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일 계사
좌의정 허적, 예조 판서 김좌명, 관상감 제조 오정일을 정릉에 보내어 다시 사초하게 하였다.
부호군 윤문거가 병으로 사양하고 오지 않자, 겸직한 우부빈객을 체직하라고 명하였다.
형조 판서 이경억이 병으로 소를 올리니, 체직하였다.
5월 2일 갑오
정지화(鄭知和)를 형조 판서로, 홍만형(洪萬衡)을 부교리로, 신정(申晸)을 정언으로 삼았다.
정두경(鄭斗卿)을 특별히 제수하여 홍문관 제학으로 삼고 그대로 예조 참판에 제배하였다. 정두경이 문장을 잘하여 시문에 득의하여 격조가 빼어난 곳은 고인의 작품을 따를 만해서, 논자들이 동방에 이런 작품이 없다고 하였다. 신흠·이정귀·장유가 매우 기이하게 여겼지만 이경석은 대제학을 맡길 수가 없다고 하였는데, 이는 그 문장이 기고(奇古)함을 숭상하여 관각의 쓰임에는 알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두경은 위인이 소탈하고 호방하여 벼슬에 나아가기를 즐기지 않은 까닭에 세상에서 그 문장이 귀한 줄을 알지 못하였다. 그래서 보잘것 없는 자들이 문형(文衡)을 맡았으나 정두경은 끼이지 못하니 사람들이 모두 원통하다고 했다. 이때 와서 발탁되어 이 직책에 제수되었지만 끝내 대제학은 되지 못했다.
행 대사간 강백년 등이, 황해 도사 윤계(尹堦)도 민진삼의 처가 목을 매어 자살한 일에 대하여 죄가 있다고 논핵하며 파직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우선 추고하라고 명했다.
좌참찬 송준길이 단오날에 성묘할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기를 청하니, 상이 너그러이 답하여 허락하지 않고 사관을 보내어 전유하였다.
5월 3일 을미
평안 감사 민유중이 재차 소를 올려 사직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5월 4일 병신
대구부의 사노 두어미(斗於未)의 처가 세 쌍둥이를 낳았다.
5월 5일 정유
영의정 정태화가 휴가를 얻어 성묘하기를 청하니, 상이 휴가를 주고 말 및 제수를 지급하라고 명하였다. 정태화가 상소하여 사양하고 또 광주(廣州)를 들려서 그의 선대 묘산을 성묘하고자 청하니, 상이 사양하지 말라 하고 원대로 들리도록 허락하였다.
좌의정 허적이 휴가를 받아 성묘하기를 청하자, 상이 다시 후일을 기다리라는 내용으로 사관을 보내어 전유하였다.
5월 6일 무술
대사헌 박장원과 집의 박증휘가, 구례 현감(求禮縣監) 이상직(李尙稷)과 전 군수 이극화(李克和)가 제도가 정해진 뒤에 혼례를 행하여 국법을 어기고 예속을 무너뜨렸다고 논하며 모두 파직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정언 이하가, 대사헌 박장원과 공조 판서 오정일과 판윤 조형(趙珩) 등이 서용된 뒤에 태연히 출사하여 공무를 행한 잘못을 논박하고자 하였으나, 대사간 강백년이 그 의논에 따르지 않자 각각 자기의 의견을 고집하고 인피하였다. 당시에 박장원 등이 무과의 정시(庭試)·초시(初試) 시관으로서 대각의 탄핵을 거듭 받아 모두 파직되었는데, 육경(六卿)에 쓸 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으로써 곧바로 특별히 서용되었으나 같은 죄를 범한 신료들은 대부분 아직도 죄적(罪籍) 속에 있었다. 박장원과 오정일은 제수된 뒤에 여러번 상소를 올리고 부득이 출사하여 공무를 수행하였으나, 조형은 그다지 고사(固辭)하지 않았다. 정언 신정이 이것으로 구별하여 처치해서, 이하와 강백년을 모두 체직시켰다.
정석(鄭晳)을 발탁하여 동래 부사(東萊府使)로, 홍만용(洪萬容)을 이조 참의로, 이익상(李翊相)을 교리로, 홍만형(洪萬衡)을 헌납으로 삼았다.
5월 7일 기해
경주·안동·인동·대구·의성·고령·신령·예안 등 8 읍에 4월 25일 서리가 내렸다.
5월 9일 신축
지평 김덕원·조성보, 집의 박증휘, 정언 신정을 체직시켰다. 처음에 김덕원과 조성보가 모두 과장의 가건물에 불이 난 과실로서 피혐하자, 박증휘가 처치하여 김덕원 등을 출사시키도록 청하였다. 그러자 김덕원 등이 뜻밖에 출사를 청하여 물의가 일어났다는 이유로 다시 피혐하니, 증휘가 처치를 잘못하였다고 피혐하고 물러났다. 신정이 처치하여 김덕원·조성보·박증휘를 모두 출사시키도록 청했다가, 곧바로 헌관의 출사를 청하여 물의에 비난을 당했다는 이유로 피혐하였다. 이에 김덕원 등이 신정의 피혐하는 말 때문에 또 피혐하니, 옥당이 차자를 올려 모두 체직시키기를 청하자, 상이 따랐다.
밤 1경에 달이 태미(太微)의 단문(端門) 안으로 들어갔다.
5월 11일 계묘
이익(李翊)을 대사간으로, 이유(李秞)를 집의로, 윤경교(尹敬敎)·이훤(李藼)을 정언으로, 이후(李煦)·홍억(洪億)을 지평으로, 김만중(金萬重)을 부교리로, 이간(李旰)을 전라 우수사로 삼았다.
이번 달 6일에는 파주(坡州)에, 3일에는 은산(殷山)과 순천(順川)에 우박이 내렸는데, 그 크기가 비둘기 알만했다.
5월 12일 갑진
좌의정 허적이 상소를 올려 휴가를 얻어 성묘하기를 청하니, 상이 허락했다. 이어 휴가와 말과 제수를 주라고 명하고 사관을 보내어 전유하였다.
좌참찬 송준길이 상소를 올려 돌아가기를 청했다.
5월 13일 을사
홍석구(洪錫龜)가 절차를 밟지 않고 그 아비 홍준(洪浚)의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상이 금부의 문서를 다시 상고하여 홍준이 흉악한 상소에 참여했는지의 여부를 조사하여 밝혀 내라고명하였으나, 오래된 문서였으므로 태반이 산실되어 상고해 낼 수가 없었다.
홍준은 대북(大北) 한옥(韓玉)의 외손으로서 어릴 때 강여재(姜與載)·이해창(李海昌)과 함께 임숙영(任叔英)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임숙영이 죄를 받자 이해창 등이, 한옥의 손자인 홍준이 이이첨(李爾瞻)에게 임숙영을 참소한 것이 아닌가 의심한 데다가 또 폐모를 건의하는 소에 참여하자, 드디어 배척하여 절교하였다. 홍준의 아들 홍석구가 급제하여 분관(分館)할 때 이해창이 선대의 허물로 탄핵하여 물러나게 하였지만, 홍석구 등이 감히 다투어 분변하지 못하였다. 이때에 또 선대의 허물로 탄핵받자 비로소 억울하다고 송사하였는데, 금부의 오래된 문서들이 태반이 산실되어 끝내 사실을 밝혀낼 수가 없었다. 홍준이 살았을 때 강여재에게 말하기를,
"어린 나이에 일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고 흉악한 소에 참여하는 누를 범했으니, 비록 버림받은 몸이 되었지만 다시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다만 홍석구 등이 문재(文才)가 있으니, 이것이 애석할 뿐이다."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홍석구 등이 아비의 허물을 감추고자 하늘과 사람을 속이니 듣는 이들이 한심하게 여겼다.
상이 양심합에 거둥하여 대신과 비국의 여러 재신들과 삼사를 인견하였는데, 좌참찬 송준길과 평안 감사 민유중도 입시하도록 명하였다. 충청 감사에게 균전사를 겸직하고 조세환(趙世煥)을 종사관으로 삼아서 문서를 완전하게 끝내도록 명하였다. 균전사 민유중이 일을 마치지 못하고 체직된 까닭에 그의 말에 따라 대신들과 의논하여 이 명을 내린 것이다. 상이 송준길에게 앞으로 나오도록 명하여 위유하고, 《심경》의 강독이 끝날 때까지 좀더 머물라고 하였다. 또 가을이 되면 올라오라고 재삼 당부하니, 송준길이 아뢰기를,
"양조(兩朝)에서 시강을 했으니, 어찌 견마지정(犬馬之情)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질병은 기필할 수가 없으니, 만약 조금이라도 힘이 있다면 감히 성상의 하교를 따르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정언 윤경교(尹敬敎)가 이완의 일에 대하여 연계하여 삭탈 관작하기를 청하니, 상이 파직시키라고 하고, 이어 이르기를,
"군문(軍門)에 난입한 것은 그에 대한 법률이 있으니, 병랑(兵郞)이 어찌 죄가 없을 수 있겠는가. 비록 경솔하였다고 하지만 이렇게 했는데도 다스리지 않는다면 뒷폐단을 막기 어려울 것이다. 좌랑 서문상도 파직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윤경교가 피혐하며 아뢰기를,
"서문상이 죄가 없다는 것은 신이 이미 아뢰었는데 도리어 파직시키라는 명을 내리셨으니, 이는 일을 분명하게 아뢰지 못한 소치입니다. 신을 체직하소서."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윤경교가 물러나 물론을 기다렸다. 상이 여러 신하에게 이르기를,
"지난날 여러 부마에게 저택으로 도로 들어가라는 뜻을 이미 전유하였고, 소에 내린 비답에서도 뜻을 다 보였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불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아 들어가지 못하고 있으며, 여러 공주도 또한 간청하니, 내가 힘써 따르고자 한다. 새로 지을 저택은 50칸으로 법을 정하자는 의견이 있는데 그렇게 하면 일에 여러가지 구애되는 점이 있을 것이다. 경들과 상의하여 처리하고 싶은데 경들의 뜻은 어떠한가?"
하니, 정태화와 홍중보는 모두 부마의 아비라 하여 피혐하며 대답하지 않았고, 좌의정 허적이 아뢰기를,
"만약 법제에 따라 50칸으로 한정하면 반드시 좁아서 살 수 없을 것이니 참작하여 선처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고, 예조 판서 김좌명이 아뢰기를,
"50칸으로는 좁아서 살기 곤란하고 옛집은 모두 너무 크다고 하니, 칸수를 반으로 줄이는 것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좌참찬 송준길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이제 선처할 방법을 생각하시니 매우 다행스럽습니다. 사당과 행랑이 모두 50칸의 범위에 포함되는 것인지를 신이 분명히 알지 못합니다만, 좀 더 생각하여 과도한 폐단이 없게 하여 완전 무결한 결과를 기약함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고, 남이성이 아뢰기를,
"상께서 흔쾌이 공론을 좇으시어 선처하고자 하시니 누군들 다행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칸수의 가감은 진실로 마땅히 참작하여 알맞도록 하기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헤아려 칸수를 줄이도록 아뢰니, 상이 이르기를,
"옛집 근처에 공해(公廨)가 있으니, 이곳으로 옮겨서 짓는 것이 편할 것 같다. 만약에 공유지가 부족하면 사유지라도 많이 사들여 보충해 주어야만 살 수 있을 것이다. 어의궁(於義宮) 근처에는 본래 공유지가 없으니, 사유지를 매입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해조로 하여금 후일 집터 및 양포(粮布) 등 물품의 제급을 분부대로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당시에 대간의 논계가 비록 정지되었으나 부마 등이 연달아 소장을 올려 그대로 들어가라는 명을 환수하도록 간청하였고, 공주 등도 간청하니, 이에 이르러 상이 제신에게 의논하여 이건(移建)을 명한 것이다. 그러나 새로 지은 집이 옛집에 비하여 조금도 칸 수를 줄이지 않았고, 대간의 논계가 한창 진행 중인 때 건축했으므로 사람들이 실망하였다. 정태화와 홍중보는 대신과 중신으로서 조그마한 혐의 때문에 대답하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모두 그르게 여겼다.
유혁연(柳赫然)을 우포도 대장으로 삼았다.
훈련 중군(訓鍊中軍) 김경(金鏡)에게 대장의 직무를 행하도록 명하였는데, 이완이 파직되었기 때문이었다.
현풍(玄風) 전세(田稅)를 훔쳐 먹은 선인(船人) 중 주모자 두 명은 효수하고, 나머지는 정배하였다.
5월 14일 병오
정화제(鄭華齊)를 장령으로, 조성보(趙聖輔)를 헌납으로, 유비연(柳斐然)을 등급을 뛰어 북 병사로 삼았다.
옥당이 상차하여, 공론에 따라 신덕 왕후(神德王后)에 대한 부묘(祔廟)의 예를 조속히 거행하도록 청하였는데, 차자가 올라간 지 7일 만에 상이 따르지 않으며, 이르기를,
"따르기 어렵다는 나의 뜻은 범연한 것이 아니다."
하였다. 당시에 《실록》에서 상고해 낸 지가 이미 오래되었는데도 처분이 없자, 좌참찬 송준길이 입시하여 대신과 삼사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고 말하자, 이에 응교 남이성이 혼자 옥당에 있다가 맨 먼저 이 논의를 꺼낸 것이다.
충청도 온양에 행행할 때 연로(沿路)의 80세 이상의 노인 정엽(鄭曅) 등 26명을 가자하였다.
5월 15일 정미
상이 양심합에 거둥하여 소대하고 《심경》을 강론하였다. 송준길이 글 뜻을 강론하였다. 김만중이 아뢰기를,
"맹자에 ‘오직 대인(大人)만이 임금의 잘못된 마음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하였는데 신하로서 누군들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고 싶은 마음이 없겠습니까. 다만 스스로가 바른 뒤에야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임금은 진실로 경외하는 신하가 아니라면 그 말을 자세하게 듣지 않으며, 과감하게 쓰지 않는 것입니다."
하자, 송준길이 아뢰기를,
"정말 그렇기는 하지만 인군의 도리로는 대인이나 소신을 막론하고 진실로 쓸 만한 말이라면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니, ‘네 말은 쓸 만한 것이 없다.’고 어떻게 마음 먹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강론이 끝난 뒤 김만중이 아뢰기를,
"신이 들으니, 전날 경연 중에 송준길의 귀향을 허락하시고 가을에 올라오도록 하셨다고 합니다. 《맹자》에 설거주(薛居州) 한 사람이 왕의 곁에 있다는 것032) 으로 말하였는데, 지금 전하께서 이 한 사람을 잡지 않으시니 모두들 실망하고 있습니다."
하니, 송준길이 아뢰기를,
"상께서 신의 형편을 굽어 살피시어 귀향을 허락한 것인데 나이 젊은 사람이 이처럼 상께 아뢰니, 옳은 일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내가 경의 마음을 알기 때문에 허락하였지만 김만중의 말도 진실로 옳은 이야기이다."
하였다. 송준길이 아뢰기를,
"신이 삼대 독자로서 자식을 잃은 뒤에 다행히 손자가 소과에 합격하였습니다. 이제 귀향하여 영분(榮墳)하려고 하니 빨리 가고 싶은 신의 마음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이미 스스로 경의 마음을 안다고 여기고 있으니, 경도 역시 나의 마음을 알 것이다. 더위가 지나고 추위가 닥치기 전에 올라오도록 하라."
하였다. 김만중이 아뢰기를,
"신이 송준길의 형편을 모르는 것이 아니지만, 신의 이 말은 국가를 위한 계책입니다. 군자의 진퇴로 보아도 송준길이 반드시 떠나야 할 의리는 없습니다."
하니, 송준길이 아뢰기를,
"신이 어떻게 감히 군자의 진퇴로써 스스로 기약하겠습니까."
하였다.
강화의 수군을 충정하지 못한 각읍 수령을 결장(決杖)했다. 처음에 강화의 각진에 배속된 수군을 강화 육군에 모두 이속시키고 본도로 하여금 고을 형편에 따라 참작 배정하여 모자라는 수군의 정액을 채우도록 하였는데, 그 중 많은 수령이 현격하게 정액을 채우지 못하니 병조에서 곤장을 때리도록 계청하였다. 상이 3명 이하를 충정한 수령은 모두 곤장을 때리라고 명하니, 벌을 받을 사람이 12읍이나 되었다. 송준길이 이로 인하여 입시하여 너무 많다고 아뢰니, 상이 10명이 이내의 정원에서 다만 1명을 충정한 자와 10명 넘는 데에서 다만 2명을 충정한 자는 곤장을 때리고 나머지는 모두 추고하도록 다시 명하였다.
5월 16일 무신
상이 양심합에 거둥하여 소대하고 《심경》을 강론하였다. 좌참찬 송준길이 아뢰기를,
"윤선거는 국가에서 예우하던 신하인데 하루아침에 갑자기 죽어 사우들이 모두 애석해 합니다. 윤선거가 항상 죄인으로 자처하여 소장에까지 한 번도 직함을 쓰지 않은 것은 성상께서도 아시는 바입니다. 들으니, 사후 명정에도 ‘성균 생원’이라고 썼다 하니, 그 예우하는 도리에 있어 증직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한번 만나 보고 싶었는데 뜻밖에 죽었다고 하니 매우 애석하다."
하고, 곧 해조에게 명하여 이조 참의에 추증하도록 하였다. 송준길이 또 아뢰기를,
"신의 생각으로는 세자의 관례를 봄 여름 중에 결정하여 거행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여 이미 성상의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조정의 형편이 어떠한지 비록 모르지만 의견이 있는 이상 다시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입학과 관례를 봄가을에 거행하는 것의 편리 여부를 여러 대신에게 문의하도록 하라."
하였다. 우승지 김만기가 아뢰기를,
"본원의 일기를 죽 살펴보니 올 봄 날씨가 따뜻해지고 온천에서 돌아오신 이후로 정사를 보시어 취품(取稟)한 일이 없으며, 또 글로 써서 품정(稟停)도 하지 않고 그냥 버려두어 지금까지 지연되어 왔으니, 오늘부터는 전례에 따라 취품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더위가 지나간 후에 취품하겠다."
하였다.
5월 17일 기유
헌납 조성보와 집의 이유가 무과에서 편전(片箭)에 관한 규칙을 제대로 밝히지 못하여 입격한 거자들에 대하여 계품하여 시행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피혐하자, 처치하여 모두 체직시켰다.
예조가 말하기를,
"세자의 입학과 관례를 봄과 가을에 거행하는 것에 대한 편리 여부를 대신에게 의논하니, 영의정 정태화가 말하기를, ‘우리 조종조에서 꼭 봄 여름에만 관례를 거행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난번 입시하여 삼가 들으니, 봄 여름은 양에 속하고 가을 겨울은 음에 속한다는 말로 유신이 어전에서 아뢰었는데, 근거가 있는 말이니 이에 따라 시행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입학례를 관례보다 먼저 시행하여도 또한 불편한 일이 없을 것이니 조속히 거행하라. 봄이든 여름이든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고, 판부사 정치화는 ‘삼가 유신이 아뢴 뜻을 살펴보니, 봄 여름 중에서 왕세자의 관례를 거행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입학례는 봄 가을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 하며, 영부사 이경석은 병으로 수의하지 못하였고, 좌의정 허적과 판부사 송시열은 지방에 있습니다. 대신들의 의논은 이와 같으니, 상의 뜻은 어떻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외방에 있는 대신에게도 수의하여 계문하라."
하였다.
호조가 계문하여 아뢰기를,
"남쪽에서 오는 조선으로서 5월 초하루 이후에 원산(元山)에 도착한 것은 그 세미를 안민창(安民倉)에 보관한다는 사목(事目)을 이미 계하하셨습니다. 이제 안민창에 파견한 본조 낭청의 치보에 의하면 기한인 4월 말까지 도착하지 못한 30척의 삼남 세선이 원산에 도착하였으니, 며칠 안 되어 수봉(收捧)될 것입니다. 조운을 마치고 한가로이 있는 우수참(右水站)의 조선 및 해운(海運) 관할의 아산창(牙山倉) 조선을 지금 막 발송하여 운송하게 하였는데, 앞으로는 이를 규례로 삼고자 합니다.’ 했습니다. 처음 새로 시행하는 일인 까닭에 감히 계문합니다."
하니, 상이 알았다고 답하였다.
주회인(走回人) 김대선(金大善)을 청나라에 압송하였다. 의주(義州) 경내의 별장 한 사람의 이름을 자문 중에 넣어서 압송하게 하였다.
5월 18일 경술
상이 양심합에 거둥하여 소대하고 《심경》을 강론하였다. 시독관 김만중이 명도(明道)와 사양좌(謝良佐)의 《사기(史記)》를 외우는 차이점에 대하여 강론하는 것을 인하여 아뢰기를,
"비록 경서를 강론하여도 외우기만 할 뿐 실제로 체득하지 않는다면 무익합니다. 이 점에 더욱 성찰하셔야 됩니다."
하니, 송준길이 아뢰기를,
"상께서 《강목(綱目)》을 강독하심에 만고의 흥망 성쇠를 꿰뚫어 보시어 거울로 삼아 경계하신다면 진실로 유익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많이 보고 많이 들었다는 것으로써 아랫사람들에게 과시한다면 이는 곧 위인지학(爲人之學)이니,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어려서부터 바르게 가르쳐 습관과 지혜가 함께 성장하게 하는 것이 성인(聖人)이 되는 공부입니다. 지금 왕세자가 어린 나이에 날마다 《소학》을 강독하고 있는데, 이것이 곧 성인이 되는 기본입니다. 그러나 여러 신하는 글 몇 줄을 진강하고 물러나는데 지나지 않으니, 어린 왕세자를 가르치는 바는 오직 전하께서 날로 학문에 힘쓰시고 교도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신의 소망입니다. 항상 하는 말에 ‘나쁜 짓을 하고 싶어도 자손들이 본받을까 두렵다.’ 하니 전하께서는 이 말을 명심하시고 훈육한다면 비단 세자에게 유익할 뿐만 아니라 전하에게도 유익할 것입니다."
하였다. 도승지 남용익, 교리 이익상이 송준길의 귀향을 허락해서는 안 된다고 아뢰자, 송준길이 아뢰기를,
"신의 형편은 이미 아뢰었으니, 지금 성상께 나아가 숙배하고 물러나려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경의 사정을 생각하여 허락하였지만 경연관의 말도 진실로 옳다. 이미 귀향을 허락하여 가을로 기한을 잡았으니 모름지기 나의 뜻을 깊이 인식하여 약속대로 올라오도록 하라. 오늘 귀향을 허락하는 것은 실로 뒷날의 상경을 위한 것이다."
하였다. 송준길이 이 자리에서 직접 숙배하기를 굳게 청하자, 상이 이르기를,
"만약 오늘 숙배하고 물러난다면 옳지 않다."
하고, 정태화도 역시 그렇다고 하였다. 상이 남용익에게 이르기를,
"좌참찬이 내려갈 때 휴가를 주어 말을 지급하고 또 제수도 지급하게 하라."
하자, 송준길이 사양하니, 상이 이르기를,
"관례적인 일이니 사양하지 말라."
하고, 또 승지에게 이르기를,
"좌참찬이 평소에 병이 많았다. 한창 더울 때 먼 길을 떠나니 어의 권유(權愉)를 보내 약물을 가지고 가서 간호하며 수행하도록 하라. 그리고 송 판부사도 일찍이 병이 있었으니 그대로 간병하도록 하라."
하였다. 교리 익상이, 북도의 백성들이, 정역(丁役)이 괴로와서 아들을 나아도 기르지 않는다고 아뢰자, 상이 본도로 하여금 민정을 수집하여 전처럼 자식을 내다버리는 근심스러운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전 판서 서필원을 삭출하라는 계문을 넉 달이 지나도록 따르지 않자, 이에 이르러 중지하였다.
우참찬 조복양이 상소하여 송준길을 머물게 하도록 청하는 한편, 귀향을 허락한 잘못을 아뢰니, 상이 답하였다.
"나라고 어찌 섭섭한 마음이 없겠는가. 나름대로 고인의 성신(誠信)한 뜻에 붙인다. 경이 이처럼 말하니 근심하고 아끼는 정성을 매우 가상하게 생각한다."
문학 신정 등이 상소하여 송준길을 만류하도록 청하였고, 관학 유생 윤이성(尹以性) 등도 또한 송준길을 만류하도록 상소하니, 상이 모두 위유하였다.
지평 김덕원(金德遠)이 일찍이 감시·회시의 시관이었을 때 방목(榜目)을 잘못 쓴 일이 있었다는 이유로 피혐하니, 체직하였다.
5월 19일 신해
상이 희정당(熙政堂)에 거둥하여 송준길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이 이제 하직하니 내가 매우 섭섭하다."
하니, 송준길이 아뢰기를,
"신의 신병이 이와 같고 개인적 사정 역시 절박하여 부득이 귀향을 청한 것입니다. 끝없는 은총을 입었으니 비록 향리로 물러난들 한시라도 잊겠습니까. 황공하고 감격하여 눈물이 날 뿐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섭섭하게 서로 헤어져도 기쁘게 다시 만난다면 시종(始終)이 있는 것이다. 경은 모름지기 어제 나의 뜻을 깊이 인식하도록 하라."
하니, 대답하여 아뢰기를,
"신이 비록 우매하지만 어찌 성상의 뜻을 모르겠습니까. 전하께서 성심으로 대우하시는데 신이 성심으로 보답하지 않는다면 어찌 사람의 도리이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이제 멀리 떠나는데 특별히 아뢸 것은 없고, 다만 어제 말씀드린 대로 세자가 한창 공부하는 때이니 반드시 성상께서 스스로 학문을 닦아서 세자의 모범이 되어야 덕성이 이루어지게 되며 두 분에게 모두 유익하게 되는 바탕이 될 것이니, 이것이 바로 신이 바라는 바입니다. 조복양과 박장원은 노성하고 충실하니 동궁을 보도하는 책임을 이 두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인군이 스스로를 다스리는 길은 다만 경연 하나에 있습니다. 간혹 경연을 열지 못할 때가 있더라도 자주 소대하여 중단이 없게 해야 할 것이니, 이는 여러 사람이 지극히 바라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마땅히 명심하고 더욱 힘쓰도록 하겠다."
하였다. 송준길이 아뢰기를,
"명나라 때에는 경태 황제(景泰皇帝)를 복호한 일과 전 황후(錢皇后)를 부묘한 일을 훌륭한 일로 삼았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소릉(昭陵)을 복위한 일을 훌륭한 일이라고 합니다. 이제 정릉(貞陵)을 부묘하자는 논의가 오래도록 거론되지 못하다가 다시 발론되었습니다. 훗날 사람들이 훌륭한 일을 이야기하면 반드시 소릉의 복위와 함께 이 일을 병칭할 것입니다. 상이 어렵게 여기시는 것이 진실로 당연하지만 마침내는 의리로써 참작하여 선처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선조(宣祖) 때에 실행하지 않았던 일이라고 하자, 송준길이 아뢰기를,
"의리가 그렇지 않습니다. 효라는 것은 조상의 뜻을 잘 계승하는 것이며 조상의 사업을 잘 이어가는 것이니, 마땅히 지켜야 할 것을 지키는 것이 효이나 마땅히 변통해야 할 것을 변통하는 것도 효입니다. 선대에 미처 하지 못한 일을 고집스레 지켜 의리를 돌아보지 않고 변통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어찌 잘 이어받는 도리이겠습니까."
하였다. 이어 상의 건강을 묻고 또 아뢰기를,
"옛말에 ‘병을 이유로 스스로를 포기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더욱 뜻을 면려하시어 유신(維新)의 위업을 도모하소서. 신이 몇 달 곁에서 모시다가 이제 멀리 떠나게 되었고 또 이처럼 늙고 병들었으니, 구구한 견마지정(犬馬之情)을 이루 다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러가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편안히 내려가서 조섭하고 상경하도록 하라."
하였다. 우승지 김만기가 아뢰기를,
"여러 신하들이 모두 상이 귀향을 허락한 것을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가을까지 기한을 정하기는 하였지만 늙고 병든 사람의 상경을 어떻게 기필코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상께서 귀향을 허락한 것이 성심에서 나왔으니 오히려 고집하여 만류하시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군신은 부자와 마찬가지이니 송준길도 어찌 차마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다만 송준길 등이 상경하였을 때에는 비록 자주 경연을 열었지만 내려가 버리면 다시 열지 않게 될 것이니, 비록 성상께서 몸이 불편한 것 때문이라 하지만 만약 힘써 노력하신다면 어찌 신하들을 인견할 수 있는 때가 없겠습니까. 여러 신하들의 바람은 송준길이 내려갔다고 생각지 마시고 자주 인견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송준길이 막 떠나기에 앞서 또 정릉의 일에 대하여 아뢴 것은, 전하께서 받아들이시기를 바란 것입니다. 정릉 문제는 사체가 비록 중대하기는 하지만 바른 의리로써 추구해 보면 끝까지 어렵게 여길 일은 아닙니다. 이제 송준길이 숙배하고 귀향하니, 떠나기에 앞서 오늘 아뢴 말씀을 잊지 마소서."
하니, 송준길이 아뢰기를,
"신이 감히 김만중이 말한 바를 감당할 수는 없지만, 그 아뢴 바는 대개 옳습니다."
하였다. 상이 술을 내리고 여러가지 물품을 매우 많이 하사하였으며, 세자도 술을 내리고 여러가지 물건을 하사하였다.
지평 홍억(洪億)이 현재 추함에 응하는 중에 있다는 이유로 피혐하니, 체직하였다.
양사가 신덕 왕후를 부묘하는 데 대해 논계하였다. 장령 경최·정화제가 계문하여 아뢰기를,
"신덕 왕후를 부묘하는 예는 대신이 건의하고 유신이 차자를 올렸으니 의리가 매우 분명하여 더이상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성상께서 흔쾌이 따르지 않으시는 것은 조종에서 거행하지 않은 일로서 연대가 매우 오래되어 가벼이 의논하기 어렵다고 여겨서입니까. 신들은 삼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천리에 부합되고 인정상 마땅한데도 조종에서 미처 시행하지 못한 일이 있을 경우, 뒤를 이은 왕이 능히 거행한다면 어찌 조종을 빛낼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참으로 이른바 뜻을 계승하고 일을 이어 가는 효입니다.
신들이 삼가 생각하건대 성조(聖祖)께서 개국하셨던 날에 신의 왕후(神懿王后)는 이미 돌아가셨고, 그 때 오직 신덕 왕후가 성조의 짝이 되어 명나라의 책명을 받고 중전에 자리하셨습니다. 어엿한 왕비와 국모로서 몇 년을 계셨으며, 승하하신 후에는 존호를 받고 의례대로 능침을 갖추어 조금도 손색이 없이 시종 숭봉(崇奉)되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부묘의 예만은 아직도 결여되어 있으니, 이 어찌 성세의 흠결이며 신인(神人)이 함께 유감스럽게 여길 일이 아니겠습니까. 지난번 대신의 아룀을 인하여, 황폐한 정릉을 개수할 때 모든 의례를 여러 능의 제도 그대로 따르니, 온 나라의 신민들이 기뻐하고 감탄하며 모두 말하기를 ‘부묘의 예를 다음에는 거행하겠구나.’ 하며 목을 빼고 눈을 부비며 날짜를 꼽으며 기다렸습니다. 이에서 나름대로 그칠 수 없는 천리와 인정을 분명히 볼 수가 있었습니다. 정론이 이미 일어나 여러 사람의 마음이 더욱 격렬해 가니, 깊이 생각하시어 빨리 예관으로 하여금 정릉을 부묘하는 예를 의논하여 정하게 하소서."
하고, 사간 김만균, 정헌 윤경교·이헌이 계문하여 아뢰기를,
"임금의 효는 계술보다 더 큰 것이 없고, 계술하는 방법은 반드시 선왕이 펴지 못한 뜻을 펴고 선왕이 미처 하지 못한 예를 닦아서 조종을 빛낸 뒤에야 계술의 도리를 지극히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들이 삼가 생각건대 신덕 왕후는 곧 태조 대왕의 둘째 부인입니다. 태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신의와 신덕이 함께 두 배필이 되었으니, 지위도 같고 신분도 대등하여 처음부터 존비의 차이가 없었습니다. 천명을 받던 날에 미쳐서는 신의가 먼저 돌아가셨고 신덕이 이어 왕후가 되었습니다. 대왕의 배필로 자리잡아서 우리 태조의 창업을 도왔고, 영광되게 명나라에 책명을 받으시어 지존의 자리에 올라 한 나라의 어미가 된 것이 거의 5년이었습니다. 돌아가신 후에도 능침의 제도나 시호를 올리는 의례를 모두 정비(正妃)의 예와 똑같이 처리하였습니다. 태종 대왕께서 봉양하는 즈음에 생전에는 받드는 도리를 극진히 하셨으며 돌아가심에 친히 향축을 전하기까지 하셨으니, 바른 명위(名位)와 엄한 분질(分秩)을 신자로서 어떻게 감히 폄론(貶論)할 수 있겠습니까. 한 번 정릉을 옮기게 되자 당시 예를 논하는 신하들이 심지어 적처가 아니라고 하여 망령되이 폄손하고 부묘의 예를 빠뜨리고 거행하지 않았으며, 끝내는 능묘(陵廟)가 모두 폐지되고 향화(香火)가 오래도록 끊어진 것이 거의 2백 년이 되어 신인의 분노가 극에 달하였고 국가의 수치가 매우 컸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태조 대왕의 영령 또한 오르락내리락하며 반드시 통한해 하시면서 속으로 당신을 계술할 후사를 기다리신 것이 오래되었을 것입니다.
다행스럽게 이제 효성스런 성상께서, 조상의 뜻을 이어받고 쾌히 유신의 말을 따르시어 조상에 대한 추모의 정성을 극진히 하여 능을 쌓고 정자각을 세우시니, 묘(廟)의 모습이 일신되었습니다. 또 사관을 보내어 《실록》을 상고하게 하시니, 사방 신민들이 목을 빼고 바라는 바가 날로 깊어지고 간절해졌습니다. 《실록》을 베끼어 낸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어찌하여 부묘의 일에 대하여는 아직도 처분을 내리시지 않습니까. 신들은 삼가 의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릇 중궁에 자리한 신덕으로서 오히려 태묘에 배향되지 못하여 서인의 위치로 떨어진다면, 이 어찌 우리 조종의 마음일 것이며 또한 성상의 계술하는 효심이겠습니까. 신들이 들으니 송 태조의 장효 황후(章孝皇后)는 태종 때에는 태조에 배향되지 못하다가 인종(仁宗) 때에 가서야 비로소 회복되어 태묘에 오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우리 조종조에도 소릉이 폐위되어 오래도록 복위되지 못하다가 중종 대왕 때에 이르러 비로소 신하들의 정청(廷請)으로 인하여 회복되어 다시 봉안되었으니 지금까지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모두 제왕의 훌륭한 처사로 송인종과 우리 중종의 효성을 칭송하니, 이를 어떻게 오늘날 본받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인심은 속이기 어렵고 공의는 거스릴 수 없는 것입니다. 예관으로 하여금 한결같이 예전에 의하여 신덕 왕후를 부묘하는 예를 조속히 거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모두 따르지 않고 이르기를,
"내 뜻이 진실로 매우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은 범연한 것이 아니다."
하였다. 논계한 지 달이 넘도록 상이 따르지 않자, 양사가 합계하여 간쟁하였다.
5월 20일 임자
장선징(張善瀓)을 대사간으로, 박증휘(朴增輝)를 집의로, 신정(申晸)과 이후(李煦)를 지평으로 삼았다.
5월 21일 계축
상이 공주들의 가택 조성 건에 대하여 차지 내관(次知內官)이 말하는 대로 지어 주라고 해조에 명하였다.
영부사 이경석이 세 번째 상소하여 사직하고 요양할 것을 청하였는데, 송시열에게 배척당하였기 때문이다. 상이 위유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5월 22일 갑인
상의 희정당에 거둥하여 소대하고 《중용》 17장부터 18장까지 강론하였는데, 응교 남이성이 진강하였다. 강론이 끝나자, 남이성이 아뢰기를,
"18장에 이른바 ‘아비는 공효를 쌓고 자식은 이어받아 따른다.’는 것은 바로 계술(繼述)을 말하는 것입니다. 제왕의 효도는 조종에서 미처 하지 못한 바를 미루어 행하는 것이니, 이를 대효(大孝)라고 합니다. 신이 지난번 온 나라의 공론에 따라 아뢴 바가 있었는데 조야의 바람을 어떻게 멈추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 장의 글뜻으로 보면 조종에서 미처 하지 못한 바를 미루어 행하는 것이 어찌 훌륭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교리 김만중이 아뢰기를,
"주자의 문인이 주자에게 묻기를 ‘선대에서 하지 못한 예를 지금 시행하려 하는데 조상이 모를까 걱정됩니다.’ 하니, 주자가 ‘자손이 안다면 조상이 바로 알게 된다. 왜냐하면 조상과 자손은 한 기운이기 때문이다.’고 하였습니다. 일이 사리에 합당하면 되는 것이지 하필 조상이 행하지 않았다고 핑계를 대십니까."
하니, 상이 답하지 않았다. 남이성이 또 《강목》의 주 현왕(顯王) 37년부터 48년 진강하였다. 강론이 끝나자, 장령 경최가 조속히 예관으로 하여금 정릉 부묘의 예를 의논하여 결정하게 하도록 계청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남이성이 아뢰기를,
"신이 글 뜻을 말미암아 조금 생각을 말씀드렸는데, 대간의 계사가 또 윤허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만약 조종에서 행하지 않았다고 하여 어렵게 여기신다면 여러 신하들의 마음이 어찌 민망하고 답답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승지 송시철이 아뢰기를,
"삼사가 이처럼 청하니 깊이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하니, 남이성이 아뢰기를,
"제왕의 효도는 변통과 계술이 가장 중요합니다. 비록 《중용》으로 말하여도 무왕은 조상을 추존하는 데 미치지 못하였는데 성왕 때 와서 주공이 왕에 비로소 추존하고 종묘에 제사를 지내는 예를 시행하였습니다. 어떻게 일찍이 조종에서 시행하지 않았던 것을 행했다 하여 주공에게 유감을 갖겠습니까. 지금 위로는 조정으로부터 아래로는 서민에게 이르기까지 모두 태종이 절대로 정릉을 박대하지 않았다고 여깁니다. 이제 만약 따르지 않으신다면 이는 전하께서 조종을 훌륭하게 하지 못하는 것이며 스스로도 능히 계술하지 못하는 잘못을 하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이전 차자에 대한 비답에서 내 뜻을 다 밝혔다."
하였다.
5월 23일 을묘
전교하여 이르기를,
"여러 공주의 저택은 선조(先朝) 때 이미 구획하여 처리하였는데 이제 와서 어찌 다시 지을 수 있겠는가. 비용을 아끼는 것으로 논한다면 다섯 공주의 집을 다시 짓는 일이 어떻게 비용을 아끼는 길이 되겠는가. 조가에서 다만 선처하고자 하여 특별 조처를 둔 것이며, 공해(公廨)로 바꾸어 주자는 뜻은 이미 경연에서 결정하였고, 또 거행조(擧行條) 안에 자세하게 나와 있다. 그런데 해조가 감히 다른 빈 공유지로 지급하자고 청하며 이미 조명(朝命)을 내렸는데도 시행하지 않으니, 일의 체모에 있어서 매우 해괴하다. 해당 당상을 엄중히 추고하고 이 초기(草記)를 도로 내어주도록 하라."
하자, 승지 오시수가 계문하여 아뢰기를,
"지금 여러 공주의 저택을 다시 짓는 이 조처는 실로 성조의 아름다운 일입니다. 보고 듣는 모든 사람으로서 누군들 흠앙하지 않겠습니까. 신이 지난날 어전에 입시하였을 때 직접 자세한 하교를 받았는데 공해를 떼어 주도록 한 것은 진실로 만부득이한 조처였습니다. 해조의 초기는 그날의 곡절을 자세히 알지 못한 듯한 감이 있지마는, 만약 다시 지을 만한 다른 빈 공유지가 있다면 공해를 철거하는 폐단이 없고 또한 재력을 낭비하는 근심도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담당한 신하가 품계한 까닭인데, 뜻밖에 특별히 추감하라는 명이 내렸습니다. 당초에 화평하게 선처하려는 뜻에 부족함이 있지 않겠습니까. 품은 뜻이 있기에 감히 이를 계문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승지는 탑전에서 하교를 들었으면서도 이런 계사를 올린단 말인가."
하였다. 당시에 상이 기필코 공해를 철거하고 특별히 해조를 추감한 것은 송시열의 말에 노한 나머지 공주의 집을 다시 지어 주게 한 것이며 경비를 아낄 뜻이 없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판서 민정중은 이 일로 인하여 끝내 직책을 맡지 않았다.
5월 25일 정사
이유(李秞)를 사간으로, 이규령(李奎齡)·김만균(金萬均)을 교리로 삼았다.
정언 윤경교와 이헌이 계문하여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들으니, 여러 공주의 저택을 해조로 하여금 지어 주도록 하게 했는데 칸수가 국법에서 정한 것보다 많으며, 공해를 헐어 버린다고까지 하니 매우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초에 여러 공주가 살던 집이 지나치게 사치하여 공론이 제기되는 데 이르자 끝내 감히 들어가 살지 못한 것입니다. 성상께서 집이 없는 것을 염려하여 친한 이를 친히 여기는 은혜를 베풀고자 하신다면 마땅히 재력을 헤아려 지급해서, 각각 빈터를 찾아 옛 집을 헐어서 나오는 자재를 가지고 스스로 건축하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지금 거듭하여 백성들의 힘을 수고롭게 하고 국가의 재정을 모조리 사용하여 한꺼번에 다섯 공주의 집을 짓게 하니, 이 어려운 때를 당하여 이런 지나친 공사를 일으키면 사방에서 듣는 사람들이 장차 무엇이라고 말하겠습니까. 하물며 공주의 집은 사가이고 공해는 공공 건물인데, 사가를 짓기 위하여 공해를 헐어 버리니 이는 실로 국조에 없었던 일로서 전하로 부터 시작되는 것이니, 또한 대단히 미안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또 들으니, 공해 이외에도 철거해야 하는 민가가 매우 많아서 집집마다 슬피 울어 차마 들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도성 안에 빈 터를 얻을 데가 없을까 보아서 기필코 공해와 백성의 집을 헐어 국가의 체모를 손상시키고 백성의 원망을 들은 뒤에야 후련하시겠습니까.
집의 칸수에 있어서도 국법이 지엄하니 이제 개축할 때를 당하여 마땅히 한결같이 《대전》의 50 칸 제도를 따라 감히 참람하게 어길 수 없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삼가 듣건대 성상께서 협소하다고 하시어 특별히 참작하여 칸수를 늘리라는 하교를 내리셨다고 하니, 이는 곧 법을 어기도록 인도하는 것입니다. 국가의 법은 금석처럼 견고한 것이며 윗사람이 행하면 아랫사람이 본받는 것이 매우 빠릅니다. 법을 확립하는 도리는 반드시 귀하고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먼저 해야지만 비로소 백성에게 믿음을 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만약 성상께서 먼저 어기신다면 어떻게 아랫사람들이 따르지 않는다고 책망하시겠습니까.
전하께서 공주의 집 지을 땅만 얻고자 하시어 민력과 재정이 고갈되는 근심은 생각하지 않으며, 사정(私情) 때문에 공사를 해치는 폐단도 돌아보지 않으시고, 아울러 법제를 무너뜨리는 폐해도 고려하지 않으시니, 신들은 삼가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해조로 하여금 지어 주게 하신명을 조속히 멈추시고, 각자가 개인적으로 짓게 하고 공해를 철거하여 옮기지 말도록 하며 각각 빈 땅을 나누어 주되 집의 칸수를 법제보다 늘이지 못하게 하여, 한결같이 《대전》의 법을 따르게 하소서."
하고, 아울러 형조 참판 이지온(李之馧)이 청탁을 받고 법을 무시하여 선비를 수감한 죄를 논하며 파직하기를 청하고, 또 병조 판서 홍중보가 개인적인 교분이 있는 사람을 위하여 형관에게 청탁한 잘못을 논하며 추고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르지 않고 이르기를,
"대군과 공주의 집을 지을 때 해조에서 자재와 인부를 대고 선공감의 감역관이 그 일을 감독하는 것이 예전부터 시행해 온 규례인데, 너희들이 감히 어떻게 마음대로 이래라저래라 하는가. 이미 해조에서 지어 준다면 관부(官府)는 관의 땅으로 옮기고 공유지는 내주어 사유지를 대신하게 하는 것이 실로 백성의 폐해를 줄이는 일이다. 너희들은 모두 함부로 논한 것이다. 50칸을 가지고 생활할 수 있다면 무엇을 꺼려서 그렇게 하지 않겠으며, 빈 칸을 만들어 장차 어디에 쓰겠는가. 이 일은 모두 경연 중의 거행조에 자세한데도 너희들이 오히려 운운하다니, 이는 너희들이 믿음을 가지고 군부를 대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것이 의리에 합당한 것인지 모르겠다. 이지온은 이미 무고라는 것을 알고 즉시 방송하였으니, 심각하게 죄줄 일이 뭐 있겠는가. 엄중히 추고하도록 하라."
하였다.
응교 남이성, 부교리 이익상·김만중 등이 다시 차자를 올려 신덕 왕후의 부묘를 청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행 대사헌 박장원이 상소하여 지방관으로 내려가 부모를 봉양하기를 청하니, 상이 그 소를 해조에 내렸다. 해조가 회계하기를,
"박장원은 정경(正卿) 중신으로서 그 어미의 나이가 80에 가까워져 오기 때문에 지방관으로 나아가 봉양하고자 하니, 그 뜻이 매우 간절합니다. 그러나 박장원은 현재 대부의 우두머리로 있고 또 삼공의 물망이 있으니, 그가 나가는 것은 조정의 경중에 관계가 있습니다. 개인적인 소원에 따라 고을에 보임하는 것은 형편상 가벼이 의논하기 어렵습니다."
하니, 상이 계문에 따르고 해조로 하여금 미포를 충분히 주도록 하여 봉양하게 하였다.
5월 26일 무오
정언 윤경교·이헌이 피혐하면서 해조에서 지어 주는 부당성과 공해를 철거하여 이전하는 것의 온당치 못함과 그곳에 거주하여 집을 뜯기게 된 백성의 원성과 칸수가 법제를 넘는 잘못을 논하니, 상이 정원에 하교하여 이르기를,
"이 대관의 피혐하는 계사를 보니 공해를 철거할 때 철거당한 백성이 매우 많아 도처에서 슬피 운다고 하는데, 내가 벌써 이런 폐단이 있을까 염려하여 공해를 이전하는 일은 이미 구분하여 처리했으니, 민가가 피해를 입었을 리가 만무하다. 지금 이 이야기는 매우 해괴하니, 해조 낭관을 패초하여 물어서 계문하도록 하라."
하였다. 승지 송시철이 계문하여 아뢰기를,
"호조 낭청을 패초하여 물어보니, 장흥고(長興庫)를 철거해내는 곳에서는 본래 피해를 당한 민가가 없는데 중사가 살피고서 말뚝을 박아 놓은 곳 안에는 헐어야 될 집이 18가구라고 합니다."
하니, 상이 회계가 모호하다고 하여 다시 명백하게 물어서 계문하라고 하였다. 송시철이 회계하여 아뢰기를,
"다시 낭관에게 물어보니, 장흥고의 자리가 다만 4백여 칸으로 담장이 둘러져 있어 그 안에는 원래 민가가 없었으므로 이번에 공해를 철거하여 이전할 때 민가가 뜯길 일은 별로 없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비로소 대관의 피혐한 계사에 대한 비답을 내려 이르기를,
"피혐하는 계사가 장황하고 은연중에 꾀를 부리고 있으니, 매우 해괴하며 또한 가소롭다. 계사에서 ‘이사할 때마다 집을 지어 주라고 한다면 옛 규례에 없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계속하기도 어렵다 ’고 한 것은 더욱 가소롭다. 예로부터 대군·공주 이하는 절대 이사하는 일이 없었으며, 이사한다 하더라도 오늘 같은 일이 있었다고는 들어보지 못하였다. 한갖 스스로 옳다고 하고 또 그 잘못을 꾸미니 이는 내가 매우 미워하는 바인데 너희들이 진실로 그것에 가깝다."
하였다.
이조 참판 윤집(尹鏶)이 여러 번 상소하니, 체직하였다.
5월 27일 기미
장령 정화제(鄭華齊)도 여러 공주의 저택을 이건하는 잘못을 논하고 아울러 정언 윤경교와 이헌을 모두 출사시키도록 청하니, 상이 답하여 이르기를,
"말할 만한 일이라면 말하여도 되지만, 이제 망령된 말을 어지러이 뒤섞고 간원의 말을 이것저것 주어 모아 명성을 낚는 밑천을 만드니, 임금을 섬기는 도리에 있어 매우 해괴하다."
하고, 출사에 대한 일은 따랐다. 정원이 성상의 비답이 온당하지 못하니 환수하도록 계청하자 상이 더이상 귀찮게 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정화제가 엄한 비답을 받았다는 이유로 피혐하니, 처치하여 출사시키도록 청하였다.
장릉(長陵)의 참봉 김시보(金時寶)를 잡아다가 추고하라고 명하였는데, 궐직(闕直)하였기 때문이었다.
5월 28일 경신
김만중(金萬重)을 헌납으로 삼았다.
정언 윤경교와 이헌이 엄한 비답을 받았다는 이유로 피혐하니, 상이 답하여 이르기를,
"이 피혐하는 계사를 보니 ‘은연중에 꾀를 부렸다.’는 나의 한 마디를 가지고 마치 대단히 큰일이나 난 것처럼 반복하여 거듭 말하고 큰소리로 성을 내는 것이 마치 이기기를 좋아하는 사람 같으니, 내가 비록 어리석지만 어떻게 너희들과 다투겠는가. 다만 스스로 우스울 뿐이다.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처치하여 출사시키도록 청하였는데, 윤경교와 이헌은 모두 패초에 나아오지 않았다.
병조가 계문하여 내일 무과 전시 때 전후에 걸쳐 전시에 직부토록 한 사람과, 평안도에 중신을 파견하여 시취(試取)할 때 부자가 동참하여 후방(後榜)에 추가로 붙은 사람에 대하여 모두 응시를 허락하도록 청하였다.
전라도 장수현(長水縣)에 우박이 내렸다.
5월 29일 신유
장령 경최가 비록 연명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의논에 참여하였으니, 엄한 비답이 내린 뒤에 감히 편안히 있을 수가 없다고 하여 인피했는데, 처치하여 출사시키도록 하였다.
평안도에 한재와 황충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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