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일 정유
상이 일렀다.
"목욕을 한 지가 오래지 않았는데도 효험을 많이 보았다. 날씨가 점점 추워지니, 길이 불편할 듯하다. 3일에 환궁하고자 하니, 이렇게 분부하여 거행하라."
예조가 아뢰기를,
"환궁할 날짜를 3일로 정했는데, 온천의 보사제(報謝祭)를 마땅히 지난해의 예대로 지내야 할 것입니다."
하니, 따랐다. 또 아뢰기를,
"대신을 보내어 다음날 새벽에 고묘제(告廟祭)를 지내야 하는데, 축문(祝文)을 지으라고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9월 2일 무술
홍처량(洪處亮)을 대사간으로, 정만화(鄭萬和)를 병조 참판으로 삼았다.
상이 의관으로 하여금 들어와 진찰을 하게 하였다. 예조 판서 조복양이 아뢰기를,
"신이 도로를 가보고 왔습니다. 비록 큰길만은 못하나 그래도 거둥할 수는 있겠습니다. 그러나 거둥은 마땅히 큰길로 가야지 굳이 지름길로 갈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고, 정지화가 아뢰기를,
"만일 속히 환궁하고자 하신다면 지름길로 가는 것도 따질 겨를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큰길로 가더라도 3일이면 도착할 수가 있고 지름길로 가더라도 2일 안에 환궁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니 굳이 큰길을 두고 지름길로 갈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조복양이 아뢰기를,
"나주(羅州) 사람들이 박순(朴淳)의 서원(書院)에 사액(賜額)을 해달라고 청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전례를 따라 안 된다고 회계(回啓)하였습니다. 생각건대 이 사람은 바로 선조(宣祖) 때의 명신으로서, 선조께서 일찍이 박순에게 이르기를 ‘솔과 대 같은 절조요, 물과 달 같은 정신이로다.[松筠節操 水月精神]’ 하였는데, 그 당시 사람들이 모두 ‘신하를 알아보는 것은 임금이 최고이다.’라고들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무슨 일을 인하여 이러한 전교가 있었는가?"
하자, 복양이 아뢰기를,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이 당시 사람들의 공격을 받았는데, 박순이 구호하니, 당시 사람들이 도리어 편든다고 논핵하였습니다. 때문에 선조께서 이렇게 전교하시고, 이어 박순을 공격하던 사람들을 귀양보냈는데, 나라 사람들이 모두들 성덕(聖德)이 쇠하지 않았다고 칭송하였습니다."
하였다.
호조 판서 이경억 등이 안흥(安興)의 포구를 파는 일의 형세를 살펴보고 돌아왔다. 상이 인견하고 묻기를,
"포구를 파는 일의 편리 여부가 어떠하던가?"
하니, 경억이 탑전에다 도형을 펴놓고 아뢰기를,
"만약 이 포구를 파게 되면 조운하는 배가 안흥으로 돌아와야 하는 폐단이 없이 바람을 타고 하루아침에 강화(江華)에 도착하게 될 것이니, 어찌 편하고 좋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민정중이 아뢰기를,
"급히 이루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오랜 세월을 두고 기다리면 절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고, 허적이 아뢰기를,
"세조 대왕께서 안철손(安哲孫)을 보내어 가서 보게 했는데, 철손이 팔 수가 없다고 하자, 또 대신인 신숙주(申叔舟) 등을 보내어 보게 하였더니 팔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고, 정중이 아뢰기를,
"헛된 말에 동요되지 말고 작은 폐단을 따지지 말고 조용히 처리해 나간다면 일을 이루기가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감사로 하여금 잘 생각해서 계품하여 행하게 하라."
하였다.
삼가 살피건대, 이 포구를 파서 조운(漕運)하는 길이 순조로와질 수 있었다면 조종조에서 우선적으로 했지 무엇 때문에 오늘날까지 기다렸겠는가. 그러나 이 곳은 조수(潮水)가 드나드는 곳이라서 파기가 매우 어렵고, 파내면 금방 메꾸어져서 공력만 낭비되었기 때문에, 예로부터 이런 의논이 있었는데도 파지 못했던 것이었다. 근래에 이 의논이 송시열에게서 시작되었는데, 경억과 정중 등이 힘껏 동조를 하였다. 때문에 조정의 신료들이 모두 그 일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송시열 무리의 기세를 두려워하여 감히 그 잘못을 바로잡는 사람이 없으니, 통분스러움을 금할 수 있겠는가.
민유중(閔維重)이 아뢰기를,
"목화(木花)가 흉년이 들어서 포보(砲保)가 가포(價布)를 갖추어 납부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진휼청에서 쌀을 갖다가 쓰고 진휼청에 남아 있는 목면을 도감으로 이송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민유중이 아뢰기를,
"후사를 잇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인데, 외방에 더러 예조에 정장(呈狀)을 올리지 않고 멋대로 후사를 세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대개 길이 멀어 서울에 와서 정장을 올리기가 어려워 이러한 폐단이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제 본도에서 거두어 모아 열록(列錄)하고 계문하여 시행하되 그 작지(作紙)는 예조로 보내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아버지와 아들 사이를 정하는 것은 인륜 가운데에서도 중대한 일입니다. 어찌 본도로 하여금 계문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9월 3일 기해
좌의정 허적과 병조 판서 홍중보를 인견하였다. 허적이 나아가 아뢰기를,
"세자의 병환이 더욱 심해져서 서둘러 돌아가시게 되니 아랫사람들의 근심되는 마음을 어찌 이루 다 진달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일 출발하여 수원에서 묵어야 하는데, 보군(步軍)이 만약 한꺼번에 가면 필시 도착하지 못하게 될 것 같다. 반으로 나누어 절반은 가중군(假中軍)이 거느리고 오늘 저녁에 먼저 소주정(小晝亭)으로 나아가게 하고, 절반은 어가를 수행하게 하라. 마병 금군(馬兵禁軍)도 그렇게 하도록 하라."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수원을 지난 뒤에는 숙소를 어디로 정해야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수원에서 묵으면 다음날 서울에 들어갈 수가 있다. 경역마(京驛馬)로 하여금 서빙고(西氷庫)에서 기다리게 하고 유도 군병(留都軍兵)도 강변에 와서 기다리게 하여, 어가를 호종하여 도성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도록 하라."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군병을 앞뒤로 나누어 이동시키는 데는 명령이 없을 수 없습니다. 신전(信箭)으로 분부할 것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선전관을 시켜서 표신(標信)을 가지고 가서 전하게 하라."
하였다. 홍중보가 아뢰기를,
"연(輦)을 호위하는 포수(砲手)도 둘로 나누어서 한 부대를 먼저 보내야 합니까?"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이조 판서 송준길(宋浚吉)과 진선(進善) 이상(李翔)이 부름을 받고 오니, 상이 면대하였다. 송준길이 나아가 아뢰기를,
"삼가 듣건대, 세자가 요즈음 편안하지 못하다고 하는데, 신민들의 근심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세자가 더위와 습기 때문에 몸이 상해 이 병에 걸렸다."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목욕하신 효험이 을사년에 견주어 볼 때 어떻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마찬가지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을 만나지 못한 지가 3년이 되었는데, 이제 이곳으로 와서 다행히 만나게 되었으니, 내 마음이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 다만 한번 만난 뒤에 갑자기 헤어지게 되니 도리어 만나지 않은 것만 못하다."
하자, 준길이 아뢰기를,
"주자(朱子)의 말에 ‘우러러 천안(天顔)을 뵈니, 옛날과 다르다는 것을 알겠습니다.’한 것이 있는데, 신이 지금와서 뵈니, 자못 많이 늙으신 기색이 있습니다. 세월은 흐르는 물과 같아 사람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신은 모르겠습니다만, 성상의 덕이 얼마나 성취되었으며, 다스린 공효가 얼마나 보태어졌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을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그러나 매양 눈병이 있어서 뜻대로 하지 못하였다. 또 세자가 가끔 경을 생각하고 보고 싶다는 말을 하였다. 경이 만약 서울에 올라오면 함양하고 훈도하는 데 필시 도움이 많을 것이다. 또한 우상과 더불어 함께 보익한다면 어찌 다행이 아니겠는가. 지금 한 번 만나고 파한다면 도리어 별 도움이 없게 될 것이다."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들으니 내일 출발하여 수원(水原)에서 묵을 것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수원까지의 거리는 5참(站)입니다. 임금의 행차는 빠르게 진행해서는 안 되며, 또 목욕을 한 지가 오래되지 않았는데 갑자기 먼 길을 가게 되면 병을 삼가는 도리에 해로움이 있을 듯합니다."
하지, 상이 이르기를,
"요즈음 세자의 병으로 자전께서 밤낮으로 깊이 걱정하시기 때문에 속히 돌아가서 자전의 마음을 위로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였는데, 준길이 아뢰기를,
"이것은 자전의 걱정을 위로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전하께서는 세자의 병을 염려하시어 속히 돌아가려 하시나, 어찌 자전께서 전하를 염려하시는 것은 생각지 않으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꼭 수원을 묵어갈 참(站)으로 정한 것은 아니다. 진위(振威)에 도착하여 형세를 보아가며 할 것이다."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진선 이상(李翔)은 글을 읽은 사람입니다. 세자의 덕기(德器)가 성취되는 이러한 때에 반드시 어진 선비를 얻어야 세자를 도와 이끌어줄 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람을 불러다 시강하게 하면 어찌 도움되는 바가 없겠습니까."
하니, 이상이 나아가 아뢰기를,
"신은 본디 병으로 들어앉은 사람이라서 진취할 뜻이 없습니다. 삼가 듣건대, 상께서 목욕을 하시고 효험을 많이 보았다 하여 기쁨을 금하지 못하였고, 이어 듣건대 세자가 편찮다고 하여 제 마음에 매우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감히 가만히 들어앉아 있지 못하고 문안을 드리고자 하여 행조(行朝)에 달려왔습니다. 그러나 은명(恩命)에 숙배 사은하는 것은 신의 본뜻이 아닙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대는 늙고 병든 사람이 아닌데 어찌하여 이토록까지 굳이 사양하는가?"
하니, 이상이 아뢰기를,
"신이 품은 생각이 있으므로 감히 아뢰겠습니다. 전하께서 송시열을 우상으로 삼고 송준길을 총재로 삼으셨는데, 성상의 뜻이 필시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신은 압니다. 이 두 사람은 숙덕(宿德)과 중망(重望)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정성을 다하여 불러다가 지극한 정치를 이루는 것은 오직 전하께서 마음을 어떻게 정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였는데, 준길이 아뢰기를,
"이상이 신의 이름을 거론한 것은 참으로 망령된 것입니다. 신은 힘닿는 대로 일을 맡아 해나가는 사람이지, 산림에서 고고하게 지내는 선비가 아닙니다. 어찌 감히 이와 같이 자처하겠습니까. 신의 근력을 돌아보건대 자강(自强)할 형세가 전혀 없습니다."
하였다. 준길이 또 아뢰기를,
"신이 띠고 있는 직책은 바로 천관(天官)의 장관입니다. 그 직임이 매우 중대한데 아직까지 헛되이 띠고 있습니다. 을사년에 패한 일 같은 것은 작은 일이 아닌데, 어찌 다시 이 직임을 감당하겠습니까. 더구나 겸대한 춘관(春官)과 국자(國子)의 직임은 여러 해 동안 직무를 보지 못하였으므로 신은 더욱 마음이 편치 못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모두 체직시켜 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간절하게 효유한 뜻과 경이 사퇴하는 말이 자못 상반되는 듯하다. 이것이 어찌 경에게 바라는 것이겠는가. 한곳에 서로 모여서 정치의 도리를 강론하는 것이 또한 좋지 않겠는가."
하였는데, 준길이 아뢰기를,
"오늘날 인재가 없다고는 하나, 어찌 나라 사람들이 함께 인정하는 어진 이가 없겠습니까. 신과 같은 늙은 사람은 근력이 이미 다했기 때문에 비록 올라가고자 하더라도 결코 희망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근력이 어가와 함께 올라가기 어려울 정도라면 뒤따라 올라오더라도 무슨 지장이 있겠는가."
하였다. 이상이 아뢰기를,
"이제 준길이 진달하는 말을 들으니, 신도 생각나는 바가 있습니다. 옛날에 한 문제(漢文帝)가 비탈진 산길을 말을 달려 내려가려 하니, 원앙(袁盎)이 간하기를 ‘폐하야 비록 가벼이 할 수 있다 하더라도 종묘(宗廟)와 태후(太后)는 어쩌시렵니까?’ 하였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비록 급히 달려 환궁하려 하시나, 자전의 염려는 어찌하시겠습니까? 또 임금의 행동 하나하나는 모두가 본보기가 됩니다. 길행(吉行)은 하루에 30리를 가고 사행(師行)은 하루에 50리를 가는 법입니다. 밤에까지 먼 길을 행진하다가 어가 호위를 제대로 못하게 된다면 어찌 성상의 몸에만 해를 끼치겠습니까. 또한 후세에 보여줄 도리도 아닙니다."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만약 신을 올라오게 하시려면 속히 신의 직책을 체면하소서. 그런 뒤에야 신의 마음이 편안할 수가 있을 것이니 일체 체직을 허락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서로 마음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 와서 체직을 허락하면 정성되고 신의 있는 도리가 아닐 듯하다. 일의 체모로 말하더라도 또한 이렇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하였다. 상이 승지 오두인(吳斗寅)에게 이르기를,
"우상이 올 때에 지나는 곳으로 하여금 역마를 지급하게 하라."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들으니 이후(李垕)가 죽었을 때에 별치부(別致賻)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사실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직명도 없고 거두어 서용되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는 치부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판의 말이 이러하니, 이후에게 별치부하라."
하였다. 준길이 여러 궁가(宮家)에서 떼어받은 곳에다 농장을 설치하고 백성들의 전토를 빼앗는 폐단에 대해서 반복하여 진달하니, 상이 유의하겠다고 하였다. 준길이 또 경연을 자주 열고 학문에 뜻을 두어 덕을 진취시키고 훌륭한 정치를 이룰 기초를 삼기를 누누이 진계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를 경계하고 깨우치는 말을 내 마땅히 깊이 유념하겠다."
하였다.
삼사(三司)가 차자를 올려, 길을 급히 가게 한 명을 중지시켜서 신민의 소망을 위로하기를 청하니, 상이 일렀다.
"형세를 보아가며 할 것이니 염려하지 말라."
9월 4일 경자
상이 환궁하는 날 아침에 우의정 송시열이 밖에서 들어와 사은하였다. 삼공이 사은 숙배하는 날에는 으레 명소 밀부(命召密符)를 주었기 때문에 정원이 명소 밀부를 전급(傳給)했는데, 시열이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정원이 계품하여 상의 명으로 전급하였으나, 끝내 받지 않았다.
초취(初吹)한 뒤에 상이 송시열을 인견하였다. 상이 송시열에게 이르기를,
"떠날 시간이 임박하였으므로 혹 경이 도착하지 못할까 염려하였다. 이제야 다행히 서로 만났으니, 기쁨을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
하니, 송시열이 대답하기를,
"삼가 들으니, 세자가 편찮기 때문에 갑자기 서둘러 환궁하신다 하여, 너무나 놀랍고 걱정이 되기에 죽음을 무릅쓰고 달려왔습니다. 세자의 병세는 어떻습니까?"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감기 기운이 심해지고 열이 오르내리니, 이 때문에 우려가 된다."
하였다. 시열이 아뢰기를,
"목욕한 뒤에 오래 조섭도 못하셨는데 오늘 갈 길이 매우 머니, 아랫사람들의 마음에 걱정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해가 이미 늦어 멀리 가기는 어렵겠다. 그리고 경이 직임을 제수한 뒤로 굳이 사양하고 오늘의 명소(命召) 역시 사양하고 받지 않으니, 이것이 비록 겸양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나, 이때에 팔다리와 같은 역할을 하는 임무를 경 말고 누구에게 맡기겠는가."
하자, 시열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신이 불초하다는 것을 모르시고 신에게 중대한 직임을 맡기시나, 지금 신은 노병이 날로 심해져서 결코 감당해 내기가 어렵습니다. 매양 소장(疏章)을 올리는 것도 매우 번독스러운 일이기 때문에 병든 몸을 이끌고 나아와 성상께 영원한 하직 인사를 하고 무거운 직임을 면하게 해주시기를 빌려고 한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서관(庶官)과는 다르다. 나의 의지함과 조야가 소망하는 것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굳이 사양하지 말고 함께 나랏일을 다스려야 할 것이다."
하였다. 시열이 또 매우 간절하게 사양하고 심지어는,
"만약 신의 본직을 체임하고 어가를 따르게 한다면 비록 도로에서 엎어지더라도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하물며 지금 세자가 이미 책봉을 받았는데도 곁에서 모시며 우러러 뵙지 못하였으니, 신이 죽은 뒤 지하에서 선왕(先王)을 배알할 때 무슨 말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신은 반드시 어가를 수행하여 서울로 올라가고 싶은데, 신의 거취는 직명을 체차하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뜻이 과연 이러하다면 어찌 억지로 권할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도승지 장선징이 아뢰기를,
"애써 따라 주신 뒤에 만약 어가를 수행하지 않는다면 일의 체모만 손상시키게 될 것입니다."
하니, 시열이 아뢰기를,
"상 앞에서 아뢴 말이 동료에게 신임을 받지 못하니, 부끄럽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본직은 지금 우선 애써 소청에 따라서 체직하겠다. 정한 약속만은 버리지 않기 바란다."
하니, 시열이 아뢰기를,
"성상의 분부가 이와 같으니, 감히 죽음으로써 기약하고 어가를 수행해 가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선징이 아뢰기를,
"진선 이상(李翔) 역시 어가를 수행하고자 하니, 아울러 역말을 지급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니, 상이 분부하라고 일렀다.
진시에 상이 행궁에서 출발하여, 모토(茅土)에서 주정(晝停)하고 또 소사(素沙)에서 주정하고, 저녁에 진위현(振威縣)에 머물렀다.
9월 5일 신축
상이 출발하여 수원부(水原府)와 사근천(沙斤川)에서 주정하고, 저녁에 과천현(果川縣)에서 머물렀다.
장령 이휴징 등이 아뢰기를,
"무릇 조정에 머물러 있는 관리는 반드시 행조(行朝)의 분부를 기다려서 일을 하는 것이 예입니다. 그런데 장령 신명규(申命圭)는 단지 하리의 보고에 의거하여 경솔히 감찰 최국성(崔國成)을 차정하여 보냈으니, 법례를 잃은 것입니다. 물의가 그르게 여기니, 체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9월 6일 임인
묘시에 상이 과천을 출발하여 오시에 환궁하였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간원이 판윤 이정영(李正英)을 파직시킬 것을 계속 논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또 논하기를,
"거둥할 때에 배종하는 여러 신하들에게 병조에서 사사로이 역말을 주었고 신하들도 사사로이 빌려서 탔습니다. 모두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장령 이휴징이 인피하기를,
"신이 최문식에 대한 진래 추고(進來推考)의 명을 환수할 것을 계청할 때에 수참(首叅)하였으니, 지금 의계하는 데에는 형세상 동참하기 어렵습니다. 체직시켜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처치하여 체면되었다.
9월 7일 계묘
지평 조원기(趙遠期)가 피혐하여 체직되었는데, 기수(旗手)에 대해 아뢴 것이 실상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9월 8일 갑진
약방이 아뢰기를,
"왕세자가 병이 심한데, 다만 의관들만으로 병시중을 들게 하는 것은 일의 체모가 온당치 않습니다. 신들도 나아가 숙직을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제조(提調) 이하가 돌아가며 숙직하라."
하였다.
판중추부사 송시열이 어가를 수행하여 강교(江郊)에 이르러, 상소하여 새로 받은 벼슬을 개정할 것을 청하였는데, 심지어는 환도할 때에 안개가 끼고 무지개가 나타난 것을 끌어다가, 형벌이 남용되고 상격이 문란해서 생긴 일이며 내린 자급도 또한 재앙을 부른 단서라고까지 하였다. 상이 답하기를,
"경과 한 약속은 신명과도 통할 수 있다. 경이 서울에 들어오는 것을 어렵게 여기지 않자 나도 어렵게 여기지 않고 애써 그대의 뜻을 따라 주었다. 그런데 경은 어찌 이것을 생각지 않는가. 새 벼슬을 개정하는 일은 실로 이런 이치는 없는 것이다. 목마르듯이 하는 나의 뜻을 깊이 헤아리고 속히 들어와서 나의 소망에 부응하라."
하였다.
상이 정원에 전교하였다.
"송 판부사가 이미 성밖에 와 있다. 해조에 분부하여 쌀과 고기를 잇대어 보내도록 하라."
유성이 나타나 빛이 땅을 비추었다.
9월 9일 을사
어가를 수행한 군병(軍兵)들을 호궤하고, 중사(中使)와 사관(史官)을 보내어 적간하게 하였다.
남구만(南九萬)을 전라 감사로, 이관징(李觀徵)과 정시성(鄭始成)을 장령으로, 최후상(崔後尙)을 지평으로 삼았다.
상이 온천에 거둥할 때에, 태안(泰安)에 포구를 파서 조운선이 운행하는 길을 편리하게 할 것을 의논하고, 이경억과 민정중 등을 보내어 지리의 형세를 살피게 하였는데, 민정중이 포구를 파자는 의논을 힘껏 주장하였다. 상이 환도하자 대사간 이경휘(李慶徽)가 상소하기를,
"신은 태안에 포구를 파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여깁니다. 이 길이 한번 뚫리면 조운하는 것이 영원히 편리할 것이라고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한편, 지리의 형세가 순조롭지 못하여 끝내 이루지 못할 것이라고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말합니다. 이 두 가지 이야기는 신이 실로 너무 많이 들었습니다.
조종조의 국력의 성쇠와 민생의 휴척과 여러 신하들의 지혜와 사려의 장단을 오늘날에 견주어 볼 때 어떠합니까. 그런데도 일을 시작하여 결국 성취하지 못한 것은 필시 그만둘 만한 형세가 그 가운데에 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만약에 한번 파서 영원히 걱정이 없게 할 수 있었다면 조종조에서 이미 그것을 했을 것입니다. 어찌 후일을 기다렸겠습니까. 유사(有司)가 처음에 잘 살피지 못하고 건의하였고 전하께서도 또한 깊이 생각지 않고 결정하신 것인데, 대신은 힘써 쟁론하려 하지 아니하고 삼사(三司)는 논하여 간할 줄을 몰라 이러한 상황에까지 이르렀으니, 신은 서글픈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소가 들어간 지 20일 만에 상이 답하기를,
"조용히 의논하여 처리하라."
하였다. 응교 남이성(南二星)도 상소하여 간하였고, 영의정 정태화는 안 된다고 하였으며, 훈련 대장 이완 역시 이 의논을 힘껏 배척하였다. 그래서 드디어 포구를 파는 역사는 정지되고 창고를 세우자는 의논이 일어났다.
9월 10일 병오
영의정 정태화와 좌의정 허적이 빈청에 나아와, 동지사(冬至使) 이정영(李正英)을 체직할 것을 청하였다. 이는 그가 논박을 당했는데 사신으로 떠날 날짜가 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상이 따랐다. 또 전에 차임했던 사람으로 의망할 것을 여쭈니, 상이 따랐다. 이에 이경억으로 고쳐서 정사(正使)를 삼았다. 이 때에 세자의 병이 위독하여 상이 몸소 돌보고 있었기 때문에 오래도록 신료들을 인접하지 못했다. 그래서 대신이 구전(口傳)으로 계품하였다.
간원이 이정영을 파직시킬 것을 청하고, 또 새로 제수한 가자를 개정할 것을 청하며, 아뢰기를,
"당초 이정영의 자급을 올려 준 것은 다만 사신의 임무를 받들었기 때문이었는데, 지금 이미 고쳐 차출하였으니, 결코 제수한 것을 그대로 둬야 할 이치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개정하자는 청만 따랐다.
9월 11일 정미
지평 이하진(李夏鎭)이 사사로이 역말을 빌린 것을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판중추부사 송시열이 상소하여 병의 정상을 아뢰고, 교외에서 조리하게 해줄 것을 청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사관을 보내어 비답을 전하게 하고 의관으로 하여금 간병하게 하였다.
9월 12일 무신
사간 김징(金澄) 등이 사복 주부(司僕主簿) 김수일(金壽一)을 탄핵하여 파직시켰다. 김수일은 전 도승지 이은상(李殷相)의 매부(妹夫)이다. 이은상이 탄핵을 당하자, 김수일이 대관을 비방했는데, 이에 간원이 그의 방자함을 논하여 파직시킬 것을 청하자, 상이 따랐다. 전에 김익경(金益炅)에 대해서는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는데 뒤에 김수일에 대해서는 그 죄를 논하였으니, 논의의 공정치 못함이 어찌 그리도 심한가.
이조 판서 송준길이 조정에 나왔다. 송준길이 행궁에 나아갔다가 뒤에 떨어져 남쪽으로 돌아갔는데, 상이 사관을 보내어 유지를 전했는데도 소장을 올리고 오지 않다가, 이때에 이르러 세자의 병이 위중하다는 말을 듣고 성밖에 도착하여 상소하여 스스로 논열하면서 본직을 면직시켜 줄 것을 청하였다. 상이 답하기를,
"어저께 경의 상소를 보고 마음에 매우 놀랐었는데, 오늘 경이 올라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근심하는 가운데에 얻은 바가 있는 듯하다. 행궁에서 정녕하게 나눈 이야기를 경은 기억하고 있는가? 상소 끝에 한 말이 또 지극한 정성에서 나왔으니, 어찌 억지로 직임을 떠맡길 수가 있겠는가. 본직에 대해서는 마땅히 그대 뜻대로 따라줄 것이니, 안심하고 들어와서 나의 소망에 부응하라."
하고, 이르기를,
"이조 판서가 성밖에 와 있다고 하니, 해조로 하여금 쌀과 고기를 잇대어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9월 13일 기유
장령 정시성(鄭始成)이 아뢰기를,
"대동법을 실시한 뒤로는 유청 지지(油淸紙地)의 값을 정해서 지급하고 있으니, 수령이 된 자는 결코 백성들에게서 횡렴하여 더 취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데 경기 지방의 수령들이 빙정(氷丁), 시·곡초(柴穀草), 연호(烟戶) 등의 잡역을 줄여주고, 역을 제해 준다고 하면서 유청 지지 등의 물건을 강제로 바치게 하고 있습니다. 열읍이 모두 그러하여 백성들의 원망이 많이 일어나고 있는데, 지금 적발하여 죄를 논하자니, 근래에 새로 생긴 일도 아니고, 또한 한 도의 수령들을 모두 죄줄 수도 없는 일입니다. 해당 도의 감사로 하여금 일체 금단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충청 감사 민유중(閔維重)과 원양 감사(原襄監司) 정익(鄭榏)이 도내에서 아주 심하게 재난을 당한 곳을 잘 헤아려 급재(給災)할 것을 청하니, 해조에 내려 시행하도록 하였다.
9월 14일 경술
집의 윤선거(尹宣擧)가 병으로 사직하고 올라오지 않았다.
송준길(宋浚吉)을 찬선으로, 이완(李浣)을 판윤으로, 이경억(李慶億)을 이조 판서로, 민정중(閔鼎重)을 호조 판서로, 권격(權格)을 집의로, 이규진(李奎鎭)과 윤증(尹拯)을 지평으로, 이규령(李奎齡)을 정언으로, 원만리(元萬里)를 사서로 삼았다. 민정중은 시무를 담당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발탁하여 제수한 것이다. 원만리는 사람됨이 거칠고 음흉하여 취할 만한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9월 16일 임자
집의 권격 등이 아뢰기를,
"유학(幼學) 유탁무(柳卓茂) 부부가 하루 안에 병도 없이 죽었는데, 겨우 6일만에 함께 발인 하면서 친척들에게도 알리지 않았습니다. 모두들 말하기를, 탁무의 아내가 그 자부(子婦)인 성씨(成氏) 여자와 서로 싸우다가 다쳐서 죽었다고 합니다. 탁무는 봉변을 당하자 목을 매어 죽었다고 하고 혹은 독주(毒酒)를 마시고 죽었다고도 합니다. 사대부들 간에 말들이 자자합니다. 일이 강상(綱常)에 관계되고 매우 놀랍고 참혹하니, 유사로 하여금 탁무의 자부를 잡아가두고 분명하게 조사해서 율대로 결단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9월 17일 계축
형조가 아뢰기를,
"유탁무의 자부 성가(成哥) 여자는 가계(家係)가 사족(士族)이니, 의금부로 옮기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삭시(朔試) 활쏘기에서 1등을 한 전 첨정 구일(具鎰)에게 전시를 바로 보게 하라고 명하였다.
9월 18일 갑인
집의 권격 등이 아뢰기를,
"전 정(正) 최문식은 포도청의 규찰을 억눌러 정지시킨 일로 추고를 당하고, 항거(抗拒)한 뒤에 직첩을 거두었는데, 본부에 진래(進來)하여서는 새로운 말을 꼭 공초하고자 합니다. 문식이 참으로 상달할 일이 있다면, 세 번 항거할 때에 무엇 때문에 바로 진술하지 않았단 말입니까. 진래함에 미쳐서는 승복하지도 않고 또 가감이 없는 것으로 공초를 바치지도 않고서, 세 번의 초사에 없던 말을 지금 첨가해 넣으려 하니, 정상과 거조가 모두 매우 놀랍습니다. 잡아다 추문하여 처리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고 이르기를,
"원점목(元粘目)을 이미 본부에 내렸는데, 어찌하여 굳이 잡아다 추문할 것을 별도로 청하는가?"
하였다. 여러 차례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삼가 살피건대, 최문식이 범한 바가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처음에 진래 추고하라는 명을 환수할 것을 청한 것은 이미 잘못한 일이고, 문식이 진래하여 항거함에 미쳐서 추고할 것을 다시 청한 것은 근거가 없는 일이었다. 이제 점목이 이미 내려졌는데 잡아다 추문할 것을 특별히 청한 것은 무슨 의논인가. 상이 따르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
9월 19일 을묘
윤문거(尹文擧)를 이조 참판으로, 이시술(李時術)을 대사간으로, 박세당(朴世堂)을 교리로 삼았다. 윤문거는 윤선거의 형이다. 석성(石城)에 물러나 지내면서 각병(脚病)이 있다고 청탁하고 문밖을 나오지 않았다. 청요직을 여러 차례 제수하였으니 끝내 오지 않았다.
함경도에 소와 말의 전염병이 크게 번져 전후로 죽은 수가 2만여 마리였다. 평안도에도 소의 전염병이 크게 번져 2백여 마리가 죽었다.
9월 20일 병진
금부가 아뢰기를,
"유탁무의 자부가 승복을 하지 않으니 마땅히 형추할 것을 청해야 하겠습니다만, 범한 것이 강상에 관계되는지라 그의 지아비 일가붙이들을 해조에서 추핵한 뒤에 여쭈어 처리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평안 감사 이태연(李泰淵)이 장계를 올려, 강변(江邊)과 산읍(山邑)에는 추수할 곡식이 하나도 없으니 급재(給災)할 것을 청한다고 하였는데, 호조에 내려 잘 헤아려 시행하게 하였다.
9월 21일 정사
나주 목사(羅州牧使) 이민서(李敏叙), 광주 목사(光州牧使) 윤변(尹抃), 장성 부사(長城府使) 소두산(蘇斗山) 등이 연명으로 상소하여 농사가 결단난 것을 진달하고, 급재할 것을 청하였는데, 호조에 내려 잘 헤아려 시행하게 하였다.
이때에 말의 전염병이 크게 번져 사복시의 말이 50여 필이 죽었다. 사복시가 어승마(御乘馬)와 주마(走馬)를 경복궁 성안으로 옮겨서 피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9월 22일 무오
세자가 장차 거처를 옮길 것이기 때문에, 상이 도총부, 홍문관, 약방, 예문관, 향실, 무겸청을 모두 다른 곳으로 옮기라고 명하였다. 뒤에 도총부는 다시 들어오라고 명하였다.
삼성(三省)이 교좌(交坐)하여 성비희(成非喜) 등을 추국하였다. 형조가 죄가 강상에 관계된다는 이유로 유진(柳袗)과 유회(柳檜)를 금부로 이송할 것을 청하였는데, 금부가 전례대로 삼성 추국할 것을 청하였다. 비희는 바로 유탁무의 자부이다. 상이 따랐다.
9월 23일 기미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9월 24일 경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추국청이 아뢰기를,
"죄인 성비희에 대해서는 원정(元情)을 봉초(捧招)한 뒤에 즉시 형추할 것을 청해야 하겠습니다만, 죄명은 무거운데 실제 자취는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삼성 죄인의 경우에는 이미 형추를 하고 나면 다시는 의논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에 신중하게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문자로 진달하는 것은 뵙고 자세히 말씀드리는 것만 못하니, 내일 등대(登對)를 허락하신다면 신들이 각각의 소견을 우러러 아뢰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일 아침에 빈청에 와서 모이도록 하라."
하였다.
9월 25일 신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대신, 비국의 신하들, 금부의 여러 재신, 삼사의 신하를 인견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나아가 아뢰기를,
"지금 이 성비희의 옥사는 대간이 비록 밖의 의논을 가지고 발론을 하였으나, 비희라는 자는 성질이 불순하여 옛날의 이른바 ‘부모에게 불순한 자’의 부류입니다. 그가 유회 부부 및 유회의 양모가 이 말을 지어냈다고 하는데, 유회 등도 또한 비희가 시부모에게 욕을 한 정상을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시역(弑逆)이 아니고 또 시부모에게 욕을 한 일도 없었다면, 삼성 추국을 해서는 안 됩니다. 발론한 대간과 금부의 당상이 모두 입시하였으니, 하문하여 보소서."
하였다. 집의 권격이 아뢰기를,
"당초에 밖의 의논이 자자하고 듣기에 놀랍고 참혹하였기 때문에 논계하였던 것입니다. 어제 추문한 결과는 들은 바와 다르고 증거로 끌어다 댄 말은 불순(不順)이라는 말에 불과했습니다. 불순이라는 두 글자가 사죄(死罪)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니 삼성은 설치하지 않더라도 여러 대신들에게 널리 물어서 처리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고, 판의금 홍중보(洪重普), 지의금 오정일(吳挺一), 동의금 남용익(南龍翼), 헌납 송창(宋昌) 등이 모두 그 죄가 삼성 추국에는 이르지 않는다고 말하니, 상이 이르기를,
"금부가 계품하여 의논을 수렴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어서 묻기를,
"어떤 율을 적용해야 하겠는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부모에게 불순한 것도 역시 강상에 관계가 됩니다. ‘죄가 강상을 범하여 정리(情理)가 매우 깊고 중요하다.’는 율로 조율하여 유 삼천리에 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호조 판서 민정중이 아뢰기를,
"그가 스스로 시어머니가 자신 때문에 죽었다고 하였는데, 그가 자결을 한다면 가하겠으나, 시어미를 죽인 것으로 죄를 주는 것은 법을 제대로 쓰는 것이 아닙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말이 옳다. 영상의 말이 합당한 율일 듯하다."
하였다. 민정중이 아뢰기를,
"영동(嶺東)이 해마다 흉년이 들었는데, 그 가운데 강릉(江陵)은 더욱 심하게 재해를 당하였습니다. 이곳은 옛날에는 풍속이 매우 아름답다고 일컬어지던 곳인데 요즈음은 인심이 좋지 못하여 큰 옥사가 자주 일어납니다. 그간에 억울한 일이 없지 않을 것이니, 마땅히 특별히 채집하고 물어서 억울한 일을 풀어주어야 합니다."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별도로 어사(御史)를 보내는 것은 일의 체모가 중대하니, 본도 감사로 하여금 더욱 더 채집하고 물어서 아뢰게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예판 조복양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오랫동안 편찮으셨기 때문에 오래도록 경연을 폐지했는데, 이는 일의 형세가 본디 그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근래 밖에 있던 유신들이 들어 왔으니, 주연(胄筵)을 열어 강론하게 하는 일이 참으로 급선무입니다만, 경연도 예로부터 제왕들이 급선무로 삼았던 것입니다. 상께서는 모름지기 학문에 힘쓰는 것으로 우선을 삼아, 비록 날마다 경연을 열 수는 없더라도, 상규(常規)에 구애되지 말고 자주 유신을 접견하시어 책을 펴놓고 논란을 하시면 크게 유익함이 있을 것입니다.
옛날 송나라 이초평(李初平)이 상관(上官)이 되고 주렴계(周濂溪)가 하관(下官)이 되었는데, 초평이 염계에게 학문의 공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에게 배우기를 원하니, 염계는 그가 늙어서 글을 읽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매일 강론을 하고 듣게 하였습니다. 초평이 이를 인하여 성리(性理)의 학문을 알았으니, 꼭 송독(誦讀)해야만 이익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고, 민정중도 또한 그렇게 말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이런 뜻이 없지 않으나, 근래에 우환과 병 때문에 인접을 하지 못했다. 재야의 신하를 불러온 것이 어찌 공연히 한 일이겠는가?"
하였다. 집의 권격이 진계하여, 최문식을 잡아다 추문할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일은 그렇지가 않다. 만약 공사(公事)를 들이기 전에 잡아올 것을 청했다면 괜찮지만, 이미 추고할 것을 청하고 나서 또 잡아다 추문할 것을 청하니, 이것이 무슨 의도인가? 무릇 공사(公事)하는 때에는 으레 지절(支節)이 많은 법인데, 어찌 건건마다 논계할 수가 있겠는가. 비록 점목(粘目) 가운데 형추할 것을 바로 청하지 않았더라도 금부에 이송할 것을 청하는 것이 무슨 안 될 것이 있기에 공사하는 데 있어서의 차례를 버려두고서 매양 계사로 별도로 논하여 청하는가? 그렇게 하면 또한 어찌 뒤 폐단이 없겠는가."
하였다. 권격이 상의 분부로 인하여 피혐하고 물러갔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재야의 유신들이 이미 모두 올라왔습니다. 송준길은 찬선에 임명하는 것으로 비답을 내렸으니 으레 서연(書筵)에 입시하겠습니다만, 송시열은 명호가 없어서 서연에 출입하기가 불편할 듯하니, 정식(定式)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삼공(三公) 이외에 별도로 세자부(世子傅)를 설치하여, 별겸 경연(別兼經筵)처럼 겸대시키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모두들 성상의 분부가 옳다고 하였다.
남구만(南九萬)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남구만이 전라 감사가 되어 사조(辭朝)하기 전에 간장(諫長)에 제수된 것이다.
지평 이규진이 최문식을 잡아다 추문할 것을 연계한 일로 피혐하였는데, 권격과 함께 모두 체직되었다.
문충공(文忠公) 박순(朴淳)의 서원(書院)에 사액(賜額)하여, 월정(月井)이라고 하였다. 박순은 나주(羅州) 사람인데, 이때에 이르러 나주 사람들이 사당을 세우고 사액을 청하였다.
9월 26일 임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9월 27일 계해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정언 조세환(趙世煥)이 북로(北路)의 폐단 12가지 일을 나열하여 별단(別單)으로 서계하였다. 1.삼수(三水)와 갑산(甲山) 두 고을의 전세 및 노비 신공을 줄일 일, 2.북청(北靑) 이남 각읍의 모든 상납에 대해 등급을 나누어 줄일 일, 3. 역졸이 포흠(逋欠)한 것을 별도로 변통할 일, 4. 칙사가 행차할 때에 병조에서 각 진보에다 피물(皮物)과 조우(雕羽)를 복정(卜定)하는 폐단에 대한 일, 5. 병영에 바치는 화피(樺皮)를 더 정한 폐단에 대한 일, 6. 내노비 가운데 건장한 자에 대해 신공을 면제하고 진보의 토병에 충정할 일, 7.갑산의 위치는 성을 쌓고 지키기에는 합당치 않으니 참작하여 변통할 일, 8. 변방의 장수를 잘 가려서 보내는 문제에 대한 일, 9. 북로의 무사들이 양식을 갖추기가 어려워서 과거에 응시하러 가지 못하는 폐단에 대한 일, 10. 남군(南軍)에게 다시 공포(貢布)를 면제하고 입방시키는 것이 편리하다는 일, 11. 민역(民役)을 잘 살펴 정하여 난잡한 폐단을 없게 할 일, 12. 정배한 죄인을 모두 풀어 줄 일 등이었다. 이 일을 비국에 내렸는데, 복계하여 시행할 것을 청한 것은 겨우 한두 조목이었고, 그 나머지는 모두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조사해서 아뢰게 하거나 혹은 해조로 하여금 분명히 조사하게 하였는데, 뒤에 결국 실상이 없었다.
의금부가 아뢰기를,
"죄인 성비희는 범한 바가 시역이 아니고 시부모에게 욕설을 한 일도 없습니다. 단지 불순했다는 죄로 처단을 하자면, 마땅히 《대전후속록(大典後續錄)》의 ‘죄가 강상을 범하여 정리(情理)가 매우 깊고 중한 자는 전가 사변하여 정배한다.’는 율을 적용해야 할 듯한데, 죄명이 매우 무거우니, 여러 대신들에게 의논하여 여쭈어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황해도 평산(平山) 등의 10개 읍에 소의 전염병이 많이 번져서 소들이 잇달아 죽었다.
9월 28일 갑자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판중추부사 송시열이 상소하여, 새로 제수한 세자부를 체직시켜 줄 것을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지금 별도로 설치한 것은 뜻이 특별한 것인데, 경은 어찌 이토록 지나치게 사양을 하는가? 생각건대, 지난번의 병이 이제는 나았을 것이니, 모름지기 나의 뜻을 깊이 생각하여 편안한 마음으로 사양하지 말고 속히 들어와서 나의 지극한 소망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고, 사관을 보내어 전유하였다.
9월 29일 을축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편찮아서 약방이 약을 의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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