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15권, 현종 9년 1668년 8월

싸라리리 2025. 12. 12. 08:19
반응형

8월 1일 정묘

상이 양심합(養心閤)에서 침을 맞았다. 이때에 상이 연일 침을 맞았는데, 제조가 보호하는 임무를 맡고 있으면서도 입시하지 못하였다. 이에 도제조 정치화가 입시를 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물러 나온 뒤에 바로 침을 맞았다.

 

원양도(原襄道) 영동(嶺東) 지방이 크게 가물었다.

 

8월 2일 무진

이정영(李正英)을 판윤으로, 여성제(呂聖齊)를 집의로, 김징(金澄)을 사간으로, 정시성(鄭始成)을 장령으로, 송창(宋昌)을 헌납으로, 이익상(李翊相)을 북평사(北評事)로 삼았다.
사신은 논한다. 김징은 일찍이 금(金)을 우송해 보내어 기생을 속량시킨 허물이 있어서 역졸(驛卒)과 대면하여 변론하기까지 하였으므로 이 때문에 버려진 사람이 되었었는데, 민정중과 이익 등이 힘껏 추천하여 다시 대성(臺省)에 들어갔다. 김징은 일이 있으면 급히 처리하느라 치고받으며 아무것도 돌아보지 않았다. 나라를 욕되게 하였다는 이유로 삼공(三公)을 논핵하다가, 귀양가는 벌을 받았다. 오래지 않아 서용되어 문학에 제수되자, 정고(呈告)하고 오래도록 나오지 않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아장(亞長)에 제수되었다. 김징은 기품이 날카롭고 일 말하기를 좋아하였으나, 이름을 내려는 행태만 있었지 사실 곧고 강직한 풍도는 없었다. 몸에 씻지 못할 허물을 지니고서 대각에서 활개를 치고 다니며 의기양양하게 스스로 좋아하니, 식자들은 그 부끄러움이 없는 것을 천하게 여겼다.


【태백산사고본】 15책 15권 10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586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역사-편사(編史) / 인물(人物)
사신은 논한다. 김징은 일찍이 금(金)을 우송해 보내어 기생을 속량시킨 허물이 있어서 역졸(驛卒)과 대면하여 변론하기까지 하였으므로 이 때문에 버려진 사람이 되었었는데, 민정중과 이익 등이 힘껏 추천하여 다시 대성(臺省)에 들어갔다. 김징은 일이 있으면 급히 처리하느라 치고받으며 아무것도 돌아보지 않았다. 나라를 욕되게 하였다는 이유로 삼공(三公)을 논핵하다가, 귀양가는 벌을 받았다. 오래지 않아 서용되어 문학에 제수되자, 정고(呈告)하고 오래도록 나오지 않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아장(亞長)에 제수되었다. 김징은 기품이 날카롭고 일 말하기를 좋아하였으나, 이름을 내려는 행태만 있었지 사실 곧고 강직한 풍도는 없었다. 몸에 씻지 못할 허물을 지니고서 대각에서 활개를 치고 다니며 의기양양하게 스스로 좋아하니, 식자들은 그 부끄러움이 없는 것을 천하게 여겼다.

 

이상경(李尙敬)을 경상 우병사로 삼았다.

 

8월 3일 기사

이조 판서 김좌명(金佐明)을 체직시켰다. 김좌명은 왕의 인척이었고 또 송시열(宋時烈)과 사이가 좋지 않아, 사론(士論)을 내는 자들이 늘 왕의 인척이라는 이유로 배척하였다. 서필원(徐必遠)이 김좌명에게 말하기를, ‘공이 전조(銓曹)의 장관이 되면 내가 논핵하겠다.’고 하였는데, 서필원은 김좌명과 정분이 두터운 사이인데도 그 말이 이러하였다. 전조의 장관에 제수되자 사람들은 모두 그가 반드시 체직되리라는 것을 알았는데, 발론이 나오기 전에 김징이 사간이 되어 아뢰기를,
"왕의 인척이 인사 행정의 권한을 잡으면 반드시 폐단이 있게 됩니다. 때문에 역대 제왕들 가운데 법을 만들어 그것을 막았던 자가 역시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광국(竇廣國)006)   같은 충성스러운 사람도 승상을 삼지 아니했고 풍야왕(馮野王)007)  같은 어진 사람도 어사 대부를 삼지 않았습니다. 미세한 조짐을 막고 혐의쩍은 일을 멀리한 것이 어찌 우연이겠습니까. 김좌명은 척완의 신분인데 갑자기 전형을 제수하였으니, 아마 성상께서 깊이 생각하지 않으신 듯합니다. 또한 어찌 청명한 조정의 아름다운 일이 되겠습니까.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당시에 김징이 권우(權堣)가 그가 기생을 속량시킨 것을 상소하여 배척한 일로 인하여, 문학에 제수되었는데도 소장을 올리고는 나오지 않다가. 사간에 제수되자 이튿날 나와서 사례하고 즉시 김좌명을 논핵하였다. 김징을 편드는 자들은 김징의 곧은 명성을 선양하고 식자들은 그가 곧다는 이름을 얻으려는 것을 비난하였다. 김좌명이 웃으며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김징은 내가 행공하리라 여기는가? 무엇 때문에 이토록 서두르는가.’하였다.

 

간원이 논하기를,
"전옥서의 전후 관리는 형옥을 삼가지 않은 죄가 있습니다. 유사로 하여금 분명히 조사하여 죄를 주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당시에 살인을 한 죄인 이세공(李世恭)이 여러해 갇혀 있으면서 예사롭게 자기 집에 오고가며 두 아들까지 낳았기 때문에 듣는 사람들이 한심하게 여겼었는데, 이때에 간원이 논계한 것이다. 전후의 옥관은 모두 법을 맡은 관리에게 내려 죄를 논하여 정배하였고, 세공은 여러 차례 엄한 형벌을 받고 결국 옥중에서 죽었다.

 

경기 지방에 소의 전염병이 심하게 번져 1백여 마리나 죽었다.

 

밤에 유성이 나타나 빛이 땅을 비추었고 소리가 있었다.

 

8월 4일 경오

상이 정원에 분부하기를,
"9년 동안 앓아온 눈병이 뿌리가 이미 고질이 되었는데, 3년 동안 온천에 목욕을 했더니 자못 효험이 있었다. 올 여름에는 점점 심해져서, 조금이나마 편했던 날은 열흘도 되지 못하고 여러 달을 쑤시는 고통 속에서 살았다. 만약 이때를 놓치고 치료하지 않으면 장차 어떻게 되겠는가. 추위가 오기 전에 온천에 가서 목욕을 하고자 하는데, 다만 농사일이 한없이 바쁘고 가을 추수가 한창인 때라서 내 마음이 편치 못하다. 모든 일을 간편하게 하여 조금이라도 민폐를 덜도록 하라. 거둥할 날을 즉시 가려서 들이라."
하니, 예조가 이달 16일로 날을 잡아 아뢰었다.

 

상이 침을 맞은 뒤에 대신 및 병판, 예판, 훈련 대장을 인견하고, 온천에 거둥할 때에 거행할 일을 의논하였다. 호판 이경억으로 정리사(整理使)를 삼아, 먼저 떠나게 하고 인하여 분부하기를,
"모든 일을 간략하게 하고 길도 대략 치울 것이며 올릴 물품들은 지난 해의 예대로 하되 30가지를 넘기지 말라."
하였다. 상이 대신에게 이르기를,
"대신 가운데 좌상이 서울에 남아 있어야 하겠다."
하니,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신이 마땅히 어가를 수행해야 하는데, 뒤떨어져 따라가는 것이라면 근력이 지탱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영상이 서울에 남고 좌상이 어가를 수행하라."
하였다. 대신들이 아뢰기를,
"어영 대장 유혁연(柳赫然)은 병이 있어서 어가를 호종하기 어려우니, 훈련 대장 이완(李浣)으로 하여금 어영군을 거느리고 수행하게 하소서. 유혁연은 병이 있으나, 서울에 남아 지키는 일은 시킬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이완이 아뢰기를,
"신이 거느리는 군사를 놓아두고 다른 장수의 군사를 거느리고서 어가를 호위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본디 그대가 이 말을 할 줄 알고 있었다."
하고, 따랐다. 이완이 아뢰기를,
"시위 군사는 몇 사람을 써야 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6백 명을 넘지 않게 하라."
하였다. 이완이 아뢰기를,
"뒤따를 부대가 1천 명인 것은 너무 많으니, 줄이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니, 좌상 허적이 아뢰기를,
"소략할 것 같으면 배행 대장의 말이 필시 이렇지 않을 것입니다. 상께서 특명으로 숫자를 줄이시면 듣는 사람들이 모두 감동할 것입니다."
하고, 판부사 정치화는 줄여서는 안 된다고 끝까지 주장하였으나 상이 답하지 않았다.

 

8월 5일 신미

전옥서 참봉 이면(李勉)이 법을 맡은 관리에게 내려졌다. 형조가 적간을 할 때에 사형수들이 목에 채워놓는 칼을 벗은 채 있었기 때문에 형조가 그를 죄줄 것을 계청하였는데, 상이 잡아다 다스리라고 명하였다.

 

송준길(宋浚吉)을 이조 판서로, 윤집(尹鏶)을 호조 참판으로, 장선징(張善瀓)을 대사간으로, 이단하(李端夏)를 부수찬으로, 정재숭(鄭載嵩)과 윤경교(尹敬敎)를 지평으로, 최후상(崔後尙)을 정언으로, 민종도(閔宗道)를 문학으로 삼았다.
사신은 논한다. 장선징은 대사간으로 있을 때에 사사로움을 따른 잘못이 있었는데, 오래지 않아 다시 이 직임에 제수되었으니, 전조(銓曹)가 공론을 무시하는 것이 심하다.


【태백산사고본】 15책 15권 11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586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역사-편사(編史)
사신은 논한다. 장선징은 대사간으로 있을 때에 사사로움을 따른 잘못이 있었는데, 오래지 않아 다시 이 직임에 제수되었으니, 전조(銓曹)가 공론을 무시하는 것이 심하다.

 

장령 조속(趙涑)이 죽었다. 자는 희온(希溫)이다. 아비는 현감 조수륜(趙守倫)인데, 광해군 때에 억울하게 죽었다. 조속이 아비가 비명에 죽은 것을 원통하게 생각하여, 정사(靖社)할 때에 협찬한 공이 많았는데, 일이 이루어진 뒤에는 단연코 훈록에 참여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이것으로 그의 뜻을 고결하게 여겼다. 효종조에 대성(臺省)에 발탁되었는데, 끝내 부임하지 않았다. 집이 매우 가난하여 끼니를 잇기 어려웠는데도 태연하였다. 글씨와 그림에 솜씨가 있어 필법이 세상에 전해진다.

 

밤 2시경에 유성이 나타났는데, 빛이 땅을 비추었다.

 

8월 7일 계유

형조의 금제조(禁制條)가 이루어졌다. 모두 8개 조항인데, 소와 말을 도살하는 일[牛馬屠殺], 술을 금하는 일[酒禁], 난전에 대한 일[亂廛], 상놈이 성안에서 말을 타는 일[常漢城內騎馬], 신사의 고중에 대한 일[神祀高重], 조운선에 대한 일[漕船], 음녀에 대한 일[淫女], 성안의 승려들에 대한 일[城中僧人] 등이다. 한성부의 금제조가 이루어졌다. 모두 6개 조항인데, 각전의 고중에 대한 일[各廛高重], 소와 말고기를 금지하는 일[牛馬肉禁], 네 산의 소나무를 베지 못하게 하는 일[四山松禁], 난전에 대한 일[亂廛], 되와 말의 크기를 규제하는 일[大小升斗], 동·서활인서의 무녀를 적간하는 일[東西活人署巫女摘奸] 등이다.

 

성균관에 경서 교정청(經書校正廳)을 설치하였다. 이단하(李端夏), 김만중(金萬重), 박신(朴紳), 김학배(金學培), 홍도(洪覩)를 교정관(校正官)으로 삼았다. 홍도는 아는 것이 많고 기억을 잘하였으며 자학(字學)에 매우 밝았는데, 마음을 다하여 교정하니, 다른 사람들은 성공을 함께 누리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적인(賊人) 배천남(裵天男) 등을 주벌하였다. 형조가 모살인율(謀殺人律)로 조율하여 결단할 것을 아뢰었는데, 상이 이르기를,
"서울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서 사람을 둘이나 죽였으니, 비록 재물을 빼앗지는 않았으나, 이 사람은 바로 강도이다. 시기를 기다리지 말고 참수하라."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월과(月課)를 짓지 않은 사람을 대간에 제수하면 추고 전지 가운데 부표하여 탕척시킬 일로 일찍이 상께서 분부하신 일이 있습니다. 지금 대관이 전임 때에 삭서(朔書)를 쓰지 않은 것을 이유로 인혐을 했는데, 가동(家僮)을 가두는 벌을 대관에게 시행한 것은 일의 체모가 온당치 않으니 변통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월과를 짓지 않은 것과 같으니, 가동을 가두지 말고 이것으로 법식을 삼으라."
하였다.

 

8월 8일 갑술

상이 침을 맞은 뒤에 대신, 비국의 여러 신하, 옥당의 신하를 인견하였다. 영상 정태화가 청하기를,
"영부사 이경석(李景奭)과 서울에 남아 지키는 일을 함께 하게 해주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부교리 이숙(李䎘)이 아뢰기를,
"지금 이 거둥이 마침 벼곡식이 들판에 가득한 시기와 마주쳤으므로 반드시 더욱 더 신칙하여야 민폐가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때에 가서 거듭 분부를 내리겠다."
하였다. 이숙이 또 아뢰기를,
"도감의 군졸들은 어영군만 못하여, 수레를 빠르게 몰면 필시 엎어질 근심이 많을 것이니, 유념하소서."
하니, 상이 웃으며 이르기를,
"마땅히 유념하겠다."
하였다.

 

행 대사간 장선징, 헌납 송창이 아뢰기를,
"전 도사(都事) 강석빈(姜碩賓)이 전에 원양 좌막(原襄佐幕)으로 있을 때에 춘천 부사(春川府使) 유병연(柳炳然)과 일 때문에 서로 따지며 다투고는, 기근 구제하는 일을 신중히 하지 않았다고 구실을 붙여, 한편으로는 선혜청에 첩보를 보내고 한편으로는 감사에게 치보하여 병연을 파직시키기를 청하였는데, 감사가 그 말을 따라 사유를 갖추어 계문하였습니다. 장문(狀文)이 출발한 뒤에 석빈이 갑자기 처음의 뜻을 바꾸어, 사람을 달려 보내어 선혜청에 보내던 첩보를 도로 돌아오게 하고, 또 감사에게 급히 보고를 하면서 겸하여 사사로운 개인의 편지를 보내어 그 장계 올리는 일을 중지하기를 청하였는데, 감사가 또 그의 말을 따라서 또한 장문을 되돌아오게 하였습니다. 그 뒤에 병연의 사장(辭狀)에 석빈을 헐뜯는 말이 있자, 석빈이 또 화를 내어 장황하게 잘못한 일들을 주워모아 감사에게 치보를 하였습니다. 감사가 머뭇거리며 난처하게 여기고 있다가, 두 사람이 다 그르다는 논의가 있다는 말을 듣고는 모두 파직시킬 것을 아뢰었습니다.
석빈이 애초에 사사로운 노여움으로 상사(上司)를 지휘하여 권했다가 중지시켰다가 하였으니, 멋대로 조종한 정상이 매우 가증스럽습니다. 감사는 한결같이 그의 지휘만을 따라서 이미 아뢰었다가 뒤따라 송환시켜 거조가 전도되었으니, 일의 체모를 손상시킨 것이 이보다 심할 수가 없습니다. 석빈은 파직하여 서용하지 말고, 감사 이상일(李尙逸)은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면서 이르기를,
"상일은 추고만 하라."
하였는데, 네 차례째 아뢰니, 윤허하였다.

 

박장원(朴長遠)을 대사헌으로, 여성제(呂聖齊)를 승지로, 박증휘(朴增輝)를 집의로, 조성보(趙聖輔)를 지평으로 삼았다. 여성제는 청현직을 두루 거치면서 날카롭고 과격한 논의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직임에 승진된 것이다. 조성보는 사람됨이 바르지 못하고 분경을 좋아하였다.

 

유성이 나타나 빛이 땅을 비추었다.

 

대사헌 박장원이 추함(推緘)을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8월 10일 병자

종성 부사(鍾城府使) 권즙(權諿)이 법을 맡은 관리에게 내려졌다가 얼마 뒤에 풀려났다. 장령 정시성(鄭始成)과 지평 윤경교(尹敬敎) 등이 아뢰기를,
"권즙은 전에 안동 부사(安東府使)로 있을 때에 서울의 판상(板商)과 결탁을 하고 황장목(黃塲木)을 기르는 곳에서 판재(板材) 1백 60여 부(部)를 베어냈습니다. 봉화(奉化)에 가 있던 이름있는 조정 인사가 이 사실을 듣고서 크게 말을 전파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들통이 날까 염려가 되어 조정 인사의 집에다 관판(棺板) 4부를 보내어 입을 막을 계책을 하니, 조정 인사가 받지 않고 그의 소행을 분하게 여겨 가는 곳마다 그 일을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권즙이 비로소 숫자를 반으로 줄여 감사에게 보고를 하여 스스로 해명할 바탕을 마련하였는데, 그 당시 감사가 즉시 조사하여 계문하지 아니하고 베어낸 판자를 본부에다 두어 민역(民役)에 보충하게 하였기 때문에 권즙의 죄상이 끝내 다스려지지 않은 채 지금 북쪽 변방의 중요한 직임을 태연히 맡고 있습니다. 잡아다 추문하여 죄를 정하소서. 감사는 중하게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른바 이름있는 조정 인사라는 자는 곧 정양(鄭瀁)이다. 정양은 사람됨이 엉뚱하고 험악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더러는 믿지 않았다. 권즙은 금부에 갇혔다가 용서할 만한 정상이 아뢰어져 석방되었다. 또 논핵하기를,
"오정위(吳挺緯)는 비국의 직임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체직시키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또 논핵하기를,
"삼척 부사(三陟府使) 이찬한(李燦漢)은 일찍이 청도 군수(淸道郡守)로 있을 때에 청렴하지 못하다는 비난을 받았으니, 백성을 직접 다스리는 직임을 다시 맡겨서는 안 됩니다. 파직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훈련 도감에서 조총(鳥銃)을 만들어 각읍에 나누어 보내고 그 값을 강제로 정하여, 월과미(月課米)를 올려 보내게 합니다. 조총을 이미 갖춘 고을이라 하더라도 감히 도감의 명령을 어기지 못하여, 심지어 이미 갖추어 놓았던 총을 되팔아 가미(價米)를 준비하여 도감에 납부를 하기도 하는데, 본미(本米)가 그 값을 충당하기에 부족하기 때문에 각읍이 고생을 해가며 그 값을 채웁니다. 각읍의 폐단과 민생의 원망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입니다. 도감 대장이 나라의 체모를 돌아보지 않고 민폐를 염려하지 않는 것이 이보다 심한 것이 없습니다. 무겁게 추고하소서. 조총을 강제로 판매하는 일도 중지시키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삼가 살피건대, 각 군문(軍門)에서 서로들 이익을 다투어, 부(富)를 축적하는 일만 오로지 힘썼다. 나라를 해치고 백성을 좀먹는 정치가 모두 여기에서 말미암았다. 지금 조총을 나누어 보내고 가미를 강제로 납부하게 하는 것은 실로 전에 없던 일로서, 나라에 매우 큰 원망이 돌아가게 하는 짓이다. 이완(李浣)은 무반 가운데서는 자못 이름이 있는 자인데도 이러한 짓을 하였으니, 그 나머지야 또 말할 것이 있겠는가.

 

8월 11일 정축

장령 정시성 등이 논핵하기를,
"흥해 군수(興海郡守) 조상한(趙相漢)은 몸가짐이 바르지 못하여 뇌물을 받고 소송 사건을 처리하였으며, 흥덕 현감(興德縣監) 박이문(朴以文)은 부역을 내는 것이 고르지 못하고 정령이 전도되었습니다. 모두 파직하라고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박장원(朴長遠)을 우참찬으로, 이상진(李尙眞)을 대사헌으로, 서필원(徐必遠)을 호조 참판으로, 박세당(朴世堂)을 이조 좌랑으로 삼았다. 박세당은 벼슬하지 않으려고 하다가 금부에 내려져서 곤장을 받고 마지못해 행공하였는데, 사명을 받들게 되자 사직하여 체차되었다. 박세당이 애초에 전랑에 추천되었을 때에 민시중(閔蓍重)이 예전의 일을 가지고 비난을 했기 때문에, 박세당이 이것을 이유로 사직 인피하고 삼사(三司)의 직임에도 오래도록 나아가지 않았다.

 

8월 12일 무인

상이 대신, 비국의 여러 신하, 삼사의 신하를 인견하였다. 예조 판서 조복양이 양관(兩館)의 제학(提學)을 차출할 것을 청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합당한 사람이 있으면 차출하는 것이 옳다."
하니, 이조 참판 민정중이 아뢰기를,
"판서가 외방에 있으니, 문망(文望)의 직임을 차출하는 것은 감히 할 수가 없습니다."
하자, 조복양이 아뢰기를,
"어찌 정해진 규례가 있겠습니까."
하고, 민정중이 아뢰기를,
"제학은 대제학의 다음가는 직책이니, 굳이 차출하고자 한다면 대신에게 의논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병조 판서 홍중보가 아뢰기를,
"북평사(北評事) 이익상(李翊相)은 병 때문에 부임할 수가 없으니 체직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병이 좀 나은 뒤에 부임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대사간 장선징이 아뢰기를,
"북평사는 문관(文官)들이 돌아가면서 하는 괴로운 직임인데, 중보가 전관(銓官)이 차임한 뒤에 바로 다시 체직을 청하였으니,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삼척 부사 이찬한을 파직시킬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체직만 시켰다. 좌상 허적이 아뢰기를,
"대관이 신의 말을 들으면, 반드시 모두 인피할 것입니다."
하고는, 인하여 기수를 혁파하는 일이 부당하다는 뜻을 진달하였다. 또 아뢰기를,
"유여량(柳汝𣛀)은 비록 죄가 있을 수 있겠으나, 유비연(柳斐然)을 파직시키기를 청한 것은 아주 근거가 없습니다. 신이 비국에서 매양 대간의 아룀이 옳지 않다는 것을 말하는데, 대관이 어찌 신들이야 책망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고, 정태화가 아뢰기를,
"기수(旗手)에 대한 일은 바로 신이 한 일인데, 대관이 비연 등은 일의 체모를 모른다고 했으니, 신은 매우 편치 못합니다. 대관과 서로 따지게 되면 무능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아뢰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말꼬투리가 나왔으니, 이에 감히 말씀을 드립니다."
하였다. 허적이 일어나 절을 하고 아뢰기를,
"오정위가 일찍이 거쳐온 이력에 대하여 사람들이 모두 직책을 잘 수행했다고 하였기 때문에 신이 사실 천거했던 것입니다. 대간의 논핵이 이미 제기되었으니 어찌 행공하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정태화가 아뢰기를,
"신도 오정위가 이 직임에 합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탄핵을 받았으니 행공하게 하기는 어려울 듯 합니다."
하니, 상이 이에 체직시켰다.

 

박장원(朴長遠)을 홍문 제학으로, 이은상(李殷相)을 예문 제학으로, 이경휘(李慶徽)를 부제학으로 삼았다. 이은상은 비록 글재주는 있었으나 인망이 전혀 없었으니, 어찌 이 직임에 합당하겠는가. 명기를 매우 욕되게 하였다.

 

장령 오상(吳尙), 지평 윤경교(尹敬敎)가 기수를 혁파하자는 의논을 냈다가 대신에게 배척을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물러나 물론을 기다렸다. 헌부가 처치하여, 체직시켰다.

 

8월 13일 기묘

경기 지방에 우박이 내려 벼곡식이 많이 손상되었다.

 

8월 14일 경진

대사간 장선징, 사간 김징 등이 아뢰기를,
"조정에 뇌물을 받는 것이 풍조를 이루고 사대부간에 청렴한 기풍이 완전히 없어졌습니다. 세도(世道)가 비루하게 되어 식자들이 개탄을 합니다. 좌윤 오정위와 도승지 이은상은 둘 다 문재(文宰)로서 청렴하지 못하다는 비난을 받아 사람들의 말이 많습니다. 물의가 비웃고 손가락질을 하니, 이것은 참으로 청명한 조정의 수치입니다.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정재숭(鄭載嵩)을 정언으로 삼았다.

 

전라도 남평(南平) 땅에서 어떤 사람이 딸을 낳았는데, 엉덩이 좌측에 혹이 있었다. 길이가 포척(布尺)으로 1척 1촌 5분이었고 홍어(洪魚)의 모양과 아주 비슷하였다.

 

8월 15일 신사

장선징을 도승지로, 홍만용(洪萬容)을 대사간으로, 정익(鄭榏)을 원양 감사로 삼았다.

 

장령 이휴징, 지평 조성보 등이 아뢰었던 이찬한에 대한 일 및 조총을 강제로 판매하는 일, 조상한(趙相漢)·박이문(朴以文)·유천주(柳天柱)를 파직시킬 일에 대해서 연계(連啓)하니, 상이 모두 따르고, 조총에 대한 일만 따르지 않았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좌상 허적이 아뢰기를,
"황주(黃州) 겸목(兼牧)의 편리 여부에 대해서 지금 의논해서 정해야 합니다. 만약 겸목을 혁파한다면 병사(兵使)의 공억(供億)을 또한 갖추어 지급해야 합니다. 혁파하지 않으면 다시 변혁시켜야 하는 거조를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깊이 생각하여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종전의 겸목은 별로 폐단이 없었는데. 이제는 이와 같으니, 이는 필시 문신 판관(文臣判官)을 차출한 까닭일 것입니다. 이른바 대간과 시종의 반열에 있던 자들이라고 해서 꼭 잘 다스리는 것도 아닌데, 스스로 문관이라고 여겨서 반드시 병사에게 이기기를 힘쓰고자 하며 또 풍토병 때문에 반드시 체직되기를 도모하고자 하여 이 때문에 10년 사이에 9명이나 교체되었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무인(武人)으로 판관을 차견하여 병사의 지응을 오로지 담당하게 하는 것이 온편하겠습니다."
하고, 정태화가 아뢰기를,
"신의 생각도 그렇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일의 체모로 말하자면 문신을 가려 보내는 것이 가장 낫다. 해조에 말하여, 일찍이 대간이나 시종을 거쳤거나 남행이거나 무관이거나를 막론하고 잘 가려서 차송하게 하라. 만약 피하기를 꾀하여 병을 칭탁하거나 임기 전에 체임되기를 도모하는 자가 있으면, 변방을 피하려고 꾀한 법을 적용하여 그 지방에 충군하라."
하였다.

 

8월 16일 임오

비가 내렸다. 상이 온천에 거둥하여 저녁에 과천(果川) 행궁에 머물렀다.

 

대사간 홍만용이 아뢰기를,
"본원에서 ‘청렴하지 못하다.’는 명목으로 오정위와 이은상을 탄핵하였습니다. 문관 재상이 탐욕스럽다는 명목으로 탄핵을 당하는 것은 실로 보통의 규핵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 일을 논하는 체모에 있어서는 참으로 범한 바를 바로 거론해야만 죄를 입는 자가 변명을 하지 못하게 되고 듣는 자들도 또한 의심을 하지 않게 되는 것인데, 다만 ‘청렴하지 못하다.’는 말로 단안(斷案)을 삼았으니, 명백하게 지적하여 진달해야 하는 뜻에 진실로 흠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은 탄핵을 입은 자와 친척이라서 혐의가 있기 때문에 가타부타하기 어려운데다 의견이 이와 같으니, 또한 구차스럽게 함께할 수가 없습니다. 체직시켜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사간 김징, 헌납 송창이 아뢰기를,
"오정위와 이은상 등은 몸가짐을 잘 단속하지 못했습니다. 다른 잗단 일들은 우선 제쳐두고 논하지 않겠습니다. 오정위는 송도 유수(松都留守)로 있을 때에 사형수에게 뇌물을 많이 받고 고의적으로 그 옥사를 늦추어 주었으며, 또 공가(公家)의 은화(銀貨)를 대출하여 전토를 매점하였으며, 또 총융청 곡물을 방납(防納)과 주급(周急)이라 칭탁하고 많은 숫자를 빌려가고는 끝내 되갚지 않았습니다. 이은상은 곤수에게 청탁 방납하여 이익을 도모했고, 그가 형조와 한성부에 있을 때에는 단속 관원들을 내보내어 속가(贖價)를 받아들이면서 자신이 많이 차지했습니다. 사람들의 말이 많고 물의가 비웃고 손가락질을 합니다.
그저께의 회좌에서 장관이 발언하고는 신들과 서로 의논하여 이 탄핵을 하게 되었는데, 실상을 하나하나 진술하면 충후하게 해야 하는 뜻에 흠이 있겠기에 다만 ‘청렴하지 못하다.’고 말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대사간 홍만용이 피혐한 말을 삼가 보건대, 탄핵한 글에 말뜻이 분명하지 못하다는 것을 칭탁하였는데, 현저하게 이견을 주장하는 뜻이 있었습니다. 만용이 비록 일가 사람이기는 하나 법에 없는 인피를 하였으므로 이미 구차스러운 것인데, 별도의 말을 추가해 넣어 감히 사사로이 비호하고자 했으니, 그의 방자하고 기탄없음이 심합니다. 신들은 이미 장관의 배척을 받았으니, 체직시켜 주소서."
하였다.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상이 이르기를,
"비가 이토록 내리니, 군병(軍兵)으로 하여금 진을 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우립(羽笠)을 쓰고 망룡 홍색 융의(莽龍紅色戎衣)를 입고 활과 칼을 차고는, 소여(小輿)를 타고 인정문(仁政門) 밖으로 나가서 말을 타고 출발하였다. 배가 있는 막차에 도착하여 상이 고취(鼓吹)를 명하고 이어 배를 띄워 건넜다.

 

정언 정재숭이 오정위와 이은상 등을 파직하고, 서용하지 말 일을 진계하였는데,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자기의 견해는 말하지 아니하고 먼저 인피부터 하였으니, 매우 경솔합니다. 처음에 분명하게 말하지 않은 것은 뜻이 있어서였으니, 자신들에게는 잘못이 없습니다. 홍만용은 체직하고 김징과 송창은 출사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선(李選)을 이조 좌랑으로 삼았다.

 

8월 17일 계미

상이 과천(果川)을 출발하여 사근천(沙斤川)에서 주정(晝停)을 하고 저녁에 수원(水原)에서 머물렀다.

 

집의 박증휘(朴增輝), 장령 유거(柳椐) 등이 아뢰기를,
"오늘 거둥할 때에 수레를 끄는 말이 걸려 넘어져 옥체를 놀라게 하였는데, 이것은 도로가 잘 닦여지지 않아서 생긴 일입니다. 해당 관리를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정원이 도로의 구덩이에 흙을 단단하게 채우지 않아서 승여의 말이 걸려 넘어지게 되었다는 이유로, 정리사(整理使) 및 경기 감사를 추고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8월 18일 갑신

사시에 수원을 출발하여 오시에 진위(振威) 행궁에 머물렀다.

 

상이 병방 승지로 하여금 사복 첨정(司僕僉正) 강전(姜琠)을 곤장을 치게 하였다. 거둥할 때에 수레의 말을 모는 마부가 말을 잘 몰지 못하여 흔들리고 엎어지게 하였는데, 상이 강전을 불러 묻기를,
"금수도 길들여 익히도록 하는데, 하물며 너희는 사람이 아닌가. 태복(太僕)의 구졸(廐卒)과 외방의 역졸을 모두 네가 관장하는 바이다. 어가를 수행해 가는 일이 어떠한 일인데 검칙을 하지 않았단 말이냐."
하였다. 강전이 황공하여 대답을 하지 못했다. 때문에 이 명이 있었다.

 

8월 19일 을유

상이 진위를 출발하여 소사(素沙)에서 주정을 하고 미시에 직산(稷山) 행궁에 머물렀다.

 

사간 김징 등이 아뢰기를,
"지난날 경연에서 전 집의 이동로(李東老)가 법을 맡은 관리의 신분으로, 무거운 죄를 진 죄수를 석방할 것을 청하여, 경연 신하들의 배척을 받아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습니다. 그때에 유거가 대각에 있었는데 이미 동료들과 상의하여 체직을 청하기로 하였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일의 이치로 보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문득 딴 생각을 먹고 굳이 인피하니, 시비가 전도되고 거조가 놀랍게 되었습니다. 물의가 비난을 하여 오래도록 그치지 않으니, 장령 유거를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8월 20일 병술

미시에 온천 행궁에 머물렀다.

 

지평 조성보(趙聖輔)가 인피하여 아뢰기를,
"대간의 체모는 일반 신료들과는 다른데, 직접 해조에서 분부하여 행궁으로 나가게 한 것은 일찍이 없었던 일입니다. 조정이 대간을 대우하는 체모가 실로 신으로부터 무너졌으니, 체직시켜 주소서."
하였다.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는데, 처치하여 출사시켰다.

 

8월 21일 정해

상이 온양(溫陽) 행궁에 있었다.

 

지평 조성보가 아뢰기를,
"본부에서 바야흐로 조총을 강제로 매각한 일을 논하고 있는데, 지금 들으니, 도감이 각읍의 조총이 정밀하지 못한 것을 염려하여, 선혜청에서 양호(兩湖) 각읍에다 그 편리 여부를 물어서, 월과(月課) 가미(價米)를 도감에다 수송하고 도감의 조총은 또 선혜청에서 편리한 대로 각읍에 나누어 보냈으며, 한 번 그렇게 한 뒤로는 다시는 나누어 보낸 일이 없다고 합니다. 본부의 계사가 이미 그 실상을 잃었고 신이 멍청하게 연계한 잘못이 또 드러났습니다. 체직시켜 주소서."
하였다.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는데, 처치하여 면직시켰다.

 

병조 판서 홍중보가 아뢰기를,
"신이 계달할 일이 있어서 해방 승지에게 청했는데, 끝내 나와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신의 품계가 숭반(崇班)이니, 승지가 기다리지 않으려고 한 것은 일의 체모를 모른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하니, 도승지 장선징이 아뢰기를,
"부원군이 빈청에 나아가 아뢸 일이 있게 되면 승지와 사관이 으레 나와 기다리는 것입니다만, 부원군으로서 육경을 겸한 경우에는 나와 기다리지 않는 것이 고례에 매우 명백합니다."
하였다. 좌상 허적이 아뢰기를,
"신이 인조조에 사관(史官)이었을 때에, 능성 부원군(綾城府院君) 구굉(具宏)이 육경을 겸한 신분으로 빈청에 나아가 대죄하는 계문을 올렸는데 그때에 승지와 사관이 나와서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어제 정원의 일을 듣고 장차 추고를 청하려 하였는데, 지금 정원이 인용한 예도 또한 견해가 있습니다. 지금 품정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였다. 중보와 선징이 서로 쟁론하였으나 끝내 귀일되지 않았고, 상도 결정을 하지 못하고 파했다.

 

8월 22일 무자

상이 온양(溫陽) 행궁에 있었다.

 

윤문거(尹文擧)를 대사헌으로, 이상진(李尙眞)을 대사간으로, 윤선거(尹宣擧)를 집의로, 이하진(李夏鎭)을 지평으로, 신명규(申命圭)와 이휴징(李休徵)을 장령으로 삼았다.

 

8월 23일 기축

상이 온양 행궁에 있었다.

 

8월 24일 경인

장령 이휴징 등이 아뢰기를,
"법가(法駕)가 움직이면 위의(威儀)를 마땅히 엄숙하게 해야 하는데, 전대(前隊)가 대오를 잃고 소란스럽게 되어 통제되지 않았습니다. 군령(軍令)이 떨쳐지지 않았으니, 책임이 대장에게 있습니다. 더구나 법가를 인도하는 관원이 두 번째 고취를 분 뒤에, 예에 따라 앞으로 나아갈 때에는 비록 대신 앞이라고 하더라도 피해가는 규례가 없는데, 금부 도사 홍진(洪璡)이 법가를 인도하는 자로서 말을 달려 지나가니, 대장 이완(李浣)이 범마(犯馬)했다고 하면서 말을 끄는 하인을 곤봉으로 쳐서 걸음도 못 걸을 정도로 만들어 장차 일이 생길 형세가 되었습니다. 본도 감사가 그 일을 보고는 하인을 정해 보내어 엎어지는 근심을 면하게 하였습니다. 이는 전혀 일의 경중을 생각지 않은 것입니다. 중하게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인하여 정원에 하교하기를,
"조정에 민폐를 염려하여 도로를 수리하지 못하게 한 것이 어찌 딴 뜻이 있었겠는가. 한 사람이라도 써서는 안 될 곳에 멋대로 쓰지 말라는 뜻이었다. 도가 도사(導駕都事)가 비록 중요한 임무를 맡은 사람이기는 하나, 스스로 혼자서 말을 달려가는 것이 옳다. 어찌 감사가 도사를 위하여 마부(馬夫)를 진배하는 이치가 있겠는가. 작은 일이기는 하나 그냥 넘어갈 수 없다. 감사를 중하게 추고하여 뒷날의 경계로 삼으라."
하였다.

 

8월 25일 신묘

상이 온양 행궁에 있었다.

 

8월 26일 임진

상이 온양 행궁에 있었다.

 

간원이 아뢰던 오정위와 이은상의 일을 이때에 와서 따랐다.

 

전주(全州)에서 태어난 돼지가 머리 하나에 얼굴이 두 개, 입이 두 개, 눈이 세 개였다. 용담(龍潭)에 사는 93세된 노인이 오른쪽 귀 위에 뿔이 생겼는데, 길이가 6분(分) 정도로 소의 뿔과 모양이 흡사했다. 도신(道臣)이 계문하였다.

 

승지 강호(姜鎬)가 비답을 받들고 가서 우상 송시열(宋時烈)에게 유지를 전하니, 병을 이유로 사양하고 오지 않았다. 이조 판서 송준길(宋浚吉)도 본직을 속히 체직하여 산반(散班)으로 소명을 받들어 나오게 해 달라고 청하였다.

 

8월 27일 계사

상이 온양 행궁에 있었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본도의 전세(田稅)를 줄이고자 하는데 어떤가?"
하니, 좌상 허적이 아뢰기를,
"이민적(李敏迪)이 감사로 있을 때에 2두(斗)를 줄였고, 민유중(閔維重)이 부임한 뒤에 또 1두를 줄였습니다. 어찌 계속 줄일 수가 있겠습니까. 꼭 줄이시겠다면 한 가지 방법이 있기는 합니다. 쇄마 인부(刷馬人夫) 및 진상가(進上價)를 감사로 하여금 숫자를 정하여 개록해서 계문하게 하여 줄이는 바탕을 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호조 판서 이경억(李慶億)이 안흥(安興) 앞 바다에서 배가 침몰하는 폐단에 대해서 극력 말하고 인하여 안흥 뒤쪽에 항구를 파서 조운하는 길을 편리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상이 좌우에게 물으니, 허적이 아뢰기를,
"파서 이룰 수만 있다면 참으로 만세의 공이 될 것입니다. 조복양이 일찍이 그 땅에 있었으니, 이해와 편부를 알 것입니다."
하자, 조복양이 아뢰기를,
"신이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 사람들의 말을 익히 들었습니다. 지난해에는 착굴을 잘못하여 일을 실패하였습니다. 대개 조수(潮水)가 드나드는 곳이기 때문인데, 반드시 높은 곳을 먼저 파서 깊은 항구를 만들고, 그런 뒤에 비로소 조수를 타고서 그 막았던 곳을 터주면 통할 수가 있습니다. 바닷물이 통하게 되면 절로 포구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올해 잃은 세미(稅米)가 무려 2천 5백 석이나 됩니다. 만약에 이 숫자를 덜어내어 일을 한다면 어찌 이루지 못할 리가 있겠습니까."
하고, 이조 참판 민정중이 아뢰기를,
"이 일은 촉박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 해를 두고 해나가면 절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호판이 감사를 데리고 가서 형세를 살피도록 하라."
하였다. 이경억이 아뢰기를,
"조복양과 민정중도 함께 가서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8월 28일 갑오

상이 온양 행궁에 있었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8월 29일 을미

상이 온양 행궁에 있었다.

 

정만화(鄭萬和)를 대사간으로, 이경휘(李慶徽)를 대사헌으로, 정재숭(鄭載嵩)을 교리로, 윤경교(尹敬敎)를 정언으로 삼았다.

 

사간 김징, 헌납 송창 등이 아뢰기를,
"조정에서 관서의 향곡(餉穀)을 작목(作木)하여 상납하라는 명을 내려, 그 당시의 감사 이정영(李正英)이 본도의 쌀 10만 석을 작목하여 올려 보냈는데, 그 가운데 직로(直路)와 연해(沿海) 각읍의 쌀 2만 석으로 사들인 목면에 대해서는, 조정에서 뒷날 불시의 수요가 있을까 염려하여 다시 작미(作米)하여 숫자를 맞추어 회록(會錄)하게 하였습니다. 정영은 이에 그 목면으로 사사로이 상인 모리배들과 함께 값을 줄여 은으로 바꾸어, 구별하지 않은 채 물려내려오던 향은(餉銀)의 전체 숫자 가운데 얹어 기록하였습니다. 외람되고 난잡함이 이미 극도에 이르러 사람들이 말이 많습니다. 많은 군향(軍餉)이 장차 그 밑천을 잃게 되어 관서 지방에 난처한 폐단이 되게 하였으니, 그간에 한 소행이 참으로 매우 놀랍습니다. 판윤 이정영을 우선 파직하고, 그 은화의 실제 숫자 및 상인들의 성명을 본도로 하여금 분명하게 조사하여 계문하게 해서 처리할 바탕을 삼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선 추고하라."
하였다. 또 논핵하기를,
"예조 정랑 이태서(李台瑞)는 평소에 하는 짓마다 웃음거리가 되니, 예조의 낭관에 알맞지 않습니다. 체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행 대사간 정만화(鄭萬和)가 인피하기를,
"신이 이정영을 교대한 관원으로서 3년 동안 재임하면서 연달아 흉년을 만나 본미(本米)를 다시 갖추지 못하였고, 체직되어 돌아올 때에는 전장 문서(傳掌文書)에 나누어 놓지 못하였으니, 그저 대충 처리한 책임을 신도 면하기 어렵습니다. 스스로를 논핵하기에도 겨를이 없는데 어찌 감히 이 의논에 가타부타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사간 김징이 처치하기를,
"도로 갖추어 놓지 못한 것은 본가(本價)가 줄어들었기 때문이기는 합니다만, 시종 그냥 있었으니 덮어두려고 한 책임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체직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8월 30일 병신

상이 온양 행궁에 있었다.

 

지평 이하진(李夏鎭) 등이 아뢰기를,
"신들이 대장 이완의 함답(緘答)을 보건대, 곤봉으로 친 한 조항에 대해서도 역시 해명을 하지 못했고, 기타 억지로 끌어댄 말들도 서로 어긋나는 것이 없지 않으니, 매우 놀랍습니다. 그러나 그가 스스로 해명하고자 하니, 신들은 혐의가 있어 조사하여 마감할 수가 없습니다. 체직시켜 주소서."
하였다.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간원이 처치하여 출사시키기를 청하였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