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17권, 현종 10년 1669년 6월

싸라리리 2025. 12. 12.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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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일 임술

조복양(趙復陽)을 대사헌으로, 조성보(趙聖輔)를 지평으로 삼았다.

 

식년 문과 전시(文科殿試)의 방(榜)을 발표하여 이덕령(李德齡) 등 33인을 뽑았다.

 

6월 2일 계해

집의 신명규(申命圭)와 지평 조성보가, 동지정사 이경억(李慶億), 부사 정륜(鄭錀), 서장관 박세당(朴世堂) 등이 사명을 받고 갔을 때 관등 놀이와 잡다한 유희를 구경한 잘못을 논하여 파직시키기를 청하였는데, 여러 번 아뢰었으나 끝내 따르지 않았다. 또 강진 현감(康津縣監) 이복(李馥)을 논핵하기를,
"송사의 일로 일시에 두 사람을 죽였으니 듣기에 놀랍습니다. 법을 무시하고 함부로 형벌을 쓴 그의 죄를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복을 나문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복이 금부에 나아가 스스로 밝혀는데, 그 일은 모두 실상이 아니었다. 금부가 아뢰기를,
"이복에게는 죄줄 만한 일이 없습니다. 대간이 아뢴 내용에 ‘일시에 두 사람이 나란히 죽었다. 법을 무시하고 함부로 형벌을 가했다.’는 말은 모두가 실상이 아니니 이복의 혐의는 분간하여 주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일은 박정서(朴廷瑞)의 종이 거짓말을 꾸며 정장(呈狀)한 데에서 나온 것인데 논죄하여 폐단을 막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형조로 하여금 심문하여 다스리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복을 석방하고 박정서의 종을 치죄하도록 하였다.

 

대사헌 조복양이 소패(召牌)를 받고도 나아오지 아니하여 응당 추감(推勘)을 받아야 한다는 것으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6월 3일 갑자

윤문거(尹文擧)를 대사헌으로, 조복양을 우참찬으로, 김세정(金世鼎)을 문학으로 삼았다.

 

호조 판서 민정중(閔鼎重)이 신병을 이유로 사직소를 올렸는데,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6월 6일 정묘

관학 유생 조지정(趙持正) 등이 상소하여, 귀산(龜山) 양시(楊時), 예장(豫章) 나종언(羅從彦), 연평(延平) 이통(李侗) 및 우리 나라의 유현 이이(李珥)·성혼(成渾)을 문묘에 종사(從祀)하기를 청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6월 7일 무진

응교 남이성(南二星), 부교리 이익상(李翊相), 부수찬 윤심(尹深) 등이 상차하여, 공론을 따라 신덕 왕후(神德王后)를 부묘(祔廟)하는 예를 속히 거행하라고 청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6월 10일 신미

정재숭(鄭載嵩)을 전라 감사로 삼았다. 정재숭은 수상 정태화의 아들로서 광주(廣州)에 제수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이 직임에 제수되었으므로 물의가 일어났다. 어미의 병을 이유로 소를 올려 체직되었다.

 

6월 11일 임신

이조 판서 이경휘(李慶徽)가 얼굴에 종기가 나서 병이 날로 심해지자 잇따라 사직소를 올렸는데 상이 윤허하지 않고 어의를 보내어 곁에서 떠나지 말고 간병하게 했었다. 이때에 이르러 상이 그의 병이 몹시 심하다는 말을 듣고 비로소 체직을 허락하고 별감(別監)을 보내어 약물을 하사하고 문병하게 하였다.

 

이때에 양사가 공주의 집을 짓는 일에 대해서 끊임없이 쟁론하였으나 상이 들어주지 않을 뿐더러 중사(中使)를 시켜 집짓는 일을 계속 감독하게 하였다. 정언 이훤(李藼)이 상소하기를,
"신은 정성이 전하의 마음을 감동시키지 못하고 말을 해도 신임을 받지 못하니, 명기(名器)를 욕되게 하고 있습니다. 길가는 사람들이 서로 말하기를 ‘오늘날 대간의 관원은 있으나 마나 한 인물들이다.’ 합니다. 신이 대각에 있으나 마나 한 인물로서 나라 사람의 비평을 많이 받고 있으니 파척하소서."
하자, 상이 체직시키도록 하였다. 이에 집의 신명규, 장령 정화제(鄭華齊)·경최(慶㝡), 지평 조성보·이후(李煦), 헌납 김만중(金萬重), 정언 윤경교(尹敬敎) 등이 모두 이헌의 상소 내용을 끌어대어 피혐하였는데, 옥당이 처치하여 모두 출사하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정원이 아뢰기를,
"요즘 공주의 집을 짓는 일에 대해 양사가 논집하자 전하께서 여러 차례 준엄한 분부를 내리셨으므로 이 일을 개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번에 정언 이헌의 상소가 신병을 이유로 면직시켜 주기를 청한 것이긴 하지만, 그의 본의는 한편에서 논쟁하고 있는데 한편에서는 그대로 집을 짓고 있는 것이 부당하다는 데에 있었던 것입니다. 일에 따라 진언하는 것은 바로 그의 직책입니다. 사직소를 인하여 곧바로 진언한 대관을 체직시키는 것은 공평한 마음으로 너그럽게 용서해주는 도리가 아닌 것입니다. 이헌을 체차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는데, 상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6월 12일 계유

정언 윤경교가 아뢰기를,
"오늘날 대각의 자리에 있기는 참으로 어렵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첨하고 순종하며 단지 임금의 비위만을 맞추려고 한다면 애당초 국가에서 대관을 설치한 의도가 아닐 것입니다. 일에 따라 진언하여 조금이나마 직책을 수행하려고 하면 전하께서는 따라 주시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기세를 꺾고 억제하시어 간관으로 하여금 직책을 잃게 한 뒤에야 그만두시니, 오늘날 대각의 자리에 있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인재가 없어 구차하게 자리에 채워진 신 같은 사람에 대해서는 전하께서 천시하시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인물은 아무리 형편없더라도 직책이 간관입니다. 성인(聖人)은 꼴베고 나무하는 사람의 말도 꼭 가려 들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 말이 쓸 만한가의 여부만을 볼 뿐이지 어찌 그 사람이 형편없다는 이유로 그 말까지 무시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대간의 논계가 한창 일어나고 있는데 한편에서 그대로 집을 짓고 있었으니, 이것은 대각을 있으나 마나 한 존재로 여겨 거리낌이 없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대관을 하찮게 보시고 진언한 사람을 배척하면서 신하들로 하여금 전하의 말씀을 따르기만 하고 누구도 거역하는 사람이 없기를 바라신다면, 그 폐해가 간하는 말을 거절하고 자신 마음대로 하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인데, 이것이 어찌 국가의 복이라 하겠습니까.
동료가 올린 상소는 들은 말을 솔직히 아뢰어 전하의 실수를 고쳐드려야 하는 책임을 수행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지레 체면시키시어 간관의 입을 막으니, 이후로 사람들이 말하기를 경계하여 전하께서 과오를 들을 수 없게 되고 국가의 폐해가 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까 신은 염려됩니다. 신하된 의리에 있어 소명을 받고 나오지 않을 수 없었으나 결코 대간의 자리에 얼굴을 들고 있을 수 없습니다. 파척하소서."
하니, 상이 또 준엄한 유지를 내려 답하는 한편, 사직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윤경교가 물러나 물론을 기다렸다.

 

집의 신명규, 지평 조성보·이후, 헌납 김만중, 장령 경최·정화제 등도,
"일을 말한 대간을 특별히 체차하라는 명이 있기까지 하였는데 입다물고 말을 하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대간의 자리에 그대로 있을 수 있겠는가."
라는 이유로 서로 잇따라 자신의 입장을 논열하였다. 상이 모두 사직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모두 물러나 물론을 기다렸다. 간원이 처치하여 모두 출사시키라고 청하니, 상이 따랐다. 간원이 또 아뢰기를,
"정언 이헌의 상소에 병이 있다고 말을 하였지만 그의 본심은 여러 번 준엄한 분부를 받고는 자리에 편안히 있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상소에 아뢴 말이 절실하고 정직하여 살펴볼 만하니 전하께서는 채택하여 받아드렸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끝내 한 마디의 비답도 내리지 않으시고 갑자기 체척하셨으니, 신들은 개탄스럽습니다. 임금의 거조는 하나하나가 온 나라 사람이 보고 듣는 것입니다. 정언 이헌을 체차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는데,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상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갔다. 약방(藥房)이 들어가 진찰을 끝마치자 호조 판서        민정중(閔鼎重)을 체직시키도록 하였는데 좌상        허적(許積)의 아뢴 말을 따른 것이다. 또 부제학        이단상(李端相)을 체직시키도록 하였는데 김좌명의 아뢴 말을 따른 것이다. 민정중은 송시열이 자리에서 물러나 향리로 돌아갔으므로 그와 거취를 같이하려 했던 것이다.

 

삼남(三南)의 감사는 가족을 데리고 가는 법을 정하였는데 감사는 본읍의 목수(牧守)를 겸직하고 만기를 2년으로 하였다. 경기·강원·황해 3도의 감사는 전례대로 가족을 데리고 가지 못하고 1년을 만기로 하였다.

 

6월 13일 갑술

박장원(朴長遠)을 이조 판서로, 이여발(李汝發)을 훈련 대장으로, 심지명(沈之溟)을 광주 부윤(廣州府尹)으로, 이선(李選)을 수찬으로, 김만균(金萬均)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신하, 삼사(三司)의 관료를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유월에 서리가 내린 것은 참으로 괴이한 일이다."
하니, 좌상 허적이 아뢰기를,
"서리가 내린 것은 과연 예사로운 재해가 아닙니다. 그러나 파종한 곡식은 평년작에 밑돌지는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비가 너무 많이 내리지 않았는가?"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비가 많이 내리기는 하였으나 농사에 그다지 해가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육진(六鎭)에 비가 적게 내렸다고 하는데 의주의 강변 지역에 든 한재가 우려된다."
하니, 영상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강변에 가뭄으로 흉년이 들면 구제할 곡식이 없으니 이 일이 걱정스럽습니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신이 시골에 있을 때 들었는데 각사 노비의 신공을 확실히 받아낼 곳이 없는 것이 오늘날의 고질적인 폐단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충청 감사 이숙(李䎘)의 장계에도 이 일에 대해 말을 하였는데 신들도 선처할 방법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형조 판서 정지화(鄭知和)가 아뢰기를,
"전라 감사의 장계 내용에, 계모가 간음한 일로 그 아들이 계모를 결박하여 관아에 고발하였다고 합니다. 중묘조 때 이런 일이 있어 교지를 받든 것을 보건대, 그 어미는 간음죄에 해당되는 벌을 내리고 아들에게는 계모를 결박한 죄로 다스리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그리하라고 하였다.

 

애초에 상이 세자의 입학 및 관례를 봄 가을 중 언제 시행하는 것이 편리한가에 대해 예관으로 하여금 대신들에게 의논하게 하였는데, 영의정 정태화, 영중추 정치화는 의논드리기를,
"우리 조종조에서는 왕세자의 관례를 꼭 봄·가을에만 시행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지난번 입시했을 때 유신(儒臣)이 봄·여름은 양(陽)에 속하고 가을과 겨울은 음(陰)에 속한다는 말로 아뢰었는데, 이 말이 근거가 있는 것으로서 그 말에 따라 시행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그리고 입학하는 예에 있어서는 봄이든 여름이든 구애될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좌의정 허적이 의논드리기를,
"유신이 왕세자의 관례를 봄이나 여름에 시행하기를 청하였는데 그 말이 근거가 있는 것으로 우연한 생각은 아닌 듯합니다. 그러나 세자가 지난 겨울에 중병을 치른 뒤로 몸에 열이 아직 남아있고 원기가 회복되지 못하였으니 무더운 여름에 강행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만약 가을 이후에 행할 수 없다고 한다면 시기를 늦추어 내년 봄에 거행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듯싶습니다. 그리고 입학하는 예에 있어서는 봄이든 가을이든 굳이 구애될 것이 없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입학은 올 가을에 하도록 하고 관례는 내년 봄에 치르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교리 이익상(李翊相) 등이 올린 차자에, 요즘 언관의 기세를 꺾어 간언을 거절하는 조짐이 심하다는 것으로 간절하게 진계(陳戒)하였는데, 상이 오래도록 비답을 내리지 않았다.

 

6월 16일 정축

강백년(姜栢年)을 공조 참판으로, 성익(成釴)을 평안도 절도사로, 김만기(金萬基)를 좌승지로, 민점(閔點)을 우승지로, 김우형(金宇亨)을 좌부승지로 삼았다.

 

지평 조성보가 아뢰기를,
"지난해 동지 사신들이 행동을 삼가지 아니하여 매우 체신을 잃었으므로 일의 체모에 있어 그대로 둘 수 없었기 때문에 동료들과 의논하여 논핵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장령 경최(慶㝡)가 논계를 정지하려고 하여 두 번이나 서신을 보내어 신에게 묻기에 신은 갑자기 정지할 수 없다고 답하였습니다. 그러자 다시 묻지도 않고 끝내 억지로 정지하였으니 참으로 의아스럽습니다. 대각의 체모나 전례상 소견이 서로 틀릴 경우 나름대로 처신하는 방도가 있는데 어떻게 신이 휴가 중에 있는 틈을 타 이처럼 서둘러 정지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모두가 신이 하찮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체직하소서."
하고, 물러나 물론을 기다렸다.

 

6월 17일 무인

장령 경최가 아뢰기를,
"동지 사신들에 대하여 파직시키기를 청한 것은 본시 동료로서 서로 잘못을 바로잡아 주려는 뜻이었으니, 한결같이 쟁집하는 것은 지나친 일인 듯하였습니다. 신이 논계를 정지하려고 하였으나 동료들이 모두 휴가 중이었으므로 전례에 따라 간통(簡通)하지 못하고 서신으로 물었습니다. 그러자 여러 동료들은 모두 정지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으나 지평 조성보는 진정 곤란하게 여기는 의사를 보이면서 ‘지금 휴가 중에 있으므로 가부에 대해서 말할 수 없으니 헤아려 선처하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신이 정지해야겠다는 내용의 서신을 재차 보내고 그 일에 대한 논계를 정지하였습니다. 지금 ‘휴가 중에 있는 틈을 노려 서둘러 논계를 정지하였다.’고 말을 하니, 이것은 모두가 신이 신임을 받지 못한 때문입니다. 어떻게 자리에 그대로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집의 신명규, 장령 정화제, 지평 이후도 모두 논계를 정지한 일로 배척을 받았다는 이유를 들어 잇따라 인피하였는데, 사간 이유(李秞)가 처치하기를,
"모두 출사하게 하고 경최만 체직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전 이조 판서 이경휘(李慶徽)가 죽었다. 이경휘는 마음이 온후하고 의지가 확고한 인물이었고, 동료들 중에 그의 논의가 제일 화평하다고 일컬어졌다. 사람들이 그의 아우 이경억(李慶億)보다 더 훌륭하다고 하였다.

 

6월 18일 기묘

지평 이후가, 거듭 제기된 논계를 서로 의논하고서 정지하였으니 그 잘못이 균등한 것인데 처리가 동일하지 않다는 이유로 인피하였고, 지평 조성보, 장령 정화제, 집의 신명규도 모두 인피하였으며, 사간 이유는 처치를 잘못했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물러나 물론을 기다렸다. 헌납 김만중은,
"신과 이헌이 애초에 같은 일에 대해서 한 사람은 소를 올리고 한 사람은 인피하였는데, 이헌은 체직되었고 신은 체직되지 않았으니, 명을 도로 거두라는 논계에 태연히 참여할 수가 없습니다."
하고, 인피하여 체직시켜주기를 청했다. 상이 모두 사직하지 말라고 하였다. 옥당이 처치하기를,
"김만중은 출사하게 하고 이후·조성보·정화제·신명규·이유는 체직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6월 20일 신사

남이성(南二星)을 집의로, 박증휘(朴增輝)를 사간으로, 송창(宋昌)·이관징(李觀徵)을 장령으로, 신정(申晸)·임상원(任相元)을 지평으로, 어진익(魚震翼)을 정언으로 삼았다.

 

집의 남이성이 아뢰기를,
"지난번 경연에서 상이 제신들에게 공주의 집짓는 일에 대해서 하문하실 때 신도 옥당의 관원으로서 입시하여 답을 올렸는데 말이 졸렬하고 내용이 분명하지 못했을 뿐더러 끝내 법에 의거하여 배척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실로 신이 자초한 것으로서 한창 매우 민망스럽게 여기고 있는데 또 언관의 자리에 제수되었습니다. 본부가 현재 집짓는 일에 대해 논집하고 있으니, 신이 이에 대죄할 겨를 조차 없는 처지인데 어떻게 이름을 나란히 하여 아뢸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인피하고서 물러나 물론을 기다렸다. 이관징 등이 처치하여 체직시키라고 청하니, 상이 따랐다.

 

유혁연(柳赫然)을 훈련 대장에 옮겨 제수하고, 이여발(李汝發)을 어영 대장으로 삼았다. 이에 앞서 좌의정 허적이 내국 제조로 입시하여 아뢰기를,
"지난번 대장을 차출할 때 신의 생각은 유혁연을 훈국에 옮겨 제수하고 어영에는 다른 장수를 차출하고 싶었으나, 영상의 의견이 신의 의견과 같지 않았으므로 감히 논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외부의 의논을 듣건대 ‘훈국은 설립된 지 오래되어 누차 노련한 대장이 차임되었던 곳이고 어영은 신설된 곳이니, 경중의 차별이 없지 않다. 그리고 훈국의 병사들은 군기는 세지만 매우 교만스럽고 함부로 행동하는 버릇이 있으므로 그들을 잘 무마하여 다스리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며, 휘하의 여러 장수들도 모두 곤수(閫帥)의 직을 역임한 유명한 장수들이다. 차임된 대장이 명망높은 사람이 아닐 경우 진정하여 복종시키기가 어려울 것이다.’고 합니다. 유혁연·이여발을 바꾸어 차임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영도 수월한 곳이 아니니, 내 생각은 그대로 제수하는 것이 옳을 듯싶다."
하였다. 허적이 외부의 의논이 이여발의 재능에 대해서 부족하게 여기는 듯하다고 거듭 아뢰자, 상이 허락하였다.

 

상이 경상 감사 민시중(閔蓍重), 광주 부윤(廣州府尹) 심지명(沈之溟)을 인견하였다. 상이 민시중에게 묻기를,
"본도의 일에 대해서 말할 만한 것이 있는가?"
하니, 민시중이 아뢰기를,
"신은 들은 것이 없습니다. 부임한 뒤에 해야 할 일이 있으면 장계를 올려 낱낱이 아뢰겠습니다."
하자, 허적이 아뢰기를,
"영남은 왜국(倭國)과 인접하고 있습니다. 동래(東萊)의 왜관에 관계되는 일에 있어서는 비록 부사가 있더라도 감사 또한 함께 의논하여 처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연환(鉛丸)이 부족한 것이 항상 걱정이다. 평소 조련시킬 때에도 이어댈 수 없어 근심인데 더구나 위급한 상황을 당했을 때 어떻게 마련해 댈 수 있겠는가. 의당 조정에서 조치해야겠지만 본도에서도 준비할 만한 힘이 있겠는가?"
하니, 민시중이 아뢰기를,
"내려간 뒤에 널리 알아보겠습니다. 은(銀)을 채취할 만한 곳이 있으면 마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연환도 실로 이처럼 부족하지만 화약도 많이 준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탄알만 있고 화약이 없어서는 안 된다. 반드시 모두 준비해 놓아야 좋을 것이다."
하였다. 민시중이 아뢰기를,
"환곡(換穀)의 일이 영남에 큰 폐단이 되고 있습니다. 동래의 경우 쌀을 받아들일 때 부사(府使)가 친히 거두지 못하고 군관(軍官)을 시켜 받아들이는 것을 감독하게 하므로 농간을 부리는 폐단이 많습니다. 차사원(差使員)을 배정하여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그러라고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 사람은 왜인을 경시하고 있습니다. 이만웅(李萬雄)이 왜국을 무찔러 없애버리자는 주청을 올리기까지 하였는데 참으로 가소로운 일입니다. 민시중이 지금 내려가니, 일에 따라 잘 처리하여 흔단을 일으키는 일이 없도록 당부하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자, 민시중이 아뢰기를,
"우리에게 믿을 만한 것이 없는데 어떻게 그들을 하찮게 대하여 난처한 일이 발생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강경하게 대할 때에는 강경히 대하고 유순하게 대할 만하면 유순하게 대하여 모든 일을 때에 따라 선처하고, 중대한 일은 품계하여 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수령을 출척(黜陟)시키는 일에 있어서는 공정하게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요즘 수령들이 체직되기를 도모하는 자가 매우 많은데 감사가 그들의 개인 사정을 모두 따라주고 있습니다. 이초로(李楚老)와 이경과(李慶果)의 경우 모두 병이 중하다는 이유로 면직되었지만 서울로 올라온 뒤에 별로 앓는 일이 없습니다. 이러한 풍조는 가증스럽습니다. 민시중은 새로 발탁되어 내려가니 반드시 공정한 마음으로 정사를 처리하겠지만, 경계시키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일에 대해서는 전부터 엄하게 금지시켰는데 늘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으니 놀라운 일이다."
하였다. 상이 심지명에게 묻기를,
"말할 만한 것이 있는가?"
하자, 심지명이 아뢰기를,
"신이 10년 전에 이 직임을 맡은 적이 있으므로 고을의 폐단을 모두 알고 있는데, 그중에 견디기 어려운 폐단은 모집하여 들여보낸 사람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이들은 몹시 가난한 자들인데 관아의 곡식을 먹은 뒤에 마련하여 바치지 못할 경우 군량이 점차 줄어들고, 독촉하여 받아들일 경우 흩어져 떠나갈까 염려되니, 반드시 무상으로 지급해야만 이러한 염려가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러한 폐단이 있기 때문에 전부터 이들에게는 지급을 많이 하지 않았다."
하였다. 심지명이 아뢰기를,
"병자년033)  에 승군(僧軍)의 힘이 가장 도움이 되었습니다. 중들이 원하는 것은 단지 금관자·옥관자의 벼슬자리를 얻으려는 것뿐이니, 그들 중에 문자(文字)를 아는 자를 뽑아 승장(僧將)으로 임명하여 큰 사찰에 들어가 거주하게 하면 반드시 유익한 점이 있을 것입니다. 신이 지난해 북문(北門)과 서문(西門)을 건립할 때 민정(民丁) 3일 일한 것이 승군 하루 일한 것에도 미치지 못했는데, 대개 중들은 부역할 때 죽을 힘을 다하기 때문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중들을 한층 더 보살펴주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6월 23일 갑신

교리 이익상, 수찬 이선 등이 상차하기를,
"언로의 직책은 대각에 있는 것인데 대간이 직책을 수행하지 못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위에서는 관용의 아량을 보이지 않고 날로 기세를 꺾으려 하고, 아래에서는 전하의 감정을 격분시키는 일이 있을까 우려하여 날로 사이가 막히고 있으니, 지금의 언로는 두절되어 통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들이 삼가 보건대 전하께서 즉위하신 초기에는 간하는 말을 잘 들어 주시는 미덕을 지니시어 모든 논의에 대해서 메아리보다 빠르게 호응하였으므로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모두 기뻐하면서 ‘대업을 성취하고 태평 시대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임어하신 지가 오래되자 점점 처음보다 못하시어 수응(酬應)을 게을리 하시는가 하면 대간들을 대하는 데 있어서 점점 싫어하고 박하게 하십니다. 대간의 논의가 하고 싶어하시는 일에 반대될 경우 따르지 않고, 이기고픈 마음이 발동하실 경우 따르지 아니하였으며, 내사(內司)에 관계되는 일, 궁척(宮戚)에 관한 일을 논급했을 경우 따르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리고 공의에 따라 아뢰었을 경우 여러 사람의 말을 주워모은 것이라 하고, 계사 내용이 강개한 경우 그 과격한 것을 싫어하시어, 날이 갈수록 대간들과 틀어져 더욱 외돌리고 배척하셨습니다.
신들이 지나간 일을 소급해 보건대 6, 7년 사이에 대간이 아뢴 것에 대해서 10건에 2,3건도 윤허하신 것이 없는 듯합니다. 아무리 사리가 분명하여 알기 쉬워 따르지 않을 수 없는 논의에 대해서도 대간이 말했을 경우 아예 들어주지 않으시다가, 마침내 여러 신하들의 말에 따라 윤허하신 것이 여러번이었습니다.
예컨대 지난번 부마(駙馬)들에게 그대로 들어가 살게 하라는 명을 도로 거둘 것을 청한 논의에 있어서 양사가 함께 거론하여 한 달이 지나도록 쟁집하였지만, 전하께서 끝내 거절하시다가 대간이 정계한 뒤에 곧바로 집을 다시 지으라는 명을 내리셨으니, 이것은 단지 대간의 말을 따르지 않으려고 하신 것일 뿐이었습니다. 이때부터 국가의 이해, 일의 득실을 따지지 않고 대간의 말이라면 일체 듣지 아니하였는데, 옛날 간하는 말을 거절하던 시대의 임금들도 이처럼 심하지는 아니하였습니다. 말만 들어주시지 않을 뿐더러 대우하시는 데 있어서도 몹시 싫어하고 미워하시며 변핵하시기를 마치 송사하는 사람들처럼 하시고, 때로는 섭섭한 말씀으로 꾸짖는가 하면 덕이 부족하여 훌륭한 일을 할 수 없다고 핑계대시기도 하고, 계사의 구절이 잘못된 것에 대해서 따져 묻기도 하십니다. 이것은 특히 임금이 아랫사람을 대하는 체모가 아닌 것입니다.
근래 이헌이 올린 상소는, 정세가 불안하였으므로 병을 핑계대어 면직시켜 주기를 청한 것이었지만, 그가 아뢴 내용은 조정을 높이고 대간을 중시하기 위한 것으로서 그 말이 진정 옳고 그 뜻이 가상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비답을 내리지 않고 그대로 체직시켰습니다. 그리고 윤경교가 피혐하면서 올린 계사에 내리신 비답은 너무 심하게 꾸짖으셨는가 하면 심지어 ‘임금을 구속하고 억제하려 한다.’는 분부를 내리셨습니다. 신하가 임금에게 간하는 말은 모두가 좋은 일을 권면하고 그른 것을 막으려는 뜻이고, 도리에 어긋나거나 잘못된 점을 바로잡으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에 대해서 몹시 꾸짖으며 임금을 구속하고 억제하려는 것이라고 하신다면 무슨 일인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신들이 우려하고 탄식하면서 이 일을 여러 번 아뢰는 것은 윤경교의 처지를 위해서가 아니라, 실로 전하의 말씀이 한번 전해지면 온 나라 사람들이 실망할까 염려해서입니다.
맹자(孟子)는 ‘임금의 자만하는 태도는 천리 밖에서도 선비를 막는 것이다. 선비들이 천리 밖에서도 오지 않는다면 참소하고 아첨하는 소인이 오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공자(孔子)는 나라를 잃게 하는 요약적인 한 마디 말에 대해서 논하시기를 ‘바로 임금이 자신의 말을 누구도 거역하는 사람이 없기를 원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성인이 간하는 말에 대해서 이처럼 소중히 여기셨는데 어찌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경계를 올린 뜻을 내 가상하게 여긴다."
하였다.

 

6월 24일 을유

홍문관 교리 이익상 등이 상차하여 신덕 왕후(神德王后)를 태묘에 부묘하라고 청하였는데,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6월 25일 병술

김좌명(金佐明)을 호조 판서로, 유철(兪㯙)을 형조 참판으로, 이정기(李廷夔)를 행 대사간으로, 신명규를 집의로, 남이성을 부응교로, 홍주국(洪柱國)을 수찬으로 삼았다.

 

삼남(三南) 지방에 홍수가 졌다.

 

6월 29일 경인

태학 유생 조상우(趙相愚) 등이 상소하여
"신덕 왕후를 부묘하는 예를 속히 거행하여 하늘에 계신 조종의 영령을 위로해 드리고 간절히 기대하는 신민들의 심정에 답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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