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16권, 현종 10년 1669년 3월

싸라리리 2025. 12. 12.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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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 갑오

상이 진찰하러 들어온 의관(醫官)에게 하교하기를,
"중궁이 전부터 괴증(塊症)을 앓아왔는데, 수년 이래로 증세가 점점 심해져서 약을 쓰고 뜸을 떠도 모두 효험을 보지 못하였다. 만일 온천욕을 한다면 혹시 효험이 있을 것 같으니, 이 뜻으로 약방에 말을 하라."
하니, 약방이 아뢰기를,
"신들이 예사로이 걱정한 지는 오래되었는데, 지금 성교를 받으니, 더욱 못내 놀랍고 염려됩니다. 즉시 약의(藥醫), 침의(鍼醫) 등과 상의하였더니 모두가 온천욕이 해로움은 있어도 유익함은 없다고 합니다. 삼전(三殿)이 일시에 행차하는 일은 사체가 중대하므로 신들이 감히 경솔하게 끝을 낼 수 없으므로 후일 등대할 때 품처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러라고 하고 그 절차를 해조로 하여금 품정하게 하였다.

 

3월 2일 을미

지춘추 박장원(朴長遠)과 대교 이인환(李寅煥)을 강화부(江華府)로 보내어 《실록》에서 정릉(貞陵)에 대한 사적을 상고하게 하였다.

 

병조의 낭천(郞薦) 규정을 혁파하였다. 교리 이민서(李敏叙)가 낭천의 폐단을 진달하니, 상이 정원에 명하기를,
"당초에 낭천을 혁파한 것과 다시 복구한 곡절을 상고하여 아뢰라."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정축년에 상신 최명길의 차론으로 낭천을 혁파하였는데 그후 대계로 인하여 다시 복구하였습니다."
하니, 명하기를,
"정축년 인조 때의 일에 의하여 시행하라."
하였다.

 

정리사(整理使) 민정중(閔鼎重)이 온양 행궁 및 노정의 모든 일을 점검하고 돌아왔다.

 

3월 3일 병신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와 삼사를 인견하였다. 옥당이 차자를 올려 중궁의 온천욕 행차에 대하여 간하였다. 등대했을 때 좌의정 허적이 영의정 정태화와 함께 온천 행차의 일을 정하여 아뢰기를,
"중전의 병환이 이와 같으니, 신들은 무사히 행차하지 못할 것이 염려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노상에서 평안할 지는 역시 예측하기 어려우나 앉아서 쾌차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수 없으므로 이러한 계획을 하게 된 것이다."
하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그만둘 수 있는 일이라면 당연히 굳이 다투겠지마는 지금은 그만둘 수 없으므로 폐단을 줄이는 것으로 절차를 품정하고자 하는데 옥당의 차자에 비답이 내리지 않았으니, 앞질러 결정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옥당이 방금 입시하였으니, 답해도 된다."
하고, 인하여 중전의 괴증(塊症)은 침이나 약으로 치유할 수 없다는 뜻으로 하교하기를,
"차자의 말은 지나친 염려에서 나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만일 대단히 그만 둘 수 없는 일이 아니라면 이러한 때를 당하여 어찌 함께 거둥할 수 있겠는가. 차자의 말단에 ‘도로에 군병이 전부(顚仆)된다.’는 말은 노정의 멀고 가까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행함의 빠르고 느린 데 있으니, 마땅히 유념하겠다."
하니, 교리 이민서가 아뢰기를,
"이미 상의 하교를 받았으니, 어찌 중지하라고 청하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승지에게 이르기를,
"판부사 정치화는 마땅히 도성에 남아 있어야 하고, 영부사 이경석은 노쇠하여 비변사에 나와 있기가 어렵다. 모든 일을 집에 있으면서 상의하게 하라고 사신을 보내어 전유하라."
하였다. 이완(李浣)이, 강도(江都) 주사(舟師)의 혁파는 실책이라고 극구 말하면서 이르기를,
"병가(兵家)의 일을 이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깃발 하나를 세워서 의병(疑兵)을 삼아도 오히려 적으로 하여금 의심하여 돌아보게 하는 것인데 어찌 주사(舟師)를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하여 버릴 수 있겠습니까, 만일 적이 강가에 도달하였을 때 우리가 주사를 성대하게 베풀어 병력을 과시한다면, 일에 있어서 도움이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당초에 주사를 옮긴 것은 잘못된 계책이니 그것이 잘못인 줄 알았다면 다시 설치하는 것이 무엇이 안 되겠습니까."
하였다. 허적이 다시 설치하자고 청하니, 김좌명이 아뢰기를,
"혁파하잔다고 혁파하고 다시 설치하잔다고 다시 설치한다면, 어느 때에 논의가 결정되어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당초에 서필원이 유수로 있으면서 아뢰기를,
"강도는 주사를 사용할 곳이 못되고 만일 사변이 있게 되면 피란의 도구 밖에 못되니 주사를 혁파하소서."
하여, 강화도에 있는 수군을 모조리 다른 곳으로 옮겼는데, 이완이 매번 한스러워 하다가 이제야 이 말을 하였고, 허적이 또 이완의 의견을 따르므로 김좌명의 말이 이러하였다.
정태화가 무신으로 총융사를 차출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호조 판서 민정중이 아뢰기를,
"초년에 행차할 때는 서울의 각사 하인이 감히 폐단을 일으키지 못하였는데, 차츰 처음과 같지 못하여 각 고을을 침학하는 폐단이 상당히 있습니다. 지금부터는 상사(上司)의 하인을 막론하고 발견되는 대로 엄중히 처벌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박장원(朴長遠)을 대사헌으로, 남용익(南龍翼)을 예조 참판으로, 이민적(李敏迪)을 승지로, 박세당(朴世堂)을 부교리로, 윤경교(尹敬敎)를 지평으로 삼았다.

 

병조 판서 홍중보(洪重普)가 아뢰기를,
"철곶진(鐵串鎭)은 승천보(昇天堡)에 있어서 서로(西路)로 왕래하는 중요한 나루입니다. 정묘년 이후에 이 진(鎭)을 신설하였는데, 수군의 수가 다른 진에 비하여 배나 되니 우연한 의도가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건너편으로 진을 옮겼으니, 인조(仁祖) 때의 설립한 의도와 어긋납니다. 옛 진을 다시 설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고, 허적이 아뢰기를,
"서필원이 주사(舟師)만을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다고 하면서 육군을 설립하여 함께 방어하게 하였으니, 소견이 없는 것은 아니나 철곶(鐵串)·덕포(德浦)·정포(井浦)의 3진을 건너편으로 옮긴 것은 실책을 면할 수 없습니다. 비단 3진의 사졸이 자리를 잃고 원망하는 것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모두 부당하다고 하니, 마땅히 모두 옛 진에 다시 설치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3진의 옛터에는 이미 별장(別將)을 설치하였으니, 유수(留守)로 하여금 형세를 살펴서 별장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다시 3진을 설치하게 하라."
하였다.

 

3월 4일 정유

상이 춘당대(春塘臺)에 친히 임어하여 관무재(觀武才)를 하고 겸하여 문신도 시험보였는데, 입시한 여러 신하에게는 별찬(別饌)을 하사하였다. 제목은 ‘용비어천가의 뒤에 쓰다.[題龍飛御天歌後]’로 하되 체제는 20운 배율(排律)로 하였다. 문신으로 제술하게 하고 시간이 넘으면 시권(試券)을 받지 못하게 하니, 정태화가 시각을 늦춰달라고 하였다. 등급의 차례대로 이훤(李藼) 등 7명을 뽑았다.

 

동지정사 이경억(李慶億), 부사 정윤(鄭錀), 서장관 박세당(朴世堂)이 연경(燕京)에서 돌아왔다. 상이 인견하고 저들의 사정을 하문하니 이경억 등이 모두 듣고 본 것으로 대답하기를,
"우리 나라 사람들은 매번 저들의 사치가 이미 극에 달하였으니, 반드시 패망할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저들은 이미 전쟁도 없고 땅을 남쪽 끝까지 얻어서 물화(物貨)가 집중되어 편안히 부귀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정조(正朝) 때에 그들을 보니 비록 하급 관리라도 모두 흑초구(黑貂裘)를 입었고, 사용하는 기물은 화려하여 눈이 어지러울 정도였습니다. 우리 나라의 가난하고 검소한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과도하다고 여기는 것이지 이것은 결코 망할 조짐이 아닙니다. 가장 위험한 것은 한인(漢人)을 침학함이 끝이 없어서 모두 언제나 망할꼬 하는 탄식을 하고 있으니, 만일 뛰어난 사람이 한번 외친다면 장차 반드시 흙덩이가 무너지는 듯 기와가 깨지듯 하는 형세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정태화가 말하기를,
"지난번에 걱정되었던 것은 몽고(蒙古)에서 변란을 일으켜 조공의 길이 막히는 것이었는데,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습니까?"
하니, 이경억이 답하기를,
"희봉구 부락(喜峰口部落)이 매우 강성하므로 청인(淸人)들이 두려워 하고 있으나 모반(謀反)하는 실상까지는 있지 않았고, 서달(西㺚) 역시 당장 난을 일으키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염려되는 것이라면 임금의 정령(政令)이 혹독하여 한인(漢人)의 원망과 노여움이 깊이 쌓였다는 점입니다."
하였다.

 

함경 감사 권대운(權大運)이 사정(私情)을 진달하여 체직시켜 주기를 청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3월 5일 무술

상이 춘당대에 몸소 나아가 관무재(觀武才)를 하고 입시한 여러 신하에게 별찬을 하사하였다.

 

정언 신정(申晸)이 상소하여, 중궁의 온천 행차에 대하여 간언하니, 상이 알았다고 답하였다.

 

전 감사 민점(閔點)을 방면하였다. 의금부가 의논드리기를,
"민점의 죄상은 주사(奏事)의 착오에 있으니, 이것으로 조율하여 단죄하소서."
하니, 상이 단지 속하도록 명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민점이 비록 중한 논박을 받았으나 법에서 말하는 ‘삼대를 계속하여 양역(良役)을 하였다.’는 조·자·손의 삼대를 말한 것이다. 그런데 김징(金澄)은 족조(族祖)와 족손(族孫)을 통틀어 삼대라고 하였고, 법에서 말하는 ‘사건이 70년 이전에 있으면 청리(聽理)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은 쟁송(爭訟)이 70년을 지나면 청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이광윤(李光胤) 등이 이미 무진년에 쟁송을 하였다면 이 법으로 단정할 수 없는 것인데 김징이 또 이것을 인용하여 죄안을 삼았고, 여성제(呂聖齊)의 사계(査啓)에서도 역시 분별하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나문을 당하게 되었으니, 여론이 옳게 여기지 않았다.


【태백산사고본】 16책 16권 29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619면
【분류】사법-탄핵(彈劾) / 신분-천인(賤人) / 역사-편사(編史)
사신은 논한다. 민점이 비록 중한 논박을 받았으나 법에서 말하는 ‘삼대를 계속하여 양역(良役)을 하였다.’는 조·자·손의 삼대를 말한 것이다. 그런데 김징(金澄)은 족조(族祖)와 족손(族孫)을 통틀어 삼대라고 하였고, 법에서 말하는 ‘사건이 70년 이전에 있으면 청리(聽理)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은 쟁송(爭訟)이 70년을 지나면 청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이광윤(李光胤) 등이 이미 무진년에 쟁송을 하였다면 이 법으로 단정할 수 없는 것인데 김징이 또 이것을 인용하여 죄안을 삼았고, 여성제(呂聖齊)의 사계(査啓)에서도 역시 분별하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나문을 당하게 되었으니, 여론이 옳게 여기지 않았다.

 

장령 홍주국(洪柱國)이 소를 올려 중궁의 온천 행차를 간언하니, 상이 답하였다.
"간하는 말은 대개가 곡절을 알지 못하는 데서 나왔으므로 그러하다."

 

3월 6일 기해

관리를 보내어 여제(厲祭)를 행하였다.

 

상이 춘당대에 몸소 임어하여 관무재를 하였다. 거자(擧子)를 정제하지 못했다고 병조 낭관을 나문하라고 명하니, 판서 홍중보가 아뢰기를,
"신이 장관으로서 제대로 검칙하지 못하여 이렇게 되었습니다. 벌을 내리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장관의 허물이 아니다."
하였다.

 

상이 연일 관무재를 하면서도 싫증내지 않았다. 권법(拳法)이나 채찍 곤봉같은 것은 마치 아이들의 놀이 같은데 어좌(御座)의 가까운 곳에서 시험하여 보고 듣는 자들이 매우 놀라워했다. 장전(帳殿)의 좌변에 높은 누각이 하나 있어 울타리를 치고 장막으로 둘렀는데, 사람들이 모두 안에서 구경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응교 남이성(南二星) 등이 차자를 올려 간언하니, 상이 기분나빠하며 일어나 들어갔다. 정태화가 허적에게 이르기를,
"옥당이 차자로 간하는데 우리들이 주상을 모시고 온종일 시재(試才)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
하였다. 얼마 후 상이 유의하겠다고 답하였다.

 

3월 7일 경자

상이 춘당대에 친히 나아가 관무재를 하였다. 상(賞)을 논함에 차등을 두었는데, 문신 정시(庭試)에 수석을 차지한 이훤(李藼)에게는 6품으로 옮겨주었고, 그 다음인 권열(權說) 등 6명에게는 표피(豹皮)·호피(虎皮)를 하사하였다. 문신 시사(試射)에 수석을 차지한 강석빈(姜碩賓)에게는 호피를 하사하고, 그 다음인 이후(李煦) 등에게는 망아지를 하사하였으며, 무신 민진익(閔震益) 등 3명에게는 말을 잘 탔다고 호피를 하사하였다. 육량 원사(六兩遠射), 유엽전(柳葉箭), 편전(片箭), 기추(騎蒭), 편추(鞭蒭), 조총(鳥銃) 등에 우등한 사람들은 혹 직부(直赴)를 내려주었고, 혹은 변장(邊將)을 제수하기도 하고 혹은 가자를 명하기도 하였다.

 

온양(溫陽)의 거둥 때 경기 일대 및 충청의 각 군읍과 양로(兩路)의 진상하는 물선(物膳)은 일체 정미년의 예에 의거하여 거행하게 하고, 함경·전라 양도의 감사는 경상(境上)에 진주(進駐)하지 말게 하여 그 폐단을 제거하게 하였다.

 

홍처후(洪處厚)를 발탁하여 함경 감사로 삼았다. 홍처후는 벼슬살이를 하면서 근실하지 않았으며, 나이 또한 노쇠한데 대신이 추천하니, 물의가 놀랐다.

 

부교리 이민서(李敏叙)가 정시에 참여하여 제술하지 않았는데 물러나면서 소를 올려 진계하기를,
"어제 상께서 내원(內苑)에 나아가 무예를 시험하는 것을 보시고 또 문사를 시험하시니 매우 훌륭한 생각이었습니다. 더구나 명제(命題)한 의도는 은미한 취지까지 있었으니, 신은 진실로 감격하였고, 전하의 의지가 광복(光復)에 있어서 여러 신하의 뜻을 살피고자 한 것인 줄 알았습니다. 신은 학술이 거칠고 재주가 짧아서 온 종일 애써 보았지만 끝내 문장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구구한 충성을 바치려는 정성은 스스로 그만 두지 못하겠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태조 대왕이 사조(四祖)가 덕을 쌓은 기반을 받들고 고려(高麗)의 망해가는 운세를 만나 천도와 인심에 순응하여 가정을 바꾸어 국가를 만들었으니, 신비롭고 성대한 공렬이 천지간에 높고 빛나 역사에도 다 싣지 못하고 칭송의 노래로도 모두 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점을 간추려 말한다면, ‘너그럽고 인자하여 군중을 얻었고, 부지런하고 검소하여 기반을 열었으며, 죽이지 않는 것으로 무(武)를 삼고 탐내지 않는 것으로 보(寶)를 삼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용비어천가》 1백 25편이 대체로 이 덕을 형용한 것입니다. 신이 삼가 역대의 군주를 살펴보니, 흥기할 때는 모두가 조종이 인후하고 절검하여 어려움에서 뜻을 얻었으며, 패망할 때는 역시 모두가 교만하고 사치하여 방자한 데 빠지는 데 연유하였습니다.
대체로 창업할 시초에는 자기 나름대로 법을 만드는 것이니, 새로운 규모를 세워 전대의 폐정을 모두 제거할 수 있지만, 이어받는 때는 내려오며 쌓인 폐단이 보고 듣는 것에 익숙해져 약간의 변경이라도 있으면 곧장 구애됨이 있으니, 이것이 첫 번째 어려움입니다. 창업할 시초에는 귀와 눈이 한결같이 새롭고 생각도 오로지 정밀하여 사람마다 일심으로 주의하여 위에서 시키는 대로 따르지 않는 이가 없지만, 이어받았을 때는 사람마다 마음이 다르고 선비마다 의논이 달라서 뜻이 하나로 뭉치지 못하고 사심을 펴려고 힘써서 하나의 일을 일으키려고 하면 의논이 어지럽게 일어나니, 이것이 두 번째 어려움입니다. 창업할 시초에는 호걸이 서로 만나 마음과 덕이 서로 같으며, 사람마다 본래 존귀함이 없고 선비마다 친밀함이 없지만, 이어받았을 때는 이미 권행(權倖)이 있거나 이미 귀척이 있으며, 이미 사사로이 친밀함이 있어서 저마다 굴혈에 사리고 웅거하여 좌우에서 견제합니다. 만일 사치를 금지하고 전산(田産)을 제한하려고 하면 모두 방해하는 것이 있어서 임금이 마음대로 명령을 행하지 못하니, 이것이 세 번째 어려움입니다. 창업할 시초에는 모두가 몸소 어려움과 변고를 겪었으니, 전일에 잃게 된 것을 징계하고 후일의 편안하기를 계획하는지라 그 마음이 두려워하여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으며, 취하거나 버림을 분명히 살피니 선을 행하기가 쉽지만, 이어받았을 때는 진실로 명철한 이가 아니라면 비록 패망하는 형세가 가까이 목전에 있더라도 위세에 젖고 안일에 빠져 깨닫지 못하여 모두가 위험을 편히 여기고 재앙을 이익으로 생각하며, 자연적으로 이루워지는 형세를 밤이 아침되는 듯이 여기고 습관이 쌓인 지 오래되어 당연하다고 하니, 이것이 네 번째 어려움입니다. 이상의 것들이 두 시대가 서로 다른 이유입니다.
우리 나라가 태조가 건국한 당초부터 지금까지 2백 77년 동안 무너진 기강이 오늘에 이르러 가장 극심합니다. 조종조의 좋은 법과 아름다운 뜻을 제대로 정리하여 거행하지 못하고, 중간에 흐르는 폐단과 쌓인 환란이 어지럽게 엉켰는데도, 성명께서는 목청(穆淸)한 곳에서 눈을 감고 앉아서 구습을 따르는 것에 힘을 쓰고 계시며, 대소 관원은 안팎에서 개인의 영리에 매달려 기름진 것을 영화로 여기고 안위와 존망의 큰 계획을 모두 소홀히 하여 도모하지 않으니, 백성은 무엇을 바라며 국가는 무엇에 의뢰하겠습니까. 이것이 숙향(叔向)이 이른바 ‘비록 나의 조국이지만 역시 말세이다.’고 한 것이니, 통곡하며 눈물지을 일입니다.
신은 진실로 원하건대, 성명께서 조종의 창업한 어려움을 거울삼고 뒤를 이어 보존하고 지키기가 쉽지 않음을 경계하여 그 지위를 편안히 여기거나 서정(庶政)을 소홀히 여기지 마소서.
명령 하나를 내리거나 사업 하나를 일으키는 데도 일시의 안일한 습성에 그르치거나 한 사람의 아첨하는 말에 엄폐되지 말아서 중심(中心)이 얽매임 없이 대공 지정하게 위에 임하여 뜻을 세우고 정신을 가다듬어 한결같이 창업의 초기처럼 하소서. 사람을 등용할 때는 오직 현능한 이를 구하며 말씀을 들을 때는 오직 의리를 강구하여 모든 구애됨과 견제되는 사사로움을 일체 쓸어 버리소서. 이것에 종사하여 게을리 하거나 저지당하지 않는다면 천하에 어찌 하지 못할 일이 있겠습니까.
옛날 우리 조종께서는 없는 국가를 있게 하였고, 창업하여 계통을 내렸는데, 지금은 그 후대로서 있는 국가도 다스리지 못하여 백성은 곤궁하고 법은 폐단이 되니, 어찌 계술(繼述)의 효성을 바라겠습니까.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주(周)나라가 비록 옛나라이지만 그 천명은 새롭다.’ 하였고, 소공(召公)도 역시 말하기를 ‘이것으로서 왕이 하늘에 나라의 천명을 기원하는 것에 이바지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신의 견딜 수 없는 구구한 뜻을 감히 이렇게 아뢰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정시(庭試)에 들어와 제술하지 않는 것은 진실로 근일의 폐풍이다. 아뢴 말은 염려하고 사랑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니 재삼 보며 깊이 감탄하였다. 제술에 응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였다.

 

3월 8일 신축

예조가 아뢰기를,
"정릉을 봉심한 좌의정 허적의 서계로 인하여, 본조에서 경기 감사에게 이문(移文)하여 동서 각릉에 왕후릉의 난간석(欄干石)과 무석(武石)을 배설하였는지를 봉심하여 문서로 보고하게 하였습니다. 각릉의 보고를 연속으로 접하여 보니, 공릉(恭陵)이 난간석과 무석을 배설하지 않았고, 경릉(敬陵)은 대왕릉에 난간석과 무석을 배설하지 않았습니다. 이번 이 정릉의 난간석은 지금 와서 배설하기는 어려우며 무석 정도는 혹 새로 만들어 배설할 수 있겠으나 이미 설치하지 않은 능도 있으니, 그대로 두는 것도 흠이 되지는 않습니다. 대신에게 다시 의논하여 품처토록 하소서."
하였는데, 대신이 모두 지금 와서 고칠 필요가 없다 하므로, 상이 그대로 시행하라고 하였다.

 

3월 9일 임인

조복양(趙復陽)을 형조 판서로, 김징(金澄)을 발탁하여 동부승지로, 박증휘(朴增輝)를 집의로 삼았다.

 

3월 10일 계묘

햇무리가 지고 안쪽에 양이가 있었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니, 약방이 들어와 진찰을 하였다. 좌의정 허적이 중전의 거둥에 가마를 사용하지 말기를 청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또 4명의 공주가 일시에 배행하지 말게 하기를 청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도승지 장선징이 아뢰기를,
"사학(四學)의 학제(學製)를 법에 의하여 시취(試取)하지 않았으니, 사학의 전후 겸관(兼官)을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당시에 판윤 민희가 대계로 인하여 감히 공무를 집행하지 못하였다. 호적 사목(戶籍事目)을 이 때문에 반포하지 못하자 각읍이 모두 시일이 급박하여 일처리를 제대로 못할 것을 염려하니, 허적이 이 때문에 민희를 체직시키기를 청하였다. 장선징이 아뢰기를,
"위에서 간발한 사람을 아래에서 경솔하게 체직을 청하는 것은 사체가 온당치 않습니다."
하니, 상이 아뢰기를,
"호적 사목은 한성부 관원으로 하여금 대신을 찾아가 문의하여 조속히 반출토록 하라."
하였다.

 

홍중보(洪重普)를 판의금으로, 윤집(尹鏶)을 이조 참판으로, 유철(兪㯙)을 대사헌으로, 조수익(趙壽益)을 호조 참판으로, 이민적(李敏迪)을 대사성으로, 권격(權格)을 집의로, 민종도(閔宗道)·김덕원(金德遠)을 지평으로, 조세환(趙世煥)을 장령으로, 박경지(朴敬祉)를 총융사로, 이완(李浣)을 포도 대장으로 삼았다.
윤집은 사대부의 풍도가 있으므로 명망이 쇠하지 않았고, 유철은 일찍이 효종조 때 대사간으로 형을 받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서용되었으되 태연히 관작을 받아들이니, 사람들이 이 때문에 비루하게 여겼다. 조수익은 사양하고 나오지 않았다.

 

좌참찬 송준길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노쇠한 병이 나날이 심하여 결코 여저(旅邸)에 오래 머물기 어렵고 근력이 쇠잔하여 어가를 호위하고 가기도 어렵습니다. 먼저 온천에 가서 문후만 올리고 인하여 휴가를 얻어 성묘도 하고 병도 조섭하겠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어록해(語錄解)》를 교감하는 일은 곡절이 없지 않으니, 발문은 응교 남이성(南二星)으로 하여금 제진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의 상소를 보니 매우 허전하다. 마땅히 대면하여 개유하겠다. 상소 말미의 일은 실로 나의 뜻에서 나온 것이니 유신은 사양을 하지 말고 지어 올려 나의 뜻을 저버리지 말라."
하고, 사관을 보내어 전유케 하였다.

 

수찬 이규령 등이 차자를 올려, 송준길을 머물게 하여 왕세자를 보도하게 하기를 청하니, 상이 답하였다.
"차자의 말은 진실로 옳다. 내 마땅히 정성과 예를 다하겠다."

 

보덕(輔德) 권격(權格) 등이 상소하여, 송준길이 사직하고 돌아감을 윤허하지 말라고 하니, 상이 답하였다.
"내 뜻도 역시 그러하다. 마땅히 머물도록 권유하겠다."

 

김포(金浦) 유생 이만춘(李萬春) 등이 상소하여, 문열공(文烈公) 조헌(趙憲)의 서원 액호(書院額號)를 청하니, 상이 해조에 내렸는데, 후에 송준길의 말로 인하여 액호를 하사하였다.

 

함경도(咸鏡道)에 정월 이후 두역(痘疫)으로 사망한 사람이 9백여 명이었다.

 

3월 11일 갑진

상이 사관을 보내어 좌참찬 송준길에게 면유할 뜻을 전하였다. 양심합에 나아가 송준길을 인견하기를,
"경이 비록 소를 올리고 물러가기를 청하나 비단 나의 마음만 허전한 것이 아니고, 세자의 보익을 오로지 경에게 위임하였으므로 지금 면유하려고 한다."
하니, 송준길이 아뢰기를,
"신이 나이가 이미 70세에 가깝고 이처럼 질병이 있으니, 여기에 머문들 무슨 유익함이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이미 오래 머물 뜻이 없으니, 내 어찌 억지를 부리겠는가. 다만 지금 사세가 이러하니 우선 머물러 환도(還都)하기를 기다렸다가 갈지 머물지를 천천히 논의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송준길이 《어록해(語錄解)》의 발문(跋文)을 지어 올리는 일을 사양하기를,
"비록 상의 하교가 있었으나 신이 문자에 있어서 날마다 매우 거칠어져 결코 명을 받들기 어렵습니다. 남이성(南二星)에게 지어 올리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양말고 지어 올려서 나의 뜻에 부응하라."
하니, 송준길이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옛 규정에 부제학으로 금부 당상을 겸임하게 되면 반드시 그 겸임의 체차를 허락하여 준다고 하였으니, 대체로 경연의 관원은 형관(刑官)을 겸임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인조 때 고 판서 정경세(鄭經世)가 여러 차례 부제학에 제수되었는데, 혹 금오 당상을 겸하게 되면 고례(古例)에 근거하여 체직을 허락하였습니다. 이번에 빈객 조복양이 형조 판서에 제수되었는데, 빈객은 평상시와 다르고 형조 판서는 지의금(知義禁)과 비교가 안 되니, 신의 뜻으로는 조복양을 형조 판서에서 체직시키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하니, 상이 체직시키라고 명하였다. 송준길이 또 아뢰기를,
"신은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지난번 영릉(寧陵) 제관에 차출되었을 때 질병을 무릅쓰고 다녀왔습니다. 제관은 봉심하는 규정이 없으나 신은 제사를 지낸 뒤에 능을 봉심하였는데 석물(石物)들이 매우 염려되었습니다. 신이 보기로는 개수하지 않을 수 없으나 일이 매우 중대하니 마땅히 대신에게 문의하여 처리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신이 풍수 지리에 대해서 아지 못하나 산등성이에 올라 살펴보니, 광명 쇄락(光明灑落)한 곳일 뿐만 아니라 선릉(先陵)과 함께 한 곳에 있으니, 그 정리에 있어서도 역시 편안해 보였습니다. 혹 어떤 지관(地官)의 무리가 능소를 옮기자고 청하는 말이 있으면 이것은 실로 망령된 말이니 일체 받아드리지 않는 것이 옳습니다."
하였다. 송준길이 또 《산릉제사초략(山陵祭祀草略)》을 진달하면서 아뢰기를,
"이것이 바로 세종(世宗) 때의 상신 황희(黃喜)가 백관을 거느리고 3개월을 정청(廷請)한 것입니다. 옛 사람의 멀리 내다봄으로도 제사 의식이 융성하지 못함이 이러하며 그중에도 가장 온당치 못한 것으로는 6개의 촛불입니다. 그 만드는 방법을 보면 노위(蘆葦) 몇 개를 종이로 싸서 우지(牛脂)와 법유(法油)를 발랐는데 태우면 밝지도 않고 꺼지면 악취가 납니다. 사대부 집의 제사 때에도 촛불을 사용하지 않는 이가 없는데 유독 국가의 제사에 어찌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제물은 비록 창졸간에 변경할 수 없더라도 제사 촛불은 변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해조에 명하여 처음 사용한 것이 어느 때부터 시작하였는지 조사해 내라고 하였다. 송준길이 또 아뢰기를,
"지난 해 온양 행차 때 충청도 내의 절행(節行)이 있는 사람들로서 전후 도신이 계문한 자를 속히 감정하여 포상할 것을 특별히 전교하였는데, 지금까지도 거행하지 않고 있으니, 일의 체모가 온당하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명하기를,
"충청도의 절행이 있는 사람들이 기록된 문서를 가지고 대신과 논의하여 행차가 있기 전에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송준길이 또 아뢰기를,
"지난 임진난 때에 장성(長城) 무인 조영규(趙英圭)가 양산 군수(梁山郡守)로 있으면서 일 때문에 동래(東萊)에 갔었는데 마침 왜구가 상륙하였습니다. 부사 송상현(宋象賢)에게 묻기를 ‘공은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하니, 송상현이 답하기를 ‘한번 죽는 것 밖에 무슨 다른 계책이 있겠는가.’ 하고 되묻기를 ‘그대는 앞으로 어떻게 하겠는가?’ 하니, 조영규가 ‘내 이미 여기까지 왔으니, 마땅히 공을 따라 죽어야 한다. 다만 노모(老母)가 임소(任所)에 있으니, 잠시 돌아가 영결(永訣)하고 피난할 곳을 지시해 드리고 오겠다.’ 하자, 송상현은 작별을 핑계대고 살 길을 찾아 도망치는 것이라고 의심하였는데, 기약한 날짜에 과연 찾아와서 함께 죽었습니다. 그의 아들 조정로(趙廷老)는 부친의 원수를 갚지 못하였다고 하여 깊이 흙집에 거처하며 하늘의 해를 보지 않았는데, 지난번 어사가 조정로의 효성을 계문하여 정려를 내렸습니다. 그러나 조영규는 오래된 일이라고 하여 포상의 은전을 받지 못하니 장성 사람들이 지금까지 원통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조영규 역시 효행으로 소문이 났는데, 오랫동안 그 어버이와 떨어져 있을 때에 집에 편지를 보내지 못하여, 기르고 있던 개를 손으로 어루만지며 육기(陸機)의 개 ‘누렁귀[黃耳]’가 서신을 전한 일을 혼자 말로 중얼대며 탄식하니, 개가 마치 그 뜻을 이해하는 모습을 하므로 인하여 가서(家書)를 매달아 보냈더니 며칠 안 되어 본가에 갔다와 사람들이 효행에 감동된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조영규는 평소의 효행이 이미 이러하고 난리에 임하여 절의를 수립한 바가 또 저와 같습니다. 이 사실은 상신 유성룡(柳成龍)의 문집 속에 있는데 이처럼 드러난 것을 어찌 인멸되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예조에 명하여 그 사적을 조사해 내게 하였다. 송준길이 또 고 참의 홍명형(洪命亨)이 강도(江都)에서 사절하였는데 유독 정포(旌褒)를 입지 못하였다는 것으로 언급하니, 상이 조영규(趙英圭)의 일과 일체로 품지(稟旨)하게 하였다.

 

송준길이 인동(仁同)의 길재(吉再), 밀양(密陽)의 김종직(金宗直), 김포(金浦)의 조헌(趙憲)의 서원, 南陽(남양)의 제갈 무후(諸葛武侯)의 사우(祠宇)의 일을 진달하고 모두 사액(賜額)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민시중(閔蓍重)이 남양 현감으로 있을 때 사우를 창건하고 제갈 무후와 호 문정공(胡文定公)을 함께 배향하였으니, 대체로 주자(朱子)가 와룡강(臥龍岡)에 사우를 세운 뜻을 취한 것이다. 부사 윤계(尹棨)가 정축년의 난리에 사절하였다고 배향하여 사액을 청하였으나 조정에서 허락하지 않았고, 인동과 밀양 역시 일찍이 사액을 청하였으나 얻지 못하였는데, 이때 일체로 시행하였다.

 

사신이 북경(北京)에서 돌아올 때면 청국(淸國)에서 으레 은자(銀子)와 비단을 조정에 보내면서 상사(賞賜)라고 하였다. 이때 동지사(冬至使)가 받아온 은자가 1천 냥이었는데, 상이 명선 공주(明善公主)에게 하사하니 주상의 제 1녀였다. 송준길이 상에게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저들 나라에서 으레 보내는 것을 호조에 내려 저들을 접대할의 비용으로 쓰도록 진달한 바가 있습니다. 지금 듣건대 다른 곳에 썼다고 하니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호조에 내리지 아니한 것은 불과 두 번이다."
하였다. 송준길이 아뢰기를,
"공적으로 얻은 것을 위에서부터 사적으로 사용하여서는 아니 되니, 전처럼 호조에 보내는 것이 옳습니다."
하니, 상이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있었다.

 

장령 조세환(趙世煥)이, 서필원(徐必遠)을 삭출하는 논의에 이의를 세웠다고 하며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3월 12일 을사

관리를 보내어 선잠제(先蠶祭)를 행하였다.

 

지평 민종도(閔宗道)가 서필원을 삭출하는 논의에 이견을 낸 것으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이경억(李慶億)을 형조 판서로, 이정영(李正英)을 호조 참판으로, 조복양(趙復陽)을 우참찬으로, 이단상(李端相)을 부제학으로, 신명규(申命圭)를 장령으로, 홍억(洪億)을 지평으로, 이익상(李翊相)을 교리로, 윤심(尹深)을 부수찬으로, 김상(金鋿)을 헌납으로 삼았다.

 

경상 감사 심재(沈梓)가, 호군 신석번(申碩番)의 상소를 중간에서 유실한 일 때문에 그것을 가지고 간 사람을 경상(境上)에 효수(梟首)하기를 아뢰었다. 정원이 그것은 전도되었다고 하여 추고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사관에 새로 추천된 조근(趙根)이 병을 핑계로 강론에 응하지 않자, 영상과 좌상이 추고하기를 청하니, 전교하기를,
"일이 매우 놀랍다. 먼저 파직한 후 추고하라."
하였다. 조근이 남의 말이 있을까 의심하여 끝내 강론에 나아가지 않았다.

 

3월 13일 병오

밤 초경에 달이 태미 서원으로 들어갔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통제사 이도빈(李道彬)을 인견하고 서로(西路)의 융비(戎備)를 하문하였는데, 이도빈이 새로 평안 병사에서 체직되었기 때문이었다.

 

3월 14일 정미

장령        신명규(申命圭)가 상소의 비답이 온당하지 못하다고 인피하였고, 지평        홍억(洪億)은 지금 추감(推勘)을 받고 있다고 인피하였다. 헌부가 처치하여 신명규는 출사하고 홍억은 체직하게 하니, 상이 홍억 역시 출사토록 명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충청도 사람으로 충효와 절의를 세워 전후 계문한 자가 95명인데 대신과 논의하여 실적에 따라 등급을 정하여 모두 별도의 단자에 기입하였습니다. 그 중에 다시 조사할 자와 드러난 행적이 없어 등급을 정할 수 없는 자는 모두 말단에 기록하고 각 개인의 이름 아래 실행을 간추려 기록하여 올리오니 이것으로 분부하여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전라도 부안현(扶安縣)의 전선(戰船)이 합동 훈련 때문에 출항하였다가 바람을 만나 배 전체가 침몰하여 사망한 자가 80여명이라고 우수사가 계문하였다. 상이 빠져 죽은 사람에게 본도로 하여금 휼전(恤典)을 거행하게 하고, 현감 오두헌(吳斗憲)은 잡아다 다스리게 하였다.

 

지춘추 박장원(朴長遠)과 대교 이인환(李寅煥)이 《실록》을 상고하여 돌아왔다.

 

3월 15일 무신

상이 왕대비를 받들고 온양 온천으로 행차하는데, 중궁이 따르고 네 공주가 배행하였다.

 

거가(車駕)가 출발하려 할 때 승지, 사관, 시위 장사가 인화문(仁和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상이 시위하는 모든 신하에게 만안문(萬安門) 밖에서 기다리게 하였다. 얼마 후 상이 홍융의(紅戎衣)를 입고 궁전(弓箭)을 차고 깃털을 꼿고 수레를 타고서 만안문을 나왔다. 인정문(仁政門) 밖에서 말을 타고 숭례문(崇禮門)을 지나 청파(靑坡)에서부터는 가교(駕轎)를 타고 진두(津頭)에 이르러 언덕 위에 가교를 멈추었다. 금군(禁軍)의 말 달리는 것을 관람하고 배 있는 곳에 도착하니, 군기시가 승선포(乘船砲)를 발사하였다. 상이 정원에 묻기를,
"자성(慈聖)의 가교가 도착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앞질러 발포함은 어째서인가?"
하니, 정원이 해관을 추고하라고 하였다. 장선징은 아뢰기를,
"좌참찬 송준길이 뵙기를 청합니다."
하니, 상이 인견하였다. 송준길이 아뢰기를,
"신의 상황으로는 돌아가는 것이 마땅한데 신을 비인(匪人)이라 않고 머물러 있게 하시니 신은 응당 감격하여 명을 받아야겠습니다만, 이단상(李端相)과 박세채(朴世采)는 모두 학문하는 사람으로 전부터 불러오려고 하였으나 할 수 없었던 이들입니다. 이단상은 지금 올라와서 서울에 있고 박세채도 역시 멀지 않은 곳에 있으니, 두 사람으로 하여금 다시 찬선(贊善)을 겸하게 하여 서연(書筵)에 시강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즉시 두 사람을 서연에 참여하게 할 것을 정원에 남아 있는 승지에게 분부하였다. 송준길이 아뢰기를,
"거가가 온양에 도착하면 도내에 학문이 있는 사람을 즉시 초빙하여 위로하고 타일러 올려보내 모두 서울에 모이게 하소서. 이것이 제일 중요한 일입니다. 승지로 하여금 때에 임박하여 품지해서 거행케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승지는 잘 알아서 거행하라."
하였다. 송준길이 또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상신이 경연에서 한 말이 있다고 하는데, 신이 이 말을 듣고 마음이 매우 불안합니다. 만일 그렇다면 신이 지금까지 머물러 있는 것은 희망하는 바가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혹 성명(成命)이 있으셨다면 신은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돌아가겠습니다."
하였다. 대체로 좌상 허적이 송준길을 수이사(守貳師)로 삼으라고 청한 것 때문이었다. 자전의 거가가 도착하자 여러 신하가 모두 물러났다. 상이 막차(幕次)를 나와 공손히 맞이하여 복명(復命)하니, 송준길이 입시하였다. 송준길이 선공 감역(繕工監役)을 파하지 말라고 청하기를,
"사사로움이 있다고 하는 것인 즉 실상이 아닙니다."
하니, 상이 추고만 하라고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오늘 성중이 비어 있고 세자를 보필하는 일을 오로지 경에게 위임하였다. 강원(講院)의 관원이 모두 나이 젊으니, 모든 일을 경에게 문의하여 행하게 하라."
하니, 송준길이 아뢰기를,
"성교가 지성스럽고 간절하니, 신이 마음을 다하겠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이번 이 거동이 만부득이한 것이므로 감히 중지하기를 청하지는 못하겠으나 가시는 노정에 폐단이 없다는 말은 망녕된 말입니다. 상께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신 후에야 백성이 고달프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지평 홍억(洪億)은 배종(陪從)을 회피하여 물의에 비난을 받았다고 하고, 지평 김덕원(金德遠)은 어가 수행에 핑계를 대어 탄핵을 받을 것이라 하고 모두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삼전(三殿)이 저녁 때 과천현(果川縣)에 머물렀다.

 

중사(中使)를 보내 대왕 대비께 문안하였다.

 

왕세자가 필선 경최(慶㝡)를 보내어 삼전에 문안하였다.

 

제천현(堤川縣)에, 본월 1일에 눈이 내렸는데, 정강이가 묻힐 만큼 쌓였다.

 

3월 16일 기유

상이 저녁 때 진위현(振威縣)에 머물렀다. 묘시에 상이 거가로 과천현을 출발하니 자전과 중전도 동시에 움직였다. 진시에 사근(沙斤)의 주정소(晝停所)에 도착하여 오시에 출발하였다. 미시에 안령(安寧)의 주정소에 도착하니 비가 매우 심하게 내렸다. 미시에 출발하여 신시에 진위현에 도착하였다. 거가가 노상에서 빨리 달리는 바람에 호위하던 군사가 넘어지고 의장이 흐트러지니 승지가 천천히 행차할 것을 구전(口傳)으로 아뢰었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집의 권격(權格), 장령 홍주국(洪柱國)이 아뢰기를,
"전 지평 홍억은 파직하여 서용하지 마시고 김덕원은 파직하시고, 해당 승지와 주서는 추고하소서."
하였는데, 홍억은 배종을 피하려고 하였고, 김덕원은 거가를 따를 것이라고 핑계하였으며, 승지와 주서는 바르게 써 입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이 모두 추고하라고 하였다.

 

3월 17일 경술

묘시에 상이 거가로 진위현을 출발하니, 자전과 중전이 동시에 움직였다. 상이 노상에서 매번 군악(軍樂)을 앞세워 인도하게 하였다.

 

대가(大駕)가 출발하려 할 때 부교리 이민서(李敏叙), 부수찬 김만균(金萬均)이 뵙기를 청하여 거가의 앞에서 아뢰기를,
"어제는 길이 멀고 또 비가 내리는 날씨여서 형세가 천천히 행할 수 없었으나 다만 너무 빨리 달린 것이 매우 온당하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가 멈추지 않기 때문에 배종하는 자들이 비에 젖는 것이 염려되어 조금 달리게 하였다."
하니, 이민서가 아뢰기를,
"몰아서 달릴 때 의물(儀物)과 배종이 전도되고 질서를 잃었으며, 군병들이 길가에 뒹굴고 엎어지는 이도 많았으니, 이것이 어찌 임금이 거둥하는 위의이겠습니까. 또한 군읍에서 백성들이 모여 있는 곳은 관광하는 것에도 관계되니 심하게 빨리 달리는 것은 더욱 불가합니다."
하였다.

 

진시에 거가가 소사(素砂)의 주정소에 멈추고, 사시에 출발하여 모산(茅山)의 주정소에 멈추었다. 영의정 정태화, 좌의정 허적이 구전으로 아뢰기를,
"대가가 겨우 막차에 들어간 후 신 허적이 후반(後班)에 있었는데, 말미에서 발포하는 소리가 들리므로 사람을 시켜 조사해 보게 하였더니 어영군 한 명이 들녘에 있는 기러기를 잡으려고 발포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은 진실로 무지한 소치이며 사건이 중대합니다. 평소에 제대로 단속하지 못한 죄를 논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장 유혁연(柳赫然)을 추고하고 그 부대의 초관(哨官)을 조사하여 다스리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장은 뒤에 있었으므로 어쩌면 모를 수도 있겠지마는 장관이 어찌 몰랐을 리가 있겠는가. 대장은 추고하고 초관은 조사하여 처리하라."
하였다. 정태화 등이 물러갔다가 다시 모아서 구전으로 아뢰기를,
"신들이 처음 어영군 교련관 최영달(崔英達)의 말을 듣고 대장과 초관의 죄를 청하였는데, 교련관 한여신(韓汝信)이 대장의 뜻으로 와서 말하기를 ‘대장이 후진(後陣)에 있으면서 기러기 떼가 들녘에 가득한 것을 보고 앞서 인도하는 포수(砲手)를 뒤쳐져 쏘아 보게 한 것인데 최영달이 대장에게 죄책이 미치는 것을 염려하여 이렇게 거짓으로 대답한 것이다.’고 합니다. 만일 그렇다면 죄는 대장에게 있고 초관은 관계가 없으니, 조사하여 다스리라는 명은 마땅히 거두어야 할 것 같으며, 대장의 죄를 상께서 재량하여 조처하소서."
하니, 상이 명하여 대신과 여러 신하를 인견하였다. 들어가기에 앞서 허적이 도승지 장선징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여러 의논이 어떻던가?"
하니, 장선징이 대답하기를,
"사건이 극히 경악스러워 중론이 심히 엄준합니다."
하였다. 허적이 정태화에게 귓속말을 하더니 들어갔다. 두 정승이 구전으로 계사의 뜻을 진달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항오의 군졸이 아니라서 분간(分揀)하는 도리가 있어야 할 것 같으니, 우선 추고하라."
하니, 정태화와 허적이 모두 아뢰기를,
"이것이 비록 경망한 행동에서 나왔으나 사건이 중대합니다. 외부의 여론이 모두 추고로는 가볍다고 합니다만, 거둥이 임박하였으니, 온양의 행궁(行宮)에 도착한 후 상량하여 죄를 논의함이 합당합니다."
하니, 상이 옳다고 하였다. 부교리 이민서가 청대하려고 하니, 부수찬 김만균이 거가가 곧 출발해야 하기 때문에 불가하다고 만류하였다. 동부승지 김징이 오라고 손짓하며 말하기를,
"속히 청대하시오."
하자, 반열을 헤치고 곧장 들어왔다. 홍중보가 말하기를,
"정원이 청대하는가? 옥당이 청대하는가?"
하였다. 허적이 반열이 있다가 노기 띤 얼굴로 말하기를,
"유혁연(柳赫然)이 도망칠 사람이 아닌데, 어찌 이처럼 급하게 구는가."
하였다. 상이 이때 이미 가마에 올랐다. 김징이 나아가 거가 앞에서 아뢰기를,
"옥당이 청대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긴급한 일이 아니니 온천에 도착한 후 입시하라."
하자, 김징이 그제야 물러났다. 신시에 대가가 온천 행궁에 도착하고, 옥당이 청대하니, 상이 이르기를,
"몹시 피곤하다. 적어서 들이라."
하였다.

 

3월 18일 신해

상이 온양 행궁에 있었다. 약방으로 하여금 들어와 진찰하게 하였다. 이때 영의정도 입시하였고, 상이 여러 신하를 인견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유혁연이 망령되게 저지른 일로 인하여 물의가 비등하고 대계가 이미 발론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헌부는 피혐하였다."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간원이 잡아다 신문할 것을 발론하였습니다만, 신은 허적과 상의하였습니다. 만일 중한 죄를 준다면 매우 난처하고, 그렇다고 대수롭지 않게 처치할 수도 없으니, 참작하기가 곤란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관이 비록 일의 체모로 발론하였으나 잡아다 신문할 만한 정상은 없다."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비록 물어야 될 정상은 없으나 잡아다 신문하는 것은 그만둘 수 없습니다."
하였다. 좌상 허적의 말도 역시 같았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군율(軍律)은 지엄하여 참(斬)하는 죄가 있고 그 다음은 곤장을 치는 것입니다. 유혁연은 별장에 비할 수 없으니, 곤장을 친 후에 또 군병을 거느리게 한다면 그것은 국가의 체면에 손상이 됩니다."
하였다. 장선징이 아뢰기를,
"외부의 의논이 모두 만일 그때 상께서 장전(帳殿)에 나아가 직접 곤장을 쳤다면 군율의 체면을 세웠을 것이라고 합니다."
하자, 정태화가 아뢰기를,
"그렇게 하는 것이 옳으나 지금 와서 곤장을 치는 것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잡아다 신문한 후에 예사로이 놓아 보낼 수는 없으니, 상께서 어떠한 죄로 단정하고져 하십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나는 파직을 시키고져 한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파직을 하면 보고 듣는 이가 불만스러워 할 것이니, 삭직을 하고 놓아주어 백의 종군(白衣從軍)케 하고 도제조 및 중군으로 하여금 군병을 영솔케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느 곳에서 나문하려는가?"
하자, 정태화가 아뢰기를,
"판의금으로 하여금 개좌(開坐)하여 잡아다가 문초하게 하소서. 이렇게 하면 국가의 체모에 합당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부교리 이민서와 부수찬 김만균이 뒤따라 입시하였다. 이민서가 유혁연의 일로 진달하기를,
"일이 중대하니 만일 예사롭게 처리한다면 국가의 체모와 군율에 크게 손상됩니다."
하며, 곤장으로 다스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강력히 말하였으나, 상은 이미 대신의 말을 받아들여 끝내 따르지 않았다.
유혁연의 죄가 비록 망령된 짓에서 나왔으나 범한 죄가 극중하니, 비록 군율에 의하여 참형에 처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곤장으로 다스려 군병에 충당하는 것은 지나친 일이 아닌데, 대신은 인정에 구애되고 주상은 사체를 가볍게 여겨 파직으로 논죄하려다가 겨우 삭직하여 종군(從軍)케 하였고, 곧바로 서용하여 군병을 영솔하게 하니, 식자들이 한심하게 여겼다.

 

상이 장선징에게 이르기를,
"판부사 송시열에게 와서 만나자는 뜻을 사관을 보내어 전유하라."
하니, 장선징이 아뢰기를,
"송준길이 진달한, 학문하는 사람을 초빙하여 올라 오게 하라는 일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유지로 불러 오게 하라."
하였다.

 

이민서 등이 아뢰기를,
"내려갔던 차사원들을 인견하고 폐단을 자문하소서."
하니, 좌의정 허적이 상의 안후(眼候)가 불편하다며 못하게 하였다.

 

연배군(輦陪軍)은 돌아가 기다리다가 돌아갈 때 와서 대기하라고 하였다.

 

좌의정 허적이 아뢰기를,
"청주 선혜청(宣惠廳)의 대동미(大同米) 여분 1천여 석을 가을에 작목(作木)하기를 자원하니, 그대로 시행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허적이 또 아뢰기를,
"본도가 이번 거둥하는 때를 당하여 양전(量田) 및 안민(安民)과 공진(貢津)에 창고 축조하는 일을 일시에 함께 거행하니, 백성의 힘이 지탱하기 어렵습니다. 공진창은 우선 역사를 멈추었다가 가을이 끝난 후 다시 거행하는 것이 합당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어영 대장 유혁연을 잡아다 신문하여 죄를 정하고, 어영 중군에게 그 임무를 대신하게 한 다음 도제조로 하여금 검칙하게 하였다.

 

집의 권격, 장령 홍주국이 유혁연의 죄를 즉시 논박하지 않았다고 인피하니, 상이 이미 잡아다 신문하였다고 하였다.

 

대사간 강백년, 정언 신정이 아뢰기를,
"어영 대장 유혁연이 공경하고 신중히 하는 도리를 생각지 않고 이처럼 망령된 일을 저질렀으니, 군법이 지엄하여 용서할 수 없습니다. 잡아다 신문하여 정죄하소서."
하니, 상이 이미 잡아다 신문하였다고 하였다. 이 때에 양사가 법대로 시행하라고 여러 날을 다투었으나 끝내 따르지 않았다.

 

상이 이르기를,
"이번에 삼전(三殿)이 함께 온천에 온 것은 어쩔 수 없어서이다. 내 어찌 즐거워하는 일이겠는가. 더구나 도내에 양전하는 일과 두 곳에 창고를 설치하는 일을 일시에 벌여 놓은 데다가 행조(行朝)에 공돈(供敦)하는 수고까지 겹쳤으니, 불쌍한 우리 백성들이 어떻게 견디겠는가. 이것을 생각하면 잠시도 편치 못하니, 민심을 위로하는 일이 없을 수 없다."
하고, 마침내 충청 감사에게 하유하기를,
"백성을 병되게 하는 모든 것을 자세히 탐문해서 조목별로 계문하여, 변통하여 처치하게 하라."
하였다.

 

배종하는 관원 이하 원역(員役) 및 군병에게 양료(粮料)를 주었다.

 

상이 목욕하였다.

 

박장원(朴長遠)을 판윤으로, 윤문거(尹文擧)를 좌부빈객으로, 조성보(趙聖輔)를 지평으로 삼았다.

 

유지로 윤문거(尹文擧)·이유태(李惟泰)·윤선거(尹宣擧)·이상(李翔)·윤원거(尹元擧)·윤증(尹拯)을 불렀으나, 모두 나오지 않았다.

 

전라도 순창군(淳昌郡)에 본월 13일 눈이 내렸다.

 

3월 19일 임자

상이 온양 행궁에 있었다.

 

균전사(均田使) 민유중을 인견하여 양전하는 일을 하문하였는데, 영상과 좌상도 입시하였다. 민유중의 말로, 청풍 부사(淸風府使) 임유후(任有後)의 자급을 올려 주었는데, 그가 관직 생활을 깨끗하게 하였고, 또 지난 해에 진휼(賑恤)을 잘하였기 때문이다. 허적이 진달하기를,
"유혁연이 나문을 당하자 군교(軍校)들이 모두 실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유혁연이 평소 사졸들에게 은혜가 있었으므로 이러한 것입니다."
하였다. 병조 판서 홍중보가 이르기를,
"군율을 따지지 않고 먼저 삭직의 명을 내렸으므로 대관(臺官)이 논집하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엄한 음성으로 이르기를,
"이것은 죽을 죄가 아닌데 삭직하는 것이 무엇이 불가한가."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판부(判付)한 중에 백의 종군하라는 명이 없고 다만 삭직하여 놓아주라고만 하시니, 유혁연에게도 온당하지 못하고 일에 있어서도 부당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제 미처 논정(論定)하지 못하였으므로 판부한 것에 과연 언급하지 못하였다."
하였다.

 

승지 홍만용(洪萬容)이 아뢰기를,
"판부사 송시열이 진달한, 직산(稷山) 사람 황박(黃珀)이 사절(死節)한 일에 대해 대가가 본현에 도착하여 그 실상을 알아보고 나서 품처하라는 하교가 있었으므로 감히 품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번에 직산을 거치지 않아 거행하지 못하였으니, 본도 감사에게 탐문하여 아뢰게 하라."
하였다. 후에 예조가 황박이 증직하는 등제(等第)의 계하 속에 있다고 하여 증직하였다.

 

상이 승지에게 일렀다.
"유혁연을 삭직으로 판부하여 내린 공사는 비록 대계로 인하여 거행하지 못하였으나, 백의 종군하라는 뜻으로 해조에 분부하라."

 

충청도 목천(木川)·전의(全義)에 본월 12일 눈이 내렸다. 제천(堤川)은 10일 이후로 광풍이 연일 불어 나무가 꺾이고 지붕이 날아갔으며, 12일은 진눈깨비가 내렸는데 다음 날까지 멈추지 않았다. 백기(白氣)는 하늘에 닿았으며, 바람부는 날 추위는 엄동(嚴冬)과 같았다. 임천(林川)은 15일과 16일에 지진이 있었다.

 

3월 20일 계축

상이 온양 행궁에 있었다.

 

삼전(三殿)이 목욕하였다.

 

장령 홍주국이 동료들이 또 민희(閔熙)의 가자를 환수하라는 일로 발론하였으나 전일에 이미 이 일 때문에 인피하였으니, 지금 와서 따라서 참여하기가 어렵다며 인피하니, 처치하여 출사시킬 것을 청하였다.

 

3월 21일 갑인

상이 온양 행궁에 있었다.

 

옥당과 간원이 뵙기를 청하니, 상이 연일 목욕으로 피곤하고 번열이 있으니, 생각한 바를 써서 올리라고 하였다. 이민서 등이 물러와 재이의 참상과 두려워하고 허물을 살피는 도리를 차례로 말하고, 또 언관을 죄준 잘못을 말하였다. 또 안흥(安興)에 창고 짓는 일을 멈출 것과 행차시 군병의 감축을 말하고, 아울러 도내 감옥의 죄수를 너그러이 처결할 일들을 언급하였다. 상이 답하였다.
"아뢴 바는 나라를 근심하는 정성에서 우러나온 것이니 대신과 논의하여 처리하겠다."

 

장령 홍주국이 인피하기를,
"일을 논의하던 동료가 파직 추고의 명까지 받았으니, 신의 직위가 언책(言責)에 있어 마땅히 쟁집하는 논의를 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환수하라는 이 일이 서울에서 제좌(齊坐)하는 날 처음 발론되었을 때 동료의 의논이 모두 동의하였으나 유독 신만은 혐의가 있었습니다. 지금 와서 전계한 후 행조(行朝)에 다른 요원이 없고 신 혼자만 있어 감히 연계하지 못하는 데다 또한 계문하지 않음도 부당하니 결코 이대로 간원에 있기가 어렵습니다."
하니, 처치하여 체직하였다.

 

행 대사간 강백년이 민희와는 상피가 있어 권격의 파직 추고를 환수하는 논의에 가부를 말하기 어려운 형세라며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정언 신정이 권격을 파직 추고하라는 명을 환수하라고 계청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상이 하교하였다.
"정원의 4차 계문의 비답을 미시 초에 내렸는데 해가 저물녘에야 전지(傳旨)를 받들 수 없다고 하며 감히 꾸물꾸물 입계하여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하니, 조정의 체통이 비록 해이해졌다고 하나 어찌 무너지는 대로 버려두고 걱정하지 않겠는가. 해당 승지를 종중 추고하여 뒷날의 경종을 삼으라."

 

원양도(原襄道)의 춘천(春川)·금화(金化)·안협(安峽)·평창(平昌)에 본월 1일에 눈이 내렸다. 횡성(橫城)에는 12일에 눈이 내려 13일 오후에 멈추었으며, 평해(平海)에는 13일에 많은 눈이 내렸다.

 

3월 22일 을묘

상이 온양 행궁에 있었다.

 

중전이 목욕하였다.

 

하교하기를,
"날씨가 매우 차서 노숙하는 군병이 염려된다. 해조로 하여금 가마니를 넉넉히 지급하게 하라."
하였는데, 나누어 준 것이 균등하지 못하다고 차사원 홍산 현감(鴻山縣監) 조정우(曺挺宇)를 병조로 하여금 곤장을 치게 하였다.

 

이상진(李尙眞)을 대사간으로, 박증휘(朴增輝)를 집의로, 김득신(金得臣)을 장령으로, 이민채(李敏采)를 사서로 삼았다.

 

이조가 조세환(趙世煥)·조원기(趙遠期)·민종도(閔宗道)를 순천 현감(順天縣監)에 갖추어 의망하니, 세 사람 모두 서필원(徐必遠)을 삭출하는 논의에 이의를 세운 자들이라 하여 상이 특별히 정관(政官)을 추고하라 하고, 다시 의망하게 하였다.

 

상이 날씨가 매우 차서 야차(野次)의 영어(囹圄)가 가긍하다며 해부로 하여금 유혁연을 우선 방면하라고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대계가 아직 결말이 나지 않았는데 앞질러 유혁연을 보석함은 사체가 온당치 못합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것은 너희가 알 바 아니다."
하였다. 이때 도승지 장선징은 약방에 있었고, 우승지 이익은 정청에 있었고, 우부승지 홍만용은 술에 취하여 일을 살피지 못하였다. 비록 정원의 뜻으로 전달한다 하였으나 동부승지 김징이 혼자 계문한 것이었다. 상이, 계사가 김징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탐문하여 알았기 때문에 비답이 이러하였다.

 

정언 신정이 인피하기를,
"그저께 하교에 집의 권격을 처음에는 체차하라고 명하였고, 이어서 파직 추고하라는 하교가 있었는데, 갑작스러워 미처 살피지 못하여 아울러 환수하라고 청하지 못하고, 정원으로 하여금 전지를 받들게 하였습니다. 오늘의 정사에서 또한 그 후임을 선출하니 물의가 모두 잘못이라고 합니다. 체척하소서."
하고, 물러나 물론을 기다렸다. 상이 하교하기를,
"어제 해당 승지를 단지 추고만 하게 한 것은 대체로 대계를 이미 전하였기 때문인데, 지금 대계를 보니 체차도 거론하지 않고서 오히려 빙자하여 명령을 폐각하니, 이것이 어찌 인신의 도리이겠는가. 이것을 다스리지 않으면 뒷날을 징계할 수 없으니, 해당 승지를 먼저 파직한 다음 추고하라."
하였다.

 

도승지 장선징이 아뢰기를,
"해당 승지를 파직 추고하라는 명을 환수하소서."
하니, 상이 엄한 말로 따르지 않았다. 재차 아뢰었으나 역시 따르지 않았다.

 

전라도 함열현(咸悅縣)에 본월 16일 지진이 있었다.

 

3월 23일 병진

상이 온양 행궁에 있었다.

 

상이 두통의 증후가 있어서 약방이 약을 처방하여 들였다.

 

옥당이 처치하여 정언 신정을 출사하라 하니, 신정이 다시 출사하라는 것이 구차하다며 인피하였다.

 

3월 24일 정사

상이 온양 행궁에 있었다.

 

삼전(三殿)이 목욕하였다.

 

부교리 이민서(李敏叙), 부수찬 김만균(金萬均)이 감히 간관을 처치하지 못한다고 소를 올려 스스로 탄핵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에 처치하여 신정을 체직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3월 25일 무오

상이 온양 행궁에 있었다.

 

민점을 승지로, 강백년을 공조 참판으로, 홍주국을 교리로 삼았다.

 

대전과 중전이 목욕을 하였다.

 

경상도 대구(大丘) 지방에 본원 7일에 해서부(解西部) 다리동(多里洞)의 산허리가 터져 벌어졌는데 길이가 1백 87보(步)였고, 넓이가 15보였으며, 깊이는 약 3, 4장(丈)이었다. 작게 터진 곳은 9곳인데 깊이는 2, 3장이었다. 산이 터질 때 잠시 비가 내리고 천둥이 있었다. 본부 해북촌(解北村)에 사는 김영립(金永立)의 집에 암탉이 변하여 수탉이 되었다.

 

3월 26일 기미

상이 온양 행궁에 있었다.

 

신정(申晸)을 지평으로, 이훤(李藼)을 정언으로, 박세견(朴世堅)을 보덕으로 삼았다.

 

3월 27일 경신

상이 온양 행궁에 있었다.

 

삼전(三殿)이 목욕하였다.

 

지평 신정이 권격과 김징을 파직 추고하라는 명을 환수하라고 여러 날 연달아 계문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사간 이유(李秞)가 김징을 파직 추고하라는명을 환수하라고 여러 날 연달아 계문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병조 좌랑 서문상(徐文尙)이 도성(都城) 각문의 수직을 순검하려고 사람을 보내어 내사(內司)에 있는 성기(省記)를 가져 오라고 하면서 순라군에게 잡히는 것을 염려하여 포도 군관을 불러 대동하고 있는 군사 한 명을 함께 가라고 하였는데, 군관이 따라가려 하지 않고 또 나쁜 말을 하므로 서문상이 그 불공함에 노하여 포도 군관을 곤장을 치자 달려가 대장 이완(李浣)에게 고하였다. 이완이 대노하여 나졸 수십명을 발동하여 서문상이 거느린 서리 사령 역졸을 포위하여 모조리 잡아가고 성기 문서도 모두 빼앗아 가버리니, 서문상이 도보로 겨우 본조에 돌아 왔다. 도성에 있던 병조 당상이 사유를 갖추어 치보하니 병조 판서 홍중보가, 대장을 추고하고 포도 군관에 대해서는 유사로 하여금 해당되는 죄를 조사하여 내라고 계청하니, 상이 따랐다. 이완은 교장(驕將)으로서 일들이 대개 이러하였으니, 물의가 떠들썩하였다. 이완은 추고당한 것을 노여워하여 서문상을 모해하는 것에 힘을 다하니, 사람마다 놀라지 않는 이가 없었다.

 

3월 28일 신유

상이 온양 행궁에 있었다.

 

자전과 중전이 목욕하였다.

 

3월 29일 임술

상이 온양 행궁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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