분명하게 조사하여 처리하게 하고, 문식을 진래 추고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두 번 세 번 이말 저말을 하여 말 뜻이 모호하므로 그 주장하는 뜻을 모르겠다. 그렇다면 당초에 무엇 때문에 진래라는 두 자를 계목 끝에서 청했었는가? 더욱 우스운 일이다."
하고, 따르지 않았다. 지평 민종도(閔宗道)가 많은 말을 하며 피혐하면서,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밝혔다. 상이 답하기를,
"이 피혐하는 글을 보건대, 구차스러운 뜻을 끝내 스스로 엄폐하지 못하였다. 내 매우 애석하게 여긴다."
하였다. 장령 이휴징이 이튿날 이것을 이유로 피혐하였다. 간원이 처치하여 출사시키기를 청하니, 이휴징과 민종도가 또 피혐하였다. 간원이 또 출사시키기를 청하였다. 이때에 문식이 규찰을 정지시켰다는 것은 실상이 없었지만 상이 이미 대신의 말을 들은 데다 금부로 이송하기 전에 대관이 일에 앞서 쟁집하여 구제하려고 했기 때문에, 비답이 이와 같았다. 여러 차례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문식은 결국 법을 맡은 관리에게 내려졌다.
충청도 목천현(木川縣)에서 사람이 벼락을 맞았다.
6월 20일 정해
상이 정전(正殿)으로 다시 돌아오고 음식의 가짓수를 원래대로 회복하였다. 예조가 29일이 입추절이라고 아뢰었기 때문이다.
사신은 논한다. 정전을 피하고 음식의 가짓수를 줄인 것은 재변 때문이었다. 재변이 그치지 않았는데 정전으로 다시 돌아오고 음식의 가짓수를 회복하였으니 어찌된 일인가. 마음을 가다듬고 자신을 반성하는 일도 제대로 못하면서, 형식적인 말단의 일까지 폐지했으니, 아, 위태하다.
【태백산사고본】 15책 15권 3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582면
【분류】왕실-행행(行幸) / 역사-편사(編史)
사신은 논한다. 정전을 피하고 음식의 가짓수를 줄인 것은 재변 때문이었다. 재변이 그치지 않았는데 정전으로 다시 돌아오고 음식의 가짓수를 회복하였으니 어찌된 일인가. 마음을 가다듬고 자신을 반성하는 일도 제대로 못하면서, 형식적인 말단의 일까지 폐지했으니, 아, 위태하다.
6월 21일 무자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이단하(李端夏)를 이조 정랑으로, 정재숭(鄭載嵩)을 수찬으로 삼았다.
좌의정 허적이 아뢰어 경상 좌수사 홍우량(洪宇亮)을 파직시켰는데, 대신(大臣)에게 하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6월 22일 기축
남구만(南九萬)을 승지로, 오상(吳尙)을 정언으로 삼았다.
사신은 논한다. 이때에 대각(臺閣)이 대부분 구차하게 채워졌는데, 변황(卞榥)과 오상이 가장 열등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5책 15권 3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582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역사-편사(編史)
사신은 논한다. 이때에 대각(臺閣)이 대부분 구차하게 채워졌는데, 변황(卞榥)과 오상이 가장 열등하였다.
6월 23일 경인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적인(賊人) 이시원(李時元)을 죽이고, 포고인들을 논상하였다. 이시원이 어사(御史)를 사칭하고, 당파를 결성하였으며, 유부녀를 겁탈하고, 사람을 죽이고 소를 빼앗았다.
평안도 철산(鐵山)에 바닷물이 크게 넘치고 지진이 일어나 지붕의 기와가 모두 기울어졌으며, 사람이 더러 놀라서 엎어지기도 하였다. 평양부(平壤府),황해도 해주(海州)·안악(安岳)·연악(延安)·재령(載寧)·장연(長連)·배천(白川)·봉산(鳳山), 경상도 창원(昌原)·웅천(熊川),충청도 홍산(鴻山),전라도 김제(金堤)·강진(康津) 등에 같은 날 지진이 있었다. 예조가 중앙에 단(壇)을 설치하고 향과 폐백을 내려보내어 해괴제(解怪祭)를 지내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6월 24일 신묘
대정(大政)을 하였다. 이경억(李慶億)을 예조 판서에 제수하여 동지 정사로, 정륜(鄭錀)을 부사로, 박세당(朴世堂)을 서장관으로 삼았다. 조형(趙珩)을 우참찬으로, 조복양(趙復陽)을 대사헌으로, 이시술(李時術)을 대사간으로, 강호(姜鎬)를 승지로, 남구만(南九萬)을 안변 부사로, 이유(李秞)를 사간으로, 정석(鄭晳)을 응교로, 남이성(南二星)을 겸보덕으로, 정창도(鄭昌燾)를 필선으로, 홍만형(洪萬衡)을 사서로 삼았다.
사신은 논한다. 조형은 취할 만한 것이 없는데 육경의 반열에 올랐으므로 사람들이 매우 경시하였다. 강호는 비록 청렴하다고 일컬어졌으나 일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는 것이 많았다. 박세당은 벼슬을 피해 물러갔는데 사신에 채워지니 여론이 그르게 여겼다.
【태백산사고본】 15책 15권 3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582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역사-편사(編史)
사신은 논한다. 조형은 취할 만한 것이 없는데 육경의 반열에 올랐으므로 사람들이 매우 경시하였다. 강호는 비록 청렴하다고 일컬어졌으나 일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는 것이 많았다. 박세당은 벼슬을 피해 물러갔는데 사신에 채워지니 여론이 그르게 여겼다.
6월 25일 임진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영상 정태화가 열아홉 번째 정고(呈告)하니, 승지를 보내어 도타이 유시하였다.
6월 26일 계사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6월 27일 갑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6월 28일 을미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충청도 회덕현(懷德縣)에서 사람이 벼락을 맞았다.
6월 29일 병신
상이 양심합(養心閤)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허적이 아뢰기를,
"여러 대관들이 모두 이미 용서받고 서용되는 은혜를 입었는데, 이무(李堥)는 아직도 죄를 벗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이 어찌 마음이 편할 수 있겠습니까. 신으로 하여금 편한 마음으로 직무를 보게 하시려면, 은혜로운 분부를 오래도록 아끼지 않으셔야 합니다. 신이 비록 하찮은 사람이나 어찌 명예를 바라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겠습니까. 일체로 서용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무는 마음씀이 바르지 못하기 때문에 분변하여 배척하고자 해서 죄를 논하게 되었던 것이다. 경의 말이 이와 같으니 서용하겠다."
하였다. 여러 간신(諫臣)이라는 것은 이숙(李䎘) 등을 가리킨 것이다. 허적이 아뢰기를,
"김익훈은 흉적이 데리고 있던 여자를 데려다가 한 집에서 살고 있으니,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그는 바로 한 원(院)의 장관이니, 대간이 논핵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다만 그 계사가 실상을 잃은 것이 많습니다. 이것은 신경윤(愼景尹)의 실수입니다만 새로 벼슬에 나와 형세가 외로운 사람으로서 대신을 논핵하면서 자기 자신의 이해 관계는 돌아보지 않았으니, 그 뜻은 참으로 높이 살만합니다. 김익경 등이 이것으로 인해 감정을 품고서 사사로이 비난을 하고 욕을 하였는데, 이는 논핵을 당한 자가 예사로이 하는 일이니, 조정에서 조사할 일이 아닙니다. 김익경이 사람의 진출할 길을 막았다는 말을 입계 문서에다 쓴 것은 망발입니다만, 오로지 멋대로 했다는 것으로 의율한다면 그것은 그의 본 마음이 아닐 것입니다. 조율을 고치라는 전교로 보건대, 꼭 정배를 하고야 말겠다는 것입니까? 여러 달을 옥에 가두었으니 이미 과중한 것이고, 또 익훈에게 견주어 볼 때 그 죄가 조금 가볍습니다. 만약 파직하거나 삭직하는 벌을 준다면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도 조정을 멋대로 했다는 것은 아니다. 아뢸 수 없는 말을 감히 입계 문서 속에다 써 넣었으니, 어찌 방자한 것이 아니겠는가. 사람마다 이러하다면 실로 뒤 폐단이 있게 된다. 싸잡아 같은 죄율로 정한 것은, 무거운 율을 적용하여 죄를 정하라고 한 뜻에 어긋나는 듯하였기 때문에 고쳐 조율하도록 했던 것인데, 대간의 논계가 먼저 일어나 마치 장차 정배하려 한다고 여기는 듯한 점이 있었으니, 이것이 내가 이해하지 못한 점이다. 그러나 더운 한여름에 옥에 갇혀 있는 것은 옳지 않으니, 김익경을 삭직하고 풀어주라."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이조 낭관 자리는 청현직(淸顯職)이기는 하나, 해당 관사인 이조가 중고(中考)를 탕척시키자고 계청한 것은 일의 체모를 손상시킨 것입니다. 이미 천거하는 규례가 파괴된 후라면, 당상이 스스로 갖추어 의망할 수 있습니다. 세 당상이 의망하지 못할 까닭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전조 낭관을 두 사람으로 의망한 것은 전에 없던 일입니다. 해당 당상을 중하게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허적이 또 최문식의 일에 대해서 아뢰기를,
"밖의 의논은 혹 그가 억울하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의금부로 이송한 뒤에 대관이 논계를 했다면 그래도 혹 그럴 수가 있는 일이겠으나, 진래 추고하는 명을 다시 거두라고 하는 것은 무슨 의도인가? 사사로이 스스로 조사해서 억울하다고 하면서 갑자기 지레 먼저 다투어 우겨대니, 매우 근거가 없는 일이다. 반드시 가둘 것이라는 것을 단정할 수도 없는데 지레 먼저 논계하여, 익경의 일을 논하는 것과 같은 식으로 하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하였다.
승지를 보내어 죄가 가벼운 죄수들을 풀어주었다. 좌상 허적의 말을 따른 것이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햇무리가 지고 양이가 있었다.
영의정 정태화가 진소하여 사면을 청하였다. 상이 따뜻한 말로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정태화가 전후로 진소한 것이 거의 이십여 차례나 되었는데, 상이 끝내 윤허하지 않자 이에 나와서 직무를 보았다.
6월 30일 정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이때에 태백이 달이 넘도록 낮에 나타났는데, 위아래가 예사롭게 보아넘기고 근심할 줄을 몰랐다.
집의 여성제(呂聖齊), 장령 송창(宋昌) 등이 아뢰기를,
"정영한(鄭榮漢)을 공산(公山)에 재임(再任)시키는 것은 법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일의 체모가 구차스러우니, 체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장선징(張善瀓)을 대사간으로, 윤경교(尹敬敎)를 정언으로, 김징(金澄)을 문학으로, 홍중보(洪重普)를 판의금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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