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16권, 현종 10년 1669년 4월

싸라리리 2025. 12. 12.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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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일 계해

상이 온양 행궁에 있었다.

 

상이 머리를 감았다.

 

신시(申時)에 일식이 있었다.

 

4월 2일 갑자

상이 온양 행궁에 있었다.

 

지평 조성보(趙聖輔)가, 창원 현감(昌原縣監) 윤세웅(尹世雄)이 백성을 학대하여 제 몸을 살찌운 죄를 논하며 잡아다 신문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또 합천 군수(陜川郡守) 홍처심(洪處深)이 시소(試所)에 가건물을 멋대로 지어 법령을 어기고 폐해를 끼친 죄를 논하며 파직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또 장령 김득신(金得臣)과 헌납 김상(金鋿)이 본직에 적합하지 않음을 논하며 체직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다가 여러 번 아뢰자 따랐다. 또 청주 목사(淸州牧使) 윤세교(尹世喬)가 조정의 본의를 생각하지 않고 힘써 결수(結數)를 늘려 능력을 과시하고 공을 세우려고 한 죄를 논하며 파직하고 서용하지 말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균전(均田)의 임무를 이미 주관하는 신하에게 맡긴 이상 떠도는 풍문으로 논죄해서는 안된다."
하였다. 여러 번 아뢰었으나,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 이유(李秞)가, 전라 병사 김경(金鏡)이 군목(軍木)을 지나치게 거두어들이고, 선죽(扇竹)을 위협하여 납부하게 한 죄를 논하며 잡아다가 신문하기를 청했는데, 멈추지 않고 여러 번 아뢰자, 먼저 파직시킨 뒤에 추고하라고 명했다.

 

부교리 이민서(李敏叙) 등이 일식을 계기로 상차하여, 재이(災異)가 연달아 나타남에 대하여 극력 진술하면서, 수성(修省)과 경천(敬天)의 도를 더욱 힘써서 양(陽)을 부지하고 음(陰)을 억제하는 의리를 다하도록 청하였다. 또 언관과 근시(近侍)를 죄주는 것은 타당하지 않으며, 신하들을 접견하여 상의하는 일이 매우 적음을 논하니, 상이 답하였다.
"차자의 말이 모두 경계하고 깨우쳐 주는 지극한 뜻이니 내가 매우 기쁘다. 그러나 끝에 한 말은 정의(情意)가 미덥지 못하여 지나치게 의심한 것이니, 마음에 진실로 부끄럽고 개탄스럽다."

 

승지 홍만용(洪萬容)을 판부사 송시열(宋時烈)에게 보내어 하유하여 올라오도록 하였다. 당시에 앞서 보냈던 사관이, 송시열이 숙환이 있는 데다가 꺼려야 할 질병이 있어 감히 명을 받들지 못했다고 돌아와 아뢴 까닭에 이 명을 내린 것이다.

 

4월 3일 을축

상이 온양 행궁에 있었다.

 

자전(慈殿)과 대전(大殿)이 목욕하였다.

 

사간 이유(李秞)가, 옥천 군수(沃川郡守) 심유(沈攸)가 술에 취해 같은 도의 수령을 모욕한 죄를 논하며 파직을 청했으나, 상이 따르지 않다가 두 번째 아뢰자 추고하라고 명했다.

 

상이 이익(李翊)에게 하교하기를,
"지난 봄 거둥했을 때에는 떠돌며 구걸하는 무리들을 구제하였는데, 이번에는 조정의 명령이 없으니 거행하지 않는 것이냐? 해조에서 별도로 구제했으면서도 품처를 하지 않은 것이냐? 물어서 아뢰도록 하라."
하니, 이익이 아뢰기를,
"해조에 물어보니, 금년에는 이런 무리들이 많지 않아서 급료를 지급하고 남은 쌀로 한 되씩 나누어 주었는데, 수량이 얼마되지 않아 품달하지 않은 것이라 합니다."
하니, 상이 알았다고 답하였다.

 

좌참찬 송준길이, 권격(權格) 등이 죄받은 것을 인하여 상의 지나친 처사에 대하여 차자를 올려 극력 말하면서 아뢰기를,
"신이 조정에 들어온 뒤에 삼가 여론을 들어보니, 김징(金澄)과 권격 등은 대각의 풍채가 있다고 허여하고 이상진(李尙眞)과 이단상(李端相)은 성품이 겸허하고 학식이 높다고 허여하였는데, 얼마 후 김징과 이단상이 모두 은총을 입어 발탁되기에 권격도 조만간 등용될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신하로서 차마 듣지 못할 실정에 벗어난 하교를 내리시니, 인심이 막히고 곧은 기개가 꺾이었습니다. 이 어찌 국가의 복이겠습니까. 성상께서 이런 지나친 처사를 하실 줄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신이 이제 늙고 병들어 죽음이 가까이 오니 온갖 상념이 사그라졌습니다. 우연히 조정에 들어와 지금까지 머물고 있는데, 오랜 친구들의 꾸지람이 사방에서 들려옵니다. 모두가 꾀하여 행하는 바가 없다고 여기고 다만 글 몇 줄 강의하는 것으로 일삼는다고 기롱하는데, 이는 정말 그렇습니다. 그러나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여러 해 전부터 성상의 선한 마음이 무성하고 학문도 날로 진보되고 있으니, 지금 백성이 근심하고 병사가 원망하며 모든 폐단이 극심해서 마치 하루도 보전치 못할 것 같지만 본원은 깊이 믿을 만하다. 내가 글 몇 줄 강론한 것이 또한 어찌 도움이 없는 것이겠는가.’라고 여겨, 이것으로써 해명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하찮은 일로 이토록 실망케 하시니 신은 삼가 상심이 됩니다. 신의 말을 채용할 수 없으시다면 하루를 머물게 하면 다만 하루를 낭패하게 할 뿐입니다. 빨리 신을 파직하여 늙그막의 절개를 고향에서 보전할 수 있도록 해 주소서. 전하께서도 마땅히 삼가고 조심하는 도리에 힘을 쓰시고, 일어나기는 쉽고 제어하기 어려운 노여움에 대하여 특히 더욱더 삼가소서. 일간에 잘못된 말씀에 대하여는 후회하고 사과하는 뜻을 흔쾌히 보여 주시고, 대신과 승지를 모두 파직시키라는 명을 빨리 거두소서. 그렇다면 군왕의 덕에 있어서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지난번 배에서 잠시 만나고는 총총히 헤어졌지만 그 사이에 한 말을 내가 어찌 헤아리지 못했겠는가. 오늘 일은 공도(公道)에서 매우 벗어난 것이니 임금의 잘못된 언사에 비할 바가 아니다. 너그러이 용납하기 어려워 부득이 벌을 준 것이나, 경의 말이 이와 같으니, 내가 어찌 거절하겠는가. 승지를 파직시키라는 명은 거두도록 할 것이니 경은 안심하고 세자를 교도하도록 하라."
하고, 사관을 보내어 전유하였다.

 

영부사 이경석이 상차하기를,
"시후(時候)가 이상하여 유행병이 점점 창궐하고 재이가 연달아 나타나니 근심이 많습니다. 조속히 수레를 돌려 서울로 올라 가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지난날 조정에는 급히 물러나려는 신하들이 이어지더니, 오늘날 행궁에는 달려가 문안한 신하가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군부가 병이 있어 궁을 떠나 멀리 초야에 있으면 사고가 있거나 늙고 병들었거나 먼 곳에 있는 자가 아니라면 도리에 있어서 이와 같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는 나라의 기강과 의리에 관계된 것입니다."
하니, 상이 너그러이 답하고 사관을 보내어 전유하였다. 당시에 지방에 있는 여러 신하들 중에 한명도 행궁에 나아온 자가 없었기 때문에 이경석이 이처럼 말한 것이다.

 

4월 4일 병인

약방이 입진하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입진할 때 영상도 입시토록 하고 충청 감사도 와서 입시토록 하라."
하였다. 입시할 때 호판 민정중이 뵙기를 청하여 입시하였다. 상이 충청도에 당시 수감된 죄인을 관대히 처벌하도록명하고, 가흥(可興)에 새로이 창고를 설치하는 일도 잠시 중단하도록명하였다. 상이 연석에서 옥당이 서계한 일을 대신에게 의논하였는데, 영상 정태화도 가흥에 새로운 창고를 설치하는 일은 폐단이 많음을 진달하며 중지시키기를 청하였다. 충청 감사 이숙(李䎘)이 아뢰기를,
"전일에 하유하시어 백성에게 두루 폐단을 물어보게 하신 까닭에 지금 한창 가려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확실히 징수할 곳이 없는 노비의 신공은 별도의 견감하여 별도의 은혜를 베푸신다면 혜택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이 말이 맞습니다. 허실을 분명하게 안다면 조정에서야 무엇이 아깝겠습니까."
하자 허적이 아뢰기를,
"자세히 조사하게 하여 견감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충청도 내에 견감하는 등의 일을 모두 무신년에 행차할 때 시행했던 전례에 따라 시행하도록 명하고, 온양의 전년 전세와 금년 세폐는 특별히 감해 주도록명했다.

 

유혁연(柳赫然)을 백의 종군하게 하여 어영 도제조의 조용(調用)에 따르도록명하였다.

 

행차할 때 어가가 지나는 고을의 노인에게 전례에 따라 음식물을 나누어주고, 지난해 나이가 차지 못하여 가자를 받지 못한 자를 조사하여 아뢰도록 도신에게 명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상에게 아뢰기를,
"유명윤(兪命胤)은 일찍이 시종관(侍從官)을 거쳤으며, 고(故) 참판 유계(兪棨)의 아들입니다. 상중에 죽었는데 그때 그의 처가 손가락을 세 개나 잘라서 피를 입에 흘려 넣어 나흘을 더 살게 하였다고 합니다. 그 절행이 가상하니 포상하는 은전이 있어야 할 듯합니다."
하니, 본도 감사에게 계문하여 정표하도록 명하였다.

 

4월 5일 정묘

상이 온양 행궁에 있었다.

 

자전이 목욕했다. 상이 목욕했다.

 

4월 6일 무진

상이 온양 행궁에 있었다.

 

삼전(三殿)이 목욕했다.

 

4월 7일 기사

상이 온양 행궁에 있었다.

 

대전과 중전이 목욕했다.

 

상이 하교하였다.
"송 판부사가 부스럼이 매우 심하다고 하니, 침과 약을 모두 쓸 줄 아는 의원으로 하여금 약물을 가지고 가서 간병케 하고 계속 머물면서 치료하게 하라."

 

4월 8일 경오

상이 온양 행궁에 있었다.

 

대전과 중전이 목욕했다.

 

이달 15일에 서울로 돌아갈 것을명했다.

 

행 대사간 이상진이 병을 핑계로 오지 않았다. 이상진이 행궁으로 나아가려다 이경석이 차자를 올렸다는 소식을 듣고는 병을 핑계대고 오지 않은 것이다.

 

박장원(朴長遠)을 대사헌으로, 이익상(李翊相)을 헌납으로, 윤원거(尹元擧)를 장령으로 삼았다.

 

4월 9일 신미

상이 온양 행궁에 있었다.

 

대전과 중전이 목욕했다.

 

밤 일경에 달이 헌원성(軒轅星)의 세 번째 별을 범했다.

 

4월 10일 임신

상이 온양 행궁에 있었다.

 

대전과 중전이 목욕했다.

 

약방이 입진하기를 청하니, 상이 영의정도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본도에 정배된 죄인을 너그러이 처벌하여, 금부의 죄인 이연년(李延年), 유경립(柳經立), 이원환(李元煥), 도거원(都擧元), 박정(朴靖) 등 5인과 형조의 죄인 8인을 풀어주라고 명하자, 좌의정 허적이 아뢰기를,
"상께서 만약 민심을 위로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삼으신다면 타도에 있는 본도의 죄인을 방면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본도에 있는 타도의 죄인을 석방시킨다면 어찌 본도의 민심을 위로하는 일이겠습니까. 본도의 죄인을 또한 마찬가지로 가려내어 석방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서도의 무과에 응시한 사람 중 초시에 합격했으나 낙방한 자가 거의 천 명이나 되었다. 대신이 이 일을 아뢰자 상이 시관에게 숫자를 알아 오라고 명하였다. 또 형조 당상에게 명하여 본도 감사와 함께 죄인의 문안을 정리하여 대신에게 상의하고, 다음날 등대시에 품처하도록 하였다.

 

4월 11일 계유

밤 일경에 달이 태미 서원(太微西垣)의 네 번째 별을 범했다.

 

상이 온양 행궁에 있었다.

 

대전과 중전이 목욕했다.

 

남용익(南龍翼)을 대사간으로, 정지화(鄭知和)를 판윤으로, 이하(李夏)를 정언으로, 강백년(姜栢年)을 예조 참판으로, 박이명(朴而㫥)를 전라 병사로, 유여량(柳汝糧)을 황해 병사로 삼았다.

 

청나라가 자문(咨文)을 보내기를, 금년 12월에는 윤달이 없고 내년 2월에 윤달이 있다고 했다. 예조가 아뢰기를,
"이미 역일(曆日)을 반사하였으니, 지금 와서 고치기는 어렵습니다. 마땅히 금년 12월에는 윤달이 없고 내년 2월에 윤달이 있다는 뜻으로 중외에 반포하소서."
하니, 따랐다.

 

진천(鎭川)의 유생들이 소를 올려, 이종학(李種學)의 충절, 김덕숭(金德崇)의 효행, 이여(李畬)의 경술, 이부(李阜)의 학문에 대하여 아뢰고 사우에 액호를 청하니, 상이 특별히 사액할 것을 명했다.

 

4월 12일 갑술

밤 이경에 달무리가 지고 양이(兩珥)가 있었는데 무지개같은 흰 기운이 좌이(左珥)로부터 일어나 비스듬히 십여 장을 뻗쳤다가 한참 지나 없어졌다.

 

상이 온양 행궁에 있었다. 전 대장 유혁연을 서용하도록 명하고 밀부(密符)를 도로 주었다.

 

상이 대신과 형조 당상 및 충청 감사를 인견하여 본도 죄인을 관대히 처벌하도록 하였는데, 삼사도 입시하였다. 또 호조 판서 민정중, 균전사 민유중, 어영 대장 유혁연을 추후에 입시하도록 명하여 죄수를 관대히 처벌하였는데, 사형을 감해 정배시킨 것이 두 명이고 방면한 것이 한 명이었으며, 그 나머지는 도신이 즉시 조사하여 처결하도록 하였다.

 

행 대사간 남용익이 결성 현감(結城縣監) 김시휘(金時輝)가 정액보다 더 많은 물선을 배정한 죄를 논하며 파직을 청하니, 상이 우선 엄중히 추고하도록 명했다.

 

회덕(懷德)의 선비 정선(鄭瑄)의 처를 정표하였다. 호조 판서        민정중이 정선의 처가 정유 왜란 때 적을 만나 순절한 일을 진달하고 정표를 청하니, 상이 대신에게 문의하여 시행한 것이다.

 

상이 목욕하였다.

 

이상진을 공조 참판으로, 구문치(具文治)를 우포도 대장으로 삼았다.

 

4월 14일 병자

진시(辰時)에 햇무리가 지고 양이(兩珥)가 있었는데 그 위에 관(冠)이 있었다. 밤 일경에 달무리가 졌는데 그 위에 관이 있었다.

 

상이 온양 행궁에 있었다.

 

판부사 송시열이 이경석의 차자 내용에 관하여 듣고는 오지 않고 소를 올려 아뢰기를,
"신이 병을 무릅쓰고 길을 떠나 몸이 이상하더니 병이 다시 도져 길가로 물러나 엎드려 조양하면서 다시 길을 떠나려 하였습니다. 때마침 도성에 머물러 있는 대신의 차자를 얻어 볼 수 있었는데 논척한 바가 매우 준엄하여 비록 곧바로 신을 거명하지는 않았지만 어찌 다른 사람을 지적하는 것이겠습니까. 신은 의리상 당연히 의장(儀仗) 밖에서 사죄하며 벌을 청하여야 하지만, 병세가 이와 같아 오도가도 못하니 다만 절박한 마음뿐입니다. 신이 스스로 삼가 생각해 보니, 의리를 괴란케 하고 기강을 문란케 한 것은 바로 신하의 가장 큰 죄입니다. 비록 다른 사람이 이 죄로 논척했다 하여도 오히려 매우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모를 터인데, 하물며 대신의 말인 경우이겠습니까. 신이 또 삼가 생각해 보니 옛날 송(宋)나라 손종신(孫從臣) 같은 이는 오래 살고 강녕하여 한때의 존숭을 크게 받기는 하였지만, 의리를 알고 기강을 진작시켰다는 일컬음은 받을 수 없었으니, 도리어 어떤 이는 그를 불쌍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당시에 매우 용렬하고 비루한 자가 있어서 행실이 보잘것 없기 때문에 도리어 그 사람에게 비난을 받았으니, 뭇 사람들이 얼마나 비난하며 비웃었겠습니까. 지금 신이 당한 일이 불행히도 이와 비슷합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이 병중이라는 것을 알고는 내가 매우 근심했는데, 이제 사직소를 보니 심히 당혹스럽다. 대수롭지 않은 문자는 지나치게 혐의할 바가 아니니, 나의 갈망하는 마음을 깊이 생각하여 내가 만나 볼 수 있도록 하라."
하고, 사관을 보내어 전유하였다.
당시에 이경석은 이상진 등 몇몇 사람 때문에 차자를 올린 것인데 송시열은 자기를 공격하는 줄 알고 크게 노하여 소를 올리고 오지 않았다. 손적(孫覿)에 빗대어 이경석을 모욕한 것은 이경석이 일찍이 인조 때에 명에 따라 삼전도의 비문을 지었는데, 찬양하는 말이 많아서 청의에 기롱을 받은 까닭이었다. 송시열이 조그만 일로 너무나 각박하게 배척하니, 논자들이 병되이 여겼다.

 

좌참찬 송준길이 차자에 대한 비답을 인해 다시 상차하여, 앞서 올린 차자의 뜻을 피력하고 상의 편벽된 마음과 격노에 대하여 극언하기를,
"인조 대왕 때에 궁노의 일로 진노하여 그치질 않자 온 조정이 허둥지둥하고 대신과 삼사는 모두 불안해 하였는데, 정경세가 한 번 차자를 올리니 시원스레 잘못을 뉘우치고 사과하는 뜻을 보여, 지금까지 미담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선대왕 때에는 차비문 밖에서 하리에게 곤장을 친 일이 있었는데, 신이 당시 말미를 받아 밖에 나가 있었다가 돌아와 입대하여 그 잘못을 아뢰니, 선대왕이 웃으며, 말하기를 ‘네가 잠시 나가 있던 까닭에 일어난 일이다.’ 하시며 곧 약을 내리라고 명하시어 그 하리를 치료하게 하셨으므로 신이 지금도 생각하면 감격한 나머지 눈물이 옷깃을 적십니다. 신이 전하를 섬긴 지도 몇년이 지났습니다. 그간 잘못된 처사가 있을 때면 근심스런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경계의 말씀을 외람되게 아뢴 것이 전후에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구슬이 구르듯 물이 흐르듯 부드럽게 용납하는 성대한 거조가 혹 충분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진실로 신의 성의가 부족하여 성상의 마음을 깨우치지 못한 것이지만, 그러나 전하도 자기를 버리고 남을 좇는 덕성이 필경 선조에 미치지 못하는 듯합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간절한 뜻이 모두 지성스런 마음에서 나온 것인 줄 알겠다. 권격의 죄가 비록 무겁지만 파직의 벌은 마땅히 경을 위하여 거두도록 하겠으니, 경은 안심토록 하라."
하고, 사관을 보내어 전유하였다.

 

전 집의 윤선거가 상소하고 올라오지 않으니, 상이 너그러이 답하고 조속히 올라오도록 하였다. 윤선거가 산림에서 도를 지켜 명망이 매우 높았는데 부르는 명이 내릴 때마다 죄지은 몸이라고 사양하면서 끝내 올라오지 않았다.

 

4월 15일 정축

상이 온양 행궁에 있었다.

 

약방이 비가 내리니 어가를 움직이지 말도록 청하니, 상이 날씨가 개이기를 기다리라고 명하였다. 비가 그치지 않자 정원이 대신의 뜻으로 출발하지 말 것을 계청하니, 상이 따랐다.

 

4월 16일 무인

월식이 있어야 했는데 없었다.

 

상이 왕대비를 모시고 온천으로부터 어가를 돌려 서울로 향했다. 중전도 같이 출발했다. 묘시에 어가가 온천 행궁을 떠나 진시에 모산(茅山) 주정소에서 머물고, 오시에 소사(素沙) 주정소에서 머물었다. 미시에 출발하였는데 상이 어가를 길가에 멈추게 하고는 영전(令箭)으로 마병 별장 이간(李旰)을 불러 진을 치도록 했다. 삼사가 어가 앞에 나아가 그치기를 청했지만 상이 따르지 않았다. 관진(觀陣)을 끝내고 난 뒤 출발하여 신시에 진위(振威)에서 머물었다.

 

진시에 햇무리가 졌는데 그위에 관이 있었다.

 

4월 17일 기묘

묘시에 삼전(三殿)의 어가가 진위를 출발하여 진시에 안령(安寧) 주정소에서 머물고, 사시에 출발하여 오시에 사근(沙斤) 주정소에서 머물고, 신시에 과천(果川)에서 머물었다.

 

대왕 대비께 승지를 보내어 문안을 올렸다.

 

왕세자가 궁관 박세견(朴世堅)을 보내어 행궁에 문안을 올렸다.

 

4월 18일 경진

묘시에 삼전의 어가가 과천현을 출발하여 나루터에 이르렀는데, 상이 관병(觀兵)하려고 하자 옥당이 청대하여 중지하기를 간언했으나, 상이 따르지 않고 결진을 호령하라고 명하자 옥당이 물러났다. 양사가 청대하여 또 간쟁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는데, 군사들이 이미 진형(陣形)을 갖추었다. 대사간 남용익이 아뢰기를,
"이것은 곧 계사이니 옥당의 청대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하고, 지평 조성보는 아뢰기를,
"대간이 한 쪽에서 논계하고 있는데 한 쪽에서는 열무(閱武)를 하니, 이는 대각을 설치한 본의가 아닙니다."
하자, 상이 노하여 이르기를,
"아무리 대간이라고 하지만 어떻게 이토록 스스로를 높힐 수 있단 말인가. 이미 호령했다. 어떻게 대간의 계사가 있을 줄 미리 알아서 호령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처음에는 소회(所懷)라고 하다가 이제는 계사라고 하면서 대각을 설치한 뜻이 아니라고 하니, 과연 이것이 계사라면 어찌하여 전계는 없었는가. 스스로 대간이라고 하면서 어떻게 말을 감히 이처럼 하는가."
하였다. 남용익 등이 엄중한 교지를 받았다는 이유로 피혐하고 물러났다. 상이 진세를 벌여 놓는 것을 구경하고 마친 후 금군 별장 구문치(具文治)와 마대 별장 이간을 불러 각각 갑옷 1부(部)를 하사했다. 오시에 강에 이르렀는데, 배종한 근시(近侍)에게 음식물을 하사하였다. 미시에 환궁했다. 상이 먼저 와서 돈화문 안의 막차에 들어 갔는데, 왕대비의 보련(步輦)이 이르자 상이 공경히 맞이하여 인화문을 지나 대내로 들어갔다. 약방·정원·옥당의 2품 이상의 관원들이 문안을 올렸다.

 

관원을 보내어 종묘에 고유제를 올렸다.

 

장령 신명규(申命圭)가 민희(閔熙)의 일을 함께 논박하다가 권격만 벌을 받았다는 이유로 피혐하니, 처치하여 출사토록 하였다.

 

정언 이하가 전라도 시관이었을 때 사목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고 과장에 가건물을 설치했던 일이 관문에 언급되었다는 이유로 피혐하니, 처치하여 체차토록 했다.

 

간원이 대사간 남용익과 사간 이유를 출사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4월 19일 신사

제도 감사에게 하유하여 본영으로 돌아가도록 했다.

 

정언 최상익(崔商翼)이, 경상 감사 심재(沈梓)가 재이를 보고하지 않은 죄 및 합천군의 과장에 불이 나서 대피할 때 사람이 죽기까지 하였는데도 즉시 계문하지 않은 잘못을 논하여 추고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당시에 경주(慶州) 땅에 돌이 부딪쳐 발생한 불이 연이어 타 달이 넘도록 꺼지지 않아서 경외(京外)에 소식이 전하여졌는데도, 심재는 끝내 계문하지 않은 까닭에 탄핵당한 것이다.

 

평안 감사 이태연(李泰淵)이 죽었다. 이태연은 비록 뛰어난 지조나 청렴한 명망은 없었지만, 총명하고 탁 트여 복잡한 업무를 잘 처리하는 능력이 있었다. 3도(三道)의 감사에게 명하여 그 운구를 호송하게 하였다.

 

4월 20일 임오

황해도 평산부(平山府)의 사인 민진삼(閔震三)이 배천(白川)에 이사하여 살고 있었는데, 본부가 양전할 때 민진삼을 감관(監官)으로 뽑아 배천에 공문을 띄워 보내주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민진삼은 본부의 영에 따라 양전할 곳으로 먼저 떠났고 그 처만 홀로 집에 남아 있었다. 군수 우창적(禹昌績)이 사람을 보내어 그 집을 덮쳐서 만약 민진삼이 나타나지 않거든그 처를 잡아오도록 하였다. 차인이 밤을 틈타 쳐들어가 그 처를 결박하고 함께 관아로 들어가기를 독촉했다. 그 처는 관인이 멀리서 왔는데 마땅히 식사를 차려야 하고 나도 길 떠날 차비를 해야 한다고 달래면서 결박을 풀어달라고 애걸했다. 그래서 풀어주자 의리상 관청에서 보낸 아전에게 욕까지 당하면서 살 수는 없다고 하여 목을 매 죽었다. 정언 최상익이 사족의 부녀를 수색하여 체포하는 데에는 국가에서 정한 법식이 있는데, 법식을 어기고 멋대로 하여 결국 열부를 자결하게 했다는 이유로 우창적을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말도록 청하니, 상이 우선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또 정사를 열지 못하게 했다는 이유로 이조 당상을 추고하도록 청하니, 상이 따랐다. 당시에 정사를 열라는 명이 내렸는데 이조 판서 이경휘(李慶徽)는 병 때문에 참의 남구만은 정세가 편안하기 어렵다고 모두 패초를 받들지 않은 까닭에 논척을 당한 것이다.

 

좌참찬 송준길이 《어록해(語錄解)》의 발문을 지어서 바치고 소를 올려 사직을 청하니, 상이 답하였다.
"경이 이토록 사양하니 서운하다. 후에 마땅히 면유(面諭)할 것이다. 발문은 재삼 읽어보아도 마음이 매우 기쁘다. 마땅히 책자에 써서 조석으로 경계하고 반성하는 바탕을 삼을 것이다."

 

4월 21일 계미

남용익을 도승지로, 장선징을 대사간으로, 박세견을 집의로, 경최를 장령으로, 이헌을 정언으로 삼고, 민유중을 평안 감사에 등급을 뛰어넘어 제배했다. 민유중이 양전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백성의 원망이 크게 일자 대신이 부득이 원망을 피할 수 있도록 관서에 천거하여 의망하니, 물정(物情)이 크게 놀랐지만 민유중이 당시에 명망이 있었던 까닭에 아무도 감히 말하지 못했다.

 

사간 이유와 정언 최상익이, 훈련 대장 이완을 탄핵하여 아뢰기를,
"이완은 행행(行幸)한 때를 당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도성에 있었으니, 마땅히 조심하고 삼가하여 충정으로 수위(守衛)해야 했습니다. 성기(省記)를 소지하고 통부(通符)를 패용한 병조 낭관이 수직(守直)을 순검하는 일은 국법에 의한 것이며 더욱이 임금이 거둥한 때에는 그 임무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완은 감히 병졸을 풀어 아전은 물론 심지어 마부까지 모조리 결박하여 낭관이 대로를 맨몸으로 걸어가게 하였으니, 이는 국조 이래로 없었던 일입니다. 대장이 군병을 장악하고 빈 성을 지키면서 본병(本兵)을 업신여기고 조관을 멸시하여 법도와 기율을 어기고 문란하게 한 것은 실로 변고에 관계된 일이니, 앞으로는 점점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교만하고 방자해져 분수를 어기게 될 것입니다.
또 삼가 들으니, 이번 달 초이틀 도감(都監)이 군사에게 급료를 지급할 때, 호조가 처음에 남쪽에서 조운해 온 쌀로 나누어 주니 군사들이 삼수미(三手米)가 아니라며 모두 받지 않고 흩어져 버렸는데, 낭청이 이를 보고하자 이완은 ‘쌀이 나쁘니까 군사들이 받지 않는 것이 당연하지 않는가. 다시는 보내지 말라.’ 하였다 합니다. 해이된 기강과 교만해진 군사가 정말로 한심하며 신책병(神策兵)들이 두건을 벗어던진 변고가 불행하게도 가깝습니다. 평소에 이미 군사들이 두려워 감히 못하도록 기율을 바로잡지 못하였으며, 낭청이 아뢰었는데도 또 법으로 제어하지 못하고 도리어 횡포한 군사들의 뜻에 따랐으니, 거조가 괴이하며 조금도 나라를 위한 충성된 염려가 없는 것입니다.
교만한 장수와 횡포한 군사에게 하루라도 법이 없을 수 없으니, 청컨대 훈련 대장 이완을 삭탈 관작하시고, 당일 제대로 제어하지 못했던 장관 등은 본 도감으로 하여금 엄중히 처단하게 하시며, 주동한 군졸 등은 유사로 하여금 가두고 법률에 따라 처리토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고 이르기를,
"지금 유독 이완만을 벌하자고 하니 나는 타당치 않다고 생각한다. 이완이 나라의 명령을 받아 삼군을 통솔하고 이 도성을 지켰으니, 사리로 보건대 임무가 어떻겠는가. 병조가 비록 본병(本兵)이라고 하지만 판서는 어가를 따라 남하하여, 각각 영문(營門)을 이루었으니, 호령하여 통솔하는 것은 다만 한 사람뿐인 것이다. 이러한데 병랑이 영중을 순검하였으니, 실로 해괴한 일이다. 지존인 천자로도 함부로 영문을 들어갈 수 없는데 하물며 일개 병랑이겠는가. 정초군(精抄軍)을 위협하여 들어갈 수 없는 곳을 억지로 들어갔고 통부를 가진 사람을 난타하였으니, 방자하고 무식한 것이 이와 같은 수가 없다. 마땅히 먼저 벌을 받아야 하는데 일체 거론치 않으니, 대간이 벌을 적용하는 데에도 문무를 구별하는가. 나는 진실로 이해하지 못하겠다. 끝에 첨가한 말은 일에 곡절이 있으니, 이를 구실로 죄를 무겁게 할 수는 없다. 군병에 관한 사항은 도감으로 하여금 자세히 조사하여 품처토록 하라"
하였다.
이완이 서문상(徐文尙)에게 곤욕을 가한 것은 한 때의 경망한 행위이자 교만한 습관이고, 횡포한 군사를 다스리지 않은 일은 크게 뒤폐단에 관계된 것이니, 어떻게 죄가 없을 수 있겠는가. 서문상이 군관을 벌하고 영문을 순검한 것도 잘못이 없다고 할 수 없는데, 대간의 계사는 오직 이완만을 공격하여 성상의 마음을 격노하게 한 것이다. 정언 최상익이 엄중한 비답이 내린 것으로 피혐했다. 대관들이 계속하여 간쟁하니, 상이 이완을 파직시키고 아울러 서문상도 파직시키라고명하였다. 이완은 이 일로 인하여 굳게 사양하여 벼슬을 내려도 받지 않았다.

 

행행할 때 배종한 군병을 호궤하였다.

 

이조 참의 남구만, 교리 홍주국, 부교리 박세당·이민서를 시관으로 패초하였으나 나오지 않아, 전지에 따라 파직하였다.

 

전 집의 윤선거가 죽었다. 윤선거의 자는 길보(吉甫)이며 대사간 윤황(尹煌)의 아들이다. 정축난 후에 과거를 포기하여 응시하지 않고 이산(尼山)에 물러나 살았다. 효종조 때부터 여러 번 불렀지만 끝내 나오지 않았다. 학문과 행실이 뛰어났다. 상이 하교하였다.
"전 집의 윤선거는 조정에서 예우하는 신하인데 갑자기 죽었으니, 매우 애통하다. 본도로 하여금 상수(喪需)와 역군을 넉넉히 지급하도록 하라."

 

응교 남이성(南二星) 등이 상차하여 송준길을 도성에 머물게 하도록 청하니 상이 답하였다.
"차자의 뜻이 범연한 것이 아니니 내가 어떻게 이에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마땅히 유념하겠다."

 

익평위(益平尉) 홍득기(洪得箕) 등이 상소하여 저택에 그대로 들어가라는 명을 환수하도록 청하니, 상이 답하였다.
"이미 패초하여 전유할 때에 내 뜻을 다 밝혔다. 안심하고 사양하지 말아 전에 하교한 대로 빨리 들어가서 나의 뜻에 부응하도록 하라."

 

사간 이유가 이완을 논핵하다가 엄중한 비답을 받기까지 했다는 이유로 피혐했다.

 

도적이 헌릉(獻陵) 정자각의 신문(神門), 신어평상(神御平床), 제상(祭床), 배설상(排設床), 예감판(瘞坎板)을 도끼로 찍어 파괴하였다. 예조가 위안제를 지내고 감역관으로 하여금 때에 맞추어 개비하도록 청하니, 상이 따르고 중사(中使)와 사관을 보내어 적간하도록 하였다.

 

4월 23일 을유

상이 양심합(養心閤)에 거둥하여 대신과 비국의 제신 및 삼사를 인견했는데 좌참찬 송준길도 입시하도록 명했다. 김좌명(金佐明)이 호서 선혜청의 쌀이 부족한 형편을 아뢰고 저축이 완전히 회복될 동안은 각사의 공물가를 경기 선혜청의 예에 따라 감하여 제급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평안도의 강변 및 재해를 입은 고을에 관곡의 반을 분급한 외에도 더 분급하도록 명했다. 당시에 각도의 각읍으로 하여금 환곡의 반은 분급하고 나머지 반은 창고에 남겨두도록 하였는데, 각관에서 액수대로 다 거두어 들일 수가 없었으므로 다만 거두어 들인 액수에서 그 반을 분급한 까닭에 백성들이 실질적인 혜택을 받지 못하여 곳곳에서 원망했다. 정지화가 서도로부터 돌아와 강변 및 재해를 입은 고을에 대하여 더 분급해 주기를 청하여, 상이 이런 명을 내린 것이다. 또 관서의 강변 각읍과 북도의 육진에서 정월 초하루에 보내는 진봉리(進封吏)를 일체 정파하라고 명하니, 거리가 멀어 폐단이 있기 때문이었다.

 

강화 유수 김휘(金徽)가 상에게 아뢰기를
"철곶(鐵串)·덕포(德浦)·정포(井浦)의 세 진을 도로 옮기는 일에 대하여 신이 직접 가서 형편을 살펴보니, 덕포에 거주하는 백성들은 지난번 옮겼을 때와 다름없이 옮기기를 싫어하였습니다. 또 첨사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덕포는 다른 곳과 달라서 이곳에서 물을 건너면 매우 편리하다.’ 하니, 도로 옮길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서필원(徐必遠)이 진을 철거하고 옮긴 것은 매우 잘못한 계책입니다. 이제 와서 그곳에 살고 있는 백성을 다시 옮겨야 하니, 덕포는 우선 그대로 두시고 철곶과 정포는 매우 중요한 곳이니, 농한기에 먼저 도로 옮기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자, 상이 따랐다.

 

김좌명이 상에게 아뢰기를,
"정릉(貞陵)의 안산(案山) 근처 수백 보 내에 8기의 옛무덤이 있는데, 하나는 그 표석에 신혜 공주(愼惠公主)라고 쓰여있고 하나는 문화 지씨(文化池氏)라고 쓰여져 있는데 기년을 보니 정통(正統) 11년이라고 되어 있으니, 이는 바로 세종 대왕의 초년입니다. 왕릉 내의 멀지 않은 곳에 상민(常民)이 들어가 장사지냈을 리가 없으니, 그 나머지 분묘도 반드시 보통 사람의 무덤이 아닐 것입니다. 경솔히 처치할 수 없으니, 대신과 의논하여 정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지금 송준길이 입시하였으니, 물어 보소서."
하자, 정태화가 아뢰기를,
"보통 사람이 암장하였을 리가 없으니, 신혜는 바로 방번(芳蕃)의 누이 같습니다. 방번의 형제들의 묘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니 바로 이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있습니다. 예전대로 두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고, 송준길 역시 대신의 말이 옳다고 하니, 상이 따랐다.

 

지평 조성보가 간원을 처치하여, 정언 최상익과 사간 이유를 출사시키도록 청하니, 상이 따르면서 아뢰기를,
"지금 출사시키라는 청은 이해하지 못하겠다."
하니, 조성보가 인피하며 아뢰기를,
"병랑이 순검을 돈 것은 바로 공무입니다. 따라서 부장(部將)에게 곤장을 때린 것이 설혹 조금 잘못됐다 하더라도 대장의 도리는 조용히 계문하고 처분을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군졸을 풀어서 수행하는 아전들을 포위하여 체포해서 끝내는 본병의 낭관으로 하여금 걸어서 관사로 돌아오게 하였으니, 이는 일찍이 없었던 변고입니다. 방자한 버릇이 진실로 극히 놀랄 만합니다. 서문상이 정초군을 순검한 것은 이전의 궐내를 순검하는 옛 규례를 따랐을 뿐으로, 군문의 사체가 자별함을 깨닫지 못한 것은 경거 망동에서 비롯되었으니, 본래 논핵할 만한 것이 아닙니다. 간원의 간관들은 실로 체직당할 만한 잘못이 없는 까닭에 감히 출사를 청한 것입니다. 이제 성상의 비답을 받고 보니 신의 처치에 정당하지 못한 잘못이 있었습니다. 신의 체직을 명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간의 논사는 다만 일의 옳고 그름만을 보아야 하는 것이다. 어떻게 몰랐다고 핑계하면서 구별을 둔단 말인가. 논핵하는 것이 잘못되었으면 법에 당연히 체차하는 것인데 도리어 출사를 청하니, 이것을 실로 내가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말한 것이다. 사직하지 말라."
하니, 조성보가 물러나 물론을 기다렸다. 상이 참찬 송준길을 앞으로 나오게 하여 조용히 위유하니, 송준길이 아뢰기를,
"외람되이 머물러 세자를 보도하라는 하교를 받고 억지로 오래 머물러 있으나, 그전부터 앓던 더위 병이 재발하려는 조짐이 있습니다. 더구나 옛 친구들이 잇달아 죽으니, 신과 같이 노쇠하고 병든 사람이 어떻게 오래도록 살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윤선거의 나이가 몇 살이었는가? 내가 한 번도 만나지 못하였는데 갑자기 이렇게 되었으니, 정말 슬픈 일이다."
하자, 송준길이 아뢰기를,
"사우간에 모두 윤선거를 엄탄지신(嚴憚之臣)이 될 만하다고 하였는데 불행히 죽었으니, 정말 국가의 불행입니다. 신이 이제 돌아가기로 결정하였으니, 직접 사직하고 물러나려 합니다."
하니, 상이 경연의 강학과 세자의 보도로써 만류하였다. 송준길이 아뢰기를,
"상께서 학문에 유념하시니, 힘써 스스로 면려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신 같은 사람이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세자의 학문은 실로 일취 월장하는 때이며 서법도 크게 진보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시기를 잃을 수는 없다. 나와 세자는 마땅히 계속하여 강학해야 할 것이니, 경은 나를 위하여 좀 더 머물도록 하라."
하자, 송준길이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이와 같지만 신의 형편이 진실로 머물기 어렵습니다. 병이 혹 날로 심해지면 끝내는 살아서 갔다가 죽어서 돌아온다는 기롱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신의 귀향을 허락하시어 신으로 하여금 멋대로 물러나지 않게 해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다. 그리고 또 아뢰기를,
"요즈음 전하의 심기가 화평하지 못한데 전하께서도 스스로 그런 것을 느끼고 계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심성 공부가 지극하지 못하여 그런 것이다. 요즈음 일이 매우 어그러지고 거슬려서 심기가 불편하였는데, 이 때문에 그렇게 겉으로 드러난 것 같다."
하자, 송준길이 아뢰기를,
"매사가 어떻게 다 좋을 수 있겠습니까. 반드시 심기를 화평하게 하고 나서 시비를 정해야 유익한 것이지 만약 일에 임하여 화평하지 못한 심기를 먼저 갖게 되면 그 폐해가 적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거취에 대한 분명한 말을 듣고자 원하니, 송준길이 아뢰기를,
"신의 형편이 이와 같은데 전하께서 좋은 뜻으로 만류하시니, 신이 물러나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였다.

 

4월 24일 병술

행 대사간 장선징과 집의 박세견은 추감을 받고 있다는 이유로, 장령 경최는 물의가 있었다는 이유로, 행 대사헌 박장원은 사세로 보아 민희의 가자를 환수하라는 논계에 동참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정언 이헌은 서문상과 상피가 되어 형편상 이완을 벌하라는 논계에 참여하기 어렵고 또 추함(推緘)이 있다는 이유로 모두 피혐하자, 헌부가 처치하여 장선징과 박세견은 체직시키고 조성보·경최·박장원은 출사시켰다.

 

4월 25일 정해

상이 양심합에 거둥하여 소대하고 《심경》을 강론하였다. 송준길이 경연에서 글 뜻을 강론하고 이어 아뢰기를,
"옛날에 인군은 전후 좌우에 모두 보필하는 신하를 두어 비록 호분(虎賁)과 위사(衛士)라 하더라도 진실로 품은 생각이 있으면 모두 나아가 간언할 수 있었습니다. 후세에 대간을 설치한 이후로 언로가 점점 좁아지게 되었는데 오히려 그들의 말조차 듣지 않으신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옛날의 좋은 제도가 모조리 없어졌으나 오직 이 경연만은 오히려 옛날의 제도에 가까운데, 이것마저 없앤다면 언로가 또 막히게 되어 국사는 전부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신이 고사를 모르지만 계해년 이후의 일은 자세히 알고 있습니다. 인군에게 어떠한 잘못이 있으면 대신·중신·유신할 것 없이 모두 간쟁하여 심지어는 정원에서 봉환(封還)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비록 대각이 있어도 윤허를 얻는 것은 중신에게 있었습니다. 요즈음에는 이런 일이 없어서 비록 인군에게 잘못이 있어도 바로잡으려 하지 않으니, 어떻게 개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당시에 상이 권격과 김징을 벌하는데도 대신이 한 마디도 하지 않은 까닭에 송준길이 이처럼 말한 것이다. 또 인재를 배양해야 한다는 것으로 아뢰기를,
"옛날에는 열다섯 살에 태학(太學)에 입학하여 마흔에 처음 벼슬에 나아갔으니, 25년을 수학한 것입니다. 교육의 방법이 이와 같았기 때문에 뛰어난 사람은 성현이 되었고, 열등한 사람이라도 단정한 선비는 되었습니다. 지금은 이렇게 하지도 않으면서 사람들이 모두 어질기를 바라니 이는 사람마다 호걸이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였다. 송준길이 또 단오날에 귀향하겠다고 청하니, 상이 위유하며 허락하지 않았다. 허적이 아뢰기를,
"세자의 말씀까지 듣고 송준길이 어떻게 결연코 돌아가겠습니까."
하였다. 세자가 서연에서 송준길을 만류하였던 까닭에 허적이 이처럼 말한 것이다. 이조 판서 이경휘가 아뢰기를,
"이 때를 당하여 재야에 있는 어진 선비라도 오히려 예를 다하여 초치해야 할 판에 하물며 조정에 있는 어진이를 물러나게 허락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만약 허락하신다면 여러 신하들이 실망할 것입니다."
하니, 송준길이 아뢰기를,
"지난 선묘조(宣廟朝) 때에 유희춘(柳希春)을 올려 서울에서 죽게 하였으니, 신도 그렇게 될까 염려됩니다."
하였다.

 

김만기(金萬基)·오시수(吳始壽)를 승지로, 박증휘(朴增輝)를 집의로, 민시중(閔蓍重)을 경상 감사로, 김만균(金萬均)을 부교리로 삼았다.

 

사간 이유가 패초에 나아오지 않은 뒤에 인피하였다.

 

정언 최상익이 패초에 나아오지 않은 뒤에 성상의 하교가 미안하다는 것으로 피혐하는 한편 또 병랑이 정초군을 순검한 것은 잘못이 없다고 아뢰자, 상이 답하였다.
"장황하게 스스로를 변명한 말이 모두 사리를 모르는 말뿐이다. 말을 꾸며 스스로를 옳다고 하니 정말 놀랍다."

 

지평 조성보가 형편상 간원을 처치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피혐하였다.

 

4월 26일 무자

상이 양심합에 거둥하여 소대하고 《심경》을 강론하였다. 좌참찬 송준길이 연석에서 글 뜻을 강론하고 이어 아뢰기를,
"제갈양의 출사표에서 ‘일의 성패와 운이 좋고 나쁨은 신이 예측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제갈량이 마땅히 할 바를 다할 뿐이라는 자세였으니, 어찌 현명하지 않습니까."
하고, 또 마원(馬援)과 위징(魏徵)의 일을 언급하여 아뢰기를,
"광무제와 마원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군신 관계가 아니었는데도 끝내 의이(薏苡)의 무함이 있었고, 위징의 충성으로도 복비(踣碑)의 재난을 면치 못하였으니,030)   군신의 사이가 얼마나 어려운 것입니까."
하였다.

 

장령 경최가 계문하여, 대사간 장선징과 정언 이헌은 체차시키고 사간 이유, 정언 최상익, 지평 조성보는 출사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송준길이 나아가 아뢰기를,
"신이 감히 조정의 의논에 간섭하는 것이 아닙니다만 구구한 생각을 어찌 감히 말씀드리지 않겠습니까. 행행하신 후에 신이 마침 조정에 있어서 여러가지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완의 일에 대하여는 모두 놀라며 ‘유혁연의 잘못은 과실이고 이완은 죄가 고의적인 데 있다.’고 하였습니다. 서문상에 대하여는 사람들이 각각 의견이 달랐는데, 어떤 이는 ‘서문상이 잘못이 있으니 함께 논핵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고, 어떤 이는 ‘비록 잘못은 있지만 함께 논핵해서는 안 된다.’ 하였습니다. 대간의 논핵은 준엄한 것을 위주로 하니 함께 논핵하지 않은 것은 큰 잘못이 아닙니다. 어제 대간의 계사에 대한 비답은 매우 온당치 못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병랑이 정초군을 순검한 것이 비록 고의가 아니라고 하지만 어찌 고의가 아니라 하여 논핵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대관의 논핵이 이처럼 구차한데도 오히려 그 직책에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하였다. 상이 매우 격앙된 어조로 말하자, 정태화가 아뢰기를,
"요즈음 전하께서 대간에게 실정 밖의 하교를 자주 하셨는데, 심지어 권격을 교활하고 간휼하다고 죄하셨으니, 바깥 여론이 모두 온당치 않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송준길이 이처럼 말한 것입니다."
하였다. 정태화와 홍중보가 모두 이완의 함사(緘辭)가 옳지 않다고 아뢰자, 송준길이 아뢰기를,
"이 사람들은 선조로부터 두터운 국은을 입었습니다. 비록 그렇지만 일이 공론에 관계되었으면 공론에 맡겨둘 뿐입니다. 유혁연의 일에 대해서도 또한 흔쾌하게 공론을 따르지 않으시고 그 마음을 굳게 맺어두실 뿐이니, 어찌 그렇게 힘써 비호하십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대간이 차별하는 뜻이 뚜렷하게 있으니, 비록 공론이라 하지만 나는 그것이 공론인지 모르겠다. 대간이 만약 함께 논박하지 않는다면 나는 양쪽을 모두 벌할 것이다. 어찌 이완을 위하여 비호하는 것이겠는가."
하자, 송준길이 아뢰기를,
"신이 아뢴 것은 범론이지 이완을 죄주자고 청한 것은 아닙니다. 대간의 계사가 완전 무결하기는 본디 어려운 것인데 매번 꺾으시니 이것이 바로 신이 민망하여 근심하는 점입니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파하고 물러난 뒤에 홍처후(洪處厚)와 박이명(朴而㫥)을 인견하시고 궁전(弓箭)을 하사하였다.

 

4월 27일 기축

상이 양심합에 거둥하여 소대하고 《심경》을 강론하였다. 상이 경연 중에 정자와 주자가 찬정(撰定)한 《대학(大學)》이 서로 같고 다른 점에 대해 말이 미치자, 송준길에게 이르기를,
"주자는 정자가 정한 바를 몸에 체험하여 그 그름을 안 후에야 고쳤는데, 후세에 이르러서는 얕은 학문으로 망령되게 주자가 정한 바를 고치니, 천박하고 경솔한 짓이다."
하니, 송준길이 아뢰기를,
"성상의 말씀이 타당합니다."
하였다. 또 ‘비사(鄙詐)031)  ’ 두 자에 대하여 강론하였는데, 송준길이 아뢰기를,
"마음의 병통이 매우 많지만 경쟁심과 고집이 모두 마음의 병으로서 비사가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행행하신 이후로 비답의 말씀에 병통이 많았고, 여러 신하들이 아뢴 것도 모두 따르지 않았으며, 심지어 대신의 말까지도 따르지 않았으니, 이것이 바로 경쟁심이며 고집입니다. 남을 책망하는 데에는 밝고 자신을 돌아보는 데에는 어둡다 한 것에 가깝지 않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어제 영상이 한 말에 대하여는 내가 미처 대답하지 못했다."
하니, 송준길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이러시면서 연소한 대관의 잘못을 책망하시니, 가당하겠습니까. 대각의 신하는 제왕의 위엄에도 굽히지 않는 것을 귀하게 여기니, 비록 지나친 말을 하더라도 어찌 심하게 책망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이 이처럼 말하니 고치는 것이 무어 어렵겠는가. 후에 마땅히 이러한 병통을 고칠 것이다."
하자, 송준길이 아뢰기를,
"후에 비록 고친다 하여도 뉘우치고 깨닫는 뜻을 보이시지 않는다면 저들은 종신토록 불안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매우 근실하니 어제 대신이 말한 대로 ‘교활 간휼’ 네 자는 삭제하도록 하겠다."
하니, 송준길이 아뢰기를,
"이렇게까지 용납하여 주시니 신은 진실로 감격스럽습니다. 이는 바로 대신이 말한 것을 말미암아 고치신 것이니, 어찌 대신의 말이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집의 박증휘가 당초에 정계(停啓)한 사람으로서 민희(閔熙)의 가자를 환수하라는 논계에 동참하기 어려운 형세라고 피혐하니, 처치하여 출사토록 하였다.

 

4월 29일 신묘

상이 양심합에 거둥하여 《심경》을 강론하였다. 좌참찬 송준길이 상께 아뢰기를,
"세자가 어린 나이에 강학을 태만히 하지 않으니, 이는 진실로 매우 다행한 일입니다. 다만 국가의 많은 일로 인하여 으레 서연을 중지하는 날이 있습니다. 선조(先祖) 때에 일찍이 국기일(國忌日)이 아니면 서연을 중지하지 말라는 하교가 있었으니, 지금도 역시 이 하교에 따라 연한을 정하여 중지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15세를 기한으로 중지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평안도 별시 무과에 급제를 내린 자에 대하여 수자리를 면제해 주고 각각 은(銀) 15냥을 바치도록 명하였다. 후에 등대할 때 이조 판서 이경휘가 불가하다고 하였으나, 상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4월 30일 임진

상이 양심합에 거둥하여 소대하고 《심경》을 강론하였다. 집의 박증휘가 갑산 부사(甲山府使) 최형운(崔亨運)이 직책에 적합하지 않다고 논핵하며 파직시킬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강백년(姜栢年)을 대사간으로, 이정기(李廷夔)를 공조 참판으로, 김덕원을 지평으로, 이하(李夏)를 정언으로 삼고, 원만리(元萬里)를 등급을 뛰어 수원 부사에 제수하였다.

 

도내의 환곡을 가지고는 빈민들에게 두루 나누어 줄 수 없다고 경기 감사가 장계하여, 강도미(江都米) 7천 석과 남한미(南漢米) 3천 석을 환곡으로 나누어 주도록 허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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