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15권, 현종 9년 1668년 7월

싸라리리 2025. 12. 12. 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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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일 무술

상이 양심합(養心閤)에서 평안 감사 이태연(李泰淵)을 인견하였다. 상이 본도의 군사 행정이 정밀하게 되어 있는지와, 인심이 순후한지와, 논밭이 기름진지와, 농사가 제대로 되었는지에 대해서 물었다. 이태연이 대답한 뒤에 아뢰기를,
"본도의 수령은 칙사(勅使)의 행차를 접대하는 것을 꺼려하여 으레 대부분 피하기 때문에, 모두 용렬한 사람들로 구차스럽게 충당되고 있습니다. 오늘 이후로는 문관이나 남행, 무관을 따지지 말고 잘 가려서 보내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해조에 말하라."
하였다. 물러나올 무렵에 상이 이르기를,
"변방의 금령(禁令)에 대한 일이 가장 걱정이 된다. 삼(蔘)을 캐는 일 등에 대한 금령은 특별히 엄하게 신칙하라."
하니, 답하기를,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하였다. 도승지 이은상(李殷相)이 아뢰기를,
"고 상신(相臣) 홍명하(洪命夏)는 일생을 청렴하고 가난하게 살았기 때문에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가난하여 제사를 지낼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제사지내는 데에 쓸 물품을 내려주라고 명하고, 또 녹봉(祿俸)을 내려주어 3년 동안 거두지 말라고 명하였다.

 

평안도의 굶주린 백성이 3만 8천 3백 40여 명이었는데, 전후로 진구한 곡식이 1만 1천 3백여 석이었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7월 2일 기해

상이 눈병을 앓았다. 증세를 의관(醫官)에게 말하라는 전교를 내렸는데, 의관들이 모두 병을 칭탁하고 한 사람도 와서 대기하지 않았다. 약방(藥房)이 다시 사람을 보내어 불렀으나, 끝내 오지 않았다. 비로소 추고하기를 계청하였는데, 들은 자들이 놀라 해괴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에 부제조 이은상만 약방에 있었다.

 

진구하고 남은 쌀 2천여 석을 시민들에게 빌려주었다. 민원을 따른 것이었다.

 

이시술(李時術)을 철원 부사로, 정만화(鄭萬和)를 병조 참판으로, 이선(李選)을 교리로 삼았다.
사신은 논한다. 정만화는 재능이 있고 이선은 청렴하다는 이름이 있었으나, 모두 각박하다는 비난을 받았다.


【태백산사고본】 15책 15권 5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583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역사-편사(編史)
사신은 논한다. 정만화는 재능이 있고 이선은 청렴하다는 이름이 있었으나, 모두 각박하다는 비난을 받았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7월 3일 경자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헌부가 의관을 잡아다 가둘 것을 청하니, 상이 파직시킨 뒤에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세 번 아뢰고는 정지하였다. 당시에 상이 의관을 대우하는 것이 매우 돈후하였기 때문에 의관들이 은혜를 믿고 교만 방자해졌고 심지어는 상이 편찮은데도 병을 핑계하고 오지 않는 자까지 있었으므로, 들은 사람들이 경악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헌부가 아뢴 것은 겨우 책임만 때우고 말았다. 여성제(呂聖齊)가 이때의 헌관(憲官)이었다.

 

7월 4일 신축

집의 여성제, 장령 송창 등이 지사 유혁연(柳赫然)이 일을 아뢸 적에 외람되고 잡스러웠다는 것을 이유로 추고할 것을 청하였는데, 두 번째 아뢰니 따랐다. 유혁연은 무신 가운데 총애를 받던 자였다. 무릇 입시할 때에 말이 매우 잡스럽고, 심지어는 말도 되지 않는 꿈 같은 이야기까지 진달하여 주위 사람들이 모두 놀랐는데, 승지가 그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였다. 이때에 와서 추고를 당한 것이다.

 

철원 부사 이시만(李時萬)이 법을 맡은 관리에게 내려져 충군 정배되었다. 당시에 이시만이 겸영장(兼營將)으로서 관직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갔었는데, 수어사 김좌명(金佐明)이 계문하여 죄주기를 청한 것이다.

 

용천부(龍川府)에서 두 여인이 벼락을 맞아 죽었다. 강동현(江東縣)에서 소가 벼락을 맞아 죽었다. 감사가 아뢰었다.

 

태백이 연일 낮에 나타나 조야가 근심하였다.

 

행 대사간 장선징, 사간 이유, 헌납 이관징이 아뢰기를,
"요즈음 전석(銓席)에서 주의(注擬)할 때에 늘 사람이 모자라 걱정인데, 청선(淸選)을 갖추어 의망할 즈음에 번번이 외임(外任)을 청하니, 비록 마지못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기는 하나 일의 체모가 매우 구차합니다. 당상 청망(堂上淸望)에 있어서는 그 숫자가 더욱 적은데, 새로 제수된 안변 부사(安邊府使) 남구만(南九萬)과 철원 부사(鐵原府使) 이시술(李時術)이 잇따라 외임에 보직되었으니, 실로 근거없는 일입니다. 이것은 해조에서 한갓 자신들의 편리만 따르고 내직과 외직의 경중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아서, 정사를 할 때에 마땅함을 잃은 것입니다. 여론이 그르게 여깁니다. 남구만과 이시술을 아울러 체차하라 명하고, 해당 당상과 낭관을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 당시 몇 달 사이에 가뭄이 거듭 가혹하게 들어, 관원을 보내어 곳곳에서 기우제를 지내게 하였다.

 

7월 8일 을사

신정(申晸)을 지평으로 삼았다.
사신은 논한다. 신정은 고 정승 신흠(申欽)의 손자이다. 이름있는 집안 출신이기는 하나 단정하고 곧은 풍도가 없었고, 하는 짓과 하는 말이 진취하는 데에 이로운 것들 뿐이었다. 현재 사관(史官)의 직무를 맡고 있는 자는 사초(史草)를 정리하기 전에는 승천(陞遷)할 수 없게 법으로 정해져 있는데, 신정의 종제(從弟) 조사석(趙師錫)이 대교(待敎)가 되고 또 지춘추 김좌명(金佐明)과 서로 상피가 되기 때문에, 전조에서 이것을 핑계로 신정을 설서(說書)에 제수하였다가 이어 육품(六品)으로 승진시켰으니, 이것은 법을 어긴 것이다. 뒤에 이민채(李敏采)도 이 예를 끌어다 승천하였으며, 신정 등도 사초를 정리하여 올리지도 않고 아무런 구애없이 승진하였으므로, 식자들이 안타깝게 여겼다.


【태백산사고본】 15책 15권 5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583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역사-편사(編史)
사신은 논한다. 신정은 고 정승 신흠(申欽)의 손자이다. 이름있는 집안 출신이기는 하나 단정하고 곧은 풍도가 없었고, 하는 짓과 하는 말이 진취하는 데에 이로운 것들 뿐이었다. 현재 사관(史官)의 직무를 맡고 있는 자는 사초(史草)를 정리하기 전에는 승천(陞遷)할 수 없게 법으로 정해져 있는데, 신정의 종제(從弟) 조사석(趙師錫)이 대교(待敎)가 되고 또 지춘추 김좌명(金佐明)과 서로 상피가 되기 때문에, 전조에서 이것을 핑계로 신정을 설서(說書)에 제수하였다가 이어 육품(六品)으로 승진시켰으니, 이것은 법을 어긴 것이다. 뒤에 이민채(李敏采)도 이 예를 끌어다 승천하였으며, 신정 등도 사초를 정리하여 올리지도 않고 아무런 구애없이 승진하였으므로, 식자들이 안타깝게 여겼다.

 

7월 9일 병오

집의 여성제, 장령 송창이 의관(醫官)들을 잡아다 추문하라는 논계를 빨리 정지하여 여론의 비난을 받자 인피하였는데, 처치하여 모두 체직시켰다.

 

7월 11일 무신

행 대사헌 조복양, 장령 신명규(申命圭)가 의관 정후계(鄭後啓)·이동형(李東馨)·윤후익(尹後益) 등을 잡아다가 국문하기를 청하였다. 여러 차례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이 당시에 공론이 여성제 등을 탓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대간이 다시 아뢴 것이다.

 

정언 윤경교(尹敬敎)가 세마(洗馬) 심익상(沈益相)이 적통(嫡統)을 탈취한 죄를 논하려고 했는데, 행 대사간 장선징이 심익상을 위하여 변명하였다. 윤경교가 따르려 하지 않자 장선징이 먼저 인피하기를,
"동료가 심익상이 적통을 빼앗은 일에 대해 말을 꺼냈는데, 신은 심익상과 서로 가까운 혐의가 있는데다, 또 그를 제수할 때에 신이 한 마디 거드는 말을 하였으니, 신은 마땅히 저 자신을 처리하는 데에 겨를이 없어야 합니다. 다만 동료의 말이 전혀 그렇지 않은 바가 있었기 때문에 옳고 그름을 따지면서 대략 의견을 주고받았는데, 동료가 굳게 자기의 의견을 고집하면서, 심지어 사양하고 나가지 않는다는 것으로 비난하였습니다. 신은 의견이 같지 않습니다. 체직시켜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윤경교가 인피하기를,
"세마 심익상은 바로 고 정승 심지원(沈之源)의 아들입니다. 심지원이 처음에 자기 아들이 없어서 양자로 후사를 삼았는데 그 뒤에 익상 등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이미 후사를 삼은 양자가 있었기 때문에 익상을 차자로 삼았습니다. 그 아비가 죽자, 익상이 적통을 차지하였으므로 양자는 도리어 중자(衆子)가 되었습니다. 아주 예를 무시하고 윤리를 어그러지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익상이 본직에 처음 제수되었을 때에 태연히 나와서 사례를 하여, 평소 아무 일도 없는 사람처럼 행동했으니, 또한 매우 방자하여 거리낌이 없는 자입니다. 신이 발언하여 논핵하고자 했더니, 장관이 처음에는 혐의가 있어서 가타부타 하지 않겠다고 하더니, 나중에는 장황하게 변명을 해주면서, 도리어 신을 고집을 피운다고 지척하였습니다. 신이 어떻게 편안히 있겠습니까. 체직시켜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사간 이유도 장관이 일으킨 일에 무릅쓰고 대들기가 어렵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간원이 처치하여, 윤경교와 이유를 옳게 여겨 출사하게 하기를 청하고, 장선징은 체직시켰다.
사신은 논한다. 심익상에게 적통을 빼앗은 허물이 있는데도 춘궁(春宮)의 요속에 의망하였으니, 정관(政官)은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장선징은 참석했던 전관(銓官)으로서 거드는 말을 한 마디 하였다면, 공론이 일어난 뒤에는 마땅히 인혐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터인데, 이미 혐의가 있다고 해놓고 또 옳고 그름을 강변하였다. 장선징이 권력을 잡고 멋대로 휘두르는 신하는 아니지만 경솔한 실수를 하여 기탄이 없기까지 하였으니, 애석하다.


【태백산사고본】 15책 15권 5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583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 가족-친족(親族) / 역사-편사(編史)
사신은 논한다. 심익상에게 적통을 빼앗은 허물이 있는데도 춘궁(春宮)의 요속에 의망하였으니, 정관(政官)은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장선징은 참석했던 전관(銓官)으로서 거드는 말을 한 마디 하였다면, 공론이 일어난 뒤에는 마땅히 인혐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터인데, 이미 혐의가 있다고 해놓고 또 옳고 그름을 강변하였다. 장선징이 권력을 잡고 멋대로 휘두르는 신하는 아니지만 경솔한 실수를 하여 기탄이 없기까지 하였으니, 애석하다.

 

오정위(吳挺緯)를 우윤으로, 권격(權格)을 집의로, 오상(吳尙)을 장령으로, 여성제(呂聖齊)를 사인으로, 최후상(崔後尙)을 지평으로 삼았다.
사신은 논한다. 여성제는 크게 대각의 체모를 잃었는데도 바로 청직(淸職)에 제수되었으니, 옳고 그름을 바르게 따지는 공론이 없다고 할 만하다.


【태백산사고본】 15책 15권 6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584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역사-편사(編史)
사신은 논한다. 여성제는 크게 대각의 체모를 잃었는데도 바로 청직(淸職)에 제수되었으니, 옳고 그름을 바르게 따지는 공론이 없다고 할 만하다.

 

7월 12일 기유

사간 이유, 정언 윤경교 등이 적통을 빼앗은 심익상의 죄를 논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세 번째 아뢰니 따랐다. 또 옥에 갇힌 죄수를 소결하는 일을 즉시 봉행하지 않은 이유로 금부 당상을 추고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사신은 논한다. 심익상을 도태시킬 것을 청하고도, 전형을 맡은 관원의 잘못 주의한 실수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았다. 추고만 하는 가벼운 벌로는 금부의 태만한 습속을 징계할 수가 없다. 간관의 나약함이 심하다고 하겠다.


【태백산사고본】 15책 15권 6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584면
【분류】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 사법-행형(行刑) / 역사-편사(編史)
사신은 논한다. 심익상을 도태시킬 것을 청하고도, 전형을 맡은 관원의 잘못 주의한 실수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았다. 추고만 하는 가벼운 벌로는 금부의 태만한 습속을 징계할 수가 없다. 간관의 나약함이 심하다고 하겠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7월 14일 신해

중신(重臣)과 근신(近臣)을 보내서 기우제를 지내게 하였다.

 

상이 침을 맞은 뒤에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강도(江都)의 곡식은 나누어 준 것이 이미 많으므로 모곡(耗穀)을 감해 주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만, 이러한 흉년에는 본색(本色)만 바치게 하는 것도 실제적인 혜택이 됩니다."
하였다. 조복양이 이 의논을 힘써 주장하고, 민정중도 찬성하자 상이 따랐다. 상이 강화 유수(江華留守) 김휘(金徽)에게 이르기를,
"생각한 바가 있으면 아뢰도록 하라."
하니, 김휘가 아뢰기를,
"신은 본디 일을 잘 모릅니다. 가보고 난 뒤에도 편리한지의 여부를 자세히 알기 어려울 것인데, 지금 어떻게 멀리서 그 이익이 될지 손해가 될지를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내려간 뒤에, 큰일일 경우에는 마땅히 올라와서 여쭈어 결정할 것이고, 작은 일일 경우에는 계문하여 의논을 여쭈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래라."
하였다. 민정중이 아뢰기를,
"진청(賑廳)에 쓰고 남은 미포(米布)가 있습니다. 별도로 10만 석을 갖추어 서울에 군향(軍餉)이라는 명목으로 저축해 두면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을 때에 쓸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편리 여부를 물었다. 모두들 옳다고 하자 상이 허락하였다. 뒤에 군자창(軍資倉)의 옛터에다 창고를 지었는데, 저축할 곡식이 없었다. 조복양, 민정중 등이 박세채(朴世采), 윤증(尹拯), 신석번(申碩蕃) 등을 대각에 갖추어 의망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고 만호        이대원(李大源)이 살았던 마을에 정문을 세우라고 명하였다. 만력 정해년에 왜적이 전라도를 노략질하였다. 이때에 대원이 녹도 만호(鹿島萬戶)였는데, 고단한 군대를 이끌고 힘을 다해 싸우다가 지원군이 없어서 패하여 죽으니, 나라 사람들이 슬퍼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조복양이 그 자손의 하소연으로 인하여 정표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청주(淸州)에서 사람이 벼락을 맞아 죽었다. 단천군(端川郡)의 양녀(良女) 애향(愛香)이 한 배에 2남 2녀를 낳았다.

 

7월 15일 임자

행 대사헌 조복양, 장령 신명규가 아뢰기를,
"요즈음 나라의 기강이 해이해져서 사람들이 법을 두려워하지 않는데, 지금 들으니, 지난달 입직 금군들이 말을 타고 가다가 금제를 당하였다는 것으로 차비문 밖에 와서 호소를 하였다고 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이러한 풍조는 매우 가증스러우니, 엄하게 징계하여 단속하지 않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유사로 하여금 무겁게 죄를 정하도록 하소서. 금군장(禁軍將)과 병조 판서도 모두 잘 교훈하여 신칙하고 규율을 엄하게 하지 못한 책임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아울러 무겁게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앞장서서 주장한 사람을 적발하여 죄를 정하라."
하였다. 당시 금군의 방자함이 이 지경이 되어 사람들이 걱정을 많이 하였다.

 

홍만용(洪萬容)을 대사간으로, 이숙(李䎘)을 부교리로, 윤증(尹拯)을 지평으로, 신경윤(愼景尹)을 비인 현감(庇仁縣監)으로 삼았다.
사신은 논한다. 신경윤이 김익훈(金益勳)을 논핵한 뒤로 사람들이 그의 곧고 강직함을 인정하였는데, 김익훈의 족속들이 바야흐로 세력을 떨치고 있었으므로 한없이 헐뜯고 비방하였다. 민정중이 이때에 이조 참판이었는데, 스스로 경윤을 돕기 위해 외방에 제수하였다고 하면서 청직에는 다시 의망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그르게 여겼다.


【태백산사고본】 15책 15권 7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584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역사-편사(編史)
사신은 논한다. 신경윤이 김익훈(金益勳)을 논핵한 뒤로 사람들이 그의 곧고 강직함을 인정하였는데, 김익훈의 족속들이 바야흐로 세력을 떨치고 있었으므로 한없이 헐뜯고 비방하였다. 민정중이 이때에 이조 참판이었는데, 스스로 경윤을 돕기 위해 외방에 제수하였다고 하면서 청직에는 다시 의망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그르게 여겼다.

 

7월 16일 계축

장령 신명규가 자기의 배리(陪吏)가 정원에게 벌을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면서, 일의 체모를 손상시켰다고 정원을 논핵하여 당해 승지를 추고하기를 청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사신은 논한다. 대관이 추고 전지를 받을 때에는 헌부의 아전이 대청(臺廳)에 올라가 붓과 벼루를 올리고 서명할 곳을 가르켜 준 뒤에 대청에서 내려오는 것이 규례인데, 이날 신명규가 전지를 받을 적에 아전이 그대로 곁에 앉아서 내려오지 않고 서명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대청은 체모와 규례가 엄격하여 낮은 아전이 청에 올라 앉아 있는 규례가 없다. 승지가 헌부의 아전이 그대로 앉아서 내려오지 않는 것을 놀라게 여겨서 그 아전을 다스렸다. 그 아전은 바로 명규의 배리였는데, 승지가 처음에는 알지 못하였고, 알고난 뒤에도 또한 사과하지 않았다. 명규가 매우 화가 나서 대각에 나아가 스스로 논열하면서 정원을 심하게 공격하였는데, 말에 상당히 노여운 기색이 있었고, 또 청에 오르는 것이 합당한지 합당하지 않은지를 따졌다. 의논하는 자들은 정원이 배리를 다스린 것은 옳지 않으며 청에 오르는 일의 합당 여부를 헌관이 논하는 것도 옳지 않다고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5책 15권 7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584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역사-편사(編史)
사신은 논한다. 대관이 추고 전지를 받을 때에는 헌부의 아전이 대청(臺廳)에 올라가 붓과 벼루를 올리고 서명할 곳을 가르켜 준 뒤에 대청에서 내려오는 것이 규례인데, 이날 신명규가 전지를 받을 적에 아전이 그대로 곁에 앉아서 내려오지 않고 서명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대청은 체모와 규례가 엄격하여 낮은 아전이 청에 올라 앉아 있는 규례가 없다. 승지가 헌부의 아전이 그대로 앉아서 내려오지 않는 것을 놀라게 여겨서 그 아전을 다스렸다. 그 아전은 바로 명규의 배리였는데, 승지가 처음에는 알지 못하였고, 알고난 뒤에도 또한 사과하지 않았다. 명규가 매우 화가 나서 대각에 나아가 스스로 논열하면서 정원을 심하게 공격하였는데, 말에 상당히 노여운 기색이 있었고, 또 청에 오르는 것이 합당한지 합당하지 않은지를 따졌다. 의논하는 자들은 정원이 배리를 다스린 것은 옳지 않으며 청에 오르는 일의 합당 여부를 헌관이 논하는 것도 옳지 않다고 하였다.

 

명나라 복건성(福建省) 장주부(漳州府) 사람이 경상도 곡포(曲浦) 앞바다에 표류해 와서 땔나무와 물을 찾아 싣고 갔다. 감사가 계문하였다.

 

7월 17일 갑인

2차 기우제의 헌관 이하에게 차등있게 상을 내렸다. 간원이 여러차례 아뢰어 명을 도로 거둘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끝내 따르지 않았다.

 

7월 18일 을묘

상이 침을 맞았다. 이튿날 또 침을 맞았다.

 

7월 19일 병진

승지 오두인(吳斗寅)·강호(姜鎬) 등이 대간에게 논핵을 당했다는 이유로 상소를 올려 사직하였는데, 잘못된 말이 많았다. 심지어는 ‘양사(兩司)의 아전이 죄를 지었을 때에 본원에서 손을 쓸 수가 없으면 정원의 사체는 날로 낮아지고 대간의 사체는 날로 높아져서, 여러 관사에 호령을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라는 말까지 있었다. 이에 헌부가 너도나도 일어나서 인피하며 공격하였는데, 장령 신명규가 피혐한 말은 적절한 말이 아니어서 많은 사람들의 웃음을 샀다. 처치하여 모두 출사시켰다.

 

7월 20일 정사

호조 판서 김좌명(金佐明)이 사직하여 체임되었다. 김좌명이 병을 이유로 여러 차례 사직을 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상소가 비국에 내려져 체임될 수 있었다. 김좌명은 사리가 분명하고 위엄이 있어서, 호조 판서에 제수되자 간사한 자들이 농간을 부리지 못했는데, 매우 각박하여 물정에 통하지 못하였으므로 원망하는 사람이 많았다.

 

원양 감사(原襄監司) 이상일(李尙逸)이 원주 목사(原州牧使) 허질(許秩), 삼척 부사(三陟府使) 정창도(丁昌燾), 금성 현령(金城縣令) 이흥직(李興稷)이 정치를 잘 한 정상과 진구할 곡식을 별도로 준비한 일에 대하여 장계를 올려 아뢰었다. 상이 해조에 명하여 전례를 상고하여 여쭈어 처리하게 하니, 해조가 전례에 혹 가자하기도 하고 혹 상을 주기도 했다는 것으로 상고하여 아뢰었다. 상이 이르기를,
"허질은 치적이 가장 현저하고 또 진구할 곡식을 별도로 준비한 것이 1천 석이 넘으니, 가자하라. 정창도와 이흥직에게는 모두 숙마(熟馬)를 사급하라."
하였다. 허질은 좌상 허적(許積)의 아우이다.

 

7월 21일 무오

대사헌 조복양, 집의 권격 등이 아뢰기를,
"들으니 봄에 평산(平山) 땅에서 궁가(宮家)가 농장을 설치하고 측량할 때에, 불을 지르고 화살을 쏜 변고가 있었는데, 본부에서 근방의 활을 쏠 줄 아는 사람 20여 명을 잡아 가두고 여섯 달이 지나도록 판결하지 않아서 집이 파산되고 농사를 폐하게 되어, 온 지역에 억울하다고 하지 않는 사람이 없고, 또 밀봉(密封)한 것을 근거로 6, 7인을 잡아 가두고 형신을 하였다고 합니다. 간사한 백성이 변고를 일으킨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니 만약에 적발할 수 있다면 법으로 마땅히 엄하게 다스려야 하겠으나, 이것은 필시 한 사람의 소행이지 다른 사람과 함께 한 짓은 분명히 아닙니다. 밀봉에 있어서는 혐의나 원망으로 말미암는 경우가 많으니, 믿고 받아들이기는 더욱 어려운 것입니다. 죄수를 소결하는 이 시기에 죄수들을 그대로 가두어두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본도로 하여금 모두 석방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고, 이르기를,
"이어서 본도로 하여금 기필코 잡게 하라."
하였다.
당시에 여러 궁가에서 농장을 설치하여, 그 폐단이 끝이 없었기 때문에 간사한 백성이 변고를 일으키게 되었으니, 백성들의 원망을 여기에서 알 수가 있다. 조정이 근본을 돌이켜 폐단을 혁파하지는 못하고 죄 없는 사람 수십 명을 반 년이나 가두어 두었으니, 어떻게 인심을 달랠 수 있겠는가. 비록 대간의 아룀으로 인하여 석방되기는 하였으나, 혜택이 베풀어지지 못함이 이러하니, 애석하다.

 

예조 정랑 도신여(都愼與)가 죄가 있어서 법을 맡은 관리에게 내려졌다가 정배되었다. 도신여는 대구부(大丘府) 사람이다. 새로 부임한 부사 최응천(崔應天)에게 글을 보내어 전임 관원의 잘못을 나열하고 또 아무 아무를 마땅히 향임(鄕任)에 차임해야 한다고 말하였는데, 최응천이 그가 지휘한 것을 분하게 여겨 벼슬아치들에게 전파했다. 이에 대사헌 조복양 등이 전임 관원의 죄를 따지고 신임 수령을 지휘한 죄를 논하여, 잡아다 추문하여 죄를 정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헌부가 또 전 현감 오정상(吳挺相)이 재산을 다툰 죄를 논하여, 유사로 하여금 죄주게 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오정상은 고 판서 오준(吳竣)의 아들이다. 아주 어리석은 자로서 죽은 아우의 아내와 가사(家舍)를 다투는 등 놀라운 일이 많이 있었다고 한다.

 

이경억(李慶億)을 호조 판서로, 박세채(朴世采)를 진선으로 삼았다. 고 의정(議政) 이후원(李厚源)에게 충정(忠貞)이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

 

이달 7일에 당선(唐船) 한 척이 표류하다가 방답(防踏) 지경의 안도(安島) 앞 포구에 들어와 정박했는데, 배의 제도가 우리 나라의 전선(戰船)과 크기가 같았다. 사람들은 모두 머리가 길고 수염이 있었으며 모두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대략 3, 4십 명쯤 되었는데, 나무를 하고 물을 긷고는 바로 배를 띄워 떠났다. 전라 좌수사가 계문하였다.

 

7월 22일 기미

승지 남구만(南九萬)이 아뢰기를,
"대청의 사체는 매우 엄한 것입니다. 승지와 사관이 대관과 상대하여 있는 경우에 아전이 자리에 참여하는 것은 사리로 헤아려 볼 때 타당하지 않습니다. 지금 이후로는 대관이 전교를 받을 때에 헌부의 아전은 벼루와 책자를 전한 뒤에는 대청에서 승지와 마주 앉지 못하게 하는 것을 법식으로 정하여 시행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리하라고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이러한 일은 모두가 심한 폐단인데, 대간이 반드시 그렇게 하고자 하니, 나는 그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아뢴 말이 진실로 그러하니, 여기에 의거하여 법식을 정하라."
하였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가을 가뭄이 이토록 심하니, 백성들의 일을 생각하건대 참으로 마음이 아프고 답답하다. 비록 질병 때문에 직접 기우제를 지내지는 못하나 마음은 매우 편치 못하다. 차례에 구애될 것이 없이 대신을 보내어 기우제를 지내라."
하였다.

 

7월 23일 경신

정원이 헌부의 아전이 대청에 참여해 앉을 수 없는 것을 계품하여 법식으로 정하였다. 이에 헌부가 모두 대청에 나아와 인피하였는데, 장령 신명규는 말이 매우 장황하였다. 심지어는 ‘헌부의 아전이 청에 오르는 것은 대간의 체모에 관계되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해오던 일을 승지가 억누른다고 해서 변경시켜서는 안됩니다. 정원이 계품하여 법식으로 정한 것은 분하게 여겨 이기고자 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으로서, 임금이 대관을 경시하는 조짐을 열었습니다. 체직시켜 주소서.’라고 하고는,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대사헌 조복양, 지평 최후상의 사직하는 말이 매우 준절하였는데, 심지어는 ‘헌부의 아전이 청에 오르고 안 오르고는 이것이 얼마나 잗단 일인데, 정원이 이것으로 상의 귀를 혼탁시키어 급급히 성상의 유지를 얻어내고자 하였습니다. 이 일은 대관과 더불어 다툰 뒤에 바로 있었으니, 오직 본원의 기상을 펴고 대간의 체모를 꺾을 줄만 안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사리입니까. 그 일을 말하면 한갓 이기기를 좋아하는 것일 따름이나, 앞으로의 폐단을 생각하면 이루 헤아릴 수 없을까 염려됩니다. 그런데 성상께서 도리어 그들의 말을 윤허하시어 그 좋지 못한 습속을 키워주었습니다.’ 하면서 인피하고는,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상이 신명규에게 답하기를,
"아전이 좌석에 참여하는 것은 실로 근거가 없는 일이다. 여기에 무슨 노여워할 것이 있기에 이토록 기세를 부리는가? 나는 매우 이상하게 생각한다."
하였다. 명규가 엄한 전지를 받았다는 이유로 다시 인피하면서 체직을 청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집의 권격, 사간 이유, 헌납 이관징도 혹은 상피를 이유로, 혹은 전임 헌관 때에 생각없이 구례를 따른 잘못을 이유로 모두 피혐하였다. 옥당이 처치하여, 모두 출사시킬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이때에 헌부의 아전이 청에 오르는 문제가 대각의 큰 의논이 되어 여러 날을 야단스럽게 논쟁하니, 식자들이 웃었다. 남구만이 계품하여 정식으로 정하는 것은 참으로 잗단 일로서, 비록 이기기 좋아하는 마음은 없었으나 마침 분쟁하는 즈음에 있었기 때문에, 대관이 이기기를 다툰다는 명목으로 배척하였고, 결국 이것으로 탄핵을 당하였다.

 

7월 24일 신유

대신을 보내어 종묘와 사직과 북교(北郊)에 기우제를 지냈다.

 

7월 25일 임술

행 대사헌 조복양이 본부가 장차 충청도 병영(兵營)의 기수(旗手)를 혁파하자는 논의를 발론하려 하는데, 그대로 두고 더 모집하자고 비국이 아뢸 때에 일찍이 참여했었다는 것을 이유로 인피하였다. 처치하여 체직되었다.

 

집의 권격, 지평 최후상 등이 아뢰기를,
"승지 남구만은 화가 난 상태에서 잘못된 것을 합리화시키고 이기기를 힘써서, 아주 하찮은 일을 가지고 많은 말로 진계하여 반드시 상의 허락을 받아내어, 시끄러운 말썽이 있은 뒤에 급급히 변통하고자 하였으니, 그 뜻이 과연 법식을 정하는 데에 있었겠습니까. 대간을 멸시하고 일의 체모를 손상시킨 것이 큽니다. 추고하소서."
하였다. 여러 차례 아뢰었으나 상이 끝내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지난번에 본부가 충청 병영의 기수에 대한 일을 논계하여 병사(兵使)와 우후(虞候)를 처벌할 것을 청하였는데, 추고하여 그 함사(緘辭)를 보고 처리하라고 분부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함답(緘答)하는 동안 잠시 논계를 정지했습니다. 지금 전 병사 유여량(柳汝𣛀), 전 우후 남용뢰(南勇賚) 등의 함사를 보니, 말을 꾸민 것이 상당히 많은데, 사사로이 기수를 설치하여 대오(隊伍)에 소속시키지 않은 일은 감히 숨기지 못하였습니다. 군병(軍兵)을 설치하는 것이 이 얼마나 중대한 일인데, 명목도 없는 일을 창시하여 끝없는 폐단이 생기게 한단 말입니까. 본도의 감사가 청주 목사(淸州牧使)가 논하여 보고한 일로 인하여, 혁파하도록 하였는데, 유여량은 기어이 그대로 존속시키고자 하여 심지어 방위(方位)를 아주 잘 안다고 말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 멋대로 설립하고 사실대로 아뢰지 아니한 죄를 징계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기수를 혁파하고 유여량은 잡아다 추문하소서. 유비연(柳斐燃)은 무겁게 추고하소서."
하였다. 여러 차례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논하기를,
"소근 첨사(所斤僉使) 김효청(金孝淸)은 위장(衛將)의 임무를 맡고 있을 때에 늠록(稟祿)을 가져다 쓴 죄가 있습니다. 파직하소서."
하였다. 여러 차례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병조 판서 홍중보(洪重普)가 상차하여 김효청을 신구하자 집의 권격이 세 번 인피하였는데, 결국 잘못 알고 경솔히 아뢰었다는 것으로 체직을 당하였다.

 

기우제 헌관인 영의정 정태화 이하에게 차등있게 상을 내렸다.

 

7월 26일 계해

이조 판서 박장원이 진소하여 사직해서 체직되었다. 박장원은 일찍부터 명망이 있었는데, 재상의 반열에 승진하여서는 계획을 세워 한 일이 없고 그저 남들이 하는 대로 따르기만 하였으므로 위아래가 모두 가벼이 여겼다. 그러나 행실이 청렴하고 신중하였으며 어머니를 효성을 다하여 섬겼으므로, 사람들이 어질게 여겼다.

 

7월 27일 갑자

상이 침을 맞았다. 도제조 정치화가 아뢰기를,
"의관(醫官) 윤후익(尹後益)과 이동형(李東馨) 등에게 군직을 주어 관대 차림으로 출입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사신은 논한다. 의관들에게 용서하기 어려운 죄가 있는데도, 끝내 징계시키는 거조는 없고, 도리어 출입하기에 불편한 점이 있다고 하여 서둘러 군직을 주었으니, 의관들이 기탄없는 것이 무엇이 이상하겠는가.


【태백산사고본】 15책 15권 9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585면
【분류】왕실-국왕(國王) / 인사-임면(任免) / 역사-편사(編史)
사신은 논한다. 의관들에게 용서하기 어려운 죄가 있는데도, 끝내 징계시키는 거조는 없고, 도리어 출입하기에 불편한 점이 있다고 하여 서둘러 군직을 주었으니, 의관들이 기탄없는 것이 무엇이 이상하겠는가.

 

김좌명(金佐明)을 이조 판서로, 조복양(趙復陽)을 예조 판서로, 박장원(朴長遠)과 조형(趙珩)을 좌·우 참찬으로, 이경휘(李慶徽)를 대사헌으로 삼았다. 김좌명은 왕비의 큰아버지이다.

 

상이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북병영(北兵營)에 성을 쌓는 일이 온당한지의 여부에 대해 의논하니,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북도(北道)가 비록 서로(西路)와는 다르지만 청나라 사람들이 이것을 구실로 우리를 위협하기에는 충분합니다."
하였다, 이조 참판 민정중은 성을 쌓자는 의논을 힘써 주장하였고, 북병사(北兵使) 이만영(李晩榮)은 이로울 것이 없다고 하였다. 이때에 풍기 군수(豊基郡守) 어상준(魚尙儁)이 상소하였는데, 상이 그 상소를 대신들에게 내어 보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상준은 사람됨이 취할 만한 말을 할 수 없는 자입니다."
하였다. 좌상 허적이 아뢰기를,
"상준은 인물과 문장이 모두 취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이조 참판 민정중이 아뢰기를,
"사람이 못났다고 말까지 폐해서는 안 됩니다. 상준이 한 말이라도 만약에 좋은 말이라면 어찌 폐해서야 되겠습니까."
하였다. 태화가 이어서 상준의 상소를 펴서 읽었다. 척화를 주장하였던 세 신하의 사당을 세우는 일에 대한 구절에 이르러 상이 묻기를,
"세 신하란 누구인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홍익한(洪翼漢), 오달제(吳達濟), 윤집(尹集)입니다."
하였다. 정중이 아뢰기를,
"이 세 신하는 병자년에 정도를 지키며 척화를 주장하다가 잡혀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죽였다고는 하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끝내 일의 명백한 상황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죽였다고 했다면서 무엇을 모른단 말인가?"
하니, 모두 아뢰기를,
"죽였다고 하기도 하고 죽이지 않았다고 하기도 했는데, 끝내 거처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죽인 것이 분명합니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그 당시에 화친을 반대했던 사람이 이 세 사람만이 아니었는데, 이들은 반드시 자기들의 뜻을 행하려고 했었기 때문에 결국 화를 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고, 허적이 아뢰기를,
"그 당시에 나라에 이로운지 해로운지는 생각지 아니하고 한갓 야단스럽게 다투어 과격한 일만을 힘썼습니다. 그 가운데 비록 절의를 지킨 사람이 있기는 하였습니다만, 대부분은 분위기에 휩쓸린 명분론이었습니다."
하고, 민정중이 아뢰기를,
"세 신하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절의를 지켜 죽어도 흔들리지 않았으니, 훌륭합니다. 그러나 증직하는 일은 괜찮겠습니다만, 사당을 세우는 것은 소문만 나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소문만 나지 않는다면 사당을 세우는 데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그 자손을 녹용(錄用)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고, 민정중이 아뢰기를,
"이미 증직을 하였더라도 품질을 하나 올려주는 것이 어찌 안 되겠습니까."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광부(狂夫)의 말도 성인(聖人)이 택했는데, 사람이 못났다고해서 말까지 폐해서야 되겠는가. 어상준(魚尙儁)이 비록 취할 만한 것이 없는 사람이나, 단지 그의 말이 어떠한지만 보아야지, 어찌 반드시 그 사람됨이 어진지 어리석은지를 먼저 논하여 취하고 버릴 것을 정한단 말인가. 선(善)으로써 임금을 인도하는 의리가 전혀 아니다. 당시에 척화를 주장했던 신하들이 비록 시대의 형세를 헤아리지는 못했으나 바른 길을 지켜 흔들리지 않았으니 뒷 세상에 할 말이 있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 그 말을 이르기를 ‘분위기에 휩쓸려 과격한 논의를 힘써 주장했다.’고 하니, 참으로 탄식할 일이다.  민정중이 아뢰기를, "성균관이 오래 전부터 떼어받아 소유하고 있는 시산(柴山)이 두 군데 있는데, 하나는 양근(楊根)에 있고 하나는 김포(金浦) 땅에 있습니다. 김포에 있던 것은 이미 잃어 버렸고, 양근의 시산은 임진 병란(壬辰兵亂) 이후에 오래도록 수습하지 않아서 백성들이 모두 차지하고 있습니다. 공조로 하여금 세금을 면제하고 소속시키게 해서 선비를 기르는 용도로 쓰게 하소서." 하니, 상이 시선(柴船) 두 척을 지급하라고 명하였다. 병조 판서 홍중보(洪重普)가 아뢰기를, "중추부 녹사(錄事)는 법전에 기록되어 있는 원래의 정원이 60명인데, 더하여 정한 숫자가 무려 800명이나 됩니다. 그런데 서울에 입번(立番)하는 녹사는 5, 6명에 불과합니다. 건장한 자 500명을 떼어내어 본조로 옮기고, 중추부에서 포(布)를 거두는 예대로 한결같이 하여 군수 물자에 보충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태백산사고본】 15책 15권 9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585면
【분류】신분-중인(中人) / 농업-임업(林業)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왕실-국왕(國王) / 군사-관방(關防) / 군사-군역(軍役) / 군사-전쟁(戰爭) / 사상-유학(儒學) / 역사-편사(編史)
사신은 논한다. 광부(狂夫)의 말도 성인(聖人)이 택했는데, 사람이 못났다고해서 말까지 폐해서야 되겠는가. 어상준(魚尙儁)이 비록 취할 만한 것이 없는 사람이나, 단지 그의 말이 어떠한지만 보아야지, 어찌 반드시 그 사람됨이 어진지 어리석은지를 먼저 논하여 취하고 버릴 것을 정한단 말인가. 선(善)으로써 임금을 인도하는 의리가 전혀 아니다. 당시에 척화를 주장했던 신하들이 비록 시대의 형세를 헤아리지는 못했으나 바른 길을 지켜 흔들리지 않았으니 뒷 세상에 할 말이 있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 그 말을 이르기를 ‘분위기에 휩쓸려 과격한 논의를 힘써 주장했다.’고 하니, 참으로 탄식할 일이다.
민정중이 아뢰기를,
"성균관이 오래 전부터 떼어받아 소유하고 있는 시산(柴山)이 두 군데 있는데, 하나는 양근(楊根)에 있고 하나는 김포(金浦) 땅에 있습니다. 김포에 있던 것은 이미 잃어 버렸고, 양근의 시산은 임진 병란(壬辰兵亂) 이후에 오래도록 수습하지 않아서 백성들이 모두 차지하고 있습니다. 공조로 하여금 세금을 면제하고 소속시키게 해서 선비를 기르는 용도로 쓰게 하소서."
하니, 상이 시선(柴船) 두 척을 지급하라고 명하였다. 병조 판서 홍중보(洪重普)가 아뢰기를,
"중추부 녹사(錄事)는 법전에 기록되어 있는 원래의 정원이 60명인데, 더하여 정한 숫자가 무려 800명이나 됩니다. 그런데 서울에 입번(立番)하는 녹사는 5, 6명에 불과합니다. 건장한 자 500명을 떼어내어 본조로 옮기고, 중추부에서 포(布)를 거두는 예대로 한결같이 하여 군수 물자에 보충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동지사(冬至使) 이경억(李慶億)을 체차하고 이정영(李正英)을 자헌 대부로 승진시켜 정사(正使)로 삼았다. 이경억이 바야흐로 호조 판서를 맡았기 때문이다.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이조 판서 김좌명은 병을 앓고 있는데 제수되었고, 참판 민정중은 상피 때문에 체직되어야 하며, 참의는 고향에 내려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만약에 긴급히 체차하고 제수할 일이 생기면 걱정입니다. 이익(李翊)을 속히 올라 오도록 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르고, 이르기를,
"참판은 정사(政事)에 참여할 수 없는가?"
하자, 민정중이 아뢰기를,
"신은 마땅히 체직되어야 할 입장에 있는데, 어찌 정사에 참여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민정중이 비록 김좌명과 상피 관계이기는 하나 김좌명이 행공하기 전에는 민정중으로 하여금 우선 임무를 보게 하는 것도 무방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의 생각도 그러하다."
하였다. 민정중이 아뢰기를,
"조정의 거조가 어찌 이처럼 구차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리고 인사권을 담당하는 혐의쩍은 자리에 또한 어찌 전례없는 규례를 새로 만들 수가 있겠습니까. 조정의 명령이 있더라도 결코 받들 수가 없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이익을 우선 체차시키고 참의를 차출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참판이 있는데 대신이 어찌 참의를 차출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자, 민정중이 마지못하여 명을 받들었다.

 

지평 최후상(崔後尙)이 인피하기를,
"신이 어제 이조 당상의 함사를 보았더니, 수십 년 전에 정병(政柄)을 전횡하려고 한 어떤 재상이 낭천(郞薦)의 법을 없애자고 주문을 올렸다는 등의 말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사실 신의 아비를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신의 아비 최명길(崔鳴吉)이 정축년에 막 정승에 제수되었을 때에 차자를 하나 올려 당시의 폐단을 아뢰었는데, 낭천을 혁파하자고 청한 일이 과연 있었습니다. 이것은 한때의 폐단을 바로잡으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딴 뜻이 있었겠습니까. 가령 신의 아비의 뜻이 과연 정병을 전횡하는 데에 있었다면, 이조 판서로 있을 때에 혁파를 청하지 아니하고 정승에 제수된 뒤에 이 청을 하였겠습니까. 더구나 선정신 이이(李珥)도 일찍이 이런 의논을 낸 적이 있습니다. 이이도 정병을 전횡하고자 한 뜻이 있었단 말입니까. 신의 아비를 헐뜯는 말이 추감(推勘)하는 가운데에 있었는데, 애초에 자세히 살피지 못하고 전례대로 주독(奏牘)하였으니, 실수한 바가 큽니다. 체직시켜 주소서."
하였다.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헌부가 처치하여, 주독을 자세히 살피지 못했다는 것으로 체직을 청하였다. 이보다 앞서, 이조가 전랑(銓郞)을 의망하는 데에 사람이 부족하다는 것을 이유로, 중고(中考)를 맞은 낭관을 모두 탕척시키기를 청하고, 또 두 사람을 의망하니, 대신이 옳지 않다고 하면서 당해 당상을 추고하기를 청하였는데, 판서 박장원과 참판 민정중의 함답 가운데에 ‘낭천을 혁파하자는 의논은 정병을 전횡하고자 하는 재상에게서 나왔었다.’는 말을 하였다. 재상이란 곧 최명길이다. 함사 가운데에 성명을 거론하지 않았기 때문에 후상이 이제서야 깨닫고 인피한 것이다.

 

제주(濟州) 노인 가운데 90세 이상인 사람에 대해서, 함경도의 노인을 대우한 전례대로 은전을 시행할 것을 명하였다.

 

황해도에 큰물이 져서 벼곡식이 모두 손상되었다.

 

7월 28일 을축

사간 이유, 헌납 이관징이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이보다 앞서 간원이 삼수 군수(三水郡守) 정사한(鄭斯翰)을 체직시킬 것을 논핵했는데, 좌상 허적이 먼 외방의 수령을 논핵할 때에는 파직을 청하는 것으로써 아뢰고 체직을 청하는 것으로써 아뢰지 않는 것이 예라고 하면서, 탑전에서 배척을 하고, 이어 사한을 파직할 것을 청하였다. 이유 등이 이것을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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