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일 병인
장령 정시성(鄭始成)이 피혐하여 체직되었다. 최문식을 잡아다 추문하자는 아룀에 참여했기 때문이었다. 정언 조세환이 피혐했는데, 처치하여 출사시키기를 청하였다. 포구를 파는 문제를 쟁론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대사헌 이경휘에게 배척을 당하였기 때문이었다.
판부사 송시열이 상소하여 세자부를 체직시켜 줄 것을 청하고, 또 교외(郊外)에 그대로 머물게 해 줄 것을 청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고 이르기를,
"서연(書筵)에 출입하는 것은 바로 경의 평소의 뜻이었는데, 어찌하여 굳이 사양하는가? 말단적인 일들은 뒷날 등대(登對)하면 직접 대면하여 말하겠다."
하고, 사관을 보내어 유지를 전하게 하였다. 송시열이 상록(常祿) 및 월름 미육(月廩米肉)을 사양하니, 상이 다시 수송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좌의정 허적이 일곱 번째 사직장을 올리니, 상이 따뜻한 말로 답을 내려 허락하지 아니하고, 사관을 보내어 유지를 전하게 하였다.
10월 2일 정묘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세자가 내의원(內醫院)으로 거처를 옮겼다.
10월 3일 무진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사간 김징(金澄)이 피혐하였다. 포구를 파는 일을 쟁론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배척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간원이 처치하여 출사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유진(柳袗)의 처(妻)의 죄를 논하여, 사형을 면제하고 강계(江界)에 정배(定配)하였다. 집안을 다스리지 못한 유진의 죄를 바루어, 가까운 곳에 도배(徒配)하였다.
금부가 성비희(成非喜)의 옥사에 대해서 품지하여 의논을 수렴하였다. 영부사 이경석(李景奭)이 의논드리기를,
"비희가 시역을 한 것도 아니고 부모에게 욕을 한 일도 없다면, 강상죄를 범한 것으로 결정하는 것은 너무 무겁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예율(禮律)에 있어서 그 죄가 마땅히 내보내야 한 데 해당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정리(情理)와 법률(法律)을 참작하여 중도를 얻도록 해서, 너무 무겁거나 너무 가볍지 않게 해야 할 듯합니다."
하고, 판부사 정치화가 의논드리기를,
"죄인 비희가 평소 시부모에게 불순했을 뿐만 아니라 그 시어미가 홧병이 나서 결국 죽게 되었다는 말이 그 남편인 유진의 공초에서 이미 나왔고 보면, 비록 삼성 추국으로 다스릴 수는 없더라도, 또한 그 불순한 죄만을 논하고 말아서도 안 됩니다. 범한 죄와 정상을 참작하여 사형을 면제하고 정배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하였다. 좌의정 허적과 판부사 송시열은 병 때문에 의논을 수렴하지 못하자, 상이 다시 의논을 수렴하라고 명하였다. 찬선 송준길에게도 의견을 물어서 아뢰게 하였다. 좌의정 허적이 의논드리기를,
"율문을 두루 상고하고 깊이 생각해 보았지만 끝내 적당한 조항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꼭 처벌을 해야 한다면, 정리와 법률을 참작하고 비율(比律)로 절충하여 먼 변방에 귀양을 보내어 그 악을 징계하고 풍속을 바룬다면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아서 중도에 맞을 듯합니다."
하고, 판부사 송시열이 의논드리기를,
"신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의 시어미가 그 사람 때문에 죽었다면 지은 죄가 무겁거나 가볍거나 간에 범연히 불순의 율로 처리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죽음만 겨우 면하게 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하고, 송준길이 의논드리기를,
"비희가 비록 효순(孝順)의 도리는 잃었으나, 또한 고부간의 갈등에서 일어난 일에 불과합니다. 우연히 그의 시어미가 죽은 데 있어서는 실로 그가 그렇게 되기를 바란 일은 아니었습니다. 참작하여 율을 쓰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의논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금부가 아뢰기를,
"비희는 마땅히 여러 대신들의 의논대로 사형을 면제하고 정배해야 하겠습니다만 유진과 유회 등은 형조로 돌려보내어 상께 여쭈어 처결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형조가 아뢰기를,
"유회는 석방하소서. 유진은 집안을 잘 단속하지 못하였고 또 처를 위해서 앞뒤로 비호해준 죄가 있으니, 도년 정배할 것을 청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10월 4일 기사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정지화(鄭知和)를 대사헌으로, 오정일(吳挺一)을 형조 판서로, 조한영(曺漢英)을 참판으로, 남이성(南二星)을 집의로, 오상(吳尙)을 장령으로, 민종도(閔宗道)와 최상익(崔商翼)을 지평으로, 이규령(李奎齡)을 교리로 삼았다.
정지화는 여러 차례 형관(刑官)이 되었었는데, 어질고 관대한 정치를 하지 못하고 엄하고 가혹한 형벌을 많이 써서 사람이 많이 죽었다. 오정일은 형관(刑官)이 되었을 적에 사람들의 말이 많았고 대간이 탄핵을 하기까지 하였으므로, 여러 차례 이 직책에 제수하였으나 끝내 배사하지 않았다. 최상익은 강직한 척하면서 명예 얻기를 바라는 추태를 많이 부려 식자들이 비루하게 여겼다.
이혜(李嵇)를 이조 좌랑으로 삼았다. 이혜는 명망이 흡족하지 못하여 사람들이 하찮게 여겼다.
10월 5일 경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밤 1경에 달이 남두(南斗)로 들어갔다.
장령 이관징(李觀徵), 오상(吳尙)이 아뢰기를,
"지난해의 흉년은 예전에도 드문 것이어서, 올봄에 국곡(國穀)을 나누어 꾸어준 것이 그 숫자가 예년의 몇 배가 됩니다. 또 각 해[各年]마다 받은 것을 가난하여 다 갚지 못한 자들도 많습니다. 올해의 농사는 비록 지난해보다는 조금 낫다고 하나 여러 해 밀린 많은 곡식을 일시에 독촉하여 받아들일 경우, 이 해가 다 가기도 전에, 떠돌며 굶주리는 상황이 필시 올봄과 다름이 없게 될 것입니다. 성명께서도 필시 생각이 여기에 미치시어 마음이 아플 것입니다. 올봄에 나누어 지급한 곡식은 절반으로 줄여서 바치게 하고, 풍년이 들기를 기다렸다가 남은 절반을 납부하게 하면, 아무 것도 없는 백성들이 조금이나마 혜택을 입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잘 헤아려 품정해서 각도에 알리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0월 6일 신미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호조가 조정의 명령을 잘 봉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정영을 죄줄 것을 청하였다. 관향 곡식을 써서 은을 무역한 일로 바야흐로 대간의 논박을 받고 있는 사건이었다. 상이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상이 일렀다.
"어저께 송 판부사의 상소에 대한 비답에, 조용히 만나서 이야기하겠다는 것으로 답을 했었다. 들어오라는 뜻을 사관을 보내어 전유하게 하고, 판부사가 입시할 때에 찬선도 입시하게 하라."
희정당에서 상이 송시열과 송준길을 인견하였다. 상이 송시열에게 이르기를,
"근래에 병 때문에 인견하지 못하여 참으로 유감이었다."
하고, 송준길에게 이르기를,
"중간에 뒤떨어져 내 마음이 허전했었는데, 올라왔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위로가 되었다."
하였다. 송시열이 아뢰기를,
"옛날에 주자(朱子)가 송 효종(宋孝宗)에게 봉사(封事)를 올려 아뢰기를 ‘폐하께서 동궁을 돌보는 것이 어찌 그리도 매우 소략합니까? 이것은 어쩌면 스스로를 다스리는 것이 소략함을 면치 못하여, 이를 당연한 것으로 여겨서 염려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는데, 전하께서도 바로 이와 같은 경우가 아닙니까?"
하고, 송준길이 아뢰기를,
"송시열이 옛일을 끌어 진달한 것이 아주 절실한 격언(格言)입니다만, 신은 감히 이어(俚語)로써 우러러 아뢰겠습니다. 경연을 오래 폐하면 속어에 옥당의 신하들을 책색리(冊色吏)라고 합니다. 이것은 한갓 서책만 지키고 있다는 말입니다. 근래에 이러한 기롱이 매우 심하니, 이로 본다면 뒷날 세자가 서연을 부지런히 열지 않으리라는 것을 따라서 알 수가 있습니다. 정일(精一)로 서로 전하지 않고 게으름으로 서로 전한다면 어찌 옳은 일이겠습니까. 그리고 모르겠습니다만, 전하께서는 깊은 궁중에 계시면서 무슨 공부를 하십니까? 서사(書史)를 가까이 하십니까? 아니면 하는 일 없이 한결같이 게으르게 지내십니까?"
하니, 상이 즉시 답을 하지 않았다. 송시열이 아뢰기를,
"송 효종은 삼대(三代) 이후의 어진 임금이었습니다. 일찍이 조정에 나와서 스스로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여러 신하들을 대한다’고 말하자. 장구성(張九成)이 나아가 아뢰기를 ‘폐하께서 궁중에 계시면서 궁첩들을 접견하시는 것이 외신(外臣)을 인접하시는 것과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하였습니다. 효종이 머뭇거리며 대답을 못하자. 구성이 아뢰기를 ‘신은 폐하께서 신료들을 대하는 것이 정성스럽지 못하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하였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답을 하지 않으시니, 준길의 말이 구성의 말과 가깝지 않겠습니까?"
하고, 송준길이 아뢰기를,
"송시열이 아뢴 것이 옛사람의 말인데, 만약 답을 하지 않으시면, 신의 답답한 마음이 끝내 풀리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웃으며 이르기를,
"찬선이 말을 끝내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미처 답을 못한 것이다. 본디 서사(書史)에는 소홀히 하지 않으나, 매양 눈병 때문에 집중하여 글을 볼 수가 없다. 어찌 아주 폐기하기까지야 하겠는가."
하였다. 두 신하가 시종 열심히 진달한 것은 유신(儒臣)을 자주 만나고 경연을 자주 열라는 것이었고, 또 느긋하고 게으른 것을 경계하고 떨치고 일어나 분발할 것을 권면하였으며, 끝에 가서 다시 사치스러운 것을 없애고 검약을 숭상할 것을 말하였는데, 상이 모두 귀를 기울여 들었다. 두 신하가 이어 돌아가게 해 줄 것을 매우 간절하게 청하였는데, 상도 머물기를 간절히 권하였다.
상이 사관에게 명하여 유대 대관(留待臺官) 사간 김징과 장령 오상을 부르게 하였다. 김징이 진계하여, 강화 경력(江華經歷) 신숭구(申嵩耉)가 대곡(大斛)을 개조하여 각읍에다 주어 이전(移轉)시킨 죄를 논하여 잡아다 추문할 것을 청하고, 또 유수(留守) 김휘(金徽)가 검칙을 제대로 못한 실수에 대해서 논하여 추고할 것을 청하고 【뒤에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나, 김징이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또 경상 병·수영에서 포자(鋪子)를 창설하여 백성들의 재물을 침탈한 폐단을 논하여, 도신으로 하여금 조사해 내어 혁파하도록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모두 따랐다. 김징이 아뢰기를,
"신이 어가를 따라 온양(溫陽)에 갔을 때에 사복시 첨정 강전(姜琠)에게 곤장을 치는 것을 직접 보았습니다. 범한 죄가 과연 곤장을 쳐야 될 죄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사부(士夫)에게 곤장을 치는 것은 이미 합당한 벌이 아닌데다, 만약에 곤장 15도를 세게 치면 목숨을 잃을까 염려되었기 때문에 【이 당시에 상이 곤장 15도를 치라고 명했었다.】 7, 8도 이외에는 모두 아프지 않게 곤장을 쳤습니다. 위에서 명령하신 것도 적당하지가 않았고 아래에서 봉행한 것도 거짓에 가까웠습니다. 이 뒤로는 비록 이러한 벌을 주어야 할 일이 있더라도 곤장칠 숫자를 줄이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였다. 송준길이 아뢰기를,
"조정에서 사부를 대우함에 있어서는 염치를 보호하여 아껴주어야 합니다. 근래에는 수령들에게 죄가 있으면 반드시 영문(營門)에다 잡아다 놓고 곤장을 치는데, 염치가 조금이라도 있는 자는 곤장을 맞고 난 뒤에는 반드시 관직에 있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장령 오상이 품은 생각을 대략 진달하였는데, 말이 말 같지가 않아서 듣는 자들이 웃었다.
이조에 명하여 청백리를 뽑도록 하였다. 대개 김징이 아뢴 바를 따른 것인데, 해조가 게으름을 부려 결국 초계하지 않았다.
10월 7일 임신
상이 천식이 있어서 뜸을 떴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사간 김징이 아뢰기를,
"신들이 평안 감사의 계본을 보니, 이정영이 관향곡(管餉穀)으로 목면 수백여 동을 무역하여 사적으로 장사치 모리배들과 함께 값을 낮추어 은으로 바꾼 정상이 분명하여 엄폐할 수가 없습니다. 내려오는 절가(折價)의 규정으로 헤아려 보건대, 은수(銀數)가 감축된 것이 거의 수천 냥에 이릅니다. 비록 사사로이 쓴 자취는 없으나, 나라에서 군향을 많이 손실당하였으니, 주관한 사람이 전연 죄가 없을 수는 결코 없습니다. 어찌 추고만 하고 그칠 일이겠습니까. 파직하소서. 또 해조로 하여금 줄어든 은을 헤아려 장사치들에게서 징수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고 헤아려 징수하는 일만 윤허하였다. 여러 차례 아뢰니 따랐다. 뒤에 송시열이 경연에서 말하기를,
"이정영으로 하여금 징납하게 하는 것이 옳지 조정에서 헤아려 징수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였다. 상이 비록 들어주지 않았으나, 벼슬아치들에게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김좌명(金佐明)을 공조 판서로, 남이성(南二星)을 부응교로, 권격(權格)을 집의로, 김만중(金萬重)을 교리로, 홍주국(洪柱國)을 부수찬으로, 윤경교(尹敬敎)를 사서로, 민종도(閔宗道)를 정언으로, 홍수하(洪受河)를 지평으로 삼았다. 홍주국은 시세에 아첨해 빌붙어 청현직을 차지하였으니 비루하다.
10월 8일 계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뜸을 떴다.
상이 명하여, 세자가 이접(移接)하고 있는 근처에서 시끄럽게 떠들지 말 것과 조사(朝士)들이 출입할 때에 가금(呵禁)하는 것을 금하게 하였다. 이때에 근수(跟隨)의 숫자를 정한 법이 잘 지켜지지 않아서 【대군(大君)은 4인, 대신(大臣)은 3인, 당상 이상은 2인, 이하는 1인이었다.】 조사들이 궐중에 드나들면서 법대로 봉행하는 자가 없었다. 이름있는 사대부들은 수행하는 자들이 떼를 이루었고 소관(小官)들도 수행인이 3, 4인을 밑돌지 않았는데, 길에 앞장을 서서 가금을 하게 하지 않는 자가 없어서 소리가 대궐 뜨락까지 진동하였다. 전교가 있었는데도 삼가지 않았으니, 조정의 기강이 해이해졌다고 할 만하다.
북청(北靑)·이성(利城)·단천(端川)·길주(吉州)·명천(明川)에서 해마다 서울로 바치는 공물(貢物)의 가포(價布) 및 주(州)에 바치는 공물의 작미(作米)와 내노비, 궁노비, 각아문 노비, 사노비(私奴婢)의 공미포(貢米布)를 완전히 감면하고, 전세(田稅)로 바치는 쌀과 콩은 절반으로 줄여주고, 경성(鏡城)·회령(會寧)·안변(安邊)·덕원(德源)·문천(文川)·고원(高原)·영흥(永興)·함흥(咸興)·홍원(洪原)·삼수(三水)·갑산(甲山)에서 전세(田稅)로 내는 쌀과 콩 및 내노비, 시노비(寺奴婢), 궁노비, 각아문 노비의 공포(貢布)와 공미(貢米)를 반으로 줄이고, 사노비(私奴婢)의 공미포를 완전히 감면시켜주라고 명하였다. 이는 감사 권대운(權大運)이 재해 당한 곳을 분등(分等)하여 계문하였기 때문이었다.
상이 뜸을 떴다.
세자 책례 별시(世子冊禮別試)의 문·무과(文武科) 초시(初試)를 개장(開場)하였다.
판부사 송시열이 조부(祖父)의 산소를 성소(省掃)하기를 청하니, 상이 허락하고, 말을 지급하라고 명하고 본도로 하여금 요전상(澆奠床)을 갖추어 주라고 하였다. 시열이 사양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것은 국가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전례이니, 안심하고 사양하지 말라."
하고, 사관을 보내어 유지를 전하게 하였다.
10월 10일 을해
우레가 치고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대두(大豆)만하였다.
상이 뜸을 떴다.
이시술(李時術)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10월 11일 병자
상이 양심합(養心閤)에 나아가 판부사 송시열을 인견하였다. 승지와 옥당이 모두 청대(請對)하여 입시하였다. 송시열이 아뢰기를,
"어제 우레의 변고가 매우 참담하였는데, 상께서는 얼마나 놀라셨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재변이 거듭되는데, 또 겨울 우레까지 있었으니, 두려움을 말로 할 수 없다."
하였다. 송시열이 아뢰기를,
"하늘의 변고가 이와 같을 때에는 전하께서는 필시 경계하는 마음을 배로 가지시겠으나, 며칠만 지나면 점점 나태해지니, 전하께서 경건한 마음으로 하늘을 대하는 정성을 다하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욕(私欲)을 누르고 덕을 닦고 반성을 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나, 끝까지 한결같이 하지 못하는 것은 사람으로서 면할 수 없는 것이다."
하였다. 시열이 아뢰기를,
"만약 성인(聖人)의 경지가 아니면 이 병통을 면하기 어렵습니다만, 극기(克己)라는 두 글자는 바로 절실한 가르침이고, 부지런하고 검소한 것은 우(禹)임금의 덕이었습니다. 만약 마음을 다스리고 사무를 밖으로 여기시면 반드시 청허(淸虛)한 경지에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밖의 의논이 전하께서 정사에 부지런하지 않다고 하므로 그런 말을 듣고 걱정스러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오래도록 답을 하지 않았다. 승지 여성제(呂聖齊)가 대신을 자주 접견하고 민역(民役)을 줄여주어 재변을 없애는 방도로 삼기를 청하였다. 송시열이 아뢰기를,
"이 말이 옳습니다. 정자(程子)께서 사람들이 소를 죽이는 것을 탄식하시면서 ‘소가 젊었을 때는 그 힘을 다 부려먹고 늙은 뒤에는 잡아 먹으니, 반드시 원한의 기운을 불러오게 될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소도 그러한데 하물며 사람이겠습니까. 오직 백성을 잘 보호하는 데에 있을 따름입니다."
하였다.
고 장령 조속(趙涑)에게 제수(祭需)를 내리고 고 대사헌 유경창(柳慶昌)의 처자(妻子)에게 먹을 것을 내리라고 명하였다. 교리 이규령이 아뢰기를,
"조속은 청백리이고 절조가 있었는데, 죽은 뒤에 집이 가난하여 제사도 지내지 못합니다. 유경창도 청렴하다는 소문이 났는데, 그가 죽은 뒤에 자손들이 떠돌며 추위와 굶주림을 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모두 진념하셔야 합니다."
하니, 송시열이 아뢰기를,
"이 두 신하의 일에 대해서는 신도 잘 알고 있습니다. 유경창은 청백하기가 옛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은데, 벼슬살이를 할 때에 자봉(自奉)하는 것이 매우 박하였고 감사로 있을 때에는 처자식들이 굶주림과 추위를 면치 못하였으니, 이것이 사람들이 미치지 못하는 바입니다. 조속도 광해조 때에 아비가 비명에 죽자 왕부(王裒)008) 처럼 행동을 하였습니다. 계해년 정사(靖社)할 때에 협찬한 공이 많았는데, 녹훈할 때에는 지성으로 면하기를 도모하였습니다.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광해가 대궐을 나갈 때에 뒤에서 칼을 들고 세 번이나 치려고 하였답니다. 사람됨이 청백하고 지조가 매우 높았는데, 서울에 있으면서도 아침 저녁 끼니를 잇지 못하였고 얼마 전에 그가 죽었는데 가난하여 제사도 지낼 수 없었다고 합니다."
하여, 상이 이 명을 하게 된 것이다.
유경창이 청렴하고 고결한 것은 사람들이 따를 수 없는 바이지만 더러 인정에 가깝지 않은 것도 있었다. 일찍이 궁관(宮官)으로서 소현 세자(昭顯世子)를 배종하여 심양에 갔을 때에, 세자가 그들을 따라 사냥을 나가면 유경창은 번번이 병을 칭탁하고 나가지 않았다. 때문에 효종 대왕이 그가 싫어서 피하는 것을 미워하여 등용하지 않았는데, 송시열이 이조 판서가 되어서는 이것을 절개에다 갖다 붙여 힘껏 천거하여, 대사헌에까지 이르렀다가 죽었다. 그러나 식자들은 인정을 해주지 않았다.
조속은 탁월한 지조가 있고 또 변란을 대처함에 있어 사람들이 미치지 못할 바가 있었으나, 칼을 빼어들고 찌르려고 했다는 말은 필시 조속의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비록 그런 일이 있었더라도 조속에게 있어서는 취할 만한 일이 아니고 또한 임금에게 아뢸 일도 아닌데, 시열이 경망하게 진달하였으니 애석하다.
영의정 정태화가 우레의 변고가 일어난 것을 이유로 차자를 올려 면직을 청하니, 상이 자신을 책망하는 뜻으로 답을 하고, 사관을 보내어 유지를 전하게 하였다.
중사(中使)와 사관(史官)을 보내어 문과 시소(文科試所)를 적간하게 하였다.
사은 정사(謝恩正使) 복창군(福昌君) 이정(李楨), 부사 민희(閔熙), 서장관 정박(鄭樸)이 청나라에서 돌아왔다.
판부사 송시열이 아뢰기를,
"강효원(姜孝元)은 시강원 서리입니다. 필선 정뇌경(鄭雷卿)이 심양에 있을 때에 정명수(鄭命壽)를 죽이려고 꾀하였는데 【정명수는 우리 나라 사람으로 적에게 포로가 된 자인데, 중간에서 용사(用事)를 하여 우리 나라를 곤란하게 하기를 끝없이 하였다.】 강효원이 그 일에 참여하였다가 일이 발각되어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함께 일을 했던 자들이 모두 수를 써서 벌을 면했는데 강효원은 죽었습니다.
이사용(李士用)은 성주(星州)의 포수(砲手)입니다. 심양에서 징병(徵兵)을 할 때에 이사용이 거기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전쟁에 임해서 빈 포를 쏘아 중국을 저버리지 않았음을 보였다가, 일이 발각되어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두 사람의 일은 모두 가상하니, 포상하는 법전을 시행하여 절의를 부지하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뒷날 품의하여 처리하라고 명하였다. 【뒤에 정태화와 민정중 등의 말을 인하여 강효원의 아들과 손자는 면천(免賤)하고 이사용의 처에게는 휼전을 거행하였으며 아들 이선(李善)은 녹용(錄用)하게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5책 15권 26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594면
【분류】인사-관리(管理) / 신분-천인(賤人) / 윤리-강상(綱常) / 외교-야(野)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10월 12일 정축
상이 뜸을 떴다.
판부사 송시열이 차자를 올려, 상록(常祿)을 사양하며 아뢰기를,
"음식물을 받는 것도 마음이 편치 못한데, 또 다시 녹을 받으면 이것은 참으로 농단을 하여 이익을 독차지하는 것이고 무덤 사이에서 더 얻어먹으려고 두리번거리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음식물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경을 예로 대우하는 별도의 일이고 반록(頒祿)을 하는 것은 대신이 응당 받아야 할 상록이니, 일의 체모에 있어서 이미 받은 것이 있다고 해서 상록을 없앨 수는 없는 것이 분명하다. 경이 이른바 농단한다는 등의 말은 어찌 그러하겠는가. 아무튼 경의 사양이 이러하니, 애써 그대의 뜻을 따르겠다."
하고, 사관을 보내어 유지를 전하게 하였다.
형조 판서 오정일이 사직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뒤에 대신의 말을 따라 체직을 허락하였다.
10월 13일 무인
상이 뜸을 뜬 뒤에,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이 당시 사은사 행차 때에 구매한 산동(山東)·무원(撫院)·강남(江南) 등 세 성(省)에 지진 변이(地震變異)가 일어난 데 대한 문서 및 희거구(喜擧口) 몽고 부락(蒙古部落)이 배반한 사정에 대한 글을 올렸는데, 상이 여러 신하들에게 내보이며 이르기를,
"담성(郯城) 한 주(州)에 지진이 일어나 깔려 죽은 자가 1천여 명이나 된다."
하니, 모두들 말하기를,
"여러 곳에서 깔려 죽은 사람이 수천 명이고 기타 변괴도 이전의 역사에 없던 바입니다. 이것이 모두 난망의 조짐인데 몽고 사람들이 또 반란을 일으켰으니, 청나라가 필시 지탱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이때에 우리 나라에 재변이 거듭 나타나고 굶주림과 전염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잇따라 실로 보전하기 어려운 형세였는데 이것은 근심하지 아니하고, 청나라에 이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한번 듣고는 위아래가 희색이 만면하였으니, 몽고가 반란을 일으키면 우리 나라가 그 화를 먼저 받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으로서 이는 마치 집이 불타는데 아무것도 모르고 걱정하지 않는 장막 위의 제비와 다름이 없는 것이다.
대사헌 정지화가 나아가 아뢰기를,
"대신의 진퇴는 시운의 흥륭과 쇠퇴에 관계가 있는 것이니, 대신의 직책을 어찌 가벼이 체직할 수가 있겠습니까. 송시열을 체임시킨 것이 비록 불러오고자 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였으나, 두 유신이 이미 일시에 왔으니, 만약에 힘써 머물게 하여 인접하시면 옛사람이 이른바 10년 동안 책을 읽은 것보다 낫다는 것이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뜸뜨기가 끝나면 응당 자주 인접할 것이다."
하였다.
상이 진휼청에 명하여, 의지할 데가 없어 구걸을 하는 자에게 끼니를 잇고 몸을 덮을 것들을 지급하도록 하였다. 정지화가 아뢰기를,
"전에 길에서 세 명의 어린 소녀를 만났는데, 다 떨어진 누더기 옷을 입고 추위에 거의 얼어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진구하여 살려 놓은 백성이 지금 와서 얼어 죽는다면 너무나 불쌍한 일입니다. 들으니, 대신이 이미 옷가지를 찾아서 지급하라고 했다 하는데, 이러한 사람들이 만약 죽음을 면하지 못한다면 어찌 왕정의 하자가 아니겠습니까. 오부(五部)로 하여금 널리 조사하여 목숨을 구활하게 하소서."
하여, 상이 이 명을 내린 것이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10월 14일 기묘
상이 뜸을 떴다.
10월 15일 경진
평안도에 소의 전염병이 많이 번져 9월 20일 이후에 죽은 숫자가 5백 60여 마리였다. 함경도에서 전염병으로 죽은 수는 헤아리지 못할 정도였다.
10월 17일 임오
이상진(李尙眞)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는데, 윤문거가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성제(呂聖齊)를 전라 감사로 삼았다. 처음에 민희(閔熙)로 감사를 삼았었는데, 이조 판서 이경억이 경연에서 아뢰기를,
"민희가 아직 복명을 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외직에 제수하는 것에 대해 물의가 그르게 여깁니다. 또 형제끼리 서로 교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합니다."
하고, 대사헌 정지화가 아뢰기를,
"법에는 상피하는 규정이 없는데, 가정 을사년009) 에, 전곡(錢穀)을 담당하는 관원의 경우는 교대할 때에 상피하라는 수교(受敎)가 있었습니다. 옛날에 감사는 감찰하고 다스리기만 했지 전곡의 일을 주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모두 관장을 하고 있으니, 상피하는 법이 있어야 할 듯합니다."
하고,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형제끼리 서로 승계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을 듯합니다. 지금 지화의 말을 들으니, 전곡을 맡은 관원의 경우 형제끼리는 서로 교대시키지 말라고 한 수교가 일찍이 있었다고 하니, 민희를 개차하고, 이 뒤로 감사를 교대시킬 때에 상피하는 한 조항을 법으로 정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 말을 따라 성제로 대신하게 한 것이다.
이익(李翊)과 민주면(閔周冕)을 승지로 삼았다.
10월 18일 계미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심경(心經)》을 강하였다. 상이 찬선 송준길로 하여금 글의 뜻을 강론하게 하였는데, 준길이 명석하게 진달하였다. 무릇 군도(君道)에 관계되는 것은 반드시 반복하여 상세히 말씀을 드렸다. 곤괘(坤卦)와 복괘(復卦)의 뜻을 논하면서 아뢰기를,
"이것은 학자에게 유익할 뿐만 아니라. 임금에게도 가장 요긴한 것입니다. 음 가운데에 양이 있고 양 가운데에 음이 있는데 음은 소인에 속하고 양은 군자에 속합니다. 임금이 된 자는 마땅히 잘 살펴야 됩니다."
하였다. 강을 마치고 나아가 아뢰기를,
"옛말에 이르기를 ‘대인(大人)은 임금의 마음을 바룬다.’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여러 신하들 가운데 비록 대인은 없으나, 미치광이의 말도 성인(聖人)이 가려서 썼으니, 여러 신하들이 올린 말 중에 어찌 가려서 쓸 만한 말이 없겠습니까. 경연은 바로 임금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 여러 해 동안 경연을 폐하여 아랫사람들의 마음을 외롭게 했습니다. 오늘 소대(召對)의 명을 내리시어 막힌 뚝을 트듯이 하시니, 누군들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오늘부터 경연을 잇따라 열어서 신료들을 자주 만나신다면 가까이에서 멀리까지 누가 감동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화기(和氣)를 불러오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하였다. 물러날 무렵에 준길이 나아가 아뢰기를,
"소신이 올라와서 나라에 도움은 되지 못하고 늠록만 허비하여 마음에 늘 부끄러웠는데, 또 은혜를 내리시니, 매우 두렵고 부끄럽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 진심으로 내리는 것인데 어찌 사양을 하는가?"
하였다. 이때에 상이 초모(貂帽)를 하사했기 때문이었다. 상이 경연을 폐지한 지 여러 해가 되었는데, 이제 소대의 명을 내리니 아랫사람들이 모두 기쁜 기색이 만면하였고, 옥당에 비로소 글 읽는 소리가 있게 되었다.
대사헌 정지화가 아뢰기를,
"학정(學正) 김정태(金鼎台)가 과거를 개장하는 날에 사사로운 혐의로 두 유생을 정거시켰는데, 사관(四館)에 알리지도 않고 자기 멋대로 정거시켰으니, 이것은 일찍이 없었던 일로서 매우 놀랍습니다.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상이 먼저 파직하고 나서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정지화(鄭知和)를 형조 판서로, 박장원(朴長遠)을 대사헌으로, 유준창(柳俊昌)을 승지로 삼았다. 유준창은 술 때문에 폐기된 사람인데, 승지가 되어서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여, 집의 권격(權格)에게 탄핵을 받아 체직되었다.
10월 19일 갑신
병조가 아뢰기를,
"육량전(六兩箭) 세 발을 쏘아서 모두 15보가 되면010) 이것이 30분(分)인데, 편전(片箭)을 두 발 맞힌 자와 분수(分數)가 서로 같아서 취사(取舍)하기가 어렵습니다. 이것은 아직 정해진 의논이 없는데, 대개 전례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한 조항을 마땅히 의논해 정해야 합니다. 지금 일소(一所)에서 시사(試射)한 사람의 숫자가 아직 절반도 지나지 않았는데, 세 발이 모두 1백 보를 간 자가 이미 수천여 명이고, 모두 1백 15보 이상인 사람도 또한 3백 명을 넘었습니다. 앞으로 멀리 쏠 자도 또한 얼마나 될지 알 수가 없으니, 세 발이 모두 15보인 자가 필시 참방을 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으로 말하자면 편전을 두 발 맞힌 자도 또한 참방하기 어렵습니다. 육량전으로 1백 보를 쏘는 것은 어깨 힘이 좋아서 활을 잘 쏘는 사람이 아니면 결코 도달하기 어려운 것이나 편전 한 발을 명중시키는 것은 비록 힘도 없고 활도 잘 쏘지 못해도 혹 요행으로 맞히는 자가 있습니다. 무재(武才)로써 논해 보자면, 먼저 육량전 쪽을 취하는 것이 마땅할 듯한데, 편전 두 발을 맞히는 것도 매우 어려운 일이므로, 육량전의 분수와 그 다소를 따져서 손해를 보게 되면 또한 억울한 일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또 신 홍중보가 별도로 생각한 바가 있습니다. 서울에 거자들이 모인 것이 오늘날처럼 많은 적이 없었으며, 무예를 능히 규구에 맞게 다할 수 있는 것도 오늘날처럼 성대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일소에서 취하는 숫자가 단지 3백명이니, 낙망하여 탄식하는 일이 있을 듯합니다. 아울러 묘당으로 하여금 잘 헤아려 품처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0월 20일 을유
비변사가 아뢰기를,
"당초에 사목(事目)을 계하할 때에, 육량전을 세 발 쏘아 모두 백보를 가는 것과 편전을 세 발 쏘아 두 발을 명중시키는 두 가지 기예 가운데서 한 가지 기예를 취할 일로 판하를 하셨습니다. 그러니 마땅히 각각 두 가지 기예의 분수를 계산하여 차례대로 출방을 해야 하겠습니다만, 지금은 거자들의 녹명(錄名)이 매우 많아서 육량전을 쏘는 일이 아직 끝나지도 않았는데 일소(一所)에서 세 발 모두 1백 보를 간 자가 이미 수천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이 뒤로 입격할 자가 또 얼마나 될지 알 수가 없는데, 육량전의 우수한 분수만 계산하더라도 출방할 숫자의 원수(元數)를 넘어, 편전으로 입격한 자는 장차 참방을 하지 못할 형편이 되었으니, 변통하는 거조가 있어야 할 듯합니다. 여러 사람들의 의논이 모두 ‘두 가지 기예의 분수를 합계하여 출방을 하면, 한 가지 기예만 입격했더라도 분수가 우등인 자는 참방을 할 수가 있고, 두 가지 기예 모두 입격한 자도 억울하지 않게 될 것이니, 이와 같이 법식을 정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고 하니, 사목 가운데 이렇게 부표를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개장한 뒤에 액수를 더 정하는 것은 일의 체모에 방해로움이 있고 또 뒤 폐단에도 관계가 됩니다. 병조 판서가 시험을 담당하라는 명을 받들고 많은 사람들이 낙망을 할까 염려되어 이렇게 계품한 것입니다만, 특명이 있지 않으면 아래에서 감히 우러러 청할 바가 아닙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뢴 대로 하라. 개장한 뒤에 액수를 더 정하는 것은 일의 체모로 보나 뒤 폐단이 생길 것으로 보나 모두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그렇지만 혹 권도를 써서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로 인해 전례가 되게 해서는 안 된다. 특별히 명하여 이번 과거는 양소에서 2백 인씩 더 뽑도록 하라."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과거는 일의 체모가 중대하여 한번 흔들리면 뒤 폐단을 막을 수가 없다. 병조 판서 홍중보가 거자들에게 명예를 구하는 일에 힘써 전례에 없던 일을 계청하였는데, 묘당이 그 잘못을 바로잡지 아니하고 그것이 잘못인 줄을 알면서도 상의 결정에 맡겼다. 그러다가 마침내 대간의 논계가 일어나 금방 정지시키게 하여, 나라의 체모를 떨어뜨리고 임금에게 원망이 돌아가게 하였으니, 재상들이 나랏 일을 하는 것이 자신을 위한 일만도 못하다 하겠다. 이때에 무사 수백 명이 떼를 지어 영상의 집에 모여서 한꺼번에 하소연하며 입격자를 모두 참방시키도록 입계해 달라고 청하였다. 인심이 꺼림이 없고 조정이 존귀하지 못함이 이러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5책 15권 28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595면
【분류】인사-선발(選拔) / 역사-편사(編史)
사신은 논한다. 과거는 일의 체모가 중대하여 한번 흔들리면 뒤 폐단을 막을 수가 없다. 병조 판서 홍중보가 거자들에게 명예를 구하는 일에 힘써 전례에 없던 일을 계청하였는데, 묘당이 그 잘못을 바로잡지 아니하고 그것이 잘못인 줄을 알면서도 상의 결정에 맡겼다. 그러다가 마침내 대간의 논계가 일어나 금방 정지시키게 하여, 나라의 체모를 떨어뜨리고 임금에게 원망이 돌아가게 하였으니, 재상들이 나랏 일을 하는 것이 자신을 위한 일만도 못하다 하겠다. 이때에 무사 수백 명이 떼를 지어 영상의 집에 모여서 한꺼번에 하소연하며 입격자를 모두 참방시키도록 입계해 달라고 청하였다. 인심이 꺼림이 없고 조정이 존귀하지 못함이 이러하였다.
10월 21일 병술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심경(心經)》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고, 찬선 송준길이 나아가 아뢰기를,
"어제 아뢴 곤괘와 복괘 그리고 음양의 뜻은 아주 절실한 요체입니다. 전하께서 유의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이어 음양 소장(陰陽消長)의 이치를 아뢰었다. 교리 이규령이 아뢰기를,
"판중추부사 송시열은 단지 세자부(世子傅)만 겸하고 있고, 경연의 직명이 없습니다. 대신에게 물어서 처리해야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원임 대신은 경연관을 겸하는 규례가 있다. 내일 개정(開政)하여 하비하도록 하라."
하니, 송준길이 이르기를,
"송시열은 근력이 신에게 견줄 바가 아니고 또 책 읽는 공부를 폐하지도 않았는데, 잇따라 시강을 하지 못하였으니, 올라온 뜻이 전혀 아닙니다. 어찌 애석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에 이미 대면하여 하유하였다. 다시 가까운 신하를 보내어 하유하겠다."
하였다. 송준길이 아뢰기를,
"경연을 열 때에는 문학(文學)을 한 선비가 없어서는 안 됩니다. 이단상(李端相)은 학문이 해박하고 식견이 있는 사람인데 지금 먼 시골에서 지내고 있으며 이민적(李敏迪) 형제는 모두 문학을 공부한 사람들인데 한 사람은 파직되었고 한 사람은 외방에서 임무를 맡고 있습니다. 모두 아까운 사람들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민적을 서용하라."
하였다. 송준길이 아뢰기를,
"권시(權諰)와 같은 사람은 끝내 버려두어서는 안 될 사람입니다. 비록 그 마음이 굳지 않고 식견이 확실하지는 못하나, 임금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한 생각은 끝까지 해이해지지 않을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마땅히 거두어 써야 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김홍욱(金弘郁)의 죄에 대해서는 선왕(先王)께서 엄한 법으로 처벌을 하셨는데, 그 뒤에 신들의 아룀을 듣고 그의 관작을 회복시키고 그의 자손을 서용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김홍욱을 잡아온 도사(都事)는, 죄인을 잠시 지체시켰다는 이유로 아직도 죄를 받고 있으니, 어찌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도사는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죄가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은 것이다."
하였다. 송준길이 아뢰기를,
"김홍욱의 죄가 이미 가볍다면, 도사의 죄가 어찌 도리어 무거울 리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그 말이 옳다고 하였다. 송준길이 아뢰기를,
"이제(李璾)도 파직된 지가 오래입니다. 신은 전 도사 이이형(李以馨)과 이제를 모두 서용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이러하니 모두 서용하겠다."
하였다. 송준길이 일어나 말하기를,
"옛날의 대신들은 비록 공격을 당했더라도 오히려 말한 자를 신구해 주었습니다. 송나라의 당개(唐介)가 문언박(文彦博)을 공격하였는데 문언박이 힘을 써서 구제해주려고 하였으니 대신의 풍도를 볼 수가 있습니다. 신이 듣기로는 이제가 벌을 받은 것이 영의정 정태화에 대한 일 때문이라고 하는데, 정태화가 끝내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으니, 옛날의 대신만 못한 것입니다."
하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일을 조사할 때에 신이 목숨을 버리지 못했으니 이것이 신의 죄입니다만, 모화관에서 아뢴 한 가지 일은 신이 말하지도 않은 일을 적어 신의 죄안으로 삼은 것입니다. 만약 상께서 변석해 주시지 않았더라면 신은 죽어도 남는 죄가 있게 되었을 것입니다. 지금 비록 낯을 들고 행공하고는 있으나 실로 부끄럽기 그지 없는데, 어찌 감히 진달해 아뢰어 지휘하면서 옛 대신의 일을 행하겠습니까. 지금 송준길의 말을 들으니, 더욱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송준길이 아뢰기를,
"지난날의 일을 제기할 것은 없겠습니다만, 그 당시 신이 올린 상소는 대관이 죄를 받고 귀양간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말했던 것에 불과한 것이지, 굳이 허적에게 죄를 주려고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금 신이 서울에 들어온 뒤에 허적이 즉시 정고하였는데, 신은 그 뜻이 무엇인지를 모르겠으니, 신은 물러가야 합니다. 허적에게도 죄를 주고자 하지 않았는데, 하물며 다른 대신이겠습니까."
하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신이 준길의 말에 대해서 노여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의 죄는 허적의 죄와는 다릅니다. 허적은 봉사(奉使)를 잘못한 죄에 불과하기 때문에 상신 홍명하가 일찍이 허적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죄는 가벼우니 공죄이기 때문이고, 태화의 죄는 무거우니 사죄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는데, 이 말이 옳습니다."
하였다. 물러가려 할 때에 상이 승지에게 이르기를,
"송 판부사가 휴가를 받은 일은 이미 끝났을 듯하고 또 이미 병조리도 다 했을 터이니, 경연을 여는 이때에 속히 올라오지 않아서는 안 되겠다. 입시한 사관을 보내어 이런 뜻으로 전유하도록 하라."
하였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10월 22일 정해
송시열을 영경연으로, 박장원(朴長遠)을 우참찬으로, 윤집(尹鏶)을 대사헌으로, 이익(李翊)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이익은 김익렴(金益廉)과 서로 다툰 일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대부분 이익이 잘못하였다고 하였다. 그런데 한갓 당원이 많은 것 때문에 전조(銓曹)에 제수하기까지 하였으므로, 들은 자들이 놀랐다.
10월 23일 무자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여러 재신과 삼사의 관원들을 인견하였다. 이완(李浣)이 아뢰기를,
"사신이 돌아옴을 인하여 몽고의 사정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몽고가 비록 반란을 일으키더라도 청나라만 그 피해를 당할 것이라고 말합니다만, 신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몽고가 반란을 일으켰다면 그들이 반드시 청나라에서 우리의 포군(砲軍)을 끌어다가 그들을 제어할까 염려할 것인데, 만약에 먼저 한 군대로 우리를 공격하면 우리 병력으로 막을 수 있겠습니까? 양서(兩西) 지방은 병자년 이후로 군정을 포기하여 활 한 자루 화살 한 개도 수습하지 않았고, 또한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는 수령이 하나도 없습니다. 만약에 일이 생기게 되면 하나도 믿을 게 없습니다. 대신들도 입시하였으니 물어서 처리하소서."
하니, 상이 영상에게 묻자, 정태화가 대답하기를,
"이 말이 참으로 맞는 말입니다. 서로(西路)의 수령에 남행과 무관을 섞어 써서 한 사람도 쓸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이 뒤로는 해조에 신칙하여 수령을 잘 가려서 차임하도록 하고 또 병사가 내려갈 때에도 분부하여 잘 처리하게 하소서."
하였다. 이완이 아뢰기를,
"4, 5년을 넘지 않아서 반드시 사변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말이 매우 강개하였다. 어영 대장 유혁연도 이완의 말과 같았다. 인하여 우후를 차출할 것을 청하고 무신 수령을 차출할 때에는 이조로 하여금 대신들에게 의논하여 차출해 보내게 할 것을 청하였다. 집의 권격이 진계하기를,
"과거를 설행하여 사람을 뽑는 것은 일의 체모가 지극히 중대한 것입니다. 이미 개장(開場)을 한 뒤에 액수를 더 정하는 것은 법례에도 어긋날 뿐만 아니라 또한 뒤 폐단에도 크게 관계가 되니, 조정의 거조가 어찌 이와 같을 수가 있겠습니까. 사람들이 모두 부당하다고 하니, 무과 액수를 더 뽑으라는 명을 환수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여러 차례 아뢰자 따랐다. 또 병조 판서 홍중보가 법을 지키지 못하고 액수를 더 뽑을 것을 계청한 것을 논하여 홍중보를 중하게 추고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중외에 명하여 호적에 들지 않은 자들에게 자수하도록 하였다. 이 당시에 호적에 들지 않은 자가 많았는데, 죄를 두려워하여 감히 고하지를 못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자수한 자는 무죄로 논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기 때문에 이 명이 있었다.
고 장령 조속(趙涑)에게 이조 참판을 증직하였다. 집의 권격이 경연에서 조속의 기절과 청백을 대단히 칭찬하였고, 조복양이 조속이 녹훈을 거절한 한 절조를 진달하였으며, 정태화가 2품으로 증직하자고 청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조속의 지조는 비록 칭찬할 만하지만 2품을 증직하기까지 한 것은 또한 지나치지 않은가.
10월 24일 기축
좌의정 허적이 열세 번째 정사하니, 상이 승지를 보내어 도타이 전유하였다.
밤 3경에 유성이 나타났는데, 빛이 땅을 비추었다.
10월 25일 경인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심경》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고 찬선 송준길이 조식잠(調息箴)을 외고 아뢰기를,
"신이 이것을 외워서 들려드린 것은 조양(調養)하는 데 도움이 있기를 바란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오래도록 경연을 폐하고 있다가 잇따라 경연을 여시니, 뭇사람들이 누군들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비록 조종조에서 하루에 세 번씩 경연을 열던 것처럼은 할 수 없더라도 혹 매일 경연을 열거나 혹 격일로라도 경연을 열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유익함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대사간 남구만이 진계하기를,
"신이 삼가 강화 유수 김휘(金徽)의 상소를 보니, 계묘년 이후부터 백성들에게 곡식을 지급할 때는 소곡(小斛)으로써 하고 거둘 때는 대곡(大斛)으로써 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일은 비록 조정의 명령이더라도 수령이 된 자는 마땅히 고쳐 계품하는 일을 했어야 마땅한데, 본부의 전후 관원은 단지 군향이 모자랄까만 염려하고 아래를 덜어서 위를 더해주는 것이 그르다는 것을 모른 채 6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대로 따르고 고치지를 않았으니, 일의 체모에 있어서 아주 놀랄 만한 일입니다. 계묘년 이후의 강화 유수와 경력을 모두 중하게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강도(江都)에서 임인년 이전에 받아들인 곡물은 이미 소곡(小斛)을 썼습니다. 지금 만약 변통하지 않으면 적게 주고 많게 취하는 폐단이 필시 여전할 것입니다. 해조로 하여금 품지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이르기를,
"강도에서 곡자(斛子)를 개조한 것은 시임 관리가 한 일이 아니니, 경력 신숭구(申嵩耉)는 죄가 없다."
하자, 정태화가 아뢰기를,
"죄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마는 원정(原情)하기 전이라서 아래에서 감히 계품할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직무를 띤 채로 풀어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예조 판서 조복양이 아뢰기를,
"조정의 신하들 가운데에 경학(經學)이 이단상(李端相)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마땅히 불러다가 시강하는 자리에 두어야 합니다."
하고, 송준길이 아뢰기를,
"박세채(朴世采)는 경학을 깊이 공부한 사람입니다. 경연에 드나들게 하면 어찌 좋지 않겠습니까. 신이 경연에 드나드는 것은 또한 보통의 예가 아닌데, 신의 말을 인하여 세채를 입시하게 하면 신들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단상은 관직(館職)에 제수하고 박세채는 경연을 열 때에 입시하게 하라."
하였다. 정태화가 이단상의 중고(中考)를 탕척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송준길이 아뢰기를,
"신의 이웃에 고 참의 송국택(宋國澤)의 아내가 있는데, 나이가 여든에 가깝습니다. 내전(內殿)에게는 외할머니가 되는데, 굶주림과 추위를 면하지 못하고 있으니, 일의 체모로 보아서 이와 같아서는 안 될 듯합니다."
하고, 정태화가 아뢰기를,
"이는 다른 사람과는 다릅니다. 비록 월름(月廩)이 아니더라도 봄 가을로 옷과 음식물을 대주어야 마땅합니다. 나라의 체모로 헤아려 볼 때 결코 그만둘 수 없는 일입니다."
하고, 송준길이 아뢰기를,
"신의 생각으로는 감사에게 분부하여 늠료를 달마다 지급하게 하는 것도 참으로 해로울 것이 없다고 여겨집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본도 감사로 하여금 월름을 제급하게 하라."
하였다. 시독관 김만중(金萬重)이 나아가 아뢰기를,
"신이 들으니, 지난번에 송준길이 권시를 거두어 쓸 것을 청하였다고 합니다. 신은 권시의 사람됨을 모릅니다만, 임금을 사랑하고 나랏일을 근심하는 사람이라고 하였으니, 어찌 한결같이 폐기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신은 또한 염려되는 바가 있습니다. 《주역》에 이르기를 ‘서리를 밟으면 곧 단단한 얼음이 얼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서리를 밟는다고 해서 반드시 단단한 얼음이 갑자기 어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 말이 이와 같은 것은 그 기미를 삼가지 않아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신은 간사한 무리들이 혹 이것으로 인해 조정을 엿보아 헤아리고 훗날 나라를 위태롭게 할 무리들이 또한 조정을 희롱하는 일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전하처럼 밝고 훌륭하신 분을 두고 신이 오히려 이런 지나친 염려를 하고 있으니, 광망하다고 하겠습니다만, 송사(宋史)를 강하다가 원우(元祐) 소성(紹聖) 연간에 이르게 되면 몸과 마음이 송연해지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전하께서는 진퇴 소장의 기미에 대해서 더욱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상이 답하지 않았다.
삼가 살피건대, 권시는 기해년에 예를 논할 때에 삼년설을 주장하여 송시열의 무리들에게 죄를 얻어, 조정에서 폐기된 지가 거의 10년이 되었으니, 송준길이 경연에서 거두어 쓸 것을 청한 것은 또한 늦었다고 하겠다. 김만중은 이것을 인하여 다시 진용할까 염려하여, 심지어는 ‘소장(消長)의 기미를 살피지 않아서는 안된다.’고 하고, 또 ‘간사한 무리들이 이것으로 인해 조정을 엿보아 헤아리고, 나라를 위태롭게 할 무리들이 또한 조정을 시험하는 일이 필시 있게 될 것이다.’고 하고, 끝에서 다시 ‘원우 소성 연간을 볼 때 간담이 서늘해지지 않은 적이 없었다.’고 하였다. 그의 아첨하는 행태와 남을 시기하는 마음은 차마 바로 보지 못할 바가 있었는데, 송준길이 전석(前席)에 함께 입시하여 끝내 한 마디도 바로잡는 말을 하지 않았으니, 그의 거두어 서용하자는 계청이 애당초 공적인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명예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겠다. 《예기(禮記)》에서 이른바 ‘부끄러워하여 그 불선한 것을 숨긴들 무슨 이로움이 있겠는가.’라고 한 것이 참으로 맞는 말이다.
금산군(錦山君) 이성윤(李誠胤)을 증직하고, 충정(忠貞)이라는 시호를 주라고 명하였다. 성윤은 성종 대왕의 후손이다. 광해가 모후를 폐할 때에 성윤이 거적자리에 엎드려 울면서 사흘 동안 그치지 않고 적신 이이첨을 참수하기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귀양을 가서 죽었다. 이때에 조복양이 경연에서 아뢰어 증직하고 시호를 내리는 법전을 시행하여 절의를 포창할 것을 청하고, 정태화도 그 말을 하자 상이 따랐다.
오정일(吳挺一)을 판윤으로, 남구만(南九萬)을 승지로, 이민적(李敏迪)을 부제학으로, 남용익(南龍翼)을 대사간으로, 김징(金澄)을 집의로, 박증휘(朴增輝)를 사간으로, 신명규(申命圭)를 헌납으로, 이단상(李端相)을 교리로 삼았다.
10월 26일 신묘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심경》을 강하였다. 찬선 송준길이 중화(中和)의 뜻을 강설하기를,
"회로애락을 절도에 맞게 하는 것은 학자들의 공부에만 절실한 것이 아니라 임금이 더욱 유념해야 할 일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희로를 절도에 맞지 않게 하는 것은 그 피해가 그래도 적지만 임금이 희로를 중도에 맞지 않게 하면 말할 수 없는 피해가 생깁니다."
하였다. 이경억이 나아가 아뢰기를,
"내일 배표(拜表)를 하게 되어, 신이 다시 등대(登對)하지 않을 것인데, 전교하실 일이 있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저들의 사정을 혹 들을 기회가 있겠는가? 우리 나라의 일은 작은 일까지 저들이 모르는 것이 없는데, 저들의 일은 한 가지도 알 수가 없으니 개탄스럽다."
하니, 송준길이 아뢰기를,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봉명 사신이 성실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경억은 반드시 마음과 힘을 다하여 해나갈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사행 중에 사정을 탐지해서 알아낸 자에게 상을 주면 뒤에 가는 자들이 필시 계속 알아낼 것이다."
하고, 이어 전일 사행 때에 문서를 구한 사람에 대해서 비국으로 하여금 품지하여 처리하게 하였다.
10월 27일 임진
새벽부터 오시까지 안개가 짙게 끼었다.
동지 정사 이경억, 부사 정륜, 서장관 박세당이 연경(燕京)에 갔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산동(山東), 무원(撫院) 및 삼남(三南)의 세 성(省)에 지진이 일어난 것에 대한 문서는, 하나는 역관 조동립(趙東立)이 구한 것이고, 하나는 만상(灣上)의 군관(軍官) 유상기(劉尙基)가 구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해조로 하여금 품처하게 해서 모두 가자하였다. 이것은 얻기 어려운 문서가 아닌데 가자하기까지 하였으니, 지나친 것이 아니겠는가.
10월 28일 계사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용강(龍岡)의 진사 김계지(金啓址) 등이 상소하여, 고 찬성 문경공(文敬公) 김안국(金安國)과 고 참판 김정국(金正國)의 서원에 사액할 것을 청하였다. 예조에 계하하니, 예조가 방계하였는데, 상이 특명으로 오산(鰲山)이라고 사액하였다.
10월 29일 갑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심경》을 강하였다. 시강관 김만중이 나아가 아뢰기를,
"옛날에 맹자가 제 선왕(齊宣王)이 재화를 좋아하고 여자를 좋아하는 자신의 마음을 속이지 않은 것을 가지고, 그가 어진 정치를 행할 수 있다고 허여하였습니다. 신은 모르겠습니다만, 전하의 병통은 어디에 있습니까? 대신과 유신들이 모두 입시하였으니, 병통이 되는 곳을 들어서 논란을 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였다. 송시열이 아뢰기를,
"김만중의 말이 이러하니, 전하께서 아랫사람들을 관대하게 대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어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신은 전하의 병통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밖의 의논은 병통이 안일에 있다고 합니다. 참으로 그렇습니까?"
하고, 송준길이 아뢰기를,
"상께서 병을 살펴 약을 쓰시는 것이 옳습니다. 아래에서 감히 마음대로 헤아릴 바가 아닙니다."
하였다. 또 양생(養生)의 뜻을 강하였는데, 정태화가 아뢰기를,
"선조조(宣祖朝) 때에 신선(神仙)의 일에 대해 말을 하게 되었는데 이준민(李俊民)이 대답하기를 ‘신은 요즘 세상에서 신선을 보았습니다.’ 하였습니다. 이에 선조께서 이상히 여겨 물으니, 답하기를 ‘재상 원혼(元混)이 술과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이가 아흔에 가까운데도 기력이 소년과 같으니, 이는 신선이 된 것입니다.’ 하니, 선조께서 ‘이것은 바로 나를 경계시키는 것이다.’ 하셨습니다.
하니, 송준길이 아뢰기를,
"준민의 말도 좋습니다만 선조의 분부도 좋습니다. 정태화가 그 일을 아뢴 것은 ‘나를 경계시킨다.’는 뜻입니다. 전하께서는 이 말을 유념하소서."
하자, 상이 미소를 지었다. 강이 끝나고 예조 판서 조복양이 고묘(告廟)에 대한 일을 품지하니, 상이 대신 및 유신들에게 물었는데, 모두들 해조의 계사가 마땅하다고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신의 의논이 이와 같으니, 아뢴 대로 거행하라. 경과(慶科)는 정시(庭試)로 설행하라."
하였다. 송시열이 아뢰기를,
"지난번 무과 초시 때 인원을 더 취할 것을 명하였기 때문에 거자들이 기뻐하지 않는 자가 없었는데, 오래지 않아 환수하였으니, 법이 사람들에게 신의를 얻지 못하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송준길이 아뢰기를,
"병판이 인원을 더 취하기를 청한 것과 대관이 환수할 것을 청한 것은 모두 소견이 있습니다만, 많은 무사(武士)들이 실로 낙망을 많이 하였습니다. 이 뒤의 정시(庭試)에서는 많이 취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뒤 폐단에 관계되는 일이었기 때문에 대간의 아룀을 윤허하였다만, 위로하는 거조가 없어서는 안 되겠다."
하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애초에 더 뽑으라는 명이 없었더라면 참으로 좋았을 것인데, 명을 내렸다가 뒤에 대간의 아룀을 인하여 환수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없는 일을 만들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명하여 문·무과의 전시에 직부할 사람들을 모두 별시 전시에 응시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전시에 직부하는 사람들은 으레 식년시의 전시에 응시하는 법인데, 별시에 응시할 수 있도록 허락한 것은 특별한 은혜이다.】
【태백산사고본】 15책 15권 32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597면
【분류】인사-선발(選拔)
좌의정 허적이 상소하여 체직을 청하니, 상이 따뜻하게 비답을 내리고 사관을 보내어 유지를 전하게 하였다.
10월 30일 을미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심경》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고 집의 김징이 아뢰기를,
"홍석기(洪錫箕)와 김진표(金震標) 등은 문벌과 명망이 흡족하지 않은데도 해조가 구차스럽게 시관에 갖추어 의망했습니다. 물정이 모두 부당하게 여기니, 해당 예조 당상을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신이 금번 과거 감시관(監試官)으로 장옥(場屋)에 들어가서 거자들이 제술하는 것을 보건대, 선유(先儒)의 말을 공공연하게 위조하고, 심지어는 경전(經傳)의 말을 위조하기도 하고, 혹은 고금에 있지도 않았던 선유의 성명을 위조하기도 하니, 풍습이 매우 놀랍습니다. 이 뒤로 다시 이러한 폐단이 있어서 혹 발각이 되면 그 유생을 중하게 추고할 일을, 해조로 하여금 경외에 두루 유시하게 해서 금지시키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아뢰기를 마치고, 송시열을 성안에 들어와 있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들어와 있으라고 송시열에게 유시하였는데, 송시열은 여러 차례 사양했고, 김징은 여러 차례 그 말을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이 성밖에 있는 것은 병을 조리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억지로 들어오게 하지 않았었는데, 비록 성안에 있더라도 편하고 조용한 곳을 가려서 지내면 성밖에 있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경을 들어오게 하는 것은 아침 저녁으로 만나고자 해서이다."
하니, 송시열이 아뢰기를,
"지난날 상께서 신을 인접하셨을 때에는 신이 경황이 없어서 저의 생각을 남김없이 모두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또 신을 아침 저녁으로 만나고자 하신다는 분부를 받들고 보니 감동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신이 청컨대 말씀을 올리겠습니다. 공자가 무왕(武王)과 주공(周公)의 효를 칭찬한 것은 계지술사(繼志述事)011) 를 잘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선왕께서는 대성인(大聖人)으로서 때를 잘못 만나셨으나, 천하에 대의를 밝히고자 하신 것이 푸른 하늘의 밝은 해와 같았습니다. 고 정승 이경여(李敬輿)가 ‘국력이 미약한데도 상의 존심(存心)이 너무 지나치니, 일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도리어 화를 자초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선왕께서 ‘마음이 매우 통분스러운데,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멀어 탄식만 난다.’고 답하셨습니다. 대개 선왕의 뜻은 비록 화를 부르더라도 그만둘 수가 없다고 여기신 것입니다.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멀다고 하는 것은 나의 일은 큰데 나이가 이미 늙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선왕의 춘추가 바야흐로 강성하셨는데,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멀다는 탄식을 무엇 때문에 하셨겠습니까. 신은 매양 이 분부를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매우 비통스럽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반드시 선왕의 뜻을 잘 이어야 효도를 한다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전하께서는 나랏 일을 생각할 때 어떠한 때라고 여기십니까? 삼강(三綱)과 오상(五常)은 나라의 큰 근본인데 강상이 이미 무너졌고, 천하의 일이 또 걱정을 해야 할 일이 있는데, 우리 나라는 한 가지 일도 믿을 만한 것이 없이 그저 게으름만 피우니, 성상께서는 계획을 정한 바가 있습니까? 만약에 변란이라도 일어나면 장차 어떻게 대처하시겠습니까? 이것이 신이 이해가 안 가는 것입니다. 임금과 신하, 위 아래가 계획이 먼저 정해진 뒤에야 일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선조(先朝)의 뜻을 언어로 형용할 수는 없다. 내가 비록 보잘것이 없지만 선왕의 뜻을 잘 이으려는 생각이 없지 않은데 뿌리깊은 병을 얻은 뒤로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 다만 그때그때에 따라 처리하여 변란이 없게 할 따름이다."
하니, 송시열이 아뢰기를,
"백성들의 아픔을 돌보고 나라 안에 난리가 없도록 하는 것은 오직 성상께서 하시기에 달려 있습니다만, 천하의 일이란 나로 말미암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만약 아무 것도 모르고 날만 보내다가 나라가 망하게 된다면 계책이 장차 어디서 나오겠습니까? 모르겠습니다만 전하께서는 이것을 유념하고 계십니까?"
하였는데, 상이 또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송시열이 아뢰기를,
"지위가 낮은 자는 나라를 도모할 수가 없으니, 그 형세가 참으로 뜻대로 되지 않아서입니다. 그러나 임금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분부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말씀입니다. 임금이 되어서 만약 뜻대로 하지 못한다면 나라가 나라꼴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신이 생각이 있는데도 아뢰지 않으면 도리에 있어서 온당치 않을 것이고, 또 마음이 매우 답답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진달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때와 역량을 헤아리시어 이 시대에 쓸 만하지 못한 사람은 버리시고 이 시대에 쓸 만한 사람을 등용하시면 또한 한 시대의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답하지 않았다. 이규령과 김징이 또 송시열을 성안에 들어오게 해야만 한다는 말을 거듭하였다. 송시열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 사람은 큰 일은 소홀히 하면서 작은 일은 잘 살핍니다. 신을 쓸 수가 없다면 성상과 아주 가까운 곳에 있게 하더라도 참으로 유익함이 없을 것입니다. 바로 성상 앞에서 이와 같이 힘써 다툴 일은 아닙니다."
하였다. 시강관 김만중이 나아가 아뢰기를,
"조정의 계책은 매우 비밀스러운 것이라서 사람마다 감히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만, 백성을 기르고 군대를 훈련시키는 등의 몇 가지 건 이외에는 다른 일이 없으니 송시열이 아뢸 바도 필시 이 일을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반드시 성상의 뜻이 먼저 정해진 뒤에야 조치하시는 여러 일들이 차례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송시열의 거취는 성상의 뜻이 정해지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을 따름이니, 비록 으리으리한 큰 집에 거처하게 하더라도 끝내 반드시 머물지 않을 것입니다. 성안이냐 성밖이냐 하는 것은 논할 일이 아닙니다."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왕세자의 병환이 회복된 경사를 장차 종묘에 고하고 교서를 반포하고 진하를 할 예정입니다. 일관(日官)으로 하여금 날짜를 가려 정하게 하였더니, 10일이 길하다고 하였습니다. 이 날에 대신을 보내어 종묘에 고하고 교서를 반포하고 진하를 할 경우 그날 오시(午時)에 예를 행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해당 각사에 분부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과거를 설행하여 경사를 함께 하는 것을 또한 전례대로 거행해야 합니다. 예전에는 자전의 병환 및 상의 병환이 회복되었을 때에 경하하는 과거는 으레 별시를 보였습니다. 경인년에는 경하하는 과거로 비록 정시를 보인 적이 있으나, 그것은 일시적인 변통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지금의 이 경하하는 과거는 응당 별시를 거행해야 하겠습니다만, 성상께서 이미 조금 차등을 두고자 하시고 여러 사람들의 생각도 또한 그러하니, 정시를 시행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일관으로 하여금 날짜를 잡게 해서 거행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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