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일 을축
도승지 남용익(南龍翼) 등이 구전으로 아뢰기를,
"신들이 성상의 뜻을 받들어 드러내지 못함으로써 송시열의 행보를 되돌리지 못하였으니 오직 부끄럽고 죄송스러울 따름입니다. 조정 신하 중에 호조 판서 민정중(閔鼎重)이 시열과 정의가 가장 두텁고, 또 함께 나랏일을 해보자고 말한 적도 있었으니, 의당 정중을 보내어 성상의 유지를 하유하여 행보를 만류하셔야 합니다."
하니, 상이 정중에게 이르기를,
"우상(右相)021) 이 끝내 들어 오지 않아 본디 육경(六卿)을 보내 하유하고자 하였는데, 승지의 말이 또 이와 같으므로 특별히 경을 부른 것이다."
하였다. 정중이 아뢰기를,
"온천에 거둥하셨을 때 정승의 체직을 허락하신 것은 기실 그를 올라 오게끔 하려는 것이었고, 지금 다시 정승에 제수하신 것은 성상께서 나랏일을 위임하고자 하신 의도입니다. 그런데 시열이 이처럼 단연코 돌아가는 것은 시열이 예전에 위태로운 형세를 겪어서 다시는 벼슬길에 들어서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니, 상이 김우형(金宇亨)의 말을 민정중에게 말하였다. 정중이 아뢰기를,
"선왕께서 시열을 초치한 의도에 대해 조정의 신하 중 누가 모르겠습니까. 애초에 위태로워 이룰 수 없는 일을 하고자 하였던 것이 아니고, 위아래가 힘을 합하여 나라에 이바지하려는 것에 불과하였을 뿐입니다. 전일 등대(登對)할 적에 선왕의 큰 뜻을 우러러 진달하면서 ‘범사에 차례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 것도 이 뜻입니다. 비록 여러 궁가의 저택만 가지고 말하더라도 검약함을 몸소 시작해야 하는데, 성상의 뜻을 어떻게 정하셨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일은 한꺼번에 할 수 없으니 차례대로 해야 된다. 그러기 때문에 서서히 상의하려 하였는데, 옥당이 나의 뜻을 잘 알지 못하고 의심하였을 뿐이다."
하고, 이어 정중에게 이르기를,
"시열이 이번에 떠나간 것은 종신토록 물러나고자 하는 의도이다. 경이 가서 나의 뜻을 하유하기를 ‘경이 나라를 떠난 지 10년 만에 다행히 다시 조정에 나왔는데 앉은 자리가 따뜻해지기도 전에 또 이처럼 결연히 돌아가니, 내 마음이 섭섭할 뿐만 아니라 국사에 있어서도 관계된 바가 매우 크다. 지금과 같은 때를 당하여 경 말고 그 누가 있는가? 끝내 아무렇지도 않게 보아서는 안 된다. 부디 멀어진 마음을 다시 돌리어 위아래가 힘을 합해 나랏일에 함께 이바지하는 것이 나의 소망이다.’라고 하라."
하였다. 정중이 명을 받들고 나갔다.
우의정 송시열이 해직을 간청하는 소를 진달하니, 상이 부드럽게 비답하고 또 승지를 보내 유시하였다.
옥당이 차자를 올려 우상을 머무르게 하도록 청하면서, 허례(虛禮)로는 만류하기에 부족하다고 하였다. 상이 답하기를,
"내 뜻이 헛된 형식만 일삼으려는 것이겠는가. 당시의 일을 자세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하였다. 이는 옥당의 차자 중에서 선왕 말년에 민유중(閔維重) 등을 파견하여 여러 도를 조사할 때 내린 봉서(封書)를 꺼내 볼 것을 청하였는데 한 본이 궁 안에 있었고 봉서 중에는 여러 궁가의 일을 조사하라는 하교가 있었기 때문에 상의 하교가 이와 같았다.
관학 유생이 상소하여 송시열을 머무르게 하기를 청하니, 상이 부드럽게 답하였다.
12월 2일 병인
호조 판서 민정중이 유시를 전하고 돌아왔다. 상이 인견하니 정중이 나아가 아뢰기를,
"송시열이 말하기를 ‘삼공의 직은 불안한 점이 두 가지이다. 첫째는 저들이 들으면 번거로운 점이 있고, 둘째는 감당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만약 한가한 부서에 배치하여 경연의 자리에 드나들게 한다면 생각한 것이 있을 때마다 반드시 진달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만약 직명을 띠게 된다면 끝내 들어오지 않겠다던가?"
하자,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12월 3일 정묘
상이 양심합(養心閤)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를 인견하였다. 좌부승지 오두인(吳斗寅)이 무과 전시(武科殿試) 때 관 화살[官箭]로 시험해 뽑도록 청하니, 상이 따랐다. 이에 앞서 무과 전시에서는 으레 관 화살로 시험해 뽑았는데 법령이 점차 해이해져 과거 응시자들이 사제 화살[私箭]을 사용해 이미 잘못된 예로 굳어졌다. 그러므로 두인이 이전의 규례를 따르도록 청한 것이다.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근래 기후가 이상하여 병에 걸린 자가 매우 많고 심지어는 문·무 과거 응시자도 사망한 자가 많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매우 불쌍한 일이다. 진휼청에 신칙하여 휼전을 거행하되 누락됨이 없게 하라."
하였다. 호조 판서 민정중이 아뢰기를,
"각읍에 회부(會付)된 원곡(元穀)에 쌀과 콩이 모두 없는 경우가 있으며 큰 길 주변에 있는 여러 고을 역시 부족한 데가 많으므로, 만약 급한 일이라도 있으면 지탱하기 어려운 형편인데다 군수(軍需)에 있어서는 용도를 잇댈 길이 더욱 없습니다. 각 고을로 하여금 마련하여 수를 채우고 저축이 있게 만들며, 원곡이 부족한 곳은 각종 포목으로 쌀을 바꾸어 수를 채워야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환곡을 출납한 후 부정을 모두 적발토록 하라."
하였다.
이때 해운 판관(海運判官) 조가석(趙嘉錫)이 탐욕스럽고 비루하다고 이름났는데 본 판관직을 맡게 되자 비방하는 의론이 더욱 심하였다. 이조 좌랑 이혜(李嵇)가 가석을 위해 정언(正言)에 의망하려 하자 참의 이익(李翊)이 그 의도를 탐문하여 집의 김징(金澄)에게 누설하였다. 김징이 동료들에게 알리지 않고 바로 탑전에서 아뢰기를,
"조가석이 전에 부여현(扶餘縣)을 맡았을 적에 재물을 탐하고 이끗을 좋아하여 의롭지 못한 짓을 많이 하였었는데, 본직을 맡고서는 이전 습관이 더욱 고질화 되었으니,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이혜가 가석을 정언에 의망하려 할 때 이익이 어렵게 여기자 이혜가 ‘좋은 수가 있다.’고 하면서 의망에 넣자고 굳이 청하였다고 합니다. 이혜가 가석의 탐학 방자함을 안 바에는 언책의 직이 어떠한 청선(淸選)인데 감히 사사로움을 꾀하고 벗을 비호하는 밑천으로 삼는단 말입니까. 식견이 전도되고 의사가 아름답지 못합니다. 이같은 낭관을 전형(銓衡)의 자리에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되니 파직하소서. 이조의 해당 당상 역시 구차히 따른 잘못을 면키 어려우니 무겁게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모두 따르며 이르기를,
"사사로움을 좇는 이혜의 죄가 어찌 가석보다 못하겠는가."
하였다. 김징은 자신이 적용하였던 법률이 적당치 않았다고 하여 인피하였는데, 다음날 옥당이 출사케 하도록 처치하였다. 지평 이규진(李奎鎭)은 김징이 간통을 돌리지 않았다고 인피하였고, 김징 역시 인피하여 체직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이 가석을 억울하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하여 폐기되었고 이혜 역시 다시는 전랑에 들어오지 못하였다.
고 급제(及第) 한오상(韓五相)에게 참하(參下) 문반(文班)의 직을 추증하였다. 오상은 문재가 있었다. 급제하고 전시(殿試)를 치르기 전에 상을 당해 상을 견디어내지 못하고 죽으니, 듣는 자들이 슬퍼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승지 남구만(南九萬)이 상소하여 문반직 추증을 의논하도록 청하니,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공을 기록한 만한 일은 없지만 은혜를 넓혀가는 요즈음에 문반직을 추증한다면 또한 조금 위로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자, 상이 명을 내린 것이다. 한오상의 자는 세익(世翊)이다. 아이 때부터 문재가 남보다 뛰어나 사람들이 기동(奇童)이라 칭하였다. 나이 열네다섯 살에 몸 매무새와 행동거지가 단아하고 청순했으며 논의가 점잖고 박절하지 않았다. 유가서를 두루 읽고 여러 역사서를 두루 열람하였다. 그 뜻이 단지 과거를 통과하는 데만 있지 않았으므로 그 또래에게 크게 추앙을 받았고 원대한 그릇으로 기대되었다. 나이 서른에 임진년022) 증광시 문과에 올라서 전시를 미처 치르지 못하고 모친상을 당했고, 복을 마치자마자 또 부친상을 당했다. 전후 상을 치르면서 한결같이 예제를 따르다 상복 중에 죽으니 나이가 서른 일곱이었다. 벼슬아치와 선비들 중 애석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12월 4일 무진
상이 일렀다.
"황량한 시골집에서는 노인의 병이 쉬 회복되지 않을 것이니 내 심히 염려된다. 어의(御醫) 권유(權愉)로 하여금 약물을 가지고 우상(右相)이 있는 곳으로 내려가 계속 머무르면서 구호하도록 하라."
좌의정 허적(許積)이 체직을 간청하는 소를 올리니 상이 부드럽게 답하여 허락치 않고 사관을 보내 하유하였다.
송시열을 판중추부사 겸 영경연 세자부(領經筵世子傅)로, 이상진(李尙眞)을 대사헌으로, 조수익(趙壽益)을 좌윤으로 삼았다. 수익은 어려서부터 당시의 명망을 입고 청현직을 두루 거쳤는데, 조경(趙絅)·권시(權諰) 등을 구원하고부터 세상의 버림을 받고는, 벼슬에 뜻을 끊어 비록 제수의 명이 있어도 끝내 나오지 않았다. 사람됨이 품행과 지조가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대부분 애석히 여겼다.
12월 5일 기사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심경》을 강하였다. 좌참찬 송준길이 글 뜻에 의거해 아뢰기를,
"전하께서 성학(聖學)을 돈독하게 힘쓰시어 세자의 모범이 되시면 이것이 자기의 최선을 다해 남에게 미치는 것입니다. 만약 이와 반대로 하면서 ‘내가 이렇게 했으니 너도 이렇게 하라.’고 말씀하신다면 이를 일러 함께 게으름을 피우는 것이라 합니다."
하니, 상이 미소를 지었다. 부수찬 이단하(李端夏)가 아뢰기를,
"나라의 큰일은 제사에 있는데 근래에 전혀 제관을 가려서 차임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조 낭관의 경우 그 사촌 이내까지는 제사에 차임하지 않고 선임 낭청 역시 제사에 차임하는 규례가 없습니다. 지금부터는 폐습을 혁파하소서."
하니, 상이 해조에 엄히 밝혀 분부하도록 명하였다.
내년 삼명일(三名日) 진상 방물(方物)은 양 대비전 외에는 모두 정지하고 탄일(誕日) 방물 역시 일체 정지하도록 명하였다.
담양(潭陽)의 유희춘(柳希春), 정주(定州)의 김상용(金尙容)·김상헌(金尙憲), 안성(安城)의 김장생(金長生), 광주(廣州)의 조익(趙翼) 등의 서원에 편액을 하사하였는데, 좌참찬 송준길의 청에 의한 것이었다. 이때 서원이 온 나라에 두루 퍼졌는데도 유풍이 진작되지 않고 오직 이기기만 힘써서 생선 눈알과 진주가 섞였다는 기롱이 있었는데 식자들이 병통으로 여겼다. 형조 판서 서필원(徐必遠)이 도성을 넘어간 사람을 잡아 놓고는 참수하여 조리돌리도록 청하였다. 상이 그 말을 좇아 형을 집행하려고 할 때, 영의정 정태화가 소식을 듣고는 크게 놀라 사람을 시켜 필원에게 말하기를,
"급히 계사를 올려 정지시키시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장차 차자로 논하겠소."
하였다. 필원이 마지못해 사형을 재심리하기를 기다려 시행하도록 계청하니, 상이 따랐다. 송준길이 경연에서 그 잘못을 꼬집어 말하기를,
"옛사람은 죽을 사람 가운데에서도 오히려 살릴 방도를 찾았는데, 지금 필원은 살릴 사람 중에서 죽이려고 하였으니 이 사람은 반드시 일을 많이 그르칠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살피소서."
하였다.
12월 7일 신미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심경》을 강하였다. 좌참찬 송준길이 글 뜻을 진강하면서 아뢰기를,
"희로애락이 중도에 맞지 않음은 진실로 학자의 병통입니다만, 임금이 중도를 잃게 되면 그 병통이 더욱 큰 것입니다. 천지를 자리잡게 하고 만물을 기름은 중화(中和)의 효험입니다. 삼대 이전에는 성현의 임금이 몸소 집안에서 행하여 ‘자리잡고 기르’는 효험이 있었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성현의 자질을 지니셨으니 자리잡고 키우는 공에 대해 어찌 바랄 수 없겠습니까. 옛사람의 말에 ‘사리에 어두운 임금이 한탄스러운 게 아니라 현명한 임금이 한탄스럽다.’ 하였는데 사리에 밝은 임금은 큰일을 해낼 수 있는 자질을 지녔는데도 하지 않으므로 한탄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병조 판서 홍중보(洪重普)가 정초청(精抄廳)을 설치하기를 청하니, 상이 편리할대로 규획하라고 명하였다. 정언 민종도(閔宗道)가 아뢰기를,
"대관(臺官)이 피혐을 하면 한꺼번에 처치하는 것이 관례입니다. 그런데 지금 헌부와 간원이 잇따라 인피하였는데도 김만중(金萬重)·민시중(閔蓍重) 등이 한 사람만 골라서 처치하고 그 나머지는 그냥두었다가 하루가 지난 다음에야 비로소 처치하였으니 이는 매우 어긋난 사례입니다. 처치한 옥당을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응교 남이성(南二星), 교리 이규령(李奎齡) 등이 아뢰기를,
"신들도 이 논의에 참여하였으니 혼자 편안히 있을 수는 없습니다."
하고, 같이 먼저 물러나갔다. 종도가 또 아뢰기를,
"사체에 손상이 있으니 추고하소서."
하자, 상이 따랐다. 지평 홍수하(洪受河)가 자기 관인(館人)을 위해 강제로 푸줏간을 더 만들도록 하였었는데 종도가 탄핵하여 파직시켰다.
12월 10일 갑술
상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처음으로 사형수를 재심리하였다. 의정부·육조·삼사·종부시·중추부·돈녕부·의빈부·충훈부의 각 1명과 여섯 승지가 입시하여 한 해의 사형수를 의결하였다. 모두 25명이었는데, 후일 다시 의논할 것을 명하였다. 김골대(金骨大) 등이 시체를 검사받기 위해 죽은 자의 머리를 잘라 온 죄에 대해서 영부사 이경석이 아뢰기를,
"이 일은 매우 흉악 참담하니, 이로써 일족 보인(保人) 제도의 폐단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어찌 그 본 마음이겠습니까. 일족이 침해를 받는 폐단을 면하기 위한 데 불과합니다. 해당 보인이 이미 죽었음을 밝히고 싶은데 멀리까지 운반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었으니, 무단히 시체를 자른 것에 비할 것은 아닙니다. 법 조문이 비록 엄하다 하더라도 이는 진실로 불쌍히 여기고 놀라 움찔해야 할 점입니다."
하니, 좌참찬 송준길이 또한 아뢰기를,
"이는 국가의 교화가 밝지 못한 소치이며, 관가에서 시체를 파오게 하였으니 이 사람에게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또 이 사람들은 일족의 폐해를 감당하지 못해 차마 하지 못할 일을 하였으니, 이는 조정에서 자책하고 용서해주어야 마땅할 일입니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의 의견도 이와 같았다. 세 번째 복주(覆奏)함에 이르러 사형을 감하고 그 수령을 파직 추고하도록 상이 명하였다.
12월 13일 정축
상이 선정전에 나아가 삼차 심리를 하였다. 입시한 제신들의 말이 처음의 심리 때와 같아 사형으로 확정된 자가 15명이었다. 남기[木只]의 처 일향(一香)은 그 지아비가 놋쇠[㗯金]에게 피살되려 할 적에 몸으로 덮어 보호하다 칼을 맞아 죽었고 남기는 죽음을 면하였다. 상이 본도에 명하여 다시 조사하여 정려(旌閭)를 세워서 표창하도록 하였다. 이때 일본에서 차왜(差倭)를 보내 왜관을 옮기기를 청하였다. 조정의 의논은 접위관(接慰官)을 파견하고 그 청을 들어주지 않으려 하였다. 좌참찬 송준길이 아뢰기를,
"어려움을 만나 살아남기를 도모하는 것은 마치 추위에는 갖옷을 입고 더위에는 갈옷을 입는 것과 같습니다. 추위와 더위는 천시(天時)이고, 갖옷과 갈옷은 인사(人事)입니다. 군신 상하가 마땅히 마음과 힘을 합하여 인사에 뜻을 다 바치는 것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호조 판서 민정중이 장단현(長湍縣)의 양전(量田)을 다시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부제학 이민적(李敏迪)이 양사가 박형(朴泂)의 죄 등급을 감한 것에 대해 논하지 않았다고 하여 모두 체차할 것을 명하도록 청하니, 상이 따랐다. 박형이 장오죄를 여러 해 범하고 갇히어 사형을 받았다가 사형을 면하고 정배되었었다. 이때에 이르러 그 어미가 소를 올려 억울함을 하소연하자 상이 등급을 감하라고 특별히 명하였는데, 양사가 미처 논집하지 못하였다. 민적이 탑전에 나아가 아뢰기를,
"옛부터 장법(贓法)을 중시한 것은 민생 때문입니다. 박형의 늙은 어미가 진정하는 말을 올리자 은혜를 넓게 펴 등급을 감해주는 하교가 있었습니다만, 장법이 점차 무너져가니 법을 집행하는 관리는 마땅히 쟁집해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양사는 전혀 말 한 마디도 없었으니 무소(武所)에 나아가 참석한 인원 이외에는 모두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한참만에 따랐다. 장차 파하여 나가려 할 때 상이 승지들에게 이르기를,
"양사를 체차하는 일을 비록 이미 윤허하였지만, 이 일이 과연 체례에 합당한가? 상·하번(上下番)이 함께 들어 왔는데 민적 혼자만 앞으로 나와, 애초에는 생각한 바를 아뢰겠다고 말머리를 꺼내면서 등급을 낮추어 주라고 나에게 독려하려는 듯하다가, 어세가 대간에게로 미끄러지더니 끝내는 많은 관리를 모두 체직하라고 말을 맺었다. 사체가 매우 마땅치 않다. 옥당의 경우는 양사와 달라서 혼자 아뢰는 것으로 많은 관리를 모두 체직시킬 수는 없다. 내가 한참 동안 대답하지 않았던 것은 대개 이 때문이었다. 다시 생각하니, 한 때의 전도된 논의로 양사의 많은 관리를 모두 체직하게 되면, 대각을 대우하는 도리에 흠이 될 뿐 아니라 뒤 폐단과도 관련된다. 체차하라는 전지는 받들지 말라."
하였다. 도승지 남용익(南龍翼)이 아뢰기를,
"민적이 애초에 생각한 것을 진달하다가 끝내 체차를 청하였고, 또 하번(下番)과 함께 같이 청하지도 않았으니, 과연 체례에 어긋난 것입니다. 그러니 성상의 하교가 참으로 옳습니다만, 민적이 물러가기 전에 상께서 체례를 가지고 하유하여 내려진 명을 환수하셨다면 괜찮으나, 이미 물러간 후에 즉시 회수하도록 하시는 것은 불가할 듯합니다."
하고, 좌승지 김우형(金宇亨)이 아뢰기를,
"민적은 체례에 어긋난 이유로 추고하되, 계사대로 하라 하신 비답은 환수함이 부당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이 어찌 추고할 일이겠는가. 일은 비록 미세하지만 생각한 것을 말하면서 양사 체차를 청하는 것은 뒤 폐단에 관련된다. 비록 체차하라는 전지를 봉입(捧入)하기는 해도 이후로는 옥당이 절대로 이를 관례로 삼지 않아야 옳을 것이다."
하였다.
이때 박형을 논핵하고자 하는 대관(臺官)들 중에는 혹 계사의 초고를 갖추어 놓은 자도 있었는데 민적은 동료들과 의논하지도 않고 갑자기 경연에서 얘기를 꺼냈으므로, 말하는 자들은 그의 경솔함을 탓하였다.
12월 14일 무인
송준길을 세자 찬선(贊善)으로 삼았다. 준길이 앞서 시강원 찬선으로 임무를 수행하였었다. 준길이 아뢰기를,
"찬선의 직은 궁관(宮官)인데 자급(資級)이 빈객(賓客)보다 위에 있으니 사체로 보아 거북스럽습니다. 찬선을 체차하고 별도로 시강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세자 찬선으로 명하도록 비답을 내렸다.
판중추부사 송시열이 소를 올려 복수의 뜻을 은미하게 드러냈다. 그 대략에,
"선조 대왕께서 일찍이 ‘조정에서 만약 사사로움만 없앤다면 풍신수길의 머리를 휘하에 가져올 수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만약 성조(聖祖)께서 자기 몸 하나의 사사로움을 없애지 않았다면 필시 이 말을 널리 고하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궁궐에서 마음을 바르게 하고 뜻을 정성스럽게한 후 반드시 후덕하고 성의있으며 강직하고 공정한 현자를 구하여 뭇 자리에 배치해야, 위로는 임금의 덕을 보필하고 아래로는 나라의 근본을 굳건히 할 수 있는 것이니, 이는 바꿀 수 없는 천리입니다. 주자가 중흥의 사업을 당시 임금에게 바라면서도 그 말은 역시 이러한 데 불과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나를 가르치는 말이 깊고도 절실하다. 내 비록 불민하나 마음에 간직하여 가슴에 새겨두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경은 마음을 편안히 하여 잘 조섭하고 되도록 빨리 들어와 나의 미치지 못하는 점을 도우며 함께 당면한 어려움을 헤쳐나가, 지극한 바람에 부응하라."
하고, 사관을 보내 유시를 전달하였다.
12월 16일 경진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심경》을 강하였다. 좌참찬 송준길이 글 뜻을 강론하며 지락잠(至樂箴)을 외어 진달하였다. 또 아뢰기를,
"신이 정경세(鄭經世)에게 들었습니다. 인조 초년에 경세가 옥당에 있을 적에 상께서 강하시는 책 속에 읽는 회수를 세는 서산(書算)이 끼어 있었는데 그 종이에 보푸라기가 일었더라고 합니다. 임금이 이같이 독서하니 큰 경사라고 하며 매양 칭송해 마지않았습니다. 요즈음 밖의 사람들이 상께서 독서를 하신다고 한다는데 사실입니까? 어제는 영부사 이경석이 신에게 이르기를 ‘사형수 재심리 때 입시하니, 살리기 좋아하는 덕이 가득함을 보았다. 경연(經筵)과 서연(書筵)을 개강함도 근일에는 없었던 일이다.’ 하고는 비감에 젖어 눈물을 흘리며 갔습니다. 이에 인심이 감동함을 볼 수 있습니다."
하였다.
윤집(尹鏶)을 대사간으로, 이유상(李有相)을 집의로, 박세견(朴世堅)을 사간으로, 신정(申晸)을 정언으로 삼았다.
12월 17일 신사
무과시(武科試) 일소(一所)에 불이 나 문서와 낭청의 방 열두 칸을 태워 훼손하였다. 직숙(直宿) 관리와 군인들이 모두 죄를 받았다. 이때 무과가 남잡(濫雜)하여 낙방한 자가 변을 일으킨 것이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심경》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고 이어 명나라 말기의 일이 언급되어 송준길이 아뢰었다.
"사리에 어두운 임금은 원망하지 않는 법이니, 천계(天啓)023) 황제는 원망할 수 없는 임금에 해당되지만, 만력(萬曆)024) 황제는 초년에 영매하고 호걸스럽던 임금으로 사십 년 동안이나 왕위에 있었으나 신료들을 인접한 적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경계로 삼아야 할 일입니다."
판부사 송시열이 들어온 후 대죄하는 소를 올리니, 상이 부드럽게 답하고 사관을 보내 유시를 전달하였다.
12월 19일 계미
상이 건강이 좋지 않아서 양심합에 나아가 의관으로 하여금 들어와 진찰케 하니, 도제조 이하가 입시하였다. 상이 송시열에게 이르기를,
"갑자기 조정을 떠나가서 내 매우 섭섭하였는데, 지금 내 뜻을 체득하여 조리하고 들어오니 위안과 기쁨이 배나 된다."
하니, 대답하기를,
"신이 지레 나간 것에 죄가 있음을 물론 알고 있습니다만, 신하로서 감당치 못할 직임을 담당하여 오직 녹과 자리만 보전할 줄 안다면 이보다 더 큰 죄는 없는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제왕에서부터 사대부까지 닦을 것은 《대학(大學)》에 불과할 뿐입니다. 대학의 도는 세 강령과 여덟 조목이 있습니다. 상께서 독서하여 고금의 득실을 알아 총명함을 깨우치시는 데 이것이 제왕으로서 공부할 첫번째 것이 됩니다. 신이 배운 것은 이 이외에 다른 것이 없습니다. 전하께서 힘써 행하시면 이는 신의 말이 쓰여지는 것이므로 신을 만류함이 당연하지만, 오활하여 써주기가 어렵다고 여기신다면 신을 만류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오직 헤아려 처리하시는 데에 달렸을 뿐입니다. 그리고 신이 사직하지 않고 물러갔다고 바깥의 의론이 대부분 그르게 여기고 있습니다. 신 역시 죄를 알고 있지만, 옛날 공자의 선조는 지위가 높아짐을 두려워하여 담장을 뛰어넘어 달아났고025) 송나라의 유정(留正)은 대궐에서 곧장 나라를 떠나자 ‘유정이 도망갔다.’고 역사에 썼습니다.026) 우리 나라에서도 이황(李滉)이 산릉(山陵)의 역사가 채 끝나지 않았을 때 서둘러 도성문을 나가자 이준경(李浚慶)이 ‘산새[山禽]’라고 지척(指斥)하였습니다.027) 인조조의 정경세(鄭經世)는 이귀(李貴)에게 욕을 먹고는 조정에 하직 인사도 하지 않고 떠났는데, 그후 인조가 ‘군부(君父)에게 사직하지 않고 떠나는 것이 예인가?’라고 물으니, ‘자기 뜻이 아닌데도 떠나지 않는 것 역시 예가 아닙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을 내가 모두 이해한다. 어찌 오활하다고 여기겠는가."
하니, 시열이 아뢰기를,
"지금 입시하여 진달할 것이 어찌 없겠습니까마는 상의 안색을 우러러 볼 때 편치 못하시니, 잠시 물러갔다가 다시 불러들이실 때를 기다리겠습니다."
하였다. 이어서 아뢰기를,
"옛사람이 군신은 부자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하고, 울음을 삼키면서 아뢰기를,
"임금의 병환에 대해 걱정하는 마음이 누군들 없겠습니까마는 전하같이 장성한 연세에 어찌 이리도 질병이 많으시단 말입니까. 조종의 중함을 생각지 않으시고, 만금 같은 몸을 가볍게 하시는 것은 아닙니까?"
하였다.
12월 21일 을유
판돈녕부사 윤이지(尹履之)가 죽었는데, 나이 아흔이었다. 고 정승 윤두수(尹斗壽)의 손자이고 윤방(尹昉)의 아들이다. 이름난 집안에서 나와 일찍 벼슬길에 올라 종1품의 지위까지 이르렀으나 사람들이 심히 천대하였으니, 그 사람됨을 알 만하다.
예조가 아뢰기를,
"판돈녕 부사 윤이지가 세상을 떠났으니, 오늘과 내일은 조시(朝市)를 중지하여야 하므로 내일 정시(庭試)도 물려야 하는데, 이 달 내에는 연이어 일이 있고 단지 26일 만이 길하다 합니다. 지방의 과거 응시자가 모두 모여 있는 이때에 며칠을 지연시키기도 매우 어려우니 변통하는 방법이 있어야 할 듯합니다. 대신들에게 의논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영부사 이경석이 의논드리기를,
"조시를 정지하는 날에 궁궐 뜨락에서 시험을 보인다는 것은 온당치 못한 일입니다만 원근의 선비들이 이미 모두 나왔고 이는 친히 임하여 조회를 받는 것과는 다르며, 또 듣건대 명나라에서는 과거일을 정한 후에는 일이 있다고 하여 물리지 않는다 하니, 그대로 설행하게 하여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하고, 영의정 정태화가 의논드리기를,
"조시를 정지하는 날, 만약 궁궐 뜨락에서 시험을 보이는 것이 불가하다면 과거 응시자를 모두 모아 지연시킨다는 것 역시 구차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저의 생각으로는 단정할 수 없으니 여러 대신들에게 널리 문의하여 처리하시는 데 달렸습니다."
하고, 판부사 송시열이 의논드리기를,
"명나라의 제도가 과연 영부사가 인용한 것과 같다면, 이번의 일은 처리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또 때에 맞춰 적절하게 처리하는 것 역시 변화에 대처하는 일반적인 의리입니다."
하니, 상이 수의(收議)에 따라 시행하도록 명하였다.
12월 22일 병술
문·무과를 설행하여 정수준(鄭壽俊) 등 9인을 뽑아 과거 급제의 자격을 하사하였다.
정언 김세정(金世鼎)이 박형에게 죄 등급을 낮추어 준 명을 환수하기를 청하였는데, 여러 차례 아뢰자 따랐다. 새로 급제한 현령 이당규(李堂揆) 등을 논하여 그의 직을 파하도록 청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이때 새로 급제한 민암(閔黯)은 선현을 모욕하였다는 죄로 유벌(儒罰)을 무겁게 받은 적이 있었는데, 민암이 계속하여 자기 변명을 하였기 때문에 벌이 풀리어 과거에 응시하였다. 급제하여 문묘에 참배하는 날에 성균관에 기숙하는 한두 유생이 의론을 제기해 거명하여 배척하고 거기에 참석하지 못하게 하였다. 장원(壯元) 민홍도(閔弘道)는 민암의 형의 아들인데, 인혐하여 방하(榜下)에 참여하지 않았고, 서문상(徐文尙) 등만 문묘에 참배하였으며, 당규 등은 민암을 위해 예를 행하지 않고 몰려가 상소를 진달하여 그 상황을 고하였다. 이에 공의가 모두들 유생들이 망령되이 그른 짓을 한 것과, 당규 등이 파당에 치우쳐 예를 폐하고 소장을 올려 고소한 것에 대해 탓하였다. 간원이 그 죄를 논핵하였는데, 상이 당규 등만을 죄주는 것을 그르다 여겨 따르지 않고 이르기를,
"새 급제자에게만 그 벌을 시행하자는 것을 나는 실로 이해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여러 차례 아뢰었으나 끝내 따르지 않았다. 또 제도 감사로 하여금 열읍에 분부하여, 역에 불응하는 완악한 토호 부민(土豪富民) 외에, 감당해 낼 수 없는 빈민과, 도망하여 절호(絶戶)된 집 대신으로 침징(侵徵)당하는 인족(隣族)을 일일이 조사해 내고, 각종 적곡(糴穀) 및 제반 신역(身役)을 다 납부하지 못한 것은 모두 똑같이 봉입하지 말도록 하였다가 풍년을 기다려 추후 징수하게 하기를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진실로 합당한 일이지만, 만약 잘 구별하지 않으면 필시 허실이 서로 뒤섞이는 폐단이 있게 될 것이다. 묘당으로 하여금 상의하여 분부토록 하라."
하였다. 또 나주 목사 박지(朴贄)를 탄핵하기를,
"일찍이 공산(公山) 고을을 맡았을 적에 세미를 창고에 들일 때 근실하지 못했다는 비난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말이 지금까지도 그치지 않고 있으니 파직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세정은 결국 실상과 틀리게 논하였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권시(權諰)를 좌윤으로, 홍처량(洪處亮)을 개성 유수로, 홍만형(洪萬衡)을 이조 좌랑으로, 홍주국(洪柱國)을 교리로, 송규렴(宋奎濂)을 정언으로, 최후상(崔後尙)을 지평으로 삼았다. 권시는 윤선도를 두둔하였다고 배척되어 쓰이지 못하다가 이때에 이르러 송준길이 거두어 쓰기를 청하여 이 직에 제수되었는데,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았다. 처량은 여러 차례 청요(淸要)의 직을 사양하다 이 직에 제수되자 숙배하였다.
12월 25일 기축
왕대비 탄일을 진하하고 표리(表裏)를 올렸는데, 권정례(權停禮)로 행하였다.
판부사 송시열이 상차하였다. 그 대략에,
"효자가 어버이를 기쁘게 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지만, 도에 입각하여 부모에게 말씀드리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왕대비께서는 성덕이 순수하시어 오로지 예를 따라 하셨으니, 사방의 백성들이 누가 교화를 따르지 않겠습니까. 외로이 근심 고생을 하신 뒤로는 반드시 미망인으로 자처하시어 즐기고 기뻐하신 적이 없으셨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전하께서 섬기시는 도리 역시 뜻을 받들어야 하는 것이지 반드시 이목을 즐겁게 해드리려고 일삼을 필요가 없습니다. 위로는 오직 자식이 병날까봐 걱정하는 심려를 끼쳐드리지 않으면서, 덕을 닦고 정사에 힘쓰며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보살펴서 선왕의 업을 계술(繼述)함이 바로 자전의 뜻을 크게 위로하는 것입니다. 전하의 효도 역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삼가 듣건대 전하께서 때로 외간의 기생과 음악을 앞에 불러들여 즐기시면서 밤을 새우신다니, 이는 말단의 행동이며 용잡한 뜻일 뿐만 아니라, 임사(任姒)의 덕과 무주(武周)의 효028) 에 도리어 해가 됩니다. 전하께서 오늘날 다시 엄숙하고 깨끗한 곳에다 잡된 기예를 벌려 놓으신다면 《주역》의 풍뇌익(風雷益) 괘에 이른바 천선 개과하는 도리029) 가 전혀 아닙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나를 가르치는 뜻이 여기에 이르니, 내 마음에 비감이 들어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마음에 두고 성찰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12월 26일 경인
김만중(金萬重)을 헌납으로, 소두산(蘇斗山)을 장령으로, 윤진(尹搢)을 정언으로, 민시중(閔蓍重)을 교리로, 이선(李選)을 수찬으로 삼았다. 두산이 이때 장성(長城) 임소에 있었다. 대신들이 수령을 보내고 맞이하는 데 민폐가 있다고 하여 체차시키고 예전대로 맡도록 아뢰었다. 두산의 사람됨은 단정치 못하고 분수에 넘친 짓이 많았다.
12월 27일 신묘
김만균(金萬均)을 부교리로, 김징(金澄)을 집의로, 정재숭(鄭載嵩)을 수찬으로 삼았다.
진선 박세채(朴世采)가 사직하는 소를 올려 아뢰기를,
"신의 미천한 계책으로는, 마땅히 은인 자중하여 본심을 잃지 않게 되면 또한 나라의 체모를 높이고 남다른 대우에 답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니, 상이 허락치 않고 이르기를,
"사양하지 말고 빨리 올라와 직임을 살피라."
하였다. 효종조 때 세채가 태학(太學)에 있으면서 선현을 무함한 유직(柳溭)의 죄를 상소하여 논하고 또 시비가 어긋난 조정의 실수를 지척하였는데, 효종이 크게 노하여 기를 꺾어 욕보이자, 세채가 유생들을 이끌고 나가 태학을 비워버렸다. 선배들이 그의 과격함을 비난하기도 하였다. 세채의 재식(才識)과 풍지(風旨)가 그리 사람을 움직일 만한 것은 아니었는데 송준길·조복양(趙復陽) 등은 번갈아 추천해 마지않았다.
예조 판서 조복양이 죄를 청하는 소를 진달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복양이 대제학으로서 정시(庭試)를 관장하였는데, 태학의 과시(課試) 제목으로 출제했던 것을 다시 출제하였다. 물의가 비등하자 복양이 스스로 허물을 인책하였으나, 후에 결국 논핵을 당하였다.
정초청(精抄廳)을 옛 병조에다 설치하였다. 판서가 주관하고 다른 당상들은 간여할 수 없도록 명하였다. 삼가 살피건대, 병조 판서는 군병의 우두머리이므로 훈련 도감과 어영청이 병조 판서에게 모두 통괄되어야 사리에 합당할 것이다. 그런데 갈라서 둘로 만들어 판서가 통괄할 수 없게 되었으니 이미 관청을 설치한 의도에 매우 어긋나고 멀리 내다보는 계획이 아니었다. 더구나 정초청을 또 설치하면서 참판 이하는 간여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무슨 까닭인가? 군사의 모습이 도성 안에 가득하여 식자들이 근심하고 있는 판인데 조처를 적절하게 못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 아, 위태롭도다.
12월 28일 임진
윤문거(尹文擧)·윤선거(尹宣擧)·윤원거(尹元擧)·이상(李翔)·신석번(申碩蕃)·윤증(尹拯)·박세채(朴世采)·송기후(宋基厚)를 부르도록 별도로 유시하고, 본도 감사에게 그들이 올라올 때 말을 지급하도록 명하였으나, 모두 오지 않았다. 문거는 욕심없이 물러나 있었고, 선거 이하는 모두 학행이 있어 천거되었었다. 이때에 이르러 좌참찬 송준길이 진달한 차자로 인하여 정원이 상에게 여쭈니 그들을 부르도록 별도로 하유하였다. 혹은 병으로 사양하고, 혹은 상소로 진달하고는 모두 오지 않았는데, 그중에서 선거가 조금 부드러웠다.
12월 29일 계사
계성묘(啓聖廟)030) 를 건립하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뒤에 흉년이 들어 중단되었다. 관학 유생 신응징(申應澄) 등이 상소하여, 중국 가정(嘉靖)031) 때 이미 행한 제도에 의거해 계성묘를 별도로 세워 숙량흘(叔梁紇)을 모시되, 안무유(顔無繇)·증점(曾點)·공리(孔鯉)·맹손씨(孟孫氏)를 배향하고 정향(程珦)·주송(朱松)·채원정(蔡元定) 및 주렴계(周濂溪)의 아버지 주보성(周輔成), 장횡거(張橫渠)의 아버지 장적(張迪)을 종사하고, 또 귀산(龜山) 양시(楊時), 예장(豫章) 나종언(羅從彦), 연평(延平) 이통(李侗)을 양무(兩廡)에 종사하도록 청하여, 사안을 예조로 내렸었다. 판서 조복양이 복계하기를,
"지금 유생들의 이 청은 실로 사문의 성대하고도 아름다운 일입니다. 성명께서 신의 조(曹)로 하여금 품의하여 처리하도록 특별히 명하셨는데, 이는 진실로 유학을 높이고 도를 중히 여기시는 성상의 지극한 뜻으로서 세상에서 보기 드문 일입니다. 그러므로 신들의 구구한 견해일망정 또한 감히 아울러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 이때에 가정 연간에 이미 이루어진 제도를 모방하여 성묘(聖廟)의 미진한 전례(典禮)를 아울러 거행한다면, 제사의 의식이 걸맞고 가지런하여야 비로소 유감이 없게 되어 선비들의 취향이 바르게 되고 유학의 풍도가 떨쳐질 것입니다. 다만 이는 대단한 변개로서 사체가 막중하니, 대신 및 재야의 여러 유신들과 의논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영부사 이경석이 의논드리기를,
"지금 성균관 유생들이 성현을 높이자고 청한 소는 의도가 아름다우니 성대한 세상의 볼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지만 주(周)나라는 아득한 옛날의 일이고 신은 견식이 몹시 어둡습니다. 이같이 중요한 전례는 늙은이가 감히 가볍게 의논할 바가 결코 아니니, 여러 대신과 유현들에게 하문하시어 처리하소서."
하고, 영의정 정태화가 의논드리기를,
"신은 우리 나라 문묘의 예는 중국이 정한 제도를 한결같이 따라 하여 지금까지 준수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명나라 때에 이미 강정을 거쳤으니 시간의 거리를 막론하고 모두 모방하여 시행해야겠습니다마는, 우리 나라에서 시작하여 새로이 늘리고 줄이거나 배향하고 배향하지 않는 데에 있어서는 또한 불가한 점이 없지 않겠습니까. 오직 여러 대신과 유신들에게 하문하여 처리하시기에 달렸습니다."
하고, 판부사 정치화가 의논드리기를,
"우리 나라의 문묘는 중국에서 정한 규식을 한결같이 따랐는데 지금에 와서 옛것을 바꾸어 배향을 새로 늘리고 위차를 개정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더욱 자세히 살피고 신중히 하여야 합니다."
하고, 판부사 송시열이 의논드리기를,
"성묘의 위패를 감하고 더하거나 답습하고 개혁하는 것을 단지 명나라의 전례(典禮)와 선유들의 정론을 따른다면 허물이 적을 것입니다. 그러나 혹 위패를 올리고 내리는 일이 있어야 된다고 한다면 원(元)나라의 허형(許衡)에 대해서도 선정(先正)의 논의가 있었는데 예관이 끝내 거론하지 않았으니, 시세상 불가한 점이 있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신은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송조(宋朝) 종묘의 제도는 시속을 따라서 옛스럽지 않음이 많습니다. 그러나 주자의 의도는 우선 심하게 사리에 어긋나는 것을 조금 변통시키고 훗날 부흥한 뒤에 오래된 오류를 바로잡아 왕가의 법을 완성시키기를 기대한 것이었으니, 또한 매우 훌륭한 일입니다. 오늘의 일도 성상께서 역량과 사세가 어떠한지를 스스로 헤아리심에 달려 있습니다. 만일 일에는 완급이 있으니 제작하는 등의 일에는 아직 겨를이 없다고 여기신다면, 지금 임시로 멈추어 보류하여 후일을 기다려야 하고, 혹 그렇지 않다고 여기신다면 소소하게 변통하는 이러한 일이라도 예관의 의론을 좇아 선비들의 마음을 위로하시는 것도 역시 한 방법입니다."
하고, 찬선 송준길이 의논드리기를,
"선비들의 상소와 예관의 계사는 모두 억설이 아니고 각기 근거가 있습니다. 조정이 예의를 닦아 밝혀 유학을 더욱 중시되게 하는 도리에 있어 진실로 마음을 더 쓰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신의 어리석고 망령된 의견으로는, 계성묘의 제도는 바로 중국에서 이미 행한 것으로서 그 의도가 나름대로 좋고, 이연평(李延平)의 종사(從祀)는 바로 주 부자(朱夫子)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이어서 그 뜻이 괜한 것이 아니니 이 두 일은 더욱 빨리 거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나머지 예제(禮制)는 서서히 더욱 상량하시어 십분 타당함을 구하심이 옳을 듯합니다. 다만 중국의 계성묘에는 주렴계와 장횡거의 부친도 과연 정(程)·주(朱) 부친의 대열에 끼었는지요? 그 두 사람의 사적과 중국에서 이미 행한 의전을 다시 자세하게 상고하여 처리하셔야 합니다."
하니, 상이 비로소 여러 의논에 의거하여 계성묘 한 건을 우선 거행하도록 명하였다.
판부사 송시열이 성덕을 닦아 하늘의 재앙에 응하도록 간청하는 차자를 올렸다. 그 대략에,
"모르겠습니다만 전하께서는 오늘날도 혹 마음이 긴장되어 재앙 없애는 방법을 생각하고 계십니까? 지금의 국세가 위급해진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중외의 신민들이 모두 전하께서 깨닫기를 바라고 있는데, 전하께서 정사에 태만함이 여전하고, 곧은 말 듣기를 싫어함이 여전하고, 천변을 두려워하지 않음이 여전하고, 백성의 폐해를 돌보지 않음이 여전하고, 공도를 없애고 사욕을 기름이 여전하고, 무익한 일을 하여 유익함을 해침이 여전하며, 시정의 폐해가 많아도 바로잡을 의지가 없고, 조정의 기강이 매우 문란해졌어도 진작할 의도가 없으십니다. 이 가운데 하나만 있어도 망하기에 충분한데 더구나 그것들이 다 있는데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신이 시골에 있을 때 바깥 사람이 기생과 악대를 끼고 대궐에 출입한다는 말을 듣고 마음에 걱정되었기 때문에 이미 앞서 차자에서 언급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또 들으니 천창(賤娼) 선향(善香)과 요무(妖巫) 보배(保陪) 같은 무리들이 연줄을 타고 출입하는데 다시는 막거나 금하지 않는다 합니다. 과연 그렇다면 근본을 갉아 먹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를 제거하고자 한다면 오직 성학(聖學)을 힘쓰는 데 있으니 성학을 하는 요점은 독서하고 궁리하는 데 불과합니다. 그리하여 선한 것은 따르고 악한 것은 버리어 마음과 몸을 지켜 나가되, 항상 상제와 귀신이 위에서 임하고 주위에서 질정하는 듯이 여기신다면, 엄연하여 지극히 바르고 태연하여 심히 안정되어 천하의 일이 분명해지지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차자를 궐 안에 두고 관서에 내리지 않은 채 답하기를,
"아, 재이가 일어나지 않은 때가 있었으리오마는 어찌 오늘날과 같이 자주 일어난 적이 있었겠는가. 이를 생각하면 절로 한심해진다. 경의 차자를 보니 면려하고 근심하며 사랑하는 뜻을 애연히 볼 수 있다. 마음에 간직하여 가슴에 새기고 더욱 경계하여 살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 국세가 위태로워 큰 내를 건너는데 나루가 없는 것보다도 더 급박하다. 그러니 내가 깊이 의지함이 과연 어떠하겠는가? 경은 나의 지극한 뜻을 깊이 이해하여 부족하고 병통인 점을 보완해 달라. 이것이 나의 소망이다."
하였다. 이때 복창군(福昌君) 이정(李楨) 등이 기생을 끼고 궁중을 출입한다는 말이 외간에 퍼졌고, 요무(妖巫)의 일도 매우 자자하였으므로, 시열이 상차하여 이같이 진달하였다. 후에 등대할 때 또 요무의 일로 말하니, 상이 해당자를 가두어 다스리도록 명하였다.
무과 전시(武科殿試) 때 대리로 활을 쏘아 준 사람 우석규(禹錫圭)를 율에 따라 죄를 정하였다. 이때 과장이 난잡하여 대리로 활을 쏘아 주거나 대리로 강(講)해 주는 경우를 이루 헤아릴 수 없었는데, 심지어는 전시에서도 대리로 활을 쏘아 주는 일이 있었으니, 국법이 엄하지 않음이 이와 같았다.
12월 30일 갑오
옥당이 차자를 올려 이조 판서 박장원(朴長遠)을 논핵하였다. 이때 장원이 이정영(李正英)을 예조 참판에 의망하여 물의가 끊임없이 비난하자 응교 남이성(南二星)이 발론하여 그가 사사로움을 따랐다고 지척하면서 장원과 낭청을 체직하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고 모두 무겁게 추고하도록 하였다. 장원이 연소배에게 능멸당하였고 송시열·민정중 등도 그를 비난하였다. 심지어는 도목정(都目政)을 앞에 두고 대정(大政)에 예전대로 참여시켜서는 안 된다는 논의까지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논핵을 당하였다.
집의 김징(金澄), 지평 조원기(趙遠期)·최후상(崔後尙)이 아뢰기를,
"이번 정시에서 글제를 거듭 출제하여 국시(國試)를 엄하지 않게 만들었으니, 이는 실로 이전에 없었던 일입니다. 속마음이야 다른 게 없겠지만 일이 매우 잘못되었으니, 대제학 조복양을 파직시키소서. 과거를 설치하여 선비를 뽑는 일은 체모가 지엄한데 이번 정시에 글의 제목을 거듭 내어 원근이 시끄럽고 비방하는 의론이 들끓고 있으니, 나랏일의 불행 중 어떤 것이 이보다 더 크겠습니까. 국가에서 사람을 뽑는 길은 단지 과거가 있을 뿐인데 혼잡하고 말 많음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지금 만약 그대로 두고 파하지 않는다면 팔방의 사자(士子)들이 해괴하게 여겨 비웃고 억울해 하는 것이 가면 갈수록 더욱 심해져서 그들의 마음을 가라 앉혀 복종시킬 수 없게 될 것이니, 국가의 체면에 있어서도 매우 구차하고 소홀해지며 아울러 훗날의 끝없는 폐해를 낳게 될 것입니다. 급히 파방하여 나라의 시험을 중하게 하소서.
엊그제 정시의 초시(初試)와 무과(武科) 일소(一所)의 과거 응시자들을 두가지 기예로 합격시켰는데, 시강(試講)해 보지도 않고 무단히 낙방된 자가 매우 많아 사람들의 말이 자자하고 원망과 비방이 비등하였습니다. 그 당시 차비관을 불러다가 곡절을 따졌더니 ‘응시자들이 강(講)에 응할 때 시관이 소란스러움을 싫어하여 호명관(呼名官)으로 하여금 호명기(呼名記)를 가지고 문밖에 나가 앉아 「자불(自不)」의 종류를 물어 이름 밑에다 적어서 들이게 하여 시책(試冊)에다 베껴 썼다.’고 하였습니다. 과장의 체모는 지극히 엄중한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강을 원하는 자는 강을 하게 하고 글을 모르는 자는 스스로 못한다고[自不]하는 것이 전해오는 법례(法例)입니다. 그런데 시관들이 한때의 소란스러운 고생을 면하려고 차비관을 밖에 내보내 기록하게 하였으면, 그 사이에서 남잡하게 조종한 폐해를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것이고, 강을 하지 못하고 억울하게 떨어진 자가 많은 것은 필시 이에 연유한 것일 것입니다. 그들의 거조가 매우 놀랍습니다. 해당 시관들을 파직하소서."
하였는데, 한 번 아뢰자 즉시 따랐다.
판부사 송시열이 상차하여, 새해 초하룻날에 종묘에 친히 배알하여 구례(舊例)를 거행하고 성상의 효도를 펴기를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비록 병 때문이었지만, 오랫동안 배알하는 예를 폐하여 한스럽기 그지없다. 지금 경의 차자를 보니 진실로 인정과 예의에 합당하다. 다만 생각건대, 나라의 제사에는 재계하는 규례가 있어 왔는데 형세상 미처 주선할 수 없어서 별도로 배알할까 하는데 아직 날짜를 택하지 못하였다. 해조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이때 상이 눈병으로 인해 종묘의 예를 오랫동안 폐하여 식자들이 개탄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시열이 차자로 배알하기를 청하였다. 상이 아직 재계하지 못해 초하루 제사[朔祭]를 친히 거행하기 어려운 형편이었기에 이같이 비답하였다. 후에 날자를 택해 세자를 거느리고 종묘에 배알하였다.
감찰 조창기(趙昌期)가 만언소를 올려 17조목을 진달하였다. 소가 들어간 지 여러 달이 되었으나 궐 안에 두고 내리지 않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너그럽게 비답을 내리고 털요[阿多介]를 특별히 하사하여 가상히 여긴다는 뜻을 보였다. 창기의 상소는 분량을 많이 늘리는 것만 힘써서 조목이 불분명하였고 격절한 등등의 말이 없었다.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현종실록16권, 현종 10년 1669년 2월 (0) | 2025.12.12 |
|---|---|
| 현종실록16권, 현종 10년 1669년 1월 (0) | 2025.12.12 |
| 현종실록15권, 현종 9년 1668년 11월 (0) | 2025.12.12 |
| 현종실록15권, 현종 9년 1668년 10월 (0) | 2025.12.12 |
| 현종실록15권, 현종 9년 1668년 9월 (0) | 2025.1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