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일 을축
옥당이 차자를 올려 지평 최후상(崔後尙), 장령 오상(吳尙), 정언 경최(慶㝡)·정화제(鄭華齊), 사간 박세견(朴世堅) 등의 구차한 행위에 대하여 논하고 체차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이때 최후상 등이 전주 부윤 안진(安縝)을 논핵하지 아니한 일로 시끄럽게 인피만 하므로 옥당이 구차하다는 것으로 논하여 체직시켰다.
김징(金澄)을 사간으로, 조원기(趙遠期)를 지평으로, 최상익(崔商翼)·신정(申晸)을 정언으로, 이규진(李奎鎭)을 장령으로 삼았다.
중건청(重建廳)이 아뢰기를,
"정릉(貞陵)의 정자각(丁字閣)을 창건하는 일로 대신과 의논하였더니, 영중추 이경석(李景奭)은 ‘개인의 견해로 가볍게 논의하기 어려우니 《실록》에서 상고하는 것이 합당할 것 같습니다.’고 하였으며, 좌의정 허적(許積)은 ‘정릉에 관한 일은 신이 어려서부터 여러 장로(長老)들의 말을 익히 들어왔으므로, 일찍이 탑전에서 하문하였을 때 장로에게서 들은 것을 대략 진달하였고, 또한 이것으로 수의(收議)할 때 올렸습니다. 신의 의견은, 그전부터 축문에 쓰기를 「효증손(孝曾孫) 사왕(嗣王) 신은 감히 조모(祖母) 신덕 왕후(神德王后)026) 께 고합니다….」라고 하였으니, 위호(位號)도 버리지 않았고 강쇄함도 없음이 분명한데 유독 수호하는 일만 결손되어 있는 바, 이는 실로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자 국가의 큰 잘못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여러 능과 구별하는 뜻을 두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을 감히 진달하였던 것입니다. 신의 견해는 그전과 다름이 없으니 속히 태조·태종 양조(兩朝)의 《실록》을 상고하여 그 당시의 곡절을 분명히 알고난 다음 의정하여 미진하다는 한탄이 없게 하소서. 그리고 신이 일찍이 듣건대, 명종과 선조 때 대간이 이 일을 가지고 연달아 논계하였다고 하였는데, 대간의 논계가 어떠하였는지 알 수 없으니 또한 조사해 내어 처치에 참고할 자료로 삼도록 하소서.’ 하였고, 영의정 정태화(鄭太和), 판중추부사 정치화(鄭致和) 등은 질병으로 수의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태종조 및 명종·선조 양조의 《실록》을 상고하라고 명하였다.
정지화(鄭知和)를평안도 시관(試官)으로 삼았다.
2월 3일 병인
상이 양심합(養心閤)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제신을 인견하였다. 좌참찬 송준길(宋浚吉)과 헌부와 옥당이 각기 한 명씩 입시하였고, 예조 판서 김좌명(金佐明)이 태안(泰安)의 창고 설치할 곳을 살펴보고 와서 연중에 입시하였다. 상이 형세를 묻고 또 포구(浦口)의 굴착 여부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신이 가서 형세를 살펴보니 조수가 크게 이르지 않았으므로 포구까지의 거리가 꽤나 멀고 또 옛날 포구를 굴착했던 곳을 보니 별로 이루지 못할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육지가 30여 리가 되어 굴착하고 난 뒤에 남북의 물이 서로 오가면서 자연히 흙이 채워집니다. 전일에 수시로 파내는 대로 채워진다 한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입니다. 창고를 설치하는 일도 일시에 크게 지을 것이 아니라 시험삼아 작게 짓고, 그 형세를 살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였다. 좌의정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이 일은 백성에게 큰 해가 될 뿐입니다. 이미 남창(南倉)으로 받아들였다가 또 북창(北倉)으로 옮긴다면 많은 감축이 있을 것이니, 어쩔 수 없이 백성에게 더 부과하여야 할 형편이 될 것입니다.
신이 앞서 창고를 설치한 후에 패선(敗船)이 반드시 많아질 것이라고 한 것은 대체로 안흥(安興)에서 못쓰게 되는 것은 아주 적으나, 철이 늦은 뒤에 선척을 운항하면 대부분 못쓰게 되어서입니다. 민정중이 말하기를 ‘가을을 기다려 운항하여 온다.’고 한 것은 모르고서 하는 말입니다. 물이 없는 것이 10여 리나 되는데 조선(漕船)이 와서 바다 가운데 정박하여 있다가 조수가 크게 이르는 것을 기다려 언덕에 닫는다면 신의 생각으로는 아마도 선척이 못쓰게 되는 것이 더욱 심하리라 여겨집니다.
백성을 부리는 데는 편하게 하는 것이 우선인데 지금은 해마다 거둥할 때 민중을 동요하고 있으니 매우 온당하지 못합니다. 신의 의견은 이와 같은데 조정에서 이미 창고를 설치하기로 정하였으니 지금 중지할 수 없다면 우선 김좌명의 말을 따라 작게 지어서 그 형세를 살펴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김좌명이 아뢰기를,
"그곳 사람들이 모두 북창도 설치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운반하였다가 다시 운반하고 계량하였다가 다시 계량한다면 감축되는 것은 적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허적이 또 남창에서 북창으로 옮길 때 수레로 운반하는 어려움을 말하니, 상이 이르기를,
"들을 때마다 다르고 볼 때마다 다르니, 당초에 이렇게 어려운 것인 줄은 몰랐다."
하였다. 김좌명이 아뢰기를,
"신이 어제 판부사 송시열을 보니 ‘성교(聖敎)가 인명을 아끼어 이처럼 창고를 설치하려고 하시니 뜻을 받들어 이루기에 겨를이 없어야 한다. 만약 일시에 모두 거행하기 어렵다면 일부만이라도 시험하여 보는 것이 해로울 것이 없다.’고 하였고, 정치화(鄭致和)는 ‘우선 적게 시험하여 보자.’고 하였고, 영의정 정태화(鄭太和)는 ‘어떻게 하여야 좋을지 모르겠다.’고 하였으며, 영부사 이경석(李景奭)의 뜻도 역시 매우 어렵게 여겼습니다."
하였는데, 허적이 아뢰기를,
"당초에 반드시 할 수 있다고 한 사람이 송시열인데 그의 뜻 역시 적게 시험하려고 하니, 우선 이 건의에 따라서 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설치할 창고의 칸수를 정하여 놓았으니 그 중에서 반을 감소하여 40칸으로 하라."
하였다. 김좌명이 남한 산성의 조적(糶糴)이 결손난 일을 진달하니, 상이 이르기를,
"송 판부사의 말이 ‘김만기(金萬基)의 말을 들으니 결손이 난 것을 쉽게 탕척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송시열이 백성의 간악함을 알기 때문에 이와 같이 말한 것입니다."
하고, 송준길은 아뢰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위에 있는 사람은 백성이 납부하지 않는 것을 가증스럽다고 하고 백성은 위에서 봉납 독촉하는 것을 원망하고 있는데 어떻게 똑같이 논할 수 있겠습니까. 무인년에 결손이 난 것이 지금까지 장부에 있는데 어찌 간악하다고 책망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기축년 이전 것은 탕척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서필원이 아뢰기를,
"보장(保障)의 군향(軍餉)을 어떻게 탕척할 수 있겠습니까. 간악한 백성이 탕척에 익숙해지면 일이 매우 난처합니다."
하였다. 송준길은 아뢰기를,
"어찌 가증스러운 백성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가증스러운 백성은 적고 불쌍한 백성은 많은데, 어찌 한두 사람이 가증스럽다고 해서 불쌍한 백성을 염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기축년 이전의 결손이 난 것은 탕척하라고 명하였다. 송준길이 아뢰기를,
"지난번 소대하였을 때 신이 종묘에 배알하는 일과 입학하는 예에 관하여 진달하였는데 상께서 관례를 먼저 행하려 하시므로 정월에 행하기를 청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들으니 시강원에서 소를 올려 입학하는 예를 먼저 행하기를 청하였다 합니다. 그 뜻이 진실로 좋습니다마는 옛날에 제후는 12세에 관례를 행하였으니 여기에 의거하여 행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러한 일들은 매번 조종조의 고사를 따랐다. 인종 대왕이 7세에 관례를 행하였고, 나 역시 신묘년에 관례를 행하고 임진년에 입학하였다. 지금 상고하지 못한 것은 문종조의 《실록》이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정릉의 일로 《실록》을 상고하라는 명이 계셨는데, 문종조 《실록》을 상고하는 일이 매우 급하니, 춘추관 당상으로 하여금 함께 가서 상고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삼가 살피건대, 허적이 안흥(安興)에 창고를 만드는 것이 잘못된 일인 줄 알았다. 그런데 송시열의 뜻을 어기기가 어려워 조금 시험해 보는 계책을 행하여 경솔하게 민력을 사용하였다가 끝내 완성하지 못하였다. 대신으로서 역량이 넓고 굳세지 못하면서 능히 국사를 제대로 담당할 자가 있겠는가.
송준길이 정릉의 일로 상께 아뢰기를,
"선조에서 행하지 못하였던 일을 송시열의 한 마디로 윤허하시니, 군신간에 뜻이 맞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이 광평 대군(廣平大君)의 집에 소장된 책을 보니, 임자년에 위로 삼공에서 부터 아래로 낭서(郞署)에 이르기까지 수개월을 복합(伏閤)하여 다투었으나 마침내 한식절에 제사 한 번 지내는 것으로 윤허하였고, 중간에는 와전된 말로 지금의 정릉이 잘못되었다 하므로 자손에게 먼저 사유를 고하게 하고 땅을 파서 지석(誌石)을 파서 보게 하였는데, 지석은 비록 찾지 못하였으나 국릉(國陵)인 것은 확실하였습니다. 그 제문 중에 ‘《실록》이 떨어지고 문드러져 상고할 수 없다.’는 말이 있으니 지금 비록 《실록》을 상고한다 하여도 자세한 것은 찾기 어렵습니다. 신의 뜻은 부묘(袝廟)하는 일은 《실록》을 상고한 뒤에 논의하여 결정하고 정자각을 중건하는 일은 매우 긴급하니 우선 거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어렵게 여기는 것은 오직 부묘하는 일이다. 이미 참봉(參奉)을 뽑았고 또한 재실(齋室)도 지었으니 정자각을 우선 창건하게 하라."
하였다. 김좌명이 아뢰기를,
"안흥의 구진(舊鎭)이 형세가 매우 좋은데 첨사가 신진으로 옮겨 주둔하니 불편한 일이 많고 토병(土兵)들도 원망하고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하자, 허적이 아뢰기를,
"안흥 첨사를 다시 구진으로 이주하게 하고 별장은 혁파하며 군향 조적의 일을 태안 군수로 하여금 주관하게 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김좌명이 또 아뢰기를,
"원산도(元山島) 목장의 말을 대산곶(大山串)에 옮겨 두고 충청 수군 우후를 원산에 진주하게 하여 풍화(風和)한 철의 변에 대비하게 하고, 또 조선(漕船)이 올라올 때 점검하여 올려 보내게 하는 것이 편리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김좌명이 아뢰기를,
"호서(湖西)의 양전(量田)이 이미 시작되었으나 농사철 전에는 형편상 양전을 마치기가 어려울 듯하니 매우 염려됩니다. 신이 민유중의 말을 들으니 ‘몸에 질병이 있고 공무가 매우 많아서 제대로 들녁에 나다니며 직접 둘러보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감사를 체임하거나 혹 균전사(均田使)를 별도로 차출한다면 오로지 맡은 일을 수행하는 데 뜻을 다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민유중이 이미 이 일을 시작하였으니 감사의 체직을 허락하고, 그에게 양전하는 일을 전담하게 하라."
하였다.
장령 이규진(李奎鎭)이 탑전에서 수원 부사 심지명(沈之溟)을 체직하라고 청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상이 판윤 조복양(趙復陽)이 외부에 있으니 체직하고 종2품 중에서 의차하라고 하였다.
대사간 김만기(金萬基)가 임무상 변장을 추천해야 하는데 추천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2월 4일 정묘
햇무리가 지고 양이가 있었다.
사간 김징이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전 정랑 김왕(金迬)이 일찍이 충청 도사가 되었을 때 시관(試官)을 맡고서 사사로움을 행하여 형을 받고 멀리 귀양갔었는데 지난번 예조 낭관으로 임명되었다고 하기에 마음으로 매우 옳지 않다고 여기던 중 우연히 이조 판서 이경휘(李慶徽)를 만나 그 주의의 잘못됨을 말하였습니다. 그것은 신이 다만 김왕의 훗날의 죄과만 알았고 지난날 한 장의 상소로 명의(名義)가 지중한 줄은 진실로 생각치 못하였던 까닭입니다. 이경휘 역시 신의 말을 옳게 여기고 즉시 계달하였는데, 대신이 경연에서 면박을 하였는데 말뜻이 엄준하였습니다. 이경휘의 낭패가 사실은 신 때문이었으니 대신의 공척을 신이 받아야 마땅합니다.
대신이 한 말도 김왕의 사람됨을 아껴서가 아니고 그 깊은 뜻과 은미한 취지가 대개 있었을 것인데, 신은 한갖 자신의 견해만 믿고 전혀 헤아려 생각하지 못하였으니 그 경솔하고 잘못됨이 이미 심합니다. 신이 어찌 감히 다시 대각에 들어가 시비를 논하겠습니까. 또한 신이 현재 추감(推勘)을 당하고 있으니 신을 체직하소서."
하니, 헌부가 처치하여 체차하였다.
2월 5일 무진
햇무리가 지고 양이가 있었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갔다. 약방이 들어와 진맥을 하였고, 호조 판서 민정중이 청대하여 입시하였다.
그 전에 상이 훈련 도감의 병제(兵制)를 변통하고자 하였는데 여러 의논이 모두 한정(閑丁)을 얻기가 어렵다고 하므로, 상이 각도의 감영·병영·수영의 영장(營將)에 임시로 소속되어 있는 한정의 숫자를 조사하도록 하였다. 허적 등이 물러가 각도의 성책(成冊)을 상고한 결과 합계가 5만 4천여 명인데, 직책이 있거나 역무(役務)가 있는 자와 공사천(公私賤)을 제외하면 한정의 수는 1만 1백 58인이었다. 그 중에서 또 서북 양도(兩道)의 사람을 제외하면 한정의 실제 수는 6천 6백 58인이었다. 이 숫자를 가지고 어영청의 예에 의하여 13번으로 나누면 매번의 수가 5백 12명이니, 이 수를 도감으로 이송한 다음 뽑아내어 번에 오르게 할 것을 어영청의 제도처럼 하라고 하니, 상이 각도의 계본(啓本)을 성책(成冊)과 함께 도감으로 이송하여 처치하게 하였다.
이때 도감의 군병이 실용에는 보탬이 없고 한갖 국고만 소비하므로, 사람들이 모두 꼬리가 크면 휘두르기 어렵듯이 병사가 많으면 지휘하기 어렵지 않을까 하고 우려하였다. 이단하가 경연에서 맨 먼저 발론하였고, 그후 송시열이 상에게 말하여 어영청의 규모에 의거하여 국(局)을 설치하고 인하여 훈련 도감을 혁파하자고 하니, 상이 새로이 1군을 설치하는 것은 좋아하면서 구군(舊軍)을 혁파하는 것은 어렵게 여겨 이완에게 문의하니, 이완이 훈련군을 혁파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을 극언하고 또 1군 신설의 어려움을 말하였으나 허적과 유혁연(柳赫然)이 극력 찬동하며 신군의 명칭을 훈련 별대(訓鍊別隊)라 하였다.
유혁연이 자원 모집하면 쉽게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힘주어 말하자, 상이 힘써 행하면서 훈국 군병의 도망한 자를 여전히 충정하니, 송시열이 건의한 뜻과 크게 달랐다. 군병을 모집할 때 원망과 비방이 떼로 일어나 사람마다 그 때문에 말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나 허적과 유혁연이 시종 찬성하였는데, 대체로 상이 군무에 마음을 쓰고 있는 까닭이었다.
군자 주부(軍資主簿) 이성철(李誠哲)은 문순공 이황의 봉사손인데 월등(越等)이 있어 녹을 받지 못하였다. 좌의정 허적 이 판부사 송시열의 말로 인하여 상에게 아뢰니, 상이 특명으로 월등을 탕척하여 현인을 숭상하는 뜻을 보이게 하였다. 대간이 법을 어긴 것이라고 간쟁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이해(李澥)를 봉조하로, 홍만용(洪萬容)을 대사간으로, 이유(李秞)를 사간으로, 이숙(李䎘)을 충청 감사로 삼고, 민희(閔熙)를 특별히 판윤으로 제수하였다. 상이 이미 종2품 중에서 판윤을 차출하라고 하였는데, 허적이 경연에서 상께 아뢰기를,
"아경(亞卿)을 정경(正卿)으로 초배(超拜)하는 것은 신 한 사람의 독천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종2품 중에는 합당한 사람도 없고 오직 민희(閔熙)가 쓸만한데 신에게는 인척이 되므로 감히 의망할 수 없습니다. 상께서 특별히 적임자에게 제수하소서."
하니, 민정중이 아뢰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전교를 받았으니, 적임자를 선택하여 의망하면 될 것인데, 하필이면 특별히 제수하겠습니까."
하였는데, 정사를 열고 보니 상이 민희에게 특별히 제수하였다. 민희가 아경으로 승급된 지 수 개월도 못 되어 갑자기 정경으로 승진되니 물론이 복종하지 않아 마침내 논박을 당하였다.
부제학 이민적(李敏迪) 등이 상차하기를,
"천하의 일이란 전일에 폐지되었다가 뒷날에 거행되는 경우도 있으며, 한때는 굴하였으나 만세에 펼쳐지는 경우도 있으니, 그 일의 옳으냐 그르냐의 여부만을 살필 뿐입니다. 그러므로 인정에 편안하지 못한 것이라면 오래된 일이라고 하여 내버려 두어서도 안 되며, 천리에 빠뜨릴 수 없는 것이라면 조종(祖宗)이 행하지 못한 것이라고 하여 어렵게 여겨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이는 분명한 사리이며 역대의 공통된 논리입니다.
이번 신덕 왕후(神德王后) 능묘에 관한 논의로 대신이 이미 그 단서를 발론하였으므로 성명께서도 그 말에 감동하셨을 것입니다. 원릉(園陵)의 제도와 관리의 설치 및 사물의 비치를 여러 능묘에 견주케 하니, 성인의 넓으신 효성을 누구인들 흠앙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삼가 듣건대 경연에서 성상께서 종묘 제사에 관한 절차를 아직도 어렵게 여기는 뜻을 보이셨다 합니다. 신들이 삼가 생각건대 신덕황후는 신의 왕후(神懿王后)가 별세한 후 성조(聖祖)께서 건국할 때 천자(天子)의 고명(誥命)을 받고 일국의 국모(國母)가 되어 중곤(中壼)의 위에 있은 지 10여 년이 되었고, 지금 선유 이색(李穡)이 찬한 정릉비(定陵碑)를 상고하면 역시 ‘먼저 모씨에게 장가들고 후에 모씨에게 장가들었다.’ 하였고 원(元)과 차(次)의 분별이 없으며, 권근(權近)이 찬한 흥천사비(興天寺碑)에도 역시 봉함을 받아 곤위에 있었던 실상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용비어천가》는 세종조에 만들어진 것인데도 역시 신덕 왕후라고 쓰여져 있으니, 위호가 바뀌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 이것이 또한 분명한 증거인데 어찌 다시 증거를 상고한 후에야 안다고 하겠습니까. 승하한 후에 존호와 시호를 올리는 일을 예관(禮官)에서 폐지하지 않았고 제사를 모시던 의식과 축판이 아직도 향실(香室)에 있으며, 태종 대왕이 친히 향축(香祝)을 전하였으니, 그 위호와 축식의 존융함은 지금까지 바뀌지 않았으며, 원릉 석물(石物)의 설비 역시 극히 높혀 받들었습니다.
살아서는 정비(正妃)가 되었고 죽어서는 존호를 받았으며, 중국으로부터 고명을 받아 성조와 짝하였는데 유독 태묘(太廟)에 배향되지 못한다면 어찌 인정에 거역되고 천리에 괴리되어서 성조의 궐전(闕典)이 되고 천고의 유한이 되지 않겠습니까. 선조조 신사 연간에 대신과 삼사가 역시 건의하였으나 욕예를 거행하지 못하였으므로 언젠가는 거행해야 할 일이니, 이는 실로 오늘날 성조의 책임인 것입니다.
소릉(昭陵)027) 의 복위 문제는 여러 조정을 지나 중조 때 비로소 거행하였으니, 조종이 거행하지 못하였던 것이라고 하여 일찍이 어렵게 여기지 않았으며, 또한 오래된 일이라고 하여 폐지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고사를 가지고 말한다 하더라도 한·당 이래로 송 나라의 가법(家法)이 가장 순정(純正)하다고 하는데 원우 황후(元祐皇后)028) 의 복호는 정자(程子)도 옳다고 하였습니다.
더구나 지금 신덕 왕후는 존호를 고치지 않았고 정릉의 의물(儀物)도 아직까지 왕후의 법제로 되어 있으니, 소릉의 개봉(改封)이나 원우의 복위처럼 중대하고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다만 빠뜨린 전례를 소급하여 거행하고 다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상세하게 정문(情文)을 마련하면 될 뿐입니다. 이렇게 한 다음에야 천리에 합하고 인정에 순응하게 될 것입니다. 국가의 전례에 관계됨이 매우 중한데다 논의가 이미 발단되어 여론을 막기가 어려우니 의리로 헤아려 결단하여 행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행 부호군 조경(趙絅)이 졸하였다. 조경의 자(字)는 일장(日章)이며 청문 고절(淸文苦節)로 한 시대의 추앙을 받았다. 총재(冢宰)의 지위에 올랐고 문형(文衡)을 지냈는데, 경인년에 청나라에게 죄를 받아 서쪽 변방으로 유배되었다. 돌아온 뒤에는 서용하지 못하게 하므로 부모를 위하여 회양 부사(淮陽府使)를 청하여 나갔는데, 얼마 후에 포천(抱川)으로 돌아가 만년을 보냈다. 지성으로 계모를 섬겼는데, 나이 80세에 상(喪)을 당하였으나 남들이 따를 수 없을 만큼 예를 잘 수행하였다. 고령으로 품계가 승급되었고, 음식물의 하사도 있었는데 이때 84세로 졸하였다. 조경의 문장은 고상하면서도 기운이 넘쳐 고문에 가까웠으며, 그의 맑은 명성과 굳은 절개는 당세에 추앙을 받았다. 그런데 윤선도(尹善道)를 구하는 상소를 올린 일 때문에 크게 시의(時議)에 거슬림을 받아 사특하다고까지 지목되었으니, 이것이야말로 사인(邪人)이 정인(正人)을 지적하여 사특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금상 병진년에 현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경상 좌도의 기근(饑饉)으로 통영(統營)의 합동 조련을 중지하게 하고, 수사(水使)에게 각기 그 영(營)의 앞바다에서 조련을 행하게 하였다.
2월 6일 기사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심경(心經)》과 《강목(綱目)》을 강하였다. 좌참찬 송준길이 시강(侍講)하였는데, 문의(文義)를 강론하여 아뢰기를,
"격물·치지는 지(知)이고, 성의·정심·수신은 행(行)이며, 제가·치국·평천하는 추리(推理)입니다. 성의는 지와 행을 일관하여 말한 것이니 지에 성의가 없어도 안 되며 행에 성의가 없어도 역시 안 됩니다. 후세의 임금이 좋은 자질을 갖고 있더라도 학문하는 공이 없다면 그 자질을 제대로 확충하지 못할 것이고, 비록 기질의 병통이 있더라도 과연 참으로 알고 힘써 행한다면 기질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렇지 못한 경우는 다만 참으로 알고 힘써 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강목》의 강론을 마치고 송준길이 아뢰기를,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사서(史書)는 시끄럽고 뜨거우며, 경서(經書)는 차갑고 담담하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비록 두 가지를 모두 강론하였지만 경중을 알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였고, 이민서(李敏叙)는 아뢰기를,
"만일 사서(史書)에서 고금의 치란(治亂)과 제왕의 잘잘못 중 모범으로 삼을 만한 선(善)과 경계할 만한 악(惡)을 하나하나 체득한다면 어찌 유익함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송준길이 경연에서 이해(李澥)의 전례에 의거하여 치사를 윤허하여 달라고 청하였으나, 상이 위유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익산(益山)의 영장(營將)을 옮겨 여산(礪山)에 다시 설치하라고 명하였다. 익산 군수 송시도(宋時燾)가 입시하여 본군의 폐단을 진달하니, 상이 병조에 말하라고 하였고, 병조가 진달한 대로 시행하라고 회계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당초 조정에서 이미 영장을 익산에 설치하였는데 지금 와서 군수 송시도의 한 마디 말에 다시 여산에 설치하였다. 송시도는 곧 송시열의 아우이다. 송시도가 감히 주상의 앞에서 이러한 말을 한 것은 대체로 송시열의 기세를 믿어서이며, 병조에서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는 것도 역시 송시열의 기세를 두려워해서이다. 이 일로 미루어서 그 나머지를 알 만하니 당시의 나랏일이 어찌 크게 한심스럽지 않았겠는가.
지평 조원기(趙遠期)가 아뢰기를,
"전주 부윤 안진(安縝)은 서득생(徐得生)의 송사에 추관(推官)으로 정해진 뒤에 다른 읍(邑)들처럼 법에 의거하여 쟁집하지 못하고 왜곡하여, 감사의 뜻에 따라 국전(國典)을 무시하고 임의대로 높이고 낮추었습니다. 심지어 삼대를 연이어 양역(良役)을 하여 60년의 기한이 지난 사람을 공공연하게 이광윤(李光胤) 등에게 결급(決給)하였으니, 그 죄범이 매우 놀랍습니다. 먼저 파직한 뒤에 추고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누차 아뢰었으나 끝내 따르지 않았다. 또 판윤 민희(閔熙)가 별안간 승급한 것의 잘못을 발론하여 개정하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형조 판서 서필원이 상소하여 창고 설치의 불편함을 논하기를,
"어제 경연에서 창고 설치가 편리한 지의 여부를 토론하였는데, 조선(漕船)은 근래에 하나도 패함이 없다는 것이 이미 확실하여졌고, 사선(私船)도 역시 모아서 감독하기로 결정하였으니, 창고를 설치하여야 할 일이 조금도 없는데 이리저리 반복한 끝에 마침내 반만 설립하여 편리한 지의 여부를 시험하기로 하였으니, 신은 몹시 개탄하는 바입니다. 무릇 일을 시행해도 좋을지 시험한다는 것은 이해를 분별할 수 없거나 편리의 여부가 자세하지 않을 때 하는 것인데, 지금은 공선(公船)이 이미 패하지 않았음이 보장되었고, 사선(私船)도 이미 변통하기로 결정하였는데 무슨 대략 설치하여 시험할 일이 있겠습니까.
신하로서 일을 논의하는 도리는 이해(利害)를 잘 알지 못하고, 마땅히 행하여야 한다고 범범하게 말하는 자는 그 잘못이 다만 이해를 알지 못하는 데 있으니, 어쩌면 용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옳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감히 쟁집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어정쩡하게 따른다면 마침내 불충으로 귀결되는 것입니다. 어제 좌의정 허적과 예조 판서 김좌명이 옳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감히 쟁집하지도 않은 채, 반은 가하다 하고 반은 불가하다 하며 반은 편리하다 하고 반은 불편하다고 하다가 마침내 대략 설치하여 가부를 시험하자는 논의로 결정하였으니, 불충한 죄를 어찌 모면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성상께서도 조선(漕船)이 패선되지 않았고 사선을 변통하였음을 통촉하신 후에는 아마도 창고를 굳이 설치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아셨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반만 설치하여 편리한 지의 여부를 시험하게 한 것은 별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앞서의 계획을 변경하고 싶지 않아서였을 것입니다. 대체로 일의 이해가 자세하지 않다면 어쩔 수 없지마는 이미 그 이해가 분명하다면 단연코 그만두어야 합니다. 이것 역시 용단(勇斷)의 한 도리이니, 한 고조가 인장(印章)을 새겼다가 그 인장을 없애버린 일을 어찌 되돌려 생각해 보지 않으십니까.
해마다 있는 온천(溫泉)의 행차로 호서의 백성들이 음식물 등을 마련하는 노고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역사(役事)를 흉년 끝에 아울러 거행하여 목재를 운반하고 돌을 운반하는 노고를 겹치게 하시니, 모르겠습니다만 전하께서는 앞서의 계획을 변경하는 어려움을 이것과 비교하여 어느 것이 어렵다고 여기십니까. 삼가 원컨대 성상께서는 마음을 결정하시어 빨리 정지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나의 뜻은 이미 등대하였을 때 유시하였으니, 다만 그 성취된 것이 어떠한가를 볼 뿐이다. 생각한 바를 진달하는 것은 본래 아름다운 일이나 말이 간혹 지나치다."
하였다. 이때 창고를 설치하자는 의논이 송시열에게서 나왔는데, 영의정 정태화는 속으로 옳지 않은 줄 알았으나 질병으로 논의에 참여하지 못하였고, 영부사 이경석은 결코 행할 수 없다고 하면서 허적이 애써 다투지 못하는 것을 큰소리로 말하였다. 허적도 옳지 않다고 여기면서도 이의를 제기하는 것을 혐의스럽게 여겨 그만두자고 청하지를 못하였다. 민정중은 송시열의 의견을 따랐으며, 김좌명은 실행 여부를 시험해 보자고 청하였으나, 뭇 의견이 모두들 창고 설치가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에 서필원이 광직함을 스스로 떠맡고 앞에 나서서 대립하다가 마침내 엄중한 논박을 받았다.
삼가 살피건대 태안(泰安)에 창고를 설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대신과 중신 중에 모르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송시열이 그 의논을 주장한 까닭에 상이 이미 의견을 굽히고 따르자, 대신 이하가 한 사람도 그 잘못됨을 말하는 이가 없었는데, 유독 서필원이 분연히 항거하는 소를 올려 대신을 불충(不忠)하다고 배척하였다. 그러면서도 송시열의 잘못됨을 직접 논박하지는 않았는데, 송시열이 마침내 노여움을 터뜨리고 돌아가니 대장(臺章)이 줄을 이어 서필원의 탄핵에 있는 힘을 다하였다.
국가에서 하는 일이란 한 사람의 사사로운 일이 아니니, 진실로 대중의 의견이 옳지 않다고 하면 당연히 반복하여 헤아려서 신속히 혁파하여야 한다. 어찌 자기의 견해를 고집하고 남의 이의를 싫어하여, 마침내 성공하지 못할 역사를 일으켜 재물을 허비하고 백성을 병되게 한 다음에야 그만두려 한단 말인가. 아, 이것은 실로 송시열의 평생 병통이다.
2월 7일 경오
공조 참판 윤집 등을 보내어 정릉 정자각의 터를 살펴보게 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14번째 정사(呈辭)하였는데, 승지를 보내어 돈유하였다.
판중추 송시열이 차자를 올리기를,
"이번에 서필원이 태안(泰安)에 설치하는 창고의 일을 가지고 이견을 제시하는 것은 좋으나 대신을 불충하다고까지 배척하였는데, 불충이란 신하의 극죄입니다. 비록 일반 벼슬아치에게라도 감히 이러한 말을 할 수 없는데 더구나 대신에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전하께서는 도리어 너그럽게 포용하는 뜻을 보이셨습니다. 대신은 비록 도량이 큰 것으로 자처한다 하더라도 조정의 체통이 여지없이 손상되었습니다. 이제부터 대소 신료는 서로 받드는 도리가 없어지고 총애받는 자는 함부로 날뛰는 형세가 있을 것이니, 신은 삼가 근심이 됩니다. 그리고 그 창고를 설치하자는 의논이 신에게서 시작되어 점점 확대되어 이렇게까지 되었으니, 신은 황공함을 견딜 수 없어 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또한 어공(御供)을 변통하자는 의논도 역시 신이 선왕의 말명(末命)으로 인하여 약간 시험하여 보고자 한 것인데, 이것은 중국 조정의 제도이며 선정신 성혼(成渾)이 선조조에 청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으로 인하여 서리들이 말을 만들고 사부(士夫)들이 호응하여 위험하고 악독한 말이 날마다 신의 몸에 모이고, 이 일을 담당하였던 민정중에게도 연루되어 자칫 견디어 내지 못하게 될 줄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이 두 가지가 모두 신이 함부로 국가 대계를 논의함에서 비록된 것이니, 스스로 뉘우치고 책망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게다가 질병도 이미 고질이 되었으니, 직명을 교차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서필원 상소의 말이 광망(狂妄)됨을 내 어찌 모르겠는가. 방금 경의 차자를 보고 내가 체통을 세우지 못한 잘못을 바로 깨달았다. 아, 오늘날의 인심과 세도가 한심스럽다고 말할 만하다. 경의 차자 말미를 보니 조정의 체통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어찌 이럴 수 있겠는가. 나는 몹시 놀랍다. 경은 안심하고 더욱 조섭을 잘하여 나의 뜻에 부응하라."
하였고, 사관을 보내어 전유하였다.
2월 8일 신미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심경》과 《강목》을 강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대신의 체면은 특별하여 사람마다 가볍게 탄핵할 수 없는 것인데 이번에 형조 판서 서필원이 불충하다고 탄핵하였으니, 그 말이 매우 이치에 맞지 않는다. 일의 체통으로 보아 경책(警責)하는 도리가 없을 수 없으니, 종중 추고하라."
하였는데, 상이 송시열의 차론으로 인하여 이러한 명을 내린 것이다. 좌의정 허적이 입시하였다가 서필원을 추고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는 뜻으로 계달하니, 상이 이르기를,
"체통으로 말한다면 옳지 못하기 때문에 추고하는 것이다."
하였다. 시독관 이민서(李敏叙)가 아뢰기를,
"본관(本館)이 신덕 왕후를 부묘하는 일로 차자를 올렸는데, 상께서 윤허하지 않는다고 비답을 내리시니, 여러 신하들이 민망스러워하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일찍이 선조(宣祖) 때 조정의 의논이 일제히 발론하였으나 선조께서 어렵게 여기신 것은 아마도 뜻이 있어서일 것이다. 선대에 행하지 않았던 일을 어찌 선뜻 거행할 수 있겠는가."
하니, 이민서가 아뢰기를,
"2백 년 동안을 거행하지 못하였던 크나큰 전례(典禮)를 지금 와서 거행한다는 것은 비록 조심스럽고 어려우나 당연히 행하여야 할 예를 끝내 폐기한다면 더욱 온당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검토관 김만중이 아뢰기를,
"선조조에 이미 거행하지 못했던 일이니 바로 오늘날 해야 할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옥당의 차자를 잘못이라고 하는 것은 아니나 내가 어렵게 여기는 것도 옳은 것이다. 옥당 역시 차자를 한번 올려서 허락을 받을 수 있는 일은 아닌 것이다."
하였다. 김만중이 아뢰기를,
"2백여 년을 행하지 못하였던 전례이니 위에서 어렵게 여기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러나 성상과 같은 참된 효심을 갖고서 만일 태조 대왕의 마음으로 마음을 삼는다면 신들의 말을 기다릴 것 없이 단연코 거행할 일입니다."
하였다.
제도(諸道) 감사의 과한(瓜限)을 2년으로 정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판부사 송시열이 맨 먼저 이 논의를 발하면서 권속을 데리고 가게 하라고 청하였다. 좌의정 허적은
"권속을 데리고 가면 폐단이 있다."
하였고, 영의정 정태화는
"오직 합당한 인재를 얻는 것에 달려있다."
고 하였으며, 영부사 이경석과 판부사 정치화는 모두 임기를 오래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상이 송준길에게 물으니, 송준길 역시 그렇다고 하므로 이러한 교명이 있었는데, 그후에 여러 의논으로 인하여 삼남 지방의 감사에게만 권속을 거느리고 갈 수 있게 하였다.
조복양(趙復陽)을 우빈객으로, 박장원(朴長遠)을 우참찬으로 삼고, 정재숭(鄭載崇)을 광주 부윤(廣州府尹)으로 초배하고, 김만균(金萬均)을 집의로, 이후(李煦)를 지평으로, 정석(鄭晳)을 수찬으로 삼았다
2월 9일 임신
예조의 계사로 인하여 춘당대(春塘臺)에서 관무재(觀武才)할 때에 문신 정시를 대거(對擧)로 거행하게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함릉 부원군(咸陵府院君) 이해(李澥)가 이미 치사한 일 때문에 법전을 상고해 보니, 당상관으로서 치사한 이에게는 매월 주육(酒肉)을 준다는 것이 예전(禮典) 혜휼조(惠恤條)에 실려 있으니, 법전대로 거행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형조 판서 서필원이 상소하여 또 창고를 설치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는 것을 논의하고 또 아뢰기를,
"근일 도성 안에 공물 주인(貢物主人)들이 생업을 잃는 까닭에 원성이 길에 가득합니다. 국가에 요즘들어 변괴가 연달아 있으니, 진실로 진정시키고 안무하기에 힘써야 할 것인데 안으로는 도성 백성이 까닭없이 대대로 전해오던 생업을 잃고, 밖으로는 호서(湖西) 백성이 까닭없이 토목의 역사에 곤경을 치르니 신은 이것을 못내 통탄하고 있습니다. 역로(驛路)의 은(銀)을 감소하니 유적(流賊)이 기승을 부리고, 유적이 기승을 부렸으므로 명(明)나라가 망하였으니, 중국의 지난 일로 증명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상소가 올라가자, 대각이 논의를 발하였으나 상은 답하지 않았다. 이때 약간의 일을 줄이려고 하였는데, 공물(貢物)을 혁파한다는 설이 먼저 전파되어 도성의 백성들이 크게 동요하여 원성과 비방이 길에 가득하고, 인심과 세도가 실로 어떻게 해볼 수 없게 되니 식자들은 한심스러워하고 있었다. 서필원이 연달아 두 장의 상소를 올렸다가 크게 시의에 배척을 받았다.
2월 10일 계유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소대(召對)하고 《심경》과 《강목》을 강하였다. 호조 판서 민정중도 뵙기를 청하여 입시하였다. 좌참찬 송준길이 시강(侍講)하여 상께 아뢰기를,
"장사숙(張思淑)이 하인을 꾸짖자 정자(程子)는 오히려 ‘왜 참지를 못하는가.’ 하였으니, 임금이 여러 신하를 욕하고 꾸짖는다면 어찌 임금의 덕에 해롭지 않겠습니까. 전하께서는 마땅히 유의하셔서 깊이 경계하소서."
하였다. 정언 최상익(崔尙翼)이 탑전에서 아뢰기를,
"형조 판서 서필원이 창고 설치의 합당 여부를 논박하면서 대신을 불충하다고까지 논박하였으니, 비할 데 없는 그의 말이 비단 체통을 고려하지 아니한 것뿐만이 아닙니다.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고 이르기를,
"서필원의 상소는 사실 말답지 않다. 내가 특별히 추고하게 한 것은 우연한 뜻이 아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월천군(月川君) 이정암(李廷馣)은 선묘조(宣廟朝)의 명신입니다. 그의 증손 이정(李靖)이 적장손으로 봉군(封君)을 이어받아 무신으로 승지에 임명되었는데, 그가 자식이 없이 죽고 그의 처가 혼자 있을 때에 이정의 숙부 이경성(李慶成)이 편의상 이정암 부자의 신주를 옮겨 갔습니다. 그후 이정의 처가 입후(入後)를 하였는데도 이경성의 아들 이저(李竚)가 그대로 그 제사를 주관하고 있으니, 이것은 그 적통을 빼앗은 것이 분명합니다. 이저는 죽었으나 그의 아들 이여주(李汝柱)가 그대로 답습하고 있으니, 종통(宗統)을 돌려주지 않는 죄를 중히 다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유사로 하여금 감금하고 죄를 정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해조로 하여금 이여주를 감금하고 조사하여 처치하게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이번 온양(溫陽)의 행차에 자전도 거둥하십니까. 신이 약방(藥房)과 태복(太僕)의 임무를 맡고 있으므로 미리 알아 거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자전이 매번 여름이면 환후가 생겼는데 한번 목욕한 후로 3년 동안 여름과 겨울에 기체후가 안녕하셨으니, 이는 실로 목욕한 효험이다. 만일 시일이 오래된 후에 목욕한 효험이 점차 떨어진다면 올 여름에 무사하실지를 알 수 없다. 당연히 거둥하실 것이다."
하였다. 허적이 택일을 청하니, 상이 다음달 10일에서 20일 사이에 날을 택하게 하고, 호조 판서 민정중을 정리사(整理使)로 차출하였다.
판부사 송시열이 상차하여 돌아가기를 청하니, 상이 사관을 보내어
"내 마땅히 대면하여 타이르겠다."
는 말로 유시하였다.
지평 이후(李煦)가 혐의스러워 판윤 민희(閔熙)의 연계(連啓)에 대해서 가부를 말하기가 어렵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2월 11일 갑술
강백년(姜栢年)을 대사간으로, 김세정(金世鼎)을 지평으로, 박세채(朴世采)를 장령으로, 목내선(睦來善)을 승지로 삼았다. 목내선이 사국(史局)에 있으면서 당시의 일을 숨김없이 사실대로 썼다가 크게 시배(時輩)의 미움을 받아 벼슬길이 막혔었다. 이때에 승지에 제수되었으나, 장령 신명규(申命圭)가 상소하여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고 하며 심지어 전조를 잘못 의망하였다고까지 논박하니, 목내선이 사직하여 체직되었고, 이조 참의 남구만(南九萬)은 여러 차례 상소하고 출사하지 않았다.
판부사 송시열이 또 차자를 올려 돌아가기를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연달아 차자를 보니 사정의 절박함을 알 만하다. 봄 추위가 매우 심하고 질병도 쾌유되지 못하였으니, 경은 안심하고 조리하라. 천천히 날씨를 보아 등대하였을 때 내 마땅히 다시 유시하겠다."
하고, 사관을 보내어 전유하였다.
2월 12일 을해
응교 남이성 등이 판부사 송시열이 돌아갈 뜻이 있다는 것으로 뵙기를 청하니, 상이 양심합에서 인견하였다. 남이성이 나아가 아뢰기를,
"듣건대 송시열이 행장을 꾸려 떠나려 한다고 하니, 국가에서 지성으로 불러왔는데 지금 그를 까닭없이 물러가게 할 수는 없습니다. 상께서 만류해야 하겠기에 뵙기를 청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찌하여 돌아가기를 결정하였는가?"
하였다. 남이성이 아뢰기를,
"무슨 일 때문인 지는 알 수 없으나 대개 근일에 건의하여 시행하는 것을 저해하는 논의가 있어서 그런 듯합니다. 상께서 송시열을 불러온 지 이미 여러 달이 되었고, 비록 위임하는 뜻은 있어도 굳게 다져 함께하는 성의가 없다면 역시 허례일 뿐입니다. 근래에 비록 강론하고 시행하는 일이 있다고 하지마는 혜정(惠政)을 하나 시행하거나 폐단을 하나 개혁한 것도 없이 간혹 떠도는 논의가 또한 덩달아 저해하며 흔들고 있습니다. 임금이 만일 위임하려고 한다면 떠도는 논의에 흔들리지 않아야 사업을 이루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떠도는 논의에 흔들려 그의 말을 채용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일을 행하는 것이 하루나 이틀에 갑자기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지금 결정하여 행하는 것도 있고, 또 논의하고 미처 시행하지 못한 것도 있는데 어찌 갑자기 돌아가기를 결심할 수 있겠는가. 내 성의가 부족한 소치이나 지금 과연 돌아갈 것을 결정하였다면 섭섭함이 어떠하겠는가."
하였다. 남이성이 아뢰기를,
"일을 하는 도리는 위에 확고한 뜻이 있다면 시끄러운 논의가 생겨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 전하가 명령을 엄중히 할 뜻이 없다면 의지가 확고하지 못하여 끝내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근일의 묘당 논의는 창고의 설치와 공물(貢物)의 감면, 이 두 가지 일인데 서필원이 이 두 일을 논박하여 ‘도성의 백성이 대대로 전해오던 생업을 잃었다.’고까지 하였습니다. 임금은 한 나라를 소유하고서도 오히려 만백성의 힘을 쏟아 자신을 봉양하게 할 수는 없는 것인데, 어떻게 온 나라의 힘을 쏟아 공물 주인(貢物主人)의 미려(尾閭)029) 를 채울 수 있겠습니까. 만일 국가에 기강이 있다면 이러한 말은 반드시 주상의 앞에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서필원이 갑자기 이러한 말을 하였으니, 사람들이 들뜬 논의를 선동하는 것이 당연하며 일을 담당한 신하가 불안해 하는 것도 형편상 당연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수백 년 된 일을 변혁하려 하니 어찌 잘잘못을 따지는 논의가 없겠는가. 비록 시끄러운 논의가 있다 하더라도 도외시하고, 할 수 있는 일만 해나간다면 떠도는 논의는 자연히 종식될 것이다."
하였다. 상이 입시 승지 목내선에게 이르기를,
"나의 뜻으로 판부사에게 가서 유시하기를 ‘지금 이미 돌아갈 뜻을 결정하였다는 말을 들으니, 내가 매우 섭섭하다. 승지를 보내는 것은 우연한 뜻이 아니니 내일 일찍 들어와 나로 하여금 만날 수 있게 하라.’고 하라."
하였다.
2월 13일 병자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와 삼사를 인견하고 판부사 송시열도 입시하라고명하였다. 상이 송시열에게 이르기를,
"경은 어찌 갑자기 돌아가려고 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신이 앞서 분황(焚黃)의 휴가를 청하였고 근일에 또 손자를 잃었으니, 일신의 사정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분황은 진실로 그만 둘 수 없는 일이지만 날씨가 아직 추우므로 즉시 허락하지 않는다. 지금 상의하여 시행할 일이 있으니, 지금 돌아가더라도 만일 온양(溫陽)의 행차 때에 다시 서로 만나 오게 된다면 다행이겠다."
하니, 대답하기를,
"그때 만일 질병이 없다면 감히 오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송시열이 인하여 아뢰기를,
"신이 전날 조참(朝參) 때 진달한 여러 궁가(宮家)의 일은 위에서 분명한 하교가 있었고, 또 내수사의 일을 진달하였는데, 하답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신의 뜻은 혁파하려는 것이 아니고, 내수사가 비록 이조에 소속되어 있으나 내관이 주장하고 있으니, 이것이 온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궁가와 부마에 관한 일에 있어서도 모두 마음에 불안한 점이 있어서 변통하여 보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참 때 경이 이 말을 하였는데 말이 길어서 매듭짓지 못하였고, 그 후로 경이 들어오지 않았으므로 내 생각을 다 털어 놓지 못하였다. 선조(先朝)에서 부마들에게 저택(第宅)에서 편히 살게 한 것이 10여 년인데 나에 이르러 일시에 거두어 옮기게 한다면 내 마음이 편하겠는가."
하니, 송시열이 아뢰기를,
"선조께서 말년에 ‘만일 사사의 폐단을 없애려고 한다면 먼저 내게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였으니, 지금 성상의 효성도 역시 선왕의 뜻을 계술하는 것에 있습니다. 비록 공주에게 거처를 옮기게 하더라도 어찌 살 만한 곳이 없겠습니까. 청평위(靑平尉) 등의 집이 궁궐 터에 있는데 이것은 매우 온당하지 못합니다. 이와 같이 한다면 경복궁(景福宮)의 옛터에다가도 모두 여러 궁가의 집을 짓게 하시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찌 그렇겠는가. 선왕도 이것을 염려하시어 정침(正寢)의 터만은 비워두게 한 것이다."
하였다. 송시열이 아뢰기를,
"이미 ‘성지(聖智)가 운운했다.’라는 말들이 있으니, 어찌 헐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성지는 광해 때의 중이다. 일찍이 ‘인왕산(仁王山) 아래 왕자의 기운이 있다.’고 하였으므로 광해가 인경궁(仁慶宮)을 창건하였는데 인조 계해년에 헐고 그 터를 비워 두었으므로 한 말이다.】 홍중보가 익평위(益平尉)에게 옮겨서 나오게 하려는 것은 그 의사가 옳은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는 홍중보가 잘못이라고 여긴다. 불안하다면 선조 때 사양할 일이지 그때는 묵묵히 있다가 지금 와서 거처함이 부당하다고 하니, 나는 실로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은 줄 모르겠다. 앞으로는 공주의 집을 축조할 때는 모든 것을 《대전(大典)》에 의거하여 행한 다음에야 내 뜻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전일에 축조하였던 것을 헐지 않고 내게서부터 법을 세우도록 하겠다."
하였다. 송시열이 또 아뢰기를,
"《논어》에 ‘천승(千乘)의 국가를 다스리되 쓰임새를 절약하고 사람을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신이 매번 쓸데없는 비용을 절약하라고 진달하였는데 크게 감소하거나 생략한 것이 없습니다. 송엽(松葉), 도지(桃枝), 도판(桃板), 춘번(春幡), 인승(人勝), 세화(歲畵), 진배(進排) 등의 일은 역시 쓸데없는 비용으로 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을 혁파하기가 어찌 어렵겠는가. 모두 혁파하도록 하라."
하였다. 집의 김만균(金萬均)이 아뢰기를,
"김응하(金應河)는 바로 천하를 위하여 절의를 세운 사람입니다. 사우(祠宇)는 건립하였으나 아직 시호를 내리지 않았습니다. 비록 시장(謚狀)은 없어도 곧바로 특별히 시호를 내리시어 절의를 장려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김만균이 또 아뢰기를,
"병자년의 난리에 정세규(鄭世規)가 충청도 감사로 참전하였는데, 전쟁에 패하였을 때 황박(黃珀)이란 사람은 당상관으로 지키던 곳에서 전사하였으니, 본도에 물어서 포장하여 증직하여야 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송시열이 아뢰기를,
"이것은 직산(稷山)에 도착하였을 때 방문하여 포장하여 증직한다면 더욱 좋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또 김만균의 말로 이시직(李時稷)의 자손을 녹용(錄用)하게 하였고, 또 교리 윤심(尹深)의 말로 정백형(鄭百亨)에게 증직(贈職)을 명하였다. 이시직과 정백형은 모두 강도(江都)에서 사절한 사람이다. 김만균이 또 아뢰기를,
"태안(泰安)과 안흥(安興)은 강도의 요충지이므로 군량과 무기를 비치한 것이 많은데, 만일 변란이 있을 때 적의 수중에 떨어지게 된다면 비단 군량과 무기만을 잃을 뿐만 아니라 강도의 뱃길이 막힐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중군(中軍)을 혁파하고 곤수(閫帥)를 지낸 사람을 군수로 삼는 것이 합당할 것 같습니다."
하였고, 송시열은 아뢰기를,
"김만균의 부친 김익희(金益熙)가 매번 이것을 염려하였습니다."
하였다. 허적이 뒷날 이것에 의하여 차견하자고 하니, 상이 따랐다.
오정일(吳挺一)을 공조 판서로, 민유중(閔維重)을 대사성으로 삼았다.
지평 김세정(金世鼎)이 아뢰기를,
"국가를 다스리는 도리는 현인을 신임하여 의심하지 않는 것보다 앞설 것이 없고, 현인을 신임하는 방법은 간사한 이를 제거하여 의심치 않는 것보다 먼저할 것이 없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유현(儒賢)을 등용하여 그의 말과 계획을 듣고 채용하여, 베풀고 설치하는 모든 것이 지극한 이치가 아님이 없으니, 온 나라 안이 눈을 닦고 치화(治化)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형조 판서 서필원은 본래 학식도 없이 한갖 거칠은 견해만 믿고 겉으로 광직(狂直)함을 칭탁하고는 몰래 간사한 계책을 펴려는 것입니다. 종전의 의론은 윤리를 망쳐 청의(淸議)에 죄를 지은 지 오래 되었습니다. 지금 한두 가지의 일을 헤아려 변통하는 일로 인하여 이득을 잃은 간민과 무식한 사부(士夫)들이 얽혀 선동하여 뜬 소문이 나날이 불어나 유현을 모함하고 있으나 누구도 감히 먼저 발하지 못하고 있는데, 서필원이 바로 이러한 때에 감히 사론(邪論)을 아뢰어 앞장서서 깃발을 세우고, 심지어는 불충(不忠)이라는 두 글자를 대신과 중신에게 가하였습니다. 그 주된 뜻은 오로지 건의한 유현을 흔들어 조정에 편안히 있지 못하게 하려는 것에 있습니다. 그 음험하고 현인을 방해하는 행동을 분명히 분변하고 통척해서 좋아하고 싫어함을 보이고 인심의 향방을 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관작을 삭탈하여 문밖으로 내치소서."
하니, 상이 파직을 명하였다. 또 집의 김만균이 안진과 민희 등에 관한 논계를 갑자기 멈춘 실수를 거론하여 체차하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누차 계문하니, 이에 따랐다. 안진을 파직하고 추고하라는 논계와 민희에게 제수된 판윤을 개정하라는 일을 다시 끄집어내 누차 계문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이때 서필원을 논핵하는 것이 나날이 준열해가니, 좌의정 허적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대계(臺啓)의 걸맞지 않음이 이와 같으니, 송공(宋公)이 어찌 떠나지 않겠는가."
하였다.
2월 14일 정축
판부사 송시열이 차자를 남기고 떠나니, 상이
"다시 대면하고 나서 거취를 결정하라."
고 답하고, 승지를 보내어 전유하였다.
도승지 장선징, 좌승지 송시철, 우승지 이익, 우부승지 박세성, 동부승지 목내선, 응교 남이성, 교리 윤심·이규령 및 부수찬 김만중 등이 뵙기를 청하니, 상이 양십합에서 인견하였다. 장선징이 아뢰기를,
"어제 송시열을 인견하고 상께서 면유하셨으므로 떠나려는 마음을 돌린 줄만 알았는데 아침에 남긴 차자를 보니 진실로 놀랍고 섭섭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 듣건대 이미 출발하였다고 하니 놀랍고 섭섭함을 말할 수 없다."
하였다. 장선징이 아뢰기를,
"들으니, 어제 경연에서 송시열이 여러 궁가의 일을 진달하였다고 합니다. 이미 분수를 넘어 진달하였다면 비록 차마 할 수 없는 일이 있더라도 여러 공주가 끝내 그대로 거처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선왕이 여러 궁가들이 제도에 넘친 것을 훼철해야 한다고 하교했다고 하는데, 이는 그렇지 않다. 그들이 안주하여 살아오기를 혹 10년이 지났고, 혹은 7, 8년이 지났다. 지금 와서 사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고 하여 옮기게 한다면 혹시 그러할 수 있다. 그러나 선조(先朝)에서 지어준 것이 부당하다고 하여 하루 아침에 훼철하고 옮기게 한다면 내 마음이 어떻겠는가."
하였다. 김만중이 아뢰기를,
"충신은 국가를 떠나면서 그 명분을 더럽히지 않는다고 합니다. 송시열의 떠남이 비록 분황(焚黃)에 있다고는 하나, 궁가(宮家)의 일에서도 충분히 거취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상께서는 홍중보가 지금 와서 거처를 옮기게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하셨는데, 홍중보가 선조(先朝) 때 사양하지 않은 것이 잘못이지 오늘날 옮기고자 하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그러므로 전하의 이 말은 남의 개과 천선하는 길을 막는 것이 되니 실로 온당하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노하여 이르기를,
"김만중의 말이 옳은지 나는 모르겠다. 홍중보가 만일 선조 때라고 한다면 어찌 감히 자기의 자식이라고 하여 그에게 옮기라고 하겠는가. 결코 입밖에 내지 못할 일을 가지고 김만중이 나를 두고 천선(遷善)의 길을 막는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너는 어질고 나는 혼미하여 모른다는 것인가."
하니, 좌우가 모두 상의 하교가 온당하지 못하다고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홍중보가 선조 때 사양하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하는 것을 김만중이 덮어주어 잘못이라고 하지 않고 도리어 천선이라고 하니, 천선이 어찌 이런 것이겠는가."
하였다. 상이 이익을 보내 송시열에게 타이르기를,
"얼마 전에 이미 나의 생각을 차자의 비답에서 대략 언급하였다. 어제 면유할 때 경이 돌아갈 뜻을 결정한 줄 몰랐고 또 경연에서 단서를 발하여 놓고 다하지 못한 것이 있으므로 후일에 다시 생각한 바를 다하리라고 여겼는데, 지금 들으니, 갑자기 돌아가기를 결정하였다고 하니, 비단 나의 마음이 허전할 뿐만 아니라 나랏일이 앞으로 와해되게 되었다. 떠나려는 마음을 돌려 나로 하여금 조용히 서로 면대할 수 있게 하라."
하였는데, 이익이 전교를 받고 출발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송시열이 효종 대왕의 지우를 받고 시골에서 일어나 국사를 담당하자 한 때 사람들의 중망을 받았다. 기해년에 물러간 후로 상이 불렀지만 송시열이 죄를 자책하고 나오지 않았다. 무신년 가을에 상이 온천에 행차하니, 송시열이 행궁(行宮)에 와서 뵈었다. 상이 그와 함께 조정으로 돌아와 다시 대석(台席)에 두었으나 송시열은 강을 건너서 도성을 떠나기로 스스로 결정하니, 상이 부득이 체직을 허락하고는 들어와 국사를 논의하게 하였다. 그런데 송시열의 일처리는 조용하게 헤아려보는 뜻이 적고 의견을 세울 때 급박하고 거칠은 습성이 있어서 싫어하는 자가 많았다. 주상이 비록 예우는 융숭하게 하였으나 고식적인 것에 안주하여 진작하는 뜻이 없었으며, 대신도 함께 힘써 같이 일하려는 사람이 없었다. 이 때문에 물러가기로 결심하고 사직하지도 않고 돌아간 것이다. 대체로 송시열은 뜻은 크나 재주가 치밀하지 못하고 성질이 편협하였으므로 끝내 성취함이 없었다. 송시열이 올라왔을 때 이경휘(李慶徽)가 찾아가 보았다. 송시열이 도움말을 청하자, 이경휘가 말하기를 "공(公)의 집에 출입하는 사람으로 어느 누가 정직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마는 공은 선입견을 주장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왕정(王庭)에 올리는 말은 모두 중요한 것이겠지만, 공은 대체를 잡아 논의하고 사소한 것은 생략하여 인정에 알맞게 하기 바랍니다." 하였다. 이때 김익훈(金益勳)과 김익렴(金益廉)이 모두 행실이 나쁘다고 사람들에게 미움을 사고 있었는데 송시열과의 사이가 매우 친밀하여 날마다 쓸데없는 의견을 올렸다. 송시열은 또 선입견을 주장하는 병통이 있어서 크고 작은 모든 일을 기어이 고치려고 하므로 이경휘의 말이 이러하였다. 송시열은 그 말에 깊이 감복하면서도 제대로 쓰지를 못하였다. 송시열이 중한 이름으로 조정에 있으면서 당시의 국사를 담당하니 일 꾸미기를 좋아하는 이들이 날마다 찾아오고 명예를 구하는 이들이 날마다 알려왔다. 김징(金澄)과 같은 무리는 항상 자리를 뜨지 않았는데 이민서(李敏叙)만은 홀로 가지 않으면서 "이름이 있는 곳에는 선비는 삼가 피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6책 16권 21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615면
【분류】왕실-국왕(國王) / 왕실-종친(宗親) / 주생활-가옥(家屋) / 역사-편사(編史)
사신은 논한다. 송시열이 효종 대왕의 지우를 받고 시골에서 일어나 국사를 담당하자 한 때 사람들의 중망을 받았다. 기해년에 물러간 후로 상이 불렀지만 송시열이 죄를 자책하고 나오지 않았다. 무신년 가을에 상이 온천에 행차하니, 송시열이 행궁(行宮)에 와서 뵈었다. 상이 그와 함께 조정으로 돌아와 다시 대석(台席)에 두었으나 송시열은 강을 건너서 도성을 떠나기로 스스로 결정하니, 상이 부득이 체직을 허락하고는 들어와 국사를 논의하게 하였다. 그런데 송시열의 일처리는 조용하게 헤아려보는 뜻이 적고 의견을 세울 때 급박하고 거칠은 습성이 있어서 싫어하는 자가 많았다. 주상이 비록 예우는 융숭하게 하였으나 고식적인 것에 안주하여 진작하는 뜻이 없었으며, 대신도 함께 힘써 같이 일하려는 사람이 없었다. 이 때문에 물러가기로 결심하고 사직하지도 않고 돌아간 것이다. 대체로 송시열은 뜻은 크나 재주가 치밀하지 못하고 성질이 편협하였으므로 끝내 성취함이 없었다. 송시열이 올라왔을 때 이경휘(李慶徽)가 찾아가 보았다. 송시열이 도움말을 청하자, 이경휘가 말하기를 "공(公)의 집에 출입하는 사람으로 어느 누가 정직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마는 공은 선입견을 주장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왕정(王庭)에 올리는 말은 모두 중요한 것이겠지만, 공은 대체를 잡아 논의하고 사소한 것은 생략하여 인정에 알맞게 하기 바랍니다." 하였다. 이때 김익훈(金益勳)과 김익렴(金益廉)이 모두 행실이 나쁘다고 사람들에게 미움을 사고 있었는데 송시열과의 사이가 매우 친밀하여 날마다 쓸데없는 의견을 올렸다. 송시열은 또 선입견을 주장하는 병통이 있어서 크고 작은 모든 일을 기어이 고치려고 하므로 이경휘의 말이 이러하였다. 송시열은 그 말에 깊이 감복하면서도 제대로 쓰지를 못하였다. 송시열이 중한 이름으로 조정에 있으면서 당시의 국사를 담당하니 일 꾸미기를 좋아하는 이들이 날마다 찾아오고 명예를 구하는 이들이 날마다 알려왔다. 김징(金澄)과 같은 무리는 항상 자리를 뜨지 않았는데 이민서(李敏叙)만은 홀로 가지 않으면서 "이름이 있는 곳에는 선비는 삼가 피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상이 송시열의 질병이 쾌차하지 않아서 돌아가는 길에 덧날까 염려하여, 어의(御醫)을 보내 약물을 가지고 가서 간병(看病)하게 하였다.
사간 이유(李秞), 정언 신정(申晸)·최상익(崔商翼)이 서필원의 파직을 청하는데 연약하게 한 잘못이 있다 하여 인피하였다.
지평 조원기가 서필원을 삭출하라는 논의에 이의를 세웠다는 것으로 인피하였다.
이지온(李之馧)을 형조 참판으로, 이단하(李端夏)를 이조 정랑으로 삼았다.
2월 15일 무인
상이 선정전에 나아가 종실 유생의 강경(講經)에 친히 임하였다.
상이 경연에서 승지 이익에게 이르기를,
"판부사가 내려갈 때 말을 내주고 호송할 것을 양도 감사에게 하유하라."
하고, 또 승지 박세성에게 말하기를,
"나의 허전한 회포를 가서 유시하라."
하였다.
지평 김세정이 조원기가 이의를 세웠다는 것으로 인피하였다.
2월 16일 기묘
사간 이유, 정언 신정·최상익 등이 혐의가 있어 감히 처치하지 못하겠다는 것으로 서로 이어 인피하였다.
2월 17일 경진
영의정 정태화가 18번째 정사하니, 승지를 보내어 돈유하였다.
호조 판서 민정중이 사직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민정중이 송시열과 함께 일을 하였는데 송시열이 물러나 돌아가자, 민정중이 거취를 함께 하고자 하였으므로 사직하였다.
관학 유생들이 소를 올려 송시열을 머물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답하였다.
"너희들의 나라를 근심하는 정성을 가상하게 여긴다. 내 마땅히 그에게 정성과 예를 다하겠다."
옥당이 처치하기를,
"서필원은 거치른 마음과 편벽된 견해로 총애를 믿고 기세를 펼치며 사건을 논의한다고 빙자하여 고의적으로 저해하고 동요하였으니, 현인을 방해하고 국가를 병되게 하는 죄를 바로잡고자 하는 것이 과중한 율법이 아닙니다. 그런데 지평 조원기는 미친듯이 장려하고 과격하게 폄하하였으니, 억양하고 두루 막는 그 태도가 가증스럽습니다. 대각(臺閣)의 논의가 한결같이 공의(公議)를 따른다면 가벼운 것에서 무거운 것으로 들어감은 옳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지평 조원기를 체차하고 지평 김세정, 사간 이유, 정언 신정·최상익은 출사케 하소서.
또한 생각건대, 근래에 일을 회피하는 풍조가 대각의 고질적인 폐단이 되어 무릇 의논이 있을 때면 그 난이도를 보아 교묘하게 나아가거나 회피하고 있으니, 그 습성을 자라게 해서는 안 됩니다. 장령 이규진(李圭鎭)은 직책을 제수받은 후로 잠시 나왔다가 다시 들어갔고, 근일에 와서는 처음에는 의질(疑疾)로, 나중에는 신병(身病)으로 두드러지게 회피하여 이틀 밤이 지나 대각의 처치를 하게 하였으니, 연약하고 구차하여 대직에 그대로 있게 할 수 없습니다.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2월 18일 신사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소대(召對)하고 《심경》·《강목》을 강하였다. 지평 김세정이 탑전에서 서필원의 삭출을 아뢰었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전 감사 민점이 법을 어기고 사정을 따라 죄없는 백성을 형살(刑殺)한 정상은 이미 전일의 계사에서 모두 말했습니다. 신이 본도의 감사 여성제(呂聖齊)의 사핵 장계(査覈狀啓)를 보니, 이학년(李鶴年)의 아들 이연춘(李連春), 손자 이응립(李凝立), 외증손 서충립(徐充立), 서충립의 아들 서득생(徐得生)이 모두 군적(軍籍)에 들었으니, 합하여 계산하면 4대에 양역(良役)한 것이 이미 73년이 지났습니다. 이것으로 말한다면 이학년과 이단지(李丹之)가 비록 이광윤(李光胤)의 노비라고 하여도 지금 와서는 햇수가 오래 되었고, 여러 세대에 양역을 치룬 후이니 환천(還賤)하는 것은 부당하며 서충립의 9남(九男)이 곤장 아래 죽은 사실이 역시 명백합니다. 민점이 일방적으로 친척의 부탁을 받고서 법을 어기고 사정을 따라 함부로 인명을 살해한 정상이 구구절절이 놀라우며, 이광윤 등이 법을 무시하고 청탁하여 비리를 자행한 정상도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민점을 나문하여 정죄하고, 이광윤·홍신(洪愼) 등은 본도에서 법에 의하여 죄를 부과하게 하고, 학년의 자손을 모두 양역에 그대로 소속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전주 부윤(全州府尹) 안진(安縝)을 파직 추고할 일로 연달아 아뢰니, 상이 우선 추고만 하라고 하였다. 또 수원 부사(水原府使) 심지명(沈之溟)을 파직하여 서용하지 못하게 하라고 청하기를,
"본래 재주와 식견이 없는 데다 나이 또한 늙었으니, 기보(圻輔)의 중요한 지역을 결코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대계(臺啓)가 거듭 발한 후에 버젓이 하직(下直)하니, 염치없는 모습이 더욱 놀랍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수령으로 소를 올려 사면하지 못하였다면 그 형세가 하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논핵할 죄가 없다. 비록 노쇠한 것을 가지고 말을 하지마는, 진실로 합당한 사람이 아니라면 나이가 아무리 젊더라도 진실로 불가하며, 만일 합당하다면 늙었다 해서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전일에 체차하라는 논의가 본디 옳지 않았기 때문에 대신이 비록 체차를 윤허하라고 청하였지만 특별히 부임하게 한 것이다. 지금 어찌 버젓이 하직하였다는 것으로 죄를 줄 수 있겠는가. 심지명이 얼마 전에 양주(楊州)를 맡아서 이미 치적이 있었는데 노쇠하였다고 논핵하는 것은 그 의도를 모르겠다. 사람을 논의하는 도리상 어찌 이렇듯이 업신여긴단 말인가."
하니, 김세정이 엄지를 받았다고 하여 인피하고 나갔다. 교리 이규령이 아뢰기를,
"세자를 보도하는 책임은 마땅히 노성한 숙유에게 있으니, 앞으로 행차가 있을 때 찬선(贊善)을 서울에 머물게 하여 세자를 보도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웃으면서 이르기를,
"이규령의 말이 내 뜻과 맞다."
하고, 인하여 송준길에게 유시하니, 대답하기를,
"신이 어찌 감히 감당하겠습니까."
하고, 인하여 질병의 증세로 보아 머물기 어려움을 계달하고, 또 아뢰기를,
"송 나라 때 범중엄(范仲淹)이 도성을 떠나니, 윤수(尹洙)가 거취를 같이 하기를 청하였습니다. 신이 이 뜻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행차할 때 거가를 모시고 가는 것이 매우 합당하기 때문에 번거롭게 진달하지 않았습니다. 보도의 책임은 조복양(趙復陽)이 지고 있으니, 이 사람에게 위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이규령 및 이민서가 모두 돌아감을 윤허하여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진달하였다. 송준길이 아뢰기를,
"지금 송시열이 돌아간 일에 있어 신은 그가 떠나야 할 만한 의리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반드시 돌아가야 할 의리가 없는데 갑자기 물러나기를 결정하니, 내가 매우 허전하다."
하였다. 송준길이 아뢰기를,
"옛 군자는 기미를 보고 행차하여 종일토록 기다리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송시열이 무슨 기미를 보고 돌아간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대단한 기회입니다. 상께서 학문과 사공(事功)이 모두 도리와 부합된다면 사람들은 모두 송시열이 떠난 것을 지나치다고 할 것이며, 만일 전일의 공업을 모두 폐하고 새로운 소득이 없다면 비단 오늘날 뿐만 아니라 후세의 사람들도 모두 송시열이 떠난 것을 훌륭하다고 할 것입니다. 서필원의 일로 인하여 삼사가 거듭 발론을 하는데 서필원의 장단점은 신이 진달한 바이나 의도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본래의 실정이 아닙니다."
하였다. 이민서가 아뢰기를,
"서필원이 반드시 유현(儒賢)을 쫓아낼 의도가 있다는 것은 아니나 사람됨이 집요하고 일하는 것이 어긋나서 마침내 유현으로 하여금 조정에서 불안하게 하였으니, 헌부의 논의가 지나친 것이 아닙니다. 위아래가 서로 오래 버틸 수 없으니, 속히 따르셔서 좋아하고 싫어함을 분명하게 보이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그의 관직을 혁파하였다. 그런데도 계사의 내용이 너무 지나치므로 따르지 않는다."
하였다. 송준길이 아뢰기를,
"송시열처럼 함께 국사를 이룰 만한 이도 앞질러 물러갔습니다. 신같은 사람은 마땅히 물러나야 하는데도 물러나지 않고 있으니,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하니, 상이 다시 세자의 서연(書筵)을 가지고 권면하며 머물게 하였다.
사간 이유, 정언 신정·최상익 등이 아뢰기를,
"서필원이 하나의 일을 논의한다는 핑계로 남을 저해하는 뜻을 갖고 있으며, 가부를 논할 때는 짐짓 다른 의견을 내고 상소할 때는 패려함을 공공연하게 부려 마침내 불충이라는 죄를 대신에게 가하였습니다. 또 여염간의 선동하는 말로 장황하게 기치를 세워 상을 동요하게 하여 국가의 체모를 존엄하지 못하게 하고 어진 보필이 나라를 떠나게 하여 공의가 일제히 격동되어 놀라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만일 선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하는 뜻을 분명히 보여 허풍을 치고 현혹시키는 죄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기탄없이 현인을 방해하는 습성을 징계할 수 없을 것입니다. 관작을 삭탈하여 문외로 출송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전강(殿講)에서 수석(首席)한 동원 부정(東原副正) 이집(李潗) 등 6명은 모두 가자(加資)하고, 영창 부수(靈昌副守) 이익철(李翼哲) 등 10명은 1급씩 승급하고, 그 이하는 상을 차등있게 주었다. 유생 강산두(姜山斗) 등 3명은 아울러 회시(會試)에 직부하게 하라고명하였다.
2월 19일 임오
상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소대하고 《심경》과 《강목》을 강하였다. 좌의정 허적이 상께 아뢰기를,
"정릉에 정자각을 중건할 때 정부에서 봉심하는 거조가 있어야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예조에 분부하라고 하였다. 허적이 또 아뢰기를,
"수원 부사 심지명(沈之溟)이 이번에 또 대론(臺論)을 받았으니, 부임하기 어려운 형편입니다. 지금 거둥이 임박한 때이니 즉시 체차하여 모든 일을 군색한 걱정이 없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계에 이른바 ‘버젓이 기탄하는 것이 없다.’는 말은 진실로 터무니없다. 사세가 이러하니 체차하라."
하였다. 병조 판서 홍중보가 청하기를,
"경기의 기병과 보병의 모자라는 숫자를 3년의 기한을 주어 각읍으로 하여금 충정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명하기를,
"각읍의 쇠잔하고 융성함에 따라 분정하여 보충하게 하되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자는 무거운 벌을 주어라."
하였다. 홍중보가 또 평안도의 인재를 뽑는 일로 아뢰기를,
"북도의 예에 의거하여 3백 인을 뽑아야 합니까."
하니, 상이 1백 명을 더 뽑으라고 하였다. 홍중보가 판의금의 체직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도승지 장선징, 교리 이규령이 춘당대(春塘臺)에서 시재(試才)할 때 유생도 함께 거행하기를 청하였다. 상이 좌우에게 물으니, 모두가 옳다고 하는데, 좌의정 허적이 불가하다고 하였다. 좌참찬 송준길이 힘껏 청하였으나 허적은 끝까지 명령을 내린 후 중도에 변경할 수 없다고 하였다. 상이 마침내 허적의 말을 따르자 송준길이 물러나서 말하기를,
"오늘에야 상신(相臣)이 중한 줄 알았다."
하였다.
간원이 김세정의 출사를 청하기를,
"한때에 재촉한 것은 비록 조정의 명이 있었지만 그가 염우(廉隅)로 책망한 것은 불가한 일이 아닙니다."
하니, 상이 사실을 잘못 알았다고 하였다. 정언 최상익이 이 때문에 인피하였다.
신명규(申命圭)를 장령으로, 홍주국(洪柱國)을 지평으로, 박증휘(朴增輝)를 집의로 삼았다.
사간 이유 등이 상차하여 신덕 왕후(神德王后)를 태묘(太廟)에 제사지내는 일로 논의하기를,
"삼가 생각건대, 신덕 왕후는 성조(聖祖)가 등극하던 날에 중국에서 내려주는 고명(誥命)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중전의 자리에 올라 한 나라의 국모로 지내시기 10여 년이었으며, 승하하신 후에는 예관이 휘호를 올리고 원릉에 의물(儀物)을 갖추었습니다. 당시 높이 받드는 예는 신의 왕후(神懿王后)와 차등이 없었고, 잠언(箴言)이 유익하다는 칭송과 좋은 보좌(輔佐)를 잃은 것 같다는 탄식이 분명하게 비문에 실려 있습니다.
나라를 세운 정비(正妃)의 존귀함으로 문왕(文王)의 비(妃)처럼 훌륭한 덕의 아름다움을 간직하여 살아서는 책봉을 받았고, 죽어서는 아름다운 칭호를 더하였는데도 아직 태묘에 봉향하는 의전을 거행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성조(聖朝)의 불행이며 천고의 유한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전하께서는 이미 대신의 논의를 받아들여 능묘(陵廟)의 제도를 회복하였으니, 차례차례 당연히 행하여야 할 의례를 무슨 어려움 때문에 아직도 결정하지 못하십니까. 전하가 선조 때에 관계된 일이라고 여기시고 조심하는 뜻이 있어서 입니까. 신들이 삼가 유첩(遺牒)을 살피건대, 태종 대왕이 신덕 왕후를 섬긴 것은 지성이었다고 하겠습니다. 정성스러운 봉양은 평소에 효성을 다하였고, 몸소 향축(香祝)을 전하여 제사를 올리는 데 경의를 다하여 생전과 사후에 섬기는 예가 진실로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단지 일시적인 제신의 잘못으로 인하여 전례가 폐하여 이륜(彛倫)이 행하지 못하고 묘의(廟儀)가 결손되어 인정이 수심에 차 있게 되었으니, 이것을 생각하면 몹시 마음이 아픕니다.
지금 듣건대 장차 《실록》을 상고해 보게 한다고 하니 대체로 그 일을 중히 여겨서입니다. 일찍이 선묘조에 대신이 건의하고 삼사는 대궐 뜰에 엎드려 청하였으며, 아래로는 낭서(郞署)와 위포(韋布)에 이르기까지 대궐에 와서 아뢰자, 역시 《실록》을 상고해 보라는 하교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끝내 그 의식을 거행하지 못한 것은 오늘날의 일처럼 지나치게 신중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인심은 갈수록 더욱 격동되었고, 온 나라 모든 사람들이 기가 막혀 3백 년을 하루같이 눈물을 짓고 있으니, 인정이 같다는 것을 이것만으로 징험할 수 있습니다. 임금의 계술하는 도리는 의리의 합당함을 얻는 것에 있고 다만 옛일을 고수하는 것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선유(先儒)의 말에 ‘준수할 것을 준수하는 것이 계술하는 것이고, 변통해야 될 것을 변통하는 것도 역시 계술이다.’고 하였습니다. 준수하는 것만이 계술인줄 알고 변통하는 도리를 알지 못한다면, 무왕(武王)의 정벌은 문왕(文王)을 잘 계술하지 못한 것이며 성왕(成王)이 선공(先公)을 높히는 것도 역시 무왕을 잘 계술하지 못한 것이니, 어찌 같은 기준으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옛날 중중 대왕이 의리의 정당함에 매우 밝아서 고치지 않는다는 혐의에 구애되지 않고 소릉(昭陵)의 억울함을 하루 아침에 풀어주어 1백 년이 된 오늘날까지도 오히려 사람의 입에 전송되고 있으니, 이것은 실로 오늘날 전하께서 본보기로 삼아야 됩니다. 어찌 선조(先朝)에서 행하지 못하였던 일이라 핑계대고 한결같이 망설이고 있습니까.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속히 대신과 예관에게 명하여 빨리 의정하여 대례를 완비해서 여정(輿情)을 위로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2월 20일 계미
사간 이유, 정언 신정이, 김세정의 처치에 사실을 잘못 알았다는 비답을 받았다고 하여 인피하였다.
행 대사간 강백년(姜栢年)이, 옥당에서 이규진(李奎鎭)을 체차시킬 것을 논의하면서 대각이 일을 회피한다는 책망이 있었다는 것으로 인피하였다.
유철(兪㯙)을 호조 참판으로, 이단상(李端相)을 병조 참의로, 김만균(金萬均)을 필선으로 삼았다.
2월 21일 갑신
큰 바람이 불었다.
지평 김세정이 패초에 나아오지 않고 장황한 말로 인피하니, 상이 일렀다.
"근일에 잘못을 꾸며 스스로 옳다고 하는 습성이 풍조가 되었으니, 진실로 한심하다. 이 일이 당초에 조정의 명령을 깨닫지 못하고 하였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조정의 명령이라고 핑계하여 수령을 죄준다면 조정의 명령을 속이고 교묘히 말을 꾸미는 것이니, 어찌 놀랍지 않겠는가. 사양하지 말라."
옥당이 처치하여 정언 최상익, 사간 이유, 정언 신정, 대사간 강백년, 지평 김세정을 출사시킬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판부사 송시열이 중도에서 소를 올리니, 상이 답하기를,
"경이 도성을 떠난 지 10년 만에 다행히도 지난 가을에야 비로소 들어와 함께 국사를 다스리게 되어 매우 기쁘게 여기고 있었는데 어찌 오늘날 이처럼 급하게 떠날 줄 알았겠는가. 나는 매우 부끄럽게 여기며 탄식하고 있다. 내 마음을 유념하여 안심하고 잘 조섭해서 후일에 면대할 기약을 어기지 않게 하라."
하고, 사관을 보내 권유하였다.
2월 23일 병술
관리를 보내 전곶 목장(箭串牧場)에서 마조제(馬祖祭)를 행하게 하였다.
김좌명(金佐明)을 판의금으로, 조복양(趙復陽)을 대사헌으로, 김만중(金萬重)을 헌납으로, 조세환(趙世煥)을 지평으로 삼았다. 민시중(閔蓍重)을 초배하여 수원 부사로, 이동직(李東稷)을 초배하여 의주 부윤으로 삼았다.
《경국대전》 1백 권을 인쇄하여 중외에 반사하였다.
2월 24일 정해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니, 약방이 들어와 진찰한 다음 침을 맞았는데 눈병 때문이었다. 병조 판서 홍중보, 충청 감사 이숙(李䎘)을 인견하였다. 상이 명하기를,
"병조 참판을 추천할 때 대신과 의논하여 당상관으로 삼망(三望)을 갖추어 의망하라."
하였다. 상이 도승지 장선징에게 이르기를,
"모든 부마의 저택은 지난날 옥당이 청대했을 때 비록 진달한 말이 있었으나 그렇잖은 것이 있으니, 나의 주관은 결코 변경할 수 없다. 선조(先朝)의 의도가 어찌 우연한 것이겠는가. 나는 아름다운 취지를 준행할 뿐이다. 지금 와서 내가 어찌 차마 바꾸겠는가. 만일 이러한 뜻을 알리지 않는다면 역시 매우 부당한 일이다. 이 뜻으로 모든 부마를 패초하여 유시하라."
하였다. 상이 충청 감사 이숙에게 유시하기를,
"내가 질병 때문에 해마다 행차를 하고 있으니, 비록 폐단을 줄이려고 애쓰고 있으나 내 마음이 어찌 편하겠는가. 전임 감사가 비록 이미 헤아려 두었겠지만, 경은 폐단을 줄이는 것에 충분히 마음을 쓰라."
하고, 또 이르기를,
"모든 일은 진실에 힘써야 할 것이니, 일을 진실하게 힘쓰지 않는 것이 근일의 폐단이다."
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공산 현감(公山縣監) 정영한(鄭榮漢)을 가자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번 이 가자는 단지 모자란 군졸을 충정하였기 때문만이 아니다."
하고, 따르지 않았다. 누차 아뢰었으나 끝내 따르지 않았다.
이때 정영한이 공산 현감을 재임하면서 모자라는 군졸 3백 명을 일시에 충정하였고 또한 치적이 있어서, 허적 등이 말을 하여 상이 특별히 가자를 명한 것이므로 대계를 따르지 않았다.
유생의 관복(冠服)을 분포(粉袍)와 단령(團領) 및 일상시의 유건(儒巾)으로 정하였다. 이때 상이 홍문관에게 유생의 관복을 상고해 내게 하니 본관에서 《대명회전》과 본관에 소장하고 있는 여러 가지 유건 제도와 《의례문해(疑禮問解)》 등 서적을 상고하여 유복(儒服)을 논한 것을 뽑아내어 별도로 기록하고 도식을 갖추어 올리니, 상이 예관에게 품처하게 하였다. 후에 경연의 자리에서 상이 유생의 건복에 대하여 송준길(宋浚吉)에게 자문하여 분포(粉袍)와 단령(團領) 및 일상시의 유건과 입학례(入學禮)를 정하였는데, 해도에서 제대로 봉행하지 못하여 마침내 폐기되었다.
2월 25일 무자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사간 이유 등이 아뢰기를,
"모든 부마의 저택을 그대로 둘 수 없다는 일을 가지고 대신이 이미 건의하여 아뢰었으니, 그 뜻이 비단 칸수가 제도를 벗어난다는 것뿐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삼가 듣건대 어제 패초하여 전유하라는 명이 있었다고 하니, 신들은 못내 개탄스럽습니다. 성상의 이러한 일은 진실로 친애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지만 대신의 논의한 바가 이미 정당한 의리에 근거하였다면 법을 지켜야 할 입장에서 성상께서 결코 흔들리거나 변경하여서는 아니 되며, 분수에 있어서 신자인들 태연히 받아드릴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대신이 조정을 떠나서 막 수문(脩門)을 나서자, 그의 건백한 것이 도리어 헛된 투식이 된다면 비단 천박하고 자만한 모습이 성덕에 흠이 될 뿐만 아니라, 법제를 밝히는 뜻이 이로 인하여 폐기되어 뭇 심정이 허전해 하고 공의가 더욱 침울하게 될 것이니, 모든 부마의 저택을 그전대로 받아들이라는 명을 거두소서."
하고, 또 청하기를,
"식년(式年) 무과 시소(武科試所)의 차비관을 내삼청(內三廳) 및 다른 무관 중에 청렴하고 일을 아는 이로 각별히 가려 뽑으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아, 인심의 곱지 아니함이 어쩌면 이렇게까지 되었는가. 그 계사를 보니 대신이 조정을 떠난다는 이하의 끝 부분 17자는 감추어진 속뜻이 매우 한심스럽다. 임금과 신하의 사이는 서로 마음을 알아주는 것이 귀중하므로 면유할 때 내 뜻을 솔직히 털어놓아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 그대들의 말이 비록 이러하나 내 어찌 마음을 동요하겠는가. 내가 선왕의 뜻도 봉행하지 못하여 흔들리고 변경한다고 하면 그밖의 것이야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내가 주장하는 것이 우연한 뜻이 아니다. 이미 굳게 지키고 있으니, 어찌 그대들의 말을 염려하겠는가. 끝부분의 일은 병조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겠다."
하였다. 정언 최상익(崔商翼)이 엄한 비답을 받았다고 하여 인피하니, 상이 다시 엄한 말로 답하였다.
2월 26일 기축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끝나고 나서 좌참찬 송준길이 뵙기를 청하고, 입시하여 아뢰기를,
"신이 노쇠하고 무능한 몸으로 머물러 있으나 다른 도움은 없고 오직 허물을 없애며 빠뜨린 것을 줍는 것으로 직분을 삼고 있습니다. 근래에 연속으로 《심경》 정심장(正心章)의 ‘분노함이 있으면…’이라는 뜻을 강론하였는데 며칠 사이에 상께서 말씀하실 때 자칫 불평하는 의사가 있으니, 어쩌면 「…함이 있으면」이라고 하는 데에 병통이 있는 것은 아닙니까. 신은 중화(中和)의 지극한 공효로 전하께 바라는데 바라는 바와 다르므로 감히 아뢰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김세정이 심지명을 논핵할 때 처음에 염우(廉隅)로 책망한 것은 혹 조정의 명령이 있었던 것을 알지 못하고 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나, 하교한 후에 인피하면서 자신이 옳다고 하므로 내가 말했던 것이다. 간원의 처치를 내가 잘못 알았다고 비답한 것은, 간원의 관리는 내가 하교한 것을 참고하여 처치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아니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정의 명이라고 하여도 버젓이 기탄함이 없이 남을 논핵하므로 나의 하교가 그러하였다."
하니, 송준길이 아뢰기를,
"김세정이 심지명을 논핵한 것은 본래 합당하지 않았으나 전하께서 김세정에게 내린 비답도 역시 제목에 맞지 않았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김세정이 꾸며서 자신을 발명하는 말이 있으므로 그렇게 비답하였던 것이다."
하였다. 송준길이 또 아뢰기를,
"어제 대계에 내린 비답을 보니 더욱 온당하지 못하였습니다. 이 일의 자초지종을 전하께 자세히 진달하겠습니다. 지난 선조조(先祖朝)에 어떤이가 부마들이 불안해 한다는 뜻으로 진달하니 선왕이 ‘나는 합당하다고 여기고 노성(老成)한 신하에게 문의하니 모두 합당하다고 하므로 그렇게 하였다.’고 하였는데, 노성한 신하란 바로 조석윤(趙錫胤)·김익희(金益熙)·이시방(李時昉)이었습니다. 선왕이 이 세 신하에게 문의하니 이시방과 김익희는 옳다고 하고 조석윤은 탑전에서 다툴 수 없어 물러나 소를 올려 옳지 않다고 하였는데 선왕이 조석윤의 말은 듣지 않고 김익희 등의 말을 따른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것뿐만은 아니다. 선왕이 대신에게 논의하여 그렇게 한 것이다."
하였다. 장선징이 아뢰기를,
"선왕이 김육·이시백·원두표(元斗杓)에게 논의하니 김육이 ‘정전(正殿)의 터에는 들어가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하였고, 송준길은 아뢰기를,
"그 때 신과 송시열이 시골에 있으면서 이 일을 듣고 매우 온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김익희에게 잘못 대답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후 민응형(閔應亨)이 대사헌이 되어 상소하여 이 일을 논하였는데 끝난 일이라는 핑계로 시행하지 않았습니다. 신은 국가 궁궐의 터에 신자가 거처해서는 안 된다고 여깁니다. 만약 그럭저럭 지나간다면 혹 그럴 수도 있겠지마는 사단이 발한 후는 그대로 두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선왕조부터 이미 말들이 있었는데 내가 어찌 오늘날에 와서 변통할 수 있겠는가."
하니, 송준길이 아뢰기를,
"선왕조 때 발단이 되었으나 미처 하지 못한 것이 어찌 한 가지 뿐이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 곳이 비록 궁궐의 옛터라고 하나 비워둔 지 이미 오래 되었다. 그리고 경복궁(景福宮)의 터와는 다르니 여러 공주의 가옥을 하나의 공한지에 나란히 들이는 것이 여염집을 빼앗아 넓게 차지하는 것에 비하여 그 폐단이 어떠한가. 당초 선왕의 뜻이 폐단을 줄이는 것에서 나온 것이니 선왕조의 아름다운 뜻을 나는 변경하지 않고자 할 뿐이지 다른 것을 위하여서가 아니다. 송 판부사도 역시 나의 말을 잘못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하고, 상이 또 이르기를,
"나의 주된 뜻이 이러하므로 내 생각을 털어놓은 것인데, 대계는 ‘대신이 도성을 지금 나갔다.’는 것으로 말을 하니, 이것이 내가 말한 ‘사람 마음의 곱지 못함이 어쩌면 이 지경이 되었는가.’라는 것이다."
하니, 송준길이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지당하십니다. 그러므로 신도 역시 대관의 언어가 적중하기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하나 상께서 내리신 비답도 역시 온당치 못하였습니다. 상께서 자전께 사뢰어 공평한 마음으로 헤아려 합당하게 처리하여야 할 것이고 위아래에서 끌고 늘어지게 하기를 이와 같이 해서는 안 됩니다. 전하께서 비록 공주의 저택을 헐어 옮기는 일을 불편하게 여기시지만 물정이 불안해 한다면 성상의 마음도 편안하실 수 만은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록 깊이 생각하여 보았으나 나의 주관이 잘못되었음을 알지 못하겠으므로 어제 대계의 비답에 이미 나의 의사를 보인 것이다."
하였다. 지평 김세정이 또 많은 말로 인피하니, 상이 답하였다.
"인피한 내용을 보니 더욱 가소로울 뿐이다. 비록 스스로 옳다고 주장하려 하나 그 허물만 더할 뿐이다. 사직하지 말라."
사간 이유, 정언 신정은 본원의 비답이 엄준하다는 것으로, 집의 박증휘는 민희(閔熙)의 제수를 개정(改正)하라는 논핵을 멈추어 물의에 비난을 당하였다는 것으로 인피하니, 지평 이규령이 처치하여 모두 출사시킬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좌의정 허적과 예조 정랑 조치중(曺致中)을 보내어 정릉(貞陵)을 봉심하였다.
2월 27일 경인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판서 정지화(鄭知和)를 보내어 평안도(平安道)에 과거를 설행하고, 예문 제학(藝文提學) 강백년(姜栢年)을 패초하여 글제를 내어 보내 양현망(楊顯望) 등 4인을 뽑아 급제를 하사하였다.
장령 신명규(申命圭)가 소를 올려 체직시켜주기를 청하고 인하여 생각한 일을 진달하면서 서필원을 공척하였다. 또 목내선의 사람됨을 공척하여 전조(銓曹)의 잘못을 극언하니, 상이 답하기를,
"상소의 내용은 자못 가상하나 목내선의 일에 있어서는 매우 의아스럽다. 목내선이 좌우에 있게 된 것이 얼마 되지 않았지만 대개 그 사람됨을 볼 때 비록 출중한 재주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실로 가까이 할 수 없다는 점은 보지 못하였다."
하며, 원소(原疏)에 계(啓) 자만 찍어 내렸다. 정원이 아뢰어 그것이 옳지 않다고 진달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영의정 정태화가 22번째 정사하니, 상이 행차가 가까이 있어 논의하여 결정할 일이 많이 있다며 도승지 장선징을 보내어 우선 정고(呈告)를 멈추고 기력이 차츰 나아지기를 기다려 들어와서 상의하자는 뜻으로 타일렀다.
좌의정 허적이 행차 때 승지와 사관에게 말을 줄 것을 청하니, 상이 일렀다.
"왕자와 대신 및 승지와 사관에게 모두 말을 주라."
행 대사헌 조복양이 현재 추감(推勘) 중에 있다고 하여 인피하였다.
지평 이규령이, 박증휘의 출사를 청하여 물의에 비난을 받았다고 하여 인피하니, 박증휘는 이 때문에 또 인피하였다.
2월 28일 신묘
장령 홍주국(洪柱國)이 기왕에 민희(閔熙)의 제수를 개정하라는 논계를 멈추는 논의에 참여하였다고 하여 인피하고, 행 대사간 강백년은 민희와 혐의를 피할 관계에 있어 감히 헌부를 처치하지 못하겠다고 인피하였다.
이원정(李元禎)을 좌윤으로, 이시술(李時術)을 초배하여 병조 참판으로, 윤심(尹深)·김만중(金萬重)을 이조 좌랑으로, 김득신(金得臣)을 장령으로, 이규령(李奎齡)을 수찬으로, 조성보(趙聖輔)를 지평으로, 송규렴(宋奎濂)을 헌납으로, 홍억(洪億)을 사서로 삼았다. 김득신은 적합하지 않다고 탄핵을 받았다.
2월 29일 임진
사간 이유가, 대사헌 조복양, 장령 홍주국(洪柱國)과 더불어 모두 한 집안인 혐의가 있어서 감히 처치하지 못하겠다고 인피하였다.
교리 윤심(尹深), 부교리 이민서(李敏叙) 등이 차자를 올렸다. 대략에 이르기를,
"근래 판부사 송시열이 조정에 머문 지 오래지 않았고, 모든 건청한 바를 조금이라도 시행한 것이 있다는 것을 또한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일찍이 경연에서 대략 진달한 것으로, 쓸데없는 비용을 절감하며 용렬한 군사를 줄이고 법전을 수거하고 기강을 정돈하는 등의 일은 그 뜻을 대체로 알 만합니다. 강석에서 올린 말은 음사의 사사로움을 내치고 의리의 공정함을 밝힌 것이 아닌 것이 없으며, 더구나 군왕을 바르게 인도하고 일을 바로잡는 대의에 정성을 다하였습니다. 성상의 부합됨과 예우하는 융성함으로 만일 제대로 그 말을 음미하여 실행에 의심하지 말으셔서 성지를 분발하여 위에서 주장하시고 넓게 여러 선함을 모아 뒤에서 윤색하며, 먼저 이미 말한 것을 따르고 말하지 아니한 것까지 차례로 미루어 행하여 시종 견지하신다면, 그 몸은 비록 잠시 국도를 떠났다 하더라도 그 말은 사용되지 아니함이 없어서 국가가 영원히 의지할 것이니 어찌 다행이 아니겠습니까.
오늘날 부마 저택의 논의는 단지 대신이 이미 말한 의논을 거듭하여 신자의 감히 하지 못하는 분수를 밝혀 성조(聖朝)의 전유(傳諭)가 잘못되었음을 바로잡고자 한 것이니 대관의 체모상 책임을 잃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명께서는 내용중의 말을 인용하여 엄하게 질책하셨고, 더구나 우매(愚昧)란 두 글자는 신자로서 들을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성명께서는 일찍이 경연에서 역시 이러한 하교로 말하는 이의 입을 막았으니, 어쩌면 제갈 무후(諸葛武侯)가 말한 ‘자신을 하잘 것 없이 여겨 충성스러운 간언을 막는다.’라는 경우가 아니겠습니까.
국가에서 대간을 두는 것은 그에게 시비를 쟁론하게 하는 것이니 정령의 잘못과 거조의 잘못됨을 쟁집하고 논박하는 것이 모두 이 대각의 직책인데, 지금 성상의 의견이 만일 ‘네 비록 말하고 있으나 내가 무슨 염려하겠는가.’ 하신다면 어찌 굳이 간의(諫議)의 직책을 설치하고 구차하게 집법(執法)의 관리를 두겠습니까.
전하께서 선왕조에 축조한 뜻을 유념하시어 당초에는 차마하지 못하셨으나 신자의 불안한 분수로 인하여 그후에 흔쾌히 따르신다면, 다만 아름다운 덕에 광채가 더할 뿐이니 은혜와 사랑에 무슨 손상됨이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계를 진달하는 말은 우애(憂愛)하는 정성에서 나온 것이니 가상하게 여긴다. 차자 끝의 말은 매우 그렇지 않은 점이 있다."
하였다.
2월 30일 계사
옥당이 양사를 처치하여, 추함(推緘)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으로 조복양을 체직시키고, 공의가 그르게 여긴다는 것으로 박증휘를 체직하고, 홍주국·강백년·이유는 출사시킬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대마도주(對馬島主) 평의진(平義眞)이 다시 차왜(差倭)를 보내어 관(館)을 옮겨주기를 청하니, 조정에서 예조 참판 강백년으로 하여금 그 서신에 답하되 허락하지 말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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