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15권, 현종 9년 1668년 11월

싸라리리 2025. 12. 12. 08:35
반응형

11월 1일 병신

예조가 아뢰기를,
"금번 하례를 올릴 때 왕세자는 전(箋)을 올리며 예를 행하는 일이 있는데, 백관이 왕세자에게 진하할 때에 2품 이상의 관원에게는 왕세자가 답배하는 예가 있습니다. 이것을 의주(儀註)에 실어야 하겠습니다만 왕세자의 병세가 회복된지 얼마 안 되었으므로 이 혹한에 밖에 나가 예를 행하는 것은 조섭하는 방법이 아닐 듯합니다."
하니, 상이 멈추라고 하였다.

 

이조 판서 이경억(李慶億)이 이미 변경을 나간 뒤 상소하여 체직을 청하니, 박장원(朴長遠)으로 대신하였다. 남용익(南龍翼)을 도승지로, 장선징(張善瀓)을 대사간으로, 송창(宋昌)·이휴징(李休徵)을 장령으로, 박세채(朴世采)를 진선으로 삼았다.

 

11월 2일 정유

정시(庭試)의 무과 초시를 열게 하여 2천 명을 뽑았다.

 

영중추부사 이경석(李景奭)이 상소하여 궤장 하사의 명을 사양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11월 3일 무술

좌상 허적이 열일곱 번째 사직서를 올렸으나, 승지를 보내 도탑게 하유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예전 일을 상고하니 계해년 9월 고 영의정 이원익에게 궤장을 하사할 때 교서를 반포하고 내외에 선온(宣醞)을 내린 뒤, 또 기로소로부터 기로연(耆老宴)을 열 것을 계청(啓請)하니, 같은 날 일등악(一等樂)을 하사하라고 특별히 명하였습니다. 지금 영부사 이경석에게 궤장을 하사하는 이때에 내외에 선온하는 등의 일을 각 해당 관사에 분부하고 교서 또한 예문관으로 하여금 지어내게 하심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11월 4일 기해

상이 양심합(養心閤)에 나아가 《심경(心經)》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고 송준길(宋浚吉)이 앞으로 나아가 아뢰기를,
"무술년012)  과 기해년013)  간에 선왕께서 송시열을 시켜 신에게 전교하기를 ‘내가 하고자 하는 이러이러한 것을 경만이 알고 있으라. 비록 송광식(宋光栻)014)  이라도 알게 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지금 입시한 제신에게도 이에 의거하여 하교하신다면 신의 소회를 우러러 아뢸 것입니다."
하니, 상이 승지에게 이르기를,
"이러한 뜻으로 제신에게 일러라."
하였다. 제신들이 일어섰다가 부복하였다. 준길이 이에 아뢰기를,
"송시열이 선대의 뜻을 이어 일을 계속할 것[繼志述事]을 진언한 것은 지난날 선왕께서 큰 뜻을 지니시어 경영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나라의 병력으로는 무슨 일을 기대하기 어렵지만, 저들에게 흔단이 이미 생겼다 하니 사전에 대비책을 강구해야 할 터인데 막연히 아무런 계획이 없으니 장차 어찌할 것입니까? 고월(古月)015)  이 어양(魚羊)016)  에게 망한다는 참설과, 동인(佟人)017)  의 피를 모조리 흘려보낸다는 이야기가 비록 엉뚱한 면이 있기는 하나, 오래 전부터 전래되었으니, 하늘이 만약 순리를 따르는 자를 돕는다면 일에는 기필할 수 없는 것도 있는 법입니다. 그러니 위대한 공렬(功烈)을 어찌 사양하고 자처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이보다 더 큰 ‘계지술사(繼志述事)’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 나라는 군사가 미약하여 먼저 일어나기는 실로 어렵지만 천하가 일시에 부르짖어 거사하는데도 호응조차 할 수 없단 말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일에 송(宋) 판부사(判府事)가 ‘계지술사’를 진언할 때에 내가 말을 다하고 싶지 않아 여의치 않다고 대답하였다. 사전의 대비책은 미리 강구해야 마땅하지만, 저들의 기미를 예측하기가 참으로 어렵다."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선왕께서는 나라를 시열에게 위임하다시피 하였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만약 시열을 임용한다면 일마다 선왕께서 바라시던 대로 모두 부응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시속의 사람들과 비교한다면 진실로 나을 것입니다. 지금 ‘계지술사’로 전하께 격려한 것은 이것을 가지고 거취를 정하려는 것입니다. 만약 신의 말이 맞다고 여기시면 이 말로 유시하시어 그로 하여금 보익하게 하여 ‘계술(繼述)’의 공업을 이루셔야 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금명간 반드시 돌아가고 말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잠깐 사이에 다할 수 있는 말이 아니므로, 당일에 판부사에게 말할 때도 이 정도만 얘기하고서 그쳤다."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일이 이미 급해져 타는 불을 끄고 빠진 사람을 건지듯이 해야 하니, 성상의 뜻을 먼저 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시열이 나오는 데에 의의가 없지 않으니, 지금 전하께서 위임하고자 하시면 비록 이전 직임으로 임용하셔도 굳이 사양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먼저 성상의 뜻을 정하시고 나서 헤아려 행하셔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여기에 이르니 지극한 성의를 볼 수 있다. 말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내 어찌 모르겠는가."
하였다. 물러가려 하면서 준길이 또 아뢰기를,
"전하의 병통은 지체하는 데에 있습니다. 옛말에 이르기를 ‘일은 서둘러서 망친다.’고 하기는 했습니다만, 이와 같은 일은 반드시 쫓아가고 달려가는 뜻이 있어야만 해낼 수 있습니다."
하였다.

 

김만균(金萬均)을 수찬으로 삼았다. 만균은 행동이 단정하지 않고 문장 실력도 짧았는데 단지 문벌이 좋아 논사(論思)의 직책에 출입하였으니, 벼슬자리를 욕되게 했다고 하겠다.

 

김만중(金萬重)을 교리로 삼았다.

 

11월 5일 경자

상이 양심합(養心閤)에 나아가 《심경》을 강하였다.

 

11월 6일 신축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금천현(衿川縣)에서 소가 몸뚱이 하나에 머리가 둘이고 꼬리가 둘인 새끼를 낳았다.

 

11월 7일 임인

형조 판서 정지화(鄭知和), 참의 박세성(朴世城)이 죄가 있어 파직되었다. 우승지 남구만(南九萬)이 아뢰기를,
"방금 형조가 죄인 양선립(梁善立)이 물고가 난 일을 가지고 초기(草記)를 올려 옥관을 추고하기를 청하자 윤허를 내리셨습니다. 그런데 신이 옥에 갇힌 자들을 살펴보니 선립이 당초 수감된 것은 본래 황득귀(黃得貴)가 은그릇을 훔쳐낸 것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선립이 스스로 고발하였으니 득귀가 체포되기 전에는 엄히 가두고 기다려야지, 앞질러 형추하는 일은 본디 없는 법입니다. 그런데 옥의 사리를 따지지 않고 문득 두 차례의 형신을 가하였으니 옥사를 처결하는 체모를 이미 잃었고, 또한 포도청에서 이미 득귀를 잡아 실상을 캐어냈고 보면 선립의 무죄는 불문가지이니, 형조가 품계하여 즉시 석방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금월 초하루에 형신을 제거하고 조율하라는 명이 이미 있었는데도, 득귀의 사건이 아직 결말이 나지 않았다고 핑계하고 곧바로 거행하지 않았습니다. 또 득귀가 어제 포도청에서 이미 자복하여 입계하였는데도 선립은 오히려 풀려나지 못하고 차가운 옥방에서 끝내 죽고 말았으니, 형옥을 신중히 하고 죄인을 불쌍히 여기는 도리에 있어 이처럼 태만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해당 당상관을 무겁게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형을 신중히 하는 뜻에 어긋날 뿐만이 아니라 직무에 태만한 그 태도가 참으로 매우 해괴하다. 해당 당상과 낭청을 모두 파직 추고하여, 다른 사람들을 경계시키라."
하였다.

 

판부사 송시열이 돌아가겠다고 간청하는 소장을 올리니, 상이 부드러운 비답을 내려 허락하지 않고 사관을 보내어, 면대하여 직접 하유하겠다는 뜻으로 하유하였다.

 

11월 8일 계묘

이시술(李時術)을 대사간으로, 이광적(李光迪)을 장령으로, 조성보(趙聖輔)를 정언으로, 이도빈(李道彬)을 통제사로, 구문치(具文治)를 평안 병사로 삼았다. 문치는 논핵을 받아 체직되었다.

 

11월 9일 갑진

전 정(正) 최문식(崔文湜)을 하옥하였다.

 

경기에서 전염병으로 죽은 소가 1천 6백여 두이고, 원양도(原襄道)에서도 한결같이 치성하였다.

 

11월 10일 을사

왕세자의 질환이 회복되었다고 하여 대신을 보내 종묘에 고한 다음 중외에 사면령을 반포하고, 백관에게 가자하고, 권정례(權停禮)로 진하례(陳賀禮)를 행하였다.

 

11월 11일 병오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대사헌 윤집(尹鏶) 등이 함사(緘辭)에서 대신(臺臣)을 헐뜯어 욕보인 전 학록(學錄) 김정태(金鼎台)의 죄를 논하여 파직하고 서용하지 말 것을 청하니, 상이 따르지 않고 추고하라고 하였다. 이에 앞서 정태가 멋대로 유생을 정거시킨 죄로 대간의 논의에서 거론되었다. 함사(緘辭)를 쓰게 되었을 때에는 발언한 대관을 헐뜯고 욕하였으므로 헌부에서 죄주기를 청하였는데 여러 차례 아뢰어서야 상이 따랐다. 후에 혐의로 인하여 남을 무함한 정태의 실상이 밝혀져 하옥하여 도배(徒配)시켰다. 또 아뢰기를,
"조정에서 사치의 폐단을 혁파하려고 탑전에서 품정한 다음 새로 금령을 반포하여 조정 선비들로 하여금 장복(章服) 이외에는 중국 물품으로 복식을 지어 입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제 진하할 적에 종반(宗班)과 의빈(儀賓)들 중에 문채있는 비단으로 장의(障衣)를 지어 입은 자가 매우 많았으며, 병조 참지 송시철(宋時喆)이 입은 털갖옷[毛裘] 또한 명주로 겉감을 지었습니다. 금령을 세운 즉시에 곧바로 준행치 않으니 매우 놀랍습니다. 모두 중하게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고 이르기를,
"장의 역시 장복 중의 하나이니 시철만 추고하라."
하였다. 이에 집의 김징(金澄), 장령 이휴징(李休徵)이 금령의 본 뜻을 자세히 알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인피하였고, 대사헌 윤집은 영을 반포하기 전에 앞질러 논죄하여 물의에 비난을 받았다고 인피하였다. 옥당이 윤집은 체직시키고 김징과 휴징은 출사하도록 처치하였다.

 

간원이 백성에게 걸태질하여 재물을 긁어모으는 평안 병사 구문치(具文治)가 서수(西帥)에 합당치 않은 실상을 논하고 파직시킬 것을 청하니, 상이 따르지 않다가 여러 차례 아뢴 뒤에야 따랐다.

 

송준길을 좌참찬으로, 이경휘(李慶徽)를 이조 참판으로 삼고, 서필원(徐必遠)을 자헌 대부에 승진시켜 형조 판서로 삼았다.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좌참찬 송준길이 체직을 간청하는 소장을 올리니 상이 부드럽게 답하고 허락지 않았다.

 

11월 15일 경술

지평 이하진(李夏鎭)이 인피하기를,
"김정태(金鼎台)가 함사(緘辭) 중에서 대관(臺官)을 침욕한 것은 사대부가 서로 존경해야 하는 도리를 해쳤으니, 본부에서 그를 논한 것은 옳았습니다. 다만 유생 조시주(曹始周)가 불효한 실상의 단서가 이미 드러났으면 이것이 얼마나 큰 죄입니까. 만약 그런 사실이 없다면 정태는 무고하여 속인 죄를 면하기 어려우니 단지 파직에 그칠 일이 아니고, 진실로 실상이 있다면 시주는 국법의 처벌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이 일은 중대하여 덮어 둘 수 없는 것이었는데도 계사 가운데에 조사하여 다스려야 된다는 뜻은 조금도 거론하지 않았으니 어째서입니까? 신의 의견이 그와 틀려서 구차하게 동의할 수 없습니다. 신의 직을 체차하소서."
하였다. 이에 집의 김징과 장령 이휴징이 일을 논함이 소략하고 잘못되었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는데, 김징이 아뢰기를,
"하진이 나온 후에 여러 동료들과 상의한다면 일에 또한 무슨 해가 된다고 앞질러 소요를 일으켰으니 그 의도를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앞질러 소요를 일으켰다는 이유로 하진을 체차시키고 김징·휴징을 출사시키도록 헌부가 처치하였다. 그 뒤 대간의 계사로 인하여 시주를 가두고 실상을 추궁해보니 정태가 사사로운 일로 인해 남을 무함한 죄가 크게 드러났다. 하진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그 일이 이런 줄은 실로 미처 헤아리지 못하고 시주를 치죄하자고 청하였다."
하였다.

 

윤문거(尹文擧)를 대사헌으로, 송창(宋昌)을 헌납으로, 최후상(崔後尙)·김세정(金世鼎)을 정언으로 삼았다.

 

11월 16일 신해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집의 김징이 사치의 폐단을 논하여, 비단으로 장의(障衣)를 만들어 입는 것을 지금부터 일체 금하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심경》을 강하였는데 좌참찬 송준길이 글의 뜻을 강론하였다. 송시열이 아뢰기를,
"신이 강관 이단하(李端夏)에게 들으니 명종 왕후께서는 반드시 예복 차림으로 상을 뵈었다고 합니다. 명종께서 예에 대하여 근엄하기가 이와 같았습니다."
하자, 단하가 아뢰기를,
"신의 외증조부 심의겸(沈義謙)은 바로 인순 왕후(仁順王后)018)  의 동기간입니다. 전에 ‘왕후께서 상에게 「나이가 들어 쇠한 뒤로는 예복이 불편하니 빈어(嬪御)들의 처소에 납시기를 원한다.」고 사뢰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왕후께서 반드시 예복 차림으로 상을 뵈었으니 명묘께서 예법에 대해 엄하시었음을 알 수 있고, 후비(后妃)가 투기하지 않기는 드문 법인데 왕후의 말씀이 이같으니 성덕의 아름다움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상께서 깊이깊이 생각해야 할 바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무왕(武王)은 성인이시니 사물을 즐기느라 마음을 빼앗기는 해가 필시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서려(西旅)가 큰 개[獒]를 바치자 소공(召公)이 글을 지어 경계하였습니다. 들으니 바깥 사람들이 모두 차비문(差備門)에서 쟁이[工匠]들을 많이 모으고 있다고들 하는데, 사실입니까? 임금이 마음을 정대하게 가지면 이와 같은 기호품을 어찌 마음에 두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지 않았다. 상이 시열에게 이르기를,
"전에 경연에서 경이 ‘계지술사’의 말을 하였다. 기왕 이것으로 나를 권면하였으니 지금 어찌 떠날 수 있는 의리가 있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전하의 도리로는 반드시 이와 같이 하셔야 하기에 말씀드렸을 뿐이지, 감히 보익의 의도를 가졌던 것은 아닙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은 선왕의 뜻을 가지고 과인에게 힘쓰게 하고, 내가 미처 모르는 것이 있으면 경은 반드시 나에게 말하라. 경을 머물게 하려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하니, 대답하기를,
"전하께서 과연 선왕의 뜻을 잇고자 하시니, 큰일을 하고자 하시는 의지를 뵈올 수 있습니다. 소문이 크게 날 일을 반드시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지마는 오늘날 국사가 날로 잘못되어감은 모두가 ‘사사로움[私]’이라는 한 글자에서 나온 것입니다. 옛날 선왕께서 하교하시기를 ‘조정 신하가 국사를 생각하지 않고 사사로운 뜻을 행하기를 힘쓰기 때문에 나 역시 사사로운 일을 한다.’고 하셨는데 공주의 저택을 짓는 일을 가리킨 말씀이었습니다. 또 ‘만약 나와 함께 나라를 다스릴 자가 있다면 공주 저택을 다시 헐어버리는 것이 무엇이 어렵겠는가.’ 하셨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성인의 학문을 도타이 힘쓰시어 청명함을 몸에 간직하시고 자기의 사사로움을 이겨 제거하시며 한결같이 ‘계술’로 마음을 지니신다면, 준길의 말에 따라 차비문의 잡공(雜工)들을 모조리 파하고 내수사를 개혁하여 유사에게 회부하며, 공주 저택을 철거하여 나라의 제도를 따르고 이어 뭇 관리들을 책려하셔야 합니다. 그렇게 하신다면 누가 깨끗한 일심으로 국사에 진력하지 않겠습니까. 신이 진달할 것은 단지 이 한가지 뿐이지마는 다른 일도 모두가 이로 말미암아 진척되는 것입니다. 진실로 이와 같이 한다면 재야에 있는 선비도 모두 조정으로 나오려고 할 것인데 하물며 신은 선조께 은혜를 받았으니 어찌 감히 마음과 힘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준길이 아뢰기를,
"선왕께서 큰일을 해볼 뜻을 가지셨는데 불행히 중도에서 돌아가시니 모두가 하늘의 운수입니다마는 천도는 10년이면 반드시 변하는 법입니다. 선왕이 승하하신 지가 지금 10년 가까이 되었는데 다시 시열과 함께 ‘계술’할 방법을 강론하시니, 신은 이에 실로 감격스럽습니다. 전하의 하교에서 ‘시열이 기왕 계술로써 나를 권면하였다면 곧바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시열의 도리로는 지금이야말로 힘을 기울여 충성을 다할 때이니, 실로 떠나갈 만한 의리가 없습니다. 우리 나라 병력을 가지고는 형세상 복수하여 부끄러움을 씻을 수는 없습니다만, 시열이 선왕과 강구한 것을 전하께서 필시 다 알지 못하신 바가 있을 것이니, 시열에게 위임하여 선왕의 정치를 점차 회복할 때가 지금입니다. 시열의 거취가 오늘에 달렸으니 전하께서는 속히 성지를 정하여 하유하소서."
하였다. 상이 시열에게 이르기를,
"오랫동안 도성 밖에 거처하고 있는 것은 사체로 헤아려 보건대 타당치 않다. 속히 들어오라."
하니, 대답하기를,
"성상의 하교가 이러하시나 신은 병세를 헤아려 들어와야 합니다. 무슨 급급해 할 일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민정중(閔鼎重)이 아뢰기를,
"천시와 인사를 족히 볼 수 있습니다. 만약 국사에 전심하지 않는다면 또한 해낼 수 있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시열의 말도 이러한 뜻입니다. 상께서 먼저 진어(進御)를 감하시고 잡역(雜役)을 파하신다면 여러 궁가 이하로 누군들 모두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면 아랫사람들이 솔선하여 행하기를 바라기는 어렵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람이 요순이 아닌 이상 어찌 매사에 모두 완벽할 수 있겠는가. 만약 와서 만날 때에 나의 모자라는 점을 메꾸어 준다면, 그것이 나의 소망이다."
하였다. 정중이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여기에 이르니 신민들의 복입니다. 이 마음을 가지고 구한다면 무슨 일인들 할 수 없겠습니까."
하였다. 이단하(李端夏)가 용안(龍安)에 있는 땅뙈기를 백성들이 떼어 받은 후에 궁가의 절수지(折受地)가 되었다는 것을 말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떼어주고나서 어찌 절수하는 이치가 있겠는가. 해조에 말하여서 조사하여 금단하게 하라."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절수의 폐단에 대해 신이 말한 것이 여러 차례였지만 윤허를 얻지 못하였었는데, 지금 용안(龍安) 건에 대해 단하의 말을 쾌히 윤허하시니, 이는 시열이 진언한 효험입니다."
하고, 시열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뿌리를 제거하시지 않는다면 용안 건에 대해서는 윤허하셨어도 다른 곳에 필시 이 폐단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이것은 시열의 뒷날의 책임입니다."
하였다. 김징이 나아가 아뢰기를,
"비단의 장의(障衣) 건은 매우 세세한 일인데도 아직 결단하지 않으시니, 신은 안타깝게 여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 의견으로는 장의(障衣)가 장복(章服)과 다르지 않고, 공복 안에 입는 것으로 또한 장복 중의 한 가지여서 금단함이 부당할 듯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윤허하지 않았다."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신은 그것들이 같은 줄을 모르겠습니다."
하고, 시열이 아뢰기를,
"사치를 없애는 데 뜻이 있다면 대포(大布)의 옷과 대백(大帛)의 관 차림으로 몸소 먼저 검약하시어 아랫사람들을 거느리셔야 합니다. 장의 한 건은 비록 작은 일이지만 금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금하라."
하였다. 집의 김징이 이어 저택이 제도를 초과하는 폐단에 대해 진달하기를,
"병조 판서 홍중보(洪重普)는 집터를 넓게 잡아 큰 집을 지었습니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흉노가 멸망하지 않았는데 어찌 집을 일삼으리오.’ 하였습니다. 지금 대신들이 이같은데 낮은 관리들을 어떻게 단속하겠습니까."
하고, 시열이 아뢰기를,
"재상들로 하여금 제도를 초과하지 않게 하려면 대군 부마로부터 시작하여야 하므로 중보의 집은 마땅히 먼저 허물어야 합니다."
하였다. 시열 등이 개연히 ‘계술’을 자기 임무로 삼고 연석에서 여러 차례 진달하였으나, 상의 뜻이 고식적이어서 분발 진작하려는 의지가 끝내 없었다.

 

별시 문과의 전시(殿試) 합격자를 발표하였는데 민홍도(閔弘道) 등 12인이 뽑혔다.

 

세자의 환후가 회복되었다고 부제조 장선징(張善瀓)과 의관들을 가자하였다.

 

11월 17일 임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윤집(尹鏶)을 대사간으로, 권격(權格)을 사간으로, 이규진(李奎鎭)을 지평으로, 조성보(趙聖輔)를 정언으로 삼았다.

 

11월 18일 계축

사간 권격, 정언 조성보 등이 효묘 승하 때의 성복하는 날에 전 정랑 도신여(都愼與)와 전 현감 손처신(孫處愼)과 전적 손단(孫湍) 등이 술과 고기를 마련하고서 모여 마신 죄를 논하고, 모두 사판에서 삭제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그런 후 실상에서 벗어났다고 인피하여 체직당하였다. 성보는 사람됨이 바르지 못해 항상 남을 해치려는 마음을 지녔다. 세 사람에 대해 발론하였으나 마침내 모함한 것으로 귀결되었다.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검토관 이단하가 아뢰기를,
"《대전(大典)》 양전(量田) 조에 ‘항상 경작하는 것을 정전(正田)이라 하고 경작하기도 하고 묵히기도 하는 것을 속전(續田)이라 한다. 정전으로서 토질이 척박하여 곡물이 잘 되지 않거나, 속전으로서 토질이 비옥하여 소출이 많은 경우는 다음 식년(式年)에 개정한다.’는 규정이 있는데, 대개 전답을 측량할 때 자세히 하지 못한 것이 있을까 염려하여 이 법을 설치한 것입니다. 근년에 경기도에서 양전할 때 산간 고을의 척박한 전답이 정전으로 들어간 경우가 많아 묵힌 해에도 조세를 내고 있으므로 백성들이 억울하다고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신은 일찍이 이러한 뜻으로 상소하여 연분 사목(年分事目) 가운데에다 개정할 것을 반포하자는 뜻을 청하여 재가를 얻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해조가 각읍으로 하여금 정전이 될 만한 속전을 책임지고 얻도록 하여 속전으로 바뀐 정전의 수를 충당하게 하였으므로, 일이 막혀 시행되지 않았습니다. 만약 농사꾼으로 하여금 사실대로 말하게 하고 이어서 부정을 적발하되, 여전히 거짓으로 꾸며대는 자가 있는 경우 무거운 법으로 다스린다면 실상을 파악하여 개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도에서 양전할 때도 똑같게 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호조 판서로 하여금 살펴서 개정토록 함이 옳을 것이다."
하였다.

 

사간 권격이 인피하기를,
"좌윤 권령(權坽)은 후사로 들인 아들 권두장(權斗章)의 나이가 겨우 서른 밖에 되지 않고 그 아내도 임신한 몸이었는데, 조카되는 권두추(權斗樞)의 아들을 취하여 두장의 후사로 삼았습니다. 권령이 자기 며느리가 해산하기를 기다려 보지 않고 두장의 후사를 들이는 데 급급했던 것은 두장이 낳은 아들로 종손을 삼지 않으려는 의도 때문이었습니다. 부자지간에 마음을 먹고 계획을 세우는 것이 이같으니, 어찌 사람의 도리로서 있을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또한 두추는 의리에 어긋나는 것을 돌아보지 않고 그 재물과 이익을 탐하여 억지로 자기 아들을 두장의 후사가 되게 하였으니 이도 사대부로서 마땅히 할 바가 아닙니다. 물의가 시끄러워 놀라지 않는 이가 없기 때문에 신이 오늘 권령과 두추를 사판에서 삭제하자는 일을 발언하고 논계하려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동료들이 신의 말을 그르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만, 적용한 법이 가볍다고 하기도 하고 신중히 해야 한다고 핑계대기도 하는 등 말이 부적합하고 시종 요모조모 빼면서 정에 이끌리는 기색이 현저하였기에 신은 실로 애석히 여겼습니다. 신은 이미 동료들에게 경시되었으니 체직시키소서."
하고, 물러나 기다렸다. 정언 조성보는 두추와 매우 친하였으므로 정에 이끌리어 이견을 내세웠다. 권격이 이에 먼저 인피하였다.

 

좌참찬 송준길이 태극음양도(太極陰陽圖) 한 부를 그려 바치고, 간행하여 반포하기를 청하였다. 또 차자를 올려 순음(純陰)에서 일양(一陽)이 생겨나는 곤괘(坤卦)와 복괘(復卦) 사이에 대왕소래(大往小來)의 뜻을 진달하고, 이어서 송시열의 복수 대의(復讐大義)의 의논을 가지고 상에게 ‘이때에 스스로 닦고 힘써 유사시의 계획을 준비하라.’고 권하였다. 상이 답하기를,
"차자의 말을 살펴보고 또 그림을 관찰하니 경계와 가르침이 절실하고 지극하다. 좌우에 놓고 관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판부사 송시열이 상소하여 다시 ‘계술’의 일을 진달하고 복수의 뜻을 은미하게 드러내었다. 성학(聖學)을 힘쓰는 것으로 근본을 삼아, 총명함을 열고 의지를 발양시키며 그 바탕을 두터이 하고 그 뿌리를 깊게 하며 극기 신독(克己愼獨)하여, 천리를 날로 밝히고 인욕을 날로 없애야만 천하의 일을 할 수 있다고 하였으며, 또 궁가들의 저택이 제도를 초과하는 일과 절수지(折受地)를 멋대로 빼앗는 폐단을 말하고 통렬히 개혁할 것을 청하였다. 또 아뢰기를,
"김익경(金益炅)의 통색(通塞)은 그의 형이 탄핵을 받기 이전에 있었는데 전하께서는 사사로움에 치우쳤다고 여기고서 깊이 죄를 주셨습니다. 이민서(李敏叙)가 뜻을 어긴 것은 남의 비밀을 들추어 곧은 체하는 데서 나온 것이 아닌데 멀리 낮은 고을에 임명한 채 오래도록 소환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모두 오늘 말해야 할 것들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근실하고 간절한 말이 지성에서 나오지 않음이 없다. 내 비록 불민하나 유념하여 성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좌의정 허적(許積)이 체직을 간청하는 소장을 올리니 상이 부드럽게 답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11월 21일 병진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심경》을 강하였다. 좌참찬 송준길이 글의 뜻을 논하여 아뢰었다.
"임금에게 있어 인(仁)의 쓰임새는 매우 큽니다. 예로부터 두 궁 사이에 말썽이 없는 경우가 드물었는데, 전하께서는 위로 두 자전을 받드신 지가 지금 10년이 되었는데도 사람들이 이의가 없으므로 신이 일찍이 감탄하였습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이것으로 만족하시지 말고 더욱 힘쓰소서."

 

집의 김징이 탑전에서 권격이 대간의 체모를 얻었다고 지지하며 출사하게 하자고 청하였고, 조성보(趙聖輔)가 퇴탁함이 구차하다고 비난하며 체직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시강관 김만중(金萬重)이 심익상(沈益相)이 적통을 빼앗았다고 함은 원통하다고 목소리를 드높여 아뢰기를,
"대신(臺臣)이 예를 아끼고 성상께서 들어 주심은 진실로 아름답습니다만, 적통을 빼앗았다고 한 데 있어서는 잘못되었습니다. 익상이 논핵을 당할 때 그의 원통함을 사뢰는 사람이 없었으니, 부마와 동기간이라는 게 혐의스러워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민정중과 김징도 그를 구원하였는데, 정중은 대각의 계사를 극력 비난 배척하였다. 익상은 고 정승 심지원(沈之源)의 아들이다. 아버지가 죽자 익상이 상례와 제사를 주관하여 후사를 잇고, 그의 양형(養兄)을 중자(衆子)와 같이 낮추며 ‘아버지의 뜻이다.’라고 하였는데 사람들이 모두 익상이 적통을 빼앗았다고 비난하였다. 그뒤 익상이 동궁의 요속에 제수되자 윤경교(尹敬敎)가 정언으로서 이 일을 들어 탄핵하여 도태시켰다. 이때에 이르러 정중 등이 그를 변명해 주기에 급급하여 심지어는 대각의 계사를 배척하였으니, 매우 잘못된 일이다.

 

민점(閔點)·정계주(鄭繼胄)를 승지로, 민정중(閔鼎重)을 겸 대사성으로, 이단상(李端相)을 응교로 삼았다.

 

11월 22일 정사

사간 권격(權格)이 권령(權坽) 등을 탄핵하려 하자 대사간 윤집(尹鏶)이 이론을 세워, 각기 인피하였다. 헌부가 윤집은 체직하고 권격은 출사하도록 처치하였다.

 

11월 23일 무오

백관에게 녹봉을 더해주되 명년 봄부터 시행하도록 하였다.

 

충청도에 양전(量田)을 명하되 네 큰 고을부터 시작하도록 명하였다. 【홍주·공주·청주·충주이다.】


【태백산사고본】 15책 15권 38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600면
【분류】농업-양전(量田)

 

또 황해도에 양전을 명하였다. 영상 정태화가 불가하다고 하였는데, 판부사 송시열, 호조 판서 민정중이 힘써 주장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명이 있었다. 이때 민유중(閔維重)이 충청 감사로 있으면서 다른 고을까지 차례대로 거행하기를 계청하였는데 조정에서 따랐다. 유중이 결수(結數)를 확보하려고만 힘써 대부분 실상대로 하지 않았으므로 호민(湖民)의 인심을 크게 잃었다. 이것은 이른바 ‘도신(盜臣)을 두는 것이 차라리 낫다.019)  ’는 격이다.

 

노산군(魯山君) 사우(祠宇)의 참봉에게 요미(料米)를 지급하고, 번을 나누어 수직하게 하도록 명하였다. 수묘군(守墓軍)에게도 급복(給復)하라고 명하였다. 원양 감사(原襄監司) 정익(鄭榏)이 계청한 것이다.

 

11월 24일 기미

좌윤 권령(權坽), 홍양 현감(洪陽縣監) 권두추(權斗樞)가 죄가 있어 사판에서 삭제하였다. 사간 권격(權格)이 출사한 후, 윤상(倫常)을 어지럽힌 권령과 재리를 탐한 두추의 죄를 논핵하고 사판에서 삭제할 것을 청했는데, 한 번 아뢰자 곧 따랐다.

 

죄인의 시집간 딸에게는 연좌하지 말 것을 명하고, 각 해당 사(司)·읍(邑)·도(道)에서 판에 새겨 벽에 걸고 정해진 법식으로서 준행하되 근실하게 봉행하지 않는 자는 죄를 주게끔 하였다. 승지 남구만이 아뢴 것으로 인하여 형조 판서 서필원이 율을 참고하여 품계한 것이다.

 

판부사 송시열이 귀환을 간청하는 소를 올렸다. 상이 부드럽게 비답하여 매우 간절하게 만류하였으며 사관을 보내 하유하였으나, 시열은 끝내 명을 받들지 않고 돌아갔다.
사신은 논한다. 송시열이 뜻을 세우고 학문에 힘쓸 것과 사심을 극복하고 집안을 다스릴 것과 폐정을 혁신하고 백성을 구제할 것과 계지술사(繼志述事)해야 한다는 뜻을 탑전에서 진달하였으나, 상이 깨달아 떨치고 일어날 의지가 없었고, 또 소장을 올려 앞의 말을 다시 폈으나 비답을 내리는 것으로만 책임을 메꾸었으니, 시열이 돌아가겠다고 한 것은 당연하다. 애석하게도 먼저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지 못하고 잠깐 나왔다가 바로 들어가면서 한바탕 소란만 불러 일으키고 떠나갔으니, 조용히 진퇴한 준길보다 오히려 못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5책 15권 38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600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역사-편사(編史)
사신은 논한다. 송시열이 뜻을 세우고 학문에 힘쓸 것과 사심을 극복하고 집안을 다스릴 것과 폐정을 혁신하고 백성을 구제할 것과 계지술사(繼志述事)해야 한다는 뜻을 탑전에서 진달하였으나, 상이 깨달아 떨치고 일어날 의지가 없었고, 또 소장을 올려 앞의 말을 다시 폈으나 비답을 내리는 것으로만 책임을 메꾸었으니, 시열이 돌아가겠다고 한 것은 당연하다. 애석하게도 먼저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지 못하고 잠깐 나왔다가 바로 들어가면서 한바탕 소란만 불러 일으키고 떠나갔으니, 조용히 진퇴한 준길보다 오히려 못하였다.

 

11월 25일 경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정만화(鄭萬和)를 대사간으로, 윤집(尹鏶)을 예조 참판으로, 민종도(閔宗道)를 정언으로 삼았다.

 

상이 일렀다.
"내일 아침 영상을 명초(命招)하여 복상(卜相)하도록 하라."

 

11월 26일 신유

송시열을 우의정으로, 김우형을 승지로, 이민서를 부교리로 삼았다. 민서는 좌상 허적을 논척하여 상의 뜻을 거슬렸기 때문에 힘써 구하여 나주 목사가 되었었는데, 시열 등이 소환할 것을 극력 청하였으므로 이때에 홍문관 직책에 제수된 것이다.

 

11월 27일 임술

영중추부사 이경석(李景奭)에게 궤장(机杖)·선교(宣敎)·선온(宣醞)·일등사악(一等賜樂)을 모두 예의(禮儀)와 같이 하사하였다. 경석은 인조조의 대신이었는데, 이때의 나이가 일흔 넷이었다. 비록 산반(散班)에 있었지만 문안하는 행사에 언제나 참석하였는데 근력이 미치지 못하여 걸음걸이가 심히 어려웠다. 식자들이 그의 성의는 아껴주었으나 물러나지 않는 것을 애석히 여겼다.

 

교리 이규령(李奎齡)이 이경석을 위하여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을 거행하도록 청하였다. 상이 옛 사례를 물으니, 규령이 이원익(李元翼)에게 궤장을 하사하고 김상헌(金尙憲)에게 견여(肩輿)를 하사한 일로써 대답하였다. 상이 또 대신에게 물으니, 송시열이 대답하기를,
"자기 나름대로 옛날 일이라고 단정짓는 것은 곤란하나, 성인도 때에 따라 변통하여 바꾸었습니다. 옥당의 관원이 선조(先祖)의 고사를 이미 아뢰었습니다만, 경석에 대한 전하의 관계가 원익에 대한 인조의 관계나 상헌에 대한 효종의 관계와 비교하여 어느 쪽이 더 낫겠습니까? 오직 성명께서 헤아려서 처리하시는데 달려 있을 뿐입니다."
하자, 상이 이에 궤장을 하사하도록 명하였다. 이·김 양공(兩公)은 모두 원로 숙덕(宿德)으로서 조야가 중히 여겼고 양 조정에서 예우함이 특별하여 이같이 남다른 은전이 있었다. 그러므로 시열은 경석이 이같은 예에 해당될 수 없다고 여겨 이와 같이 대답한 것이다. 경석이 대궐에 나아가 사은하는 전(箋)을 올리고, 또 그 일을 그림으로 그려 시열에게 글을 구하자, 시열이 송나라 손적(孫覿)이 오래 살며 강건했던 일을 인용하여 기롱하니, 식자들은 그르게 여겼다.
삼가 살피건대, 이경석이 여러 해 동안 정승의 자리에 있었으나 볼 만한 사업이 없는데다 일컬을 만한 건의도 없어 단지 대신의 숫자만 채웠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아무리 나이가 많더라도 조정에서 남다른 예로서 대우하고 궤장을 하사하는 것은 진실로 지나치다. 시열이 임금 앞에서 대답한 말을 보면 경석에 대해 부족하게 여기는 뜻이 있는 듯하다. 그의 뜻이 이와 같다면 상의 물음에 곧이곧대로 대답했어야 할 것인데 단지 이원익과 김상헌의 일로 말 뜻을 모호하게 하여 대답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곧은 도로써 임금을 섬기는 의리이겠는가. 더구나 경석은 세상에서 드문 은전을 입고 시열의 말 한 마디를 얻고자 하여 글을 구하였으니, 시열은 참으로 경석을 적합지 않다고 여겼다면 그 구함에 응하지 않아도 괜찮은데, 그 기록한 글 가운데다 심지어 손적의 일을 인용하면서 그 성명은 쓰지 않고, 단지 ‘오래살며 강건했다.[壽而康]’는 서너 자를 써서 기롱 폄하함으로써 경석이 깨닫지 못하게 하였으니, 또한 어찌 정인 길사(正人吉士)의 마음씀이겠는가.

 

별똥별이 나와 그 빛이 땅을 비추었다.

 

11월 28일 계해

우의정 송시열이 소를 올리고 돌아갔다. 새로 관직을 제수한 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상이 너그럽게 비답하고 정원에게 하교하였다.
"지금 우상의 상소를 보니 내 마음이 놀라워 마음을 가눌 수가 없다. 직접 대하여 하유하겠다는 뜻으로 사관을 보내 전달하라."

 

옥당과 정원이 청대 입시하여 모두 아뢰기를,
"상께서 송시열에 대해 대우가 비록 융숭하지만, 분발하여 진작하려는 의지가 끝내 없으셨기 때문에 시열이 떠난 것입니다. 급히 가까운 시종을 파견해 성상의 취지를 전유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자. 상이 또 도승지 남용익(南龍翼)을 시켜 하유케 하고 매우 간절히 만류하였다. 용익 등이 돌아와 아뢰기를,
"신들이 성상의 취지를 하유하였더니 시열이 말하기를 ‘신이 오늘 떠나는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분수에 합당한 자리가 아니고, 하나는 병으로 머무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좌참찬 송준길이 상소하여 세자의 서연을 속히 열어 신민(臣民)의 바람에 부응하도록 청하고, 또 예모가 지나치게 융숭하여 감히 받들지 못하겠으니 예관(禮官)더러 재정토록 명하라고 간청하였다. 이때 세자가 준길을 사부의 예로 대접하였기 때문에 준길이 사양한 것이다. 상이 답하였다.
"전례가 그러할 뿐 아니라 예로 헤아려 보아도 그만둘 수 없을 듯하다. 경은 마음을 편안히 가져라."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11월 29일 갑자

상이 도승지 남용익과 좌승지 김우형을 인견하였다. 모두가 송시열에게 하유하러 갔다 돌아온 자들이다. 상이 우형에게 묻기를,
"서계 이외에 별도로 말한 바가 없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돌아가기로 결정한 뜻을 신이 사사로이 물으니 시열이 지나친 걱정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걱정하는 것이 무슨 일이라더냐?"
하니, 대답하기를,
"시열이 말하기를 ‘전일 윤선도의 상소 중에 「천하에 위엄을 부린다.[威天下]」는 석 자가 있었는데 훗날의 화근이 될까 염려가 된다. 기해년020)   겨울에 저들이 나올 때 저들 족속 중의 한 사람이 중도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송모가 나라를 맡아 모의가 조밀하니 그대들은 아는가?」라고 밀고하였다. 그 때 고 상신 홍명하(洪命夏)가 원접사(遠接使)였는데, 가까스로 미봉하고 나에게 은밀히 말해주었다. 훗날 불량한 사람이 옛날에 말했던 것처럼 몰래 고한다면, 내 한 몸에 화를 전가시킬까 두렵다. 상의 돌보아 주심이 융숭하니 어찌 아주 떠나고자 하겠는가마는 사세가 이와 같으니 어쩔 수 없이 물러가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한숨을 쉬며 이 말을 하면서 신으로 하여금 조용히 기회를 봐서 자기의 심정을 상께 말씀드리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